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놈들이 여기서 나 몰래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나?'
오메르 왕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과 불안감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런데 이놈들이 호레스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기사들과 검술 수련을 할겸, 여기 있는 엘버스테인과 대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호레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힐끗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흠. 수상한데.
호레스만 끼면 그냥 다 수상하단 말이지.
거기다 엘버스테인 저놈은 왠지 넋이 나간 거 같고.
"그래서 누가 이겼지?"
아론은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히 제가 이겼습니다."
아직은 엘버스테인이 아론에게 상대가 안 되는 건가.
하지만 아론아.
얼마 안 있으면 엘버스테인이 널 그냥 쳐바를 거다.
지금이라도 그 승리, 많이 만끽해 둬라.
[엘버스테인]
무력: 83
지력: 85
'오늘도 무력이 또 올라가 있네.'
진짜 어디까지 성장하려는 거지?
정말 저러다 90 넘기는 거 아니야?
저 사기적인 재능에 배알이 꼴려 몸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엘버스테인. 저 애물단지 같은 놈.'
괜히 놔뒀다가 오메르 왕국과 전쟁을 하게 생겼다.
만약 오메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저놈은······.
'왕이 되겠다고 떠날 거 아니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오메르 왕국이 우리 일라이 왕국의 우호국이 되는 건 맞겠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저 능력 좋은 놈을 내가 마음대로 써먹어야 하는데, 이제 자기 왕 됐다고 콧대만 높아져서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진작 2배에 팔았어야 했거늘.'
이래서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3배는 해 주지.
오메르 왕국, 이 쪼잔한 새끼들 같으니.
"대기사단장님."
그때 호레스가 나를 부르며 말했다.
"오늘 이리 나오셨으니, 대기사단장님의 위대한 검술을 이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뭐, 뭐요? 검술?
"소드마스터의 검술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건 기사들에게 큰 영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검술을 조금이라도 익힐 수만 있다면 더욱 강해질 것이고요."
이 영감탱이가 뭐라는 거야.
검술은 개뿔.
내가 그걸 할 줄 알았으면 이러고 살겠냐.
하지만,
"오오."
"대기사단장님의 검술이라니."
모두 너무 기대감이 높아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봐도 보여 줄 게 없는데.
호레스.
하여튼 저놈이 제일 문제다.
"검술이라."
그런데 그때 내 발밑에서부터 솟아 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줄 만한 검술은 없다."
"······?"
"검의 달인이 된다면 모든 검술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지."
그것은 바로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였다.
"무(武)의 길은 서로 달라도, 그 정점에 달하면 결국 그 끝은 하나로 합쳐진다. 검, 창, 권, 모든 것이 말이지. 그로 인해······."
나는 검의 의지를 발동시켜 내 몸 전체에 기검사의 효과가 흐르도록 했다.
그것은 날카로운 예기처럼 번뜩이며 마치 아우라 같은 것이 일렁였다.
"이렇게 몸 전체가 무기가 되는 것이다."
"!?"
푸르게 불타고 있는 기검사의 효과를 보고 기사들은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떻게 저리도 예기가 흘러 넘칠 수 있단 말인가."
"닿기만 해도 베이겠어."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기검사 효과를 거둬 들였다.
그러자 타오르던 아우라가 사라졌다.
"보았느냐? 이것이 너희들이 가야 할 검의 끝이다."
"······."
아론과 엘버스테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검합일을 이루고 나아가 온 만물과 하나를 이룬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너희들에 베지 못할 것은 없다. 그것이 설령······."
나는 엘버스테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악마라도 말이지."
"······!"
엘버스테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너희는 어떤 전쟁도, 그 어떤 싸움도 두려워 할 필요 없다. 너희들의 부족함은 나 아슬란이 채울 것이다."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 나는 격동하며 끓어 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한 번 더,
"내 검술을 보고 싶다고 했지. 그럼, 검을 들어라. 물론 힘 조절이 어려워 살살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누구든 덤벼라."
31화
1초만 소드마스터 31화
[간악무도한 아슬란을 죽이고 일라이 왕국을 오메르 왕국 아래에 두어 심판하겠다!]
레베카의 정보대로 오메르 왕국은 일라이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문제는,
'왜 나한테 지랄이야.'
누가 보면 내가 일라이 왕국 왕인 줄 알겠네.
억울하다.
'이렇게 되면 정석대로 가는 수밖에 없나.'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다.
엘버스테인을 따르는 지지 세력과 힘을 합쳐 오메르 왕국과 전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스토리를 따라 루시안을 설득해 리버테일을 몰아내거나.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지.'
전쟁은 싫다. 무섭다.
난이도는 둘째 치고 사방에서 창칼이 날아오는 곳을 내가 어떻게 가라고.
게임 모니터에서만 즐기던 그 웅장한 전투씬을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고 싶진 않다.
'우리 왕국의 피해는 최소화해야 돼.'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일라이 왕국의 새우등이 터지게 해서는 안 된다.
'정 불리하다 싶으면-.'
그땐 엘버스테인을 넘기고 끝내면 된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나는 때마침 리카르 성주와 함께 들어오는 엘버스테인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시오. 리카르 공."
긴장을 한 것인지, 리카르의 안색이 굳어 있었다.
그는 경직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우선, 저희 왕자님을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메르 왕국에 언제든 넘길 수 있는데도 끝까지 그리하지 않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감동했습니다."
리카르 성주는 확실한 엘버스테인의 편이었다.
스토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리카르 성주의 도움은 꼭 필요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판단을 했을 뿐. 별거 아니오."
[리카르]
무력: 68
지력: 72
리카르는 그냥 평범한 기사였다.
어디 하나 특출난 곳이 없는 놈이지만, 영지 개발이라는 특성이 있어서 성에 그냥 쳐박아 놓으면 알아서 개발을 하고 생산량을 뻥튀기시키는 내실용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엘버스테인 이놈은 나중에 왕이 돼서 돈 뜯어 먹을 곳이 참 많겠구나.
부럽다.
"군사는 어느 정도 데리고 오셨소?"
"2천입니다. 오메르 왕국은 아마 2만까지 군사를 모을 수 있을 겁니다."
2만이라.
우리 일라이 왕국이 최소 방어 병력만 놔둔다고 치면 8천 정도밖에 끌어모으지 못한다.
두 배나 차이나는 전력이었다.
"전면전으로 간다면 엄청난 혈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문대로 오메르 왕국이 테키나 족속을 등에 업고 있다면 굉장히 힘든 전투가 되겠지요."
"공은 우리가 패배할 거라 생각하시오?"
"······예?"
"단순히 우리의 숫자가 적다고 해서 전쟁에 패배할 것 같소? 전쟁은 숫자 놀음이 아니오."
리카르 성주는 눈을 껌뻑이기만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허세가 그런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이걸 묻고 싶군. 그 2만의 군대가 전부 몰살당하면 오메르 왕국은 계속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모, 몰살이요?"
"나 아슬란은 진지하게 이 전투에 임할 것이오. 그 말은 즉, 단 한 명의 적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지. 그럼 우리가 승리를 해도 오메르 왕국은 대부분의 기사를 잃는 것이니, 왕권을 계속 보존할 수 있겠소?"
엘버스테인과 리카르 성주, 그리고 그의 부관들 모두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앞에 승리만 보지 말고 그 후의 일을 생각하시오."
"그럼,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나는 슬쩍 웃으며 두 사람에게 루시안을 만나 그를 설득하라는 조언을 해주려는 찰나였다.
"대기사단장님! 급보입니다!"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오메르 왕국 루시안 대기사단장이 대군을 이끌고 와 현재 리브레 평야에 다다랐습니다!"
리브레 평야라면 로난 성까지 코앞이었다.
이런 참을성 없는 놈들을 봤나.
그거 잠깐 못 기다려서 금세 쳐들어왔냐.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리브레 평야에서 만나 협상을 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엥? 협상을?
'이거 운이 따라주는 건가.'
우리가 직접 서신을 보내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협상 요청을 하다니.
원래 스토리와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긴 하지만, 루시안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니 일단 좋게 흘러가는 건 분명했다.
"그쪽도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그러므로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카르 성주가 다급하게 물었다.
"루시안 대기사단장을 만나시려는 겁니까?"
"그렇소."
"무슨 흉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러네.
하지만 그건 미리 기사들을 보내 철저히 확인을 한 뒤에 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거기다 흉계든 뭐든 루시안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날로 로난 성과 일라이 왕국은 말발굽에 짓밟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를 꼭 스토리대로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깟 흉계로 날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놈들도 알겠지."
나는 망토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면서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출정 준비를 하라."
* * *
'하- 이렇게 보니까 더럽게 많네.'
오메르 왕국이 이끌고 온 2만의 군사.
그 위용을 보고 있자니 진작 엘버스테인을 돌려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다시 한번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후회하기에는 늦지 않았던가.
"가겠다."
나 또한 루시안과 마찬가지로 모든 군사를 이끌고 평야 중앙으로 갔다.
그곳에는 천막이 하나 쳐 있었는데, 그 안에는 루시안과 그의 부관들, 거기다 저번에 날 만났다가 도망쳤던 페리마라도 있었다.
[루시안]
무력: 91
지력: 70
대륙 9번째 소드마스터 루시안.
그는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눈을 떼지 않았다.
난 그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저건 왜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야.'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루시안은 리버테일과 엘버스테인 사이에서 고민하며 누구를 주군으로 모셔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그러다 주인공의 설득과 엘버스테인이 가진 왕의 자질을 보고 결국 그는 마음을 정하게 되고 이 길로 오메르 왕국을 향해 그곳에 있는 리버테일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는 것이 정석 스토리였다.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좀 묘했다.
루시안은 전혀 고민하는 얼굴도 아니었고, 엘버스테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여기로 우릴 부른 이유가 뭐지?"
무거운 적막을 깨는 내 물음에 루시안이 답했다.
"너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다."
"······?"
나와 담판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굳이 우리가 머리를 써가며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있나? 기사라면 마땅히 검과 검을 맞대고 싸워야지. 뒤에서 머리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루시안의 말이 점점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난, 아슬란 너에게 정식으로 청하겠다. 나와 기사의 대결을 펼치자. 내가 진다면 목숨을 내놓지. 하지만 네가 진다면······."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목을 내놓아라, 아슬란."
이, 이게 지금 무슨 귀신 호박씨 까는 소리야.
갑자기 왜 나한테 그래?
기사의 대결을 하자고?
그건 말 그대로 일대일로 붙자는 뜻이었다.
쾅-!
하지만 그때 내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엘버스테인이 상을 내려치며 일어났다.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냐! 너희들이 원하는 건 나 엘버스테인이 아닌가?!"
그러자 루시안은 그런 엘버스테인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난 너한테 관심이 없다, 엘버스테인."
"뭐라?"
"나약한 아비를 닮아 똑같이 나약한 놈인 너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이냐."
잠깐.
이건 또 뭔 소리야.
루시안이 왜 저렇게 엘버스테인을 무시하고 있는 거지?
분명 스토리상 루시안은 엘버스테인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야 하는데?
"네 아비가 나약했기에 오메르 왕국은 쇠퇴했다. 그래서 난 왕국을 다시 살리고자 새로운 힘을 받아들였을 뿐. 그걸 깨닫게 해준 건 바로 너였다, 아슬란."
하지만 스토리와 정반대로 루시안은 엘버스테인을 완전히 깔보고 있었다.
거기다 나를 통해 뭘 깨달았다는 거지?
"그러니 넌 거기서 입 닥치고 가만히 앉아만 있거라. 아슬란과의 대결이 끝난 뒤에 네 아비처럼 똑같이 내 칼로 죽여 주겠다."
"네 아비처럼이라면······."
"아- 아직 못 들었나 보군. 네 아비를 누가 죽였는지."
루시안은 음흉한 입가를 보였다.
"네 아비의 숨통을 끊은 건 바로 나다."
그러자 갑자기 옆에서 엄청난 투기가 느껴지더니,
"루시안!!"
엘버스테인이 루시안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콰앙-!
두 사람이 충돌하면서 천막 안에 있던 모든 기사가 칼을 뽑았다.
엘버스테인의 칼에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 루시안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칼을 거둬라."
그런 뒤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천천히 뽑으면서 말했다.
"스승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냐? 엘버스테인."
"닥쳐라. 넌 내 스승이 아니다."
"쯧. 스승에 대한 예의도 없는 놈이군. 어디 덤벼 봐라. 가르침을 주마."
채앵-!!
엘버스테인은 힘을 다해 칼을 휘둘러 봤지만, 루시안은 그의 공격을 아주 가볍게 막아내고 있었다.
엘버스테인이 최근 성장을 했다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루시안이다.
소드마스터라는 위명을 괜히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콰콱-!
"윽!"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엘버스테인은 루시안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옆구리에 상처만 입은 채로 비틀거렸다.
루시안은 그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네 아비처럼 나약하다. 하지만 목숨을 구걸한다면 살려 줄 수도 있다, 엘버스테인."
"!?"
"네 아비도 죽는 순간까지 내게 목숨을 구걸하더군. 얼마나 그 모습이 처량하던지. 원통함으로 가득했던 그 눈동자가 아직도 선하다."
"이놈!"
채애앵-!!
엘버스테인은 이번에도 오뚜기처럼 일어나 루시안에게 칼을 내려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엘버스테인의 무력 수치가 실시간으로 계속 올라가더니 마침내,
[엘버스테인]
무력: 90
지력: 85
90이라는 엄청난 수치를 달성했다.
성장 촉진이라는 특성, 그리고 분노라는 특성이 함께 발현되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 같았다.
"루시안! 네 죄를 내가 물을 것이다."
"······!"
루시안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그의 표정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콰앙-! 콰아앙-!!
철과 철이 부딪히는 것이 아닌,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엘버스테인의 파상공격에 루시안이 밀리기 시작했다.
벌써 천막은 둘의 충돌에 의해 다 뜯겨 나갔으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오메르 왕국과 일라이 왕국 병사들에게도 둘의 싸움을 관전할 수가 있었다.
"이 애송이가 감히!"
뒤로 밀려나던 루시안은 몸을 틀어 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촤아악-!
오히려 그것을 맞받아친 엘버스테인의 의해 그의 왼쪽 어깨에 피가 솟구쳐 올랐다.
"!?"
엘버스테인과 빠르게 거리를 벌린 루시안은 당황하며 제 몸에 흐르는 피를 살펴보았다.
"엘버스테인. 조금 성장했다고는 느꼈다만······."
"너를 내 칼로 반드시 벌하겠다, 루시안!"
옳지. 그래! 바로 그거야!
그렇게 루시안의 목을 따는 거다, 엘버스테인!
나는 열심히 속으로 엘버스테인을 응원했다.
"흐흐흐. 우습구나."
하지만 루시안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내 광기에 휩싸인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설마 네가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전력으로 상대해 주는 수밖에."
그리고 그의 발밑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왔다.
저건 바로,
"마, 마기다!"
어느 기사의 외침대로 저건 마기였다.
루시안 몸에서 저런 게 나온다는 건······.
'설마 마수화?'
콰아아아-!!
내 직감대로 루시안의 몸이 기괴하게 꺾이면서 그 아래 솟구쳐 나오는 마기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강력한 마기 속에서 그르렁거리는 괴물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건 대체······."
그 위협적인 마기에 엘버스테인도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우-."
길고 거센 숨소리가 새어 나오면서 앞을 자욱하게 가리던 마기를 갈라 버렸다.
그곳에는 더 이상 루시안이 아닌, 마수화가 된 괴물이 서 있었다.
[루시안]
*마수화
무력: ???
지력: ???
말도 안 돼.
벌써 이 타이밍에 마수화라니.
마수화는 테키나 족속에게서 받은 마석으로 스스로의 힘을 증폭시켜 괴물이 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단계가 나오려면 스토리가 한참은 진행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초기 단계에서는 상대하기가 불가능하니깐.'
플레이어가 스펙업을 하고 착실하게 성장을 하지 않으면 깰 수가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스토리 초중반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초반 단계에서 마수화가 등장했다.
그것도 루시안을 통해서 말이다.
'아무리 난이도가 극악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잖아.'
이건 개발자들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고인물들의 플레이가 상식을 벗어났다고 해도 최소한 깰 수는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그냥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플레이어를 짓밟아 버리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루시안. 결국 너마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겼구나!"
콰앙-!!
엘버스테인의 일갈에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따라 함께 마검이 되어 버린 검을 내리 찍었다.
"크윽!"
엘버스테인의 무릎이 반으로 꺾였다.
마수화를 통해 키와 몸집이 두 배로 커져 버린 루시안의 칼을 받아내는 것조차 간당간당해 보였다.
"그러니까 네가 나약하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힘을 악마의 힘으로 몰아가며 거부하다니."
"크으윽-."
"이대로 죽어라."
루시안은 칼을 직각으로 휘둘러 엘버스테인의 몸을 단번에 잘라 버리려 했다.
