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1초만 소드마스터 23화
심상치 않은 황금빛.
다년간 단련된 고인물의 직감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대박 옵션이 뜬 게 분명하다!
'그래. 이제 나도 꽃길 걸을 때가 됐지.'
휘리릭 잭팟 머신처럼 돌아가는 옵션창에 마른침을 삼켰다.
색깔만 요란하고 사실은 별 것도 아닌 게 나오는 거 아니야?
나는 속으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아이고. 제발 좋은 거 뜨게 해 주세요.
착하게 살겠습니다.
이윽고,
[기검사]
보석에 부여된 옵션이 나타났다.
'기검사?!'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르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미친. 기검사면 1티어 옵션이잖아?!'
[기검사]
-기검사 효과를 부여합니다.
-검에 깃든 보석의 힘이 전방 15m까지 날아갑니다.
-한번 부여된 효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마법사는 마력을 소모해 마법을 쓰는 것처럼, 기사 역시 기력, 혹은 오러라 불리는 것을 소모해 스킬을 쓴다.
그중 검에 기를 불어 넣어 전방에 발사하는 검기나 검강 같은 종류는 그 힘에 따라 기력 소모가 천차만별이며, 무한정으로 쓸 수 가 없다.
하지만 이 기검사 효과는 팔을 휘두를 힘만 있으면 무한정으로 검기를 발산시켜 주는 효과였다.
기력 소모를 거의 하지 않고 검기나 검강을 계속 쏠 수 있다?
플레이어에게는 엄청난 옵션이었다.
'이게 여기서 뜨네. 나 플레이 할 때는 거의 뜨지도 않던 놈이.'
난이도에 따라 스크롤이 있으면 보석 효과를 바꿀 수 있다.
한때 나도 이 옵션을 얻으려고 얼마나 가챠를 돌렸던가.
점점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보석 효과 가챠도 횟수가 줄어드는데, 극악 난이도라서 그런지 효과 변환 가능한 횟수가 0 이었다.
그런데 고작 1트 만에 1티어 옵션이 나오다니.
'행운 특성 효과를 본 것일 수도 있겠네.'
대체 아슬란에게 왜 붙어 있는지 모르겠는 '행운' 특성.
개발자가 이 똥캐를 만들면서 죄책감이라도 느꼈나?
거기다 행운 특성은 정확히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쓰읍. 그런데 이거 아슬란한테 쓸모가 있나.'
1티어 옵션을 얻은 건 좋지만, 문제는 파일럿이었다.
아슬란이라는 똥캐가 검기를 무한정 쓸 줄 안다고 해도 그래 봐야 무력 50따리다.
그런 놈이 날리는 검기를 날려봤자 벌레 물리는 게 더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찰나의 괴력을 쓴다면?'
찰나의 괴력은 그 유한을 일격에 죽였고, 무려 미스릴을 진흙처럼 바스라뜨렸으며, 미뉴엘을 손가락 하나로 튕겨 날려 보냈다.
그런 무지막지한 스킬에 보석 효과를 발동시킨다면······?
'그 스킬에 보석 효과가 적용되는 거라면 엄청 좋은 거 같은데?'
찰나의 괴력의 단점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에만 힘이 발동된다는 것이고, 쿨타임이 무척 길다는 점, 그리고 상대가 순순히 맞아줘야 한다는 가장 큰 단점이 있었다.
즉, 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기검사 효과는 엄청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것.
'사거리 15m도 나쁘지 않아.'
사거리 문제는 다른 보석들을 파밍해서 해결하면 된다.
'첫 파밍부터 아주 순조로운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아슬란의 허세가 막아세웠다.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주 근엄한 얼굴을 한 채 보석을 검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보석이 검에 스며 들면서 옵션 효과가 그 안에 깃들었다.
나는 효과가 잘 적용됐나 확인하기 위해 검의 정보를 살펴봤다.
[찬란한 베라크의 보검]
-전설의 대장장이 레바투스가 만든 베라크 가문의 보검입니다.
-대장장이 레바투스의 가호가 깃들어 있습니다.
-검의 내구도가 닳지 않습니다.
-검이 주인의 정신에 감응하여 내구성이 달라집니다.
-기검사 효과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검은 베라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다.
보통 이런 보검에는 특별한 옵션이 하나씩 들어있는데, 특이하게 이 검은 내구도가 닳지 않고 주인의 정신에 감응한다고 되어 있다.
즉, 주인의 정신이 약해지면 검의 내구성도 약해지고, 주인의 정신이 강하면 검의 내구성도 함께 강해진다는 뜻이었다.
'진짜 쓸데없는 옵션이네.'
이 약한 몸 지킬 수 있는 공격 옵션 하나 달아줄 것이지.
내구성을 어따 써먹으라고.
그나마 찰나의 괴력을 쓸 때 검이 부러지지 않는 정도의 쓸모라고 해야 하나.
"대기사단장님. 바, 방금 그 성스러운 빛은 대체······."
성스러운 빛?
보석에 정신이 팔려 있어 기사들의 반응을 지금에서야 보게 되었다.
"그 빛은 분명 신성한 라할의 빛이었어."
"왜 갑자기 대기사단님 몸에 그런 강력하고 성스러운 빛이······!"
이놈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군.
이건 그냥 황금 보석에서 나오는 이펙트일 뿐이다.
라할과는 일절 관계가 없었다.
"대기사단장님. 혹시 라할께서 계시를 내리신 건······."
"아론."
"아, 예."
"호들갑 떨지 말거라."
"······."
다른 건 몰라도 라할이랑 엮여서 좋을 게 없다.
모든 판타지 게임이 그렇듯, 그곳에서 등장하는 신이랑 엮여서 몸만 피곤하지, 잘되는 꼴을 본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런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모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한다."
"예!"
그럼 얻을 건 얻었으니, 이제 현상금을 얻으러 가 볼까?
* * *
오메르 왕국의 다섯 번째 왕자, 엘버스테인.
그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단과 함께 간신히 오메르 왕국을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복형제이자 큰형인 리버테일이 추격대를 보낸 상황.
그로 인해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며 도망만 치고 있는 신세였다.
"왕자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리카르 성주는 왕자님을 지지하지 않습니까. 그가 있는 성에만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다면 다시 힘을 기르실 수 있을 겁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은 맞으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왕궁 안에서는 패배했어도, 왕궁 밖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숙부인 리카르 성주다.
그를 중심으로 힘을 모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왕좌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왕자님?"
그러나 그의 길을 막아 서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왕실 최고 마법사, 페리마라였다.
"페리마라. 그대도 내 목숨을 가지러 왔는가?"
"후후. 저는 이미 우리 왕국의 새로운 국왕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아버지는 형님이 아니라 내게 왕좌를 물려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이 그 뜻을 배반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항상 백색 옷을 입고 있었던 페리마라가 오늘은 새까만 마법사복을 입었다.
거기다 그는 낄낄 음흉한 웃음까지 터트리며 성스럽고 인자해 보였던 왕실 마법사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저는 제 이익을 취했을 뿐.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습니다."
"뭐라?"
"왕자님께서도 부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뒤로 검은 복장의 마법사들이 여럿 나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와, 왕자님. 저걸 보십시오!"
마법사들 아래로 생겨난 검은 마법진.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마력.
저것은 분명,
"흑마법입니다!"
모든 왕국이 금지하는 흑마법을 저들이 쓰고 있었다.
"페리마라. 타락했구나! 절대 손대지 말아야 할 금기를······!"
"후후. 그래서 발전이 없는 겁니다, 왕자님. 힘에 선과 악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마법진 안에서 나오는 건 흉측한 몬스터를 닮은 거인이었다.
그 손에는 두꺼운 철퇴를 들고 있었다.
"우리가 이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쳤는지 아십니까? 드디어 왕자님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었군요."
"사령술까지······! 기어코 네놈이 오메르 왕국을 멸망시키려 하는구나."
"오메르 왕국은 이제 변화할 겁니다. 마법의 힘으로 강대국이 되어 대륙을 정복하겠지요. 아참.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군요. 이 아이를 소환하기 위해 또 누굴 제물로 바쳤는지 아십니까?"
"······?"
"바로 당신의 아버지, 선왕입니다."
"뭐?"
내 아버지 몸을 감히 제물로 바쳤다는 것인가?
거기서 엘버스테인의 눈이 돌아갔다.
"죽여 버리겠다, 페리마라!"
"와, 왕자님!"
"왕자님을 지켜라!"
분노한 엘버스테인이 뛰쳐 나가자 기사단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크워어어-!!"
엘버스테인의 검이 페리마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거인이 휘두르는 철퇴에 땅이 갈라지고 사악한 힘이 퍼져 나가면서 함부로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거기다 페리마라가 지휘하고 있는 기사들도 있어 이미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콰앙-! 콰아앙-!!
"크윽!"
기사단이 엘버스테인을 도와 거인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저 두꺼운 살가죽을 쉬이 뚫을 수가 없었다.
또한 가볍게 휘두르는 철퇴에 기사들의 몸이 짓뭉개져 버리기까지 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페리마라는 입 꼬리를 올리며 왕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길게 끌 것 없다. 어서 놈을 죽여라."
"크오오오-!"
페리마라의 명령에 거인은 말 위에서 떨어진 엘버스테인을 향해 쿵쿵 뛰어갔다.
* * *
'음. 기사단을 좀 더 데려올 걸 그랬나.'
막상 엘버스테인을 잡으러 가려니, 기사단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100명을 채워 오긴 했는데, 그냥 500명 정도 꽉꽉 채워서 데려올 걸 그랬나.
'뭐, 이 정도도 충분하긴 해.'
어차피 놈을 지키는 기사단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터.
이 퀘스트는 질리도록 해왔기 때문에 이 정도도 차고 넘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다 내게는 아론이 있지 않은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오겠지?'
아마 지금쯤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려 리카르 성주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격대를 피해서 가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고 있을 텐데, 그 길목으로 가게 되면 우리 일라이 왕국의 경계선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이미 수십 번을 반복해서 봤던 패턴이기에, 나는 놈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을지 다 꿰고 있었다.
'감히 일국의 왕자가 일라이 왕국의 경계선을 침범했다는 명분으로 붙잡으면 돼.'
놈을 넘기면서 높은 현상금과 오메르 왕국과의 외교적 이득을 얻는 일석이조의 이익까지 얻을 수 있다.
'길목에 가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아론한테 얼른 가서 잡아오라고 시키기만 하면 되니까.'
푸르~ 푸르르~!
그렇게 말의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음?"
전방에 몬스터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뭐, 레벨도 낮은 잡몹들이라 크게 신경쓸 필요 없었다.
스르릉-.
아론은 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칼을 뽑아 들었다.
기사단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콰콱-!
퍼억-!
아론의 섬광 같은 검술에 몬스터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언제 봐도 참 든든한 호위기사면서 속이 쓰렸다.
