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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역 인근, 건물.

아레스 길드 사무실.

"청소부가 작전본부장으로 임명됐다고?"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를 냈다.

메카닉 클래스의 차석현.

국내 1위 길드, '아레스' 길드의 우두머리이자 공식 국내 랭킹 2위의 인물이었다.

"그렇다니까? 별일이 다 있지, 정말."

차석현의 오랜 친구이자 국내 5위 길드 '아프로디테'의 길드장, 유지우가 대답했다.

국내 저격수 클래스 1위.

국내 랭킹 9위로, 그녀 또한 차석현에 못지않은 실력의 헌터였다.

이처럼 '협회 게이트'를 비롯한 한국 협회의 격변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동종 업계에서도 빠르게 퍼져가는 중이었다.

"크하하하! 확실히 격변은 격변이네. 그 꼰대 소굴이 그렇게 바뀔 줄이야!"

"웃을 일이야?"

유지우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청소부가 지휘권을 잡았다고 다들 축제 분위기야. 지금 움직이면 협회를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고."

"뭔 소리야, 그건 또?"

"뭐긴 뭐야. 통제팀 출신도, 헌터 출신도 아니고 청소부잖아. 그런 사람이 작전본부장으로 올라갔으니 협회가 휘청거릴 거라고 보는 거지."

"흠… 이상하네."

차석현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그 본부장 말이야, 내가 볼 땐 잡아먹으면 먹었지, 절대 잡아먹힐 놈은 아닌 것 같거든."

근거도 없는 말.

차석현은 이처럼 자신의 판단을 거의 직감에 맡기는 편이었다.

중요한 건, 그의 직감은 항상 맞아떨어졌다는 거다.

때문에 유지우 또한 흥미롭다는 듯 관심을 가졌다.

"흐음,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네."

"뭐, 조만간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차석현이 미소를 지었다.

김준우 이야기는 길드에서뿐만 아니라, 무소속의 프리랜서 헌터들 사이에서도 이슈였다.

이태원 소재의 작은 바.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신문을 보던 한 남자는 헤드라인에 적힌 문구를 보며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청소부라… 우연이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술을 홀짝였다.

양민호

마법사 클래스.

공식 세계 랭킹 59위.

공식 국내 랭킹 1위의 헌터.

공식적으로는 프리랜서 헌터로 등록되어 있지만, 이 업계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그때,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예, 양민호입니다."

핸드폰 너머에선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뢰 말씀이십니까?"

"음...."

"뭐, 가능은 한데… 그런 건 단가가 좀 세서 말입니다."

"예예."

"예, 그럼 바로 한번 해보죠."

양민호는 전화를 끊고는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처럼 돈을 받고 해결사 일을 해주는 것이 그의 또 다른 직업이었다.

헌터, 일반인, 정치인.

협박, 납치, 정치공작.

누가, 어떤 의뢰를 하든 상관없다.

돈만 주면 그 어떤 의뢰든 깔끔하게 처리해주었고, 그 때문에 이 바닥에선 그런 그를 '청소부'라 불렀다.

***

지원팀, 헌터관리실.

신수지 보좌관은 일전에 있었던 연구시설 증축 건의가 통과되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 그게 통과가 됐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이아영은 보고를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산이 어마어마하게 들 텐데.... 기획서 읽어보시긴 하셨대요?"

"대충은요. 솔직히 저도 당황스럽긴 하네요."

신수지 보좌관도 머리를 긁적였다.

이아영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지 혼란스러웠다.

물론 지원팀 연구시설 증축은 장기적으로 봤을 땐 꼭 필요한 사항이었다.

다만 여태까지 지원팀에 대한 지원은 '쓸데없는 지출'로 취급받아왔기에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드디어 그 사람이 본부장으로 올라서지 않았는가. 말이라도 꺼내 볼 기회라고 이아영은 생각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야기라도 꺼내 본 것일 뿐, 큰 기대 없이 보낸 기획서였는데… 이렇게 단번에 통과가 될 줄이야.

"증축뿐만이 아니라 통제팀, 청소팀한테도 대대적인 지원을 하시겠다고 해요. 그것도 다음 분기 예산까지 땡겨서.... 하,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신수지 보좌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아영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왜, 왜 웃으세요?"

"아뇨.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싶어서요."

신수지 보좌관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수지 씨, 본부장님이랑 같이 일해본 적 없죠?"

"...그렇죠. 저는 입사 때부터 계속 행정본부에만 있었으니. 뭐, 소문으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요."

"그럼 이해하기 힘들만도 하네."

"네…?"

"이해는 잘 안 가도... 그 사람, 절대 생각 없이 일 저지르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거야 누구나 그런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근데 그 사람은 수준이 달라요."

신수지 보좌관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남들이 보는 것, 앞에 앞을 보고 있어요. 가끔은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건가 싶다니까."

"에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번 일만 봐도 그렇잖아요. 이번 게이트, 다 본부장님이 처음부터 짠 건데?"

신수지는 침묵했다.

이아영 실장과는 업무 때문에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그녀가 이 정도까지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청소팀 소속일 땐 주변 동료를 얼마나 챙겼는데요. 자기 동료 건드리는 꼴은 곧 죽어도 못 보는 사람이고. 부당한 건 절대 못 참고. 하여간 능력 있지, 사람 됐지...."

이아영의 칭찬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저, 이런 질문은 실례인 줄 알지만...."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신수지 보좌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본부장님, 좋아하시는 건 아니죠?"

"좋아하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오히려 질문한 신수지 보좌관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러자 이아영이 씨익 웃었다.

"사람으로서."

싱긋 미소를 짓곤 이아영은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통과됐다니 잘됐네요. 빨리 저 녀석 연구해보고 싶었는데."

관리실 구석에 설치된 진공관을 바라봤다.

그 안에서 시간석이 은은한 노란빛을 내뿜고 있었다.

신수지 보좌관 또한 그 오묘한 빛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뱅크 아이템… 맞죠? 연구 목적으로만 취급할 수 있는 아이템."

"맞아요. 잘 아시네요?"

"대충이요. 그런데 저게 그렇게 위험한 물건인가요?"

"저도 잘 몰라요."

이아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네?"

"저도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루프 던전이야 가끔 출현하긴 해도, 모든 던전이 시간석을 떨구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국제 협회에서 위험 아이템으로 지정할 정도면 자료를 찾아볼 수 있지 않나요?"

"수지 씨 같으면 그 자료, 공개할 거예요?"

"아...."

바로 납득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다른 뱅크 아이템은 조금이라도 자료가 있어요. 이능석은 이능력이 없는 이에게 강제로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하죠."

"…그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네요."

"사람 외에도 부여할 수 있다는 게 포인트죠."

사람 외에 이능력을 부여한다?

대체 어떤 효과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로 반능석은 이능력을 없앤다고 하고… 차원석은 임의로 던전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하고. 뭐 별게 다 있다니까."

"흐음."

신수지 보좌관은 적당히 대답했다.

딱히 관심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근데 딱 저것만 자료가 없어요. 대체 무슨 물건인지 감도 안 온다니까요."

"…신기하네요."

"그래서 연구실 증축을 건의했던 거예요. 무슨 물건인지 좀 보려고."

"그렇군요."

"참, 바쁜 사람 데리고 너무 티엠아이였네."

이아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그렇게 바쁘진 않아요."

"엥? 이번에 대규모 스카우트 진행한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그거 본부장님이 전부 직접 진행하고 계세요. 벌써 어제부터 사무실엔 들어오시지도 않는걸요."

"그 사람답네. 어차피 한 달 뒤에 나갈 거면서 뭘 그렇게까지 열심이래."

하여간....

이아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송파구 잠실.

내리꽂는 뙤약볕 아래에서 고층 빌딩 사이를 헤매기도 벌써 30분째였다.

"이 근처인데...."

핸드폰 지도와 주변을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그러다 이내 익숙한 번지수가 붙어 있는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맞네.'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한 뒤,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도착하자 사무실 입구에서부터 '아레스'의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져 있었다.

'1위 길드답군.'

언뜻 유치해 보이는 그 로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때.

"아, 오셨군요."

사무실에서 한 여성이 나왔다.

"반갑습니다. 경리부 허진아라고 합니다."

"연락드린 김준우라고 합니다."

"들어오세요. 마침 대표님도 방금 출근하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내부는 평범한 회사 같은 분위기였다. 20명 남짓한 직원들은 자리에 앉아 업무 중이었다.

"이쪽 회의실로 들어가시면 돼요. 차 한 잔 드릴까요?"

"아, 예. 시원한 거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혼자 회의실로 들어서자 먼저 대기하고 있던 우락부락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이야! 반갑습니다!"

마치 고릴라를 연상케 하는 저 남자가 이곳, 아레스 길드의 대표이자 현 국내 랭킹 2위의 헌터.

메카닉 클래스의 차석현 길드장이다.

"차석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뭐, 전생에서도 그렇게 연이 깊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호들갑 떠는 건 여전하구만.

"반갑습니다. 이능차원협회 서울 작전본부장, 김준우입니다."

"암요, 암요. 이 바닥에서 본부장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눈에 띌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러자 차석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청소부 출신 인사가 작전본부장에 올랐는데, 소문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하죠."

하여간, 길드 놈들 협회 일에 관심 갖는 건 예나 지금이나....

"솔직히 저도 좀 궁금합니다. 그 꼰대 집합소에서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신 겁니까?"

"글쎄요.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일은...."

마땅히 해줄 말이 없었기에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토록 알려지게 된 건 좀 의아하거든.

차석현은 또다시 큰 소리로 웃어넘기며 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덩치에 안 맞게 눈치가 빨랐다.

"연락 주신 내용은 잘 보고 받았습니다. 스카우트를 진행하고 계신다고요?"

"예. 협회 내부적으로 일이 좀 있어서, 작전 인원이 많이 비는 실정입니다."

"그래도 나름 협회잖습니까. 몇 명 빈다고 급하게 충족시킬 정도는 아닐 텐데요."

"당장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통제팀 정보에 따르면 조만간 인천항에서 수중 던전이 열릴 것 같다더군요. 어차피 충당해야 할 거, 미리 대비하려고 합니다."

흠, 팔짱을 끼며 그는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굳이 저희 길드를 선택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선택하고 말고도 없었습니다. 명실공히 1위 길드 아닙니까."

"하하하! 저번에 저희 부 길드장이랑 마찰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눈 밖에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레스 부 길드장이랑 만나 적이 있었나 싶던 찰나, 뒤늦게 청소팀 채용 면접 때의 일이 떠올랐다.

신태환이 여기 부 길드장이었지 참.

"뭐, 공과 사는 구분하는 편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차석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챙겨온 서류를 꺼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건 스카우트 계약서입니다. 읽어보시면 꽤나 좋은 조건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혹시 이직 대기 명단이 있으면...."

"죄송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차석현이 고개를 꾸벅였다.

아직 서류를 다 꺼내기도 전이었다.

"...예?"

"여기까지 오시게 해놓고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스카우트는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게 대체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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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뜬금없는 거절에 잠시 벙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거절을 하는 건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길드에서 협회로 스카우트 되는 건, 길드 소속 헌터들에게 있어선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기회다.

그런데 아예 길드장 선에서 스카우트 진행 자체를 막는다고?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스읍… 당황스럽군요. 계약서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디 가서 이런 조건은 절대 못 보실 텐데."

"금액적인 문제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럼 대체 왜…?"

"우선 그 전에 한 가지. 혹시 우리 길드 외에 다른 길드에서도 스카우트를 진행할 생각이십니까?"

몇몇 후보군을 정해두긴 했지만, 말 그대로 후보일 뿐이었다.

가능한 한 여기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획에 없습니다."

"그럼 더더욱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차석현은 미소를 띠고 있음에도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간을 보는 것 같진 않았다.

"본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원체 협회와 길드 간의 사이가 그리 좋진 않습니다. 길드가 협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간 쌓인 감정도 있고, 현재 협회의 사정이야 모두가 잘 알고 있고… 뭐, 그동안 협회가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요."

나는 팔짱을 끼며 등을 뒤로 기댔다.

'협회가 그동안 했던 짓이라....'

뭐, 썩 틀린 말은 아니다.

민간 길드는 협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통제팀에서 일정에 맞춰 작전을 배분하고도 던전이 남으면, 그때야 길드에 남은 토벌권을 넘겨주는 시스템이니까.

협회는 악성 재고를 처리하고 민간 길드는 수수료 없이 던전의 모든 수익을 챙겨간다.

이것이 협회와 민간 길드의 관계다.

한 개 던전의 수익을 오롯이 가져갈 수 있으니 몇 번의 토벌로도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반면, 던전 재고가 없으면 한 달 넘게 손가락만 빨아야 할 수도 있다.

물론 협회 관할이 아닌 곳에서 자율 토벌을 진행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통제팀 허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결국, 길드는 던전을 하나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협회에 무조건 고개를 숙여야 했고 협회는 그런 입장을 이용해 길드를 부려먹는, 소위 말하는 갑을관계가 굳어진 것이다.

지금까지야 서민철이 그 짓을 해왔겠지만, 회귀 전에 그걸 가장 잘 이용해 먹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심한 경우엔 재고 던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길드 인원을 부려먹다가 한 달도 안 돼서 입 싹 닦는 일도 있었으니.

'그때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면 절대 가만 안 뒀을 텐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쨌든 협회와 길드의 관계란 그렇고 그렇다.

그동안 쌓인 악감정.

철저한 갑을의 관계.

충분히 이골이 날 만도 하지.