이거 위험해 보이는데.
채애앵-!
하지만 가까스로 그의 칼을 막아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론이었다.
"넌 또 뭐냐?"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아론. 엘버스테인과 힘을 합쳐서 저 괴물을 쓰러뜨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콰아앙-!!
아이고. 저 쓸모없는 녀석들.
루시안이 휘두른 검격에 의해 두 사람 모두 저 먼발치까지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역시 저 둘로는 택도 없는 건가.
"루, 루시안 대기사단장님."
"어째서 저, 저런 모습으로······."
루시안의 부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기들이 모시는 상관이 악마가 되어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자,
퍼억-!
루시안은 검은 마기로 뒤덮인 검강을 쏘아내 그들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날벌레처럼 왱왱거리지 말거라."
"히, 히익!"
살아남은 부관들은 겁에 질린 채로 뒷걸음질을 쳤고, 루시안은 자신의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 하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동안 엘버스테인과 아론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흐흐. 이번 일격으로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 주마."
루시안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별의별 변수를 다 생각해 보긴 했지만, 설마 마수화가 등장할 줄은 몰랐다.
설마 벌써 마수화의 힘을 넘길 정도로 테키나 족속이 빠르게 부활한 것일까.
모르겠다.
그냥 머리가 멍해진다.
이대로 끝인가.
아론과 엘버스테인까지 죽으면 이제 저놈을 막을 사람은······.
"멈춰라."
루시안이 칼에 담긴 강력한 마기를 두 사람에게 쏘아 보내려는 때였다.
"음?"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목소리에 루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미친. 이놈의 허세가 또!
"아슬란. 드디어 나설 마음이 생겼는가?"
루시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 큰 덩치로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놈이 앞으로 발을 뻗는 것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였다.
"이 힘을 보거라, 아슬란. 이 힘이라면 누구도 쓰러뜨리지 못할 자가 없다.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놈의 징그러운 얼굴이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내가 대륙 최강자다."
마수화로 인해 완전히 비틀려 일그러진 괴물 같은 루시안의 얼굴을 나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에 숨결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대륙 최강자?"
활화산처럼 끓어 오르기 시작한 아슬란의 허세가 저 지독한 마기보다 더 독했다.
"악마의 힘 따위를 빌리는 자가 감히 그 위치를 입에 담는 것이냐?"
"악마의 힘 따위? 인간의 힘은 나약하다. 그러기에 새로운 힘을 담아야 한다. 그것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에 골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러니까 네가 우매하다는 것이다."
병적인 허세는 고작 저런 것으로 꺾이지 않는다.
"뭐라?"
"네가 인간의 힘을 아느냐? 그 무엇보다 신성하고 강한 힘을 네가 아느냐? 그걸 모르니 악마의 힘을 빌린 것이겠지."
루시안은 비웃음 젖은 입가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칼을 뽑아 직접 증명해 보이거라, 아슬란. 나의 의지가 무엇인지, 대륙 최강자의 의지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보여 주마."
그러자 바로 그때.
우우웅-!
허리춤에 있던 베라크의 보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얼른 뽑아 달라고.
저 악마를 함께 베어 버리자고 말이다.
하지만,
"대륙 최강자의 의지라······."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검집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검을 붙잡은 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놈이 잘도 지껄이는구나."
검에 담긴 분노와 의지를 내 손끝에 담았다.
"네놈의 피를 내 칼에 묻히는 건 수치이자 모욕이다. 그러니-"
그리고 손을 들어 놈의 칼끝과 저 거대한 몸을 향해 그어 버렸다.
"꺼져라."
그 순간.
⎯⎯⎯⎯⎯⎯!
손끝을 타고 흘러나간 검강이 그대로 루시안의 칼끝을 가르고, 그의 몸통마저 가르며 솟구쳐 올랐다.
"?"
루시안은 자신의 칼이 갈라지는 것을, 그것을 따라 흉측하게 변한 제 손과 팔이 갈라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는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이런······."
나는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알겠느냐, 루시안."
그러고는 경악 어린 눈동자로 서서히 갈라지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네가 나약하다 멸시했던 인간의 힘이다."
"!?"
그와 동시에,
푸확-!
검은 피가 하늘 높이 솟구치며 루시안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32화
1초만 소드마스터 32화
쿠웅-!!
저 거구가 뒤로 쓰러지자 지면이 울렸다.
동시에 내 머리도 종이 울리듯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무슨······!'
검의 의지가 발동되고 기검사와 찰나의 괴력이 동시에 발현되면서 저번 날 거인병을 쓰러뜨렸던 검강이 이번에는 루시안의 몸을 갈라 버렸다.
'이거 완전 죽창 스킬 아니야.'
공평하게 너도 한방, 나도 한방.
그것이 마수화가 된 저 괴물이라도, 누구든 닿기만 한다면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아직 끝이 아니다.'
나는 흔들리던 정신을 붙잡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저 앞에는 오메르 왕국의 부관들과 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아슬란의 허세가 필요하다.'
루시안을 쓰러뜨리고 나서 잠시 가라 앉고 있는 허세에 일부러 몸을 던졌다.
그러자 등허리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는 허세가 내 심장 박동수를 안정시키고 혈맥의 흐름도 잔잔하게 만들었다.
뚜벅- 뚜벅-
'그런데 지금 나 어디 가고 있냐.'
가라앉고 있던 허세를 이렇게 내가 자발적으로 끓어 올리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느낌이 묘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이런 당황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내 정신을 똑바로 붙잡아 주던 까닭이다.
물론,
콰직-!!
"대륙 소드마스터라는 놈이 더러운 마물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어리석은 놈."
이렇게 선을 넘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들끓는 허세를 따라 반토막이 난 루시안의 머리를 짓밟았다.
마기가 빠져나간 그의 몸뚱이는 진흙처럼 가볍게 뭉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그런 뒤,
"너희들은 목석이더냐?"
저 앞에 있는 기사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한번 폭발하기 시작한 아슬란의 허세는 나를 충동질하며 저들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 일갈에,
"!"
그들은 뒷걸음질을 쳐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저들을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너희들도 이 마물과 똑같다면 칼을 들어라."
그리고 당당하게 싸움을 걸었다.
쥐뿔도 없는 힘이지만, 저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허장성세만큼은 가히 대륙 최강이었다.
"으으-."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칼을 뽑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겁에 질린 짐승마냥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 뿐이었다.
그러자 병적인 허세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나 아슬란이 친히 너희들을 상대해 줄 것인즉."
겁대가리를 상실한 허세를 마구 표출해냈다.
"누구든 덤벼도 좋다. 저 마물처럼 정화시켜 주마."
"······."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대로 누군가가 칼을 뽑아 달려들면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우, 우린 마물이 아닙니다!"
그들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우린 악마가 아닙니다!"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루시안 대기사단장님이 저런 흉측한 마물이 될 것이라고는······!"
"거기다 저분은 10년을 넘게 함께 한 부관들을 망설이지 않고 죽였습니다!"
루시안이 악마로 변하는 것을 보고 이들은 큰 충격에 빠진 듯 보였다.
또한 그가 부관들을 무참히 도륙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충격이 클 만했다.
"우린······이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오메르 왕국이 정말 악마의 손에 넘어갈 줄은······."
흐름이 좋았다.
여기서 감언이설로 이들을 설득해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런 한심한 놈들."
그러나 한번 엑셀을 밟기 시작한 병적인 허세가 이대로 멈출 리 없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심취하며 그들을 경멸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스스로를 기사라고 할 수 있느냐? 자신이 섬기는 상관이 어떤 상태인지, 왕국이 누구 손에 놀아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하다니."
"······."
"너희는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하찮은 놈들이다. 무엇을 위해 칼을 드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기사라고 부르기에도 아깝구나."
그런 모욕적인 언사에도 기사들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다행히 이들에게는 전투를 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꿈틀거리는 허세로 그들에게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
"너희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기회."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그들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악마를 혐오하고, 그 힘을 부정한다면 증명해내거라. 너희들은 다르다는 것을."
고요한 침묵 속.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어색한 정적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저들의 눈빛이리라.
"우리도 정말 달라질 수 있는 겁니까?"
"더럽혀진 우리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겁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치만 살피고 있는 페리마라를 노려보았다.
"너희들 곁에 있는 저 악마의 하수인부터 직접 처리를 하는 것이 그 시작이겠지."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페리마라에게 집중되었다.
저들의 분노가 그에게 쏟아졌다.
"페리마라."
"소문은 익히 들었다. 네놈이 흑마법을 부린다지?"
"과연 네가 우리 왕국을 타락시킨 것이로구나!"
그러자 페리마라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 이런 멍청한 놈들! 저런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냐! 너희들의 적은 내가 아니라 바로 저 아슬란이다!"
뭐, 구구절절 너무 옳은 말만 해서 오히려 뜨끔했다.
"감히 말장난이라 했느냐?"
그러나 저런 말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아슬란의 허세에 장작을 던지는 꼴이다.
"이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더럽힌 놈이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히, 히익!"
페리마라는 무섭게 치켜뜬 내 눈을 바라보고는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엉덩이를 바닥에 찧었다.
기사들은 칼을 뽑아 들고 페리마라에게 다가갔다.
"페리마라. 저항하지 마라! 너를 붙잡아 직접 우리가 조사할 것이다. 우리 왕국에 숨어든 악의 세력이 누구인지를!"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이래서 꽉 막힌 기사 놈들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뭐라?"
"내가 너희 같은 놈들에게 순순히 잡혀 줄 거 같으냐?"
그러고는 페리마라가 마법을 펼쳐 저번처럼 도망치려 했다.
그러면서 놈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기다려라. 오늘의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러 오겠다, 아슬란!"
아. 잠깐.
이대로 놓치면 위험할 거 같은데?
페리마라가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언제 어디서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
바로 그때.
"페리마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공 위를 깃털처럼 가볍게 날고 있는 엘버스테인.
그가 푸른 예기를 내뿜으며 낙하하자,
푸욱-!
"크아아악!"
그대로 그 칼이 페리마라의 허벅지를 관통해 바닥을 뚫었다.
"에, 엘버스테인! 네, 네놈이··· 네놈이 감히! 으아악!"
"두 번은 놓치지 않는다."
엘버스테인은 그 칼을 뽑아 이번에는 반대쪽 발등에 꽂아 버렸다.
"으아악!"
"네 죄값을 꼭 치르게 만들 것이다. 페리마라!"
"이, 이 애송이가!"
페리마라는 검은 마력을 끌어 올려 두 손에 모았다.
마법을 발현해 엘버스테인을 죽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뻐억-!
페리마라의 마법이 발현도 되기 전에 어디선가 달려온 아론의 발이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억-!"
페리마라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끌어 올린 마력도 전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 주는 페리마라였다.
엘버스테인은 페리마라의 발등에 찍힌 칼을 뽑으며 말했다.
"고맙네, 아론."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빠져 주었다.
오메르 왕국 기사들이 엘버스테인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님······."
"자네들."
"저, 저희는······."
"괜찮네. 자네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기보다는-"
엘버스테인은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엘버스테인의 정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버스테인]
무력: 85
지력: 85
분노 특성으로 잠시 90까지 치솟았던 무력 수치가 서서히 내려와 85에서 멈췄다.
이제 엘버스테인은 아론과 동실력의 강자가 되었다.
아니. 특성만 잘 활용한다면 이제 아론은 상대가 안 될지도.
갑자기 우리 아론이 초라해 보이는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데, 슬슬 정리해야 할 시점 같았다.
"모두 뜻은 정했느냐?"
나의 말에 기사들은 무어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여전히 악의 힘을 따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눈 감고 딱 한번 더 병적인 허세를 부렸다.
"이곳에서 너희와 저 군대를 모조리 죽여 정화하는 수밖에."
"!?"
말 같지도 않은, 어처구니가 없는 허세였다.
내게는 그럴 힘도 없거니와, 제 아무리 저들이 대기사단장을 잃었어도 우리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우, 우린 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부, 부디 아량을······."
이들에게는 아슬란의 병신 같은 허세가 완전히 먹혀들고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저들의 몸과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거기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엘버스테인 역시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다.
이들은 내가 정말로 저 대군을 몰살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난 이미 충분히 베풀었다. 대답을 하지 않은 건 너희들일 뿐."
그러자 기사들이 하나둘 목청을 높였다.
"아슬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못된 것을 저희의 손으로 바로 잡겠습니다!"
"우리 오메르 왕국은 모든 악의 세력을 몰아낼 것입니다!"
다급하게 예를 차리며 소리치는 기사들을 거만한 고갯짓으로 바라보던 나는 엘버스테인에게 말했다.
"그리하겠다는군."
"예. 저 역시 이들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좋다."
나는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펄럭~
망토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러자 엘버스테인이 나를 붙잡았다.
"같이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내가?
또 이상한 싸움에 휘말릴지도 모르는데?
여기까지 했으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았다.
이걸 더 해 달라는 건 입에 넣은 밥까지 대신 씹어 넘겨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너의 왕국을 되찾거라, 엘버스테인."
그러니 나는 이제 그만 내 왕국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네가 내게 주는 두둑한 보상을 말이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 * *
"······."
엘버스테인은 멀어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닿지 못할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감히 넘을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그저 까마득한 높이에서 모두를 굽어보는 사람 같았다.
'난 영원히 저분처럼 될 수 없겠지.'
하지만 그에게 닿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 그 발끝만큼은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소드마스터 카르만과 비등한 실력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악마가 된 루시안 대기사단장을 단칼에, 아니. 그것도 맨손으로 죽여버렸으니······."
"손으로 그런 강력한 검강을 만들어내는 건 난생처음 봤습니다."
부관들은 아직도 몸에 떨림이 가시지가 않았다.
아슬란이 보여 준 그 놀라운 힘과 상대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모두 압도되어 버린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멋모르고 일라이 왕국과 전면전을 벌였다면······."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평야는 온통 오메르 왕국 병사들의 피로 물들 것이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위에는 아슬란이 서 있을 것이다.
척-!
"······?"
그때 엘버스테인이 아슬란을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왕자의 신분으로서 보이는 것이 아닌, 주군을 향한 충성스러운 부하의 예우였다.
"와, 왕자님!"
부관들이 깜짝 놀라 그를 말려 보았지만, 엘버스테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괜찮네. 이미 저분은 나의 주군일세. 주군께 드리는 작별의 인사도 못 하게 막는 것인가?"
"하, 하지만 왕자님은 이제 곧 왕이 되실 분입니다. 이대로 오메르 왕국으로 돌아가 악마와 결탁한 현 왕을 몰아낸다면······."
그런 그들의 우려에도 엘버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난 기사로서 저분을 내 주군으로 택했네. 자네들과 같이 오메르 왕국을 재건하고 빼앗긴 왕좌를 되찾겠지만, 저분이 내게 가르쳐 주신 기사의 정신을 잊지 않을 걸세. 거기다······."
엘버스테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분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나. 기다리겠다고."
"······."
"비록 내가 왕의 신분이 된다고 해도 내 마음은 항상 저분을 주군으로 섬길 걸세."
그러자 기사들도 더는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그들이 봐도 아슬란은 무언가를 아득히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릇 기사라면, 칼을 드는 자라면 아슬란을 직접 보고 그 위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엘버스테인의 마음을 백번 헤아리고도 남았다.
"돌아가지. 저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을 때이지 않나?"
기사들도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예!"
그렇게 엘버스테인은 혼란스러운 군대를 진정시키고 오메르 왕국으로 향했다.
33화
33화
"오메르 왕국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겠군요."
호레스의 말대로 이제 오메르 왕국은 달라질 것이다.
제 아비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던 리버테일은 엘버스테인의 군대를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
아니. 막을 시도조차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반란으로 왕이 된 사람이고, 그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도 흉흉했던 탓에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아예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놈이 내 은혜를 잊으면 안 되는데.'
엘버스테인의 특성, '의리'를 믿는 수밖에 없다.
게임 난이도가 어떻든 특성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교단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군요. 조만간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악마의 출현은 당연히 가볍게 볼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거기다 악마가 나타난 시일이 너무 빠르다.
아직 놈들의 봉인이 전부 다 풀려 버린 것 같진 않다만······.
'이대로 가면 시간 문제겠지?'
테키나 족속에는 '네피림' 이라고 불리는 등급이 있다.
쉽게 말해서 대악마 축에 끼는, 흔히 말하는 보스 몬스터급이다.
이놈들을 1대1로 잡을 수 있느냐?
스펙업을 무진장해 놓아도 컨트롤이 따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라, 다인 레이드를 통해 사냥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피림 안에서도 등급이 나뉘어 있어 상대를 하게 되면 정말 머리가 어지러울 수준.
'레이드를 하려면 영웅들의 도움이 절실한데.'
패턴을 파훼하고 게임 속 영웅들과 협력하여 테키나 족속을 물리치는 것이 이 게임 후반에서 느낄 수 있는 묘미였다.
