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수선했던 경매를 끝내고 나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이라.
이제 일라이 왕국은 나의 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그런 집 말이다.
푸르르~!
오늘도 룰루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말을 천천히 몰면서 나는 기쁨을 한껏 만끽했다.
새로운 아이템을 무려 2개나 얻고, 샤를렌 가문에게 투자 약속까지 받았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물론, 아직도 황금과 보석으로 가득 찼던 그 상자가 눈에 아른거렸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그 아픔을 꾹 눌렀다.
앞으로도 이렇게 술술 인생이 잘 풀리기를······.
'그런데-.'
이런 내 평화를 방해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저건 왜 자꾸 따라오는 거지.'
[라파엘]
내 뒤를 은밀하게 따라오고 있는 불청객이 있었다.
바로 다크 엘프 라파엘.
저게 안 보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 나도 다른 캐릭터의 정보창을 볼 수 있는 플레이어의 눈이 없었다면 그녀가 내 뒤를 따라온다는 걸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론과 다른 호위기사들도 전혀 모르는 것 같고.
'그냥 무시하고 가야 되나.'
게임 스토리를 따라 우리의 주인공 알렉산더를 만나기 위해 쫓아오고 있는 것일 터.
괜히 아는 척 하지 말고 둘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무시하며 가려고 했는데,
"아론."
아슬란의 허세가 이걸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예, 대기사단장님."
라파엘의 이름을 보자마자 등허리를 찌릿하게 자극하는 허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나는 그 들끓는 감정에 따라 라파엘이 은신해 있는 수풀 쪽을 가리켰다.
"저기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구나."
"예?"
아론과 기사들은 어리둥절하며 내가 가리킨 수풀 쪽을 살펴보았다.
난 그런 그들에게 말했다.
"베어라."
그러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라파엘의 이름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42화
1초만 소드마스터 42화
내 명령에 따라 아론이 칼에 기운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고오오-!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검강이 고요한 울음 소리를 내며 번뜩이는 예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을 저 수풀 속에 던져 버리려는 순간.
"자, 잠깐만요!!"
라파엘이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엇-!"
아론과 기사들은 그런 그녀를 보고 놀란 반응을 보였다.
"정말 저기 누가 숨어 있었잖아······?"
"대기사단장님은 어떻게 아신 거지?"
라파엘은 아직도 무섭게 검강을 발산하고 있는 아론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제 그건 그만 거두시면 안 돼요? 항복이라니깐요?"
아론이 눈을 껌뻑이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거두거라."
"예."
그제서야 라파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진짜 변신술도 그렇고, 내 은신술도 들키다니.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나는 라파엘을 한심하게 내려다 보며 말했다.
"저번에 말했을 텐데. 한번만 더 이따위 짓거리를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그래도 이번에는 변신술로 오진 않았잖아요."
"······아론."
아론이 거두었던 검강을 다시 만들려고 하자 라파엘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뭐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니라,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만나러 온 거라고요!"
"나를?"
알렉산더가 아니라?
"네! 대기사단장님게 부탁 드릴 일이 있어요."
"뭐지?"
그러자 그녀는 손을 모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일라이 왕국 마법사로 써주세요."
* * *
"여왕님. 이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희가 라파엘을 무사히 엘드라비까지 데리고 가겠습니다."
엘프들의 여왕, 엘티히는 거듭 청을 올리고 있는 수하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희가 한 번이라도 그 아이를 제대로 데려온 적이 있더냐?"
"그건······."
"그 아이가 변신술을 써버리면? 간파할 순 있고?"
"······."
"은신술도 마찬가지다. 너희들만으로는 그 아이를 절대 찾을 수 없어."
라파엘은 변신술과 은신술에 무척 뛰어나다.
기본 마력도 강하지만, 저 두 가지는 엘프 중에서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번 달아나 버리면 찾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엘티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 어미를 닮아 도통 가만있지를 못하는 구나, 그 아이는. 왜 그리 자꾸 엘프들의 둥지에서 떠나려는 것인지."
하지만 아무리 변신술과 은신술에 능하다고 해서 마법의 여왕 앞에 도망칠 순 없는 법. 이런 때를 대비해 엘티히도 만들어 준 안전장치가 있었다.
엘티히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마력에 집중했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생겨나면서 푸른 마력이 하늘 위로 서서히 떠 올랐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눈동자처럼 변하여 사방을 둘러 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마력이 느껴진다."
엘티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일라이 왕국의 영토였다.
* * *
콰아아앙-!!
역시 주인공의 네임드 동료답구나.
굉장한 마법의 힘에 기사들도 놀란 눈치였다.
라파엘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헤헤. 이 정도면 괜찮나요?"
몬스터 한 무리를 육편처럼 짓이겨 놓았으면서 수줍게 웃고 있다.
[라파엘]
무력: 50
지력: 87
마력: 87
주인공의 깜찍한 엘프 동료이자 훗날 대마법사가 되는 라파엘.
그 네임드에 걸맞게 그녀는 87이나 되는 마력 수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한창 성장 중인 마법사였다.
방금 전 저 몬스터 무리를 마법 한 방에 쓸어 버렸듯, 그녀의 마법 실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엘프이기도 하고, 그녀의 마법 잠재력은 상당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괜히 주인공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여자가 아니다.
주인공이 대륙을 안전하게 클리어하도록 만들어 둔 개발자의 안배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어, 엄청난 마법이군요."
"그런가요?"
"예. 생전 그런 마법은 처음 봤습니다."
아론과 기사들은 신기하다는 듯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라파엘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쓰는 마법과 다르다.
엘프는 정령의 힘을 다루는 족속.
이들의 마법은 정령을 소환하는 것을 베이스로 깔기 때문에 엘프의 마법을 모르면 당연히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 한번 더 보여드릴게요!"
라파엘이 하늘 위로 손짓하자 놀랍게도 불사조처럼 몸에 불을 가득 휘감고 있는 새들이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전방을 휩쓸었다.
"오오-!"
"저것이 정령이라는 건가?"
그들은 아주 신이 나서 라파엘의 마법을 구경했다.
나 역시 모니터 화면으로만 보던 정령 마법을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정도면 일라이 왕국의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겠죠?"
"이런 마법의 힘이라면 대마법사도 어렵지 않을 것 같군요."
"하하. 우리 왕국에 첫 대마법사가 나오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왕국에 마법 병단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넝쿨째 라파엘이 굴러와 주다니.
라파엘만 있다면 마법 병단 보강 문제는 금방 해결될 것이고, 우리 왕국의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다크 엘프라는 건데.'
엘프와 악마의 피가 섞인 다크 엘프.
물론, 스토리상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사람이 문제였다.
'엘티히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개발자들이 라파엘을 주인공 동료로 집어넣은 건 그녀의 뛰어난 마법의 힘을 사용하라는 것도 있지만, 엘프들의 여왕, 엘티히와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놓기 위함이었다.
