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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층을 가득 메웠던 마녀의 원한도 사라졌다.

"풀린 거냐."

혼자 중얼거린 나는 마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곧 그 곁에 다가가 유리 위로 손을 뻗었다.

'유리 공작'

조소하는 신데렐라에게 받았던 세례를 발동시킨 순간 유리로 된 아이들이 그녀의 곁에 만들어졌다.

"혼자 있던 것보다는 괜찮네."

['파라만의 피리'가 당신에게 감동합니다.]

['파라만의 피리'가 당신을 지목합니다.]

['파라만의 피리'가 당신에게 세례를 내립니다.]

"망할, 엿보기 범이."

뜬금없이 세례를 받은 순간 내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쑥스러운 짓을 했단 것을 자각했던 탓이었다.

['파라만의 피리'가 즐거워합니다.]

썩을 성좌들.

순간 짜증이 치밀었지만 참았다.

세례는 언제, 어디서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

나는 툴툴거리며 다음 계단을 찾아 올랐다.

현재까지 내가 클리어한 것은 아직 22층.

앞으로 클리어해야 할 층이 산더미같이 남아 있었다.

"하천성!"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검왕이 서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층이 클리어되자마자 계단을 오른 모양이었다.

층이 클리어됐을 때, 성좌가 층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잠시 동안은 안전지대가 되니 그 틈에 올 수 있었겠지.

규칙대로라면 검왕이 클리어를 포기한 지금, 패널티로 일주일 동안 22층에 대한 도전권을 잃게 되니까.

물론 잠깐 동안 안전지대가 된 층을 올라 봤자 나를 뒤따라 계단을 오를 방법도 없지만.

"당신, 정말로...."

"먼저 간다. 천천히 클리어하고 와라."

나는 검왕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번 클리어는 검왕의 공이 컸다.

그녀의 정보 덕분에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나름의 선물을 툭 던졌다.

"악마를 잘 이용해."

힌트.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이다.

"뒤쫓아 갈게."

기분 좋은 대답이 들려오자 나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검왕을 뒤로 하고 다시 또 계단을 올랐다.

* * *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러진 팔 하나와 찌푸려진 인상.

식은땀을 흘리며 이단아는 걷고 있었다.

"이단아."

그 순간 이단아를 부르는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고, 그 남성을 발견한 이단아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꼴이 말이 아니군."

"...죄송합니다."

거리의 어둠에 가려진 남성의 말에 이단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남성은 천천히 어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전신에 둘린 나무 모양의 문신, 흰색과 검정이 반전된 눈동자, 허리 가에서 나부끼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

야신이었다.

"하천성의 짓인가."

"예,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회귀자들 중 가장 강한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야신의 물음에 이단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 말에 야신은 침묵했고, 곧 어느 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나서야 할 모양이군."

"그러게."

어둠 속에는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그 사람은 누군가와 닮은 얼굴을 한 채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이단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저 사람은."

"이단아, 치료를 위해 당분간 쉬어라. 하천성은 저자가 해결할 테니."

"예."

이단아는 야신의 말 한마디에 조금의 토도 달지 않고 순응했다.

이단아가 텔레포트로 사라지자 남겨진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갔다.

"부탁하지."

"그래, 하천성은 내 몫이니까."

야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22.5층.

현재 나는 23층 공략을 앞두고 피로를 풀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10층에서 22층까지 돌파하는 데 기력과 시간을 투자했기에 슬슬 하루 정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왕은 그 뒤로 바로 클리어에 들어갔겠지.'

날 뒤쫓아 왔던 검왕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그 여자도 계속 크라운 로드를 오를 테지.'

호텔의 욕조에 몸을 누인 나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달려오며 쌓인 피로감이 겨우 풀리는 것 같았다.

'다음 층은 어쩌려나.'

매일같이 새로운 층을 공략했기 때문일까, 나는 습관처럼 다음 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성좌 변동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5회차에 들어섰음에도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과거 4회차 동안 50층을 오를 때까지는 똑같은 것의 무한 반복이었으니까.

'덕분에 보상도 쏠쏠하게 얻고 있고.'

이런 호텔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상당한 양의 재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파라만의 피리'의 보상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욕실에서 나온 나는 물기를 닦아 내곤 가운을 입은 뒤, 곧바로 보상을 받기로 했다.

"클리어 보상을 받겠다."

그 순간 내 손 위에 검 하나가 떨어졌다.

[22층 보상으로 별천도가 주어집니다.]

오, 오랜만에 마주한 무기 보상이다.

손에 쥐어진 검의 그립에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다.

겉모습만 봐도 상당히 아름다운 별천도의 모습에 한 번 검을 뽑아 보았고, 그 순간 우주가 새겨진 듯한 새까만 검날이 보였다.

그와 함께 중간중간 별이 지나가는 듯한 무늬를 보며 나는 꽤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쁜 건 좋지. 값어치 있어 보이니까."

사람이란, 몸에 걸리는 것이 고급스러워야 저절로 품격이 풍겨 나오는 것이다.

파라만의 피리가 나름 괜찮은 걸 줬다고 생각하며 나는 검집에 다시 넣었다.

최근에 쓰는 도가 슬슬 날이 무뎌진다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새로운 무기를 장만했다.

곧이어 나는 파라만의 피리가 부여한 세례를 확인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

몬스터에게 인기 스타.

당신은 몬스터의 시선을 끄는 최고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능력을 발동하면 1km 밖에서도 몬스터가 당신에게 달려들 겁니다.

단, 주의하세요.

몬스터들은 당신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거니까요.

(파라만의 피리가 부여한 세례입니다.)

그것참 별 쓸모없는 기술이네.

'레벨 업을 할 때는 쏠쏠하겠지만.'

그러나 이미 남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강해진지라, 내게는 그다지 쓸모없는 세례다.

뭐, 없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 리모컨을 들었다.

TV를 켜자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 뉴스는 '구애하는 정보' 성좌가 운영하는 것으로 매일 있는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것이었다.

물론 50층까지의 정보만 보도되기에 이후의 정보는 알 수 없다.

"내 이야기가 나오네."

마침 뉴스에서 내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초신성 같은 인물 하천성, 그는 지금 참가자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크라운 로드를 오르고 있다. 게다가 혼자서 22개의 층을 클리어한 그의 홀로서기는 어디까지 향할 것인가! 세간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보도되었다.

이후, 이와 관련된 내용의 인터뷰를 하는 사람도 영상에 나왔다.

"마도, 저 녀석."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마도도 있었다.

몇 달 전에 본 얼굴이지만 이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그는 해맑게 인터뷰를 했다.

그는 나와 같이 2층을 클리어한 사람으로서, 자신은 내가 해낼 거란 걸 믿고 있었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나 원, 구애하는 정보답다.

이미 내 정보는 다 가지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참가자의 개인 정보를 말하는 건 규칙 위반이었기에 내가 어찌 강해졌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 후, 나는 TV를 끄고 우선 한숨 자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짹짹거리는 새 소리에 시끄러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 나는 하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22층까지 클리어하고 잠깐 쉬기로 했었지.'

기지개를 피며 일어난 나는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그리고 세수를 하고자 물을 틀던 순간, 내 얼굴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내 얼굴이.

"X발, 뭐야 이거."

마치 게임에나 등장하는 '마을 사람 1'처럼 흔한 상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1%]

['23층의 주인' '삼라만상의 정신'이 비웃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자가 허공에 나열되었다.

그 문자를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며 '23층?' 하고 중얼거렸고, 곧 무언가 떠오른 듯 서서히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클리어 조건."

['삼라만상의 정신'이 23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하나만의 용사.' 오래전 잠들었던 마왕이 나타났습니다! 마왕을 쓰러트려 주세요! 단, 주의하세요. 당신의 기억이 점점 '마을 사람 1'의 기억으로 덮어 씌워져 갑니다. '하나만의 용사'의 세계는 바깥 세계와는 다른 시간 축으로 흘러갑니다. 시간이 바깥보다 빠르니 주의해 주세요.]

"씨, 발."

다시 한 번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알았다.

눈앞에 뜬 글자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괴리감이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다.

나는 어제 23층에 입장했고 성좌에 의해 마을 주민의 기억이 덮여 입장했을 때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 천성아. 오늘도 일 가냐."

"네, 안녕하세요. 아저씨, 발."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2%]

12화

마치 오랫동안 안 것처럼 여관 주인아저씨와 해맑게 인사하는 내 모습에 몸서리쳐졌다.

실시간으로 마을 사람 1의 기억이 주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젠장."

여관 문을 박차고 나온 순간 하늘의 햇볕이 마을을 내리쬐고 있었다.

밖은 내가 기억하던 22.5층과 달리 판타지 같은 분위기였고, 마을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어우러져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23층, 하나만의 용사.

마을 사람 1 역할인 내가 할 일은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녀석을 처리하는 순간, 층은 저절로 클리어될 거다.

"이봐, 당신."

그리 생각한 나는 눈앞에 지나가던 남자 한 명을 불러 세웠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녀석은 양아치 같은 모양새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앙?' 하고 소리 내었다.

"나한테 볼 일 있냐?"

심기가 불편한 건지 입을 삐죽 세우며 금방이라도 싸울 듯이 구는 양아치의 모습에 나는 덤덤히 물었다.

"마왕성이 어디냐."

"마왕성? 마왕성은 왜...."

내 물음에 답하려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팍 찌푸렸다.

"너도 용사 지망생이냐?"

"지망생이고 뭐고 마왕성이 어디냐고."

"아서라. 딱 봐도 마을 사람 1 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용사를 어떻게 하냐. 나처럼 그냥 포기하고 네 운명을 따라. 난 평생 동안 용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 운명은 정해져 있었어."

나는 양아치를 쥐어박았다.

"...그래서 마왕성은 어디 있지."

"옙, 형님, 저기, 저쪽 방향으로 쭉 나아가시다 보면 바로 보이실 겁니다. 제가 직접 안내할 깝쇼?"

"그래도 되겠어?"

"옙, 어차피 전 딱히 할 일 없슴다. 형님. 용사 지망생으로 10년을 보냈는데 결국 백수밖에 할 일이 없더라고요. 헤헤."

"그래, 그래, 부탁 좀 하자. 동생."

순박한 마을 청년으로 돌아온 양아치의 머리를 텁텁 두드려 준 나는 안내하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양아치는 헤헤 하고 웃으며 안내를 시작했고, 나는 그런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저, 형님, 그런데 말입니다."

"왜 또."

안내나 할 것이지 귀찮게 또 입을 여는 양아치에게 대꾸해 주자 녀석은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도 아실 테지만, 마왕을 굳이 찾아갈 이유가 있으십니까."

"뭐가."

"예? 그야 그렇지 않습니까. 이름만 마왕이지, 딱히 그럴듯한 활동 같은 걸 전혀 안 해서 무해한 녀석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어진 양아치의 말을 듣고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그 순간 머릿속에 '마을 사람 1'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마왕, 10년 전에 갑자기 나타난 마족의 왕의 등장에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마왕성을 지은 그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정복하고자 쳐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10년이 지나도록 마왕은 움직일 낌새가 전혀 없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사람들은 어느새 마왕이라는 존재를 그저 옆 나라 왕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형님이 마왕을 퇴치해도 딱히 별다른 명성은 못 얻을 검다."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4%]

기억이 떠오른 순간 침식률이 또 다시 올랐다.

"그러니 형님도...."

"야."

"옙."

"그만 말해."

"옙."

이 녀석이 더 나불거렸다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까지도 떠올라 버릴 것 같다.

망할 정신 오염을 욕하며 한참을 이동한 나는 마왕성 바로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내 침식된 기억과 양아치의 말처럼 마치 옆 나라에 놀러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단 여기가 마왕성입니다만."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테니 넌 그만 가봐."

"옙, 형님 고생하십쇼!"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빠르게 도주하는 양아치를 뒤로한 채 나는 마왕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마왕성. 본래라면 지옥도를 연상시키는 듯한 풍경에 몬스터가 득실거려야만 하는 곳.

그러나 본래 스토리와는 달리 평화 그 자체인 그곳에서 마왕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마왕의 자리에 오르고 언 10년.

동쪽에서 용사 소환 의식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그러나 마왕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성좌 삼라만상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사도.

마왕은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은 용사에게 죽을 운명.

하지만 마왕은 죽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왕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마왕성을 짓고 난 뒤에도 마족들에게 평화를 강조하여 용사가 자신을 죽일 이유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정말 이름만 마왕일 뿐인 존재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순탄한 인생이 계속될 거라고 마왕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한 명의 남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가 마왕이냐."

평범해 보이는 얼굴, 예사로운 옷차림 그리고 유일하게 안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검 한자루.

마지막만 빼면 전형적인 '마을 사람 1' 같은 녀석이 마왕성을 찾아온 것이었다.

"누구지, 넌?"

마왕이 의문을 품고 물었다.

용사는 오지 않는다.

자신은 마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마을 사람 1 같은 게 마왕성을 찾아올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야, 내가 이제 용사 할 거라서."

마을 사람 1, 하천성은 별천도를 들었다.

그 순간 마왕은 그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파직.

하천성의 오러가 불타오르며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 모습을 직시한 마왕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마을 사람 1에게 느껴지는 감각은 고작 엑스트라에 불가한 자가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위험을 인식한 마왕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쨍그랑, 티타임을 즐기던 마왕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그 순간 번개가 튀어 올랐다.

오러를 머금은 하천성의 검은 마왕의 인식을 한참 벗어나 있었고, 그 검은 마왕의 심장을 벼락처럼 꿰뚫었다.

순식간에 심장이 꿰뚫린 마왕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하천성은 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마을 사람 1'은 마왕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걸로 클리어냐."

그러나 스테이지는 끝나지 않았다.

* * *

마왕성에 들어오게 된 나는 유유히 복도를 거닐었다.

마왕성이 꽤 컸기에 마왕이 있는 곳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탓에 지나가던 도중 사천왕이라는 것들이 내 앞을 막았다.

"누구냐! 이곳은 마왕님의 거처다! 어딜...."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내 검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사천왕을 죽이고 마왕성을 오른 나는 곧바로 마왕에게 돌격했다.

그리고 마왕을 죽이고 검을 집어넣었을 때.

마왕의 잘려나갔던 심장이 다시 복구되었다.

"복구 능력?"

그렇다면 재생하지 못할 만큼 베어 주겠다고 다시 검을 뽑으려던 순간 나는 자세를 멈췄다.

내 쪽을 향해 돌아본 마왕의 얼굴에서 나를 향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저 얼굴은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베어 봤다.

그러나 당연하듯 복구되었다.

또 한 번 베었다.

"그만해라!"

그리고 또 복구되었다.

"나는 용사의 손에 죽을 운명. 그것이 내 사명. 그렇기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용사 이외의 존재에게는 죽지 않는다."

마치 세계의 법칙이라는 양 마왕이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마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를 죽이는 방법은 정말로 용사밖에 없단 건가.

'설마 클리어 조건이 내가 마왕을 죽이는 게 아니라 용사를 키워 저 녀석을 쓰러트리게 하는 것이었나.'

그럼 마을 사람 1은 마왕을 죽일 수조차 없다는 거냐.

망할, 그냥 평범히 몸만 쓰는 층이 없다.

꽤나 골치 아픈 스토리에 인상을 찌푸렸던 나는 곧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내 시선이 천천히 마왕에게로 향하자, 나와 눈이 마주친 마왕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너 10년이나 이곳에 있었지."

"그, 그렇다만."

"그럼 용사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지."

마왕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한순간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미소를 짓자 마왕도 나를 따라 억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찾아오면 되겠네."

"뭐, 무슨."

그 말을 하며 나는 마왕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안 하면 이 성 부숴 버릴 거니까. 나 정도면 가능한 거 알지?"

위력을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았던 마왕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른 찾아와, 마왕.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지금 내 손으로 날 죽일 용사를 데려오라고 하는 게냐."

"맞아. 정답이야."

"...마왕은 네놈이 아니냐?"

"아니, 네가 마왕이지. 헛소리하지 말고 용사나 데려와. 마왕군 전부 다 써서."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마왕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별천도를 뽑으려 하자 히익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10년간 지낸 자신의 거처를 잃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여봐라. 사천왕. 사천왕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잠시 후 복도에서 사천왕의 시체를 본 마왕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마왕을 보내고 여유롭게 찻잔의 찻물을 따라 마신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찻물 특유의 쓴맛은 적응이 안 된다.

이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느끼며 찻잔을 내려둔 순간, 나는 찻잔을 보고 몸을 움찔거렸다.

마왕은 내가 살던 고향에서 만들어진 찻잔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6%]

"썅."

내가 살던 고향은 개뿔이.

나의 고향은 서울이다. 서울.

오티누 마을 같은 게 아니라.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7%]

무얼 보든 실시간으로 기억이 덮여가자 나는 포기한 채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쯤 되면 그냥 차라리 눈 감고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100%가 차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 1이 되어 갈수록 회귀자의 기억은 점차 잃어 가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그 끝은 하천성이 아닌 마을 사람 1이 되어 '하나만의 용사'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최악이다.'

정신 오염의 끝판왕 층에 왔음을 느낀 나는 혀를 찼다.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나는 마왕이 용사를 직접 데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늦어."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생각이 스치기 시작했다.

이놈 설마.

그냥 튄 거 아니야?

그 생각이 스친 순간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작정하고 마왕이 몸을 숨긴다면?

나는 그 녀석을 찾느라 시간을 투자할 테고, 그동안 점차 마을 사람 1이 되어 결국엔 이 층에 영원히 묶여 버릴 것이다.

그 상황만큼은 피해야 함을 깨달은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마왕성 창문 너머에서 마왕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마왕은 침울한 얼굴로 계단을 올랐고, 나는 그를 보며 안도했다.

다행히 도주를 택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 성이 부서질까 봐 용사를 찾으러 간 놈인데 마왕성을 떠날 리도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기쁜 마음으로 마왕을 맞이하러 나갔다.

"왔구나! 고생했어!"

마왕을 맞이한 나는 그가 자루 하나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본 뒤 마왕에게 물음을 던졌다.

"용사는?"

"여기 있다."

그 순간 마왕이 자루를 내 앞에 던졌다.

눈앞에 던져진 자루의 모습에 나는 의문을 품으며 포대를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용사의 시체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용사라는 느낌이 드는 검과 머리 장신구, 금발 머리카락과 잘생긴 얼굴.

그러나 일반적인 용사와 다른 점은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 이 꼴이야."

"용사를 데려오라고만 했지 않나. 그래서 데려와 줬네."

"그렇다는 건 네가 죽였다. 이거냐."

"하핫."

마왕이 대답 대신 가볍게 웃음 지었다.

마왕이 용사를 죽인 세계.

나는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씨발."

또 한 번 욕설이 내뱉어졌다.

13화

이제야 마왕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굳이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내 눈앞에 용사를 데려온 이유.

마왕은 죽고 싶지 않아 용사를 직접 처리해 자신을 죽일 유일한 방법을 지운 것이다.

"그럼 이제 누가 웃을 차례지?"

