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엘라 비하크.'
소설 좀 읽어 봤다 하는 놈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고전 명작.
인터넷 발전으로 웹소설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전 판타지는 전부 묻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이 소설이 1위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유독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바로,
"게임 때문이지."
싱글 플레이부터 멀티 플레이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엘라 비하크.
소설 속 주인공을 플레이해 모험을 하며 대륙을 횡단하며 여러 왕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주된 목표지만, 반드시 그렇게 플레이를 할 필요는 없다.
굉장히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 자신이 원하는 컨셉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수 있고, 주인공이 아닌 다른 캐릭터를 선택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것이 이 게임이 지금까지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다.
"이런 갓겜도 이제 슬슬 질리네."
몇 년 동안 같은 게임만 하면서 여러 등장인물들로 다양한 컨셉질을 하며 플레이를 해왔다.
플레이를 할 때마다 정말 이런 게임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으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는 듯, 이 게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새로운 업적 달성!]
내가 아직도 안 깬 업적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수집할 건 다 수집했고, 게임 속 숨겨진 히든 퀘스트도 전부 클리어한 내가 아직도 업적 달성을 못 한 게 있다고?
[신의 장난]
"······?"
처음 들어보는 업적이었다.
내가 여러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업적을 받았다는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설마······.
"내가 최초?"
벌써부터 커뮤니티로 들어가 비틱질을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청춘과 낭만이 가득한 플레이어님을 위한 선물입니다! 글로만 읽던, 그저 눈으로만 봤던 엘라 비하크 대륙을 생생하게 체험해 보십시오!]
축하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화면이 전환됐다.
그리고 나오는 건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나오는 캐릭터 선택창이었다.
[캐릭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항상 보던 캐릭터 선택창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으음? 캐릭터가 많아진 거 같은데?"
기분탓이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는 등장 인물들 숫자가 두 배는, 아니. 최소 세 배 이상은 늘어난 것 같았다.
원래도 다양한 캐릭터들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이 게임의 장점이었는데, 그보다 더 많은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다니.
이놈의 개발자들. 이런 걸 잘도 숨기고 있었다는 거지?
흥분감에 몸이 들썩거리고 아랫도리에 힘이 빡 들어갔다.
"그럼 어디······."
룰루~ 휘파람을 불며 마우스 휠을 드르륵 내렸다.
"선택 안 되던 네임드들부터 비중 없는 캐릭터들도 꽤 많네."
내가 이 게임과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 네임드 캐릭터들마다 매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팬들도 캐릭터의 생생한 입체감을 장점으로 뽑곤 했다.
"주인공은 달리진 게 없나?"
혹시 달라진 게 있을까 싶어 주인공의 능력치부터 확인해 보았다.
무력: 65
지력: 65
무력과 지력 스탯은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이지만, 이 게임은 스탯만으로 캐릭터를 평가하면 안 된다.
[용기] [불굴] [행운] [전술의 귀재] [터득] [검술의 천재]······
너무 주인공 몰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성이 많았다.
이래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주인공 능력치는 그대로인 거 같네."
그래서 난 새롭게 등장한 네임드들을 살펴보았다.
중요 네임드들은 하나 같이 든든한 국밥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더 감동 포인트는, 네임드들 말고도 별로 비중이 없는 캐릭터들도 여럿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간간히 마주친 술집 웨이터부터 시작해 마구간 주인도 플레이가 가능했다.
"뭐야. 이 미친 캐릭터 선택 자유도는."
그러다,
"어?"
쭉 내리던 마우스 휠이 멈췄다.
[아슬란]
그 이름에 시선이 고정됐다.
"얘도 있었네?"
이름은 주인공처럼 멋있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해 보면 그냥 이름뿐인 놈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된다.
중년들의 대표 미남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얼굴을 가졌지만, 악당이라고 하기에는 능력이 형편없고, 선한 놈이라고 하기에는 악명 높은 놈.
집안 배경으로, 쉽게 말해서 빽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허세만 가득한 놈.
한 마디로 네임드가 아닌,
"똥캐."
이런 성스러운 네임드들 사이에 왜 이런 캐릭이 섞여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절로 든다.
뭐, 마구간 주인도 있는 마당에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래도 몇몇 취향 특이한 놈들이 아슬란으로 플레이 해보고 싶다며 커뮤니티에 글을 쓴 걸 본적이 있긴 하다.
"흠. 특성도··· 딱 캐릭터답네."
어쨌거나 그래도 나름 네임드라고 특성이 꽤 여러 가지 있긴 했다.
[병적인 허세] [행운] [심취] [사기 증진] [자긍심] [군림] [중후한 매력] [치졸함]
"대부분이 가성비 없는 능력이라는 게 문제지."
특히 저 병적인 허세라는 특성이 참 와닿는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게임 속에서 이놈은 정말 병적으로 허세를 부린다.
귀족 가문의 허세, 대기사단장의 허세, 싸움 실력도 쥐뿔 없는 놈이 네임드에게 깝치질 않나.
하여튼, 여러모로 정신병자 같은 놈인데, 특성도 딱 그에 맞춰져 있었다.
"이런 놈을 누가 플레이 한다고."
아니지.
달리 생각해 보면 좀 재밌을 수도?
"아슬란으로 플레이하면 난이도는 헬 아닌가?"
아슬란이 있는 일라이 왕국은 8개의 왕국 중에서 가장 약하다.
특히 아슬란의 가문인 베라크는 일라이 왕국에서 제일 강성한 가문으로, 그들이 저지른 각종 비리와 착취로 인해 멀쩡했던 왕국이 쓰러져 가다 결국 망하게 된다.
또한 아슬란은 적이 많아서 여기저기 싸움을 걸려는 놈들도 많고, 암살 시도도 많이 일어난다.
그뿐인가?
네임드들 중에서 아슬란을 좋게 보는 사람이 없다. 더군다나 아슬란은 무능력에 가까운 놈이지 않은가.
"한번 해볼까?"
주인공을 하면 그냥 게임이 너무 쉽다.
난이도를 최고로 올려도 쉽다.
주인공의 특성을 봐라.
이건 어떤 난이도를 해도 무조건 깨라고 만들어 놓은 캐릭터다.
원래 게임을 한번 하면 난이도를 항상 어렵게 하는 걸 좋아하는 터라 나는 이상하게 아슬란에게 끌렸다.
병신 같은 놈이긴 하지만, 컨셉 플레이를 하거나 하드하게 게임을 할 땐 이것만 한 캐릭터가 또 있을까.
안 그래도 요즘 컨셉 플레이도 질려서 안 하고 있던 차였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기분이다.
"너무 어려워서 못 하겠으면 그땐 난이도를 낮추면 돼."
일라이 왕국은 8개 왕국 중에서 가장 먼저 멸망하는 곳이다.
수천 번 플레이하며 일라이 왕국이 항상 제일 먼저 멸망해 버렸다.
아슬란은 바로 그런 곳의 대기사단장을 맡고 있다.
즉, 반드시 멸망 당할 운명인 왕국과 아슬란이라는 똥캐로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밌겠는데?"
이런 걸 좋아하면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아슬란 캐릭터를 선택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난이도를 결정해 주십시오.]
-하수
-중수
-고수
*극악*
"···극악?"
분명 3단계가 끝이었는데, 갑자기 하나가 더 등장했다.
"이것도 새로 생긴 건가?"
망설이지 않고 극악을 택했다.
게임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극악' 난이도가 맞습니까? 플레이 중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 또한 추가 특성을 1개밖에 얻지 못하며, 플레이 중에도 특성 습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나 제약이 많다는 거지.
딱 좋아.
이런 걸 좋아하는 내가 변태인 건가?
난이도가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사라졌던 도전 의식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리고 만약 극악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 하게 될 경우, 사상 최초 극악 난이도 플레이 및 클리어를 한 유저가 될 수 있다.
게이머에게는 이보다 더 명예로운 보상이 없었다.
[특성 한 개를 선택해 주십시오. 특성 선택시 기존에 있는 특성 하나가 랜덤으로 사라집니다.]
-찰나의 괴력
-미인계
-철의 장인
"난이도가 하드해서 그런가."
추가 특성을 한 개 주는데, 셋 중에 고를 만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하나를 선택하면 원래 있던 특성 하나가 사라진다.
어차피 아슬란에게는 딱히 좋다고 여겨지는 특성이 없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찰나의 괴력] (300초)
찰나의 순간, 최강의 괴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처음 보는 특성인데?"
최강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면 보통 스킬이 아니라는 건데.
쿨타임이 300초?
이걸 좋다고 봐야 하나.
[미인계]
당신의 미인계로 수많은 여성, 혹은 남성의 애간장을 태울 수 있게 됩니다.
"아. 이건 뭔지 알지."
컨셉 플레이를 하기에는 딱 좋은 특성이다.
[철의 장인]
무기 제작 및 재련 성공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전설의 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것도 좋은 특성이긴 하지만······."
아슬란으로 대장장이가 될 건 아니니까.
물론, 전설의 무기가 끌리긴 하지만 철의 장인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전설 무기를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수점에 달하는 그 엄청난 확률을 뚫을 수 있어야 한다.
"미인계도 끌리긴 하네."
수많은 후궁을 만드는 컨셉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아슬란은 전투 스킬이 아예 없고 전투 능력도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공격 스킬 하나쯤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쿨타임이 300초나 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일단 이번에는 찰나의 괴력으로 하고······."
2회차 플레이 땐 미인계로 간다.
"후후후."
내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든 세팅이 완료되었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시작 버튼을 누르면 엔딩까지 종료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극악 모드 설정으로 인해 사망시에는 복귀가 불가능합니다.]
"일단 해보자. 근데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건 뭔 소리지?"
라고 중얼거리며 버튼을 누른 순간.
----!?
온 세상이 갑자기 새까만 어둠으로 변했다.
* * *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춰 진군하는 기마대의 말발굽과 보병들의 발소리가 땅을 울렸다.
"와아아-!"
이어지는 함성은 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렸다.
"······."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성이 손을 들자 모두 침묵했다.
수천 명의 군사,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한 사람.
"나 할라즈 왕국 대기사단장 유한이 말한다. 오늘 저 건방진 일라이 왕국을 짓밟아 할라즈 왕국의 무궁한 영광을 도모하리라!!"
"오오오-!!"
어마어마한 함성이었다.
그들은 대기사단장 유한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륙 10대 소드마스터.
그중 하나가 바로 유한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상대는-.
"······."
아까부터 왠지 말 없이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는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었다.
* * *
'뭐, 뭐야, 이거.'
게임 시작과 동시에 눈앞이 껌껌해졌다.
곧 눈을 떠 보니 다른 세상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분명 난 책상 앞에 있는 게이밍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웬 말 위에 올라타 있다.
거기다 한 손에는 묵직한 촉감이 느껴지는 대검을 들고 있었고, 저 앞에는 푸른 깃발을 든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슬란]
무력: 50
지력: 50
특성: [병적인 허세] [행운] [심취] [사기 증진] [자긍심] [군림] [중후한 매력] [찰나의 괴력] (치졸함 특성이 삭제되고 찰나의 괴력이 대신합니다.)
골드: 0
호칭: 일라이 왕국 대기사단장, 베라크 가문의 수장.
"······?"
정보창.
그래. 정보창이다.
게임에서나 보던 똑같은 UI의 정보창이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거짓말이지?'
내가 아슬란이 된 건가?
"하하···."
난 실 없이 웃었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아슬란!! 당장 나와서 나 유한의 칼을 받으라!"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유한?"
유한이라면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
* 퀘스트 발생!
[할라즈 왕국 대기사단장 유한과의 대결]
-유한과의 전투에서 무사히 도망치십시오.
-보상으로 골드 10을 얻습니다.
-골드는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이건 또 뭔······."
이번에는 퀘스트까지 튀어 나왔다.
그런데 웃기게도 싸우라는 게 아니라 무사히 도망치는 게 퀘스트였다.
아슬란의 능력치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유한을 이길 수 없다 이건가?
하지만,
('극악' 난이도로 인해 퀘스트 난이도가 조정됩니다.)
뜬금없는 난이도 조정이 들어왔다.
-유한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십시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꿈이라면 지금 깨야 한다.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당장 나오너라!"
겁을 안 먹는 게 이상한 거지 인마.
[유한]
무력: 93
지력: 35
심지어 나는 유한의 레벨을 볼 수가 있었다.
내 무력이 고작 50인데, 저놈은 93이나 된다.
즉, 싸우면 평타 한 방에 뒤진다는 뜻이었다.
"감히 대기사단장님을 모욕하다니!!"
"저 건방진 놈의 콧대를 꺾어 주십시오!!"
앞에서도 지랄인데, 뒤에서도 지랄이 풍년이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 일라이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다들 날 말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불구덩이에 얼른 들어가라고 밀어 넣는 수준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해.'
이미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 보았으나, 여전히 나는 태평하게 푸르르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한 말 위에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야 한다.
저기로 가면 100% 죽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죽어서 내가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게임 시작 전에 나온 그 불길한 문구가 퍼뜩 떠올랐다.
죽으면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즉, 여기서 죽는다면
'개죽음이라는 거지.'
거기다 난 말도 탈 줄 모른다고 시팔.
나는 말고삐를 잡아 옆으로 틀었다.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푸히히힝-!!
이 미친 말이 갑자기 높이 앞발을 드는 것이 아닌가.
"으, 으어어!"
그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버렸다.
'미, 미친! 멈춰!!'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가닥-! 다가닥-!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은 고춧가루 탄 물이라도 마신 것마냥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가기만 했다.
"와아아아-!!"
"대기사단장께서 나가신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잔뜩 흥분한 채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한은 저 멀리서 힐끗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오호. 드디어 오는 것이냐?!"
팔뚝이 무슨 내 몸통만 한 유한은 거구의 사내였다.
그 거대한 몸에 맞게 그가 쓰는 대검 역시 거대했다.
그가 칼을 높이 드니, 검은 그림자가 지면을 메우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아 올렸다.
그러나 전혀 말을 탈 줄을 몰라서 균형을 잡는 것조차 위태로웠다.
결국 몸이 뒤로 떨어질락 말락 젖혀졌다.