즉, 라파엘은 엘티히와 주인공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라파엘을 통해 주인공은 엘티히를 만나게 되고, 처음에는 갈등을 겪지만 그가 엘프와 인간의 피가 섞인 하프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조금씩 우호적인 관계로 변해 간다.
그렇게 엘프와 인간이 다시 한번 힘을 합치는 역사가 알렉산더, 그리고 라파엘이란 존재를 통해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주인공이 아닌데.'
그렇기에 엘티히가 얼마나 개지랄을 떨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엘티히는 라파엘에게 악마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녀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걸 무척 꺼려한다.
그래서 나도 아직 라파엘을 정식으로 받아들이진 못했다.
"누가 널 마법사로 받아들인다고 했지?"
"계속 동행을 해도 말이 없으시길래 허락해 주신 줄 알았죠."
요 며칠 동안 라파엘은 우리 일행에 껴서 같이 일라이 왕국으로 가고 있었다.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벌써 아론을 비롯한 기사들과 전부 친해지기까지 했다.
그동안 알렉산더와 무슨 얘기를 나누나 하고 봤는데, 딱히 이렇다 할 발전은 없어 보였다.
"난 널 일행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냥 네가 따라왔을 뿐."
"아이참. 그럼 이제부터 정식으로 동행하게 해주세요!"
그녀가 익살스러운 말투로 내게 애원하고 있을 때였다.
"라파엘-!"
마치 그릇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에 라파엘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들썩였다.
그건 우리 기사단도 마찬가지.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에 모두 안색을 굳혔다.
"헉!"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따라 고개를 돌린 라파엘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 여긴 어떻게······."
"쯧. 내가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성난 목소리에 마력을 담은 이의 정체는 바로,
[엘티히]
무력: 30
지력: 93
마력: 99
대륙 최강의 마법사, 엘프들의 여왕, 엘티히였다.
'이런 미친.'
당당하고 오만하며 도도한 저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호랑이가 제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라파엘 때문에 언젠가 엘티히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막 방금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엘티히가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데려오너라."
"예."
그녀의 뒤에 있던 두 명의 엘프가 제자리에서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라파엘 곁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라파엘의 양팔을 붙잡고 다시 점멸 마법을 써서 엘티히 뒤쪽으로 돌아갔다.
"앗! 이, 이거 놔요!"
"가만있거라."
"전 그 거지 같은 곳에서 더 이상 갇혀 살기 싫다고요!"
"시끄럽다."
라파엘이 마력을 끌어올려 달아나려고 하자 엘티히가 어림도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러자 라파엘의 양손에 푸른 결속구가 생기면서 끌어 올리던 마력도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아니. 진짜 치사하게!"
고작 손가락 한번 튕기는 거로 마력을 봉인시킨 건가?
'저게 대륙 최강 마법사의 힘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마력 수치가 87에 달하는 라파엘을 저렇게 간단하게 제압해 버리다니.
"거기 인간."
그때 엘티히의 앙칼진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네가 이 아이와 뭘 하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러니 너도 여기서 본 일을 잊어라. 그게 네 신상에도 좋을 것이야."
어휴, 뭐 저야 불만 없습니다.
좋을 대로 데려가십시오.
라고 말할 뻔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말로 잘 구슬려 볼까 했는데, 지금 엘티히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건들면 일라이 왕국을 전부 뒤집어엎어 버릴 기세였다.
아깝지만 라파엘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엘티히와 싸울 순 없는 노릇이니.
그런데,
"멈춰라."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병적인 허세가 얼른 말머리를 돌리려는 나를 붙잡았다.
내가 어떻게 제어를 해보기도 전에 강렬한 허세의 파도가 내 몸 전체에 몰아쳤다.
그 충동적이고 오만하며, 병신 같은 허세에 이끌려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일라이 왕국의 영토다. 감히 이곳을 멋대로 침입하고도 그냥 넘어가려는 것이냐?"
그러자 엘티히의 뒤에 있던 두 명의 엘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런 소리를!"
그러면 그럴수록 아슬란의 허세는 더욱 콧대가 높아질 뿐이었다.
"당연히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엘프족의 여왕, 엘티히."
그 말에 엘프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여왕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그따위로 말한다는 것이냐?"
"너희들의 여왕이지, 나의 여왕이 아니다. 손님으로 왔다면 마땅히 대접을 해줬겠다만, 지금은 그저 남의 나라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범한-"
나는 거만하게 턱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침입자일 뿐이다."
"!?"
두 엘프가 다시 나서서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엘티히가 손을 들었다.
"여왕님."
"뒤로 물러나 있거라."
"······알겠습니다."
그들은 라파엘을 끌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엘티히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신발을 신지 않고 있는 그녀의 백옥 같은 발에서부터 푸른 마력이 흘러나와 바닥을 물들였다.
"건방진 놈이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날 쳐다보다니."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흉흉해지고 있었다.
아론과 기사단은 아까부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잘못 건드린 거 같은데.'
하지만 한번 끓어 오르기 시작한 아슬란의 허세는 엘티히의 마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침입자 따위를 무서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들끓는 이 감정이 나를 더욱 충동할 뿐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예전에도 너처럼 건방진 놈이 하나 있었지. 그놈과 눈빛이 닮았어. 짜증 나게 말이지."
촤아아악-!!
몸이 붕 떠오른 엘티히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뿜어냈다.
그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마력의 힘에 숨조차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우윽!"
"크읍!"
아론과 기사단은 몸을 부르르 떨며 칼을 뽑아 들지도 못했다.
이것이 바로 엘프의 여왕, 엘티히의 힘!
'조, 좆된 거 같은데.'
이놈의 허세가 언제 한번 크게 사고 칠 줄 알았다.
하필이면 건드려도 대륙 최강 마법사를 건들다니.
쿠우우웅-!!
그녀가 손을 들자 그 위로 푸른 불길이 치솟으며 거대한 창이 만들어졌다.
엘티히의 주력 마법인 심판의 창이었다.
"인간. 오늘 너와 네 부하들이 여기서 죽는 건, 그 오만함 때문이다."
잠깐. 그걸 정말 나한테 던지려고?
"대, 대기사단장님!"
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아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온몸을 짓누르고 공기마저 태워 버리는 것만 같은 마력의 열기 때문일 것이다.
"아, 안 돼요. 여왕님!!"
저 앞에 있던 라파엘도 소리쳐 봤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엘티히의 손에서 떨어지는 푸른 심판의 창을.
콰아아앙-!!
* * *
"끝이군."
거대한 폭발과 함께 아직도 마력의 열기가 뜨겁게 하늘을 뚫을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생명체도 저 안에서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엘티히, 자신의 분노를 담은 심판의 창이었으니.
"돌아가겠다."