미소를 지은 마왕은 정말로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죽을 일이 전혀 없어진 순간 무서울 것이 없어진 그는 마왕으로 변모했다.

그의 주위에서 검은색 기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용사가 아니면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러니 네놈한테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런 나와 싸우면 네놈이 과연 날 이길 수 있을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마왕을 보고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변수가 터져 나와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이거 클리어를 포기해야 하나.

"죽어라."

그리고 마왕의 기탄이 내게 쏟아진 순간 나는 녀석을 바닥에 쿠웅 내려찍었다.

기탄은 이미 내 검에 잘려 있었고, 내 얼굴 위에 핏발이 서 있었다.

"크학."

마왕을 내리꽂은 나는 별천도를 들어 올렸다.

"먼저 열 받게 한 건 너다."

"열 받은 건 내 쪽이다!"

빼엑 하고 마왕이 소리를 내질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가 용사를 죽여 놓고 왜 나한테 화를 내.

좋다.

마왕을 내가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 하다는 것은 알았다.

유일한 방법인 용사도 죽었다.

그렇다면 대신에.

"마왕성을 박살 내놓아야지."

"뭣."

마왕이 당혹감을 흘린 순간 나는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마왕이 안 된다면 마왕성이라도 모조리 박살 내놔서 이 분을 풀어야겠다.

"이게 마을 사람 1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미친놈이."

내 검이 반월 형태로 움직였다.

마치 세계를 절단하듯 움직인 검에 의해 대기에 균열이 나타나고, 동시에 건물 벽들이 반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식(五式)

무형뇌절(無熒雷絶)

파직. 균열 사이로 튄 스파크가 잘게 울려 퍼졌다.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나는 히죽 웃고 있었고 마왕은 인상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 1!!!!!!!!!"

그리고 마왕이 울부짖었다.

* * *

마왕성을 부수고 밖으로 나온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을 박살 낸 건 그렇다 치고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마왕을 죽일 용사를 잃었다는 점이었다.

마왕성이 저 꼴이 되었더라도 마왕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만의 용사를 클리어할 수 없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젠장, 좋은 방법이 없나.'

턱수염이 자란 턱을 쓰다듬으며 나는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9%]

마을에서 고향의 느낌을 받았다.

또다시 올라간 침식률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침식률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층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포기해 버리는 순간 23층 도전권을 일주일 동안 빼앗기는 패널티가 있으니까.'

일주일은 길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번 도전에서 클리어하거나 적어도 다음 도전에서 무조건 클리어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용사가 죽었다.

그런데 용사란 무엇일까.

용사란 마왕을 쓰러트리는 존재.

그렇다면 마왕을 쓰러트리는 게 곧 용사가 아닐까.

삼단논법 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턱을 눌렀다.

층을 클리어하는 데 편법은 늘 존재한다.

용사가 죽고 나서도 클리어 실패는 뜨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라만상의 정신이 준비 해 둔 또 다른 편법이 존재한다는 것.

애초에 클리어 조건은 마왕을 쓰러트려라지 마왕을 쓰러트릴 용사를 찾아라가 아니었다.

돌발 상황은 항상 일어나고 이러한 상황을 나는 수도 없이 겪어 왔다.

'과연 용사가 한 명뿐일까.'

나는 다른 관점에서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용사란 마왕을 쓰러트리는 존재.

그렇다면 마왕을 쓰러트리는 존재가 곧 용사이며 그럴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용사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즉, 용사라고 할 만한 녀석을 찾아서 키워내 그가 마왕을 베면 되는 게 아닐까.

'일리는 있네.'

스스로에게 납득하며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나는 용사로 쓸 만한 녀석을 찾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과거에 용사를 꿈꾸거나 해서 의지가 있는 녀석을 찾고 싶은데.

"이 자식이! 드디어 찾았다!"

"아, 아버지 진짜. 더럽게 귀찮게 구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리의 저편에서 아까 길 안내를 했던 양아치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머리가 벗겨진 아버지한테 혼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어릴 적에는 용사가 되고 싶다고 해맑게 웃던 네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건만."

"옛날 일은 왜 꺼내고 지랄이야!"

"지랄? 우라질 염병하고 있네. 어디서 어른 앞에서 욕질이야. 확 혀를 지져 버릴까 보다."

아버지의 살벌한 말에 양아치는 윽 소리를 내뱉으며 자기 입가를 가렸다.

왠지 모르게 저 아버지는 진짜로 한 번쯤 양아치의 혀를 불로 지졌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것보다.

'어릴 적에는 용사가 되고 싶었다라.'

이전에 만났을 때도 계속 용사 지망생 소리를 했었지.

뉘앙스를 보면 아직까지도 용사가 되고픈 마음은 남아 있는 것 같고.

'과연 내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저 녀석을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성좌는 층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우연 또한 모두 성좌의 의도이고, 그 의도는 전부 층의 공략의 한 요소가 된다.

'우연? 그럴 리가.'

저놈은 성좌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장치다.

"야."

"아, 형님."

양아치를 부르자 그는 나를 보고 놀라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마왕성은 잘 갔다 오셨습니까."

"그래, 다 부수고 왔다."

"하핫, 그러셨군요."

이 녀석. 농담으로 생각하는 건가.

"야, 너 이름이 뭐냐."

"예? 소혼입니다."

"그래, 소혼, 너 용사가 되고 싶은 마음 없냐."

내 말을 듣고 소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마치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양.

그런 소혼을 보며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들어 줄게. 용사."

"용, 사 말입니까?"

"그래, 너 되고 싶었잖아. 용사."

아이들이 한 번쯤 꿈꿔 봤을 꿈.

방금 전 이 녀석 아버지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소혼은 용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 양아치가 될 운명이었기에 포기하고 그 길을 택했다.

"형님,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십쇼."

하지만 예기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상한 소리라니?"

"설령 형님이 절 용사로 만들어 줬다 칩시다. 그런데 악당인 마왕이 없는 마당에 용사가 왜 필요합니까."

"아니, 그건."

그건 그러네.

무심코 동의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 1 기억 속에서도 마왕은 항상 평화주의자였다.

물론 용사에게 죽기 싫어서 일부러 평화를 연출한 거였지만, 용사가 마왕을 퇴치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세계가 평화로운 건 맞았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팔짱을 낀 채 잠깐 생각에 잠겼던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기다리고 있어. 곧 올 테니까."

"예? 예."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소혼에게 뒤로하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다시 향한 곳은 마왕성.

여기저기서 몬스터들이 마왕성을 다시 짓고자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이곳은 마왕님의 거처, 사천왕인 내...."

언제 또 새로 뽑은 건지, 길을 막는 사천왕을 죽이고 지나온 나는 마왕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기에는 마왕이 왕좌에 앉아 있었고 그는 내 등장에 당황한 듯싶었다.

"네놈 또, 또!"

"오랜만."

"오랜만은 개뿔이!"

마왕이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나는 마왕을 또 베어 보았다.

"익, 이익!"

그러나 마왕은 다시 복구되었다.

그 순간 검은색 입자들이 내게 쏘아졌고, 나는 능숙하게 그 입자들을 모조리 갈랐다.

회심의 일격이 통하지 않자 마왕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나는 미소와 함께 검을 들었다.

"아, 안 돼! 마왕성은!"

"돼."

"다시 지으려면 얼마나 노력이 드는 줄 네놈이 아느냐! 겨우 뼈대를 다시 만들었단 말이다!"

"몰라. 다시 지어."

한마디 말과 함께 검을 휘두르기 직전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씨익 하니 미소를 지으며 마왕을 돌아보았고,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마왕성을 언제든지 부술 수 있어."

내 말이 내뱉어졌다.

"그리고 그걸 매일 할 수 있지."

마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라면 정말로 할 거라고 생각 든 것이었다.

"넌 거처를 잃을 거야. 매일매일. 그리고 어차피 죽지 않으니까 난 집요하게 널 벨 거지. 그렇게 네 일상생활은 모조리 무너질 거다."

그리고 마왕의 입장에서는 지옥처럼 느껴질 협박을 계속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게 만들어 줄 거다."

"잠, 잠깐, 잠깐만!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 대체 뭘 원하기에 그런 살벌한 말을 하는 건가!"

"와, 이거 참. 말이 잘 통하네. 역시 마왕이야."

사정하듯 바닥에 무릎까지 꿇은 마왕을 보고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녀석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마왕군을 움직여."

"...마왕군을? 뭐 하러?"

"용사가 죽었잖냐. 이제 평화를 지킬 이유가 있냐?"

"아니, 지금 상황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나는 검을 들었다.

"할게! 하겠네! 무조건 하겠네! 오오, 정복욕이 끓어오르는군! 젊었을 적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옳지. 옳지."

적극적인 마왕에게 나는 박수를 쳐 줬다.

"그럼 오늘부터 시작해."

"오, 오늘은 마왕성 복구를 해야 해서."

"내일도 복구하고, 그 다음 날도 복구하고, 일주일 뒤도 복구할래?"

"바로 하지."

그래, 진작 그래야지.

마왕의 대답에 만족한 미소를 지은 나는 고생하라고 손을 흔들어 주며 마왕성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사천왕을 일격에 죽인 탓인지 마왕군은 흠칫흠칫하며 길을 비켰다.

"출출하네."

마을로 돌아온 나는 배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어서 빨리 소혼을 찾아 키우긴 해야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부터 먹어야 할 듯싶었다.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11%]

그리고 그 금강산도 식후경은 침식률만 올렸다.

음식을 먹으면 고향 생각이 나며 자연스레 올라 버리는 침식률에 나는 골머리를 썩였다.

오늘 하루 동안 오른 침식률만 해도 11%.

단순 계산을 하면, 10일이 지났을 때 나는 완전히 마을 사람 1로 되어버린다는 소리였다.

"썩을."

골치 아픈 정신 오염이다.

"소혼."

"예, 형님."

밥을 먹고 곧바로 소혼을 찾은 나는 녀석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 마왕이 말입니까?"

"속보요!"

소혼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한 남성이 우리 쪽으로 뛰어오며 외쳤다.

그는 신문을 주변에 흩뿌리며 필사적으로 뛰어갔고 나는 신문 한 장을 들어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소혼에게 신문을 건네주자 신문을 받아 든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혀, 형님?"

"왜."

"갑자기 마왕이 활동을 시작했다는데. 벌써 옆 나라가 정복당했다고...."

"내가 말했지. 내가 널 용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설마 형님이 한 겁니까?"

"아니, 난 딱히 별짓 안 했어."

마왕성 정도만 부숴 협박했다.

그리고 그걸 수락하고 직접 움직인 건 마왕이니까.

"하지만 용사는 버젓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절 용사로 만들 이유가 있으십니까."

"없어."

"예?"

"없다고. 마왕이 죽였어."

내 말을 듣고 소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 곧 그는 서둘러 신문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용사 그는 어디 있는가.'라는 구절에서 멈췄다.

"그래서야. 널 찾아온 게. 너라면 용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거든."

"제가 말입니까? 하지만 전 그냥 동네 양아치입니다."

"그냥 양아치가 아니지. 용사를 꿈꾸던 양아치잖나. 내가 이루어 줄게. 너 용사 만들어 준다니까?"

살살 꼬시자 소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용사가 공주님과 결혼 하는 건 알지? 너도 할 수 있어. 부와 여자를 모두 손에 쥘 수 있어."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13%]

공주를 언급하자마자 침식률이 올랐다.

기억 속에서 공주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고 성녀로 추앙받는 여자였다.

공주와의 결혼이라는 말에 양아치가 흠하고 헛기침했다.

그도 공주를 알고 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공주와 결혼도 하고 얼마나 좋아. 그치?"

"그건 그런데 제가 정말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될 수 있다니까 그러네. 넌 재능이 있어. 인마."

"저한테 재능이 말입니까? 대체 어떤 재능이...."

"꿈이 있잖냐. 용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재능이란 건 그런 거야. 꿈을 꾸는 자만큼 재능이 넘치는 자는 없지."

나는 소혼의 가슴팍에 주먹을 툭 가져다 대었다.

"믿어라. 네 꿈을. 너라면 할 수 있어."

물론 당연한 거지만 그냥 헛소리다.

14화

이 녀석이 조금이라도 더 용사가 될 마음이 생기도록 말장난을 한 것뿐이다.

그러나 소혼의 눈동자는 점점 흔들렸고 나는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되자. 용사가."

"...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이지. 너한테 손해는 전혀 없을 거다."

내 말을 듣고 가슴팍에 자신의 손을 올린 소혼은 곧 눈을 빛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오늘부터 용사다."

"예."

"앞으로 좀 힘들 수도 있어. 용사로서 자격을 갖추려면 강해져야 하니까."

"예, 형님처럼 강해진다면 양아치로서의 품격도 오를 겁니다. 형님 말대로 밑져야 본전입니다."

"가자. 용사."

"예."

그렇게 나는 소혼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 * *

소혼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 지 하루.

첫째 날 우리가 한 것은 슬라임 사냥이었다.

가장 레벨이 낮은 몬스터인 슬라임은 들판 여기저기에 있었고 소혼은 능숙하게 검을 휘둘러 녀석들을 잡았다.

아무래도 용사를 꿈꿨던 건 거짓이 아닌 듯 그는 내 생각 이상으로 검을 다룰 줄 알았다.

"꽤 하잖냐."

"그래도 꼴에 양아치지 않습니까. 일반인보다 약해서야 쓰겠습니까. 뭐, 사실 검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휘둘러 왔습니다. 6살 때부터 휘둘렀으니 벌써 20년 정도 되었네요."

야영을 하며 소혼의 말을 들은 나는 씨익 하니 웃었다.

이 녀석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든다.

"소혼아."

"예, 형님."

"오러가 뭔지 아느냐."

"오러 말입니까? 분명 기사들이 사용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일단 모르지는 않는군.

다행이다. 오러는 아예 모를 때 이미지 하는 게 가장 힘드니까.

소혼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내 손에 마나가 몰리기 시작했고 곧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며 손 위로 오러가 뒤덮어졌다.

"이건."

소혼의 눈동자가 놀란 듯 크게 떠졌다.

내가 오러를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싶었다.

"뭘 놀라냐. 널 용사로 키울 선생님이 오러조차도 못 쓰면 쓰겠냐."

"형님, 혹시 변방의 기사라든가 그런 사람이셨습니까?"

"적당히 알아서 생각해라. 어쨌든 너도 이 오러를 쓰는 걸 오늘부터 연습해야 한다."

"제가 오러를 말입니까?"

"너도 이제 용사 지망생이잖나. 오러도 못 쓰면서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리 말한 나는 오러를 지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녀석의 앞에 다가가 상의를 벗을 것을 지시했다.

내가 오러를 보였기 때문일까, 소혼은 의심 없이 상의를 탈의했고 나는 녀석의 등 뒤에 섰다.

다시금 손에 오러가 맺혔다.

"좀 찌릿할 거다. 내 오러는 전(電) 속성이라서."

나는 그 오러를 소혼의 등에 손을 올렸다.

한순간 소혼이 움찔거렸으나 얼마 안 가 녀석의 표정은 곧 편안히 변했다.

이 녀석.

"너도 오러가 전(電) 속성이구나."

"속성 말입니까?"

"그래, 나랑 같은 속성이야. 보통이라면 찌릿함에 인상을 찌푸렸을 텐데, 넌 금방 표정이 풀렸잖냐."

"오오, 형님이랑 같은 속성이라니 무슨 운명 같은 걸 느낌다."

"징그러우니까 그쯤 해. 일단 마나를 네 등을 타고 흘려보내마. 그걸 잘 캐치 해 봐. 같은 오러 속성이니 좀 더 쉬울 게다."

나는 지그시 마나를 소혼에게 흘려보냈다.

마나를 붙잡는 것이 처음은 어렵다.

그렇기에 소혼은 번번이 내가 흘리는 마나를 놓쳤고, 나는 초조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나를 흘렸다.

"천천히, 강줄기를 떠올려라. 강줄기는 움직임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저 바다를 향해 천천히 흘러갈 뿐이야. 너는 바다가 되는 거다. 흐르는 강줄기를 받아들이는 바다다."

그리고 1시간, 2시간.

뛰어난 집중력을 보이는 소혼은 그 끝내.

마나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잘했다."

칭찬 한마디에 소혼의 어깨가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넌 바다가 되었다. 바다는 파도가 치지. 마나도 똑같다. 파도를 치듯 내 몸 안에 있는 마나를 서서히 전신의 파도로 보내 봐라.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쌓아 나가는 거다."

조금씩, 조금씩 내 마나가 소혼을 타고 흘러갔다.

소혼은 마나를 붙잡아 서서히 전신으로 뻗어 보냈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옳지."

소혼은 정말로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것도 상상 이상의 재능이.

오래도록 용사를 꿈꿔 오며 검을 휘둘렀기에 자연스레 마나가 소혼의 몸을 유영했을 것이고 그 덕에 마나의 길이 뚫려 있는 것이었다.

역시 이 녀석은 성좌가 준비한 또 다른 장치였다.

"다음은 오러다. 손을 앞으로 내뻗어 봐라."

나를 완전히 믿기 시작한 것일까, 소혼은 손을 서서히 앞으로 들어 올렸다.

"네 속성은 전(電). 손가락 끝에 마나를 끌어모아라. 그리고 정전기를 떠올려라. 파직하고 잠깐 튀는 정전기. 그 정전기가 손가락 끝에 맺혀 있다고 생각해라."

소혼은 내 지시에 따라 마나를 손가락 끝에 모았다.

당연하지만 처음은 잘 되지 않았다.

마나가 손가락 끝에 끌어모아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소혼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마나를 운용하는 것과 달리 오러는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괜찮다. 천천히 해. 시간은 충분하니까."

나는 소혼을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마치 정말로 제자를 키우는 양 그에게 계속해서 설명을 했다.

한참을 설명하고 소혼이 묵묵히 내 말을 따라 연습한 순간.

파직.

자그마한 소리가 소혼의 손끝에서 울렸다.

희미하지만 소혼이 오러를 사용한 것이었다.

"형, 님."

"그래, 너는 오늘부터 오러 사용자다."

소혼이 오러를 쓰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그 날 꼬박 소혼은 오러 사용을 연습했다.

손가락 끝에서 검으로 검 끝에서 전신으로 오러를 씌우는 것을 소혼과 나는 계속해서 연습했다.

처음은 미숙했지만 하면 할수록 소혼의 오러도 능숙해져 갔고, 얼마 안 가 소혼은 검면에 완전히 오러를 두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내가 오러를 배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스파크들이 소혼의 검에서 튀는 걸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 정도면 이제 실전에서 쓸 수 있겠지."

"오러라는 거 정말 대박입니다. 저 이런 건 처음입니다. 형님은 혹시 이전 세대에 용사라든가 그런 거 아니십니까? 저 같은 일반인이 오러를 쓸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짜식이, 네가 노력 한 거야 인마. 따라와 바로 실전이다."

나는 알랑방귀를 뀌는 소혼을 데리고 오크가 주로 사는 숲으로 향했다.