충분한 스펙업으로 슬슬 게임이 질리려고 할 때 레이드를 통해서 게임의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이건 너무 빠르잖아. 거기다 아직 주인공도 안 나왔어.'
이 게임의 핵심이 될 주인공.
놈이 어디에 있는지 난 알지 못한다.
내가 정상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영웅 반열에 드는 네임드 캐릭터였다면 주인공이 나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역할이 중요했다.
'주인공이 얼른 등장해야 성물도 모으고 영웅들도 모아서 그 악마 새끼들을 상대할 수 있으니깐.'
모든 알피지 게임이 그러하듯, 주인공만 나온다고 뭐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한 장비도 모아야 하고 주인공을 뒤에서 지원해 줄 영웅 캐릭터도 모아야 한다.
이런 재료들을 잘 모아 놓지 않으면 결국 게임은 터져 버리게 되고 재시작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근데 난 재시작이 안 되잖아?'
켠왕.
켠 김에 왕까지.
하지만 재시작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극악 난이도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두야.
"신전에서 우리 왕국을 방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이번 사태에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까요."
가급적이면 신전이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
더군다나 그 새끼들은 꼭 사건 다 끝나면 맨 마지막에 우르르 몰려오는 영화 속 경찰마냥 그러더라.
"그건 그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더 알아야 할 사안이 있나?"
"아뇨.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맡기도록 하지. 난 돌아가겠다."
"예, 대기사단장님."
나는 조금이나마 휴식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베라크 가문을 오랫동안 섬기고 있는 내 집사 루카스는 시녀들과 함께 내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지 않겠다. 그리고 급한 일이 아니거든 찾지 말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께 온 서신들은 침실에 올려 두었습니다."
"알겠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갑옷을 다 벗어 놓은 뒤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으어. 뻐근해."
이놈의 병적인 허세 때문에 하루종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더니, 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후. 집에 와도 머리가 아픈 건 똑같구나."
테키나 족속이 등장하면서 안 그래도 아팠던 머리가 더 아파진 기분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역시-"
스펙업.
기검사 효과로 찰나의 괴력을 원거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지금 나는 새로운 힘에 목말라 있었다.
"음- 보석을 더 구해서 이 검에 이식을 해야 하나."
루시안을 손가락만으로 쓰러뜨렸을 때의 상황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분명 이 검이 진동했다.
그것도 매우 격렬하게 진동하며 내게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와서 몇 번을 시도해 봐도 그때의 떨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인재풀도 필요해."
엘버스테인도 왕이 되겠다고 떠난 지금, 내게 있는 거라고는 호레스, 아론, 그리고 기껏해야 넬라 정도였다.
"쓰읍-. 인재를 어디서 구하느냐도 문제네."
이 게임이 엔딩까지 달려가는 동안 이 한 몸 지킬 만한 능력과 인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뭐라도 먹을 걸 그랬나."
스트레스성 배고픔인가.
갑자기 단 게 땡기고 입이 심심했다.
나는 루카스를 불러 뭐라도 먹을 것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신 중 내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이건······."
다른 봉투에 비해 유독 고급스러운 빛깔의 편지.
나는 그 황금색 편지를 들어 인장을 풀고 열어 보았다.
[샤를렌 경매에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초대합니다.]
"아, 역시. 샤를렌 경매였구나."
샤를렌 경매는 게임에서 이따금 발생하는 이벤트였다.
노예, 유물, 미술품, 보석, 장비 등등.
다양한 것들을 경매에 내놓고 거금을 받아 챙긴다.
"이거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잘하면 여기서 좋은 아이템을 구매할 수도 있다.
거기다,
[샤를렌 경매]
-경매에 참석하십시오.
-1개 이상의 경매품을 구입하십시오.
-보상으로 5골드를 얻습니다.
덤으로 퀘스트 골드까지 준다.
"이 퀘스트만 하면 상점을 오픈할 수 있잖아?"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아. 갑자기 배부르네."
뭔가 먹으려고 일어난 거였지만, 갑자기 폭식한 듯 배가 부르다.
틈만 나면 일희일비를 하는 것이 RPG의 묘미가 아닐까.
지금은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주인님. 루카스입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루카스가 문을 두드렸다.
"기다리거라."
아니. 조금 쉬려고 했더니.
병적인 허세가 다시 치밀어 오르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구부러진 허리가 똑바로 세워졌다.
"들어와라."
"예."
루카스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무슨 일이지?"
"왕국에서 다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교단에서 보낸 성기사들이 현재 왕국으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
교단 그놈들이?
갑자기 또 기분이 안 좋아졌다.
* * *
성기사는 레이어스 교단을 섬기고 그 교단이 섬기는 라할에게 충성을 다 한다.
여러 왕국이 교단에 반기를 들지 않는 이유는 라할 때문도 있지만, 성기사들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륙 곳곳에서 들어오는 자금으로 교단은 세력을 넓혔고, 당연히 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도 조직했다.
그 집단이 바로 성기사단이었다.
신성한 빛으로 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표지만, 게임 내용을 봤을 때 선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끼치는 놈들이라 모든 플레이어가 극혐한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
그래서 내가 최대한 교단 놈들이랑은 엮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도움보다는 방해가 더 되는 놈들이기 때문에.
"흐음. 교단에서 이렇게 빨리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 성기사들이지 않습니까? 그 숫자가 3천에 달합니다."
"그냥 사제만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성기사까지 동원하는 이유가 뭐랍니까?"
갑작스러운 성기사 파견에 신하들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누구 말대로 할 말이 있으면 사제들만 몇 명 파견하면 될 것을.
이렇게 성기사들까지 몰고 온다는 건 필시 무슨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교단이 벌써 테키나 족속 손에 다 넘어간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과시용인가?
하여튼 겉만 번지르르 한 놈들이.
그렇게 악을 처단하고 싶으면 오메르 왕국에서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빛처럼 빠르게 달려갔어야지.
이놈들을 왕국 안으로 들이는 것이 잘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문전박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받아들였다.
"위대한 분이시여. 레이어스 교단의 성기사단장, 로엔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올 것이 왔다.
거기다 로엔이라.
심지어 네임드 캐릭터가 오다니.
"안으로 들여라."
"예."
전각 입구가 열리면서 로엔과 그의 성기사들이 척척 철갑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동네방네 자기들이 성기사라는 걸 광고하듯이 갑옷부터가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성한 레이어스 교단의 성기사단장, 로엔이라고 합니다."
[로엔]
무력: 90
지력: 75
라할을 섬기고 그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는 성기사답게 스펙도 짱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슬란의 허세가 주눅들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상대를 내 아래로 보듯이 말했다.
"우리 왕국에는 무슨 일로 왔지?"
그러자 로엔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교단의 뜻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전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로엔은 공손하면서도 조금은 위압적인 어투로 말했다.
"교단에서는 오메르 왕국과 일라이 왕국의 전투 중에 발생한 사태에 대해 깊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교단의 소환에 응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교단 소환?
'이건 당연히 가면 안 되지.'
나한테 하등 이익도 안 되는 일이다.
오메르 왕국이 테키나 족속과 결탁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성기사를 보내지 않았던 놈들이지 않던가.
즉, 내부에 이미 테키나 족속에 넘어가 버린 놈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 내가 소환에 응하여 성전 문턱을 잘못 밟았다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하지만 여기서 대놓고 소환에 불응한다면?
'저놈들이 성기사를 3천이나 끌고 온 이유가 있었구나.'
강압적으로라도 나를 데려가 보겠다는 것인가.
성기사들의 숫자가 우리 왕국 수비 병력보다는 적다고 할 수 있으나, 질적으로는 차원이 달랐다.
돈을 쳐발라서 만든 군대인데다가 라할의 신앙심이라는 세뇌 작업으로 두려움까지 없앤 놈들이다.
온갖 마법과 창칼이 날아 들어와도 무서워 하지 않고 돌격을 하는, 광전사들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내 물음에 로엔이 힘을 주며 말했다.
"교단의 뜻은 절대적입니다. 무엇보다 악의 힘을 처단하는 데에 있어서는 말이지요. 그런데도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때였다.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허세가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닿았다.
"절대적이라고 했느냐?"
아슬란의 허세가 '교단의 뜻은 절대적'이라는 말에 뜨겁게 반응한 것이었다.
"건방지구나."
왕처럼 상석에 앉아 상대를 내려다보던 고개는 옆으로 기울어져 턱을 손으로 괴었고, 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거만해져 갔다.
"감히 그따위 말을 내게 지껄이다니."
"······예?"
순간 로엔은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악마가 무서워 숨어 있던 놈들이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것인가?"
허세에 들끓어 충동적으로 내뱉은 나의 도발에 로엔이 소리쳤다.
"저희는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너희는 치졸하게 숨어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기회를 줬지만, 너희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악의 세력을 처단하겠다고 실컷 떠들더니, 결국엔 침묵했다. 내 말이 틀린가?"
"······."
"그런 비겁한 겁쟁이들의 말을 내가 왜 따라야 하지?"
급기야 겁쟁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로엔을 비롯해 그의 뒤에 있는 성기사들까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겁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교단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한번 달아오르기 시작한 병적인 허세에 저런 말이 먹힐 리 없었다.
오히려 나를 더욱 뜨겁게 만들 뿐.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닥쳐라.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열라고 했지?"
그와 동시에,
우우웅-!!
내 옆에 놓여 있던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 저건!"
그 모습을 보고 전각에 모인 기사들이 까무러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거, 검명! 검명이다!"
"이럴 수가. 검명이라니!"
검의 끝을 본 자만이 검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던가.
검의 진동은 강하게 울려 퍼져 전각 전체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검이 왜 갑자기 진동하는 것인지, 저것이 왜 반응을 하는 것인지,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겁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허세에 심취한 내 눈동자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있는 로엔을 노려볼 뿐이었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모두 눈앞에서 사라져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한다는 성기사들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34화
0.01초 소드마스터 34화
"······니미. 뭐가 저렇게 빡세?"
왕궁을 나서는 로엔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러자 혹시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살피며 부단장이 말했다.
"단장님. 항상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제사장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빡센 걸 빡세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로엔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위에다 이걸 뭐라고 보고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슬란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데려가진 못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가서 설득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럼 네가 가서 해볼래? 아까 보니까 한 마디만 더 하면 반갈죽 낼 것처럼 보이던데."
"그, 그건······."
기사들의 반응에 로엔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방금 전 그 광경을 본 자라면 누구나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제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기사라고 해도 말이다.
"아슬란님께 잘 말씀을 드린다면 허락을 해주실 수도······."
"님? 언제 봤다고 님이야."
기사들의 말투에 아슬란을 향한 존칭이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검의 끝을 보신 분이지 않습니까. 기사라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다들 같은 생각이야?"
"······."
침묵은 곧 긍정을 뜻한다.
그 딱딱한 성기사들이 외인이나 다름없는, 그것도 교단을 겁쟁이라 모욕하는 아슬란에게 존경심을 품는다라.
"하긴.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검의 끝을 본 자는 신검합일을 이루어 검에게 혼을 부여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건 그저 전설처럼 치부되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각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상대의 정신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검명을 방금 이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검의 끝을 보는 자는 만물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으며,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만으로도 군대를 멸절시킬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검의 끝을 본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았다.
물론,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듣기만 했을 뿐이다.
저 옛날 대륙 최강의 검으로 불렸다는 '라일라칸'은 검의 끝을 본 유일한 검사로, 그는 300년 전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는 데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천공이 갈라지고 대지는 공포에 떨었으며, 그의 검이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적들은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빴다.
"이거 순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교단에 올라온 보고 중 로엔의 기억에 강렬히 남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아슬란이,
"악마가 된 루시안을 고작 손가락 하나만으로 거대한 검강을 일으켜 그 몸을 반쪽 냈다는 거. 그게 사실이었나 보네."
"단장님께서는 그건 헛소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아슬란이라는 사람을 마주하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행실은 조금 하자가 있어도 실력 하나만큼은 교단에서 인정해 주었기에 로엔은 어울리지도 않는 성기사단장이 되었다.
뭐,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는 하나 로엔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강자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니까.
그 덕분에 지금껏 그는 여러 강자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의 떨림은 없었다.
그 유명한 카르만을 마주했을 때도 이 정도로 손이 땀에 축축해지진 않았다.
그렇기에,
"돌아가자."
아무리 교단의 확고한 명령이라고 해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이대로 말입니까? 교단에서 엄청난 문책이 있을 겁니다."
"그럼 여기서 한바탕 전쟁이라도 벌일까? 넌 저 괴물이랑 싸우고 싶어?"
"······."
"아슬란이 정말 검의 끝을 본 소드마스터라면 지금 우리 군대로는 안 돼. 괜히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하긴 싫어."
로엔이 이 정도로 몸을 사리는 건 기사들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카르만 앞에서도 감히 고개를 추켜들며 대들다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라는 얘기를 듣지 않았던가.
그런 로엔이 아슬란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졌다.
"······."
일라이 왕국 밖으로 나가기 전, 로엔은 뒤를 돌아 아슬란이 있을 왕궁을 바라보았다.
교단과 자신의 힘만을 믿고 함부로 까불고 다니면 안 된다는 걸 오늘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들이 많다.
* * *
"아뢰옵니다. 로엔과 그의 성기사들이 현재 성 밖으로 나가는 중입니다."
전각 안은 충격으로 휩싸여 있었다.
신하들은 그저 입만 쩍 벌리고 있는 터라 웅성거림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가. 알겠다."
그저 아슬란의 목소리만 울림이 남아 전해질 뿐이었다.
"대, 대기사단장님. 방금 그건······ 검명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넬라 기사단장의 말을 시작으로 그들은 하나둘 정신을 되찾으며 거들었다.
"대륙 최강의 소드마스터였던 라일라칸께서도 늘 검명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오직 검의 끝을 본 존재만이 검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들었거늘."
"그렇다는 건 역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그러나 그들의 기쁜 목소리도 잠시.
"호들갑 떨지 마라."
묵직한 아슬란의 음성에 그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불쾌한 얼굴로 아슬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칼을 허리춤에 매며 상석에서 내려왔다.
"검의 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함부로 운운할 만한 것이 아니다."
"······."
"내 힘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 보여줬을 뿐. 그러니 고작 이런 거로 시끄럽게 굴지 마라."
"소, 송구합니다."
아슬란은 전각 입구 쪽으로 당당하고 격조 있게 걸어 나갔다.
펄럭~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퇴장하는 것 역시 한결같았다.
그제서야 기사들과 신하들은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대기사단장님의 위세가 커져 가는 것 같지 않소?"
"예. 숨을 쉬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떻게 저리 계속 강해지실 수가 있는 것인지······."
"저분이야 말로 진정한 소드마스터이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하찮은 우리들은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것이겠지요."
이들의 얼굴에는 아슬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경외심도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이건 강압적인 공포가 아니었다.
카리스마.
사람들을 저절로 따르게 만들고 경외심을 들게 만드는 아슬란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교단이 이제 어찌 나올까요?"
"흐음. 확실히 이번 일로 교단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것은 아닐지."
"교단과 사이가 나빠지면 여러모로 곤란할 텐데······."
신하들의 걱정에 넬라 기사단장이 말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한단 말이오?"
"······?"
"처음부터 감히 우리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무례한 모습을 보인 건 바로 교단이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정작 필요할 땐 오지 않았소. 결국 모든 해결은 우리 위대하신 아슬란님이 하셨지!"
핏대를 세운 넬라의 분노 섞인 목소리에 신하들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음흉한 속내를 가진 놈들에게 우리가 왜 절절매야 한단 말이오! 우리에게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있소. 그분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으며 저 악마마저도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소."
"옳소!"
"아주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교단이든 누구든 아슬란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없소!"
"오오-!"
신하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호레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한때 아슬란을 죽여야 한다며 작당을 하던 그들이 정말 맞는 것인가.
특히 넬라는 아슬란을 무슨 신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광신도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따르는 신을 찬양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변화는 썩 나쁘지 않구나.'
교단과 척을 진다는 건 무척 발칙하고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호레스는 저들의 뜻을 막고 싶지 않았다.
보아라.
그동안 나약하고 저 밑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서로 싸우기 바빴던 일라이 왕국이 지금은 서로 화합하여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강대국이 되는 빛을 말이다.
'그것도 아슬란님을 중심으로 말이지.'
그렇기에 호레스도,
"옳은 말이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없소이다!"
주먹을 높이 들며 저들과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어휴. 이놈의 허세는.'
서둘러 전각 밖을 나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놈의 병신 같은 허세는 전각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지랄이었다.
'지극히 작은 힘은 개뿔.'
나는 전각 안에서 부렸던 손발이 오글거리는 허세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주변에 눈이 많아 속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뿐, 겉으로는 아주 꼿꼿하고 품격 있는 발걸음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확실히 갔겠지?'
내가 이렇게 급히 전각을 나선 것은 로엔과 성기사들이 정말로 돌아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놈들은 군말 없이 돌아간 것 같았다.