건방진 인간에게 마땅한 최후였다.
그녀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런데,
"여, 여왕님."
"뒤, 뒤에!"
수하들의 손짓에 엘티히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음?"
심판의 창이 일으킨 폭발과 그 뜨거운 열기 속에 무언가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건······?"
신성한 빛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었다.
방금 그 공격을 막아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걸 막아낸 거지?
마법을 쓰는 놈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엘티히는 헛웃음이 나왔다.
"제법이구나. 인간 따위가 내 마법을 막아내다니."
뭐, 상관없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한번 더 날린다면 그땐······.
콰아아아-!!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
밝은 빛으로 만들어져 있던 방어막이 사라지고 나서, 그 밖으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검강이 마력의 열기를 가르며 치달아 오기 시작했다.
"황금빛?"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검강이라니.
"감히!"
엘티히는 마력으로 이뤄진 방어막을 만들어내 다가오던 검강을 막아냈다.
하지만,
콰직-!!
두껍게 펼친 마력 방어막이 너무나도 쉽게 깨져 버렸다.
"흐읍-!"
그녀는 다시 한번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콰직-!!
그 다음 것도,
콰지직-!!
저 무지막지한 크기의 검강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콰콱-!!
그렇게 마지막 방어막까지 뚫리는 순간.
"아-."
엘티히는 체념하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높이 솟아오른 신성한 빛의 검강이 자신의 몸을 가르려는 것을.
"여왕님!!"
그러나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던가.
양옆에서 나타난 제 부하들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이동 마법을 썼다.
"너희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저 검강을 피할 순 있었지만, 그때 엘티히의 눈에 홀로 남은 라파엘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두 사람이 엘티히의 안위만을 챙기느라 라파엘을 신경 쓰지 못 한 것이었다.
"이런!"
마력을 봉인 당한 채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라파엘은 당장 저 검강을 막을 수단도, 피할 방법도 없었다.
엘티히는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라파엘!!"
그러나 그녀를 대피시킬 수 있는 수단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마법을 쓰는 동안 검강이 더 빨리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
라파엘은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 앞에 치달아 오는 검강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그런데,
"아니?"
엘티히의 방어막을 우습게 뚫어 버리며 이 세상 모든 걸 갈라 버릴 것처럼 나아가던 저 무시무시한 검강이,
키이이잉-!!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놀랍게도 라파엘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이, 이게 대체······."
라파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헐떡였다.
엘티히 역시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저 거대한 검강을 멈춰 세웠다는 것인가?
대체 누가?
"제법이구나."
그때 이 뜨거운 열기를 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프 따위가 내 검강을 피하다니."
뚜벅뚜벅 둔중한 발소리를 내며, 뿌연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
아슬란은 엘프들과 함께 주저앉아 있는 엘티히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43화
1초만 소드마스터 43화
"······."
엘티히는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고작 인간 따위가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특히 그녀의 방어막을 모조리 부숴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검강을 멈춰 서게 만들어 버리는 그 힘은 대체······.
"인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처음으로 흥미가 생기는 인간이었다.
엘티히의 물음에 그는 거만한 고갯짓을 하며 대답했다.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다."
아슬란.
그래. 이자가 요즘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는 그 인물인가.
인간들의 소식은 잘 듣지 않고 있지만, 아슬란의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빛의 기사, 악마 사냥꾼, 등등.
여러 칭호로 그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
그냥 인간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인간에겐 과분한 힘을 가졌군."
그러자 그는 더욱 차갑고 오만한 눈빛으로 엘티히를 노려보았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인간의 힘을, 명예로운 기사의 힘을 어찌 엘프 따위가 알 수 있을까."
"뭐라?"
그 실력에 걸맞게 상대방을 긁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이런 건방진 놈. 방금 그 한번으로 네가 이 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일단 일어나고 말하지.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거냐."
"아-"
엘티히는 그제서야 자신이 더러운 땅바닥에 앉아만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일어나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저 눈동자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누가 감히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라고 했지?"
"그럼 그렇게 보지 않도록 네가 행동을 똑바로 하면 될 것 아닌가?"
"뭐, 뭐라고?"
"윗물을 보면 아랫물을 알 수 있다고 했지. 모든 엘프가 당신처럼 뻔뻔한가 보지? 여왕의 신분으로 국경을 무단 침범했으면서 뭐가 그리 당당한 것이냐?"
엘티히의 백옥 같은 얼굴에 금이 갔다.
아슬란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 엘프 신분으로도 인간의 땅을 함부로 밟는 것이 위험할 진데, 무려 여왕이라는 자가 땅을 침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화가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놈이 정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네가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고 있기는 한 것이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에 엘프들과 기사들은 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됐다.
그러나 과열되는 열기가 터지기 직전, 그들 사이에 펄쩍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여왕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라파엘?"
라파엘은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아슬란님은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싫어서 나온 거라고요. 제발 저 좀 자유롭게 살게 놔두시면 안 돼요?!"
"허튼소리 하지 마라. 네가 엘드라비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것이냐!"
두 사람이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한쪽은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했고, 한쪽은 어떻게든 상대를 구속하고자 했다.
둘이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슬슬 두 사람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려고 할 때쯤.
"대기사단장님!"
아론이 저 수풀 너머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마을에서 보내는 신호입니다!"
"검은 연기는 누군가가 마을을 공격했을 때 올라오는 신호이지 않습니까?"
기사단의 말에 라파엘이 하던 말을 멈췄다.
"마을을 공격하는 신호······?"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몸에서 부드럽게 솟아 나오는 새 한 마리가 빠르게 비행하여 연기가 나는 쪽으로 날아갔다.
라파엘은 곧 눈을 떴다.
"······몬스터들이 대거 마을로 몰려들고 있어요."
"몬스터들이?"
"네. 여왕님과 대기사단장님이 거하게 싸워 주신 덕분에 몬스터들이 그걸 보고 흥분했나 봐요. 이쪽으로 몰려오는 길에 하필이면 마을이 중간에 끼어 있던 거죠."
마을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슬란은 즉각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마을로 간다."
"예!"
마치 엘티히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홀연히 기사들과 떠나 버렸다.
"······."
"지, 진짜 가버렸군요. 저 인간."
엘프들을 멀어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만 보았다.
엘티히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우리도 간다."
"예? 마을로 말입니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을 모른 척할 순 없지 않느냐? 거기다······."
저 인간이 자신을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며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 같다.
'윗물을 보면 아랫물을 알 수 있다고 했지. 모든 엘프가 당신처럼 뻔뻔한가 보지?'
그 말을 듣고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칫, 건방진 인간 같으니."
언젠가 이 일을 반드시 갚아 주리라.
"모두 가자."
* * *
'······따돌렸나?'
