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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4)

"으음, 숲속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해서 데려왔단 말이지. 엘리카하고 그 아이들이."

"예, 젊은 남자입니다. 스스로 말하기로는 그냥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여행자라고 합니다."

"어쩌다 그리 됐다던가?"

"모르겠습니다.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없다고 하는데, 조금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어서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제의 설명에 수도원장 디호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거동도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 수도원에서 머물고 싶다고 합니다만······."

"그러면 별 수 없지.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를 봐주게. 외지인이니 조금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기만 하게나."

선선한 수락에 사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신실한 그가 다치고 어려운 이를 그냥 내쳐버릴 리가 없었으니.

사제가 책상에 한가득 쌓인 서류 더미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보다 조금 쉬엄쉬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장님. 건강을 해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번에 다른 교단 지부로 떠나는 사제와 성기사들도 그렇고, 이것저것 바쁜 일들이 겹친 시기라 근래 업무에만 파묻혀있는 원장이었다.

걱정 섞인 말에 디호드가 싱긋 웃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슨. 그리고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 마음 쓰지 말게나."

사제가 바깥으로 나가고, 다시 홀로 남은 디호드는 하고 있던 일을 계속했다.

"······."

한참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그가 힐끔 책상 아래의 수납장을 내려다봤다.

자물쇠로 잠겨있는 가장 밑쪽의 칸.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꺼내든 그가 자물쇠를 풀고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검은빛의 보석이 들어있었다.

"흐음······."

보석을 집어든 디호드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표정에는 방금까지의 온화함은 어디에도 없고 차가운 무정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방으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그는 보석을 서랍에 도로 집어넣고서 얼굴을 폈다. 이내 노크가 울렸다.

"들어오게."

다시 방문이 열리고 다른 사제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예, 원장님. 전에 말씀하신 경전 정리와 관련해서 확인해주셔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 많이 바쁘신지요?"

디호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괜찮네. 이리로 가지고 오게."

***

사정을 설명하고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 수도원에서 머무르고 싶다고 하자 흔쾌한 허락이 돌아왔다.

나는 그날 하루와 다음날을 거의 침대에만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사제들이 찾아와서 회복 마법을 써주기는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초재생으로도 이렇게까지 회복이 더딘 걸 보면 디트로데미얀의 마력이 정말 지독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물론 원마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낸 것치고 이 정도면 굉장히 싸게 먹힌 것이었지만 말이다.

'진짜 팔자 한번 좋게 됐네.'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처지가 이러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움직이는 일은 조금이라도 몸을 풀어주기 위해 가끔 수도원 마당으로 나가는 일이 전부였다.

또 온종일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근질거림을 견디는 게 고역이기도 했고.

여기가 병원은 아니지만 마치 병원에서 입원해서 요양이라도 하는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

의자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마당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엘리카와 톰······ 그리고 헤런이었나.

세 사람도 나를 발견했지만 거리가 떨어져있었기에 딱히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헤런의 손에는 책이, 그리고 엘리카와 톰의 손에는 각각 목검이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은 짧게 몸을 풀고는 곧 서로 검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대련인가.'

저들 말고 몇몇 다른 아이들도 마당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건 봤었다. 장래에 성기사라도 되고 싶은 건가.

고작 하루지만, 그동안 살펴본 분위기로는 이곳 수도원은 아이들에게는 그리 엄격한 생활과 규율을 강요하지 않는 듯했다.

헤런은 근처의 바위에 기대앉아 책을 읽었고 톰과 엘리카는 치열하게 검을 부딪혔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련을 지켜봤다.

[Lv. 11]

레벨은 엘리카라는 소녀가 소년 둘보다 더 높았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력도 느껴지는 게 유일하게 마력을 쌓는 법도 익힌 모양이었다.

전부 리곤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리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리곤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수준들이었지만 녀석은 애초에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어디 명문가의 자제처럼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저 정도면 상당한 레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타악!

얼마 지나지 않아 톰의 검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검을 놓친 그가 요란스레 손을 파닥이며 투덜거렸다.

"야, 제발 살살 좀 하자. 손아귀 찢어질 뻔했잖아."

그에 엘리카가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헤런을 돌아봤다.

"아직 몸 덜 풀렸는데, 너도 한판 할래?"

"사양할게."

그들은 잠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근처로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뭔 볼일인가 싶은데 톰이 먼저 힘차게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움직이기 힘들다면서 여기엔 왜 나와서 있으세요?"

엘리카의 물음에 짧게 대꾸했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 나왔다."

흐음, 콧소리를 내뱉은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괜한 의심을 받기 싫으면 너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저씨는 수상한 외지인이니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딱히 돌아다닌 적도 없다."

고작해야 마당에 나와서 앉아있던 게 전부인데 무슨.

그리고 바깥으로 나오면 항상 주위에 있는 사제나 성기사들의 눈길을 받고 있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더 상대하면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그만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아, 잠깐만."

갑자기 엘리카가 손을 뻗어서 내 어깨를 붙잡고 당겼다. 순간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 억센 손길도 아니었지만 걷는 게 고작일 정도로 몸에 힘이 없었던 탓이다.

터억.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나를 엘리카가 다급히 붙잡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몸이 쑤시는데 등을 타고 찡 격통이 올라왔다.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받친 등에서 손을 뗐다.

"······별로 힘도 안 줬는데. 아무리 그래도 뭐가 이리 허약하세요?"

"야, 엘리카."

헤런이 뻔뻔하게 말하는 그녀를 말렸다.

나는 쯧 혀를 차고서 물었다.

"뭐냐?"

"혹시나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는 깊이 들어가지 마시라고요. 거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거든요."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유를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엘리카, 톰!"

수도원 건물이 있는 쪽에서 한 수녀가 소리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두 사람이 다급한 얼굴이 되서는 곧장 반대편으로 뛰어 도망쳤다. 헤런도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뒤를 따랐다.

곧 가까이 다가온 수녀가 숨을 고르며 내게 물었다.

"혹시 저 아이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던가요?"

"검술 수련을 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들이 도망친 방향으로 다시 뛰어갔다.

멀어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다른 할 일이 있는데 팽개쳐두고 농땡이를 부린 모양이었다.

***

수도원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회복에만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전히 움직이는 데에는 뻐근함이 있어도 몸을 지속적으로 찌르는 고통은 거의 사라졌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서 수도원 내부를 돌아다니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앞쪽에서 바닥에 떨어진 책과 서류들을 줍고 있는 사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인 사제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거들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에단 씨. 감사합니다."

그가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전보다는 방에서 자주 나오시는 것 같습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셨는지요?"

"예, 편의를 봐주신 덕분에."

나는 떨어진 책들을 주워들며 자연스레 제목들을 훑었다. 아무래도 성경 같은 책인 모양이었다.

"이걸 혼자서 다 옮기고 계셨던 겁니까?"

"하하, 예. 무리해서 한 번에 가져가려다 보니 그만······."

뭘 하려고 이 많은 책을 옮기고 있는 건가 궁금증이 솟아오르는데,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그가 설명했다.

"경전을 필사해야 되는데 그 전에 먼저 정리해야 될 것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경전 필사?

순간 그런 짓을 왜 하나 싶었다가 바로 이해했다.

이 세계에 인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찍어내려면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써야 할 테니 말이다.

'아니면 뭐 활자판 같은 것도 있으려나.'

나는 책들을 전부 줍고 종이 서류도 집어들며 내용을 슥 훑었다.

대충 훑어보니 경전의 구절들을 정리한 내용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로 실존하는 세계다. 그렇기에 새삼 갑자기 흥미가 솟아올랐다.

잠깐 종이에 정리된 구절들을 읽는데 옆에서 책을 모두 정리한 테인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에단 씨, 혹시 성어를 읽을 수 있으신 겁니까?"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말에 나는 기억 저편에 있었던 라사의 설정을 하나 떠올렸다.

'교단에서는 대륙공용어와 별개로 성어도 함께 사용했었지.'

교단은 오래 전부터 사용한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성어였다.

기본적으로 대륙 공용어를 베이스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훨씬 더 난해하고 까다롭다는 문자.

그래서 그런 성어를 완전히 숙달하는 게 성직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가장 큰 난관 중에 하나라고 했던가.

'······난 왜 잘 읽히지?'

나는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힌 내용들을 훑어봤다.

다시 살펴보니 대륙 공용어와는 유사하지만 분명히 다르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별 문제가 없이 술술 잘 읽혔다.

이것도 기본적으로 대륙 공용어가 바탕이니까 해석이 되는 건가?

"예,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대답에 테인이 눈에 이채를 띄고서 날 부담스레 쳐다봤다.

"성어를 읽을 수 있으시다니, 혹시 에단 씨께서는······."

그제야 나는 쓸데없는 오해를 샀음을 깨달았다.

성어는 성직자가 아니고서야 익힐 일이 없는 문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성어를······?"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익혔을 뿐입니다. 제가 고대어라든가 이런저런 문자들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해서."

"아, 그러신 거였군요."

테인이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전히 눈빛에는 적잖은 호의가 담겨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정말 노력이 대단하십니다. 총명함을 타고난 수재들도 성어를 완전히 익히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리는데, 그것을 신앙심이 아닌 단순히 탐구심으로 익히셨다니 말입니다."

조우 (5)

"아닙니다. 뭘 대단할 게 있겠습니까."

굳이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성어를 익혔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진심으로 꽤나 기꺼운 듯했다.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서류를 계속 훑어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혹시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

"이 필사해야 할 경전들을 정리하는 일 말입니다. 서류를 보면 시간만 많이 걸린다 뿐이지, 특별히 어려울 부분은 없는 간단한 일인 것 같은데."

대충 보면 단순히 경전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성어만 읽을 수 있다면 딱히 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을 작업이었다.

테인이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에단 씨에게 그걸 부탁드리기는······."

"그간 편의를 봐주셨는데 이 정도가 어렵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정말 해보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것이기도 하니 괜찮습니다."

내 하루 일과는 침대에 누워있거나 수도원 마당에서 풍경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말한 대로 수도원에 큰 빚을 졌는데 이 정도 도움쯤이야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고.

"제가 분량을 반 나눠 맡아서 정리하면 사제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만 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테인은 잠시 고민에 잠긴 기색이었다.

하지만 눈 밑에 희미하게 다크써클마저 보이는 게,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거부할 수 없는 도움의 손길인 모양이었다.

그가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

나는 테인에게 건네받은 경전들과 종이와 펜을 챙겨서 방으로 돌아왔다.

방 한편에 있는 책상에 앉아 자리를 잡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한쪽에 경전들을 펼쳐두고, 한쪽에는 종이를 놓고서 잉크를 묻힌 펜을 끄적였다.

'길어도 내일 안에는 끝나겠네.'

구절을 찾고, 분류하여 기록하고.

단순 노동에 가까운 작업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지루하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경전의 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도 나름 있었다.

어느새 종이 한 면을 빼곡히 채운 나는 잠시 휴식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신이라······.'

지구에도 수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종교라고 함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들은 정말로 그 실체가 명확히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섬기는 것이었으니까.

빛의 신, 라엘.

라사 세계관에 만인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교단은 그를 숭배하는 라엘 교단뿐이다.

또한 세인테아의 국교이기도 했는데, 적어도 세인테아의 영역 내에서는 라엘을 믿지 않는 이를 찾는 게 힘들 정도였다.

과거에 비해 라엘 교의 세가 훨씬 강성해지고, 믿는 신의 존재에 더욱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게 된 것에는 명확한 이유와 기점이 존재했다.

마족 세력의 대침공, 그리고 성검의 출현.

파멸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 초월적인 존재는 한 자루 검으로 인류에게 기적을 내렸다.

그리고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단 한 명의 인간은 초월적인 힘으로 대륙에 뻗친 암운을 걷어냈고, 인류는 끝내 마왕을 봉인하고 마족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용사.'

현 성검의 주인, 만인에게 위대한 영웅으로서 칭송받는 존재.

그녀는 공식적인 설정상 이 라사 세계관의 최강자였다.

바로 그런 용사의 존재가 현재 4대 세력 간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대한 칼데릭이 세인테아를 침공하지 않고 어느 정도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그런 칼데릭보다도 우위인 전력을 지닌 마족 세력이 날뛰지 못하는 것도 전부 아직 용사가 건재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용사가 사라지면 대륙에 다시금 거대한 혼돈이 찾아올 건 예정된 미래였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마왕과의 최후의 전투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입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괜히 또 지금 처지가 우습게 느껴졌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때가 아닌데 뭔 팔자 좋게 경전 정리나 하고 있는 건지.

한시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고서 아셸을 찾아가야 하는데······.

벌컥.

그때 방으로 인기척이 가까워지더니,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저녁 식사요."

······엘리카였다.

입에 빵을 문 채로 있는 그녀가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고는 책상으로 다가와서 손에 들고 있는 식사를 턱 내려놨다.

거침없이 내려놔서 수프 국물이 튈 뻔했기에 나는 재빨리 종이를 치웠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네가?"