항상 볼 때마다 저게 내 능력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저놈을 미래의 소드마스터로 잘만 성장시키면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몬스터들을 빠르게 처리한 아론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갑자기 옆에 있는 수풀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쿠웅··· 쿠웅···
얼마 안 있어 옆쪽에서부터 진동이 이는 것을 나도 느꼈다.
점점 그 소리가 커지더니,
콰아앙-!!
"크오오오!!"
굉음과 함께 왠 거인이 튀어 나오며 괴성을 질러댔다.
콰직-!!
갑작스레 수풀을 헤치고 나온 거인이 휘두른 철퇴가 아론을 강타했다.
아론이 칼을 들어 막아내긴 했으나, 그 몸이 저 먼발치까지 쓸려나갔다.
그리고 저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건 이 거인뿐만이 아니었다.
[엘버스테인]
무력: 70
지력: 85
내가 노리던 사냥감, 엘버스테인도 있었다.
'저놈이 왜 여기서 튀어 나와?'
아직 목적지까지는 좀 더 걸리는데.
그 사이 벌써 경계선을 넘었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걸 복잡하게 따지고 있을 새가 없었다.
"크르르르-."
족히 4m는 되어 보이는 키와 거대한 덩치.
발밑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검은 기운과 흉측한 생김새.
그리고 들고 있는 저 무기까지.
'거인 병사?'
악마라고도 불리는 테키나 족속의 몬스터.
거인 병사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크고 압도적인 기세를 내뿜는 거인 병사는 처음이었다.
'이건 또 왜 여기서 튀어 나오는 건데?'
섬뜩한 하울링을 흘리던 거인 병사는 자신의 옆을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내 눈이 놈과 서로 맞부딪혔다.
'이런 미친.'
그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다.
살인에 대한 놈의 엄청난 욕구를 말이다.
"크오오오!!"
놈은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철퇴를 들었다.
저놈이 처음에 노리던 건 엘버스테인이었는데, 갑자기 타깃을 나로 바꾼 것 같았다.
'이건 왜 나한테 지랄이야!'
피해야 한다.
방어력도 약한 몸으로 저 철퇴에 맞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름철 터져 버린 수박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감히."
난 말머리를 돌릴 수가 없었다.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아슬란의 허세가 말머리를 비틀려던 내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더러운 미물 따위가 이 몸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냐?"
허리는 더욱 꼿꼿하게 세워지고, 거인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더욱 강렬해진다.
철퇴의 그림자가 내 몸을 덮고 있어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건방지구나."
손은 고삐가 아닌, 허리춤에 있는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그리고,
"죽어라."
키이이잉-!!
검집에서 뽑힌 칼이 비명을 질렀다.
검에 깃든 찰나의 괴력은 곧 드높이 솟은 푸른 검강이 되어,
콰콰콰콱-!!
순식간에 땅과 거인의 몸을 가르며 지나갔다.
24화
1초만 소드마스터 24화
'여기까지인가.'
엘버스테인은 그리 생각했다.
오직 왕국과 백성들을 생각하는 어진 왕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은 여기서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더러운 미물 따위가 이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냐?"
저 남자를 만니기 전까진 말이다.
"건방지구나."
위용 넘치는 풍채와 중후한 매력을 가진 얼굴.
거기다 상대를 압도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까지.
저 남자는 저 괴물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하찮다는 듯,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가볍게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키이이잉-!!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아난 검강이 그대로 괴물의 몸을 갈라 버렸다.
기사단과 협공을 펼쳤는데도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던 저 괴물을 말이다.
'저, 저게 무슨!'
저렇게 거대한 검강은 생전 처음 본다.
땅을 움푹 갈라 지면을 두 쪽 내 버릴 것만 같은 저 검강을 저리도 가볍게 만들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콰콰콰콱-!!
하지만 놀라고 있을 새가 없었다.
'이런!'
괴물을 갈라 버리고 치닫는 검강은 그대로 엘버스테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렇다고 저걸 막을 수도 없다.
기사단 전체가 달려 들어도 저 검강을 멈추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버지.'
그는 눈을 감으며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깨달으며.
"······."
그런데,
'왜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 거지?'
너무 순식간에 검강이 지나가서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던 건가?
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 검강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던 검강이,
저 하늘마저 가를 것만 같았던 저 검강이,
"와, 왕자님!"
"이럴 수가. 어떻게 검강이 저리······."
엘버스테인 코앞에 멈춰 서 있었다.
왕자를 지키기 위해 달려오던 기사들도 경악 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검강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키이이잉-!!
그 강렬하고 위협적인 검강의 힘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앞으로 더 보내 달라고.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게 놓아 달라고.
하지만,
파앗-!
거짓말처럼 검강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듯이.
"······."
엘버스테인은 전율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저 말 위에서 자신을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게 가능한 경지인 것인가?'
한번 쏘아 보낸 검기를 시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그것을 멈추게 만들며, 거기다 사라지게 만드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방금 전 그것은 그저 그런 검기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본적 없는 위력의 검강.
그것을 저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다루며 엘버스테인을 그대로 반 토막 내 버릴 뻔한 것을 막아세웠다.
도저히 인간의 경지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기행이었다.
다그닥-.
상대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천천히 말을 몰아 엘버스테인에게 다가왔다.
그 서슬 퍼런 눈동자에 엘버스테인은 몸이 경직되어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위압감이었다.
"엘버스테인."
그런데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넌 무단으로 경계선을 침범했다는 걸 알고 있나?"
"그, 그것이······."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돼서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였다.
"대체 뭐가 이리 오래 걸리는 것이냐? 그리고 방금 그 높이 솟아 오른 푸른······ 응?"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페리마라는 하던 말을 멈췄다.
놈은 두쪽 난 괴물과 그 밑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갈라진 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말 위에 있는 저 사내와 눈이 마주쳤을 땐,
"으헉!"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져 엉덩이를 찧기까지 했다.
"다, 당신은 아, 아슬란!?"
아슬란?
설마 그 아슬란을 말하는 건가?
거인 유한을 단칼에 죽이고 원탁 회의에서 카르만과 동등한 힘을 보여줬다는······!?
"죽고 싶은 것이냐? 감히 그 추잡한 입으로 내 이름을 담다니."
엘버스테인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저 페리마라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을.
"아아······."
그는 잠시 뒷걸음질을 치다,
"에잇!"
바닥에 검은 연막을 뿌렸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그러자 아론이 연막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퍼억-! 퍼버벅-!
"크악!"
하지만 안타깝게도 페리마라는 이미 도망친지 오래였고, 검기에 맞은 건 그의 부하들이었다.
이 야비한 놈은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만 도망친 것이었다.
"제가 추격하겠습니다."
"놔두거라. 제 목숨만 챙기는 놈일 뿐이다. 그 말로가 뻔히 보이는구나."
아슬란은 한 마디의 말을 해도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눈치 빠른 페리마라의 부하들은 얼른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슬란과 그의 기사들 숫자는 저들보다 적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소드마스터다.
소드마스터가 무엇인가.
수백의 기사쯤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없애 버릴 수 있는 검의 달인이다.
그걸 알고 있으니, 페리마라도 저리 발 빠르게 도망친 것이리라.
"죽일 가치도 없는 놈들이다. 왕국으로 데려가 전말을 조사할 것이다."
"예, 대기사단장님!"
그런 뒤 아슬란은 그의 밑에 있는 엘버스테인을 내려다 보았다.
용을 닮은 듯한 그 눈동자에 엘버스테인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사람을 닮고 싶다.
나도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 * *
[페리마라]
무력: 50
지력: 80
마력: 88
페리마라.
오메르 왕국 최고의 마법사다.
대마법사급은 아니지만, 저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론이 있어도 과연 상대가 될지 미지수인 강자였다.
하지만 그런 놈이,
'자기가 알아서 도망쳐줬네?'
이러면 나야 고맙지.
거기다 놈이 버리고 간 수하들도 알아서 항복을 해 준 덕분에 유혈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벌써 테키나 족속 몬스터가 보이는 거지?
아직 저게 나오려면 스토리 전개가 어느 정도 되야 하지 않나?
설마 난이도가 극악이라서 평소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 흐름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건가?
'뭐가 어찌 되었든.'
일단 내가 잘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황금보석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사용법도 아직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저 거인병 덕분에 실전으로 감을 익혔다.
그리고 찰나의 괴력을 사용하면 방금 전처럼 그런 무식한 크기의 검강이 나간다는 것도 확인했다.
과연 기검사라는 1티어급 옵션답게 굉장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사거리는 역시 조금 아쉽긴 했다.
만약 사거리까지 길었다면,
'거인병 뒤에 있는 놈도 함께 썰려 나갔겠지.'
오메르 왕국의 막내 왕자, 엘버스테인.
모니터에서 질리게 봤듯이, 정말 왕자님처럼 생긴 외모였다.
하얀 피부에 금발.
전형적인 왕자님 얼굴이었다.
'고놈 참 돈 잘 받게 생겼네.'
입술이 씰룩이고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할라즈에게 받지 못했던 아론 몸값을 여기서 복구시키는구나.
뭐, 내가 생각했던 만남은 아니었지만 항상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지 않던가.
내가 엘버스테인을 잡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엘버스테인을 내려다 보았다.
놈을 잡았으니, 이제 오메르 왕국에 잘 넘겨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엘버스테인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내게 예를 차렸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기사들도 다 같이 뛰어와 내게 무릎을 꿇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너희들 살려 준 거 아니거든.
난 엘버스테인을 오메르 왕국에 넘겨서 받을 게 아주 많단 말이다.
하지만,
"과연 듣던 대로였습니다."
"······?"
"여러 강자들을 만나봤지만, 아슬란님만큼 엄청난 검의 경지를 이룩하신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늘을 가를 것만 같았던 검강을 날리시는 것은 물론, 그걸 의지대로 움직이기까지 하시다니."
갑자기 얘가 왜 이래?
"그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검의 경지를 보는 것 같아 그 상황 속에서도 감격해 심장이 뛰었습니다."
이놈이 아부를 하면 내가 좋게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어림도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고작 그걸 꿈의 경지라고 하는가?"
아슬란의 허세가 그 말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찮은 잡기술일 뿐이다. 경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지. 넌 꿈을 좀 크게 가져야겠군."
오글 거리니까 그만해 미친놈아.
"과연······."
또 시작된 아슬란의 허세에 엘버스테인은 두 눈을 반짝였다.
"아슬란님의 위대한 명성은 소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 검술은 가히 대륙 최강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으며, 백성을 위하는 모습은 마치 라헬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온 듯하다고 말입니다."
엘버스테인 이놈이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입을 털어댔다.
"그래서 항상 당신의 소식을 들으며 흠모해 왔습니다. 훌륭한 국왕이··· 되기 위해 언젠가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잠깐.
이놈이 지금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거야?
"허락하신다면 제가 일라이 왕국으로 잠시 들어가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나는 단칼에 잘라 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놈이 간사하게 입을 털었기 때문일까.
