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기사단장께서는 뭐라고 하시오?"
"곧 이곳으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대기사단장께서는 괜찮으시오? 대체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방에서 나오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오?"
호레스를 비롯해 왕국 내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폐관 수련을 하고 계셨습니다."
"수련?"
"예. 수련의 강도가 무척 높았는지, 굉장히 수척해 보이셨지요. 하지만 여전히 건재하셨습니다."
"허어- 수련이라······."
과거의 아슬란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는 수련과는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고 군림하는 것을 즐기기에 대대적인 군사 훈련에는 항상 참가하곤 했다.
물론, 참가만 하고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외롭게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할라즈 왕국에 대한 건 말씀드렸소?"
"예. 크게 놀라지는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자 호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금 이상한 일이긴 했지. 내가 봐도 대기사단장께서 할라즈 왕국에 제시한 금액이 터무니없이 높다고 생각했거든."
"전 이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군요."
"아무리 아론이 할라즈 왕국에서 각광 받는 젊은이라고는 하나,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높았소. 그래서 나도 일이 엎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럼 다시 협상해야 하지 않습니까?"
"할라즈 왕국에서는 이미 협상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있소이다. 그리고 넬라 기사단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의 의문이 풀리는 것 같구려."
그동안의 의문?
넬라는 호레스의 말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대기사단장께서 직접 할라즈 왕국에 높은 가격을 제안하셨소. 그리고 할라즈 왕국은 거절을 했지. 그 소식을 듣고 그분께서는 덤덤하셨고."
"예."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소?"
"혹시 대기사단장님께서는 일부러 높은 가격을 부르셨다는 겁니까? 할라즈 왕국이 거절할 수밖에 없게?"
"바로 그것이오."
"하지만 대체 왜 그런······."
호레스는 아슬란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왕국에 가장 필요한 일을 하시려는 거겠지."
"······?"
"그게 무엇인지는 넬라 단장도 곧 알게 될 것이오."
끼이이익-.
이윽고 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아슬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따라 유독 그의 붉은 망토가 화려하게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근엄해 보였다.
* * *
'아, 속쓰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할라즈 왕국이 내 제안을 거절한 것도 짜증 나는데, 뒤집어진 속까지 난리였다.
'아슬란. 이 미친놈 때문에 내가 진짜.'
크리페가 먹었다던 숙취 해소 포션을 찾아 마시려고 했지만, 집사는 그런 것이 집에 없다고 했다.
그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그깟 포션 하나가 없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습게도 말이 된다.
사내대장부가 그딴 걸 먹어야 쓰겠냐며 아슬란이 그런 포션들을 싹 다 치워 버리게 만든 탓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 하는 것이다.
"라울은 어떻게 했지?"
"감히 일라이 왕국의 검을 해한 죄로 왕께서 그를 처형하셨습니다."
내가 자는 동안 알아서 잘 처리한 듯싶었다.
배신자 라울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꼴 좋다.
왠지 막혔던 체증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그나저나 아론. 이놈을 어떡하면 좋지?'
할라즈 왕국한테 한번 더 협상을 제의해 봐야 하나?
만약 거기서 거절한다면 더 이상 아론을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감옥에서 밥만 축내는 놈을 무슨 이유로 살려 준단 말인가?
차라리 라울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아론도 처형장으로 보내 줘야 할 것 같았다.
"······."
그때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쪼개고 있는 호레스였다.
놈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소름이 끼친다.
라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 영감도 언제 내게 칼을 들이밀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 이제 그만 이들에게 말씀을 해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뭘 말하라는 거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대기사장님께서 일부러 할라즈 왕국에게 큰 금액을 제시하여 거절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확신에 찬 호레스의 목소리에 회의장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대기사단장님께서 일부러?"
"왜 그러신 거지?"
그건 나도 궁금했다.
"우리 아름다운 일라이 왕국은 부끄럽지만 대륙에서 가장 약체에 속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왕국을 이끌어갈 만한 인재도 부족한 상황. 즉, 왕국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좋은 질문이었다.
호레스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한 책망의 눈빛으로 넬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붙잡혀 온 아론은 매우 유능한 젊은이요. 탁월한 검술 실력과 적의 허를 찌르는 뛰어난 지휘 능력까지 갖췄소."
"이번 전쟁에서 아론 때문에 할라즈 왕국이 큰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단지 상대를 잘못 만났던 것뿐이오. 그 상대가 모든 계책을 꿰뚫어 보는 우리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지. 만약 그대, 혹은 내가 군을 이끌었다면 지금쯤 우리 왕국의 수도는 아론에 손에 불타 버렸을 터. 내 말이 틀리오?"
넬라를 비롯해 회의장에 모여 있는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능력을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신 것이오. 그렇기에,"
회의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헛소리를 이어가던 호레스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론 그자를 일라이 왕국의 기사로 등용하고자 그런 수를 쓰신 것이 아닙니까?"
"오오-"
"그런 깊은 뜻이!"
······오는 무슨.
이 영감이 뭐라는 거야.
아론을 등용해?
어떻게?
그 잘난 놈이 잘도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
'아론은 절대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아.'
할라즈 왕국에 대한 충성심도 그렇고, 능력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자긍심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못하다고 생각되면 절대 굴복하지 않거니와, 설령 스텟이 자기보다 높다고 해도 캐릭터마다 만족하는 부분이 달라 무척 까다롭다.
적국의 기사를 등용하는 건 공략법이 따로 있지 않을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웬만하면 크게 값을 받고 넘기는 것이었다.
즉, 아론을 등용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말해야만 한다.
'네 생각은 틀렸다, 이 음흉한 영감탱이.'
라고.
하지만 그때였다.
막혀 있던 혈맥이 뚫리는 것처럼 단전에서부터 끓어 올라오는 허세력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간 것이.
"여기서 내 의중을 파악한 건 호레스 뿐인가?"
아슬란의 허세는 아예 한술 더 뜨고 있었다.
호레스는 자신의 말이 맞았다며 의기양양했고, 나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일어나는 순간에도 평범하지가 않았다.
병적인 허세와 심취라는 특성은 매 순간, 모든 행동에서 내가 최고이며, 나 의외에 다른 것은 하찮다, 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 교만한 심성이 그대로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었지만, 놀라운 건 그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격조가 있었고 품위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들이 나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 가지 너도 틀린 것이 있다, 호레스."
상석에서 일어난 나는 호레스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왕국은 최약체가 아니다."
충만한 허세력에 잠식된 내 몸은 알아서 앞에 걸어 나갔다.
그리고 전각에 모여 양옆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과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왕국을 수호하는 기사가 누구인가? 이 왕국을 지키는 검이 누구인가?"
그 물음에 그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대기사단장님이십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 허세력에 잠식당한 아슬란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너희는 무엇인가?"
"······?"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 아슬란은, 최강이다."
낯부끄러운 말을, 전혀 사실도 아닌 말을 아주 당당하고 뻔뻔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륙 최강자가 이끄는 너희들 역시 최강이다."
정말 이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듯,
"나 아슬란의 이름이 함께 하는 한, 너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 목소리에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자긍심을 가져라. 절대 우리 왕국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우린 그동안 하늘 높이 비상하기 위한 때를 기다렸을 뿐, 결코 약했던 적 없다. 그러니 너희에게 다시 한번 묻겠다."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을 때, 내 입에서는 인자하면서 강인한 음성이 나갔다.
"너희는 무엇인가?"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우리는 최강입니다."
넬라의 대답이었다.
그것에 탄력을 받고 나는 더욱더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희는 누구인가!?"
그러자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쳤다.
"우린 최강입니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전각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항상 그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라."
말하는 나조차 오글거려서 손발이 저릿거렸다.
그만큼 뻔뻔하고 황당한 언사였다.
감히 최강이라는 말을 부끄러움 없이 입에 담다니.
하지만,
"예!!"
이게 왜 먹히는 거 같지?
시들시들했던 저들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나는 느꼈다.
이들이 아슬란의 허세가 진실인 양 믿고 있다는 것을,
날조에 가까운 그의 뻔뻔함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호레스. 네가 무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예."
"다시는 우리 왕국이 약하다 말하지 마라. 나 아슬란이 지키고 있는 한, 우리 왕국은 대륙 최강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간 호레스의 주름진 눈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11화
1초만 소드마스터 11화
호레스는 회의장을 나가는 기사들과 신하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 흥분감에 사로잡힌 표정이다.
"정말 오랜만에······심장이 뛰더군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이토록 가슴이 요동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제는 낡아 힘을 거의 잃었다고 여긴 자신의 심장도 이리 쿵쾅대는데, 저들은 오죽하겠는가.
방금 전 그 연설을 듣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정녕 사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체 아슬란.
무엇이 너를 이토록 바뀌게 한 것이냐.
"군사님."
"넬라 단장."
"저는 이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 그리고 의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것들도 마음에서 지울 겁니다.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넬라는 확실하게 마음을 정했다.
아슬란을 따르기로 말이다.
"일라이 왕국에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꼭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분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일 겁니다."
한때 그를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넬라라는 것을 알기에 호레스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군사님도 이제 마음을 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아슬란을 죽이는 것이, 그의 뒤에 있는 베라크 가문을 멸문시키는 것이 이 왕국을 위해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호레스는 깨닫게 되었다.
이 왕국이 살아나려면 아슬란이 필요하다.
저들의 눈빛을 보라.
뜨겁게 타오르는 저들의 전의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처럼 저들을 타오르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자질인 건가?'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충동시키며 움직일 수 있는 존재.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존재.
이 왕국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오직 하나.
아슬란밖에 없었다.
* * *
"읏-"
부하들이 나가자 귀신같이 허세력도 썰물처럼 사라졌다.
뭐랄까.
오글거림, 쪽팔림과 더불어 텅 빈 공허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방금 전 막 큰 무대의 연극을 끝내고 내려오는 배우들의 심정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아론은······. 역시 죽여야 되는 게 맞겠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아론은 바위 같은 놈이니 찔러 봤자 소용없었다.
찌르는 내 손만 아플 뿐이다.
아론은 내게 넘어오지 않는다.
"호레스 그 영감 때문에 사람들 기대감만 높아졌어."
문제는 호레스.
그래. 항상 호레스 그놈이 문제였다.
괜히 말 같지도 않은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사람들은 내가 아론을 얻으려고 할라즈 왕국에 말도 안 되는 값을 제시한 줄로만 알고 있다.
악의적으로 그런 포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기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엇이 되었든,
"얼른 호레스도 갈아 치워야 하는데."
물론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건데, 라울처럼 무작정 나를 공격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지. 방심하면 안 돼. 난이도가 극악이잖아."
언제 또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론이 군을 우회시켜 수도를 공격하려 한 것도 그렇고, 라울이 갑작스럽게 자객들을 모아 나를 암살하려 했던 것도 그렇고.
이놈의 난이도는 깜빡이 없이 들이박기만 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상황을 쉬이 예상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 말고 이 게임이 알아서 정해준 난이도라면 실컷 욕이라도 박겠다만, 내가 직접 이 손가락으로 선택한 난이도다.
그러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이런 똥캐 가지고 게임을 클리어 하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 벽에 똥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길이 열리지 않을까?
"에휴. 아론급 스텟만 가졌어도 이런 고민은 안 하는데."
배를 벅벅 긁적이며 발을 의자 걸이에 걸은 채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대기사단장님!"
밖에서 나를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흐트러져 있던 자세가 저절로 올곧아지고 버릇처럼 거북이마냥 축 앞으로 흐느적거리던 목도 목각처럼 단단하게 세워졌다.
······얘는 따로 자세 교정을 안 받아도 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죄인 아론을 데리고 왔습니다."
괜히 기대감만 높아진 부하들 앞에서 쪽을 당하느니, 차라리 부하들이 없을 때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론을 따로 불렀다.
"들어와라."
아론을 사방에서 감싼 채 기사 다섯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아론을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론]
무력: 85
지력: 80
참 속이 쓰리는 능력치였다.
저 아까운 걸 써보지도 못하고 죽여야 하다니.
차라리 저 스텟을 내가 쓸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까워도 어쩔 수 없다.
아론이 내 밑으로 순순히 들어올 리도 없고, 그렇다고 풀어 주자니 후환이 두렵다.
원래는 그냥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목을 쳐버리려 했으나, 호레스가 이상하게 포장을 해버려서 하는 수 없이 놈을 내 집무실까지 불러들였다.
"······."
아론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포박이 두껍게 잘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내게 함부로 달려들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흠."
아슬란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부하들 앞이라고 또 급유하듯 허세력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내 감정을 부추겼다.
그 감정에 심취한 나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포박을 풀어주거라."
아론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포박을 풀어도 기사들이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서······.
"너희들도 나가거라."
안 돼. 나가지 마.
"예."
이제 믿을 건 기사들밖에 없었는데, 그들마저도 나가 버렸다.
보통은 위험하니 같이 있겠다고 한번쯤은 말하지 않나?
어떻게 된 게 전부 군말 없이 명령을 따랐다.
저들은 아론이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굳건히 믿는 것만 같았다.
"포박을 풀다니. 자신감인가?"
포박에서 풀려난 아론이 꿇고 있던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한님보다는 못 해도 동귀어진을 각오한다면 충분히 네 목숨을 가져갈 수도 있다."
그의 몸에서 흉흉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좆됐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아주 태연했다.
저 찌를 듯한 살기에 솜털이 곤두서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고 있었지만, 이 아슬란의 몸은 결코 놀라지 않는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 덤덤할 뿐이다.
"자신감이라······."
허세로 가득 찬 내 입술은 시동을 걸었고,
"이건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아론을 노려보았다.
"당연한 거라고 해야겠지."
오히려 흔들리는 것은 아론의 눈빛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디에 검이 있는지를 찾는 것 같았다.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신호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음에도,
"검이라면 이 옆에 있다."
나는 검의 위치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이것이 병적인 허세와 심취의 무서운 점이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릴 만큼 본인의 허세에 취하는 것이다.
아론의 몸이 검 쪽으로 서서히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발을 떼는 순간,
"검을 잡기 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거라."
아론은 흠칫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그는 선뜻 발을 앞으로 떼지를 못했다.
거기까지 하면 좋겠건만, 한번 뚫린 입은 멈추지 않고 상대방을 긁어댔다.
"재롱을 피우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날 너무 얕보는군."
"유한도 한 합을 버티지 못하고 내 손에 죽었거늘, 너라고 다르겠느냐?"
유한이란 이름에 아론은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비틀어 버릴 기세였으나,
"큭-!"
그는 끝끝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아론은 반쯤 포기한 얼굴이었다.
"딱히. 그저 이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할라즈 왕국이 널 버렸다고."
"그게 무슨···?"
"내가 가격을 제시했으나, 그들은 널 돌려받고 싶어 하지 않더군."
"하-"
아론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기대했던 건가.
하긴. 그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할라즈 왕국이 반드시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아론을 버렸다.
"그래서, 왕국에서 버린 놈이니 저를 등용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날이 선 그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의식 과잉이다. 내가 왜 너 같은 애송이를 곁에 둬야 하지?"
"그, 그건······."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 피를 내 칼에 묻힐 생각은 없다."
"그럼 절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할라즈 왕국으로 돌아가 당신에게 복수를 할지도 모르는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내 안에 가득한 허세심이 맹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그것에 심취한 혓바닥은 거만함으로 가득 찼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어디 몇 번이고 덤벼 보거라."
저질러 버렸다.
"기사의 긍지도 모르는 놈을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그것에 모자라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각하지 말거라."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아론은 한 걸음 멀어졌다.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건 알량한 자비 따위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마른침이 아론의 목울대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고 싸우는 애송이의 피를 검에 묻히는 것이 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가 코앞까지 다다라 더는 뒤로 갈 수가 없을 때,
"으으-"
쿵-!
아론은 그대로 넘어져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그가 보였던 살기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맹수 앞에 겁을 먹은 초라한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넌 이제 자유다, 아론. 네가 복수를 위해 군을 다시 모아오든, 다른 것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지나쳐 문 앞에 섰다.
"다만,"
그리고 문을 열기 전 그를 돌아보았다.
"그땐 지금처럼 한심한 모습이 아니라 진짜 긍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기사였으면 좋겠군. 그럼 좀 덜 지루할 테니 말이다."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야?'
정말 이대로 보내준다고?
'미친 거 아니야?'
이러다 진짜 아론이 할라즈로 돌아가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마침 내 허리춤에 단검 하나가 있었다.
이 정신 나간 허세가 일을 그르치기 전에 내가······!
"기사의 명예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이 말한 그 긍지가 무엇입니까?"
그때였다.
아론의 목소리에 허리춤으로 가던 손이 멈췄다.
간신히 억눌렀던 허세력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번에 말한 그 명예가 무엇인지, 그 긍지가 무엇인지 감옥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난 끝내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힘 없이 고개를 떨군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이 훤히 드러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단검을 잡고자 하는 내 의지는 혈관에 펄떡대며 흐르던 허세에 꺾여 버렸다.
대신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나?"
그러자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예. 알고 싶습니다."
그것을 보고 정수리까지 치솟던 허세력은 마침내,
"그럼 곁에서 배워라. 대륙 최강에게."
하늘을 뚫으며 승천했다.
"······."
아론은 잠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최강이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뻔뻔함에 할 말을 잃은 것일까.
"나 아슬란에게 배운다면 누구에게도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이놈이 결정타까지 날렸다.
내가 아론이라면 미친놈이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제가 당신 곁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난 네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 적국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언제 제가 당신을 배신할지 모릅니다. 당신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습니다!"
아슬란은 허리춤에 있던, 내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었던 단검을 풀어 아론 앞에 던졌다.
"네가 찾고자 하는 기사의 긍지가 내게 없다고 여겨진다면 언제든 그 칼로 내 등을 찔러라."
"!?"
아론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붙잡았다.
스르릉-.
천천히 뽑아 드니,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단검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순간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런 미친.'
하지만 아슬란은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론에게서 몸을 돌려 당당히 등을 보이기는 허세까지 부렸다.
죽으려고 환장한 게 틀림없다.
"난 내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이 설령 내 등에 검을 찌른다고 해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아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단검을 내려보고 있던 아론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방금 내 선택이었다."