마침 오크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사슴을 사냥하고 있었고 그 오크를 본 나는 소혼에게 말했다.

"잡을 수 있겠냐."

"오크 말입니까? 당근 빠따입니다."

이 녀석 언제 적 말을 쓰는 거람.

어쨌든 호기롭게 외친 소혼의 말에 나는 오크를 가리켰다.

"좋아. 실전 경험이다. 저 녀석을 잡고 와 봐. 그 뒤에 부족한 점은 내가 가르쳐 주마."

"옙, 금방 모가지를 따오겠습니다."

호기롭게 말한 소혼은 사슴을 사냥하던 오크에게 다가갔다.

시선을 끌려는 듯 바닥을 쿵쿵 짓밟았고 그 순간 오크가 소혼을 발견했다.

으르릉.

오크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오크는 근육질의 몸까지 가지고 있어 상대적으로 소혼이 왜소해 보였다.

그러나 소혼에게는 오러가 있었다.

파직.

소혼의 오러가 옅게 검에 맺혔다.

아직 미숙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오러였다.

곧 소혼과 오크가 부딪쳤다.

소혼이 검을 휘둘렀다.

이전에 용사를 목표로 했기에 소혼의 검은 능숙하게 오크의 몽둥이를 맞받아쳤다.

서걱!

그 순간 오크의 몽둥이가 검에 베여 조각났다.

역시 오러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순식간에 무기를 잃은 오크는 당황한 눈치였고 소혼은 망설임 없이 검을 재차 휘둘렀다.

이어진 연격에 오크의 몸이 베이고, 놀란 오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의 가슴팍에는 검상이 드러나 있었고 그 위로 옅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오러의 속성 효과였다.

"으랴!"

그리고 소혼의 마지막 일격이 오크의 머리를 꿰뚫었다.

3격. 단 3격만에 오크를 정리한 소혼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다가갔다.

"형님, 저 잘하지 않았습니까?"

"자만하지 마. 아직 멀었어. 오러를 검에만 두르면 쓰냐. 손에도 둘러야 안정적이지. 만약 오크가 오러를 쓸 줄 알았으면 십중팔구 넌 검을 놓쳤을 거다."

"형님 칭찬이 인색하십니다."

"시끄러. 일단 검술부터 배우자. 넌 나랑 같은 속성이니까 내 검술도 배울 수 있을 거야."

"형님의 검술 말입니까?"

"그래, 인마. 잘 봐."

내가 만든 검술.

20년 동안 회차를 반복하며 그 끝에 완성한 검술을 나는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우선 오러를 담은 강렬한 찌르기, 최단 속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릴 수 있는 내 첫 검술.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번개가 튀고 찌르기가 허공에 이어졌다.

눈으로 쫓아가기 힘든 찌르기에 소혼이 움찔거렸고 허공에는 번개의 잔상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번개가 지나가듯 끝없이 펼쳐지는 검무.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번개가 번개를 잇는다.

내가 뇌제라는 지명을 얻었을 때가 두 번째 검술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을 때.

끝없는 검무가 펼쳐지고 번개의 잔상이 그를 따라 휘감겼다.

그리고 그 끝에 검은 다시 검집으로 되돌아온다.

눈을 감고 가늘게 호흡한다.

그립을 잡은 손가락 끝에 마나가 맺히고 작은 스파크가 검집 속에서 용솟음친다.

눈이 떠진 순간, 손은 이미 움직였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파직.

자그마한 스파크 소리가 튀고 공간이 일렁거렸다.

최속의 발도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세 번째 검술 뇌격발도였다.

별천도가 발도된다.

도는 내 몸쪽으로 당겨지고 내 왼쪽 다리가 앞으로 쭈욱 뻗어져 나갔다.

오러가 깊숙하게 검 전체를 휘감는다.

마치 용수철처럼 몸이 뒤로 젖혀지고 그 순간 발가락 끝에 마나가 맺혔다.

쿠웅.

왼발을 크게 내려찍는다.

사식(四式)

뇌도탄룡(雷刀彈龍)

검에서 오러가 사출된다.

번개의 오러는 용이 되고 용은 주변을 짓이기듯 모든 걸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용의 잔상이 한줄기의 번개가 되어 사라지고 나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검이 허공을 향해 띄워진다.

오러의 끝이 검 끝을 감싸자 나는 반월 형태로 검을 내려 끌었다.

오식(五式)

무형뇌절(無熒雷絶)

세계가 반으로 갈라진다.

갈라진 틈으로 번개가 튀어 오른다.

다섯 개의 검술을 사용한 나는 천천히 별천도를 아래로 내리고 소혼을 돌아보았다.

소혼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 검술을 눈으로 아슬아슬하게 쫓아왔는 듯싶었다.

천천히 검술을 시행한 보람이 있었다.

"형, 님, 정말로 용사가 아니십니까?"

오래도록 검을 다뤄 봤기에 내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유추한 것일까.

소혼은 소름이 돋았다는 양 자신의 팔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별천도를 검집으로 돌리고 말했다.

"네가 올라와야 하는 경지다. 물론 여기까지는 바라지 않겠지만 그래도 삼식까지는 익혀 줘야겠어."

"예, 예! 하겠습니다! 하고 말고요!"

소혼은 의욕에 차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검술을 보여 준 보람이 있는 녀석이었다.

"해 보자."

"예!"

그리고 소혼의 검술 연습이 시작되었다.

"일식 뇌전섬뢰는 최속의 찌르기다. 번개와 같은 찌르기는 언제나 상대방의 급소를 노리지. 이것만 익혀도 넌 어떤 상대든 간에 상대의 급소를 박살 낼 수 있다."

우선 일식 뇌전섬뢰의 가르침이 이어졌다.

"이식 섬뢰적선은 끝없는 검무다. 다수의 상대를 상대할 때 유용하며 번개와 번개를 끝없이 이어 나가야만 한다. 오러를 능숙하게 다루면 다룰수록 더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으며, 가히 만 명의 사람도 벨 수 있는 검술이다."

그리고 이식 섬뢰적선의 가르침이 이어졌다.

"삼식 뇌격발도는 모든 상황에서 선제공격의 우선권을 가진다. 상대는 예측하지 못한 발도술에 당해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오러를 검집 안에 있는 도면에 담아라. 억눌러라. 그러면 일순간 번개와 같은 빠르기로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식 뇌격발도의 가르침이 이어졌다.

15화

소혼은 나와 같이 계속해서 검술을 훈련했다.

때로는 그저 휘두르기만을.

때로는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을.

때로는 나와 모의 연습을.

때로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위한 명상을.

끝없이 연습하고 연습한 끝에 시간은 3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잠들 새 없이 검술에 빠져든 소혼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고 실력은 일취월장해 나갔다.

나는 옆에서 계속 소혼을 보조하며 녀석의 검술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 주었다.

소혼은 검의 재능이 있었다.

20년 동안 검을 휘둘러온 소혼은 3주 만에 내 검술을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이 녀석은 용사가 될 자질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자질을 꽃피우는 것뿐.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율 65%]

그리고 내 침식률도 소혼의 검술 실력을 따라 끝없이 올라갔다.

또다시 한 주가 지나고 회귀자로서의 기억이 상당히 흐릿해진 나는 소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혼은 검을 쥐었다.

오러가 맺힌 검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질러졌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스파크가 튀었다.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빠르기는 검술을 연마했던 기사들도 능가할 정도였다.

검로가 이어진다.

번개가 번개를 타고 이어졌다.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내가 하루 동안 집중해서 가르쳤던 검술을 시행했다.

그렇게 하루 내내 계속해서 휘두른 끝에 현재 한 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소혼은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번개가 번개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검무는 꽤나 쓸 만해 보여 100명의 사람을 홀로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검은 검집으로 되돌아간다.

소혼의 눈이 감겼다.

검집 안에 맺힌 오러가 피어오른다.

번개가 검집 안에 끝없이 맺혀 간다.

그리고 소혼의 눈이 떠졌을 때 검은 이미 제자리를 찾은 뒤였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검이 번개를 내뿜었다.

허공에 그어진 검격이 잔상을 일으키고 서서히 사라져 나갔다.

최속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첫 선제공격은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혼아."

"예, 형님."

"스승님이라 불러도 된다."

"예, 스승님."

"4주, 거의 한 달이었다. 다 가르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

그러나 내게 더 이상의 시간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침식률 65%.

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난 저주에 걸려 있다. 마왕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내가 빙의한 마을사람 1로 돌아간다."

"예, 스승님."

한 달 동안 나를 완전히 스승으로 여기기 시작한 소혼의 눈이 내게 향했다.

내 말은 모두 믿는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앞으로 널 얼마나 더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른다. 길면 한 달, 짧으면 일주일일 거다. 그때 동안 너한테 모든 걸 가르치겠다."

"예."

"마왕은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내가 모든 기억을 잃었을 때 너는 홀로 전장에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 말한 나는 소혼의 앞에 내 별천도를 내밀었다.

"용사가 되어라. 넌 용사의 자질이 있는 녀석이니까."

"맡겨만 주세요."

내게서 별천도를 받은 소혼에게서 기분 좋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한 달.

['마을 사람 1'이 되어 갑니다. 침식률 100%]

나는 완전히 마을 사람 1이 되고 만다.

* * *

"스승님."

"예? 누구시죠?"

마을을 거닐던 한 남자에게 어딘가 비루한 차림의 남성이 그를 스승이라 불렀다.

당연하게도 스승이라 불린 남성은 의아한 반응이었다.

"형님."

"형님이라뇨. 누구신데 이러십니까."

그리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 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겁에 질린 남성의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잠시 침묵한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는 남성이 기억을 잃기 전에 한 부탁했던 대로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의 이름은 소혼, 하천성의 첫 제자였다.

일 년, 또 일 년.

소혼은 전장에서 살았다.

하천성이 가르쳐 준 검을 휘두르고 마왕군에게 맞섰다.

마왕은 하천성이 자취를 감추자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10년간 품었던 울분을 풀듯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마왕군을 진격시켰다.

그 전장 속에서 소혼은 끝없이 검을 휘둘러 갔다.

하천성의 잃은 기억이 그에게 담긴 듯, 그의 검에서 하천성이 엿보였다.

그리고 일 년. 또 일 년이 지난다.

소혼의 검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용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비루한 차림에 밝게 웃는 것보다는 씁쓸히 미소 짓는 일이 많은 소혼이었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추앙받는 용사였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다.

마왕군을 베고 또 베며 사천왕마저 쓰러트린 소혼은 드디어 마왕 앞에 섰다.

마왕은 소혼을 보고 한차례 몸을 떨었다.

소문대로 새로운 용사가 등장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용사라 불린다.

이것이 '하나만의 용사'에서 용사라 불릴 자격.

그 자격을 충족시킨 소혼은 진짜 용사였다.

"그 검."

하천성에게 받은 별천도가 마왕의 눈에 띄었다.

이제야 알았다.

하천성이 사라지고 한 달. 마왕은 마왕군을 움직이면서도 망설였다.

혹여나 방법을 찾은 하천성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마왕군을 쓰러트리고 용사를 자처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끝끝내 하천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마왕은 본성을 깨달았다.

자신은 마왕이다. 세계를 지배할 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다.

마왕은 전쟁과 정복에 빠져들어 갔다.

10년간의 평화는 순식간에 깨졌다.

그렇게 그 평화를 깬 순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새로운 용사의 등장이었다.

그것도 원망하기 그지없는 하천성이 키운 용사.

"마을 사람 1."

한마디 말을 중얼거린 순간 마왕의 손에서 검은색 오러가 피어올랐다.

그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사천왕을 두 번이나 죽이고 마왕성을 박살 내놓았던 하천성을 향한 마왕의 원한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와라."

오만한 마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소혼의 검집에서 검이 움직였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최속의 발도.

어떤 상황이든 선제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검술이 마왕에게 휘둘러졌다.

그러나 하천성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한 소혼의 검은 마왕의 빠른 반응에 의해 그의 목 대신 팔을 가르는 것에 그쳤다.

투둑.

마왕의 팔에서 핏물이 떨어졌다.

마왕도 눈치챈 것이다.

소혼이 자신보다 약하지 않다는 것을.

"용사!"

그리고 마왕에게서 검은색 기탄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탄막처럼 사방에서 뻗어져 나온 기탄에 소혼의 검이 검로를 그렸다.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전장에서 수없이 휘둘렀던 두 번째 검술이 사용되었다.

검술은 끝없이, 끝없이 기탄을 베어 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닿은 것은 마왕의 검이었다.

검은색의 흉흉한 오러를 피운 마왕의 검과 소혼의 검이 맞부딪쳐 가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소혼의 눈동자가 마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자 빠르게 쫓아갔다.

「검은 휘두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상대의 검을 유심히 봐라. 상대의 검의 흐름을 알아내라. 검의 흐름이 끊겼을 때 상대의 검은 너의 검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에서 하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혼의 검이 마왕의 검의 틈을 파고들어 그의 가슴팍을 베었다.

마왕은 진노하며 다른 검을 꺼내 들어 두 개의 검으로 소혼을 압박했다.

「화난 상대일수록 검은 거칠어진다. 분노는 힘의 원천이지만 이성을 잃게 만든다. 상처 입은 상대를 살펴라. 상처 입은 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상처 쪽을 가리고자 한다. 그 틈을 노려라.」

또다시 하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왕이 무의식적으로 막았던 상처의 틈을 타 소혼의 검이 마왕의 다리를 베었다.

마왕은 소혼에게서 멀어져 기탄을 쏘아 내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어둠이 스며들고 소혼을 뒤덮으려 했다.

「상처 입은 상대는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한다. 놓치지 마라. 끈질기게 달라붙어라.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의 호흡은 흐트러진다.」

소혼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마왕의 어둠이 엄습한 곳에 닿은 다리가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지만 나머지 부분은 오러로 뒤덮으며 마왕을 집요하게 쫓았다.

마왕도 결국 기탄과 어둠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상대에게 숨 쉴 틈을 주지 마라. 숨을 쉬지 못하는 상대는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 급소만 노리지 마라. 급소를 노리는 것을 상대가 알게 되면 상대는 절대로 급소를 보이지 않는다.」

마왕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늘어났다.

막는 데 급급해지기 시작한 마왕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를 상대하는 소혼의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상대가 급소를 내보였을 때.」

소혼의 검에 오러가 맺혔다.

스파크가 튀었다.

「절대 놓치지 마라.」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최속의 찌르기가 이어졌다.

파직.

"크학!"

마왕의 비명이 울렸다.

소혼의 검에 꿰뚫린 마왕이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곧이어 천천히 마왕의 몸이 앞으로 숙어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소혼은 마왕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결국 마왕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스승님."

그리고 소혼은 자신의 스승을 불렀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몇 년간 싸워 온 전장을 지났다.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지나쳤다.

마왕에게 상처를 입은 것도 잊고 하루를 꼬박 달리고 달려 처음 시작했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의 입구에 마을 사람 1이 서 있었다.

그는 소혼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소혼도 그를 바라보았다.

소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스승님, 저 해냈습니다."

소혼의 깊은 감정이 담긴 말 한마디와 함께 별천도가 하천성에게 닿았다.

* * *

[축하합니다. 2번째로 23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3층의 주인' '삼라만상의 정신'이 당신의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23층의 주인' '삼라만상의 정신'이 당신의 기억을 되돌려 줍니다.]

하늘에 글자가 떠오르고 잠깐 시야가 사라진 순간, 다시 뜬 내 눈동자에 들어온 것은 소혼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녀석은 울고 있었다.

해냈다는 것에 기뻐서.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용사가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끝으로 내던져진 검은색 공간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얼굴을 감쌌다가 쓸어내렸다.

"...해낸 거냐."

소혼이 마왕을 쓰러트려 준 것이었다.

그놈이 해냈다.

녀석이 결국 해내고 만 것이다.

"시간은, 클리어 시간은 어떻게 됐지! 삼라만상의 정신!"

['23층의 주인' '삼라만상의 정신'이 한 달이 지났음을 가르쳐 줍니다.]

한 달.

아무래도 23층에서의 시간 흐름은 실제와 다르게 훨씬 빨랐던 건지 내 생각 이상으로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한 달도 길었다.

한 층을 공략하는 데 한 달이라니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젠장."

욕설을 한마디 내뱉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아까 본 메시지에 한 글자가 떠올랐다.

내 눈이 서서히 커졌고, 나는 입술을 열었다.

"삼라만상의 정신, 내가 두 번째 클리어라고?"

['23층의 주인' '삼라만상의 정신'이 물음에 '긍정'으로 답합니다.]

2번째.

내가 2번째?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23층에서 투자한 시간은 무려 한 달.

한 달, 한 달이다.

이곳은 분명 개인플레이를 해야 하는 층.

물론 한 달은 길었지만, 용사를 키워 나가는 그 시간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보다 빠른 녀석이 있었다.

'누구냐.'

혹시 검왕인가?

검왕은 내 뒤를 바로 쫓아 들어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야신.

그 순간 두 글자가 머릿속을 스쳤다.

왠지 그 남자가 움직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확신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누구더라도 나보다 앞서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금방 따라가 주마."

내 이가 뿌득 갈렸다.

그 덕분에 클리어 직후 허탈감에 뒤섞였던 감정이 겨우 진정되었다.

고맙다.

감사 인사를 던져 줘야만 할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돌아온 내 몸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역시 내 몸으로 돌아온 것만큼 현실감을 일깨우는 것은 없었다.

"가자."

한마디 말과 함께 나는 계단을 올랐다.

16화

Chapter 4. 첫 만남

나보다 얼마나 먼저 올라간 거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보다도 빨리 24층에 들어가 공략하고 있단 건 회귀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가는 녀석들 중에는.'

1위 나락

2위 대협

3위 지략가

4위 마술사

5위 진선

최상위 5명의 랭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거기에 더해 또 떠오른 한 명이 야신.

'5명 전원 다 이전 회차에서 지명을 들어 본 적 있는 녀석들이야.'

혹시나 녀석이 회귀자가 아니라면.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그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뉴비가 이 정도의 속도로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렇게 랭커들을 살피고 보니, 가장 경계해야 할 야신의 현재 상태도 대략 짐작 가능했다.

즉, 야신은 아직 랭커에 속할 정도로 높은 레벨은 찍지 못했다는 소리다.

물론 찍었다 한들 그가 지금의 나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클리어하고 있는 녀석은 누군지 몰라.'

이유는 몰라도 23층을 클리어했음에도 주인공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크라운 로드는 그 층을 클리어한 사람이 있으면 이름과 함께 전 층에 알림 메시지를 돌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는 게 어딘가 상당히 미심쩍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클래스의 능력으로 손을 쓴 게 분명했다.

마치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걸 꺼리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계단을 오른 순간 탁 트인 시야와 함께 보인 것은 뒤죽박죽으로 섞인 공간이었다.

삼라만상의 정신이 만든 공간은 기괴하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걸어 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23.5층 중심에 존재하는 계단.