"왕국에서 쫓겨난 왕자가 내게 가르침을 받는다라."
아직 열기가 다 식지 않은 아슬란의 허세가 다시 펄떡 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건방지구나. 기사의 자격도 증명하지 못 한 자가 감히 내게 가르침을 받겠다니."
"······."
그래. 잘한다.
이대로 차갑게 쳐내는 거다.
"하지만-."
그러나 갑자기 뒤에 이어지는 말이 불안해졌다.
"한번 지켜는 보겠다."
뭐?
"그 말씀은······."
"우리 왕국에서 누구도 널 왕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잡일을 하는 일꾼일 뿐. 그걸 견딜 수 있다면 내 곁에 있어도 좋다."
그러자 엘버스테인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것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따라도 좋다."
그리 말한 뒤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 이게 지금 뭐하는 짓거리여, 시방.'
굴러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리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지. 생각을 달리 해보자.
여기서 또 칼부림 하며 싸우다 변수가 발생하느니, 차라리 왕국으로 데려가 모든 무기를 내려 놓게 만들고 감옥에 쳐 넣으면 되지 않은가?
그게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래. 써먹을 곳이 있으면 조금 써먹다가 오메르 왕국에 언제든 넘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방금 전 오메르 왕국의 마법사와 작은 교전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놈을 넘겨 준다고 하면 그 정도는 부드럽게 넘어가 줄 것이다.
'후후후. 역시 난 천재야.'
아슬란 네놈의 허세가 날 이겨 먹은 줄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보여주······.
[왕좌의 길]
-엘버스테인을 도와 그를 오메르 왕국의 왕으로 세우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아무래도 돈 바꿔 먹기는 틀린 것 같았다.
25화
1초만 소드마스터 25화
"왕자님. 이렇게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사들은 아슬란을 따라 일라이 왕국으로 가겠다는 엘버스테인의 결정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도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거라. 우리가 가는 길은 내 숙부이신 리카르 성주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페리마라였지."
"서, 설마 리카르 성주께서 배신을······!?"
"확신하진 못하겠다. 그분도 우릴 돕고 싶으셨겠지만, 일라이 왕국의 경계를 침범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올 순 없었을 테니. 그리고······."
엘버스테인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꼿꼿한 자세로 가장 선두에 서서 가고 있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슬란이라는 인물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어떻게 이걸 놓칠 수 있단 말이냐?"
"최근 아슬란에 대한 정보가 많이 바뀌긴 했습니다만, 결국 그는 적국의 대기사단장이지 않습니까?"
"너는 적국의 왕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줄 수 있느냐? 그것도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는 자의 목숨을 살려 주기까지 하고?"
"······."
기사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이나 다를 바 없는, 거기다 외교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사안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상대방을 붙잡아 타국에 넘긴 뒤 보상금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아슬란은,
"남들과 다르다."
엘버스테인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 중, 아슬란에 필적할 자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궁금하구나. 대체 무엇이 아슬란을 저리도 강하게 만들었는지."
* * *
콰앙-!
"누굴 놓쳤다고?"
페리마라는 역정을 내는 왕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 리카르 성주의 견제를 대비해 그 수많은 제물을 바쳐서 거인병까지 만들어 보냈거늘. 또 무슨 변수가 있단 말이냐?"
"그것이 갑자기 아슬란이 튀어 나오는 바람에······."
"뭐? 아, 아슬란?"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는 오메르 왕국의 왕, 리버테일이었다.
하필이면 아슬란과 부딪혔단 말인가?
"그, 그래서?"
"저희 공들여 소환한 거인병은 아슬란이 날린 검강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엘버스테인도 그자의 손에 들어간 듯합니다."
"이런!"
아슬란 그놈 때문에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쳤다.
씩씩 대는 리버테일에게 누군가 옆에서 진정시키듯 말했다.
"그리 걱정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슬란에게 정식으로 사람을 보내 우리가 내걸었던 현상금을 주고 데려오면 될 일 아닙니까?"
"흠. 생각해 보니 그렇군."
"우리가 함부로 일라이 왕국의 경계선을 넘은 것은 사실이니, 그 점에 대해 사과를 하고 값을 치러 엘버스테인을 데려와 사형을 시키면 됩니다."
사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리버테일은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굳이 그런 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나?"
"그런 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아슬란의 입지가 너무 넓어졌습니다."
"루시안. 자네도 소드마스터이지 않나? 그런데도 아슬란을 두려워 하는 것인가?"
두려워 한다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검의 원탁에서 아슬란의 힘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
"소드마스터를 고작 손가락 하나로 제압하는 자는 드물겠지요. 아마 아슬란이 유일할지도 모릅니다."
그날 검의 원탁에서 보았던 아슬란의 존재감과 그 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성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아슬란의 모습이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미뉴엘을 날려 버리고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카르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그 기개.
기사라면 누구나 흠모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를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흠흠. 그, 그런가? 아슬란이 그 정도라니."
"예. 왕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강합니다. 제가 왜 다음 왕위 자리를 이어 받기로 한 엘버스테인을 배신했겠습니까?"
그렇기에 루시안도 오랜만에 피가 끓고 심장이 뛰었다.
소드마스터 자리에 오르면서 더는 위로 올라갈 곳이 없다고 여긴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에 생겨났다.
"전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그를 몰아낸 겁니다."
그 힘이 비록 모든 대륙에서 금지하는 악마의 힘이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강해지기만 한다면,
모두를 자신의 발아래 꿇리는 절대자가 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강해지고 싶었다.
아슬란 바로 그자처럼.
* * *
왕국으로 돌아온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날을 보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잘한 퀘스트를 깨면서 골드를 수급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바뀐 게 있다면,
"힘이 닿는대로 도움을 드리겠소."
"호호. 이 기사님은 참 얼굴이 잘생기셨네."
"엘버스테인님이라고 하셨죠? 이거 한 잔 드세요."
엘버스테인이 아론처럼 열심히 잡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다하다 이제는 엘버스테인을 데리고 퀘스트 매크로를 돌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외모와 특성 영향 때문인지, 백성들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왕좌의 길]
-엘버스테인을 도와 그를 오메르 왕국의 왕으로 세우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하-. 이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놈을 넘겨 버리고 현상금을 꿀꺽 했을 텐데.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주인공이 받아야 할 퀘스트인데 말이야.'
이 게임의 핵심인 주인공.
플레이어가 없으면 원작대로 게임은 주인공 중심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은 특성을 통해 빠른 성장을 하고 주워진 스토리와 퀘스트를 따라 게임을 클리어해 가는데, 왕좌의 길이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아슬란에게 이 퀘스트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확 감옥에 처넣어서 보상금만 빼 먹을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10골드가 눈에 아른 거렸다.
'엘버스테인을 키워서 써먹는 것도 좋긴 한데······.'
그놈을 키우는 과정이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놈을 왕으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그럼 오메르 왕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주인공으로 플레이 할 땐 그리 어려운 퀘스트가 아니긴 했어.'
죽을 위기에 처한 엘버스테인을 구하고, 리카르 성주와 소드마스터 루시안을 주인공 편으로 끌어들인 뒤 성을 탈환하는 것이 퀘스트의 주 내용이었다.
'결국 루시안을 우리편으로 끌어 들여야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지금 루시안은 리버테일의 편에 서서 엘버스테인을 대적하고 있다.
뭐, 이건 루시안의 마음을 돌리는 퀘스트가 따로 있으니 그걸 이용해 돌리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왜 테키나 족속이 나왔냐는 건데.'
악마의 등장은 꽤나 심각한 일이었다.
놈들이 등장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더 있어야 한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처음 시작하고, 여러 왕국을 정복하고 나서야 악마가 등장하는 스토리가 나와야 하는데, 이건 뭐 숟가락 뜨기도 전에 튀어나온 꼴이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난이도에 관련된 거라면 진짜 골치 아프겠군.'
이 대륙을 구원해 줄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악마가 벌써 출연을 한다면 그건 극악 난이도에 맞는 재앙일 것이다.
'네임드 악마들이 하나 둘 등장해 버리면 그땐 진짜 헬모드가 되는 거지.'
대륙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기 전에 어디 좋은 터 하나 잡고 잘 숨어 있을까?
어차피 그래봤자 악마가 대륙을 휩쓸어 버리면 숨을 곳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방법은,
'주인공을 성장시켜서 대륙의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과연 쉬울까.
이 아슬란의 몸으로?
"이곳 백성들은 웃음이 끊이질 않는군요."
그때 엘버스테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놈은 내 속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제가 오메르 왕국에 있었을 땐 일라이 왕국은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들었습니다. 민심도 굉장히 좋지 못한 편이었고요. 하지만 글로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역시 다르군요."
왜 꼴보기가 싫지.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엘버스테인."
"예."
"누가 감히 내게 말을 걸라고 했지?"
"······!"
그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찰랑 이는 저 금발 머리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버스테인]
무력: 70
지력: 85
기사라는 놈이 지력 빼고는 볼 게 없다고 여길지 모르나, 저 스텟만 보고 엘버스테인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놈에게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특성이 있다.
[성장 촉진]
특정 상황에서 능력이 개방되면 성장이 촉진되면서 스텟이 놀라울 정도로 쭉 오르게 된다. 그 특정 상황이라는 건 주인공을 만나면서 열리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무력 70따리에 불과하지만, 특수 상황을 만족시키게 되면 금방 90을 돌파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는 것.
거기다,
[의리]
한번 우애를 다진 아군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특성이다.
상대가 자기 부모든 자식이든 일단 뒤통수부터 때리고 보는 배신 특성과 완전 정반대였다.
그래서 주인공으로 플레이 할 때 엘버스테인을 잘 사귀어 놓아서 든든한 아군으로 삼는 것이었다.
'골드도 골드지만,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내 아군으로 놔두는 게 이득이겠지?'
저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돌지만, 일단은 참아 보기로 했다.
나중에 정 돈이 필요하면 그때 팔아넘기면 되니까!
"농담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아, 예."
그럼 이놈이 알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나 볼까.
"저번 날 내가 죽인 거인병은 분명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예. 맞습니다."
"오메르 왕국이 언제부터 악마와 결탁하고 있었던 거지?"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럼 네가 아는 게 뭐야.
"저 역시 그날 페리마라가 소환한 그 괴물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엘버스테인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선왕께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길과 힘을 강조하셨습니다. 라할의 뜻에 따라 오직 선과 빛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충성스러웠던 그분의 신하들이 악마의 힘을······!"
그는 크게 분노하며 손바닥에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걱정이 되시겠군요."
그러다 엘버스테인은 화를 삭히며 내게 말했다.
"그들이 테키나 족속과 결탁해 타락한 힘을 가졌다면······ 당신 이름 아래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왕국이 망가질지 모릅니다."
그 말은 제 발로 알아서 나가 주겠다는 건가?