"그런 상황에 우리가 협회와 스카우트 계약을 체결했다는 게 알려지면 공공의 적이 되겠죠. 나름 명색이 1위 길드인데, 다른 길드를 적으로 돌리는 건 아무래도 피하고 싶습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곳인데 상도를 신경 쓰는 줄은 몰랐군요."

"하하, 상도는 그쪽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여전히 입엔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빛은 꽤나 날카로웠다.

나는 이마를 턱 짚었다.

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어이가 없긴 하네.

적은 서민철이 만들었는데 비난은 왜 내가 감수해야 하는 건데.

그대로 옅은 한숨을 내뱉길 한 차례.

"잘 알겠습니다. 사정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리자 차석현이 다시 나를 불렀다.

"현재 서울 내 길드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길드를 찾아갈 생각이시면 우리처럼 환대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이게 환대였다니.

다른 데는 뭐 뺨이라도 치려나 보군.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

김준우 본부장이 돌아가고 나서도 차석현 대표는 여전히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곧바로 다른 손님이 찾아온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걸 그대로 다 말했다고? 그러다 앞으로 던전 못 받으면 어떡하려고?"

이야기를 듣고는 잔소리를 쏟아내는 단발의 여성.

바로 옆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아프로디테' 길드의 대표, 유지우였다.

"어쩔 수 없잖아. 어떤 인간인지 보고 싶었다니까?"

"너무 도박이잖아! 그러다 밥줄 끊기면 직원들 월급은 니 돈으로 줄 거야?"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음성.

차석현은 말로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지우도 한풀 꺾인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땠어?"

"생각했던 거랑 비슷하던데."

차석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놓고 협회 욕을 하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더라. 서민철 같았으면 절대 가만히 안 있었을 텐데."

"흐음...."

"최소한 서민철 같은 부류는 아니야."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거기까진 모르겠고… 뭐,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아."

차석현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데 계속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

"뭐, 그러면 딱 그 정도 사람인 거지."

차석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솔직히 청소부 출신이라고 해서 한편으론 만만하게 본 것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 대화를 나눈 후에는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에 딱히 힘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마치 이런 사소한 일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느낌.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놈은 딱 두 가지 부류다.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이거나.

혹은 이런 일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훨씬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놈이거나.

뭐, 본부장이 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놈이니 전자일 리는 없고....

'그릇이 다르다 이건가.'

그 맥 빠진 눈빛 뒤에 어마어마한 속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자 차석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른 길드 놈들도 제발 눈치가 있어야 할 텐데."

그 순간 유지우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나도 그 얘기 하려고 온 거야. 아무래도 서울 내 길드들 움직임이 좀 이상해서 말이지."

"이상하다고? 뭐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나 봐. 꼭 대규모 토벌이라도 나갈 것처럼."

"흠, 시위라도 하려는 생각인가."

"글쎄, 이번엔 느낌이 달라."

"뭔 소리야."

"나도 몰라. 그냥 뭔가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아."

유지우가 턱을 만지며 말했다.

동시에 차석현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불안한데...."

"뭐가?"

"원래 사람 좋은 놈이 화내면 더 무서운 거 알지."

"그걸 아는 사람이 면전에 대고 협회 욕을 했어?"

"...."

하여간, 저 뒤끝은....

차석현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튼…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괜히 쓸데없는 짓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차석현은 이미 비어버린 종이컵을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

다시 본부로 복귀했을 땐 이미 해가 저문 시각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넥타이와 셔츠 소매부터 풀어 재꼈다.

"젠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확실히 차석현의 말 대로였다.

결과적으로 스카우트는 모두 허탕이었다.

아레스 이후로 다른 길드도 몇 군데 더 돌아 다녀봤지만, 사무실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레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길드장이 자리를 비웠다고 에둘러 문전박대를 하는가 하면 아예 약속을 잡아주지도 않는 곳도 있었다.

심한 곳은 사무실 앞까지 찾아갔지만 대놓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놈들, 옛날 같았으면 밥줄을 죄다 끊어버렸을 텐데....'

이를 빠득 갈았다.

물론 지금도 못 할 거야 없다만… 지금 상황에 그런 짓을 했다간 무사 퇴사에서 한 걸음 멀어질 뿐이다.

대놓고 길드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소리밖에 안 되니. 이제 와서 일을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휴...."

고개를 뒤로 팍 젖히곤 천장을 향해 깊은 한숨을 늘어뜨렸다.

생각보다 골이 깊다.

확실히 그간 협회에 쌓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하고… 무엇보다 작전 본부장을 그렇게 대할 정도면 이젠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겠다는 입장인 듯했다.

그래, 그간 당한 게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는데....

그동안 당한 걸 왜 나한테 푸는 건데!

갑질을 내가 했어?

'청소부 출신이라고 만만하게 보는 건가.'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태까지는 서민철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숙였지만, 이젠 만만한 놈이 왔으니 숨길 것도 없다 이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본인들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인데, 고작 출신 하나 때문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한다고?

'이것들을 진짜....'

순간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됐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곧바로 팍 식어버렸다.

화낼 의욕조차 나지 않는다.

오늘도 뺀찌만 먹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네.

더 이상 여기에 열을 내다간 대머리로 퇴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스카우트 건은 이제라도 편 팀장한테 위임하고 농땡이나 쳐야겠다.

...라고 생각한 그때.

"본부장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 댔던가.

편 팀장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스카우트 건은 편 팀장님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편 팀장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설마 뭔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서울 각지에서 인터셉트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긴장한 볼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편 팀장은 대체 무슨 반응이냐는 듯 여전히 심각해 보였다.

"본부장님! 이거 심각한 일입니다! 그렇게 쉬이 넘길 일이 아닙니다!"

"에이, 고작 던전 몇 개 가지고 그렇게 열 내지 맙시다."

"고작 몇 개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18건입니다. 18건이요! 그것도 두 시간 사이에요!"

"...?"

"심지어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얼굴이 바짝 굳었다.

두 시간 새에 인터셉트가 18건이나 일어났다고?

근데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딴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양아치 몇 명이 벌인 짓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조직적이라면… 민간 길드의 소행이라는 말입니까?"

"그것도 한두 개 길드가 아닙니다. 서울 전 지역에서 이 정도 인터셉트를 성공시킬 정도면 서울 내 거의 모든 길드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허, 이런 미친."

헛웃음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편 팀장은 그런 웃음조차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본부장님, 아무래도 이거...."

이내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선전포고 같습니다."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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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포고?

민간 길드가 협회를 상대로?

단체로 약이라도 처먹은 건가?

아니, 일단 그건 둘째 치고....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딱 한 달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쓰린 마음을 속으로 삭였다.

물론 지금 상황에 열이 뻗치는 건 편 팀장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길드와 마찰이 생기는 건 저희로서도 피하고 싶지만… 이건 명백히 선을 넘었습니다."

대답 대신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편 팀장이 바짝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협회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습니다. 급격한 개편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일단 작전팀 전원 출동시키겠습니다. 되도록 대화로 해결하겠지만... 때에 따라선 무력 충돌도 고려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력 충돌.

그 말에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어난 인터셉트에 대해서는 법적 대응을 하려고 합니다. 일단 협회장님께도 보고를 드리고...."

"아, 아니! 자, 잠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 사람이 일을 크게 벌이려고 하네!

"하, 하하.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습니까. 협회장님도 많이 바쁘실 텐데."

"그렇다고 말씀을 안 드릴 순 없지 않습니까. 법무팀에서도 이미 증거 수집 들어갔습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피해액이 수백억을 넘을 겁니다."

손이 떨려왔다.

피해액이 커질 거라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다만,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법무팀까지 나서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진다.

게다가 협회장 귀에까지 들어가면… 제때 퇴사는 물 건너간다.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어떻게든 내 선에서 끝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해결해볼 테니 법무팀은 움직이지 말라고 해주십쇼. 협회장님께도 보고하지 마시고요."

"해결하신다니. 어떻게…?"

"대화로 잘 풀어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편 팀장은 퍽 답답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 말꼬리를 잡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하하, 감사합니다."

"일단 보류하겠지만, 본부장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입장에서도 더는 손해를 감수할 순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급하게 대충 지껄인 대답이었지만 편 팀장은 어째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편 팀장이 사무실을 나서는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 작전 6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유빈 씨, 지금 어디십니까?"

「지금 막 잠실 쪽 작업 끝내고 나왔어요. 인터셉트 일어나고 있다면서요?」

"예, 방금 들었습니다.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연락드린 겁니다."

「설마 저한테 처리해달라는 건 아니죠?」

"지금 당장은 아니고… 혹시 모르니까 대기해주십시오."

「대기요?」

"무력 충돌... 고려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에요?」

"예."

「잘못하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려고요?」

"그래서 한유빈 씨한테 부탁하는 겁니다. 비공식적인 일은 그쪽이 제격이잖습니까."

핸드폰 너머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혹시 몰라서 하는 얘긴데, 제가 별다른 말 하기 전까진 인터셉트는 못 본 척해주세요."

재차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여전히 께름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지 않은가.

길드가 그간 협회에 쌓인 감정이 있다는 것도 알겠다. 청소부 출신인 날 무시하는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협회를 상대로 대규모 인터셉트를 벌인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결론인가.

협회를 건드려서 길드에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구리다.

구린 걸 넘어 냄새가 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말년에 이게 무슨....'

이가 빠득 갈렸다.

그렇게 혼자 구시렁대기도 잠시.

외투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단은 길드들이 왜 이러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신림동 인근.

네이비 등급의 건물형 던전 앞.

국내 39위 길드, '칠성 길드'가 이제 막 인터셉트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인터셉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속한 토벌이다.

B급 이상의 헌터라면 네이비 등급 정도야 네댓 명으로도 30분이면 떡을 치겠지만, 민간 길드의 형편상 전력이 그리 넉넉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길드 전체가 토벌에 참여해 어떻게든 양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물론 인원이 많을수록 눈에 띄기 쉬우니 인터셉트가 끝나면 바로바로 흩어져 몸을 숨겨야 했지만....

막 흩어지려는 차에 칠성 길드의 대표, 손종현 길드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양민호 헌터님."

핸드폰 너머에서 나지막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협회는 아직도 반응이 없나요?」

"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이상하군요. 눈앞에서 던전을 뺏기고도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닌데.」

흠, 옅은 숨소리.

「새로 부임한 본부장을 생각보다 더 과대평가했나 봅니다. 이 정도로 물렁물렁한 놈일 줄은 몰랐군요.」

양민호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저, 양민호 헌터님...."

그러자 이내 손종현 길드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저,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요?」

"피해액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손해배상이라도 들어오면... 저희 감당 못 합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협회는 협회 아닙니까."

「하, 하하하.」

날카로운 웃음소리.

「당신들이 그러니까 평생 협회에 빌붙어 있는 겁니다.」

난데없이 비수가 날아들었다.

「협회한테 무시당하면서도 어떻게든 던전 받아내려고 자존심 다 버리고 굽신거렸던 건 이미 다 잊으셨나 봅니다.」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상도가...."

「상도요? 협회는 언제 상도가 있었습니까? 협회한테 당신들은 그냥 부려먹기 좋은 을일 뿐이었는데?」

"...."

「협회가 아무리 개혁을 했다고 해도 당신들한테 손을 내밀 것 같습니까? 전혀요. 협회는 길드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예, 그렇겠죠...."

「무엇보다 이번에 임명된 본부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청소부 출신입니다. 심지어 임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죠. 협회가 가장 약해진 순간이란 소립니다. 한두 번 인터셉트가 일어나는 거야 법적 대응이든 뭐든 하겠지만, 이렇게 모든 길드가 들고 일어나면 경험이 없는 본부장으로서는 어떻게든 협상을 하려 들 겁니다.」

양민호가 잠시 숨을 고르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재고 던전을 약속받는 겁니다. 제가 전에 한 번 말씀드렸죠. 본인 밥그릇은 본인이 챙겨야지, 누가 챙겨주지 않는다고.」

손종현 길드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또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신들은 평생을 지금처럼 협회에 벌레처럼 빌붙어 살 겁니다. 손종현 길드장님, 길드장님은 그렇게 살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계속 진행하세요. 악독한 협회 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는 겁니다.」

"네, 네!"

손종현의 목소리에 다시금 기합이 들어갔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 포인트로 가서 대기하자. 조금 지체됐으니까 서둘러서...."

"운이 좋았네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손종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다른 길드원인가 싶었지만, 차림새를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젠장. 설마 작전팀인가…?'

손종현은 이를 악물었다.

작전팀이라면 상황이 퍽 곤란해진다.

여기서 잡히면 다른 길드들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도망을 치든 싸우든, 절대 붙잡히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다행히 쪽수는 이쪽이 훨씬 많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유니폼을 보니까… 칠성 길드인가 보군요."

상대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종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쪽은?"

"이능차원관리협회 소속 작전 1팀장, 김민주입니다."

"...!"

동시에 손종현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협회 최연소 정예팀 팀장.

국내 최연소, 최고 성적의 A랭크 헌터.

국내 랭킹 4위.

고유 클래스 '검제', 김민주.

이 바닥에서 던전밥 먹는 놈이라면 그녀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젠장, 하필 만나도....'

손종현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도망을 쳐야 하나? 아니면 이제라도 빌어봐야 하나?

어떤 선택을 하든 저 괴물 앞에선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때, 김민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시죠."

동시에 경고하듯 눈빛이 번뜩였다.

"힘쓰기 전에."

***

이태원 인근의 작은 바.

양민호는 단골 가게에서 통화를 마치곤 다시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한 모금도 채 마시기 전, 다시금 전화가 울렸다.

"예, 의원님."