계단으로 필사적으로 뛰어가던 순간 내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 계단의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전신에 한 나무 모양의 문신, 기다란 흑발 머리카락, 감겨 있는 눈.

그리고 붉은색의 옷을 두른 그는.

"하, 하하하핫!"

입가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남자를 본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야, 신!"

내 예상대로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

끊어서 그의 지명을 부른 순간, 그의 얼굴에 드러난 문신 사이로 시선이 내게 뻗어 나왔다.

흰자와 검은자가 반전된 눈동자,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는 왠지 모를 희열감을 느꼈다.

"역시 네놈 살아 있었구나."

황제를 죽였으며,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자 했던 회귀자들을 배신한 그 자가 이곳에 있었다.

"겁대가리가 없네. 분명 이단아한테 내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텐데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나보다 먼저 층을 공략하기까지 하고."

내 입에서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은 과하게 들어간 힘에 의해 뿌득 하고 뼈에서 소리가 냈다.

이 남자 때문에 이번에는 성공하리라 믿었던 전 회차의 크라운 로드를 실패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망친 이 남자를 향한 내 원성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 가지 정정하지."

잠자코 듣던 야신의 입이 열렸다.

"이전 층을 공략한 건 내가 아니다."

"하, 뭔 개소리야? 그렇담 네가 여기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건데."

"설명이라, 굳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이유가 있나? 뇌제."

야신의 입에서 과거 지명이 불리자마자 내 발이 먼저 움직였다.

내 눈앞에 버젓이 나타난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끝났다.

주변 소리가 잦아들어 간다.

검집에 잠들어 있는 별천도에 들어간 오러는 순식간에 몸집을 키워 나갔고, 내 검은 일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직.

자그마한 스파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내가 낼 수 있는 최속의 발도술.

삼식 뇌격발도가 펼쳐진 순간 공간이 일렁거렸다.

별천도는 이미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고, 자그마한 스파크만이 베고 지나간 공간에 일렁거리며 머물 뿐이었다.

야신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마치 베어진 것조차 모르는 양.

그러나 곧.

내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너...."

"이번 주역은 내가 아니다."

야신의 몸은 반투명하게 빛날 뿐 멀쩡했다.

내 검은 그를 베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가 내 검에 베이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그의 몸을 내 검이 통과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다시금 말하지만 내가 설명해 줄 이유는 없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클래스.

A급까지는 모든 클래스를 꿰고 있는 내가 모르는 클래스라는 것은 S급 이상의 클래스라는 소리였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건 저 클래스를 얻기 위해서였나.

'골치 아픈 걸 주워 왔군.'

이전 회차에서 본 적 없는 클래스를 쓴다는 건 녀석도 이번 회차에 나와 같이 많은 준비를 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한 층."

그 순간 야신의 입이 열렸다.

"위에서 널 기다리는 녀석이 있다. 난 그걸 전하러 온 것뿐이다."

의미 모를 말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야신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놓칠 생각이 없는 나는 야신에게 다시금 검을 휘둘렀고, 내 검은 또 야신을 통과하고 지나갔다.

"씨발."

욕설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어떠한 클래스를 얻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를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층을 올라라. 뇌제, 하천성. 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만나라. 그 뒤에 날 쫓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야신이 사라졌다.

눈앞에서 원수를 놓친 내 이가 뿌득 갈렸고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썩을, 썩을, 썩을!"

쿠웅.

분풀이로 휘두른 내 검에 의해 건물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아무렇지 않게 내 눈앞에 나타나 말만 전하고 사라지다니 날 무시해도 유분수다.

"죽여 버리겠어."

다음 층에 날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 있다고?

그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후회하게 될 거다."

야신도, 그놈도 모두.

* * *

야신에게 농락당한 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마음이 없었던 나는 곧바로 계단을 밟고 올랐다.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관장하는 24층 Stage '던전 메이커'에 입장하였습니다.]

['24층의 주인'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당신의 입장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던전 메이커.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층이다.

눈이 살며시 떠지고 시야가 확보되자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절벽 밑에 존재하는 숲이었다.

숲에는 자그마한 검은색 슬라임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슬라임은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클리어 조건은.'

그리고 생각하기 무섭게 내 눈앞에 글자가 나열되었다.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24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던전 메이커' 당신의 손으로 최고의 던전을 만들어 주세요! 이곳은 파라스타 제국의 어느 숲. 수많은 모험가들이 찾는 이곳에 당신의 던전이 되어줄 던전 유체가 태어났습니다. 당신은 그 던전의 보스 몬스터. 최고의 던전이 되어 보스 몬스터로서의 제명을 다해 봅시다.

―힌트입니다. 당신은 던전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당신은 흑기사라는 모험가를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24층에서는 2주가 지날 때마다 현실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현재 2명의 참가자가 있습니다.]

나 말고 또 다른 참가자의 존재를 확인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야신의 말대로 나보다 먼저 이 층에 들어온 녀석이 있었다.

'야신의 말대로라면.'

23층을 먼저 클리어한 것은 야신 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23층을 먼저 돌파한 장본인이 나와 같이 이곳에 있다는 거다.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

그나저나 층을 클리어하지 않고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구역에 있는 게 가능한 일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쓸데없이 짜증을 계속 내봤자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야신이 아무리 본 적 없는 클래스를 얻었다 해도.'

날 이길 방법은 없다.

그리 생각하니 겨우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이 녀석은.'

흑기사라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눈앞에 꾸물거리는 검댕이를 바라보았다.

클리어 조건은 우선 이 검댕이를 던전으로 키워 나가는 건데.

'클리어 조건이 애매모호하네. 그리고 보스 몬스터로서 제명을 다하라니.'

무엇보다 이 녀석을 던전으로 키우면 끝인 건지 명확히 표시가 안 돼 있다.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의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 악질적인 녀석이 걸린 모양이었다.

"야, 검댕이."

검댕이를 불러보자 녀석이 꾸물거렸다.

꽤나 징그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내려다보고 있자 내 발 쪽에 스멀스멀 다가왔다.

띠링!

그 순간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던전 유체(검댕이)]

Lv.1

투기량 : 50

던전의 유체입니다.

매개체인 시체를 삼키면 곧바로 던전으로서 성장합니다. 던전은 삼킨 시체에게 원래 기억을 부여합니다. 던전 속에서도 일상생활은 해야 하니까요. 삼킨 시체의 따라 성향이 달라지므로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미리 주의하시길! 던전도 사냥당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뒤이어 주의사항 같은 문구들이 떴다.

1. 당신은 보스 몬스터이기에 던전을 중심으로 1m 이상 나갈 수 없습니다.

2. 던전은 투기를 먹고 자랍니다.

'투기라, 오러 같은 건가?'

그러자 스테이터스 창 위 다른 창이 떴다.

투기란?

던전을 성장시키는 요소로 모험가가 던전에서 싸울 때 발산하는 힘입니다. 투기로는 몬스터를 소환하거나 층을 꾸미거나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코스트란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마저 나머지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3. 유체인 던전은 이동할 때 1km 당 10의 투기를 소모합니다.

4. 던전 안에 몬스터들은 죽은 뒤 1시간 후 다시 부활합니다.

5. 던전이 강해질수록 던전의 주인 또한 공명하여 강해집니다.

6. 던전에서 태어난 몬스터는 더 이상 레벨 업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검댕이의 스테이터스 창인 듯했다.

'완전히 키우기 모드군.'

그것보다 시체라니 취향 한 번 더럽다.

'그나저나 시체를 어디서 찾는다.'

우선 주변에 생물이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귓가에 마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 컹 하고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 보아도 몬스터.

잘됐다.

"피리 부는 사나이."

그 순간 내 목소리가 휘파람 소리로 변했다.

퍼져 나간 휘파람 소리에 개 소리가 줄어들고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제일 먼저 온 것은 흉견들이었다.

옆구리에 깊숙이 파인 상처가 있는 개들은 나를 향해 침을 흘리며 맹렬히 뛰어왔고, 나는 즉시 별천도를 들어 올렸다

"환영하마. 너희가 검댕이의 첫 몬스터다."

"깨갱!"

내 검에 순식간에 베어 갈라진 흉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흉견 위에 검댕이를 올려 주자 녀석이 꾸물거리며 개들을 삼켜 가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그 순간 뼈끼리 부딪치는 울려 퍼졌다.

앙상하고 새하얀 사람의 뼈.

그리고 초라하게 걸친 옷과 검을 쥔 몬스터는 스켈레톤이었다.

퀭하게 비어 있는 검은색 눈동자를 엿본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검을 들었다.

"어서옵셔."

스켈레톤이 박살 났다.

뼛조각을 하나하나 주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거친 날개 소리가 창공에 울렸다.

고개를 든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효과 직빵이네."

그곳에는 내 몸의 수천 배는 될 법한 용이 날고 있었다.

['24층의 주인'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박수를 쳐 보입니다.]

* * *

광풍의 호푸라.

혹은 광룡이라 불리는 그 용은 오늘도 유유히 자신이 파괴한 나라 소에르에서 태평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소에르 왕의 왕국을 멸망시킨 용은 다음 사냥감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 심심한 삶을 활기로 가득 채워줄 자를 말이다.

얼마 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바람을 타고 낯선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일반 생물과는 차원이 다른 청각을 가지고 있는 호푸라가 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호푸라는 홀린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흥미가 돋은 호푸라는 거대한 상체를 세워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고 이내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펄럭.

호푸라의 움직임 한 번에 주변의 새들이 모두 도망쳤다.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온 호푸라는 휘파람의 끝에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내 취향인데?'

17화

다부진 체격, 꽤나 잘생긴 얼굴. 호푸라의 취향에 딱 맞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눈을 빛냈다.

'바람을 타고 들려온 휘파람 소리는 이자가 낸 것이겠지.'

오랜만에 좋은 장난감이 손에 들어왔다며 호푸라는 눈가에 호선을 그렸다.

[인간, 좋은 휘파람이구나. 어디 한 번 더 내 앞에서 불러 보거라.]

위엄 섞인 용언이 호푸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마디, 한마디가 일반 사람이라면 오금을 저릴 오러가 깃들어 있었으나 남성은 아무렇지 않게 호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성이 보통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어이, 용가리 좀만 더 다가와 봐."

[요, 용가리? 이 몸에게는 '광풍의 호푸라'라는 이름이 있다!]

"그래, 호푸라. 좀 내려와 보라니까."

호통을 친 호푸라는 남성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남성은 왠지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고, 그 눈빛에 호푸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자신을 이렇게 대범하게 보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으흠흠, 뭐, 내가 좀 아름답긴 하지. 가까이서 보고 싶은 네 마음도 잘 알겠다.]

괜히 무안하여 헛기침을 한 호푸라는 못 이기는 척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게 남성과 2m 쯤의 거리에 쿠웅 내려 앉자 그는 더 오라는 듯이 손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더 가까이."

[이런, 적극적인 놈 같으니. 안된다. 이 몸의 몸을 그리도 자세하게 감상하고프냐.]

호푸라는 수줍은 소녀처럼 싫은 척하며 그 거대한 발을 조심히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남성의 검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남성의 검에 오러가 맺힌 순간 호푸라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오싹, 비늘 아래로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남성에게서 강자를 향한 공포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위협을 감지한 호푸라가 거칠게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그래도 용답게 위험 인식은 빨랐는지 도주를 택하려 한 것이었다.

"늦었어."

그러나 호푸라는 자신의 밑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이미 남성의 공격 범위 밖으로 빠져나가기에는 늦었던 것이다.

"용 한 마리 추가네."

그 날 광풍의 호푸라의 목이 잘렸다.

* * *

검댕이가 흉견을 삼킨 이후 순식간에 불어나자 '와.'하고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흉견을 삼킨 지 한 시간.

검댕이는 이제 성장기로 돌입했는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주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커가기 시작한 녀석은 곧 검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거대해졌다.

마치 탑의 입구 같은 모양에서 점점 더 던전과 비슷한 형태로 탈피한 순간.

[던전 성장기(검댕이)]

Lv.2

현재 보유 투기량 : 50

성장력 : 2단계

난이도 : 쉬움(F)

특이사항

1. 현재 보유 몬스터.

―흉견 Lv.1 : 한 마리 소환 시 투기 1을 소모합니다.

더 많은 몬스터의 시체를 먹이거나 혹은 몬스터를 던전으로 이끌고 와야 합니다. (던전이 먹은 몬스터는 던전에서 계속 생성됩니다.)

2. 던전을 운영하기에 투기량이 모자랍니다. 이대로라면 던전의 수명이 한 달 내에 끝납니다.

3. 현재 보유 보상이 없습니다. 보물을 찾아 놓지 않으면 모험가들이 던전을 찾지 않을 겁니다. (던전이 먹은 보물은 던전에서 계속 생성됩니다.)

레벨 2가 된 검댕이의 스테이터스창이 떠올랐다.

잠시 스테이터스 창을 살피다가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시작하자마자 한 달이라는 제한 시간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곳에서의 일주일이 바깥에서는 하루라고 했었나.

그렇담 바깥 시간으로 4일 이내에 어떻게든 투기를 뿜어내 줄 모험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나는 검댕이를 모험가가 매력적이게 느낄 만한 던전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전에 모험가가 여길 찾아오긴 하나.'

팔짱을 낀 채 검댕이를 본 나는 우선 호푸라와 스켈레톤 시체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쪽은 신기하게도 우거진 숲이 보였다.

아무래도 던전 내부는 이렇게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 순간 외벽이 꾸물꾸물 거리며 내가 가져온 호푸라와 스켈레톤을 삼켰다.

[광풍의 호푸라(Lv.193)가 던전에게 흡수되었습니다.]

[스켈레톤(Lv.1)이 던전에게 흡수되었습니다.]

오오, 바로 흡수하는 건가.

조금 재밌네.

"그럼 흉견 1마리 소환."

[흉견 1마리가 던전에 소환됩니다. 투기 1을 소모합니다.]

그 순간 컹 하고 짖으며 흉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눈앞에 나타난 흉견은 주위를 서성거리더니 어딘가로 걸어갔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없어 보이네.

"일단 흉견 9마리 소환."

[흉견 9마리가 소환됩니다. 투기 9가 소모됩니다.]

연이어 9마리에 흉견이 소환되었다.

그러나 곧 9마리가 각자 흩어지자 역시 어딘가 없어 보였다.

'뭐, 시작이니까. 더 이상 레벨 업 하지 않는 제약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내가 어깨를 으쓱거린 순간.

[던전에 모험가가 입장했습니다.]

또 다른 알림음이 울려 왔다.

* * *

흑색의 갑옷.

흑기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21세에 소드 마스터라는 쾌거를 이룬 S급 모험가였다.

본명, 하블리아 신시아.

검술 명가로 유명한 하블리아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처음 검을 잡았을 때부터 이미 재능을 보였다.

하블리아 가문의 타고난 핏줄로 인한 선천적인 육체, 그리고 같은 검술가라면 재능의 차이에 몸서리칠 만한 압도적인 검술.

그 두 가지를 가지고 태어난 신시아는 하블리아 가문에 차기 가주로서 지목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녀는 가문에서 차기 가주는 물론, 검을 제외한 모든 걸 박탈당하고 만다.

그 이유는 바로 악마왕이라 불리는 일렉산드라의 왕 이블제리아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몰래 자신을 찾아온 그의 손길을 내친 신시아는 이블제리아의 저주를 받고 '영원히 좀 먹는 가면' 에 씌워졌다.

벗어도, 벗어도 무한히 되돌아오는 가면이 씌워진 그녀는 가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악마왕에게 당했다는 치욕과 흉측한 가면을 쓴 자는 하블리아 가문에 가주가 될 수 없었기에.

순식간에 가문과 가족, 얼굴마저 잃은 그녀는 자신을 쓰러트리는 자가 나온다면 가면은 저절로 해체될 거란 이블제리아의 말에 모험가로서 검을 갈고 닦았다.

언젠가 자신이 이블제리아를 꺾고 가면을 벗는다면 분명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던전?"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 새로 생긴 던전이 보였다.

자주 이 길을 거닐던 신시아는 알고 있다.

이 자리에 던전이 없었다는 것쯤은.

그렇기에 그녀는 의문을 가진 채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새로운 던전이 생긴 걸까.

'이 길이면 초보 모험가가 자주 다니는 길이야.'

분명 멋모르고 들어갈 모험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신시아의 머릿속에 스쳤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뜻 던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이도가 낮은 던전이라면 초보 모험가들도 들어가도 괜찮겠지만, 혹여나 높은 난이도를 가진 던전이라면 모험가 길드에 알려 입장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S급 모험가로서 자신이 할 일 중 하나라고 신시아는 생각했다.

그렇게 던전에 입장한 순간 그녀의 눈에는 숲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이는 던전은 새것과 같았기에 신시아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던전임을 짐작했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 흉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몬스터가 등장하자 곧바로 흑색의 검을 뽑아 베어 버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흉견을 보아하니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은 던전인 듯하였다.

'이 정도라면.'

초보 모험가들도 충분히 클리어할 만한 수준이었다.

나오는 건 고작해야 흉견 10마리.

모든 흉견을 베어 낸 신시아가 안쪽으로 더 걸어갔을까, 그 순간 인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수풀을 해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공터 하나가 펼쳐졌고 눈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모험가?"

자신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남성에게 의문을 가지고 다가서던 순간 신시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녀에 몸에서 우수수 돋아난 소름이 남성의 정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던전의 주인.

그가 보스 몬스터임을.

신시아의 눈초리가 서서히 변해 가기 시작했다.

분노와 원한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저주를 내려 영원히 흑색 투구 속에 얼굴을 가릴 운명으로 만든, 지금 신시아가 가장 죽이고 싶은 그 남자가 떠올랐다.

눈앞에 남성은 악마왕과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다.

신시아의 눈에 불이 붙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신시아의 검이 휘둘러졌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가 담긴 검은 하천성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하천성이 들어 올린 검에 신시아의 검은 가볍게 막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신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내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금 하천성에게 검을 휘둘렀다.

몇 번의 합이 오고 가고.

그 끝에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은 신시아였다.

하천성은 분명 방어만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자신의 검이 단 한 번도 그에게 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해. 이 정도로 강한 사람이 대체 왜 던전의 주인 따위가 된 걸까.'

호흡을 고치며 거리를 벌린 신시아는 다시금 자세를 되잡았다.

하천성은 강했다.

그것도 자신을 가볍게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강하기 때문일까, 강함에 집착하는 건 언제나 강자들이었으니까.'

머릿속에 원수 악마왕을 떠올린 신시아는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신시아의 검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하블리아가 신시아식

도깨비 호롱

신시아의 검이 한없이 진해졌다.

오러가 빛을 흡수시켜 마치 그림자처럼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하블리아가 신시아식

황혼의 요람

그리고 신시아의 검이 휘둘러진다.

한 번의 휘두름.

그러나 그 휘두름에는 수천 번의 베기가 담겨 있었다.

마치 천 개가 된 듯한 검이 다각도에서 하천성을 덮치자 그도 그녀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신시아의 비기임에도 불구하고 하천성은 그녀의 검을 모조리 받아쳤다.