"으아아아!!"
제발 멈춰 이 미친 말새끼야!
"푸르르르-!!"
말은 여전히 무대포로 앞만 바라보며 달려갔고, 내 눈에 보이는 건 직각으로 검을 올려치려 하는 유한의 모습이었다.
저 대검을 피하고 싶어도 말의 속도가 너무 빨라 몸을 좌우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나마 말고삐를 꽉 잡고 있어 낙마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나는······.
'죽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건가?
하필이면 왜 아슬란 같은 놈을 골라서!
주인공을 골랐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야.
이놈은 왜 쓸 만한 전투 스킬이 하나도 없는-
'잠깐. 전투 스킬?'
그 다급한 와중에도 뇌리에 스치는 한 가지.
내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 이 버러지 같은 캐릭터에게 부여했던 단 하나의 특성.
[찰나의 괴력]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라면······!
[찰나의 괴력을 발휘합니다.]
그 순간 심장에서부터 강한 떨림이 일었다.
그 떨림은 빠르게 퍼지면서 검을 붙잡은 오른손에,
뒤로 젖혀진 허리에,
마침내 몸 전체에,
"으아아아!!"
괴력을 불어 넣었다.
쐐애액-!
그리고 용수철처럼 튕긴 허리와 그 위로 내려치는 검이 유한의 검과 부딪혔다.
콰득-!
"가소롭구··· 엇!?"
그러나 동등한 힘의 충돌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괴력.
"!?"
나는 보았다.
유한의 놀란 두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이.
저 우람한 몸과 길쭉하게 뻗은 성스러운 검이,
"커헉-!"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갈라져 쪼개지는 것을 말이다.
2화
1초만 소드마스터 2화
"······."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구의 남성, 유한을 내려다보았다.
할라즈의 거인이라 불리던 그 위명이 무색하게 그의 반쪽 난 몸뚱이가 처량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이긴 건가?'
아직까지도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 온다.
내가 정말 저 거인을 이 손으로······!
[히든 퀘스트 완료]
-소드마스터 유한을 죽이는 대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극악' 난이도 설정으로 인해 추가 경험치 및 히든 특성, 혹은 추가 보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나는 앞에 떠있는 정보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보상이 짜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미친놈이라서 그런 건가.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찰나의 괴력]
(재사용 시간 300초)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썼던 스킬이다.
그런데 아무짝 쓸모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 스킬이 유한이라는 거목을 쓰러뜨렸다.
유한이 누구인가.
무려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다.
이 대륙에서 7번째로 강한 기사라는 뜻이다.
'설마 이 정도로 강한 스킬일 줄은 몰랐지.'
쿨타임이 300초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한을 일격에 죽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스킬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나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유한의 시체를 바라보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읍-"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고 해도, 내가 바라보는 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이 생생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그 공포와 역겨움이 올라오려 할 때, 그것들을 전부 짓누를 만큼의 다른 무언가가 솟구쳤다.
특성 [병적인 허세]가 발동됩니다.
특성 [심취]가 발동됩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긴장감과 공포심에 토악질이 나오려던 것이 사라지고 쿵쾅대던 심장도 금방 진정되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모든 건 정해진 일이라는 듯 나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고 태연자약하게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적군을 향해 말이다.
그리고,
"더 없느냐?"
그 충동적이고 강렬한 감정이 내 몸을 잠식하면서 입이 저절로 열렸다.
"날 상대할 자가 더 없느냐?"
수천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적 병사들 앞에서,
방금 전 내 손에 자신들이 따르는 지휘관을 잃은 그들 앞에서 난,
"원한다면 전부 덤벼도 좋다."
병신 같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
잠시 적막이 흘렀다.
1초가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
'지, 지금 내가 무슨 미친 짓을.'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이자 저들의 영웅인 유한을 내가 죽였다.
당연히 복수심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을 터.
그런데 내가 방금 불난 집에 기름을 퍼부은 꼴이었다.
'간신히 죽을 위기에서 벗어났더니.'
병적인 허세라는 특성이 다시 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설마 이 특성이 이런 식으로 작동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개병신 같은 캐릭터.'
지금이라도 말을 돌려 도망을 친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말고삐를 굳게 잡았다.
"우으으-."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퇴, 퇴각! 퇴각하라!"
오히려 적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 * *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일라이 왕국의 군사, 호레스는 오늘이 오기를 고대했다.
오늘 드디어 일라이 왕국의 적폐인 아슬란이 죽는다.
"이날을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왕국을 망치는 아슬란과 그의 가문을 벌하고자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
그를 따르는 가신들도 계획에 동참했다.
독살을 할지, 아니면 정변을 일으킬지, 고민하고 있을 때 호레스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아슬란은 허세가 굉장히 심한 자다.
정신병에 가까운 허세와 같잖은 자신의 힘에 심취하여 스스로가 천하무적이라고 착각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 그를 도발했으나, 그 추잡한 옹졸함 때문에 아슬란은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놈은 겁대가리 없이 할라즈 왕국 대기사단장이자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 유한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제 무덤을 제가 파 버린 것이었다.
"일라이 왕국의 영광을!"
"대륙 최강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만세!"
미리 군사들을 시켜 놈의 용기에 힘을 불어 놓기까지 했다.
아슬란은 완전히 그 분위기에 심취하여 대검을 들었고,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막상 말 위에 올라타고 나서 생각이 달라진 것일까.
오늘 자신이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될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떠들던 놈이 갑자기 굳은 얼굴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실패인가?'
하긴. 아무리 허세에 찌든 정신병자라고 해도 막상 이런 상황에 치달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지금까지 저 옹졸한 놈은 사고란 사고는 다 쳐 놓고 꼭 중요한 순간에 뒤로 슬쩍 빠져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럼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나?'
여기서 한번 더 아슬란을 도발하면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유한과 싸우려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푸히힝-!!
아슬란이 말의 앞발을 높이 든 뒤 유한을 향해 용맹하게 달려나갔다.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정말 자기가 소드마스터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그래도 마지막 모습은 기사답구나."
비록 개죽음이라도 정정당당한 대결이니 영예롭다고 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죽어라."
죽어서 네놈이 아름다운 일라이 왕국에 저지른 그 끔찍한 짓들을 조금이나마 속죄하거라. 그럼 우리는 너희 가문을 몰아내고 이 왕국을 찬란하게 일으킬 것이다.
콰득-!
"!?"
그런데 예상치 못 한 일이,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뭐?"
분명 죽어야 할 놈은 아슬란이거늘.
저 바닥에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저 망나니이거늘.
어찌하여 놈이 아닌, 유한이 쓰러져 있단 말인가!
"이게 무슨!"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차라리 비등한 대결을 펼쳤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슬란은 유한을 단 일격에 죽여버렸다.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라는 저 유한을 말이다.
'꿈인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허허. 그래.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게야.
그렇고 말고.
하지만 눈을 몇 번이나 감고 뜨는 것을 반복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
저 허세과 자아도취에 찌들어 사는 망나니가 정말로 유한을 죽인 것이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놈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수천의 병사들 앞에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도발하기까지 했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전부 덤비라니까?"
그 패기에 겁을 먹은 수천의 할라즈 왕국 병사들은,
"퇴, 퇴각하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도망쳤다.
할라즈 왕국의 영웅인 유한의 시체를 거두지도 않고 말이다.
'미,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제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그럴 리 없다.
호레스는 아슬란이 어렸을 때부터 봐왔다.
허세만큼은 가히 대륙 제일이었으나, 저놈은 검술에도, 전술에도, 그 무엇에도 재능이 없는 쓰레기였다.
그저 막강한 가문의 뒷배경으로 실력도 없는 놈이 감히 대기사단장 자리에 앉은 것이고 왕국을 망쳐 놓은 것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유한을 죽였다.'
그 뜻은 곧
'새로운 소드마스터의 탄생!'
그것도 바로 저 아슬란이!
"우와아아아-!!"
"대기사단장님 만세!!"
병사들의 어마어마한 함성이 평야를 덮었다.
이 순간만큼은 호레스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슬란은 이제 새로운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 * *
일라이 왕국의 병사들이 도망간 뒤, 나는 막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말을 타는 게 어려웠는데, 이 캐릭터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금방 말을 모는 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아까부터 이놈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아까 일부러 그랬지? 내가 멈추라고 고삐를 계속 당겼는데도 그냥 달렸잖아."
푸히힝-!
"이걸 확 목을 쳐서 말고기로 만들어 버릴라."
푸르르-!
왠지 이 말새끼가 날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넌 이따 두고 보자.
"대기사단장님!"
"과연 대기사단장님이십니다!"
"대기사단장님 만세!!"
난 막사에 있는 병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말 위에서 내려왔다.
고작 말 위에서 내리는 것뿐인데도 몸짓이 자연스레 과장되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와 걸을 때도 턱을 위로 치켜든 채 거만한 자세를 유지했다.
마치 모두가 내 아래라는 것을 표방하듯이 말이다.
[병적인 허세]
특성, 병적인 허세의 발현이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대기사단장님!!"
"새로운 소드마스터이시다!"
구태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들의 환호성을 온몸으로 느끼며 즐겼다.
그들의 찬사가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심취]
이것 역시 아슬란의 특성이었다.
그리고 텐트 안에 들어가 상석에 앉을 때도 망토를 일부러 과하게 펄럭이며 앉았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닌, 이 몸이 본능적으로 해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괴랄한 정신병 특성들이 아닐 수 없다.
"가, 감축드립니다.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되셨군요. 일라이 왕국의 축복입니다."
턱을 괴고 앉아 있자 노년의 남성이 내게 예를 차렸다.
[호레스]
무력: 30
지력: 80
호레스.
알고 있는 이름이다.
'게임에서는 분명······.'
준수한 스텟을 가지고 있는 지략가.
지력이 80이면 꽤 높은 편.
그래서 게임 플레이할 때 기회가 된다면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에 좋은 인재였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아슬란을 죽이는 데에 일조한다는 거지.'
게임을 플레이하면 거의 대부분 일라이 왕국이 가장 먼저 멸망을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아슬란과 아슬란의 뒷배경인 베라크 가문 때문이다.
지금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베라크 가문의 탐욕으로 왕국은 망가져 버리고 결국 참다못한 왕국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국을 정상화에 놓으려 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호레스가 있었다.
'그래서 자원 파밍하려고 호레스가 반란하는 것만 기다렸다가 왕국에 쳐들어갔었지.'
게임 속 등장하는 영웅을 플레이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왕국을 움직일 수 있는 왕을 플레이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기본 공략이었다.
최약체인 일라이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공격을 가해 멸망시키고 그곳에 있는 자원들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끽하면 저 영감탱이한테 죽을 수 있다는 거잖아.'
언제나 반란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저 호레스라는 영감이다.
여기 막사에 모여 있는 사람 중 호레스와 결탁을 한 자가 과연 몇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어지럽네.'
생각이 많아지니 머리가 아프다.
큰 위기였던 유한을 죽이고 왔더니, 이젠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
"7번째 소드마스터 유한을 일격에 꺾으시다니. 과연 대기사단장님이십니다."
더군다나 여기 막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꾹 누르며 참고 있던 감정들이 자꾸만 솟구친다. 하지만 특성이라는 것은 내가 저항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그 감정에 잡아 먹힌 나는 거만하게 뒤로 몸을 기대며 턱을 치켜들었다.
"뭘 그 정도로 가지고 그러나?"
"예?"
병적인 허세와 자아도취가 콜라보레이션을 일으키며 망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시한 싸움이었다."
온갖 만화책과 애니를 봤으면서도 이 중2병 같은 허세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번 열린 이 주둥이는 닫히지 않는다.
"너무 시시해서 죽고 싶을 정도였지."
"······."
모든 행동과 말투에 허세가 가득했고, 본인 스스로에게 심취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분명 듣는 사람은 손과 발이 오그라들다 못 해 쪼그라들어 버릴 것이다.
주먹이라도 안 날리면 다행이겠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러냐.
"과연 대기사단장님이십니다."
"그토록 강대한 힘을 가지고 계셨다니. 일라이 왕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기사들은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어떤 놈들은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한다.
조금만 생각해도 내 발언이 개소리였다는 걸 알 텐데도 이들은 조금만 더 하면 눈물바다가 될 것처럼 들 떠 있었다.
'강대한 힘은 개뿔.'
찰나의 괴력 덕분에 정말 운 좋게 이긴 것뿐이다.
만약 유한이 내가 달려오기 전 검강을 썼거나, 다른 스킬을 썼으면 그 자리에서 난 즉사였다.
방심을 한 건지, 아니면 서로 무기를 부딪혀 힘 싸움을 하고 싶었던 건지.
무엇이 되었든, 운이 좋았던 것이다.
"······."
그러다 나는 아까부터 시선이 따가운 곳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내 눈길이 닿는 곳에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호레스가 있었다.
'저 영감을 어떻게 하면 좋지?'
좋은 인재이기는 하지만, 아슬란과는 상극이며 언제든 기회가 되면 날 위험에 빠뜨리려 할 것이다.
그럼 날 죽이려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여야 하나?
아니면,
"호레스."
"예. 대기사단장님."
"내가 죽지 않아서 아쉬운가?"
"······!?"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짓밟아 줘야 하나?
3화
1초만 소드마스터 3화
"휴-."
호레스는 짙은 숨을 내쉬며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리된 것인지······.
그는 아까 전 막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네는 내가 살아 돌아와서 아쉽냐고 물었다.'
금빛으로 물들인 안광이 자신을 표독스럽게 바라보았다.
순간 호레스는 그 기세에 압도되어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흥, 다음에는 좀 더 재밌는 흉계를 들고 오도록. 오늘 건 좀 지루했다.'
거기다 그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내려와 꽂혔다.
그 말은 지금까지 넌, 내가 무슨 일을 꾸며 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냐?
"군사께서 오늘따라 한숨이 늘어나셨습니다그려."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넬라 기사단장."
일라이 왕국 최고의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넬라 제3기사단장이었다.
경력은 그 누구보다도 높으나, 직책은 제3기사단장에 멈춰 있다.
아슬란 저놈이 제 사람들로만 주변을 채웠기 때문이다.