원래 매번 식사를 가져다주던 수녀가 한 명 따로 있었는데, 뜬금없이 왜 이 녀석이 왔나 싶었다.

엘리카가 씹고 있던 빵을 마저 꿀꺽 삼키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대신 갖다달라고 붙잡혀서요. 저도 귀찮거든요. 아무튼 맛있게 드세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경전은 한가득 쌓아놓고서 뭘 하세요?"

그녀의 시선이 경전과 내가 기록하고 있는 종이로 향했다.

"아, 이거 그거죠? 필사할 경전들 정리하는 일. 얼마 전부터 사제님들 몇몇이서 열심히 하시던데."

"그래."

"이걸 왜 아저씨가 하고 있어요?"

"신세도 지고 있으니 그냥 돕는 거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성어는 읽을 수 있긴 해요?"

"그래."

"어떻게요? 아저씨도 성직자였어요?"

"아니다."

"그럼 어떻게 읽는 건데요?"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따로 공부했다. 이제 그만 좀 나가줬으면 고맙겠는데."

귀찮게 굴지 말고 좀 나가라고.

하지만 그녀는 어디서 또 쓸데없는 흥미가 인 건지, 나가지 않고 계속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아저씨."

"······?"

"진짜로 끝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숲에서 왜 쓰러져있던 건지."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날 마주칠 때마다 아직도 끈질기게 그 일에 대해서 물어오곤 했다.

"기억이 없다고 했을 텐데, 몇 번을 말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거 거짓말이잖아요."

"진실이다. 너야말로 대체 언제까지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냐?"

그녀가 팔짱을 꼈다.

"제가 궁금한 건 못 참아서요. 아저씨는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요. 피를 그렇게 한가득 흘렸는데 몸에 상처 하나 없었고, 옷은 아무것도 안 걸치고 알몸으로 있고."

피를 한가득 흘렸는데 상처가 없다는 건 초재생 때문이었다.

특히 그 부분에 꽂혀서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숨기고 있는 건 맞지만.'

당연히 말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아무리 말해봐야 들어먹지 않을 테니까.

내 반응에 엘리카가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 기록하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침묵이 감돌다가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대륙 공용어는 놔두고 이런 문자는 도대체 왜 따로 쓰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쓸데없이 복잡해서 익히는 데에 시간만 오래 걸리고, 아무런 실용성도 없잖아요."

나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성직자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

"전 아직 세례 안 받았으니까 정식으로 교인은 아니에요."

"어쨌든 장래에는 될 게 아니냐. 너는 성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뭐라고요? 누가 그래요?"

"가끔 네가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던데."

그녀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서는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거든요. 톰 그 자식이 멋대로 지껄이는 이야기를 왜 아저씨도 멋대로 믿고 있어요?"

"믿은 게 아니라 물어본 거다."

"아니라고요. 뭐······ 그렇다고 해도 성기사는 아니더라도 교인이 되긴 하겠죠. 수도원을 떠나서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냥 먹고살기 위해 교인이 될 거라는 말이었다.

신앙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에 뭐 이런 녀석이 있나 싶은데, 이어진 말은 더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신 안 믿어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슬슬 나도 호기심이 들었기에 물었다.

"신을 안 믿는다니······ 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거냐?"

엘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요. 용사가 빛의 신에게 성검을 내려받은 건 사실이잖아요."

"그렇지."

"단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신이 인류를 구원했지만,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어째서 신은 그만큼이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도움을 베풀어준 건가요?"

······그야 나도 모르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온 적은 없었으니까.

"만약에 신이 정말 전능한 능력이 있고, 아무런 희생 없이 얼마든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음에도 그런 거라면, 저는 그런 존재에게 무엇에서 숭고함과 경외심을 느껴야 하는 건가요? 이유도 모른 채 어쨌든 끝내 구원은 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 뿐인가요?"

그녀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제님하고 수녀님들은 매번 같은 말을 하시더라고요. 신께서는 단지 시련을 내려주시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라고."

"······."

"그런데 그게 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인가요? 시련을 극복하면 죽은 사람들을 되살려주기라도 하나요? 이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따위 게 전부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에요."

조곤조곤하지만 이제는 약간의 분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내 시선을 받은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멋쩍은 듯 화제를 돌렸다.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는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딱히 별 생각 없다."

라사 세계관의 유일신, 용사에게 성검을 내려준 초월자.

그리고 이 세계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해답을 줄 수도 있을 열쇠.

빛의 신 라엘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 정도뿐이었다.

"뭐예요. 나는 성심껏 말했더니만 그 성의 없는 답은."

엘리카가 입을 삐죽였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 같은 외지인한테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거냐?"

"뭐가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

"그래."

"외지인이니까 하는 거죠. 그럼 사제님들 면전에 대고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그건 또 그렇네.

"아니면 뭐,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할 거예요?"

"그럴 리가."

"그리고 뭐, 말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런 말을 대놓고 한 적은 없어도, 제 성격이 삐뚤어진 건 수도원의 사람들 대부분이 알아요."

할 이야기는 전부 끝난 듯 그녀가 책상 모서리에 기댔던 허리를 뗐다.

"아무튼 식사 맛있게 드세요. 별 쓰잘데기도 없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긴 했네요."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잊고 있었던 게 번뜩 떠올라서 그녀에게 물었다.

"저번에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는 깊게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던 것 말이다. 이유가 뭐냐?"

"아······ 그거요?"

그녀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사실 저도 잘은 몰라요. 숲 깊은 곳에 괴물이 산다고 하더라고요."

"······괴물?"

"예전에 사제님하고 성기사님들이 여러 차례 숲에서 흔적도 없이 실종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숲 깊은 곳으로는 아무도 안 들어갈 뿐이에요."

조우 (6)

수도원 뒷편의 숲은 내가 쓰러져있던 곳과는 다른 방향에 위치한 숲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숲이었는데, 뜬금없이 괴물이라니.

"뭐······ 흉포한 몬스터가 산다는 거냐?"

"그건 모르죠.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괴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거지?"

"방금 말했잖아요. 수도원 사람들이 실종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그러니 다들 정체불명의 괴물의 소행이라고 하는 거죠."

그냥 소문이라는 건가.

하기야, 사람이 여럿이나 실종됐으면 그런 식으로 여겨질 법도 했다.

"그래서 한 번은 대대적인 수색을 한 적도 있었는데, 결국 작은 흔적 하나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숲에 들어간 사람마다 전부 실종된 건가?"

"아뇨, 몇몇 사람만요. 그 전에는 별 문제없이 잘 지나다녔대요. 일이 몇 번 터지고 난 후에야 거의 들어가지 않게 된 거고."

엘리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기도 전의 예전 일이라 자세히는 몰라요. 솔직히 저도 괴물 같은 건 안 믿지만요."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난 걸 보면 숲에 무언가가 있긴 있나 보군."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튼 들어가서 좋을 게 없으니까, 나중에 떠날 때 굳이 그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럼 전 나가볼게요. 수고하세요."

나는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고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책상에 놓인 식사로 시선을 돌렸다.

식사부터 하기 위해 종이와 책들을 한쪽에 밀어놓고 수저를 집어들었다.

'그나저나······.'

방금 전에 엘리카가 했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그녀에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이 수도원의 아이들 대부분은 갈 곳이 없어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긴 했지만.

'마족한테 가족을 잃기라도 했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마족들은 대놓고 날뛰지 않는다 뿐이지, 알게 모르게 대륙 곳곳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직접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고, 계약으로 많은 이들을 타락시키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마의 씨앗.'

마족들은 마왕의 부활을 꿈꾼다.

다시 그 괴물을 부활시켜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씨를 말리고, 오직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놈들이 은밀하게 행하고 있는 일.

그것이 바로 '마의 씨앗'을 품은 이들을 찾는 것이었다.

용사와의 마지막 결전, 성검에 의해 존재가 완전히 소멸당한 위기에 처한 마왕은 권능을 사용해 자신의 영혼을 조각내어 온 대륙으로 퍼뜨렸다.

그 영혼 조각, 마의 씨앗을 품게 된 이들이 바로 마왕의 부활을 앞당길 수 있는 열쇠이자 제물이었다.

현재 마족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와 대륙 곳곳을 은밀히 떠돌며 그런 씨앗을 품은 이들을 찾고 있었다.

때문에 일단 계승자를 찾는 게 우선이긴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사람들도 어떻게든 찾아서 확보해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상념을 마치고 수프를 떠먹었다.

누가 요리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식사는 매번 맛있었다.

***

날이 밝고, 마당으로 나온 엘리카와 헤런은 이른 아침부터 먼저 나와있는 톰을 발견했다.

"왔냐?"

톰이 휘두르고 있던 목검을 멈추고서 두 사람을 반겼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훈련하기라도 한 건지 벌써 몸에 땀과 열기가 한가득이었다.

"아침부터 기운도 좋다. 언제 일어났냐?"

"한 2시간 전쯤에? 어우, 이제 좀 쉬어야겠다."

톰이 목검을 내던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왜 이렇게 열심인지는 두 사람도 이유를 알고 있었다.

헤런이 타이르듯 말했다.

"무작정 수련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컨디션 관리도 해야지."

로벨지오 수도원은 세인테아 남동부 변경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수도원이었다.

애초에 웬만한 규모의 수도원이 아니고서야 성기사 정도의 전력들이 상주하는 일은 없었다.

때문에 관리하고 있는 아이들도 많은 만큼 그들 중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을 뽑아서 제대로 육성하기도 했는데, 그 선별 시험이 이제 앞으로 일주일도 남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톰은 견습 성기사가 되기 위해 이번 선별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야,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컨디션 관리씩이나."

팔짱을 끼고 있던 엘리카가 코웃음을 쳤다.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진심으로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놀릴 뿐이라는 건 톰도 알고 있었기에, 피식 웃고 말았다.

"대련이라도 할까?"

"좋지. 근데 이제 시간 거의 다 됐으니까 예배 드리고 아침부터 먹고 하자."

성직자들의 공간인 만큼 매일 아침마다 모여서 올리는 예배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규율이었다.

엘리카가 귀찮다는 표정을 한 번 짓고는 톰이 내던진 목검을 집어들었다.

허공에 대고 검을 휘휘 젓는 그녀를 보다가 톰이 물었다.

"그런데 넌 진짜로 안 할 거냐?"

"뭘?"

"뭐기는, 성기사 말이야. 네 실력이면 분명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엘리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안 한다고."

"아니······ 난 진짜로 이해가 안 되는 게 그러면서 검술 수련은 왜 하는 건데? 야, 헤런. 너는 얘가 이해되냐? 응?"

헤런은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이렇게 까불거리다가 또 얻어터지는 게 뻔한 패턴이고, 자신은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예상대로 결국 목검의 면으로 등짝 한 대를 얻어맞고 마는 톰이었다.

"아, 아파!"

"작작 좀 해. 검이야 그냥 심심하니까 휘두르는 거고, 난 그냥 사제가 될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되냐?"

"웃기고 있네, 툭하면 폭력만 휘두르는 게 사제는 무슨! 말 안 듣는 애 있을 때마다 쥐어패서 계도라도 하게?"

얼얼한 등을 싹싹 비비면서도 깝죽대던 톰은 다시 한 번 엘리카가 험악한 얼굴로 검을 들어올리자, 재빨리 헤런 뒤로 숨었다.

헤런이 작게 혀를 찼다.

"엘리카, 적당히 해라. 그래도 시험 볼 녀석인데 어디 잘못 얻어맞았다가 망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그래, 지당한 말이지. 너 때문에 망치면 평생 저주할 거다."

"너도 좀 조용히 다물고."

엘리카는 한숨을 내쉬고서 목검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예배당으로 가기나 하자. 넌 진짜 한 번만 더 깝죽거리면 머리를 깨버린다."

"······어이구, 무서워라."

"그만하라고. 쟨 진짜로 한다니까."

투닥거리던 세 사람이 건물로 다시 들어가려는 때였다.

"어, 에단 씨다."

어느새 건물에서 나와 마당 한편에 놓인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

톰이 저멀리 보이는 에단을 발견하고 휘휘 손을 흔들었다.

그 역시 세 사람을 돌아보고는 손을 한 번 들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요새 마당으로 자주 나오시네. 몸이 많이 회복된 건가?"

"그런가봐."

톰이 엘리카에게 물었다.

"야, 엘리카. 너는 아직도 의심 중이냐? 저 사람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어."

"흐음, 내가 보기엔 그냥 무뚝뚝해도 친절한 아저씨인데. 저번에도 보니까 수녀님들 사이에 섞여서 청소를 돕고 계시더라고."

엘리카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나도 나쁜 사람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거든. 그냥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을 것 같다는 거지."

"아, 그런 거야?"

그가 이곳 수도원에서 지낸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기에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여전히 없었다.

묘하게 접근해서 말을 걸기가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까닭도 있었다.

"그냥 여기 수도원에서 계속 지내도 좋을 텐데 말이야."