그러나 반격해 오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끄는 듯한 그의 행동에 신시아는 입술을 까득 깨물곤 다음 비기를 쏟았다.

하블리아가 신시아식

오만

검을 부딪치는 와중 흑색의 오러가 갑자기 치솟았다.

하천성의 목을 노리고 맹렬히 날아드는 오러는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고, 그는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좋아. 충분히 뽑아 먹었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검집 속에서 번개가 용솟음친다.

뻗어진 검이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휘둘러지자 챙강 하고 흑검이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신시아의 눈이 투구 사이로 비치자 하천성이 으직 하고 그녀의 머리를 내려쳤다.

찌그러지는 투구와 함께 바닥의 꽂힌 신시아는 몸을 부들부들거리다가 이내 멈췄다.

하천성은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투기는 충분히 얻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기, 다려."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설마 기절하지 않았을 거라곤 생각 못 한 하천성은 신시아를 돌아보았고, 거기에는 부서진 투구를 내던진 그녀가 있었다.

신시아의 얼굴에는 찌푸려진 얼굴의 가면 하나가 덧대어 있었다.

그 가면은 꿈틀거리며 기괴하게 신시아의 얼굴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기분 나쁜 감각에 몸서리쳤다.

"아직, 아직이야."

충격으로 혀를 깨물었는지 입가에 핏물이 흘러나왔지만, 신시아는 개의치 않고 검을 다시 되잡았다.

그런 만신창이의 신시아가 다가오려 하자 하천성이 가만히 눈을 찌푸렸고, 곧 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잠깐만, 너 흑기사냐."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남성의 말투에 이번에는 신시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신시아의 반응을 보던 하천성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힌트에서 흑기사를 지키라는 말이 있었는데 설마 처음 들어온 모험가가 그 흑기사일 줄이야.

'성좌가 의도했군.'

일부러 만남을 조성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신시아는 이미 한계.

방금 전 투기를 벌고자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며 하천성은 신시아의 복부를 쩌엉 하고 차 줬다.

"일단 좀 자라."

신시아의 의식이 날아갔다.

18화

[파라스타 제국 남부에 던전이 생성되었습니다.]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네. 하천성."

하블리아가 어느 방.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남성은 무표정하게 글귀를 바라보았다.

은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누군가와 닮은 얼굴.

무표정에서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그는 찻잔을 내려두고 또 다른 창을 바라보았다.

['용사 메이커' 당신은 세계 최고의 던전을 클리어할 용사입니다. 하지만 이런, 용사로서의 본문을 다하기 전에 당신의 클래스는 단계별로 봉인되어 있습니다. 단, 하블리아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된다면 모든 클래스가 해금됩니다! 당신은 그 유명한 검술 명문가 하블리아 가문의 막내 도련님! 전국의 막내의 힘을 받아 차기 가주가 되어 봅시다! (24층에서는 2주일 당 하루가 지나갑니다.)]

[현재 2명의 참가자가 있습니다.]

"나머지 떨거지들은 사실상 거의 다 제쳤고."

히죽, 특유의 미소가 그에 입가에 거닐어졌다.

"남은 건 차기 가주였던 신시아네."

* * *

"뭐라고?"

모험가 길드 연합, 통칭 서야.

S급 랭크 모험가들과 각 나라의 길드장들이 모여 만든 길드 연합 회의에서 뜬금없는 주제가 튀어 나왔다.

그건 몇십 년 동안 클리어되지 않은 S급 퀘스트, 광풍의 호푸라가 사냥당했다는 터무니없는 소식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등장인가."

성룡급 용을 죽였을 때 붙는 이명,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각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명은 쉽사리 얻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또 괴물 같은 신인이 나타난 모양이군."

우락부락한 근육의 사내, '염후' 로테미우스가 끌끌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도 과거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명을 부여받은 자였기에 그 이름의 값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광풍의 호푸라를 죽인 자는 살아 있나?"

혹시나 동귀어진한 게 아니냐는 한 물음에 하천성이 속한 파라스타 지역의 모험가 길드장 '거인', 자이언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뭐야, 그럼 그냥 용들끼리 싸우다 죽은 거 아니야?"

"그 정도 스케일의 일이 있었다면 진작 누군가가 알아차렸을 거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용들은 특급 재해.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모험가 연합인데 용들의 싸움을 자신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흑기사는?"

연합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흑기사의 부재를 언급한 S급 모험가가 의문을 가진 채 물었지만 서로가 모르는 눈치였다.

"이 정도 안건에 그 녀석이 안 올 리가 없는데 말이야."

"뭐, 중요한 퀘스트라도 하는 중이겠지. 그것보다 중요한 건 호푸라를 죽인 자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호푸라 급의 괴물에 대한 정보조차 모른다는 건 큰일이야."

"그럼 조사대를 파견해야겠군."

그리고 서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흑기사를 쓰러트린 이후 녀석을 들판에 재워 둔 나는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소환한 것은 20마리.

흉견 10마리와 스켈레톤 20마리를 모아두니 그럭저럭 던전의 구색은 갖춘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보상, 보물이네."

모험가가 흥미를 끌 만한 보물이 없다.

그건 또 다른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1m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구해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벗겨 먹을 모험가를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일단 검댕이 밖으로 나온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곤 우선 귓가에 마나를 맺혀 청각을 돋우고 정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

멀리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영 안 걸리네."

"요즘 산적질도 참 힘들단 말이야."

잡담하며 낄낄거리는 두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 순간,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가자. 검댕아."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자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검댕이가 벌떡 일어났다.

검은색의 다리가 돋아난 검댕이는 뿌리를 갈무리하더니 쿵쿵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던전 입구 앞에 털썩 앉아 도착을 기다렸다.

* * *

오티만 산적 집단.

B랭크 모험가 다수는 되어야 잡을 수 있을 만큼 크기가 큰 이 집단은 파라스타 제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북쪽의 카라드 왕국과 기 싸움을 하고 있는 파라스타 제국 입장에서는 남쪽에 자리 잡은 오티만 산적 집단을 처리하고자 따로 군사를 빼기 애매했다.

그래서 모험가들에게 소탕 의뢰를 했지만, 모험가들은 몬스터를 사냥 하는 이들이지 사람을 사냥하는 자들이 아니었기에 아무도 산적 사냥에 신경 쓰는 자가 없었다.

결국 오티만 산적 집단은 갈수록 크기가 불어나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달리 방도를 찾지 못한 파라스타 제국 입장에서는 발만 동동 굴렀다.

"카하핫, 머저리들도 이런 머저리들이 없지."

고작 자리 선정 하나 잘한 것 덕분에 이 정도로 자유를 만끽하다니.

산적 대장인 비슈엘라 진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원래 파라스타 제국의 몰락 귀족이었던 그는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이곳 오티만 숲에 자리 잡았다.

그런 뒤 자신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자들을 꾸역꾸역 받은 결과 이러한 집단으로 커진 것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산 중턱에 따로 마을을 짓기까지 했으니 이들이 얼마나 커졌는가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여봐라, 잔이 비지 않았느냐. 빨리 채워라."

하녀에게 비아냥대며 마치 왕이라도 된 양 비슈엘라 진은 히히덕거렸다.

갑자기 그의 문을 박차고 누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비슈엘라 님!"

거친 목소리와 함께 산적 한 명이 무릎을 꿇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급한 산적의 목소리에 흥이 깨진 비슈엘라는 진한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왜 소란이야."

"크,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온 던전 때문에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있습니다!"

"던전?"

산적의 말을 듣고 비슈엘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이라니 그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몰락한 귀족이긴 하나 비슈엘라는 엑스(Axe) 엑스퍼트 상급에 이르는 자로서 무려 70레벨에 달하는 강자였다.

던전에 대한 것은 당연히 상식처럼 알고 있는 일이었고, 그는 허무맹랑한 소리라 여기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자랑하는 도끼를 쥐고 서둘러 산적 단원의 뒤를 따라나선 순간 비슈엘라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도 그럴 게 산적 단원의 말처럼 던전 하나가 마을 중심에 떡하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냐 저게."

"던전입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산적 단원의 대답에 비슈엘라는 눈을 비빈 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단원 몇 명을 때려눕힌 채 유유히 휘파람을 불던 남성은 비슈엘라를 보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보스지?"

단원들에게 비슈엘라의 생김새를 들었던 남성이었기에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어느 멍청이가 겁도 없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뿌득.

비슈엘라의 이가 갈렸다.

감히 자신의 단원들을 이 꼴로 만들다니 용서해 줄 수가 없었다.

"겁도 없이 이 비슈엘라 님의 단원을 이 꼴로 만들어?"

불타오르는 붉은색의 오러가 비슈엘라의 도끼에 맺혔다.

열은 받았으나 그는 신중했다.

비록 자신보다는 약하나 매일 단련 시킨 단원들이다.

이 정도로 쉽사리 당할 정도의 자들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는 건 남성의 무위가 자신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것.

비슈엘라는 도끼를 비스듬히 쥐고 천천히 발을 굴렀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우리를 습격한 이유가 무엇이지!"

"니들한테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남성, 하천성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비슈엘라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부탁, 부탁을 어느 누가 이런 태도로 하는가."

"아, 미안,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야."

히죽 웃은 하천성의 말에 비슈엘라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버릇없는 저 태도, 비슈엘라가 겪어 본 전형적인 귀족 녀석들의 태도였다.

비록 자신도 귀족이었으나, 자신을 몰락시킨 귀족을 증오하는 비슈엘라 입장에서 하천성은 상당히 기분 나쁜 자였다.

"죽여 주마."

그 순간 비슈엘라의 도끼가 움직였다.

비슈엘라식 도끼술

절기 로우테라

화염이 깃든 도끼가 상하좌우로 끝없이 휘둘러진다.

마치 한 개의 도끼가 수십 개가 된 것처럼 휘둘러진 도끼는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하천성에게 날아들었고, 하천성은 검이 든 검집을 가볍게 올렸다.

태엥.

그 순간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묵직한 도끼와 검집이 부딪친 소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작은 소리가.

"너 호푸라 아니, 흑기사보다도 약하네."

"흑, 기사?"

설마 소드 마스터 흑기사를 말하는 건가.

자신의 도끼를 아무렇지 않게 막은 하천성에게 경악한 비슈엘라였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음 기술을 사용했다.

비슈엘라식 도끼술

절삭 로우만테

그 순간 비슈엘라의 도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비슈엘라의 도끼에서 맹렬한 열기가 감돌고 그 열기에 의해 이전보다 더한 절삭력을 가졌다.

동시에 그의 팔이 두껍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나가 급속하게 비슈엘라의 팔에 집중된 것이었다.

'이놈은 전력을 다해야 이길까 말까 한 상대.'

저 입에서 흑기사가 튀어나온 것은 분명 허풍이 아니였다.

그렇다면 눈앞에 선 하천성을 흑기사를 상대한다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끝장낼 생각이었다.

뚜둑.

그의 도끼가 하천성의 검 놀림에 허무하게 부서지기 전까지는.

일순간 비슈엘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오러가 깃든 하천성의 검집이 자신의 도끼보다도 더한 절삭력을 가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검집이 자신의 두꺼운 목을 향했을 때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무릎이 풀렸다.

달달달, 그의 이가 부딪치며 죽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의 목 바로 옆에서 멈춰져 있는 검집에서 흘러나온 오러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내 부탁 좀 들어주실까?"

"뭐든지 하겠습니다!"

산적답게 비슈엘라는 바로 항복했다.

* * *

비슈엘라를 부하로 들이고 나는 원래 그가 앉던 자리에 앉아 녀석이 따라주는 잔을 뻗었다.

"잔 따라."

"따, 따르겠습니다."

"필요 없어!"

"우와악!"

적당히 비슈엘라의 정신도 다져 준 나는 울상을 짓는 그에게 말했다.

"자, 니들한테 시킬 건 단 하나다."

"예."

나한테 전원 한 대씩 맞았기 때문일까, 녀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비슈엘라 녀석이 가져온 파라스타 제국의 지도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내 던전이 있지. 앞으로 이곳에 계속 세워 둘 테니까. 매일 전원 던전을 클리어해라."

"던전을 말입니까?"

비슈엘라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마치 굳이 왜 그런 일을 하냐는 듯.

그 의문에 내 눈빛이 싸해졌고 비슈엘라는 당황하며 고개를 급히 숙였다.

내 말에 토 달지 말라는 눈빛을 잘 이해한 모양이었다.

"별말 말고 전원, 매일이다. 알겠지?"

"예, 예."

"아, 그리고 보물도 다 내놔."

"예."

내 말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본능적으로 느낀 비슈엘라는 바삐 부하들에게 보물을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다른 부하들한테도 내 말에 더 토를 달다간 이제는 봐주는 거 없다고 눈을 부라리자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몇몇은 무기를 챙기고 던전으로, 몇몇은 보물을 찾으러 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봤다.

이걸로 주기적으로 투기를 지급할 녀석들과 보물까지 모았다.

"꼭 모험가로 하란 법 있나. 사람이면 다 되지."

낄낄거리며 편법을 쓴 내 머리를 나는 열심히 칭찬했다.

"너!"

그 순간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검댕이의 입구에 서 있는 여성의 등장에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가면이 씌워진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왜, 왜 너 정도 되는 급의 사람이 던전 주인 따위가 되어서."

아무래도 흑기사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머리를 맞아서인지 아직 혼란스러운듯한 표정을 짓는 흑기사를 보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러냐 쟤."

"형님, 흑기사의 과거사는 유명한데 모르십니까?"

19화

내 의문에 옆에 있던 비슈엘라가 놓칠세라 대답했다.

그런 비슈엘라를 보고 설명해 보라고 눈짓하자 녀석은 바쁘게 입을 놀렸다.

"악마왕이라고 형님과 같은 던전의 주인인 이블제리아라는 아주 못된 놈이 있습죠. 그 녀석이 어느 날 하블리아 가문의 차기 가주 신시아에게 눈독을 들였다가 퇴짜를 맞자 열이 받은 나머지 그대로 가면의 저주를 내렸고, 그 바람에 차기 가주 자리는 물론 가족들한테도 버림받은 신세가 된 겁니다. 그래서 흑기사 앞에서는 너도나도 악마왕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 게 국룰이죠."

대강의 과거사를 듣고 나는 턱을 매만졌다.

나한테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도 악마왕에게 당한 게 있어서라 이거지.

'성좌가 그냥 이야기를 만들었을 리가 없는데.'

무언가 이어지는 게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천성."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어딘가 기괴하게 철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얼굴에 노이즈가 낀 남성이 서 있었다.

그리고 보자마자 나는 직감했다.

'이놈이다.'

야신이 말했던 나를 막을 자라는 게.

내 눈이 번뜩이고 곧이어 검이 휘둘러졌다.

그러나 남성은 능숙하게 내게서 걸음을 떼었고 1m 거리 이상 벌렸다.

내가 던전 밖으로 1m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뭐지. 이놈.'

우수수.

어딘가 꺼림칙한 감정이 목 끝을 타고 올라왔다.

나와 엇비슷할 정도의 반응 속도.

심상치 않은 기분이 느껴졌다.

야신이 직접 나타나 그 정도로 호언장담한 인물이다.

분명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 터.

'클래스, 어떤 클래스냐.'

얼굴에 생긴 저 노이즈도 분명 클래스의 일종일 터.

추측하건대 저 클래스가 바로 성좌들이 클리어를 알리지 않게 만들었던 장치가 분명했다.

옅게 내 눈살이 찌푸려지자 나에게서 거리를 벌린 채 그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빠르네. 벌써 신시아랑 만날 줄이야."

아직 정신을 못 차려 어벙하게 있는 신시아를 보고 남성이 반응했다.

그 모습에 나는 직감했다.

남성은 신시아를 노리고 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

"거기서!"

그리고 그 한마디를 남기고 남성이 자리를 뜨려 하자 나는 바닥을 쿵 하고 박찼다.

그러나 검댕이에게서 1m를 벗어나기 직전 내 몸이 공중에서 우뚝 멈춰 세워졌고 하는 수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눈앞에서 뻔히 보이는 상대를 놓쳤다.

1m 제약만 아니었다면 뒤를 쫓을 텐데 망할 놈의 성좌가.

빠득, 이가 갈렸다.

"야."

"예, 형님."

비슈엘라가 부복하며 대답했다.

이블제리아의 설명에 의하면 그놈은 분명 자유롭게 던전 밖을 나돌아 다녔다.

성좌가 만든 룰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분명 다른 편법이 있을 것이다.

"악마왕의 대해 자세히 설명해 봐."

"옙!"

곧이어 비슈엘라는 옆에서 침이 마르도록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던전이 투기를 완전히 머금었을 때 던전은 완전히 개화한다.

그 일대는 던전에 집어 삼켜져 끝내 던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지상에 현현하고, 죽더라도 1시간 뒤에 되살아 나는 불사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때 던전의 주인은 자유의 몸이 되는데, 이블제리아는 그를 이용해 던전의 몬스터를 이끌고 수십 개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이블제리아는 '악마왕'이라는 명칭을 얻고 이블제리아가 명칭한 나라 일렉산드라는 마경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악마왕 이블제리아.

수십만 명을 학살한 괴물이었다.

"악마왕 자체도 굉장히 강합니다. 그는 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마법은 어느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11서클이라는 경지에 올랐다고 하니까요."

그 정도라면 300레벨대일려나.

과거 회차를 생각하면 최전선에 설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수치다.

'지금의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세계관에서 최강자의 위치에 있는 자겠지.

'그렇군. 던전의 주인으로서 본보기를 하나 만들어 뒀다. 이건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내 목가에 반이 잘려진 흑색의 검이 들이 밀어졌다.

내 등 뒤에는 겨우 정신을 되잡은 흑기사가 있었고 나는 녀석이 입을 떼기 전에 검을 튕겨 내고 흑기사를 바닥에 눕혔다.

"꺄악!"

안면은 바닥을 향하고 팔은 내게 붙잡혀 제압당하는 자세가 된 흑기사는 분한 듯 씩씩거렸다.

나는 그런 흑기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 악마왕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지? 지금도 나랑 악마왕이랑 겹쳐 보이니 이러는 거고."

움찔.

흑기사의 어깨가 한차례 떨렸다.

"내가 도와주마."

그리고 내 말이 들린 순간 흑기사가 불같이 화를 내었다.

"건들지 마! 악마왕은 내가 죽일 거야!"

내가 악마왕을 대신 죽여 주겠다는 말로 착각한 건지 소리를 내지르는 흑기사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 내가 죽이는 게 아니라 네가 죽여야 할 테니까."

의문을 띄우는 흑기사를 놓아준 나는 녀석에게 한두 걸음 물러서서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악마왕처럼 될 생각이 없어."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네가 믿지 않는다고 뭔가 달라질 것 같아?"

확실히 나는 흑기사 정도로는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을 흑기사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가면 너머에 표정이 흐려졌다.

"대신 널 강하게 만들어 줄게."