12화
1초만 소드마스터 12화
저벅 저벅-
등 뒤에서 언제 단검이 날아와 꽂힐지 모르기에 가급적이면 빨리 걷고 싶었다.
저벅- 저벅-
하지만 이 정신 나간 아슬란의 몸은 한 명이라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으면 절대 빨리 걷지 않는다.
급똥이 마려워도,
아파 뒤지겠어도,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자세와 발걸음을 유지한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에도 본인만의 규칙이 있어서 그걸 지키지 않고서는 절대 마음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정신병자 때문에 바싹바싹 입안이 말라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와 왕국 바깥까지 나왔을 때 그제서야 나는,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안 찌르네.'
놀랍게도 아론은 날 찌르려는 것도, 탈출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용한 것을 보면 그는 아직도 내 집무실에 혼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먹혔다고? 진짜?'
말 같지도 않은 허세의 연속이었다.
그 끝없는 망언을 아론은 설마 전부 믿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런 거라면 아슬란도 아슬란이지만, 아론도 심각한 건데.
'지금이라도 기사들을 보내 봐야 하나?'
아론이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찬찬히 복기를 해보면 내가 얼마나 허세를 부렸는지 눈치챌 가능성이 높다.
놈이 그걸 깨닫고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 * *
"······."
아론은 단검에 비추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의 긍지라."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지금껏 아론도 말로만 기사의 긍지를 떠들어댔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고찰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명예로운 기사라고, 긍지 높은 할라즈 왕국의 기사라고 콧대를 높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영원히 깨지지 않을 거라 굳게 믿기까지도 했다.
하지만 아슬란을 만나면서부터 그동안 아론을 지탱해 오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거짓된 삶을 살다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과 초라함이 동시에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기사의 명예······ 대체 그게 무엇이냐!"
단검을 붙잡은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할라즈 왕국은 자신을 버렸고, 이제 의지할 곳은 없다.
또한 기사로서 명예도, 긍지도 잃었다.
하지만,
"그를 따른다면 나도 달라질 수 있는 걸까?"
그 말에 답하듯,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라질 수 있네."
아슬란이 아론을 따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몰래 둘의 이야기를 엿들은 호레스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연 아슬란이 아론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듣고 싶었다. 그리고······ 넬라처럼 자신도 남아 있던 일말의 망설임을 없애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와서 놀랐나?"
아론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얘기를 엿듣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아론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건 역시,
"대기사단장님께서도 알고 계셨다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이시니.
그렇다는 건,
'아론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말씀을 하셨던 건가?'
내 사람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들이 설령 내 등을 찌른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라.
여러 번 곱씹어 봐도 이건 아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호레스 자신에게 하는 아슬란의 일침이었던 것이다.
네가 내 등을 찔러도, 나는 널 믿는다고 말이다.
"이런."
호레스는 몸이 떨려올 정도로 벅찬 감정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끓게 만드는 것인지.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호레스는 뒷짐을 지며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대기사단장님의 마음이 조금 헤아려지더군."
그의 꼿꼿한 성격답게 집무실 안은 무척 깨끗하고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그분은 자네의 재능을 안타까워하고 계시네."
"절 애송이라며 무시하던데요?"
"후후. 당연히 그분 눈에는 자네가 피라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정말로 자네를 하찮게 여겼다면 그분이 직접 얼굴을 보는 일도 없었을 게야."
"······."
"거기다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가르치기 위해 자네를 곁에 두려고도 하지 않았을 걸세. 자네가 들고 있는 그 단검이 증표이지 않나?"
호레스의 말이 사실이다.
아슬란은 단검을 던지며 언제든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길 때 자신의 등을 찌르라고 말했다.
과연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론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머릿속에 자꾸만 그 목소리가 맴돌고 있을 정도였다.
"자네가 부럽군. 젊은 나이에, 그분의 곁에서 배울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의외군요."
"무엇이?"
"당신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
호레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론은 할라즈 왕국에서 중책을 맡았던 기사이니, 당연히 일라이 왕국과 할라즈 왕국 사이에 은밀한 교류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부정하진 않겠네. 하지만 이 사실을 이미 대기사단장님께서도 알고 계신 거 같더군."
"알고 계신다고요?"
"아까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 나는 자신의 사람들을 믿는다고. 그들이 배신을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
"그건 자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야. 내가 엿듣고 있다는 걸 알고 말씀을 하신 거지."
호레스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아슬란은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를 왕국 최고의 두뇌라 생각했던 시절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지 않으신가? 그분은 아군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고 하셨네. 그래서 우리가 작당 모의를 한다는 걸 미리 알아챘음에도 끝까지 모른 척하셨지. 오히려 역으로 그것을 전략으로 이용하셨다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유한이 죽었고 할라즈 왕국은 우리 일라이 왕국에 대패를 했네."
이 모든 것이 아슬란의 작전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사람이 치밀하면 그런 계책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아군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
몇 번을 되뇌어 봐도 명언이었다.
"그래. 그 어려운 것을 스스로 해내신 거지."
아슬란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인물이었다.
대체 왜 그런 자가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지 못했는지 의문일 뿐이다.
착-!
아론은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눈빛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제 선택이 여전히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 곁에서 배워 보고 싶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기사의 긍지와 명예라는 것을."
호레스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될 걸세."
아론이 그 손을 붙잡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라이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아론."
호레스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남아 있던 일말의 망설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 * *
새벽 이른 시간.
동이 트기 전 시간대가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이놈의 몸뚱이는 벌써 늙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것도 아슬란의 허세 때문인지 자꾸만 새벽 시간에 눈을 번쩍 뜬다.
어제저녁 늦게 잠에 들었어도 꼭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는 것을 보면 아슬란이 스스로 만들어낸 루틴 같았다.
집사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동이 트기 전 미리 아침 식사를 준비할 정도였다.
"안 피곤하면 내가 말을 안 해요."
이 시간에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면 괜찮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하루종일 수면 부족으로 피곤하고, 허세에 짓눌린 정신적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밥은 맛있단 말이지."
과연 왕국 최고의 권세가답게 식사 퀄리티는 굉장히 높았다.
아침부터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다는 것이 이런 행복이었구나, 라는 걸 매번 느끼고 있다.
"후-"
배부른 배를 땅땅 때리며 의자에 푹 꺼져버리듯 편하게 기대었다.
지금 많이 해둬야 한다.
이따 또 나가면 부하들 앞이라고 허리를 백날 꼿꼿하게 세우고 다닐 게 뻔하기 때문이다.
[소지금: 20골드]
[상점 이용은 50골드부터 가능합니다.]
"아직 30골드가 더 필요하네."
게임 머니 외적으로 시스템에서 부여 하는 골드가 있다.
이 골드를 통해 다양한 것을 구매할 수가 있는데, 나오는 물품이 전부 랜덤이라 50골드를 모아 봐야 알 수 있었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상점은 꼭 필요해."
이 괴랄한 난이도는 캐릭터 성장을 통한 특성과 스텟 수급을 막아 놓았다.
원래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스텟이 성장하거나, 혹은 특별히 특성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게임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지."
아무리 극악 난이도라고 해서 성장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닐 터.
미친 난이도이지만, 이것도 결국 깨라고 만든 게임이니 캐릭터가 강해질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찾아봐야겠지?"
그때까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아론은 어떻게 된 거지?"
어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는 호레스와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고 한다.
"호레스 그 영감은 또 언제 와서 아론을 데리고 간 거야?"
설마 아론을 데리고 뒤에서 또 개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닐까?
난이도가 극악인 것도 있고, 호레스는 아슬란을 죽이려고 하는 놈이다 보니, 그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위대한 분이시여. 기사들이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도 참 긍정적인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아침을 먹고 난 후 팔자 좋게 침대에서 늘어져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냥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 이 미친 난이도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발발 떨면서 손톱을 물고 뜯고 있어도 모자를 판에 말이다.
"알겠다. 곧 나가지. 옷을 준비해 놓거라."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가벼운 잠옷 차림.
중년의 나이라고 해서 배가 불룩 튀어나오진 않았다.
품위 유지 목적으로 아슬란이 그래도 몸매 관리는 빡세게 한 듯싶었다.
나는 괜히 복근에 힘을 주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대륙 최강자의 몸답구나."
······.
잠깐 정적이 흘렀다.
"미친."
지금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거야?
짝-! 짝-!
내가 아슬란처럼 혼잣말로 떠들어댔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뺨을 마구 때렸다.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넌 아슬란이 아니야.
그냥 이 게임에 부조리하게 떨어진 플레이어라고.
"설마 이러다 완전히 아슬란한테 먹혀 버리는 건······."
지금도 끓어 오르는 허세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나중에는 허세에 먹혀 버려 24시간 내내 아슬란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평상시에 늘어져 있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떼우지도 못한다.
마치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으로 24시간 동안 병적인 허세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부하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느라 밥도 잘 못 먹고 배가 아파도 화장실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지도 못 하는 이 정신병자의 삶.
그걸 24시간 동안 겪으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였다.
"내가 너한테 먹힐 줄 알고?"
나는 일부러 거울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춰댔다.
"하하. 어떠냐?"
손으로 입을 길게 잡아당기며 웃긴 표정도 지었다.
허세로 내 의지를 억압하는 아슬란이 경련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주 약올라 죽겠지, 이 허세충아!"
그러다 현타가 왔다.
"······쓰읍. 병신인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지만. 그래도 내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위대한 분이시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집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굽어진 허리가 똑바로 세워졌고, 우습게 풀어진 얼굴도 근엄한 아슬란의 얼굴로 돌아갔다.
표정만 바뀐 것이 아니다.
혈맥의 피는 더욱 뜨겁게 흐르기 시작했고, 심장은 사자의 그것처럼 용맹하게 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보인 추태를 비웃듯,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왕국의 대기사단장.
대륙의 소드마스터.
그 위용에 걸맞는 카리스마까지.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은 더 이상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배불뚝이 방구석 여포가 아니었다.
오늘도 모두가 내 아래라는 것을 표방하듯, 내가 최강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거만하게 올려진 고개와 눈빛을 띠고 있는 아슬란이었다.
13화
1초만 소드마스터 13화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저택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내게 예를 갖췄다.
그중에는,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아론도 있었다.
저 잘생긴 얼굴을 보고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가 아니었다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아론."
"예."
"네가 왜 여기 있지?"
"제가 스스로 대기사단장님을 보필하기 위해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대기사단장님 곁에 머물며 당신이 말씀하신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배우려고 합니다."
"······."
실화인가.
저 군침 나오는 스텟과 능력을 가진 아론이 내 호위기사 노릇이나 한다고?
이 게임을 참 많이도 플레이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냥 적당한 직책을 받아도 됐을 텐데?"
"호레스 군사가 이러는 편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해줬습니다."
역시 그 영감이 연관되어 있는 것인가.
안 그래도 어제 뜬금없이 호레스가 아론을 데려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거기서 둘이 모종의 거래를 한 건 아니겠지?
의심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난이도가 극악이라는 점도 있고, 호레스는 원래 아슬란을 죽이려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당연히 찝찝한 구석이 있기에 내 곁에서 물리려고 했으나,
"난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는다, 아론."
이미 아슬란의 허장성세에 먹혀 버린 혓바닥은 그걸 용납지 않았다.
"대륙 최강의 곁에서 배우라고 한 것은 나다. 그러니 곁에 있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나는 말 위에 올랐다.
그 뒤로 내 호위 기사들과 아론이 함께 말을 몰았다.
"······."
뒤통수가 따갑다.
이제부터 언제 아론이 칼이 휘두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다니.
'호레스. 두고 보자.'
그 독사 같은 영감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나는 그리 다짐하며 왕궁으로 나아갔다.
일라이 왕국의 수도, 브릴.
다른 왕국의 대도시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갖춰야 할 것은 전부 갖췄다고 봐도 무방한 곳이다.
아무리 약소국이라고 해도 처음 게임 플레이를 하기에는 지장이 없도록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오오. 위대한 분이시여."
"오늘도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은 내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대기사단장이라는 위치, 거기다 무려 대륙 소드마스터라는 엄청난 타이틀.
이 두 개가 있으니 백성들은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삼았다.
아무리 도시 치안이 나쁘고, 민심이 좋지 않아도 소드마스터라는 타이틀만 있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될 정도로 이 게임은 명성이 중요했다.
"신들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나는 왕궁으로 똑바로 향하지 않고 일부러 시민들이 몰려 있는 도시 한복판을 지나갔다.
이들이 나를 보고 외치는 칭송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아슬란 이놈은 심취 특성이 발동되어 이 순간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다른 목적으로 도심을 거닐고 있는 것이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그래.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 퀘스트 발생!
[일라이 왕국 백성들]
-일라이 왕국 백성들의 크고 작은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총 10번의 부탁을 들어주면 보상으로 1골드를 얻습니다.
1골드.
엄청 짜게 보일 수도 있으나, 백성들이 뭔가 어려운 걸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번에 10골드씩 얻었던 건 그만큼 퀘스트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클리어가 불가능했던 퀘스트들을 연달아 깬 것이 기적이었다.
그에 반해 이들이 주는 퀘스트는 간단한 것도 많았다.
거기다 퀘스트 내용에 따라 귀찮은 건 그냥 기사들을 시키면 되고,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면 왕궁에 있는 기사들까지 끌고 오면 되는 거라 상관 없었다.
일일 퀘스트처럼 백성들의 애로 사항을 들어주면 골드를 얻는, 매우 좋은 골드 수급처였다.
'유한 같이 네임드를 죽여야만 하는 돌발 퀘스트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안전하고 낫지.'
목숨을 걸고 10골드를 얻느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천천히 골드 수급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아 보였다.
"마차 바퀴가 망가져서 수레를 끌 수가 없습니다!"
"물건을 도둑 맞았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루에 10개를 다 몰아서 할 순 없으니, 한두 개씩 퀘스트를 받은 뒤 나는,
"고쳐주거라."
"예."
"물건을 찾아주거라."
"예."
"치안 책임자가 누구지? 그를 이곳으로 불러라."
"예!"
열심히 명령만 내렸다.
그냥 일반 네임드 캐릭터로 플레이를 하게 되면 일일이 퀘스트 해결을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왕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슬란이지 않은가.
내가 직접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
그저 밑에 있는 부하들을 시키면 된다.
"논밭에 몬스터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일을 못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몬스터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위험한 퀘스트도 등장했다.
논밭에 가보니, 검은 이빨을 가진 맹수들이 그곳을 점령한 상태였다.
[검은 이빨 재규어]
레벨: 55
레벨 55짜리 몬스터.
아슬란의 몸으로는 한 마리도 간신히 상대할까 말까 한 레벨이었다.
그러나 논밭에 깔려 있는 검은 이빨 재규어의 숫자는 족히 15마리는 넘어 보였다.
하지만 이건 내게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게는,
"아론."
"예."
"쓸어 버려라."
"알겠습니다."
아론이 있기 때문이다.
스르릉-!
그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데 검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론은 부러진 검을 쓰고 있었다.
"아론. 그 검은?"
"저번에 주군께서 맨손으로 부러뜨리신 미스릴 검입니다."
미스릴?
내가 아는 그 미스릴?
그걸 내가 부쉈다고?
왠지 포션을 부어도 손이 더럽게 안 낫더라니.
"그때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마음가짐이야 좋다만.
그걸로 어떻게 싸우려고?
그런 생각도 잠시.
화아악-!
아론의 검에서 검기가 흘러나왔다.
푸른 검기는 부러진 검의 절반을 대신하며 그 예리한 날을 세웠다.
"······."
이것이 바로 압도적인 재능 수저 차이라는 건가.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하냐.'
특성과 스텟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론이다.
무력 50따리 밖에 되지 않는 아슬란 따위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 네임드에 걸맞게 녀석은 재규어들을 순식간에 썰어 버렸다.
"와아아!"
"몬스터들이 전부 죽었다!"
"대기사단장님 만세!"
재롱은 아론이 부렸는데, 온갖 찬사는 내가 다 받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아슬란은 그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이들의 환호성에 심취했다.
아론과 기사들이 있어서 이 정도 속도면 금방 퀘스트 10개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도울 건 없는가?"
내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론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대기사단장님. 국정 회의에 많이 늦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얼른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아론의 말에 백성들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 우물쭈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잠들어 있던 아슬란의 허세에 트리거가 되었다.
"아론. 국정 회의가 무엇이냐?"
"예?"
"왕국의 근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국정 회의다. 그렇다면 왕국의 근간은 무엇인가."
"그건······."
나는 주변으로 모여든 백성들을 가리켰다.
"바로 저들이다. 이 왕국을 지탱하는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저들의 노고와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이 잠깐 앉아서 떠들어 대는 국정 회의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뻔하디 뻔한 말이었다.
허세에 취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것뿐이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나를 보며 감동 어린 눈빛을 띠었다.
"아아. 역시 위대하신 분."
"이렇게나 우리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계시다니."
"대기사단장님!"
"당신이 우리 왕국의 희망입니다!!"
사기 증진, 중후한 매력, 군림.
거기에 적절한 허세까지.
군중을 선동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특성이 없어 보였다.
과연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드높이 불렀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찬사와 환호성에 아슬란의 허세와 심취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나 아슬란은 항상 그대들을 돌볼 것이다. 나 아슬란이 그러하듯, 그대들이 왕국의 희망이니까."
"예!!"
"저희는 당신만 믿고 있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퀘스트 진행은 전부 부하들에게 맡기고 온갖 관심과 사랑, 그리고 보상까지 내가 독식하는 이 불합리한 시스템.
아주 마음에 들었다.
"대기사단장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도 처음 왔을 때보다 표정이 많이 풀려 있었다.
이윽고 그는 먼저 백성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울 일이 필요하면 뭐든 말씀하시오. 대기사단장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힘껏 돕겠소."
"저희도 돕겠습니다."
"뭐든 말만 하시오. 나도 위대하신 분의 뜻을 따라 도울 터이니!"
아론과 기사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까지.
전부 동화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어. 잠깐만.'
저들이 내가 도울 일을 대신 하고 있어 퀘스트 발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허세와 심취로 민심을 끌어 올리는 것까진 좋았으나, 이런 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다들 무리하지 말거라. 내가 하면 된다."
퀘스트가 다 사라져 버리기 전에 뒤에서 명령만 하던 나도 두 손 두 발 벗고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저들이 나를 막아 세웠다.
