제118화
교류회를 연 지 3일이 지났다.
그동안 마탑이 뛰어난 연구성과를 보이며 압박하기도 했고, 반대로 아카데미 측의 발표가 마탑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갈수록 더해 가는 교류회의 열기에 고위 마법사들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경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경쟁은 앞으로의 발전을 부채질해 줄 좋은 동력원이었으니까.
그 사이 마탑의 고위층에서 조용히 아카데미 측과 접촉을 했었지만, 일부를 제외한 이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알렌도 공간 마법 토론에 한 번 참여했다.
그러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괜한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는 이들도 없었고.'
레이첼에게도 이번 교류회에 빠지는 게 좋겠다며 권했다.
이넬리아와 린벨은 엘피스에 남아 잠시 상단의 기반을 다지는 것을 돕게끔 했다.
그녀들의 무력이라면 순조롭게 거래망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알렌은 오후에 프란시스카와 만나기 전, 미리 잡았던 약속 시간에 맞춰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7대 마탑을 제외한다면, 독보적일 정도로 높은 층수와 넓은 부지.
일선에서는 연금 학파도 마탑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위세가 엄청났다.
페르타에서 활동하는 연금술사 대부분이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안으로 들어간 그는 곧장 신분과 이름을 확인받곤 응접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똑똑-
"마르골 님, 알렌 라인하르트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안내인이 문을 열며 비켜섰다.
알렌이 들어가자, 안에는 왜소한 몸집의 젊은 남성이 뒤돌아 서 있었다.
철컥-
문이 닫히자, 그는 알렌을 향해 돌아섰다.
"안녕하십니까, 연금 학파의 수장인 마르골이라고 합니다."
"갈슈딘 아카데미에서 재학 중인 알렌 라인하르트입니다."
"그것 말고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그는 웃으며 알렌을 자리로 안내했다.
"저희 학파의 후원자가 아니십니까."
알렌과 같이 거래 관계에 있는 자들을 은유하는 명칭이었다.
알렌보다 반 뼘 작은 키에 옅은 금발을 가진 그는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 조금 달라 보였다.
'말더듬이라 학파의 수장에 걸맞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건 따로 꾸며 낸 모습인가?
알렌의 얼굴에 잠시 의아함이 드러났던 걸까, 그는 익숙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밖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니 조금 당황하신 모양이군요. 괜찮습니다, 처음 만나는 분들도 모두 같은 반응이거든요."
그는 알렌이 실례에 대한 사과를 입에 담을 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정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실험에만 몰두하다 보니,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게 되더군요. 독대하는 것까지는 상관없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는 소문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렇게까지 고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웃어넘겼다.
알렌은 문이 닫히자마자 그에게 돌아섰던 마르골의 모습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그가 보기보다 심계가 깊다는 사실도.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그가 더 널리 퍼트렸을지도 모르겠군.'
처음 만난 이들은 높은 확률로 그를 얕잡아 볼 것이다.
그는 그걸 이용해 이득을 취하겠지.
알렌의 앞에서 저 말을 하는 이유도, 엘릭서의 조제서를 넘긴 것에 대한 호의나 다름없었다.
"그럼 밖에서도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야겠군요."
알렌이 숨겨진 뜻을 잘 눈치챈 듯 보이자 마르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하, 역시 젊은 인재는 언제 봐도 기분이 좋군요. 따로 시간을 마련한 보람이 있었어요."
젊은 나이에 학파의 수장이 된 인물은 역시 쉽게 볼 수 없었다.
"차는 제가 따로 준비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알렌은 깊게 올라오는 향을 맡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제가 후원한 조제서가 많은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도움이 됐습니다. 그 덕에 요즘 수요가 폭발해 얼마나 매출이 나왔는지 모르는데요."
일반적인 후원 관계라면 해야 될 이야기들.
엘릭서의 유용성과 효과.
판매 전략과 더욱 끈끈한 후원자로서의 관계 확인.
"원하신다면 최근 학파에서 개발한 포션의 시제품도 드리겠습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지요."
"준비해 둘 테니, 내려가실 때 챙겨 가시면 됩니다."
알렌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준비된 것 같은 말투에 그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을 향해갈 때쯤, 알렌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알렌은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듯, 슬쩍 문을 바라봤다.
그의 태도에 마르골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누가 들을 염려가 없으니 말하셔도 됩니다."
"그란델 님에 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란델 님 말씀이십니까?"
"예, 그분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물음에 마르골의 표정이 진중하게 물들었다.
"왜 그걸 묻고자 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일단 들어 보겠다는 어조.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곤란한 질문은 답할 수 없다는 의사가 드러났다.
알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제 동생이 그란델 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란델 님의 제자…?"
"예, 13년 전, 제가 다섯 살이 되었던 때…."
그러나 알렌이 말을 다 잇기도 전, 마르골의 안색이 변해 외쳤다.
"그만, 그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군요."
그의 태도에 알렌이 직감했다.
'무언가 있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몇 년 전이라는 시기만 듣고도 그의 말을 멈춰 세웠다.
그 말은, 알렌이 직접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살면서 모르는 것이 더 나은 일이 더 있습니다."
"알기에 더욱 조심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마음에 근심만을 더할 뿐입니다."
"그건 제가 판단할 일입니다."
알렌과 마르골의 눈이 마주쳤다.
마르골은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기색이 강했고, 알렌은 기껏 잡은 단서를 놓칠 마음이 없었다.
"마르골 님을 곤란하게 만들 의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궁금할 뿐이지요."
"…행동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의 전말을 알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조그마한 단서면 됩니다."
알렌의 목소리에 담긴 집착을 느낀 탓일까, 마르골의 눈썹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겨났다.
"그건…, 잠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마르골은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
알렌과의 거래 관계.
그가 제공한 하급 엘릭서의 조제서로 얻은 이득.
그의 현재 위치와 미래에 도달할 위치.
정보를 제공하며 짊어질 위험과 반대로 얻을 가치.
그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저울질하며 깊게 고민했고, 판단을 끝마쳤다.
'…단서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지금 입에 담을 정보라면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대가를 제공한다면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말해 드리지요."
그의 대답에 알렌은 집중했다.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올 정보는 그란델의 처우를 결정 내릴 것이다.
"마탑의 고위층에게만 도는 은밀한 소문이 있습니다."
학파의 수장쯤 되면 알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정도 위치가 아니라면 접할 수도 없는 소문.
"누구는 믿지 않고, 누구는 비웃으며, 누구는 무시하지만…."
그 누구도 쉬쉬하며 쉽게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그때 마르골의 얼굴은 언뜻 두려워하기도, 세계의 비밀을 엿보는 호기심 가득한 학자 같기도 했다.
"소문은 간단합니다."
그 말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작아져 소곤거리는 듯했다.
"대몰락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며, 심지어 용과 거인의 시대 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알렌의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꿈틀거리던 베스틀라가 잠잠히 변했다.
"그러나 세상이 멸망하는 데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로 모여들었다.
"시대가 특이점에 이를 때…,"
잿빛의 멸망이 잠에서 깨어난다.
* * *
휘스 아로나는 페르타에서 소문난 망나니였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으며.
항상 술과 재물을 가까이했다.
특이하게도 여자에 손을 대지는 않았는데, 그의 자의라기보다는 그의 할아버지인 그란델의 경고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권력이 그로부터 나온다는 걸 알았기에, 그의 명령만큼은 절대로 어기지 않았다.
그 모습 덕분인지 그란델은 어지간한 사고가 아니면 그가 사고 친 것들을 덮어 주었다.
그렇기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실제 놈에게 당한 사람은 꽤 많았다.
"…이 정도나 된다는 말입니까?"
알렌은 마르골과의 독대를 끝내고, 그녀가 알려 준 주소로 찾아갔다.
"네, 이것도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만 추린 거예요."
그녀는 알렌이 말했던 조사를 끝마쳤다며,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하루 이틀 준비해 온 게 아닌데….'
전생에는 그란델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나? 그렇기에 휘스 아로나만 죽이고 도망을 쳤던 건가.
프란시스카는 그의 생각도 모른 체 예전부터 준비했던 자료들을 막 조사한 것처럼 그에게 건넸다.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한 것치고는 엄청난 양인데…, 혹시 미리 준비해 뒀습니까?"
"설마요. 그저, 예전부터 관심이 많아서 보관해 둔 거랍니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정에도 쌓인 자료들의 양은 그녀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양이 많군요. 혹시 따로 정리해 둔 자료가 있습니까?"
그의 허리춤까지 쌓인 서류의 양은 절대 단시간 안에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그녀는 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방금 건네준 것보다 얇은 서류철을 여러 개 꺼내 들었다.
"보통 여기까지 조사를 했다면, 남은 건 분류하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분류해서 일을 처리하는 건 서류 작업의 기본이었다.
펄럭-
그녀는 첫 번째 서류철을 건네며 말했다.
"거기 있는 건 휘스 아로나에게 당한 이들 중에 크게 다친 이들만을 표시해 둔 거예요."
"큰 부상, 말입니까?"
"최소, 서클이 부서질 정도의 중상."
멈칫-
"…서클이 부서질 정도의?"
"네, 그 상대가 대부분 두각을 드러내기 전의 아이들이지만요."
그녀는 알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서류철을 건넸다.
"네, 다음은 도시에서 실종된 사람의 명단이에요."
"실종자 명단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실종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거든요."
"공통점?"
프란시스카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정확히는 그들이 실종되기 전에 이름을 알릴 거라 기대받았던 유망주라는 점이에요."
알렌의 눈이 깊어졌다. 그녀는 알렌의 반응에 단아한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마지막 서류철을 꺼냈다.
"마지막은 공자님이 가장 궁금하실 정보."
알렌의 시선이 그녀가 건네준 서류의 제목으로 향했다.
"…그란델이 직접 죽였을 거라 추정되는 이들?"
"네."
서류철은 앞서 받았던 것보다도 얇았다.
그녀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두 천재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에요. 그란델과 만난 이후 모두 죽었고요."
그녀의 눈이 첫 장 가장 위에 있는 이름에 향했다.
'에릭, 레아.'
그녀는 부모의 이름에도 감정적인 틈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기대와 광신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응시했을 뿐.
알렌은 마르골에게 들었던 소문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시대가 특이점에 이르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 소문은 마탑의 고위층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해야 했다.
'만약, 그란델이 벌인 일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면?'
특이점이 어떤 건지 판별하는 기준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란델이 그 특이점을 한 명의 천재로 인해 발생하는 시대적 발전을 뜻한다 생각했다면.
'그것을 위해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을 만한 인재들을 해친 거라면.'
알렌의 눈이 세 개의 서류철을 훑었다. 점점 가설이 세워졌다.
휘스 아로나의 악행에 서클이 부서진 아이들.
어느 순간 실종된 유망주들.
그란델과 만난 후 죽은 천재들.
비슷한 상황이었다.
엄청난 천재. 하루 만에 서클을 완성했다. 마나를 하나의 입자로 본다고 했다. 마도서. 아이. 서클이 부서졌다? 함정. 죽음. 유망주. 그리고 율리우스. 율리우스. 율리우스.
'13년 전의 일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면.'
알렌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알렌 공자님."
프란체스카의 부름에 알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어때요. 도움이 되었나요?"
"…확실하게."
"그렇다면…."
그녀가 소름 끼치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걸로 충분하신가요?"
그들을 죽일 만한 이유로.
붉은 핏기가 도는 눈동자가 반달을 그렸다.
119화
[과거의 원한을 해결하고 복수를 하자!
그란델을 쓰러트리고 그의 서클을 부수십시오! 제한시간 : 168 : 09 : 34]
[보상 :정신력 영구 강화, A급 특성 확정 선택권]
율리우스는 심각한 얼굴로 퀘스트를 바라봤다.
마탑 도시에 가는 걸 선택한 직후에 생겨난 퀘스트.
그는 퀘스트의 메커니즘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향하는 장소에 따라 퀘스트가 생성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의외인데….' 아니 그렇지만도 않은가.
마탑에 온 만큼 원작의 사건대로 에스테도르의 습격을 막아 내라! 혹은 도시를 지켜 내라! 같은 퀘스트를 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란델이라니.
'사실상, 이 몸이 망나니가 되게 만든 원인이니 당연한 건가.'
지금까지 히든 피스를 회수하랴, 퀘스트를 진행하랴.
거기다가 하이젤의 일이나 주변 주·조연들까지 영입한다고 지금껏 잊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보통이라면 기꺼워했을 A급 특성 선택권이라는 보상에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마탑주들은 지금의 하이젤이 나선다고 해도 승률이 반반이야.'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시기에 마기를 드러낸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보상이 너무 아까웠다.
A급 특성 선택권.
잘하면 성장이 멈춘 검술을 끌어 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정령 친화력을 대폭 늘려 인공 정령을 완전히 지배하든지.
어느 것이라도 매력적인 선택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나? 아니면 하이젤과 연합을 한다면….'