「어떻게, 잘 돼가고 있나?」

"아직 반응은 없지만, 그것도 조만간입니다. 눈앞에서 던전을 뺏기고 있는데 협회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그래. 역시 자네에게 의뢰하길 잘했어.」

미래민주당 소속, 정훈 의원.

서울 지역구에서 3선을 노리는 중견 정치인.

그가 바로 이번 일의 의뢰인이었다.

「이번 게이트 때문에 협회가 정치권이랑은 아예 연을 끊어버려서 이래저래 곤란했는데 말이지. 이대로 가면 협회가 제멋대로 날뛰겠거니 싶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은 이제 걱정 마시고 선거 준비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무어라 대답이 들려왔지만, 양민호는 적절한 선에서 전화를 끊었다.

청소부라 불리는 그가 이번에 맡은 의뢰는, '협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떨어트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토벌권 국가 전환'을 공략으로 내 건 어느 당의 정치 공작인 셈이었다.

이번 게이트로 정치권이랑 붙어있던 인사들이 대거 날아가고 협회가 정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난 협회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다시금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협회가 가지고 있는 토벌권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

이번 의뢰는 그것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양민호는 의뢰를 받자마자 서울 내 길드에 연락을 돌렸다. 그리곤 협회에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며 바람을 넣었다.

밑바닥 생활을 오래 한 놈들일수록 다루기가 쉽다.

신분 상승을 미끼로 구슬려주면 목숨까지 갖다 바칠 기세로 움직이니까.

그럼 과연 협회가 정말로 협상하려 들까?

턱도 없는 소리.

아무리 청소부 출신이라고 해도 그간의 종적이 남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신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김준우 본부장.

그 새낀 서민철보다 더 악독한 놈이다.

법정 공방은 물론이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하겠지.

한 번 마찰이 일어나면 쉽사리 잦아들지 않고 더욱 큰 분쟁으로 번질 것이다.

분쟁은 과열되면 될수록 좋다.

그러다 무력 충돌까지 일어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시민들에게 협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테니까.

서로의 이익을 위해 피 튀기며 싸우는 저들이 과연 나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불신.

그때 타이밍 맞게 선거 공약으로 '토벌권 정부 회수'를 들고나오면?

'돈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양민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술을 홀짝였다.

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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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

본부를 나와 향한 곳은 아레스 길드 사무실이었다.

서울 내 모든 길드가 움직이고 있다면, 1위 길드인 그들이 내막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혀 모르셨다고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차석현은 오후에 찾아왔을 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아니, 명색이 길드 커넥션의 중심인 1위 길드인데 낌새조차 모르셨던 겁니까?"

"아프로디테 길드에 유지우 대표 말로는 요 며칠간 길드들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는 했습니다. 다만, 설마하니 단체로 인터셉트를 진행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무리 협회에 악감정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아프로디테 길드도 이번 일은 몰랐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마 서울 내에선 저희와 아프로디테 길드만 미리 소식을 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길드끼리 인터셉트를 진행하려면 1위와 5위 길드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왜 같은 편으로 두지 않은 걸까요. 다른 길드에 척을 질 만한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전혀요.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저흰 모든 길드와 친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이 길드 사이에서 계획된 거라면 저희가 모를 수도 없고요."

"그렇다면 더욱이 이상하군요...."

흠, 옅은 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협회에 시위하기 위해 인터셉트를 벌이고 있는 거라면 1위와 5위 길드를 포섭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포섭은 둘째 치고라도 언질은 해줬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낌새를 몰랐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서울 내 길드만 해도 20개가 넘습니다. 인원을 총합하면 족히 1,000명은 될 거고요.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연합해서 동시다발적인 인터셉트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리더가 필요합니다. 토벌 지식에도 해박하고, 길드 전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실력 있는 리더가요."

차석현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명백한 불쾌감의 표시다.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 반대입니다. 차석현 씨를 백 프로 믿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단호하게 말했지만 차석현은 여전히 께름칙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리더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길드 내부 인물이라면 차석현 씨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니 길드 외 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프리랜서 헌터?"

"예. 프리랜서 헌터 중에서도 이런 규모의 인터셉트를 지휘할 만한 인물은 많지 않습니다. 뭐,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이마를 톡톡 치다가 입을 열었다.

"양민호 헌터 정도가 있겠군요."

차석현이 크게 반응했다.

동그래진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만요. 그 사람은 국내 1위 헌터입니다! 뭐가 아쉬워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겁니까?"

"그냥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 중 한 명을 꼽은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벌인 일이라는 증거는 없어요."

짐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론 이미 확신하는 중이다.

회귀 전 기억이 떠오른 참이었으니까.

양민호.

전생에선 내 뒤를 이어 국내 2위의 헌터였던 인물.

물론 헌터라고 하기보단 해결사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이 바닥에서 '청소부'라고 불리는 그놈은 돈만 주면 온갖 더러운 의뢰도 마다하지 않는 개망나니였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활개를 치고 다녀도 경찰 고위 관계자부터 정치인까지, 온갖 높으신 분들이 뒤를 봐주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그 새끼랑은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데....'

나조차 학을 뗐다.

괜히 건드렸다가 좋은 꼴 못 볼 게 뻔했으니.

어쨌든,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고 길드들을 부추겨 인터셉트를 일으켰다고 한다면 이 모든 사태가 대략 설명이 된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양민호 헌터와 친분이 있습니까?"

"아는 사이긴 합니다만… 원체 우리랑은 안 맞는 인간이라, 오래전에 척을 졌습니다."

"유지우 길드장과는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대충 앞뒤가 맞는군요."

"저와 지우가 알게 되면 방해할 것 같으니 일부러 우리에게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는 겁니까?"

"그거 말곤 설명이 안 되죠."

차석현은 내 말에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그 또한 양민호가 어떤 인물인지 어렴풋이는 알고 있을 테니.

잠시 사무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또한 꽤나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이내 침묵을 지키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협회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대립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차석현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쓸데없이 우직한 놈이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법적 책임을...."

"협회 내부에선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본부장님 생각은 아니라는 거군요."

"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법정 공방이 벌어지면 퇴사를 못 할 것 같으니 내 선에서 해결하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금전적인 부분을 떠나서 결국 누가 됐든 토벌해야 할 던전인데, 그거 몇 개 다른 놈들이 했다고 뭐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

차석현은 퍽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뭐, 저희도 직원들 월급 줘야 하는 입장이니 피해액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거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니."

물론 나 다음에 임명될 본부장이 해결해야겠지만.

"어쨌든,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진 않군요."

"역시...."

"예?"

"아닙니다."

이내 차석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죠."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끝에 입을 열었다.

"뭐, 정말로 양민호 헌터가 뒤에 있다면 굳이 길드를 막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한 짓이라는 증거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거야 직접 찾아보면 알겠죠."

"뭐가 됐든 빨리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은 양민호를 찾아가서 협박하든 협상을 하든 해야 한다.

원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놈이라 찾는 게 쉽진 않겠지만....

'이태원에 그 새끼가 자주 가는 바가 있었지 아마.'

생각을 정리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경리부 허진아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대표님, 대표님! 신림동 부근에서 인터셉트를 하던 칠성 길드와 작전 1팀이 맞닥뜨렸답니다!"

시발....

"늦은 모양이군요."

차석현의 표정이 퍽 어두워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

신림동 부근, 토벌이 완료된 던전 앞.

두 진영이 살벌한 분위기로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손종현 길드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힘쓰기 전에? 작전팀이 민간 길드를 상대로 무력행사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못할 것도 없죠."

김민주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다짜고짜 싸울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김준우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는 건 김준우 또한 아직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 와중에 독단으로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줄 수도 없고....'

일단은 협박이라도 해볼 심산으로 입을 열었다.

"손해배상,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할 생각 없습니다."

"생각보다 더 염치가 없으시네요."

"협회가 그런 말 할 처집니까? 그동안 우리한테 했던 짓은 기억도 안 납니까? 얻다 대고 염치를 들먹입니까."

김민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김민주는 길드에 무슨 짓을 한 기억이 전혀 없다.

했어도 이수용이 했겠지.

손종현 길드장의 말이 퍽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거죠? 쌓인 게 있으면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안 해봤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이 몇 장엔 아무 반응도 없었으면서 인터셉트 몇 번 하자마자 달려오는 걸 보니, 진즉 이렇게 할 거 그랬습니다."

생각보다 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김민주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거절합니다."

"하아...."

더는 대화로 해결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러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습득 스킬 : 금강]

[시전자의 근력 스텟이 대폭 상승합니다]

곧이어 김민주의 전신이 발열하며 수증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전 1팀의 헌터들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물론 칠성 길드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요."

[고유 스킬 : 비스트 - 백호]

손종현 길드장.

비스트 클래스의 헌터이자 국내 랭킹 22위.

그의 외형이 순식간에 반인반수로 변했다.

동시에 칠성 길드의 헌터들이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두 진영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누군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걸.

"작전 1팀, 전원...."

이윽고 김민주가 입을 연 그때.

"아오, 시발! 택시 존나 안 잡히네!"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민주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에서 김준우가 뛰어오고 있었다.

"허억, 허억...."

김준우는 두 진영 사이에 멈춰 서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길 잠시, 이내 허리를 세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휴, 다 큰 어른들끼리 뭘 싸우고 그럽니까."

칠성 길드 전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당신… 혹시 김준우 본부장?"

"예. 제가 책임자니까 이제부턴 저한테 말씀해주십시오."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야, 본부장이 직접 행차하셨네?"

"뭐, 우릴 잡아 처넣기라도 하려고?"

"해봐! 이제 우리도 가만히 안 있어!"

"자자, 흥분들 하지 마시고...."

김준우는 손바닥을 보이며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양상은 더욱 과열되어 갔다.

계속해서 고함과 함께 야유 섞인 항의가 날아들었다.

도저히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짜증 나게들 하시네, 정말."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허공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었다.

가히 어마어마한 위력.

그 여파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인원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조용히 좀 해주십시오. 나 얘기 좀 하게."

김준우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네!"

"그냥 다 죽여 버리게? 그래, 시발 죽여봐!"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심지어 몇 명은 넘어진 김에 아예 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돌아버리겠군.'

김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잠실 부근 사고 발생! 사고 발생!」

일대 소란을 깨고 김민주의 무전이 울렸다.

"사고가 발생했다고요?"

「한 길드가 오렌지 등급 던전을 인터셉트하던 도중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기어이 사고를 치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문제는 무전 내용이 칠성 길드에도 그대로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사, 사고…?"

"잠실 부근이면 얼그레이 길드인데...."

"얼그레이 길드에 손종현 길드장님 아내분이 있는...."

황급히 김민주의 무전기를 뺏어 들며 말했다.

"김준우 작전 본부장입니다. 모든 작전팀은 지금 바로 잠실 인근 오렌지 등급 던전으로 출동하십시오."

「모, 모든 작전팀이요?」

"예. 모든 작전팀입니다. 협회 내 모든 작전팀은 지금 당장 구출 작전 투입 바랍니다."

무전을 끊고는 나 또한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시발,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벌여.

063

063

잠실 인근.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자, 이미 통제팀을 비롯해 지원팀 의무대와 대부분의 작전팀이 도착해있었다.

내 뒤를 따라 달려온 칠성 길드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손종현 길드장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지금 저 던전에서 사고가 난 '얼그레이' 길드에는 그의 아내가 속해 있다고 한다.

거의 넋이 나간 그를 뒤로하고 편 팀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던전은 오렌지 등급의 차원형 던전입니다. 워낙 위험 요소가 많은 던전이라,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정보를 모은 후에 다음 주 안으로 토벌을 시행할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인터셉트를 위해 진입한 것 같습니다."

편 팀장은 태블릿 PC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오렌지 등급 던전은 작전팀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겨우 토벌에 들어가는 곳이다.

체계적인 시스템도 없는 민간 길드가 인터셉트하기 위해 들어갈 만한 던전이 결코 아니란 소리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니 이 꼴이 나지.'

이가 빠득 갈렸다.

"사고가 난 건 확실합니까? 내부 상황 파악은요?"

"통제팀 모니터에 던전 진입이 한 시간 전에 확인됐는데, 이후로 보스 몬스터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급히 드론으로 확인해보니 보스 방이 닫혀 있더군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보스 방이 닫혀 있을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우선 보스 방에 진입하지 않았을 경우.

혹은 보스 방에 진입했지만, 장시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을 경우.

전자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지금 상황이 후자라면....

"저희 쪽에선 전멸...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으아아아악!!"

편 팀장의 말이 들린 것인지, 손종현 길드장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곤 이성을 잃은 채 던전 입구로 달려들었다.

"뭐해! 잡아!"

"놔! 이거 놔, 시발!!"

"들어가서 어쩌시겠다고요! 오렌지 등급입니다! 작전을 세우고 들어가도 위험한 곳이라고요!"

"이, 일단 진정하시고…!"

작전팀 헌터들이 말렸지만, 이미 완전히 눈이 풀려 있었다.

퍽―!

결국, 내가 다가가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힘 조절을 했음에도, 온몸에 힘이 풀린 건지 그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진정하시죠. 지금 그쪽이 들어가 봤자 피해만 늘어납니다."

"...."

그는 허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럼 시발 저대로 내버려두라고? 뭐, 자업자득이라 이거야?"

"예. 자업자득입니다. 그러게 왜 망나니 새끼 말에 홀랑 넘어가선 주제넘은 짓을 벌이셨습니까."

"너, 너 지금 그게 할 소리…!"

"그리고 내버려두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

손종현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저희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그쪽은 제발 더는 일을 크게 만들지 마세요."

손종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 본부장님...."