"아닙니다. 저희도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왕국의 근간이 되는 백성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저도 열심히 돕고 살겠습니다, 대기사단장님!"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뜻에 따라 저도 이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항상 찾아다닐 겁니다!"
안 돼. 이것들아.
내가 골드를 벌어야 한다고!
"자자. 음식이 필요한 자는 이곳으로 오시오!"
"고칠 것이 있다면 제가 고쳐드릴게요."
"아픈 곳이 있다면 내가 치료 마법을 조금 쓸 줄 아니, 줄을 서시오!"
말릴 새도 없이 사람들은 서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것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몇몇 백성들 위에 떠있던 느낌표의 퀘스트 알림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아아. 내 소중한 퀘스트들이··· 내 소중한 골드들이···.'
이 죽일 놈의 허세.
이놈의 정신병이 또 내 발목을 붙잡는구나.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는 법.
"나도 돕겠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저 하이에나들에게 전부 퀘스트를 빼앗길 것이다.
나는 백성들의 만류에도 끝까지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퀘스트를 하나라도 더 받아서 골드를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지 않은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없이 퀘스트만 쫓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행히 7개는 건졌다.'
오늘 10개는 충분히 할 줄 알았는데, 아론 저 약삭빠른 놈이 내 퀘스트를 다 가져가 버렸다.
'역시 호레스가 심어 놓은 복병.'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그래도 퀘스트 진행에는 쓸모가 많아서 안 데려오기가 참 아쉬운,
그래. 계륵이었다.
'지금 왕궁에 가봤자 아무도 없겠지.'
나는 왕궁으로 가기 위해 방향을 잡다가 곧 마음을 접었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으니 아마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 나도 돌아갈까?
"대기사단장님! 또 오세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랑해요, 대기단장님!!"
"다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백성들의 인사를 받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몸은 힘들었지만 한 가지 좋았던 건, 백성들의 구수하고 훈훈한 정을 느끼는 것이 꽤 힐링이 된다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뜻깊은 하루를 보낸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그래. 이게 RPG 게임의 낭만이지.'
그렇게 지나왔던 길을 돌아가며 내게 손을 흔드는 백성들 사이를 지나던 때였다.
그들의 인사를 하나씩 다 받아주고 있다, 저 끝에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
사람들 뒤에 있는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점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점이란, 이 사람들 머리 위에 있는 점을 뜻한다.
그래서 몇 초 동안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하면 머리 위에 떠 있는 점이 그의 이름과 능력치로 변해 내게 보여 준다.
나는 상대방의 이름과 능력치를 볼 수 있는 플레이어의 특권이 있지 않던가.
내게는 정말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저 벽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 떠 있는 점들만 보일 뿐.
그렇다는 건,
'은신 스킬?'
스킬이나, 혹은 마법 도구로 일부러 은신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약해 빠진 일라이 왕국에 은신 스킬까지 쓰며 정체를 숨기는 사람들이 있다라.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뭔가 냄새가 났다.
나는 눈을 부라리며 그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위에만 찍혀 있던 점이 서서히 바뀌어 갔다.
[하리엘]
무력: 90
지력: 70
"!?"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무력 90에 달하는 엄청난 강자.
그 곁에 있는 놈들도 하나 같이 무력 70~80을 오가는 실력자들.
거기다 하리엘이란 이름은 나도 알고 있는 네임드였다.
'저 여자가 대체 여기는 왜?'
90이라는 무력에 걸맞는 거물급 네임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 여자가 여기에 온 건지 궁금했지만,
'알려고 하지 말자.'
나는 못 본 척 넘어가려 했다.
왠지 알면 다칠 거 같잖아.
은신 스킬까지 썼다는 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건데, 굳이 그걸 까발려서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아무것도!
"건방지구나."
하지만,
"그깟 비루한 은신으로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관자놀이를 저릿하게 파고드는 아슬란의 허세가 이걸 그냥 넘길 리 없었다.
"그런 개수작을 부리면서까지 이곳에 숨어들었다는 건 필시 악한 의도가 있을 터."
상대의 누구든, 그 무력이 얼마나 높든, 병적인 허세와 자긍심에 찌든 아슬란에겐 그저 모두가 하찮게 보일 뿐.
"모습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내 몸은 이미 하리엘에게 향해 있었다.
14화
1초만 소드마스터 14화
신성 블레이드 하리엘.
이름에서 나오듯, 그녀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교단의 검이다.
모든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이 그러하듯, 당연히 이 엘라 비하크에도 거대한 교단 세력이 있다.
태초의 신 '라할'을 섬기는 레이어스 교단.
하리엘은 어느 왕국에도 속해 있지 않고 오직 교단에만 충성하는 네임드 캐릭터다.
무력 수치뿐만이 아니라 전투 특성도 하나하나가 강력해서 웬만한 네임드는 상대가 전부 가능할 정도로 전투에 특화된 여자였다.
'아론이 있어도 저 여자한테는 상대가 안 돼.'
하리엘이 칼을 꺼내 드는 순간, 우린 그냥 끔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력 90부터는 일단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괴물 같은 여자한테 지금 나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면······."
스르릉-!
검을 뽑아 드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리엘이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사지를 분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허세에 잡아 먹힌 몸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알아서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은신이 풀리면서 그녀의 부하들도 함께 모습이 드러났다.
"어이쿠!"
"뭐, 뭐야!?"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은신이 풀리자 백성들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서 멀어져 내 곁에 몰려들었다.
신성 블레이드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피 한 방울 묻힐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보이는 옅은 미소에 백성들은 벌써 경계심이 풀어질 정도.
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저 매력적으로 휘날리는 은발 머리조차도 강력한 살인 무기로 바꿀 수 있는 여자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아슬란. 10년 만인가요?"
잠깐. 오랜만이라고? 10년만?
아슬란과 하리엘 사이에 연결점이 있었나?
이건 나도 처음 알았다.
하긴. 어떤 플레이어가 이런 똥캐한테 관심을 갖겠는가.
그러나 얼타고 있을 새가 없었다.
"하리엘."
"다행히 절 기억하고 계시네요."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도둑 고양이마냥 백성들 틈 사이로 숨어들다니. 불순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부하 하나가 치기 어린 목소리로 반박했다.
"불순한 의도라니요! 이분은 레이어스 교단에서 신성한 임무를······."
하지만 그 꼴을 허세와 군림이 절여 있는 아슬란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어이."
나는 상대방의 말을 자르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죽고 싶나?"
"······!"
"누가 너더러 입을 열라고 했지?"
[에길론]
무력: 80
지능: 55
상대방의 무력은 무려 80에 달했다.
아슬란이 칼을 뽑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힘의 차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만 더 나와 하리엘의 대화에 끼어든다면 그땐 그 건방진 혓바닥을 뽑아 버리겠다."
나는 에길론을 철저히 무시하며 짓뭉개 버렸다.
마치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듯이.
'미쳐, 내가.'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러다 갑자기 칼을 뽑아서 달려들면 어떡하지?
"우린 싸움을 벌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하리엘이 중재에 나섰다.
"우린 당신을 뵙기 위해 온 거예요."
"교단에서 보냈나?"
"예."
"그럼 손님이로군."
나는 얼른 칼집에 검부터 넣었다.
나도 절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놈의 주둥이는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손님이라면 손님답게 오거라, 하리엘.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지 않나?"
제발 긁지 좀 마라.
저러다 하리엘이 눈 돌아가서 칼이라도 뽑으면 어쩌려고.
"······미안합니다."
다행히 천사 하리엘은 되려 내게 사과를 했다.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이 세계는 법보다 칼이 앞서고, 이성보다 힘이 먼저다.
아무리 상황이 불합리해도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세면 입 다물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이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리엘이 내게 사과를 다 하는 날이 오다니.
"시간이 늦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묵을 곳은 있나?"
"아직 없어요."
"그럼 기사들을 시켜 마련해 두도록 하지."
나는 이놈의 허세가 또 하리엘의 성질을 긁기 전에 얼른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리엘이 나를 붙잡았다.
난 귀찮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지?"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네?"
당황한 하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알고 계신다고요?"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네임드 출현에 긴가민가했지만, 짱구를 돌려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레이어스 교단의 검.
그런 그녀가 나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면 그건 분명,
"검의 원탁이 소집돼서 나를 부르러 온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냥 초대장만 보내면 될 것을.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하리엘. 예나 지금이나 융통성이 없는 건 똑같군."
"읏-"
하리엘과 아슬란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FM 대로 일처리를 한다는 건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다.
뇌물은 당연히 먹히지 않고, 일 처리에 있어서 뭐든 꼼꼼하게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없는, 부하들에게는 참 지옥 같은 상사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겠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나누도록 하지."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기 위해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럇-!"
그녀가 더는 날 붙잡을 수 없게 말의 배를 찼다.
······.
됐나?
이 정도면 꽤 멀어졌겠지.
뒤를 슬쩍 돌아보고 싶었지만, 아슬란의 몸은 절대 그런 좀생이 같은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거리를 길게 벌린 것이나 마찬가지.
'진짜 뒤질 뻔했네.'
하리엘 같은 네임드 캐릭터를 박박 긁는 것도 모자라 칼까지 뽑았으니, 몇 번이고 고쳐 죽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리엘이 아니더라도 그 뒤에 있는 놈들이 덤볐다면 답도 없었을 터.
'원래 참을성이 많나?'
상대방을 대놓고 무시하는 아슬란의 입담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니.
역시 신성 블레이드 하리엘.
왠지 신앙심이 절로 생겨나는 것 같았다.
* * *
"칫. 잘난 척하기는. 하리엘님께서 말리지 않으셨다면 아슬란의 목을 진작 떨어뜨렸을 겁니다."
"크크. 목을 떨어뜨리긴. 아슬란이 일갈하니까 겁먹고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린 놈이."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에길론이 아니라고 완강하게 부정을 했으나,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부하들이 에길론을 놀리고 있던 중, 하리엘은 로브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대체 우리가 은신하고 있었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건 그저 그런 은신 로브도 아니고 무려 교단에서 성스러운 힘으로 만들어 준 건데······."
웬만한 마법으로는 절대 은신을 찾아낼 수 없는 로브다. 하지만 아슬란은 너무나도 쉽게 이들의 존재를 간파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혹시 아슬란이 '신안'을 가진 건······."
에길론의 중얼거림에 타샤가 뒤통수를 때리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슬란처럼 교만하고 교단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사람이 신안을 어떻게 갖는다고!"
"악! 왜 때리고 그래? 아슬란이 우리가 숨어 있는 걸 금방 찾아낸 건 맞잖아?"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그 방법이 대체 뭔데?"
"그··· 아무튼! 뭔가 있었을 거야!"
타샤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신안은 오직 선택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신께서 내리는 특권이자 축복이다.
그런 권능을 아슬란이 가졌을 리 없다.
"그래도 아슬란의 태도가 너무 건방졌습니다. 하리엘 님을 그렇게 대하다니."
"은신 로브를 써서 몰래 들어온 건 우리 잘못이 맞잖아."
"그건 그렇지만······."
"거기다 그 유한을 일격에 죽인 남자야. 그 정도 실력이라면 누구든 아래로 보겠지."
그들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유한을 직접 대면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리엘님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유한이 아슬란 따위에게 패배할 리 없다면서요. 그래서 은신 로브까지 써서 그의 뒤를 밟은 것이 아닙니까?"
하리엘은 아슬란이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가 유한을 꺾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나서도 되지 않을 임무를 맡아 은신 로브까지 써서 일부러 도시 안에 잠입해 본 것이었다.
과연 아슬란이 어떤 평가를 듣고 있는지, 그는 여전히 쓸모없는 인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성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
"당신들! 우리 대기단장님을 괴롭히러 온 건 아니지!?"
"아슬란님을 건드는 놈은 우리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레이어스 교단에서 나왔다고 하면 모두 고개를 숙이기 바쁘다.
그만큼 교단의 영향력이 컸고, 종교를 믿는 자들이 많은 만큼 교단에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 백성들의 반응을 보라.
이들은 무엇보다도 아슬란이 먼저였다.
"원래 이 도시가 이랬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슬란을 좋아하다니. 그 인간이 얼마나 몹쓸 놈인데."
부하들도 이런 백성들의 반응이 의외인 듯했다.
교단은 듣는 귀가 사방에 깔려 있고, 이미 각 왕국에 대한 정보를 전부 가지고 있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도시의 상황은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하리엘은 왜 이곳이 바뀔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너희들도 봤잖아."
"네?"
"아슬란이, 무려 왕국 최고의 권력가라는 인물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 사람들을 돕는걸. 너흰 그런 광경을 본적이 있어?"
"······."
"난 귀족 출신이라 알아. 아무리 백성들의 평이 좋은 권세가라도 직접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민생을 살피는 사람은 없어."
그래서 신선했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질 줄 아는 사람이라니.
저게 정말 내가 아는 그 아슬란이 맞는 것일까?
허세만 많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그 사내가 맞다고?
"그런데 하리엘 님은 아슬란 저자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응. 10년 전에, 우리 둘만 아는 사연이 있지."
"······?"
그 사연이 무엇인지는 하리엘도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상했다.
"왕국의 근간은 백성이 된다, 라는 말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봤어도,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 어려운 걸 다른 사람도 아닌, 아슬란이 백성은 곧 왕국의 근간이라는 것을 본인의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확실히 예전과 달라.'
하리엘 앞에서 보이던 그 투지도 결코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가 유한을 꺾었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아슬란은 확실히 변화했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군가가 이토록 궁금해지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 * *
"검의 원탁에서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왕궁에 정식으로 온 하리엘.
그녀의 말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검의 원탁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대륙에 10명밖에 있지 않은 소드마스터들과 똑같이 10명으로 구성된 대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행사다.
그러한 행사를 주최하는 곳은 바로 레이어스 교단.
이들이 모이는 목적은 간단하면서 복잡하다.
대외적으로는 왕국끼리의 영토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은근한 기 싸움이었다.
그곳에서 몰래 동맹을 맺어 뒤통수를 치는 놈들도 있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이득을 취하는 곳도 있다.
'일라이 왕국은 한번도 참석을 한 적이 없다는 게 문제지.'
일라이 왕국은 소드마스터를 보유하지 않은 유일한 왕국이었다.
소드마스터가 없으면 대마법사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없어서 한번도 검의 원탁에 초대를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유한을 죽이고 7번째 소드마스터 자리를 획득하면서 그 자격이 생겼다.
즉, 이번이 최초라는 것이다.
"오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우리 왕국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검의 원탁에 참석한다는 건 그만큼 왕국의 격이 드디어 다른 왕국과 나란히 할 정도로 올라갔음을 뜻한다.
신하들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난 거기 참석할 생각이 없는데.'
검의 원탁은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다.
이 연약한 아슬란에겐 아주 위험천만한 장소라는 것.
나도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검의 원탁을 종종 참석했었다. 그리고 항상 싸움이 일어났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놈들이 알아서 칼부림을 하며 싸워댔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 하는 사내들이 진득하게 앉아서 대화나 나눌 것 같은가?
'내가 가만히 있어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마련이지.'
특히나 소드마스터 중에서는 신참이나 다름없는 아슬란한테 여기저기서 시비를 털려고 할 텐데, 까닥 잘못 휘말리면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 게 뻔하다.
그러니 내게 별 이득도 없는 곳에 가지 않는 게-.
* 퀘스트 발생!
[검의 원탁 회의에 참석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골드는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
그런 내 의도를 다 읽고 있다는 듯, 갑작스럽게 나타난 10골드짜리 퀘스트.
이 게임은 날 한 시도 가만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15화
1초만 소드마스터 15화
나는 퀘스트창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좋은 떡밥을 게임 시스템이 그냥 놓칠 리 없지.
'10골드······. 포기할까?'
굳이 빨리 갈 필요 없이 천천히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걸 알기에 일부러 도시 안을 돌아다니며 서브 퀘스트들을 받고 다녔던 것이다.
'검의 원탁이 아예 안 좋기만 한 건 아니긴 해.'
왕국 운영에 있어서 어디에 줄을 타야 하는지, 또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그리고 요즘 정세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검의 원탁만한 곳이 없다.
사실상 각 왕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이는 자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괜히 갔다가 잘못 걸려서 죽으면 다 부질없는 짓이잖아.'
그렇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 그냥 후딱 다녀오면 10골드를 꽁으로 버는 건데.'
내가 이렇게 골드에 집착하는 건, 그만큼 상점에서 나오는 보상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오는 아이템들에 붙은 옵션들을 통해 이 똥캐 아슬란을 조금이나마 보정해 줄 수가 있다.
아이템 말고는 사실상 게임 난이도 때문에 특성과 스텟을 올릴 수 없는 내게는 골드 상점 이용이 절실했다.
"일단 알겠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선택은 잠시 뒤로 미뤘다.
뭐, 거의 안 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긴 했지만.
"······예?"
하리엘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 말씀은 참석을 안 하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러자 하리엘과 더불어 전각에 모인 기사들과 신하들도 함께 놀라 했다.
그냥 허수아비처럼 앉아만 있는 리베르트 왕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오랜만에 발언권을 행사했다.
"허허. 아슬란 대기사단장. 검의 원탁은 우리 왕국을 위해서라도 무척 도움이 되는······."
하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금방 꼬리를 내렸다.
"흠흠. 뭐, 대기사단장의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라울 사건 이후로 그는 더욱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호레스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기사단장님. 검의 원탁은 무척 중요한 자리입니다. 왕국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고, 새로운 교역로를 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건 굳이 검의 원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안 그런가?"
"그, 그렇지만······."
호레스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참석을 하지 않을 예정이십니까?"
"생각을 하겠다고만 했지,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리엘."
"······알겠습니다. 그럼, 뜻이 정해지시면 그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
하리엘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더 오래 앉아 있다가는 여기 저기서 말이 나올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대기사단장님. 한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난 분명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도 전각을 나가 답답한 마음에 잠시 바람을 쐬었다.
'그래. 역시 안 가는 게 낫겠지?'
10골드가 눈에 아른거렸지만, 괜히 도박을 하느니 안전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맞았다.
아론처럼 든든한 호위기사가 한두 명만 더 있었어도 충분히 고려를 해보는 건데······.
역시 안 되겠지?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때였다.
