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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협회의 최전방, 던전 청소팀.」
이아영이 내민 핸드폰에 커다란 타이틀이 떠올랐다.
'최전방…?'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사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작전팀의 원활한 토벌을 위한 던전 정리 작업. 그것이 공식적인 던전 청소팀의 주된 업무다. 때문에 청소팀은 매일 12시간씩, 곧 소멸하는 던전으로 들어가 몬스터의 시체를 해체하고 정체 모를 부산물을 청소한다.」
「그 과정에서 청소팀은 지속적으로 차오르는 가스에 노출되며, 독이나 강한 산성 같은 부산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뿐이랴. 부족한 인원, 강도 높은 업무와 살인적인 근로 시간까지. 이것만 본다면 전형적인 3D 업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주일간의 취재 결과, 던전 청소팀의 업무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작전팀의 정산 시즌에 맞물려 다른 청소팀들의 과부하가 예상되자, 청소 3팀의 김준우 청소부는 뛰어난 작전 기획력과 던전 분석력을 바탕으로 작전팀과 지원팀과의 연합 작전을 지휘했다. 또한, 다른 팀의 실수로 전반적인 토벌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자 곧바로 작전을 포기하고 다른 팀을 지원하는 강단까지 보여줬다.」
「결국, 던전 청소팀은 단순히 던전을 청소하는 팀이 아닌, 모든 팀의 업무를 조율하고 실행시킴으로써 더욱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작전을 이끌어내는 '기획팀'인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팀보다 뛰어난 능력과 실력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방면에서 보았을 때, 비록 임금은 적을지 몰라도 청소팀은 가히 협회의 최전방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기사 전문 보기-
'...??'
머릿속에 무수히 떠오르는 물음표.
최전방? 기획팀?
다 무슨 개소리인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구상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이런, 개...."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게 최대한 만만하게 보이게 쓴 건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내용이야 이게?
"어때요? 생각보다 기사 잘 나왔죠?"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들 반응도 엄청 난리에요. 특수 작전팀이네, 역시 실세였네 하면서요. 입장 표명 때 일이랑 겹치면서 더 관심을 끌고 있던데요. 뭐, 다만...."
"반응만 좋다, 그뿐이겠죠."
"맞아요."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누가 '뛰어난 능력이 요구되는 청소팀'에 오려 하겠는가. 그런 능력이 있으면 가도 작전팀이나 통제팀으로 가겠지!
"저도 혹시나 해서 알아봤는데, 청소팀에 지원한 사람은 없대요. 내용이 내용인지라, 선망의 대상이 될 순 있어도 본인이 하려고 하진 않겠죠. 무엇보다 임금이 적다는 얘기도 있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쓸데없이 친한 척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심지어 그 밑에 있는 내용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김준우 청소부의 뛰어난 리더십과 동료애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준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인격자?'
대체 누군가 그건.
이 새끼 설마 회식 때 내가 쐈다고 띄워주는 거야?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구상찬에게서 온 문자였다.
「♡」
'개새끼....'
핸드폰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끝났다.
임금이고 신입이고 다 날아갔다.
지금 청소팀에 남은 건 '뛰어난 능력을 겸비해야 하는 특수 직군이지만, 정작 주 업무는 청소 일이고 심지어 월급도 적은 직업'이라는 기괴한 칭호뿐.
"아무튼 다들 반응도 좋고, 청소일이라고 무시하던 놈들도 조금 인식이 바뀐 것 같긴 한데… 당신 말대로 딱 그뿐이에요. 이 기사 때문에 지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
"그러니까 신설 팀원은 주변에서 알아보는 게 빠를 거예요."
지금 내 기분을 알 턱이 없는 이아영이 위로를 하는 건지, 재촉을 하는 건지 모를 말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입 한 명 받으려고 일주일 동안 그 개고생을 했는데… 결국 제 발로 뛰게 생겼네.
***
좁은 거실.
침대 겸용 소파에 누워 있던 한유빈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연거푸 하품을 뱉는 중이었다.
"야. 평생 그러고 살 거냐? 좀 씻기라도 하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남동생, 한상혁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알아서 하긴 개뿔. 언제까지 집에만 처박혀 있을 건데. 할 일 없으면 나가서 노가다라도 좀 뛰던가!"
"...헌터 존심이 있지."
"지랄을 하고 있네. 헌터 자격도 정지된 주제에 헌터 존심은 무슨...."
"야!"
그 순간, 한유빈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뒤지고 싶냐, 씨발아?"
"...."
진심 어린 살기.
다른 사람이 본다면 왜소한 체격으로 허세를 부린다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저 인간의 성깔을 알고 있는 한상혁은 죽기 싫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참 나, 잘린 게 자랑도 아니고...."
"한마디만 더하면 진짜 죽여 버린다."
"...."
중얼거리는 것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한유빈은 한 차례 콧김을 내뿜고는 다시 핸드폰 화면에 빠져들었다.
국제 협회 헌터.
수많은 자격증과 높은 학력 그리고 엄청난 재능을 요구하는 자리.
그 자격을 받기 위해선 프랑스 국제 협회 본부에서 직접 심사를 받아야 한다.
엄격한 서류 전형과 온갖 시험들이 있고, 통과한 뒤에도 강도 높은 훈련과 실제 전투를 바탕으로 한 실전 평가가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자격을 취득하는 게 어려운 건, 그 나라의 시민권자만이 지원할 수 있는 조항 때문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한유빈은 국제 협회, 미국 지부 소속의 헌터였다.
- 나 잘렸어.
한상혁이 인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간 그 날, 한유빈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당연히 한상혁은 충격에 휩싸였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래서 뭐… 상심이 크겠지만 잘 이겨내겠거니 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달랐다.
저 빌어먹을 년은 벌써 일주일째 씻지도 않고 소파 위에만 눌어붙어 있다.
놀지만 말고 일이라도 하라고 했더니 세상에, 하찮은 일은 죽어도 하기 싫단다.
아직까지 본인이 국제 헌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지.... 게다가 저 나이가 돼서 밥 한 끼 혼자 못 해 먹는 상태라니.
진짜 생긴 것처럼 애가 따로 없었다.
'어디 가서 쪽팔려서 말도 못 하겠네, 진짜....'
문소연과 박 팀장에게 자랑 아닌 자랑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저런 인간이 누나라고는 입도 뻥긋 못 하겠다.
됐다, 저런 인간 신경 써서 뭐 하겠나.
굶어 뒤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내일부터는 출근해야겠다.
한상혁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등을 돌렸다.
"...야."
그와 동시에 한유빈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 씨, 또 뭐!"
"이거 너네 팀 아니냐?"
"…뭔 소리야, 그건 또."
어리둥절한 목소리.
그런 그를 향해 한유빈이 핸드폰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화면에 떠 있는 알 수 없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단독] 협회의 최전방, 던전 청소팀.」
"니네 팀 기사 났는데?"
"...엥?"
한상혁이 곧바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불안감부터 엄습했다. 빠르게 기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한상혁이 걱정했던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뭐, 뭐야… 뭔 일이 있었던 거야."
한상혁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본인이 휴가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청소팀은 그냥 청소팀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 역시 협회 실셐ㅋㅋㅋㅋㅋㅋ
└ 청소는 좀… 하던 새끼들 어디감?ㅋㅋㅋㅋ
└ 이 정도면 그냥 특수 작전팀이네ㅋㅋㅋ
└ 청소부가 내가 아는 그 직업 맞음?? 연합작전 지휘하는 청소부는 대체 뭔 말이냐?
└ 야 근데 진짜 뽕 거르고 저거 다 진짜면 ㄹㅇ 대단하긴 하네;; └ 응~ 그래봤자 청소부~ 여기서 아무리 물고 빨아도 막상 할 사람 찾으면 아무도 없음ㅋㅋ
└ 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 아님?
└ 던전 관련 자격증 하나는 가지고 있냐?ㅋㅋㅋㅋ
└ 팩트 밴.
└ 근데 아무나 못하는 일인 건 맞는 듯. 저 정도 업무면 입사 허들 개 높을 것 같은데.
이게 다 뭔 개소리들인가.
한상혁은 상황을 이해해보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애초에 굴릴 머리가 없었기에, 오래가진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준우, 이 새끼… 뭔 짓을 한 거야."
김준우.
이 정도 스케일의 일을 벌일 놈은 그 새끼밖에 없다.
"김준우라면… 그 사람이지? 네가 저번에 말했던 그 또라이."
쿡쿡거리며 댓글을 넘겨보던 한유빈이 물었다.
"내가 말했었나?"
"신입인데 던전에도 빠삭하고 스킬도 쓴다면서? 예산도 받아주고, 뭐 이것저것 엄청 신경 써준다고 존나 고마워하더만."
"...."
한상혁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한유빈은 그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나저나 연합 작전을 지휘하는 청소팀이라...."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끝에.
"그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한상혁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뱉었다.
"야, 야… 설마 아니지…?"
"뭐가 아닌데?"
모르겠다는 척 새침을 떨고 있다.
"너, 너 청소팀 들어올 생각이면 꿈도 꾸지 마! 경고했다, 진짜!!"
"방금까지 일자리 알아보라고 하던 새끼 뒤졌냐?"
"그거랑 이거랑 같아?! 니 주제에 무슨 청소팀이야! 방 청소도 못 하면서 무슨 던전을 청소하겠다고!"
"설마 내 방이 던전이라는 소리냐?"
뜬금없는 데서 발끈하는 한유빈.
덕분에 한상혁은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여, 여기 월급도 존나 적어! 너 벌던 거에 백 분의 일… 아니, 천 분의 일도 안 될걸?"
"상관없어. 나 돈 많아."
"아, 아니, 누나 제발...."
급기야 바뀐 호칭.
한상혁의 입장에선 당연히 뜯어말릴 상황이었다.
그 어떤 남동생이 누나와 같은 직장, 같은 팀에서 일을 하고 싶겠는가. 차라리 퇴사를 하고 말지.
하지만 사실 한상혁 또한 알고 있었다.
한번 마음을 먹은 한유빈을 말리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상혁의 고개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졌고, 급기야 두 손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뭐, 해본 소리야."
그제야 한유빈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진짜?"
"그럼, 내가 진짜 청소팀에 들어가겠냐."
"와씨,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십년감수 한 표정.
한상혁은 애써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진심으로 질색을 하니, 더는 놀려주기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야 근데...."
한유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양복 어디 있는지 아냐?"
"...?"
동시에 한상혁의 입술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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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실.
1개월 감봉 처분에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서민철은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당황스러워하는 건 이수용 쪽이었다.
"기, 김준우가 팀장으로 승진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거랑 맞춰서 청소과장도 생긴다는 것 같더라."
"그, 그게 무슨… 없던 티오를 만들 수 있는 놈은 이두식 정도밖에는 없을 텐데요?"
"그놈이 한 거 맞아. 아무튼, 우리로선 골치 아파진 거지. 솔직히 청소과장 자리에 누가 올라가든, 실질적으로 청소팀을 이끄는 건 김준우가 될 게 뻔하니까. 뭐, 예외가 있다면 신설 팀이겠지. 그래서 말인데...."
서민철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신설 팀. 청소 3팀을 베껴볼까 싶은데."
"예?"
"신설 팀원을 우리 쪽 사람을 꽂자는 거야. 김준우랑 비슷한… 아니 더 능력 있는 놈으로다가."
이수용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김준우의 대안… 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1, 2년 청소팀에 있다가 작전팀장으로 올려준다고 하면 몇 명은 붙지 않겠냐."
한 프랜차이즈가 유행하면 우후죽순으로 비슷한 것들이 생긴다고 했던가. 그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대놓고 청소 3팀을 따라 해서 청소팀의 영향력에 승차하겠다는 뜻.
아니 그보단… 김준우를 따라 하겠다는 쪽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우리도 한번 타보자고. 청소 코인."
서민철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수용은 걱정부터 앞섰다.
"그… 저번에 청소팀은 이제 안 건드리실 거라고...."
"능력 있는 사람들로 새 팀을 만들어주겠다는 건데, 이게 건드리는 거냐? 도와주는 거지."
이수용이 위로 눈을 치켜떴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런 것보다… 우리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다는 거야."
"...네?"
"듣자 하니 고은영 이사랑 송철식 이사도 이번 신설 팀에 자기들 쪽 사람을 꽂으려고 한다더라. 하여간 냄새 맡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어떻게든 빨대 한 번 꽂아보겠다고 벌써부터 민간 길드에 연락을 돌리고 있는 모양이야."
"하하...."
본인도 모르게 새어 나온 헛웃음.
이수용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을 하는 팀인지도 몰랐던 놈들이다.
자기뿐인가. 서민철은 물론이고 본부 내에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팀이었다.
그런데 이젠 본부장에 이사들까지 두 팔 걷고 나서서 청소팀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니.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수용 팀장은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지원팀, 작전 2팀, 게다가 이젠 통제팀까지 붙으려고 눈치를 보고 있다.
이대로 두면 정말 본부 영향을 넘어서는 사단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김준우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청소팀이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그 청소부가 우리 쪽 사람이 되어 준다면.
본부의 영향력을 되찾을 수도 있다.
되찾는 걸 넘어서, 김준우 팀의 영향력을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부정할 수 없다.
이번 청소 6팀에 어디 쪽 사람이 들어가냐에 따라, 앞으로 본부의 주축이 달라진다.
"아무튼, 너는 경기도랑 충북 쪽 길드, 프리랜서 헌터들 중에 한 번 알아봐봐. 나는 나대로 한 번 찾아볼 테니까."
"기준은 따로 있습니까? 뭐, 청소 경험이 있다거나...."
"무슨 개소리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그냥 일단 랭크 높고 작전 경험 많은 놈으로 찾아."
곧바로 이수용의 머릿속으로 몇 명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무조건 다른 놈들보다 빨리 찾기만 해. 후보는 최대한 많이 챙겨오고."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이수용이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김준우은 어떡할까요. 그놈이라면 신설 팀에 무조건 관심을 가질 텐데요. 거물들이 움직이는 거 모르지도 않을 테고…. 그놈도 분명 움직이려고 할 겁니다."
"...됐어. 그건 신경 쓰지 마. 그놈이 어떤 놈을 찾아오든 우리가 더 괜찮은 놈으로 찾아오면 그만이잖아. 그리고 뭐… 새파랗게 젊은 놈이 찾아봤자 뭐 얼마나 대단한 놈이겠냐. 해봤자 C, B급 프리랜서 몇 명이겠지."
서민철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아내의 잔소리에 못 이겨 끊은 지도 무려 4년째였다.
4년을 어렵게 참아왔지만… 지금 본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도저히 담배 없인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인맥 싸움에선 우리가 질 수 없어."
서민철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작전 2팀 사무실.
토벌 허가 전면 철회로 남는 게 시간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농땡이나 피울 생각으로 김민주를 찾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셔도 돼요?"
뭐, 찾는다고 해도 결국 앉아서 차 한 잔 마시는 게 전부지만.
"설마 승진 내정되어 있다고 땡땡이치시는 건 아니죠?"
"그 얘긴 하지도 마. 가뜩이나 그거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코로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하, 입사 두 달 만에 팀장이라니… 다른 놈들한테 미운털 단단히 박히겠구먼."
"글쎄요. 전 충분히 합당한 처분이라고 봐요. 저 같은 사람도 팀장인데, 선생님이 일개 직원인 건 말이 안 되니까요."
"그거야 네 생각이고. 조직이란 게 또 그렇지가 않잖아."
나는 이내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뉘었다.
"어쨌든 정산 시즌 여파로 작업도 없고 하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놔야지. 승진하면 눈코 뜰 새도 없을 테니까. 아, 혹시 내가 방해했냐?"
"아뇨. 그건 아닌데요...."
김민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아영 부실장님이 부탁하신 게 있잖아요?"
"아, 그거?"
나는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 하려고."
"...네, 네?"
"내가 무슨 안목이 있다고 사람을 꽂아, 꽂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땅한 사람도 없고."
그리곤 고개를 뒤로 팍 젖혔다.
일주일간의 고생이 허사로 돌아가니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뭐, 엄밀히 말하면 아주 허사는 아니지.