3천 명이나 끌고 왔길래 정말 성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놈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났다.
로엔, 그놈 성깔이 어지간하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잘도 참았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돌아갔다고 해서 걱정거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사사건건 교단이 태클을 거는 건가?'
소환 명령에 불응하는 것에 모자라 비겁한 겁쟁이들이라며 모욕까지 했으니, 앞으로 저놈들이 얼마나 내 일을 방해하려 들지.
'하여튼 도움 안 되는 광신도 새끼들.'
그래서일까.
하루라도 빨리 내가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국이 멸망해도 나 혼자만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경매부터 바로 참석해서 쓸만 한 아이템이 있으면 사고, 퀘스트도 깨면 돼.'
그럼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아이템들을 둘러 강제 스펙업을 시켜 버리면 된다.
'기다려라, 개발자 놈들.'
너희들이 아무리 억까를 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고인물이 왜 고인물인지 알게 해 주마.
이 게임을 깨고 나서 내가 꼭 너희들 찾으러 간다.
꼭!
'그런데······.'
그렇게 다짐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나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만지작 거렸다.
'이 자식은 대체 뭐지?'
전각에서 검이 진동하며 마치 울음을 터트리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검명이라 소리쳤다.
'발동 조건이 대체 뭐야?'
내가 부를 땐 대답도 안 하는 놈이, 오늘도 그렇고, 루시안 때도 그렇고 거기다 레베카 때도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봐라.
열심히 속으로 부르고 있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꼭-.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와 심취가 맥스까지 치달으면 이놈도 함께 발광을······.'
순간 바닥을 걷고 있던 발걸음이 멈췄다.
'설마 그건가?'
이 검에게 붙어 있는 또 하나의 효과.
[검의 의지]
-검이 주인의 의지를 따르며 공유합니다.
-검을 다루지 않아도 검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설명에 적힌 대로, 찬란한 베라크의 보검은 나와 의지를 공유한다.
하지만 놈은 평소에 내가 말을 걸어도 가만히 있다가 병적인 허세가 발현되는 순간, 그것도 치사량을 넘나들 정도의 허세력이 올라오는 순간에만 갑자기 반응을 한다.
그렇다는 건,
'의지를 공유한다는 게 아슬란의 허세를 공유한다는 거였어?'
맙소사.
'몸뚱이도 지랄인데, 이젠 검까지 허세를 부리는 거냐?'
이마를 탁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이놈은 전설처럼 치부된다는 에고 소드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아슬란의 허세에 물들어 버린,
허세 소드였던 것이다.
35화
35화.
"칼끝을 똑바로 세워라!!"
"너희는 자랑스러운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다!"
"예!!"
기사들은 오늘도 대열을 맞추고 열심히 창칼을 휘두르며 훈련에 매진했다.
오늘 훈련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론이었다.
"그렇게 가벼이 칼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예!"
내가 알기로 아론에게는 군대의 사기를 올림과 동시에 훈련 효과를 증대해 주는 특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괜히 사기캐 중 하나로 뽑히는 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게임을 플레이 하게 되면 어떤 캐릭터가 좋은지 공략글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얻어두면 좋은 장수 중에 항상 아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근데 기사단만 잘 키우면 뭐하나.'
전략적인 진법과 창칼을 다루는 무력으로 적과 싸워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긴 칼만 가지고 싸우는 중세 시대가 아니다.
마법사들과 그들을 모아서 만들어낸 마법병단이 있는 판타지 세계다.
근접에서는 당연히 기사단이 강하겠지만, 원거리에서는 마법병단을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왕국도 똑같이 마법병단을 키우면 될 일이겠으나,
'어휴. 이 병신 같은 왕국은 어떻게 제대로 된 마법사도 없냐.'
네임드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최소 마력 75 이상의 마법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현재 일라이 왕국에서 마력이 제일 높은 마법사의 스텟이 고작 62였다.
'혹시라도 적국이랑 싸우게 될 때 마법병단이 제대로 안 갖춰져 있으면 곤란한데.'
내게는 마법사가 필요했다.
우리 왕국의 마법병단을 키울 수 있는 마법사가!
'지금이라도 떠돌이 마법사들을 알아봐서 우리 왕국으로 데려와야 하나.'
속세를 떠나 이리저리 대륙을 방황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있다.
당장 방랑자라 불리는 소드마스터도 있는 마당에, 스텟이 준수한 마법사가 없겠나.
문제는 그놈들이 워낙 위치를 자주 바꿔서 쉽게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래도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마법병단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실력 좋은 마법사 하나쯤은 필수였다.
"기사단이 전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했더니 호레스 영감이었다.
"대기사단장님의 위용 덕분에 사방에서 인재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우리 왕국의 기사가 되어 대기사단장님 옆에서 싸우고자 지원하는 자들도 넘쳐 나고 있지요."
호레스는 아주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메르 왕국과도 교역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경제 상황도 굉장히 좋은 상태입니다."
적어도 아직은 돈 떨어질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여러 상단이 우리 왕국을 방문하고 있고, 그에 따라 들어오는 세금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 돈으로 천천히 군비를 올려 신병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우리 왕국의 병력이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질 겁니다."
호레스가 가리키는 곳에는 이제 막 일라이 왕국에 들어와 훈련을 받고 있는 신입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훈련교관의 명령에 따라 제식을 맞추며 걷고 있는 중이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겉으로 드러나는 기사의 품위와 품격을 강조한다는 걸 알기에 제식 훈련에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사단 훈련소에 들어간 훈련병마냥 열심히 딱딱하게 걸음 걸이를 맞추며 힘들게 걷고 있었구나.
이건 내가 아니라 나 이전의 아슬란이 병적으로 허세에 집착하면서 생긴 일 같았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여기서 보니 확실히 제식을 맞춰서 걸으니까 보기에는 참 좋았다.
그래. 약하면 저런 거라도 잘해야지.
"오늘도 훈련에 참관하십니까?"
"잠깐 둘러 볼 생각이다. 이따 입단식도 있고 하니."
내가 이렇게 틈틈이 훈련 상황을 확인하는 이유는 이 게임의 특징 때문이다.
대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훈련에 관심이 없고 기사들에게 전부 맡겨 버리면 어느 순간 놈들은 농땡이를 피우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한번씩 나와 눈을 부라리며 고삐를 느슨하지 않게 잡아 주는 것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아슬란의 특성을 잘 활용해야지.'
[군림], 그리고 [사기] 특성을 잘 활용한다면 훈련 효과를 더욱 맛있게 뽑아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오늘 있을 입단식에서 그 특성들을 이용한다면 군의 사기를 한동안 높이 유지가 가능하다.
"목소리가 그것 밖에 안 되나!? 우리 일라이 왕국에 너희 같이 썩어 빠진 정신을 가진 놈들은 필요하지 않다!"
"죄송합니다!"
"더 크게!!"
"죄송합니다!!"
갑자기 군대 PTSD가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악마 같은 훈련 교관에게 얼차려를 받는 신병들을 살펴보았다.
'쓸만 한 놈은 없나?'
신병들 위에 떠 있는 정보를 확인해 봤지만, 일반 백성처럼 스텟은 나오지 않고 이름만 뜨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끔 떠도 무력 스텟이 30을 밑돌았다.
'아직 성장을 안 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일반 병사들 안에서 금덩이가 나오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긴 했다.
저들은 개개인으로 약할지 모르나, 군대라는 조직으로 모이게 되면 그 힘은 단순히 무력 수치로 가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뭐 하나 건지면 좋을 거 같았는데.'
떡잎이 보이는 놈들을 몇 명 뽑아 내 호위기사로 훈련시킨다면 앞으로 유용하게 쓸······.
[알렉산더]
"······?"
내, 내가 뭘 잘못 봤나?
나는 눈을 껌뻑이며 다시 한번 확인을 해보았다.
[알렉산더]
무력: 65
지력: 65
마력: 65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알렉산더.
이 게임의 주인공.
위기에 빠진 대륙을 구할 영웅!
그리고,
'온갖 S급 특성이란 특성은 다 가지고 있는 사기캐!'
그것이 바로 주인공 알렉산더였다.
이 게임을 무조건 깨라고 개발자들이 만들어 놓은 캐릭터라는 것.
그런 엄청난 분이 지금 저기에 있다.
"26번 훈련병. 그것 밖에 못 하나!"
"죄송합니다!"
"엎드려!"
"옙!"
그것도 훈련 교관의 꽥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흙먼지 속에 얼차려를 받는 중이었다.
* * *
침착하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아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상하잖아?"
알렉산더가 다른 곳도 아니고 대체 왜 일라이 왕국에?
플레이어가 알렉산더를 고르지 않고 게임을 진행할시, 세 가지 루트로 나뉜다.
첫 번째는 알렌산더가 모험가로써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고,
두 번째 루트는 왕국 마법병단에 들어가 대마법사가 되어 대륙을 구하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강대국의 일반 병사로 들어가 그곳에서 기사가 되어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기사단장이 되는 것이다.
"지금 루트를 보면 세 번째인데."
문제는 알렉산더가 들어가는 왕국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카르만이 있는 '칼라' 왕국과 기사의 왕국이라 불리는 '만'.
세 번째 루트를 타게 되면 둘 중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전혀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일라이 왕국에 들어왔다.
"이것은 호재인가······ 아니면 악재인가······."
원래는 스토리 라인에 따라 칼라 왕국으로 들어가 카르만의 인정을 받고 차기 대기사단장이 되어 그 영향력을 대륙 전체에 끼쳐야 한다.
서로 다른 종족끼리의 분쟁을 해결하고 그들을 화합시키면서 힘을 모으는 것이 알렉산더의 역할이라는 것!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지는데."
이걸 어쩐다.
쫓아낼까?
아니다.
내가 별 이유도 없이 쫓아낸다면 알렉산더가 앙심을 품고 나중에 복수할 수도 있잖아.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기에는······.
"차라리 내 옆에다 두고 지켜봐야 하나?"
지금이야 스텟이 65 밖에 안 되지만, 놈의 특성상 순식간에 성장을 이뤄낼 것은 자명한 일.
만약 내가 놈을 호위기사로 삼아 옆에다 놔둔다면 엄청난 방어 수단을 얻게 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주인공을 호위기사로 삼으려는 건 아마 나 밖에 없을 거다."
발칙한 상상이긴 했지만, 주인공이 루트에 따라 무사히 대륙을 구해낼 수 있도록 내가 옆에서 도움을 준다면······.
"나도 살고, 이 대륙도 살고 그럼 모두가 해피엔딩이네?"
그런 뒤 난 이 병신 같은 게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서 나는 박수를 딱! 쳤다.
바로 그때.
"대기사단장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밖에서 들리는 말에, 행복한 상상으로 흐리멍텅하게 풀어져 있던 표정이 굳어지고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곧 나가지."
"예."
입단식 준비가 전부 끝난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쳤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입고 있는 갑옷도 정갈하게 했다.
그리고 절대 빠질 수 없는 망토도 지저분한 곳이 없도록 빳빳하게 세웠다.
'귀찮긴 하지만.'
왕국의 민심을 항상 주시하며 높은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군의 사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야 혹시라도 전쟁이 터졌을 때 더 빠른 대처가 가능하며, 반란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대기사단장님께 모두 경례!"
"충!"
내가 등장하자 입단식을 위해 모여 있는 수천의 기사들이 검을 높이 들며 예를 차렸다.
하-. 그래.
이 맛이지.
군대 사단장들이 왜 꼭 쓸데없이 사람들을 연병장에 가득 모아 놓고 똥개 훈련을 시키나 했더니, 이 뽕맛 때문인 것 같았다.
수천의 병사가 오직 나를 위해 모이고, 나를 위해 경례를 한다면 그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나는 잠시 공간을 가득 채운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기초 훈련을 끝내고 이제 정식으로 일라이 왕국의 수련 기사가 된 신입 병사들을 축하하기 위해 왕국 내에 있는 거의 모든 기사가 모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떨려서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내려오겠지만,
"자랑스러운 일라이 왕국의 기사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들의 시선과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와 심취 앞에서 긴장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저들이 나를 보고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너희는 앞으로 이 왕국과 대륙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혈맥을 따라 펄떡이고 있는 허세를 거스르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절대 순탄치 않을 터. 누군가는 그 과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신입 병사들이 조금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난 이들을 겁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다. 너희의 숭고한 희생을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영원한 별이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 왕국을 위해 죽은 영웅들처럼 말이다."
단지, 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었을 뿐.
"그리고 너희를 끝까지 기억하는 건 바로 나 아슬란이 될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의 정보가 저들의 머리 위로 나타났다.
"라만, 리펠, 제딘, 루오스."
나는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면서 그들 위에 있는 이름을 호명했다.
그러자 그들은 몸을 들썩이며 놀란 눈빛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다 대답했다
"네, 넷!!"
그 외에도 나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이름을 불렀다.
"알리, 로건, 루미네."
"에, 옙!!"
그들 모두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기 바빴다.
그렇게 몇 명 더 이름을 부르다 나는 다시 기사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여기 있는 너희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다."
"!?"
왜냐하면 내 눈에는 이들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너희들 중 누군가 이 왕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을 때, 그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너희들의 이름을 전부 머리에 담아 두고 있다."
나는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를 따라 올라오는 뻔뻔한 허세를 근엄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담았다.
"세상 누구도 너희를 기억하지 못 한다고 해도 나 아슬란은 그대들의 이름과 그 용맹함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저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더욱 나의 허세를 자극하며 들끓게 만들었다.
"너희는 나의 분신이며, 나의 칼이다. 어떤 적을 상대해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는 나 아슬란을 지키기 위해,
"이 왕국과 이 대륙의 미래를 위해."
나의 안전과 이 게임의 끝을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라."
나는 정점을 찍은 허세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와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망토가 길게 펄럭였다.
"와아아아!!"
그 망토의 펄럭임과 함께 병사들이 전부 칼을 높이 들며 함성을 질렀다.
* * *
"대기사단장님!!"
"우와아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은 목소리가 되어 알렉산더는 동료들과 함께 외치고 있었다.
아슬란, 그 위대한 이름을.
"으흐흑. 훈련은 진짜 힘들었지만, 들어오길 잘했어."
"저런 분이 우리의 대기사단장이시라니."
"이제 그럼 내 이름도 저분이 알아주시는 걸까?"
"당연하지! 이제 우리도 일라이 왕국의 기사니까!"
땅이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함성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적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대, 대단하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이토록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가 있다니.
알렉산더는 후들 거리는 다리가 진정되지 않았다.
과연 아슬란은 엄청난 인물, 아니.
"영웅이구나."
저것이 자신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었다.
36화
36화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 보자."
알렉산더는 길게 기지개를 쭉 폈다.
그동안 부모님과 어떤 왕국에도 속해 있지 못 하고 떠돌이 생활만 하다 드디어 정착할 곳을 찾아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은 아직도 왕국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계신다.
어쩔 수 없다.
괜히 잘못 왕국에 발을 들였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 분은 대륙에서 금지하는 일을 저질렀고, 그 핏줄을 타고난 것이 바로 알렉산더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친구를 만들어도 속내를 털어 놓을 수가 없고, 연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신분을 숨기며 섞여드는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진 않았다.
그에게도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
"드디어 떴구나."
"하. 내가 이날만을 기다렸지."
"뭐야. 고작 니 실력으로 감히 이걸 지원하려고 했어?"
"아니. 이거 왜 이래?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보단 차라리 내가 낫지!"
알렉산더는 기사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다가가서 보니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호, 호위기사?!'
무려 아슬란의 호위기사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는 아슬란이 친필로 써 놓은 글도 있었다.
[대륙 최강자의 옆에 늘 서고 싶은 기사가 있다면 누구든 도전하도록.]
짧고 강렬한 문장이었다.
"캬. 대륙 최강자. 이게 우리 대기사단장님이지."
"만약 여기에 뽑히면 대륙 최강자의 오른팔이 되는 건가?"
수련 기사 중, 아니. 여기 왕국에 있는 기사 중에 아슬란이 대륙 최강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저번에 있었던 입단식 이후로 그를 향한 기사들의 신뢰도는 벌써 하늘을 뚫어 버렸다.
'나도 하고 싶다.'
알렉산더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날 입단식에서 보았던,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모든 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던 그 영웅 옆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런데 우리들한테 기회가 오긴 올까?"
"우린 수련 기사잖아. 애송이들이 뭘 할 수 있다고."
"분명 위 기수의 기사들이 다 해먹겠지."
"그래도 신청은 할 수 있다잖아?"
하지만 신청을 하고 나서도 문제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슬란의 호위기사를 뽑는 일이다.
즉, 그의 친위대가 되어 항상 그의 곁을 따라다니는 기사가 된다는 것.
당연히 실력이 있어야 하기에 여러 가지로 시험을 본다고 한다.
"체력도 엄청 좋아야 하고 검술도 뛰어나야 돼. 거기다 대련을 펼쳐서 경쟁자들을 모조리 물리치지 않으면 절대 뽑힐 수가 없대."