"만약 당신이 명령을 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저희 기사들을 이끌고 이곳에서·나가겠습니다."
어딜 감히 현상금이 자기 발로 도망을 치려고!
내 속에서 고요한 물결처럼 잠잠이 있던 허세가 들끓기 시작했다.
"너는 그들이 두렵나?"
"······예?"
"자신의 힘이 부족해 고작 악마 따위에게 손을 벌리는 그놈들이, 두렵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자 엘버스테인이 대답했다.
"테키나 족속의 힘은 강합니다.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그 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악마의 힘은 한때 대륙을 멸망시킬 뻔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네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격동하는 감정에 심취하며 말을 이었다.
"300년 전 그땐 나 아슬란이 없었다."
"!?"
엘버스테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놀라서 저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허세는 끝을 모르고 달렸다.
"난 오메르 왕국이 두렵지 않다. 그들의 뒤에 있는 악마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나는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엘버스테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이 날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테키나 족속 중에서 네임드급 하나만 잘못 만나도 여기 성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역시 당신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
왠지 엘버스테인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 말씀이 절대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전 알고 있습니다."
허세 맞는데.
"당신의 기개와 그 위상이 존경스럽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을 지킬 수 있는 그 힘 역시 부럽습니다."
그는 주먹 쥔 손을 가슴팍에 올렸다.
"그렇기에 저도 노력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바로 당신처럼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할 겁니다."
"······나 아슬란처럼 된다라."
그런 순진한 엘버스테인을 보며 나는,
"꿈이 크구나."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네가 가진 재능은 나쁘지 않다."
"그 말씀은······."
"어디 따라올 수 있을만큼 따라와 보거라. 지켜보고 있겠다."
엘버스테인은 감격 어린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예!"
귀를 따갑게 하는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농땡이 그만 피우고 가서 일하거라."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백성들을 돕고 있는 무리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엘버스테인]
무력: 75
지력: 85
엘버스테인의 무력 수치가 갑자기 상승해 버렸다.
26화
1초만 소드마스터 26화
'이건 뭔 경우야?'
[엘버스테인]
무력: 80
지력: 85
엘버스테인의 무력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다.
첫 성장이 있은지 일주일 후, 엘버스테인의 무력은 80까지 치솟았다.
대체 이게 어디까지 올라가려는 것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성장 촉진이라는 특성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 특성을 폭발시킬 수 있는 건 오직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는데?
주인공.
엘라 비하크 게임의 스토리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 인물.
그 이름은 바로,
[알렉산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플레이어가 이 주인공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그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을 통해서만 엘버스테인의 특성이 해금되는 거 아니었나?'
대체 뭘 어쨌다고 갑자기 저렇게 무력 수치가 계속 오르는 거지?
'설마 아슬란이 그때 허세 부린 게 효과가 있었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 역시 대발견이었다.
주둥이를 잘 털면 잠겨 있는 특성도 열 수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니까.
'그나저나······.'
나는 오늘도 왕자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예의를 차리는 엘버스테인을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오늘도 근엄한 모습이 무척 멋있습니다."
"······."
얘 집에 안 가냐?
아니. 지금 네 첫째 형이 왕국을 악마들한테 넘기고 있는데, 얼른 리카르 성주한테 뛰어가든가 해서 전쟁을 할 준비를 해야지.
왜 아직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오늘도 도시 안을 순찰하십니까?"
"아니. 그동안 너무 왕국 수도만 챙긴 것 같아 다른 곳에 가보려고 한다."
일라이 왕국은 수도를 포함해 총 3개의 성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번 날 아론 손에 털릴 뻔했던 로난 성이다.
오늘은 그쪽 지역으로 가서 퀘스트를 수급해 골드 벌이를 할 예정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가서 얼굴만 비추어도 민심이 안정되니, 가뜩이나 극악 난이도 때문에 언제 민심이 요동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관리를 해주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안쪽에서부터 분열이 되면 답이 없으니까.'
이런 전략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외부보다 내부에서 터지는 게 더 어지럽다는 것을 말이다.
민심 관리를 잘못해 멀쩡했던 성이 갑자기 반란군의 도시가 되어 고립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이 게임에서 많이 나온다.
그렇기에 아슬란의 특성을 이용할겸 성을 순찰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저도 뒤를 따르겠습니다."
이놈은 아예 여기 눌러 앉을 작정인 건가.
'잠깐. 차라리 이거 잘된 일이지 않나?'
엘버스테인 성장 촉진으로 계속 무력이 늘어난다면 나는 아론보다 더 능력 있는 부하를 곁에 두게 된다.
지금 아론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는데, 여기에 무력 90짜리 캐릭터가 나를 위해 퀘스트 매크로가 되어 준다?
'10골드보다 이게 더 나은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동안 눈앞에 아른거리던 현상금 때문에 아니 곱게 보이던 엘버스테인이 갑자기 대견하게 보였다.
'그래. 무럭무럭 자라라.'
이것이 아빠의 마음일까.
좌청룡 우백호처럼 아론과 엘버스테인이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은 투자 같았다.
"위대한 분이시여.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나를 찾아온 건 호레스였다.
굳이 여기서 말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둘이 할 이야기인 듯싶었다.
우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오메르 왕국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래.
왠지 일주일이 넘도록 안 온다 했다.
"내용은 확인했나?"
"예. 혹시 몰라 흑마법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다행히 그런 건 없었습니다. 안심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아슬란의 허세가 꿈틀거리며 대꾸했다.
"그깟 흑마법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호레스. 내가 그런 조잡한 마법 따위에 당할 거 같나."
"하하.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있으니, 부디 항상 안전을 위해 힘쓰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쯧. 걱정이 많구나. 알아서 하거라."
흑마법에 스치기만 해도 몸이 터져 죽을 놈이 하여튼 허세는.
나는 호레스가 건넨 서신을 펼쳐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오. 현상금을 따블로 준다고?'
예상했던 대로 보상금을 줄 테니 순순히 왕자를 넘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현상금을 2배로 주겠다고 말이다.
이건 게임과 시스템이 똑같은 것 같았다.
상대 왕국이 원하는 사람을 플레이어가 붙잡고 있으면 이렇게 돈을 2배로 올려서 부르기도 한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2배면 충분히 할 만한 장사겠지만,
'지금 한창 성장 중인 녀석을 파는 건 아깝단 말이지.'
수지타산이 안 맞아.
"그냥 보류하거라."
어차피 당장 답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
이런 건 보통 몇 번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값을 올리는 게 제 맛이니까.
그러니까 딱-
'5배, 아니 3배만 현상금이 뻥튀기 되면 그때 넘겨 버리자.'
흐흐흐.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방금 전까진 엘버스테인을 잘 키워서 곁에 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상금이 3배 이상으로 올라가면 그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외부에 알리지 않도록 할까요?"
"그러도록."
괜히 잘못 떠들었다가 엘버스테인이 도망칠 각을 잡아 버리면 곤란하잖아.
거기다 이런 건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진짜 팔아 넘겨야 할 때 잡음 없이 해결할 수가 있다.
"교단에는 이 일을 알리지 않을 작정이십니까? 오메르 왕국은 대륙에서 금지하는 사령술을 썼습니다. 그에 모자라 테키나 족속과 손을 잡았고요. 이는 라할에 대한 반역이며,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무모한 짓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라면, 300년 전 대륙에 있는 모든 족속이 힘을 합쳐 간신히 몰아내 봉인시켜 버린 테키나와 손을 잡은 오메르 왕국을 교단에 신고함이 옳다.
하지만 현상금을 3배로 뻥튀기 해 줄 수 있는 왕국을 신고해서 일을 그르칠 순 없지 않은가.
"호레스."
"예, 위대한 분이시여."
"넌 교단을 믿나?"
"······!?"
거기다 지금 교단을 믿는 건 좋지 못 한 선택이다.
으레 판타지 소설과 게임이 그렇듯 교단이라 불리는 작자들은 무늬만 교단이지, 사실상 양아치 집단이 따로 없었다.
이 게임이라도 다르겠는가.
물론 교단 내에도 정말 악마를 증오하고 그들을 몰아내려 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반면, 타락한 놈들도 있기 마련이다.
테키나 족속이 벌써 튀어 나왔다는 건 분명 교단 안에서도 어둠의 마법에 손을 뻗고 있는 세력이 있음을 뜻한다.
그놈들이 어디까지 세력을 넓혔는지 모르니, 교단을 의지하는 건 위험하다.
'그리고 교단이랑 엮여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지.'
허구한 날 사람 부려 먹기만 하고 말이야.
내가 그놈들 때문에 게임 할 때마다 얼마나 똥개 훈련을 했는데.
그래서 이 게임의 고인물이 됐을 땐 최대한 교단을 피해서 다니기도 했다.
"난 그들을 믿지 않는다."
그냥 그놈들이 싫다.
내가 주인공도 아닌데, 엮여야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테키나 족속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빛의 힘입니다."
저 말도 사실이다.
불이 물에 약하고, 어둠이 빛에 약한 것처럼, 이 게임에도 속성마다 상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테키나는 어둠이고, 교단은 빛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아슬란의 허세가 근엄한 눈동자로 호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정녕 그 어둠을 벨 수 있는 것이 교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빛과 어둠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그것을 베느냐가 중요한 거겠지."
그것을 베는 건 이 게임의 주인공, 알렉산더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 아슬란에게는 빛도, 어둠도 똑같이 베어 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불과하다."
이 허세는 알렉산더가 아닌, 마치 내가 주인공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교단에 의지하지 말거라, 호레스."
"······."
"이곳에는 내가 있지 않느냐?"
호레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도 아슬란의 허세 스택이 쌓여 가고 있었다.
* * *
탁-!
문을 닫고 나온 호레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빛과 어둠을 가리지 않고 벤다라-.'
굉장히 위험천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건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행동 때문일까.
'설마 그 보고가 사실이었나?'
아슬란이 기사단을 데리고 엘버스테인을 데리고 왔을 때, 호레스는 기사들을 통해 한 가지 기이한 보고를 전해 들었다.
'그건 분명 라할의 빛이었습니다!'
'그토록 신성하고 아름다운 빛은 일전에 본적이 없습니다.'
기사들의 증언은 전부 똑같았다.
아슬란이 신성한 빛을 뿜어냈다고 말이다.
그 뒤로 악마와 대치하게 되었으며, 그 악마를 일격에 없애 버렸다고 한다.
'테키나 족속은 단순히 힘이 강하다고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 악마들이 대륙을 멸망시킬 뻔했던 게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빛의 힘으로 그들을 정화 시켜야만 베어낼 수가 있다. 아니면 그런 상성마저도 깨뜨릴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있거나.
후자인 경우가 거의 없으니, 제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기사라고 해도 악마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는 것이었다.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론이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봤지만, 아슬란은 호들갑 떨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악마를 죽일 수 있는 신성한 빛을 가지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아슬란은 이것을 밖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호레스도 구태여 묻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짐을 짊어 계시는구나. 저분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짐을 나눠서라도 짊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 * *
"아슬란. 이 작자가 지금 뭐하자는 거지?"