그때, 편 팀장이 다가와 조심스레 속삭였다.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아직 정보가 많이 없는데 괜히 구조하려다 작전팀까지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자업자득입니다. 그리고 지금 들어가 봤자 이미 늦었을 수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들끼리 지랄하다가 지들끼리 사고를 친 거에 협회가 나설 필요는 없으니까.

냉정하게 보자면 그렇다.

구출 작전은 일반 토벌 작전보다 몇 배는 어려운 작전이다. 들어가는 예산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설령 작전에 성공한다고 해도 수익이 나는 작전이 아니다.

금전적으로 본다면 개손해 그 자체.

다만, 지금 나한텐 그깟 몇백억보다 무사고 퇴사가 더 중요했다.

비용이야 다음에 할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작전팀."

"네!"

"지금 당장 던전 부근 모든 구역 봉쇄하세요. 사고 소식 듣고 길드들이 달려들기 시작하면 이도 저도 안 됩니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무력을 써서라도 막으세요."

"알겠습니다."

"통제팀은 던전 내부 상황 실시간으로 보고해 주시고요."

"네."

"그리고 작전 1팀. 너흰 나랑 같이 들어간다."

내 뒤에 있던 작전 1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김민주에게 말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어. 내가 지휘할 테니까 바짝 긴장하고 따라와."

"그럼요."

웃음기 없는 대답.

1팀 대원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좋아, 다들 장비 챙겨."

작전 개시를 선언했다.

***

"사고요?"

바에서 술을 마시던 양민호에게도 마침 그 소식이 날아든 참이었다.

「그래. 경찰청 쪽에 아는 놈이 있어서 방금 전해 들었네. 아무래도 길드놈들이 던전을 착각해서 오렌지 등급에 잘못 진입한 모양이야.」

"아, 그거 착각한 거 아닙니다."

양민호는 전화기를 어깨에 걸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정훈 의원은 뜻밖의 대답에 꽤나 당황했다.

「뭐, 뭐? 착각이 아니면 뭔가?」

"처음 길드 놈들한테 인터셉트할 던전 정보 넘겨줄 때 말입니다. 거기를 블루 등급 던전이라고 알려줬거든요. 뭐, 그쪽은 철석같이 믿고 들어간 거겠죠."

「왜, 왜 그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양민호가 가벼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분쟁 일으키기에 누구 한 명 죽는 것만큼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어요."

정훈 의원은 차마 즉답할 수 없었다.

모든 걸 알아서 해달라고 말하긴 했다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미친놈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뭐, 뭐 그렇긴 하다만… 소식을 듣자 하니 이미 협회에서 구출 작전 들어갔다던데.」

그 순간 양민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김민주 팀장이랑 작전 1팀, 그리고 김준우 본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한다고 하더군.」

"협회가 대체 왜? 길드 때문에 그 지랄이 났는데. 인터셉트 막는 것도 모자랄 판에 길드를 구출해준다고요?"

「낸들 아나. 뭐… 나도 전해 들은 거라 확실치는 않지만.」

양민호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인터셉트 구출 작전이라니, 협회에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득은커녕, 자칫 잘못하다간 어마어마한 손해만 볼 게 뻔한데....

'김준우… 대체 무슨 꿍꿍이야, 시발.'

양민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 있자 정훈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정예팀이 나섰으니까 구출은 되지 않을까 싶네만. 그리고 구출이 되면 길드 쪽에서도 더는 협회를 건드릴 것 같지도 않고. 이거 혹시… 의뢰에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양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긴 경험도 없는 작전팀장이랑 청소부 출신 본부장이 어떻게 해볼 던전이 아닙니다."

「그래?」

"네. 오히려 구출하겠답시고 나대다가 일만 키워줄 수도 있습니다."

양민호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러자 정훈 의원도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그래. 뭐, 자네가 실수할 리는 없겠지. 내 믿고 기다리겠네.」

"그럼요. 염려 마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양민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술잔을 휘휘 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협회가 직접 구출 작전을 할 거라곤 당연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

다만 변수가 생겼다 한들 이제 와서 계획을 수정할 순 없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서 그저 구출 작전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꼬리 자를 준비는 해야겠군.'

양민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

던전 내부는 어두컴컴한 고성(古城)이었다. 마치 중세로 온 것 같았다.

온통 시커먼 외벽엔 박쥐와 비슷한 무언가가 날아다녔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정보가 별로 없으니 천천히 진입한다."

"예."

작전 1팀과 함께 커다란 복도를 따라 조심스레 전진했다.

내가 토벌했던 던전이라면 주변을 살필 것도 없이 곧바로 보스 방으로 달려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던전은 나 또한 처음이었다.

방도 너무나 많았고 무엇보다 너무 어두웠던 탓에 시야 확보도 쉽지 않았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나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스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뿐.

사실 다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이름이 블랙 타이거 드래곤이라는 것 외에는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었다.

뭐 그래도 드래곤이 붙었으니 어떤 몬스터일지는 대충 예상은 되지만.

'쯧, 날아다니는 놈은 영 까다로운데.'

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 무전이 울렸다.

편 팀장이었다.

「현재 위치가 어디십니까?」

"지금 막 진입해서 복도 따라 전진하고 있습니다."

「아, 그대로 직진하시면 오른쪽에 계단이 하나 있을 겁니다. 계단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가시면 커다란 문이 있는데, 거기가 보스 방으로 추정됩니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곤 이내 걷는 속도를 올렸다.

다행히 가는 길에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그나마 무난하게 편 팀장이 일러준 위치까지 도착했고, 우린 커다란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그렇게 되뇌며 문을 열었다.

"...."

방 내부는 코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확인을 위해선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그때였다.

바스락―.

"...!"

발소리와 함께 정면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수, 숙여!!"

피슉―!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머리 위를 스쳤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마를 관통했을 공격.

들어서자마자 숨이 끊어질 뻔한 그 상황에 모두가 크게 당황했지만,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동작을 멈출 것을 지시했다.

"움직이지 마. 소리에 반응한다."

겨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전달된 듯, 모두가 제자리에 바짝 얼어붙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황.

어떤 공간인지,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범위가 큰 위력적인 스킬을 쓸 수도 없는 노릇.

'생각보다 더 귀찮게 됐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몇 분쯤 지났을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차츰 공간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략 100평쯤 되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반대편 구석에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는 다수의 실루엣이었다. 생존자들이다.

'살아는 있군.'

진심으로 안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직 보스를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다시금 눈을 굴려 공간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머지않아 천장에서 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블랙 타이거 드래곤.

과연 이름답게 거대한 검은색 몸통과 8개의 붉은 눈, 8개의 다리를 가진.

'시발. 저게 왜 드래곤이지…?'

거대한 거미였다.

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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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역 인근.

김준우 본부장을 비롯한 작전 1팀이 던전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김준우의 명령에 따라 통제팀은 던전 입구를 중심으로 반경 10m를 완전히 봉쇄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길드들이 출입 금지선을 넘어 던전으로 달려드는 소란이 일었지만, 작전팀이 서둘러 그들을 제압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들의 흥분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통제팀이 현재 작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나서야 다들 조금씩 진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놈들. 우리만 고생시키고....'

편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 길드에 악감정은 없었다만, 지금은 충분히 그들에게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수십억 규모의 인터셉트를 일으킨 것도 모자라 기어이 사고를 쳤으니.

상당히 아니꼬운 얼굴로 혀를 내두르고 있던 그때.

"뭐예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한유빈 팀장과 함께 모든 청소팀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경황이 없는 그들 또한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한 길드가 던전 등급을 착각하고 진입했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지금 본부장님이 작전 1팀이랑 직접 구조 작전 중입니다."

"주, 준우 씨가요?!"

"아니, 그놈이 대체 왜? 길드가 잘못한 걸 왜 지가 나서?!"

편 팀장의 설명에 문소연과 한상혁이 목소리를 키웠다.

물론 편창현 또한 김준우 본부장의 행동이 전부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김준우는 여태껏 본인이 만난 사람 중 가장 인격자다. 당연히 구조 작전 또한 어떤 수지 타산도 없이 순수한 선의로 나선 거겠지.

하지만 그릇이 작은 본인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계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구조에 성공해야 본전.

만에 하나 실패라도 한다면, 의도가 어찌 됐건 모든 비난의 화살이 협회를 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렌지 등급 던전에 준비도 없이 진입했다. 생존자 구조는 둘째 치고 작전팀 또한 무사하리란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물론 김준우 본부장이 그걸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 그가 구조 작전을 진행한 건, 그깟 자질구레한 것보다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겠지.

'역시 그릇이 달라.'

이러니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는 사람은 비단 편 팀장뿐만이 아니다. 한 씨 남매와 문소연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 팀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편 팀장은 이를 보며 실감했다.

김준우가 이제 작전본부에 없어선 안 될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 제발 무사히 나오시죠.'

편 팀장은 시커먼 던전 입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그냥 밖에 있을 걸 그랬나.'

보스 몬스터인 거대 거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몸소 나선 걸 후회했다.

토벌 가능 여부를 떠나서 토벌 자체가 꽤나 까다로울 것 같은 몬스터로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후퇴하는 것도 모양 빠지고....'

쯧, 혀를 찼다.

그리곤 다시 한번 보스 방을 둘러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일반적으로 구출 작전은 두 가지 경우로 진행이 된다.

첫 번째는 몬스터를 먼저 토벌한 이후에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

두 번째는 토벌을 제쳐 두고 생존자만 구출하는 것.

당연히 첫 번째 방법이 이후 다시 던전에 진입할 필요가 없으니 제일 깔끔하고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도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드래곤이라고 해놓고 거미가 튀어나올 정도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선, 섣불리 전투를 벌이다간 생존자는 물론이고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전투를 벌이기엔 공간이 너무 좁은 것도 문제다. 이래서는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나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해봤겠지만,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김민주."

"네."

"아무래도 생존자만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다. 토벌은 나중에 정보가 쌓이면 그때 다시 하자."

"저도 그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보스를 무시하고 반대편까지 갈 수 있을까요. 소리에 반응해서 공격한다면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가 유인할게."

김민주의 눈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볼 테니까 너흰 달려가서 구조부터 해."

"...알았어요."

난 이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벅, 소리와 함께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 순간.

피융―.

날카로운 실이 정확히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숙였음에도 실은 아슬아슬하게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깜빡이는 좀 켜고 들어오지.

[시전자를 향한 공격 감지]

[현 시간부로 전투태세에 돌입합니다]

[스킬 발동]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김민주와 눈을 맞췄다.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셋을 세길 잠시.

탓―!

"달려!!"

내가 먼저 좌측으로 진입하며 소리쳤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보스 방을 가로질렀다.

예상대로 보스는 내게만 공격을 퍼부어댔다. 완벽하게 유인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작전은 순조롭게 풀린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파바바바바박―!!

'뭐, 뭐가 이렇게 빨라?!'

공격이 너무 매서웠다.

날카로운 실들이 내 꽁무니를 따라 비처럼 쏟아졌다. 하이퍼 부스트가 발동된 속도로도 피하는 게 겨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 이동 스킬에도 투자를 좀 할걸.'

1초라도 주춤하는 순간 고슴도치가 되겠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도망만 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한데.'

문득 내 처지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피슝―!

"어이쿠."

꼬챙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집중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거미형 몬스터가 까다로운 이유는, 몬스터 그 자체보다 뿜어내는 거미줄 때문이다.

회귀 직후 날 거의 죽일 뻔했던 '폭스트롯 센티피드'의 혈액에 견주는 접착성이 이 거미줄에도 있었다.

만약 피부에 스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발이 묶이고 만다.

게다가 거미줄이라는 특성상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걸 지금 투사체로 발사하고 있으니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위험한 건, 이 공간 어딘가에 거미줄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래서 거미형 몬스터를 토벌할 때는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며 전투를 벌이는 게 정석이지만....

'지금은 그런 거 따질 상황이 아니지.'

파앙―!

조금 더 가속을 붙였다.

굉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뒤꽁무니에서 터져 나왔다.

벽을 타고 달리며 최대한 변칙적으로 움직인다.

다행히 공격 패턴도 슬슬 눈에 익었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익숙해졌다.

움직임에 여유가 생기니 덩달아 시야도 넓어졌다.

보스와는 일정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며 투사체를 피할 시간을 벌고, 시야 확보가 어려운 구석은 피한다.

동시에 작전팀과 생존자의 위치를 주기적으로 살피며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몬스터를 유인한다.

거미 몬스터의 공격이 빠른 게 예상외긴 해도 이대로 가면 구출 작전은 문제 없....

쾅―!!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큿…!"

바로 몸을 던져 피했지만 타이밍이 어긋나 자세가 안 좋았다.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몬스터의 붉은 눈 8개가 내 정면에서 번뜩였다.

'성가시게 됐네....'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계속 천장에만 붙어있던 보스가 결국 직접 앞으로 나선 거다.

아무래도 실로 쏴서는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보스 몬스터잖아.

겁나 귀찮게 말이지.

스스스―.

보스가 거대한 턱을 들이밀며 나를 탐색했다.

공격해야 하나. 아니면 방어?

잠시 고민하던 그 순간.

팍―.

두 개의 날카로운 턱이 덮쳤다.

"업화!"

[습득 스킬 : 업화]

[스킬 발동]

쾅―!

검은 불꽃이 정확히 보스에게 날아가 작은 폭발이 일었다.

물론 C급 마법 스킬로 해치울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대미지는 줄 수 있을 터였다.

최소한 발이라도 묶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저건 또 뭐야...."

스스스스스―.

눈앞의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혀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스킬이 닿지도 못했다.

거대 거미 몬스터가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거미로 분열한 것이다.

스스스스슥―.