"근데 대체 오늘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저 유한을 아슬란이 일격에 무찌를 줄은······."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소. 무슨 술수를 썼는지도 모르겠구려. 너무 순식간에 대결이 끝나버렸으니."
수백 번을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설마, 아슬란 가문에 숨겨진 검술 비기라도 있었던 건가?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저 허세 충만한 아슬란이 안 보여줬을 리 없을 텐데.
'혹시 이때를 위해 지금까지 숨겨 왔던 것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저 아슬란이 그럴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 일을 두고 직접 흉계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정말 모르겠군."
다른 놈도 아니고 설마 아슬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 하는 날이 오다니.
"후- 오늘만큼은 아슬란의 목이 효수되고 일라이 왕국을 재건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넬라가 아쉬운 듯 푸념했다.
왕국을 재건하고자 모인 사람 중 넬라도 그 한 명이다.
"기회는 언제나 있소."
"글쎄요.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가 아슬란 손에 죽었습니다. 과연 왕국 누가 새로운 소드마스터에게 대항하려 하겠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대륙 10대 소드마스터라는 명예는 기사들의 꿈이지 않던가.
평소 아슬란을 좋게 보지 않고 있던 기사들도 이번 일로 그 인식을 바꿨을 것이다.
"왕국을 갉아 먹는 자가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라. 참 역설적인 일이 아닙니까?"
"······기회는 또 올 것이오. 아슬란을 희망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슬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넘쳐났지만, 호레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슬란이 있는 막사를 한참 노려보고 있었다.
* * *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아까부터 오한이 드는 게 누가 또 날 죽이려고 작당 모의를 하는 건 아니겠지.
"이제 어떡하지?"
일은 저질러졌다.
난 새로운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소드마스터가 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야."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건 곧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이에게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줄줄이 나한테 도전을 해올 텐데."
이 난관을 어찌 극복해야 하나.
차라리 성장을 해서 강해질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새로운 특성들을 얻으면서 강해지면 되니까.
근데 문제는,
"난이도가 극악이라 특성을 더 이상 못 얻잖아."
즉, 성장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스텟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냥 적당히 중수를 골라서 했어야지. 깝치긴 왜 깝쳐, 이 씨발놈아."
오늘은 내가 참 원망스러웠다.
자만하지 말고 쉬운 모드로만 선택했어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금방 마련했을 텐데 말이다.
하필이면 고수도 아니고 극악 모드라니.
에라이 멍청한 새끼.
그렇게 한창 셀프 디스를 하고 있을 때즈음.
"위대하신 대기사단장님. 군사 회의를 위해 모두 막사에 모여 있습니다."
[에단]
무력: 56
지력: 55
내 호위기사 에단.
근데 아슬란은 이 하찮은 호위기사보다 무력과 지력이 낮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나.
주인공급은 아니더라도 스텟이 빵빵한 놈을 캐릭터로 선택했더라면-.
'진짜 캐릭터 삭제 마렵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에단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대기사단장님. 혹시 속하가 무슨 잘못을······."
"아무것도 아니다."
위대하신 대기사단장님, 이라는 호칭이 거슬렸지만,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명령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았다.
'허세하고는.'
분명 저것도 아슬란이 억지로 기사들에게 시킨 것일 터.
나는 움직이기 싫은 몸을 이끌고 작전 회의를 위해 막사로 이동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병적인 허세와 심취가 발동하여 이번에도 나는 위풍당당하고 과장된 발걸음으로 상석에 앉았다.
펄럭~
······망토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흠흠.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회의를 이끌어 가고 있는 호레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 영감이 또 날 죽이려고 무슨 흉계를 꾸미려 할 텐데.
'내가 살려면 역시······.'
죽여야겠지.
안 그럼 내가 죽을 테니.
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자. 여긴 현실이 아니야. 게임··· 게임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연민 같은 감정은 버리고 오로지 게임에서 생존하고 클리어할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냉정하게 생각하자.
내가 살려면 호레스는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죽이느냐인데.'
당장 끌어내서 저 노망난 노친네의 목을 베어라!!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놈이 날 죽이려 흉계를 만들었다! 그 죄를 엄히 물어 산채로 태워 죽여라!!
증거가 없으니 이럴 수도 없고.
그냥 저놈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죽여라!
이렇게 할 수도 없다.
'호레스는 왕국 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니까.'
더군다나 아무리 망나니라도 명분 없이 무작정 사람을 죽일 순 없다.
호레스를 이유 없이 죽인다면 내 곁에 있는 자들 모두 앞으로 내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이며, 호레스와 작당했던 놈들이 여기서 날 죽이려 들 수도 있다.
즉, 내게는-
'명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왕국 내에서 대기사단장이 갖는 영향력.
이번에 새로 얻은 소드마스터의 호칭까지.
내게 그다지 큰 명분은 필요하지 않다.
꼭 호레스가 죽을죄를 지었다는 걸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을 자리에 보내면 된다는 거지.'
그것이 아주 깔끔한 방법이었다.
이 게임은 명분을 중요시한다.
플레이어가 마구잡이로 휘하에 있는 부하들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현실적인 장치였다.
그래서 월급만 쪽쪽 빨아 먹고 하는 일 없는 놈을 죽이고 싶을 땐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터에 보내 제거를 해 버리는 것이 전략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기사단을 움직여 적의 후방을 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줄 압니다. 하오니-"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호레스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잠깐."
"······?"
"그러니까 지금 기세가 약해진 할라즈 왕국 병사들을 공격하자는 건가?"
이 몸이 가진 특성 때문인지 상대를 군림하듯 말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예. 저들은 대기사단장인 유한을 잃었습니다. 지금쯤 혼란으로 가득 차 철수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 뒤를 노린다면 필시 승리할 겁니다."
아주 올바른 계책이었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적의 뒤를 공격하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중의 기본.
하지만,
"우린 철수한다."
난 그럴 생각 없다.
"······예?"
"귀가 먹었나? 철수한다고 했다."
호레스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 재차 물었다.
"처, 철수 말입니까?"
"그래. 난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놈들을 굳이 공격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대기사단장님. 이건 전쟁입니다! 할라즈 왕국의 기세가 땅에 떨어졌을 때 지금 짓밟아 놓아야 두 번 다시 우리 일라이 왕국에 도전하지 못할 겁니다."
"흥. 난 겁쟁이들과 시시한 싸움은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왜 내가 왕국에 처박혀 가만히 있었던 건지 아나?"
"······?"
병적인 허세가 내 혓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그동안 내 피를 끓게 하는 싸움이 없어서였다."
물론, 내가 호레스 저 영감 때문에 일부러 허세를 피우는 것도 있지만, 한번 허세가 터지면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친히 나선 건 유한 때문이었지. 감히 놈이 나를 도발했기에, 소드마스터라는 허울뿐인 명성으로 감히 유세를 떨었기에 그 목을 쳐버린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호레스가 몸을 잘게 떨었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나는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막사에 모인 기사들을 둘러 보았다.
"만일 적장이 나를 죽인다면 너희들은 그대로 도망칠 건가?"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사의 긍지를 버리고, 명예를 버리고, 적들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냐고 물었다."
"······."
이번에도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모두 검과 투구를 버리고 떠나라. 겁쟁이는 우리 위대한 일라이 왕국의 기사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
"······!?"
"다시 한번 묻겠다. 너희들도 저 겁쟁이들처럼 너희들의 지휘관을 죽인 원수를 두고 도망칠 것이냐?"
그제서야 그들에게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복수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겁니다!"
그 들뜬 분위기에 허세력이 더욱 타오른 것인지,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것이 바로 기사의 정신이다.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저 겁쟁이들은 자신들의 대기사단장이 죽었는데도 복수심은커녕 자기의 안위만 챙겼다."
난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빛에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일라이 왕국의 기사들이며 명예로운 자들이다. 그 신성한 검에 겁쟁이들의 피를 묻히는 치욕을 안길 순 없지."
"대기사단장님······."
기사들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그들은 크게 감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슬란의 특성 중 하나인 '사기 증진'.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난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멍하니 서 있는 호레스에게 말했다.
"그런 내가 왜 흥미도 가지 않는 싸움을 해야 하지? 기사답지도 않은 놈들의 꽁무니를 쫓아서?"
"하, 하지만 이렇게 보낸다면 저놈들은 필시 또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오라지."
나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병적인 허세 덕에 악당처럼 웃는 게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놈들에게 끝없는 살육이 무엇인지 내 친히 보여 줄 테니. 그때는 오늘처럼 시시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미친놈처럼 웃어대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호레스. 네게 묻겠다."
"예."
"아직도 의견에 변함이 없나?"
"······예."
"그렇게 피가 끓는다면야 어쩔 수 없지. 우리 왕국 최고의 군사인데."
걸려들었다, 요놈.
"100명을 주마."
"예?"
"호레스 네가 직접 가서 놈들을 도륙내고 오너라."
"······?"
"왜 그런 얼굴이지? 본인 입으로 직접 그러지 않았나. 도망치는 적의 뒤를 노린다면 필시 승리할 거라고."
호레스는 그게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 말에 책임을 지도록. 아! 물론, 병사가 너무 적으면 상대가 깔볼 수도 있으니, 깃발을 많이 챙겨 가서 최대한 군사 숫자가 많아 보이게 하거라. 야심한 밤에 공격하면 놈들이 속아 넘어갈지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 싫은가?"
"그, 그것이···."
"싫으면 싫다고 말하거라. 없던 일로 해주겠다."
"······."
호레스는 잠시 내 눈을 올려다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역시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일라이 왕국 최고의 군사이니까. 안 그런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레스가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무리 상대가 도망치려고 하는 놈들이라고 해도 고작 병사 100명으로 뒤를 공격한다면 필시 전멸을 당하는 쪽은 호레스일 터.
'그러게 날 죽이려 들지 말았어야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호레스가 왕국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는 건 알지만, 날 죽이려 든다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써먹을 수 없지 않은가.
* * *
한편 할라즈 왕국의 막사는,
"우린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일라이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어 돌아가신 유한 대기사단장님의 명예를 드높이리라!"
"와아아-!"
호레스의 예상과는 달리 혼돈에 빠져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할라즈 왕국 기사들은 온통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유한의 시체를 버리고 꼴사납게 도망친 그들이었지만, 그가 죽고 나서 새로운 대기사단장이 된 아론이 혼란스러운 기사들의 사기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의 특성인 '혼란 통제'와 '분노'가 동시에 발현된 결과물이었다.
"놈들은 필시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뒤를 쫓아 후방을 공격하려 들겠지."
"예. 그것이 전략의 기본이지 않습니까."
"그래. 난 놈들의 방심을 이용하겠다. 어차피 전면전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이니."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대기사단장께서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놓긴 하셨으나, 상대는 유한 님을 꺾은 아슬란입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왕국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유한이 일격에 죽는 그 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일라이 왕국을 죽어 가게 만드는 최고의 망나니라 불리던 아슬란이,
문무에 전혀 재능이 없다던 그 아슬란이 유한을 쓰러뜨렸다.
이건 대륙을 충격에 빠뜨릴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슬란 그놈이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운이 좋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일격은 아론도 생전 처음 보는 파괴적인 검술이었다.
기사라면, 칼과 창을 든 사내라면 누구든 배워 보고 싶은 교과서적인 자세와 힘.
그것은 결코 운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수천 번 수만 번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훈련을 통해 아슬란은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다.
"놈들이 우릴 속였어."
대체 일라이 왕국은 얼마 전부터 이런 준비를 해왔던 것일까.
이 모든 게 아슬란의 계책이었나?
스스로의 평가를 극한으로 낮춰 모든 왕국이 일라이 왕국을 우습게 보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할라즈 왕국은 아슬란의 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유한을 앞에 내세웠다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전면전은 안 된다."
유한을 꺾을 정도의 무력이라면 전면전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유한을 일격에 죽여 버린 그 압도적인 힘으로 아슬란이 선봉에 나설 경우, 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슬란이 아닌, 일라이 왕국의 심장을 공격하면 될 일."
분노에 떨고 있는 주먹을 꽉 쥔 아론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반드시 이 수모를 갚아 주마, 아슬란."
4화
1초만 소드마스터 4화
"이건 자살 행위입니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말씀을 하십시오!"
출정을 하려고 하는 호레스를 넬라 기사단장이 붙잡았다.
아무리 승리한 전투라고 해도 고작 100명의 병사들로 적의 후미를 공격한다면 처음에야 혼란에 빠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놈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공격하는 상대의 숫자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걸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주저 없이 호레스에게 창칼을 휘두르게 될 터.
"넬라 기사단장. 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오."
"예?"
"아슬란은,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우리의 계략을 미리 꿰뚫어 본 것일지도 모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이 유한을 꺾고 와서 말하지 않았소? 다음에는 더 나은 흉계를 준비하라고. 그게 무슨 뜻이겠소?"
넬라도 분명히 들은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찝찝했는데, 아슬란이 정말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건가?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가 뜻을 모아 놈을 치려 했다는 걸 어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 오늘 유한과의 싸움도 그놈이 스스로 결정한 일 아니었습니까?"
"그리되도록 만든 건 우리였지. 잠깐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던 아슬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소. 만약 내가 이번 작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더 끔찍한 방법으로 날 죽이려 했을 것이오. 더불어 내 가문의 가솔들도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테지."
"······안 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제가 뜻이 맞는 기사들을 모아서-"
호레스는 흥분한 넬라 기사단장의 팔을 붙잡았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나와 아슬란, 둘의 문제이니. 이 늙은 목숨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일이오. 그리고 지금 아슬란을 죽인다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칠 것이오."
"하지만 군사님!"
"설사 병사들을 모은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소. 저 유한을 일격에 꺾은 아슬란이오. 그대가 정녕 소드마스터의 칼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
"저자는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아슬란이 아니오."
그들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아슬란이라면 칼이 없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한을 꺾었던 그 일격을 보여 준 아슬란이라면······.
넬라의 침묵에 호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은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도 있소. 그 포악하고 망나니 같은 성정은 여전하나,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드는구려.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를 갖고 놀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구, 군사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호레스는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아무튼, 그대는 그만 돌아가시오. 혹시 모르지 않소. 내가 기지를 발휘해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지."