"대련도 진검으로 한다면서? 괜히 그러다 죽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알아서 빠지라는 거겠지. 이게 보통 일이야? 무려 소드마스터의 호위기사가 되는 일인데!?"
수련 기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기다,
"뭐야. 햇병아리들이 감히 이런 영예로운 직책에 도전하려고 했던 거였어?"
"이번 기수 놈들은 건방지구먼. 되도 않는 실력으로 감히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친위대가 되려고 하다니."
"뭐, 누구든 도전해라. 밑바닥 깔아 주는 놈들이 있긴 해야지. 크크."
선배 기사들의 조롱에 그들은 더욱 자신감이 하락했다.
그래서일까.
지원 신청을 받는 서관에게 수련 기사 중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딱 한 사람 빼고.
"저, 저도 지원하고 싶습니다."
"!?"
알렉산더가 서관에게 다가와 지원란에 이름을 적어 놓자 선배 기사들이 비웃음을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네?"
"네 얼굴, 기억하고 있다. 대련이 진검인 건 알고 있지?"
"야야. 그러다 울겠다. 아직 수련 기사잖아. 그러니까 딱 팔다리 한 개씩만 베어 버리자고."
그런 살벌한 조롱에도 알렉산더는 꿋꿋하게 신청서를 냈다.
"야! 괜찮겠어?"
"너 그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말해. 아무리 네가 우리 수련 기사 중에서 실력이 가장 좋다고 해도 이건······."
동료들도 걱정하며 알렉산더를 만류했으나, 그는 한번 정한 마음을 되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선배 기사들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전 반드시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호위기사가 될 겁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어떻게?"
"보나마나 본선에는 올라가지도 못 하고 떨어질 거다."
계속된 조롱에도 알렉산더는 꺾이지 않았다.
"떨어져도 상관 없습니다. 그래도 계속 도전할 거니까요. 반드시, 반드시 그분 곁에 설 수 있는 기사가 될 겁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반드시 해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도 근엄한 자세로 정무를 보고 있을 아슬란이 있는 왕궁 쪽을 바라보았다.
* * *
"아. 내정 개노잼."
나는 찢어져라 하품을 길게 하며 배를 긁적였다.
"아효. 게임이었으면 그냥 대충 보고 마는데."
UI에 나오는 정보창을 스윽 보고 지력 높은 문관에게 일을 맡겨 공장처럼 알아서 돌리는 것이 바로 내정이다.
이런 개노잼 시스템을 플레이어가 길게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개발자들도 나름 배려 차원에서 간단히 만든 것인데······.
"나한테는 이게 게임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이 서류 쌓인 걸 좀 봐라.
뭐가 이리 할 게 많은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걸 다 호레스한테 맡기자니······.
"그 영감탱이가 또 뒤에서 무슨 구린 짓을 꾸밀지 모르잖아."
왕궁에 들어오는 물자 장부를 조작해서 빼돌릴 수도 있고, 그걸로 군을 만들어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과대망상이라고?
절대 아니다.
이 게임 시스템은 매우 잔혹하다.
조금이라도 무신경한 부분이 있으면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그 취약한 부분을 파고 들어 플레이어를 괴롭힌다.
만약 내가 마음 놓고 일을 다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면 그놈들이 언제 딴 짓을 할지 모르기에 오늘도 소처럼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신경 쓸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곧 있음 경매장도 가긴 해야 하는데."
샤를렌 경매가 위험한 곳이었다면 고민을 했겠지만, 다행히 여긴 그리 위험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무식하게 검만 휘두를 줄 아는 기사들만 오는 곳이 아니라, 귀족들이 모이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사교 모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네임드 캐릭터가 쟁쟁하게 등장하긴 하겠지만 서로 주먹질을 하며 싸우는 곳은 아니기에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샤를렌 경매]
-경매에 참석하십시오.
-1개 이상의 경매품을 구입하십시오.
-보상으로 5골드를 얻습니다.
이걸 보고 그냥 넘길 순 없지.
거기서 파는 아이템들도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나타나면 하나쯤은 구매를 해볼 생각이었다.
"대기사단장님. 아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론의 목소리에 나는 배를 긁적이던 손을 멈췄다.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있던 발도 내렸다.
거북이처럼 기울어져 있던 목도 꼿꼿하게 세워졌다.
"들어와라."
목소리까지 굵게 만드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대기사단장님의 친위대가 되고자 수많인 지원자들이 경쟁을 펼쳤습니다."
내 친위대, 그러니까 호위기사가 될 인재들을 뽑는 경쟁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당연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목숨을 지키는 일이지 않은가.
어정쩡한 놈들을 데려갔다가 도움도 안 되면 나만 곤란해진다.
그래서 일부러 아론을 내 친위대장으로 삼고 물갈이를 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아론은 꾸준하게 호위 기사들을 새로 뽑고 있었다.
"이번에는 최종 10명의 기사를 대기사단장의 새로운 호위기사로 삼고자 합니다."
아론은 내게 명단을 건네면서 말했다.
"다른 때와 달리 이번 경쟁은 꽤나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수련 기사 하나가 의외의 성과를 보여 주어 결국 최종 10인에 이름을 올렸으니까요."
······수련 기사?
순간 내 머리에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니. 진짜잖아?'
명단에는 알렉산더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세요.
정말 여기에 못 박으려고 하는 건가, 이놈은?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밖에 대기 중입니다."
우르르 안으로 들이기 보다는 그냥 밖에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직접 나가 보니, 이제 갓 입대한 신병마냥 기사들이 빳빳하게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거만하게 한 명씩 내려다 보았다.
다들 평균 무력 스텟이 60 안팎이었다.
엄청 약하지도, 그렇다고 강하지도 않은 적당한 스텟.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알렉산더]
무력: 70
지력: 70
마력: 70
노란 머리에 푸른 눈빛.
과연 진주인공.
그 짧은 사이에 벌써 성장해 버렸나.
하도 사기적인 특성만 가지고 있어서 논밭에 굴러도 쑥쑥 자랄 놈이다.
그래서 원래 스토리 라인대로 따라갔다면 놈은 내 호위기사가 아니라,
'카르만 밑으로 들어갔어야지.'
카르만의 위용 넘치는 모습에 반하여 알렉산더는 황실 기사에 지원하게 되고 종국에는 대기사단장이 되어 활약을 펼치게 된다.
그것이 알렉산더 일대기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개발자의 음모인지 알렉산더는 카르만이 아니라 내 밑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타의가 아니라 본인의 의지로 말이다.
'이놈을 어떻게 하면 좋나.'
주인공의 손에 대륙의 미래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내가 다른 네임드 캐릭터로 플레이를 했다면 주인공이 뭘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최대한 스토리대로 잘 따라갈 수 있게 도와줘야겠지?'
내가 살려면, 이 게임의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았다.
거기다 나는 주인공의 엄청난 비밀을 하나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몇 명 밖에 모르는 그 비밀!
'알렉산더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대륙에서 금지하는 서로 다른 종족간의 사랑으로 태어난 하프.
그것이 알렉산더의 숨겨진 비밀이었다.
그래서 놈은 다른 엘프들처럼 마력을 쉽게 다룰 수가 있고, 마법 성장 속도 역시 굉장히 빠르다.
물론, 이걸 구태여 밝힐 생각은 없다.
지금 밝혀봤자 나한테 좋을 것도 없고.
알렉산더한테 괜한 원한을 살 수도 있다.
하프는 대륙에서 금지하는 일이니, 이 일이 밝혀진다면 알렉산더와 그 부모는 무조건 처형이다.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은혜도 갚겠지.'
주인공은 무조건 선한 인물이니, 지금부터 좋게 대해 준다면 나중에 대륙의 영웅이 되어서도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합지졸들을 보는 것 같군."
이제 막 친위대로 뽑힌 이런 애송이들 앞에서 아슬란의 허세가 좋은 말을 꺼낼 리 없다.
등허리를 타고 전율처럼 퍼져 나가는 강렬한 허세는 거만하고 날카롭게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읏."
알렉산더 역시 나와 눈을 슬쩍 마주치고는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것이 하필이면 내 눈에 띄고 말았다.
"너희는 나 아슬란의 친위대다. 그런데 누가 겁쟁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고 했지?"
이 미친놈.
또 시작이구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끝인가?"
"······."
나는 내 몸 가득 퍼져 나가는 허세를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마른침이 그의 목울대로 넘어가는 것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너희는 나의 얼굴이자, 나의 수족이다. 그에 걸맞는 말투와 행동을 갖춰야 할 것이며, 기사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저지른다면 그 목을 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 하고 있는 알렉산더를 하찮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난 친해지려고 한 건데, 왠지 사이가 더 험악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놈한테서는 겁쟁이 냄새가 나는군."
이 미친 허세의 발현에 주인공과의 관계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이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겁먹은 저 얼굴이 아슬란의 허세를 자꾸만 들끓게 만들었다.
"대륙 최강자가 이끄는 친위대 역시 최강이어야만 한다. 넌 그리 될 수 있는가?"
나의 물음에 알렉산더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대답에서조차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런 놈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난 너 같은 애송이를 곁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욱 그를 몰아붙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이 없다면 떠나라."
그러자 알렉산더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되,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뒤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대기사단장님이 바라시는 그런 기사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당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고의 기사로 거듭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런 알렉산더의 번쩍이는 푸른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슬몃 미소를 지었다.
"기개는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그에게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친위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물론,
펄럭~
붉은 망토를 과장되게 펄럭이며 퇴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37화
37화
"오늘도 정무를 보시느라 바쁘시군요.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밤이 깊었지만, 대기사단장 아슬란이 있는 집무실은 여전히 빛이 환했다.
그런 넬라의 말에 호레스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거의 모든 내정을 간섭해서 하고 계시지. 덕분에 이 늙은이의 일이 줄었다오. 얼마나 꼼꼼하시던지. 가끔 나도 놀랄 정도요."
"기사단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낙하산이라 불리며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지휘관들이 대거 물갈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느 순간 바뀌어 버린 아슬란의 행동에 넬라와 호레스는 제대로 적응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랏일을 도맡아 하고, 거기다 부정 청탁으로 들어왔던 기사들을 전부 내치는 등, 아슬란은 이 왕국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중이었다.
"가끔은 불안하기도 합니다. 저러다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실까 봐."
그런 넬라의 우려에 호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슬란님은 항상 똑같이 아슬란님이셨소. 그저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
이제 호레스 안에는 아슬란을 향한 티끌만큼의 의심도 남이 있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왕국을 위해 저리 열심히 일하고 계시오. 또한 사비를 들여 부족한 돈을 충당하기까지 하셨소."
"사비를요? 그 말씀은 베라크 가문의 돈을 가져와 쓰셨다는 겁니까?"
"그렇소. 성벽 보수와 병사들의 장비를 바꾸는 것까지. 전부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이지. 보통의 위정자라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짊어지게 했겠지만, 우리 아슬란님은 그 고통을 백성에게 전가하지 않으셨소."
그러자 넬라는 경외 어린 눈빛으로 아슬란의 집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국고가 전보다 풍족해져서 군비를 보충해 준 줄로만 알았는데······."
"후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저분이 진심으로 이 왕국을 위한다는 것이오. 이제야 의심을 거둘 수 있겠소?"
"의, 의심이라니요. 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까는 불안하다 어떻다 하더니."
"그, 그건······ 크흠!"
넬라는 헛기침을 뱉으며 호레스의 눈초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더 이상 아슬란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놈의 경을 칠 것이다.
그때 그는 보지 않았던가.
입단식에서 보였던 아슬란의 그 엄청난 위용을.
단 말 몇 마디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슬란은 가능하다.
지금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정녕 없어 보였다.
'거기다 왕국을 위해 자신의 재물도 아끼지 않으시다니.'
넬라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항상 말로는 왕국을 위한다면서 아슬란처럼 모범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다.
그 역시 진심으로 왕국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저 아슬란처럼 말이다.
* * *
"아오. 진짜 돈을 얼마나 쏟아 부어야 하는 거야."
이놈의 왕국은 하여튼 돈, 돈, 돈이다.
그 쓸모없는 국왕 새끼도 그렇고 아슬란도 그렇고 얼마나 왕국의 등골을 뽑아 먹었던 건지, 온통 돈 들어갈 곳만 있었다.
"성벽 보수, 낡은 무기 교체, 갑옷 교체, 군마 교체······ 뭔 축구 게임하나. 교체할 거 밖에 없어."
내가 강대국의 지도자였거나, 아니면 그냥 왕국과 관련 없는 일반 영웅을 플레이 했다면 이런 걸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왕국의 대기사단장이고, 이 왕국이 무너지면 나도 위험하다.
이곳은 나의 방어벽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보수할 것이 있으면 꼼꼼하게, 누가 뒤에서 자재 빼돌리지 않게 잘 감시하며 해야 했다.
"흑흑. 뭔놈의 왕국이 창고에 남아 있는 게 없어서 내 개인 재산을 풀어야 되냐."
억울하다. 억울해.
한번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원 많고 스텟 짱짱한 네임드를 골라 플레이 할 것이다.
"에고고. 아까워. 너무 아까워."
내 피 같은 돈이 아주 쭉쭉 나가는구나.
하지만 내 안전을 위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니 좀 나은 거 같으면서도 종종 손발이 떨릴 정도로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경매에서 물건 살 정도의 돈은 남겨 둬야지."
다행인 건 베라크 가문이 그동안 꽁쳐 둔 재산이 많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재산을 왕국 보수에 쏟아 붓느라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괜찮아. 난 괜찮아."
지금이야 왕국을 안정시키는 단계라서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라.
"그동안 쌓아온 민심도 있고 하니-."
여태까지 쓴 돈을 야무지게 세금으로 뽑아 먹어 주마.
"그럼 왕국 경제가 잘 활성화가 되어야 돼."
일라이 왕국이 최약국인 이유는 외교적으로 다른 왕국과의 관계가 안 좋은 것도 있지만, 지형적인 요소도 무시하지 못 한다.
뒤로는 네릴 산맥이라 불리는 험준한 곳이 있는데, 거기로 넘어가게 되면 다른 종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물론, 300년 전 대전쟁 이후로 잠시 동안 인간과 다른 종족들끼리의 교류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끊겨 버려 사실상 그들은 내 적이나 다름없다.
"엘프랑 외교를 트게 되는 것도 딱 좋을 텐데."
네릴 산맥 너머에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종족이 바로 엘프다.
이 게임을 하면서 엘프와 외교를 하고, 그들과 교역을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엘프가 파는 마력석이나 신비스러운 식물들이 상당한 값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 여왕이 지랄 맞아서 힘들지."
엘프들의 여왕, 엘티히.
엘프 중 최고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이자 300년 전 대전쟁을 통해 테키나 족속을 막아낸 최후의 영웅 중 하나이다.
인간보다 높은 엘프의 수명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눈 시퍼렇게 뜨고 엘프 족속을 통치하고 있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주인공이 나중에 엘프와 첫 교류를 열게 되지?"
하프는 인간에게도, 엘프에게도 환영 받지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삼아 인간과 엘프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흐흠-. 그 말은 내가 알렉산더를 잘 이용해 먹으면 떼돈을 벌 수도 있다는 얘기군."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우리 알렉산더에게 잘해줘야겠다.
물론,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알렉산더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이놈 얼굴만 보면 이놈의 허세가 가만 있지를 못 한다는 게 문제란 말이지.
"무슨 일이지?"
마음 같아서는 따뜻한 눈길과 애뜻한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아슬란의 허세가 그런 소름 돋는 짓을 용납할 리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잘해 주려고 하면, 허세는 더욱 강하게 꿈틀거려 알렉산더를 차갑고 딱딱하게 대하도록 만든다.
"그······."
내가 너무 거만한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알렉산더는 주눅이 든 채로 말을 절었다.
그것이 아슬란의 허세를 또 한번 건드렸다.
"말을 해라. 벙어리냐?"
"소, 송구합니다. 명령하신 대로 방금 모든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나가서 기다리도록."
내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알렉산더를 이번에도 역시 가만 두지 않았다.
"알렉산더."
"예? 아, 예."
"너는 내 호위기사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해야 하며 주눅조차 들어서는 안 된다. 최강자를 호위하는 기사 역시 최강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알렉산더가 나가면서 내 몸에 가득해 있던 허세가 풍선 바람 빠지듯 슈우우 빠져나갔다.
"이러다 진짜 도망가는 거 아니야?"
무슨 군대 선임이 후임 갈구듯이 애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이러다 엘프와의 교역은 물 건너 가고 알렉산더가 나한테서 도망쳐 나중에 복수하러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 *
탁-.
문을 닫고 나온 알렉산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같은 친위대 기사인 루미엔이 말했다.
"또 대기사단장님께 꾸중을 들은 거냐?"
알렉산더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허구한 날 네가 실수를 해서 그렇지."