그때 양동이를 들고 가던 한 소녀가 세 사람의 곁을 지나치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들의 또래 친구인 카라였다.

톰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계속 지내면 좋겠다니, 뭔 소리야?"

"아니, 그냥. 엄청 잘 생기셨으니까 눈이 호강하잖아. 그렇지 않아, 엘리카?"

"몰라."

그녀의 짖궂은 물음에 엘리카가 짧게 대꾸했다.

톰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쯧쯧, 하여튼 얼굴만 잘생기면 좋다고."

"니가 할 말이냐? 톰 너야말로 매번 라야 수녀님 볼 때마다 헤벌쭉거리지 말고 침이나 닦아."

"뭐? 뭔 소리야, 그게!"

소녀가 혀를 내밀고는 마저 가던 길을 가버렸다.

톰이 힐끗 엘리카를 바라보고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쟤, 쟤가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난 그런 적 없어, 엘리카."

"······뭐 어쩌라고?"

엘리카는 그런 톰에게 신경을 끄고 다시 에단을 돌아봤다.

톰이 헛기침을 하고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에단 씨는 언제쯤 떠나시려나. 몸도 엄청 허약하신 것 같은데 혼자서 가다가 또 쓰러지는 건 아닌가 몰라."

"설마."

"······아, 그건 어때? 만약에 떠나면 당연히 근처 도시는 지나쳐 들를 것 아냐? 그럼 우리가 위험할 일 없도록 거기까지만 데려다드린다고 하는 거야!"

"그거 핑계로 도시까지 외출하자고? 너 바보냐? 사제님들이 허락해줄 리가 있나."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예배당으로 향했다.

***

'다 들린다, 이것들아.'

나는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만 방으로 돌아가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근처를 지나쳐가는 한 사제의 모습이 보였다. 테인 사제였다.

"아, 에단 씨."

그도 나를 발견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이곳에 나와서 계셨군요."

"예, 그냥 산책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사제님께서는?"

"이제 곳 아침 예배 시간이라 예배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테인의 손에는 경전 한 권이 들려있었다.

그가 경전을 내려다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보다 경전 정리를 맡아주신 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몸도 편찮으신데 제가 괜한 수고를 끼친 건 아닌지······."

"펜만 움직이면 되는 일인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거의 다 끝났습니다."

"······예? 어제 시작하셨는데 벌써 거의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마 오늘 오후 중으로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정말 빠르시군요."

"남은 게 있다면 더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아니, 아닙니다."

홀린 듯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재빨리 고개를 젓는 그였다.

뭔가 또 시키고 싶은 일이 있지만 참는 모양이었다.

딱히 크게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더 해도 상관은 없는데 말이다.

"이제 나머지는 제가 전부 마무리하겠습니다. 해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건네며 미소를 짓는 그였다.

그만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 때였다.

"······?"

나는 저멀리 걸어가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을 발견하고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테인도 내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아, 원장님이시군요."

······원장님? 수도원장?

테인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단 씨께서는 아직 원장님을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예, 대부분 방에서만 있었으니."

"저분이 이곳 수도원의 원장이신 디호드 님입니다. 모든 사제들의 모범일 정도로 굉장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원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내 눈에 띈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Lv. 64]

왜냐면, 그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이 일개 수도원의 원장이 가질 만한 레벨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조우 (7)

64레벨.

군주성의 고위 기사나 마법사들과도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

나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테인에게 물었다.

"혹시 말입니다."

"예?"

"수도원장님께서는 마법을 익히시고 계십니까?"

초감각을 끌어올리니 원장의 몸에서는 확실히 레벨에 걸맞는 마력이 느껴졌다.

체형을 보면 육체를 단련한 건 아닌 것 같았기에 마법사인 건가 싶었다.

하지만 테인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딱히 마법 같은 걸 익히시진 않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까?"

평범하다고?

수도원장이 상당한 수준의 강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면 원장이 수도원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왜?

순간 의문이 솟아올랐지만, 캐묻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기에 더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뭐 숨기고 있는 과거라도 있나?'

나는 다시 한 번 저멀리 떨어진 원장의 모습을 바라봤다.

***

시간이 흘러 선별 시험 당일.

정확히 정오 시간에 맞춰 수도원의 공터에는 몇몇 성기사와 사제들, 그리고 소년소녀들이 모였다.

지원자들을 한 차례 둘러본 수도원의 성기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견습 성기사 선발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선별의 방식은 간단했다. 시험관을 맡은 성기사와 한 차례 대련을 하여 실력을 검증받으면 그것으로 끝.

톰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원자들은 대부분 그의 또래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 소년들이었다.

견습 성기사 자리에 도전하는 건 보통 세례를 받을 때가 다 된 성년에 가까운 이들이고, 톰은 그중에 확실히 어린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성기사, 무엇보다도 검과 갑옷으로써 신앙심을 증명하는 교단의 전투 전력.

특히나 혈기 넘치는 소년들에게 있어서 성기사라는 존재는 사제보다도 훨씬 동경의 대상이었다.

견습 성기사가 된다면 수도원의 성기사들과 정식으로 사제 관계를 맺고, 훨씬 더 수준 높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주위에서는 선별에 지원하지 않은 아이들이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물론 엘리카와 헤런도 있었다.

"쟤 표정 좀 봐라, 진짜 얼빠졌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엘리카가 킥킥 웃으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톰을 가리켰다.

결국 시험에 지원한 건 세 사람 중 톰뿐이었다.

헤런은 그녀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톰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엘리카."

"응?"

"진지하게 묻는 거야. 정말로 성기사가 될 생각 없어?"

엘리카는 인상을 찌푸린 채 헤런을 쳐다봤다.

하지만 평소처럼 쏘아붙이는 대신,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가 딱히 성기사가 될 이유가 없잖아."

"그냥 사제가 되기엔 재능이 아까우니까 그렇지. 경들도 매번 말씀하시잖아, 넌 타고났다고."

일찍이 엘리카의 재능을 알아본 몇몇 성기사들은 톰과 헤런,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성기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검술이나 마법을 배우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사제가 된다면 웬만해선 평생을 이곳 수도원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가 되어 무예를 더 갈고닦는다면 언젠간 그 실력을 인정받아 큰 교단 지부로, 혹은 본부로도 이동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엘리카에게 가르침을 준 성기사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잠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헤런은 그것이 아까웠다. 소중한 친우가 큰 명예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잘된 일이었으니까.

"몰라. 어쨌든 아직은 마음 없어."

나중에는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일까.

헤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어쨌든 선별 시험이 이번이 마지막인 것도 아니고,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말이야, 저거 좀 불안하지 않냐?"

엘리카가 한쪽을 슬쩍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번 선별의 시험관을 맡은 젊은 성기사가 서있었다.

헤런도 찝찝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성기사 바리언, 왜냐면 그가 평소 톰을 아니꼽게 보고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이전에 한 번 그가 톰의 검술 자세를 교정해줬었는데, 톰이 그것을 따르지 않고 다른 성기사의 가르침대로 검술 수련을 계속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톰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더 적합하도 생각하는 수련법을 따른 것뿐이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시험인데 사적인 감정을 섞지는 않겠지. 그리고 설마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겠어."

곧 시험이 시작되었다.

호명에 따라 차례로 앞으로 나선 지원자들이 한 명씩 바리언과 대련을 진행했다.

"아직 전체적인 기본 토대가 부족하다. 아쉽지만 불합격이다."

"자세는 훌륭하게 잡혔지만 검격이 너무 단순하다. 조금 더 단련해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도록 해라."

"합격이다. 크게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하군."

대련은 진검이 아닌 날을 세우지 않은 검으로 진행되었는데, 톰 앞으로는 10명 중에 오직 2명만이 통과했다.

이어서 톰의 차례가 되었고, 그는 검을 쥔 채 바리언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바리언이 어딘가 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검술을 펼쳐보거라."

"예."

톰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곧바로 바리언을 향해 덤벼들었다.

텅! 터엉!

날이 세워지지 않은 뭉툭한 철날이 서로 부딪혔다.

다리언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톰의 검격을 모두 피하고 막아냈다.

공격이 닿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었기에 톰은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그만."

1분 정도 지났을까, 다리언의 말에 톰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긴장하며 다리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단호하기 그지없게 나온 말은······.

"불합격이다."

톰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켜보고 있던 헤런의 얼굴에도 어둡게 그늘이 졌고, 엘리카는 아예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 불합격?"

엘리카가 격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톰의 실력이 명백히 부족하게 느껴졌다면 순순히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앞서 선별된 두 사람 중,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던 쪽과 톰의 실력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한쪽은 붙고 한쪽은 떨어지다니.

"검을 휘두를 때 몸의 중심이 안정적이지가 않다. 자질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 여러모로 숙련이 부족해 보이는군."

바리언이 그렇게 말하고서 한쪽을 돌아봤다.

심사를 맡은 이는 직접 지원자들과 대련하는 그를 포함해서 다른 두 성기사까지 총 3명이었다.

그러나 애매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들도 바리언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똑같은 결과를 내렸다.

"아쉽지만 불합격이다. 더 수련에 정진해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거라."

톰의 실력은 붙어도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딱 합격선에 간신히 걸친 애매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바리언이 만약 합격을 내렸다면 나머지 두 사람도 어느 정도 따라서 합격을 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톰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불합격을 내렸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사적인 감정이 섞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톰은 그것을 따질 수 없었다.

어차피 항의해봐야 결과가 번복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 시험을 생각하면 굳이 성기사들의 눈에 밉보일 것 없이 얌전히 물러서는 게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톰은 검을 꽉 쥔 채 입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그 말만을 내뱉고는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엘리카는 보았다.

톰이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바리언의 입가에 스친 희미하기 그지없는 조소를.

으득.

이를 까득 간 엘리카가 번쩍 손을 들고서 소리쳤다.

"시험에 지원하겠습니다!"

난데없는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엘리카에게로 몰렸다.

헤런도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그녀가 완전히 열이 받았다는 걸 표정과 목소리에서 곧바로 알아차렸다.

"야, 야······ 엘리카?"

"저 빌어먹을 놈 한 방 먹여줘야겠어."

엘리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가볍고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어도, 성기사가 되겠다는 꿈만큼은 진심인 녀석이었다.

바리언이 고작 사소한 악감정으로 톰을 떨어뜨렸다는 확신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톰이 놀람과 당황이 섞인 얼굴로 공터의 중앙으로 다가와서 선 그녀를 바라봤고, 성기사들도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냐, 엘리카? 네가 선별 시험에 지원하겠다고?"

지금껏 성기사가 되라는 설득에도 어물쩡 넘겨오기만 했던 그녀가 갑작스레 시험에 지원하겠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톰에게서 검을 뺏어든 엘리카가 바리언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대련, 바로 부탁드립니다."

바리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좋다, 최선을 다해 검술을 펼쳐봐라."

그에 검을 치켜든 엘리카가 곧장 그를 향해서 덤벼들었다.

***

나는 막 다음 대련이 시작된 공터의 상황을 지켜봤다.

오늘 견습 성기사를 선발하는 시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잠깐 구경하고 있던 중이었다.

'친구를 떨어뜨려서 열받았나.'

시험관을 상대로 사나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엘리카.

그녀는 톰이 탈락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홧김에 선별 시험에 도전한 것처럼 보였다.

레벨에서부터 알 수 있었지만 엘리카의 검술은 지원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대련 결과가 어떻게 나오려나 조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돌연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

나는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수도원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이 아니었으니까. 그 기척이 품고 있는 기운은 상당히 거대했다.

[Lv. 81]

시야에 들어온 건 회색 로브를 걸친 중년 사내의 모습이었다.

수도원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외부자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자연스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서 정중히 물어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곳 수도원의 사제님 되십니까?"

"······."

나는 그를 슬쩍 훑어봤다.

남자의 목에는 라엘 교단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진 로자리오가 걸려있었다. 그걸로 성직자라는 사실은 추측할 수 있었다.

허리춤의 검을 보니 성기사일까. 다른 교단 지부에서 온 인물?

뭐가 됐든 레벨만 봐도 일단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건 모를 수가 없었다. 81레벨이라니······ 누구지?

"아닙니다. 수도원에서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외부자입니다. 당신은?"

남자가 대답했다.

"저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신자입니다. 한데, 지금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가 내가 바라보고 있던 공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일단 대답해주었다.

"견습 성기사를 뽑는 선별 시험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렇군요. 견습 성기사라······."

남자가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그는 수도원 안으로 들어온 용무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잠시 엘리카의 대련을 지켜보더니, 이내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뛰어난 아이로군요."

그러고는 내 옆에 서서 자연스럽게 함께 대련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그런 그를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뭐야?

***

바리언은 약간의 경악을 느끼며 공격을 방어했다.

엘리카의 전력을 다한 공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였나?'

그녀의 뛰어난 검재야 이미 수도원의 성기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나이에 비해 그렇다는 것뿐이지 아직 정식 성기사와 비교하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의 검이 하단에서 낮게 맞물렸다.