그리 말하는 호레스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못하는 넬라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호레스의 마지막 출진이 된다는 것을.
"그럼 또 봅시다. 넬라 기사단장."
"······."
넬라는 힘없이 병사들을 이끌고 떠나는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슬란 이 개자식."
분노가 치밀어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래. 지금이라도 당장 놈의 막사로 가서 칼을 뽑는다면, 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아슬란을 상대한다고?'
뇌리에 스치는 장면 하나가 끊어지려 하던 그의 이성을 붙잡았다.
무지막지한 일격에 몸이 반쪽 나 죽어 버린 유한.
그리고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차갑게 내려다보던 아슬란.
지금 감정에 휩쓸려 칼을 뽑아 막사로 간다면 유한의 처참한 모습이 곧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넬라는 치미는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 * *
행군은 평화로웠다.
푸르르~ 푸르르~
이놈의 말새끼는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뭐, 오늘은 봐준다.
'근심거리 하나가 줄어드는 날이니까.'
호레스를 죽을 자리에 보냈다.
그는 순순히 뜻을 받아들였고, 왕국 내에서 날 죽일 만한 가장 위협적인 빌런을 내쳤다.
'거기다 전쟁도 끝났고.'
제아무리 상대가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고는 하나, 방심하지 말자.
이건 무려 극악 난이도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에 최대한 전투는 피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입을 털어 가며 기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달랑 호레스만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극악의 난이도.
당장 고수만 해도 숨 막힐 정도로 난이도가 높아지는데, 대체 극악 난이도는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가 않는다.
그리고 호레스를 깔끔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역시 난 게임 천재야.'
지금 생각해도 참 기가 막힌 전략 같았다.
싸우는 것도 피하고 호레스도 제거하고.
이게 바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거라고 해야 하나.
문제는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냐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주 방어진을 쌓아야 하나.'
삼국지에 공손찬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역경루라는, 그 당시 우주 방어진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한 진지를 세워 거기서만 칩거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게임 플레이 중에 역경루와 비슷한 우주 방어진을 쌓아 적의 공격을 버텨낸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상대를 공격할 수도 없어 그냥 오랫동안 버티는 것이 전부인 전략이었다.
'외부 정세도 조심해야 돼.'
아슬란은 주변에 적이 많다.
아니. 난이도가 난이도인 만큼 내 편이었던 사람도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그렇기에,
'조심 또 조심.'
말을 타고 갈 때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근데 시발 이게 조심하는 사람의 태도냐?'
아슬란이란 캐릭터는 참 골 때린다.
말을 타고 가면서도 이 병신 같은 허세가 발동하여 말고삐를 잡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도 행군을 시작한 야밤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이런 자세가 보통 힘든 게 아닐 텐데도 병적인 허세와 심취의 발동으로 전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피곤하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이 자세를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체 이런 강철 같은 정신력과 자제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에 좀 다른 걸로 이래 보지.
'진짜 미친 새끼라니깐?'
앞으로 내가 쭉 이런 몸으로 있어야 한단 말이지?
벌써 어지러웠다.
"급보! 급보입니다!!"
앞서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황급히 돌아오고 있었다.
속으로는 놀랐지만, 병적인 허세는 놀란 모습도 겉으로 보여 주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
근엄한 목소리로 묻자 그들이 예를 차리며 소리쳤다.
"위대하신 대기사단장님께 아룁니다! 할라즈 왕국의 병사들이 현재 경계선을 넘어 로난 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로난 성?
잠깐. 거기라면?
"로난 성이라면 지금 방비가 취약한 곳입니다. 그런데 할라즈 왕국 병사들이 어떻게 그곳에서 나타날 수가!"
옆에서 나와 같이 보고를 듣고 있던 넬라 기사단장의 말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의도하지 않게 말이 튀어 나갔다.
"수도를 노리는 것이겠지."
아. 내가 이 게임을 정말 오래 하긴 했나 보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맵이 쫙 펼쳐져 각 성의 위치가 홀로그램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수도를!? 지금 왕국 수도는 비어 있지 않습니까?"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이 게임을 오랫동안 하면서 정말 다양한 전술을 경험해 보았고, 수 없이 뒤통수를 맞아 봤다.
그래. 이런 식으로 뒤를 노린다는 거지.
이상한 점은 보통 대기사단장 같은 영향력이 큰 장수를 잃으면 군사들이 잠깐 분전했다가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니면 서둘러 왕국으로 퇴각을 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놈들은 퇴각을 하지 않고 우회하여 경계선을 넘었다.
즉, 전면전을 포기하고 왕국의 수도를 공격하겠다는 의미였다.
'극악 모드다, 이거냐?'
게임 특성상 사기를 잃은 병력으로 이런 작전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엿이나 먹으라는 듯, 보란 듯이 놈들은 무섭게 일라이 왕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극악 난이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인가?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마치 이 모든 걸 알고 계셨다는 듯 덤덤하시군요."
제 3기사단장 넬라의 말이었다.
그는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였던 겁니까?"
······?
"그것도 야밤에, 깃발을 잔뜩 든 소수의 병력으로만 추격대를 구성했던 것이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러신 거였군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는 거야, 얘가.
"할라즈 왕국 놈들이 도망가는 척을 하고 사실은 우회하여 우리 왕국의 수도를 노린다는 걸 미리 간파하셨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여기까지 놈들의 간사한 계책을 꿰뚫어 보셨을 줄은······."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건데.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병적인 허세가 꿈틀거리며 발동됐다.
"그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꼬리가 휘어졌고,
"정정당당한 싸움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놈들이 하는 짓이 다 똑같지."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였다.
"놈들은 나보다 몇 수 앞서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
날 바라보는 넬라 기사단장의 눈동자에 경악과 충격이 담겨 있었다.
곁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미리 깨닫지 못한 너희들도 우매하구나. 아무리 아군마저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기는 하나,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실망스럽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과연 위대하신 분!"
그런 그들의 찬사가 당연하다는 듯, 나는 어깨를 쫙 넓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넬라는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눈빛으로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내게 청했다.
"대기사단장님. 제 3기사단장 넬라가 청하옵니다. 제게 군을 내어 주신다면 적들을 신성한 일라이 왕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습니다!"
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치는 넬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넬라]
무력: 75
지력: 60
어중간한 무력 수치에 딱 기사에 맞는 지력이었다.
그나마 하나 알 수 있는 건 그가 일라이 왕국 베타랑 기사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최고의 카드인가.'
스탯이 좋은 편은 아니기는 하나, 그렇다고 내가 직접 선봉에 나서서 출진을 할 순 없는 노릇.
'5분에 한번만 쓸 수 있는 병신 같은 스킬로 전투를 한다는 건 자살 행위지.'
운 좋게 얻어걸린 일대일 상황이라면 모를까, 수천의 기사들이 서로 창칼을 휘두르는 전쟁통에 5분도 못 버티고 죽을 공산이 컸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전쟁터에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넬라 기사단장."
"예. 대기사단장님."
"내가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작 저런 놈들을 상대로 말이다."
난 죽어도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싶지 않거든.
"······예!"
내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한 넬라는 의기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 뒤, 기사들을 데리고 떠났다.
* * *
"허어-.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100명의 자살 특공대를 데리고 출진한 호레스는 죽음을 각오하고 할라즈 왕국 병력의 뒤를 쫓았다.
놈들은 야밤을 틈타 도망을 친 것인지, 막사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속력을 높여 따라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할라즈 왕국 본대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호레스는 자신이 이끄는 병력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여 주고자 일부러 깃발을 많이 챙겨왔다. 하지만 도망치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병력으로 깃발을 우후죽순 늘리고 텅 빈 수레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숫자가 많은 줄 알았으나, 막상 후미를 공격해 보니 가짜였다는 걸 깨달았다.
"말하라. 본대는 어디에 있느냐?"
호레스에게 붙잡힌 지휘관은 피를 흘리며 대답했다.
"크흐흐. 이미 늦었다. 자랑스러운 할라즈 왕국의 형제들이 지금쯤 너희 일라이 왕국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이다!"
"뭣이?!"
유한이라는 거목을 잃은 할라즈 왕국이 이런 기발한 전략을 꾀할 줄이야.
방심했다.
놈들이 사기를 잃고 뿔뿔이 흩어질 거라 생각한 자신의 오만이었다.
만약 아슬란이 철군을 하지 않고 이 가짜들의 뒤를 따라왔다면······.
"잠깐."
그때 호레스는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슬란은 설마 일이 이리될 줄 알았던 건가?"
넋을 놓고 호레스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연···이겠지?"
그러나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다 잡은 승기를 버리고 갑자기 철군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던가.
"나를 이곳에다 보낸 것도 혹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달으라고?
정말 그런 것이냐, 아슬란.
"얼른 돌아가 봐라. 뭐, 너희들이 돌아갔을 때쯤에는 일라이 왕국 수도가 잿더미로 변해 있을 터. 크크크."
"쯧쯧. 멍청한 놈. 그러니 네놈이 이런 미끼 역할만 하는 것이다."
"뭐라?"
"잘 보거라. 우리 군의 숫자가 몇인지. 고작 10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군은 어디에 있을까?"
"······서, 설마!?"
"죽여라."
호레스의 명령에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기함을 터트리는 적 지휘관의 목을 베었다.
원통한 표정으로 떨어져 있는 수급을 멍하니 바라보던 호레스는 짧게 혀를 찼다.
"네놈을 욕할 게 아니었구나. 나도 어리석어 이런 미끼 역할을 하고 있으니."
5화
1초만 소드마스터 5화
"곧 놈들의 수도가 코앞이다! 진격하라!"
아론의 우렁찬 목소리에 힘을 얻은 할라즈 병사들은 쉬지 않고 뛰었다.
무리한 강행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론은 유한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놓았으며, 그 결과 그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가 로난 성이다!"
로난 성은 다른 곳에 비해 작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공략하기도 쉬웠고, 지금의 사기라면 충분히 공략 가능해 보였다.
"우리의 분노를 똑똑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곳 로난 성을 불태워라. 포로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의 명령에 기사단장들이 소리쳤다.
"포로는 없다!! 로난 성에 있는 것을 모두 불태우고 죽여라!"
성난 병사들의 함성에 평화로웠던 로난 성도 큰 혼란에 빠졌다.
"저, 적이다!"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째서 할라즈 왕국의 병사들이 여기까지······!"
"우리 왕국 병사들은 어떻게 된 거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들이 도망칠 새도 없이 할라즈 왕국 병사들이 성을 포위한 터라 도망칠 길도 없어 보였다.
남아 있는 수비 병력도 거의 없어서 차라리 성문을 열고 항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었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는 동안,
"저, 적들이 올라온다!!"
할라즈 왕국 병사들은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는 중이었다.
또한 마법사들은 성문을 부수기 위해 파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제길. 이대로 가다가는······."
그렇게 점점 그들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할 때쯤.
"잠깐. 저건?!"
저 멀리서부터 푸른 깃발들이 펄럭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성벽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병사들은 그 깃발을 보고 소리쳤다.
"워, 원군이다!"
"뭐? 원군?"
"진짜야? 정말 원군이 왔어?!"
곧이어 다른 병사들도 저 먼 곳에서부터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기마병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푸른 깃발이야!"
"그건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깃발이잖아?!"
"대기사단장님께서 오셨다!!"
"진짜다! 대기사단장님이야!"
그들의 함성은 곧 할라즈 왕국 군사들에게도 닿았다.
그들도 뒤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뭐지 저게?"
두두두두-!
아슬란 가문의 상징인 사자 얼굴이 그려진 푸른 사자 깃발을 높이 들고 기마대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 아슬란이다!"
"뭐? 아슬란?!"
아론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분명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다.
도망가는 척 군을 위장시키고 일부러 크게 길을 우회하여 놈에게 걸리지 않도록 진군했다.
그것에 속아 놈들의 군대가 그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보고까지 받았다.
지금쯤이면 놈은 할라즈 왕국 경계를 넘어 허탕을 치고 있어야 할 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슬란의 군대가 이곳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대기사단장님. 군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어서 명령을!"
아론은 마른침을 삼키며 넋을 놓고 흙먼지로 가득해진 평야를 바라만 볼 뿐,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론은 어수선한 얼굴로 말했다.
"이, 일단 모두 지, 진정하거라."
진정하라는 말을 해봤자 당장 대기사단장부터가 목소리와 표정에서부터 진정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병사들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아슬란이다.
아슬란의 깃발만 봤을 뿐인데도 이들은 사시나무처럼 다리를 떨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위대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기사들이여!"
그 기세를 몰아 선두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오고 있던 넬라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든 적을 섬멸하라!"
"와아아아-!!"
"어, 얼른 방어 대형을 갖추어라! 놈들을 막아야 한다!"
기사단장들의 다급한 명령에도 병사들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포에 압도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적의 기마대가 폭풍처럼 휩쓰는 것을 지켜만 볼 뿐이다.
* * *
"헉헉. 여긴가?"
호레스는 말이 지쳐 쓰러질 정도로 달려 간신히 막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늦었군."
턱을 괸 채 상석에 앉아 있는 아슬란이었다.
그의 앞에는 할라즈 왕국의 기사들이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자들은······."
"보면 모르나. 기사의 자격도 없는 한심한 놈들이다. 거기서 그만 떠들고 앉지."
"아, 예."
호레스는 자리에 앉으면서 붙잡혀 온 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들 중 아는 사람은 몇 없었으나, 유독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저자가 아론이군.'
유한 다음으로 검술과 전술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인재다.
차기 대기사단장이 되는 가장 유력한 후보로 뽑힐 만큼 할라즈 왕국에서도 입지가 좋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밧줄에 묶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슬란이 자신의 계책으로 저 유능한 젊은 인재와 더불어 할라즈 왕국의 병사들을 소탕한 것이었다.
'결국 나도, 할라즈 왕국도 모두 아슬란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것인가?'
아슬란은 사자를 닮은 매서운 눈동자로 아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예전에는 저 어리석은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슬란이 멍청했던 것이 아니라 호레스 자신이 멍청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 *
'좆될 뻔했네.'