덕분에 신설 팀도 만들어졌으니까.
무엇보다 신설 팀이 만들어지면 본부에서 어떻게든 인원을 구겨 넣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조건은 자동으로 달성될 테니, 내가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
이아영의 조건?
알 게 뭐야.
어쨌든 청소팀도 슬슬 안전 궤도에 올랐고,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팀장도 곧 달게 될 테니 이제 맘 편히 청소에만 신경 쓰면....
아, 아니.
맘 편히 해금에만 신경 쓰면 된다.
"뭐, 그러시다면 제가 더 할 말은 없죠."
김민주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뭐, 만약에 사람을 직접 뽑는다고 하면 어떤 기준으로 뽑으실 거예요?"
"흐음.... 고분고분하고 성격 좋은 녀석?"
"…으, 의외네요."
…뭘 기대한 건가. 대체.
뭐, 누가 됐든 해금을 위한 장기 말로 쓸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그러니 쓸데없이 자존심 세고 잘난 녀석은 방해만 되겠지.
"그럼 너는? 너라면 어떤 사람을 뽑을 거냐."
"음, 저는...."
김민주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고민하길 잠시.
"여자만 아니면 돼요."
"...."
해괴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 무슨 시대착오적 발언이란 말인가.
그리고 너도 여자잖아.
무어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뜨고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바짝 예의를 차리고 사무실로 들어온 이는.
'...누구지?'
뭔가 낯이 익긴 한데.
"일전에 전화 드렸던 편창현 통제팀장입니다."
"…아, 아! 예예, 기억납니다."
그제야 기억 속의 얼굴과 매칭이 됐다.
누군가 했더니 그놈이었구먼.
편창현 통제팀장.
서민철 라인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던 놈.
그런데 뭐, 이번 징계위원회에서 단칼에 손절 당한 걸 보면… 이놈도 어지간히 불쌍한 녀석이다.
"통제팀장님께서 작전팀에는 왜...?"
김민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편 팀장은 대답 대신 서류 뭉텅이를 꺼내 들었다.
"각설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신설되는 청소 6팀, 잡으셔야 합니다."
"…예?"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정작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알아먹질 못했다.
"서민철 본부장은 물론이고 고은영 이사, 송철식 이사 등등… 다들 신설 팀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벌써부터 자기 쪽 사람들로 꽂아 넣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더군요."
"자, 잠깐만요. 뜬금없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도움을 드리려는 겁니다."
"그니까 갑자기 왜...."
"…더 이상 그쪽 놈들이랑 상종을 못 하겠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편 팀장.
눈에 독기가 아주 그득그득했다.
쯧, 이번에 뒤통수 맞은 충격이 생각보다 컸나 보군.
"아무튼 아실지 모르겠는데, 현재 본부 내에선 청소팀에 대한 관심이 엄청납니다. 견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옆에 붙고 싶어도 명분이 없는 팀. 그 어떤 팀보다 우선적으로 손에 넣어야 하는 정도가 되었어요. 그런 입지란 말입니다, 지금 청소팀은."
"그래서… 이번 신설되는 청소팀을 먹으려고 서로 쌈박질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아마 김준우 청소부님처럼 작전 기획에, 현장 지휘까지 가능한 사람을 꽂으려는 거겠죠."
"참 나, 그런 사람이 있으면 청소팀이 아니라 작전팀에 넣을 것이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청소팀이 무슨 킹X맨이야 뭐야.
그리고 큰 착각들 하고 계신다.
내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어이가 없네. 어떤 놈이 감히 내 흉내를 내겠다는 건가.
나와 비슷한 놈을 찾아서 우리 팀을 베낄 게 아니라, 날 어떻게든 잡아서 본인들 편으로 세울 생각을 했어야지.
"그러니까 김준우 청소부님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편 팀장은 이내 들고 있던 서류 뭉텅이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요즘 랭크 추세가 괜찮은 헌터들 리스트입니다. 유명 길드 소속도 있고, 전직 작전팀장도 있습니다. 한 번 쓱 보시고 괜찮다 싶은 사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희 쪽 예산으로 어떻게든 스카우트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전개가 너무 빨라서 좀 헷갈리는데… 이 중에서 제 사람으로 꽂을 만한 놈을 고르라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하, 참 나.
초면에 이런 것까지 준비해서 찾아오다니.
아예 이쪽으로 붙으려고 작정을 했구만?
'그나저나 놈들도 놈들이네. 할 일이 그렇게들 없나. 뭔 청소팀 하나를 두고 이런 짓까지....'
나는 그렇게 구시렁댔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편 팀장이 준비한 리스트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하나 같이 쟁쟁한 헌터들이었다. 개중에는 지금 김민주와 견줄 만한 녀석도 있었다.
뭐, 물론.
"네. 잘 봤습니다."
관심 밖이다.
지들끼리 처먹든 말든 알 게 뭔가.
높으신 분들 자리싸움엔 끼고 싶지도 않고.
"...이거 상당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팀장 승진이 내정되어 있으시잖습니까. 자칫하다간 팀장을 달고도 청소 6팀에 먹힐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
"예, 예?"
"그렇잖습니까. 청소팀이 언제부터 그렇게 영향력 있는 팀이었다고 이렇게 신경을 쓴답니까?"
편 팀장은 순간 움찔했다.
"그, 그래도 운용할 수 있는 팀이 많아지잖습니까."
"이미 충분합니다."
"여, 영향력이 더 커질 겁니다!"
"별로 끌리진 않는군요."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편 팀장도 슬슬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 김준우 청소부님이 직접 개입한 팀이라면 다른 청소팀원들도 좋아하겠죠!"
"참 나, 그거야말로 저랑 아무 상관이 없는...."
어?
잠깐.
[레플리카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팀 직업 만족도 30% 이상]
[현재 18%]
"그건 조금… 솔깃하군요."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어렴풋한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니… 어째선지 김민주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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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만족도를 올리는 방법은 아마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임금에 맞는 업무 강도.
그리고 좋은 근무 환경.
사실상 이 두 가지는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더욱이 실현하기 힘든 조건.
현재 청소팀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18%나 된다는 게 놀라울 정도지만.'
일단 신설 팀이 만들어지면 업무 강도가 줄어드는 건 기정사실일 테니 내버려두고.
문제는 좋은 근무 환경.
좋은 근무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청소팀에 빠삭하고 청소팀을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겠지.
'뭐… 일단은 내가 팀장 내정이라는 것부터가 모순이긴 한데.'
어쨌든 신설 팀만큼은 청소팀에 어울리는 사람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청소팀에 들어가 준다고 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 될 일이지 뭘 미팅까지 하자고 불러내."
에휴.
나는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서울 본부 근처 카페.
30대 중후반의 남자와 마주 앉아 30분 동안이나 그의 소싯적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이전까지 리스트에 있던 놈들과 차례로 미팅을 진행한 탓에 피곤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지금 내 앞에 앉은 이 남자, 신태환이 그 마지막 순서라는 것뿐.
신태환.
국내 10위권 안에 드는 유명 길드, 아레스의 전 부길드장. 현 프리랜서 헌터.
잘 아는 놈은 아니지만, 일면식은 있는 놈이다.
내가 팀장으로 있을 때 몇 번 같이 작전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기획이나 지휘는 그냥 평범한 수준. 하지만 헌터 랭크 하나만큼은 국내에서도 꽤나 상위권. 무엇보다 국내 광전사 클래스 중에선 1, 2위를 다투는 놈이다.
그런 놈이 청소팀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왜 길드를 나온 줄 알아?"
"글쎄요."
커피에 시선을 처박은 채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길드는 그래 봤자 길드더라고. 협회 소속보다는 확실히 제약이 많아. 뭐만 하려고 하면 허가받아야 하고... 그래서 나왔어. 그렇지 않아도 협회로 들어갈 생각이기도 했고."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정보.
"아무튼, 나도 협회가 무슨 상황인지 대충은 알고 있어. 너랑 비슷한 청소팀을 신설한다지? 뭐, 너 대안이라고들 하는 것 같은데…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아. 누가 누구의 대안이라는 건지."
고작해야 청소부 주제에.
...라고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표정에 모두 쓰여 있다.
"아무튼, 어차피 길드도 나와서 지금은 백수고. 당분간 시간도 있을 것 같으니까 들어가 줄게."
"신태환 씨…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데."
나는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제가 부탁해서 당신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사정사정 부탁해야 제가 겨우 추천을 해주는 겁니다."
"...뭐?"
동시에 날카로워지는 눈빛.
나 또한 무척이나 피곤했던 탓에, 더 이상 좋게 돌려 말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저는 청소팀 사람을 뽑는 겁니다. 부 길드장? 랭크? 그딴 게 청소팀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미팅을 요청했으면 본인이 어디에 지원하는 건지 정도는 준비하고 오세요."
"하, 하하...."
"별 같잖은 길드에 조금 있었던 거 가지고 뻐길 생각이시면, 청소팀이 아니라 작전팀으로 가시고."
신태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이가 없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신태환이야."
"어쩌라고요."
그가 카페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야, 이 새끼야. 협회에서 조금 띄워주니까 진짜 뭐라도 된 것 같냐? 어린 나이에 유명세 조금 탔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너 이러다 후회해."
"이미 하는 중입니다."
이 자리에 나온 걸 말이지.
참 나, 저런 놈을 내 대안으로 꽂으라니.
고작 A랭크 부길드장 주제에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아.
"할 말 끝나셨으면 먼저 일어나보십쇼. 전 할 게 좀 남아서."
"...너 조만간 다시 보자."
신태환은 이윽고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카페를 나섰다.
그가 자리를 뜬 후, 나는 곧바로 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이번에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고. 저런 놈은 청소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랭크나 경험은 조금 모자라도 되니까 최대한 청소팀에 어울릴 만한 사람으로 다시 리스트를 뽑아주십쇼."
"네. 네. 그럼 이만."
핸드폰 너머에선 아직도 할 말이 남은 듯 시끄러웠지만,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미간을 꼬집었다.
미팅을 모두 끝낸 소감은 딱 하나뿐이다.
하나 같이 다 똑같은 놈이라는 것.
잘 나가는 헌터다. 그런 내가 특별히 청소팀에 들어가 주겠다. 대신 모든 권한을 달라 등등.
심한 놈은 헌터급 연봉을 요구하고 나선 경우도 있었다.
하나 같이 지들이 유능한 줄 아는 머저리들뿐.
본인이 뭐라도 되는 양 휘두르려고 하는 놈은 필요 없다. 그런 놈들이 청소팀에 들어가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청소 업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고 온갖 허드렛일은 나머지 팀원들에게 미룰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도 자신이 헌터인 양, 팀원들을 덜떨어진 부하 취급하겠지.
당연히 만족도 30%는커녕, 오히려 더 떨어지기만 할 것이다.
'하... 이렇게 인재가 없냐.'
연신 한숨만 내쉬고 있던 그때.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
이번엔 이아영 부실장이었다.
"여보세요."
「진짜 수고 많았어요! 역시 당신한테 부탁하길 잘했네요.」
"...또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여전히 다짜고짜 이상한 말부터 내뱉고 있다.
「제가 이왕이면 재밌는 사람으로 찾아달라고 한 거 말이에요. 벌써 이렇게 찾아오셨잖아요?」
"...아직 못 찾았는데?"
「아, 비밀로 하려고 했어요? 그럼 모른 척해줄게요. 아무튼, 빨리 본부로 오세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니, 대체 뭔 소립니까. 기다리긴 누가 기다려요."
「누구긴요. 청소팀 지원자죠! 김준우 씨 불러 달라고 애타게 찾던데? 어, 성함이....」
저편에서 무어라 소리가 들리길 잠시.
이내 다시금 이아영이 입을 열었다.
「한유빈 씨?」
...그게 누군데?
***
본부장실.
"후보 준비해봤습니다."
이수용 또한 편 팀장과 마찬가지로 준비해온 리스트를 서민철에게 건넸다.
"최승훈 헌터. 국내 랭킹 300위권. 작전 경험 다수. 하승빈 헌터. 국내 랭킹 290위권. 연합 작전 및 특수 작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민철의 시선이 리스트의 마지막 장으로 향했다.
누가 봐도 방금 급하게 끼워 넣은 듯한 페이지였다.
"신태환 전 아레스 부길드장. 원래는 통제팀 쪽에 먼저 연락이 닿았는데, 김준우가 거절했답니다. 이후에 저희 쪽으로 연락이 와서 냉큼 잡았고요."
"뭐? 이런 놈을 거절했다고 왜?"
"그건 저도 잘.... 불협화음이 있었다곤 하는데."
김준우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수용은 알 턱이 없었다.
신태환에게 물어봤지만, 욕지거리만 들려줄 뿐이었으니.
"뭐… 그놈 성격에 자기보다 잘난 놈을 두고 싶진 않았겠지. 부길드장이면 자기 수준 이상일 테니까 멋대로 다룰 수도 없을 테고."
그때 서민철이 멋대로 상황을 해석했다.
"동감입니다. 그리고 스카우트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을 테고요."
"맞아. 단가 맞춰서 데리고 오려면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밖에 없겠군."
서민철이 미소를 흘렸다.
"좋아. 김준우는 일단 신경 꺼도 될 것 같고. 고은영 이사랑 송철식 이사는?"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쪽도 꽤 쟁쟁하답니다. 이름 좀 날리는 헌터들로 후보를 짰다는데… 그래도 뭐, 신태환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한 패 같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는 신태환으로 밀어 보자고."
서민철이 리스트의 마지막 장만 두고 나머지를 반으로 쭉 찢으며 말했다.
"채용은 어떻게 진행할까요."
"임원들 눈도 있으니 최대한 공평하게 가야지. 괜히 낙하산 얘기 나오면 귀찮아지니까 일단 1차로 면접부터 보자고."
"면접이요?"
이수용은 탐탁지 않은 반응이었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뇨. 그런 것보다… 김준우도 이번 채용 심사에 끼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히 자기 후보를 밀어주려고 할 수도...."
"맘대로 하라 그래. 그런 것까지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제아무리 밀어준다고 해봤자 후보 스펙이 다르잖아."
서민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이아영의 호출에 본부로 복귀하자, 웬 꼬맹이가 있었다.
이아영은 어디서 저런 분을 꼬셨냐고 물었지만…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나도 지금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 김준우 씨? 생각보다 카리스마 있어 보이진 않네요.
어찌 된 영문인지 지원자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에 싸가지가 더럽게 없었다.
아무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보기 위해 이아영을 내보낸 후, 그녀 앞에 앉았다. 몇 가지 신상 정보를 물어보던 중.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 전직... 뭐라고요?"
"국제 협회 헌터라고요."
그리고 꺼내 보여주는 헌터증.
이 꼬맹이가 정말로 국제 협회 헌터라는 것에 한 번 놀랐고, 나보다 연상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국제 협회 헌터가 청소팀에는 왜…?"
"뭐… 수준이 맞는 것 같아서요."
"수준이라면 차라리 작전팀이나 하다못해 민간 길드가 더 맞으실 텐데요."
"헌터 자격 박탈당해서 헌터는 안 돼요."
"...?"
정말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재밌는 사람으로 뽑아달라더니, 기어이 미친년이 왔네.
"아무튼, 딴 일은 할 줄도 모르고 헌터는 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그나마 여기가 하는 일은 비슷한 것 같아서 면접이나 보려고 왔어요. 혹시 지금 사람 안 뽑아요?"
"아니 뭐. 뽑긴 뽑는데… 청소팀이 뭐 하는 팀인지는 압니까?"
"어? 왜 박탈당했는지는 안 물어봐요?"
"별로 안 궁금한데요."
의외라는 듯한 표정.
그것도 잠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미국에서 청소팀이 하는 일이라면 그냥 던전 부산물 청소였죠."
"아, 잘 알고 계신...."
"하지만 한국의 청소팀은 긴급 상황 시 특수 작전 수행 및 전반적인 작전 조율. 그리고 대규모 작전 기획 및 지휘. 맞죠?"
"...."
뭐라는 거야, 시발.
"혹시 기사 보고 오셨습니까?"
"네."
나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꾹 눌렀다.