일라이 왕국에 자존심을 굽히며 친히 서신까지 써서 보냈건만, 일라이 왕국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놈들이 날 우습게 여기는 건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리버테일은 주먹으로 상을 내려쳤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조금 더 기다려 보심이 어떻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리버테일이 언성을 높였다.
"루시안 대기사단장. 그대가 아슬란을 두려워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대륙 소드마스터라는 그대가 적을 두려워해서 쓰겠나!?"
"······그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검의 원탁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루시안은 리버테일 말대로 아슬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힘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럼 대체 언제까지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냐! 저놈이 내 말을 무시하고 있는데! 그것도 일라이 왕국 따위가 말이다!"
리버테일은 그 성정이 잔악한 자다.
선왕을 독살시켜 죽인 것은 물론, 그 아래에 있는 왕자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자신과 한 배를 타고 나온 친동생까지 죽이면서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했다.
"난 엘버스테인을 반드시 죽여야겠다. 그리고 나를 능욕한 아슬란 그자의 목도 원한다. 아니. 일라이 왕국의 멸망을 원한다!"
이미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정한 리버테일이었다.
그의 야망은 일라이 왕국에게 향해 있었다.
"······정 그러하시다면 뜻대로 하셔야겠지요."
그리고 사실 루시안도 피가 끓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새롭게 얻은 이 힘을 얼른 써보고 싶었다.
과연 자신의 힘이 아슬란에게 닿는지, 그 당당하고 꺾이지 않는 그를 과연 굴복시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왕의 자리니, 왕국의 부흥이니, 루시안에게는 상관 없었다.
그저,
'알고 싶다.'
나의 힘이, 나의 의지가,
'너보다 강한지.'
그것을 알고 싶을 뿐.
그렇기에,
"제게 군사를 내어 주십시오."
"오오. 드디어 루시안 대기사단장의 출정인가?"
"예. 아슬란, 그자를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왕은 전쟁을 원하지만, 루시안이 원한 건 다른 것이었다.
군사들을 활용해 치열한 전략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전쟁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닌, 아슬란 그자와 칼을 부딪히는 것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반드시 아슬란의 목을 베어 국왕께 바치겠습니다."
루시안은 다짐했다.
아슬란 그를 이 손으로 꺾어 보겠다고.
그리고 나아가 이 대륙의 최강자가 되겠다고 말이다.
27화
1초만 소드마스터 27화
"누님. 이게 맞소?"
"괜히 여기 있다가 모가지만 댕겅 잘리는 거 아니오?"
덩치값을 못 하고 겁만 많은 길드원들 때문에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던 여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희들도 들었잖아. 일라이 왕국에서 우릴 찾지 않는다고."
"거참. 아무리 그래도 누님이 그······."
산적 같은 덩치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길드원 하나가 주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슬란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 나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난 처음부터 그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깐. 라울, 그놈한테 미혼약을 파는 게 아니었소."
"누님. 그 미혼약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아요? 아슬란이 그걸 마시고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이거 우리만 잡혀 죽게 생겼네."
이것들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깐.
여인은 절로 욕설이 튀어 나갔다.
"이런 개호로 새끼들이 돈 나눠 줄 때는 아주 그냥 좋아 죽더니만, 이제 와서 내 탓 하는 거야? 앙?!"
그녀가 상을 쾅 내리치며 성질을 부리자 길드원들도 움찔 거리며 말했다.
"아니. 누굴 탓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잖소."
"괜히 일라이 왕국 땅을 잘못 밟았다가 낭패를 볼까 봐 하는 말이지요. 우리가 언제 누님 탓을 했다고 그러실까?"
여인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어휴. 내가 이런 개쫄보 새끼들이랑 무슨 영광을 보자고 여기까지 왔는지 원. 그래서 내가 일라이 왕국 수도를 왔냐? 여긴 로난 성이잖아. 아슬란 그놈이 여길 올 거 같······."
바로 그때였다.
"누, 누님! 누님!"
밖에 나가 있던 길드원 하나가 다급하게 선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왜 그래?"
"크, 큰일 났어요, 누님!"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아, 아슬란! 아슬란이 지금 여기로 오고 있대요!"
"뭐어-?!"
그 얘기를 듣고 길드원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참말이여?!"
"아니. 그 작자가 여기는 왜······."
"설마 우릴 잡으러?"
"아이고! 우린 다 죽었다!"
아주 그냥 통곡을 하고 있는 길드원들 때문에 도저히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좀 닥쳐 봐, 이 돼지 새끼들아!"
"아니. 왜 또 그런 심한 말을······."
"요즘 누님 너무 날카로우시다니깐?"
이상하네.
정말 우릴 잡으러 오는 건가?
아슬란은 라울을 조용히 처형시키는 걸로 사건을 일단락 시켰다고 알고 있는데.
거기다 아슬란이 직접 움직여서 잡으러 올 이유도 없을 테고.
사건을 그렇게 급 마무리 시킨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설마 내가 연류된 걸 알고 묻어 버린 건·····?'
문득 든 생각에 여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럴 리가 있나.
상대는 그 아슬란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새끼가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해.'
일라이 왕국과 베라크 가문의 정보력이라면 충분히 라울과 동조한 범인을 유추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을 판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금방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도 아슬란은 아직까지 현상금도 걸지 않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누님. 일단 빨리 튑시다!"
"네. 여기 있다가는 다 죽겠어요!"
"야. 다들 닥치고 밥이나 쳐먹어. 아슬란이 우릴 진짜 잡으려고 했으면 직접 왔겠냐? 군사를 보냈겠지."
사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강력한 미혼약을 먹고도 그는 살아 남았고, 그 이후에도 아슬란은 대륙을 계속해서 충격에 빠뜨리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냥 사기치는 것일 수도 있지.'
여인은 아슬란을 알고 있다.
그가 능력 없고 허세만 부리는 병신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난 절대 못 믿어.'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정말로 소문대로 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녀가 알고 있는 아슬란이 맞는 것인지.
"거기다 아직 돈 못 받은 거 있어서 지금 못 간단 말이야."
"에? 지금 돈이 문제에요!?"
"아슬란이 오고 있는데? 소드마스터 두 명을 박살낸 그 아슬란이 오고 있는데!?"
"싫으면 다 꺼져. 나 혼자 있을 테니까."
여인은 아슬란이 오고 있다는 성문 쪽으로 나가보았다.
* * *
"어서 오십시오, 대기사단장님. 이렇게 다시 뵈니 영광입니다!"
로난 성의 성주, 세드릭은 미리 기사들과 마중을 나와 나를 맞이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나는 성 안으로 들어갔고, 구경을 나온 백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와아아!!"
"아슬란님!!"
"대기사단장님이시다!!"
이곳에서도 아슬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왜 다들 이런 놈을 좋아하는 건지 원.
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정반대였다.
아슬란의 허세와 심취가 끓어 오르는 것도 있지만, 나도 한낱 인간인지라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해 주면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땐 허세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헤실헤실 바보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면, 정말 멍청해 보였을 것이다.
아슬란의 허세가 그런 행동을 억제해 주는 건 마음에 들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우리 왕국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소서!"
언제 어디서 살수가 날아와 공격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한번 심취하기 시작한 이 허세를 끊을 수 없었다.
어디 한번 죽이고 싶으면 죽여 보라는 듯,
나는 덤덤한 얼굴로, 이들의 찬사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당당하게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래도 진짜 살수가 있으면 안 되니깐.'
나는 눈을 부릅뜨며 인파들의 머리 위로 떠 있는 정보창을 일일이 확인했다.
일반 백성들은 무력과 지력이 뜨지도 않고 이름만 뜨기 때문에 이곳에서 누가 수상한지 가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력 30~60을 넘나드는 사냥꾼이나 용병들이 보였지만 이들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레베카]
무력: 30
지력: 80
"······."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럴 때 꼭 네임드 한 명이 끼어 있더라고.
그나마 다행인 건,
'레베카는 정보 상인이지 않나?'
뭔가 악의적인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여러 정보를 사고 팔며, 특별한 아이템을 팔기도 하는 여자니까.
혹시 모른다.
아주 귀중한 아이템을 그녀가 팔고 있을지.
"······."
그런데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레베카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따 혹시 기회가 되면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지금 당장 만나기는 그러니, 일단 나는 그녀를 지나쳐 계속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귀를 거슬리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놈이 또 허락도 없이 여기다 자리를 깔고 있는 거냐?!"
"죄송해요, 아저씨. 이것만 팔게 해주세요."
"뭐. 이딴 돌조각? 어디 산에서 대충 주워 온 걸 팔려고? 이딴 걸 누가 산다는 거야!"
"제발 한번만 허락해 주세요. 이거라도 팔아야 우리 엄마를 살릴 수 있어요."
"당장 썩 꺼져!"
이렇게 인파가 우글우글 모여 있고 수많은 목소리에 옆에 있는 기사가 하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잠깐. 이건 설마?'
고인물의 귀신 같은 레이더를 피할 순 없다.
오직 퀘스트와 보상을 쫓아다니는 나 같은 사람은 더더욱.
'분명 이쪽 부근인 거 같았는데.'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들 너머로 한 아이와 상인이 실랑이를 벌이는 게 보였다.
'찾았다!'
속으로 나는 유레카를 외치며 인파를 헤치고 그 둘에게 다가갔다.
"오냐오냐 하고 봐줬더니, 이 건방진 꼬마가 감히 어른 무서운 줄 모르······ 응?"
아이를 윽박지르고 있던 남자는 자기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보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헉! 대, 대기사단장님!"
그는 나를 올려다 보고는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슨 소란이지?"
"아. 그, 그것이 이 아이가 허락을 받지도 않고 자꾸만 여기서 물건을 팔려고 해서······."
깡 마른 몸에 누더기를 걸친 것만 같은 옷에는 검은 먼지가 가득 묻어 있다.
찢어지게 집안이 가난한 아이였다.
보통 플레이어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선행의 손길 퀘스트!'
히든 퀘스트 중 하나로 이처럼 어려움에 처한 아이를 플레이어가 돕게 되면 감사 의미로 아이템을 얻게 된다.
그것이 어떤 아이템인지는 랜덤이라 알 수 없다.
그냥 잡템일 수도 있고, 정말 운이 좋으면 생각지도 못 한 것을 얻을 수도 있다.
이게 커뮤니티에 알려지면서 한동안 이 히든 퀘스트를 깨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도시 안을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히든 퀘스트가 그리 찾기 쉬운 게 아니지.'
나처럼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후후.
아니나 다를까.
[선행의 손길]
-아이의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보상으로 1골드를 얻습니다.
거기다 보상으로 1골드까지 준다고?