율리우스는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하이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가 시선을 보내기 무섭게 하이젤의 고개가 제 쪽을 향하더니, 이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
"...."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자, 하이젤의 옆에 있던 여자도 율리우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릴리트.
하이젤이 마왕일 적 그를 섬겼던 신하.
원작에서는 서큐버스니 히로인이다, 아니다를 두고 논쟁이 일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결론으로 모였다.
'발암이라고.'
강제적인 제약을 핑계 삼아 얼마나 많은 고구마를 선사했던가.
결국, 마지막 결말까지 말아먹었으니 나름 소설의 애독자였던 그로서는 그녀를 좋게 바라볼 수 없었다.
율리우스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하이젤과 협력하는 건 힘들다.'
굳이 여기서 마탑주를 살해하기 위해 협력을 요청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원인인 릴리트를 살해한다면 하이젤이 폭주할 터.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른 그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마침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던 비엘리와 눈이 마주쳤다.
비엘리 카자나프.
남쪽 끝의 작은 해양 왕국의 왕녀이자, 자신보다 한 학년 위의 빙결 마법사.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이젤과 릴리트를 감시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녀의 요청으로 참관하게 되었다는 말이 옳았다.
'…나는 마법사도 아닌데.'
하필 첫날부터 아냐를 따라 토론회에 참석했다는 것이 들켜서 그런지.
마탑 도시의 일정이 끝나기 일주일 전인 지금까지 토론회에 들어가야 했다.
그 탓에 마법사가 아닌 학생들의 훈련 일정과 하이젤의 감시 그리고 자신과 관련도 없는 토론회에 불러 다니느라 이번 일주일간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선배의 표정이 많이 안 좋네?
그녀 말고도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의 얼굴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토론회는 마탑 측이 우세한 것 같았다.
마침 빙결 학파 수장의 제자라던 남자가 소리 높였다.
"저희 빙결 학파는 저 남쪽의 깊은 해저에서 최초로 뜨거운 얼음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번 발견으로 저희 학파는 얼음이 무조건 차갑다는 '인식'을 깨트렸고…."
율리우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의 발표를 들었다.
'뜨거운 얼음인가.'
현대에 있을 때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들이 보기에 뜨거운 얼음은 악마의 차가운 불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현상으로 보이기 충분하겠지.
"얼음이 단지 수증기에 이어 물의 상태 변화에 불과하다는 현재의 이론을 뒤집을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이 자리에서 선언하겠습니다."
그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저희 물의 마탑 부속 학파, 빙결 학파는 이 시간 이후로 물의 마탑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짝짝짝-
그의 설명을 듣던 마법사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율리우스는 다른 사람이 박수를 치니 그도 같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찬탄과 놀라운 얼굴로 박수를 보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율리우스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비엘리 선배를 기다렸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패배감에 젖은 얼굴로 토론장을 걸어 나왔다.
"선배, 무슨 일인데 저렇게 흥분하는 건데요?"
"…율리우스인가."
그녀는 그를 옆으로 끌고 가더니 사람들이 없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답했다.
"학파 독립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율리우스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녀가 자세히 풀어 설명했다.
"마법사가 아니라도 학파는 하나의 계통을 수련하는 이들이 모인 거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네."
"그런 학파들도 수준이 나누어지기 마련이지."
마탑 도시를 대표하는 7대 마탑.
그 아래에 위치하는 연금 학파와 변화 학파.
그 아래의 수많은 계통을 수련하는 학파들.
"잠깐, 연금술은 알겠는데 변화 학파는 뭔데요?"
"못 들어 봤나? 변화 학파는 말 그대로 변화 계통을 수련하는 이들이지."
현재 학계에서는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물질의 변화에 따른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가설이 우세하다.
변화 학파는 그런 물질의 변화를 연구하며, 끝에는 시간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었다.
"어쨌든, 수많은 학파가 나뉘어 있지만… 진정으로 독립한 이들은 많이 없지. 7대 마탑의 속성과 관련 없는 학파는 드무니까."
그렇기에 많은 학파가 7대 마탑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학파가 되고 싶어 한다고.
공간이나 영혼 같은 계통은 난해하고 희귀하기에 그쪽은 사람이 더 부족하다고 했다.
영세한 학파는 학파를 유지할 제자를 모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니.
"그런 상황에서 물의 마탑의 부속 학파 취급당하던 빙결 학파가 독립했으니, 다른 이들이 보기에 얼마나 희망차게 보이겠어?"
율리우스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없어서 잘 모르겠네."
하긴, 하이젤은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이런 자세한 설정까지 읊는 건 이상할 것이다.
그가 신기한 표정으로 다른 질문을 하려는 그때,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망나니한테 몇 놈 걸렸다는데?"
"또? 근데 저거 저번이랑 같은 사람이…."
망나니란 소리에 율리우스는 홀린 듯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돼지란 단어가 어울릴 한 청년 주위로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 다섯이 소리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내 동생이 폐인이 되었어!"
"유망주로 불리던 우리 누나가 방구석에 틀어박힌 게 너 때문이다."
"휘스 아로나, 그란델 님께 우리 아버지의 실종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촉구하오."
그곳을 바라본 율리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익숙한 기시감.
망나니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비슷한 일을 당한 적 있었다.
'추수제… 였지?'
별 같잖은 놈들이 길을 막아 대서 얼마나 귀찮았는지 모른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비엘리는 키가 작아 벌어지는 일을 보지 못했다. 율리우스는 괜히 찔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니에요. 그냥 가죠. 약속도 있는데."
"음, 그래도 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그녀의 대답에 율리우스의 눈에 무지갯빛이 맺혔다.
'진한 주황색.'
원작의 잠깐 등장했던 조연임에도 재능이 훌륭하다. 율리우스가 활짝 웃었다.
'저놈과 다르게 나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없는 게 다행이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 확신을 얻은 율리우스는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요. 나타샤랑 아냐가 기다리니까."
"알았다. 그, 그런데 손목은 언제 놓을 거냐?"
율리우스의 웃음소리가 깊어졌다.
* * *
한껏 기분 좋게 사라진 율리우스와 다르게, 휘스 아로나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리 꺼져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저질러?"
그가 소리쳤음에도 상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휘스 아로나. 마탑주 그란델 님의 손자인 너를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쨌든 제대로 된 해명을 해야 할 거다. 그 어린 것의 서클을 깨트려? 고작 부딪쳤다는 이유로?"
"나는 그란델 님의 답변 듣고 싶소. 현재 그와 만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을 테니, 당신이라도 붙잡아야겠소."
평소에는 자신이 누군지 알 테니 적당히 하고 물러날 텐데, 이번 주는 유독 저런 놈들이 많았다.
'아카데미가 있다고 저러는 건가?'
그들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체면을 차려야 할 테니?
그 생각에 그는 콧방귀를 꼈다. 언제부터 자신이 체면에 신경을 썼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은 생각과 정반대였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저리 꺼져!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는…."
저들의 눈에 보이는 독기에 휘스 아로나는 말하다 말고 발걸음을 돌렸다.
"휘스 아로나!"
"이 새끼를 내가…!"
"참으시오, 먼저 공격하면 우리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일단 그가 약조했으니, 그를 믿고 기다리…."
뭔가 계획을 꾸미는 듯한 그들의 말에 휘스 아로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도 아카데미 탓인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사라져 혼자밖에 없는 상황이다.
거기에 할아버지마저 요즘 무슨 일이 있는 듯 이번 주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자신의 배경을 생각한다면 누가 건드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눈이 돌아간 이가 있어 자신을 공격한다면?
'아카데미가 떠날 때까지만 참는다.'
그때쯤이면 할아버지도 다시 그를 신경 써 줄 것이고, 사라진 자신의 패거리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교류회 셋째 날부터 거리를 걸을 때면 부쩍 나타나는 저들 같은 이들 때문에 이제 밖을 나가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개인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그제야 안심이 들었다.
"개새끼들 같으니…. 이번 일만 끝나봐. 제대로 손봐 줘야지."
할아버지의 말대로 몇 명만 건드렸더니, 저렇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니 확실하게 처리한다면 앞으로는 저런 일이 없겠지.
앞으로 일주일만 참으면 이루어질 미래에 그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았던 그들의 독기어린 눈빛이 떠오르자 웃음이 뚝 그쳤다.
"…시발."
사실 요즘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자신이 몰래 처리했던 이의 환청이 들리기도 하고, 잠을 자면 자신에게 당했던 모든 이들이 그를 물어뜯는다.
처음에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자위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환청과 환각에 그도 두려움이 들었다.
"엘릭서도 몇 병이나 먹었으니 마법일 리는 없는데…."
몰래 꿍쳐 둔 상급 엘릭서까지 먹었으니 확실했다.
결국, 결론은 현재 상황 때문에 느끼는 불안감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왜 내가 돌아왔는데 없… 아."
이틀 전, 하인 하나가 그의 음식에 독을 타는 악몽 때문에 열흘간 아무도 오지 말라고 소리쳤었다.
한숨을 내쉬는 그는 오늘따라 그림자가 더 짙어 보이는 저택의 통로를 지나쳤다.
획-
"누구야!"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시선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만이 어둡게 자리한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는 차오르는 두려움을 누르며 속도를 높였다.
꾸륵꾸륵-
"또, 또 이 소리인가."
어디서 나는지도 모를 정신을 갉아먹는 소리.
햇빛이 구름을 가려서일까, 사용인 하나 없는 저택은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더욱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분명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는데…."
그는 떠오를 듯 말 듯한 생각을 억지로 구겨 넣고,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중간을 지나칠 때쯤, 소리가 들렸다.
-휘스 아로나.
-왜, 왜?
-무슨 짓을 했다고….
또 환청이다. 그는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귀를 막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듯 뇌를 울렸다.
"시발, 꺼져! 왜 갑자기 나타나고 지랄이야!"
꾸륵꾸륵-
이제는 저택의 그림자까지 꾸물거리며 기어 왔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왜, 서클을 부셨어?
-또, 때릴 거지?
-응? 그렇지? 응?
그는 달렸다. 그러나 일 분이면 도착할 방이 보이지 않았다. 복도가 길게 늘어졌다.
꾸륵꾸륵-
그림자가 솟아오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어린아이로, 소년으로, 청년으로 변했다.
그들이 입을 벌리고 그에게 다가섰다.
꾸륵꾸륵-
"뭐야! 뭐냐고! 꿈도 아니…, 그래."
꿈이구나.
그가 길게 웃음을 터트렸다. 꿈이구나. 꿈.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꾸륵꾸륵
"어서 깨어나! 깨어나라고. 당장 날 깨워 줘 깨우란말이야당장깨우라고꾸륵꾸륵꾸륵꾸륵- 아?"
왜 내 입에서 소리가?
정신이 멀어진다. 발밑에서 솟아난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두 개의 인형이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꾸르륵-
눈앞이 검게 암전되었다.
제120화
"…이제 끝인가?"
복도의 그늘진 그림자에서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검은 두 인영의 정체는 알렌과 프란시스카였다.
"네, 며칠 동안 충분히 공들였으니 이제 괜찮을 거예요."
프란시스카는 차분한 걸음으로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저택의 곳곳에서 여러 가지 생물이 기어 나왔다.
구불거리는 촉수, 날개 달린 눈알, 표정 없는 그림자, 소리 지르는 하얀 가면까지.
당장 밖에 데리고 나간다면 그녀가 악마 계약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기괴한 외형이었다.
'저게 바로 그녀의 마법인가….'
상암 마법이라 했던가.
운명 마법과 같이 그녀가 직접 창시한 계통.
인간 본연의 심연과 관련되어 있다는 그녀만의 마법.
저 모습을 보니 왜 그녀가 전생에 마녀라 불렸는지 이해가 가능했다.
"자, 다시 들어가렴."
그녀가 손을 휘젓자, 기괴한 외형의 괴물들은 검은 안개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알렌은 일을 처리하기 전 먼저 감사 인사를 했다.
"며칠 동안 움직이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즐거웠는걸요?"
그녀는 정말 즐거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생은 저뿐만이 아니라, 도와준 다른 이들 덕분이죠."
"그들에게도 답례해야겠군요."
"그건 공자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요."
그녀는 싱글벙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알렌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았다.
'슬슬 결정해야겠지.'
사실, 프란시스카에게서 그란델과 휘스 아로나의 정보를 얻었을 때부터 반쯤은 결정했었다.
그란델을 죽이자고.
그러나 알렌은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그녀에게 받은 자료를 확인한 직후, 휘스 아로나의 악행에 분노를 품은 이들의 힘을 빌려 순조롭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휘스 아로나에게 당한 이들의 신분은 다양했다.
그중에는 별 볼일 없이 평민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마법사가 되려는 이들도 있었던 반면, 전통적인 마법 명가도 몇이나 있었다.
그들은 그란델보다는 약하다고 해도 절대 그 위세가 약하지 않았다.
단지 마탑주를 상대할 수 없기에 분을 삭이고 있었던 것일 뿐.