사람 머리통만 한 수천 마리의 거미가 순식간에 흩어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야, 야! X 된 것 같다! 서둘러!"

김민주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쪽도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난 듯했다.

"생존자들이 거미줄에 묶여 있어서 꿈쩍도 안 해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렸다.

생존자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게 아니라, 거미줄에 뒤덮여 고치가 된 상태다.

'아껴먹는 타입이었던 건가.'

바로 잡아먹히진 않아서 다행이지만, 이래서는 탈출에 시간이 걸린다.

"기다려줄 시간 없어. 어떻게든 끊어!"

"네!"

김민주가 다급하게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푸른색 안광과 함께 시퍼런 검날이 번쩍였다.

스스스스스―

"젠장!"

마침 타이밍 나쁘게 그악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습을 숨겼던 수천 마리의 거미들이 작전팀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야!!"

"으아아악!!"

"시발, 시발!"

"이, 이것 좀 어떻게…!"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거미들이 순식간에 작전팀 전원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일제히 거미줄을 뿜어댔다.

김민주는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거미줄에 몸이 묶였고, 다른 헌터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으읍… 으브븝."

"으그극...."

불과 몇 초.

작전팀은 이미 생존자 무리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끼어들어서 어떻게 하기엔 늦었다.

괜히 저걸 막아보려다가 나까지 거미줄에 발이 묶인다면 정말로 끝이다.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숨을 죽였다.

곧바로 정적이 내 주위를 감쌌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처럼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 속, 홀려 남겨진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던전이 위험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헌터라고 해도 매년 던전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이유는....

사전 정보 부족.

그린 등급 이하라면 모르겠지만, 옐로우 등급 이상에선 정보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현재, 사실상 오렌지 등급을 혼자서 토벌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작전을 바꿔야겠네.'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정보가 없다면 그걸 커버할 만한 힘이 있으면 된다.

한 마리씩 공격해선 턱도 없다.

어쭙잖은 공격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수천 마리를 한 번에 날리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방이 너무 좁아 닥치는 대로 스킬을 난사하다간 생존자는 물론 작전팀까지 위험해질 수 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여기서 다 같이 죽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는 게 나을 테니까.

'이렇게 된 이상 진지하게....'

[습득 스킬 : 형상 - 우리엘]

[형상이 유지되는 동안 시전자가 지정한 아군은 사망하지 않습니다]

8개의 거대한 하얀색 날개가 등에서 솟아난 순간.

고치가 된 녀석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군 지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아군의 사망 면역까지 앞으로 10초]

[9초]

[8초]

스스스스스―.

스킬을 감지한 거미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당황해선 안 된다.

최대한 집중을 유지해야 한다.

[습득 스킬 : 한계돌파]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일시적으로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해당 스킬의 효과가 종료되면 모든 스킬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습득 스킬 : 과몰입]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습득 스킬 : 타천사]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과몰입 스킬로 인해 마력 상승률이 증가합니다]

[현재 마력 수치 : 921,240 (913,440↑)]

[마력 수치가 마법사 클래스를 초과하였습니다]

[클래스 각성]

[고유 클래스 : 대마도사]

"후우...."

검은 기운은 더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거미들은 사냥감을 노리듯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곧 사방에 퍼져 있던 검은 기운이 손가락 끝으로 빠르게 압축되었다.

지금이다.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전방을 향해 강력한 폭발 마법을 발사합니다]

[스킬 발동]

번쩍―

눈앞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했다.

065

065

던전 앞, 봉쇄 구역.

김준우를 기다리고 있는 한유빈은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속으론 상당히 초조했다.

구조팀이 던전에 진입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분명 보스 방까지는 도달했다고 했는데....'

한유빈이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미국에서 작전팀장까지 맡아본 경험상, 오렌지 등급 던전은 결코 한 개 작전팀이 준비도 없이 토벌에 나설 만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토벌보다 까다롭다 알려진 구조 작전이다. 소식까지 끊겼으니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요, 유빈 언니."

"맞아. 그 새끼 성격은 좀 이상해도 실력 있는 놈이잖아?"

표정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온 것인지, 문소연과 한상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만."

물론 김준우 본부장은 강하다. 어쩌면 A랭크인 한유빈 본인보다 훨씬.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한들, 토벌은 경험과 정보가 결과를 좌우한다. 지금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렌지 등급의 보스를 상대하기엔....

그때, 한유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불안해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괜한 생각 말고 기다리자.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 나옵니다!!"

던전 앞의 누군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던전 안에서 검은 실루엣이 일렁였다.

누구랄 것 없이 입구로 모여들었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던전에서 빠져나오는 그림자를 가슴 졸인 채 바라봤다.

"…구경이라도 났답니까. 뭐 이리 사람이 많이 몰렸대."

이윽고 던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준우 본부장이었다.

그와 동시에 던전 입구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괘, 괜찮은 거예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그런데 왜 혼자 나오십니까…?"

"구, 구조는요! 구조는 어떻게 됐어요?"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김준우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질문이 귀찮다는 듯 귀를 후볐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다치긴 했는데… 뭐 다 무사합니다. 걱정할 건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난 직후. 작전 팀원들이 생존자들을 한 명씩 부축한 채로 힘겹게 던전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작전 성공에 대한 환호가 쏟아졌고, 한 씨 남매와 문소연 또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무팀, 바로 생존자 응급처치하고, 지원팀은 부설 병원으로 이송해주세요."

"네!"

"다들 화상이 심합니다. 거미줄에 뒤덮여 있어서 그나마 많이 다치진 않았는데... 병원 쪽에는 미리 연락해주세요."

김준우의 지시에 따라 의무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여, 여보!!"

한편 생존자 무리에서 아내를 발견한 손종현 길드장이 출입 금지선을 넘어 달려들었다.

몇몇 작전 팀원들이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김준우가 퍽 귀찮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손종현은 아내를 와락 끌어안으며 상태를 살폈다.

등과 다리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생존자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손종현과 그의 아내에게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손종현과 마찬가지로, 다른 길드원들 또한 생존자들의 상태를 살펴주며 그들의 귀환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한유빈은 점점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갔다.

"저기요."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칠성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음은 알겠는데, 일단 고맙다고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가 턱짓한 곳엔 김준우 본부장과 작전 1팀이 모여 있었다.

길드원들 또한 그들을 바라봤지만.

"쯧...."

돌아오는 건 혀를 차는 소리뿐이었다.

"우리가 모를 줄 알아? 괜히 던전에서 사고 나면 니들이 덤탱이 쓸까 봐 구해준 거잖아."

"일 크게 만들기 싫어서 구해준 거 가지고 고마워할 만큼 우리 사이가 좋아 보여?"

"설마 이번 한 번으로 그동안 니들이 했던 짓을 갚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적반하장식 날 선 반응에 한유빈의 이마에 난 핏줄이 꿈틀거렸다.

"하하...."

분노를 감추기 위해 애써 웃어봤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감사는 염병, 이제 와서 이미지 세탁하는 거야, 뭐야."

"영웅 행세하고 싶은 거면 번지수 잘 못 찾았어."

"본부장들이 하는 짓거리야 뻔하지."

한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더는 참아줄 이유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목숨 걸고 작전을 수행한 그를 욕보이게 할 순 없다.

한유빈이 주먹을 꽉 움켜쥐는 순간.

"고맙습니다."

손종현 길드장이 김준우와 작전 1팀에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기, 길드장님…!"

"인정할 건 해야지. 저 사람들 덕에 살았잖아."

하지만 이내 손종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그거고.... 우리 애들 말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종현 길드장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김준우 본부장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번 일로 협회와의 사이가 개선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우리 입장이 된다면 이해하실 거라...."

"참 나."

잠자코 듣고 있던 김준우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대체 어디까지 이해해주길 바라는 겁니까?"

"네?"

"이봐요, 손종현 길드장님."

김준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내가 그렇게 개 호구로 보여요?"

***

사실 손종현이 다가와서 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큼지막한 스킬을 쏟아부은 통에 몸과 정신이 피로해져서 멍한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당신들 딱한 사정 모르는 거 아닙니다. 그동안 협회가 길드에 못 할 짓 한 것도 다 압니다. 근데 이건 방법이 틀려도 너무 틀렸습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낸 피해액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십니까?"

손종현 길드장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도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참 나, 우리가 무슨 자선 사업가입니까?"

"우리가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오죽하면 뭐요. 어려운 사람은 뭔 짓을 해도 용서된답니까? 아니 애초에, 여기서 당신들만 어렵습니까?"

"...."

그 말에 손종현 길드장은 입을 닫았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쪽 처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의도적으로 무게를 실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들이 어떤 이유로 인터셉트를 했든 나와는 딱히 상관이 없다.

당장 나갈 날이 정해진 사람한테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에게는 그것보다 그저 앞으로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대충 덮어놓고 넘어갔다간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다만, 관계 개선을 위해선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필요했다.

저들이 원하는 게 있다면 최대한 맞춰주면 된다.

물론.

일을 벌인 책임은 분명히 해야겠지만.

나는 미리 챙겨뒀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당연하겠지만 오늘 있었던 일에 책임은 져 주셔야겠습니다. 설마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모두의 낯빛이 퍽 어두워졌다.

정식으로 피해액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그들은 파산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나 또한 법정 싸움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선 제압이니까.

애초에 손해배상을 청구한다고 해서 제대로 받을까 싶기도 하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어난 사람들인데, 뭐가 있을 리도 없고. 괜히 협회 이미지만 더 안 좋아질 게 뻔하다.

그러니 보다 현실적인 타협안이 좋다.

최대한 문제가 덜 생기는 방향으로.

"여러분 모두, 당분간 협회 소속으로 토벌을 진행하면서 토벌 수익금으로 피해액을 변제해 주셔야겠습니다."

가진 게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뭐.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 밑에서 공짜로 토벌을 하라는 겁니까?"

"예. 그린 등급 기준으로 길드 당 대충 10개씩만 토벌하시면 되겠군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꺼냈던 서류를 각 길드의 대표들에게 한 장씩을 건넸다.

"쭉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피해액을 모두 변제한 이후부턴 토벌 수익금의 5%를 협회에 지급하는 조건으로 매월 일정 이상의 토벌권을 보장해드린다는 내용의 계약서입니다."

그 순간, 모든 길드장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뭐, 뭐라고요?"

"토, 토벌권을 보장한다는 건, 그러니까...."

차마 말도 잘 나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대충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이후로는 토벌 건에 대해 합리적인 계약을 맺을까 합니다. 현실적으로 협회에서만 모든 토벌을 진행하는 건 현재 어렵기도 하고요."

길드장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태까지 길드가 수년간 협회에 요구했지만, 협회에선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

이능차원협회 및 민간 길드 간 협력업체 체결 계약서였으니까.

그것도 매우, 매우 합리적인 조건으로.

"마, 말도 안 돼...."

"이거 정말입니까…?"

길드의 대표들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쪽에서 바라던 거 아닙니까?"

"하, 하지만 왜 굳이 이제 와서...."

"그동안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으면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나는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 보자, 이유라....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본부장은 접니다. 제가 필요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

"...."

물론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대답했음에도 분위기가 퍽 이상했다. 협회 쪽 인원은 묘하게 쓴웃음을 지었고.

뭐야. 내가 뭐 못할 말이라도 했나?

아무튼, 급한 불을 껐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아 맞다.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이번 인터셉트를 사주한 자가 양민호 헌터가 맞습니까?"

"...!"

길드장들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했다.

'역시.'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가서 손을 봐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귀찮게 뭘 또 찾아가냐.'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괜히 또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되도록 그 새끼랑은 별로 엮이고 싶지도 않았고.

"청소팀."

한유빈 쪽으로 몸을 틀며 입을 열었다.

"인터셉트 당한 던전, 그대로 두면 안 되니까 청소 작업 들어가세요. 작업 지휘는 한유빈 씨한테 맡기겠습니다."

"그거야 상관없는데… 우리끼리 작업하기엔 양이 너무 많은데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길드 분들이 도와주실 겁니다."

각 길드의 대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죠?"

"네!"

"무, 물론입니다!"

물어 뭐하겠는가.

지금이라면 뭘 시켜도 좋다고 할 기세인데.

"김민주 팀장은 작전팀 데리고 현장 수습하고, 편 팀장님은 계약서 잘 받아서 바로 본부로 복귀하세요. 해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김민주와 편 팀장은 짧게 대답하곤 각자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

본부장으로서 일을 마치고 옅은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생존자들은 하나둘씩 구급차에 실려 이송되고 있었고, 과열되었던 분위기도 차차 가라앉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들것에 실려 가던 손종현의 아내가 의식을 찾은 듯 내게 말했다.

"저희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트렸네요.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다들 무사하니 됐습니다. 물론 인터셉트는 너무하긴 하셨지만요. 오렌지 등급 던전을 인터셉트 하시려던 건 좀 무모했습니다."

"저희도 오렌지 등급이라는 걸 알았으면 안 들어갔을 거예요. 사전에 블루 등급이라고 들었거든요."

"...예?"

지금 뭐라고?

"정말입니까? 여길 블루 등급인 줄 알았다고요?"

"네. 아무래도 정보 전달에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

"아무튼,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손종현의 아내가 쓰게 웃었다.

한편 내 눈엔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종현 아내의 말대로라면 인터셉트할 던전의 정보는 양민호가 준 거다.

그런데 양민호쯤 되는 인물이 던전 정보를 착각했다? 그것도 오렌지 등급을 블루 등급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등급을 모르면 몰랐지, 4등급이나 착각했을 리가 없다.

그 새끼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잘못된 정보를 준 거다.

그 결과 민간 길드는 오렌지 던전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연히 민간 길드가 오렌지 던전을 토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

그 새끼는 그냥....