은쟁반 옥구슬 흘러가는 듯, 청명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 것이.
"하리엘."
백옥 같은 피부와 눈부신 외모로 멀리서도 눈을 사로잡는 하리엘이었다.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던 건가?
그녀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앞을 바라보며 섰다.
'뭐, 뭐야.'
보통 남정네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콩닥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의 빛나는 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양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만이 신경 쓰일 뿐.
하리엘이 날 죽이고자 한다면 저 단검을 뽑는 동작도 못 보고 내 목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절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릴 줄 알았어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을 하든가요."
입이 갈라질 것처럼 말라갔지만, 다행히 허세로 무장한 아슬란은 겉으로 겁먹은 티를 내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자 하리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10년 전 그 일 때문에요."
10년 전 그 일?
대체 둘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당신이 저한테 청혼했었잖아요."
"······?!"
뭐?
누가 뭐를 했다고?
"그래도 그땐 너무 하셨어요. 아카데미에서 생도로 있는 저한테 다짜고짜 청혼이라니."
아슬란.
정녕 미친 새끼인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그것도 자기 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딸 수 있는 여자한테 청혼을 해?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우리 나이가 15살이나 차이 나는 건 아시죠? 물론, 서로 사랑한다면 나이 차이야 상관없다지만, 친한 사이도 아니면서 갑자기 그렇게 청혼을 하는 건 역시······."
"하리엘."
"아, 네."
"용건은 간단하게 해라."
더 들었다가는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내가 한 짓이 아닌데도 이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알겠어요."
하리엘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전 대기사단장님이 꼭 검의 원탁에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왜지?"
"그거야 당연히 이 왕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까요."
"그걸 묻는 게 아니다."
내 몸이 저절로 하리엘에게 기울어졌다.
"왜 그토록 집착을 하냐는 것이다. 내가 참석을 하든, 하지 않든 너와는 상관없을 텐데?"
너무 가까웠던 것일까.
하리엘이 히끅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지, 집착이라니요. 그런 거 아니예요."
나는, 아니. 아슬란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저와 교단의 체면도 있으니까요. 검의 원탁이 보내는 초청장을 거절한 사람은 이제까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첫 희생자가 되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그녀에게서 얼굴을 가까이하던 아슬란의 몸을 나는 억지로 끌어당겼다.
미친놈아.
얼른 떨어져.
"시시한 이유로군."
"전 중요해요."
"그런가? 왠지 더 가기가 싫어지는데."
드디어 이놈이 맛이 갔구나.
원래도 정신 나간 놈이긴 했는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평소처럼 잔뜩 허세를 부리는 것은 맞는데,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섞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면 가실 건데요?"
"흠-."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똥말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하리엘을 바라보았다.
컴퓨터 화면으로 봤을 때도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계속 바라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서 느끼는 이 감정은 흥분감이나 호기심, 혹은 애끓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긴장감일 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렸다.
'이걸 어떻게 떼어내지?'
내가 계속 안 간다고 하면 진짜 칼부림이라도 할 기세인데.
그렇게 말없이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십니까?"
그녀가 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원탁에 모이는 사람 중 당신과 껄끄러운 관계인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 그들이 당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박하려 들 겁니다. 어쩌면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테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누가 보면 독심술이라도 쓰는 줄 알겠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대기사단장님 곁을 지켜드릴게요. 만약 다툼이 발생하려고 해도 제가 중재를 한다면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잠깐.
그 말은 지금 검의 원탁에서 내 호위 기사 노릇을 해주겠다는 건가?
정말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리엘이?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
"하리엘."
이건 엄청난 기회였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교단에서 크게 인정을 받고 있는 하리엘이 내 편으로, 그것도 내 호위를 맡아 준다면 이것보다 든든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넌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예?"
아슬란의 허세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난 네 호위가 필요하지 않다."
안 돼, 이 미친놈아!
이런 엄청난 제안을 걷어차겠다고?
"난 누구의 호위도 필요하지가 않다. 정녕 그 자리에 모이는 자들이 내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느냐?"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허세 부리는 것밖에 없는 놈이 잘도 떠들어댔다.
그러나 무서운 점은 아슬란이 진심으로,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대륙의 최강이며, 정녕 그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왜 거절을 하시는 거죠?"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그저 허울뿐인 명성에 기대어 사는 놈들과 만나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도모하라는 것이냐?"
하리엘은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들어도 얼탱이가 없는데, 하리엘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아슬란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장난 섞인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천하의 하리엘이 호위를 해주는 진귀한 경험을 놓칠 순 없지."
"에?"
나는 그녀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나서 몸을 돌렸다.
"내일 바로 출발하겠다, 하리엘."
"저, 정말요?"
"그래. 그러니 얼른 가서 쉬어라."
"정말이죠? 정말 내일 가는 거죠? 갑자기 마음 바꾸시면 안 돼요?!"
꽤 집요한 여자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놔두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탁-!
그리고 문을 닫는 순간.
"우읍-"
온몸을 장악하고 있던 허세가 풀리면서 나는 전방에 힘찬 함성을 내질렀다.
"믿고 있었다고 아슬란!!"
그래. 병신 같은 너도 한 건을 하는구나.
뭐, 운 좋게 잘 맞아떨어진 거 같다만, 아주 적절한 밀당으로 하리엘의 호위를 약속받았다.
처음에는 이 정신 나간 놈이 하리엘의 제안을 거절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제 10골드는 내 거야. 내 거라고!"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쭈욱 뻗었다.
곁에 누구도 없기 때문에 이 같잖은 허세에 짓눌리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난 아주 불량한 자세로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기댔다.
"후후후."
자꾸 웃음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 * *
"또 혼자 쌩 가버렸네······."
망토를 화려하게 펄럭이며 사라지는 아슬란의 뒷모습.
언제 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10년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러했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그저 허울뿐인 명성에 기대어 사는 놈들과 만나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도모하라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슬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리엘이 지금까지 봐왔던 검의 원탁은 그의 말대로 무언가 뜻깊은 것을 나누고,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소드마스터.
대륙의 위대한 대마법사.
그런 명성이 정말 허울처럼 보일 정도로 그들은 온갖 탐욕과 야망에 잠식당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아슬란이 꼬집어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마음을 바꿨어."
저 자존심 강한 사람이 대체 왜?
'천하의 하리엘이 호위를 해주는 진귀한 경험을 놓칠 수 없지.'
나 때문에?
정말?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10년 전처럼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건······.
"어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리엘은 혼자 웃으며 숙소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슬란이 있었던 자리를 힐끔 돌아보게 되었다.
16화
나 혼자 최강 괴력스킬 16화
내가 검의 원탁에 참여한다고 하니, 왕궁은 축제 분위기였다.
일라이 왕국이 처음으로 검의 원탁에 참석하는 거라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자리를 비워서 기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길을 떠나기 전 그들에게 배웅을 받았다.
난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호레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호레스."
"예, 대기사단장님."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뒤에서 개수작 부리지 말고 처신 잘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믿음에 부응하겠습니다."
뭔가 잘못 알아들어도 한참 잘못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한 마디 더 하려다 이 영감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그만두었다.
일단은 내가 왕궁에 없으니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 수밖에.
"다 모였나?"
내 직속 호위 기사는 아론을 포함해 다섯 명.
"예. 저희도 왔습니다."
그리고 하리엘과 그녀의 부하들이 5명 있었다.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이지만, 하리엘과 그녀를 따르는 부하들의 무력 수치를 따졌을 때 아주 든든한 호위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차로 이동하지 않고 말로 이동을 한다는 점 정도?
"저······."
내 호위기사들과 아론은 하리엘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특히 아론의 반응이 꽤 신선했다.
항상 무뚝뚝한 얼굴로 호위만 하던 놈이 어쩔 줄을 몰라한다.
역시 남자들은 이쁜 여자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건가.
"오늘부터 우리와 동행을 할 자들이다. 서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라."
제발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 싸우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싸우는 순간 우린 하리엘한테 다 죽을 테니까.
"예!"
오늘따라 목소리가 더 힘차 보이는 기사들이었다.
"하리엘."
"네."
"강행군이 될 것이다. 난 어쭙잖게 쉬는 걸 싫어한다."
"잘 알겠어요.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왕 가기로 한 거, 최대한 빠르게 갔다가 빠르게 돌아오는 것이 목표였다.
10골드를 받는 순간, 바로 그곳에서 내뺄 것이다.
"그럼 출발하지."
그런데 내가 성문으로 나서려고 하자 언제 소문이 돌았던 것인지, 벌써부터 백성들이 쫙 모여 있었다.
"대기사단장님!!"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우리 왕국의 자랑입니다!"
승전보를 울린 기사를 맞이하는 것처럼 백성들은 꽃잎을 흩날리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하리엘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인기가 정말 많으시네요."
"흠. 그런 셈이지."
심취의 특성으로 나는 아주 당연하게 저들의 찬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기 손을 흔드는 여인들도 대기사단장님께 아주 애절한 거 같네요."
하리엘이 가리킨 곳에는 젊은 여성들이 나를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중이었다.
"이젠 익숙하다."
"아~주 좋으시겠어요."
뭔가 하리엘의 말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인가.
"군중의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중후한 매력, 사기 증진, 그리고 군림까지.
민심 끌어 올리는 데에는 특화된 특성들이었다.
"당신도 이 사람들을 많이 아끼시나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내가 어찌 이들을 싫어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들은 내게 희망을 주고,"
내게 퀘스트를 주고,
"용기를 주며,"
골드를 주며,
"존재의 이유까지 준다."
세금까지 준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들을 지키고, 이들을 위해 죽는 것이 곧 기사의 명예인 것을."
물론 정말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아······."
하리엘은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당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기사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얘기했을 뿐. 특별한 것은 아니다."
난 말의 배를 차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빠르게 출발하지."
"네!"
검의 원탁이 열리는 곳.
레이어스 신전으로.
* * *
검의 원탁 회의가 열리는 레골라스 산맥으로 향한 아슬란과 그의 무리는 정말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하리엘도 처음에는 성문을 나서기 전에 보았던 아슬란의 모습과 그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감탄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행군을 지속하면서 그런 여유가 사라졌다.
'왜 쉬지 않는 거지? 이 정도면 쉴 만도 한데.'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를 반복하는 건 제아무리 하리엘이라고 해도 고역이었다.
그건 부하들도 마찬가지.
특히 달리다 보면 사막지대를 넘어야 하는 곳이 있어서 더욱 힘들었다.
그런데도 아슬란은,
"속도가 느리다. 더 빨리 따라와라."
아주 멀쩡해 보였다.
처음 출발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저, 저기 아슬란. 잠깐 쉬면 안 될까요? 부하들이 너무 힘들어해요."
부하들 핑계를 대긴 했지만, 하리엘도 지쳐 있었다.
벌써 3일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아슬란은 살짝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제서야 하리엘의 부하들이 숨을 헐떡이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으으. 대체 체력이 얼마나 좋으면······."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강행군에는 진짜 위아래가 없던데."
"괴물이야, 괴물. 아니. 저건 악마야. 진짜 단 한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더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부하들은 이제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슬란은 괴물이었다.
특히 이런 사막지대에서는 충분히 수분 보충을 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금방 낙오하기 마련.
그런데도 아슬란은 한번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더군다나 놀라운 건,
"저 말도 주인을 닮았나 봐."
그가 타고 있는 말도 도시에서 출발하기 전과 똑같이 기분 좋게 푸르르 울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 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게 놀라울 따름.
"다 쉬었나?"
"네···? 이, 이제 막 앉았는데요."
"여기까지 오는데 말 위에서 쭉 앉아 있지 않았나? 그대들이 달리는 게 아니라 말이 달리는데, 왜 너희들이 먼저 지치는 거지?"
"······."
그러자 참다 못한 타샤가 나섰다.
"아슬란 님. 말도 많이 지쳤습니다. 이러다 말이 죽게 생겼어요."
"포션을 먹여라. 포션만 잘 먹이면 일주일 동안은 지치지 않고 잘 달릴 수 있다."
"······."
백성들에게 보이던 그 인자한 모습.
그땐 아슬란이 정말로 백성만 생각하는 성인군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를 지금까지 오해했노라고 하리엘과 그의 부하들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출발하지. 낙오하는 놈은 버리고 가겠다."
역시 그는 악마가 맞았다.
* * *
오랜만에 소집되는 검의 원탁 회의였다.
마지막 소집이 5년 전인 걸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만큼 자잘한 사건으로는 소집되지 않는 회의였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라이 왕국과 할라즈 왕국의 전쟁.
그리고 소드마스터 유한의 사망!
"그런데 그 유한을 죽인 것이 아슬란? 그 아슬란이? 이거 뭔가 잘못된 정보가 아닐런지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한이 아슬란 손에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분명 무슨 흉계가 있었던 겁니다."
"카르펠 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대륙 세 번째 소드마스터이자, 에인소프 왕국의 왕자, 카르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교단이 이렇게 회의를 소집한 것 아니겠는가?"
이번 원탁 회의가 소집된 이유는 이러한 찝찝함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아슬란이 정말 유한을 본인 실력으로 죽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설령 아슬란이 유한을 정말로 꺾었다고 해도 저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카르펠은 자신의 호위기사인 요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은 네가 아슬란을 꺾어 보겠다는 것이냐?"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유한은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와 덩치로 유명했다.
이 요리스 역시 그런 점은 유한과 닮았다. 또한 그가 가진 능력 또한 특별했다.
거기다 그 덩치에 걸맞게 그가 가진 무력 역시 다른 부하들에 비해 뛰어났다.
호전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은 단점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는 기사였다.
만약 아슬란이 정말로 무슨 흉계를 일삼아 유한을 죽인 것이고, 그 자리를 요리스가 대신 차지하게 된다면······?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때마침.
"요리스."
"예, 주군."
"저 앞을 보거라."
"······?"
요리스는 카르펠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저건 설마······."
"그래. 아슬란이다."
여전한 걸음걸이.
여전한 거만함.
그리고 완전 녹초가 되어 버린 것만 같은 그 뒤의 부하들.
재밌는 일을 꾸미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
"요리스.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나? 아슬란을 꺾어 보겠다는, 그 말 말이다."
그러자 요리스는 가슴을 땅땅 치며 대답했다.
"제가 소드마스터가 된다면 에인소프 왕국에 더한 영광을, 주군께는 찬란한 미래를 가져다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 아슬란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진짜 소드마스터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좋아. 그럼 내가 판을 깔아 주지."
요리스는 아슬란에게 다가갔다.
* * *
온몸에 힘이 없다.
탈수 증상이 일어난 것인지, 온통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러다 눈만 감으면 풀썩 쓰러질 것 같았다.
그 뜨거운 사막을 생으로 뚫고 지나왔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3일 동안 잠도 안 자고 밤을 낮처럼 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 고생도 이제 끝인가.
우리는 드디어,
"여기가 성전입니다."
검의 원탁 회의를 진행하는 빛의 성전에 도착했다.
나는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하리엘을 비롯해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나 역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 지경이었으나,
"다들 체력부터 기르거라."
혓바닥은 아주 팔팔했다.
나는 그 잘생긴 얼굴이 아주 아작 나 버린 아론과 기사들을 바라보며 쓴소리를 했다.
"특히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이렇게 체력이 약하다면 어디에 써먹겠느냐?"
"소, 송구합니다."
"그리고 하리엘. 교단을 지키는 검들이 저렇게 나약해서야 되는가?"
"그건 당신이······!"
하리엘은 무슨 말을 하려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흠. 들어가겠다."
나는 말 위에서 내린 뒤 망토를 펄럭이며 앞장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고, 손이 벌벌 떨렸지만 아슬란의 미친 허세병이 있는 한, 목구멍에 칼이 들어와도 이곳에서 쓰러질 일은 없다.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해도 허세로 무장한 아슬란만큼은 꼿꼿하게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거 하나는 쓸모가 있다고 해야 하나.
"빛의 성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라이 왕국의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시다."
"예. 하리엘님. 그리고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경비를 지나 우린 성전 안에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 안이 우리 왕궁보다 더 넓은 듯보였다.
신께 바치는 제물이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 와서 이런 곳에다 처바른 탓이다.
온갖 귀한 보석들이 곳곳에 박혀 있고, 신앙과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조형물들과 미술품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카르펠]
무력: 94
지력: 80
마력: 80
저 앞에 걸어오고 있는 무리 중 유독 빛이 나는 사내.
마검사 카르펠.
저 아름다운 수치를 보라.
무력뿐만이 아니라 지능도 80, 거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력도 80에 달한다.
그뿐인가?
대륙 세 번째 소드마스터에 왕족이라는 신분까지.
내가 만약 아슬란이 아니라 카르펠처럼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을 골랐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군침이 싹 돌았다.
'부하들도 더럽게 센 놈들만 데리고 다니네.'
성전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괴물을 만나다니.
그 뒤에 있는 놈들도 인상이 다 험악해서 가급적이면 부딪히지 않고 얼른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게 누구신가. 우리 대륙의 새로운 소드마스터께서 행차하셨군."
카르펠이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왜 이놈은 또 아는 척을 하고 지랄이야.'
난 긴말할 것 없이 짧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소."
그리고 얼른 지나가려는 것을,
"주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상합니다."
카르펠 뒤에 제일 떡대가 큰 놈이 날 우습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이자가 유한을 꺾었다는 겁니까?"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하. 요리스. 장난이 심하구나. 새로운 소드마스터에게 그 무슨 무례더냐?"
"아. 이런. 아직도 옆에 계셨군요. 너무 키가 작으신 탓에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카르펠의 목소리에도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주 나를 물로 보는 것이었다.
[요리스]
무력: 90
지력: 60
유한과 비슷한 덩치에, 비슷한 키.
난 이 거인을 알고 있다.
카르펠의 수하이자, 에인소프 왕국의 돌격대장 요리스.
그래. 에인소프 왕국으로 플레이할 때 항상 든든하게 써먹던 놈이다.
실제로 스토리를 따라가 보면 이놈은 나중에 소드마스터 한 명을 제 손으로 죽이고 당당히 그곳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한다.
'그래. 이럴 거 같더라.'
시비를 거는 놈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만, 소드마스터도 아닌 것이 덤빌 정도면 그동안 아슬란의 평판이 얼마나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는지 알만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런 강자들을 상대로 여기서 싸움판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감히······."