"미안합니다만… 청소팀은 그런 거창한 팀이 아닙니다. 미국이랑 똑같아요. 그냥 던전 청소하는 팀입니다."
"비슷한 방식이네요."
"...? 뭐가요."
"제가 처음 미국 지부에 들어갈 때, 그런 말을 들었거든요. 작전팀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매우 하찮고 사소한 일을 한다고. 연봉도 완전히 낮춰서 알려줘요."
"...?"
"물론 미끼였죠. 직업 네임벨, 작전팀 간판만 보고 뛰어든 놈들은 그걸 듣고는 바로 면접을 포기했고요. 저 나름 꽤 오래 일했어요. 그런 수법은 안 통해요."
그런 거 아닌데.
미국에서 오래 일을 해서 그런가, 어째 말이 통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보다, 그녀가 가져온 이력서를 살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로 어마어마한 스펙이었다.
랭크부터 시작해서 스킬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청소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지만.
'이것만 보면 이 녀석도 다른 놈들이랑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특히 국제 협회에 몸담았던 녀석이 아닌가. 자존심으로 따지면 다른 놈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청소팀이 뭐 하는 팀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은가.
아쉬운 인재지만 청소팀엔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기각을....
'잠깐.'
그 순간 이전에 박 팀장이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하셨죠?"
"한유빈이요."
"...혹시 동생 이름이 한상혁입니까?"
"오, 오늘 면접 온 거 그 새끼한테 말하면 안 돼요!"
그녀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역시 그랬나....
이건 생각지 못한 부분이네.
동생이 청소팀이니까 최소한 이전 놈들처럼 청소팀을 하대하진 않겠지.
듣자 하니 유일한 가족이라고 했고.
소중한 피붙이가 있는 팀이니까, 오히려 더 잘 대해 줄 수도....
쾅―!
"야 이 미친년아! 내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진짜 뒤지고 싶냐?! 니 주제에 무슨 청소부야, 청소부는!!"
아닌가…?
037
037
작전 2팀 사무실.
이아영 부실장과 김민주 팀장 그리고 문소연이 한자리에 모여 간만의 다과회를 갖는 중이었다.
"...그렇게 돼서 조만간 각자 후보를 데려올 거예요. 듣자 하니 인사 담당자랑 본부장이 직접 면접을 본다나 봐요."
이아영 부실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나 신설 팀원 채용에 관한 이야기였다.
직군도, 역할도, 팀도 달랐지만, 김준우를 대신할 청소팀이 만들어지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로선 아직 그것이 좋은 일이 될지, 아니면 나쁜 일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직접 청소팀에 몸담은 문소연은 걱정이 먼저 앞서는 모양이었다.
"그… 제가 소문을 들었는데요. 헌터들로만 후보를 짰다는 거, 진짜예요?"
"네 뭐. 말이 청소팀이지 사실상 김준우 청소팀의 레플리카를 만들려고 하는 거니까요."
"다들 선생님을 띄엄띄엄 보고 있네요. 그게 따라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씨익 웃는 김민주.
그러자 문소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알잖아요. 높은 분들 특징이란 거. 청소팀이 조금 잘 된다 싶으니까 다들 이때다 싶어서 너도나도 청소 코인을 타려는 거죠. 청소팀 자체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이아영 또한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쯧, 한 차례 혀를 차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 신설 팀에 그런 놈들의 후보가 들어오면… 본부 꼴은 안 봐도 뻔하죠. 청소팀이 지들 거라도 되는 것처럼 꽉 잡으려고 할 거예요."
"저는 그런 것보다.... 이제야 청소팀 모두가 조금이나마 어깨를 펴고 있는데, 괜히 헌터들이 들어와서 그걸 꺾는 게 아닌가 걱정되네요."
김민주는 이아영과 조금 시각이 달랐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김준우야 정보가 알려진 것도 없고, 스스로를 당당하게 청소부라 자칭하고 있으니 여태껏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헌터가 청소팀에 들어오면 다른 청소팀원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헌터들 또한 팀원들을 동료라고 생각하기보단 아랫사람으로 보고 휘두르려 하겠지.
애초에 그러기 위해 청소팀에 들어오려는 놈들이다.
협회의 높은 분을 등에 업고, 김준우가 쌓아 놓은 영향력에 숟가락만 얹어서 휘두르기 위해 청소팀에 들어오려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그들이 채용되면 청소팀은 다시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채용 싸움, 김준우 씨가 무조건 이겨야 해요. 다른 후보는 몰라도 그가 데려온 사람이면 믿을 만할 테니까."
"당연히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가 도움을 드릴 게 없는걸요."
"그러게요. 차라리 청소팀 실무 면접이면 저희 팀이 어떻게든 밀어줄 수 있을 텐데."
문소연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자 이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울 거예요. 본부장이랑 임원들은 면접에서 어떻게든 승부를 보려고 할 테니까요."
동시에 울려 퍼지는 한숨 소리.
다들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표정이 무척이나 안 좋았다.
이아영은 괜히 있는 그대로 말했나 싶었다.
조금은 위안을 해주려던 그때.
"저 그래서...."
"근데 말이에요."
김민주와 문소연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준우 씨가 데려온 후보, 여자래요?"
"선생님 후보분 여자예요?"
"...."
이아영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
본부에 마련된 작은 면접실.
나란히 앉아 있는 네 명의 면접자.
그리고 나와 서민철 본부장, 인사 담당자 몇 명이 그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뭐, 원칙적으로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니지만....
청소팀 인원을 뽑는 자리에 청소팀 소속이 없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누가 목소리를 냈다는 모양이다.
안 봐도 이아영이겠지만.
"그럼 저부터 먼저 질문드리겠습니다."
그들을 향해 민희숙 인사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아영에게 슬쩍 들은 바로는 고은영 이사의 입김이 닿는 인물이라는 듯했다.
"작전 중 도저히 현재 팀으로 토벌할 수 없는 몬스터를 만났을 경우,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강우혁 씨부터 차례로 답변해주세요."
"다중 구역 던전이 아니라면, 일단 포기하고 향후에 다시 작전을 기획하겠습니다. 무리하게 토벌을 진행하다간 무의미한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오른쪽에 앉은 고은영 이사의 후보-강우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한 번 진행된 작전을 도중에 포기하기엔 금전적으로 매우 큰 손실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계속 토벌은 진행하되, 통제팀에 연락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겠습니다."
노소민-송철식 이사의 후보가 뒤이어 답변했다.
그들의 답변에 작게 웃음을 흘리던 신태환-서민철의 후보가 입을 열었다.
"작전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전 중지를 걸어 놓고, 일단 던전을 빠져나와 다른 팀에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 로케이션 토벌을 진행하면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여유로운 표정과 확신에 찬 목소리.
무엇보다 정답이라고 해도 될 만큼 완벽한 답변이다.
요행으로 부길드장을 단 건 아닌가 보군.
"그럼 마지막으로... 한유빈 씨?"
자연스레 마지막 순서인 한유빈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내뱉은 답변은....
"애초에 토벌에 들어가고 나서야 못 이긴다는 걸 알 정도면 그건 이미 틀린 작전 아닌가요? 저라면 창피해서라도 그냥 죽겠습니다."
"...."
정말이지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싸늘한 정적.
'내가 미쳤지. 어쩌다 저런 녀석을....'
나는 가만히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후보는 결국 한유빈으로 정해졌다.
물론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편 팀장의 리스트는 결국 쓸모가 없었고, 다른 마땅한 놈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녀석이 그나마 청소팀에 적대적이지 않았기에 한 번 면접이라도 보게 하자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막상 데려와 앉히니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전형적인, 딱 봐도 자존심 강해 보이고 사람을 휘두르려는 타입.
아무리 봐도 만족도를 올릴 만한 인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로 계속해서 몇 가지 질문들이 이어졌다.
작전 규칙에 관한 질문.
장비 지원 절차에 관한 질문.
팀과 협회의 입장이 다를 때, 어느 편에 설 것인지에 관한 질문.
토벌 허가 혼선을 해결하기 위한 절충안 등등.
그에 맞춰 각자 정석적인 답변들을 내놓았고....
"작전에 규칙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하든 몬스터만 죽이면 그만이지."
"장비? 미국에선 모두 개인이 관리했는데요."
"조직과 동료 중에 골라라… 어이가 없어서 원."
"애초에 허가를 받아야만 토벌을 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이해가 안 갑니다. 한국 협회는 시민을 지키는 것보다 헌터 개인의 실적이 더 중요한 건가요?"
한유빈은 매번 개소리를 내뱉었다.
쟨 대체 미국 지부에 어떻게 들어갔지?
미국은 원래 면접을 저따위로 보나? 문화 차이 뭐 그런 건가?
다른 면접관들을 슬쩍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고개를 내젓고 있다.
확실하다.
저 자식, 무조건 떨어진다.
"그럼 뭐… 김준우 청소부님, 마지막으로 질문하실 거라도?"
나는 쉽게 말을 뱉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어떤 질문을 하든 한유빈에게만 마이너스다.
사실 저 녀석이 떨어지든 말든 나야 크게 상관은 없다만… 문제는 저 녀석이 떨어지면 다른 놈이 붙는다는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신태환이 되겠지.
내 면접 기준은 오로지 청소팀의 만족도를 올릴 수 있느냐, 마느냐. 그런데 신태환 같은 놈이 채용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저놈들이 채용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여기서 그냥 전부 떨어트릴까…?'
이렇게 된 이상 그편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아예 백지화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뽑는 게 백번 낫겠지.
쯧, 어쩔 수 없군.
억지를 좀 부려보는 수밖에.
"김준우 씨? 질문 없으면 이대로 면접 끝내는 거로...."
"지네형 몬스터는 해체 작업 시, 몇 등분으로 잘라야 할까요."
정리를 마친 후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자, 잘...."
"무슨 질문이 그따구지?"
동시에 쏟아지는 의문들.
"아무도 모르시는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인사팀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이봐요. 김준우 씨. 대체 무슨 질문이...."
"지금 우리 어느 팀 사람을 뽑는 겁니까?"
"...네?"
"여기 서류에 쓰여 있네요. 청소 6팀 신규 입사자 채용 면접이라고. 청소팀 사람을 뽑는데 청소 관련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한 겁니까?"
면접실에 있던 모두가 침묵했다.
나는 기세를 놓칠세라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다른 질문을 드리죠. 3층 상가 건물형 던전 기준, 크기 2m의 고블린 사체가 있을 경우 던전 내 가스 수치는 평균 분당 몇 마이크로그램씩 올라갑니까?"
"다른 질문. 몬스터의 점액과 함께 사람의 혈흔이 벽면에 묻었을 경우, 가장 효과적으로 청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전한 침묵.
나는 이내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훌륭한 인재들이 아닐 수 없군요."
"...."
"...."
벙찐 표정의 후보들.
그들을 한 명씩 노려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면접관분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제 기준에선 모두 불합격입니다."
***
면접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었다.
면접자들은 우선적으로 면접장을 빠져나갔고, 우리는 그 자리에 남아 간략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당연히 전원 불합격을 제안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자기 후보가 뽑혀야 하니 전원 불합격은 가당치도 않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청소팀 채용인 만큼, 그에 맞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만큼은 동의했다.
결국, 실무 과제로 대체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큰소리쳐놓고 데려온 게 고작 저런 꼬맹이야?"
짧은 회의를 끝내고 면접장을 나오던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신태환이 대뜸 말을 걸었다.
근데 큰소리는 내가 아니라 저놈이 치지 않았던가.
게다가 고작 저런 꼬맹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후보자들끼리는 서로의 정보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도 성에 차지 않긴 하지만… 뭐, 그래도 당신보다야 나은 것 같던데요."
"그래?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 정도 안목인 거겠지."
대놓고 주절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면접으로는 너희들이 불리할 것 같으니까 일부러 뒤집어엎은 것 같은데… 어디 할 수 있는 만큼 해봐. 대충 수준 보니까 뭔 짓을 해도 안 뽑힐 것 같긴 한데."
"...."
신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서민철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의 등을 바라봤다.
이제 와서 저 측은한 자존심에 발끈할 것도 없다만....
'뭔가 이상한데....'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친다.
게다가 마치 합격자가 정해져 있다는 듯한 말투. 아무리 나를 얕잡아 본다고 해도 면접관과 면접자의 위치를 무시하는 도발.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 만한 근거가 있나?
께름칙한 기분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찰나, 이번엔 다른 녀석이 길을 막았다.
"방금 면접 대체 뭐예요?"
바로 내 후보님 되시겠다.
"뭐가 말입니까?"
"그런 질문을 할 거였으면 조금 귀띔해줘도 좋았잖아요! 그래도 나름 추천받고 여기 온 건데… 이게 뭐야, 괜히 쪽만 당하고…!"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깊게 숨을 들어 쉬고 내뱉길 한 차례.
"미국에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온 사람도 인심 써서 뽑아준답니까?"
정확히 한유빈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청소팀 들어오고 싶다고 제 발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준비는 당신이 해야죠. 준비는 하기 싫고, 면접은 잘 보고 싶고. 그래놓고 또 자존심은 상해요? 청소팀이라고 너무 우습게 본 거 아닙니까?"
"그, 그런 건 아닌...."
"마음 같아선 떨어트리고 싶었는데… 내부 회의 결과, 아쉽게도 실무 면접으로 대체됐습니다. 날짜는 정해지면 통지해드릴 테니까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다음엔 준비해서 오세요. 내가 추천해줬으니 응당 붙겠거니 하는 마음이시면 그냥 나오지 마시고."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등을 돌렸다.
038
038
지원팀, 헌터관리실.
이아영은 결과가 꽤나 궁금했던 건지, 면접이 끝나자마자 나를 찾았다.
"...뭐, 그렇게 해서 실무 과제로 대체됐습니다. 아마 다음 주중으로 진행될 것 같더군요."
대충 경황을 설명해주자 이아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당신 후보인데 너무 날 세운 거 아니에요? 자존심이 강한 분이라면서요. 저 같으면 그냥 안 나오고 말 것 같은데?"
"뭐,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정도 사람이었던 겁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그 녀석의 기분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으니까.
"생각보다 엄청 엄격하시네요?"
"그래야 합니다. 뭐, 애초에 면접에서 죽을 쒔으니 합격할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에이,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요. 그래도 신태환만 꺾으면 어떻게든 채용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힘 써볼게요."
"채용된다고 해도 그 이후가 걱정입니다. 다른 녀석들보다야 낫다지만 여전히 자존심이 너무 강해요. 이대로 합격하면 같은 팀원들만 고생할 겁니다."
비단 한유빈 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더 최악은 다른 후보들이다.
특히나 신태환, 그 새끼가 채용되면 정말로 답이 없다.
"흐음...."
그때, 이아영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흘겼다.
"뭡니까?"
"아녜요. 그냥 당신답구나 싶어서요."
어째 미소 짓는 이아영.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다.
아무튼, 실무 과제로 대체된 건 나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되도록 그 자리에서 모두 떨어트리고 싶었지만....
'뭐, 다른 놈들 입장에선 무조건 자기 후보를 붙이고 싶을 테니까 당연한 건가.'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실무 과제에서 모조리 떨어트려야 한다.
"어쨌든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헌터고 나발이고, 청소팀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죠?"
"뭐… 굳이 따지자면."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 그쪽은 우리한테 맡기시고… 당신은 따로 할 일이 있어요."
이아영은 구석에서 무언가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이내 서류 뭉텅이를 책상에 쾅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그동안 협회에서 나왔던 실무 과제들이에요. 참고가 될까 해서요."
"제가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게 왜 필요합니까?"
"당신이 만들어야 하니까요."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 각 팀의 팀장들과 인사 담당자, 본부장이 모여서 과제 가이드라인을 만들 거예요. 모든 팀이 참여하니까 각 팀의 역할을 모두 시험하게 되겠죠."
"…그렇겠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청소팀 과제를 당신보다 더 잘 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만들어 봐요."
"...인사팀이나 임원들이나 절대 허가 안 내줄 것 같은데요."
"그건 뭐…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아영이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설마 이두식 이사님한테 부탁하려는 건 아니겠...."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쨌든 당신은 청소팀 과제나 생각해봐요. 인사팀에는 제가 잘 얘기해놓을 테니까."