'누군가 죽었으면 한 거군.'

기어이 선을 넘네, 이 미친 새끼가.

066

066

이태원 인근에 위치한 작은 바.

[긴급 뉴스입니다.]

구석에 있는 아날로그 TV에서 한창이던 야구 중계를 끊고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6시부터 서울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대규모 인터셉트 사건이 오후 10시 30분경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별 관심이 없던 양민호조차 흠칫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양민호는 술잔을 든 채 굳은 표정으로 TV를 바라봤다.

[인터셉트를 진행하던 얼그레이 길드가 실수로 오렌지 등급 던전에 진입하면서 연락이 두절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새로 부임한 이능차원협회 김준우 작전 본부장과 작전 1팀이 곧바로 구조 작전에 착수, 길드원 전원을 무사히 구조했습니다.]

바에 있던 손님들은 대부분 다행이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그 소식이 양민호에게는 다행일 리 없다.

[또한, 김준우 본부장은 오늘 일어난 인터셉트에 대해선 길드와 협회 간의 협력 관계로써 책임을 지게 하는 동시에, 서울 내 모든 길드와 합리적인 조건으로 협력업체 체결을 맺었습니다. 이 사실이 시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며, 또다시 김준우 본부장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양민호는 결국 TV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하...."

본인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협회와 협력 관계?

합리적인 조건?

'저거 진짜 미친 새낀가…?'

양민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정훈 의원이었다.

"...예."

「뭐, 뭐가 어떻게 된 건가! 협회가 왜 길드랑 협력업체 계약을 체결한 거야?!」

"저도 예상치 못한 일이군요."

「예상치 못한 일이라니! 자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나! 선거가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협회 지지도만 오르게 생겼어.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건가!」

"의원님."

양민호의 목소리가 팍 가라앉았다.

"지금 누구한테 큰소리 내는 겁니까?"

「....」

정훈 의원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저로서도 유감입니다. 의원님도 의원님이지만, 저도 커리어에 흠집 나게 생겼군요."

「자, 잠깐! 자네 설마 여기서 그만둔다는…!」

"의원님도 지금 뉴스 보셨을 거 아닙니까. 저 새끼, 생각보다 훨씬 또라이입니다. 여기서 더 나가다간 서로 위험해질 것 같으니 이쯤에서 각자 손 떼는 게 좋을 겁니다."

뚝―.

양민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설마하니 저 상황에서 길드를 품을 생각을 할 줄이야.

길드를 대신해 구조 작전을 진행한 것도 모자라, 몇 년 동안 길드가 그토록 원하던 협력 계약까지 체결해버렸다.

길드 여론은 이미 협회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다면 자신이 인터셉트를 사주했다는 게 그 미친놈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물론 한국 협회 본부장 신분으로 자신을 건드릴 수야 없겠지만… 괜히 더 시끄러워졌다간 '그쪽' 일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당분간은 좀 쉬어야겠군.'

그렇게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어디가?"

살기가 느껴지는 나지막한 어조의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일단 앉아. 할 얘기 있으니까."

"...."

남자와 마주한 순간, 양민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방금 뉴스의 주인공, 김준우 본부장이었다.

'이 새끼가 여길 어떻게 알고...!'

양민호는 물론 그를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알고 있는 것과 별개로, 그가 자신을 알 리가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아, 가만히 서서 남자를 노려보던 그때.

"앉으라고 새끼야. 다리 접어 버리기 전에."

남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TV에서 봤던 그 맥 빠진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심으로 상대를 잡아먹으려는 기세.

현 국내 1위의 헌터마저 주춤하게 만드는 기세였다.

***

"...."

양민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끝이 없을 것 같아 양민호의 옆자리에 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좀 다사다난했지?"

"...절 아십니까?"

이제 와서 시치미를 뗀다고?

어처구니가 없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니 알 바 아니고."

등받이에 등을 팍 기대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니가 뭔 의뢰를 받았든, 뭔 개짓거리를 하든 내가 신경 쓸 건 아닌데… 최소한 선은 지켰어야지. 헌터라는 새끼가 사람 목숨으로 장난을 쳐?"

"…하하, 하하하."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린 순간.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음성이 재생되었다.

[습득 패시브 : 결벽증]

[패시브 발동]

"야, 웃겨?"

"...."

어디까지 미친놈인지 모르겠다.

의뢰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새끼인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뭐, 다 알고 오신 것 같으니 더 발뺌도 못 하겠군요."

양민호는 순순히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다 드러난 마당에 더 할 말이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제가 누굴 죽이기라도 했답니까? 설마 던전 등급 좀 잘못 알려줬다고...."

"개소리 그만 지껄여. 일부러 잘못 알려준 거 내가 모를까 봐?"

"생각보다 눈치가 좋으시네."

양민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거기엔 경계심도 섞여 있었다. 전생에 날 보던 표정과 비슷해졌다.

"아무튼, 오늘은 피곤하기도 하고 다 끝난 마당에 또 일 벌이고 싶진 않으니까 이번 한 번은 조용히 넘어가지. 대신...."

검지로 양민호의 가슴을 짚었다.

"앞으론 내 눈에 띄지 마. 한 번 더 내 일에 끼어들면 그땐 가만 안 둔다."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데요. 당신이 협회에서나 작전 본부장이지, 나한테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 친절한 경고를 무시하겠다?"

"그렇다면?"

"잠깐 던전으로 따라올래? 죽여 버리게."

"하하, 청소부 출신이 허세는...."

양민호가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설마 제가 누군지 모르시는 건 아니죠?"

"알아."

"그럼 대체 무슨 자신감인 거죠."

양민호가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선 아까와는 다른 기세가 느껴졌다.

'참 나, 꼴에 국내 1위라고 자존심은.'

눈도 못 마주치던 새끼가.

"제가 던전 밖에선 힘 못 쓸 거라고 세게 나오시는 것 같은데, 저 프리랜서입니다. 자격 정지 먹는 거 딱히 신경 안 써요."

"야, 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고개를 숙였다.

현 공식적인 국내 1위, 양민호.

마법사 클래스의 헌터.

회귀 전에도 내 바로 뒤를 이어, 국내 2위로 꽤나 이름을 날린 놈.

동시에.

"나는 아닐 거 같냐?"

죽는 그 날까지 내 발끝에도 못 미친 애송이 새끼.

"...."

"...."

잠시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겨,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사람 그 사람이잖아. 김준우 본부장!"

"김준우 본부장이 여기 왜 있어?"

"일단 협회에 신고해봐. 싸움 날 거 같으니까."

주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양민호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손님 중 한 명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등을 돌렸다.

"앞으로 조심해. 만약 또 선을 넘으면...."

다급하게 가게를 빠져나가려는 양민호의 등에 대고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너 그땐 진짜 죽어."

***

협회, 서울 본부.

작전 본부장실.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차석현 길드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귀에 꽂혔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민망합니다."

「하하하!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디 보통 일이었습니까, 그게.」

이미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대체 뭐 그렇게 오바들을 하는지 참.

「한 개 작전팀만으로 오렌지 등급 구조 작전에 성공했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력 좋은 헌터들이라고 해도 오렌지 등급 이상부턴 지휘에 따라 토벌 성공 여부가 갈리는데… 정말이지 청소부 출신이라곤 믿기 힘들 정돕니다.」

"하하...."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멋쩍게 웃었다.

그 1개 작전팀이 실질적으론 아무 도움도 못 됐다는 건 굳이 말해봤자 괜히 쓸데없이 이야기를 키우는 거니 잠자코 있었다.

「큼큼, 아무튼 본론은 그게 아니고....」

차석현이 화제를 전환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 길드도 협력 계약을 해주시는 겁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저희는 현장에 있었던 게 아니라서 계약서를 못 받았는데.... 하, 하하!」

본인이 말하고도 멋쩍은 듯 괜히 웃는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한 장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아프로디테 길드는....」

"같은 주소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원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180도 반응이 달랐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본부장님!」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내자 편 팀장이 사무실에서 다소곳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건가 싶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경영부에서 저번 주 인터셉트로 인한 구체적인 피해액을 집계했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됐습니다. 이제 와서 뭐. 다른 건요?"

"다른 건 뭐... 결과적으론 다 좋습니다."

편 팀장이 서류를 펄럭이며 미소를 띠었다.

"이번에 계약한 길드의 의욕이 대단합니다. 저번 주 대비 토벌량이 40%나 상승했습니다. 어차피 지금 작전팀 인원으로는 월 100개가 한계였는데, 아무런 지출 없이 40개 던전을 추가로 토벌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이득이긴 합니다. 토벌 수익에 5%를 공짜로 받는 셈이니까요."

"그렇군요."

"손해를 보고 시작하긴 했지만, 이 속도라면 피해액도 금방 메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 팀장은 서류철을 탁 덮었다.

"대단하십니다. 설마 여기까지 생각하시고 계실 줄은.... 순간이나마 일 크게 벌이기 귀찮아서 그냥 던진 말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창피해지네요."

"...창피해하실 거 없습니다."

사실 그게 맞으니까.

"거기에 협회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한 것도 그렇고... 본부장님도 이번 일로 입지를 아주 확실히 다지셨습니다. 이 시대에 두 번 없을 참된 리더라고들 하더군요. 뭐, 동의하는 바이긴 합니다. 하하하!"

"별...."

퇴사까지 3주 남았는데 이제 와서 입지를 다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편 팀장 또한 내가 곧 퇴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뭐, 어쨌든 다 좋다니까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제 서울 내 프리랜서를 제외한 모든 헌터는 협회 소속이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앞으론 인원이 모자랄 일은 없겠죠?"

"그럼요. 토벌 쪽으론 크게 문제없을 겁니다."

그거면 됐다.

원래 상정했던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다행이군요. 아, 연구 시설 증축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직 공사 중이긴 한데, 장비는 벌써 몇 대 들어왔답니다. 뭐… 이아영 실장은 완공될 때까지 언제 기다리냐며 벌써 시간석 연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성격 하고는....

뭐, 그 사람답다.

등받이에 등을 팍 기댔다.

어쨌든 하룻밤의 해프닝도 여차여차 해결됐다.

윗분들 귀엔 일절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지만… 뭐, 대놓고 뉴스까지 탄 마당에 그럴 수는 없었다.

덕분에 이두식 이사한테 아침 댓바람부터 한소리 들었지만, 다행히 협회장에게선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양민호도 그날 이후론 딱히 들려오는 말도 없으니 이걸로 마무리.

퇴사 때까진 당분간은 조금 쉬어도....

"보, 본부장님! 편 팀장님! 긴급 상황입니다!"

"...빌어먹을."

행복회로 돌릴 틈도 없다는 듯, 황동휘 대리가 사무실 문을 격하게 열어젖히며 등장했다.

"대체 또 뭡니까...."

"일전에 인천항 부근에서 포착한 이능파 말입니다! 우리 예상이 맞았어요."

나와 편 팀장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수중 던전이 출현했습니다."

황동휘 팀장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등급은요. 등급은 어떻게 됩니까?"

"레드 등급입니다.

미치겠군.

"작전팀 전원 소집해주십시오. 지금 당장."

바로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067

067

프랑스 파리.

국제 협회 산하 기구, 퍼팩트 밸런스 코퍼레이션(PB Corporation).

그 건물 지하 17층에 위치한 뱅크 아이템 관리팀 부설, 컨트롤 센터.

"이능파 감도 안정적입니다."

"좌표 확인 바랍니다."

"북위 37.3도, 동경 126.5도."

"입력 완료했습니다."

"모든 시스템 준비됐습니다. 가동할까요?"

늦은 밤이었음에도 그곳에 있는 많은 직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 공간 전체에 깔린 이름 모를 복잡한 기계들과 모니터, 온갖 제어 장비.

마치 항공 우주국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물론 여기선 우주선이 아닌 웬 보라색 돌멩이를 다루는 중이었지만.

"가동해."

이윽고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의 명령이 떨어졌다.

"차원석 가동!"

"카운트 다운 시작합니다."

"출현까지 앞으로 십, 구, 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모든 직원의 시선이 한 모니터에 쏠렸다.

모두가 숨죽인 채 기다리길 잠시.

"생성 성공했습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동시에 짤막한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좌표 확인해 봐."

하지만 클로이는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는 듯 일갈했다.

"오차 없습니다. 정확하게 한국, 인천항 근처입니다."

"좋아. 차원석 상태는?"

"안정적입니다. 이 정도면 일주일 이상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클로이 또한 긴장을 풀었다.

그리곤 곧바로 위성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클로이입니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여전히 품격 있는 우아한 목소리.

PB코퍼레이션의 대표, 에마가 물었다.

"방금 던전 생성 성공했습니다."

「등급은?」

"레드 등급입니다."

「호오, 오랜만에 쓰는 건데도 꽤나 상태가 좋군요.」

에마 대표가 작게 웃는다.

「그래서? 차원석까지 써서 이제 뭘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던전을 생성하는 것과 시간석을 회수하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일단은 한국 협회가 토벌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입니다."

「아, 혹시 토벌이 시작된 틈을 타서 시간석을 탈취해 온다거나?」

"아닙니다. 물론 못할 거야 없지만 굳이 무력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협회 정도 되는 조직을 상대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리스크가 상당하니."

「그럼…?」

"최대한 합법적으로 가야죠. 이번 던전을 미끼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적대적 인수합병.

그 말에 에마 대표는 조금 놀란 듯 대답을 아꼈다.

협회끼리의 '적대적 인수합병'은 일반 기업과는 그 의미가 크게 달랐던 까닭이었다.

그것은 곧 협회끼리의 전쟁을 뜻하는 말이었으니.