알렌은 며칠간 움직이며 그들과 접촉했고, 그들에게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고 나서야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덕에 휘스 아로나 곁의 인물들을 순조롭게 배제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직접 나서서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이들을 움직여 휘스 아로나를 압박했고, 그를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프란시스카의 상암 마법을 통해 더욱 뒤흔들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이것이었다.
완전한 휘스 아로나의 신변.
며칠에 가까운 공작으로 인해 그들을 방해할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때마침 그란델의 관심도 도시의 바깥에 있었다.
지금만큼 절호의 기회가 없었다.
"공자님 빨리 행동해야 해요. 한 시간 후면, 사용인이 음식을 가지고 도착할 시간이니까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휘스 아로나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뒤집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그의 정신 방벽이 완전히 허물어지기는 했는데…."
"제가 할게요."
그녀는 잠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수인에 따라 얇은 실지렁이가 그의 입 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휘스 아로나의 눈이 부르르 떨리더니, 멍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무의식 상태인가."
"네, 맞아요. 정신에 관여하는 건 저도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으니, 빨리 질문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렌은 그와 그란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떠올렸다.
그란델의 행동과 휘스 아로나의 악행.
그로 인한 피해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만들어진 결과.
물어볼 것은 정말로 많았다.
그란델이 휘스 아로나를 움직여 얻으려는 것.
그의 진짜 진의와 소문과 관련된 진실.
하지만….
'첫 번째 질문만은.'
자신의 고민에 마침표를 찍는 게 먼저였다.
"휘스 아로나, 너에게 묻겠다."
멍한 눈빛의 그가 알렌을 올려다봤다.
"너는 정말로."
진실로 대답하라, 네 본심을.
"네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나?"
그가 대답했다.
"――――."
알렌이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확실하게 정했다.
다음은 그란델의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 * *
마탑 도시 페르타에서 북서쪽으로 몇 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
남쪽으로는 엘프의 숲이 있었으나 워낙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나타나는 괴물 탓에 인적 하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수천은 될 법한 군세가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수천의 해골 병사.
수백의 벤시.
수십의 데스나이트.
수 명의 리치.
평범한 도시 하나를 공략하기에는 과한 전력이었으나, 페르타를 무너뜨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그들의 중앙, 골탑을 쌓아 만들어진 왕좌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비쩍 마른 얼굴에 새하얀 피부.
사령왕 카이슨.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남부를 휘젓고 다니던 악명 높은 사령 술사였다.
곁에 해골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그 남자는, 왕좌에 앉아 있던 것이 무색하게 수정구 하나에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시옵소서, 주인이시여."
"내가 마도 여황을 잡아 두겠다. 그 안에 페르타를 함락하고, 함락하지 못했을 때는 철저하게 마법사의 수를 줄여라."
"반드시 놈들을 무너뜨리겠나이다!"
"명심하도록, 반드시 마법사의 수를 줄여야 한다. 너의 성과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그의 말에 카이슨은 숭배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박았다.
쾅- 쾅-
"반드시, 반드시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행동은 수정구의 목소리가 끊기고 나서도 오 분이나 지속되었고,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고 나서야 그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그 말라비틀어진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성량을 내질렀다.
"기만의 가호를 펼쳐라! 놈들은 습격당하는 것도 모른 채 불타오를 것이다!"
군세가 소리 없이 포효했다.
벤시가 날아올랐고, 데스나이트가 발을 굴렀다.
리치가 손짓하자, 다섯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그 안에 새겨진 가호가 발동했다.
"이 모든 것을 마왕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자를 위하여.
그가 낮게 읊조렸다.
죽음의 물결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탑 교류회가 시작된 지 열흘이 흘렀을 때의 일이었다.
* * *
"자! 제대로 정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들어갈 장소는 지극히 위험한 장소입니다."
교류회는 어제부로 무사히 끝마쳤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겨루었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적으로 의견을 교환했고, 서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채 헤어졌다.
이제부터 남은 일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원시 회랑.
마탑 도시가 마법사들의 세력으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만든 원인.
이번 교류회의 인원을 몇 배는 늘리게 만든 원인이자, 그란델이 누군가를 처리하는데 애용하는 공간.
페르타에서는 이곳의 출입증을 빌미로 마법사들을 단합시켰다.
흔히 원시 회랑이 열렸다는 말은, 분기마다 열리는 입구의 입장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간단하다.'
시간에 맞춰 출입증만 있다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번 분기의 원시 회랑에는 아카데미 학생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탑의 제자와 입장권을 배분받은 학파의 수련자 그리고 경매를 통해 입장권을 손에 넣은 마법 명가의 자제들까지.
들어가는 인원은 다양했다.
그 안에, 누군가 섞여 들어가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프란시스카 양이 계획했던 대로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군.'
알렌은 프란시스카를 떠올리다, 중앙에 서 있는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
그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이번 원시 회랑에 참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이번 만큼은 젊은 마법사들을 주축으로 원시 회랑을 열겠다고 한 것이었으나, 알렌은 내부의 사정을 알았다.
도시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실종 사건.
'하이젤이 이번 일에 관여하던가.'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투입했고, 그 사건의 뒤에는 릴리트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도시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에스테도르의 계책.
'율리우스도 밖에 있으니, 이번 도시 습격은 그들이 알아서 막아 낼 테지.'
자신은 단 하나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알렌은 평소보다 강하게 조인 옷을 적당하게 풀며, 준비물을 확인했다.
'근력 강화 물약, 정신력 집중 물약, 오감 활성화 물약, 회복력 상승 물약, 항마력 강화 물약, 실전된 교단의 성수….'
물약은 마르골의 도움으로 빠르게 구할 수 있었다.
유물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7위계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가문의 가보급 유물이 필요했다.
그것도 일회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한 번의 전투로 그 정도 가치의 유물을 사용하는 것은 낭비였고, 또한 짧은 시간 내로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마법 명가들이 지원해 줄 의향이 있어 보였지만.'
그건 결국 다 나중에 돌아올 빚이었다.
특히 알렌 자신이 그란델을 죽였다는 증거가 될 만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목줄을 죌 만한 약점을 남의 손에 쥐여 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인원이 모여들었다.
중년의 마법사 몇 명이 그란델의 곁에서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자, 이제 잠시 후면 비프로스트를 이용해서 이동하겠습니다. 보통 공간 이동과는 다르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이미 충분한 주의를 받은 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빛이 몸에 닿기를 기다렸고.
도시의 하늘을 빛내던 비프로스트에서 일곱 가지 빛이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깜박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후였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외딴 숲이었다.
초록색의 잎이 울창하게 솟아오른 맑은 공기가 가득한 장소.
푸른 자연과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은 이곳이 사람의 인적이 잘 닿지 않는 장소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와… 미친 마나 농도 봐. 실화야?"
"…여기서 수련하면 밖의 수십 배겠는데."
"이러니까 마탑이 마법사들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
마탑의 마법사들도 직접 들어온 적은 처음인 듯 신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고, 아카데미 학생들은 평민, 귀족 가리지 않고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알렌이 느낀 감상은 저들과 조금 달랐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중첩되었다.'
원래의 공간 이동이 공간이 물결치는 전조가 일어난 것과 다르게, 비프로스트를 이용한 이동은 그가 알던 것과 달랐다.
소수의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흥미로운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이건 이동이라기보다는, 공간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
그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간의 경도 상으로는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비프로스트를 이용한 순간 그들은 같은 위치에, 다른 공간이 중첩되면서 이동한 것이라 느낀 것이다.
'이건 절대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가 없다.'
모두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듯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둘러보던 그때,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전에 알렸으니 알겠지."
하늘 위로 거대한 얼굴 모양의 구름이 입을 열었다.
입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탑주 그란델이었다.
"앞으로 나흘 후 원시 회랑은 닫힐 것이다. 그동안 마음대로 하거라. 수련을 하든, 이곳을 조사해 보든, 유적을 탐험하든 상관없다. 단…."
그는 한층 심유한 눈으로 경고를 입에 담았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책임이니, 그걸 명심토록!"
그란델의 말이 끝나자 얼굴 구름은 순식간에 흩어져 하늘로 되돌아갔다.
"그럼…, 어떻게 할래. 계획대로 탐색?"
"가문에서 구해 온 지도가 있으니까, 잠시만…."
"나는 근처에서 수련이나 해야겠어. 위험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란델이 사라지자 학생들은 곧바로 사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준비한 지도를 들고 동료들과 사라지거나, 위험을 감수하기 싫다는 듯 적당한 곳에 수련하거나, 특별한 소환수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주변을 탐색하거나.
가지각색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 사이로 알렌도 미리 계획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장소.
협곡과 칼바람이 가득해 일반적인 학생들이라면 절대 오지 않을 장소였다.
그 협곡의 정상에, 누군가 묶여 있었다.
커다란 몸집과 며칠 굶은 듯 핼쑥한 안색.
휘스 아로나. 그는 알렌이 다가오자 발버둥 쳤다.
"읍읍…!"
며칠간 그들과 지내며 익숙해졌을 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알렌을 두려워했다.
"프란시스카 양이 제대로 준비해 놨군. 그러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알렌이 베스틀라를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두꺼운 피륙을 파고들었다.
푸슉-
붉은 피가 솟구치며, 휘스 아로나의 몸에서 하얀빛이 솟구쳤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미끼가 준비됐으니, 이제 용을 사냥할 준비만 남았다.
제121화
그란델은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그가 향하는 장소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유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분기별로 입장권을 통해 들어오는 것과 다르게 7대 마탑의 마탑주들은 제약이 있으나 자유롭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루에서 이틀.
그것도 한 달에 한 번만 출입할 수 있을 뿐이지.
하지만 그와 같은 초인은 고작 하루의 시간으로도 일반인이 하는 일의 몇 배에 해당하는 작업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저번 달에 발견했던 유적을 마저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유적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그란델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 방향에서 하얀색 빛 뭉치가 날아왔다.
"…저건 신호인데."
저게 발동될 만한 일이 있나?
자신을 제외한 마탑의 일원은 들어오지 않았고, 저걸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수 자체도 한정되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가 손을 당기자, 푸른 바람이 빛 뭉치를 당겨 왔다.
"이건…."
그 빛 뭉치의 정체를 알아챈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휘스가?"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했다.
한가하게 유적을 공략할 때가 아니였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이곳까지 납치된 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람 마탑의 주인.
7위계의 능력자.
그란델.
그가 방향을 돌렸다.
그의 감정을 알아채듯 그의 옷자락이 미친 듯이 팔락거리며 광풍이 몰아쳤다.
* * *
후우우웅-
날카로운 삭풍이 협곡 사이를 매섭게 몰아쳤다.
바람 마법을 사용하는 그란델에게 있어 이 장소는 최고의 장소일 것이다.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을뿐더러, 마법의 위력도 강화될테니.
알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
그런데도 그는 이 장소를 골랐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하는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이곳만큼 안성맞춤인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
한동안 협곡의 아래를 바라보던 알렌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회귀를 깨달은 직후, 저택에서 세웠던 계획, 키메라 술사 사건, 신수의 숲의 흑마법사, 벤자민의 대련, 유적의 괴물, 학기 말 대련 등.
과거의 계획과 미래의 계산이 서로 혼란스럽게 얽혀 어그러지고 지고 있었다.
검은 책과 하얀 책의 유용성을 깨달았을 때, 제3세력이 여러 곳에 손을 뻗치는 것을 알았을 때, 하얀 책이 원하는 것이 마왕을 막는 것이라 추측했을 때.
그로 인한 처음 세웠던 계획과 점차 달라지는 미래.
처음 율라우스 만을 구하려던 계획은 이제 세력과 인재가 합쳐져 다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새로운 목표기도 했으며, 자신이 선택한 미래기도 했다.
'변하는 건 없다.'
율리우스는 아니, 김우진은 여전히 빙의자고, 제3세력도 물리쳐야 할 상대에 불과하다. 그 사이 마왕이든 흑마법사가 끼어들든 상관없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린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새로이 얻은 회귀의 특권이었다.
그 목표에 달려가는 사이, 여러 고민과 그로 인한 행동이 자신을 막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었다.
"너로구나."
알렌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삭풍이 노인의 주변을 돌았다. 협곡을 맴돌던 바람이 흐름에 이끌렸고, 알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내 손자를 건드린 놈이."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시시각각 달라지는 기준과 겨우 세워진 자신의 선.
그의 간극과 이따금 생겨나는 모순은 범인에 불과한 그를 흔들어 댔다.
아무리 강철 같은 마음을 먹어도. 그는 인간이었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휘스는 어디 있지? 아직 살아 있는 듯 보이는데…."
노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알렌의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 생각했는지 금방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 신역도 구축하지 못한 마법사 따위, 기억할 가치도 없었다.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손자의 안위였다.
휘스가 얼마나 쓰레기이건 재능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그의 악명을 통해서 귀찮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니, 자신도 그에게 마땅한 안전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서라도.
"아니, 네 놈을 죽이고 알아보면 되겠지."