그런데 흥분한 아론이 이빨을 우득 갈았다.
방금 전까지 지친 얼굴로 걸음걸이조차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했던 기사들 역시 눈에서 불이 일었다.
나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너희들이 난리야.
"대기사단장님께 그런 망언을 해놓고 살기를 바라더냐?"
"아- 누군가 했더니, 너였군. 할라즈 왕국의 자랑거리였던 젊은 기사, 아론. 차기 대기사단장으로까지 거론되었다던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적국의 개노릇을 하다니."
"!?"
요리스의 도발에 넘어간 아론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려고 하는 것을,
"아론."
"······?"
"진정하거라."
내가 막아세웠다.
하지만 둘이 충돌하는 것이 두려워서 막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있는 요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너, 키가 크군."
내 정수리 끝이 간신히 놈의 어깨에 닿을 정도로 놈은 거인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후후. 내 키가 부럽소?"
하지만 혈맥을 타고 흐르는, 태산 같은 아슬란의 자존심과 허세는 이 거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아마도, 분노일 것이다.
"감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뭐?"
그 끓어 오르는 감정을 따라 나는 내 머리보다 높은 요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건방지게."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콰드득-!!
"!?"
썩은 낙엽이 뭉치로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내게는 그저 허공에 주먹을 쥐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건만, 순식간에 그의 견갑과 어깨가 걸레짝처럼 쥐어 틀렸다.
콰앙-!!
괴력에 억눌린 요리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성스러운 신전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고, 그 아래가 움푹 파였다.
그의 무릎뼈가 부러져 살가죽을 뚫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우으읍······."
이 모든 것은 가히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으아아악-!!"
나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요리스를 자약하게 내려다보았다.
"입 닥치고 내 눈을 똑바로 보거라."
그러자 그는 경련을 일으키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눈높이가 되었다.
"난 너 따위가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17화
나 혼자 최강 괴력스킬 17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카르팰은 끔찍하게 부서져 버리다 못 해 바람 빠진 고무처럼 늘어진 요리스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애처럼 비명만 지르고 있던 요리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슬란의 위압적인 시선에 결국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공께서는 부하 관리를 잘하셔야겠소."
"······?"
"허우대만 좋고 입만 산 놈들의 결과는 항상 같지."
허우대만 좋다고?
입만 살았다고?
요리스는 그런 덩치만 좋은 기사가 아니다.
그는 왕국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돌격대장이며, 카르팰 자신 다음으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최고의 기사란 말이다!
"······."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요리스의 모습에 그저 할 말을 잃었다.
"가겠다."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아슬란은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저 허세만 많고 실력은 좁쌀만큼도 없는 자라 여겼거늘.
오늘은 그 모습이 무척 달라 보였다.
"와, 왕자님. 지, 지금이라도 쫓을까요?"
"쫓아서 무얼 하려고?"
"그거야······."
"요리스의 꼴을 보거라. 아슬란이 고작 한 손으로 저렇게 만들어 놓았다. 너희들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요리스가 그저 그런 기사였다면 이 정도로 반응하진 않을 것이다.
요리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건 바로,
"대체 철쇄를 어떻게 한 손만으로 뚫은 거지?"
철쇄.
강철보다도 훨씬 더 단단한 내구성을 가진 몸을 뜻한다.
요리스가 카르팰의 눈에 들었던 건 바로 그 능력 때문이다.
그동안 그가 날아오는 창칼과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용맹하게 돌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철쇄다.
그런데도 아슬란은 저 무식하게 단단한 몸을······.
"크크."
카르팰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왕자님?"
"크하하! 이거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 그래. 내가 너무 일라이 왕국에 신경을 쓰지 않긴 했어."
아슬란.
그래. 너 같은 놈이 그동안 일라이 왕국에서 건재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설마 저런 괴물이 그 약하디 약한 왕국에 웅크려 있었을 줄이야.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시를 했던 건가?
"요리스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라."
"아, 예."
기사들 열 명이 간신히 달라붙어서 요리스를 옮겼다.
카르팰은 아슬란이 지나간 길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흥미가 가는 사내로군."
앞으로 저자가 밟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이 대륙에 어떤 충격이 가해질지, 생각만 해도 지루함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 * *
"저기······ 대기사단장님."
내 뒤를 따르는 아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로 인해 일라이 왕국과 에인소프 왕국의 관계가 험악해진다면······."
"아론."
"아, 예."
"넌 너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다."
"······."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아론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주군."
그러자 이번에는 하리엘이 걱정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슬란. 괜찮겠어요? 에인소프 왕국은 강대국 중 하나에요. 만약 카르팰 왕자가 이번 일로 앙심을 품고 전쟁을 벌인다면······."
"하리엘."
"네?"
"넌 너의 본분을 잊지 마라. 날 경호해 준다더니, 하는 게 없군."
"바, 방금 거긴 경호할 새도 없었잖아요."
나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 진담이었다.
"그리고 왕국 간의 전쟁은 걱정할 필요 없다. 설령 에인소프 왕국이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일라이 왕국은 저런 놈들에게 패배하지 않아. 왜인지 아는가?"
"······?"
"놈들에게는 명분도, 기사의 명예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나는 내게 주목된 시선을 바라보며,
"일라이 왕국에는 나 아슬란이 있다."
정점을 찍은 허세를 분출했다.
"모두 쉬도록.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나는 신전에서 배정해 준 숙소로 먼저 들어갔다.
10명 밖에 없는 소드마스터들을 위한 방은 역시 특별했다.
넓고, 화려했지만 지금 그것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열기를 뿜어낼 정도로 몸에 가득 차 있던 허세가 주르륵 사라지면서 나는 두 다리가 풀려 버렸다.
그대로 문을 닫은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강행군의 피로와 방금 전 있었던 사건에 의한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렸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오늘 강대국 에인소프 왕국과 일라이 왕국은 사실상 적대국이 되었다.
잠깐 10골드에 눈이 멀어 하필이면 카르팰과 척을 지다니.
아이고. 내가 미쳤지.
"카르팰이 거기서 칼이라도 휘둘렀다면······."
그 가벼운 손짓 한번에 내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인 건 카르팰이 건방진 내 일침을 듣고도 칼을 뽑지 않았다는 것이었따.
"이거 곤란한데."
회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 난리가 났다.
최대한 주목받지 않으려고 마음먹었건만, 과연 아슬란답게 시작부터 화끈하게 저질러 주었다.
"그러니까 요리스 그 새끼는 왜 사람 성질을 건드려 가지고."
아슬란의 허세가 발동한 것도 있지만, 나도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저지른 것도 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뻔뻔하게 나가야지."
허세로 무장해 아무도 날 건들 수 없게 말이다.
일단 내가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가야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 * *
"아슬란에 대한 교단의 정보를 바꿔야 할 거 같습니다."
에길론의 말에 옆에 있던 타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게. 저번에 너 진짜 잘 참았다. 그때 대들었으면 찍소리도 못 내보고 죽었겠는데?"
에길론은 그날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때까진 아직 아슬란을 무시하고 있을 때라 참지 못 하고 칼을 뽑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철쇄의 기사라고 불리는 요리스의 걸레짝이 된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근데 대체 힘이 얼마나 강하면 사람 어깨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괴력이었다.
견갑으로 보호되고 있는 어깨를 부수기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철쇄의 명성을 가진 요리스의 몸을 그렇게 쉽게 찌그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상대방의 몸이 얼마나 단단하든, 얼마나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든, 그분께는 그저 진흙처럼 나약할 뿐입니다."
아론은 그리 말하면서 허리춤에 있던 자신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반쯤 부러진 그의 검은 여전히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스릴?"
"맞습니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하지만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이것을 맨손으로 부수셨지요."
쿨럭-.
얘기를 듣던 타샤가 기침을 터트렸다.
"미, 미스릴을 맨손으로요?"
"예. 너무나도 가볍게 부러뜨리셔서 저도 처음에는 미스릴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미스릴은 보통 물질이 아니다.
근데 그냥 미스릴도 아니고 검으로 제작된 것을 맨손으로 부술 정도면 대체 아슬란은 평소에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근데 그걸 왜 들고 다녀요?"
"그날 대기사단장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타샤는 짜게 식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도 아슬란이지만, 그쪽도 정상은 아니네요."
아론은 미간을 좁혔다.
"저는 괜찮아도 대기사단장님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아, 예. 그러시겠죠."
그는 타샤를 한번 흘깃 노려본 뒤 하리엘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무튼, 저희도 그만 배정된 곳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들어가서 편히 쉬세요."
타샤는 기사들과 함께 떠나는 아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흥.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타샤. 너무 상대를 자극하지 말아라."
"그래도 저자가 왕국을 배신하고 아슬란의 밑으로 들어간 건 맞잖아요?"
"아론을 오래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가 강직하고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런 마음마저 녹여 내릴 만큼 아슬란이 대단한 거겠지."
하리엘은 아슬란과 여러 날을 보내면서 왜 아론과 기사들이 그를 충직하게 따르는지, 왜 백성들이 그에게 환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희들도 가서 쉬어라. 난 제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겠다."
"예, 하리엘님."
그녀는 부하들을 보내 놓고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실로 들어갔다.
"하리엘."
인자한 노년의 목소리에 하리엘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이스마엘 제사장님."
"그래. 임무는 잘 끝마치고 왔느냐?"
"예. 라할께서 지켜 주신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구나. 성전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는데?"
"아, 예. 그것이······."
하리엘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딱 하나.
하리엘도 일부러 빠뜨려 놓고 말한 것이 있었다.
아슬란은 하리엘이 함께 간다는 조건으로 이곳까지 따라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만큼은 이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부끄러웠기 때문일까.
"허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이스마엘은 짧게 기함을 터트렸다.
"아슬란이 정녕 그렇단 말이지?"
"예. 그동안 교단에서 기록한 그의 정보를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글로만 읽은 모습과 너무나도 많은 것이 달랐습니다."
"흐음. 그래. 그건 네게 맡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리엘."
이스마엘의 목소리가 갑자기 착 낮아졌다.
"아슬란은······ 믿을 만한 인물이더냐?"
"그것이 무슨 뜻인지-."
"교단에 그닥 좋지 않은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뒤에 있던 라할의 동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악의 기운이 발견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지."
"악의 기운이라고 하시면 설마······."
"그래. 악마들이 다시 이 대륙으로 나타나려는 조짐일 것이다."
악마라는 말에 하리엘은 눈가를 꿈틀거렸다.
지금도 이 대륙에는 악마의 잔당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세력이 굉장히 미미하여 신경 쓸 수준도 못 되었다.
여러 차례 교단에서 그들을 정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오랜 전투 끝에 간신히 무저갱으로 봉인시켜 놓은 악마들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려는 것을 뜻한다.
"지금 이 대륙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다. 350년 전 그날처럼 다시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야 할 때지. 그래서 내가 네게 묻는 것이다. 아슬란은 믿을 만 하더냐? 그와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겠느냐?"
그러한 제사장의 물음에 하리엘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제가 봤던 아슬란은,"
그녀는 왕국에서 보았던 아슬란의 모습을 기억한다.
"제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그가 백성들을 대하는 자세를,
"만약 그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결코,"
백성들이 그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을,
"사사로운 감정이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닐 겁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아슬란을 믿고 있습니다."
만약 다시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그때 세상은 영웅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하리엘은 그 영웅이 될 사람이 바로,
"아슬란은 그런 사람입니다."
아슬란이라고 믿었다.
"흠-."
제사장은 하리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교단에 명령을 받고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아슬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찼다.
그가 절대 소드마스터일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의 불손한 행동거지는 교단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대륙의 영웅이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바뀌게 만든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항상 이랬지."
"네?"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 차기 시작할 때마다 영웅이 탄생한다. 어쩌면 네가······."
그렇기에 이스마엘도
"그 영웅을 만나고 온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아슬란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기로 결심했다.
18화
나 혼자 최강 괴력스킬 18화
내가 무리해서 신전으로 빨리 왔던 것은 그냥 목적지에 도착만 하면 퀘스트가 알아서 클리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이놈의 게임이 그렇게 쉽게 돈을 줄 리 없지 않은가.
꼼짝없이 나는 이곳에 최소 3일은 더 머물러야 했다.
"갈 데도 없고. 에휴."
레이어스 신전 밖을 나가면 산맥 아래로 내려 가야 하는데, 그 밑은 전부 사막 지대라 딱히 나갈 만한 곳도 없었다.
사막 지대에만 산다는 몬스터를 잡으러 가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여기서 많이 굴렀었지."
레골라스 사막에는 거대 전갈, 수천 마리의 뱀떼, 모래의 요정 등등. 사냥할 맛이 나는 몬스터들이 많다.
그놈들을 죽여 재료를 모아 장비를 만들기도 하고, 가끔 운이 좋으면 히든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잡는 게 존나 빡세다는 거지."
사막 지대라는 페널티.
뜨거운 날씨.
바다를 헤엄치듯 모래 안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똥캐 아슬란."
아슬란으로는 몬스터들이 우글 거리는 곳에 발 한번 잘못 들이면 그대로 객사다.
뭐, 신전으로 오는 길은 몬스터들이 거의 없는 길을 따라 왔으니 무사히 넘어갔다지만, 사냥 목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아슬란으로는 택도 없었다.
"쓰읍-. 그래도 몬스터 파밍으로 얻는 재료들이 꽤 되긴 하는데."
몬스터를 죽여서 얻는 재료로 장비를 만들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똥캐 아슬란으로 이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방법이 몇 개 없다.
"템빨로 밀고 가는 수밖에."
이것이 내가 단기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극악 난이도는 새로운 특성과 스텟을 보상으로 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템을 통해 얻는 건?
아무리 지랄 같은 난이도라도 결국 이것도 클리어 목적으로 만든 난이도이니, 아이템을 통한 성장은 분명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 아이템들을 어떻게 얻느냐는 건데."
몬스터를 토벌해서 얻는 재료들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특정 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아이템을 찾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건 왕국 가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네."
찰나의 괴력이란 스킬은 어디까지나 일회용에 불과하다.
내가 가진 최후의 한 방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스킬 쿨타임 돌 때마다 한번씩 싸워 주는 것이 아니니, 그것 말고도 나를 지켜 줄만 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재료 파밍과 아이템 제작은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적당한 때가 오면 주인공을 도와서 게임을 클리어 하면 돼."
모든 게임이 그렇듯, 이 게임도 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달려 있다.
문제는 게임 엔딩이 수십 가지라는 것이었다.
대륙이 평화롭게 유지되는 해피 엔딩도 있고,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대륙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는 배드 엔딩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또 어떤 컨셉의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서 엔딩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분이시여. 에단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호위기사 에단의 목소리에 나는 퍼질러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다듬은 목에서는 굵직한 목소리가 나갔다.
"잠시 기다리거라."
"예."
나는 로봇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을 빠르게 정돈했다.
어휴. 이놈의 허세하고는.
"들어오너라."
에단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내게 아뢰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하리엘인가?
에단의 얼굴이 왠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뭘 봤기에 저러지?
"나다."
기사가 다 아뢰기도 전에 요염한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구두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아슬란."
붉은 드레스··· 드레스가 맞는 것이겠지.
미니 스커트처럼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뒤의 등과 허리도 맨살이 가려지지 않은 짧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
새빨간 립스틱과 붉게 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내게 알려준다.
"······나타샤?"
샤나 왕국의 대마법사, 나타샤 헤리오스.
이곳에서는 그녀를 홍염의 대마법사라 부른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을.
색욕의 마녀, 나타샤.
"오랜만에 보는 스승에게 여전히 건방지구나, 아슬란."
스승?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대마법사가 아슬란의 스승?
하리엘에 이어 두 번째로 놀라는 아슬란의 인간 관계였다.
"흐응. 나이는 들었어도 생김새는 여전하구나.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탐스러워 보여."
색기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에단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에단."
"아, 예."
"나가 있거라."
"예."
보통 대마법사라고 하면 긴 수염 난 다 늙은 할아버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대마법사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저렇게 나타샤처럼 개성이 강한 캐릭터도 존재했다.
[나타샤]
무력: 70
지력: 95
마력: 95
무시무시한 스텟이다.
지금까지 봤던 네임드들 중 단연 최고다.
일단······ 본인 입으로 스승이라고 하니 대접은 해줘야겠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긴. 그냥 오랜 제자가 왔다기에 한번 보러 왔다."
제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타샤가 아슬란을 일대일 멘토링을 해서 키웠을 리는 없다.
나타샤 정도의 눈이라면 이 병신 같은 캐릭터는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금방 판단했을 터. 그렇다면 왜 자신을 스승이라고 소개했을까.
'나타샤가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았었지?'
이럴 땐 내가 고인물이라서 다행이었다.
나타샤 정도의 네임드라면 그 정보가 내 머릿속에 없을 리가 없지.
내가 알기로 그녀는 대마법사가 되기 전까지 아카데미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엘라 아카데미는 거의 모든 왕국에서 귀족 자제들을 보낼 정도로 대륙 최고 수준의 아카데미다.
그곳에 들어가면 왕족도, 귀족도 심지어 평민도 모든 신분이 하나로 평등해진다.
아마 거기 스쳐 지나가는 제자들 중 하나가 아슬란이었던 것 같다.
만약 아슬란이 가르치는 제자였다면-.
"스승과 제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나타샤가 이런 똥캐를 진짜 제자로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그러자 그녀는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제자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100년을 넘게 산 여인이지만, 그 미모는 이제 갓 20대가 된 성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백옥 같은 피부와 상대를 유혹하는 붉은 입술.
의도적으로 드러낸 목선과 쇄골. 그리고 일부러 과장되게 꼬는 다리를 바꾸는 동작까지.
모든 것이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한 그녀만의 기교였다. 그리고 열의 아홉은 전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그녀의 능력은,
[끝없는 매혹]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매혹.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상대방을 본능적으로 유혹하는 것이 그녀의 특성이었다.
"내가 여자란 무엇인지, 여자는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너에게 가르치려고 했지만, 그걸 거부한 건 너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설마, 나타샤가 아슬란을 작정하고 유혹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땐 내 가르침에 넘어오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넌 특별했지. 한창 혈기왕성할 때일 텐데도 말이야. 그래서 혹시 남성적 상징인 그곳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염려도 했었다니깐?"