공방은 충분히 나누었다. 그만 대련을 끝내기 위해서 바리언이 검을 쳐내려는 순간이었다.

"······?!"

엘리카의 검날이 갑작스레 빙글 호선을 그렸다. 이어 곧바로 바리언의 목을 노리고 찔러들었다.

초심자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반격에 적당히 방심하고 있던 바리언은 반응이 늦고 말았다.

대련은 당연히도 마력은 사용하지 않은 채 펼치고 있었으나, 그는 반사적으로 마력까지 끌어올려 목을 노린 일격을 쳐냈다.

차마 힘조절을 하지 못한 바리언의 검이 엘리카의 검날을 산산히 부서뜨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엘리카의 연약한 어깨가 심상치 않은 힘을 담은 검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대로면 그녀의 어깨마저 검날처럼 박살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쩌엉!

돌연 빛살처럼 날아든 작은 마력탄이 바리언의 검을 쳐냈다. 그의 검날이 마찬가지로 박살났다.

"······큭!"

검자루를 놓친 바리언이 바닥에 주저앉아 손목을 부여잡았다.

중심을 잃고 털썩 엉덩방아를 찧은 엘리카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대련을 관전하던 이들도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시선을 돌렸다.

한 낯선 남자가 이쪽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경. 대련이 너무 격화된 듯하여 피치 못하게 간섭했습니다."

로브를 입은 남자는 정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왔다.

"······귀하께서는 누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언이 적의가 담긴 눈으로 그런 남자를 노려봤다. 다른 성기사들도 경계가 담긴 눈빛을 띠었다.

힘조절을 하지 못한 건 명백한 바리언의 실수였지만, 대련에 갑작스레 끼어든 외부자에게 반응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로브의 후드를 내린 남자가 온화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던 신자입니다."

"신자라니, 어느 교단 지부에서······?"

말을 잇던 한 성기사가 남자가 차고 있는 검자루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서, 이내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순백색의 테두리 안에 새겨진 찬란한 황금빛 십자가를.

"과, 광휘의 기사······?"

조우 (8)

광휘의 기사.

성기사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교의 중심인 교황령 직속, 교단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스물의 성기사들.

잠시 동안 벙쪄있던 수도원 사람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긴가민가한 기색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교에서도 손꼽는 그런 대단한 거물이 난데없이 이런 변방의 수도원에 찾아왔다는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부정하지 않고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교단의 열여섯 번째 광휘의 기사인 제르엘입니다."

"······아, 제르엘 경!"

열여섯 번째 광휘의 기사, 제르엘.

조금이라도 교단의 명망 높은 인사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어느새 주위의 성기사들은 한껏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의 모든 전사들의 정점이나 다름없는 광휘의 기사는 같은 성기사들에게 있어선 특히 동경과 경외의 대상이었기에.

남자, 제르엘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그가 쓰러진 엘리카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괜찮느냐, 아이야?"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엘리카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모여있던 사제들 중 가장 상급자인 이가 물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제르엘 경. 한데 어째서 저희 수도원에 방문하신 건지······."

제르엘이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연입니다. 근처를 지나치다가 이곳에 수도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서 한번 들러보려 온 것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수도원장님께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여나 폐라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부디 어려워 마시고 편히 대해주십시오."

사제가 다급히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모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원장님께서도 기껍게 맞이해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시선을 돌린 제르엘이 엘리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사제를 따라서 이동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어쨌든 남은 지원자들에 대한 선별 시험은 계속되었다.

***

'······광휘의 기사였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저멀리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역시 그는 심상치 않은 레벨에 맞게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광휘의 기사, 라엘 교단에 존재하는 최정예 전력 중 하나.

교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교황 다음 권력자들인 추기경에 버금가는 이들.

'날 알아보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이미 내 외관이야 대륙에 퍼질 대로 퍼지기는 했다.

하지만 칼데릭의 군주가 세인테아 변방의 수도원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 연관을 못 짓겠지.

만약 그가 내 존재를 떠올렸더라도 당연히 그냥 착각이라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었다. 이 대륙에 흑발에 금안의 인간이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저쯤 되는 인물이 이런 변방의 수도원에는 왜 찾아온 건가 싶었다.

말하기로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것뿐이라고 했지만 다른 목적이 있는지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와 관련된 게 아닌 이상에야 알 바는 아니었기에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들어가야겠다.'

나는 대련을 관전하던 것을 관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

"정말 귀하신 손님께서 수도원에 방문해주셨군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르엘 경."

수도원장 디호드의 찬사에 제르엘은 점잖게 겸양을 표했다.

"아닙니다. 갑작스러우실 텐데도 이리 환대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이어지고 디호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저희 수도원에 찾아오신 데에 따로 어떤 이유가 있으신 건지······."

"아, 아닙니다. 정말 말씀드린 대로 우연일 뿐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에 인근 마을에 들렀는데, 주민들이 이곳에 수도원이 있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변덕으로 찾아와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시군요. 원하시면 제가 직접 수도원 이곳저곳을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오고 간 뒤 대화가 마무리되고, 제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디 원하는 만큼 편히 머물러주십시오."

"예, 배려 감사드립니다."

원장실에서 나온 제르엘은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탓인가?"

그는 방문에서 시선을 거두고서 계속 가던 걸음을 옮겼다.

***

"야, 진짜 말도 안 된다. 말로만 듣던 그 광휘의 기사가 우리 수도원에 찾아오다니······!"

완전히 흥분한 채 떠드는 톰을 보며 엘리카가 혀를 찼다.

선별 시험에 떨어진 건 벌써 잊은 듯 들떠있는 모습이 왠지 짜증났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신났냐?"

엘리카의 퉁명스러운 말에 오히려 톰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럼 신나지 안 신나냐? 너야말로 뭐가 그렇게 무덤덤해? 광휘의 기사라니깐? 그것도 무려 그 제르엘 경이라고!"

"그러니까, 그 제르엘 경이 뭔데."

톰과 달리 엘리카는 교단의 유명 인사들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광휘의 기사라는 게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건 알지만 그들 각각의 정보나 일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톰이 답답해 죽으려고 할 때, 헤런이 나서서 대신 설명했다.

"마족과의 최후 결전에서 용사님과 같은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셨던 분이잖아."

광휘의 기사, 제르엘 라그니스.

그는 광휘의 기사들 가운데서도 유독 특별한 인물로 여겨지는 존재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십 년 전 마족과의 최후 결전, 용사가 마왕을 봉인시킨 바로 그 거대한 전투를 직접 겪고 살아남은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나 대단하신 분이라고! 그런 분이 지금 우리 수도원에 찾아오신 거라니깐?! 넌 손까지 직접 잡아놓고!"

물론 그 설명에도 엘리카의 반응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용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계속해서 열띤 찬양을 이어가는 그에게 헤런이 혀를 차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괜찮냐?"

"······응? 뭐가?"

"시험 말이다, 멍청아. 그렇게 열심히 했었는데 떨어졌잖아."

톰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뭐냐? 어차피 붙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도 안 했었는데."

"웃기고 있네, 엄청 기대했으면서."

"시끄러. 뭐, 이미 지나간 일인데 별 수 없잖아. 이번이 마지막도 아니고, 더 열심히 해서 다음 번을 노리면 되지."

낙천적이기 그지없는 말에 엘리카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쏘아붙였다.

"멍청아, 그게 아니라 바리언 그 자식이 너 일부러 떨어뜨린 거잖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시험인데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니가 못 봐서 그런데 그 새끼가 분명히 너 비웃었거든? 하여튼 이 머저리는······."

"야, 야."

헤런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고서 그녀를 말렸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원 뒷마당의 담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누가 듣기라도 했다간 사달이 날 수위의 욕이었다.

톰이 씨익 웃었다.

"아무튼 고맙다. 아까 나 때문에 그렇게 나선 거지?"

"······뭘 착각하고 있냐? 너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짜증나서 나선 거거든?"

엘리카가 으르렁거렸다.

그게 그거였지만 톰이든 헤런이든 굳이 더 걸고 넘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하는 거냐?"

"뭘?"

"성기사 말이야. 넌 시험 통과했잖아?"

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현재 그가 시험에 떨어지고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엘리카가 선별 시험에 지원하고 합격한 것.

아까운 친구의 재능의 이제야 빛을 발하겠다는 사실에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를 배반하고서 엘리카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니, 안 할 건데."

"······응?"

"안 할 거라고. 잘 생각해보니까 역시 귀찮아. 이따가 다시 찾아가서 그냥 안 하겠다고 말할 거야."

"······."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톰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야, 좀 제발······ 시험도 다 통과해놓고 안 한다고 하겠다고? 그랬다가 경들 눈밖에 나면 어쩌려고?"

"나야 아무렴 상관없지."

"그럼 너 때문에 나까지 밉보여서 다음 선별도 통과 못하면 어쩌려고?"

그 말에 엘리카가 움찔했다.

반쯤 억지이긴 했지만 아주 말이 안 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세 사람은 수도원에서 유명한 삼총사였으니.

순간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톰이 머쓱하게 말을 바꿨다.

"아니, 방금 건 그냥 농담이었고.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한번 다시 잘 생각해봐라, 응? 너도 좀 뭐라고 해봐, 헤런."

"우리가 말한다고 설득될 녀석이냐. 자기가 하기 싫으면 별 수 없지, 뭐."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엘리카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땅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에휴, 그래. 말해봐야 뭐 하냐."

톰과 헤런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잔잔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내린 헤런이 문득 엘리카의 목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엘리카, 너 목에 로자리오 어디 갔어?"

"······어?"

그녀도 그제야 깨달았는지 손을 더듬어 목 부근을 만졌다.

평소 목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가 사라진 채였다.

"씨, 어디에 떨어뜨렸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있다. 아까 대련할 때 줄이 끊어져서 떨어졌더구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세 사람은 흠칫 놀라서 한쪽을 돌아봤다.

광휘의 기사 제르엘, 갑작스럽게 건물 벽을 돌아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였다.

"제, 제르엘 경!"

허둥지둥거리는 톰을 향해 제르엘이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의 손에는 줄이 끊긴 로자리오가 들려있었다.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나무로 만들어진 목걸이.

엘리카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가 그것을 건네주었다.

"자, 여기 받거라."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받은 엘리카는 잠시 로자리오를 내려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감사 인사를 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경."

"아니다. 그런데 그보다 그 로자리오, 어디서 받은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예? 그냥 예전에 사제님들이 주신 걸 차고 다닌 건데요."

수도원의 아이들이 교를 상징하는 물건을 장신구로 차고 다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톰은 팔찌를, 그리고 헤런은 모양은 다르지만 엘리카와 마찬가지로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제르엘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로자리오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이 새져겨있기에 궁금해서 물어봤단다."

조우 (9)

제르엘의 말에 엘리카는 슬쩍 로자리오의 뒷면에 자그맣게 새겨진 문장을 내려다봤다.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마음에 품은 기적은 허무히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줌의 빛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옆에 서있던 톰도 슬쩍 로자리오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용사님께서 마족과의 최후 결전에서 남기셨다는 말씀 중 하나죠? 경."

그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이 바로 엘리카의 로자리오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마음에 품은 기적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줌의 빛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제르엘이 과거를 회상하듯 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카에게 물었다.

"그분의 말씀이 새겨져있는 로자리오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용사님을 존경하느냐?"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들의 터전을, 이 대륙을 지킨 용사를 어느 누가 존경하지 아니할까?

엘리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묵한 채 로자리오를 품에 넣었다.

옆에 서있던 톰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대륙을 구한 영웅이시잖아요. 얘도 말로는 맨날 애도 아니고, 아니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엄청 좋아해요."

"야······ 죽고 싶냐?"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든 엘리카가 톰을 죽일 듯 노려봤다.

움찔한 톰이 재빨리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제르엘에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제르엘 경도 엄청나게 존경합니다! 용사님과 함께 마왕을 봉인시키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업적이잖아요!"

"하하, 고맙구나. 하지만 마왕을 봉인시킨 건 용사님께서 홀로 이루신 업적이고, 나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단다."

최후의 결전에서 마왕과 원마들을 모두 상대한 인물은 용사였고, 나머지 결사대원들은 그저 잡마족들을 처리했을 뿐이다.

제르엘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준 것이었지만 톰이나 헤런은 그조차도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엘리카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고서 말했다.

"그보다 아이야,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네? 엘리카요."

엘리카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가 이어서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 엘리카. 혹시 내게 검을 배워볼 생각은 없느냐?"

그 말에 톰과 헤런이 깜짝 놀랐다.

두 사람 모두 순간 말을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엘리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되물었다.

"······그건 혹시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제르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묻고 있는 거다."

"제, 제자······."

톰이 믿기지 않아서 벙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휘의 기사, 교단에서 가장 높고 고결한 성기사가 지금 그녀에게 직접 제자가 될 것을 묻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헤런도 멍하니 제르엘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엘리카를 돌아봤다.