노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옅은 녹색의 칼바람이 둥글게 압축되었다. 둥근 구의 주변에서는 용오름 소리가 났고,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강대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깔끔하게 보내 주마. 너 따위에게 쓸 시간도 아까우니."
그란델이 손을 내리쳤다.
작게 압축된 바람의 구가 터져 나가며 수만은 될 법한 칼날이 터져 나왔다.
바람이 끊기고, 공간의 면(面) 자체를 가득 채우는 만면의 칼날.
그 앞에서 알렌은 손을 풀었다.
용의 노심이 끌어낸 실타래가 손 사이에 걸렸다.
풀어헤친 실이 가닥가닥 이어져 수천의 실타래가 이어졌다.
휘스 아로나의 대답은 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아니, 그러기에는 조금 이르군."
그란델의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알렌이 손을 튕겼다.
운명(運命) 제 1법(法)
노른 우르드(Norn Urðr)
과거규정(過去規定)
생물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운명이 정해진다.
실타래가 커다란 물레로 엮이기 시작했다. 수레바퀴 모양의 물레는 한쪽으로 돌아가며 알렌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에 그란델은 아무런 감흥 없이 칼날의 수를 늘렸다. 어떻게 방어하려 하든 완전히 짓눌러 버릴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생각처럼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알렌을 바라보는 그란델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건 신기하군."
칼날이 사라졌다.
그란델은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시간 마법인가? 아니, 그것과는 살짝 다른데…."
산들바람이 알렌의 옷깃을 스친다.
그의 통제에 사나운 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 칼날은, 수레바퀴에 닿기 무섭게 산들바람으로 변했다.
"공격을 막아선 게 신기한가?"
알렌의 기꺼운 반응에도 그란델은 가라앉은 눈으로 팔을 휘저었다.
그의 심상에 따라 이끌린 마력이 광폭한 소용돌이로 변해 휘몰아쳤다. 그러나 어떤 공격이든 수레바퀴에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산들바람으로 흩어졌다.
알렌은 대응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몇 번 사용해봤으나, 7위계 마법사 앞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계는 대략 이 정도인가.'
마법은 한계가 없으나, 마법사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더 발전한다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지금이 한계였다.
'마탑주란 이름이 허명은 아니군.'
전력이 아님에도 일반 마법사의 수 배나 강력했다.
한동안 공격을 이어 나가던 그란델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알렌."
알렌이 성을 숨기자, 그란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런 마법을 쓰는 이들이라면 진즉 소문이 났을 테니까. 특히, 모든 공격을 산들바람으로 되돌리는 저 마법은 변화 학파에서 눈독 들일만 했다.
"성이 무엇인지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나. 아니면 말하기 부끄러운 곳인가 보지?"
"다짜고짜 공격해 놓고, 이제 와서 대화를 청하나? 마탑주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알렌이 대답하지 않고 비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그란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수행은 모욕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알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다, 알고 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마법을 쓰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저런 특이한 마법이라면,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을 테니까.
"어디 세력이지? 제국? 아니, 제국은 저럴 역량이 없다. 그렇다면 엘프 쪽 혼혈인가? 그렇지만도 않은데…."
저 특이한 청발.
분명 어딘가 기억에 있었다.
기억에 남았다는 건 비슷한 이들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잠시 인상을 찌푸린 그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어린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과연, 라인하르트인가."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란델은 알렌이 라인하르트 가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동시에 그가 왜 휘스 아로나를 납치해 두고 자신을 이곳에 끌어들였는지도 깨달았다.
"복수가 목적인가?"
알렌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휘스 아로나의 대답과 자꾸 고민과 후회로 흔들리는 자신을 보며 깨달았다.
"아니, 이건 다짐이지."
가이온의 한 마디에 휘둘린 것도 지긋지긋했고, 사건마다 판단과 기준에 영향을 받는 것도 지겨웠다.
그러니 이건 다짐이자 선언이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도대체 언제까지 사소한 것에 흔들리려 하는가.
"…다짐?"
"휘둘리는 것도 지겨워졌거든."
꼭 선과 악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옳음과 그름을 따질 이유도 없다.
정당함과 부당함 사이에 헤맬 필요가 없다.
왜, 그 모든 것을 돌보려 하는가.
자신은 동생 하나 구하지 못한 못난 형일진대.
세계를 위함이니 멸망이니 그런 것들 모두 다 상관없었다.
자신 혼자 지키기에도 벅찼다.
그렇기에 고민했고, 결정했다.
그것을 처음 증명하기 위한 상대가 그란델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할 수가 없어."
그의 대답에 그란델은 알렌을 미치광이 바라보는 표정으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네 동생의 고리를 부쉈는지 아느냐?"
"내가 알 필요가 있나?"
"이리도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그란델은 알렌에 대해 알아보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상대의 신분은 정해져 있다. 그가 이런 마법을 사용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었으니, 개인적인 복수일 확률이 높았다.
몇 달 전, 프린달에게서 알렌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니 확실했다.
손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프린달은 쓰기에 적당한 말이었다.
'이제 슬슬 성장세도 가팔라졌으니 다 같이 처리해야겠군.'
알렌도 마찬가지.
저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최근일 터, 그렇다면 알렌도 그란델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마탑주인 나를 건드리다니, 젊은 피는 이렇게 무지하구나."
"글쎄, 늙어서 미몽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이대로 항복하고, 휘스를 내어 준다면 봐주마. 어떻게 하겠느냐."
"늙은 여우는 믿는 게 아니라 그랬지."
그란델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알렌의 목적이 확고하다면, 그 이상 설득할 필요 없었다.
그의 주변을 돌던 바람의 흐름이 가속한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을 이을 듯 거대해진 회오리가 솟아오르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수백의 칼바람이 협곡의 벽면을 깎아지르며 위태로운 비명을 질렀다.
협곡의 날카로운 삭풍에 부서진 돌조각들이 위협적으로 공간을 울렸다.
알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한 손의 수인을 그렸다. 용의 노심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실타래를 뽑아냈고, 물레가 윰직이며 뽑아낸 실타래를 엮기 시작했다.
물레가 돌아간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하나의 거대한 그물로 엮인다.
운명(運命) 제 2법(法)
노른 베르단디(Norn Verðandi)
현재역변(過去易變)
생물의 삶은 쉽게 바뀌며 달라진다.
그물에 뒤덮인 회오리와 맞닿을 리 없는 돌조각의 운명이, 강제로 이어졌다.
제122화
어렵게 짜 맞춘 퍼즐을 흩트리는 건, 맞출 때와 비교도 안 되게 간단하다.
그저 뒤엎는 것.
그 하나의 행동만으로도 모든 노력은 물거품으로 변한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알렌을 도륙 낼 듯 다가오던 바람의 방향이 꺾였다. 그물에 닿았던 돌풍은 그대로 돌아가 회오리에 섞인 돌조각과 부딪쳤다.
쾅!
돌가루가 흩날렸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마법에 그란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물 범위 안의 돌풍은 그것만으로 모자라다는 듯 방향을 바꿔 협곡지대의 벽면에 구멍을 뚫었다.
알렌은 회오리와 암벽을 잇는 얇은 실의 모습을 보며 냉정하게 판단했다.
'십 초, 아니 오 초 정도 버티나?'
과거규정이 과거의 원래 운명 그대로 되돌린다면, 지금 사용한 현재역변은 이어지지 않은 운명을 강제로 엮는다.
그 시간은 몇 초라 할 만큼 짧았으나, 상대의 마법을 무효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늘과 땅을 이을까 싶던 회오리가, 그 효용성 한 번 보이지 못한 채 사라지자 그란델은 제대로 상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렌의 차례였다.
실타래를 감싸던 손을 뒤집었다. 녹청색의 칼날이 허공을 꿰뚫는다.
그와 동시에 알렌이 발을 박찼다.
쾅!
어느새 베스틀라가 그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녹청색의 칼날은 그란델에게 향했으나, 그의 재빠른 행동에 협곡지대의 벽면에 박혀 들었다.
그란델은 잡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주먹 모양의 구름이 떨어져 내렸다.
이계, 이르파스카더스. 알렌의 피부가 검게 물들며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파앙!
주먹은 땅에 닿는 즉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어딜 도망가느냐!"
그러나 구름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쿠구구구구!!
협곡지대를 박살 낼 듯 수십 개의 주먹이 그대로 알렌을 향해 내리찍었다.
알렌의 손짓에 물레가 회전하며 공격이 무효화 되었고, 그물이 생성되며 박살나며 산란하는 파편들을 감싸 안았다.
그의 머리 위로 폭풍의 창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오랜 시간을 바람에 버티던 협곡의 탑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란델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진작 이곳의 수색은 끝냈었기 때문이다.
높은 돌탑의 꼭대기에서 끊임없이 폭풍의 창이 쏘아졌다.
알렌은 정면을 향해오던 폭풍의 창에 검을 내질렀다.
일계, 마나그람.
붉게 물들던 검이 그대로 창을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주위로 쏟아지는 충격에 알렌의 몸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를 틈타 그란델이 수인을 맺었다.
짧고 굵게, 이미 수인의 간략화를 습득한 그에게 위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겨울의 정령."
그가 수인을 끝마친 즉시 정령 하나가 북풍을 몰고 알렌에게 돌진했다.
정령은 바람과 서리가 섞인 칼날 같은 작은 화살들을 몰며 알렌에게 달려들었다.
사아아아-
날카롭게 얼어붙은 바람은 그를 갈아버릴 듯 기세가 흉흉했다. 그 엄청난 온도변화에 공기의 대류 현상이 일어났다.
알렌의 주위를 완전히 박살내겠다는 의지를 가진 광역 공격.
정령까지 동원한 공격에 알렌은 물레를 미친 듯이 돌려 앞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녹청색의 창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그 공격들은 무의미하게 바람에 휩쓸려 주위 벽면에 틀어박혔다.
알렌은 뒤를 노리는 공격을 그물로 막아내며 정령을 살폈다.
하얀 사슴 형태와 차가운 북풍, 전형적인 겨울 정령의 모습이다.
'정령까지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두 개 이상의 위계를 파고드는 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마탑주까지 올라간 그란델이니, 마법 하나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터. 그러나 그가 정령 계약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가 정령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바람은 약하다.
거대한 재해를 일으킬 수 있지만, 불이나 번개 같은 파괴력을 내기엔 힘들다.
정령은 그것을 보조하는 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터.
게다가.
'정령은 죽이기 힘들다.'
완전히 소멸시키는 건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당장 할 수도 없었다.
단지 역소환, 지금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알렌의 마법이 순간적으로 끊겼다.
전방을 막아내던 물레가 희미해지고, 그의 주변을 맴돌던 그물이 사라지는 가운데, 정령이 그 차디찬 숨결을 뱉으며 다가왔다.
사아아아-
"…후."
노심의 마력이 일순간 검에 모였다.
한 번 멈췄던 노심은 다시금 세차게 마력을 공급했으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옷이 잘게 찢겨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차디찬 정령이 죽음을 두르고 그에게 다가서는 순간.
삼계, 료스솔.
빛으로 이루어진 태양이 검 끝에서 빛났다. 거대한 빛이 서리를 깨부수며 정령의 몸을 뒤덮었다.
콰아아앙!
"...!!"
정령이 역소환 되자, 그 여파로 그란델의 안색이 거뭇하게 변했다.
알렌은 여전히 날붙이를 그에게 던졌다. 다른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마법은 정신에 영향을 일으키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대등하거나 낮은 실력이라면 모를까 그보다 명백히 상위의 실력을 갖춘 그란델에게 의미 없는 마나발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란델의 안색이 시종일관 가라앉아 있자, 알렌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그란델이 굳은 얼굴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알렌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위기감에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란델의 수인이 알렌의 반응 속도를 넘어섰다.
부서진 바위들이 날아온다.
알렌은 수인을 맺을 틈도 없어 손가락을 튕겼다.
팡!
충격파가 터지며 날아오던 바위들을 밀어낸다.
그 모습에 그란델은 순간 눈썹을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금 진중한 얼굴로 수인을 이어나갔다.
이번 공격은 그로서도 집중해야 할 만한 수였다.
겨우 바위의 잔해를 걷어내던 알렌이 본 것은, 그란델의 웃는 얼굴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스쳤다.
들이쉬는 공기에 폐까지 익을 것 같은 온도.
후우욱-
알렌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주위가 몇 십 도는 올라간 원인이 그를 반겼다.
하늘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하늘 저편에 있던 바람이 불어온다.
중간열풍 태양십자
천중화
쿠우우웅-
강제로 끌어당긴 하늘의 바람은 십자의 형태로 돌며 그의 위쪽에서 거대한 열기를 내뿜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열풍에 협곡에 피어났던 식물들이 시들었고, 돌바닥을 뜨겁게 달구었다.
7위계 마법사가 일으킨 인위적인 재앙(災殃) 속에서 그란델이 오연하게 알렌을 응시했다.
"이 정도면 오래 버텼다."
그가 열풍의 속도를 높였다.
"그만, 끝내도록 하지."