제 발 저리는 건지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진다.
또다시 이두식 이사와 관련되는 건 떨떠름하기 그지없지만....
"뭐, 알겠습니다."
지금 상황으로선 사실상 기회다.
어차피 다들 토벌에 있어선 날고 긴다 하는 놈들이니 작전이나 기획 쪽으론 변별력이 없다. 차이가 난다고 하면 당연 청소팀 쪽.
그렇다면 아무도 통과 못 할 과제를 내서 모조리 떨어트리면 그만이다.
클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군.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노파심에 하는 소리지만… 한유빈 씨에게 조금 유리하게 만든다고 해도 뭐라 그럴 사람 없어요. 알죠?"
"…? 걱정 마세요. 그럴 생각 없으니까."
"정말로요. 정말 뭐라 그럴 사람 없어요."
아니, 무슨 임원 딸이라는 사람이 대놓고 부정 채용을 권고하고 있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원.
"그나저나… 새삼 신기하네요."
그때,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아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뭐가요."
"청소팀 채용에 이 정도로 열을 올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거든요. 그것도 임원들까지 끼어서는.... 참 나,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혀를 내두르는 이아영.
뭐, 이제 협회에 들어온 지 몇 년 안 된 이아영도 저 정도인데, 나는 오죽하겠는가.
"아무튼 이번 채용, 그 사람들이 고생해주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 사람들이라뇨?"
"누구겠어요."
뭘 알면서 물어보냐는 말투.
"나중에 감사 인사나 해둬요."
끝까지 영문 모를 소리나 하고 있다.
***
한상혁의 자취방.
한유빈은 벌써 몇 시간째 소파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로 나자빠져 있는 중이었다.
"끄으으...."
그것도 연신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 준비는 하기 싫고, 면접은 잘 보고 싶고. 그래놓고 또 자존심은 상해요?
- 내가 추천해줬으니 응당 붙겠거니 하는 마음이시면 그냥 나오지 마시고.
면접을 보고 온 지도 이틀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면전에서 그런 굴욕을 당한 건 태어난 이후 처음이었다.
심지어 차별이 심하기로 소문난 미국 지부에서도 그런 모욕은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내 협회에서, 그것도 청소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참 나, 자긴 뭐가 그리 잘났다고....'
사실상 지금 한유빈에겐 실무 과제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것보다, 그냥 그 자식한테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무시했던 걸 사과받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 자식 말 대로 청소팀에 대해선 아는 것도 없고, 이대로 실무 과제를 치른다 한들 그 자식한테 또다시 굴욕이나 당할 게 뻔했다.
'빌어먹을 놈....'
한유빈은 이내 몸에 힘을 빼며 축 늘어졌다.
그래.
하지 말자.
실무 과제고 뭐고 그냥 나가지 말자.
합격? 알게 뭔가.
애초에 정말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 일은 해야겠고, 마음에 드는 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찔러 본 것뿐.
물론 그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끄으으으으!!"
"아 씨, 개 같은 소리 좀 그만 내! 옆집에 다 들린다고!"
참다못한 한상혁이 덩달아 몸서리를 쳤다.
"...닥쳐. 니가 뭘 안다고."
"그러게 만만히 보고 지원할 때부터 알아봤다. 게다가 김준우가 직접 면접 봤다면서? 그럼 면전에서 욕 안 처먹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라."
"같은 팀이라고 편들어주는 거냐?"
"편들어주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놈이야. 청소팀 관련된 일에는 눈깔 뒤집히는 놈."
참 나, 한유빈이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볼 땐 누나는 이미 눈 밖에 났어. 합격은 기대 안 하는 게 좋을걸?"
"흥, 합격시켜준 대도 이젠 내가 싫어."
"으휴, 저 쓸데없는 자존심.... 그래서 실무 과제는 어떡할 거야."
"...몰라. 이젠 관심 없어."
한상혁은 기다렸던 대답에 내심 안도했다.
그동안 친누나랑 같은 직장에 다닐 걸 생각하니 밤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저 미친년이랑 같이 출근을 하느니 차라리 때려치우고 말지.
그래도 뭐… 김준우가 눈치 있게 잘 내쳐줬다.
그 성격에 굴욕을 당하고도 다시 제 발로 찾아갈 리는 없으니까.
자식, 역시 눈치 하나는 좋다니까.
"야 근데 청소팀은 둘째 치고 니 방이라도 좀 치우면 안 되냐? 전에 한 번 들어갔다가 영영 못 나오는 줄 알았잖아. 미궁인 줄 알고."
"닥치고 밥이나 줘. 배고파."
"내가 니 식모냐?"
한유빈은 대답이 없었다.
저 빌어먹을 식충… 한상혁은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너 택배시켰냐?"
"아니."
"올 사람도 없는데."
한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건.
"어, 집에 계셨네요? 전화 안 받으시길래 일단 와 봤어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소연과 김민주였다.
"이번 과제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들어가도 돼요?"
"...?"
한상혁은 눈앞에 놓인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뭔가.
이 사람들이 우리 집엔 왜 온 것인가.
"그… 과제라면 전화로 얘기하셔도 될 텐데.... 두 사람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문소연이 쿡 웃음을 흘렸다.
"민주 언니랑 얘기를 해봤는데,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편이 유빈 씨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저, 저요?"
본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한유빈은 화들짝 놀라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그, 그게 무슨...."
"당연히 이번 실무 과제죠! 혼자 준비하시려면 어렵잖아요?"
"아, 아니 저는...."
"그래서 전문가도 데려왔어요!"
한유빈이 어물거리는 틈을 타, 또 다른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청소 3팀의 박 팀장 그리고 통제팀의 편 팀장. 마지막으로 이아영 부실장까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곤 손을 흔들었다.
"...."
"...."
덕분에 한상혁과 한유빈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좁고 지저분한 자취방.
그곳에 난데없이 본부 내 모든 팀의 실세가 들이닥쳤다.
남매가 쌍으로 무어라 반응도 못 하고 벙쩌 있자니, 편 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유빈 씨는 이번 채용에 무조건 붙으셔야 합니다."
"이건 유빈 씨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저희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선생님을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뿐.
"뭐, 걱정 꽉 붙들어 매세요. 저희가 청소팀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마지막으로 박 팀장이 호쾌한 웃음을 흘리자, 그제야 한유빈의 정신이 어렴풋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실무 과제를 도와주기 위해 이 많은 인원이 찾아온 거라는 건데....
고작 청소팀 지원자 한 명을 도와주려고 협회 팀장급들이 죄다 찾아온다고? 한국 협회에선 그게 보통인가?
아니,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죄송한데...."
한유빈은 이내 문 앞의 손님들을 향해 작게 입을 열었다.
"저 이번 실무 과제 안 나갈 건데요."
"...."
이번에 얼어붙은 건 문밖의 손님들이었다.
***
"으으으...."
스탠드 불빛이 퍼지고 있는 책상.
새벽이 다 돼서야 나는 겨우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완성했다.
내 청소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궁극의 과제.
10위권 길드 출신? 부 길드장? 국제 협회 헌터? 까라 그래.
이건 아무도 통과 못 한다. 클클클.
홀로 자축을 하고 있던 그때, 뜬금없이 전화가 울렸다.
이아영 부실장이었다.
"이 새벽에 또 무슨...?"
「과제는 어떻게 됐어요?」
"…방금 막 완성했습니다."
「보여줄 수 있어요?」
「…? 아뇨. 그건 부정이잖습니까.」
"생각보다 고지식하네요."
대체 날 그동안 어떻게 생각했길래, 자꾸 저 소리인가.
「농담이에요, 농담! 그냥 어떻게 되고 있나 안부차 전화했어요.」
"예. 근데 어디시길래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아, 지금 다들 모여 있거든요.」
「준우야! 고생했다!」
「수고했어요, 준우 씨.」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박 팀장과 문소연의 목소리.
...나 빼고 회식이라도 하나.
「아무튼, 수고하셨어요. 초고는 인사팀으로 보내 놓으시면 되고, 과제 날까지는 조금 쉬세요. 나머진 이제 저희한테 맡겨주시고요.」
"맡기다뇨. 또 무슨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
뚝―.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핸드폰을 응시했다.
039
039
실무 과제 당일.
실시간으로 과제가 진행될 던전 앞.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후보가 모였다.
내 예상을 깨고 한유빈도 참석했다.
"...용케 나오셨군요."
"왜요. 안 왔으면 했어요?"
"조금은."
"참 나, 그럴 거면 처음부터 추천하지 말던가."
여전히 날카롭기 그지없는 말투.
그와 반대로 어째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이다. 퀭한 눈에 다크서클까지 내려온 걸 보니 며칠 잠을 설친 모양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이전에 봤을 때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감…?'
밤새워서 실무 과제 공부라도 한 걸까.
뭐, 그래 봤자지.
"저번에 무시했던 거, 사과받으러 왔어요."
한유빈이 눈에 힘을 바짝 주며 나를 쏘아봤다.
"사과할 생각 없습니다."
"지금 하라는 거 아닌데."
"나중에도 안 할 건데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안 봐도 뻔한데.... 근데 왜 자꾸 반말?"
심사관한테 말을 놓는 면접자라니.
미국식이다 이거야?
"뭐, 아무튼 덕분에 일주일 동안 개고생했어요. 동료분들이 아주 극성이시리라."
"...무슨 소리신지?"
"몰라도 돼요. 당신한텐 비밀로 해달라고도 했고. 참 나, 당신 후보라는 것 하나 때문에 본부 전력이 몽땅 쳐들어올 줄이야....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한유빈이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비밀?
본부 전력?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자자, 다들 앞으로 모여주십시오."
그때. 서민철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인사 담당자와 각 부서에서 선출된 심사관들이 서민철 본부장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전에 고지했듯이, 실무 과제는 실제 던전에서 진행됩니다. 심사관들과 인사 담당자가 함께 던전에 들어가게 될 거고, 입장하시는 순간부터 몇 가지 이슈가 제시될 겁니다."
이윽고 서민철이 간략하게 과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각 이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심사가 진행되니, 현명하게 판단하시고 행동하기 바랍니다."
"질문 있습니다. 토벌된 던전입니까?"
"토벌도 과제에 포함되기 때문에 활성 던전으로 골랐습니다. 뭐… 다들 헌터 출신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다고 봅니다"
활성 던전이라는 말에도 모두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하긴, 신입도 아니고 나름 토벌을 업으로 삼고 있는 숙달된 헌터들이니, 토벌 정도야 식은 죽 먹기겠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던전에 입장해주세요."
서민철 본부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후보들이 걸음을 옮겼다. 이수용을 포함한 심사관들과 인사 담당자가 그 뒤를 따랐다.
이번 과제로 준비한 던전은 옐로우 등급의 동굴형 던전.
꽤나 난도가 있는 곳이지만, 후보들의 수준으로 보아 돌발 상황만 일어나지 않으면 무난하게 토벌할 수 있는 곳이었다. 후보들도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모두가 던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은 시각.
"이슈 발생, 이슈 발생."
첫 번째 과제가 던져졌다.
"작전 4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현재 출동할 수 있는 팀원은 없으므로, 현 팀이 지원을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수용이 후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형적인 작전팀 토벌 지원 이슈.
곧바로 후퇴해서 지원을 가느냐, 혹은 서둘러 토벌을 완료한 후 지원을 가느냐 선택해야 한다.
뭐, 신입 헌터였으면 안전하게 전자를 선택했을지 몰라도 저놈들이라면....
"20분 안으로 토벌 완료 후 지원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이의 있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신태환이 즉답했다.
"없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뒤따라 두 명의 후보가 동의했다.
그래. 저게 당연한 선택이겠지.
개개인이 현 작전팀 팀장급이다. 무엇보다 토벌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경력에 대한 자존심이 넘치는 놈들뿐.
그런 놈이 4명이 모였는데, 후퇴는 말도 안 되겠지.
'뭐, 덕분에 죄다 감점이겠지만....'
나는 작게 미소를 흘렸다.
자존심, 자신감.
그 두 개로 인해 저들은 중요한 걸 놓치고 말았다.
물론 나야 환영이다.
이대로 계속 뭐가 중요한지도 모른 채, 지들 멋대로 행동할수록 전원을 떨어트릴 명분이....
"이의 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손을 들며 당당한 목소리를 뱉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20분 만에는 무리입니다. 후퇴 후 다시 토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의를 제기한 이는 다름 아닌 한유빈이었다.
"뭡니까?"
"자신 없으면 먼저 나가셔도 됩니다."
"참 나. 20분 만에 완료하지도 못할 정도면, 대체 뭔 깡으로 여길 왔대."
후보들은 곧바로 그녀의 의견을 묵살했다.
인사 담당자들의 표정도 썩 좋지 않다.
국제 협회 헌터라는 녀석이 초장부터 후퇴를 제안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말도 안 돼....'
하지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답이다.
저게 정확하게 옳은 선택이다.
저들은 지금 여전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지금 실무 과제는 토벌을 심사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겠지만, 저들은 어디까지나 청소팀의 면접을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저들은 토벌 후 청소까지 완료해야 한다.
그런데 20분 만에 끝내고 지원을 가겠다?
택도 없는 소리다.
여기선 후퇴를 제안하는 게 당연히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자만과 자존심에 찌들어 있는 헌터가 그걸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한유빈이 그걸 파악할 줄이야.
일주일 동안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과반수가 진행을 선택했으므로 토벌은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계속해주십시오."
의견이 나뉘자, 인사 담당자가 곧바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동시에 신태환이 양 옆구리에서 쌍검을 꺼내 들며 선두로 나섰다.
한유빈은 딱 봐도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별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로는 장비 지원 이슈, 토벌 허가 이슈 및 기획 관련 이슈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신태환이 나서서 제안했고, 후보들은 대부분 군말 없이 동의했다.
암묵적인 리더가 형성된 것이다.
그와 다르게 한유빈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후보들은 몇 가지 이슈를 해결하며 어느새 보스 방 앞까지 다다랐다.
모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고유 스킬 : 광분]
신태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스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광전사 클래스답게 저돌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공격.
그 뒤를 이어.
[고유 스킬 : 퀘이사]
[고유 스킬 : 소환 - 오베른]
각 후보 또한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가 더 강하고, 빠른지를 대결하려는 듯한 움직임.
광기 어린 공격에 몬스터의 피가 사방으로 튀고, 보스 방 전체에 흔적이 남는 그 화려하기 짝이 없는 토벌이 이뤄졌다.
[습득 스킬 : 정권]
그 가운데에서 한유빈만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스킬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는 인사 담당자와 심사관들.
하지만 내 반응은 조금 달랐다.
'저거 설마....'
한유빈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길 잠시, 어느샌가 토벌이 완료되었다.
거의 농락당했다고 봐도 무방한 몬스터와 엉망진창이 된 보스 방.
과제가 끝나기라도 한 듯, 한숨을 돌리는 후보들 사이에서....
"이슈 발생."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
실무 과제가 있기 하루 전, 본부장실.
서민철은 시험을 앞두고 신태환을 호출했다.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기보단… 내일 있을 시험, 내가 좀 도와줄까 해서."
서민철은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알아. 아는데... 김준우, 그놈이 영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서 말이지."
"해봤자 청소부...."
"신태환."
서민철의 다짜고짜 그의 말을 끊었다.
"어찌 됐든 그자도 심사관이다. 무엇보다 이번 채용이 끝나면 팀장 승진도 내정되어 있고. 경솔한 발언은 자제하도록."
"...알겠습니다."
신태환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심사관이기 전에 청소부가 아닌가.
청소부가 채용 심사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본부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무튼, 우리 입장에선 자네가 꼭 채용됐으면 좋겠어."
"자신 있습니다."
"아무렴. 아레스의 부 길드장이었는데. 토벌, 장비, 기획에 있어선 솔직히 다른 후보랑은 비교도 할 수 없겠지. 다만...."
서민철이 목소리를 팍 죽였다.
"문제는 청소야."
동시에 신태환의 눈이 꿈틀했다.