"그럴 이유는?"

"나랑 똑같은 놈이 있는 건 마음에 안 들거든."

그러면서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하나 내 미소를 보고도 흑기사는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가.

"알았어. 그냥 내가 투기가 필요해서야. 너 정도로 강한 모험가는 투기가 많이 나오니까."

실제로 일반 산적들과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흑기사를 비교했을 때 흑기사 쪽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내가 일리 있는 말을 했기 때문일까, 흑기사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너야말로 나쁠 것 없는 제안일 텐데? 강자랑 매일 싸울 수 있는 찬스가 어디 흔할 것 같아?"

그리고 내 마지막 한마디에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있으면 이블제리아를 꺾는 것도 그리 큰일이 아닐걸. 적어도 지금보다 몇 단계는 성장 가능할 거다."

강자와의 싸움.

그것은 무인이라면 어느 누구나 얻고 싶어 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목이 마를 때 갈증을 해소시켜 줄 물 한 잔보다 더 간절한 것이 경험이니까.

그 사실을 흑기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흑기사가 우물쭈물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저, 정말로 악마왕이랑 똑같이 되지는 않을 거지?"

말투가 살짝 바뀌었다.

조금만 더 말하면 넘어가 주겠다는 듯한 태도에 나는 씨익 하니 웃었다.

"그래."

내 대답을 듣고 흑기사가 끝내 넘어오고 말았다.

"그나저나 너 이름은."

"하블리아 신시아."

"그래, 신시아 당분간 잘해 보자고."

또 한 번 용사 키우기 시작이다.

* * *

이후 보물을 잔뜩 먹이고 난 이후 나는 신시아와 마주 봤다.

"우선 수준 검사다. 싸워 봐서 어느 정도 알긴 하지만 난 네가 어디까지 실력을 끌어낼 수 있는지는 몰라. 그러니 네가 상대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몬스터에게 안내해 봐."

"뭔가 이용하려는 듯한 말투인데."

"틀린 말은 안 했잖냐."

미심쩍은 눈초리를 한 신시아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번 믿기로 한 거 그냥 제대로 믿어 보자는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이전에 전쟁터였어서 언데드들의 천국이 된 곳이 있긴 한데."

"좋아. 거기로 결정. 검댕아 가즈아!"

그 순간 이전과 같이 던전이 불쑥 일어났다.

검댕이는 혼란스러운 듯한 신시아를 태우고 성큼성큼 그녀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던전은 걸을 수도 있었어? 설마 지금까지 던전이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장소에 나타났던 것도 전부 이래서...."

충격받은 듯한 신시아의 표정에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직진했다.

한참을 이동했을까, 신시아가 도착했다고 한순간 거기에는 황량한 대지가 있었다.

언데드들은 딱히 보이지 않았기에 내가 손가락으로 황무지를 가리켜 보이자 신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땅속에 잠들어 있는 거야. 살아 있는 생명체가 다가오면 즉시 땅을 파고 다시 나오거든.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 전쟁이 워낙 규모가 컸던지라 소드 마스터 급의 언데드들도 몇몇 잠들어 있어서 웬만하면 사람들이 안 오는 금지구역이야."

"내게 이곳을 소개해 준 건 날 그만큼 높게 평가한 거구만."

"어차피 여기 온 목적은 하천성 네 던전에 몬스터를 채워 넣을 목적인 거잖아?"

"들켰구만."

기왕 협조하기로 한 거 팍팍 협조 해 주는 신시아의 태도에 감사하며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발동시켰다.

휘파람 소리가 땅속으로 울려 퍼진 순간 두두둑하고 흙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량했던 일대가 순식간에 언데드 밭으로 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언데드들은 인간인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신시아가 당황하며 외쳤다.

"뭐,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검이나 들어. 사냥 시간이다."

신시아의 외침에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별천도를 뽑았다.

그러자 결국 신시아도 투정 부리는 것을 멈추고 검을 뽑았고 우리는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

한참 동안 언데드들을 베었을까, 어느덧 삐걱거리는 스켈레톤 한 마리가 다리를 잃고 바닥을 뒹굴 무렵 대지는 다시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나와 함께 싸우던 신시아는 도중부터 나가떨어져 검댕이 입구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에 반해 쌩쌩한 내 모습에 가면 너머가 울상이 되어 있었다.

"어, 떻게 아직, 도 움직여."

"너야말로 체력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 팍팍 한계치를 돌파해야 성장하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지친듯한 신시아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신시아를 보며 언데드 시체들을 던전 안에 집어넣은 나는 곧 또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그럼 다음 사냥이다."

"잠깐, 뭐? 하천성 너 미쳤...."

"몬스터 파밍 가즈아아아!"

"가긴 어딜 가!"

신시아의 비명을 뒤로하고 나는 또 다음 몬스터 사냥을 시작했다.

* * *

[던전 성장기(검댕이)]

Lv.25

현재 보유 투기량 : 18,721

성장력 : 2단계

난이도 : 어려움(S)

특이사항

1. 현재 보유 몬스터.(현재 10마리가 넘어가는 관계로 이름만 표시됩니다.)

[스켈레톤/광풍의 호푸라(성룡)/데스 나이트/듀라한/용아병/데몬윙/하이 스켈레톤/머그 독/미라/구울/밴시/본드래곤/스켈레톤 기사/스켈레톤 전사/스켈레톤 마법사/스켈레톤 궁사/...]

몬스터의 시체를 먹이거나 혹은 몬스터를 던전으로 이끌고 와야 합니다.(던전이 먹은 몬스터는 던전에서 계속 생성됩니다.

2. 지형 변화

투기 500당 던전 내부 지형을 10m씩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3. 보유 보물.

금화 : 한 상자 소환 시 투기 5를 소모합니다.

은화 : 한 상자 소환 시 투기 3을 소모합니다.

마검 테리우스 : 소환 시 투기 500을 소모합니다.

유리아의 성화 목걸이 : 소환 시 투기 300을 소모합니다.

그리고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밖에서는 자그마치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는 계산 내의 시간이었다.

두 달 동안 주구장창 몬스터들을 모았기 때문일까, 어느새 던전은 북적북적해져 수많은 몬스터들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20화

거기에 층도 두 개로 늘어나 1층 자연계 층과 2층 언데드 층으로 나누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만하면 모험가를 받을 준비는 충분히 되었다고 나는 단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동안 크게 변화한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신시아였다.

두 달 동안 악의가 느껴질 만큼 강하게 만든 내 던전을 신시아는 매일같이 공략했다. 그리고 던전을 모두 공략한 뒤, 마지막에 왔을 때 나와의 대련을 치르고 탈진하기를 반복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신시아의 검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강해져 갔다.

"그럼 오늘 분을 치러 줘."

내 생각 사이로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열심히 던전 공략을 끝낸 듯 그녀의 갑옷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투구 너머의 눈빛만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슬슬 호푸라도 소환할 시기인 모양이군.'

그때는 몰랐지만 호푸라는 주변에 소문이 자자한 광룡이었다.

당연히 웬만한 몬스터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의 레벨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내가 던전에 수집해 놓은 몬스터 중 레벨이 제일 높았다.

거기에 소환을 하는 데 드는 투기량만 해도 자그마치 1만이라 나는 섣불리 소환하지 못했었다.

"오늘은 몇 합이나 버티는지 볼까."

"이번에는 100합을 넘기겠어."

의지를 불태우는 신시아를 보며 나는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이 대련으로 인해 신시아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 10합도 견디지 못했던 신시아가 어느덧 나와의 대련에서 90합까지 견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성장이었고, 어느덧 신시아는 이러한 대련에 재미를 붙인 듯싶었다.

"하압!"

기합 소리와 함께 신시아의 검이 휘둘러졌다.

내 검도 그에 맞서 휘둘러졌고 신시아는 검이 서로 맞부딪치기 직전 검날을 비스듬히 틀어 힘의 반동을 줄였다.

신시아는 나를 통해 강자와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기에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는지와 같은.

지금은 S급 모험가 등급의 강자이기에 잊어버렸으나, 오래전 약자이던 시절에 알았던 것들을 다시금 깨우쳐 나가고 있었다.

하블리아가 신시아식

흑광참령

흑색을 머금은 검이 맹렬히 휘둘러진 순간 뒤에서 잇따라 칠흑의 검날이 내 몸을 덮쳐들었다.

오러로 만든 이기어검.

최근 신시아가 사용하기 시작한 새로운 검술이었다.

그러나.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번개를 머금은 내 검이 순식간에 하블리아의 비기를 박살 내놓았다.

이제는 내 차례.

번개를 삼킨 연격이 신시아를 덮쳤다.

나름대로 내 연격을 받아치는 신시아였지만 내 오러는 갈수록 더욱 강대해졌다.

결국 90합을 넘겼을 때 신시아의 오러가 끊어지며 검이 부서졌다.

내 검이 신시아의 투구 바로 앞에서 멈추자 그녀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또각.

내 오러를 견디지 못한 신시아의 투구가 반쪽으로 부서지고 그 속에 있던 은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기괴한 가면이 갉아 먹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걸 신경 쓰기보다는 99합을 넘기지 못했단 것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었다.

"...일부러 99합에서 끝낸 거지."

"100이란 숫자는 뭔가 가치 있어 보이잖냐. 뭐, 그래도 이제 슬슬 수준을 더 올려도 괜찮을 모양이다."

"그 콧대를 언젠가 눌러 주겠어."

그러려면 아직 한참 남았겠지만 말이다.

신시아는 내가 일으켜 주지 않고 그냥 돌아서자 엉덩이를 털고 스스로 일어났다.

그리고 힘없이 자신의 가면을 매만지다가 내게 말했다.

"언제쯤 직접 일으켜 줄 거야?"

"안 일으켜 줘."

내 대답을 듣고 신시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몬스터들이 약해진 거 같던데."

"알게 모르게 네가 강해진 거겠지. 그놈들은 더 이상 강해지지 않으니까. 던전에 먹힌 그 순간부터 영원히 고정이야."

"그래? 그건 안타깝네. 나라면 분명 못 견딜 거야."

신시아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강해지는 것만을 목표로 달리고 있는 신시아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겠지.

그런 신시아를 두고 검댕이의 상태 창을 킨 나는 곧바로 소환을 시작했다.

"또 뭘 소환하려고."

"전에 말했던 그 녀석."

"잠깐만 여기서?!"

침울해하던 신시아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그러든 말든 나는 소환 준비를 마쳤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소환 광풍의 호푸라."

[광풍의 호푸라 1마리가 던전에 소환됩니다.]

그 순간 바람이 몰아쳤다.

몰아친 바람에 잠깐 인상을 찡그린 내가 고개를 들자 높디높은 천장에 호푸라가 나타나 있었고, 녀석은 나를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 감히 내 목을, 어라, 여긴 어디냐!]

소리치던 호푸라가 주변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주위를 한 바퀴 날더니 던전의 출구를 발견하곤 그쪽을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쿠웅!

그 순간 날아가던 호푸라가 투명한 벽에 부딪히며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나는 곧 호푸라에게 저벅저벅 다가갔고, 녀석은 울상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게냐!]

"너 나한테 이미 죽었었어 인마."

[죽, 죽었다고? 내가?!]

호푸라가 경악하듯 소리치자 나는 느긋하게 녀석의 목을 한 번 더 베어 보였다.

그러자 호푸라는 악 소리와 함께 절명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하천성 너 정말 가차 없네."

"세월이 그렇게 만들더라고."

1시간 후 천장에서 호푸라가 새롭게 태어났다.

녀석은 경악하는 표정 그대로였고 나를 보며 진저리난다는 양 외쳤다.

[익, 이익! 이 괴물, 악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럼 사람이지. 내가 용이냐. 넌 오늘부터 내 던전 중간 보스 몬스터 역할 좀 해 줘야겠다."

[던전? 설마 여긴 던전이었냐?!]

경악하듯 소리친 호푸라는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에는 지형 변화를 눌렀다.

"살고 싶으면 투기를 모아. 너도 투기가 끊기는 순간 우리 검댕이와 같이 훅 가는 거니까."

[이 호푸라 님이 한낱 던전 중간 보스 몬스터로 전락하다니. 꺼이꺼이, 어머니 저 극악무도한 녀석을 죽여 주시옵소서.]

이게 은근슬쩍 막말하네.

내가 별천도를 꺼내려 들자 흠칫한 호푸라는 갑자기 몸을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연두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땅에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고 나는 금세 폴리모프한 호푸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인간도 될 수 있었네."

"나도 용의 폴리모프는 처음 봤어."

호푸라가 인간이 되자 겨우 다가온 신시아도 관심 있는 듯 반응했다.

"그 몸으로도 싸울 수 있냐."

"못 싸운다. 폴리모프는 말 그대로 인간이 되는 거니까. 여긴 너무 좁아서 내 육신으로 있긴 힘드니 변화 한 거다."

흐음, 확실히 호푸라의 말대로 2층 언데드 층은 녀석이 활보하고 다니기 힘들었다.

'이참에 한 층 늘릴까.'

나는 조작 창을 켜서 층 하나를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상당한 양의 투기가 소모됐지만,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아깝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던전을 키우는 이유가 뭐냐."

주구장창 만들던 도중 들려온 호푸라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이 층의 클리어 조건은 아직 확실시되지 않았네.'

당연한 의문.

보스 몬스터로서 제명을 다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쿡쿡.

"이 몸을 심심하게 하지 마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날 책임져라. 나도 쉽사리 넘어가는 용은 아니지만, 너 정도면 그래도 좀 괜찮을 것 같으니까 넘어가 주마."

"주둥이 다물어라."

"매정한 놈!"

수줍은 새색시처럼 넘어가 주려는 호푸라를 못 볼 꼴인 양 보고 있자 녀석은 내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용가리한테 사랑을 느끼는 인간이 어딨냐."

"지금 내 몸은 인간이 맞다만?"

나는 녀석의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쥐었다.

한 번만 더 주둥이를 나불거리면 뜯어 버리겠다고 경고하듯.

그러자 호푸라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마저 층을 만들기로 한 나는 호푸라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녀석은 슬쩍 내 손을 잡아 깍지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길 죽인 녀석의 깍지를 끼고 싶을까.

그 순간 반대편 손목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신시아가 있었고 그녀도 내 손목을 잡은 걸 당황한 듯싶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신시아의 모습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반하지 마라. 후회한다."

"아니, 아니야. 내가 너무 오랫동안 혼자 다녀서 그랬지. 절대 아니야!"

기어코 부정하는 신시아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실실거리는 호푸라를 끌고 다음 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에 보인 것은 탁 트인 절벽이었다.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있는 절벽은 몸집이 큰 호푸라라도 마음대로 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호푸라도 새로운 층에 관심을 보였다.

"날 위해 만들어 준 거냐?"

"그래도 어울리게는 해야지."

윗층은 언데드 층, 그리고 이 층은 용의 층이다.

조만간 호푸라 말고도 와이번이나 다른 용 같은 걸 넣을 생각이었다.

"그럼 적당히 여기서 놀아라. 조만간 친구들로 채워 줄 테니까."

"뭔가 강아지 취급하는 거 같지만, 좋다. 장소는 꽤 괜찮군."

그리 말한 호푸라가 용 모습으로 변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나 아니다."

"그만 부정해라. 심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도 모르냐."

"반한 거 아니라니까!"

"아, 알았다고!"

가시나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그리고 또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새 파라스타 제국의 오티만 산적 마을에 자리 잡은 던전의 입구에 앉아 있으니 비슈엘라가 돌아왔다.

녀석은 크하핫하고 거칠게 웃으며 오늘치 보물을 들고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형님, 저희 왔습니다요."

"그래, 오늘은 별일 없더냐."

"아, 그러고 보니 모험가 길드 연합에서 파견 온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모험가 길드 연합?

'슬슬 그쪽도 내 던전에 관심을 가질 시기인가.'

하긴, 자리를 잡고 난 뒤 신시아의 홍보 덕에 최근 모험가 유입이 잔뜩 늘어났다.

이 근처에 모험가 전용 여관까지 급히 지어질 정도로 모험가의 왕래가 늘어났고 거기에 더해 저 멀리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도 생길 지경이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 무섭구만.'

뭐, 던전의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높은 탓에 일부러 낮게 조정한 1층을 제외하면 2층까지는 엄두도 못 내는 모험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가 됐으니 모험가 길드 연합 같은 곳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긴 했다.

"야, 비슈엘라. 오늘부터는 던전 안 가도 된다. 슬슬 왕래하는 모험가들로 충분할 거 같다."

"예? 갑자기 말입니까?"

"그래, 오늘로 너와 내 관계는 끝이다. 던전 돌면서 번 돈으로 농사를 하든, 장사를 하든 좀 괜찮게 살아 봐라."

"혀, 형님?!"

갑자기 내가 이별을 통지하자 비슈엘라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한 달 동안 나랑 동고동락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나름 정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슈엘라는 내 생각과 달리 기쁜 마음을 한껏 표현하며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났다.

"후우, 드디어 저 새끼가 놔주네. 애들아 자유다!"

그렇게 들려온 소리에 다시 녀석을 쥐어패러 검댕이를 이동시켰다.

21화

[던전 성장기(검댕이)]

Lv.102

현재 보유 투기량 : 108,781

성장력 : 3단계

난이도 : 어려움(S)

특이사항

1. 현재 보유 몬스터.(현재 10마리가 넘어가는 관계로 이름만 표시됩니다.)

[스켈레톤/광풍의 호푸라(성룡)/데스 나이트/듀라한/용아병/데몬윙/하이 스켈레톤/머그 독/미라/구울/밴시/본드래곤/스켈레톤 기사/스켈레톤 전사/스켈레톤 마법사/스켈레톤 궁사/...]

몬스터의 시체를 먹이거나 혹은 몬스터를 던전으로 이끌고 와야 합니다.(던전이 먹은 몬스터는 던전에서 계속 생성됩니다.)

2. 지형 변화

투기 500당 지형을 10m씩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3. 보유 보물.

금화 : 한 상자 소환 시 투기 5를 소모합니다.

은화 : 한 상자 소환 시 투기 3을 소모합니다.

마검 테리우스 : 소환 시 투기 500을 소모합니다.

유리아의 성화 목걸이 : 소환 시 투기 300을 소모합니다.

검댕이의 스테이터스 창을 본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벨 102.

성장 3단계.

벌써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 왔어."

그 순간 새로운 검을 준비해 온 신시아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등장에 던전을 들어가던 모험가가 수군거리고 나는 신시아의 명성을 새삼 느꼈다.

하긴, 여기 모인 모험가들 대부분이 신시아의 홍보 덕에 와 준 거니까.

"오늘은 이길 거야."

"이기는 건 무리지 않을까 싶은데."

벌써 네 달째 나와 검을 맞서고 있지만, 당연 전패인 신시아는 가면 너머에서 호기로운 표정을 지었다.

"왠지 요즘 검이 달라진 느낌이 들거든. 곧 새로운 영역에 도달할 거 같아."

"그래, 슬슬 좀 성장해라. 정체기도 적당히 길어야지."