알렌은 이제 끝났다는 듯한 오만한 얼굴의 그란델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내가 여기까지 그냥 왔다고 생각하나?"
"뭐?"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의 노심을 자극한다. 끝도 없이 뿜어지는 마력은 수천 갈래의 실타래를 넘어, 공간을 가득 채울 듯 넘실거렸다.
실타래는 물레를 거쳐 그물을 지나, 새로운 형태로 빚어진다.
과거와도 다르고, 현재와도 다른 운명의 형태.
운명(運命) 제 3법(法)
노른 스쿨드(Norn Skuld)
미래부지(未來不知)
미래는 알 수 없다.
실타래가 천천히 분해되어 나타나는 건 빛과 같은 형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가 정해져 있고, 현재가 변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란 그런 것이니.
실타래를 벗어난 작은 빛의 알갱이가 자신을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협곡 전체를 뜨겁게 달구던 열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없었다.
"...."
그러나 결과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그란델은 드디어 평정이 깨져 경악 어린 얼굴로 알렌을 바라보았다.
열풍이 사라진다.
식물을 한순간에 시들게 했던 열기도, 거대한 폭발에 일어나야 할 후폭풍도 없었다.
그저 열풍이 빛의 알갱이에 닿는 순간 없어졌다.
그것이 그란델이 이해한 전부였다.
"...과연, 나에게 대항할 수단은 있다는 건가?"
그러나 그 감정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아니, 억지로 잠재웠다는 말이 옳았다. 전투를 하는데 쓸데없는 감정은 판단력만 흔들 뿐이니.
"그것도 없이 왔겠나?"
알렌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했으나, 내심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에 고통을 느꼈다.
익숙한 형태의 고통이었다.
마력 고갈의 전조.
제 3법 미래부지는 료스솔보다 더 많은 마력을 잡아먹었다. 용의 노심이 대화를 하는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건가.'
미래부지는, 운명에 간섭하는 힘이다.
과거규정을 통해 그란델의 마법을 되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본래부터 존재했던 하늘의 열풍은 어떻게 되돌리는가.
그곳의 공기는 몇 시간, 며칠 전으로 되돌린다 해서 없앨 수 있을 만한 열기가 아니었다. 이미 과거부터 존재했을 테니.
그렇기에 제 3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규정이 본래의 형태로 되돌리고, 현재역변이 본래와 다른 운명으로 강제로 이어버린다면, 미래부지는 원래 받아 들였을 운명을 비튼다.
그를 통해 열풍은, 어쩌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미래로 비틀었다.
그게 어떤 원리인지 알렌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역천에 가까웠다.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을 만큼.
'한순간밖에 사용할 수 없다.'
만약 그란델의 마법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텼거나, 상대가 그보다 강한 팔강이었다면 알렌은 곧바로 짓이겨졌을 것이다.
"명색이 7대 마탑의 주인을 상대하는데, 이 정도의 수는 있어야지."
알렌은 간신히 다시 뛰기 시작하는 노심의 마력을 끌어내며 다시 녹청색의 날붙이들을 날렸다.
그란델은 그 공격을 도발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손을 크게 휘저었다.
쾅!
몇 번이나 튕겨 나간 날붙이는 협곡의 바닥과 벽면에 박혀 들었다.
"…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군. 이 나이를 먹고 무시를 당하다니."
기류가, 흐름이 달라진다.
휘이이이-
협곡의 뚫린 벽면을 지나가며 기이한 바람 소리가 알렌의 귓가를 찔렀다.
그란델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금까지 얕본 것을 사죄하도록 하겠네, 후배."
알렌의 대한 명칭을 달리 부르며, 그란델은 싸늘하게 웃었다.
"상대가 어리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되는 법이거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몸을 지지하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행동에 힘입어 하늘의 구름에서부터 거대한 폭풍이 그의 위로 내려앉았다.
쿠우우웅!
"상대가 마법사라면 마땅한 진심을 보이는 것이 합당할 터."
그가 입고 있던 로브가 미친 듯이 팔락거렸고, 노인의 몸에서 믿을 수 없는 기세가 터져 나왔다.
바람이 머무른다.
그의 주위로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바람이 모였다.
7위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리가 진동하며 마력을 뿜어냈고, 그의 감지력에 닿은 외부마력이 호응하며 폭풍을 키웠다.
거대하게 변한 폭풍의 위로 구멍 뚫린 하늘에서는 햇빛이 그의 머리를 내비쳤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하도록 하지. 7위계의 마법사이자 바람의 마탑주로 불리는 그란델일세. 마도여황에게 배움을 받고자 원래 이름은 버렸지."
존재감이 더욱 확장된다.
더욱더 크게.
머물지 않는 바람이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그는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선 고마움을 표현하도록 하겠네. 자네 덕분에 자네 같은 경우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네."
그는 담담히 알렌에게 읊조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수인을 맺었다.
쿠르릉!
고개를 돌리니 하늘의 저편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후배가 가르침을 줬으니, 선배도 마땅히 보답해야 하는 법."
"...."
녹빛의 안광에 소용돌이가 담겼다.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알렌이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고하겠네."
7위계의 자격을 손에 쥔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알렌, 알렌 라인하르트. 내 상대로 인정하겠네. 그러니."
바람은 알렌과 그란델, 아니 그것을 넘어 협곡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벽이 되어 감쌌다.
왜소한 노인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곧 근육으로 가득 찬 중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신역(神域)
십이중북서(十二中北西)
상취재풍천(常吹在風天)
바람이 불었다.
"장난은 끝났다. 어린 마법사야. 살고 싶다면 전력을 다해라, 아니, 네 모든 것을 보여야 할 거다."
바람의 신이 나직이 선고했다.
제123화
쿠우우우웅-
지팡이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오만하게도 왜 7위계 마법사가 신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알렌이 사방을 둘러봤다.
그란델의 의지에 따라 바람이 흐르고, 바람이 모이며, 바람이 고인다.
하늘, 땅 할 것 없이 사방의 모든 곳에 바람이 머물렀다.
거대한 구름 벽에 둘러싸인 신역은 그가 이 공간의 주인임을 완벽히 납득하게 만들었다.
저 압도적인 모습에 절망할 법도 하지만, 도리어 알렌은 미소 지었다.
그는 이미 그란델이 신역을 펼칠 줄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란델을 기습해, 신역을 사용하기도 전에 죽일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공의 여부의 가능성을 넘어서, 알렌은 일부러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왜?'
기회였기 때문이다.
알렌은 단순히 그란델과의 전투를 복수심만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복수도 중요하지, 하지만 그 목적만 가질 필요가 있을까?
'그란델은 노련한 마법사다.'
마탑주의 자리에 올라가기 전까지 많은 전투를 치렀겠지.
그 자리는 단순히 위계가 높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그를 위해 많은 업적과 쌓으며 싸움을 이어왔을 것이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하지만.
'그가 언제까지 전성기를 유지할까.'
보통 위계가 높을수록 젊은 외모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한계에 이르러 늙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다.
일전에 보았던 그늘진 여왕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수십 년을 팔강으로 지냈음에도 체력전에 밀려 자크니르에게 패배 했었지 않나.
지금은 결국 한계를 돌파했지만, 그란델은 그녀 같은 경우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실력을 유지한다고 해도, 한계가 존재하지.'
그는 현재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 반대.
그란델이 삶의 마지막 촛대가 타고 있다면, 알렌은 수많은 촛대 중 하나가 타오르고 있다.
그 차이에 알렌은 판돈을 올렸다.
세상에는 알렌이 알지 못하는 실력자도 즐비하며, 원작과 검은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적이 있었다.
그건 이번 마탑 습격을 통해 구체화될 것이고, 결국 자신의 앞을 막아설 날이 오겠지.
그렇기에, 나서야 했다.
쉴 틈도 없이 달려 나가다 거대한 벽 앞에 짓눌리기 전에, 애써 앞지른 실력의 차가 다시 좁혀지기 전에.
'이번에 새로이 확인하고, 다시 조정해야 한다.'
그것이 알렌이 은밀하게 습격을 감행하지 않고, 그란델과 정면승부를 고집하게 된 이유였다.
지금 스스로를 불에 던져 단단히 제련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철에 부딪혀 박살 날 뿐이었기에.
'그란델, 너는 무슨 답을 들려줄까.'
한동안 녹색의 안광을 내뿜으며 가만히 알렌을 내려다보던 그란델이 입을 열었다.
"왜, 말이 없지? 이제 도망이라도 치고 싶나?"
강한 기세를 내뿜으며 휘몰아치는 바람 속의 중년은 조금 전의 신중한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했다.
알렌은 답하지 않았다.
"생각이 바뀔 만도 하지, 신역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은 이 영역에 대해 무지하거든. 6위계가 운으로 7위계를 이기니, 뭐니 그런 논쟁까지 벌일 정도로."
중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란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젊은 시설로 돌아오며 기개와 자존심, 명예와 오만함을 모두 돌려받은 듯 거침이 없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니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휘스를 납치하고 외딴곳으로 유인까지 하고…, 이제는 감히 홀로 나를 상대하기까지."
그는 마치 젊음의 혈기가 그리운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위험을 느낄 수 있었어."
"...."
"그들은 너 때문에 죽을 거다. 이 일과 관련되어 있든, 관련되어 있지 않든 단지 너와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란델은 이제서야 자신을 습격한 의미를 이해했냐는 듯 친절히 설명했다.
"웃기지도 않지. 네가 사용하는 그 충격파의 근본도 내 마도서에서 나온 것이거늘."
그란델은 마치 그 때문에 알렌이 충격이라도 받으리라 생각한 듯 했다.
"…그것이."
하지만.
"무슨 상관이지?"
지금의 알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이미 각오를 했다. 그따위 말에 내가 흔들릴 줄 알았나?"
알렌은 이미 나아가기로 했다.
그 길에 이제 무엇이 있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알렌이 평온한 표정으로 되받아치자, 그란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탓에 수많은 이들이 죽는다는 말이다.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나? 아니, 네 동생의 서클을 깨부순 이유도 깨닫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군."
그는 고개를 몇 번 젓더니 짧게 답했다.
"됐다. 이제 진정으로 끝내지."
그란델은 시시한 얼굴로 알렌을 쳐다보더니, 양손을 활짝 펼쳤다.
신역 안에서 마법사는 신이라 칭한다.
그것이 그 영역 안의 일일 뿐일지라도, 실재하는 것에는 거짓이 없다.
그렇기에 현존하는 법칙을 뒤틀고, 존재하는 공간을 비틀며, 끝에는 실재하는 현실을 개변한다.
그의 지팡이가 공중에 떠올라 빛을 발함과 동시에 그란델은 펼친 양손을 크게 돌렸다.
쿠우우웅!!
그의 심상에 따른 상상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알렌의 주위에 나타났다.
알렌이 없애버렸던 겨울의 정령, 아니 그 모습을 빌린 듯한 수백의 사슴 떼가 알렌을 노려봤다.
눈에 의지라곤 없는 정령체가 알렌을 본 즉시 살의를 품으며 달려들었다.
사아아아-
눈앞에 보이는 수백의 정령은 그 형체만을 빌릴 뿐인 저 하늘의 극저온의 바람임이 분명했다.
숨결 한 번에 살을 에워싸 부서뜨릴 것 같은 추위가 일제히 알렌을 향해 조여 들었다.
알렌은 물레를 돌렸다. 그로도 모자라 그물로 주위를 방어하며, 동시에 빛의 알갱이가 그를 감싸 안았다.
온도가 내려간다.
숨 한번 내쉴 때마다 하얀 서리가 퍼져나가며 공간을 통째로 얼릴 듯 에워쌌다.
알렌은 어떻게든 방어하며 수십, 수백 개의 녹청색 날붙이를 아무렇게 날렸다.
아무런 의미 없는 이러한 공격에 정령 몇 개체를 뚫고 지나갔으나 곧 정령은 순식간에 되살아나 알렌을 향한 공격을 지속했다.
의미 없는 발버둥.
그란델은 그 모습에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라면, 하늘 저 위의 바람을 빌려오는 것에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동시에 마력도 꽤 소모했어야 겠지. 그러나 신역 안에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바람이 머무는, 바람의 세계였다.
알렌의 발버둥을 지켜보던 그란델이 진중한 얼굴로 수인을 맺으며 영창을 뱉었다. 어찌 되었든 알렌은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고, 그에 맞는 수준의 보답을 주어야 했다.
바람 계통 마법은 약하다.
불과 같은 화력도 없고, 물과 같은 유연함도 없다. 그저 칼바람이나 뿌리며, 폭풍을 흉내 낼 수 있을 뿐.
하지만, 그 바람 계통 마법의 정점에 선 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보여주마, 바람 계통 마법의 극의를."
그의 수인이 완성되며 그란델이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틀라스(?τλα?)
영겁형벌(刑罰永劫)
만천근(滿天斤)
순간적으로 알렌의 머리 위쪽 공간이 물결치더니 주위에 보일 만큼 엄청난 파문을 그리며 압력을 가했다.