후훗 웃고 있는 그녀의 눈빛에는 색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말했다.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흐응. 이렇게 또 피해간단 말이지. 뭐, 좋다. 그래야 나도 탐닉하는 맛이 있으니."
왠지 저 여자는 아슬란보다 더 미친년 같았다.
"할라즈 왕국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
뜬금없이 갑자기 할라즈 왕국을?
"유한이 죽고 나서 할라즈 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미 내분이 일어나 서로 칼질을 할 때만 기다리고 있지. 그리고 그 옆에는 누가 있는지 아느냐?"
나타샤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바로 우리 샤나 왕국이 있다. 만약 너와 우리 왕국이 힘을 합친다면 할라즈 왕국은 금방 끝장을 낼 수 있겠지."
"동맹 요청입니까?"
"그런 셈이지. 우리 샤나 왕국은 할라즈 왕국을 원한다. 그렇기에 너와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쪽이 최대한 출혈도 적고 다툼도 적을 테니까."
샤나 왕국과 일라이 왕국이 손을 잡아 할라즈 왕국을 멸망시킨다라.
좋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타샤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저 여자는 국정에 아예 관심이 없잖아.'
왕국이 잘 되든 망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내게 직접 와서 이런 소리를 떠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왕국의 대의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중에 홍염의 대마법사가 아닌, 색욕의 마녀로 불리는 이유가 된다.
"흐음-."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그녀는 탐색하듯 내 위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훨씬 더 멋있어지다니. 지금껏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입니까?"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겠느냐? 넌 매번 혼자 진지한 놈이지 않느냐?"
역시 이 여자는 왕국의 일은 뒷전이었다.
그럼 대체 그걸 왜 물어본 거지?
단순히 구색을 갖추려고?
"어때. 아카데미에서 맛보지 못했던 이 탐스러운 과일을 한번 맛보고 싶지 않느냐, 아슬란?"
그녀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색기가 내 전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혈맥의 흐름은 빨라졌고, 심장의 진자 운동도 덩달아 활발해졌다.
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아랫도리에도 반응이 오려고 한다.
어느새 눈은 그녀가 보일락 말락 들추고 있는 가슴에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
아슬란의 정신은 욕망을 자극하는 그녀의 매혹적인 색기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전 당신에게 순순히 젊은 생기를 바칠 생각이 없습니다."
"으응?"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젊은 생기?"
모른 척하고 있지만, 날 속일 순 없다.
나는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젊음을 유지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끝없는 매혹으로 상대를 유혹한 뒤, 생기를 흡수해 저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철저히 마법사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금지하는 마법이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이걸 입 밖으로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녀의 색욕을 방어하기 위해 발동된 아슬란의 허세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털어냈다.
"전 당신의 노리개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더더욱 당신의 젊음을 위해 희생할 생각도 없지요."
"누가 들으면 내가 흑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겠구나."
"아닙니까?"
그녀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져 갔다.
"말을 조심하거라. 오랜 제자를 여기서 죽이고 싶진 않다."
그녀의 강렬했던 색기는 이제 엄청난 살기로 바뀌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것만 같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아슬란의 허세는 꺾이질 않았다.
"저도 오랜 스승의 피를 이 자리에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건방진······!"
그녀가 힘을 발산하기 시작하자 붉은 마력이 내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짓눌렀다.
방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나타샤의 마력은 굉장히 거칠었다.
핏줄이 메마르고 목이 옥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
아슬란의 정신력이 함께 있는 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무덤덤한 얼굴로 버텨내자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더욱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콰콱-! 콰콰콱-!!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마력에 의해 바닥이 붉게 갈라졌다.
바닥을 가르는 힘은 점차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의자 끝에 다다르려는 찰나.
"거기까지 하시지요."
"뭐?"
"제가 칼을 뽑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바닥을 가르며 다가오던 붉은 마력이 멈췄다.
"하! 그건 네가 날 죽일 수 있다는 것이냐?"
"······."
나는 말 없이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
때론 말 몇 마디하는 것보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더 큰 힘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나타샤도 한참 동안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이내 힘을 거둬 들였다.
"제법이구나. 내 마력을 버텨 내다니. 하긴. 그 유한을 일격에 죽인 사내이니,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허세 부리는 거 맞습니다, 누님.
"진짜 용건이 무엇입니까?"
"응?"
"당신은 어차피 국정에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여기까지 손수 찾아와 그런 제안을 하신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할 수밖에요."
그러자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새침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슬란. 생각보다 넌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혹시 몰래 내 뒤라도 캐고 있었느냐? 그건 그거 나름대로 흥분되는군."
"······."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깟 국정은 개나 주라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성적 매력을 마구 뿜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처럼 저 끝없는 매혹도 같은 부류인 듯싶었다.
"하지만 대답은 듣고 싶다. 넌 샤나 왕국과 손을 잡아 할라즈 왕국을 칠 생각이 있느냐?"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이유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요."
"그래? 이상한 일이군. 할라즈 왕국을 점령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대국이 될 수 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렇게 되면 모든 왕국에게 주목을 받게 되고 경계심을 느낀 주변 왕국끼리의 동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 꼼짝 없이 협공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거기다 나는 전쟁터에 나가기 싫었다.
잘못 갔다가 기습 공격에 당하기라도 한다면 전투 능력도 없는 아슬란은 끔살이다.
"가만히 있는 유한을 먼저 건드렸으면서 정작 왕국은 치지 않겠다······ 뭐, 잘 알겠다. 그런데 아슬란."
"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끈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네가 듣지 못한 내 특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말이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칫. 재미없기는."
나타샤는 문밖으로 나가기 전, 또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보았다.
"잠깐. 너 혹시 그것 때문이냐? 아직도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야?"
"······?"
"아아. 그랬던 거군. 여전히 그 아이를 잊지 못한 것이었어."
이 미친 여자가 또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이걸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하리엘은 이미 교단의 성검이 된 자. 그녀는 앞으로 어떤 남자와도 함께 할 수 없다."
하리엘?
아슬란이 아직도 하리엘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 천하의 아슬란이 순애보라니. 이거 더욱 점령하고 싶어서 마음이 들끓는구나. 후후훗."
"······멀리 안 나갑니다."
"쯧. 알겠다. 이 매정한 녀석. 다음에 두고 보자. 그땐 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
탁-!
마침내 나타샤가 돌아갔다.
한바탕 붉은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듯한 기분이다.
그동안 애써 감춰 두고 있던 식은땀이 얼굴과 몸에 줄줄 나고 있었으며,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가 사라지면서 잔존하던 흥분감이 가시질 않았다.
"진짜 모니터로 보는 거랑 다르네."
아슬란의 정신력이 아니었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 아니지. 이게 끔찍한 건가?
커뮤니티에서 나타샤 손에 죽는 게 호상이라고 말하는 놈들이 꽤 있었다.
그만큼 수많은 가능충을 양성해낸 것이 바로 저 나타샤다. 그리고 실제로 꽤 많은 플레이어가 나타샤 손에 죽는다.
그 이유는 홍염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그녀가 훗날 타락한 색욕의 마녀가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플레이를 하다가 나타샤에게 죽은 적이 있었다.
그땐 모니터로만 정기를 흡수당해 죽는 걸 봤는데, 그걸 오늘 실제로 봤으면······.
흠흠. 아무튼,
"그런데 하리엘을 못 잊어? 이 아슬란이?"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 아슬란이 여자 하나를 못 잊어서 그렇다기에는-.
"잠깐."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슬란은 사십이 넘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격이 개차반이라 여자들이 다 도망갔겠거니 했는데, 정말 나타샤 말대로 아슬란이 아직도 하리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라면?
갑자기 모든 게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설마······?"
왜 아슬란이 지금까지 혼자 있었는지,
왜 하리엘만 보면 허세와 더불어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는지,
처음에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일 거라 생각했으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19화
나 혼자 최강 괴력스킬 19화
탁-!
나타샤는 닫힌 문을 슬쩍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내 밑에서 매달리게 만들어 주마, 아슬란."
그러고는 밖을 나오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는 보았는가?"
"응. 만나봤지."
"그래서? 아슬란은 뭐라고 대답했지?"
"할라즈 왕국을 치는 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그렇군."
그녀는 짜증 섞인 눈동자로 레이어스 교단 제사장, 이스마엘을 쏘아붙였다.
"그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나보다는 자네가 그래도 조금은 아슬란과 가깝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카데미에서의 인연이 있지 않은가? 난 아슬란의 의도를 알아야 했네."
"의도?"
"그가 정말로 개인적인 탐욕을 일삼아 전쟁을 벌이는 그저 그런 기사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진 영웅인지 말일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스마엘은 잠시 주변을 스윽 살펴보았다.
그러자 나타샤는 손가락을 튕겨 마력으로 방벽을 만들었다.
"괜찮아. 이제 아무도 못 들어."
"······사실 교단에서 받은 정보가 하나 있네."
"어떤 정보?"
"유한이 악마와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 말일세."
악마라는 말에 나타샤는 비웃음 젖은 입가를 보였다.
"또 시작이네. 대체 레이어스 교단은 이미 다 봉인 돼서 사라진 악마 타령을 얼마나 더 할 예정이야?"
"이번에는 다르네."
"그 말도 여럿 들어봤지. 무려 100년이 넘도록."
악마라면 이제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350년 전을 마지막으로 잔당 세력 이외의 대륙에 위협이 될 만한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누구든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레파토리를 좀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나타샤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지폈다.
이스마엘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는 연기를 가득 내뿜으며 말했다.
"이해해줘.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기에는 이게 딱이거든."
"아슬란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예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나한테 안 넘어 오더라고. 근데 이상하게 아슬란 그놈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멋있어지는 거 있지? 너랑은 다르게."
"······."
"그런데 악마랑 아슬란이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거야?"
악마가 다시 나타나는 건 상관 없었지만, 교단이 아슬란에게 왜 관심을 갖는 건지는 궁금했다.
"그저 시기가 절묘하다고 해야 할지."
"뭐가?"
"유한이 악마 세력과 결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들어온 뒤 얼마 안 있어 아슬란이 갑자기 유한에게 대결을 요청했네."
"그래?"
뭔가 얘기가 흥미진진할 것 같아 나타샤는 귀를 쫑긋 열었다.
"전장에 제대로 나선 적도 없고, 그저 뒤에만 있던 그가 갑작스레 할라즈 왕국에게 전쟁 선포를 하고 유한과의 대결을 청했네. 자네가 보기에도 뭔가 묘하지 않나?"
"네 말은 그러니까 아슬란이 뭔가를 알고 나섰다는 거야?"
"그래. 그렇게 유한을 일격에 죽이고 아슬란은 망설임 없이 왕국으로 돌아갔지. 자기 할 일은 끝났다는 듯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보통 전쟁이었다면 할라즈 왕국을 단숨에 끝장냈었을 거야."
그건 나타샤도 의문이었다.
아슬란은 유한을 죽이고 아론까지 잡는 대승을 거뒀는데도 할라즈 왕국을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놔두고만 있다.
충분히 그들을 쓸어 버릴 수 있는 전력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난 하리엘의 보고를 듣고 그리 생각했네. 사실 아슬란은 악의 세력과 유한이 서로 결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잠깐. 하리엘?"
"그래. 하리엘이 교단의 명을 받고 아슬란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네."
그 말에 나타샤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아슬란. 이 앙큼한 놈."
"······?"
"내가 마력까지 쓰면서 유혹을 한 건데, 왠지 끝까지 안 넘어오더라고. 이 독한 놈이.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마력으로 유혹을? 지금 그게 대마법사가 할 짓인가?"
"야. 나도 너 같이 늙고 병든 닭한테는 내 아까운 마력 안 써. 괜히 잘못 먹고 탈 날 일 있나."
"느, 늙고 병든 닭······."
충격을 받은 이스마엘은 제자리에 경직되었다.
"아무튼, 네 말은 아슬란이 뭔가를 알고 유한을 죽였다는 거지?"
"······그게 우리의 추측이네. 확실하진 않아."
"이런. 그게 사실이라면 난 더 아슬란한테 끌릴 거 같은데? 호호."
그렇게 실실 웃으며 이스마엘을 지나쳐 가던 중, 나타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맞다. 난 네 부탁 들어줬다. 나중에 너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
"그러지."
"그래. 다음에 또 만났을 때 아는 척하지 말고. 늙은 닭이랑은 얘기 나누는 걸 꺼려해서."
"······."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떠나가는 그녀의 향수와 담배 냄새는 코끝을 자극할 만큼 향기로웠다.
평생 신에게 인생을 바치는 제사장의 금욕마저 건들만큼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유혹의 향기는 강렬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작정하고 달려들었는데도 아슬란은 넘어가지 않았다라······.
"하리엘의 말이 사실이었나."
아슬란이 정말로 달라졌다는 하리엘의 보고를 듣고 이스마엘은 긴가민가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확인을 하고자 일부러 나타샤를 이용해 그의 마음을 떠본 것이었으나, 역시 그는 하리엘의 말처럼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럼 정말로 뭔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미리 알았든, 미리 알지 못하였든, 이거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슬란.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리고 어쩌면 이 대륙이 그에게 의지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이스마엘이었다.
* * *
'전부 괴물 천지로구나.'
검의 원탁 회의가 시작되는 당일.
나는 부하들과 함께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스텟 떡칠을 하신 네임드들께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계셨다.
그냥 앉아만 있으면 다행인데, 내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의 시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
나였으면 숨도 못 쉬고 밖으로 나갔겠지만, 아슬란의 허세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이 정신 나간 캐릭터는 그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날 바라보는 것이 옳다는 듯이,
저들은 모두 자신의 아래라는 듯이,
격조 있고 품격 있는 발걸음과 그렇지 못 한 교만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펄럭~
망토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며 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웃긴 건 이런 허세 가득한 아슬란의 모습을 대부분 감탄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놈도 있었다.
"지가 무슨 주인공인 줄 아나? 혼자만 제일 늦게 도착하셨네?"
볼멘 목소리가 나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만한 자세의 대표는 아슬란이라고 하지만, 그는 귀족스러운 품위를 잃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냥 거만함을 표방한 천박스러운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뉴엘]
무력: 94
지력: 55
미뉴엘.
칼라 왕국의 대기사단장이자 대륙 다섯 번째 소드마스터.
사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가 중요하지, 그 아래부터는 실력이 비슷비슷 하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 미뉴엘은 상대방과 싸우는 걸 좋아하는 놈이라 소드마스터가 되기 전에는 광견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즉, 지금 절대 시비가 걸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광견이라는 별명답게 저놈한테 잘못 걸리면 나를 계속 물고 늘어지려 할 것이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는 정각에 왔다만. 내가 혹시 늦었나?"
"다른 사람들은 미리 와서 다 기다리는데, 너 혼자만 마지막에 오니까 그렇지. 사실상 여기서는 네가 이번 회의에 처음 참석하는 신참 아닌가?"
초장부터 시비를 거는 미친개였다.
문제는 그냥 무시하려고 해도 아슬란의 허세가 저걸 그냥 넘길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 같잖은 소리를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미뉴엘."
"······뭐야?"
미뉴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스멀스멀 투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쿵! 상을 내리 찍었다.
"모두 조용."
대륙의 최강자,
대륙 최강의 검,
그는 무려 기사도, 왕자도 아닌, 칼라 왕국의 국왕, 카르만이었다.
그의 일갈에 회의장 안이 고요해졌다.
"다들 모였으니, 검의 원탁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카르만]
무력: 99
지력: 85
마력: 80
스텟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가히 대륙 최강이었다.
거기다 칼라 왕국은 국왕을 포함해 소드마스터가 2명, 대마법사가 3명이나 있기 때문에 전투력이나 자원 측면에서도 다른 왕국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서 있다.
그래서 초보자들에게 이 게임을 권할 때 쉽게 깨고 싶으면 칼라 왕국을 선택해 카르만으로 플레이를 하라고 조언한다.
광견이라 불리는 저 미친놈도 카르만 앞에서는 금방 꼬리를 내릴 정도였다.
"그럼 첫 번째 안건부터 해결하겠소."
검의 원탁 회의는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 그리고 회의를 주관하는 교단의 제사장만 자리에 앉을 수 있고 나머지는 그 뒤에 서 있어야 한다.
발언권 역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회의였다.
내 뒤에는 아론과 하리엘, 단 두 명만이 있을 수 있었다.
"할라즈 왕국과 일라이 왕국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대외적으로는 대륙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인 만큼 전쟁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계속 전쟁을 한다고 해서 이들이 물리적으로 제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할라즈 왕국은 더 이상의 다툼을 원하지 않습니다."
할라즈 왕국의 대표로 나온 대마법사, 켈린의 발언이었다.
부럽다. 유한이 죽었어도 저기는 대마법사가 하나 남아 있어서 건재하구나.
"할라즈 왕국의 뜻이 저러한데, 아슬란. 그대는 어떻지?"
나도 할라즈 왕국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다.
딱 하나 원하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나 역시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다만."
"다만?"
"내게 투항한 아론과 그의 기사들이 가족을 그리워 하고 있다. 그들을 일라이 왕국으로 보내라."
내게 투항했던 아론과 그 외 기사들.
그들이 날 절대 배신할 수 없도록 하려면 가족이라는 인질을 잡아야만 한다.
나중에 또 할라즈 왕국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 저놈들이 가족을 데리고 협박을 한다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켈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받아쳤다.
"그들은 우리 왕국을 배신한 배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족을 넘겨달라는 겁니까?"
쉽사리 넘겨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요리스의 어깨를 그 지경으로 만든 이후 결심했듯, 여기서는 뒤로 물러나기보다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만 방심하면 머리 끝까지 차올라 꿈틀 거리려 하는 허세를 억누르지 않고 풀어 주었다.
"싫은가?"
그러자 내 몸이 의자 뒤로 기대었고, 턱은 상대를 하찮게 여기듯 높아졌다.
"뭐, 협상을 원하신다면 적당한 가격으로 내어 드릴 순······."
"전쟁."
"예?"
"그들을 내놓지 않으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군을 출정시킬 것이다."
그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켈린도 당황한 듯 말을 절었다.
"지금 저, 전쟁을 또 하겠다는······."