"그렇군요. 적대적 인수합병이라… 클로이 팀장,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무서운 사람이네요."

"과찬이십니다."

클로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컨트롤 센터 중앙에 설치된 유리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꺼운 유리관 안에는 보라색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차원석.

시간석과 같이 국제 협회에서 지정한 '뱅크 아이템' 중 하나.

이능파를 조정해 인공적으로 차원을 열어 던전을 출현시킬 수 있는 아이템.

현재 밸런스 팀에서 가지고 있는 차원석은 5년 전, 필리핀에서 출현한 레드 등급의 차원형 던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협회 간 양도 불가' 규칙에 따라 필리핀 협회가 계속 보관해 왔지만, 뱅크 아이템이 다른 협회 손에 들어가 있는 걸 극도로 꺼리던 사무총장이 그것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때문에 당시 독립 협회였던 필리핀 협회를 거액에 인수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뱅크 아이템을 양도받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차원석은 국제 협회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대부분의 뱅크 아이템 또한 이러한 방법을 통해 회수해왔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독립 협회 입장에서도 국제 협회와의 인수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 빌어먹을 한국 협회를 제외한다면.

'하여간 아시안 놈들, 자존심만 세 가지고.'

클로이가 혀를 찼다.

물론 인수를 거부하는 독립 협회가 한국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만큼은 사안이 조금 달랐다.

시간석이 그들에게 있었으니까.

「아무튼, 케인 팀장이랑 잘 얘기해서 진행해 봐요. 난 다른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신경 못 써줄 거 같으니까.」

"다른 프로젝트라면…?"

「이번에 마르크 팀장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슬슬 헌터들 밸런스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이 나왔어요. 뭐, 말 나온 김에 미리 준비를 좀 해둘 생각이에요.」

"아, 벌써 그럴 시기인가요."

에마 대표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애들은 워낙 배우는 게 빠르다니까? 저번에 듣자 하니 무슨 B랭크인데 고유 클래스를 각성한 친구도 있다고 하고....」

그렇죠, 클로이가 작게 대답했다.

「아, 그건 그렇고… 그 이레귤러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서울 작전 본부장 말이에요. 마르크 팀장 말로는 너무 대중에게 드러난 인물이라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곤 하는데.」

"이번 작전을 겸해서 같이 처리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 변수는 미리미리 손을 써놓는 게 좋겠죠."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뭐, 다른 팀 업무 대신해준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마르크 팀장이 좋아하겠네.」

"네… 그럼 이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계속 수고해줘요.」

통화를 마치고 클로이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통신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윽고 들려오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

헌터 밸런스 조정팀 소속의 한국 담당자였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어떻게, 요즘 잘 지내요?"

「그럭저럭. 이번 의뢰에 실패했다는 것만 빼면.」

클로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별일이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당신이 맡아줄 일이 있어요."

「…밸런스 조정 건입니까?」

"네."

「타깃은?」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준우 김이라고. 한국 협회 소속 작전 본부장이에요."

젊은 남자의 대답이 끊겼다.

영문을 모르는 클로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할 수 있죠?"

「...물론입니다.」

"정체가 발각되지 않는 선에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마세요. 뒤처리는 우리가 해 줄 테니까."

「그러도록 하죠.」

"아 그리고, 조만간 우리 팀에서 뱅크 아이템 회수 업무도 같이 들어갈 거에요. 혼선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요. 작전 기획서 보내드릴 테니 한 번 읽어보시고."

「알겠습니다.」

클로이는 통화를 마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바빠지겠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앞으로는 제때 퇴근할 생각은 깔끔히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 회사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

서울 본부, 통제팀.

회의실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채였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김민주 팀장을 비롯한 10개 작전 팀장들과 이아영 실장, 편창현 팀장까지 모두가 참석한 회의였다.

"수, 수중 던전이요?"

간략한 브리핑을 마치자 이아영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게다가 황동휘 대리 말로는 레드 등급으로 추정된답니다."

"…아이고."

"야단났네...."

여기저기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나름 베테랑이라는 이들이 저렇게 반응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수중 던전.

지상에 출현하는 일반 던전과 달리 깊은 바닷속에 출현하는 특수 던전.

기본적인 구조는 일반 던전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물속에서 토벌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땅에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도 힘들뿐더러 특수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토벌을 진행해야 하기에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수중 던전이 힘든 건 바로 물속이라는 공포감.

자칫 전투 중에 물이라도 먹기 시작하면 패닉에 빠지기 쉽다.

안 그래도 긴장하지 않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던전에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레드 등급의 수중 던전이라니.

작전 팀장들마저 막막하게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나마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던 김민주 팀장이 물었다.

"작전 개시일은 언제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빠르면 다음 주. 레드 등급이라 오래 두면 위험하니."

몬스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던전에서 빠져나와 도심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하는 시점은 옐로우 기준 한 달.

당연히 헌터들은 몬스터가 탈출하기 전에 토벌해야 하지만, 지상 던전이야 딱히 그런 걸 신경 쓰진 않는다. 워낙 헌터가 많으니 기간에는 무조건 토벌이 되니까.

다만 레드 던전은 탈출 시점이 불분명하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충남에 출현했던 레드 등급 던전에서 사흘 만에 몬스터가 탈출한 기록도 있었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이아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수중 던전인 만큼 특수 장비가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까지 준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정이 빠듯하긴 한데... 가능은 할 것 같네요."

이아영이 턱을 감싼 채 대답했다.

"작전팀은 어떻습니까. 레드 등급이라 인원이 상당히 필요할 겁니다. 그렇다고 다른 토벌 일정을 무시할 순 없을 테고. 이번 작전에 참가 가능한 인원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전원 투입은 어렵긴 하겠지만, 길드에 협력 작전 요청하면 인원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편 팀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통제팀은 추가적인 던전 정보 파악하는 대로 저한테 보고하지 말고 바로 작전팀으로 넘겨주세요. 김민주 팀장은 오늘부터 작전 회의 들어가 주시고요."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이번에도 다들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홀로 남은 회의실.

정리했던 서류를 다시 뒤적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전히 께름칙한 부분이 남았다.

'대체 전생에서도 없었던 던전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걸까....'

과거에는 없었던 던전이 뜬금없이 출현하다니.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짚어봤지만, 이렇다 할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누군가 인공적으로 던전을 생성했다, 정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상황이 너무 복잡해진다.

던전을 생성하기 위한 차원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걸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뱅크 아이템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진 인원들도 대거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단체라고 하면... 역시 국제 협회밖에 없다.

근데 그들이 굳이 인천 앞바다에 던전을 생성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길게 늘어뜨렸다.

'뭐, 어떻게든 억지로 끼워 맞춰 본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국제 협회 놈들이 이전부터 눈엣가시였던 한국 협회를 흡수하려고 일부러 까다로운 던전을 열어 사고를 유도하는 거라면?

혹은 전생에서와 달리 시간석을 탈취하지 못한 미국 지부가 시간석을 회수하기 위해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너무 소설이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되지. 국제 협회가 뭐가 아쉽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래, 꼭 전생이랑 똑같이 흘러간다는 법도 없는데 조금은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니까.

068

068

서울 어딘가, 오래된 건물의 허름한 사무실.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다 찢어진 소파 하나.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바로 양민호의 사무실이었다.

띠링―.

반쯤 드러누워 신문을 보고 있는데 양민호의 핸드폰으로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밸런스 조정팀에서 일전에 보내 주기로 했던 작전 기획서였다.

"빨리도 보내 주네."

양민호는 퍽 귀찮은 표정으로 pdf 파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반도 채 읽어보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밋밋하네.'

양민호는 미간을 구겼다.

한국 협회를 박살 내겠대서 대놓고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건 줄 알았건만, 고작 한다는 게 적대적 인수합병이라니.

심지어 그 방법마저도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 사무직이 세운 작전은....'

양민호는 혀를 쳤다.

그리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국내 랭킹 1위. 마법사 클래스.

프리랜서 헌터이자 해결사.

여기까지가 이 바닥에서 알려진 그의 정보였다.

협회는 물론 길드와 다른 프리랜서들 또한 양민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그중에 그의 진짜 소속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국제 헌터 협회 산하 기구, PB 코퍼레이션 소속.

헌터 밸런스 조정팀, 한국 담당.

양민호는 통칭 '현장직'이라 불리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현장직의 업무는 국제 협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과 미등록 헌터 및 밸런스를 흔드는 헌터를 처리하는 것.

듣자 하니 한국에 본인 외에도 몇 명의 현장직이 더 있다던데… 그들이 누구인지까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PB 코퍼레이션의 현장직으로 스카우트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니 더욱 그랬다.

1년 전쯤. 국내 랭킹 1위를 달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창 해결사 활동을 하며 '청소부'라는 별명이 이 바닥에 퍼지기 시작했던 그 당시,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성이 양민호를 찾아왔다.

마르크라고 이름을 밟힌 그는 자신을 PB코퍼레이션 소속의 헌터 밸런스 조정팀장이라 소개했다.

양민호는 당연히 코웃음을 쳤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국제 협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배제하고 전 세계 모든 토벌권을 통제하려는 비밀 조직에 관한 이야기.

헌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괴담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 퍼트린 인물이 누군지 아나?

그날, 마르크 팀장은 그렇게 말했다.

-아마 전 세계 그 누구도 모를 거야. 존재 자체가 삭제됐거든. 뭐…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발설하면 자네도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도저히 허세나 농담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말투였다.

그쯤 되니 양민호 또한 남성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PB 코퍼레이션에서 그를 스카우트 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전부터 그의 해결사 활동을 유심히 보았고, 앞으로는 자신들을 위해 사용해주길 바랐다.

더불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활동이 자유로운 상위 랭커였다는 사실도 긍정적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양민호는 잠깐 고민하던 끝에 마르크의 제안을 수락했다.

해결사 일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뿐더러, 나름 재미있어 보였다. 게다가 그가 내건 금액이 꽤나 거액이기도 했고.

그렇게 1년 동안 현장직으로 활동하며 몇 개의 임무를 받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처음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진 않았다.

뭔가 다른 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지만, 실상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을 받고 일을 맡아 처리한다.

그저 그것뿐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김준우 본부장....'

느낌상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만날 놈이다.

그때가 되면 마냥 정의감 넘치고 올곧기만 한 그놈이 자신 앞에선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빌 게 될 거란 생각에 꽤나 고대하고 있었는데....

'밸런스 조정팀에서 먼저 선수를 쳐버리다니.'

업무가 되어버린 이상, 개인적인 욕심으로 일을 처리할 순 없다. 괜히 일이 난잡해지면 회사에서도 싫어할 테고.

'그러게 살고 싶었으면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왜 쓸데없이 나대서....'

죽고 싶지 않으면 눈에 띄지 말라더니, 정작 본인이 더 눈에 띄어 버렸다. 그것도 PB 코퍼레이션 눈에.

'제 명이지 뭐.'

양민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개인적으로 상대할 수 없는 건 꽤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담백하게 가는 수밖에.

***

이번 작전 협력 요청을 위해 찾은 아레스 길드 사무실.

"당연히 오케이입니다."

차석현 길드장이 즉답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옆에 앉은 여성을 바라봤다.

"유지우 씨는 어떻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꼭 참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도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니."

"저희도 당연히 참가해야죠."

유지우, 아프로디테 길드의 대표 또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흔쾌히 수락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사람들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건가.

왠지 불안한데....

"다들 가능하시다니 다행이군요. 필요한 장비는 저희 쪽에서 지원할 예정입니다. 각 길드에서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대충 얼마나 될까요?"

차석현이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실력 있는 놈들로만 추리면... 대충 열 명 정도 될 겁니다. 물론 저 포함해서!"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명단이 나오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토벌대에 명단 올려놓겠습니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찰나, 차석현 길드장이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 작전, 혹시 본부장님도 참가하십니까?"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작전 팀장 중 한 명이 열렬히 반대하더군요."

본부장씩이나 됐으면서 또 위험을 감수하는 게 말이 되냐면서 말이지.

남 걱정할 거면 본인부터 걱정하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관뒀다.

"아쉽게 됐군요. 꼭 한 번 본부장님과 함께 작전에 나가보고 싶었는데!"

"뭐, 작전이 이번만 있겠습니까."

"그렇죠. 다음에는 꼭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차석현이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아! 혹시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혹시 본부장님... 헌터십니까?"

"...."

순간 눈썹이 꿈틀했다.

굳이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굳이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같이 작전에 나선 적도 없는 저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처음에 청소부 출신이라고 들었을 땐 당연히 일반인인 줄 알았는데.... 뉴스에서 얼굴을 딱 보는 순간, 아무리 봐도 일반인은 아닌 것 같더군요. 뭐랄까, 눈빛이 약간 짐승 같다고 해야 하나."

…시비 거는 거지?

"그런데 이번 구출 작전을 직접 지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싶더군요. 어떤 청소부가 오렌지 등급 던전에 제 발로 들어갈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깡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하하하!"

나에 대한 감상은 제쳐놓고라도, 역시 덩치에 안 어울리게 눈치가 빠른 놈이다.

"뭐, 이능력자는 맞습니다."

"역시! 그럼 혹시, 랭킹이 어떻게 되십니까?"

"헌터는 아닙니다. 랭크 등록을 안 했으니까요."

차석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굳이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뭐 급한 것도 아니고, 나중에 필요하면 할 예정입니다."

"그러시다면 뭐... 그래도 되도록 빨리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유라도 있습니까."

"왜,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국제 협회에 비밀 조직이 있는데, 그들이 위협될 만한 인물이나 미등록 헌터를 찾아 죽인다는...."

"하하하...."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웃음이 터졌다.