주위를 통째로 누르는 압력에 알렌 주위의 협곡이 부서졌고, 이윽고 그 압력은 중앙에 있던 알렌에게 향했다.
산 위와 지상의 기압이 다르고, 지상과 지하의 기압이 다르다.
그것의 원리를 빌려 비틀어낸 자신의 성명 절기.
신역 밖에서는 엄두도 못 낼 마법이 영역 안에서는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었다.
대기가 울리는 것을 보며 그란델은 눈을 감았다.
'이제 원시 회랑이 끝난다면, 남은 이들을 처리….'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이런 느낌인가.]
"...!"
[이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신역을 구축한 자의 영역이군. 내가 도달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광경이야.]
"…뭐라?"
[자신의 의지로 일정 구역의 권한을 강제로 빼앗는다. 그 빼앗은 구역을 어떻게 구축할지는 마법사의 영역이고.]
세계에는 주인이 없으니.
눈을 크게 부릅뜬 그가 경직된 목을 돌렸다.
밖에서의 계획을 세우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유롭게 끼던 팔짱을 다급히 푼 그가 손을 들었다. 오랜 시간 그를 도와주었던 본능이 다급히 경종을 울렸다.
'어떻게,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속에서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일진대…!
수백의 정령이 둘러싼 서리의 세계. 그 중앙에서부터 짓눌린 공간의 중심에서, 검은 인영이 일어섰다.
[그렇다면, 반대도 불가능하지 않겠지.]
알렌이 자리한 중심으로부터 작은 진동이 일었다. 그 진동은 순식간에 신역 전역에서 퍼지더니 무언가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저건…!"
의미 없이 신역 전역에 박혀있던 녹청색의 날붙이, 그것이 진동하며 실타래로 풀렸다.
그란델이 경악했다. 그저 발버둥의 일환으로 알았던 것이, 처음부터 세워놨던 계획이라 말인가.
그러나 그가 무언가 행동하기 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신역 전체를 감싸던 먹구름에 실타래가 박혀 든다. 침식된 먹구름은 이내 거대한 벽이 되어 사방을 단단히 에워쌌다.
바람이 드나들던 협곡은 수백, 수천, 수만의 실타래가 뒤덮여 본래 모습은 찾을 수도 없었다.
검은 먹구름으로 가려진 단절된 공간과 바닥을 가득 채운 실타래가 신역을 구성했다.
마치 거대한 우물 속에 들어온 듯한 광경.
"이, 이건 무엇이냐!"
이미 구축한 신역을 빼앗는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느새 공포심에 물든 그가 미친 듯이 발광했다.
마법을 퍼부으며 발버둥 치는 그의 동작이, 한순간 멈추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결국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물레가 바닥에서 실을 뽑아냈다. 우물의 중앙에서 뽑아낸 실이 짜여지며 거대한 그물이 되었고, 우물의 천장에 빛의 알갱이가 하늘을 틀어막았다.
"...설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란델이 홀린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후우우웅-
일정한 박자에 따라 실이 뽑혀, 엮기고, 다시 풀린다. 끝나지 않을 영원 속에서.
그리하여 빚어지는 건 하나의 흐름이었다.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
"이건 시간 그 자체가 아닌가…."
무수히 이어지는 하나의 법칙.
그제야 알렌이 사용했던 마법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물레를 이용해 마법을 과거로 되돌리며, 그물을 이용해 현재를 비틀고, 뭔지 모를 빛의 알갱이가 미래를 바꾼다.
이러한 마법을, 진정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7위계라는, 마법사의 신역이라는 것을 구축했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이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어찌 인간이 이러한 광경을 창조해낼 수 있단 말인가.
변화 학파조차 실마리 하나 잡지 못했던 것을, 시간 마법의 마력 형태조차 아직 인지 못 한 것이 마법계의 현실인데.
저 어린 마법사가 어찌 미래에도 도달하지 못할 영역을 넘볼 수 있다는 말인가. 몰락한 신 아니, 대신 정도는 되어야…!
"시간이 아니다. 운명이지."
잘못된 생각을 정정하기라도 하듯, 알렌이 물레의 옆에 내려섰다.
무수한 실타래는 그를 환영하는 듯 기쁘게 요동치며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 듯 실타래는 다시 돌아갔고, 알렌의 곁에 남은 건 단 하나의 실 가닥이었다.
그 실은 알렌과 그란델을 제법 깊게 잇고 있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한 것이 현실인데, 어찌 시간이라고 생각하나."
있는 듯 없는 듯 곁을 맴도는 실 가닥을 바라보며 알렌이 말했다.
"그보다, 하나 질문을 하지."
많은 고민을 했다.
1년 사이, 무수히 흔들렸고 제대로 된 결심마저 지키기 힘들었다.
"마탑주 그란델, 너는 네가 한 행동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나?"
"뭐라고?"
처음 결심과 다르게 상황은 계속 달라졌다.
"네가 한 행동 모두를 옳게 생각 하냐고 물었다."
자신의 실수 탓에 죽은 자들을 만났을 때.
욕심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방관해야 할 때.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버릴 자들을 선택해야 했을 때.
자신의 결심에 발목이 잡혀, 지인의 죽음마저 침묵했던 때.
그 끝에는,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어졌다.
"…하, 하하! 이제 와서 묻는 게 고작 그런 것이냐?"
한동안 헛웃음을 터트리던 그란델은 조소를 담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답해주지, 그래. 나는 내 모든 행동을 옳다고 생각한다. 네 동생의 서클을 부순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그런가."
그렇다며 되었다.
네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그 답을 들려주지.
알렌은 담담히, 의지를 담아 선언했다.
[나, 알렌 라인하르트는 세계에 제약한다.]
도시의 처음 들어왔을 때, 마나의 맹세를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떠올리던 것을.
[정의를 시험하기 위한 심판대를.]
불투명한 실타래가 공간을 뚫고 어딘가와 이어진다.
[선악의 무게를 재기 위한 저울을.]
선과 악.
옳고 그름.
정당성과 부당함.
그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면, 그 탓에 행동이 제약이 걸린다면.
[죄인을 처형하기 위한 단두대를.]
그렇다면, 다른 이가 판단하면 될 일이다.
[이곳에서, 티르(Tyr)의 결투를 신청한다.]
자신이 아닌, 세상이.
제124화
공간이 울렸다.
아니, 세상이 호응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마력이 요동치며 신역의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실타래는 무언가를 끌고 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이게, 이게 무슨…."
그란델은 알렌의 선언에 따라 진동하는 신역을 보며 아연실색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살아온 기간이 달랐고, 쌓아 온 시간이 달랐다. 입문한 계통이 다르고, 겪어 온 경험이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나의 맹세라고?"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를 제외한 다른 마탑주라고 해서 의견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력을 가진 자는 세계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언이 모두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 증인과 심판자로서 자리할 뿐,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반응이라니.
"그저 생각을 바꿔 봤을 뿐이다."
알렌은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거대한 저울이 나타났다. 중앙의 공간이 진동하며 거대하게 솟아올랐고, 만들어진 심판대 위로 단두대가 자리했다.
"그저 단순한 맹세로 마력을 제약하는데, 더 특별한 준비를 한다면? 그 이상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 추측대로 이뤄졌고.
알렌의 신역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부족함이 많았다.
자신의 마법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마법의 원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다.
만약 그란델이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난다면.
운명 마법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 더 많은 연구가 선행된다면 알렌은 틀림없이 신역을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것과 다른 더 깔끔한 형태의 신역을.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들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
그 모든 순간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평범한 것으로는 부족했다.
신역은 변하지 않는다.
한 번 구축되면, 마법사와 평생 함께하며 변하지 않고 따로 강해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기에.
알렌의 실력이 늘어날수록 신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아지겠지만, 특별히 신역이 더 강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휘스의 대답과 그란델의 대답 그리고 마나의 맹세로부터 얻은 실마리와 운명 마법의 가능성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내 행동이 세계의 보편적인 선에 해당한다면 강해진다."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없다면, 상대를 약화시키면 된다고.
"내 동기가 일반적인 인식에서, 정당한 사유라 판단되었을 때 강해진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면, 힘을 빌려 오면 된다고.
"목적의 정당화가 미래의 올바른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옳다고 판단한다."
끼익-
저울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축으로 삼고, 앞으로의 행동을 인질 삼는다."
끼익-
저울이 다시 기울었다.
"그렇기에 나는 정당하다."
알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역이 완성되었다.
신역(神域)
우르다르브룬느(Urðarbrunnr)
실타래가 모여져서 만들어지는 건, 시간이 고인 운명의 우물.
선악비의정(善惡非義定)
그 위로 알렌의 진언(盡言)에 따라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정할 저울이 나타나며.
단두처형(斷頭處刑)
머리를 갈라 처형할 단두대가 자리했다.
그것을 위해 복잡한 조건을 달아 그의 신역을 침식했고, 직접 자신의 제약을 선언함으로써 가능성을 중첩시켰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이럴 수가…."
그란델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뒷걸음쳤다.
"…감히 네 행동을 세계가 보좌해 준다고?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 결국, 네 행동을 자기 합리화할 뿐이 아니냐! 그런데, 그걸로 힘을 얻어?"
그란델의 눈이 저울과 심판대 그리고 단두대를 향했다.
그는 알렌이 말한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어란 말이냐.
정의? 보편적인 정의라고?
"네가 무언데 그걸 정하느냐!"
그란델은 인정할 수 없었다.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뜻대로라면 자신을 틀렸다는 게 아닌가.
자신의 삶, 목적, 행동이 틀렸다 평가받는 기분은 끔찍했다.
수십 년이 넘는 삶 속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조차 없었다.
"네가 그랬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그럼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조금씩 힘이 빠져 허약하게 변하는 그란델에게 알렌이 차갑게 비웃었다.
"더 할 말이 있나? 변명할 시간을 주지."
"...."
그란델은 침묵했다.
노련한 마법사인 그는 쉽게 빈틈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란델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치광이를 봤나."
그란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침묵할수록 심장 안쪽에 위치한 고리가 흩어지는 걸 느꼈다.
알렌은 느긋한 웃음을 짓다 그란델이 노려보자, 무엇이 문제냐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지?"
"…정신이 나갔나? 자신의 신역에 금제(禁制)를 가한다고?"
침묵한다면 마력이 흩어진다. 마치 마나의 맹세처럼.
그 끔찍한 상황에 그란델이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알렌은 다시 물었다.
"이제 대답할 마음이 들었나?"
"그래, 무엇이 궁금하지?"
그는 다 포기한 얼굴로 질문했으나, 알렌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묻지, 지금까지 유망주들을 죽인 이유가 뭐지?"
"당연히 그들이 마법사의 금기(禁忌)를 어겼…."
말을 하던 그란델은 이를 악물었다. 거짓을 입에 담아도 마력이 흩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신역의 기능, 그 하나만을 위해 이만한 불이익을 짊어진다고? 다른 가능성을 모조리 내다 버리고?
"죄인, 마지막으로 항변할 기회를 주지."
그 말에 그란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내가 왜 네 동생의 서클을 깨부쉈는지 아느냐!"
"모른다."
"그럼 왜! 다른 이들의 목숨을 취했는지 아느냐!"
"그것도 모른다."
"모두!"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하며 처절함과 집착이 묻어 나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끼익-
저울이 조금 기울었다.
그 모습에 그란델은 혼신의 힘을 짜냈다. 지금 판을 뒤엎지 못한다면, 자신은 끝없이 약해져 결국 죽을 수밖에 없음이 분명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멸망했다!"
다시 저울이 기울었다.
"고대 제국의 이전! 용과 거인의 이전! 그 이전에도 몇 번이고 세상은 멸망했단 말이다!"
끼익-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아니, 모르겠지. 간단하다. 네 동생 같은 천재 때문이지. 그런 천재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이끈다!"
저울이 수평을 되찾아 갔다.
"그 하나 때문에 시대가 특이점에 도달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무엇 때문에? 그건, 그건…."
그가 입을 열려던 때, 알렌의 뒤에서 하얀 책이 열렸다. 아니, 열리려 했다.
허공과 이어져 있던 반투명한 실타래가 책을 휘감았다.
하얀 책은 몇 번이고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그란델의 말은 이어졌다.
"살아 있는 재앙이 강림하기 때문이지."
"…살아 있는 재앙?"
"그렇다!"
끼익-
수평을 찾아간 저울이 다른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름은 모른다. 그저 회색의 괴물이라는 것만 알 뿐. 세상에 알려진 유적이 전부라 생각하나? 천만에!"
그는 누가 들을까 두렵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7위계 마법사의 저런 모습에 알렌의 눈이 침잠되었다.
"마탑에는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자료가 있다 보니,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대로 있으면 세상은 멸망한다고."
그는 그것을 진실로 믿는 듯 표정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지금 세상을 봐라! 시대가 바뀌려는 게 너는 눈에 보이지 않느냐? 나는, 나는 그게 너무 두렵단 말이다!"