"말 좀 이쁘게 해 주지?"

어느새 신시아와 나는 친구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네 달이라는 기간 동안 계속해서 함께했기 때문일까, 알게 모르게 정이 든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라질 인연이지만.'

그걸 아는 건 나뿐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씁쓸함을 느끼며 나는 몸을 돌렸다.

수없이 겪어왔던 일.

이제 와서 이런 걸 신경 쓸 때는 아니다.

'뭐, 이것도 일종에 성좌의 노림수지.'

영원히 이 층에 빠져들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고도의 수.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더더욱 신시아에게 큰 정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여섯 달째 날.

신시아가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 * *

그 시각 검술 명가 하블리아 가.

그곳에서 한 서신을 받은 여성이 바삐 뛰어나가고 있었다.

여성의 이름은 하블리아 노스트라주, 이제는 하블리아가의 막내로 올해 22살의 나이에 이른 여식이었다.

그녀는 가주의 호출을 받아 방을 찾는 중이었다.

똑똑.

가쁜 숨을 내쉬며 가주의 방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 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거기에는 최근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에 이른 가주, 하블리아 첸이 뒷짐을 쥔 채 서 있었다.

"가주를 뵙습니다."

묵례를 올린 노스트라주는 한차례 몸을 떨었다.

하블리아가의 축복받은 육체를 이어 소드 엑스퍼드 최상급에 오른 그녀지만, 가주 앞에서는 티끌조차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스트라주, 이블제리아에게서 소식 하나가 들어왔다."

"이블제리아에게서 말입니까?"

이어진 가주의 말에 노스트라주의 눈이 놀라 동그랗게 변했다.

차기 가주와의 건이 있은 이후로 악마왕 이블제리아에게 소식이 온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하블리아가와 연을 맺고 싶다더군."

"그 뜻은...."

첸의 말에 노스트라주의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가주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가, 가주님."

"네 생각대로다."

노스트라주는 속으로 경악했다.

막내인 자신을 지금 악마왕 이블제리아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가주는 결심을 내린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여자를 지독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이블제리아는 분명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게 분명했다.

그걸 알고도 자신을 보내겠다니.

하나 가주라도 이블제리아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노스트라주는 알고 있다.

이블제리아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가주보다도 훨씬 아득한 영역에 있는 자였으니까.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긴장감에 입술이 깨물어진다.

노스트라주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이블제리아의 노리개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 사달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노스트라주가 도달한 곳은 오래전 가문에서 추방당한 언니였다.

"가주님."

회심의 미소를 지은 노스트라주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후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예상을 못 한 채로.

* * *

「아버지.」

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괴하게 가면이 덮어 씌워진 얼굴 사이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아이와 대면한 남성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악마왕 따위에게 저주를 받다니. 가문의 수치다.」

자신의 딸.

하블리아 신시아에게 가차 없이 내뱉은 말에 그녀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찌 아비가 저런 말을 내뱉는다 말인가.

「가문을 나가라. 가면을 벗을 때까지 넌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

「그 뜻은 가면만 벗으면 가문에 다시 발을 붙여도 된다는 뜻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신시아의 눈에 옅은 불길이 타올랐다.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강하다고 소문난 이블제리아를 당당히 쓰러트린다면 다시 아버지께서 다시 받아 주신다 말씀하신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신시아는 그렇게 각오하며 집을 나섰다.

* * *

서걱.

몬스터를 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흑 같은 마경에서 그녀는 그렇게 걸어 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나 자신을 덮친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지금의 자신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부탁이야. 나 좀 살려줘. 이블제리아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아.」

자신을 버린 가문에 넷째 동생이 울고 불며 찾아온 게 일주일 전.

어릴 때 보고 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생의 말에 하블리아 신시아는 검을 들었다.

자신의 철천지원수인 이블제리아를 죽이고자.

어차피 언젠가 이블제리아를 죽이고자 했다.

그것이 지금이 되었을 뿐, 달라질 건 없다.

마경, 일렉산드라.

이블제리아가 던전의 최종 형태로 만들어 낸 그 장소.

그곳에 서 있는 신시아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다 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아간 끝에 신시아는 일렉산드라의 중심에 우뚝 선 한 성에 도착하기에 이른다.

이마 부근에 맺힌 핏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까 전 몬스터의 공격을 아슬하게 피하지 못한 탓에 눈썹 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투구를 썼음에도 몬스터의 공격은 상처 없이 막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시아의 몸은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였다.

S급 모험가들에게도 접근 금지인 마경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신시아는 생기가 넘쳤다.

마치, 한 단계 성장한 양.

어둠에 휩싸인 그녀의 오러가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서걱, 철커덩.

휘두른 검의 일격에 마법 결계가 쳐진 문이 부서져 내렸다.

오러를 빛내며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 신시아의 앞에 한 노신사가 내려앉았다.

"일렉산드라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블리아 신시아 님."

"...이블제리아는 어디 있지."

"안에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시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신시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곤 앞장서서 걸어갔다.

마치 그녀가 검을 뒤에서 휘두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노인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신시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그저 지금 이블제리아를 만나 처단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하천성, 그에게 마경을 뚫고 나오며 성장한 자신의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똑똑.

"들어 와라."

그 순간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노인의 노크 소리와 겹쳐 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끼이익 하고 열린 문 틈 사이로 옅은 빛이 들어오고 그곳에는 뼈로 만든 왕좌가 있었다.

그 중심에 앉은 긴 흑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은 신시아를 보며 히죽 웃었고 그녀는 말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군. 하블리아 신시아. 가면 아래 예쁜 얼굴은 잘 간직하고 있는가?"

신시아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저 오러가 더 흉흉히 불타오를 뿐.

증오, 신시아의 가슴팍에 한줄기 불이 타올랐다.

자신이 아직 어린 시절, 자신에게 손을 대려 했던 치욕스러운 행동에 반항한 대가로 얼굴에 내려진 저주.

매일 밤 벌레가 얼굴을 기어가는 듯한 그 감각을 잊고자 신시아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왔다.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남성을 죽이기 위해.

"끌끌, 가주 녀석에게 신부를 보내랬더니 자객을 보낼 줄이야. 하블리아 가문도 슬슬 숨통을 끊어 줄 때가 온 모양이군."

비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블제리아의 손에 순수한 오러로 만들어진 검이 나타났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의 사람들만 만들 수 있다는 신검.

그것 하나만으로 이블제리아는 신시아를 압도하고 있었다.

신검을 본 신시아의 눈이 한순간 흔들렸으나 곧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이 쓰러트릴 상대가 누구인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블제리아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반대편 손에서 마법진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블제리아는 마검사였다.

그것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어디 우리 신시아가 얼마나 실력이 늘었나 볼까."

"누가 우리 신시아냐."

이를 빠득 간 신시아가 발을 떼었다.

마나가 담긴 발에 의해 고속으로 날아든 신시아의 검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 고속의 검을 이블제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튕겨 내었다.

신시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신시아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연격을 날렸다.

'하천성에게서 강자와 싸우는 법은 지독하게 배웠어.'

한 달 동안 그와 검을 맞대었기에 안다.

강자와 싸우는 방법을 신시아는 터득했다.

신시아는 집요하게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도록 질기고, 또 질기게 달라붙었다.

"더 강해지긴 한 모양이지만."

그 순간 이블제리아가 사라졌다.

흠칫한 신시아가 소리를 듣고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이미 그녀의 몸으로 신검이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팍에 핏물이 튀었다.

비틀거린 신시아가 두 걸음 물러섰다.

화륵.

곧이어 갈라진 그녀의 가슴팍 사이에 불이 붙었다.

'블링크에 화염 마법.'

핏물마저 증발시키는 불길에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신시아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블제리아를 향한 오러가 다시금 불붙듯 타올랐다.

신시아는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블리아식 가문의 비기는 어차피 이블제리아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꿋꿋이 정석적인 검을 휘둘렀다.

몰아치고, 계속해서 몰아쳤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몸은 부서져 갔다.

작은 상처가 늘어난다.

핏물이 바닥을 가득 메운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뇌를 채워 나간다.

그러나 신시아는 검을 휘두른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상대에게.

'하천성.'

그 속에서 신시아는 하천성을 떠올렸다.

그와의 대련에서 수없이 보았던 강자의 위엄.

그 위엄에 비해 이블제리아는 작았다.

조그맣다.

견디지 못한 신시아의 검이 부러진다.

그러자 신시아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그리고 오러는 더욱 불타올랐다.

마지막 모든 잡념까지도 집어삼키려는 양.

「멍청하게 휘두르지 마라. 네 검이 부러지면 넌 모든 걸 잃게 돼. 네 검을 목숨보다 소중히 해라.」

하천성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서서히 신시아의 눈이 떠진다.

그녀의 손에는 검 대신 오러가 형상화되어 있었다.

드디어 신검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달뜬 미소가 그려졌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처음 오른 이후 오랜만에 좋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뼈는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 검을 휘둘렀다.

끝없이.

끝없이.

끝이 올 때까지.

「일어서.」

하천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가슴팍에 무언가가 꽂혀 들었다.

울컥 뜨거운 핏물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늘게 떨던 신시아는, 그 날.

가면 너머에서 그렇게 눈을 감았다.

22화

이튿날 아침, 검댕이의 내부를 정리하며 오늘 모은 투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

벌써 신시아가 오지 않은 지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디서 죽기라도 한 걸까.

설마 야신의 부하놈한테 당한 것은 아니겠지.

일부러 강하게 키운 것도 어디 가서 당하지 않게 하려고 한 거였는데.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입구에 앉아 그저 가만히 신시아가 자주 걸어오던 길목을 직시할 뿐이었다.

난 이 밖을 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신시아를 찾으러 갈 수도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 순간 내 목에 각종 무기가 들이 밀어졌다.

흉흉한 오러로 빛나는 무기들 사이로 모험가들의 번뜩이는 눈과 마주쳤지만 나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 뵙겠소. 하천성, 소인들은 모험가 길드 연합. 그대가 묘한 짓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듯 확인차 찾아왔소."

"인사는 무슨. 단순히 확인하려고 찾아온 녀석들이 다짜고짜 목에 칼을 대냐."

무인으로 보이는 옷차림을 한 녀석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눈앞에 망치를 든 가장 덩치 큰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는 파라스타 제국의 길드장 자이언트, 그대를 찾아온 건 당신이 던전 관리자라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알려질 정보였기에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내 태도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 건지 자이언트의 눈이 찌푸려졌다.

"던전이 투기를 완전히 머금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있나?"

"어떻게 되는데."

"그 일대 자체가 모두 집어 삼켜져 끝내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지상에 현현한다. 그것도 죽지 않는 불사로! 이블제리아가 똑같은 일을 하여 악마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자이언트의 외침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도 그걸 위해서 이렇게 투기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고.

"그냥 이대로 목을 베면 물을 것도 없잖아. 바보들아. 그냥 죽이자고."

"귀마,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라."

자이언트가 경고하자 귀마는 혀를 찼다.

"그리고 네놈은 흑기사와 무슨 관계지? 설마 그녀도 네놈에 던전에 관여하고 있나?"

그러다가 신시아까지 언급되자 나는 비스듬히 자이언트를 올려다보았다.

"너 신시아가 어딨는지 아냐? 나 그 녀석한테 볼 일이 있는데."

"악마왕에게 죽었다."

그리고 한마디 말이 이어진 순간 내 눈이 멍해졌다.

"1달 전 생사가 확인됐다. 분명 네놈이 보낸 거라 생각했다만."

"하아."

내 입에서 조그맣게 탄식 섞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그놈한테 도전하러 간 거였나.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슬픔, 분노, 그리고 후련함인지 모를 웃음을.

[히든 퀘스트 '흑기사의 죽음'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던전이 마지막 단계의 성장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알림창이 떠올랐다.

창을 본 내 눈이 지그시 감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탄식이 분노로 떨렸다.

내 이가 처음으로 빠득 하고 갈리는 소리가 함께 인상이 극도로 구겨졌다.

"성좌."

두 글자의 단어가 옅은 분노를 담은 채 흘러나왔다.

아무리 투기를 모아 던전을 키워도 마지막 단계로 개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모두 성좌가 의도한 것이었다.

내가 신시아의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성장이 불가능했으니까.

기분 나쁜 짓이다.

처음부터 모조리 성좌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만큼 짜증 나는 감정은 없었다.

잘도 이렇게 기분 나쁜 짓을 벌여 주다니.

처음부터 신시아는 어찌 되었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네가 바란 것이 이딴 것이었냐."

치를 떨듯 내 입가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러가 뒤섞인 내 목소리에 주변 모험가들의 표정이 굳었고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블제리아는 어디 있냐."

"하, 웃기는 놈일세. 왜 흑기사의 복수라도 하려고?"

그러자 내 말에 정신을 되잡은 귀마가 깝죽거렸다.

그걸 보고 나는 귀마를 순식간에 쩌엉 하고 차 버렸고 녀석은 찍소리도 못하고 근처 나무에 부딪혀서 기절했다.

내 행동에 전원이 몸을 긴장시켰다.

육안으로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눈앞에 겨눈 무기들을 별천도로 전부 베어 버렸다.

그리하고 넋을 놓은 자들을 둔 채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악마왕에게 향하기 위해서.

* * *

내가 도착한 일렉산드라는 그야말로 마경이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죽어가는 식물들 사이를 지나치고 있었고, 본능에 따라 게걸스럽게 서로를 사냥하고 있었다.

평균 레벨대만 해도 100 이상, 높은 녀석들은 200레벨 가까이 되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다.

즉, 여기서는 광풍의 호푸라조차도 강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산책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스산하게 오러를 내뿜자 몬스터들은 지레 겁먹고 자리를 피했고, 나는 별 탈 없이 일렉산드라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안쪽으로 가면 갈수록 강해졌다.

일렉산드라의 몬스터 최대 레벨은 250.

이미 인간의 영역은 한참 벗어난 수준이었다.

마경, 정말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마경의 중심에 성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긴가.'

성문을 손으로 밀어 열자 눈앞에 노신사가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예고도 없이 그를 발로 뻥 차버린 나는 커억 하고 악마 형태로 변하는 노신사를 내버려 두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기괴한 취향을 가진 듯 여기저기 낡아 빠진 골동품이 엿보이는 복도를 지나 한참을 걸었을까, 딱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 하나가 보였다.

천천히 문을 열어보자 거기에는 왕좌의 앉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 여성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성은 눈을 감은 채 새하얀 피부와 어울리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의 손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최근 손님이 많군."

남성이 히죽 웃었다.

내 얼굴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구나."

내리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분노는 아니었다.

나는 여러 사람을 지금껏 잃어 왔으니까.

그러한 아픔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그녀에게 깊은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천성, 나는 강해지고 싶어.」

그러나 그녀는.

「언젠가 너보다 강해져서 증명해 볼게.」

저렇게 시체가 되어 고작 한량의 장난감 취급당할 만한.

「그때쯤이면 내가 직접 널 일으켜 줄 거니까.」

그런 하찮은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었다.

성좌에게 놀아나며 오직 죽기만을 기다리는 도구가 될 그런 녀석은 아니었다.

나는 성좌가 싫다.

사람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며 즐기고 있는 그들이 싫다.

그래서 결과를 바꿔 주겠다.

"야."

낮게 깔린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손 치워라."

그리고 별천도가 드러났다.

파직.

번갯불 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남성, 이블제리아는 가벼운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제는 생명을 다한 신시아를 왕좌에 앉혀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블제리아의 손에 신검의 경지에 오른 오러로 된 검이 만들어졌다.

내 과거와 비교해도 엇비슷할 수준의 강자였다.

서걱!

그러나 오러를 쥔 악마왕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뭣?!"

놀란 이블제리아의 손에서 수백 개의 마법진이 그려지고 순식간에 화마의 불덩어리가 나를 덮쳤다.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그러나 모든 불덩어리가 나의 검 아래 사라졌다.

나는 비웃었다.

이 남자는 신시아의 검에 비하면 너무도 가벼웠다.

"이런 녀석한테 질 녀석이었냐."

경악한 이블제리아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움직이지 않았다.

11서클 대마법

염마옥(炎魔玉)

진동이 울려 퍼졌다.

하늘 위에서 강렬한 중압감과 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천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흰색의 불덩어리가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 근방을 다 날려 버릴 정도의 크기.

차갑게 식은 내 눈이 11서클 대마법 염마옥을 향했고 이내 검이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졌다.

토옹.

물방울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의 끝부분에 부딪친 검이 다시금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십식(十式)

전야(電夜)

번개의 밤이 휘몰아쳤다.

염마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줄기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검집에 돌아온 검을 쥐고 이블제리아에게 시선을 향했다.

녀석의 핏발선 눈과 마주치고 이내 번개가 그의 뒤에 내리꽂힌다.

한순간 이블제리아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고, 갈라진 틈 사이로 드러난 번개가 휘몰아친다.

그 위력에 시체마저 까맣게 타서 사라졌다.

번개의 밤이 끝나고 하늘이 원래대로 돌아온 순간 나는 신시아에게로 다가갔다.

은빛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그리고 가면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볼 수 있게 된 고운 얼굴.

나는 신시아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나는 걸었다.

일주일.

갈 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시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안 했고, 나는 검댕이의 앞에 서서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모험가 연합에서 모은 수천 명의 모험가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두 번째 악마왕이 나타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그런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내 품에 있는 신시아를 확인한 순간 그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신시아가 내 품에 있다는 것을 보고 악마왕이 어찌 되었는지 모두가 눈치챈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걸어가는 길을 차마 막는 사람은 없었다.

"검댕아."

던전인 검댕이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하나 나는 그저 말없이 검댕이 안에서 신시아를 내려 주었다.

"부탁 좀 하자."

그리고 나는 씁쓸히 웃었다.

"이 녀석 좀 살려 주라."

검댕이가 신시아를 삼켰다.

[던전 개화(검댕이)]

Lv.255

현재 보유 투기량 : 2,878,122

성장력 : 4단계

난이도 : 어려움(S)

특이사항

1. 현재 보유 몬스터.(현재 10마리가 넘어가는 관계로 이름만 표시됩니다.)

[스켈레톤/광풍의 호푸라(성룡)/데스 나이트/듀라한/용아병/데몬윙/하이 스켈레톤/머그 독/미라/구울/밴시/본드래곤/스켈레톤 기사/스켈레톤 전사/스켈레톤 마법사/스켈레톤 궁사/하블리아 신시아/...]

몬스터의 시체를 먹이거나 혹은 몬스터를 던전으로 이끌고 와야 합니다.(던전이 먹은 몬스터는 던전에서 계속 생성됩니다.)

2. 지형 변화

투기 500당 지형을 10m씩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3. 보유 보물.

금화 : 한 상자 소환 시 투기 5를 소모합니다.

은화 : 한 상자 소환 시 투기 3을 소모합니다.

마검 테리우스 : 소환 시 투기 500을 소모합니다.

유리아의 성화 목걸이 : 소환 시 투기 300을 소모합니다.