"근데 대기사단장님이 유독 알렉산더한테 엄하신 게 조금 있긴 해."
기사들이 그렇게 느낄 정도면······.
"정말 날 싫어하시나?"
갑자기 축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걸까.
뭔가 열심히 해보려고 해도 아슬란 앞에서만 서면 숨이 막힌다.
드래곤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드래곤 앞에 선다면 딱 그런 기분일 것이다.
칼날 같은 눈동자로 심장을 움켜쥐고, 모든 것이 압도당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저것이 대륙 최강자가 내뿜을 수 있는 위압감이라는 것이겠지.
"대기사단장님은 널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알렉산더."
그때 아론이 저 구석에서 혼자 침울해 하고 있는 알렉산더에게 다가갔다.
"그분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몰아붙이신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더욱 성장시키시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나도 처음에 그분에게 얼마나 많은 악담을 들었는지 아느냐. 내 미스릴 검을 맨손으로 부수시고, 날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쓸모없는 놈이라고 하셨지."
저 완벽해 보이는 아론에게?
미스릴 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왕국 내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아론이 항상 자랑스럽게 그때 일을 회상하며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분은 적국의 수장이었던 날 받아 주셨다. 그리고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지. 그분을 통해 나는 매일 기사의 명예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칼을 드는 것인지 배우고 있다."
아론의 눈동자에는 신뢰로 가득해 있었다.
"그건 오롯이 그분께서 나를 믿어 주신 덕분이다. 만약 그분이 정말로 널 싫어하셨다면, 곁에 두지 않으셨을 거다. 보아라. 이번 행렬에도 널 넣지 않으셨느냐?"
듣고 보니 그러했다.
중립 지역에서 열린다는 샤를렌 경매는 딱 5명의 호위기사만 대동할 수 있다.
그곳에 알렉산더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주눅들지 말고 더욱 열심히 하거라. 그분의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 그분께서는 너의 안에 있는 잠재력을 보신 거니까."
아론의 말에 알렉산더는 축 쳐져 있던 어깨가 퍼졌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그 어떤 때보다 힘이 들어갔다.
"예!"
반드시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오늘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되었다.
* * *
"환영합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 중립 지역 오크릴입니다."
샤를렌 경매가 열리는 곳은 오크릴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이 대륙에 몇 안 되는 중립 지역이었다.
신전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이곳에서는 어떠한 무력 충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군대의 접근이 불가했고, 소수의 호위기사만 대동해 경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크릴의 경계에 다다르면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샤를렌 가문의 병력들이 경매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호위한다.
손님들끼리의 싸움을 사전에 차단하고 구입한 경매품이 누군가에게 도난 당할 일이 없도록 예방하는 것이었다.
'진짜 돈이 더럽게 많긴 한가 보구나.'
성 안이 온통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샤를렌 가문은 수백 년을 이어온 대륙 최고의 상인 가문이다.
이들이 쌓아온 재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칠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렇기에 이 수많은 왕국이 바글 거리는 곳에서 당당하게 중립 지역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게 꼭 돈지랄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 검의 원탁처럼 여러 네임드들이 참석하는 곳이라 서로 친분을 쌓을 수 있고 외교도 할 수 있어서 사실상 이건 경매라는 명분하에 모이는 친목 모임이었다.
'이왕 온 거 여러 사람을 두루 사귀어서 우리 왕국도 돈 좀 벌어보자.'
가뜩이나 마법 병단을 만들 인력도 없고,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역도 열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행사는 나한테도 중요했다.
거기다 검의 원탁 때와 같이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무식한 놈들만 모이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 서로 부딪힐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누구신가."
긴 금발 머리를 찰랑이는 한 남자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카르펠]
무력: 94
지력: 80
마력: 80
소드마스터이자 마검사로 불리는 카르펠이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이 이번 경매에 참석을 하다니. 한번도 참석하지 않아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거늘. 반갑구려. 검의 원탁 때 이후로 아마 처음이지?"
하지만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은 카르펠이 아니었다.
카르펠을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허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요리스]
무력: 83
지력: 60
저번 날 나한테 잘못 걸렸다가 어깨가 박살 났던 요리스였다.
그런데 분명 내 기억으로는 요리스의 무력이 90이었는데, 지금은 83으로 내려가 있었다. 어깨가 아직 다 회복이 안 됐나?
내가 슬쩍 눈짓을 주자,
"헉."
방금 전까지 카르펠 뒤에서 자신의 큰 키를 자랑하며 걷고 있던 그는 얼른 다리를 수그리고 어깨를 한참이나 아래로 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경매장 안에 신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요리스처럼 키가 큰 기사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놈들까지 내 눈이 닿는 사람마다 최대한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현상을 보고 카르펠이 슬몃 미소를 지었다.
"후후. 감히 아슬란 대기사단장을 내려다보면 뼈도 못 추린다는 소문이 퍼져 다들 저러는 것이오."
누가 보면 진짜 본 브레이커인 줄 알겠네.
하지만 그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병적인 허세가 용솟음 치듯 솟아 올랐다.
나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 내 앞에 바짝 몸을 숙이고 있는 요리스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좋은 자세다."
그러자 요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앞으로도 그 가르침을 잊지 말도록."
38화
38화
"가주님. 오늘 참석 명단입니다."
이번 경매의 주선자이자, 샤를렌 가문의 가주인 비올레타는 집사가 건네는 명단을 받아 살펴보았다.
"흠-. 저번이랑 비슷하구나."
"예. 이번에도 초대장을 받은 고객들이 대다수 참여를 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각 왕국의 신분 높은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샤를렌 경매는 사치 부리기 좋아하는 귀족들의 욕구를 발산할 좋은 소비처였다.
그리고 서로 얼굴 보기 힘든 각 왕국의 귀족들이 사교 모임처럼 모이기에 좋은 명분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를 위정자들이 그냥 놓칠 리 없지.
덕분에 샤를렌 경매는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아 선택 받은 소수의 높은 자들만 모일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음?"
그런데 그때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오늘 참석자 명단에,
"아슬란?"
이제까지 여러 차례 초대장을 보냈지만 한번도 이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는 그 이름, 아슬란.
"이자가 여기에 참석을 하다니."
요즘 대륙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아슬란의 이름이 가장 먼저 튀어 나올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유한을 죽이고 소드마스터가 된 뒤에도 여러 활약상을 보여 주고 있다. 거기다 지금은,
"악마 사냥꾼이라는 별명도 생겼다지?"
"예. 라할께서 선택한 빛의 기사가 아니냐는 얘기도 정말 많습니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아슬란이 그런 평가를 듣다니."
대륙 최고의 상단답게 샤를렌 가문에 들어오는 정보량은 어마어마하다.
각 인물에 대한 정보집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히 아슬란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허세가 심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했는데."
물론 최근 정보는 많이 달라졌다.
옹졸함, 치졸함과 같은 이야기는 쏙 빠지고 백성을 위할 줄 알고 일라이 왕국에서는 거의 신처럼 떠받들여질 정도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엄청나다.
또한 그를 향한 기사들의 충성심도 매우 높아 보초를 서는 일개 병사조차도 거금을 준다는 유혹을 뿌리치며 아슬란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정보상인들 물갈이를 한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손바닥 뒤집 듯이 정보가 바뀌다니."
"그건 우리 뿐만이 아닐 겁니다. 레이어스 교단에서도 갑작스레 바뀐 아슬란의 행동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합니다."
샤를렌 가문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가진 곳이 바로 레이어스 교단이다.
거기서도 당혹스러워할 정도라면 정보 상인들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결국 아슬란, 그자가 문제라는 것이군."
"예. 도무지 다음 행보가 예상되지 않은 자입니다."
왠지 흥미가 가는 사내였다.
특히 가장 궁금한 것은,
"그자가 지금까지 침묵하다 갑자기 칼을 뽑아 들기 시작한 것이 악마 때문이라던데?"
"확실하지 않은 정보이긴 하지만, 현재까지의 행보를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
비올레타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레길로트의 팔찌를 경매에 내놓거라."
"······하지만 그건 팔리지 않는 경매품이지 않습니까?"
"그래. 볼품 없어 보이는 물건이긴 하지. 생긴 거에 비해 가격도 좀 있는 편이고. 소문도 안 좋지."
이 격식 높은 귀족들은 외관을 중요시하게 여긴다.
경매품으로 올라오는 물건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고 남들 눈에도 좋아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구매를 한다.
그렇게 입찰 경쟁이 붙으면 끝까지 해당 물픔을 얻고자 돈을 올리고, 마침내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해당 물품을 손아귀에 넣게 되면 잠시나마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경매가 주는 원초적인 쾌락이었다.
"한번 올려보거라."
그에 있어서 레길로트의 팔찌는 귀족들의 사치품과 거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장비가 오래 돼서 복원을 해 놓아도 외관상 좋지가 못 하고 특히,
"괜찮으시겠습니까? 고객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이 팔찌를 사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이 팔찌에 붙은 옵션이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확히 어떤 옵션인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마법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저 마탑조차 이 팔찌가 가진 효과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이 팔찌가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실험을 중단해 버렸다.
그게 귀족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지면서 모두 이 팔찌를 외면하게 된 것이었다.
"아슬란이 가진 돈은 많을 테고."
베라크 가문이 자금력 하나는 굉장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매년 초대장을 보낸 것이고.
"오늘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군."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에 절어 그저 사치품에만 돈을 쓸지, 아니면 다른 곳에 관심을 둘지.
얼른 이 호기심을 풀고 싶었다.
* * *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하나 있는데······."
"대기사단장님의 활약상은 매일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베라크 가문이 저희 가문과 긴밀하게 교류를 한다면-."
"대기사단장님 같은 분에게 배우자가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사실 제게 어여쁜 딸 아이 하나가 있습니다만······."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귀족들은 각자 잔을 든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중간하게 껴서 그냥 뻘쭘하게 서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으로 모여 들었다.
꽤나 솔깃한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이놈의 허세 때문에 나는 줄곧 무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나는 아무 자리나 찾아 앉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내 곁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였다.
"어머. 여긴 자리가 비었네요. 앉아도 될까요?"
하지만 그중 한 여인이 재빨리 엉덩이부터 들이밀어 먼저 앉으려고 했던 사람을 쫓아내고 자기가 앉았다.
"······그러시오. 어차피 정해진 자리도 아니니."
처음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으나,
[라파엘]
무력: 50
지력: 87
마력: 87
"!?"
그 위에 뜨는 정보에 나는 순간 어깨를 들썩일 뻔했다.
라파엘.
이곳 경매장에 참석한 네임드들이 워낙 많아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지만, 라파엘은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곳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 초대장도 못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생김새는······.
'변신술인가.'
내가 아는 라파엘이란 캐릭터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자신의 특기를 부려 다른 이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면 제 미모에 넋이 나가 버리신 건가?"
"······."
"호호. 농담이에요. 처음 뵈어요. 저는 네르빌 가문의 엘리샤라고 해요."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다.
아마 귀족 가문 중 하나일 터.
"반갑소."
나는 대충 인사만 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은 주인공의 동료 중 하나로, 그녀는 엘프 출신이다. 그것도 주인공과 비슷한 하프.
물론,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 무려 악마라 불리는 테키나 족속과 엘프 사이에서 나온 다크 엘프였다.
'알렉산더 때문에 온 건가?'
하지만 아직 둘은 이렇다 할 연결점이 없을 텐데.
"2천만! 2천만 리넨까지 나왔습니다!"
혼자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경매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참 돈 많은 새끼들 많구나.
[리오네의 망망대해]
-그림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별 효과도 없고 그냥 금 좀 처바른 미술품이 2천만 리넨까지 올라갔다.
2천만 리넨이면 대체 얼마야.
하지만 이건 애교 수준이었다.
"5천만 리넨! 다음 분 없으십니까? 그럼 5천만 리넨으로 낙찰입니다!"
별 효과도 없는 아이템에 귀족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근데 확실히 보는 재미는 있는 것 같았다.
저 쓰레기 물품 하나에 얼마나 돈이 올라가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 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하. 내가 샤를렌 가문 네임드로 플레이를 했다면.'
그럼 여기 있는 돈이 전부 다 나의 것인데!
여기서 소비되는 돈을 10%만 가져와도 왕국 보수를 완벽하게 끝내고 당분간 돈 걱정 없이 살 것이다.
더군다나 왕국 보수와 군비 충당에 돈을 많이 써서 여기에 쓸 수 있는 돈도 한정적이었다.
'큰일인데.'
샤를렌 경매 클리어 조건은 여기서 경매품 하나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이렇게 돈을 올려 버리면 과연 물건 하나는 제대로 건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설사 낼 수 있는 돈이 있다고 해도 쓸모없는 것들에 큰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대기사단장님은 사고 싶은 게 없으신가 봐요?"
라파엘이 내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사고 싶은 거?
아직까지는 없다.
효과라도 좋은 게 있으면 하나 구매해 볼 텐데, 오늘 경매는 영 아니었다.
'하긴. 원래 이렇게 랜덤이긴 하지.'
게임에서도 자주 겪던 일이었다.
샤를렌 경매에서 얻는 아이템은 랜덤이라 오늘처럼 외관상으로만 보기 예쁜 쓰레기들이 널려 있을 때가 많았다.
'아. 그럼 진짜 쓰잘데기 없는 걸 하나 사야 하는 건가.'
경매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곧 있으면 마지막 물품이 나올 차례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퀘스트 실패인데.'
지금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하지만 진짜 살 가치는 없고 가격만 비싼 것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제 마지막 경매품입니다."
이런.
어영부영하다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다.
"마지막 경매품은 항상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물품입니다."
항상 화제가 되었던 거?
"바로 레길로트의 팔찌입니다."
레길로트의 팔찌?!
드디어 쓸 만 한 게 하나 나오는구나.
그런데 경매장 분위기가 무척 싸늘했다.
귀족들은 서로 웅성거리며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현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레길로트의 팔찌는 그 효과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만 있을 뿐입니다."
사회자도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이 팔찌를 착용하게 되면 악마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확인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이 팔찌는 전설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레길로트가 만들어낸 팔찌이니, 분명 팔찌에 있는 효과도 엄청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반응은 여전했다.
아. 그래.
레길로트의 팔찌에 붙어 있는 괴담 때문이구나.
원래 레길로트의 팔찌는 히든 퀘스트로 얻게 된다.
'그 괴담이 좀 살벌하긴 했지.'
그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레길로트의 팔찌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괴담이 퍼져 있어 누구도 착용하려 들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와 관련된 아이템이라고 하면 고귀한 우리 귀족님들께서 부정한 물건이라며 꺼려 할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이 게임을 몇 번 클리어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레길로트의 팔찌가 굉장히 유용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레길로트의 팔찌]
-전설의 대장장이 레길로트가 만든 팔찌입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전환합니다.
-어둠 계열에 200%의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팔찌 착용시 랜덤으로 옵션이 하나 더 부여됩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바꿀 수 있고 어둠 계열, 그러니까 테키나 족속 같은 악마들에게 추가 데미지 200%나 적용시키는 미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100만 리넨으로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게 얼마나 올라가냐는 건데-.
"······."
아무도 입찰을 넣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없으십니까?"
정말 아무도 없어?
저 꿀템을 진짜 아무도 안 사?
아무리 괴담 때문이라고 해도 저걸 그냥 넘긴다고?
"아무도 없으시다면 경매품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경매품을 내리려고 할 때, 나는 얼른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놈의 허세 때문에 빨리 손을 들지도 못했다.
최대한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자세로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아! 7번 고객님께서 입찰을 하셨습니다. 110만 리넨 없으십니까? 110만 리넨?"
제발 없어라.
3, 2, 1.
이윽고,
"7번 고객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는 물론, 쓸만 한 아이템까지 얻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일제히 내게 쏠리는 시선 때문에 그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경매장에 모인 귀족들은 왜 내가 저런 물건을 산 것인지 의문과 호기심 섞인 눈빛을 보였다.
"신기하네요. 아슬란님은 과연 어떤 물건에 관심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레길로트의 팔찌를 입찰하시다니."
그때 옆에서 내게 말을 거는 라파엘이었다.
잠깐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라파엘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저 팔찌에 무슨 효과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데. 아슬란님은 혹시 그게 뭔지 알고 계신가요? 아니면 아슬란님에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시는 건가요?"
난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와 내가 친해져서 좋은 것이 있을지, 아니면 단점이 더 많을지.
하지만 그걸 따져 보기도 전에,
"글쎄."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아슬란의 허세가 먼저 충동적으로 내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엘프의 눈에는 저것이 다르게 보이나 보지?"
"!?"
그러자 라파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에, 엘프요? 갑자기 그게 무슨······."
나는 그녀가 뭐라 변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런 조잡한 변신술로 내 눈을 속이려 들다니."
오히려 라파엘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한번만 더 이런 장난을 친다면 그땐 가만 두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공의 동료 중 하나인 라파엘과의 사이는 이것으로 완전히 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39화
1초만 소드마스터 39화
"뭐, 뭐야······."