겉으로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만약 내가 군을 회군시키지 않고 호레스 말을 따라 군을 추격했다면 지금쯤 저놈들이 왕국 수도를 털어놓았을 것이다.
일명 빈집털이 전법으로, 이 전략에 한번 당하면 멘탈이 갈려 나가는 것은 물론, 게임 재시작을 자연스레 누르게 된다.
그만큼 플레이어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어느 왕국에 속해 있지 않고 방랑자로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운 좋게 잘 맞아떨어진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호레스 저 영감이 살아 있잖아.'
나는 괜히 힐긋 호레스를 한번 째려보았다.
이럴 의도로 군을 철군시킨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호레스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근데 얘네는 왜 저놈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전투에서 승리한 넬라 기사단장은 굳이 아론을 비롯해 여러 기사를 붙잡아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자기를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우쭐거리며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했다.
'아니지. 이건 잘한 게 맞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꽤 좋은 수완이었다.
'포로 해방 조건으로 돈을 뜯어낼 수 있잖아.'
어떤 게임이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자원이라는 건 항상 큰 도움이 되니까.
물론, 일정 수치가 넘어가면 모든 왕국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히 조절하거나 숨기는 것도 중요했다.
거기다 하필 붙잡혀 온 것이 아론.
[아론]
무력: 85
지력: 80
입에 침이 고이는 능력치였다.
저게 내 능력이었어야 했는데······!
다시 한번 주먹이 부르르 떨릴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왜 이런 똥캐를 골라 가지고!
'거기다 저놈은 스텟만 좋은 게 아니라는 거지.'
아론은 성장형 캐릭터라 저기서 더 성장해 나중에는 무력이 90까지 치솟는다. 거기서 이런저런 무기까지 곁들여 주면 최고 무력을 찍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단순히 무력과 지력으로만 인재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캐릭터마다 특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론은 A급에 달하는 특성들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즉, 할라즈 왕국한테는 아주 소중한 인재라는 거지.'
유한도 죽은 마당에 할라즈 왕국에서는 이제 믿고 의지할 게 아론밖에 없다.
다른 인재들도 있겠지만, 아론에 버금가는 인물은 없으니 그들은 큰돈을 지불해서라도 돌려받으려 할 것이다.
'나중에 저놈이 성장해서 복수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먼 나중의 일이니까.'
이번 전쟁으로 할라즈 왕국의 병력은 거의 괴멸 수준에 달했고, 유한도 잃었으니 당분간 힘을 회복시키기에 바쁠 것이다.
아니면 다른 왕국이 먼저 할라즈를 점령할 수도 있고.
설사 어떻게 잘 회복을 해서 내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해도, 그전에 내가 이 지랄 맞은 게임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럼 어디 가격을 잘 책정해 볼까?'
분명 비싼 값에 놈을 팔아 버릴 수 있겠지.
그럼 그 돈으로 내 안전을 위해 최대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입술을 짓씹고 있던 아론이 말문을 열었다.
"분명 내 전략은 완벽했다. 분명히 그럴 텐데, 대기사단장의 자격도 없는 아슬란 네가 어떻게······!"
난 미간을 좁혔다.
추하다. 아론아.
그럴 거면 그냥 싸우다 죽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잡혀 와서는 입을 털고 있어.
별 들을 것도 없었다.
저놈은 아주 좋은 자원이 될 테니, 더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감옥에 처넣으면 된다.
그런데,
"건방지구나."
이 주둥이가 그걸 가만히 허락할 리 없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심각한 허세가 내 몸을 금세 장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절로 몸이 의자 뒤에 기대어졌고, 턱은 거만하게 들렸다.
또한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굵고 낮게 깔렸다.
"네 알량한 머리로 내놓은 계책이라는 것이 고작 힘없는 백성들만 있는 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느냐?"
"그건 전쟁에서 항상 있는 일이다."
"아니, 그건 그저 비겁하고 옹졸한 놈들의 변명일 뿐이다."
난 아론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기본적인 기사의 명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이 감히 내 이름을 입에 담다니. 한심하구나."
아론은 한 대 제대로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긴. 너희 왕국의 윗대가리들이 명예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지."
그러자 그는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소리쳤다.
"우리 왕국을 욕보이지 마라! 그동안 겁쟁이처럼 가신들 뒤에 숨어 있던 건 바로 너 아슬란이 아니더냐!"
아주 지당하고 진실된 말씀이다.
아슬란은 앞에서 허세를 부리다 조금이라도 불리할 것 같으면 뒤로 도망치는 치졸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뒤에 숨어 있었다라······."
지금의 아슬란은 다르다.
찰나의 괴력이라는 특성이 생기면서 치졸함 특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너에게 묻겠다, 아론. 내가 유한과 싸울 때 비겁하게 뒤에 숨어 있었던가?"
무한한 자신감.
"내가 유한을 죽이고 너희들 앞에 홀로 섰을 때,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도망쳤던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
"아니. 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등을 보인 건 바로 너희들이었다. 내게는 지켜야 할 명예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어떤 때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 자신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을 위해 용맹하게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대기사단장이 갖는 명예이며, 무게다. 네가 그 무거움을 알고 있느냐? 감히 너 따위가?"
병신 같은 허세였다.
"······."
아론은 떨리는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 애니, 만화, 드라마 등등.
일련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그곳에서 나왔던 대사들이 하나로 묶여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런 놈들이 나를 겁쟁이라 부를 자격이 있느냐? 기사는 검으로 살고, 검으로 죽는다. 힘없는 이들을 죽이려고 검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검을 드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적의 백성들이라 해도!"
원래의 나라면 이런 많은 사람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몸 전체에 충만한 허세력은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전부 사라지게 만들었다.
다른 건 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이거 하나는 만족스러웠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준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거기까지는 좋으나, 항상 그다음이 문제였다.
턱-
머리 끝까지 차오른 허세력이 충동적으로 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밧줄로 묶인 포로들 앞에 놓인 검 중 유독 때깔이 좋아 보이는 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검집에서 검을 뽑아 검날을 맨손으로 잡자,
콰득-!!
검이 진흙처럼 가볍게 구부러졌다.
찰나의 괴력이 발동된 순간이었다.
"!?"
아론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난 피가 철철 나는 손을 털어내며 부러진 검을 그의 앞에 던져 놓았다.
"이 동강난 검을 보고 매일 뼛속 깊이 새기거라. 진정한 기사의 긍지가 무엇인지를."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놈들을 투옥시켜라. 명예도 모르는 애송이의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예!"
병사들이 포로들을 데리고 막사 밖을 나갔다.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도 그만 나가 보거라."
"하지만 대기사단장님. 손이······."
"이런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거라."
"예."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는데, 호레스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호레스?"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기사단장님."
저번과는 다르게 그는 극진한 예의를 차리며 내게 인사한 뒤 총총걸음으로 밖을 나갔다.
그제서야,
"아-"
내 몸을 지배하며 맥스를 찍었던 병적인 허세에서 자유를 얻었다.
모든 감정과 통증마저도 통제하는 허세력이 터진 풍선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아파. 씨발 아프다고!"
절로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던 손에서는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왔다.
꺄아아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나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욕이 나오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진짜 시발 이 병신 같은 캐릭터!"
그러면서도 아론이라는 대어를 낚아 돈을 벌었다는 안도감이 드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다.
6화
1초만 소드마스터 6화
막사를 나서던 호레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아슬란.
그가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던 사람이던가.
'기사는 검으로 살고 검으로 죽는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든다.'
막사에 있던 모두가 아슬란의 말을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당장 호레스조차도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부터 아슬란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이젠 모르겠다.
과거 자신이 알고 있던 아슬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섞여 혼란스러웠다.
"군사님."
"넬라 기사단장."
자신이 추격군을 이끌고 간다고 했을 때 무거운 표정으로 보내줬던 넬라의 얼굴이 지금은 미소로 가득하다.
오랫동안 험한 미로에 갇혀 있다 마침내 출구를 되찾은 듯, 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해방감마저 보였다.
"군사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
"역시 알고 계셨던 거군요. 대기사단장님이 그렇게 뛰어난 전략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전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아군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호레스는 괜히 헛기침을 터트렸다.
아군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라.
설마 저 아슬란에게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명언이었다.
"할라즈 왕국 놈들이 대기사단장님의 깃발을 보고 얼이 빠졌던 걸 직접 보셨어야 했는데. 하하하!"
"넬라 기사단장."
"아, 예. 군사님."
호레스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아니오. 오늘 노고가 많으셨소."
"아닙니다.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직접 먼 길을 자처하신 군사님이 대단하시지요."
호레스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아슬란의 계획을 미처 알지 못했노라고 직접 입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넬라의 얼굴을 보니, 더는 그에게서 아슬란에 대한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대기사단장님 말씀 들었어?"
"크- 나도 밖에서 다 들었지. 어찌 그리 말씀도 멋있게 하시는지."
"그분이야 말로 기사의 표본이시지 않은가? 한 걸음을 걸으시더라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으시잖아."
"크하하! 맞지, 맞아! 난 한번도 대기사단장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니까?"
호레스는 군영 안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이 나누는 얘기를 조용히 엿들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호레스도 흐트러진 아슬란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술을 잔뜩 마셔도 아슬란은 결코 걸음걸이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은 타협이 없었기에 그런 점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거기다 검술도 엄청 뛰어나시잖아! 그 유한을 일격에 죽이셨다고!"
"아- 내 평생에 우리 왕국에서 대륙 소드 마스터가 나오는 날을 보다니."
"그런 분과 같이 싸우는 것도 엄청난 영광이야."
아슬란을 향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중후한 매력을 가진 외모에 평소 어떤 순간에도 잃지 않는 품위를 보이던 아슬란.
거기에 더해 이제는 소드 마스터라는 후광까지 생겼다.
소드 마스터의 휘하에서 싸운다는 것만큼 병사들에게는 대대손손 그 후일담을 들려줄 만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왕국에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나왔는데, 자긍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왕국의 군영이 맞는 것인가?"
일라이 왕국은 대륙에서 최약체로 평가되는 약소국.
그렇기에 전쟁이라도 터지면 항상 막사 안은 어둡고 우울함만 가득했다.
하지만 보라.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내가 틀렸던 것일까."
아슬란만 사라지면,
그의 뒤에 있는 베라크 가문만 사라지면,
일라이 왕국이 강대국으로 다시 일어설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원하던 이상적인 광경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슬란의 지휘 아래에서 말이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군."
호레스는 저 멀리 언덕 꼭대기에 홀로 있을 아슬란의 막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옆에서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네가 정말 그 말을 지키는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든다는 아슬란의 말을 호레스는 영원히 간직할 생각이었다.
* * *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네게 남기신 선물이다."
옥에 갇힌 아론 앞에 일라이 왕국 병사 하나가 무언가를 던져 놓았다.
쨍-
그것은 바로 두 동강 난 아론의 검이었다.
깨끗하게 단면이 잘린 것이 아닌, 아예 중간 부분이 바스러져 다시 수리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무식하게 저걸 맨손으로 부러뜨렸으니 당연한 결과다.
아론은 그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대기사단장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시 힘을 모은다면 일라이 왕국쯤은 금방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아론을 위로하고자 그와 함께 포박되어 있던 기사들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들은 이 검을 보고도 모르겠는가?"
"예?"
"내 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한번 봐라."
검에서는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는 건.
"미, 미스릴!?"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는 미스릴.
아론의 검은 바로 그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아슬란은 내 검이 미스릴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완력만으로 이 검을 부러뜨린 거다."
"어, 어떻게 사람이 그런 괴력을···!"
"완전 괴물이 아닙니까?!"
"그래. 괴물이지. 그런 자와 너희는 다시 싸우고 싶은 것이냐?"
"······."
아슬란과 다시 싸운다?
벌써부터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아론 역시 누군가에게 이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 잠시 아슬란의 옛 그림자에 속아 그의 힘을 과소평가했어.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실책을 범하지도, 이곳에 붙잡히지도 않았을 터."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을 통해 배운 것도 있었다.
아슬란이라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그가 손에 피를 흘리며 외친 기사의 명예가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아슬란.'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더 이상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압도적인 그의 힘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100번을 싸워도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과 할라즈 왕국을 비겁하고 옹졸하며 명예를 모르는 자들이라 내리깎았지만, 이상하게 거기다 대고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기사로서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대체 넌 무엇이냐?'
대륙 전체에 퍼진 아슬란에 대한 소문은 전부 거짓이었던가.
그의 악행들과 치졸한 짓들은 전부 헛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힘과 저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내가 여길 나간다면-'
그땐 아슬란을 단순히 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롤모델로서 그가 외친 기사의 정신을 지켜나갈 생각이었다.
* * *
"새로운 소드마스터이시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와아아아-!!"
일라이 왕국의 수도, 브릴 도시.
성문이 활짝 열리기 무섭게 하늘에서 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전부 이곳 백성들이 승전하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위해 뿌리는 찬사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군중 사이로 지나갔다.
'또 시작이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것처럼, 아슬란 역시 그러했다.
근엄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꽃가루가 아무리 날려도 눈꺼풀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양옆에서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어도 절대 표정이 변하는 법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닌, 허세력에 찌든 이 아슬란의 몸이 본능적으로 해내는 것이었다.
하여튼 대단한 정신병이다.
푸르르-!
이놈의 말도 주인을 닮은 것인지, 평소에는 촐싹대게 울어대던 놈이 오늘은 꼭 명마처럼 말발굽이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이놈도 주인의 허세력에 전염된 게 분명했다.
나는 전쟁터의 위대한 지휘관마냥 팔짱을 낀 채 백성들을 지나쳐갔다.
"아아. 저것이 소드마스터의 품격인가?"
"어쩜 말을 타실 때도 저렇게 멋있을 수가."
"대체 누가 지금까지 우리 대기사단장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던 거야?"
중후한 매력이라는 특성이 발동되면서 아슬란은 백성들의 마음을 금방 휘어잡았다.
이래서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상해 보여도 일단 얼굴이 잘났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는 봐야 한다는 잔인한 말이 있지 않던가.
나 같은 아싸 찐따에게는 침이나 뱉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하필 믿어도 아슬란 같은 놈을 믿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었으나, 병신 같은 허세력에 장악당한 이 몸은 그런 간단한 동작조차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걸 다행스럽게 여기면 안 되는 건가?