"김준우가 청소팀 과제를 만들었어. 아마 흉내 내는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그건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분명 저번에 명칭만 청소팀이지, 청소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맞아. 맞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채용 이후고. 지금은 시험을 보는 입장이잖냐. 나도 청소팀 과제는 빼고 싶었는데, 명분이 없어. 어쨌든 자네는 지금 청소팀 시험에 응시하고 있는 거니까."
신태환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 그것 때문에 부른 거니까."
신태환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표지에는 '청소팀 과제 가이드 라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김준우가 만든 청소팀 과제야. 뭐,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다른 놈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한번 미리 훑어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
신태환은 서류를 받아들곤 첫 장을 넘겼다.
"보다시피 청소팀 첫 이슈는 토벌이 끝난 다음이야. 그런데 뭐, 딱히 어렵진 않아."
신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청소팀의 작업이 늦어지는 관계로, 현 던전을 자체 청소해야 한다. 하지만 작전팀에 지원을 약속했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어떻게 청소를 진행하겠는가.
그것이 청소팀의 첫 이슈였다.
'딱, 지 수준이군.'
후보는 4명이나 있다.
아무리 청소를 해본 적 없다고 해도, 헌터가 4명이나 있는데 오래 걸릴 리가 없지.
신태환은 미소를 지었다.
***
"청소팀 이슈 발생."
나는 후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청소팀의 작업이 늦어지는 관계로, 현 던전을 자체 청소해야 합니다. 하지만 작전팀에 지원을 약속했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어째 신태환이 미소를 짓고 있다.
이전, 나에게 대놓고 도발을 하던 그때와 똑같은 표정.
나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또한, 토벌 진행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으므로, 홀로 청소를 진행해야 합니다."
"...?"
"그럼 한 분씩 먼저 나와 이슈를 해결하십시오."
어림도 없지 이 새끼야.
내가 설마 서민철한테 과제를 그대로 써서 냈을까.
다른 놈들은 몰라도 신태환만큼은 미리 받아보리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하지.
"빨리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20분 안에 작업 끝내시려면."
재차 이야기했지만, 다들 여전히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벌써부터 그렇게 넋이 나가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진짜 과제는 이제부터인데.
040
040
후보들은 서로 눈치를 볼 뿐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비는 여기 준비되어 있으니 원하는 대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시간이 계속 지체되면 감점 없이 바로 탈락입니다."
챙겨 온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보들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저기. 억지 부리지 마십쇼. 이걸 어떻게 혼자 치우라고?"
그때, 가장 크게 당황하고 있던 신태환이 애써 실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억지 같습니까?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인데요."
"이, 이거 정말 청소팀이 하는 일은 맞습니까? 과제 내려고 너무 갖다 붙인 거 아니에요?"
"이게 청소팀이 하는 일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 하면서 과제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바, 방에 튄 피랑 부산물까지 전부 치우라뇨. 그건 너무 과한 것 아닌가요?"
"그러게 왜 그렇게까지 전투를 벌이셨습니까. 조금 더 담백하게 토벌하셨으면 청소도 쉬웠을 텐데 말이죠."
대답하며 한유빈을 슬쩍 흘겼다.
다른 후보와 마찬가지로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그저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누가 봐도 집중하고 있는 눈빛이다.
보스 방과 부산물을 천천히 살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정도면 그냥 사람이 바뀐 수준인데....'
처음 후퇴를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 싶었다.
토벌을 진행하면서 연신 던전의 구조를 살필 땐,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조금 전의 밋밋한 전투를 보고는 확신이 섰다.
청소팀의 프로세서를 이해하고 있다.
'개중에서 그나마 구실은 하고 있다만....'
물론 이해만으론 부족하다.
실질적인 기술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현재 후보들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오우거의 사체.
화려한 전투로 인해 원래 형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남은 건 사방팔방에 튀어 있는 핏자국과 사체 조각들.
너무 조각조각 난 덕에 따로 해체할 필요도 없을 정도.
뭐, 어찌 보면 일이 하나 준 셈이지만… 문제는 부산물 청소다.
양도 양이지만 공기 중에 닿는 단면이 많아 벌써부터 가스가 방출되고 있다.
한 번에 최대한 많이 그리고 최대한 빨리 청소를 진행해야 한다.
결국, 이 과제의 핵심은 변칙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웬만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기술이 없다면....
"이딴 근본도 없는 걸 과제라고 내놓은 것부터 수준 알 만하네. 난 안 합니다.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지, 쯧."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신태환 씨는 포기한 거로 하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동 침묵.
표정들을 보아하니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
"한유빈 씨는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후보에게 물었다.
"…네?"
"한유빈 씨도 포기할 겁니까?"
"...."
예상대로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후보 전원이 과제를 포기했으므로, 시험은 여기서...."
"이 약품, 농도 맞춰져 있는 건가요."
"...예?"
"농도요. 60퍼센트 맞춰져 있냐고요."
불안감이 확 몰려오는 질문.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유빈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비된 장비에서 방호복을 집어 들더니, 조각조각 난 사체 위에 덮어씌운다. 공기 중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서 가스 방출을 늦추기 위한 작업이다.
그리곤 분사기를 이용해 보스 방 전체에 약품을 빠르게 도포. 그렇게 피가 녹아내리는 동안 사체 부산물을 모두 로프로 엮는다.
이후에는 곧바로 사방에 튄 피를 닦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한유빈은 청소를 마쳤다.
그녀는 사체를 줄줄이 엮어 놓은 로프를 어깨에 들춰 멨다.
"이대로 나가면 되나요?"
"...."
담담한 태도.
"...뭐, 뭐야?!"
"…저 사람도 헌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짓말 아니야? 담당자님, 인사 기록 확인해보셨어요?"
"당연하지. 여기 분명히...."
예상치 못한 결과에 심사관들과 인사 담당자가 수군대기 시작했다. 부쩍 던전이 소란스러워졌다.
경험, 기술, 지식.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당연히 며칠 공부 좀 했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도 겨우 일주일 만에!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숙달된 전문가가 직접 알려준 게 아닌 이상 절대....
'잠깐, 설마....'
- 그 사람들이 고생해주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 나머진 이제 저희한테 맡겨 주시고요.
- 나중에 감사 인사나 해둬요.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하니 다 같이 모여서 저 녀석한테 과외라도 해준 건....
'빌어먹을....'
악문 입에서 으득 소리가 났다.
대체 그 녀석들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건가.
애초에 이번 시험으로 후보 전원을 탈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유빈 혼자 과제를 해결해버리면... 그녀를 뽑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젠장, 어떡하지.
이번엔 뒤집어엎고 싶어도 저번과 같은 명분이 없는데....
"참 나, 이거 너무 대놓고 밀어주는 거 아닌가?"
그때 신태환이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딱 봐도 말도 안 되는 걸 과제라고 내놨는데, 유일하게 당신 후보만 그걸 해결한다고?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당신이 미리 알려준 거 아니야?"
"...어,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가만히 안 있지. 이거 엄연히 채용 비리야. 심사관님들도 설마 저걸 인정해주실 건 아니겠죠?"
눈부시다.
신태환이 너무 눈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다.
그래, 잘하고 있어.
이대로 조금만 더 힘내서....
"병신새끼."
"...뭐?"
...?
"…너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자기가 못 하는 일이라고 비리니 뭐니 주절거리는 거 안 쪽팔려?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었으면 공부라도 좀 하지 그랬어."
뭐, 뭐야.
한유빈 쟤는 갑자기 왜 지랄이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여기서 푸쉬 안 받은 놈 누가 있어? 저기 덜떨어진 두 명은 임원들 후보라는 거 하나 믿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것 같고. 당신도 본부장한테 미리 정보 좀 받은 것 같던데?"
"저, 저기 한유빈 씨? 그, 말을 좀 가려서...."
"이런 시발, 진짜 년놈들이 쌍으로 쳐 돌았구나?"
"아니,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황급히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말이 먹힐 분위기가 아니다.
신태환은 진심으로 열이 뻗치고 있었고, 한유빈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본인 능력이 수준 미달이니까 어쭙잖은 길드에서 길드장으로 승급도 못 하고 나왔겠지. 아… 혹시 잘린 건가?"
잘린 본인이 할 소린가?
"이 씨발, 밖에선 눈도 못 마주칠 년이....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신태환의 표정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리곤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동안 몬스터 몇 마리 잡았다고 나랑 동급으로 보이냐?"
[고유 스킬 : 광분]
어지간히 빡이 돌았는지 스킬까지 발동시킨다.
버서커 클래스의 전매특허인 붉은 기류가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 아레스 부 길드장.
A랭크. 국내 광전사 클래스 중 1위.
참으로 칭호에 걸맞은 감정 컨트롤이 아닐 수 없다. 무슨 다 큰 어른이 시비 좀 걸렸다고 시험 중에 무기를 빼 들어.
...물론 다짜고짜 쌍욕부터 내뱉은 사람이 잘못이긴 한데.
'뭐, 그건 둘째 치고라도....'
측은한 표정으로 신태환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서민철이 중요한 걸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 본인에게 쌍욕을 박은 저 여자가....
"당신, 내가 왜 전 직장에서 잘린 줄 알아?"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전 국제 협회 미국 지부 소속 헌터.
전 미국 지부 작전 4팀장.
세계 랭킹 152위.
"능력도 없는 주제에 말만 많은 새끼들 턱을 죄다 부숴놨거든."
세계 광전사 클래스 1위의 진또배기 미친년이라는 걸.
이윽고 신태환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붉은 기류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
신태환의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느낀 듯했다. 자신과는 급이 다르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앗―.
이를 악물고 그가 다짜고짜 한유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두 미치광이가 맞닿았다.
쾅―!!!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거센 파동을 일으켰다.
그곳에 있던 인원들도 예상치 못한 그 충격에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두 미치광이가 맞붙어서 생긴 충격은 아니었다.
[시전자를 향한 공격 감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현 시간부로 전투태세에 돌입합니다]
격돌하기 직전, 내가 양쪽의 손목을 낚아채며 사이로 끼어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대판 싸움이 벌어졌을 거다.
"...!"
"...?!"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눈에 힘을 바짝 준 채로 양측을 번갈아 봤다.
"시험이 장난입니까. 심사관들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추태죠?"
"...."
"...."
"다들 여기까지만 하십쇼.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한유빈을 슬쩍 흘기자, 그녀의 눈이 상당히 동그래져 있다.
놀란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본인의 주먹을 붙잡은 내 손이었다.
'...? 이 자식 봐라.'
그런데 어째 주먹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참 나, 나름 클래스 1위라고 자존심은 있다, 이건가.
살짝 자존심을 눌러줄 생각으로 나 또한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윽!"
...버틴다고?
내 힘을?
'미친년… 대체 근력 스텟에다가 뭔 짓을 한 거야.'
근력 스텟이 특출난 건 아니지만, 웬만한 헌터에겐 밀린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꼴에 국제 헌터 출신이라 이건가.
보이지 않는 힘이 부딪치며 핏줄이 더욱 팽팽해졌다.
그렇게 소리 없이 서로 노려보며 힘 싸움하길 얼마가 지났을까.
"...알았어요, 알았어. 그만할게요."
한유빈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저항은 해봤지만, 스킬의 효력이 다 떨어지자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신태환 씨도 무기 내려놓으세요. 더 이상하면 바로 탈락입니다."
신태환 또한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을 거뒀다.
"시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더 진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뭐, 더 볼 것도 없고."
상황이 종료되자 곧바로 등을 돌려 던전을 빠져나갔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긴 했어도 생각대로 되었다.
***
시험이 끝났음에도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심사관들과 인사 담당자는 던전을 나오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서민철과 대화를 나눴다.
덩그러니 버려진 후보들은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다가 이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서 있던 한유빈 또한 나를 한번 슬쩍 흘기곤 이내 등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천천히 멀어지는 등에 대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네, 네?"
"사과받으러 왔다면서요. 저번 면접 때 일은 제가 경솔했습니다."
"...."
면접 때 태도를 문제 삼았긴 했어도, 오늘 보여준 모습은 한 치의 오류도 없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아, 아니 사실… 당신 동료가 도움을 조금...."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든, 결국 과제를 수행한 건 한유빈 씨 본인이잖습니까. 어쨌든, 본인에게 배우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거겠죠."
"뭐, 뭐… 네...."
정말 사과를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꽤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물론 오래가진 않았다.
"알았어요. 사과는 받아줄게요.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것도 아니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날이 선 목소리다.
"...채용엔 관심 없다는 건가요."
"말했잖아요. 전 그냥 당신한테 사과받으러 온 거라고. 뭐… 애초에 그 지랄을 했으니 합격은 물 건너갔을 거 아니에요."
"뭐, 알겠습니다. 본인 뜻이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금 멀어지는 한유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가 뭔데 이러겠다 저러겠다야.
041
041
채용 심사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이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백수 생활로 돌아왔지만, 한유빈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자꾸만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김준우에게 사과를 받아낸 것까진 좋았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참석한 거니까.
다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시험 중에 왜 화를 낸 건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태환의 개소리에 기분이 나빴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봤자 청소 시험.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진 없었다.
거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대체 뭐야 그 인간....'
한유빈은 그때를 떠올리며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한유빈의 근력 스텟은 '한계돌파' 스킬로 인해 최대치를 한참 상회하는 수치를 자랑했다.
물론 근력에만 올인한 덕에 다른 수치는 B급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힘만큼은 미국 지부에서도 단연 1위의 스텟이었다.
게다가 고유 스킬인 '하이패닉 버서커'까지 발동된 상태.
당시의 근력 스텟은, 짧은 순간 몇만을 돌파했었다.
그런데, 그걸 한 손으로 막았다.
막는 걸 넘어서 순간적으로 압도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순수하게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 헌터?
물론 있기는 하다.
세계 랭킹 50위 안에 들어 있는 최상위권 헌터 몇 명.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큰 길드의 우두머리이자, 현 세계 랭킹 1위인 그 자식.
그렇게 모두 포함해봤자 열댓 명 정도다.
근데 헌터도 아닌 청소부가 그 열댓 명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대체 그런 인간이 왜 한국에 있는 건가.
아니, 그걸 떠나 그런 인간이 왜 청소팀에 있는 건데?!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괜히 본부 실세라고 하는 건 아닌가 보네.'
능력은 있다 이건가.
한유빈이 쓰게 웃었다.
습관적으로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털었다.
그래,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것도 아닌데.
과정이 어찌 됐든 소정의 목표는 이뤘으니 합격 여부 따윈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떨어지지 않으면 곤란하다.
모든 게 미심쩍은 그 인간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으니.
지지잉.
그때,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모르는 번호다.
한유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능차원관리협회 이능운용과 청소 6팀 최종 면접에 합격하셨습니다. 귀하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출근 일자는 추후...」
"...."
이내 빌라 전체에 귀를 찢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
[해금 조건 달성]
[던전 청소팀 신규 입사자 1명]
[습득 스킬 : 과다출혈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김민주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채용 심사 합격자가 발표된 직후, 나는 작전 2팀 사무실을 방문했다.
심사 기간 동안 밀린 청소 작업을 위해 작전팀의 일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화는 어느샌가 삼천포로 빠진 뒤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게 다 보였는데요?"
"첫인상은 달라지는 법이니까. 지금은 나름 만족해."
김민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실하신 분 같던데요. 아마 바로 현장에 투입해도 잘하실 거예요."
"잘해야지. 그러라고 뽑은 건데."
담담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한유빈을 최종적으로 밀어주었다.
다른 심사관들은 영 탐탁지 않아 했지만… 사실 그들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실무 과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건 사실이니까.
불안한 구석이 있긴 해도, 일주일간 청소를 배워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점을 높이 샀다.
성격이 좀 삐뚤어지긴 했어도 능력만 있으면 어느 것이든 시킬 수 있을 테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은 잘할 거 같은데… 성격이 상당히 지랄 맞아서 사고 칠까 봐 좀 걱정이야."
애초에 미국 지부에서 해고까지 당한 녀석이 아닌가.
자세한 건 몰라도 그 성질에 뭔 일이든 벌였을 거다.
"글쎄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특히 선생님한테는요."
"…음? 무슨 소리야."
"아, 유빈 씨가 선생님한테는 말 안 해줬나요?"