벌렁거리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이놈의 미친 허세가 기어코 엘티히의 꼭지를 돌게 만들더니, 하마터면 여기 있는 기사단과 단체로 황천길을 건널 뻔했다.
'타이밍이 좋았어.'
아무래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모양인데, 엘티히가 한번 더 심판의 창을 날리기 전에 아주 잘,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설마 쫓아오진 않겠지?'
그 더러운 성질머리로 나를 끝까지 따라와 요절을 내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번 정도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는데, 아슬란의 허세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대기사단장님! 저쪽입니다!"
"!?"
이건 호랑이를 피하다 늑대를 만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모, 몬스터들의 숫자가······!"
"몬스터들이 저렇게나 많이!"
기사들이 기함을 터트리며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미친. 뭐가 저렇게 많아.'
아무리 몬스터 웨이브라고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가 나올 수 있는 건가?
'설마 난이도 때문에?'
몬스터 웨이브는 종종 일어나는 이벤트다.
일종의 경험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왕국 기사단의 전투 경험치를 쌓고 몬스터들에서 나오는 자원들을 파밍하는 이벤트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벤트가 아니라, 그냥 마을 하나를 통째로 쓸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 마을이 몬스터 웨이브에 당한다면 그다음에는 성벽으로까지 이어져 그 피해가 어디까지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아무리 난이도 때문이라고 해도 너무한 수준인데.'
어디 몬스터 게이트라도 열린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숫자가 많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부족해.'
아론과 알렉산더가 있어도 저 많은 몬스터들을 한번에 쓸어 버릴 순 없을 테고.
봉화를 올렸으니, 곧 왕국에서 기사단이 오긴 하겠다만 그들이 당도할 땐 이미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있을 게 뻔했다.
'찰나의 괴력은 쿨타임이 돌긴 했지만······.'
고작 이거 하나로 저 몬스터 떼를 없애 버리진 못 한다.
쿨타임 초기화를 시켜 한번 더 쓴다고 해도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쿠우웅-!!
바로 그때였다.
"엇-"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위로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기어코 여기까지 나를 쫓아온 엘티히가 있었다.
저저 지독한 년.
"인간. 우리 엘프들은 뻔뻔하지 않다. 너희들 인간처럼 무책임하지도 않다. 그러니 다시는 우리를 폄하하지 말거라."
마을 위로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
그 위에서 감도는 어마어마한 살기.
저건 필시,
'엘티히의 광역기!'
수천의 병사들을 한꺼번에 소멸시킬 수 있는 광역기.
원래 이 정도 크기의 광역기는 수백 명의 마법사가 모여서 마법진을 만들어야 하지만, 엘티히 같이 마법의 끝을 깨우친 캐릭터는 혼자서도 광역기를 시전할 수 있었다.
'설마 저걸로 우릴 다 죽이려는 건가?'
콰아아아-!!
하늘에서 푸른 불꽃이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그 불꽃에 닿는 몬스터들은 몸이 녹아내리고 폭발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어 갔다.
이것이 엘티히의 광역기 스킬, 염화지옥.
모니터 화면으로 봤을 때도 푸르게 타오르는 그녀의 불꽃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는데, 그걸 실제로 보게 되니 그 장엄한 광경에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캬오오오!!"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몬스터들.
그 위에서 마법의 여왕답게 군림하는 엘티히.
놀라운 건 저 수많은 불꽃 중에서 마을에 떨어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엘티히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닌, 몬스터 소탕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누님.
이럴 거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괜히 오해했네.
하지만 저 위에서 혼자 멋있게 마법을 펼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부럽다.'
아슬란이 아니라 차라리 엘티히를 선택해 게임을 플레이했다면, 나도 저런 스킬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스르르-.
광역기 한 방으로 몬스터 군단을 쓸어 버린 엘티히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쿠쿵-!
그런데 바로 그때,
"캬오오오-!!"
바닥에 숨어 있는 웜들이 솟아오르며 방심하고 있는 그녀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안에 식어 가던 허세가 다시 뜨겁게 끓어 올랐다.
그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나는 반사적으로 칼을 잡은 뒤 허리춤에서 재빨리 뽑아 올렸다.
피이잉-!!
빛 속성으로 뒤바뀐 검강이 번쩍이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 * *
콰콰콱-!!
"키에엑!"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검강이 엘티히의 바로 옆을 가르며 지나갔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마력 방어막이 항시 펼쳐져 있긴 하지만, 만약 저 검강이 닿았다면-
'죽었겠구나.'
하루 동안 죽음의 공포를 두 번이나 느꼈다.
수많은 전쟁터를 다녀봤지만, 지금처럼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공포는 처음이었다.
'날 죽일 기회였을 텐데.'
방금 전까지 서로 살초를 나누며 싸우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어쩌면 자신을 죽일 유일한 기회를 날려 버리고 오히려 뒤에서 공격을 하던 몬스터들을 없애 주었다.
"또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군."
그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와 마주했다.
여전히 오만하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을.
"흥. 네 생각은 잘 알고 있다. 내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겠지. 손 몇 번 흔드는 것으로 저 정도 몬스터들 따위는 충분히 혼자서 없애 버렸을 테니."
그 무지막지한 검강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어내는 자다.
저런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준비 운동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내게도 책임이 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난 너희 인간들을 무척 싫어하지만, 내가 벌인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건 더 싫거든."
혈기왕성한 사내놈들은 자신이 나설 일을 누가 빼앗아 버리면 왜 끼어들었냐고 난리를 친다.
엘티히가 잘 알던 인간 남자 하나도 종종 그랬던 적이 있다.
그래서 또 한바탕 지겨운 말다툼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런가······."
아슬란, 저 남자는 슬몃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
엘티히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고맙다고 한 건가?
"들어와라. 손님을 박대할 만큼 우리 일라이 왕국은 매정하지 않다."
"손님?"
"마을을 지켜줬으니, 이제 손님이지."
"······."
그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잠깐 멍하니 쳐다보았다.
확실히 다르다.
지금까지 만났던 인간들과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저 넘치는 여유와 품격.
특히,
펄럭~
저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망토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일까.
"······."
엘티히는 잠시 고민하다 부하들에게 말했다.
"들어가 보자."
"예?"
"여왕님?"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하겠다고 하지 않느냐."
"······?"
그녀는 홀린 듯이 아슬란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엘프들은 평소답지 않은 여왕의 행동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오오. 대기사단장님이시다!"
"뭐?! 지, 진짜잖아!"
"역시, 대기사단장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군요!"
"아슬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진풍경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와 아슬란을 맞이하며 그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불편했다.
"몬스터 토벌은 전부 우리 여왕님께서 하셨는데······!"
"이 우매한 인간들! 지금이라도 제가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그들의 아우성에 엘티히는 손을 들어 막았다.
"됐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아슬란, 저자의 손에 해결되었을 일이다."
"그, 그렇긴 하지만······."