이 병적인 허세력에 내가 먹혀 버릴까 두려웠다.
'그나저나 여기만 지나면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겠네.'
가만있자.
일라이 왕국의 왕이라면 리베르트였나?
이 게임에서 등장하는 왕 중 제대로 된 놈은 거의 없다.
중세 시대처럼 첩이 많아서 후계 문제로 매번 피바람이 불고, 별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왕족들이 득실거려 한번 플레이를 해보면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다.
일라이 왕국같이 망국 테크 트리를 타고 있는 놈들이라면 그 왕족 수준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간다.
상대가 대기사단장이건 대마법사건 제 신분만 믿고 날뛰는 놈들이 많다는 것이다.
'뭐, 나한테는 베라크 가문의 빽이 있으니까.'
일라이 왕국에서 베라크 가문의 위세는 대단하다.
제아무리 왕족이라도 베라크 가문의 사람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왕실 곳곳에 베라크 가문의 수족이 심어져 있으며, 그들의 감시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왕도 나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부딪히지 말자.'
이 게임이 현재 '극악' 난이도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 * *
"끄응-"
일라이 왕국의 왕, 리베르트는 똥 마려운 똥개마냥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일라이 왕국의 적폐 아슬란을 제거하고 베라크 가문을 몰아내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것이다.
할라즈 왕국에게 따로 밀지를 보내 협력을 하고 있었을 만큼 완벽한 작전이었거늘.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아슬란이, 그 아슬란이 어떻게 유한을!?"
백 번을 생각해 봐도 뭔가 잘못된 일이었다.
문무에 재능이 없으면서 가문을 등에 업고 분수에도 안 맞는 대기사단장이 된 아슬란이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하하하! 세상이 미쳐 버린 게 틀림없다. 다 미쳐 버린 거라고!"
"고정하십시오, 왕이시여."
"지금 고정하게 생겼느냐? 네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아슬란의 위세만 높여 준 꼴이 됐잖은가! 이걸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라울!"
왕의 측근이자 사촌인 라울도 미칠 지경이었다.
아슬란이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기에 그 유한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인지 그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럴수록 침착하셔야 합니다. 기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미 왕을 위해 이번 일에 동참한 기사들과 신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솔깃해진 왕이 은근하게 물었다.
"무슨 방도라도 있는 것이냐?"
"왕께서는 그저 지켜만 봐주십시오."
지켜만 봐달라는 건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왕은 모른 척 잡아떼도 된다는 것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니, 왕은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이번 한번만 마지막으로 믿어 주지."
"송구합니다. 이제 그만 전각으로 가시지요. 아슬란이 오고 있습니다."
"쯧. 그래야지. 내 언제쯤 그놈 얼굴을 안 볼 수 있는 것인지."
리베르트 왕은 아슬란이 오는 것에 맞춰 전각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이미 신하들과 기사들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왕이 왕좌에 앉자 얼마 안 있어 기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큰 목소리로 아뢰었다.
"왕이시여! 대기사단장 아슬란이 왕을 뵙고자 합니다!"
리베르트는 똥 씹은 표정을 지웠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인자하고 아슬란을 아끼는 왕인 척을 해야 한다.
"대승을 거둔 자랑스러운 나의 기사다. 그를 성대하게 맞이하거라!"
웅성웅성-
술렁이던 신하들과 기사들.
그들도 의문일 것이다.
어떻게 아슬란이 유한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가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는지.
하지만 아슬란이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전각 안이 고요해졌다.
라울은 느낄 수 있었다.
아슬란을 바라보는 저들의 눈동자가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벌써 잊어버린 건가? 이 우매한 놈들.'
아슬란이 그동안 저지른 악행을, 그 추악한 만행을 전부 다 잊어버린 것인가?
"오오. 위대한 분이시여."
"소드마스터가 되심을 감축드립니다."
입에 발린 신하들의 말과 기사들의 경외심 가득한 목소리.
그저 아슬란의 눈치만 보며 아부만 떨던 과거의 모습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저놈들은 어쩌면 그가 왕국의 희망이 될지 모른다는 미친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 라울은 생각했다.
'저대로 놔두면 안 되겠구나.'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슬란은 죽어야 한다.'
설사 그가 정말로 왕국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자신의 권력과 왕실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서라도.
7화
1초만 소드마스터 7화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 아슬란이여. 그대가 우리 왕국의 명예를 드높였구나."
일라이 왕국의 왕, 리베르트.
뚱뚱한 몸집이 왕의 망토에 다 가려지지 않을만큼 심각해 보였다.
"먹고 즐기시게. 그대는 충분히 자격이 있으니."
나는 힐끗 웃으며 술잔을 드는 척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더럽게 맛없네.'
술이 내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난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가끔 사람들은 술이 달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 양반은 혓바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맥주도 그렇고, 소주도 그렇고 아무리 비싼 양주를 마셔도 술이 맛있다, 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몸이 바뀌어도 입맛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리들이 전부 고기 요리라는 것 정도?
"우하하하-!"
"자자. 모두 잔을 드시게!"
어느 술자리나 그렇듯, 무리에 끼지 못하는 아싸가 있고 분위기를 승천시키는 인싸가 있다.
이 자리에도 연회의 분위기를 열심히 띄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라울]
무력: 55
지력: 65
왕의 사촌인 라울이었다.
형편없는 능력치에 나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런 놈도 나보다 능력치가 높구나.
아슬란 이놈은 대체 얼마나 똥인 거냐.
"자! 모두 주목! 오늘 승리의 주역인 아슬란 대기사단장을 위해 잔을 듭시다!"
"옳소!"
"새로운 소드마스터를 위하여!"
"위하여!!"
이날만큼은 문무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잔을 높이 들었다.
보통 문관과 무관의 사이는 껄끄러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로 먹고 마시며 취하는 술자리에서는 그런 갈등도 전부 허물어지는 듯 보였다.
"우리 왕국의 소드마스터가 탄생하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들이 내 스텟을 알게 되면 아마 까무러칠 것이다.
찰나의 괴력.
딱 그거 하나 말고는 볼 게 없다.
저 라울 같은 놈한테도 아슬란은 상대가 안 된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젠장.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저들처럼 난 이 연회를 즐기지 못하는 중이었다.
원래 아싸 기질이 심한 터라, 이런 술자리에 잘 나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아슬란의 캐릭터 특성상 같잖은 품위를 지켜야 한다며 이런 자리에서는 실컷 떠들어 대지도 않는 듯했다.
그래서 지루하게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먹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대기사단장. 연회가 즐겁지 않소?"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라울이 서글서글하게 내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아까 일부러 다른 곳에 술을 버리고 빈 잔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놈이 제 마음대로 술을 채웠다.
인싸는 저기 가서 놀라고.
"얘기는 들었소. 아론이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붙잡아 할라즈 왕국에 거금을 내놓으라고 했다지?"
이놈은 왜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정도의 거금은 할라즈 왕국에서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겠소?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고 해도 말이오. 어쩌면 포기를 할 수도 있겠구려."
할라즈가 아론을 포기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왕이 눈치를 보다 끼어들었다.
"오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그게 궁금했다. 아슬란 그대가 직접 포로들에 대한 몸값을 책정했다지? 근데 과연 그 정도의 값을 할라즈 왕국이 지불하려 들지 모르겠군."
값이 그렇게 높았나?
아니. 내가 이 게임을 얼마나 많이 플레이 해봤는데.
나도 선을 넘는 정도의 값을 내놓으라고 하진 않았다.
딱 그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맥시멈을 계산한 것이었다.
적어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내 계산이 틀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괜히 고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알아서 잘 해결이 될 터이니."
"흐흠. 그래. 우리 대기사단장이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겠지."
"하하. 그렇겠지요. 그럼 이제 연회도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으니, 여기서 제대로 흥을 띄워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이시여."
"라울. 그것이 네 특기이지 않더냐. 어디 마음껏 해 보거라."
라울은 왕에게 공손히 예의를 차리며 기사들이 있는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비열한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라울.
저런 쩌리 캐릭터 이름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놈이 가진 특성 때문이었다.
[야망] [배신]
야망이라는 특성은 좋을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특성이다.
야망은 자신의 힘, 혹은 세력을 넓히고 강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과하게 되면 무모한 짓을 하게 되고 안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양날의 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라울은 '배신'이라는 특성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캐릭터의 낙인 같은 거지.'
이 게임에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혹은 친해져야 하는 캐릭터, 그리고 반드시 멀리하거나, 죽여야 하는 캐릭터가 있다.
아예 교류를 피하는 것도 방법인데, 이런 목록에서 라울은 항상 부정적인 곳에 들어가 있었다.
본인의 능력이 어울리지 않는 야망이 있고, 또 상대가 누구든 일단 배신부터 치고 보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삼국지의 여포처럼 저놈은 제 부모도, 형제도, 자신이 모시는 주군도 망설임 없이 뒤통수를 치는 놈이다.
그러므로 라울과 같이 '배신' 특성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무조건 걸러야 한다.
"이제 시간이 됐소."
놈은 잔을 들고 연회장에 모인 회중들에게 말했다.
"누가 이 왕국 최고의 술꾼인지 가려야 하지 않겠소?"
라울이 손뼉을 치자 시종들이 사람 키보다 높은 술병을 가지고 들어왔다.
왕과 신하들은 기함을 터트리며 그 안에 잔뜩 담긴 술을 내려다보았다.
"참가할 사람은 누구든 참가할 수 있소. 일라이 왕국 최고의 대주가가 될 수 있는 명예를, 그리고 왕께서 친히 하사하시는 상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참여하겠습니다!"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남자들이 이상한 곳에 자존심을 부리는 건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이다.
그들은 각자 술잔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나이가 좀 든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기사들이 이번 경쟁에 참여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끼리 하면 재미가 없겠지. 이건 어떻소? 내가 우리 왕국 최고의 대주가라고 보증할 수 있는 시종이 하나 있소이다. 그를 이번 경쟁에 참가하게 한다면 더욱 재밌을 거 같은데?"
"좋습니다!"
"다 덤벼 보십시오!"
기사들의 호쾌한 웃음도 잠시.
남들보다 두 배는 더 큰 덩치에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페]
무력: 75
지력: 30
무력이 75에 달하는, 우리 왕국에는 몇 없는 강자였다.
저런 놈을 라울은 시종으로 데리고 있었단 말인가.
이미 저 몸집과 아우라에서부터 기사들은 주눅이 들어 보였다.
이번 대결은 보나 마나 뻔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아슬란 대기사단장."
라울이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이런 자리에 빠지면 섭섭하지.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라는 그대가 이런 대결을 피하진 않겠지? 어떻소? 한번 같이 흥을 띄워 보는 것이."
유치한 도발이었다.
당연히 나라면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문제는,
"흠-"
이 몸은 아슬란의 몸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병적인 허세가 기다렸다는 듯이 치밀어 올랐다.
펄럭-!
일어날 땐 망토를 펄럭이고,
"날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래로 내려갈 땐 절도 있고 품격 있는 발걸음을 잊지 않았다.
나는 술병 앞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기사들을 하찮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이나마 내 지루함을 달래 줄 정도면 좋겠군."
그 말에 자극을 받은 기사들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 *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호레스?"
"······."
"그리고 넬라 기사단장도 그렇소. 일이 틀어지면 그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 하지 않았던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두 사람이 라울은 답답했다.
"뭐라 말 좀 해보시오."
"일이··· 그리되었습니다."
"그냥 그리되었다?"
"아슬란이 유한을 꺾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이대로 포기하자는 것이오?"
아슬란을 죽이고 무너진 왕국을 재건하자는 것에 뜻을 모은 건 호레스와 넬라 뿐만이 아니었다.
라울도 그중 하나였고, 그 외에도 아슬란의 측근이 아닌 자들이 비밀리에 힘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아슬란이 대승을 거두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난 그대들을 믿소. 다시 한번 우리가 힘을 모아 계책을 만든다면 아슬란을 제거할 수 있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뭐요?"
"공의 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 마지막으로 한번만 아슬란을 믿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라울은 지금 내가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토록 아슬란을 증오하던 호레스에게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호레스. 혹시 뭘 잘못 드셨소?"
"공께서는 아슬란이 못마땅하실 수 있지만, 지금 그는 우리 왕국의 희망입니다. 그런 그를 무리해서 제거하려 든다면 어떤 출혈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을 통해 깔끔하게 제거하려 했던 것이 아니오? 거기다 희망? 저 아슬란이 희망이라고?!"
"진정하십시오. 호레스 군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넬라 기사단장. 자네까지!?"
"그는 왕국에 꼭 필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오늘 연회가 끝난 뒤에 하시지요."
"······."
믿었던 호레스와 넬라가 차갑게 등을 돌리며 연회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슬란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라며 피를 끓이던 작자들이 대체 이번 전쟁에서 무얼 봤기에 저토록 변한 것인지.
라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막상 아슬란이 죽는다면 저들의 마음도 다시 달라질 것이리라.
그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준비는 되었느냐?"
그의 물음에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이 조심스레 다가와 대답했다.
"후훗. 공께서 지금 제일 필요하신 약이 뭔지 전 알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작은 약병을 라울에게 건넸다.
약병 안에는 투명한 물약이 들어 있었다.
"베라크 가문 같이 큰 가문은 주기적으로 큰돈을 들여 독에 면역이 될 수 있는 주문을 가주에게 걸어 둡니다. 그렇기에 웬만한 독으로는 그를 죽일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약은 독이 아닙니다."
"독이 아니다?"
"예. 제아무리 흉포한 몬스터라도 이 약 한 방울이면 금세 잠에 빠지게 만들지요. 이 약을 아슬란에게 먹이신다면 그는 세상 모르고 잠들게 될 겁니다. 그럼 그때 스윽-"
여인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라울의 입가가 저절로 호선을 그렸다.
"마음에 드는군. 약효는 확실하겠지?"
"의심이 가신다면 아무에게나 써보십시오."
"좋아. 효과가 좋다면 내 또 연락하도록 하지."
"언제든 공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인은 라울이 던져주는 돈주머니를 받고 미소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라울은 약병을 품 안에 넣어 놓고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끄으윽······."