알렌은 마탑을 왔을 때 탔던 마차를 떠올렸다. 그러다 엘피스의 축제를 떠올렸고, 미래의 정보를 떠올렸다.
"그렇기에 네 동생의 서클을 부셨다. 마나를 작은 입자로 인식하는 재능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이제 저울은 상당 부분 그란델의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게 전부다! 죽이지 못할 때는 서클을 부셨고, 내가 움직이지 못할 때면 휘스를 시켰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이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란델은 몸에 끓어오르는 힘을 느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도 그를 제약하던 힘이 지금은 그를 돕고 있었다.
자신감을 점차 되찾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알렌이 답했다.
"그게 끝인가?"
"뭐?"
알렌은 무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럼 반론을 시작하지."
첫째, 그의 말에 가장 큰 모순.
"그럼 왜 마도여황을 죽이지 않았나."
뭐라 반론하려던 그란델이 입을 다물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하, 웃기는군. 당대 최강의 마법사를 놔두고서 뭐?"
"…언젠가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의 추한 변명에 저울이 기울었다.
"언제까지?"
"…그건."
끼익-
수평으로 변한 저울의 모습에 그란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 번째, 그 행동이 오직 정의로 행했다 확신할 수 있나?"
"그래! 나는 오직 세상…."
"마탑의 암투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그란델이 멈칫했다
알렌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란델, 당신이 마탑주가 되기 위해 했던 업적의 뒤에 행방불명 된 사람이 꽤 있더군. 그들은 무슨 죄인가?"
어차피 세상을 바꿀 만한 재능이 있던 것도 아닐 텐데?
"그건… 그들이 미래에 재능 있는 마법사를 낳을 수…!"
끼익-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끼익-
자꾸만 기울어 가는 저울에 그란델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란델 너에게 다시 묻지."
그란델은 몇 년은 폭삭 늙은 얼굴로 알렌을 노려보았다.
"너는 아직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
그란델은 핏발 어린 눈으로 저울을 바라봤다.
저울은, 알렌 쪽으로 반 이상이 넘어간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기서 대답을 해 봤자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죽어라!"
그의 모든 마력이 모여 만들어 낸 주먹만 한 강한 충격파가 알렌을 향했다.
제일 처음 마법을 습득하게 도와주었던, 자신이 가장 자주 사용했던 충격파의 최종 모습.
알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게 당신의 답인가."
홀로 솟아 있던 심판대가 진동하며 빛을 뿜어냈고, 알렌을 향하는 공격을 막아 냈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아아아!"
그란델의 실력은 끊임없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알렌의 힘은 늘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렌은 많은 것을 곱씹었다.
나는.
"동생을 구하고 싶었다."
어릴 적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끼익-
나는.
"선한 인물로서 남고 싶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동생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끼익-
나는.
"주변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과거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끼익-
"나는!"
알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진심을 깨닫는 과정은 모두 다르다.
처음에는 율리우스였고, 후에는 죄책감이었으며, 끝에는 바람이었다.
그 때문에 흔들렸고, 고민했으며, 방관했다.
그러나 이제는.
"망설이지 않으리라."
양팔 저울이 완전히 기우는 순간,
알렌이 손을 내렸다.
선악심판(善惡審判) 처형(處刑)
공중에 맴돌던 단두대가 거대한 형상을 그렸다. 새하얀 빛의 천벌이 공간을 갈랐다.
싹둑-
죄인의 목이 잘렸다.
제125화
데구르르-
절망의 찬 표정. 그란델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힘의 차이에 대한 억울함만을 나타냈을 뿐.
거대한 단두대는 처형을 끝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게 돌아왔다.
쿠구구구궁-
원시 회랑의 협곡지대 전체를 감싸 안았던 그란델의 신역 상취재풍천이 끝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그 안의 알렌의 신역 우르다르부룬느, 운명의 우물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머물던 신역을 통째로 집어삼켰던 운명의 우물은 그란델이 목숨을 잃자 산산이 분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욱씬-
"...!"
알렌은 뒤늦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대가를 인식했다.
노심의 마력이 사라진다. 몸을 강대하게 만들던 생명력도 줄어들며, 신체가 쪼그라드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알렌은 가빠지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베스틀라를 땅에 박아 넣었다.
「당신 괜찮아요!? 식은땀이 너무 흐르는데….」
"괜찮…!"
욱씬-
마치 생명력 자체를 쥐어짜내고, 존재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감각에 알렌은 신음했다.
「알렌, 알렌!」
알렌의 몸을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이상했다.
거인의 몸,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몸이라고 하나 그 강고함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또 방금의 전투에서 알렌이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부상을 입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우웁...!"
검에 몸을 기댄 알렌은 커다란 피를 토해내더니,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낫군."
협곡의 풍경은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에 생겨난 구멍과 커다랗게 갈라진 틈으로 인해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음을 방증했고, 여기저기 무너진 곳이 많아 전투의 흔적을 숨기기도 힘들었다.
후우웅-
인위적인 바람이 아닌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바람.
그 차가운 바람에 땀이 식혀지자 알렌은 눈을 감았다.
'너무 무모했나.'
알렌은 천천히 자신의 행동을 반추했다.
전략은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충분했다.
바람 마법은 약하다.
불, 물, 흙, 나무, 철, 바람, 어둠, 빛.
나무 계통 마법은 전투에 치우쳐지지 않아 사실상 제외한다면, 바람의 마탑은 일곱 개의 마탑 중 최약체라고 불러도 좋았다.
그렇기에 그란델에게 실험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그란델 조차 그 약한 바람 마법 계통으로 7위계에 오른 자다.'
그가 익힌 마법이 약하다고 해서, 그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란델은 바람 마법이 것을 이룩할 수 있는지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알렌에게 거대한 폭풍이나 바위를 쪼개는 칼날 바람 같은 마법이 통하지 않았기에 안정적으로 그란델을 상대할 수 있었을 뿐.
그러지 못했더라면 알렌은 베스틀라에게 부탁해 비장의 수단까지 동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란델과의 전투 덕분에 신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다음부터 직접 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저 자신의 행동이 옳다면 강화될 것이고, 옳지 않은 행동이라면 약화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건 운명 신역의 특수성 탓이 컸다.
알렌의 운명 신역 우르다르부룬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고인 곳이다.
그 탓에 마나의 맹세로 제약하는 것을 극한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
인간이 넘봐서는 안 되는 구역을 이용하며, 마음대로 제약을 걸어댄 탓일까, 알렌의 몸에 심한 압박이 가해졌다.
강대한 거인의 몸으로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만약 신역 사용 직후 누군가 기습하기라도 한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알렌은 자신의 마법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그 마법의 가능성을 장악하여 신역을 구축한 것이 아니다 보니 홀로 신역 펼쳐낼 수 없었다.
무조건 다른 이의 신역 위에서 펼쳐야 했다.
'지금도 반쪽짜리인가.'
다른 마법사의 신역을 펼치는 순간 그걸 침식해 역으로 잡아먹는 것.
그것이 알렌이 앞으로 신역을 펼치는 마법사와 그 비슷한 것을 펼치는 괴물들을 죽일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이온 같은 팔강이나 유적 실습에 겪었던 베드르폴니르 같은 괴물이 습격해 온다면….
"…갈 길이 멀군."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검도 게을리 할 수 없겠지.
"베스틀라,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갑자기 뭐에요. 아픈 건 괜찮아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지만, 일어서는 것에는 문제없었다. 협곡 끝까지 감지력을 펼치니 커다란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알렌은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떠나려다, 잠시 협곡의 다른 방향을 살폈다.
정확히는 휘스 아로나를 숨겨둔 장소를.
"…뭐, 프란시스카 양이 이미 데려갔으려나."
그게 약속이었으니.
알렌은 땅을 박찼다. 이미 밖에서는 한참 도시 습격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원시 회랑이 끝날 때까지만 숨는다면 이 소란을 조사할 틈도 없을 것이다.
'그란델의 죽음은 분명 큰 사건이지만….'
만약 마탑주가 죽은 게 한두 명이 아니였다면?
「이제 검술 수련이나 해요. 요즘 맞고 다니는 거 보면 내가 못 봐주겠다니까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알렌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뒤로 그란델의 머리가 바람에 굴러다녔다.
그 강대했던 위세에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 * *
흐흠- 흠- 흐음-
프란시스카는 콧노래가 나오는 걸 참지 않으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기분을 동조한 듯 하얀 촉수가 팔딱거렸고, 몇 번이나 사용한 망치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며 서늘함을 풍겼다.
"웁웁!!"
물론 그 앞에 있는 상대는 절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웁웁!!"
"어머,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이제 곧 당신 차례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망치를 내리쳤다. 여린 여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힘이었다.
콰직-
"...!!"
다시 피가 튀었다.
휘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할아버지는 왜 오지 않는 거지? 그는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 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세상에는 망나니가 너무 많아요. 정말."
그란델의 위세를 믿고 다섯 살 아이의 열의 서클을 부순 막슨.
던전에 같이 가는 수법으로 열셋의 유망주를 죽인 바인.
휘스의 눈에 들고자 같은 동기의 목숨을 바친 리온.
그녀가 잡은 건 이 정도에 불과했지만, 남은 이들도 다른 이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시발, 네크로맨서가 습격했다아아-!
-빨리, 빨리 움직여! 마탑주 님은 어디 있나!
-왜! 비프로스트가 작동하지 않는 거야! 왜!
그녀는 알렌이 그란델과 전투를 시작하는 즉시 그를 데리고 도시로 빠져나왔다.
만약 그녀가 평소라면 성인만 한 자루를 들고 다녔다면 의심을 받았겠지만, 밖의 혼란으로 인해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그 틈을 타 위스의 패거리를 세 명 더 처리했고, 이제 모든 일의 원인마저 처리할 차례.
"정말, 길고 길었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아련한 감정이 실렸다.
부모를 그란델에게 잃고.
뭔지 모를 예언을 쫓아 몇 년을 기다리고.
그때를 위해 실력을 키우고.
알렌을 보고 확신하지 못할 예언을 믿으며.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간단한 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야 했는지…."
프란시스카는 예언이 결국 돌고 돌아 이루어졌음을 실감했다. 아마, 그란델도 알렌의 손에 처리되었으리라.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잘 가요. 휘스 아로나."
자신이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어두운 밀실 사이에서 핏빛의 눈동자가 물기에 번들거렸다.
무거운 망치가 천천히 올라갔다.
"저승에서 그란델을 만나면 꼭 안부 전해주시고요."
그 말에 휘스가 그란델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웁웁웁웁…!!"
그러나 되돌릴 수 없었다. 그가 저지른 수십 년간의 악행은, 기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프란시스카의 안부를 마지막 안부를 마지막으로, 둔기가 허공을 갈랐다.
"다음에는 착하게 살아요."
망치가 떨어졌다.
콰직-
악의 굴레가 하나 더 끊어졌다.
그 뒤로 억눌린 울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 * *
"하이젤!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율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처음에 실종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원작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된 줄 알았다.
그러나, 율리우스가 한 가지 착각한 점이 있다면 원작의 하이젤은 마탑 습격 이전까지 마족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있었지만….
"죽어라, 어린 검사야!"
지금은 자신 덕분에 달라졌다는 것.
스륵-
율리우스가 허리를 굽히며 몸을 비틀었다. 날카롭게 솟은 가시가 어깨를 스쳐 지나가며 율리우스의 팔이 움직였다.
꽈릉!
터져간 번갯불이 어두운 지하수도를 밝히며 마족 하나를 더 불태웠다.
"릴리트 님을 쫓는 이들이 저기 있다!"
"얼른 막아라! 우리들의 희망이다!"
율리우스는 출렁대는 표류물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다면 결국 마족들에게 포위당할 뿐이었다.
'하이젤이 그녀와 합류할 줄이야.'
원작의 하이젤은 여기서 처음으로 마족의 존재를 인식한다.
마탑 도시의 실종사건에 우연히 관여하게 된 그는, 교류회 기간 동안 마족의 꼬리를 쫓아 끝에는 릴리트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저지하고, 오히려 끌어들여 마탑 도시의 습격을 막아낸다.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게 진행되었어야 할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파르델 님! 파르델 님은 어디 있느냐! 왜 마탑주 님이 사라졌….
-빛의 마탑주 바르덴 님과 지금 전투 중이다. 당장 바르덴 님을 도와서….
-아니, 먼저 도시의 언데드들을 막아내는 게 먼저…!
-하지만 비프로스트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면….
도시의 습격은 이미 벌어졌다. 성벽이 없던 페르나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많은 이들이 초반에 죽고 말았다.
원래는 그렇게 릴리트를 끌어들인 하이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불의 마탑주 파르델을 비롯한 배신자들을 빛의 마탑주에게 알린다.
그 덕에 빠르게 비프로스트를 다시 작동시키고, 그 사이 하이젤이 직접 사령왕을 죽였어야 했다.
'내가 미리 가로채서 빛의 마탑주에게는 알렸지만….'