엘프들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엘티히가 빤히 아슬란과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 이것 보세요. 오늘 제가 만든 목검이에요."
"저희도 나중에 커서 대기사단장님 같은 훌륭한 기사가 될 거예요!"
아슬란은 자신에게 몰려드는 어린아이들을 내치지 않고 말에서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기사의 명예를 안다면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너희는 이미 자랑스러운 일라이 왕국의 기사다."
"우와! 정말요?"
"그럼 나도 이제 일라이 왕국 기사다!"
고작 작은 마을일 뿐인데, 이들과 사이가 두터운 것 같았다.
대기사단장 정도의 직책이라면 이런 마을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대기사단장님. 저번에 도와주신 덕분에 저희 남편의 병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저희도 요즘 살 맛이 납니다. 농사도 아주 잘 되고 있고요!"
"이게 다 대기사단장님 덕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라할의 강림을 보는 것처럼 아슬란을 대했다.
유독 엘티히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돕겠다."
"예.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항상 대기사단장님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성들을 바라보는 아슬란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차갑고 무덤덤한 눈빛이 지금은 따뜻하게 바뀌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대기사단장님. 저분들은······."
"응? 저 얼굴과 귀는 설마-."
"에, 엘프?!"
엘프는 인간과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아슬란이 손을 들어 말했다.
"귀중한 손님들이시다. 부족함이 없도록 맞이해 드려라."
"아, 예."
"대기사단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어서 오세요! 저희 마을은 처음이시죠?"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아 보긴 했어도, 이런 일반 백성들이 환대를 해주는 건 처음이었다.
"대기사단장님의 손님이시라면 우리에게도 귀중한 손님이시지."
"자자.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 마을에서 끓이는 스튜가 무척 맛있답니다."
"엘프는 처음 보는데,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아. 그, 그래."
엘티히와 엘프들은 눈을 껌뻑거리며 거의 끌려가다시피 백성들 손에 붙들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슬란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44화
1초만 소드마스터 44화
"자. 여기 따뜻한 스튜 대령했습니다."
"아······. 그래. 고맙다."
"호호. 맛있게 드세요."
엘티히는 눈을 몇 번 껌뻑이며 자신 앞에 놓인 스튜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음식은 처음인 건가.
아니면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그러는 건가.
나는 최대한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쳐다보고 먹어라. 식는다."
물론 말이 따뜻하게 나가진 않았다.
나는 먼저 스푼을 들고 스튜를 떠먹었다.
여기 마을 스튜는 언제 먹어도 맛이 일품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해지는 포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달까.
"이곳에 자주 오는 모양이군."
"여기 마을 회관에서 이곳 사람들과 함께 모여 이 스튜를 먹는 것이 내게는 소중한 시간이지."
퀘스트를 다 끝내고 국밥 같은 스튜를 한 그릇 먹으면 그날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린다. 그래서 성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진행할 때 꼭 이곳을 들렀다 간다.
골드를 얻기 위한 내 피땀 섞인 스튜였다.
"그렇군. 너는 내가 아는 인간들과 조금 많이······다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꾸만 먹지는 않고 수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엘티히의 행동이 무척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그냥 인간의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러는 거겠거니 싶어 무시하려 했지만,
"그래서, 대체 언제 먹을 생각이지? 그러다 아까운 스튜가 다 썩어 버리겠군."
이놈의 허세는 그새를 못 참고 엘티히를 쏘아붙였다.
"쯧-. 재촉하지 마라. 이런 건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정 못 먹겠으면 먹지 않아도 된다. 강요할 생각은 없다."
"흥. 누가 못 먹겠다고 했느냐?"
자존심이 센 누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에도 자존심을 부리는 건가.
엘티히는 천천히 스푼으로 스튜를 뜬 뒤 잠시 고민하며 바라보기만 하다 입에 앙 넣었다.
"······!"
번쩍이는 눈빛만 봐도 알겠다.
후르릅-.
그녀는 곧바로 다시 스튜를 떠먹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워 냈다.
"······며칠 굶었느냐?"
"시, 시끄럽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회관 안을 돌아다니며 스튜를 나눠 주고 있던 여인이 달려왔다.
"어머. 벌써 다 드셨군요? 여기 새로운 스튜입니다."
"아니. 난 이제 됐······."
"그리고 스튜와 빵을 같이 드시면 두 배는 더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
엘티히는 여인이 주고 간 빵을 매만지다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빵 먹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난 먼저 빵을 찢어 스튜에 찍어 먹었다.
빵과 스튜는 언제 먹어도 맛있는 조합이다.
"······."
그녀도 나를 따라 빵을 찢은 뒤 스튜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
생각보다 표정으로 많은 걸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대체 엘프들은 평소에 식사를 어떻게 하길래 고작 이런 빵과 스튜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저희는 괜찮다니깐요?"
"지금은 여왕님을 경호하는 중이라 먹을 수 없어요."
"어휴. 그러지 마시고 드세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그때 뒤에서 소란 소리가 들려왔다.
인심 좋은 마을 주민들이 스튜를 권하고 있었지만, 엘프들은 한사코 거절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거의 걸신들린 것처럼 빵과 스튜를 먹고 있던 엘티히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흠흠."
그녀는 자신이 너무 품위 없이 먹기만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무안한 듯 헛기침을 뱉었다.
"라이리. 로나."
"네, 여왕님."
"저들이 대접해 주는 걸 감사히 먹도록. 여기 스튜 맛이 매우 훌륭하다."
"아······. 예. 여왕님."
엘프들은 어리둥절하며 스튜를 한 숟갈 먹고는,
"헉!"
"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호호. 맛있죠? 제가 맛있다고 했잖아요."
엘티히와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접시를 비워 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엘프들의 평소 식사가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진짜 얘네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건가.
"아슬란."
그때 엘티히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넌 나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전 딱히 나눌 얘기가 없긴 한데요······.
"자리를 옮기지."
"······따라와라."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데리고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티히랑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아까 몬스터 군단을 단번에 쓸어 버린 그 힘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엘티히가 손가락을 까닥일 필요도 없다.
그냥 눈 한번 깜빡이는 것으로 마을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네임드와 단둘이 방 안에 남게 된 것이지만,
펄럭~!
아슬란의 허세로 무장된 지금의 나는 멋들어지게 망토를 펄럭이는 여유까지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상석에.
"······."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엘티히도 착석을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운을 뗐다.
"난 인간을 믿지 않는다. 아니. 인간을 싫어한다."
엘프가 인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너희 인간들은 늘 그래왔지. 우리의 선의를 악의로 갚으며, 배신했다. 한때 나도 인간과 엘프가 서로 평화롭게 교류하는 시대를 꿈꿨으나······ 전부 부질없었다. 결국, 너희들은 우리를 탄압하기만 했지."