"난 분명 아량을 베풀어 유한을 죽인 뒤에도 할라즈 왕국을 추가로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난 너그럽지 않다."
"······."
"그러니 선택해라. 그들을 내게 넘겨 평화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할라즈 왕국이 멸망하는 것을 볼 것인지."
켈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카르만이 입을 열었다.
"아슬란.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군. 다른 방법은 없겠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저놈이다."
허세로 무장해 뻔뻔하게 나가는 것은 좋았으나,
"그리고······ 이건 제 3자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나와 할라즈 왕국, 둘이서 풀 문제다."
이건 뻔뻔한 것을 넘어 겁대가리를 상실한 발언이었다.
아무리 허세에 미쳤어도 위아래는 구분할 줄 알아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르만한테 저런 소리를···!
후회한들 늦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 않은가.
아슬란의 충동적인 허세를 조절하지 않고 내비둔 결과였다.
"감히 우리 국왕께 그 무슨 무례더냐?"
과연 벌써부터 입질이 왔다.
카르만을 주군으로 모시는 미뉴엘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폭주하기 시작한 아슬란의 허세가 여기서 멈출 리 없었다.
"너에게는 국왕이겠지만, 내겐 아니다."
"넌 왕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느냐?"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게 하지 마라, 미뉴엘. 예나 지금이나 머리가 안 좋은 건 똑같군."
"뭐야?"
벌떡 일어난 미뉴엘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이글 거리는 눈동자는 오롯이 내게 향했다.
보통 이 정도 했으면 말릴 법도 하지만······.
'안 말리네. 미친.'
카르만은 상황이 어찌되나 끝까지 보려는 것인지, 흥분한 미뉴엘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가 나서지 않으니,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진짜 칼부림 한번 나겠는데.
"아카데미 시절부터 내 눈은 쳐다도 보지 못했던 놈이 감히······."
미뉴엘과 아슬란이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었나.
뭐가 어찌 되었든, 미뉴엘이 진짜 칼을 뽑아 들기 전에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원래 상종하기 어려운 천박한 자의 눈을 보지 않는다, 미뉴엘.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네가 감히 내 눈을 마주할 자격이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아슬란은 끝없이 선을 넘고 있었다.
결국 거기서 폭발한 미뉴엘은,
"아슬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달려와 칼을 휘둘렀다.
콰앙-!
하지만 그의 칼은 하리엘의 단검에 막히고 말았다.
"······."
겉은 무덤덤하게 있지만, 속은 심장이 벌렁거려 토악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뭐지?
미뉴엘이 아슬란의 이름을 외치는 것까지만 봤다.
그가 칼을 뽑고, 저 멀리서 여기까지 달려오는 건 보지도 못했다.
이 아슬란의 눈으로는 차마 쫓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하리엘이 막아 주지 않았다면 단번에 목이 날아가 버렸을 터.
"뭐하는 짓이냐? 누가 내 검을 막으라고 했지?"
"칼을 거두십시오. 신성한 회의 중입니다."
"신성한 회의 같은 소리하네. 너도 이 새끼랑 같이 죽여 줄까?"
하리엘이 한번은 막아 줬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막아 줄 수 있을까.
아무리 하리엘이라고 해도 상대는 대륙에 10명 밖에 없는 소드마스터다.
하리엘로는 놈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면······.
"하리엘."
바로 그때였다.
"예?"
"칼을 거둬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것만 같았던 아슬란의 허세가 무언가를 초월한듯,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벌렁거리던 심장은 침착해지고, 빠르게 흐르던 혈맥도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네가 막아 줄 필요가 없었다, 하리엘."
그러자 미뉴엘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허세 부리기는. 예전이랑 다를 바가 없구나, 아슬란. 하리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놈이."
"미뉴엘.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군."
"뭐?"
"하리엘은 내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니다. 네 목숨을 구한 것이지."
"······?"
"하리엘이 막지 않았다면 방금 전 일격으로 넌, 죽었을 것이다."
미뉴엘은 멍하니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크하하하!"
미친놈마냥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놈은 하리엘과 맞대던 칼을 거두더니, 그 끝을 내게 겨누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그래. 어디 보여 보거라. 그 유한을 일격에 죽였다지? 과연 어떤 일격으로 죽였을지 무척 궁금하군. 허세는 그만 부리고, 행동을 보여라."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허세의 고양감에 젖어 버린 내 몸은 더 이상 상대방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리엘."
"네?"
"내가 이래서 여기를 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미뉴엘의 칼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놈은 여전히 내게 빈정대듯 말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느냐? 얼른 잘난 네 힘을 보여 보라니깐?"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꺼져라."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그의 칼끝을 때렸다.
그러자,
터엉-!!
허공을 찢는 파공음이 울려 퍼지면서,
콰콱-!
그것이 그 밑에 있던 원탁을 갈랐다.
"으, 으아아아!!"
내 손가락을 타고 나간 찰나의 괴력은 검을 붙잡고 있던 미뉴엘을 저 먼발치까지 보낸 뒤,
콰아앙-!
그대로 기둥에 처박아 버렸다.
"······"
회의장 안은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 정적으로 가득 찼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하리엘을 향해 말했다.
"내가 대체 저런 자들과 무엇을 도모하라는 것이냐, 하리엘."
20화
1초만 소드마스터 20화
"······."
충격으로 휩싸인 전각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모두 눈알이 튀어 나올 것만 같이 놀란 표정으로 나와 기둥에 처박혀 쓰러져 있는 미뉴엘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미, 미친······.'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뉴엘이 내게 칼을 겨누고, 내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을 뿐인데.
고작 그거 한 방으로 미뉴엘이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버리다니!
'이왕 칠 거면 칼이 아니라 저 볼때기를 때렸어야지!'
그 정도 위력이면 충분히 미뉴엘을 즉사시킬 수 있었을 터.
대체 이놈의 허세가 뭐라고.
'지금이라도 일어날까?'
각만 잘 보면 대충 말로 떼우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어차피 회의를 진행하기에는 어렵지 않나?
그런데 바로 그때.
"크으으-."
기둥이 움푹 파일 정도로 처박혔던 미뉴엘이 이를 갈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잘근잘근 씹은 그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아슬란······ 네놈······."
눈동자에는 지독한 살기가 아우러졌다.
찰나의 괴력은 방금 써버린 탓에 쿨타임이 200초도 넘게 더 남아 있는 상황.
즉, 내게는 그와 싸울 무기가 더는 없다는 것이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끝까지 칼을 놓지 않은 점은 높이 평가해 주지, 미뉴엘."
팔팔한 허세뿐이었다.
"내가 잠시 방심했지만,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는다! 고작 내가 그걸로 쓰러질 줄 알았느냐!?"
물론 칼을 놓을 새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손가락으로 칼끝을 때리자마자 총알처럼 순식간에 저 먼 곳까지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냥 누워 있거라."
"왜? 내가 또 똑같은 것에 당할 줄 아느냐?"
"그 이상으로 선을 넘는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허세면 미뉴엘도 조금은 물러설 줄 알았는데, 놈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바닥에 퉤 뱉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죽여 봐라. 넌 방금 전 그 일격으로 날 죽였어야 했다. 두 번 다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까."
미뉴엘의 말대로 그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러나 아슬란의 허세가 그런 걸 따지겠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끝까지 혓바닥을 놀리다 죽을 놈이다.
"어리석어 깨닫지를 못하는구나, 미뉴엘. 네가 방심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과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 목을 베고 그 몸을 쪼갤 수 있다. 넌, 네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죽을 것이다."
"이게 끝까지 개소리를······!"
"그럼 어디 그 칼을 들어 보거라. 내가 장담하지. 그 칼이 네 목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것이 너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
끝까지 당당한 헛소리였다.
뻔뻔하고 기가 차는 개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금방 망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허세였다.
"칼을 들어라, 미뉴엘."
하지만 우습게도,
"······크윽."
미뉴엘은 끝끝내 검을 들지 못했다.
저 광견이라 불리는 미뉴엘이, 무려 대륙 다섯 번째 소드마스터라는 기사가 아슬란의 허세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게 먹힌다고?'
기뻐하긴 이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화약고에 불을 질러 버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슬란의 허세라는 화약고 말이다.
"그래도 네가 재롱을 부린다면 귀엽게 봐주려고 했으나, 그것도 못 하겠군. 한심한 놈."
이놈의 정신 나간 허세가 기어코 가까스로 진정이 된 미뉴엘의 코털을 건드리고 말았다.
"아슬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뉴엘이 이를 바득 갈았다.
"감히 네놈 따위가 나를······!"
활화산처럼 폭발해 버린 미뉴엘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 무시무시한 투기는 내 피부를 따갑게 만들 정도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오냐. 네가 원하는 대로 검을 들어 주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여기서 죽이겠다, 아슬란!"
그런 미뉴엘이 칼을 들어 강한 기운을 발산하려는 찰나.
"거기까지 하거라, 미뉴엘."
묵직한 음성이 회장 안을 갈랐다.
아무리 미친개라도 위아래는 구분할 줄 아는 법.
"주, 주군. 전 아직 괜찮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아슬란 저놈의 목을······."
"미뉴엘."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카르만의 음성에 몸을 떨었다.
"검을 잃은 기사가 어찌 싸운다는 것이냐?"
"······예?"
검?
미뉴엘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끝에 나 있는 균열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쩌쩍-!
점점 퍼져나가,
콰직-!
마침내 검 전체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
미뉴엘은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린 채, 바닥에 흩뿌려진 검 조각들을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거, 검이 부러지다니!"
"저, 저런······!"
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기겁하며 웅성거렸다.
거기에 대고 카르만이 못을 박았다.
"오늘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기거라. 아슬란이 손속의 정을 두지 않았다면 검이 아닌 네 몸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미뉴엘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망연자실한 그의 얼굴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이제 저놈이 날뛸 일은 없겠지?
"아슬란."
하지만 한 놈이 가면 다른 놈이 오기 마련.
카르만은 지그시 고개를 들어 내게 말했다.
"이 정도 했으면 그대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 준 거 같은데. 이제 그만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떤가."
나 역시 그러고 싶지만, 아슬란의 허세는 아직 식지 않았다.
그 울컥 하는 뜨거움을 여전히 유지한 채 나는 감히 카르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역량이라-."
이 대륙에 있는 온갖 괴물들을 모아 놓은 검의 원탁 회의에서, 그것도 저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카르만 앞에서 나는,
"너흰 아직 내 힘의 일부분도 보지 못했다."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1초가 내게는 1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병적인 허세와 심취는 저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저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즐겼다.
나 역시 그러한 감정에 동화되어 저들의 경외와 두려움 섞인 눈동자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겠다."
나는 회장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뚜벅- 뚜벅-
회장 안은 오직 내가 바닥을 밟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제발 아무도 잡지 마라.
제발.
그렇게 입구까지 몇 걸음 남지 않았을 때.
"정말로 가려는 건가?"
카르만이 나를 붙잡았다.
서서히 가라 앉는 것 같았던 허세가 다시 요동쳤다.
"그래. 잠시나마 너희들과 뭔가를 나눌 수 있다고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네가 뭐라고 감히 그따위 말을 하는 거지?"
그의 음성에 화가 깃들어 있었다.
"음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며 뒤에서 관망만 하던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
그가 내뿜는 위압감이 몸을 짓눌렀다.
내 숨통을 조이고, 목구멍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대륙 최강자의 힘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희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그런 그조차 내겐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그리고 내가 무얼 위해 이제서야 검을 들었는지."
난 카르만과 회중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너흰 알지 못 한다."
마지막 허세를 날렸다.
"숲을 바라보지 못 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너희들이 무얼 알겠느냐?"
그러고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회장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뒤에서 소리쳤다.
"이럴 거면 대체 여긴 왜 온 것이오?"
그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대답했다.
"이 회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
"이것으로 만족을 했으면 좋겠군."
그 대답을 끝으로 회장 입구가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 * *
"허-."
"진짜 가버렸잖아?"
아슬란이 회장에 던져 주고 간 충격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 준 그 엄청난 힘은 저 미친개라 불리는 미뉴엘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 역시도 충격이 컸는지, 조각난 검 앞에서 일어나지를 못 하고 있었다.
"쯧. 아주 자기 마음대로군."
카르만은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카르팰이 말했다.
"크게 혼쭐을 내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려고 했지. 그 건방진 혓바닥을 놀리지 못 하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아슬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끝까지 꺾이질 않더군."
"그 말씀은 능력을 사용하셨다는 겁니까?"
카르만은 아무 대답 없이 잔을 들었다.
침묵은 곧 긍정.
그의 반응에 카르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르만의 위압을 버텨냈다는 건가?'
카르만이 아직도 굳건하게 첫 번째 소드마스터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건 그가 가진 능력 때문이었다.
위압.
드래곤의 피어처럼 상대방의 정신에 강한 공포를 심어 주고 나아가 육체까지 짓누르는 능력이다.
카르만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의 위압은 검조차 들 수 없게 상대방을 굴복시킨다.
카르팰도 예전에 한번 당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이 가진 파괴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슬란 그놈은 대체······.'
카르만을 눈을 보고도 저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대륙에 몇이나 될까. 이 회장에 모인 사람 중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아슬란. 내가 너무 그를 과소평가했군."
"예.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예전에 카르만님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오르더군요."
카르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카르팰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아아. 물론, 아슬란이 당신과 동일 선상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슬란도 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지 않았습니까?"
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인 계속 아슬란 얘기만 하고 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쭉 아슬란에 대한 것만 입방아에 오를 것이다.
아무리 충격적인 안건이 회의 중에 나와도 이들은 끝까지 아슬란 얘기만 하고, 아슬란 얘기로 마무리를 지을 것이다.
그만큼 아슬란이 남기고 간 강렬한 인상은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르만님께서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슬란 그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그가 검을 들었는지, 그런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뒷전에만 물러나 있었는지.
그랬던 그가 왜 이제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날이 갈수록 물음표만 가득 남기는 사내였다.
"이래서야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겠군."
도저히 회의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카르만은 손을 들어 말했다.
"오늘의 원탁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소. 추후 다시 일정을 공지할 것이니 그때······."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콰직-! 콰콱-!
원탁이 큰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쿵-!
이윽고 원탁은 몇 갈래로 나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
"워, 원탁이 부서졌어?"
"200년을 지켜온 원탁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검의 원탁.
200년을 지켜온 평화의 상징.
회장 안에서 싸움이 일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소드마스터 몇 명의 목숨이 날아갈 정도의 큰 싸움이 일어났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도 원탁은 항상 멀쩡했었다.
그런데 그 원탁이 무너졌다.
"······."
카르만도 멍하니 무너진 원탁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것 때문인가.
아슬란이 손가락 튕겨 미뉴엘을 날려 버렸을 때 말이다.
그때 일어난 파동이 원탁을 찌그러뜨리더니, 기어코 200년 동안 이어온 신성한 원탁을 부서뜨렸다.
그래. 직접 힘을 가하지 않았으면서 고작 손가락 하나로 그동안 수많은 역경을 버텨낸 원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지, 아슬란.
"으하하하!"
그는 곧 참지 못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 카르만님?"
카르만은 한참을 웃다 고개를 저었다.
"이거 엄청난 거물이 들어왔군. 앞으로가 재미 있겠어."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슬란······."
카르만은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대륙 최강자가 된 이후로 느껴보지 못한 이 감정.
처음으로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1화
1초만 소드마스터 21화
'땡 잡았다.'
나는 퀘스트 완료창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저들에게 말한 어떤 이의 부탁.
그게 누구겠는가.
바로 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퀘스트다.
이놈만 아니었어도 여기 올 일도 없었거니와, 이런 심장 떨리는 일을 경험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제 아무도 안 붙잡겠지?'
카르만이나, 미뉴엘이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빡쳐서 쫓아오기 전에 얼른 여기서 빠져 나가고 싶었다.
퀘스트 보상도 받았겠다, 더는 여기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오. 제발 좀 빨리 걸어라, 새끼야.'
곳곳에 깔린 경비병들이 지켜보고 있는 통에 아슬란의 허세가 여전히 몸에 가득 남아 있는 터라 내 마음대로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한 걸음을 걸어도 품격 있게.
덕분에 회의장에서 나온지 꽤 됐는데도 여전히 숙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모델도 이렇게까진 안 걷겠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누군가의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나한테 협박을 받았던 대마법사 켈린이었다.
회의가 벌써 끝났나?
아마 끝나마자 여기로 부리나케 달려온 듯싶었다.
[켈린]
무력: 45
지력: 87
마력: 93
"······."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시면 내 몸이 숯덩이가 되도 이상할 게 없는 스텟이었다.
당연히 머리부터 박고 아깐 죄송했다고 비는 것이 순서였지만,
"무슨 일이지?"
헬파이어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놈의 허세가 고개를 숙일 일은 절대 없다.
거기다 눈에도 힘을 빡줘서 상대를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하. 누, 눈매에서부터 그 용맹함이 드러나시는군요."
"용건만 말해라."
"그······ 아까 회의장에서 하셨던 말씀 있지 않습니까."
"내 수하들의 가족 말인가?"
"예."
"난 이미 내 뜻을 다 전했을 텐데?"
켈린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 저도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슬란님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말은?"
"말씀하신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할라즈 왕국은 아슬란님과 절대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절대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라.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여기까지 쫓아와서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아까 일이 효과가 있긴 했나 보네.'
광견 미뉴엘이 그렇게 깨진 것을 보고 아마 많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이놈도 내가 사실은 허세만 부릴 줄 아는 텅 빈 강정이라는 걸 알면 가만 놔두지 않겠지?
"나 아슬란은 할라즈 왕국과 평화를 약속한다."
"정말이십니까?"
"내 이름을 건 약속이다. 결코 가볍지 않다."
"감사합니다, 아슬라님."
"조속히 가족들을 보내라. 그럼 우리가 더는 얼굴 붉히며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켈린은 연신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떠나갔다.
대마법사란 족속은 자존심이 무척 강하기에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도 더더욱 허리를 숙이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저 켈린이 내게 저렇게까지 공손하게 나오는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기사단장님."
켈린이 떠나가고 나서 아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 아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들거라, 아론."
"······."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오히려 조금 늦어진 거 같아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기억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아론.
이제 넌 완전히 코 꿰인 거다.