오히려 제안을 받은 당사자인 그녀는 두 사람과 달리 침착한 기색이었다.

"어째서요?"

엘리카가 제르엘에게 물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사제의 관계를 맺는다는 건 수도원에서 성기사들이 오며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정말로 제대로 된 가르침을 전수해주고 성장을 전격적으로 조력해주겠다는 뜻.

지금 제르엘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오늘 생전 처음 본 그녀에게 제자가 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르엘이 대답했다.

"아까 네 대련을 잠깐 지켜봤단다. 거기서 네 재능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다."

엘리카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재능이 제법 뛰어나다는 건 물론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와 같은 대단한 인물이 관심을 가질 정도인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께서는 저보다 훨씬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요."

제르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보통 이런 제안을 들으면 정신을 못 차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오히려 의심하며 자신을 떠보고 있으니.

아직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하여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아이라 생각하며, 그는 별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네 재능만을 보고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란다."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만······ 나는 제법 감이 좋다. 그래서 감에 따라 행동할 때가 많지."

······감?

이게 뭔 말인가 싶어 세 사람은 눈을 깜박거렸다.

"이 수도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른 이유도 그 때문이란다. 이곳에서 반가운 만남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불현듯 들더구나. 그런데 아까 전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그게 너일 것도 같더구나. 하여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농담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엉뚱하기 그지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엘리카는 그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르엘이 싱긋 웃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겠느냐?"

"······."

침을 꿀꺽 삼킨 헤런이 엘리카를 돌아봤다.

톰 역시 시선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녀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광휘의 기사의 제자가 된다니, 그 어느 신자가 이런 어마무시한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죄송합니다."

잠깐의 침묵 뒤에 엘리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설마 거절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제르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톰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고는 다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엘리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미쳤어?!"

엘리카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그 손을 떼어내며 이어서 말했다.

"저는 성기사가 될 생각이 없거든요. 그래서 감사한 말씀이지만 제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제르엘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까 네가 벌인 대련은 견습 성기사를 선별하는 시험인 것으로 알았는데, 혹여 내가 잘못 안 것이냐?"

엘리카가 조금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냥 열이 받아서······ 시험만 보고 정말로 성기사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제르엘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굳이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아쉽구나. 어째서 성기사가 되지 않으려는 것인지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그에 엘리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성기사는 신을 위해서 목숨도 바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그렇지."

"······제 신앙심은 그만큼이나 크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성기사가 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요."

헤런이 눈을 감고 턱 이마를 짚었다.

광휘의 기사 앞에서 신앙심 타령이라니, 수도원 사람들에게라면 몰라도 이건 그가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제르엘은 격노를 쏟아내거나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신앙심이라······."

단지 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건 아무렴 괜찮지 않나 싶구나."

"······예?"

"이건 내 솔직한 사견이다만,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맹목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세 사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지금 모든 성기사들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광휘의 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제르엘은 웃으며 거기더 더 떠서 엘리카에게 물었다.

"혹시 이런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느냐? 세상에 여전히 고통과 절망들이 넘쳐나는데, 어째서 신께서는 일일이 구원을 베풀어주시지 않는지, 그분이 정말로 전능한 존재라면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 아닌지, 우리에게 시련을 내리고자 하시는 거라면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단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

엘리카가 그 이야기를 홀린 듯이 듣다가 물었다.

"그래서 답을 찾으셨어요?"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구나."

"······예?"

"내게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됐든 그분께서는 인류를 한 번 구원하셨고, 나는 그에 무언가 숨겨진 뜻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내 신앙심은 바로 그것이지. 신성 모독으로 여겨져도 이상할 건 없다만, 하하."

제르엘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 수도원에서 사흘 동안 머무를 생각이다. 제안은 계속 유효하니, 그 안에 생각이 바뀐다면 나를 찾아오거라. 그럼······."

그렇게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서 몸을 돌려 떠나갔다.

***

수도원에서 머무른 지도 열흘이 훌쩍 지났다.

나는 이제야 드디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데에 무리는 없었고, 몸 내부에 남았던 놈의 마력의 잔기운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한세월이 걸리겠네.'

목적지는 일단 곧장 칼데릭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디트로데미얀과 일전을 벌인 현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직까지 아셸이 그곳에 남아있을 리는 없었으니, 달리 별 수 없었다.

세인테아의 변방인 이곳에서 칼데릭까지 이동하려면 아득히 먼 거리였기에 정말로 부지런히 이동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단지 거리뿐만 아니라 또 있었다.

'당장 가진 것도 하나도 없으니.'

바로 내일 떠나겠다고 하니 테인 사제가 약간의 경비와 식량을 싸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걸로 칼데릭까지 이동하기에는 당연히 부족할 것이었다.

일단 가까운 도시에 들러서 어떻게든 자금을 더 마련해서 경비를 벌어볼 생각이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진짜 모험가 길드에 들러서 의뢰라도 받아야 하나······.

똑똑.

고민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엘리카였다.

무슨 볼일인가 싶은데 그녀가 물었다.

"내일 떠나신다면서요?"

테인 사제에게만 말했는데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물어보려고 왔나?

"얼마 전까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더니, 몸은 다 회복되신 거예요?"

"그래, 얼추."

"음······ 그냥 잘 가시라고요. 인사나 좀 하려고 왔어요."

그녀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변명하듯이 말하고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런데 그건 아세요? 저희 수도원에 어제 엄청 대단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광휘의 기사라고."

"안다."

그야 전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알지.

그건 왜 묻나 싶은데 그녀의 뜬금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보고 제자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었거든요."

"······?"

제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 재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 정도 거물이 관심을 가질 정도였나?

"잘 됐구나. 그래서 어쩌겠다고 했냐?"

"······아직 고민 중이에요. 원래는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람이 묘한 말을 해서요."

"묘한 말?"

"내가 저번에 신이니 뭐니 했던 거요. 신기하게 그거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신이니 뭐니 했던 거라면, 딱히 자신에게 신앙심이 없다는 그 이야기 말인가?

그 광휘의 기사가 그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우 (10)

엘리카의 물음에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좋은 기회니까 받아들이면 되겠지."

본래 거절할 생각이었다고 말했지만 이게 거절할 이유가 있는 제안인가?

광휘의 기사의 제자라니,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다시는 안 올 천운과 다름없는 기회 아닌가.

"역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에도 엘리카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저 높은 곳까지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의 인생이고 선택이야 스스로의 몫이라지만,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으면 당연히 냉큼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성기사가 되기 싫은 거냐?"

"싫다기보다 의미를 못 찾겠다는 거죠."

"너는 사제가 되겠다고 했었지. 그렇게 따지면 사제라고 크게 다를 게 있나 싶다만."

엘리카가 인상을 슬쩍 구겼다가 순순히 긍정했다.

"뭐, 그렇긴 하죠. 근데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그 사람 제자가 되면 이 수도원에서 떠나게 될 것 아니에요."

"아, 친구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가 싫다는 거였나?"

"······아니요. 딱히 그런 녀석들 아무래도 좋거든요. 그냥 수도원에서 떠나기 싫다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이유가 가장 큰 듯했다.

그보다 뭔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지금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와는 마주칠 때마다 인사나 하던 게 전부였다. 언제 고민 상담이라도 해줄 만큼 친해졌었던가?

"신중히 고민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그래도 일단 성심껏 대답해주기로 했다.

"그 광휘의 기사라는 자를 따라가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좋겠고, 계속 이곳 수도원에 머물러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좋겠지. 나는 딱히 네가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도 멍청하게 복을 걷어차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쪽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인지도 모르지."

내 말에 엘리카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너무 애매한 답변이잖아요."

"네 삶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넌 어차피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하든 귀담아 듣지도 않을 것 같은데."

부정할 수 없는 듯 잠시 침묵한 그녀가 이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죠. 아무튼 감사해요."

몸을 돌려 다시 방밖으로 나가려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떠날 때 말은 해주세요. 얼굴 비춰서 배웅은 해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다."

"말 안 하면 테인 사제님한테 물어보면 그만이거든요. 그리고 그것도 끝까지 숨기실 거예요? 왜 숲에서 쓰러져있었는지?"

나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 좀 나가라."

"예이."

엘리카가 설렁 대답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하던 고민을 마저 계속했다.

***

"먄악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면 수도원에서 떠나게 되는 건가?"

멍하니 물컵을 만지작거리던 톰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옆에 앉아있던 헤런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서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겠어? 설마 그분이 우리 수도원에서 계속 머무르실 리는 없고, 아마 교황령으로 가지 않으려나."

"햐, 교황령이라······ 그거 진짜 엄청난 출세잖아? 그런데 엘리카 걔는 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나 같으면 경께서 말씀하시자마자 무릎 꿇고 절부터 올렸을 텐데."

"뭘 새삼스레. 그 녀석이 그런 걸 바랄 성격이냐?"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난 가끔 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의자에 등을 기댄 톰이 답답함과 불만이 섞인 듯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런 톰을 헤런이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야말로 상관없냐?"

"······뭐? 뭐가?"

"엘리카가 진짜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서 수도원을 떠나버려도 상관없냐고."

"뭔 말을 하는 거야? 그러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지. 너 설마 내가 걔 질투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톰이 콧방귀를 뀌며 손에 쥐고 있던 물컵을 입가에 가져갔다.

"너 엘리카 좋아하잖아."

그리고 이어진 헤런의 말에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냈다.

사레가 들려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던 톰이 완전히 당황해서 헤런을 쳐다봤다.

"뭐, 뭐, 뭔 말을 하는 거야? 누가 누구를 좋아해? 내가 걔를? 그런 선머슴 같은 녀석을 누가 좋아한다고!"

"톰."

헤런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카만 빼면 다른 애들은 다 알아. 너는 지금까지 그걸 숨긴 거라고 숨긴 거냐?"

"······."

"그러니까 다 집어치우고 한번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너는 정말 엘리카가 제르엘 경의 제자가 되길 바라냐?"

톰이 헤런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벌써 3년이었다.

톰, 헤런, 엘리카. 세 사람이 이곳 로벨지오 수도원에 들어온 건 거의 같은 시기였다.

톰과 헤런은 전쟁으로, 그리고 엘리카는 마족의 난동으로 부모와 형제를 잃은 고아였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서로에게 날을 세우기 바빴던 그들은 싸우면서 친해졌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셋이서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헤런의 말대로 톰은 엘리카를 좋아했다.

스스로는 그것을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에만 눈치가 없는 엘리카를 제외하고 모두가 알았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한 투로 말했다.

"말했잖아, 그러길 바란다니까."

"······."

"물론 엘리카가 수도원을 떠나는 건 싫어. 그래도 제발 제르엘 경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건 진심이야. 그 녀석은 이런 변방의 수도원에서 평생을 박혀있을 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톰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고작 그런 이기심 때문에 소중한 친구의 앞길을 막다니, 그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헤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걔는 애초에 그걸 바라지 않을 거라니까."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또 나중이 되면 모르는 거잖아. 걔는 성기사가 되기 싫은 게 아니라, 딱히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니까. 너야말로 설마 엘리카가 제안을 거절하길 바라냐?"

"그럴 리가 있나. 나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수녀님들한테 말해서 한번 설득을 부탁드려볼까? 역효과려나?"

"말이라고 하냐? 관둬."

엘리카의 반골 기질을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아직 제르엘의 제안을 다른 수도원 사람들에게 말하진 않았다.

만약 다른 이들도 이 사실을 알면 완전히 수도원이 뒤집어질 테고, 당연히 단체로 엘리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버리면 오히려 더 고민하지도 않고 단칼에 제안을 거절해버릴 것 같았다.

"아직 며칠 더 남았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 우리 둘이서 열심히 설득해보자고. 그래도 결국 마음 안 바꾸면 별 수 없는 거고."

고개를 끄덕이던 톰이 돌연 결심한 듯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 수도원에서 떠나게 되면, 그때는 그냥 질러봐야겠어."

"······?"

"그 녀석한테 고백하겠다고."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헤런이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진심이냐?"

"어."

"······장난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두들겨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차라리 그러면 훨씬 낫겠네. 걔가 진지하게 정색하고 거절이라도 하면 진짜 죽고 싶어질걸."

톰이 기지개를 켜고서 말했다.

"시간 다 됐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어느새 날은 거의 저물고 하늘에는 노을이 져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치고 방밖으로 나섰다.

엘리카를 찾아서 함께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마당 한쪽에 또래 친구들 몇 명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 한 소년이 코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톰과 헤런은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야, 무슨 일이야? 메트 너는 얼굴이 왜 그 꼴이고? 누구랑 싸웠어?"

다친 소년을 주위의 아이들이 진정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년 대신 다른 소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렉스랑 싸웠어. 그 자식이 또 시비를 걸고 발작해대서."

그 말에 톰과 헤런은 더 설명을 자세히 듣지 않아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전에 엘리카가 코뼈를 부러뜨린 소년이 바로 렉스였다.

수도원 아이들과 여전히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그는 툭하면 다른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기 일쑤였으니까.