안 그래도 내가 이 히든 퀘스트를 찾아 보려고 일라이 왕국 수도를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그땐 그냥 난이도 때문인 줄 알았는데, 황금이 사실은 로난 성에 숨어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아이를 상대로 자비를 베풀 줄 모르다니. 넌 이 아이의 어려움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이냐?"
"그, 그것이······."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더냐?"
나는 경직 되어 있는 남자와 사방에서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이 왕국에, 그리고 나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적의 침입이나, 위협도 너희들이 걱정할 필요없다. 그건 나 아슬란이 해결할 일이니까."
"······."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아이 앞에 쭈그려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온정을 나누는 것. 어려움을 보고 못 본 척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강자가 약자를 돕는 것.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오늘도 아슬란의 혓바닥은 열심히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
그토록 시끄러웠던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 길고 어색한 침묵 속에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야. 내가 무엇을 도와 주면 되겠느냐?"
"저, 저희 엄마의 약값이 필요해요."
"그렇구나. 그러나 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돈을 준다면 형평성에 어긋나겠지. 하지만······."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가 전시해 놓은 돌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있다. 진짜 있다고!'
아이템이 숨겨져 있었다.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돈을 꺼냈다.
"이 귀한 돌들을 보고 그냥 넘길 순 없지. 여기 있는 걸 전부 내가 사겠다."
"네? 저, 전부요?"
"그래."
나는 기사를 시켜 아이에게 돈을 주도록 했다.
두툼한 주머니를 받게 된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 이걸 정말로 주시는 거예요?"
"그래. 전부 너의 것이다."
아이는 돈 주머니를 살펴보다 우물쭈물 거리며 중얼 거렸다.
"우리 엄마 약값도 필요하고, 병을 낫게 할 포션값도 필요하고, 동생들 먹일 빵도 필요한데······."
이런 욕심 많은 놈을 봤나.
쓰읍. 좀 아깝지만, 그 정도는 내가 챙겨 줄 수 있지.
나는 눈짓을 보내 아이에게 두툼한 주머니를 하나 더 주도록 했다.
"와아! 감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가족을 잘 챙기거라."
"예! 꼭 그리 하겠습니다."
"그럼 이 돌들은 내가 챙기도록 하지."
그냥 아무 산에 올라가 예뻐 보이는 걸 마구 집어온 거 같은데, 여기 있는 걸 전부 가져갈 필요는 없다.
이미 내가 가져갈 건 정했다.
'이거다. 분명해. 내 눈을 속일 순 없어.'
겉만 보면 그냥 흙먼지가 잔뜩 묻은 볼품 없어 보이는 돌처럼 보이겠지만,
[잃어 버린 검은 보석]
-아이템의 히든 능력을 열 수가 있게 됩니다.
이건 보석이었다.
그것도 검은 보석!
그냥 쓰레기 잡템이 나올 수도 있기에 최대한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횡재를 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건 무려 아이템의 히든 능력을 잠금 해제 시켜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진 검은 보검이잖아?'
당연히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도 엄청날 터.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당장 보석을 사용해 검에 이식했다.
그러자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보석이 순식간에 검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이 소리쳤다.
"저, 저 빛은?!"
"신성한 빛이다!"
"저건 분명 라할의 빛이야!!"
원래 보석을 흡수하면 이렇게 빛이 나오는 이펙트가 있긴 했는데, 이 정도로 심하게 뿜어져 나왔던가.
하지만 백성들의 웅성 거림을 들을 새가 없었다.
이미 눈앞에 새로운 보석 효과가 생겼다는 알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검의 의지' 효과가 찬란한 베라크 보검에 적용됩니다.]
28화
1초만 소드마스터 28화
"라할의 영광스러운 빛을 내가 이렇게 보게 되다니."
"역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시라니깐? 라할께서 그분과 함께 하고 계시는 게 분명해!"
"힘없는 사람 편에 늘 서는 분이시잖아. 라할께서 왜 저분을 선택하셨겠어?"
백성들은 쉽사리 제 자리에서 떠나가지 못 하고 있었다.
그들이 봤던 그 감동의 여운을 그 끝자락까지 만끽하려는 것이었다.
"와. 거 사람 참 멋있네."
"남자가 봐도 반하겠어. 저게 진짜 기사지."
문제는 이놈의 길드원들까지 난리였다.
"흑흑. 누님. 너무 감동적이지 않소?"
"넌 또 왜 울고 지랄이야, 병신아."
"아니. 이렇게 사람이 감정이 메말라서야. 난 엄청 울컥했단 말이오!"
"나도 그렇소. 내가 일라이 왕국 출신은 아니지만, 갑자기 소속감이 생기면서 막 왕국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거 아니겠소?"
하다하다 이젠 소속감을 들먹이고 있다.
지랄도 풍년이었다.
"난 이제까지 누님한테 아슬란이 아주 쓸모없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오늘 보니까 전혀 아니던데요?"
"그러게. 대체 누님은 그동안 누구 얘기를 했던 거요? 동명이인이 있던가?"
그에 대해서는 레베카도 할 말이 없었다.
오늘 본 아슬란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망나니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대체 뭐지?'
혼란스러웠다.
그 탐욕스럽고 치졸한 아슬란이 저런 작고 연약한 아이의 편에 서주었다.
그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보인 그의 행동은 진심이 묻어 나왔다.
마치 정말 저 아이가 팔던 그 검은 쪼가리들이 필요하다는 듯이, 아슬란은 진심으로 아이를 대하며 후하게 값까지 치렀다.
가장 충격적인 건,
'그건 분명 성스러운 빛이었어.'
천한 백성들도 알아볼만큼, 그건 분명 라할의 신성한 빛이었다.
대체 어떻게 아슬란 따위의 인물에게 그런 빛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만큼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슬란이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다,
'날 알아보기도 했고.'
아슬란은 레베카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짜증 나게 잘생긴 그 미모 때문에 순간 레베카도 모르게 그 눈빛을 피하고 말았다.
"누님. 얼굴이 빨개요."
"뭐, 뭐야?"
"무슨 생각하시길래 그래요? 혹시 남자 생각?"
"이게 드디어 미쳤나."
레베카가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길드원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날 때였다.
"그대들이 그림자 길드요?"
그들 앞으로 기마를 탄 기사들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아름다운 왕자의 미모를 가진 엘버스테인이 있었다.
"······?!"
갑작스러운 기사들의 출연에 길드원들은 당황하며 두리번 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라는 표정이었다.
"누, 누님."
"모두 가만히 있어."
레베카는 마력을 거두며 엘버스테인 앞으로 걸어나갔다.
"맞아요. 제가 그림자 길드의 길드장, 레베카입니다."
그러자 엘버스테인이 미소를 보였다.
뭔가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저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레베카님을 모셔 오라고 말입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저를요? 무슨 이유 때문이죠?"
"그에 대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극진히 모셔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제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레베카님."
극진히 모셔오라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알겠어요. 같이 가도록 하죠."
길드원들은 귓속말로 그녀를 만류했다.
"누님. 미쳤소!? 제 발로 끌려 가다 죽을 작정이오?"
"그럼 여기서 싸우니? 성 안에 있는 모든 기사랑 싸워 보려고?"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그림자 길드인데, 잘만 하면 빠져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오."
레베카도 그래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엘버스테인의 말이 자꾸 걸렸다.
극진히 모시고 오라는 명령, 거기다 아슬란과 나눴던 그 뜨거운 눈빛도.
만약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는 거라면 순순히 죽어 줄 생각도 없었다.
동귀어진을 하는 각오로 아슬란의 목숨은 반드시 가져가고 죽을 것이다.
거기다 여기 길드원까지 모조리 몰살시킬 순 없지 않은가.
나 하나 죽어서 끝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됐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너희들은 여기 기다리고 있어."
"혼자요?"
"누님.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누님을 혼자 보낼 것 같소?"
"그래요. 우리가 누님을 지켜드릴게요."
라고 말하면서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여튼 멍청하면서 웃긴 놈들이라니깐.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들을 이상하게 여긴 엘버스테인의 말에 레베카는 미소를 보였다.
"아니요. 지금 다 같이 가죠."
아슬란. 네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예전 그 멍청하고 순진했던 귀족집 영애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레베카는 천천히 마력을 예열시키고 있었다.
* * *
[검의 의지]
-검이 주인의 의지를 따르며 공유합니다.
-검을 다루지 않아도 검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
나는 한참 동안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애써 검은 보석으로 베라크 보검에 잠겨 있는 히든 능력을 찾아내 열어 놓았더니······.
"이게 대체 뭐야?"
이런 능력은 처음 보는 거라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거 분명 보검 아니었어? 그런데 붙은 옵션도 그렇가 해금한 히든 능력도 왜 이따구인데?
"보통 보검에 담긴 히든 능력이면 엄청 좋은 게 나오지 않나?"
막 번개를 일으키던가, 마력이 없어도 마법을 부린다든가 하는······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런데 검의 의지?"
검이 나와 의지를 공유한다고?
내 생각을 공유하고, 내 허세도 공유하는 뭐 그런 거?
잠깐 이거 설마······.
"에고 소드?"
판타지 세계관이니 당연히 에고 소드, 그러니까 말을 하는 무기가 존재한다.
물론, 플레이어가 에고 소드를 갖는 일은 드물다.
왜냐하면,
"쓸모가 없거든."
하지만 컨셉 플레이를 하고 싶고 진짜 판타지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에고 소드를 가지려고 해당 아이템을 찾으러 다니는 놈들은 있었다.
실제로 에고 소드에 해당하는 검이 몇 개가 있는데, 괜히 거슬릴 것 같아 나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설마 그런 옵션이 무려 베라크 가문의 보검에, 그것도 히든 옵션으로 숨겨 있을 줄이야.
"진짜 상위 옵션 하나 붙여 주는 게 그리도 힘들었더냐."
이 검을 만든 대장장이를 조져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걸 보검이랍시고 가지고 다니는 아슬란을 조져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은······."
에고 소드라면 말을 하겠지?
"어이."
나는 검에 대고 말을 걸어봤다.
"네 주인에게 답해라."
······.
"대답하라고."
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야. 검. 귀 먹었냐?"
급기야 현타까지 왔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에고 소드인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네.
"쓰읍. 그럼 이건?"
나는 검집에 다시 넣어 놓고 붙잡은 채 반대편 손을 휘둘러 보았다.
슉-!
그러자 놀랍게도 손에서 검기가 뻗어 나가 기둥에 작은 흠집을 냈다.
"오?"
검을 다루지 않아도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나는 몇 번 더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여러 검기들이 기둥을 때렸다.
"잠깐. 그럼 이거 검을 잡지 않아도 발동이 되나?"
나는 검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손을 휘둘러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촤악-!
이번에도 검의 의지가 발동되면서 검기가 앞으로 솟아 나가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무력 50따리에 걸맞게 그 위력이 미미해서 흠집이 조금 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게 없었다.