대체 뭐야?!
"어떻게 안 거지?"
라파엘은 저 멀리 망토를 펄럭이며 사라지고 있는 아슬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변신술이 조잡해?"
그럴 리가.
이제까지 누구도 그녀의 변신술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엘프들의 여왕, 엘티히 말고는 없다.
그만큼 이 변신술은 가히 완벽했다.
무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런데,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일말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 그가 이 변신술을 간파하다니.
"······."
100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라파엘의 변신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저 아슬란이 놀라울 정도로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 카르만과 필적한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특히,
'한번만 더 이런 장난을 친다면 그땐 가만 두지 않겠다.'
그 박력 넘치는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것 같았다.
나 미쳤나 봐.
그 살기 어린 목소리가 왜 이렇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거지?
"이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겠는데."
샤를렌 경매에 참석을 하게 된 건 라파엘 그녀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전부 나라의 고위직이다.
답답하고 자신을 구속하기만 하는 엘프들의 땅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들 중 적당한 사람을 골라 왕국의 마법사가 되는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오길 잘했어."
그녀는 어떤 왕국으로 가야 할지 이미 마음을 정했다.
* * *
"허-."
같은 시각.
샤를렌 가문의 가주, 비올레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던 팔찌를 아슬란이 가져가 버렸다.
"르네. 네가 봐도 아슬란은 처음부터 저 팔찌를 사려고 여기 온 거 같았지?"
그녀의 집사, 르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많은 경매품이 지나갔지만, 아슬란은 앉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레길로트 팔찌에만 반응을 했지."
"맞습니다. 처음부터 저걸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슬란은 마지막에 저게 나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레길로트의 팔찌는 원래 경매 예정 목록에 없는 거였다.
비올레타가 충동적으로 마지막에 끼어 넣은 물품이라는 것.
그런데 아슬란은 마치 그것이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했다.
"경매에 참석하는 귀족 중 아슬란과 같은 자는 처음 보는군요. 본인을 과시하고 사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경매품에 돈을 아끼지 않는데 말입니다."
베라크 가문의 자금력을 생각했을 때, 아슬란은 충분히 경매품을 쓸어 담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이 광기나 다름 없는 경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하고 품위 있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두 탐욕에 눈이 멀어 돈을 물처럼 쓰고 있을 때도, 아슬란은 끝까지 묵묵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그 모습이 비올레타에게는 꽤나 신선하게 보였다.
그건 비올레타 뿐만이 아니었다.
"아슬란님께서 이번에 레길로트의 팔찌를······."
"사실은 엄청 고귀한 팔찌였던 것이 아닐까요?"
"허허. 악마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그 팔찌를 사시다니."
"아슬란님이 사신 것이니,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이런. 나도 한번 레이스를 해볼 걸 그랬나."
보통 경매가 끝나고 나면 귀족들은 수다를 떨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청탁을 넣곤 한다.
그렇게 서로 상부상조하며 각자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전부 아슬란, 아슬란, 아슬란.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아슬란 얘기로 시끄럽다.
아마 오늘 밤 내내 아슬란 얘기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참 어딜 가도 주목을 받는 사내구나, 아슬란 그자는."
"최근 보여 주는 거칠 것 없는 행보가 이목을 끌긴 했지요. 오늘도 충분히 시선을 집중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고요."
음지에 숨어 있다 혜성처럼 등장한 아슬란.
한두 번쯤 조용히 지나갈 만도 한데,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남자였다.
"그런데-."
비올레타는 붉은 부채를 살랑이며 중얼거렸다.
"그 팔찌를 대체 왜 노린 거지?"
아슬란 때문에 그 팔찌를 내놓은 것이긴 하지만, 정말 그걸 사갈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악마와 관련이 되어 있으면 아슬란이 무슨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호기심에 머리 끝까지 달해 극으로 치달았다.
"혹시 아슬란 그자는 저 팔찌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건가?"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여러 왕국에 있는 저명한 마탑에 의뢰를 해봤지만, 누구도 이 팔찌가 가진 힘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거야 그놈들이 겁을 먹어서 그런 거고. 그중에서 이 팔찌를 제대로 만져본 놈이 없지 않느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급기야 팔찌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미쳐 버린다는 괴담이 퍼지면서 마탑 역시 레길로트의 팔찌를 감정하는 걸 꺼려했다.
그렇다고 샤를렌 가문의 청을 거절할 순 없으니, 질질 시간만 끌다 악마와 관련된 힘만 확인했을 뿐, 자세한 건 알 수 없다는 식으로 결말을 내 버린 것이었다.
"내가 이래서 마법사 놈들을 싫어한다. 음흉하기만 하고 실속이라고는 전혀 없는 놈들이야."
하지만 그 마법사들도 모르는 것을 아슬란은 알고 있다라-.
악마 사냥꾼이라는 명성이 은근하게 퍼지고 있는 이때에, 하필이면 그가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이 팔찌를 손에 넣었다.
당연히 흥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슬란을 잘 주시해 보거라. 그 팔찌를 과연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하구나."
"예, 가주님."
그녀는 가느다란 턱을 접어놓은 부채 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내에게 이토록 관심이 가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 * *
나는 지금 무척 기분이 좋다.
왜냐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흐흐흐.
바보처럼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다.
경매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라파엘과 사이가 틀어진 건 안타깝긴 하다만.'
히든 퀘스트가 아니면 얻기 힘들다는 레길로트 팔찌를 거저 얻게 되었고,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상점을 오픈합니다.]
드디어 상점이 오픈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소지하고 있는 금액은 정확히 50골드였다.
빠득빠득 이를 갈며 백성들의 탄원을 들어주고, 목숨을 걸면서 10골드짜리 퀘스트를 클리어해 만들어낸 승리였다.
'그럼 어떤 아이템들이 있는지 한번 봐볼까나?'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어느 비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 나는 상점창을 열었다.
[라오렌트의 창]
[융겐의 마력석]
[다르트의 활]
[칼로루스의 심장]
다 내가 알고 있는 아이템들이었다.
라오렌트의 창은 목표에다 던지면 그 아래로 번개를 내리꽂는 능력이 있었고, 융겐의 마력석은 나의 마력을 증폭시켜 강한 마법을 쓸 수 있게 도와 주는 아이템이었다.
그 외에도 전설급으로 치부되는 아이템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 이게 행복이구나."
하지만,
[주의사항]
-상점 물품은 오픈 때마다 랜덤으로 바뀝니다.
-한번 상점에 판매 목록으로 올라왔던 것은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습니다.
-가격은 모두 동일하게 50골드입니다.
이런 악랄한 놈들.
이렇게 좋은 아이템들을 보여 주면서 한번에 하나씩 밖에 못 사게 하다니.
거기다 한번 초기화가 되면 같은 물품은 절대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
"뭘 사야 하지."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아슬란의 스텟을 고려했을 때, 지금 아슬란에게 가장 좋은 아이템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목록을 쭉 살피던 중.
"어?"
한 아이템에 눈이 꽂혔다.
"이, 이게 왜 여, 여기에 있어?"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았다.
[모비로스의 팬던트]
지금까지 내가 봤던 것들이 전설급으로 분류가 된다면 이건 무려 신화급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게임 클리어에 필요한 팬던트잖아!?"
대륙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총 6개의 팬던트.
신화 속 이야기만으로 알려져 있던 이 팬던트들은 게임 클리어에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들이었다.
이것들을 다 모아야만 테키나 족속을 봉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의 힘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 클리어 조건이 바로 주인공이 6개의 팬던트를 모아 모든 악의 세력을 대륙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되는 모비로스의 팬던트가 이 상점창에 떡하니 자리를 하고 있었다.
"미친."
팬던트는 매 게임마다 위치가 랜덤으로 뜬다.
어디에 팬던트가 숨겨져 있는지는 수많은 퀘스트와 여러 소문을 따라가야만 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점에서 뜨는 건 처음 봤다.
"이건 고민할 것도 없는 거잖아."
게임 클리어를 위해서라면, 내가 목숨을 보전하며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 나가려면 이 팬던트가 꼭 필요했다.
물론, 나중에 주인공한테 팬던트를 넘겨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어차피 그건 마지막 순간에나 필요한 거고.
그때까지 아주 유용하게 써 먹을 작정이었다.
[모비로스의 팬던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래.
솔직히 라오렌트의 창도 무척 탐이 나지만, 이걸 포기할 순 없지.
"이걸로 하겠다."
[상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문구가 사라짐과 동시에 내 손 위로 모비로스의 팬던트가 떨어졌다.
[모비로스의 팬던트]
-악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
-여섯 개로 나뉜 팬던트들을 하나로 모으면 전설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풍족의 신, 모비로스의 가호가 함께 하는 팬던트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비로스의 팬던트가 가진 정보였다.
그 다음이 가장 중요했다.
팬던트는 게임 플레이 때마다 나오는 위치도 바뀌고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도 바뀐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능력을 줄 것인지······.
-모든 스킬의 쿨타임을 초기화 시켜줍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30분)
"!?"
쩍 벌어진 입을 틀어 막았다.
모든 스킬,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찰나의 괴력 스킬의 쿨타임을 초기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일회성에 불과했던 찰나의 괴력을 2번이나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미친 능력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절로 감사의 말이 튀어 나왔다.
쿨타임 초기화는 지금 내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옵션이었다.
나는 팬던트를 꾹 쥐었다.
그러자 팬던트가 사르르 녹아내리더니, 내 팔 안으로 스며 들어가 손목에 소라 모양 같은 표식을 남겼다.
첫 번째 팬던트를 모았다는 증거였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안에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에 음흉하게 혼자 웃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헤실헤실 거리던 얼굴은 근엄하게 뒤바뀌고 풀어졌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냐?"
"오늘 경매의 진행을 맡았던 바르엔이라고 합니다."
"들어와라."
검은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바르엔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구매하신 경매품을 확인받기 위해 왔습니다. 잠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르엔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귀족들이 나를 보고 일제히 고요해졌다.
그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마지막 경매품이었던 레길로트 팔찌가 회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품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뭐 이상이 있을 게 있나.
"······괜찮아 보이는군."
"예. 극도로 위험한 물품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배송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배송? 그럴 필요 없다. 그냥 가져가겠다."
굳이 귀찮게 배송까지 할 필요 없었다.
이 좋은 아이템이 어떤 옵션을 가졌는지 확인하기에도 바쁜데, 이게 배송될 때까지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라는 건가?
"하, 하지만 레길로트의 팔찌는 어떤 사악한 힘이 깃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잘못 만지셨다가는 봉변을 당하실 수도 있어 저희가 마법 보호를 걸어 안전하게 포장을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 바르엔도 그렇고, 저 물품을 마법 보호가 되어 있는 작은 방석 같은 것에 받쳐서 가져가야 하는 직원들도 그렇고, 모두 겁에 질려 있는 얼굴이었다.
아까 경매 때는 다 헛소문이라며 떠들더니, 이들도 팔찌에 대한 괴담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사악한 힘?"
저들의 겁 먹은 표정과 목소리에 마치 먹잇감을 만난 것처럼 아슬란의 허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군."
그러면서 나는 팔찌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바르엔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됩니다! 잘못 만지셨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면서 바르엔은 뒷걸음질을 쳤다.
직원들도 벌써 멀찍이 도망친지 오래.
이들 모두 팔찌에 깃든 사악한 힘에 안 좋은 영향을 받을까 두려운 것이었다.
"······."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눈빛에 담긴 긴장감, 기대감, 호기심, 등등.
그 모든 시선이 한 데 모이자,
"건방지구나."
허장성세는 극에 달하고,
"감히 이런 팔찌 따위가,"
심취는 나를 더욱 허세의 수렁으로 빠져 들게 만들었으며,
"추악한 악마의 힘 따위가,"
그것이 극에 달하면서 나는,
"이 아슬란을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턱-
나는 망설이지 않고 팔찌를 집어 들었다.
"헉!"
사람들이 기겁하며 기함을 터트렸지만, 난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그것을 팔에 착용했다.
그러자,
촤아아악-!!
검은 기운이 그 안에서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악마의 힘이다!"
"여, 역시 저건 저주받은 팔찌였어!"
"아슬란님! 지금이라도 얼른 팔찌를 벗으십시오!"
하지만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건 처음 이 팔찌를 착용했을 때 나오는 이펙트에 불과하다.
그걸 말해 주고 싶어도 아슬란의 허세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호들갑 떨지들 마라."
이윽고,
"엇!?"
"저건?"
검은 기운은 전부 사라지고 그 안에서 찬란한 빛이 새어 나왔다.
회장 전체를 눈부시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고 아름다운 빛이었다.
"이건······?"
그것을 보고 귀족들이 하나 둘 소리쳤다.
"라, 라할의 빛이다!"
"저 팔찌에 담긴 악마의 저주를 그 빛으로 정화한 것인가!?"
저주라니.
어림도 없는 헛소문이다.
나는 잘 착용이 된 팔찌를 살펴보았다.
[레길로트의 팔찌]
-전설의 대장장이 레길로트가 만든 팔찌입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전환합니다.
-어둠 계열에 200%의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팔찌 착용시 랜덤으로 옵션이 추가로 하나 더 부여됩니다.
나는 입가를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언제 저 먼발치까지 달아난 바르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나를 넋이 나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
"왜 대답이 없지?"
"아! 예, 옙! 자, 잘 알겠습니다!"
그는 얼른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를 지나쳐 입구로 향했다.
뚜벅뚜벅-.
느릿하면서 격조 있는 나의 발소리만이 회장 안에 울려 퍼질 뿐.
감히 입도 벙긋하지 않을만큼 고요했다.
나는 거만한 고갯짓과 눈빛을 풀지 않은 채 경매장을 나섰다.
그리고,
[레길로트 팔찌에 새로운 옵션을 부여합니다.]
40화
1초만 소드마스터 40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정말 아슬란님이 빛의 기사였던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빛의 기사는 오직 교단에서만 나올 수 있소!"
"그럼 방금 전 그건 뭐라고 설명하실 건데요?"
아슬란이 레길로트의 팔찌를 가지고 나간 뒤로 회장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경매 때 가격이 1억을 넘어 섰을 때도 이 정도로 후끈하진 않았다.
"대체······ 방금 내가 뭘 본 거야?"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지.
상상 이상의 퍼포먼스라고 해야 하나.
레길로트의 팔찌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었는데, 그걸 직접 착용하고 그 안에 깃든 악의 힘을 정화하는 것까지 보여 주다니.
비올레타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르네도 거들었다.
"방금 그건······ 관람비를 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습니다."
오늘 이 광경을 놓친 사람들은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것이 정말 사실이었다니.
악마 사냥꾼이자 빛의 기사 아슬란.
백성을 먼저 위하고 악을 처단하는 정의의 사도.
오늘 경매장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아슬란이었다.
이제 열국이 그를 더욱 주시할 것이며, 그를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감히 일라이 왕국이 약국이라며 손가락질 할 사람도 없을 터.
"일라이 왕국에 우리 상단이 들어가 있던가?"
"예. 들어가는 있으나, 활발하진 않습니다. 최소 규모로만 되어 있는 수준입니다."
망나니였던 아슬란이 갑자기 개과천선을 하면서부터 일라이 왕국도 심상치 않은 성장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보니, 그 성장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일라이 왕국에 자금을 더 투입해야겠구나."
지금 추세라면, 저 아슬란이 계속 우뚝 서 있다면 일라이 왕국은 전례 없는 성장을 이뤄낼 것이다.
"그리고··· 한번쯤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예? 직접 만나러 가신다는 겁니까?"
"왜? 안 될 거라도 있느냐?"
"그게······."
비올레타는 극도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린다.
그렇기에 정말 큰일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을 보내 실무를 보게 한다.
당장 오늘 경매를 주최하는 샤를렌 가문의 가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참석자 중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아무리 대륙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비올레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직접 아슬란을 만나러 간다라-.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 할 말이 있었지만, 르네는 그냥 삼키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손처럼 뒤에서만 모든 걸 관장하던 그녀가 직접 움직일 만큼 아슬란이란 자에게 흥미가 생기신 거겠지.
"그럼 가자."
"예, 모시겠습니다."
르네의 뒤를 따라가는 비올레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
"모두 돌아갈 채비를 하거라. 내일 해가 밝으면 왕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
나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샤를렌 가문이 참석자들에게 각각 내어 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탁-!
온몸을 지배하고 있던 병적인 허세가 탁! 하고 닫히는 방문 소리와 함께 쓸어 내려갔다
"휴. 진짜 처음에는 무슨 일 나는 줄 알았네."
경매장에서 처음 레길로트의 팔찌를 차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마기 같은 게 솟구쳐 나오길래 그땐 심장이 철렁였다.
그게 착용 이펙트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슬란의 허세 덕분에 남들 앞에서 놀란 티를 내진 않았다.
"이펙트 참 쓸데없이 화려해."
레길로트의 팔찌가 유독 그렇다.