300년 전,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 테키나를 물리쳤을 때만 하더라도 인간과 엘프의 사이는 지금처럼 험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교류하며 서서히 섞여드는가 싶더니, 결국 갈등이 커지고 다툼이 벌어지면서 마침내 큰 전쟁으로까지 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만약 그때 대륙의 영웅들이 나서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인간과 엘프, 둘 중 하나는 끝을 봤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엘티히는 인간과의 모든 교류를 끊어 버려 지금까지 이르렀다.
"난 너희들이 변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불신이 남아 있으면 곤란하다.
언제 테키나 족속이 대륙을 장악하려 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엘티히가 엘프들과 함께 나서주지 않으면 무척 곤란하다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나서서 두 종족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건 아직 스토리가 한참 덜 진행되고 성장도 덜 해서 안 될 것 같고······.
그렇다면,
"300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냐?"
"아니. 다르지 않지. 엘프가 그러하듯, 인간 역시 늘 똑같다. 음모와 배신이 판을 치고 온갖 권모술수가 도사리고 있지. 하지만-"
정말 나 밖에 엘티히를 설득할 사람이 없다면,
"방금 전 너도 만나보지 않았나. 저 순수한 주민들을. 그들이 네가 엘프라고 해서 차별을 하던가? 아니면 박대를 하던가?"
"그건······."
이 아슬란의 정신병을 이용해서라도, 이 끓어 오르는 병신 같은 허세에 내 몸을 던져서라도 난 이 게임의 스토리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저들도 300년 전과 똑같았다. 인간이 가진 순수한 마음은 항상, 늘 같았다. 그저 탐욕에 절어 있는 것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문제가 생겼던 것일 뿐."
인간과 엘프가 하나 되어 테키나 족속을 물리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가 무사히 집으로, 이 게임 밖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너는 그 탐욕스러운 위정자들과 다르다는 것이냐?"
그녀의 서늘한 눈빛을 나는 덤덤하게 마주했다.
"그래. 나는 다르다.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그렇다고 라파엘을 네 밑으로 보내 줄 거라 생각하나? 감히 엘프를 부하로 삼으려 하다니."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거만한 태도로 반박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난 라파엘을 내 부하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뭐? 그럼 그 아이와 왜 동행했던 거지?"
"그건 라파엘이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왔을 뿐이다."
엘티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 엘프의 자존심을 다 구기고 다닌다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군. 내가 여기 온 것은 라파엘 때문이니."
잠깐만.
이렇게 되면 잘 끌고 오던 이야기가 갑자기 끊어지는 거잖아?
엘티히가 라파엘을 끌고 돌아가 버리면 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어차피 그 아이는 계속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엘프의 둥지를 탈출할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겠지."
들끓는 허세가 엘티히를 그냥 보내 주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반발심만 키울 뿐이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이윽고 전기에 자극을 받는 것처럼 등허리에서부터 찌릿한 무언가가 올라오더니, 급해진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뭐가 그리 두려운 거지? 엘프라 바깥세상에서 모진 고통을 당할까 봐? 아니면······."
한번 날뛰기 시작한 허세가 순간 통제를 벗어나 엘티히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 아이의 몸에 악마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
"!?"
엘티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넌 대체 무엇이냐?"
"무엇이 말인가?"
"대체 그걸······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엘티히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똑바로 얘기해라. 인간인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아이가 그런 얘기를 했을 리는 없을 텐데?"
"얘기한 적 없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것이냐?!"
마력을 담은 목소리에 방 안이 흔들리고 밖에 있는 마을 회관까지 흔들렸다.
'미친. 목소리만으로도 사람 죽이겠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날 바라보는 저 시선만으로도 몸이 뚫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몸을 장악하고 있는 허세는 놀라울 만치 침착했다.
마치 저런 건 위협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듯,
"소리 지르지 마라. 품위 없다."
오히려 엘티히를 비난했다.
"지금 내가 장난을 하는 것 같으냐?"
"그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의미심장한 말······이 아니라, 그냥 개소리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 헛소리가,
"흐음-"
엘티히에게 먹히는 것 같았다.
대체 왜지?
"네가 빛의 기사라는 소문은 들었다. 라할의 빛을 쓴다지. 아까 너와 잠깐 부딪혔을 때도 분명 그건 심상치 않은 빛이었다. 너······."
그녀는 치솟아 오르고 있던 마력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라할과는 무슨 관계지?"
이건 또 뭔 소리여.
"······아무 관계도 아니다."
내 솔직한 대답에 엘티히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거까지는 얘기해 줄 수 없다, 이건가? 이해한다. 그런 걸 함부로 알려 줄 순 없겠지."
뭔가 대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파엘을 너한테 맡길 순 없다."
"아까부터 자꾸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나도 맡겨달라 한 적 없다."
"······."
"그저 그 아이를 믿어 보라고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라파엘과 며칠을 같이 있다 보니 알겠더군. 그 아이의 곧고 착한 심성과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단한 재능을. 너도 그 재능을 알기에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티히에게 말했다.
"난 그 아이의 마음을 믿는다. 그리고 강한 엘프의 정신을 또한 믿는다."
"엘프의 정신?"
"그래. 고작 악마의 피에 넘어갈 정도였다면 엘프족은 진작 테키나 족속에게 멸망했겠지. 그들의 강인한 정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륙이 있는 것이다."
"······."
잘 나가나 싶었는데, 오늘도 열심히 들썩이는 이 병적인 허세는 기어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
"그런데 넌 그렇지 않은 것 같군. 한심하구나. 여왕이라는 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엘프에게 그리도 믿음이 없다니. 정작 인간인 나조차도 엘프에게 갖는 믿음을 말이다."
"!?"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엘프에게 발전은 없을 것이다. 테키나 족속이 봉인을 깨고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이번에는 멸망을 피할 수 없겠지."
"감히 그따위 소리를······!"
엘티히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치닫게 했다.
이런 미친.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나는 더 미친 소리를 날리기 전에 억지로 몸을 입구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슬란의 허세는,
"선택은 너의 몫이다, 엘티히. 너희 종족에게 믿음을 가질 것이냐, 아니면 이번에도 너의 힘만 믿고 싸울 것이냐."
화려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난 뒤졌다.'
그리 생각하며 도망치듯 방 밖을 나서는 순간.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엘프족과의 외교 개선
"?"
45화
0.01초 소드마스터 45화
저놈은 또 제 할 말만 하고 떠나 버렸다.
이런 건방진 인간! 이라고 소리치면서 뒤에다 헬파이어를 날려 주고 싶었지만-.
"······."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슬란의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 마치 심판의 창처럼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한심하구나. 여왕이라는 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엘프에게 그리도 믿음이 없다니.'
그랬던가.
엘프들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엘티히는 항상 자신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종족과의 단절이었다.