"검을 어디까지 떨어뜨려도 되는 거지?"
혹시 이것도 기검사가 딱 15m만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쪼잔하게 거리 제한이 있나?
나는 내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검을 놓은 뒤 한창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조금이나마 스펙업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위대한 분이시여."
엘버스테인의 목소리에 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에 빙의하던 것을 멈추었다.
망가진 자세는 다시 올곧게 돌아왔고 헤실헤실 풀어져 있던 얼굴도 근엄하게 바뀌었다.
"무슨 일이냐?"
"그림자 길드의 길드장, 레베카를 데리고 왔습니다."
레베카가 왔구나.
안 그래도 그녀에게서 정보와 아이템을 구매할 겸 엘버스테인을 보냈었다.
"들어 오너라."
"예."
정보 상인 레베카.
아름다운 미모와 달리 괴팍한 성격에 말투가 반전인 여자다.
이 게임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두분 얘기 나누십시오."
엘버스테인이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뒤집어쓰고 있던 보라색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고풍스러운 레베카의 미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기다 저 보랏빛 눈동자.
이 게임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라면 저 눈동자에 담긴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아슬란?"
아슬란과 레베카가 안면이 있었나?
뭐, 베라크 가문에서 정보를 산 적이 있나 보지.
거기다 레베카는 일라이 왕국 출신으로 알고 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자녀였다나.
그녀에 관련된 친밀도 퀘스트를 해본 게 아니라서 자세한 건 알지 못 한다.
나는 대충 대답했다.
"그렇군."
하지만 뒤에 이어진 그녀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오랜만에 약혼녀가 보고 싶었나요? 아니지. 파혼녀라고 불러야 하나. 호칭이 애매하네."
"······?"
지금 뭐, 뭐라고?
약혼녀?
"뭐, 어차피 그쪽은 나한테 관심도 없었잖아. 당신의 가문이 우리 가문을 철저히 짓밟고 불에 태워 없애 버리는 그 순간에도 나한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지."
설마 몰락한 귀족 가문이 아슬란의 베라크 가문과 연관이 있었나?
이건 진짜 나도 몰랐던 얘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날 여기에 불렀다는 건······."
그녀는 내가 검의 의지를 실험하기 위해 자리에서 멀찍이 놔두었던 검을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역시 날 죽이려고?"
아니. 난 그냥 정보만 사려던 것뿐인데.
운이 좋으면 쓸만 한 아이템도 사려고 했었다.
그런데 약혼녀?
아슬란이 누가 약혼을 맺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런 똥캐한테 누가 관심을 준다고.
"당신도 다 알고 있잖아. 내가 라울에게 미혼약을 팔았다는 걸. 라울을 조사를 했다면 그 정도는 금방 알아냈을 테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라울이 내게 먹였던 그 미혼약이 레베카한테 온 거였어?
그때 그 사건은 내가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통에 제대로 조사를 하지도 않았다.
이미 내가 깨어났을 땐 왕이 라울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설마 거기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줄이야.
"그게 당신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난 알고 있었어. 당신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거든. 그런데 멀쩡하네? 그걸 먹고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지? 잠든 사람도 못 죽일 만큼 라울이 병신이었나?"
점점 격해지는 말투와 목소리처럼,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마력 역시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위험을 감지한 약자의 본능이 머릿속에서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검은 저곳에······.
"그런데 날 죽이려면 검이 필요하지 않아? 기사라는 사람이 검을 멀리에도 놨네. 아니면 검이 없어도 나 하나쯤은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야?"
레베카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사람들은 당신을 소드마스터라고 칭송하지만, 난 그걸 믿지 않아. 난 당신의 본성을 알고 있어, 아슬란. 무슨 수작을 부려 이 많은 사람들을 속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그것을 천천히 빼 들었다.
"난 속지 않아. 그리고 쉽게 죽어 줄 생각도 없어. 나, 생각보다 강하거든."
이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만, 이대로 가면 레베카 손에 죽을 거 같았다.
그냥 정보 몇 개 사려고 했던 건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차라리 지금이라도 검의 의지를 활용해 찰나의 괴력을 발휘한다면 내가 먼저 레베카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윽!"
검을 붙잡은 레베카의 행동이 이상했다.
"뭐, 뭐야?"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멍하니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레베카는 몸을 휘청 거리더니,
쿵-!
곧 무릎이 꺾여 바닥에 쓰러졌다.
* * *
일레브로 가문은 베라크 가문 다음으로 잘 나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영애였던 레베카는 이상하게 미움만 받았다.
아니. 무관심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보러 오지도 않는 아버지.
누군지도 모르는 어머니.
거기다 뜬금없이 정치적 이유로 약혼을 맺게 되면서 조금은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저 아슬란마저 자신을 무시했다.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보다 외모가 유별나서?
눈동자가 달라서?
그게 어쨌다고?
날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말은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바라만 보았고, 아슬란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세력 다툼에서 패배한 일레브로 가문이 멸망하고 가주는 처형을 당했으며, 가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레베카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이 좆 같은 집안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왜.'
널 보면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그때의 일은 이미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오래 전 일이라 그때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슬란이 여전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순간 화가 치밀어 이성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칼을 잡아 그곳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냥 죽어!'
왕국의 대기사단장을 죽이려 했던 음모에 관여가 되어 있으니, 그 죄를 벗긴 어렵다. 그러니 차라리 널 내 손으로 죽인다면 그나마 좀 덜 억울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히.]
"······?"
큰 종이 울리는 것처럼 머릿속 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격도 없는 자가 그 더러운 손으로 이 몸을 만지다니.]
대체 어디서 이런 목소리가-?
[죽고 싶은 것이냐?]
"뭐, 뭐야."
설마, 이 검에서 나오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검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너 같은 약자가 감히 들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약자?'
내가?
대마법사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이를 갈으며 단련해 온 마력이다.
그런데 고작 검 따위가 그런 소리를 해?
뿌득-!
레베카는 이를 꽉 물며 그녀가 가진 마력을 검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검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며 그녀를 비웃었다.
[건방지구나.]
그리고 그녀가 불어 넣었던 마력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건 말도 안 돼······!'
대체 검이 어떻게 이런 힘을 뿜어낼 수가 있는 거지?
애초에 검에게 자아가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 한 일이었다.
[오직 대륙 최강자만이 이 몸을 다룰 수 있다. 그런데 너 따위가 내 명예를 더럽히려는 것이냐?]
대륙 최강자?
그렇다면 이 검의 주인인 아슬란이 대륙 최강자라는 거야?
[끝까지 놓지 않겠다면······.]
당장 토를 하고 싶을 정도로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이 검에게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여 주마.]
순간 밀려오는 공포와 위압에 레베카는 얼른 검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연결되어 있는 실이 툭 끊어지는 것처럼, 몸에 힘이 빠지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이건 마검이다.
대체 아슬란은 어떻게 이런 검을 가지고······.
뚜벅- 뚜벅-
그때 들리는 발소리.
레베카는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 위에는 그 옛날처럼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29화
1초만 소드마스터 29화
'여기까지인가.'
설마 아슬란이 저런 마검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딱 지 주인을 닮은 듯한 건방지고 오만한 그런 검이었다.
문제는 저 검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이 느낌.
메스꺼워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거기다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슬란까지.
아주 삼박자로 지랄인 날이었다.
"하-. 이렇게 어이 없이 죽을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마력을 끌어 올리면 어떻게든 공격 마법 하나쯤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라.
레베카가 떨어뜨린 검을 태연하게 들고 있다.
저 마검을 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에게 뭔가를 할 수 있을까?
"길게 끌지 말고 죽일 거면 빨리 죽여."
그리고 마법을 쓰고 싶어도 어지러움이 극에 달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마치 드래곤 피어라도 당한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어차피 그때 날 죽이려 했던 거잖아? 그때 못 끝낸 일을 네 손으로 직접 끝내야지."
그래. 죽이지 못 한다면 차라리 욕이라도 시원하게 박자.
"라울 그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어. 병신 같은 새끼. 차라리 내가 나섰다면······! 그럼 넌 반드시 죽었을 텐데."
"······."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아니. 자기가 짓밟아 버린 천한 가문의 씨앗 따위랑은 말도 섞기 싫다는 거야? 이 좆 같은 새끼야."
악을 지르듯이 레베카는 온갖 육두문자를 상대에게 다 퍼부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한을 이곳에서 풀어 버렸다.
그래서일까.
속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상대는,
"······."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씨발. 끝까지······."
아슬란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그래도 사람이 말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나쁜 새끼."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레베카."
무겁게 닫혀 있던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널 이곳에 부른 건 널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뭐?"
"그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쭈그려 앉아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레베카."
"······?!"
레베카는 입만 쩍 벌려질 뿐, 놀라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대체 내가 왜 널 죽일 거라 생각한 거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엘버스테인에게 널 극진히 대우하며 데려오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을 거다."
"나, 나는 널 죽이려고 라울에게 미혼약을······."
아슬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그따위 미혼약으로 이 몸을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 약혼녀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군."
"······."
고작 미혼약?
그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그런 소리를!
"그래도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먹었다. 네가 준 선물이니까."
"미친!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 더는 날 죽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만약 네가 진정으로 날 죽이고자 했다면 더 지독한 방법을 썼겠지."
뭐라 반박을 하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베라크 가문에 의해 멸망한 네 가문의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가문의 복수?"
레베카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 빌어먹을 가문은 날 가족으로 대해주지도 않았어. 날 이유 없이 천대하고 무시했다고."
"······정말 아무 이유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나?"
"뭐?"
"괜한 말을 했군. 일어나라. 부축해 주겠다."
레베카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아슬란의 손을 뿌리치며 기어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
"됐어. 누가 애인 줄 알아?"
"씩씩한 애라는 건 알겠군."
그 말에 레베카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지만, 아슬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이런 만남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다시 보니 좋군."
"왜? 죽은 줄 알았던 약혼녀가 알고 보니 살아 있어서?"
"네가 죽지 않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 네가 그림자 길드를 만들고 그곳의 길드장이 되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그동안 날 지켜보고 있었다고?
완전히 잊어 버린 줄 알았는데.
"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난 널 응원할 것이다, 레베카."
"!?"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개, 개소리 하고 있어!"
"쓰는 말이 아직 애답구나."
"애는 무슨!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다, 당신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당황한 레베카는 얼른 이곳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우, 우리 사이에 이제 구린 건 없는 거야? 응? 갑자기 또 막 잡으러 오는 거 아니지?"
"네가 또 날 죽이려 한다면 모를까."
"흥! 이제 그럴 일 없거든."
그렇게 방 밖을 나서려다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찝찝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라도,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만 같았다.
"당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게 좋아."
"무슨 뜻이지?"
"오메르 왕국에서 비밀리에 군대를 준비하고 있어. 조만간 일라이 왕국을 향해 진군하려는 거겠지. 그 선봉에는 루시안이 있을 테고. 나도 최근에 알게 된 정보야."