김민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과외 해줄 때 저희한테 슬쩍 얘기해줬거든요. 본인이 왜 지부에서 해고당했는지. 뭐, 사실 저희가 얘기해 달라고 조른 거긴 하지만요."
"그래서, 뭔 일이 있었던 건데?"
"미국 지부에서 일할 때 유일했던 동료가 필리핀 출신의 헌터분이셨대요. 도움도 많이 받고, 심적으로도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다던데...."
김민주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사망했대요. 작전 중에."
이상하다. 미국 지부라면 헌터의 사상자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이 아니던가. 던전 내 사망사고라면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일 텐데.
"한유빈 씨 말로는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대요. 그런데 통제팀에서 구조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며 일방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고, 한유빈 씨는 혼자라도 구조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나 봐요."
"국제 협회는 동료가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걸고라도 구하라고 하는 곳이잖아. 그럼, 구조를 포기했다는 건...."
김민주가 쓰게 웃었다.
"뭔가 구린 게 있었나 보죠."
"...허."
참으로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인간이 모이면 꼭 뒤가 구리다더니. 그건 국내나 해외나 다른 게 없구만.
"한유빈 씨는 미국 지부 임원들에게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묵살됐나 봐요. 그 후로는 뭐, 통제팀에 쳐들어가서 언쟁을 벌이던 중에 통제팀장한테 주먹을 날렸다고...."
"참 나, 잘릴 만했네."
동기는 이해가 되지만 방법에는 한숨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들어오면 잘 대해주세요. 상처가 많은 분이잖아요."
"됐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잘 대해주면 오히려 더 싫어할걸. 동정받는다고 생각할 테니까."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니 더욱이 말이지.
하지만 그런 건 일단 둘째 치고라도.
'...받지 말 걸 그랬나.'
차라리 욱해서 사고를 친 거면 그 녀석 한 명만 조심하면 될 텐데, 생각보다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이거 어째 더 불안해지네.
"...뭐, 괜찮겠지. 어쨌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일단은 우리 일이나 신경 쓰자고."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난 뭐 노냐. 이번 채용 심사 때문에 며칠 자리 비웠더니 작업 엄청 밀렸어."
"아, 선생님."
김민주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왜."
"승진 축하드려요."
싱긋 미소를 지었다.
***
국제 헌터 협회, 미국 뉴욕 지부.
던전 통제팀, 작전 지휘실.
뉴욕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 사무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남성이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쿵, 소리와 함께 창문이 흔들렸다.
제 주먹만 아플 뿐이었지만, 제이슨 통제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체 작전 파일이 왜 남아 있었던 거야! 내가 바로 폐기하라고 했잖아!"
"통제팀 쪽 데이터는 확실하게 삭제했습니다. 아무래도 작전팀 쪽에 복사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원팀의 클로이 실장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늘씬한 몸매에 똑 떨어지는 금색 단발.
지부 소속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모델로 착각할 법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그 파일이 언론에라도 뿌려지면 모가지 날아가는 거로는 안 끝난다고!"
제이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클로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시발, 나갈 거면 곱게 나갈 것이지...."
제이슨의 시선이 다시금 창밖으로 향했다.
그의 분노는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이 지휘를 맡았던 그 작전에서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사고. 그로 인해 헌터 한 명이 낙오해 홀로 보스 방에 남겨졌다.
한은 그 필리피노 헌터를 구하기 위해 지원 병력을 투입해달라고 했지만, 제이슨은 요청을 묵살했다.
해당 던전의 추산 이익과 병력 투입의 예산을 저울질해본 결과,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동안 토벌 수익의 상당 부분을 본인의 지갑으로 빼돌리고 있었던 제이슨에게, 필리피노 헌터 한 명과 수억 원대의 비자금은 재볼 가치조차 없었다.
결국, 그 필리피노 헌터는 목숨을 잃었지만 사실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상부에서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뿐더러, 보고서 조작은 제이슨의 주특기였으니까.
제이슨은 당시 정황들을 조작해서 구조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조서를 상부에 제출했다. 덕분에 협회 또한 더는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던전 내 사고'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한이 미쳐 날뛰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제이슨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였던 그년을 내쫓을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준 셈이었으니.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한이 지부를 나가면서 통제팀 쪽 원본 작전 파일을 들고 나가기 전까지는.
그 파일이 공개되면 사고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작, 로비.
무엇보다 그동안 자신이 작전 수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 또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시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회수해."
제이슨이 이를 빠득 갈았다.
"협상이라도 해볼까요?"
"그 성격에 협상이 먹히겠냐."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뭘 어떡해. 힘으로라도 뺏어와야지."
클로이가 흠칫했다.
"...설마 습격이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다른 나라에서 일을 벌이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클 텐데요. 무엇보다 한이 그런 거에 당할 사람도 아니고요."
"...."
제이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맞는 말이었다.
자칫 목격자라도 생기면 괜히 일만 커질뿐더러, 도심에서의 무력 충돌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무엇보다 비밀리에 처리해야 하는 만큼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젠장, 마땅한 방법이 없나.
"...근황은 파악되나?"
"네. 정보팀 쪽 얘기로는 내부 전산망에 프로필이 다시 등록된 거로 보아 다시 협회에 입사한 것 같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야. 헌터 자격 정지됐잖아."
"그게… 프로필상 소속이 작전팀이 아니라 청소팀이랍니다."
"...뭐?"
홀리… 제이슨은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 미친년이 왜 청소팀으로 들어간 거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클로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문득 제이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잠깐. 협회에 다시 들어간 거면… 한국 협회?"
"네. 맞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다음 주에 한국 협회에 합동 작전 제안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거 어떻게 됐어."
"루프 던전 건 말씀이시죠? 아직 연락은 안 해봤습니다."
"빨리 연락해봐. 그리고… 작전 무조건 따내."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고 있었다.
뭔가 불안해진 클로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말했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수할 거라고."
제이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마침 머릿속에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참이었다.
042
042
한유빈이 정식 채용된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그사이 예정되었던 청소팀 내부에 소소한 개편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건 박근태 팀장의 승진.
청소과장이라는 상당히 미묘한 직책이었지만, 그럼에도 박 팀장은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청소 3팀원들과 김민주, 이아영이 모여 작은 축하연을 열어 주었고 박 팀장… 아니, 박 과장은 꽤나 감격스러웠는지 기어이 눈물까지 보였다.
그렇게 박 과장은 본부로 갔다.
그를 대신하여 나는 청소 3팀의 새로운 팀장이 되었다.
뭐, 사실 말이 팀장이지 하는 일은 이전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무엇보다 잡다한 행정 업무가 청소과장에게 위임되어, 하는 일이라곤 고작 해봐야 전체 청소팀 스케줄을 조정하는 정도였다.
"김준우! 약품 만들어 오냐?! 벌써 부패 시작했다고!"
"준우 씨, 몬스터 사후경직이 너무 심해서 칼이 안 들어가요. 일단 해체 먼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저 새끼 저거, 팀장 되고 감 다 잃었네."
물론 청소 작업도 병행하면서.
...근데 저것들은 왜 아직도 호칭이 저래.
청소팀은 위아래도 없어?
"아, 김준우! 빨리!"
"준우 씨!"
"저 개새... 간다, 가."
아무튼, 이런 실정이다.
직책이 생겼으니 해금 조건을 달성하기가 조금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팀장이라고 해봐야 결국 청소부.
내 선에서 본부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봤자, 내가 편한 대로 일정을 조정하는 정도?
그 순간, 말하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울렸다.
통제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예, 편 팀장님."
「지금 남태령 쪽에 던전이 출현했는데, 저희 쪽 정보로는 정산 시즌에 발생했던 미완성 던전인 것 같습니다. 작전팀이랑 청소팀이 같이 투입돼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바로 투입 가능한 팀이 있을까요.」
"잠시만요."
곧바로 모든 청소팀 일정을 정리해둔 수첩을 꺼내 들었다.
"흠... 당장은 비는 팀이 없네요."
「이거 일 났네… 그럼 작전팀이라도 우선 투입해볼까요.」
"아뇨. 그랬다간 두 팀 다 일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죠."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고는 며칠 새 외워버린 번호를 눌렀다.
짧은 연결음.
이윽고 건너편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빈 씨. 지금 바쁩니까?"
「방금 작업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는 중인데요.」
"아, 마침 잘됐네요. 지금 왕십리에 마지막 미청소 던전 출현했답니다. 빨리 가서 토벌을 좀...."
「아니! 대체 작전팀은 뭐 하는데 왜 자꾸 토벌을 우리한테 시키는 거예요?! 우리가 만만해?! 만만하냐고!」
"토벌이랑 청소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팀이 그쪽 팀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미청소 던전이잖습니까. 저희도 끝나는 대로 지원 나갈 테니까. 일단 토벌이라도 먼저 해주십쇼."
「....」
"아, 됐습니다. 제가 그쪽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봅니다. 못 하겠으면 그냥 다른 팀을 보낼 테니...."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가면!」
뚝―
결국, 할 거면서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시작부터 말이 많았던 청소 6팀.
한유빈은 그곳의 팀장으로 채용되었다.
뭐, 나름 작전팀장까지 맡았던 경력직이니 그 정도 대우야 당연하겠다만… 그래 봤자 이젠 내 추천으로 들어온 신입일 뿐.
같은 팀장이어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었다.
요 일주일간 까다롭다 싶은 던전을 전부 한유빈에게 떠넘겨버렸다.
지금처럼 작전과 청소를 병행해야 할 땐 이만한 팀이 없었다. 두 팀이 해야 할 일을 한 팀이 해주니 우리 입장에선 일이 반으로 준 셈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해금 조건 달성]
[던전 청소팀 직업 만족도 30% 이상]
[습득 스킬 : 레플리카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청소팀의 만족도가 급상승하며 생각지 못한 해금 조건도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가 편해지는 만큼 본인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내가 알 게 뭔가.
다시 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편 팀장님. 지금 청소 6팀 먼저 보냈습니다. 출동 가능한 작전팀 있으면 바로 지원 붙여주시고요."
"네네. 그리고 더 이상의 작업은 청소팀한테 무리가 가니까, 오늘 작전은 미청소 던전까지만 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나머지 작전팀은 모두 철수시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곤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해금 조건을 달성하기에는 부족한 직책이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괜찮다.
하기 싫은 일은 몽땅 떠넘기면 되고, 편한 대로 일정 조정할 수 있다. 사람 굴리는 맛도 있고.
'덕분에 막차 놓칠 일도 없어졌네.'
***
통제팀, 작전 기획실에서 열린 작전팀 정기회의.
편창현 통제팀장을 비롯한 모든 작전팀장은 기다란 타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다음 주 작전 계획을 확인했다.
하지만 서류를 살펴보는 팀장들의 표정은 어째 하나 같이 불만이 가득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건지, 쯧."
그때, 추지연―작전 4팀장이 참다못해 서류를 탁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편 팀장, 이게 정말 맞다고 생각해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요? 작전이 죄다 청소팀 일정에 맞춰져 있는데, 무슨 문제냐고요? 어이가 없어서 진짜."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추지연의 발언에 눈치를 보고 있던 팀장들 또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합동, 협력 다 좋은데 결국 1순위는 토벌 아닙니까? 이렇게 다른 팀 사정까지 맞추려고 하면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겠습니까?"
"김준우가 청소팀장 단 이후로는 지들 힘들다고 통째로 작업 스탑 걸지 않나, 작업 딜레이 생긴다고 연속 작전은 아예 막아버리질 않나.... 이러니 작전 효율이 계속 떨어지지."
"편 팀장님이 라인 갈아 탄 거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는데, 이건 좀 아니죠. 지금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한테 맞춰주지는 못할망정,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작전 3팀장, 5팀장, 8팀장이 차례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와중에 김민주―작전 2팀장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청소팀 일정에 맞춘 건 아니고요… 당연히 작전팀이 우선이죠. 우선이긴 한데.... 청소팀 일정도 고려해서 각자에게 너무 무리한 일정은 지양하자는 겁니다."
편 팀장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작전팀장들의 불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청소하라고 만든 팀인데 당연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그쪽 일정을 왜 신경 써줘야 합니까? 외부 사람들이 보면 작전팀을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위상도 떨어지고, 작전팀 위상이 떨어지면 협회 이미지도 떨어질 텐데?"
"언제부터 협회가 이렇게 위아래도 없는 조직이 됐죠?"
사실 말이 정기회의였지, 실상은 거의 불만 토로의 현장이었다.
"이게 다 김준우 그놈 때문이에요. 아주 협회가 자기 건 줄 안다니까?"
"아무리 빽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작전팀을 청소팀에 맞추려는 건 문제가 있는 거죠."
"하여간 능력도 없는 놈을 팀장으로 앉히니까, 이 꼴이 나는 거 아닙니까."
비난의 화살이 김준우에게 직접 향하자 김민주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들 불만이 많으신 건 알겠어요. 하지만 좀 치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작전 효율이 떨어진다고요? 이번 주 작전 결산 보고서 확인 안 하셨나요?"
"뭐?"
"김민주 팀장! 지금 네가 우리랑 같이 앉아 있다고 동급인 줄…!"
김민주는 말을 끊으며 준비해뒀던 결산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토벌 던전이 저번 달 대비 30%가 올랐습니다. 거의 정산 시즌과 맞먹는 수치죠. 이런대도 효율이 떨어진다는 말씀은... 다들 이 정도 실적은 가능하시다는 뜻이겠죠?"
"이봐, 김민주!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이수용 팀장님, 이번 주 총 작업한 던전만 100개인데, 그중 이슈가 발생한 던전은 몇 개죠?"
"...."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한 건도 없었으니까. 정산 시즌도 아니고, 평시에 30% 실적 상승. 그런데 접수된 사고는 0건. 물론 다들 이 정도는 가능하시겠죠?"
팀장들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작전팀, 청소팀 그리고 지원팀까지 수십 개 팀의 일정을 맞춰서 이 정도로 완벽한 효율을 뽑아내는 사람한테 능력이 없다니. 그거참 웃기는 말이네요."
회의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사실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고작 해봐야 청소팀장이 이 정도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건, 마음에는 안 들어도 결코 실력으로는 깎아내릴 수가 없다는 걸.
그래서 더 싫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 누구도 김준우만큼의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건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해는 합니다. 팀장님들 입장에선 탐탁지 않으시겠죠. 이전까진 찍소리도 못하고 하라는 대로만 해왔던 청소팀이 이제는 작전팀이랑 같은 위치가 됐으니까."
김민주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건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 협회에 작전팀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조직에 있는 팀끼리 서로 합을 맞추자는 게 대체 뭐가 문제죠? 애초에 그게 정상 아닌가요?"
정곡이었다.
물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최소한 이 자리에는 없었다.
팀장들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아, 아무튼! 이런 일정, 저는 인정 할 수 없습니다."
3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쯧, 우리가 없어 봐야 정신 차리지."
"그러니까 말이야!"
"정 이대로 진행하고 싶으면 김민주 팀장 혼자 하시던가!"
"...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김민주는 당황했다.
한편 팀장들의 표정은 다시금 활짝 펴지기 시작했다.
"그거 좋네. 그렇게 청소팀이 좋으면 김민주 팀장 혼자 맞추세요. 우리 팀은 다음 주 작전 참가 안 하려니까."
"5팀도 빠지겠습니다."
"8팀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다음 주 작전 다 같이 빠지죠? 보아하니 우리 없어도 아주 잘하실 거 같은데."
"그, 그게 무슨...."
당황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작전팀장이라는 놈들이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다.
"다음 주에 루프 던전도 열린다면서요? 작전팀 하나로 되려나 몰라."
"오히려 좋겠네! 루프 던전 수익금 혼자 다 먹을 수 있어서!"
"그럼 그렇게 아시고, 저흰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무튼, 혼자서 잘해보슈."
딴소리 못 하게 하려는 건지, 팀장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김민주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아무리 빌어먹을 놈들이라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작전팀 하나로 루프 던전을 토벌하라고?
그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루프 던전은 위험부담이 큰 만큼 기대 수익도 어마어마한 던전이다. 그런 곳을 저 욕심쟁이들이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다.
저들은 루프 던전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다.
도움받고 싶으면 일정을 뜯어고치라고.
'개 같은 새끼들....'