여기 옵션을 봐라.
[레길로트의 팔찌]
-전설의 대장장이 레길로트가 만든 팔찌입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전환합니다.
-어둠 계열에 200%의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나는 팔찌의 옵션을 살피며 바보처럼 히죽 거리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변경시켜 주는 덕분에 그렇게 이펙트가 화려했던 것이다.
사실 레길로트의 기본 팔찌 옵션은 딱히 나한테 쓸모가 없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전환하는 것도 그렇고, 어둠 속성을 가진 몬스터에게 200% 추가 데미지를 주는 것 역시 따지고 보면 나한테는 크게 필요한 능력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난 악마랑 싸울 생각이 없거든."
내가 미쳤다고 악마랑 싸운단 말인가.
그건 알렉산더나 아론 같은 네임드들이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찰나의 괴력이 2배 세지긴 하겠네."
그렇다고 악마가 순순히 내 찰나의 괴력을 맞아 줄 거 같진 않았다.
맞기만 한다면 한방컷이 나겠지만, 그놈들이 얼마나 영악한 놈들인데 바보 같이 가만히 앉아서 맞아 주겠는가.
"하지만 이건 대박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토록 팔찌를 얻어서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수호의 방패]
-15초 동안 수호의 방패가 적용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60초)
-방어력은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무려 보호막 스킬이었다.
그것도 랜덤으로 부여된 것인데, 수호의 방패는 굉장히 좋은 스킬 중 하나였다.
15초 동안 공격을 막아 주는 수호의 방패가 생긴다.
그것도 노 코스트 스킬로, 마력 같은 거나 다른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미친 스킬이었다.
"행운 스텟 때문인가? 왜 이렇게 좋은 게 걸렸지?"
이 미친 난이도 때문에 옵션도 억까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슬란이 가지고 있는 행운 특성이 상쇄를 시키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옵션이 잘 떴다.
보통 이런 1티어 옵션을 뜨게 하려면 뽑기작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근데 쪼오끔 아쉽다."
수호의 방패는 옵션을 사용하기 위해 소비되는 코스트가 없는 대신, 딱 하나 단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전자의 힘에 비례해 방패의 강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팔찌에 옵션을 발현시켜 보았다.
우우웅-.
그러자 내 앞으로 작은 방어막이 생겨났다.
그것도,
"투명한 방어막이잖아?"
방어막에도 급이라는 것이 있다.
그 급을 결정할 수 있는 건 바로 색깔이다.
어떤 색깔의 방어막이냐에 따라 그 강도를 알 수가 있는데,
"투명한 건······ 최고 약한 거 아닌가?"
지금 내 앞에 펼쳐진 방어막은 투명한 색이었다.
즉, 이건 무늬만 방어막이지, 사실 있으나 마나 한 방어막이었다.
"아니. 이런 건 능력치 버프 좀 해주면 어디 덧나냐?"
잊고 있었다.
수호의 방패가 분명 좋은 옵션인 건 맞으나, 그건 네임드 캐릭터를 플레이 했을 때나 좋은 것이었다.
나는 아슬란이지 않은가.
"하아-."
이놈의 팔찌, 다시 확 환불해 버릴까.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이런 쪼가리에 낭비했다니.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잠깐. 이게 내 힘에 비례하는 거라면······."
찰나의 괴력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나는 방어막을 거두고 쿨타임이 돌기를 기다렸다.
수호 방패를 사용하는 그 순간부터 쿨타임이 돌기 때문에 사실상 1분도 되지 않는 대기시간이었다.
"수호 방패를 쓰면서 찰나의 괴력을 같이 쓴다면······."
처음 시도해 보는 거라 긴가민가했다.
이게 과연 될지도 의문이었고,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앉아서 생각만 하기 보다는, 직접 해보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한번 해보면 감이 잡히겠지."
나는 수호의 방패를 펼치면서 찰나의 괴력을 그 안에 불어 넣어 보았다.
그러자,
우우우웅-!!
이전과 다른 진동이 팔찌에서부터 울려 퍼지더니,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최고 방어 등급이라는 황금색이었다.
* * *
"경매장에서 우리가 본 건······."
"자네들도 봤잖아 대기사단장님이 성스러운 빛으로 마기를 정화시키는 걸."
아슬란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기사들이 수군 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아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너희들은 대기사단장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 하느냐?"
"네?"
"호들갑 떨지들 말거라."
"아, 넵."
"그리고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그분께서 성스러운 라할의 빛을 쓰신다는 건 일라이 왕국의 기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론의 말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가히 아름다운 힘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건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였다.
아슬란의 힘은 감히 예측할 수가 없고, 그의 위상은 자꾸만 높아져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시 한번 그는 아슬란 곁에 있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단장님. 그런데 저기······."
"음?"
그때 한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 실크 옷을 휘달리며 요염한 걸음 걸이로 선두에 서 있는 여인.
그 뒤를 동행하고 있는 샤를렌 가문 표식을 달고 있는 호위기사들 숫자만 봐도 여기서 굉장히 높은 사람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멈추시오."
아론은 그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막아 세웠다.
그러자 비올레타의 집사 르네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이분은 샤를렌 가문의 가주, 비올레타님이십니다."
아론은 비올레타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폈다.
가히 소문대로 절세가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시오?"
"비올레타님은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선약은 하셨소?"
"아닙니다."
아론은 아슬란에게 이 일을 아뢰려고 하기 전, 집사 르네가 들고 있는 상자가 눈에 거슬렸다.
"그런데 그 상자는 무엇이오?"
"아. 이건 비올레타님께서 아슬란님에게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그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상자를 열어 보시오."
"······예?"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해야겠으니, 열어 보라는 것이오."
"지금 우리 가주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여긴 샤를렌 가문입니다. 흉계 따위를 쓰려고 했다면 이런 조잡한 걸 쓰진 않았을 겁니다."
"말이 많군. 어서 열기나 하시오."
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번 더 반박하려는 것을 비올레타가 저지했다.
"하라는 대로 하거라, 르네."
"······예, 가주님."
르네는 입술을 깨물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황금과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올레타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조심성이 참 많으시네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아주 든든해 하시겠어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할 뿐이오."
"그러시구나. 그런데······."
그러다 그녀는 아슬란이 있는 거처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뭐죠?"
"······?"
그녀가 부채로 가리키는 곳에 고개를 돌린 아론도 강렬한 빛이 거처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대기사단장님!!"
그는 혹시라도 아슬란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검을 뽑아 들고 서둘러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단이 그 뒤를 따랐고 호기심이 극에 달한 비올레타와 그의 기사들도 함께 우르르 따라 들어갔다.
콰앙-!
아론이 먼저 입구를 박차고 들어갔으나,
"대기사단장님! 무슨 일······ 아니?!"
그들 앞에 나타난 건 황금빛을 내뿜는 구체였다.
구체 안에는 마치 별자리처럼 황금색 별빛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것들이 방 안 전체를 휘감았다.
"이, 이건 대체······."
이런 기이한 건 건 평생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기사들이 당황하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중,
"오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르네는 아름다운 그 빛에 이끌려 손가락으로 살짝 구체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콰직-!!
"으아아악!"
스파크가 강하게 터지면서 르네는 비명을 지르며 입구를 뚫고 저 먼발치까지 날아가 버렸다.
"!?"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경직되었다.
아론은 르네처럼 누가 또 봉변을 당하기 전에 소리쳤다.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비올레타도 숨이 턱 막히며 제자리에 얼어버렸다.
"······."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오들오들 떨려온다.
대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르네 같은 실력자가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버리다니.
괜히 발을 잘못 놀렸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촤악-!
"어?"
"사, 사라졌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눈을 매혹시키던 무시무시한 구체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감히-."
둔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 허락도 없이 누가 들어오라고 했지?"
그곳에는 홀로 꼿꼿하게 서 있는 아슬란이 맹수를 닮은 눈동자로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41화
1초만 소드마스터 41화
[수호신의 방패]
-찰나의 괴력을 수호의 방패와 동시 사용시 옵션 효과가 수호신의 방패로 변경됩니다.
-최고 등급의 방어막을 15초 동안 유지합니다.
나는 멍하니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괴력과 수호의 방패를 동시에 쓰면 새로운 옵션이 탄생하게 된다.
바로 수호신의 방패.
일단 어떤 스킬이든 '신' 글자가 들어가면 굉장히 좋은 스킬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증거로, 방금 내가 보지 않았던가.
무려 방어막 중에 최고 등급이라는 황금빛이 이곳 전체를 감싸 안고 있었던 것을.
'찰나의 괴력 쿨타임이 돌아야 다시 쓸 수 있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내게는 쿨타임을 초기화 시킬 수 있는 펜던트가 있다.
그걸 사용하면 이제 찰나의 괴력을 두 방향으로 쓸 수가 있게 된다.
방어용으로 한 번.
공격용으로 한 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낸 뒤, 곧바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었다.
이건 엄청난 수확이었다.
"갑작스럽게 방문을 해서 송구합니다."
청명한 목소리에 나는 금방 정신을 되찾았다.
나를 매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샤를렌 가문의 가주, 비올레타였다.
게임 화면에서 본대로 과연 엄청난 미인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주의해야 할 건 예쁜 여자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올레타]
무력: 30
지력: 95
저 높은 지력 수치를 봐라.
저게 무력이었으면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는 스텟이다.
그만큼 그녀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뜻한다.
'원래 후계자도 아니었잖아.'
비올레타는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위로 다섯 명이나 있는 형제들을 모조리 쳐내 버리고 당당히 샤를렌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뛰어난 두뇌가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날 찜쪄 먹을 수 있고, 뒤통수를 수십 번도 더 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샤를렌 가문의 가주께서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행차하셨소?"
그렇다고 해도 샤를렌 가문의 가주이지 않은가.
이 대륙에 있는 돈이란 돈은 다 가지고 있는 여자다.
당연히 좋은 관계를 가지면 나한테도 좋고 왕국에게도 좋겠다만-.
"호호. 대기사단장님께서는 제가 반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귀족들은 한번만이라도 저를 만나고자 큰돈을 걸기도 하는데요."
"용건만 간단히 하시오."
한번 발동이 걸린 아슬란의 허세가 예쁜 여자 앞이라고 해서 멍청한 표정을 지을 리도, 좋게 목소리가 나갈 리도 없었다.
"어머나. 냉정하셔라."
그녀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아까 그 신성한 빛으로 이루어진 구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래도 내가 펼친 방어막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비올레타 가주."
하지만 내 영업 비밀을 쉽게 알려 줄 순 없는 일.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시오."
물론, 최대한 순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내 몸을 장악하고 있는 허세가 비올레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과한 호기심은 항상 화를 불러 일으키는 법이니."
"······."
"이제 왜 날 찾아왔는지 말해 주시겠소?"
비올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그녀의 부하들이 상자 하나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 놓았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드리는 제 작은 선물이랍니다."
작은 선물?
이윽고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황금과 보석들이 내게 손짓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아이고. 누님.
이런 진귀한 걸 들고 오시다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앞으로 큰일을 하셔야 하니, 이걸로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휴. 조금이라니요.
왜 그리 황송한 말씀을.
나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그녀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뭐하는 짓이지?"
아까 전부터 비올레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병적인 허세가 꿈틀거리며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분노를 일으켰다.
"네?"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비올레타는 당황해 했고, 이 미친 허세는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이따위 돈으로 내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인가?"
안 돼. 이 미친놈아.
저게 얼마짜리인데!
"날 그리 가볍게 보았다니. 건방지구나, 비올레타여."
나는 더 험한 말이 나가기 전에 간신히 아슬란의 허세를 붙잡았다.
그런데 이미 늦은 거 같다.
비올레타가 두 눈을 부릅 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우리 샤를렌 가문은 대륙 최고의 상단입니다. 관계든, 계약이든, 거래든, 심지어 사랑까지도 우린 돈으로 해결해요. 그것이 저희의 방식이니까요."
"그렇다면 거절하겠다."
"왜죠? 이제까지 누구도 제 선물을 거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거절하는 거죠?"
그 물음에 반응하듯, 애써 붙잡고 있던 허세가 다시 한번 정수리 끝까지 치솟았다.
"난 돈으로 친분을 사지 않는다."
"!?"
"돈 따위로 산 관계가 오래 갈 리 없지. 난 그런 진실되지 못 한 것을 혐오한다."
나는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비올레타에게 상자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니 가지고 돌아가라."
아, 안 돼.
내 돈!
이렇게 내 황금 상자가 사라지나 싶었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당신과 좋은 사이를 맺을 수가 있는 거죠?"
비올레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신뢰다."
"신뢰요?"
그녀는 곧 코웃음을 쳤다.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것을 믿으시는 건가요?
그러나 그런 비웃음에 굴복할 허세가 아니었다.
"명예를 아는 자라면 그 신뢰를 지키겠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면 돈으로 쌓은 관계보다 훨씬 단단할 터. 난 그 신뢰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
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고 있어.
무조건 돈이 최고지!
비올레타 말처럼 신뢰는 언제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지만, 돈으로 쌓아 올린 관계는 돈만 준다면 절대 깨질 일이 없다.
하지만 한번 끓어 오르기 시작한 아슬란의 허장성세는 꺾이지 않았다.
내가 꾹꾹 밀어 내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그런데 그때 비올레타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제가 당신과 신뢰를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변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건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호호. 재밌는 분이시네요. 좋아요. 그럼 이건 어때요? 우리 두 사람의 아름다운 신뢰를 위해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죠."
그녀는 펼쳐 있던 부채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샤를렌 가문은 일라이 왕국을 최우선 교역 대상으로 삼겠어요. 당연히 왕국에 투자하는 금액도 엄청날 거고요."
멍하니 황금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올레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교역을 활발하게 열고, 거기다 투자금까지 아끼지 않겠다는 건 우리 왕국에 엄청난 이익이었다.
저 상자를 받아 황금을 챙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잠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샤를렌 가문이 내게 원하는 건?"
"뭐, 저희야 아슬란님 같은 분이 든든한 동맹군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요?"
진짜 그거면 되는 건가?
"샤를렌 가문에게 칼을 대는 자가 있다면, 그건 곧 나 아슬란을 향한 도전으로 생각할 것이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같은 분이 우리 상단을 도와주신다면 아주 든든하겠네요."
뭐지. 분명 꼬였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일이 잘 풀리는 거지?
"그리고 대기사단장님."
아직 비올레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분명 뭔가 더 내게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내게 할 리가 없는······.
"듣기로 아직 혼인을 하지 않으셨다는데."
"······?"
"어쩌면 우린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서로의 신뢰를 쌓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네?
"언제든 저한테 찾아오세요. 그땐 지금보다 우린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비올레타는 특유의 웃음 소리를 내며 방 밖을 나갔다.
"······."
나는 빠르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아-."
기어코 상자를 가지고 돌아가는 그녀의 치밀함에 탄식을 내질렀다.
그 정도는 그냥 놔두고 가셔도 되는데 말이다.
***
"르네는 어때?"
"예. 방금 막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비올레타는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그 뒤에 딸려 나오는 상자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까지 수많은 귀족들을 만나봤지만, 저 상자를 거절한 건 아슬란이 유일했다.
"역시, 괜히 내 흥미를 끄는 사람이 아니라니깐?"
그는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처소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아론과 마주쳤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론 기사단장님."
"왜 그러시오?"
"여기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검은 상자를 앞에 내려놓자 아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아까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드린다는 그 보석 상자가 아니오?"
"맞아요. 이걸 단장님에게 드릴게요. 여기 있는 분들과 공평하게 나누시면 될 거 같은데. 어때요?"
하지만 그런 달콤한 유혹에 아론과 그의 기사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대기사단장님께서 그대의 호의를 거절하신 것 같은데, 우리 역시 그분과 같은 뜻이오. 그분의 뜻에 반하는 짓을 우리가 저지를 순 없소. 가져가시오."
그 주인이나, 그 기사단이나 참 한결 같았다.
이 정도의 황금을 보면 한번쯤은 고민을 할 만도 한데, 주저할 것 없이 거부하는 저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일라이 왕국, 참 재밌는 곳이네."
비올레타는 처소로 돌아가면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라이 왕국에 투자금을 넣을 수 있는 만큼 전부 넣어라. 각 지부에 통보를 하도록."
"일라이······ 왕국에 말입니까? 아직 상업적으로 개발이 덜 된 곳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키워 보겠다는 거다. 오늘 아슬란과 그의 기사단을 보니, 확신이 생겼어. 적어도 돈 때문에 우릴 배신할 사람들은 아니야. 그러니 가능한 최고로 높은 금액을 넣도록 해."
"예, 가주님."
오늘 비올레타는 기분이 좋았다.
일라이 왕국이라는 새로운 투자처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고, 무엇보다 기쁜 건 아슬란이란 남자를 알게 된 것이었다.
"흐응. 언제쯤 다시 오려나?"
과연 그가 자신의 마지막 제안을 언제쯤 받아 들일지도 궁금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