헤런이 소년의 상처를 살피면서 물었다.

"렉스는 어디 있는데?"

"나한테 실컷 얻어맞다가 도망쳤어. 그 별것도 아닌 새끼."

소년이 아직 분이 덜 풀린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때 다른 소년이 거들었다.

"렉스 걔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 달려갔어."

"······뭐? 왜 거기로?"

"몰라.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해야 되나 얘기하고 있었는데······."

수도원 뒷편의 숲, 예전에 사제와 성기사들 몇몇이 실종된 적이 있던 숲.

깊은 곳에 정체 모를 괴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에 수도원의 사람들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장소.

"그냥 내비둬, 그딴 새끼. 좀 지나면 겁먹고 알아서 나오겠지."

톰이 인상을 찌푸린 채 수도원 뒷편의 숲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일단 넌 얼굴부터 씻어. 내가 한번 찾아볼 테니까."

"뭐? 그냥 내버려두자니까."

"그랬다가 안 돌아오면 어쩌려고? 날도 거의 다 저물었는데. 안 그래도 엘리카가 걔 코뼈 부러뜨린 지도 얼마 안됐는데, 수녀님들한테 들키면 이번엔 그냥은 못 넘어가."

더 일이 성가셔지기 전에 빨리 렉스를 찾아 데리고 돌아와서 조용히 넘기는 편이 좋았다.

헤런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갈게."

"됐어. 넌 엘리카 찾아서 얘네하고 먼저 식당으로 가. 오래 안 걸려."

헤런과 다른 아이들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톰은 곧장 몸을 돌려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 뛰어갔다.

"아오, 하여튼 렉스 그 새끼······."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렉스는 여전히 수도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톰 역시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그와 비슷했기에 적당히 이해해주며 넘어가고 있었지만, 어째 갈수록 말썽이 잦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제대로 한번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톰은 거침없이 숲 안쪽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갔지?'

어차피 괴물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소문일 뿐이고, 실종도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일 뿐이기에 별 두려움은 없었다.

실제로도 톰과 헤런, 엘리카는 사제들 몰래 숲에 몇 번 들어와서 나다닌 적도 있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날이 밝을 때였지만.

렉스야 깊이 들어가지도 못했을 게 뻔했기에 톰은 숲 외곽 쪽을 훑어보며 돌았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했다.

"······!"

꽤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의 시야에 곧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성한 수풀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와있는 다리.

그것이 렉스의 다리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챈 톰은 안도감과 동시에 의문을 느끼며, 서둘러 가까이 다가갔다.

"렉스, 이 미친 새끼야! 여기 자빠져서 뭘 하고 있······."

톰이 수풀을 헤치고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퍼뜩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

돌연 근처에서 들려오는 괴음에 톰은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날이 밝을 때까지 톰과 렉스, 두 사람은 모두 숲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조우 (11)

날이 저문 늦은 밤, 로벨지오 수도원은 완전히 소란으로 뒤집어졌다.

뒤늦게 아이들에게 사정을 설명들은 사제들이 성기사들을 동원하여 숲을 뒤졌다.

하지만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돌아오지 않은 두 사람을 추적해볼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또 사람이······."

가네샤 수녀는 착잡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마당에 모여있는 성기사들을 바라봤다.

숲에서 사람이 실종됐던 건 오래 전의 일이었다.

숲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나돌긴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믿지 않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단지 불행이 겹쳐 발생한 우연이라고 여겼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또다시 사람이 실종되었다. 그것도 이번엔 아이들이.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반대편에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봤다. 엘리카와 헤런이었다.

그들은 하염없이 수도원 뒷편의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도원의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세 사람이었기에 특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미안해, 엘리카."

헤런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톰을 말렸어야 됐는데, 혼자 숲에 들어가게 두면 안 됐는데······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무심코 내버려둬버렸어······."

그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에 엘리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괜찮다고 다독여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그럴 여유가 없었기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친구가, 톰이 실종되었다.

성기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아직까지도 발견된 건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이전에 실종됐었다는 사람들과 똑같았다. 그들도 그렇게 자그마한 흔적 하나 발견하지 못한 채,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그게 이렇게 자신의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엘리카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숲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성기사들은 수색을 더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그만 해산할 분위기였다.

그녀는 다급히 걸음을 옮겨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에 그나마 친분이 있던 성기사인 뮤턴에게 말을 걸었다.

"뮤턴 경, 어째서 수색을 계속 안 하시는 거예요?"

뮤턴이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수도원장님께서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 중단하라고 하셨단다. 무리하게 수색을 하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전에 숲에서 실종됐던 사람들 중에는 성기사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뛰어난 전사인 그들이라도 숲에서는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깊은 밤이라면 더더욱.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해 미안하다. 네 친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나도 기도하마. 그러면 분명 신께서 보살펴주실 게다."

뮤턴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성기사들을 따라서 흩어졌다.

몇몇 성기사들만이 남아서 숲의 입구를 지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직접 숲으로 들어가서 톰을 찾고 싶었지만, 당연히 어른들이 그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엘리카는 그저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서 나온 제르엘이었다.

제르엘은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온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수도원장 디호드였다.

램프를 든 채 제르엘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을 꺼냈다.

"이전에도 한 번 이렇게 숲에서 수도원의 사람들이 실종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들은 결국 찾았습니까?"

"아니요, 흔적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해서 숲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는데, 설마 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디호드가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제르엘이 빤히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다른 교단에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었습니까?"

"예, 단서가 아무것도 없기도 했고, 그 뒤로 또 같은 일이 발생했던 적은 없었기에······."

제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제가 직접 숲을 수색해보겠습니다."

"예? 하지만 경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수는······."

"아이가 실종되지 않았습니까. 시간을 낭비할수록 더 찾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까지 체면을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장."

뼈가 담긴 말에 원장의 눈매가 일순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감격한 듯한 얼굴이 되서는 감사를 전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경.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두 아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사제와 수녀들은 그만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수도원 건물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엘리카는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마당을 몰래 둘러봤다. 그녀의 한 손에는 헝겊에 싸여 불빛을 숨긴 램프가 들려있었다.

뒤쪽에 서있던 헤런이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카, 지금 네가 숲에 들어가봐야 위험하기만 할 뿐이야. 램프의 불빛 정도로는 앞도 제대로 안 보일 거라고."

"······."

"제르엘 경께서도 직접 수색에 나서셨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기다리······."

"시끄러, 헤런. 넌 됐으니까 그만 침실로 돌아가."

현재 엘리카는 직접 숲으로 들어가서 톰을 찾을 생각이었다.

성기사들은 날이 밝고서 다시 수색을 하겠다고 했지만, 밤이 지나고 나면 벌써 톰은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헤런의 말대로 제르엘이 직접 숲으로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무엇이 됐든 무력하게 기다리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헤런은 답답함에 침음을 흘리며 엘리카를 바라봤다.

성기사들이 나서도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혼자 몰래 숲으로 들어가서 뒤진다고 해도 당연히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건 어차피 말려봐야 들을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알겠어, 그럼 나도 같이 가."

그리고 톰이 자신 때문에 실종됐다는 죄책감도 있었다.

헤런 역시 지금 상황이 답답하고 당장이라도 직접 숲으로 들어가서 친구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인 건 마찬가지였다.

"넌 됐다니까. 나 혼자 갈 거야."

"맘대로 해. 계속 그렇게 고집부리면 바로 다른 사제님들께 말하러 달려갈 거니까."

엘리카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창문을 통해 몰래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온 둘은 건물에 몸을 숨기고서 숲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성기사 몇 명이 서있었지만, 그러면 다른 방향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길이 나있지 않다고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니니.

그렇게 두 사람은 몰래 바깥쪽으로 빙 돌아서 숲 안으로 들어섰다.

숲 안으로 어느 정도 들어서고 나서 엘리카는 램프를 감싼 헝겊을 풀었다.

숲 내부는 램프가 없었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었다.

달빛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램프가 있는 지금도 고작 몇 걸음 앞만 겨우 보는 것이 전부였다.

"생각보다 훨씬 어둡잖아······."

당연히 이렇게 캄캄하기 그지없는 밤에 숲에 들어온 적은 헤런도, 엘리카도 없었다.

마치 괴물의 입속을 거니는 기분을 느끼며, 어두컴컴한 시야에 의존해서 방향을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헤런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하려고?"

어디서부터 톰의 흔적을 찾아야 할지를 묻는 것이었다.

엘리카가 대답했다.

"숲에 나있는 길을 따라서 찾아야지."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그게 최선이기는 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계속해서 숲 안쪽으로 나아갔다.

헤런은 그 뒤를 따라가며 차라리 지금 숲 어딘가에 있을 제르엘과 마주치기를 바랐다.

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발자국이든 무엇이든, 엘리카는 뭐라도 톰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두 눈을 부릅 뜨고서 숲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찾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수도원의 성기사들이 단체로 나서도 찾아내지 못한 걸 그녀가 혼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우······."

결국 지친 엘리카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답답한 한숨을 쏟아냈다.

헤런도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날이 밝을 때까지 숲을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벌써 들켜서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몰라."

"······."

엘리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숲 저편을 바라봤다.

헤런은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며 더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야, 헤런."

헤런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돌아봤다.

그리고 어둠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무언가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저게 뭐야?"

그 물음에는 헤런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한순간 넋을 놓고서 멍하니 바라봤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어느새인가 지척까지 다가온 그것은······ 촉수였다.

마치 뱀처럼, 끝쪽에 자그마한 아가리를 뻐끔거리는 촉수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카와 헤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악몽이라도 꾸고 있나 생각했다.

"어, 어······."

엘리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기로 목검을 챙겨오긴 했지만 당연히 저런 괴물과 맞서싸울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빛살처럼 뻗어온 촉수가 헤런의 다리를 휘감았다.

"······흐아악!"

바닥에 넘어진 헤런이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거렸다.

"헤런!"

엘리카는 다급히 목검을 휘둘러 헤런을 붙잡고 있는 촉수를 연신 내리쳤다.

그러나 마치 강철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는 촉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다른 촉수가 또다시 뻗어와 이번엔 그녀의 목검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뺏어들어서 부러뜨러버렸다.

촉수는 엘리카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오직 헤런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 난 됐으니까 도망쳐! 엘리카······!"

헤런이 두려움에 가득 질린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엘리카는 그 말을 무시하고 부러진 목검을 다시금 집어들었다. 뾰족하게 부러진 목검으로 촉수를 미친 듯이 내리찍었다.

이번엔 조금 피해가 있었는지 단단하기 그지없는 촉수의 표면에 생채기가 나며 검은 핏물이 튀어올랐다.

끼이익!

한 차례 괴성을 내뱉은 촉수가 그런 엘리카를 밀쳐냈다.

촉수에 정통으로 후려맞은 그녀는 한순간 허공에 붕 떴다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으······."

더욱 사납게 날뛰기 시작한 촉수가 나머지 촉수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헤런의 팔다리를 모두 휘감아버렸다.

간신히 몸을 가눈 엘리카는 그 광경을 보고서 하얗게 질렸다.

촉수는 그대로 헤런의 몸을 찢어버릴 듯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 하지마······! 안돼!"

그대로 끔찍한 참상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번쩍!

갑작스레 번쩍인 백색의 섬광이 한순간 숲속을 환하게 밝혔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촉수는 완전히 난도질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있었다. 그리고 헤런은 무사했다.

"큰일이 날 뻔했구나. 괜찮느냐?"

엘리카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을 향해 검을 든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르엘이었다.

조우 (12)

톰은 완전히 죽었다 살아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갑작스레 등장한 제르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르엘이 쥐고 있는 검에는 강대한 기운이 담긴 순백색의 광채가 환하게 빛나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엘리카는 그가 검기를 쏘아 촉수들을 베어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이내 가까이 다가온 제르엘이 헤런과 엘리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에 두 사람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른들의 말을 어기고 몰래 숲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니까.

어렵지 않게 상황을 짐작한 제르엘은 쓰러져있는 헤런의 상처부터 살폈다.

"윽······."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촉수에 꽉 조여진 탓에 헤런의 팔다리는 피멍이 들어서 퉁퉁 부은 채였다.

제르엘은 상처를 살펴보고는 상처 부위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방금 전 검기와 같은 순백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상처들을 흔적도 없이 치료했다.

수도원의 사제들이 펼치는 치료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회복 속도에 헤런도 엘리카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 감사합니다. 제르엘 경······."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제르엘이 책망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허락을 받았을 터일리는 없고, 다른 사람들 몰래 들어온 모양이구나. 친구를 찾고 싶어 이런 위험천만한 짓을 한 것이냐?"

엘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런은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제르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이 숲으로 들어와봤자 위험하기만 하지 도움이 될 일은 없다는 건 두 사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숲으로 들어오고 만 것이리라.

사람은 이성보다도 감정이 앞서는 생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아이들이었다. 제르엘도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숲에 들어왔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한 건 이해한 거고,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봤다시피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는 숲이다. 너희가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다."