"저… 회의 중에 죄송한데요. 미국 지부에서 전화 왔습니다. 편 팀장님 바꿔 달라는데요?"
그때 황동휘 대리가 벌컥 회의실로 들어왔다.
"미국 지부?"
동시에 서둘러 회의실을 나가려던 팀장들의 시선이 편 팀장에게로 쏠렸다.
043
043
"예, 전화 바꿨습니다."
편 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리곤 능숙한 영어로 통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예예. 안녕하십니까."
"아뇨. 본부장님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예, 제가 전임자긴 한데...."
"글쎄요. 저희 쪽 일정을 조정하는 분이 따로 계셔서 제가 독단으로 판단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그분한테 한 번 연락해보시겠습니까."
이윽고 통화를 마친 편 팀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뭡니까?"
"왜 갑자기 미국 지부에서...."
팀장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마치 부모님이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루프 던전, 서울 본부와 합동 작전으로 진행하고 싶은데, 참가 가능한 작전팀 있냐고 물으시네요."
"...?"
"...뭐, 뭐요?"
"마침 이야기가 마무리돼서 다행입니다. 다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니… 작전 2팀을 참가시키겠습니다."
그 순간, 팀장들의 표정이 잿빛이 되었다.
이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 어...."
"그...."
"음? 왜들 그러십니까? 미국 지부가 낀다니까 갑자기 일정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제야 팀장들은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자, 모두를 대표해 이수용 팀장이 나섰다.
"당연히 약속대로 작전 2팀이 참가해야겠죠. 그런데 그… 어려운 던전이니만큼 작전 기획을 맡아줄 총 책임자가 따로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편 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의도야 뻔했다.
이대로는 정말 2팀으로 홀랑 넘어갈 것 같으니, 어떻게든 총 책임자라도 맡아서 발이라도 담가보려는 심산.
"알겠습니다. 그럼 작전 총 책임자는 김준우 팀장님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어림도 없었다.
편 팀장이 바라보자 김민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대충 얘기 끝난 것 같으니까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망부석이 된 팀장들을 뒤로하고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이제 어떻게 합니까?"
작전 1팀 사무실.
보좌관, 류승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수용 팀장은 대답 대신 손톱을 물어뜯었다.
작전팀장들에게 보이콧을 선언하자고 선동한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원래 계획은 루프 던전 보이콧을 이용해 주도권을 찾으려던 건데... 난데없이 미국 지부에서 합동 작전 제안이라니.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다른 작전팀장들의 원성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시발,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이수용 팀장이 학을 뗐다.
보이콧 얘기를 꺼냈을 땐 다들 좋다고 박수 치더니, 수틀리니까 바로 물고 뜯고 지랄들을 하고 있다.
"이해는 됩니다. 루프 던전이잖아요. 던전 수익은 그렇다 쳐도 떨어지는 아이템도 장난 없잖습니까."
"누가 몰라? 그렇다고 이제 와서 참가시켜 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아오, 시발 진짜...!"
되는 새끼들은 뭘 해도 된다더니.
이수용 팀장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그나저나 본부장님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어디 계시는 겁니까. 본부장님이 계셨으면 이렇게까진 안 됐을 텐데요."
"듣자 하니 지방 돌아다니면서 지부장들이랑 이사들 만나고 있다더라."
류승민 보좌관의 눈썹이 물결을 쳤다.
"...갑자기 왜요?"
"나야 모르지. 이번 총회 끝나자마자 지방 내려간 거 보면 뭔 이야기가 나온 것 같긴 한데...."
이수용이 작게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뭐, 김준우는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팀장을 달지, 청소팀은 계속 치고 올라오지. 그나마 유일한 견제 수단이던 청소 6팀은 죽 쒀서 개 줬지. 똥줄 타니까 구조요청이라도 하고 싶나 보지."
이수용은 알게 뭐냐는 듯한 말투였다.
실제로 요즘 라인을 잘못 탄 건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더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이수용은 고개를 털었다.
"아무튼, 이번 합동 작전 거나하게 사고나 터졌으면 좋겠네, 시발."
"미국 지부가 꼈는데 사고가 날 리 없죠. 그리고 뭐, 일 터지면 본부도 골치 아파지지 않겠습니까."
"나도 알아 새끼야. 해본 소리야."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뭐야. 토벌 이제 끝났습니까?"
미청소 던전.
약속대로 한유빈을 지원해주기 위해 들어서자, 청소 6팀원 전원이 상당히 지친 모습으로 맞이했다.
"아니, 전직 국제 헌터라는 사람이 블루 등급 토벌하는데 이렇게 힘들어합니까?"
"...어이가 없어서, 진짜."
한유빈이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도와주기라도 하고 그런 말 하시죠? 일은 우리가 다 하는데, 와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참...."
"그러게 누가 고유 스킬 쓰지 말랍니까? 본인이 굳이 안 쓰고 토벌한 걸 왜 저한테 화풀이입니까."
"하, 진짜... 엥?"
갑자기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뻔하잖습니까. 당신 클래스가 광전사인데, 고유 스킬을 썼으면 몬스터 사체가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죠."
놀랄 것도 많다.
"아니… 사체가 엉망이 되면 청소가 힘드니까...."
"그건 시험 때나 얘기고, 실전에서는 토벌이 무조건 우선입니다."
참 나, 전직 국제 헌터에게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줘야 한다는 게 유머네.
"물론 조절할 여건이 된다면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효율을 따져야죠. 청소 때문에 토벌이 힘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어쨌거나 협회 1순위는 던전 토벌인데."
"뭐야… 당신 청소팀 편 아니었어요?"
"편? 참 나."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일에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습니까. 피차 뺑이 치는 입장인데."
"...."
어째 의외라는 얼굴이다.
그런 거 따질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아직 몸이 덜 힘든 모양이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네, 네."
"그럼 식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요 앞에 청소 작업 하나만 하고 가십쇼. 여긴 제가 청소하겠습니다."
"...."
방금 입 모양으로 욕한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미심쩍은 표정으로 걸레를 집어 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갑자기 들려오는 외국어.
"...누구시라고요?"
집중해서 듣자니 작업하면서 받을 전화가 아니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아, 잠시만요."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막 떠나려는 한유빈을 불러 세웠다.
"저 급한 전화가 와서 나가봐야겠습니다. 여기 청소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번엔 확실하게 욕이 날아들었다.
거참 성질머리하고는.
"예, 이제 통화 가능합니다."
애써 무시한 채 던전을 빠져나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미국 지부에서 무슨 볼일이시라고요?"
「이번에 서울에서 루프 던전이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루프 던전은 북미권에서는 잘 출현하지 않는 던전이라, 경험을 쌓기가 매우 힘들죠. 그래서 합동 작전을 제안 드리고 싶은데, 책임자와 얘기해보라고 이 번호를 주시더군요.」
발신자는 국제 협회 미국 지부 소속의 통제팀장이었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침착하게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여보세요. 듣고 계십니까?」
"아, 예. 듣고 있습니다. 하, 루프 던전 말씀이시죠...."
머릿속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루프 던전.
보스 몬스터를 특정 조건에 맞춰 토벌하지 않으면 토벌 전 시간대로 되돌아가는 특수 던전.
기억상으로는 분명 이맘때 신림동에서 루프 던전이 열렸다.
「아시다시피 상당히 고난도의 던전인데, 아무래도 지금 한국 협회 수준으로는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경험을 쌓고 당신들은 도움을 받고. 서로 윈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흐음...."
틀린 말은 아니다.
루프 횟수는 무한.
한 마디로 같은 시간대 안에서 토벌 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무한히 토벌을 진행해야 한다는 소리다.
나조차 전생에선 이 루프 던전을 토벌하기 위해 100회가량 같은 던전을 반복했다.
이게 얼마나 지옥 같은 짓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그러니 저쪽에서 먼저 합동 작전을 제안해준 건 우리 입장에선 꽤나 고마운 일이다.
...라고 생각했던 회귀 전 내가 병신이었다.
'이 새끼들은 여전히 양아치네.'
그렇다.
회귀 전에도 루프 던전 출현을 앞두고 미국 지부에서 똑같은 연락을 받았었다.
그리고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경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참가한 미국 지부는 루프 던전에서만 나오는 아이템, '시간석'을 본부 몰래 빼돌려 미국으로 돌아갔다.
협회의 입지를 다지는 데 있어 너무나 중요한 아이템이었기에 당연히 본부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나도 협회장에게 엄청 깨졌었지.
미국 지부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국제 협회가 독립 협회의 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작전 기획도, 총괄도 전부 서울 본부가 맡았지만 결국 우리가 얻은 거라곤 쪼개고 쪼갠 몇 푼짜리 수익금뿐.
'시발.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어찌 됐든… 몰라서 속았지 이미 속셈을 다 알고 있는 이상, 이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이번 작전은 저희 쪽 힘만으로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
갑자기 핸드폰 너머가 소란스러워진다.
「무, 물론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보답이라고 하긴 뭐합니다만, 저희 쪽에서 이번 작전에 들어가는 예산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
「원하신다면 개인 계좌로도 입금해드릴 수 있는데....」
돈을 준다고?
전생에선 이런 조건은 없었는데.
게다가 개인 계좌라니.
대놓고 한 주머니 찔러 주겠다는 거잖아.
참 나, 청소부한테 로비하는 꼴이라니.
그까짓 돈 몇 푼에 그 개 같은 일을 또 당하라고. 어림도 없지.
"예상 금액이 얼마나...."
「백만 달러.」
"...."
10억?
자, 잠깐! 생각보다 괜찮잖아.
시발, 이걸 잡아 말아?
"후우.... 죄송합니다. 역시 힘들 것 같네요."
순간 흔들렸지만, 거절했다.
스킬 해금만 아니었으면 꽤나 혹할 돈이다.
하지만 저걸 받아버리면 현재 상황에서는 협회를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자, 잠깐만요! 얼마를 원하십니까?!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이것 참.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순간, 통화 중에 문자가 도착했다.
김민주한테서 온 연락이다.
- 선생님, 통화 중이셔서 문자로 남겨요.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주 루프 던전 말인데요. 다른 작전팀장들이 보이콧을 해서 저희 팀만 참가하게 됐어요. 총 책임자는 선생님으로 정해졌고요. 그래도 다행히 미국 지부에서 합동 작전 요청이 와서 어떻게든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자 보시면 연락 한 번....
너무 장문이었기에 빠르게 눈을 굴려 핵심만 읽었다.
'아오 시발....'
곧바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팀장들의 보이콧에 작전 2팀의 단독 참가 그리고 내게 위임된 총 책임자 자리.
대체 정기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젠장, 이렇게 되면 마냥 거절할 수가 없는데.
'쯧, 어쩔 수 없나.'
"알겠습니다. 합동 작전으로 진행하도록 하죠."
「받아 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루프 던전이라 청소팀과 같이 작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예산 때문에 청소팀까지는 파견하기가....」
"걱정 마세요. 마침 딱 맞는 팀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빠른 시일 내에 뵙겠습니다.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입니다. 준우 김."
통화를 종료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수첩을 펼쳐 청소팀 일정을 확인했다.
'다음 주 청소팀 작업을 조금 미뤄두고… 나랑 6팀이 참가하면 얼추....'
잠깐.
문득 불길한 기운이 스쳤다.
생각해보니 미국 지부면 한유빈의 전 직장이지 않은가.
이거... 한유빈을 참가시켜도 되나?
"...."
그래, 나름 국제 협회 지부인데 설마 일 좀 있었다고 해코지라도 하겠는가.
괜찮겠지 뭐.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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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아시안 놈들."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제이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도와주겠다고 하면 덥석 받을 것이지, 왜 이렇게 튕겨."
협상은 영 껄끄럽게 끝났다.
설마하니 상대가 거절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파일만 아니었으면 주제도 모른다며 욕이라도 박았을 텐데, 그러기엔 지금 본인 상황이 무척이나 절박했다.
'살다 살다 독립 협회한테 로비를 하게 될 줄이야....'
제이슨이 고개를 뒤로 팍 젖혔다.
아까운 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나마 10억으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예산 내에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다.
"클로이."
이내 생각을 정리한 제이슨이 그녀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다음 주 작전 1팀 일정 파악해서 시간 되는 놈들로 몇 명 차출해놔."
"1팀이요? 3팀에서 차출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3팀 놈들은 영 못 미더워서 말이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3팀을 데려가."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정예팀을...."
클로이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일을 회수하겠다고 하자마자, 정예팀을 파견하겠다니.
이건 정말 무력이라도 써서 파일을 뺏어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버려 둬도 될까, 아니면 말려야 할까.
클로이는 망설이던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전에도 말했듯이 다른 나라에서 일을 벌이는 건 지부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이...."
"알아, 안다고. 내가 설마 미쳤다고 도시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겠냐."
던전 안이라면 모를까, 제이슨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백만 달러 지급 조건에 1팀까지 파견하려면 예산을 훌쩍 초과할 겁니다."
"예산은 걱정 마. 루프 던전 수익금 나름 괜찮잖아? 5대5로 나눈다고 해도 대충 메울 수 있어. 무엇보다 시간석도 있고."
"...."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에 거래 및 양도 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뱅크 아이템' 중 하나.
2차 가공이 금지되어 오로지 연구 목적으로만 취급할 수 있는 시간석은 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그런 아이템을 가져온다면 상부에서도 예산 따위야 신경도 쓰지 않겠지.
됐다, 빌어먹을 놈. 마음대로 하던가.
클로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더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을 게 뻔했다.
"아무튼, 시간석은 네가 알아서 신경 써.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말이야. 나는 파일만 회수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등을 돌린 찰나.
클로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방금 통화하신 분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김? 준우 김. 이번 작전 총 책임자라더군."
"작전팀장인가요?"
"몰라. 더 높아 보이던데. 본부장 아닐까. 그건 왜 물어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클로이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기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
이미 해가 저문 시간.
"어, 오늘은 빨리 끝났네?"
"...."
한유빈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하자, 드라마를 보고 있던 한상혁이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꼴을 보니 저놈은 이미 한참 전에 퇴근한 모양이었다.
"밥은?"
"안 먹어."
"잘됐네. 어차피 안 줄 거였는데."
"...."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한유빈은 대꾸도 없이 소파 위에 몸을 던졌다.
"…뭐야. 일이 나름 적성에 맞나 봐? 전에는 못 해 먹겠다고 지랄 지랄을 하더니, 요즘은 좀 조용하네?"
"...."
모르는 소리였다.
한유빈은 적응이 돼서 조용해진 게 아니라, 그저 입을 열 힘조차 없어서 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에휴...."
그녀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깊게 한숨을 뱉었다.
일주일 동안 그녀가 작업한 던전은 총 33개.
그중 토벌에 참가한 던전만 7개였다.
이런 건 미국 지부에 있었을 때도 겪어본 적 없는 스케줄이었다. 하물며 공식적으로 헌터가 아니니 토벌 수당도 받을 수 없는 입장.
그러니 회의감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김준우....'
한유빈이 이를 빠득 갈았다.
따지고 보면 본인이 힘든 건 모두 그 자식 때문이지 않던가.
마음 같아선 당장에 따지러 가고 싶다만 실적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일만 시키는 쓰레기라면 마음 놓고 욕이라도 하겠는데, 자기가 봐도 그건 아니었기에 속으로 불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일에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습니까. 피차 뺑이 치는 입장에.
아직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중이었다.
계급, 위계, 출신 그리고 인종.
그 무엇으로도 편을 가르지 않고 오로지 일만 중시하는 놈.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그런 놈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 하지 않을 한국에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한유빈은 또다시 습관적으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쓸데없이 완벽해서는....'
게다가 말만 번지르르 한 놈도 아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김준우는 업무적으로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채용되기 전에도 본부에서 꽤 능력 있는 놈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간 일하며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니, 그마저도 과소평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전팀 하나를 거의 통째로 운용하질 않나, 지원팀은 거의 전속이질 않나. 하다 하다 통제팀까지 김준우의 말 한마디에 움직였다.
모든 팀이 김준우의 지휘에 군말 없이 움직였고, 또 결과적으로 최고의 효율을 뽑아냈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능력 있는 놈이다.