왕국 최고의 대주가라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자신의 부하가 덩치값을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져, 졌습니······."
놈은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잠에 빠져들었다.
그 외에도 이번 경쟁에 참여했던 기사들 모두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꼿꼿하게 서 있는 자가 있었으니,
"한심한 놈들. 고작 이 정도 마시고 쓰러지다니."
그건 바로 아슬란이었다.
"이제 막 시작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내 상대가 될 자는 없는가?"
그는 술병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시는 무시무시한 주량을 보여 주었다.
설마 저 많은 걸 다 마신 건가?
라울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저 술은 그냥 술이 아닌, 굉장히 독하게 만들어진 독주다.
그런데 저걸 정말 다 마셔 버렸다고?
"라울 공."
그때 자신을 부르는 아슬란의 목소리에 라울은 몸을 들썩였다.
아슬란은 잔을 털어내며 말했다.
"숨겨둔 부하는 더 없습니까?"
8화
1초만 소드마스터 8화
"누님. 그 멀건 놈한테 물건은 전하셨소?"
"응. 아주 마음에 들어 하던데?"
여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길드원들에게 다가가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덕분에 돈도 두둑이 받았고."
"오~ 당연히 가격도 잘 후려치셨겠죠?"
"물론이지."
돈이 든 주머니를 짤랑짤랑 흔들자 길드원들은 그 소리에 이끌리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발길질을 날렸다.
"야. 이 씨발. 어딜 더러운 손으로 만지려고."
"아이참. 누님. 우리도 돈 좀 만져 봅시다."
"꺼져. 나중에 분배해 줄 때나 많이 만져."
하지만 돈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의뢰의 수준에 따라 어떨 땐 이런 돈이 큰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다.
"근데 이거 괜찮은 거 맞소? 그 멀건 놈이 아슬란을 죽이려고 약을 산 거 아니오?"
"알아서 하겠지. 뭔 상관이야."
"아슬란이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됐다는 건 누님도 알고 계시죠? 괜히 실패했다가 우리한테 불똥이 튀는 건······."
"풉!"
그 말을 듣고 여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개병신 같은 아슬란이 소드마스터? 난 절대 안 믿어. 그리고 내가 준 약은 최상급 미혼약이라고. 진짜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한 방울만 마시면 바로 기절이야."
"누님은 아슬란을 참 싫어하시네."
"내가 원래 너희들보다 병신인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놈이 딱 그렇거든. 어휴. 그 정신병자 새끼. 아무튼, 이제 그 새끼 볼 일 없을 거야. 그리고 우린 얼른 여기부터 뜨자."
"예? 아슬란이 죽으면 우릴 쫓을 사람도 없을 텐데요?"
"야. 아슬란이 죽는다고 베라크 가문이 망하니? 그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싸우려 들걸? 가뜩이나 왕국 상태가 메롱 한데, 내전까지 일어나 봐. 안 봐도 뻔하지."
아슬란이 죽은 걸 알면 베라크 가문의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고, 그럼 왕족과 베라크 가문끼리의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것이다.
"가자. 이런 구닥다리 같은 왕국은 역시 나랑 안 맞아."
어차피 정도 들지 않은 곳이라 아쉬움은 없었다.
그저 다음에 왔을 땐 이 성에 어떤 왕국의 깃발이 꽂힐지 궁금할 뿐이었다.
* * *
"우욱-"
온 세상이 빙빙 돈다.
롤러코스터가 최고 속력으로 원을 그리며 달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씹-"
뒤집어진 속을 풀어 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으으. 숙취해소제라도 제발······."
오늘따라 편의점이 그리웠다.
갈증을 풀어 줄 시원한 물과 모닝땡 같은 숙취해소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고통을 끝내려면 그냥 안에 있는 걸 게워 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화장실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이 대사, 왠지 예전 룸메가 했던 소리 같은데.
매번 저러다가 술이 다 깨고 나면 해장술을 처마시러 룰루랄라 나가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래서 난 저 정도로 술을 마시지 말자··· 고 다짐했었는데.
"아오. 아슬란 진짜 이 개 같은······우읍!"
대체 그 허세가 뭐라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끝까지 들이키게 만들다니.
차라리 이 아슬란의 몸이 술을 잘 받는 신체면 말도 안 한다.
이놈은 내 원래 몸보다 더 심각하게 술이 안 받는 약체였다.
이 손을 봐라.
저번에 괜히 똥폼 잡는다고 손으로 칼을 부쉈다가 아직도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고 있다. 그나마 회복용 포션을 퍼부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많은 술을 퍼마셨다.
웃긴 건 부하들 앞에서는 절대 취한 모습을 보이거나, 속이 뒤집히는 것조차 병적인 허세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휴. 씨발. 내가 이 정신병자 몸에서 빨리 나가든가 해야지."
안 그랬다가는 어떤 허세를 부리다 죽을지 모를 판이었다.
"이따 집은 어떻게 가지?"
그나마 여기 방까지 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꽐라가 된 부하들 앞에서는 맥시멈을 찍은 허세력이 몸을 꼿꼿하게 세워 주고 여기까지 오게 해줬지만, 눈앞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니 그 후폭풍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아까 누가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이곳 왕궁에 남아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바보 같은 경쟁에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왕이 하사하는 상을 받아야 한다나 뭐라나.
다 됐고, 그냥 이대로 얼른 잠에 들고 싶었다.
속만 뒤집히지 않았어도 그냥 기절했을 것이다.
뚜벅뚜벅-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대기사단장. 안에 있으시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몸이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났다.
빙빙 돌던 시야도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고, 흔들리던 발걸음 역시 균형이 잡혔다.
병적인 허세가 몸 안에 가득한 취기를 놀라울 정도로 꾹꾹 밀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참 언제 봐도 놀라운 정신병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난 흐트러진 망토끈을 단정하게 하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울을 안으로 들였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독주를 엄청나게 마셨는데도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니. 과연 소드마스터다운 정신력이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 꼴이 멀쩡해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병적인 허세가 술기운을 억누르고 있을 뿐.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면 언제 또 토악질을 하며 쓰러질지 모른다.
라울은 자리에 앉아 시종을 시켜 상자를 위에 올려 두게 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왕께서 내리시는 보물이오. 오늘 연회에서 그대가 왕국 최고의 대주가라는 걸 증명하지 않았소? 아아. 물론, 할라즈 왕국을 격파한 전공에 대한 상도 따로 주실 거라 하셨소."
상자 안에는 황금과 반짝이는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별로 감흥이 없었다.
안 줘도 되니까 빨리 좀 라울이 꺼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도 함께 하사하셨다오."
상자 다음에 나오는 것은 바로,
"국왕께서만 드신다는 매우 진귀한 술이오."
"······."
이런 시발.
또 술이었다.
"왕께서 하사하신 것이니, 맛은 봐야 하지 않겠소? 내가 한 잔 따라 주겠소이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허허. 거절하지 않으셔도 되오. 얼른 이 맛을 보고 싶지 않소이까?"
라울은 뒤집힌 내 속도 모르고 잔에 술을 쪼르르 따랐다.
"자. 얼른 드시오."
이제 술은 보기만 해도 뭐가 위로 올라오는 것만 같아 입에 대기가 싫었다.
하지만 저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으니,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저 혼자 마실 순 없지요. 공께서도 받으십시오."
"아아. 나는 괜찮소."
"둘이서 마시면 더 술맛이 좋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이 귀한 술을 저 혼자 마실 순 없지요."
"크흠. 그,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는 라울에게도 잔을 따라 준 뒤 그가 잠깐 술잔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얼른 내 잔에 있는 술을 바닥에 부어 버렸다.
그는 전혀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자. 쭉 드십시다."
나는 비어 있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꿀꺽꿀꺽 넘기는 연기를 했다.
라울은 술을 마시지 않고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왜 드시지 않습니까?"
"음? 하하. 그거야 나는 마시면 안 되기 때문이오."
"괜찮습니다. 드십시오."
"그럴 순 없지. 그랬다가는 나도 자네처럼 잠에 곯아떨어질 것이 아닌가?"
"······?"
그게 무슨 소리지?
"술맛은 어떻소? 내가 직접 맛을 보진 않아서 약물 때문에 맛이 달라진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소이다."
약물?
그는 품 안에서 작은 빈 병을 꺼냈다.
"이 약 한 방울이면 흉포한 몬스터도 금방 잠재울 수 있다고 하지.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소. 내가 여기 가져오기 전에 몇 번 시험을 해보니, 정말 다들 한 방울만 먹고도 기절을 하더군."
"······."
"그런 강력한 약을 병째로 이 술에 넣어 놨소이다."
그 말은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이런 짓을 꾸몄다는 것이다.
나한테 약을 먹여서 무슨 짓을 하려고?
"베라크 가문이 그대의 몸에 보호 마법을 걸어 독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오. 이 약은 보호 마법이 지켜주지 못하거든. 그냥 빠르게 잠만 재우는 약이니까."
"왜 그런 짓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대를 죽이기 위함이지."
바로 그때였다.
* 퀘스트 발생!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십시오.]
-크리페 처치, 자객 20명 처치, 라울 처치 혹은 생포.
-보상으로 골드 10을 얻습니다.
-골드는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라울 이 개새끼가?
야망과 배신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벌써 행동으로 옮긴다고?
거기다 아무런 전조 신호도 없이 퀘스트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전개가 빠른 거 같은······.
'아.'
그때 내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난이도 때문이구나!'
'극악' 난이도는 내가 한번도 플레이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니 무엇도 예상할 수가 없고, 예상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
"날 죽인다면 베라크 가문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상관없다. 너만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
그의 신호에 따라 사방에서 자객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중에는 아까 나와 마지막까지 주량 대결을 하다 쓰러진 크리페가 있었다.
분명 꽐라가 돼서 기절을 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일어난 거지?
"흐흐. 그렇게 취한 건 오랜만이라 덕분에 포션을 많이 마셨습니다, 대기사단장님. 지금도 사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울 정도로 취기가 남아 있지요."
그래. 판타지 세상인데, 술을 깨게 해주는 포션이 없을 리가 없지.
놈은 날이 서 있는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내게 뚜벅뚜벅 다가왔다.
거대한 몸집 때문인지 바닥이 쿵쿵 울릴 정도였다.
"당신을 죽이면 이제 내가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가 되는 겁니까? 크흐흐."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놈은 도끼날을 앞에 내세웠다.
"이제 슬슬 약효가 돌겠군요."
미안하지만, 약효가 돌 일은 없었다.
난 라울이 준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멋모르고 마셨다면 벌써 저 망나니 같은 놈의 도끼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안 마셔도 죽을 거 같긴 한데.'
크리페도 문제지만, 사방으로 모여든 이 자객들도 문제였다.
놈들의 숫자는 대략 20명.
내가 진짜 소드마스터라면 그냥 단칼에 썰어 버렸겠지만, 아쉽게도 난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그냥 어쩌다 이 세상에 떨어져 버려 졸지에 소드마스터가 되어 버린 방구석 여포일 뿐.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300초에 한번밖에 쓰지 못 하는 병신 스킬이었다.
"왜 약효가 돌지 않는 거지? 지금쯤이면 쓰러져야 하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낀 라울이 술잔을 들고 옆에 있던 자객에게 건넸다.
"한번 마셔봐라."
자객은 그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만 마셔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쿵-!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약효 하나는 기가 막혔다.
라울은 잔에서 찰랑이는 술과 쓰러진 자객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이렇게 약효가 빨리 도는 게 정상이거늘. 왜 넌 멀쩡한 거지?"
잘 생각해 보자.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일단 찰나의 괴력이 있으니, 크리페 저놈을 단번에 베어 버리고 어떻게든 이곳을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그래. 차라리 라울 저놈을 노리자.
일격필살의 의지로 달려가 검을 뽑으면 놈의 목 하나는 날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당연한 걸 묻는군."
아슬란의 몸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지고 목소리는 굵고 낮게 깔렸다.
기회를 엿봐서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준비하던 동작도 풀려 버렸다.
"고작 그따위 약으로 이 몸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꿈틀거리기 시작한 병적인 허세.
그래. 네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지.
이미 허세에 잠식당한 혓바닥은 내 의지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춤을 췄다.
"어리석구나. 라울이여. 넌 약을 믿을 게 아니라 이 왕국에 있는 모든 기사를 끌고 왔어야 했다. 뭐, 그랬어도 이 몸을 잡기는 어려웠겠지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주 당당하게 하고 있었다.
"야, 약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아까부터 재수 없게 웃기만 하던 크리페가 안색을 싹 굳히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댔다.
잠깐. 이놈들 봐라?
이거 잘하면 먹힐 수도 있겠는데?
아슬란에게 있는 또 다른 무기는 바로 상대방이 속을 정도로 뻔뻔한 허세가 아니던가?
"약 따위는 이 몸에게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여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한번 고삐 풀린 허세가 얼마나 위험한지, 가오에 지배당한 몸이 얼마나 더 미친 짓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웃기지 마라. 그 약이 통하지 않을 리 없다."
라울의 반박에 나는, 아니. 아슬란은 약이 잔뜩 풀어져 있는 술병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 미친놈은 그 술병에 담긴 술을,
"그럼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군."
전부 입에 부어 버리기 시작했다.
9화
1초만 소드마스터 9화
꿀꺽꿀꺽-
라울과 자객들은 병째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아슬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곧 술을 다 마신 아슬란이 바닥에다 병을 던져 버렸다.
쨍-!
바닥에 부딪혀 깨진 병은 물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슬란은 정말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술을 해치워 버린 것이었다.
"이, 이런 미친놈."
예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역시 저놈은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저놈이 스스로 약물을 잔뜩 몸에다 넣어 버렸으니까.
라울은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거지?"
저토록 강한 미혼약을 다 마셨는데도 아슬란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휘청거리거나, 눈이 풀리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설마 베라크 가문에서 이런 것도 보호할 수 있는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냐?"
"······보호 마법이라."
아슬란은 코웃음을 치며 팔을 걷어 보였다.
"보호 마법이 걸린 자는 손목에 그 표식이 남는다. 보거라. 그 표식이 네 눈에 보이느냐?"