이전에 한유빈도 언급한 적이 있고, 무엇보다 전생에서도 한때 꽤나 유행했던 이야기였으니까.

다만 그건 그냥 괴담이지 않은가.

"그런 걸 믿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글쎄요...."

차석현은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목소리를 깔며 말을 이었다.

"이유 없는 괴담은 없다지 않습니까."

그리곤 곧바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뭐… 조언 감사합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적당히 대답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준비하는 대로 연락드리죠."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건물을 나오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작전 준비는 큰 문제 없이 순탄하다.

인원도 충분, 지원도 충분.

지원팀의 장비도 훨씬 좋아졌고, 통제팀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작전팀 헌터들도 큼지막한 작전을 몇 번 겪으니 자신감이 붙어 있었고, 무엇보다 김민주도 이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칼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회귀 후 첫 레드 등급 작전.

하지만 내가 작전권을 잡은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이아영 실장이었다.

「미팅은 끝났어요?」

"예, 끝났습니다. 점심 먹고 복귀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그럼 복귀하면 관리실 한 번 들려요. 부탁하신 장비랑 수중 전투용 슈트 다 준비됐으니까.」

"벌써 완료했습니까? 생각보다 꽤나 빨리 제작됐군요."

「음? 제작한 거 아니에요. 예전에 쓰다 남은 거 몇 개 고치고, 부족한 건 해외에서 급하게 가져온 건데.」

"…중고라는 거군요."

「설마 그거 가지고 뭐라 하려는 건 아니죠? 이렇게 안 하면 작전 일정엔 죽어도 못 맞추거든요?」

이아영 실장이 톡 쏘아붙였다.

나 또한 뭐라 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일정에 맞춰 장비를 준비해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아, 그리고 슈트는 일정도 그렇고 물량 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작전 참가 인원에 딱 맞춰서 준비했어요. 여분은 없으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세요.」

"…? 그게 뭔 소립니까."

「나중에라도 작전 참가할 생각 말라는 소리예요. 당신, 부하들이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잖아요.」

"...?"

내가?

대체 언제?

혹시 돌려 까는 건가?

「암튼 위험한 일에는 적당히 빠지고 그래요. 그동안 고생깨나 했잖아요? 조금 농땡이 부린다고 뭐라 그럴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시간석 연구는 진척이 좀 있습니까?"

이대론 잔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뭐, 어느 정도는?」

"뭔 대답이 그럽니까."

이아영 실장이 모호한 신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루프 던전은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까지 시간이 루프 되잖아요. 아무래도 그 힘이 시간석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그것참 대단한 발견이군요...."

그 정도는 누구든 추측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고작 그거 알아내려고 500억을 갈아 마신 거야?

「근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거 던전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또 어디에 적용이 되는 겁니까."

「그건 몰라요. 더 연구를 해봐야겠는데, 일단은 공간뿐만 아니라 물체나 인체에도 적용이 되지 않을까 추측은 하고 있어요.」

추측은 하고 있다.

결국, 알아낸 게 없다는 소리지 않은가.

뭐라 한소리 해야 하나 싶던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아영 씨."

「네?」

"혹시 괴담 같은 거 믿는 편입니까?"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설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069

069

작전 당일, 인천항.

매우 중요한 작전인 만큼 인천항을 포함한 주변은 완전 통제가 이루어졌다.

온갖 매체가 해당 작전의 취재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지만, 모두 통제선에 막혀 멀리서 사진만 찍어댈 뿐이었다.

현장에 모인 토벌대는 차분히 작전을 준비했다. 날이 선 듯한 긴장감 속, 슬슬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이내 확성기를 들었다.

"토벌대 집합해주십시오."

100여 명의 토벌대원이 순식간에 대열을 갖췄다.

"다들 숙지하셨겠지만, 이번 작전은 초 고위험군 등급입니다. 게다가 수중 던전인 만큼 첫 트라이로 토벌 성공엔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진행하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후퇴하시기 바랍니다."

"네!!!"

짧고 간결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번 작전의 리더는 김민주 팀장이 맡을 거고, 그녀를 비롯한 작전 1팀이 선두에 설 겁니다. 포지션은 전방 작전팀, 후방 길드팀으로 진행합니다. 다들 각자 포지션에서 이탈하는 일 없길 바랍니다."

이번 작전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토벌이 완료되기 전까지 나올 수 없는 일방형 던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험 요소가 많은 작전이니, 그 이점을 활용해서 여러 번에 나눠 토벌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럼 장비 체크 먼저 하겠습니다."

토벌대원들은 나를 따라 부품을 하나씩 짚으며 단체로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수중 전투를 위한 특수 장비, 골리앗 슈트.

호흡과 동시에 물속 저항을 줄여주는 하이테크 장비였다.

이번 작전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장비였지만, 이거 맞추느라 다음 분기 예산까지 모조리 끌어다 썼다는 걸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신수지 보좌관만 빼면....'

눈으로 그렇게 욕을 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니까.

5분간의 장비 체크를 마치고 다시 확성기를 들었다.

"만약 작전 진행 중에 작은 변수라도 생기면 바로 무전 주십시오. 제가 임시 본부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본부장님이 총 책임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아레스 길드의 차석현 길드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가벼운 웃음으로 화답하며 말을 이었다.

"통제팀 정보로는 '이모털 파이선'으로 이무기형 보스라고 합니다. 다만, 아직 매핑이 완료되지 않아서 작전을 진행하면서 직접 위치를 파악하셔야 합니다. 되도록 토벌을 지향하겠지만 정보가 부족하다 싶으면 리더 판단에 따라 행동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작전 개시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00여 명의 토벌대가 차례차례 바다로 입수하기 시작했다.

그때 김민주가 입수 준비를 마치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따 봬요."

"죽으러 가냐. 뭔 인사가 그래."

김민주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럼 만약에 진짜 죽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흐음, 이쪽에서 지시할 건데 그럴 리가 있겠냐. 그래도 진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 같으면...."

말하기를 잠시 망설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과연 이게 충고할 게 맞기나 한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쭙잖은 거였으니까.

"...그냥 직진해. 몸 사리지 말고."

그런데도 김민주는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그렇게 너무 진지하게 모든 걸 받아들여도 곤란한 데 말이지.

아무튼, 마지막 차례까지 입수한 걸 확인한 뒤, 인천항에 마련된 임시 작전 지휘실로 걸음을 옮겼다.

온갖 모니터와 통신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사이로 편 팀장을 비롯한 통제팀과 지원팀 인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나는 대충 아무 자리에나 앉으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작전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준비를 했다. 변수가 일어날 수 있는 부분도 모두 고려했다.

정보가 충분한 이상, 김민주 또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긴장은 되지만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것까진 없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청소팀을 같이 투입하지 않으셨네요. 매핑이나 정보 파악을 맡아줬으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편 팀장이 생각난 듯 넌지시 물었다.

"던전이 던전이잖습니까. 비토벌 인원이 같이 작전을 진행하기엔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죠. 애초에 첫 트라이에 토벌될 거란 보장도 없고요."

"6팀은요? 그 팀이라면 제격이잖습니까."

퍽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편 팀장 또한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나 또한 한유빈 팀의 투입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전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셉트 건으로 작업이 꽤나 밀려있던 터라 고사했다.

일반 던전 작업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것까지 시킬 순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작전은 영 불안하기도 하고.'

팔짱을 낀 채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김민주를 필두로 한 토벌대가 던전에 진입한 지도 30분이 경과했다.

내부는 평범한 동굴형 던전.

그렇다고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레드 등급인 이상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를뿐더러, 지상과 달리 수중에서는 길 찾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또 막다른 길입니다."

좁은 통로를 따라 전진하던 작전팀 헌터 한 명이 말했다.

김민주는 미간을 좁혔다.

그것도 잠시, 토벌대 전체에게 바로 무전을 날렸다.

"A-3 구역, 막다른 길입니다.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네."

그렇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며 김민주는 다시 한번 슈트에 달린 모니터를 확인했다.

던전 내부 매핑을 위해서였다.

'여기도 막다른 길. A-2랑 A-5도 막혀 있었으니까....'

지도에 체크를 마치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다른 길을 마주한 것도 이번이 벌써 4번째였다.

생각보다 위치 파악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히고 있었다.

다행히 산소는 아직까지 충분하다만, 지금처럼 계속 헤매기만 하다간 보스 방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후퇴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긴 근성만으로 토벌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일단 보스 방 위치까지만 탐색했다가 벗어나는 게 낫겠네.'

김민주는 그렇게 판단했다.

슈트의 무전기를 본부 채널로 돌렸다.

"작전팀 김민주입니다. 수신 바랍니다."

「통제팀, 수신했습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뇨. 매핑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토벌까진 진행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내부 파악만 마치고 복귀하겠습니다."

「알겠습니.... 그렇게… 하… 세....」

"통제팀, 통제팀?"

「…까? 잘… 통신… 확인....」

지지직―.

통신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더니 기어이 신호가 끊겼다.

김민주는 슈트 헬멧을 툭툭 두드렸지만, 여전히 기분 나쁜 전파음만 들려왔다.

물속이라 그런 건가.

김민주가 쯧, 혀를 찼다.

그리고 그 순간.

쿠구구궁―!

던전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동굴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내부가 심하게 요동쳤고, 토벌대 전원이 거센 물살에 휘말린 채 이리저리 부딪혔다.

"뭐 하고 있어! 빨리 균형 유지 장치 켜!"

"네, 네!"

쿠구구궁―.

토벌대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이후에도 진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지, 지진이라도 난 걸까요?"

다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퍽 당황한 모습이었다.

김민주 또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어찌해야 싶던 찰나 진동이 멈췄다.

"다들 괜찮습니까?"

"예."

"이상 없습니다."

다행히 피해는 없는 모양이었다.

김민주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계속 진행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죠."

정말 지진이 일어난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상황 파악도 안 되는데 통신까지 먹통이다.

안전을 위해선 이쯤에서 복귀하는 게 옳은 선택이다.

그녀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이내 토벌대는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두가 출구에 다다른 순간.

"뭐, 뭐야...?"

"다시 확인해봐. 여기 맞아?"

"여, 여기 맞는데?"

"그러면 여기 왜...."

토벌대 전체가 패닉에 휩싸였다.

눈앞에 놓인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

그건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김민주 또한 동공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녀의 공허한 목소리가 헬멧 안에 울려 퍼졌다.

***

PB코퍼레이션 본사.

뱅크 아이템 관리팀 부설, 컨트롤 센터.

"팀장님, 현재 본부 토벌대 전원 던전 진입했습니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팀원 한 명이 클로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인원은?"

"10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작전팀 인원만 따지면 6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60명이라...."

기대했던 것보단 적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서울 본부의 50%에 달하는 전력이었다.

"작전팀이 추가로 투입될 가능성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이대로 진행할까요?"

클로이는 대답 대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모두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었지만, 말 한마디로 얼굴도 모르는 헌터 수십 명의 목숨이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영 께름칙했다.

물론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소린 아니다.

말 그대로 뒤가 찝찝할 뿐이었다.

애초에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해선 이 방법밖엔 없기도 했고.

'그래도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인데....'

적대적 인수합병.

주식 싸움을 통해 특정 기업의 경영권을 빼앗는 행위지만, 협회 사이에서는 그 방식이 조금 다르다.

협회의 근간은 곧 헌터다.

주식 지분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결정되듯, 협회는 헌터의 지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협회 사이에서 일컫는 적대적 인수합병이란, 곧 한쪽 협회에 소속된 헌터의 지분을 빼앗거나....

혹은 없애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클로이 팀장은 비교적 비용이 덜 드는 후자를 선택했다.

에마 대표에게도 말했듯, 던전을 생성한 것은 이를 위한 미끼였다.

서울 본부의 전력을 던전으로 최대한 많이 유인한 뒤, 던전을 닫는다.

그 한 번의 조작으로 서울 본부 전력의 50%를 날려버릴 수 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헌터를 잃은 한국 협회는 내외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에 휩싸일 것이다.

여론은 60명의 헌터를 전멸시킨 협회에 대해 맹목적인 비난을 퍼부을 테고, 내부적으론 갑자기 생긴 공백을 수습하지 못하고 휘청이겠지.

그렇게 되면 한국 협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협회 매각.

그다음엔 토벌권 회수팀이 나서서 헐값에 내놓은 한국 협회를 꿀꺽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협회들 사이에서 말하는 적대적 인수합병이다.

물론 실제 사례도 거의 없을뿐더러, 지금처럼 굵직한 독립 협회를 상대로는 아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들킬 위험부담도 크고, 자칫 꼬리를 밟혔다간 합병을 추진한 쪽이 역풍을 맞아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이미 밑거름 작업은 모두 끝났다.

차원석까지 사용한 이상 꼬리를 밟힐 확률도 낮다.

뭐, 혹시 모를 걸림돌은 미리 제거를 해둬야겠지만.

'김준우....'

역시 제일 불안한 건 그놈이다.

미국 지부 헌터들을 압살할 정도의 이능력.

도저히 청소부 출신이라곤 믿을 수 없는 실적.

무엇보다 그 보수적인 서울 본부에서 입사 4개월 만에 작전 본부장을 꿰찬 미친놈.

이번 작전에서 그놈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그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레귤러인 이상 언젠간 제거해야 할 인물이다.

조금 앞당겨서 나쁠 건 없지.

'뭐, 그건 현장직이 알아서 할 일이고.'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하길 잠시.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차원석 가동 중지해."

"네."

클로이의 명령과 함께 컨트롤 센터의 모든 장비가 정지했다.

그것은 곧, 100명의 토벌대와 함께 던전이 닫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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