물론, 그것이 꼭 자신만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엘프들의 힘을 믿고 함께 싸워나갔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로 이어졌을까?
"선택이라······."
엘프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선택.
한번 더 인간을 믿어 보는 선택.
아니. 어쩌면 인간이 아닌, 저 아슬란이라는 사람을 믿어 보는······ 선택.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겠다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누군가를 믿어 보고 싶었다.
* * *
쿠쿠쿵-!!
"꺄악!"
"뭐, 뭐야?"
"지진인가?!"
"설마 또 몬스터들이 쳐들어 오는 건······!"
회관이 크게 흔들리자 회관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이곳 주민들과 섞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스튜를 먹고 있던 두 엘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여왕님?"
라이리와 로나는 여왕의 마력을 느끼고, 그녀가 아슬란과 단둘이 있는 별관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앞을 아론이 막아 세웠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비키세요. 이건 분명 여왕님의 목소리였다고요."
"두 분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다."
"알아요. 그런데 방금 그쪽도 느꼈을 거 아니에요? 이건 여왕님께서 엄청 화나셨을 때 나오는 마력이라고요. 그쪽 주군이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아론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히려 그쪽 여왕님이 크게 다쳤으면 모를까, 우리 대기사단장님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뭐, 뭐라고요? 당신은 우리 여왕님이 누군지 몰라요?"
"그쪽이야 말로 우리 대기사단장님을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라이리와 아론이 팽팽하게 기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끼익-.
"어?"
별관에서 문이 열리더니,
펄럭~
오늘도 멋들어지게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아슬란이 나오고 있었다.
어디 하나 그을린 자국도 없이 아주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아슬란을 보며 라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띠었다.
그에 반해 아론은 그거 보라며, 거만한 고갯짓을 보였다.
"방금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었는데······."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슬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다."
별일이 아니었다고?
여왕이 그 정도로 목소리에 마력을 실을 정도라면 필시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건데, 이렇게 몸 멀쩡히 걸어 나올 수 있다니.
"라파엘."
"······네? 아, 예? 저, 저요?"
"라파엘이란 이름이 여기에 너 말고 또 있나?"
"아, 넵! 부, 부르셨어요?"
"들어가 봐라. 아무래도 엘티히가 너와 할 얘기가 있을 거 같던데."
안 그래도 아까부터 자신의 처우가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 하고 있던 라파엘이었다.
그녀는 아슬란의 말을 듣고 여왕이 있는 별관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라이리와 로나가 그 뒤를 따랐다.
* * *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엘프족과의 외교 개선.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대체 어디서, 뭐가 어떻게 외교 개선이 되었다는 거지?
나는 혼자 방 안에서 골똘히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히든 퀘스트 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히든 퀘스트라, 지금처럼 갑작스레 퀘스트 완료 알림창이 뜨기도 한다.
거기다 무려 보상이 10골드라니!
"근데 이거 어떻게 깬 거냐?"
가끔 보면 이 게임의 시스템을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즉사각이었는데."
엘티히가 그 정도로 인내심 많은 캐릭터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 뒤통수에 마법을 갈기지 않다니.
사실 방 밖을 나오면서 얼마나 떨렸는데.
지금도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외교가 개선되었다는 건 엘프와 교역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 말은 엘프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을 다른 곳에 팔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곧 왕국 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럼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세율을 높여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울 수 있게 된다.
"하-. 돈만 많아지면 곧바로 중갑병부터 만들고, 방어벽도 새로 쌓고, 마탑도······ 잠깐. 그럼 라파엘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마탑을 세우려면 라파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엘프와의 외교가 개선되었다고 해서 엘티히가 과연 라파엘을 우리 왕국 쪽에 넘겨 주려 할지······.
혹시 몰라 라파엘을 엘티히가 있는 방으로 보내 둘이 대화를 나누도록 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안 주면 어쩔 수 없고."
엘프들과 교역의 문을 열어 왕국 경제를 크게 키울 수만 있다면 라파엘 정도는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물론, 와주면 더 고맙고!
* * *
다급히 별관 안으로 들어온 라이리가 소리쳤다.
"여왕님!"
"······음?"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느냐."
그러자 두 엘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저희는 여왕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그러다 엘티히는 같이 따라 들어온 라파엘을 발견했다.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내 너와 할 얘기가 있었느니라. 둘은 잠시 나가 있거라."
"아, 네.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그래."
두 엘프가 나가고 나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라파엘. 너는······."
그리고 엘티히가 천천히 운을 떼는 순간.
"싫어요!"
"?"
라파엘은 자동 반사처럼 연달아 소리쳤다.
"안 가요! 못 가요! 전 여기 있을 거예요!"
"······."
그런 라파엘의 반응에 엘티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네년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냈다.
"감히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끊어? 오냐오냐했더니, 진짜 죽고 싶은 것이냐?"
"헙-!"
그에 기겁한 라파엘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죄, 죄송······."
"후-.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아슬란 그놈은-."
그러나 아슬란이라는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재빨리 들었다.
"네? 아슬란님이 왜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래. 벌써 '님'이다, 이거냐?"
"그건······.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시끄럽다. 한번만 더 떠들면 그땐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 하게 만들어주지."
라파엘은 한번만 더 말대꾸를 했다가는 진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너를 왜 지금까지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았는지는······ 너도 잘 알 것이다."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
엘프 안에서도, 대륙 밖에서도 그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엘티히는 라파엘을 거의 숨기다시피 했다.
라파엘도 알고 있다.
자신이 왜 그리 살아야 했는지.
"네 어미이자 내 동생인 엘리나가 너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맹세했다. 그 아이가 남긴 유언대로 너를 올바르게, 다치지 않게 잘 키우겠다고. 누구도 네 정체를 알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제 뜻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었던가.
엘티히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에 족쇄가 되어 오히려 너를 더욱 다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네?"
"그래서 마음을 정했다. 이번 한번만 너를 믿어 보기로."
"네에!?"
"네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뜻을 펼쳐 보라는 것이다."
"네에에!?"
"쯧. 다시 예전처럼 갇혀 살고 싶으냐?"
라파엘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그러니까 이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 어미를 닮아서 허둥대기는. 단, 조건이 있다."
그럼 그렇지.
조건이라는 말에 라파엘은 좋았다 말았다는 듯 기대감을 낮췄다.
그런데,
"네가 대륙을 탐험하고 싶다는 뜻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라이 왕국의 마법사 신분으로 움직이거라. 절대 혼자 다녀서도 안 된다. 항상 나와 아슬란의 감시 하에 움직여야 한다. 다른 왕국의 마법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어차피 일라이 왕국 말고는 다른 왕국에 들어갈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게··· 조건이에요?"
"그래."
"정말 그것뿐이라고요? 정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강경했던 엘티히가 마음을 바꾸다니.
라파엘은 너무 좋아 여왕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
엘티히는 잠시 당황하여 몸이 경직되었다.