"아론. 너는 나의 검이다."
"······!"
"대기사단장이라는 자리에 오르면 기사는 함부로 검을 뽑지 않는다. 그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네가 날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나를 대신해,
"용맹하게 돌진해 적군과 싸우고,"
내 퀘스트 달성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그리고
"오직 왕국의 평안과 백성들을 위해."
전쟁터에서도, 밖에서도 오직 나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라, 아론."
그러자 아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론은 현재 내가 가진 최고의 무력 캐릭터다.
퀘스트를 위해, 혹은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그는 크게 쓰일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당분간 그가 날 배신할 일은 없어 보였다.
"돌아가겠다."
퀘스트도 끝나고 골드도 벌었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나의 집, 일라이 왕국으로.
* * *
"역시 아슬란 그자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이스마엘 제사장은 오늘 아슬란이 보여 준 행동으로 확신했다.
특히 그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면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절대 꺼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의외로군. 다른 곳도 아니고 최약체로 평가받는 일라이 왕국에서, 그것도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아슬란이 악마와 싸우고자 검을 들다니."
하지만 이스마엘의 말에 대꾸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허공에 흩뿌려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무안하여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하리엘?"
"예? 아, 예."
아까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것만 같은 하리엘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제사장님."
"하긴. 너도 충격이었겠지. 200년을 지켜온 검의 원탁이 그리 허무하게 깨져 버렸으니 말이다. 대체 아슬란 그자의 힘이 얼마나 강하기에 고작 파공음만으로 원탁이 깨질 수 있단 말이냐?"
하리엘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토록 강대한 힘을 가진 자가, 무려 소드마스터를 손가락 하나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자가 하리엘의 호위를 약속 받고 이곳에 왔었다.
사막지대의 몬스터들이 무서워서?
아니. 그가 작정하고 검을 들었다면 사막을 몇 번이고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거기다······.
'이 회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이 뇌리에 박혀 잊혀지질 않는다.
어떤 이의 부탁이라는 건 설마······ 나?
'진짜 나 때문에?'
대체 왜?
설마 아직도 날······ 좋아하나?
10년 전이랑 똑같이?
아, 아니겠지?
"······."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지, 시시각각 바뀌는 하리엘의 표정을 이스마엘은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뭔가 달콤한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달빛 같은 미소가 걸렸다.
* * *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나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으레 RPG 게임이라는 건 나태함과 어울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고, 할 게 없으면 찾아다녀야 했다.
그래야 스펙업을 통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씨발. 근데 난 다른 이유 때문이잖아."
하지만 나는 생존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슬슬 히든 아이템 같은 것도 찾을 때가 된 거 같은데."
문제는 그 히든 아이템이라는 것들이 일라이 왕국에 모여 있지 않고 대륙 곳곳에 뿌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히든.
숨겨진 아이템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찾기 쉽고 스펙업에도 무난한 건 역시······."
보석 종류겠지?
몸을 치장하기 위해 끼는 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검, 혹은 견갑이나 장갑 등에 장착하는 보석을 뜻한다.
이걸 게임에서는 마법 보석이라 부르는데, 아이템을 모아 제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숨겨진 마법 보석을 찾을 수도 있다.
"제작하는 건 복잡하니까 패스."
우리 왕국에 대마법사가 하나 있었으면 그놈을 데려다가 마구 부려 먹으며 써먹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기 왕국에는 쓸만한 마법사가 없었다.
"그럼 찾아 다녀야 한다는 거네."
마법 보석은 색깔별로 구분이 가능하다.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등등.
다양한 색깔의 보석이 존재하며, 그 보석마다 갖는 특징도 다르다.
스킬의 데미지를 올려 줄 수도 있고, 장비의 방어구를 높여 줄 수도 있으며, 특별한 능력을 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나한테 중요한 건······."
특별한 능력을 주는 화이트 마법 보석.
엄청난 S급 능력을 주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한 단계 위라는 황금 보석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만, 그건 지금 구하기가 불가능하니 패스.
보석이라는 건 결국 보조 역할을 하는 장비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옵션은 한계가 있다.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그러므로 모을 수 있는 보석은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게 좋다.
"가만 보자."
나는 지도를 펼쳐 놓고 일라이 왕국 주변을 살펴보았다.
게임으로만 보던 맵을 이렇게 직접 펼쳐서 보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지금 당장 위협이 될 만한 왕국은 없는 거 같고."
할라즈 왕국은 이미 꼬리를 내렸으며, 할라즈 왕국 옆에 있는 샤나 왕국도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
거기다······.
"여긴 지금 한창 시끄러울 때인가?"
오메르 왕국.
이 왕국에서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두 명이 있다.
쫓겨난 왕자 엘버스테인과 소드마스터 루시안.
"지금은 어떻게 됐으려나?"
기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면 오메르 왕국은 형제들끼리 내전이 일어난다.
엘버스테인은 막내였지만, 그 능력이 출중하다는 이유로 왕이 죽으면서 그에게 왕좌를 물려 준다. 하지만 그걸 가만 두고 볼 리 없는 다른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 내기에 이른다.
하필이면 소드마스터 루시안이 첫째 왕자 편을 드는 바람에 엘버스테인은 결국 도망치게 되고 떠돌이 신세가 되는데······.
"거기서 엘버스테인을 만나면 퀘스트가 열렸었지?"
퀘스트를 받는 건 자유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엘버스테인을 도와 그를 왕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그를 죽여서 보상금을 얻을 것이냐.
추후 게임 플레이를 위해서라면 엘버스테인을 도와 왕으로 만드는 것이 이득이지만,
"나는 보통 그냥 죽여서 보상금 챙겼는데."
딱히 놈을 도와 왕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냥 오메르 왕국에서 건 두둑한 보상금을 받아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아론 정도면 엘버스테인 쯤은 일격에 죽일 수 있지 않나?"
엘버스테인은 성장형 캐릭터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성장력을 가진 재능충 캐릭터라 지금 스텟은 비록 평범해 보여도 조금만 놔둬도 알아서 크게 성장할 것이며, 훗날 그는 왕의 신분으로 소드마스터가 되어 그 이름을 펼친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나중에 써먹으려고 장기 투자 하듯 엘버스테인을 돕는 것이었다.
"근데 그걸 언제 키워 먹어."
그러니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예!"
나는 안으로 들어온 기사에게 명령했다.
"오메르 왕국의 최근 상황이 어떤지 알아야겠다."
"정보국에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신속하게 알아오도록."
"명!"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위대한 분이시여.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기사가 건네는 양피지를 받아 그곳에 적힌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오메르 왕국에서 첫째 왕자 우미르가 루시안을 필두로 반란을 일으킴. 즉위식을 앞두고 있던 엘버스테인은 현재 실종 상태.
-오메르 왕국은 엘버스테인의 목에 큰 현상금을 걸음.
내 예상대로 오메르 왕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현재 엘버스테인은 사라진 상태.
게임 플레이를 했을 때 수없이 많이 봤던 상황이다.
그리고 난 고인물답게 엘버스테인이 어디쯤에 숨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잘 알았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습니까?"
"아론을 불러라."
"예!"
그렇다면 이제 행선지는 어느 정도 결정이 된 건가.
그때 할라즈 왕국이 쪼잔하게 값을 안 줘서 못 얻었던 아론에 대한 목숨값을 엘버스테인으로 대신 받아야겠다.
일단,
"마법 보석부터 찾고!"
22화
1초만 소드마스터 22화
"대기사단장님께서 오메르 왕국에 대한 정보를?"
"예. 군사님."
"허어-."
오메르 왕국이라.
할라즈처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왕국이다.
그런데 아슬란이 갑자기 그곳의 정보를 찾는다?
'설마 할라즈 왕국 다음은 오메르인가?'
검의 원탁 회의에서 아슬란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철쇄의 기사라 불리는 요리스의 어깨를 맨손으로 부쉈으며, 다섯 번째 소드마스터라는 미뉴엘을 고작 손가락 하나로 굴복시켰다.
그 일이 있은 뒤, 온 대륙에 소문이 퍼지면서 아슬란이 사실은 카르만에 버금가는 강자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 중이었다.
'그 일을 당했는데도 보복이 없는 것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사건들이었다.
타 왕국의 돌격대장을 그 지경으로 만들고 소드마스터의 명예에 흠집을 냈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칼을 들고 싸우는 철 없는 사내놈들이 이걸 그냥 넘어갔다는 건,
'정말 카르만과 우리 아슬란님이 비슷한 위치라고 보는 건가?!'
순간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충격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 괴물 카르만과 아슬란이 동급이라······.
그거 하나만으로 일라이 왕국의 격이 얼마나 높아지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대기사단장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예. 기사단을 이끌고 왕궁 밖을 나서셨습니다."
"음? 무슨 일로?"
"성 안 민심을 살피기 위해 나가신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허허. 또 말이냐?"
호레스는 절로 푸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슬란. 정말 바뀌어도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거의 매일 밖으로 나가 민생을 살피며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
한때 일라이 왕국으로 파국으로 치닫게 하던 악마 아슬란은 어디 간 것인지.
이제 남은 건 오직 존경과 칭송만 받고 있는 성인군자, 아슬란이었다.
"일라이 왕국이 과연 어디까지 변화할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그는 어떤 마음으로 백성들을 대하고 있을까?
* * *
'하. 시발. 보상 한번 더럽게 짜네.'
도시에 있는 백성들에게서 퀘스트 10개를 받아 클리어 하면 1골드.
처음에는 이것도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퀘스트 한번에 10골드를 팍파 벌어 들이고 나니 왠지 엄청 적어 보였다.
'이래서 헝그리 정신이 중요한 건데.'
나도 슬슬 배가 부른 건가, 싶다가도.
"위대한 분이시여. 집에 벌레가 가득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딴 퀘스트나 받고 있으니 현타가 올 수밖에 없다.
그런 건 벌레 퇴치 전문 업체를 부르면 되는 거 아닌가.
'참자. 어디 성으로 쳐들어가서 성주의 모가지를 따오라는 퀘스트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거기다 나는 궂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저 불쌍한 노인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거라."
"예."
그냥 부하들을 시켜 놓으면 알아서 퀘스트 클리어가 되고 보상이 들어온다.
그렇게 바득바득 일을 하며 모은 현재 골드.
[32골드]
쩝.
갑자기 또 현타 오려고 하네.
하지만 18골드를 모으면 상점을 오픈할 수 있으니, 꾹 참자.
어차피 RPG라는 게임이 결국 노가다 아니던가.
"위대한 분이시여. 항상 저희를 굽어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 작은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건 이렇게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 저기서 선물꾸러미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청탁 목적이 아니라 고마워서 주겠다는 선물을 왜 거절하겠는가.
"흠. 귀하게 쓰겠다."
"감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이것이 다 민심과 평판, 그리고 아슬란의 특성 효과를 보는 것이었다.
물론, 쓸만해 보이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다 내 주머니를 두둑이 만들어 주는 일이니, 난 마다하지 않고 전부 받았다.
"이제 가겠다."
"또 오세요~!"
"항상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100명 정도 되는 기사단을 이끌고 성 밖을 나왔다.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히 내 안전이 확보되었다.
거기다 내 옆에는 아론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지 않던가.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투르 산맥이다. 길이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할 터. 속력을 높이겠다."
"예!"
그래도 이 극악 난이도를 무시할 수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산맥에 숨겨진 아이템을 찾은 뒤에는 들를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 아론 밥값하게 해줘야지.'
할라즈 왕국이 떼어 먹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엘버스테인을 붙잡아 오메르 왕국에 넘겨줄 참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원을 끌어모으면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진다.
현실이나 게임이나 일단 돈 많은 게 무조건 최고였다.
푸르~ 푸르르~
이놈의 말 새끼가 주인 기분 좋은 건 알아가지고 나를 대신해 콧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우린 빠르게 행군하여 투르 산맥에 도착했다.
가까운 곳이라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아마 여기 부근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리 내가 고인물이라고 해도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던 지형을 실제 눈으로 보고 찾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마법 보석들은 동굴에 짱 박혀 있는데.'
그래서 나는 기사들을 시켜 주변에 동굴을 찾게 했다.
과연 인원이 많으니 찾는 것도 빠르다.
얼마 안 있어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발견한 동굴이 좀 이상했다.
'뭐지? 원래 입구가 이렇게 막혀 있었나?'
동굴 입구에 왠 큰 바위가 하나가 입구를 떡하니 막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치워라."
"예."
기사들이 나서서 바위를 치우면 그만이다.
"읏!"
"큭!"
그런데 수십의 기사들이 나서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예 그들은 바위를 부수고자 칼을 들고 힘껏 내려 치기도 했지만,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슬슬 뭔가 쎄했다.
"아론."
"예."
"네가 저 바위를 갈라 보거라."
"알겠습니다."
해결사 아론이 나서서 부러진 미스릴 검을 들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강이 바위를 강하게 내려 쳤지만,
"······."
여전히 바위는 멀쩡했다.
몇 번을 내려쳐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거 설마······.'
또 난이도 때문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보석 하나 파밍하는 곳에서 이런 바위가 입구를 틀어 막고 있다고?
아론이 저렇게까지 쳤는데도 부서지지 않는 것을 보면 보통 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 개발자놈들.'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냐.
스르릉-.
하지만 내게는 찰나에 불과하나 최강이라는 괴력 스킬이 있지 않던가.
네놈들이 끝까지 막겠다면 나도 끝까지 뚫어주마.
난 검을 들어 바위의 정중앙에 가져다댔다.
그런 뒤,
콰아앙-!!
있는 힘껏 바위를 때렸다. 그러자,
콰직-!! 콰콰콱-!!
태산처럼 버티던 바위가 산산조각 나면서 부서졌다.
"와아-!"
"과연 엄청난 힘!"
이 정도로 뭘.
코를 쓱 매만지고 싶었지만, 이놈의 허세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럼 이제 파밍을 해볼까?'
라고 즐겁게 발걸음을 앞으로 떼려는 순간.
콰콰콱-!!
"어어?"
"도, 동굴이······!"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찰나의 괴력에 의해 부서진 바위는 그 위까지 균열을 퍼뜨려 아예 동굴과 그 위의 절벽까지 무너뜨리고 있었다.
"피, 피해!"
"무너진다!!"
콰콰쾅-!!
그렇게 동굴이 무너져 내렸고, 그 동굴과 연결된 산맥 역시 균열이 일어나 산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무너기로 쌓인 돌들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어딘가에 보석이 있을 터.
하지만 이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면 보석이 멀쩡할 리 없었다.
'이렇게 보석 하나가 날아가는구나.'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애써 기사단까지 끌고 와서 그깟 보석 하나 얻겠다고 이 고생을 했는데.
입구를 이상한 바위로 막지를 않나, 막상 부수니까 다 무너지지 않나.
'그냥 처음부터 주기 싫다고 해라.'
도대체 이놈의 게임은 나를 얼마나 굴려 먹으려는 것인지.
이런 건 그냥 하나쯤 줘도 되지 않나?
'아니지. 기사단도 있으니까 여기 잔해를 다 치우게 해서 보석을 찾는 건······.'
하지만 저 높은 돌무더기를 하루 아침에 다 치울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최소 며칠은 걸릴 작업이 될 텐데, 막상 일을 끝내도 보석이 망가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포기해야 하는 건가?'
그래. 보석이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앞으로 매번 아이템을 얻으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태클을 걸어 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일단 철수를······.'
바로 그때였다.
"저 위에 뭔가가 있습니다."
아론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무더기 꼭대기를 가리켰다.
뭐가 있다는 거야?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가져와라."
난 못 올라가.
"예."
아론은 군말 없이 번쩍 날아올라 빠른 속도로 꼭대기 위에 올라갔다.
그런 뒤 그가 발견했다는 것을 들고 그대로 바닥에 낙하했다.
쿵-!
저 높이면 발이 부러질 법도 한데, 아론은 아주 멀쩡하게 걸어와 내 몸통 만한 바위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황금 보석?!'
무려 유니크 등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미친.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유니크 등급의 황금 보석은 구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화이트 보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는 황금 보석은 상당히 유용한 능력을 옵션으로 준다. 그렇기에 구하기도 까다롭고 어려우며, 제작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이게 진짜 히든 아이템이었나?'
여긴 화이트 보석이 있는 동굴.
하지만 사실 화이트 보석은 맥거핀이었고, 진짜 히든 아이템은 이 황금 보석이었다면? 그것도 여기 동굴을 전부 무너뜨려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진짜 미친놈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누가 여기 동굴과 산맥을 다 뒤집어 엎으려고 하겠는가.
누구도 그런 시도를 했던 적이 없기에 황금 보석이 여기 숨어 있다는 정보도 없었던 것이다.
'이걸 잘 꺼내야 하는데.'
나는 아론에게 말했다.
"아론. 여기 안에 있는 보석을 꺼낼 수 있느냐?"
"예."
자칫 검을 잘못 휘두르면 보석까지 상해서 못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검을 여러 번 휘둘렀다.
그의 정교하고 빠른 쾌검에 바위는 횟감처럼 투둑투둑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 보석이 튀어 나오자 아론은 그것을 검신으로 내려 받았다.
"······."
무슨 서커스 쇼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게 재능러의 검술인 건가.
속이 쓰리면서 부러웠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아론이 준 황금 보석을 건네 받았다.
영롱한 빛이 아주 요염하게 유혹을 하는 느낌이다.
'내가 그냥 플레이어였으면 별 감정 못 느꼈겠지.'
여기에 이런 히든 아이템이 있더라! 라고 커뮤니티에 글을 쓰고 잊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의 몸을 하고 나니, 이게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무명의 황금 보석]
-아직 개방되지 않은 황금 보석이다.
-개방 이후 보석 효과가 자동으로 부여된다.
심장이 쿵쾅 뛰는 것만 같았다.
끽해봐야 화이트 보석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런 횡재를.
보석을 개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여기서 바로 개방시킬 수가 있다.
문제는,
'제발 이건 난이도 타지 않게 해주세요.'
능력 부여가 랜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고 해도 랜덤으로 능력이 부여되기 때문에 어떤 능력을 얻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진짜 빛살 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정말 대박이 터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보석을 개방시켰다.
그러자,
[보석의 힘이 개방됩니다.]
범상치 않은 황금빛이 눈이 멀 것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