그의 손목은 깨끗했다.
어떤 마법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가능할 리 없다. 보호 마법도 없이 그 강한 약물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어!"
"우습구나, 라울."
아슬란은 천천히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라울을 비롯해 그의 자객들도 동시에 뒷걸음질을 쳤다.
"술에 약이나 타며 음모나 일삼는 네가 뭘 알지?"
그 많은 미혼약을 마셨으면 분명 쓰러져야 정상이지만, 아슬란의 동공은 더욱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기사의 정신을 알고 있나?"
"······."
"그 고귀한 정신의 단단함을 알고 있나?"
커지는 아슬란의 목소리에 라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을 모르니, 이따위 약물을 쓰는 것이겠지. 멍청한 놈."
"허, 허세 부리지 말거라. 네가 간신히 서 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허세인지 아닌지는······."
아슬란은 천천히 검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앞에 있던 크리페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쳤다.
콰콱-!!
크리페는 검을 막기 위해 얼른 도끼를 들었지만, 너무나도 가볍게 아슬란의 검이 아래까지 통과했다.
"어?"
거구의 사내는 자신의 도끼가 갈라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시야도 두 개로 멀리 갈라지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쿠웅-!!
"!?"
라울이 가진 최고의 무기였던 크리페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것도 도끼와 같이 몸이 반으로 갈라진 채로 말이다.
"저, 저런···!"
검강을 쓴 것인가?
아니. 그냥 위에서 아래로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휘두르는, 검술이라 부르기에도 아까운 간단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저 큰 도끼와 덩치를 동시에 반으로 갈라 버리다니!
실로 무시무시한 검격이었다.
"이래도 내가 허세를 부리는 것 같나, 라울?"
아슬란은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주위에 깔린 자객들을 바라보았다.
"고작 20명. 내 칼에 피를 묻히기도 아까운 숫자로구나."
"으으-"
"마, 말도 안 돼."
그 기세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 자객들.
그들은 방금 전 아슬란이 보여 준 기행이 얼마나 괴물 같은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뭐, 뭣들 하느냐! 어, 얼른 가서 저놈을 죽여라!"
라울의 외침에 아슬란은 그들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오너라. 내 너희들에게 기사의 검이 가진 무게를 알려 줄 터이니."
하지만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겁에 질린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서 저놈을 죽여! 죽이라니깐!"
라울의 목소리가 더 이상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그의 발악 섞인 외침은 다른 이를 불러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밖에서도 크게 들리는 소란 소리에 달려온 것은 바로 넬라 기사단장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이건······."
두 쪽으로 나누어진 거구의 사내.
그리고 깨진 술병과 자객들.
넬라는 금방 어떤 상황인지 알아챘다.
라울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를 붙잡고 말했다.
"잘 왔소. 넬라 기사단장. 그대라면 지금 저 아슬란을 죽일 수 있을 것이오."
"예?"
"놈은 지금 미혼약에 취해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이오. 그러니 지금이라도 칼을 뽑아 저놈의 목을 치시오!"
미혼약?
역시 그랬군.
넬라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네, 넬라 기사단장! 이게 무슨 짓이오!?"
아슬란이 아닌 바로 라울이었다.
"닥쳐라. 아무리 왕족이라도 일라이 왕국의 검을 해하려 들다니!"
"넬라 기사단장! 정신 차리시게! 지금 나는 옳은 일을 하려는······."
"한 마디만 더 지껄여 보거라. 단숨에 목을 베어 주마, 라울."
"······."
넬라는 사나운 눈빛으로 자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기사단!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지키거라!"
"예!"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쏜살처럼 달려가 자객들을 죽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자객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기사단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했다.
"아아······."
라울은 망연자실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슬란은 어느새 앞에 다가와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라울은 느꼈다.
아슬란의 눈동자가 전과 다르다는 것을.
"대체 넌··· 누구냐."
라울은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슬란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넌 내가 알고 있는 그 아슬란이 아니야. 내가 아는 아슬란은······!"
추잡하고 더러우며 치졸하고 허세밖에 모르는 그런 놈이 바로 아슬란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이 기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자 아슬란이 쭈그려 앉아 그와 얼굴을 맞대었다.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그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혔다.
"말해 보거라. 네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
라울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나오질 않았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라울."
아슬란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붉은 망토가 화려하게 펄럭였다.
"뒷일을 맡기겠다, 넬라."
"예."
아슬란은 그대로 왕궁을 나왔다.
밖에는 자신의 경호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맛있는 당근을 먹어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의 말도 함께였다.
아슬란은 그 위에 올라탔다.
"가겠다. 앞장서거라."
"예!"
그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말에서 내리고 걸을 때도 격조 있는 발걸음을 유지했다.
궁전만 한 저택에서는 모든 시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소드마스터가 되셨다는 소식은 진즉 들었습니다. 정말로 감축드립니다."
아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를 따로 불러 말했다.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그 누구도 내 방에 들이지 말거라. 날 찾고자 불러서도 안 된다. 이건 명령이다. 알겠느냐?"
그의 엄한 명령에 집사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워낙 이상한 명령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이제는 무슨 명령을 내려도 그냥 이해가 됐다.
"잘 알겠습니다."
"믿고 있겠다."
아슬란은 그렇게 혼자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는,
"아-"
쿠웅-!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 * *
상황을 정리하던 넬라는 밧줄에 포박된 라울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라울 공. 이번 일은 도가 지나쳤소."
"······."
"그리고 멍청한 계획이었소. 대기사단장님을 상대로 고작 자객 20명이라니."
그러자 라울이 개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완전히 아슬란의 개가 되었구나, 넬라."
라울은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많은 약을 먹었는데도 어떻게 아슬란은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일까.
거기다 그가 자신에게 보였던 그 눈동자와 위세는 도대체···!
"······."
넬라는 그러한 라울의 표정에서 과거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자신도 라울처럼 저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
"뭐라?"
"그분의 강함을 공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오."
그분의 강함?
거기서 라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너와 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가 '문'에서도 '무'에서도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아니. 전혀 모르고 있었소."
라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르고 있었다고?
넬라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보았소. 대기사단장님께서 가지신 그 놀라운 힘과 적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를."
"그게 무슨······."
"그대는 그걸 직접 보지 못했으니 모르는 것이겠지. 유한이라는 거대한 태산이 아슬란님의 검 앞에 무너지는 것을 말이오. 그때 우리가 느꼈던 떨림과 끓어 오르던 피를 공이 어찌 알겠소이까?"
라울은 넬라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기 어렵지만, 그는 그토록 경멸했던 아슬란을 존경하고 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 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 광경을 공이 보았다면 이런 무모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이오."
"······나도 마냥 바보처럼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다. 분명 그 술을 먹으면 아슬란은 쓰러졌아야 했다. 그런데 놈은···!"
"술?"
상 위에는 아직 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까 라울이 마시지 않고 놔둔 그 잔이었다.
"아까 미혼약이라고 했었지."
"그래. 그런데도 아슬란 그놈이 그걸 병째로 다 마셔 버렸다."
"이, 이걸 병째로?"
"거기에 약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정상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하지만 아슬란이라면 왠지 이해가 갔다.
그런데 멀쩡하게 걸어 나갔다는 건 약 효과가 별로였나?
넬라는 궁금증에 술잔에 손을 살짝 담가 맛을 봐보았다.
그리고,
"헉!"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시야는 흔들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혀로 맛만 봤을 뿐인데, 이렇게나 약효가 뛰어나다니.
"이, 이걸 어떻게 버텨내신 거지? 보호 마법 때문인가?"
그걸 라울이 자약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슬란은 보호 마법이 없더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보호 마법이 없다니?"
그는 베라크 가문의 가주이며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이다.
당연히 온갖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이미 확인해 본 거니까. 놈에게는 어떤 보호 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 그럼 대체 어떻게 이걸 견뎌내신 거지?"
"나도 그게 의문이다. 넬라 너도 이 정도인데, 그놈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이러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넬라는 얼른 기사들에게 손을 뻗었다.
"라, 라울 공을 감옥에 가두거라."
"예, 단장님."
"윽, 그리고 날 부축해다오."
꼴사납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여기서 정신을 잃고 바닥에 드러누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대기사단장님은 어떻게 이런 끔찍한 약을 드시고도······."
과연 대단한 분이시다.
이것을 마법 없이 버텨내다니.
그만큼 육체를 단련하신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약을 견뎌냈을 리 없다.
'그런 분을 내가 그동안 의심하고 경멸했었다니.'
그분은 왕국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나는 노력을 하며 지금의 힘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런 대단한 분을 무시했던 것일까.
'난 멀었구나. 그분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멀었어.'
넬라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결국 미혼약에 잠이 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쯤 되니 다른 기사들도 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기사단장님은 분명 멀쩡하셨는데."
"왜 우리 단장님만 저러시지?"
"흠. 한번 맛을 봐볼까?"
"야! 잠깐!"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살짝 찍어서 맛을 보고는,
"!?"
쿵-!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기절해 버렸다.
"뭐, 뭐야?"
"장난하는 거지?"
"아니. 이게 대체 뭐라고······."
쿠웅-!
라울은 맛을 보는 족족 나가떨어지는 기사들을 보며 한심하다기보다는 공포심을 느꼈다.
이걸 병째로 마신 그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슬란.'
넌 괴물이냐?
10화
1초만 소드마스터 10화
"음냐. 내 치킨······. 우웅."
닭다리를 뜯던 나는 그 바삭바삭함과 부드러운 쫄깃함에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입가를 축축하게 만들면서 나는 손으로 입을 닦다 정신을 차렸다.
"아 씨발 꿈."
달콤 바삭한 꿈에서 깨어났다.
내가 닦은 건 눈물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침이었다.
"으아. 허리야."
저 푹신한 침대를 놔두고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여길 들어오자마자 정신을 잃어버린 탓이리라.
"젠장. 진짜 꿈에서는 아직도 깨질 않았구나."
매번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은 꿈에서 깨겠지.
현실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눈을 뜨면 여전히 난 게임 속이었다.
"으. 머리 아파. 숙취 지리네."
대체 내가 여기서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나는 답답한 갑옷을 풀고 세수라도 하기 위해 얼굴을 한번 씻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니,
"······."
한번 삶았냐?
"대체 며칠이나 퍼질러 잤길래."
아슬란 이 미친놈은 그 독한 술을 다 마신 것도 모자라 약을 탄 술까지 꿀꺽꿀꺽 다 처마셨다.
이 모든 게 무슨 큰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병신 같은 허세를 떨기 위해서였다니.
정말로 어떤 놈이 만든 캐릭터인지 가면 갈수록 가관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넬라 덕분에 살았다는 거지.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시발.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뜬 시스템 창에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이렇게 겁도 많은 놈이 이상하게 허세를 떨기 시작하면 백만 대군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니깐?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었습니다.]
[난이도 설정으로 인해 추가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아. 그놈의 난이도."
이래서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건데.
그때 내가 극악이 아니라 바로 아래 단계만 선택했어도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이 게임은 이런 퀘스트를 통해 자원을 얻고 새로운 능력치를 얻으며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극악 난이도는 그런 방법을 철저히 봉쇄하면서 오직 오리지날 스텟으로만 게임을 풀어나가게 만들도록 한 것 같았다.
"하-. 개발자 죽빵 마렵네."
누굴 탓하리오.
이게 다 똥캐를 고르고 극악 난이도를 고른 내 탓이지.
"으. 울렁거려."
크리페가 포션을 먹고 괜찮아졌다고 했던가.
그럼 나도 술을 깨는 포션을 찾아 먹어야겠다.
이런 으리으리한 곳에 그런 포션 하나가 없을 리 없지.
여기 시종들도 많으니, 아무한테나 시키면 될 것 같았다.
마침 배도 고프니까 밥도 같이······.
[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나!]
[정말 안 됩니다!]
그때 밖에서 소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분을 봬야 한다니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다니깐요!]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고 계시지 않는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일주일?
내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
그 정도면 혼수상태 있다가 간신히 깨어난 거 아니야?
[안 됩니다! 정말 안 돼요!]
[그래도 이 사람이!]
"쯧."
저러다 둘 중 하나는 피를 볼 것 같아서 난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에는 넬라 기사단장과 그 외 기사들. 그리고 집사가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내 꼴이 말이 아니긴 한지, 기사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넬라는 얼굴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송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설마··· 수련을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수련?
"이제 막 전투에서 돌아오셨는데도 정신과 육체 단련에 힘을 쓰시다니. 참으로 기사들의 귀감이십니다. 그 자세를 항상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
얘가 또 뭐라는 거야?
넬라와 비롯해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해 주진 않았다.
"무슨 일로 왔느냐? 분명 중한 일이야 할 것이다."
"아, 예. 실은 할라즈 왕국에서 답이 왔습니다."
"아론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할라즈에서 아론과 포로들을 돌려받기 위해 보낸 돈이 도착한 모양이다.
그럼 알아서들 처리할 것이지,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피워?
"할라즈 왕국에서 아론을 받지 않겠다고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할라즈 왕국이 거절을 했다고?"
"예.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며 아론을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고······."
깜짝 놀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힘도 없었다.
그냥 눈을 몇 번 껌뻑이는 게 전부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가격 측정을 잘못했나?
그럴 리가.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한번도 저지른 적이 없는 실수다.
항상 나는 적당한 가격을 책정해 포로를 풀어 주었고, 그 계산 과정에서 절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잠깐. 설마 이것도?'
머릿속에서 스치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극악' 난이도.
'설마 이것도 난이도에 영향을 받는다고?'
이 게임은 포로 교환에 있어서 난이도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하수든, 중수든, 고수든, 포로 해방에 관한 가격 계산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난이도를 생각하며 가격을 조금 낮췄던 건데······.
할라즈 왕국이 내 제안을 거절했다.
즉, 극악 난이도에서는 가격 측정이 훨씬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건 너무하잖아.'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오로지 내 안위를 위해 쓰려고 했건만.
할라즈 이 마요네즈에 머스타드 소스를 섞은 것 같은 놈들이 내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럼 아론은 이제 어떡하지?'
아론은 아무짝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이제 놈은 그냥 아까운 밥만 축내는 놈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