제르엘이 바닥에 널브러진 촉수 사체를 힐끗 내려다보며 말했다.

엘리카와 헤런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봤다.

이 괴물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이런 것이 수도원 숲에 존재하는지 둘의 머릿속에 의문과 두려움이 스쳤다.

방금 제르엘이 베어버린 괴물은 평소 그들이 책 속에서 보던 일반적인 몬스터들의 생김새와도 현격하게 다른 무언가였다.

"경, 대체 이 괴물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제르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어째서 숲에 이런 존재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들을 퇴치해온 그도 이런 괴생물을 마주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야 넘치도록 겪어봤다. 하지만 얼마나 강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기괴하냐의 문제였다.

마치 마경에나 나올 법한, 혹은 마족들의 영역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마족.'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제르엘은 사실 처음 이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질감은 수도원장인 디호드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이 숲에 들어와있는 지금은 더욱 커져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르엘은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수도원의 숲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는 수도원장인 디호드와 분명히 어떠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제르엘은 일단 숲을 더 탐색해보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두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먼저였다.

"몸은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느냐?"

"네, 네······ 완전히 나은 것 같습니다."

"바깥으로 데려다주마. 수도원 건물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단호한 제르엘의 말투에 헤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방금 그런 괴물한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이었기에 더 숲을 돌아다닐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카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저도 수색에 함께하게 해주세요, 경."

엘리카도 헤런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평생에 본 적도 없는 괴생물체를 봤는데 아무리 겁이 없는 그녀라도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도 오히려 톰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다.

숲에 실제로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 톰의 실종은 그와 관련이 있다는 게 거의 분명해진 것이었으니까.

"안 된다."

그런 그녀의 정신력에는 제르엘도 감탄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순순히 말을 들을 기색이 아니자 제르엘은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거칠게 손을 써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지는 않구나. 말을 안 듣겠다면 기절시켜서라도 짊어지고 나가마."

"······."

그렇게까지 말하자 엘리카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울한 기색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쨌든 그렇게 제르엘이 두 사람을 데리고 숲 밖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

돌연 제르엘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고정했다.

그에 엘리카와 헤런도 그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곧 어둠 너머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상이 걸어나오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원장님?"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헤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숲 한편에서 튀어나온 이의 정체는 바로 수도원장인 디호드였다.

갑자기 여기에 원장이 왜 온 것인가 엘리카와 헤런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제르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집에 회수했던 검에 다시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곳에 계셨군요, 제르엘 경. 한데 그 둘은 어찌된 일입니까?"

세 사람과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서 멈춰선 원장이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르엘이 담담하게 답했다.

"숲에 몰래 들어왔다가 제가 발견했습니다. 방금 막 데리고서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다시 한 번 괴물의 사체를 내려다보고서 물었다.

"원장,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그 물음에 디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 숲에 정말로 이런 괴물이 존재했다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에는 엘리카와 헤런까지도 명백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디호드의 태도가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나 태연하고 평화로웠으니까.

이런 괴물이 죽어있는 걸 보면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애초에 성기사들도 없이 왜 이곳에 혼자서 왔지?

"원장."

"예, 제르엘 경."

"정체가 무엇이오?"

제르엘의 목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서늘한 음성에 헤런과 엘리카도 움찔 놀라서 디호드를 바라봤다.

뒷짐을 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디호드가 다시 한 번 입가에 미소를 내걸었다.

하지만 방금 전과 판이하게 다른 섬뜩하고 기괴한 미소였다.

"참으로 일이 귀찮게 됐습니다. 이제 거의 다 때가 됐었는데, 하필이면 종속 하나가 말썽을 부려서는."

디호드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괴물의 사체가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더니 그에게로 흡수되었다.

제르엘은 그 광경에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역시 마족의 계약자였군."

"아, 경께는 익숙한 광경일 수 있겠군요. 과거에 마족과의 전쟁을 직접 겪으신 분이니."

괴물의 기운을 회수한 디호드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르엘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아무튼 봐선 아니될 걸 봤으니 이곳에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디호드의 손에 불길한 흑색의 기운이 뭉쳐졌다. 숲에 내려앉은 밤의 어둠보다도 더욱 검은 기운이었다.

마치 거대한 실타래처럼 뭉쳐진 그것은 이내 수십 갈래로 뻗어져 제르엘을 향해서 쇄도했다.

그에 제르엘의 뒤에 서있던 엘리카와 헤런은 경약해서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움츠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르엘이 섬전처럼 검을 뽑아든 건 그와 동시였다.

번쩍!

좀 전보다도 훨씬 밝고 강렬한 순백의 기운이 일순간 숲을 뒤덮었다.

디호드의 공격은 그 백색의 섬광에 잡아먹혀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크아악!"

가슴팍에 거대한 검상이 새겨진 디호드가 피를 철철 쏟아내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방금 전까지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에도 없었고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검을 거두고서 제르엘의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종된 아이들은 어디에 있지?"

제르엘이 서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디호드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려 그런 그를 올려다봤다.

설마 단 일격에 승부가 나버릴 줄은 몰랐기에 디호드는 지금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교단의 최고 전력인 광휘의 기사, 아무리 그런 광휘의 기사라지만 힘의 격차가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광신도 놈이······ 끄악!"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디호드의 어깨에 제르엘이 검을 찔러넣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방금 전의 새하얀 검기를 불꽃처럼 피워내어 검날을 박은 채 그대로 디호드의 살을 지졌다. 디호드의 괴성이 울려퍼졌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헤런과 엘리카는 움찔 놀랐다.

평소 온화하기 그지없던 그의 모습과 완전히 정반대의 잔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제르엘의 본색인 것은 아니었다.

제르엘은 단지 수많은 경험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족과, 그런 마족들에게 영혼을 판 계약자들을 상대로 자비와 관용 따위를 베풀어주는 건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종된 아이들은 어디에 있나?"

다시 한 번 제르엘이 물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디호드가 이내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큭, 큭큭······ 과연 멍성대로 더럽게 강하긴 하구나."

"······."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결국 네놈은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니······."

제르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디호드의 몸에 꽂힌 검을 뽑았다.

아무래도 당장 제대로 된 대답을 듣는 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제르엘은 고개를 돌려 엘리카와 헤런 두 사람을 돌아봤다.

그는 일의 우선 순위를 착각하지 않았다. 우선은 이 위험한 장소에서 두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아아.

제르엘의 손에서 순백의 기운이 사슬이 형태로 뭉쳐지더니, 순식간에 디호드의 전신을 휘감고서 꽁꽁 포박했다.

디호드의 뒷덜미를 붙잡은 제르엘이 두 사람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

갑작스레 한편에서 요동치는 거대한 기운에 제르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시뻘건 핏빛의 파도가 제르엘이 서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그 광경에 엘리카가 소리를 질렀다.

"······제르엘 경!"

기운이 가시고 다시금 모습이 드러난 자리에 다행히도 제르엘은 무사했다. 그의 주위에는 순백의 장막이 펼쳐져있었다.

좀 전에 디호드가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파괴력.

제르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슬아슬하게 금이 간 장막을 바라보다가, 기습이 날아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빛 피부를 한 기괴한 생김새의 남자가 어느새 그곳에 서있었다. 마족이었다.

조우 (13)

다음날 동이 트면 곧바로 수도원에서 나서기 위해 일찍 잠에 들었었던 나는, 수도원에서 느껴지는 소란에 깨어났다.

그리고 뒤늦게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 중 둘이 수도원 뒷편의 숲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기에 수도원이 한바탕 뒤집어진 것이었다.

그중 한 명이 나도 잘 알고 있는, 엘리카와 헤런의 친구인 톰이었다.

'떠나기 직전에 이런 일이 터지네······.'

나는 방밖에 있는 복도의 창가에 서서 뒷마당 너머로 보이는 숲을 내려다봤다.

바로 내일이면 수도원에서 떠날 예정이었기에 참 묘한 타이밍이다 싶었다.

물론 녀석의 실종이 나한테 있어 어떤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야 예정대로 날이 밝으면 갈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엘리카, 헤런, 톰, 그들 셋은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냥 신경을 끄고 휙 떠나버리기도 당연히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에단 씨."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어왔다. 테인 사제였다.

한밤중이었지만 그의 낯빛에 진 어두운 그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일 떠나셔야 하는데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예, 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내 말에 테인이 떠나가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언가 찾은 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별일이 없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렇군요. 지금도 수색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원장님께서 일단 수색을 중단하라고 말씀하셔서 날이 밝으면 성기사들이 다시 수색을 재개할 겁니다."

그런가.

엘리카에게 듣기로는 예전에도 사제와 성기사들이 숲에서 실종된 적이 있다고 했었다.

이런 밤중에 무리하게 수색을 이어가다가 자칫 성기사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일단 중단한 듯 싶었다.

'정말로 숲에 뭐가 있기는 한 건가?'

정말 소문대로 정체불명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정말 괴물의 소행이라면 흔적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헤런이 말했다.

"그래도 제르엘 경께서 직접 아이들을 찾아주시러 숲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부디 뭐라도 발견하셨으면······."

제르엘 경?

광휘의 기사가 직접 수색에 나섰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나마 안심할 일이었다.

그의 레벨은 80이 넘는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뭐라도 성기사들은 찾지 못한 단서를 뭐라도 얻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

"······."

하지만 설마 광휘의 기사마저도 숲에서 실종된다면?

그건 애초에 이들의 수준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것이었다.

그때 한순간 하나의 인물이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수도원장.'

그는 주변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60레벨이 넘는 실력자였다.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 그가 이 사건에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억측이고 비약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를 직감이 들었다.

나는 그 직감을 무시하지 않고 테인에게 슬쩍 물었다.

"원장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테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예? 아마도 원장실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정확히는 모른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에단 씨께서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그만 주무십시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테인이 떠나가고,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숲을 다시 바라봤다.

왜인지 모를 불길함이 숲 어딘가에서 뿜어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서 아래쪽으로 공간 도약했다.

한번 숲으로 직접 들어가봐야겠다.

***

제르엘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앞에 나타난 잿빛 피부의 남성을 바라봤다.

그는 가공할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저 불길하기 그지없는 생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족.

젊었던 과거,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대륙의 공적. 최악의 종족.

"······네가 원장에게 힘을 준 마족이겠군."

마족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마족이라면 원장과 관련된 존재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제르엘은 온 신경을 마족에게 집중한 채 검을 겨누었다.

좀 전의 날아든 일격의 파괴력은 결코 자신보다 아래의 수준이 아니었다.

주위를 슥 둘러본 마족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쯧, 벌레 같은 놈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일을 크게도 벌였구나."

제르엘의 손에 붙잡혀있던 디호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항변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메, 메퓌르님! 오해이십니다! 이 자는 교황령에서 찾아온 광휘의 기사입니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시끄럽다."

마족이 그의 말을 끊고서 손을 휘저었다.

화아악!

그러자 그의 몸에서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나오더니 마족에게로 흡수되었다.

"······끄아아악!"

디호드가 단말마와 같은 찢어지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생명력이 증발해버린 듯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다.

제르엘은 침음을 흘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족과 계약한 자의 말로, 힘의 회수. 어차피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디호드에게서 기운을 전부 빨아들인 마족은 다시 제르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르엘은 엘리카와 헤런 두 사람을 등 뒤에 두고 선 채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던 것인지 대답해라, 마족."

원마는 아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마족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괴물들이니까.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마족들 중에서 상위에 속하는 수준의 강자인 것은 분명했다.

이 정도 마족이 수도원장을 계약자로 삼고 이곳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마수가 이곳 로벨지오 수도원에 뻗쳐있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었다.

마족이 묘한 눈길로 제르엘을 쳐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부 알고 파견을 온 건 아닌 모양이군."

"······뭐라고?"

"하긴, 그랬다면 너 따위 버러지가 아니라 용사가 직접 행차했겠지."

마족이 제르엘을 향해 무심하게 손을 뻗었다.

"네놈을 처리하고 이 수도원만 정리하고서 그만 회수해가면 되겠구나."

그 순간 제르엘은 마족의 시선이 엘리카에게로 향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곧바로 공격이 날아들었다.

마족의 손에서 방금 전의 핏빛 기운이 번쩍이더니 광선처럼 쏘아졌다.

제르엘도 황금빛의 검기를 찔러 정면에서 그 공격을 막아냈다.

바로 뒤쪽에 엘리카와 헤런이 있었기에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시뻘건 기운과 황금빛의 기운이 뒤섞이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제르엘은 방어막을 넓게 펼쳐 폭발의 여파까지 막으며 넋을 놓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급히 외쳤다.

"도망쳐라! 숲을 빠져나가!"

엘리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서 헤런의 팔을 이끌었다.

무력한 처지가 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그녀라도 이번에는 순순히 제르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전투에 방해만 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슈우우우!

마족의 주위에 넘실거리는 핏빛의 기운이 거대한 검날의 형태로 뭉쳐졌다.