정작 빛의 마탑주가 파르델을 쓰러트릴 동안 언데드의 군세를 일시적으로 막아낼 하이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탓에 피해가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
율리우스는 자신이 사령왕을 상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하이젤도 끝에는 마기의 봉인을 풀어 겨우 사령왕을 죽이는데,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하이젤! 당장 나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꽈르릉!
율리우스는 마구잡이로 뇌전을 뿌려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족들이 그의 위치를 알게 되겠지만, 율리우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멀리 있지 않다고.
마족과 게이트의 존재를 알린 존재에 대해 하이젤이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었다.
"시발, 나오라고 이 새끼야! 내가 진짜 다 죽여야 나올 거냐!"
율리우스는 조급했다.
지금의 습격을 막지 못한다면, 원작 전체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마왕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율리우스 자신도 마지막에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하이젤!"
하이젤은 인류의 편에 서야 했다.
아직 그는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었고, 팔강들이 일의 심각성을 인지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다.
"빨리 나오란…!"
"정말 시끄럽네, 율리우스."
율리우스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일견 경박함을 보이지만, 실상은 얼마의 인간이 죽어 나가든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괴물이.
"하이젤."
"네가 이렇게 행동하라고 나를 떠민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저벅-
"이제 와서 난리를 치는 거지?"
무표정한 얼굴의 하이젤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율리우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서 말해봐라, 무슨 일 때문이지?"
그가, 인간의 삶을 살기를 선택해야 했던 하이젤이.
"…너."
다시 몸에 마기를 두르고 있었다.
하이젤이 어둡게 미소 지었다.
제126화
율리우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왜 마기를 두르고 있냐고.
사실 그런 말을 하기엔, 충격이 너무나 컸다.
율리우스는 원작 주인공 하이젤에 대한 많은 것을 떠올렸다.
하이젤은 전 마왕이다.
하지만, 환생한 후의 그는 인간이기도 했다. 원작에서는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그런 하이젤이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정말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라면 꺼내지도 않았을 마기를 사용한다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율리우스의 목소리가 절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런 율리우스의 모습에도 하이젤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는 무심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이젤은 늘 그랬다.
심각한 상황에도, 위험한 순간에도, 심지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도시가 습격당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익숙할 것이다.
저런 혼란은, 전쟁의 비명과 광기 그리고 전투의 소음은 그와 일평생 함께 하던 것일 테니까.
그게 원작 주인공답기도 했고, 독자들이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마기를 두르고 있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하이젤은 뭘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무슨…!"
그 변명에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열었던 율리우스는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율리우스는 오랜만에 원작을 곱씹었다.
아니, 원작이라기보다는 하이젤이 겪었을 상황과 감정, 그 모든 것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하이젤의 주위를 돌리면서 그사이에 원작 주연과 기연을 얻기 위해 마족의 존재를 미리 알렸지.'
그 후에 하이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상상한다.
그의 원작의 행동을 토대로.
'하이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정이 없다.'
마왕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기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으로 환생했기에 그에 적응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려 했었지.
그 계기를 겪으며 점차 성장하는 곳이 아카데미다.
'만약, 하이젤이 인간에게 정을 붙이기 전에 마족의 존재를 알린 것 때문에….'
그가 인간보다 마족에게 더 신경을 쓰게 됐다면.
인간의 삶을 살고, 인간의 마음을 가지며, 인간의 유대감을 느끼는 그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자신 때문에 틀어졌다면?
점차 실현되는 가정에 율리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 생각했어.'
하이젤은, 아카데미에서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인간'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고정된 것처럼 행동하는 '캐릭터'가 아니….
[도시를 습격한 에스테도르를 막아 내고, 사령왕을 처치하십시오! 제한 시간 : 1 : 44 : 12]
[보상 : 아이에른의 손길(S)]
생각이 깊어지려던 순간, 그것을 끊어 내듯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그 탓에 율리우스는 방금 생각하려던 것을 잊어버렸다. 아니, 그보다 보상에 눈이 더 갔다.
'…몇 년 전 조제법이 손실된 엘릭서잖아.' 저것만 있다면, 죽기 직전의 시체도 아니 죽은 지 5분이 넘어가지 않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퀘스트 시간에 정신 차린 그는 뭐 하냐는 듯 빤히 보는 하이젤에게 입을 열었다.
"…하이젤, 그럼 너는 뭘 하고 싶은 건데?"
"무엇을…."
그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뜬 하이젤이 생각에 잠겼다.
율리우스는 그 틈을 꿰뚫듯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인간계에 살아야 하잖아. 지금처럼 습격이 이어진다면, 마법사 전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다고."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최대한 이성적인 답을, 하이젤이 감정에 물드는 때는 오직 과거를 기억할 때뿐이다.
그렇다면,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질 삼아서.
"에스테도르의 목적인 마왕의 강림, 하이젤 너도 알다시피 마왕이 다시 이곳에 쳐들어온다면 너희도 무사하지 않을 거야."
"흠…, 맞는 말이야."
한동안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런데."
하이젤의 목소리가 울린다.
마기로 뒤덮인 그의 몸에서 마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율리우스가 안심한 순간, 그의 등골이 오싹해지며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불쾌한 눈으로 볼 거지?"
율리우스는 남은 마력을 생각지 않고 뇌전을 내뿜었다.
꽈르릉!
율리우스는 뒤로 튕겨 나가는 몸을 억지로 바로 세웠다.
그가 고개를 들자, 하이젤은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차갑게 그를 내려다봤다.
"…뭐라고?"
"언제까지 그런 눈으로 볼 거냐고 물었다."
율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매만졌다가, 자신의 눈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언제 무지개 마안이 발동된 거지?'
눈을 깜빡이자 다시 하이젤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것과 하얀색이 뒤섞였다가 뒤늦게 강한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그의 몸이.
하이젤과 눈을 마주치자, 그는 곧바로 무지개 마안을 껐다.
"모르는 모양이야. 뭐, 됐어. 내가 말해 봤자 이미 늦은 것 같으니."
잠시 율리우스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본 그는 몸을 돌렸다.
검은 하수구의 어둠 그 너머로 향하는 그의 몸이 그림자에 파묻히며, 하이젤의 목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네 말대로 마왕이 나타나면 우리도 손해니, 여기서는 더 이상 나서지 않지."
"…그 말은?"
하이젤이 뭘 또 묻냐는 듯 귀찮게 답했다.
"말 그대로다. 여기서 혼란을 더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앞에 나서지도 않을 거야."
작은 목소리가 그만 물으라는 듯 짜증을 더했다.
잠시 사령왕을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으려던 율리우스는, 하이젤의 근처로 다가오는 수많은 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하."
내 탓인가?
아니, 이건 자신의 탓이 아니다.
자문하는 동시에 떠오르는 자답에 율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적인 놈."
많은 전투와 전쟁을 하이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보기에는 마탑 도시의 전력으로 이번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계산과 판단의 사이에는 희생될 인명과 줄어든 전력의 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
'어떻게든 사령왕을 멈추기만 한다면 될 것 같은데….'
남은 언데드들은 마탑 도시의 마법사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불타는 무지개, 비프로스트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배신자들도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제압해 낼 수 있겠지.
그러니 사령왕을 잠시 맡아 두기만 한다면, 원작의 비틀림을 최대한 줄일 수 을 것이다.
"…후, 최대한 버티기만 해야지."
자신의 뇌전에 깃든 정화 속성과 그것을 더 강화하는 유니콘의 뿔.
어쩌면 버티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 *
도시 전역을 뒤덮을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부딪쳤다.
콰앙-
"파르델,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배신할 줄이야."
"크흐… 눈치는 전부터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의외로군."
거대한 불의 구가 도시에 떨어진다.
바르덴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빛 한 줄기가 화염 구를 터트리며 공격을 막아 냈다.
"그 성급한 성정으로 사고를 칠 줄 알았다만, 몇십 년 동안 지내던 도시까지 파괴할 정도였습니까?"
"바르덴, 너는 모르겠지. 너같이 젊은 놈은 모른단 말이다. 위로 올라갈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게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고작 그것 때문…."
"고작이 아니다!"
불의 꽃이 도시의 하늘을 수놓았다.
"초월을 목전에 둔 자가 그 경계를 내딛지 못하는 것이 고작이라? 하하, 역시 내가 옳았군."
아름답게 퍼져 나가는 꽃은 그 겉모습과 다르게 서늘한 죽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다시 도시에 떨어지는 공격을 막은 바르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의 내용이 맞았나.'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마탑주들 중 배신자가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로 간의 균열을 일으키려는 수작이거나 실제 배신자가 있더라도 몇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둠과 물의 마탑까지 배신할 줄이야."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겠나?"
바르덴의 허탈한 음색에 파르델은 포악한 웃음을 지으며 도시의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도시로 들어오던 언데드의 물결을 끊어 내기 위해 나섰던 흙과 철의 마탑주를 어둠과 물의 마탑주가 막아 내고 있었다.
"쯧, 빙결 학파가 독립할 때 조용하다 싶더니만. 어둠은 그리 놀랍지도 않군."
불, 물, 흙, 철, 바람, 어둠, 빛.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이 원시 회랑에 있으니 그를 제외한다면 여섯 중 반절이 배신한 것이다.
언데드는 철저히 사령 마법의 지배 아래에 있다.
사령왕만 제거한다면 이번 일의 절반은 해결되는 것인데.
그 움직임을 봉쇄해 버리자니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싸우자는 겁니까?"
"이미 늦었는데 무엇을 망설인다고. 바르덴 항상 네 실력이 궁금했다. 빛의 마탑주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공기가 끓어올랐다.
그런 감상이 들 정도로 솟아오른 열기가 세상을 불태울 듯 이글거렸다. 적색의 화염이 맹렬히 퍼져 나가며 거대한 불의 영역을 만들었다.
신역을 펼치려는 그 모습에 바르덴 또한 전신을 빛에 물들였다.
여기까지 왔다면 멈출 수 없다.
천공을 내리쬐는 빛이 한순간에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빛의 연못이 만들어지며 그 가운데 바르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겠지!"
마탑주 중 전투력 1, 2순위를 다투는 두 명이 전투를 시작했다.
* * *
지하수로를 빠져나오고 율리우스가 가장 먼저 본 광경은 경천동지한 마력의 파동이었다.
도시 전역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파동은 아마 마탑주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하겠지.
세상을 다 파괴해 버릴 듯한 기세가 연이어 부딪치자, 율리우스는 자신의 실력에 부족함을 느꼈다.
'…나도 어느 정도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마탑주 하나 쓰러트릴 수 없다.
그 사실에 그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열심히 노력해 왔으나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얼른 그 장소에 가야겠어.'
지금껏 원작에서도 위험한 장소라 언급했기에 자제했지만, 눈앞의 장면을 보니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그 장소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전에.
'사령왕을 막아야 한다.'
원작이 비틀린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이걸로 마왕이 더욱 빠르게 강림한다면?
끔찍했다.
율리우스는 망가진 은신자의 망토를 걸쳤다.
그의 기척이 희미해지며, 산 자의 생기를 느끼고 달려오던 언데드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그 순간 땅을 박찼다.
다른 언데드들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았다.
전투를 피해 도시를 빠져나가기 직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우스 님!"
움찔-
벌써 들켰다고? 아니, 내 이름은 어떻게….
은신자의 망토가 정말 망가졌나 싶어 당황하던 그때, 그의 앞으로 나타난 것은 레이나였다.
"…네가 어떻게."
놀란 얼굴의 율리우스에게 레이나는 평소처럼 미소 지었다.
"공자님의 시녀니까요."
뭐라 할 말을 잃은 그에게 그녀는 무언가를 건넸다.
그녀의 손에 든 것은 그가 잠시 그녀에게 맡겨 놨던 행운의 토끼 반지였다.
다만, 그녀에게 맡겼을 때 C급에 불과했던 것과 다르게 겉이 검게 변색되었고, 반지의 안으로 읽을 수 없는 글귀가 추가되어 있었다.
[악운의 토끼 반지(A)]
최악보다 차악을.
나쁜 운수에 벗어날 일말의 기회를.
효과를 본 율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 반지는 유물이 아니다.
아니, 유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강화하는 건 힘들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가지고 가세요. 이것 때문에 찾아왔으니까요."
율리우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지를 끼웠다.
'이 반지가 있다면 막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겠지.'
레이나가 어떻게 아티펙트를 강화했는지 궁금했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공자님, 조심하세요."
율리우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위기를 벗어날 기회가 생겼다.
율리우스를 배웅하던 레이나는 그가 사라지자 완전히 표정이 바뀌었다.
"…늦을 뻔했네요."
조직에서 다급히 그녀에게 반지를 그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카샤 님께서 급히 큰 변수가 생겨났다며 반지의 보조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생겨난 지시였다.
전투의 소음이 더욱 진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죽음의 파도가 들이닥치는 언데드의 중앙에서 번개가 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시작되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율리우스를 맞이하는 일이다.
평소처럼.
그가 자신에게 더욱 익숙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