그것도 미국 지부에서 수도 없이 봤던, 실력도 없이 자리만 꿰차고 있는 머저리들보다 훨씬.
그런 생각을 하며 한유빈은 펜던트를 딸깍 열었다. 그 안에는 비슷한 나이대 여성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길 잠시.
딱, 소리를 내며 펜던트를 닫았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지금 한유빈에게 있어선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떠넘기는 빌어먹을 상사임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그놈의 추천으로 들어온 거라지만… 부려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이대로 있다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쓰러질 판국이다.
한유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이번 주까지만 참는다.
어차피 아쉬울 것 없는 입장이다. 이 살인적인 스케줄이 계속 이어진다면, 자신도 굳이 협회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김 팀장'으로 저장된 번호였다.
번호를 보자마자 한유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젠 하다 하다 퇴근하고서도 전화라니.
"…뭐예요."
한유빈은 최대한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뗐다.
「불쑥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혹시 바쁘십니까?」
"아뇨. 바쁘진 않은데… 왜요?"
「별건 아니고, 다음 주에 큰 작전이 하나 잡혔습니다. 제가 총 책임을 맡고 작전 2팀을 필두로 해서 토벌팀이 꾸려질 것 같은데… 이게 최대한 문제 없이 진행해야 하는 작전이라 한유빈 씨가 참가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또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예요?"
「떠넘기다뇨. 저도 참가할 거라 옆에서 지원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나름 전직 작전팀장이잖습니까. 경력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든든하니까요.」
"...하."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소리는 전화기 너머로도 들린 모양이었다.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일정대로 미청소 던전이랑 청소 작업 진행해주시고....」
"아직 안 한다고 안 했는데요."
아차, 싶었는지 한유빈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그럼 참가할 겁니까? 빨리 결정하세요. 지금 결재 올려야 되니까.」
이 인간이 진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유빈은 애써 화를 눌렀다.
그래.
지원 정도라면 뭐, 다른 작업보다야 나으니까.
"...참가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작전인데요?"
「그건 당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유빈은 말문이 턱 막혔다.
대체 뭔가. 이 어처구니없는 인간은.
"원래 사람이 그렇게 제멋대로예요? 작전 참가하라고 전화하면서 무슨 작전인지도 안 알려준다고요?"
에휴,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알려주면 안 할 것 같아서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뭐야?"
한유빈이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김준우냐?"
한유빈이 인상을 팍 구기고 있자니, 한상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
"뭐래냐?"
"다음 주 작전 있다고 참가하래."
"이야, 어지간히 그놈 마음에 들었나 보네."
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동시에 한유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뭔 개소리야."
"김준우 그놈, 뭔 일을 하든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 안 해. 뭐든지 자기 혼자 처리하려고 하거든."
"그런데."
이내 한상혁이 고개를 젖혀 한유빈과 눈을 맞췄다.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그런 인간이 너한테만 일을 시킨다는 게 뭔 뜻이겠냐. 너 존나 예쁨받고 있는 거라니까?"
"...지랄을 한다."
한유빈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
작전 2팀 사무실.
"후우...."
늦은 시간까지 작전 회의를 이어가던 도중, 짧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유빈 씨가 뭐래요?"
김민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대답 안 듣고 끊었어."
"선생님도 유빈 씨 눈치는 보이나 봐요?"
김민주가 후후 웃는다.
"보이지, 보이기야. 일주일 동안 일을 얼마나 시켰는데, 이젠 미국 지부랑 붙이려고 하는 거 알면 그 성격에 가만히 있겠냐."
"그래서 선생님도 참가하는 건가요? 유빈 씨 혼자 참가시키기 미안해서?"
"아니. 불안해서."
"음. 하긴, 유빈 씨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걔 말고, 다른 놈들이."
"...네?"
김민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말한 다른 놈들은 당연히 시간석을 노리고 있는 미국 지부 놈들이었지만, 그 얘기를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이번 작전은 너나 나나 엄청 중요해. 솔직히 청소부가 총 책임자를 맡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렇죠."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 생겨봐. 그동안의 실적 끌어안고 절벽 다이빙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이번 작전에선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면 안 돼. 토벌은 물론이고 그 외적으로도."
최대한 뭉뚱그려서 이야기했지만, 어쨌거나 핵심은 같았다.
토벌이 됐건 수익 분배가 됐건, 아니면 아이템 소유권이 됐건.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그 책임은 오롯이 나한테 돌아올 것이다.
차라리 나한테만 돌아오면 다행이지, 지금 작전팀장들 꼬라지로 봐선 청소팀을 싸잡아 걸고넘어질 게 뻔하다.
쌓는 건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건 쉽다고 했던가.
내가 쌓아 올린 걸 남이 건드리게 둘 순 없는 일이었다.
'뭐, 문제없이 잘 마무리하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때 가선 상부도 청소팀 눈치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나는 이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랜 시간 회의를 이어가니 여기저기가 쑤셔왔다.
'어쨌든 문젯거리 하나는 해결했고, 이제 남은 건....'
작전 당일에 시간석을 빼돌리지 못하게 예의주시하는 것뿐.
이외에는 아무 문제 될 것 없다.
045
045
작전 당일, 신림동.
기본적으로는 옐로우 등급의 차원형 던전.
하지만 일반 던전에는 없는 까다로운 조건과 위험성으로 2급 특수 작전 구역으로 분류된 곳. 루프 던전인 동시에 이중구역 던전이다.
그 앞에 미국 지부의 파견팀과 본부팀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작전 개시까지 약 30분가량 남은 시각.
이번 작전의 리더로 선발된 김민주는 작전 개요를 파견팀에게 설명해주고 있었고, 나는 문소연, 한상혁과 함께 청소 장비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내 시선은 연신 파견팀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시간석을 빼돌리기 위해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어째 공동작전 때보다 분위기가 더 엄숙하네요. 회의도 벌써 한 시간째고"
그때, 문소연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합동 작전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토벌 규칙도, 전투 방식도 협회마다 크게 차이가 있어서 처음부터 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문제가 생길 겁니다. 회의가 중요할 수밖에 없죠."
문소연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이해는 못 했지만 대충 알았다는 표정이다.
"무엇보다 루프 던전은 숙련된 헌터들도 힘들어하는 곳이라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을 겁니다. 토벌 조건을 만족할 때까지 기약 없이 던전에 갇혀 있어야 하니까요."
"그럼… 영원히 토벌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뭐,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아예 없다곤 장담할 수가 없군요."
문소연의 낯빛이 순식간에 회색이 됐다.
그러자 한상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야, 시작부터 겁주면 무서워서 작업이나 제대로 하겠냐? 걱정 마 소연아. 저거 다 농담이야."
"...그렇겠죠?"
"당연하지! 그리고 미국 지부 놈들도 있는데 설마 뭔 일 나겠냐."
한상혁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모양이었다.
뭐, 그의 말대로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사실이다.
전생에선 실제로 어떤 루프 던전을 1,400회 반복하고 미쳐버린 헌터도 있었으니까.
그만큼 위험한 던전임은 틀림없지만… 그것도 정보가 없을 때나 이야기고.
이 루프 던전은 내가 참가했던 던전이다.
당연히 토벌 조건 또한 알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떡을 치고도 남지.
'뭐, 그렇다고 한 번에 토벌할 수는 없겠지만.'
미국 통제팀도 모르는 조건을 내가 알고 있으면 괜한 의심만 살 테니까.
무엇보다 김민주가 팀장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맡은 대규모 프로젝트 리더 자리 아닌가.
경험도 쌓을 겸 일단은 그냥 내버려두고, 여차할 때 도와주면 되겠지.
파견팀 쪽을 다시 한번 슥 훑었다.
그리고 나 외에도 파견팀을 힐끔거리는 녀석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래서 말 안 해준 거예요? 미국 지부랑 합동 작전이라서?"
다름 아닌 한유빈이었다.
콕 쏘는 목소리가 마치 '지금 장난하냐'고 대놓고 말하는 듯했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얘기했으면 참가 안 했을 거 아닙니까."
"네. 그래서 지금 한 대 칠까 말까 되게 고민 중이에요."
"누굴 말입니까."
"누구겠어요."
"...."
한유빈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한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뽑았을까.
깊은 후회가 몰려왔다.
"큼큼… 어쨌든 이렇게 된 거 문제 일으키지 말고 진행합시다.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괜히 시비 걸고 그러면 골치 아파집니다."
"시비는 제가 아니라 저쪽이 걸 거 같은데요."
"그럼 그냥 참으세요. 맞대응하실 생각 마시고. 설마하니 미국 지부가 공식 작전에서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아무리 당신이 꼴 보기 싫다고 해도 그렇지."
"아직 잘 모르시네. 저 새낀 그러고도 남을 새끼예요."
두고 보라는 듯 한유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쪽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다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네요."
"둘이 맞짱 깔 거면 나한테도 말해주라. 구경 가게."
"민주 언니랑 아영 언니도 불러야겠죠?"
팍팍해진 분위기를 애써 풀어보려는 듯, 한상혁과 문소연이 농담을 던졌다.
"됐습니다. 제가 질 것 같으니."
"...."
작전 시작부터 초를 칠 생각은 없었기에, 나 또한 농담으로 화답했다.
덕분에 한유빈도 한풀 꺾인 듯 얌전해졌지만....
어느샌가 눈앞에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제이슨 통제팀장입니다. 청소팀장님이시죠?"
"지원실장 클로이입니다."
배가 불룩한 남성과 금색 단발 여성이 다가와 대뜸 악수를 권했다.
"아, 예. 반갑습니다."
눈에 익은 얼굴.
전생의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유능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던전에도 해박하시다고."
"과찬입니다."
"겸손하실 거 없습니다. 그렇게 들었다는 것뿐이니."
한쪽 입꼬리가 슥 올라간다.
동시에 내 미간이 확 좁혀졌다.
어째 통화할 때와는 태도가 천지 차이다.
이내 제이슨은 내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네, 뭐."
옛 직장 동료와 마주한 순간.
한유빈은 적개심을 숨기지 못한 채 대답했다.
"당신도 잘 지내는 것 같네요. 유감스럽게도."
"하하... 자네가 참가한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아, 혹시 이번 작전에 참가하는 거,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마음에 안 들기야 한데… 어쩌겠어요. 일인데."
"그래,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아무튼, 이전 일은 나도 유감일세."
제이슨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한유빈이 그의 등을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아, 그런데 혹시...."
그 순간, 제이슨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퇴사할 때 지부에서 뭐 들고 나간 거 있나?"
"...."
한유빈의 눈빛에 갑자기 날이 서린다.
"아무것도."
"...그래.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의미심장한 대화를 마치고 제이슨은 다시 파견팀으로 돌아갔다.
한유빈이 나를 쏘아봤다.
내가 뭐랬어, 라고 말하려는 듯 보였다.
"그럼, 이제 다들 모여주세요. 마지막 브리핑하겠습니다."
이윽고 작전 시간이 다가왔고, 김민주가 앞으로 나와 브리핑을 시작했다.
모든 대원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사전에 고지한 바와 같이, 오늘 작전 구역은 루프 던전이자 이중구역 던전으로, 보스는 총 두 마리입니다. 인원이 많지 않지만, 순차적으로 한 마리씩 토벌한다면 전력에는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민주는 자신의 대원들을 슥 훑어보곤 다시 말을 이었다.
"루트 던전인 만큼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미지수입니다. 다들 최대한 체력을 아껴주세요. 토벌 조건을 알아내는 방법은 직접 부딪혀 보는 것, 딱 하나입니다. 당연히 막무가내로 진행하는 건 아니고 여기 미국 지부 통제팀에서 준비해준 매뉴얼 대로 조건들을 하나씩 소거해볼 예정입니다."
우렁찬 대답 소리가 쏟아졌다.
"그럼, 작전 개시하겠습니다."
***
작전 개시 3시간째.
던전 내부는 고대 그리스 사원과 같은 분위기였다.
"1층에 있는 방은 모두 클리어했습니다!"
"좋아. 이제 2층 진입할 거야. 내가 앞장설 테니까 본부팀은 청소팀 데리고 천천히 따라와. 파견팀은 바로 뒤에 붙어주세요."
"알겠습니다!"
"네!"
김민주의 지휘에 맞춰 본부팀과 파견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통로도 복잡하고 방도 굉장히 많은 던전이었기에 본부팀과 파견팀은 서로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던전 내부를 면밀히 탐사해나갔다.
물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할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평소 하던 청소 업무가 아니었기에, 다들 바짝 긴장한 채였다.
"한상혁, 마킹 어떻게 되고 있어."
"잘하고 있어."
"통로에만 하지 말고 갈림길이랑 탐사 완료된 방에도 해둬. 마킹할 때 시간이랑 횟수 적어두는 것도 잊지 말고. 소연 씨는 루프 될 때마다 인원 체크랑 상태 점검해주시고요."
"네, 네!"
"만약 잡몹 사체가 발생하면 분해하려 하지 마시고 그냥 소각해야 합니다. 괜히 처리하려고 하다가 뒤처지면 큰일이니. 그리고... 한유빈 씨?"
나는 한유빈에게 태블릿 PC를 건넸다.
"던전 내부 매핑해주세요. 작전팀장 출신이시니 이 정도는 가능하시겠죠?"
"뭐, 그렇긴 한데. 이건 팀장님 일 아니에요?"
"...누구 일인 게 뭐가 중요합니까.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한유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하여간 눈치는 또 빨라 가지고.'
나는 혀를 찼다.
한유빈의 말대로, 내 역할까지 모두 팀원들에게 떠넘긴 채였다.
나한테는 이런 자잘한 업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뭐겠어, 저 양아치 새끼들 감시하는 거지.
그도 그럴 게, 제이슨 통제팀장은 어째 아까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우리 쪽을 연신 힐끔거리질 않나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지 않나.
뭔가를 기다리는 건지 상당히 초조한 얼굴이다.
'누가 봐도 꿍꿍이가 있는데....'
낌새가 이상하긴 해도 아직은 괜찮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 뭐든 상관없다.
뭔 짓을 하든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시간석은 절대 빼돌릴 수 없을 테니.
그렇게 두 시간이 더 흘렀다.
이윽고 토벌대는 커다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 말고 다른 방은 다 확인한 거지?"
"네. 방이랑 통로까지 싹 다 확인했습니다. 여기만 남았어요."
"그러면... 여기가 보스 방이네."
김민주가 고개를 돌려 팀원들을 향했다.
"바로 진입할 겁니다. 다들 집중해주세요."
끼이익―.
커다란 문을 힘껏 밀어젖히자, 거대한 석상 하나와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모든 팀원이 공격 태세를 갖추며 천천히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정면에 있던 석상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석상의 전신에서 푸른빛이 발광했다.
단단한 갑피로 무장한 첫 번째 보스, '퍼시픽 골렘'.
그 거대한 몬스터가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부팀이 전방에서 최대한 공격을 받아내겠습니다! 파견팀은 패턴 분석을 해주세요!"
김민주가 검을 뽑아 들었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동시에 서슬 퍼런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캉―!
전투가 시작되었다.
***
'시발, 어째 틈이 안 나네....'
제이슨은 손톱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첫 번째 보스와의 전투가 시작되고, 비전투 인원은 서둘러 보스 방을 나와 통로에서 대기 중이었다.
자신과 클로이 그리고 한유빈을 포함한 청소팀이 서로 말을 아낀 채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훑어보던 제이슨은 이내 쯧, 혀를 찼다.
제이슨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토벌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저 빌어먹을 년에게서 파일만 회수하면 됐으니.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한유빈과 따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 같아선 파견팀과 본부팀이 찢어져서 진행하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보는 눈도 많은데 대놓고 파일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고....
'이러다 끝날 때까지 손도 못 쓰는 거 아니야?'
으득, 제이슨이 이를 갈았다.
밖에서는 기회가 없다.
어떻게든 던전 안에서 끝을 봐야 한다.
그런 생각에 또다시 한유빈을 흘겼지만, 이번에도 엉뚱한 놈과 눈이 마주쳤다.
'저 새끼....'
다름 아닌, 청소팀장이었다.
'저 새끼는 왜 자꾸 꼴아보는 거야.'
제이슨이 팍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청소팀장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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