도망치려는 두 사람을 향해서 검날이 지면을 통째로 짓뭉개듯 내리쳐졌다.

제르엘이 다급히 검기를 쏘아내어 검날을 파괴시켰다.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충격파가 일어났다.

마족이 성가시다는 듯 다시 한 번 기운을 부풀렸다.

그의 주위에 떠오른 구체처럼 뭉쳐진 기운들이 사방으로 날카로운 가시들을 폭발적으로 쏘아냈다.

카카카카캉!

두 사람의 신변이 우선이었던 제르엘은 가시가 그들에게 적중하지 못하게 막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숲속의 짙은 어둠에 수많은 황금빛의 잔상이 그의 검을 따라서 새겨졌다.

한참을 가시들을 튕겨내던 제르엘의 눈이 돌연 크게 떠졌다.

어느새 바로 밑의 지면에서 튀어나온 핏빛의 촉수들이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

동시에 마족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기운이 유동했다.

다급히 앞쪽을 바라보자 핏빛의 거대한 구체가 뭉쳐져있었다.

주위의 공간마저 왜곡시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구체가 느리지만 빠르게, 그를 통째로 삼켜서 소멸시킬 듯 다가왔다.

제르엘은 별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번쩍!

그의 목에 걸려있던 로자리오가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그 밝은 빛에 한순간 마족도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빛은 제르엘의 다리를 구속한 기운은 물론이고 마족이 쏘아낸 거대한 구체마저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다시 자유를 되찾은 제르엘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서 마족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돌진했다.

그의 검날이 그대로 마족의 목을 베어버리고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제르엘의 몸이 휘청거렸다.

돌연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타들어가는 고통에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날카로운 핏빛의 기운이 가슴을 꿰뚫고서 나와있었다.

'왜······.'

왜 공격에 당한 거지?

피를 울컥 쏟아내며 제르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마족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별 감흥이 없다는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는 듯.

제르엘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전력을 발휘한 적이 없었다는 걸.

"크헉······!"

핏빛의 기운은 순식간에 몸 내부에 침투하여 남아있는 기력을 모조리 증발시켰다.

서있을 힘조차 사라져버린 제르엘은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에 도망가고 있던 엘리카와 헤런이 멈춰서서 소리쳤다.

"······제르엘 경!"

제르엘은 계속 도망치라고 간신히 손을 휘저었지만,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마족이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부질없다. 네놈도, 이 수도원에 득실거리는 벌레들도 밤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있을 것이다."

제르엘은 멀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좀 전에 성물의 힘을 빌려 펼친 마법도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대로면 이제 곧 이 마족의 손에 목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수도원의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목적이 뭐냐? 저 소녀와 관련이 있는 건가?"

제르엘이 목소리를 쥐어짜내 물었다.

분명히 전투가 시작하기 전 엘리카에게 향했던 마족의 시선은 심상치 않았다.

마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었다.

'신이시여······.'

제르엘이 눈을 감고, 지켜보던 엘리카와 헤런의 얼굴에도 절망감이 들어찼다.

마족의 손에서 핏빛의 기운이 파도처럼 몰아쳐 제르엘을 뒤덮었다.

콰아아앙!

그 일격에 고스란히 맞았다면 제르엘의 몸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그는 여전히 멀쩡했다.

의문을 느끼며 제르엘은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앞에 서있는 누군가의 등이었다.

"······흠?"

공격이 막힌 마족은 인상을 찌푸린 채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를 바라봤다.

엘리카와 헤런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숲속에 쓰러져 수도원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외부인.

남자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에단이었다.

조우 (14)

숲 한편에서 거대한 마력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건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적어도 80레벨급의 강자들이 전력으로 맞붙어야 일어날 마력 충돌.

'뭐지?'

한쪽은 광휘의 기사인 제르엘일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현재 숲에 들어가있는 인물은 그였으니까.

문제는 다른 반대편이 누구냐는 것이다.

나는 바로 좀 전까지 수도원장이 이번 일에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미심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싸우고 있는 이가 원장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왜냐면 그의 레벨은 기껏해야 60레벨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80레벨이 넘는 제르엘과 전투를 벌였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떨어지거나 제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수도원에 제르엘에 버금가는 레벨을 지닌 다른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는 원장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 3의 인물?

"······!"

현장에 가까워지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피안개처럼 숲 한편에 시뻘겋게 퍼진 기운이었다.

불길함이 넘실거리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기운.

이 기운은 이전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바로 디트로데미얀에게서.

단 한 번 경험해봤을 뿐이지만,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기운은 잊을 수가 없었다.

'······마족!'

핏빛의 기운에 대항하여 황금빛의 기운 또한 그와 뒤섞여 격렬하게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힘이 다해버린 듯 완전히 끊겼다. 제르엘이 당한 건가?

한 발 늦었나 싶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것은 쓰러져있는 제르엘과, 그 반대편에 서있는 잿빛 피부의 남자. 마족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엘리카와 헤런까지.

'저 둘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마족이 제르엘을 완전히 끝장낼 듯 거대한 기운을 뭉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제르엘의 앞으로 공간 도약하여 부동 장막을 펼쳤다.

동시에 핏빛의 기운이 파도처럼 내가 서있는 자리를 거세게 휩쓸었다.

쿠구구구.

손을 거둔 마족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녀석과 잠시 눈으 마주치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제르엘이 경악과 당혹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 신은······?"

일전에 잠시 마주쳤을 뿐이지만 반응을 보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에, 에단 씨?"

엘리카와 헤런 또한 벙찐 기색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러서라는 손짓만을 보내고서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Lv. 85]

놈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은 85.

아주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강자.

81레벨인 제르엘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상대이긴 했다.

"성가시게도 새로운 벌레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구나."

이내 마족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명백히 경계가 섞인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버렸으니 어지간히 오만한 놈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경계를 할 수밖에 없겠지.

세인테아의 영역으로 넘어와 무언가 수작을 꾸미고 있는 마족이다.

마족들은 대체로 오만하고 포악하긴 하지만, 이런 놈들 중에 만용을 부리는 놈은 거의 없었다.

'그나저나······.'

바닥 한편에 말라비틀어진 채 널브러진 시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수도원장의 시체. 얼굴을 제대로 못 알아보겠지만, 기억하는 그의 복장과 일치하니 아마 맞을 것이다.

"수도원장이 흑막이었습니까?"

나는 제르엘에게 물었다.

멍하니 입을 다물고서 있던 그가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 마족은 원장과 계약한 마족이겠군요."

보통 마족들이 자신들의 영역 밖에서 벌이는 개수작이라고 하면 단순하다.

계약자들을 불리고 그들에게서 영혼이나 생명력 등의 대가를 가져가기 위하여, 혹은 아예 격이 떨어지는 마족들은 단순히 인간의 피와 살점을 탐하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이나 작은 도시 등에 숨은 마족들이 사람들을 습격하고 잡아먹는 건 그렇게까지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놈은 그런 류도 아닐 것이었다.

비록 내 주위에 워낙 괴물들이 득실거려서 눈이 좀 높아지긴 했지만, 80레벨대의 마족이면 마족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마족이었다.

이런 놈이 고작해야 변방의 수도원에 불과한 곳에서 도대체 뭔 짓을 꾸미고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래, 이 정도 수준의 마족이 나설 일이라면······.

'······설마?'

머릿속에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게임에서도 관련 에피소드 자체가 있지는 않았지만 대사들을 통해 꾸준하게 등장했던 개념.

마족들이 마왕의 부활을 앞당기기 위해 찾는다는 마의 씨앗.

설마 정말로 그거인가?

나는 한편에 서있는 엘리카를 슬쩍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마족의 시선이 묘하게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기는 했다.

"마의 씨앗."

내가 그것을 입으로 내뱉자 마족의 인상이 따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반응으로 내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마족 놈이 이곳 수도원에서 이러고 있는 건 마의 씨앗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의 씨앗은 아마도 엘리카다.

"마의······ 씨앗?"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르엘이 중얼거렸다.

이건 아직 마족들이 덜 날뛰기도 했고, 놈들 사이에서도 극비인 사항이기에 이 개념을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사를 제외하고.

다만 그녀는 여러 가지 금제 때문에 이 마의 씨앗처럼 주변에 말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알아봐야 그녀를 도와서 마족들의 마수를 막을 수 있는 인재가 세인테아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저 소녀가 마의 씨앗이었군."

내가 그렇게 확정을 내리듯 말하자 침묵하고 있던 마족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 어떻게?"

좀 전까지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마족의 얼굴에 명백하게 당혹감이 차올랐다.

놈의 입장에서는 내가 대체 마의 씨앗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 싶을 것이었다.

"대답해라, 인간. 그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놈의 의문에 대답해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확인할 건 모두 확인했다.

나는 제르엘에게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 예······."

"그럼 물러나십시오. 전투에 방해가 되니."

그에 제르엘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마족이 그를 얌전히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놈이 손에 핏빛으로 거대한 기운을 뭉치더니 그것을 광선처럼 쏘아냈다.

나는 다시금 부동 장막을 펼쳐셔 가볍게 막았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살점을 하나하나 찢어서 실토하게 해주마!"

마족의 주위에 불길한 마력이 요동쳤다.

허공에 떠오른 핏빛 구체들에서 방금 전의 광선들이 어지럽게 쏘아졌다.

하지만 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 공격들을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모두 막아내기만 했다.

핏빛의 마력이 터지고 흩어지며 주위에 마치 피안개와 같은 것이 자욱하게 퍼졌다.

놈의 마력은 대체로 핏빛이었기에 이전에 폭왕과 싸웠던 게 생각나는 풍경이었지만, 당연히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

공격이 막히기만 하자 놈도 서서히 다급해지는 기색이었다.

원마도 결국 뚫지 못한 부동 장막을 놈 따위가 뚫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나는 잠시 공세를 멈춘 녀석에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네 공격이 내게 닿을 일은 없다."

"······."

"너야말로 목숨에 자비를 베풀어줄 때 대답해라. 이번 일에 원마가 관련되었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것은 다른 마족, 그러니까 원마의 개입이었다.

마의 씨앗은 마왕의 부활과 관련된, 놈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항이었으니까.

그런 일에 원마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감히! 인간 따위가!"

그러나 놈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모멸감과 격분만이 가득한 기색으로 마력을 끌어올릴 뿐이었다.

이번엔 전력을 다한 필살의 일격이라도 날리려는 건지 심상치 않았다.

핏빛의 기운이 마족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쳤다.

물론 그것을 가만히 기다려줄 이유는 없었다.

놈은 몸 주위에 방어막 따위는 펼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놈의 목숨을 끊어야 되나 고민했다.

여기서 놈의 목숨을 끊으면 더 정보를 캐낼 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계속 공격을 맞아주고만 있을 수도 없고, 계속 이런 양상이 지속되면 결국 몸을 내뺄 것 같았기에 별 수 없었다.

"······?!"

공격의 준비가 마저 끝나기 전에 나는 놈의 바로 눈앞으로 순간이동했다.

놈의 눈이 순간 경악으로 커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즉살에 당한 놈의 몸이 풀썩 넘어갔다.

허공에서 격동하던 놈의 마력도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

나는 놈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르엘과 다른 두 사람이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제르엘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물었다.

"저 마족은······."

"죽었습니다."

"······대체 경께선 누구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짧게 대꾸했다.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 일단 숲에서 나갑시다."

제르엘의 부상이 심각하기도 했고, 여유롭게 말이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는 엘리카와 헤런을 돌아봤다.

"너희는 괜찮냐?"

"······네, 네."

헤런이 더듬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수도원에서는 지금껏 빌빌거리는 모습만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저······."

헤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뭐라 말하려 했지만 더듬거리며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엘리카가 나서서 말했다.

"아직, 톰을 찾지 못했어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그러고 보니 원래 실종된 애들을 찾으려고 했던 거였지.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일단 그들을 숲 바깥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숲을 더 수색해보마. 경의 부상이 심하니 일단 수도원으로 돌아가자."

제르엘의 꼴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기에 엘리카도 순순히 말대로 따랐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위험하게 숲에 들어온 거냐?"

"······몰래 들어왔다가 제르엘 경께서 저희를 구해주셨어요."

그런 거였나.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가 실종됐으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숲에 직접 들어온 모양이었다.

내가 이들의 보모도 아니었기에 굳이 그에 대해서 꾸짖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세 사람을 데리고서 숲 바깥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허공에 어두운 기운이 일렁이더니, 공간이 쩍 갈라지듯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아아······ 이게 도대체 뭔 꼴이야?"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려있는 잿빛 피부의 여인.

태연자악하게 주위를 슥 둘러보고서 푸념하듯 투덜거린 여인이 이쪽을 바라봤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안녕? 너는 또 뭘 하는 인간일까?"

"······."

반대로 나는 웃지 못했다.

그녀의 외관에서 정체를 곧바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원마, 서열 13위의 마족 아카슐라.

마음속 한편에 차있던 불안이 씨가 되듯 정말로 원마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