"오메르 왕국이?"
"그래. 앞에서는 너한테 평화 협상을 하려고 하겠지만, 뒤에서는 군대를 준비해서 쳐들어 올 거라고. 대비하고 있는 게 좋아. 거기 요즘 심상치가 않거든."
"걱정해 주는 건가?"
그 말에 또 한번 얼굴이 붉어지는 레베카였다.
"거, 걱정은 무슨 개뿔! 그냥 이걸로 빚을 갚는 거지! 지금 오메르 왕국 놈들이 얼마나 막장인 줄 알아? 그놈들은 지금 악마의 힘까지 빌려서······."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
"나 아슬란이 건재하는 한, 일라이 왕국이 패배할 일은 없으니까."
저 확신에 찬 목소리와 침장한 모습.
이번에도 개소리를 한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난 분명 말해줬어. 알아서 해."
레베카는 그 길로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왔다.
얼굴을 만져보니 여전히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어? 누님!"
밖에 있던 길드원들은 우르르 그녀에게로 모여 들었다.
"저희는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누님.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기에······."
레베카는 징그럽게 모여드는 길드원들을 쳐내며 소리쳤다.
"몰라! 입냄새 나니까 가까이 오지 마, 새끼들아!"
"엇! 누님! 같이 가요!"
"아니. 저녁 식사는 안 준대요?!"
"에라이 미친 새끼들. 빨리 따라오기나 해, 쪽팔리니깐."
길드원들을 데리고 나서던 레베카는 아슬란이 있는 집무실을 슬쩍 뒤돌아 보았다.
아슬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허세만 가득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이제 고쳐야 할 것 같았다.
* * *
"······갔나?"
휴우우우-.
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미친. 진짜 게임 어메이징 하네."
레베카와 옛날에 약혼을 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그 엑스 약혼녀라는 여자가 날 죽이려고 했다니.
"대체 아슬란 이 새끼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냐."
아슬란은 너무 적이 많다.
고인물인 나조차도 모르는 적이 많다.
그래도 적절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잘 넘긴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레베카는 이 검을 잡고 나서 그런 행동을 보였던 거지?
분명 날 죽이려고 마력을 끌어 올리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혹시 검이 무슨 반응을 했나?"
나는 검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흔들어 보기까지 했다.
"어이, 검. 내 말 들리냐?"
"······."
무안한 정적이 흘렀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래. 에고 소드는 무슨 에고 소드냐."
이딴 게 내 말에 답할 리 없지.
"난 그냥 정보랑 아이템을 얻고 싶었을 뿐인데."
레베카를 성급하게 불러 들이는 게 아니었다.
설마 둘 사이에 그런 악연이 엮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래도,
"정보를 얻긴 했네?"
오메르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라.
하지만 왜?
"엘버스테인 때문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보상금을 3배로 줄 테니 엘버스테인을 넘기라는 서신을 놈들이 보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메르 왕국은 서신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밀당할 마음도 없는 건가?
"아니. 3배는 솔직히 국룰 아니냐? 그거 하나 못 줘?"
솔직히 5배는 선 넘은 거고, 3배는 줄만 한 수치였다.
그런데 그게 아까워서 안 주고 그냥 전쟁을 하겠다고?
"미친놈들인가.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차라리 현상금 3배를 주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텐데.
그냥 정보가 잘못된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레베카의 정보가 절대 틀릴 일 없어."
레베카의 정보는 값이 비싼만큼 그 값을 톡톡히 한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 뜻은 곧,
"오메르 왕국이 곧 쳐들어온다는 거네."
그 선봉에는 소드마스터 루시안이 있을 테고.
거기다 그 뒤에는 테키나 족속까지 있다.
"그냥 2배에 팔 걸······."
이래서 욕심 부리지 말고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 팔라는 조언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나.
지금 서신을 다시 보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것이다.
레베카의 정보는 거의 예언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그 정보대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개발자들이 레베카라는 캐릭터를 설계하면서부터 정해 놓은 법칙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정보는 틀림이 없으며, 반드시 그 정보대로 이뤄지기에 가격도 무진장 비쌌다. 그렇기에 게임을 플레이 하려면 그녀의 정보를 얻는 것도 무척 중요했다.
"이건 대비를 하는 수밖에 없잖아."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러자 기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엘버스테인을 데려와라."
"예."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힘을 끌어 모아야 한다.
우리 왕국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메르 왕국에게만 피해가 갈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래 게임 퀘스트대로 리카르 성주와 손을 잡은 뒤 루시안을 설득해 왕을 배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전쟁은 엘버스테인의 지지 세력이 해 줄 것이다.
그럼 난 병사들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지며, 내가 전쟁에 나설 필요도 없어진다.
어쩌면 운 좋게 어부지리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레베카 눈동자가 진짜 신기하게 생기긴 했네."
엘버스테인을 기다리며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게임의 5대 미녀 중 하나로 꼽히는 레베카이지 않은가.
특히 그 보랏빛 눈동자.
지금 사람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난 그 눈동자가 가진 비밀을 알고 있다.
그 눈동자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
그것이 바로 레베카의 정체였다.
"말 안 한 게 잘한 거겠지?"
어차피 나중에 가면 게임 스토리에 따라 밝혀질 수도, 아니면 영영 묻혀 버릴 수도 있는 사실이니.
"그러니 나도 그냥 묻자."
오늘 이후로 다시는 안 만날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또 만나게 될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30화
1초만 소드마스터 30화
"하아압-!"
채애앵-!
두 검이 부딪히자 불꽃이 튀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혀 있는 엘버스테인은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빈틈이 발견되면 곧바로,
촤악-!
그곳을 향해 칼끝을 찔러 넣었다.
챙-!
하지만 칼이 닿는 곳마다 철저히 막히고 있었다.
바로 저 아론이라는 젊은 기사에 의해 말이다.
"오오."
훈련장에 모인 기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결의 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버스테인. 오늘따라 칼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아론은 곧바로 손을 비틀어 엘버스테인의 칼을 쳐낸 뒤 그대로 그의 목에 칼끝을 세웠다.
"아-."
완벽한 엘버스테인의 패배.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제까지 한번도 아론을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의 귀신 같은 검술을 도저히 파훼할 수가 없군."
"오늘은 자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 어디로 칼이 날아올지 다 예상이 되더군."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엘버스테인이 작게 읊조리자 아론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안 그래도 아까까지 아슬란을 만나고 오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쭉 저 표정이다.
똑같은 나이이기도 하고 말도 잘 통해서 둘은 금방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까부터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데."
엘버스테인은 아론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메르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더군."
"전쟁? 설마 자네 때문에?"
"맞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아까 전해 들었어. 오메르 왕국이 일라이 왕국을 치기 위해 병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이런. 그놈들이 기어코······.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일단 나를 지지하는 세력을 먼저 모으라고 하셨네. 그렇게 다 같이 힘을 합치면 된다고. 하지만······."
엘버스테인은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 하나만 항복을 한다면 누구도 피를 흘릴 필요가 없네. 대체 내가 뭐라고 무의미한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보게. 그게 무슨······!"
"자네 생각에도 그렇지 않나? 나 때문에 이 아름다운 일라이 왕국이, 그리고 대기사단장님과 그분의 기사들이 희생해야 하네. 대체 내가 뭐라고?"
"······."
아론은 침묵했다.
엘버스테인을 위해 일라이 왕국이 희생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네. 이대로 오메르 왕국으로 돌아가 이 모든 싸움을 끝내야 하는 것인지······."
엘버스테인도 마음을 거의 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네."
"······호레스 군사님?"
"감히 누구 허락을 맡고 여기를 떠나겠다는 겐가?"
호레스는 두 젊은이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런 그에게 엘버스테인이 말했다.
"군사님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일라이 왕국 출신이 아닙니다. 철저히 남이라는 겁니다. 저만 사라진다면, 저만 포기한다면 두 왕국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쯧쯧.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되겠는가?"
호레스는 축 처진 엘버스테인의 어깨를 다독이듯 두드렸다.
"어깨 펴시게. 한 왕국의 후계자라는 자는 항상 당당해야 하는 법."
"하지만 군사님. 저는······."
"자네는 아직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대기사단장님의 뜻?
엘버스테인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자네를 오메르 왕국에 넘기실 수 있었네. 심지어 오메르 왕국에서 서신까지 보냈었지. 현상금을 2배로 줄 테니, 자네를 넘기라고 말이야."
"두 배를요?"
"그래. 참으로 광기가 느껴지는 액수였지. 이미 싸움에서 패배해 쫓겨난 왕자를 하나 잡겠다고 그 많은 액수를 내놓으려 하다니. 정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어. 하지만······."
호레스는 나지막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단칼에 거절을 하시더군.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표정은 보이지 않으셨어. 3배, 5배, 아니. 10배를 준다고 했어도 그분께서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더군."
"······."
엘버스테인의 손발이 떨려왔다.
그분께서는 내가 뭐라고 그 많은 돈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런 결정을 내리셨단 말인가?
오메르 왕국이 건 현상금은 엄청난 액수였고, 그것을 두 배나 준다는데도 거절을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불러 일으킬 파장이 곧 전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것인가?
대체, 대체 왜!?
"그것이 바로 우리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일세."
"······."
"당신의 품에 들어온 사람은 끝까지 지키는 것. 설령 당신의 뒤에 비수를 꽂는다고 해도······."
호레스는 잠시 말을 흐리다 마른침을 삼키며 이었다.
"부하를 끝까지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주군일세."
그의 말에 기사들 모두가 고요해졌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론을 보시게. 그는 우리의 적이었네. 그것도 로난 성을 공격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려 한 아주 파렴치한 인간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호레스는 아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과거 젊은 혈기만 앞세우던 아론이 아닌, 이제는 듬직하고 늠름한 기사가 서 있었다.
"그는 진정한 기사가 되어 가고 있어. 아슬란님 밑에서 착실하게 기사의 명예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칼을 들어야 하는지 배우고 착실하게 배우고 있지."
아론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저를 진정으로 수하로 생각하고 계실까요?"
늘 그것이 불안했다.
자신은 왕국의 왕자 출신.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신분이었다.
하지만 아슬란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그 진심이 닿기를 바랐다.
호레스는 그런 엘버스테인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자네가 대답해 보게. 자네도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이지 않나?"
사실 엘버스테인도 그 물음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한 자락 남아 있는 이 불안한 마음을 지우고 싶었기에, 이 의심을 없애고 싶었기에 꺼낸 말일지도 모른다.
아슬란, 그분께서는 진정으로 나를······.
"여기서 뭣들 하고 있지?"
바로 그때.
중엄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오늘도 근엄한 얼굴과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엘버스테인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분과 관계 없이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주신 분.
내가 목숨을 걸고 믿고 따를 수 있는 분.
사소한 것까지도 전부 닮고 싶은 분.
자신의 주군이 바로 저곳에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