그리고 몬스터 목록에 하블리아 신시아가 추가된 순간 나는 입을 열었다.

"소환, 하블리아 신시아."

[하블리아 신시아가 던전에 소환됩니다.]

내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눈앞에 여성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24층의 주인'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당신에게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23화

비틀었다.

성좌의 의도를 강제로 비틀었다.

이런 불합리함에 당하지 말라고.

나는 이 세계의 법칙을 비튼 것이다.

신시아가 눈을 뜨고 나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입을 열었다.

"잘 잤냐."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차례 눈꺼풀을 감았다 뜬 신시아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자신이 반평생 써온 가면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신시아의 입에서 놀람이 새어 나온 순간 나는 말 없이 별천도를 뽑았다.

그러곤 신시아에게 검을 겨누어 보였다.

"오랜만에 해볼까."

내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던 신시아는 곧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오러로 된 신검이 생성되었다.

"이제 쉽게 지지 않을 거야."

그 날 밤, 나는 하루 종일 신시아와 검을 겨누었다.

던전 속에서 부딪치고, 휘두르고, 검의 울림이 저 멀리까지 퍼졌다.

밤이 지나간다.

낮이 되어 떠오른 태양이 아래에 빛을 내리쬐었다.

날 처치하기 위해 몰려왔던 모험가들은 어느새 홀린 듯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닿지 못한 아득한 영역에 있는 우리 두 사람의 대결에 그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겨."

"이겨라!"

"흑기사, 이겨!"

모험가들의 목소리가 점차 모였다.

신시아는 조금씩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2의 악마왕이 될지도 모를 나를 쓰러트리러 온 자들이었고, 나와 맞서고 있는 신시아는 자신들과 같은 모험자이며 가장 높은 수준의 강자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둘 신시아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스 몬스터의 제명을 다해라.'

모험가들의 눈에 신시아는 희망과 같이 비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신시아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던전이 클리어되는 걸까.

"하천성!"

그 순간 신시아의 기합성과 함께 그녀의 검이 내 검에 부딪혔다.

그러자 나는 한줄기 웃음을 머금었다.

신시아는 나에게 모든 걸 다 쏟아부어 부딪치고 있었다.

이런 녀석에게 적당히 져 주려 하다니.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나 하천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질 인물이 아니다.

'한 가지 더.'

이 스테이지의 초창기 때 나를 공격했던 얼굴에 노이즈가 낀 녀석.

이 녀석이 아직 이 층에 있다.

야신이 준비한 날 막을 카드가.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져 줄 수 없다.

쩌엉!

내 검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오러가 신시아의 신검과 부딪쳤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출력에 신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곧 환한 웃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끝에 신시아의 심검이 무너져 내렸다.

파직, 파직하고 신시아의 심검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더 이상 오러를 운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시아의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나와 시선이 교차하고 그녀는 힘없이 웃는다.

"날 던전에서 부활시켜 준 거지."

"그래."

"그럼 난 더 이상 하블리아 신시아가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아니라고는 말 안 해 주네."

그녀에게 나는 검 한 자루를 던졌다.

던전을 이용해 만들어 낸 검이 날아가 신시아의 손에 잡히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뽑아."

"응."

신시아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내 검에서 오러가 사라졌다.

오직 서로의 검술만으로 겨루자는 내 의지를 느낀 듯 그녀는 조소를 토했다.

그리고 눈빛이 전과 달라진다.

지켜보던 모험가들이 침을 꿀꺽 삼킨다.

"흑기사! 아직 안 끝났어!"

"힘내라!"

몇몇은 감정을 이입한 듯 소리쳤다.

그 응원 속에서 신시아가 움직였다.

검이 목을 향해 날아든다.

망설임 없는 휘두름에 내 검이 맞선다.

채엥, 채엥.

귓가에 검을 나누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시아의 은발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가면을 벗고 드러난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검이 땀방울을 가른다.

은방울꽃이 조용히 바람에 휘날린다.

오로지 검만이 고요한 와중에 대화를 지속한다.

채엥.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차례 울려 퍼졌다.

파르르 떨린 신시아의 얼굴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천성, 나 계속 대련하고 싶었어."

"그래."

"더 강해지고 싶었어."

"그래."

"악마왕을 이기고 싶었어. 이블제리아한테 직접 복수하고 싶었어. 그리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오직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를 제외하고.

희미하게 달뜬 웃음을 지은 신시아가 눈물을 옅게 흘렸다.

"너에게 이기고 싶었어."

그리고 신시아는 나와 끝없이 검을 나눴다.

비록 승리는 없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신시아를 불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던전의 몬스터가 되어 버린 지금.

신시아에게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

그리고 그 뜻은.

나를 영원히 꺾지 못한다는 뜻과 같았다.

그것을 알기에 신시아의 목소리의 비통함이 담겼다.

몇 개월간 나와 함께 해온 신시아는 두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봐 왔으니까.

신시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신시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신시아도 따라 검을 들었다.

마지막 검격이 휘둘러진다.

신시아의 검이 튕겨 나고 그녀는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고마워. 하천성."

그 날 우리는 그렇게 검담을 끝마쳤다.

* * *

이틀 뒤 하블리아가.

한 통의 편지를 받은 가주, 하블리아 첸의 표정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게 사실이냐."

"예."

눈앞에 있는 정보원의 말에 첸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기에 적힌 것은 이블제리아의 사망 소식과 하블리아 신시아의 실종 건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하블리아 신시아가 한 던전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까지 종이에 적혀 있었다.

"...하블리아 가의 치욕이다."

가만히 읊조린 첸의 손에 오러로 된 검이 쥐어졌다.

그의 눈이 흉흉히 붉게 물들고 은발 머리카락이 오러를 타고 뻗어 나갔다.

비록 내친 자식이라고는 하나 한때 하블리아의 차기 가주였던 자.

하블리아 첸은 신시아를 믿었다.

언젠가 이블제리아를 죽이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러나 그 결과가 고작 던전의 몬스터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에 그는 큰 치욕과 실망감을 느꼈다.

"하블리아가 전원 소집이다. 지금부터 하블리아 신시아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말살시킨다."

검술 명가 하블리아 가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 몸을 따라라!]

그 무렵 나는 비룡을 데리고 나는 중인 호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룡들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지금까지 호푸라가 공략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신시아와의 검담이 있은 이후 모험가들은 부쩍 검댕이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1층 자연 층과 2층 언데드 층은 공략을 성공했지만, 3층 비상의 공략을 성공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호푸라가 너무 강한 것도 있지만 하늘을 나는 존재를 상대해야 한다는 큰 제약이 호푸라 공략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뭐, 투기는 잘 모이니 상관없지만.'

S급 모험가들도 이제는 오기가 생겼는지 매번 호푸라에게 덤비고 있었다.

"하천성."

그 순간 누군가 내 눈가를 손으로 덮어 시선을 가렸다.

오러로 기색을 숨기는 법을 배운 신시아가 몰래 다가오는 것에 재미를 들린 모양이었다.

물론 그냥 귀찮아서 적당히 모른 척해 주던 거였지만.

"신시아, 손 잘라 버린다."

"무서운 소리를 하네."

내 눈가에서 손을 뗀 신시아는 여전히 순백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제 갑옷은 싸울 때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4층에는 언제 모험가가 오는 거야?"

"몰라. 우선 호푸라를 쓰러트리는 녀석이 나와야 되겠지."

내 말에 신시아는 호푸라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호푸라의 경지를 넘어선 신시아는 현재 4층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24층이 아직 클리어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보스 몬스터의 제명을 다해라.

신시아에게 죽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한때 가졌지만, 왠지 다른 게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에 노이즈 낀 그놈도 역시 마음에 걸리고.

[2층 언데드 월드가 공략되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알림이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알림에 내가 벌떡 일어나자 신시아가 나를 돌아보며 의문을 보였다.

"왜 그래?"

"2층이 공략당했어."

"또 모험가 애들이 들어온 모양이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신시아와 달리 내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신시아의 눈동자도 서서히 커다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블리아가인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하블리아 가문이 던전을 방문했다.

* * *

하블리아 가.

검술 명문가로 이블제리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최강이라 칭송받던 가문.

그곳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남녀 분간 없이 압도적인 육체와 검술의 재능을 타고난다.

평균적으로 25세가 되기 전에 소드 마스터를 달성하는 명문가 사람들 전원이 던전을 찾았다.

은 빛깔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들은 아름다웠고, 그런 그들 앞에 언데드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맨 앞에 선 하블리아 첸은 압도적인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지를 가르는 그는, 그의 자식들과 함께 순식간에 2층을 돌파했고, 곧바로 3층으로 내려왔다.

3층, 그 유명한 광풍의 호푸라가 살고 있는 비상이라는 층.

그곳에 도달한 하블리아 가문들은 눈을 번뜩였다.

그동안 이블제리아 때문에 기가 죽었을 뿐이지 그들은 본래 싸움광 기질을 타고 났다.

그렇기에 호푸라라는 강자를 보고 오히려 눈을 빛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간들이 또 용 무서운 줄 모르고 왔구나! 하하, 어디 또 한 번 깡그리 당해 봐라!]

하늘을 지배하는 호푸라가 커다랗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시 아래 비룡들이 하블리아가를 덮쳐들었고, 첸과 그의 자식들도 검을 빼고 비룡에 맞섰다.

"끼에에엑!"

"키엑!"

그러나 비룡들만으로는 하블리아 가문에 자식들을 쓰러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비룡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하늘에서 그 상황을 보던 호푸라는 혀를 찼다.

유유히 하늘을 날은 호푸라가 하블리아가를 덮칠 준비를 했다.

"아버지, 제가 하겠습니다."

호푸라가 공격할 낌새를 보인 순간 첫 번째 아들 하블리아 르소아가 검을 뽑고 나섰다.

차기 가주인 그는 소드 마스터 상급이라는 경지에 올라 있었고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하블리아 첸의 눈에는 마땅치 않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고작 인간 하나로 되겠느냐.]

큰소리친 호푸라와 르소아가 맞부딪쳤다.

발끝에 오러를 맺히게 하여 허공을 날아오른 르소아는 오러를 두른 검으로 맹렬히 호푸라를 몰아붙였다.

하블리아 가문의 비기가 쏟아지자 호푸라 또한 자신의 전력을 다해 르소아에게 맞섰다.

그리고 그 끝에 패한 호푸라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하블리아 르소아가 승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르소아도 꽤 엉망인 상태였기에 첸은 영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그대로 그를 지나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갔을까, 계단이 끝나고 바닥에 닿은 순간 첸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곳은 검의 전장이었다.

수많은 검들이 바닥에 꽂혀 있었고, 그 중심에는 흑색의 갑옷을 착용한 한 여자가 있었다.

하블리아 신시아.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24화

과거에는 하블리아 가문의 차기 가주였던 그녀를 향해 자식들의 눈총이 이어지고, 몇몇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하블리아 첸이 손을 들어 막았다. 곧 그의 손에 오러로 된 검이 맺히자 전원 기립 자세를 유지했다.

"신시아."

"예, 아버지."

투구 사이로 대답이, 신시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하블리아 첸은 언제나 굳어 있던 얼굴에서 오랜만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구나."

이어진 그의 말에 자식들 전원이 숨을 삼켰다.

21살.

고작 21살에 나이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에 모두들 경악한 것이었다.

압도적인 재능.

어쩌면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하블리아 첸 보다도 넘치는 재능을 가진 신시아의 모습에 자식들의 눈이 부러움으로 물들었다.

검 하나에 살고 죽던 그들에게 검의 재능에 대한 갈망은 어느 누구보다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입문 단계일 뿐입니다."

"아니, 훌륭하다. 단지, 그게 하블리아 가문에서 일궈 낸 것이라면 말이지."

그리고 첸의 눈에 옅은 노기가 서렸다.

올해로 61세,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라는 경지에 올라 있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노기는 뒤에 있는 자식들마저 숨 막히게 만들었다.

그 순간 신시아의 손에서도 심검이 만들어졌다.

은빛이 나는 첸의 심검과 달리 신시아의 검은 칠흑 같은 어둠을 가지고 있었다.

첸은 그 검을 보고 말했다.

"우리 가문에서 태어난 몸임에도 빛 속성이 아닌 어둠 속성을 가졌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건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리고 그 한마디와 함께 첸의 검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선로를 탄 검이 신시아의 목을 노렸다.

검 하나만이라면 이블제리아조차 압도하는 그의 검격은 자식들 어느 누구도 쫓지 못했고, 모두가 신시아의 목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단 한 명.

하블리아의 자식이 아닌 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채엥!

맹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격을 나눈 것만으로 으득 하고 땅이 갈라지고 공기가 요동쳤지만, 신시아는 확실하게 첸의 검을 막았다.

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떠지고 신시아는 투구 속에서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버지, 검이 많이 녹슬으셨군요."

신시아의 웃음에 첸의 눈썹이 일그러지고 곧이어 둘의 검이 계속해서 부딪쳤다.

그 둘의 대결을 자식들은 눈 한 번 떼지 못한 채 지켜보았다.

압도적인 둘의 검술 실력은 하블리아가 자식 전원을 매료시켰다.

쩌엉!

대기가 또 한 번 요동친다.

서릿발 같은 바람이 분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아득한 영역의 두 사람은 끝없이 검을 부딪쳤다.

하지만 서서히.

조금씩.

신시아는 밀리고 있었다.

비록 같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할지언정 신시아는 입문, 첸은 최상급.

둘 사이에는 너무도 큰 벽이 있었다.

챙강.

신시아의 심검이 무너지고 그녀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런 신시아의 모습에도 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고, 그녀도 다시 심검을 만들어 맞섰다.

또 오랜 시간 동안 검격이 오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시아는 잔상처가 늘어나고, 그녀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죽지 않았다.

첸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검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첸의 볼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신시아의 심검이 첸에게 닿은 것이었다.

하나 그 성과에 비해 희생이 너무 컸다. 신시아는 이미 팔 하나를 잃었고 수많은 잔 상처를 입었다.

목가에서 흘러나오는 핏물도 그녀의 정신력으로 겨우 견디고 있는 것이었지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신시아."

그리고 첸의 입이 열렸다.

그의 얼굴은 힘없이 웃고 있었다.

"너만이 내 뒤를 이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첸의 검이 움직였다.

"저도 그리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더 우월한 영역을 전 엿보았습니다. 아버지 품이라면 평생 보지 못할 영역을요."

그리고 신시아의 심검이 부러지고.

"아버지도 부디 이블제리아의 망령에서 벗어나시길... 이 딸의 마지막 바람입니다."

신시아의 목이 떨어졌다.

던전의 몬스터로서, 아버지의 검에 의해 신시아는 또 한 번 목숨을 잃었다.

무너지는 신시아의 몸을 받은 첸은 눈을 감았다.

마치 예전의 신시아를 추억하듯이.

"아버지!"

그 순간 르소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눈을 뜬 첸은 아래로 내려가는 새로운 계단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던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강해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첸의 눈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계단의 뜻은.

'신시아보다도 강한 자가 밑에 있다는 뜻인가?'

신시아를 이곳에 데려온 자가 밑에 있다.

계단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시아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블제리아의 망령에서 벗어나시길.」

그 뜻은.

"너희들은 나가라."

낮은 중저음이 실린 첸의 목소리가 던전 내에 울렸다. 그는 자식들을 두고 홀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그곳에는 왕좌에 앉은 한 남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자신이 죽인 신시아가 있었다.

첸은 확신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신시아는 영원히 되살아날 거라고.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이런 강자와 만나 보았다고.

이제야 신시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블제리아의 망령 따위 저 남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왕좌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있던 하천성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왔냐."

최종 보스가 입을 열었다.

* * *

하블리아 첸을 본 내 감상은 이랬다.

검만으로는 이블제리아 이상.

그러나 마법이 있는 이블제리아는 꺾지 못한다.

그의 수준은 딱 그 정도였다.

"네놈이냐."

첸의 입에서 으름장 같은 말이 나왔다.

나는 대꾸 없이 별천도를 뽑으며 첸의 앞으로 다가섰다.

첸의 손에서 심검이 생성되었다.

신시아와 달리 은색의 빛이 돋보이는 심검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그를 따라 별천도에 오러를 씌웠다.

그 순간 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 경지를 알아보고 반응한 것이다.

"...네놈 어디 가문의 사람이냐."

"하씨 가문이다."

"하 가문?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군."

"지구에서는 유명해."

그리 말한 내 검이 첸을 덮쳤다.

휘둘러진 검이 호를 그리며 순식간에 첸의 목을 향했고 그 순간 그는 흐릿해진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하블리아식 비기

영령선보

그 순간 신시아가 사용하지 않았던 비기가 펼쳐졌다.

호오 하고 운을 띄운 나는 곧바로 뒤편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곧이어 채엥 하는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괜히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 수준이 아니라 이건가.

검술 실력만은 나보다 뛰어난 듯 첸은 비기를 펼치며 심검을 휘둘러 왔고, 나는 오랜만에 좋은 상대를 만났다며 검을 받았다.

그러나 첸의 심검은 내 검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다.

심검은 이게 문제다.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오러가 차이 나면 결국 그 힘에서 밀리는 쪽이 속수무책으로 진다.

일순간 내 검에서 오러가 더 강해지고 첸의 심검이 무너져 내렸다.

한순간의 변화에 눈을 커다랗게 뜬 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드 엠페러, 그 정도 영역인가."

짧게 감탄을 했던 첸의 뒷발이 한 발자국 뒤로 빠졌다.

어느 순간 녀석의 손아귀에 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고, 첸은 검날이 없는 검의 손잡이를 내게 향했다.

"오호라. 그렇게 나오시겠다."

옅은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검날을 타고 흘렀다.

투명한 날.

하블리아식 비기

광영검

비기의 마지막.

심검의 최대 경지에 이르렀을 때 사용 할 수 있는 검술인 듯싶었다.

그래서 이토록 심검을 고수했던 걸까.

모든 빛을 반사한 검은 너무나 투명했다.

채엥!

그러나 내 검과 맞부딪친 소리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검의 길이, 잡는 방법이 일정하지 않고 제각각으로 바뀐다.

투명한 날 때문에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검의 길이를 새롭게 인식한다.

강하다.

확실히 검술로 최강이라 칭할 만큼 강하다.

피잉.

볼 가에 핏물이 튀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화끈한 통증에 나는 씨익 하니 웃었다.

좋다.

검술에서는 내가 졌다.

그렇다면.

'오러도 곧 실력.'

내 몸에서 압도적인 양의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첸의 눈이 한순간 흔들리고 내 검은 그걸 놓치지 않고 뒤쫓았다.

순식간에 수세가 뒤바뀌었다.

이블제리아는 압도적인 마법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검술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에 비해 첸은 이블제리아보다 약했다.

그러나 검술 실력만은 뛰어났다.

만약 첸의 오러 수준이 이블제리아 수준이었다면 더 재밌는 싸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검을 직선으로 뻗었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파직.

번개가 튀어 올랐다.

광영검을 뚫고 나아간 검이 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일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아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