"감사해요. 저 정말 잘할게요."
곧 그녀는 라파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엘프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항상 예의주시할 것이다."
라파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이 있다."
"네?"
엘티히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아슬란 그자는 네가 테키나 족속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
순간 라파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버렸다.
대체 어떻게 아슬란이 그 사실을?
"서, 설마 여왕님이 말씀해 주신 거예요?"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말하겠느냐."
라파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널 본 그 순간부터 알았던 거 같더군."
"그, 그걸 어떻게!?"
변신술도 은신술도 단번에 꿰뚫어 본 남자다.
그런데 설마 자신의 몸에 흐르는 악마의 피까지 알아봤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상식적으로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더러운 잡종을 받아 줄 사람은 이 대륙에 없다.
라파엘은 머리가 하얗게 변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엘티히는 그런 라파엘을 진정시키듯 말했다.
"괜찮다. 그 사실을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내는 아니다. 거기다 그는-."
그녀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을 이었다.
"너를 믿고 있더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를?
"저, 저를요?"
"그래. 너의 곧은 심성과 엘프 정신이라면 악마의 힘 따위는 쉽게 이겨낼 수 있다는 듯이 떠들더군. 감히 엘프의 정신을 들먹이는 것이 건방져 보이긴 했다만······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그동안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아예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눈감아줬다.
무려 악마를 처단하는 빛의 기사라 불리는 아슬란, 그 남자가.
"그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자는 내뱉는 말에도 무게가 다른 법이지."
엘티히가 누군가의 강함을 인정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매번 무시하고 경멸하던 한낱 인간 따위를 말이다.
"아슬란, 그자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조금 이해가 됐다.
라파엘도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마법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엘티히와 호각을 이루던 아슬란의 강함을.
그땐 자칫 잘못하면 엘티히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오싹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 사내라면 널 한번 맡겨봐도 괜찮을 것 같더군. 물론 네가 아직 철이 없어서 언제 질려 버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엘티히가 마음을 바꾼 것이구나.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번복하는 일이 없던 고고한 엘프의 여왕이 마음을 바꾼 이유가 바로, 아슬란 때문이었구나.
"잘할 수 있겠느냐?"
오늘따라 더욱 부드럽게 느껴지는 엘티히의 손길에 라파엘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정말 잘할 거예요. 제가 원래 적응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하지만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에 그녀는 목에서부터 무언가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러니까 이, 이번에도······."
차마 말을 다 이을 수가 없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내가 미쳤나 봐."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예전에 엘프들과 다른 이 검은 피부를 지워 내려고 피가 날 정도로 닦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별것도 아닌 거로 나, 나도 참-."
엘프들과는 다른 검은 피부.
마력에서도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
자신은 원하지도, 택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악마의 피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늘 위축되어 살아왔다.
그래서 항상 다른 이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라파엘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흑-."
하지만 이제 엘티히 뿐만이 아니라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생겼다. 심지어 그 남자는 자신을 믿는다는 말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해방감이 느껴졌다.
"끄으윽-."
속으로 삼키려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엘티히는 말없이 그런 라파엘을 조용히 안아 주었다.
"······."
자신도 정말 오랜만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46화
0.01 소드마스터 46화
"예쁜 여왕님.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
"그땐 더 맛있는 스튜랑 빵을 준비해 드릴게요."
주민들의 따뜻한 인사에 엘티히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꼭 한번 다시 오지. 그땐 다른 엘프들도 데려오겠다."
"호호. 기다리고 있을게요."
비록 반나절 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벌써 주민들과 엘티히 사이에 정이 생긴 듯하다. 못내 아쉬워 하는 그들을 뒤로 하며 엘티히가 내게 다가왔다.
"우린 이제 엘드라비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엘티히는 저 뒤에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를 부탁한다."
그 말은 라파엘을 정말 나한테 넘겨 주겠다는 건가?
순간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애 돌보는 취미는 없다."
이놈의 허세에 떠밀려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갔다.
그러나 엘티히는 여전히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가르칠 게 많은 아이다. 아직 철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르겠지.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았나. 저 아이가 가진 재능은 진짜라는 거."
라파엘의 재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
"어쩌면 저 아이의 재능은 먼미래 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지만 그만큼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 너는 괜찮다고 말할지 모르나, 저 아이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이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
"내 동생 엘리나는 금지된 사랑을 했고, 저 아이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저 아이 때문에, 그 악마 때문에 내 동생이 죽은 거라고 원망했다. 그래서 아직 대륙에 남아 있는 테키나 족속의 마을을 찾아 그곳을 쓸어 버리기도 했지."
테키나 족속 안에는 다양한 등급이 존재하며, 그 생김새도 다르다.
이렇게 등급도 나뉘고 생김새도 다른데 이들이 테키나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마기'.
이들의 몸 전체가 마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힘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테키나 족속의 아이덴티티다.
그중 '루인' 등급이라 불리는 악마는 인간 체형에, 무척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통 악마의 피가 섞였다고 하면 루인 등급을 뜻한다.
얼마나 그 외모가 뛰어났는지, 무려 여왕의 동생이라는 엘리나도 그 꾀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짝 쓸모도 없는 일이었다. 저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찾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저 아이를 숨기려 했다. 우리 엘프의 명예를 위해, 저 아이의 미래를 위해. 그래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변신술이었지."
슬슬 느낌이 이상했다.
이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 가여운 아이를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저 아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저 아이에게만 무거운 짐을 올려놨었다."
이 장면, 이 대사, 이 구도.
내가 게임에서 몇 번이나 봤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되겠지. 저 아이와 내가 너를 만났으니까, 아슬란."
방금 저 말로, 날 바라보는 저 눈빛으로 확신했다.
이건 엘티히가 주인공, 알렉산더에게 해야 하는 대사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아이를 부탁한다. 내 딸아이나 다름없는 저 아이를······너에게 맡기겠다."
그렇다면 설마,
'그, 그것도 주는 건 아니겠지?'
오직 알렉산더를 골랐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
오직 이 게임의 진주인공을 골랐을 때만 받을 수 있는 보상.
그것까지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대사와 이 장면은 알렉산더로 플레이를 했을 때만 나오는 컷씬 같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에게 줄 것이 하나 있다."
엘티히는 목걸이를 풀며 내게 건넸다.
심장이 쿵쾅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뭐지?"
하지만 병적인 허세로 무장하고 있는 나는 덤덤한 얼굴로, 모른 척하며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이 하나 있다. 그자가 훗날 반드시 쓸 일이 있을 거라고 내게 맡겨 둔 것이지. 언젠가 쓸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알게 될 거라면서."
"······그 인간이라는 건 라일라칸을 말하는 것인가?"
엘티히와 유일하게 친분을 쌓았던 인간이자 대륙 최강 소드마스터로 불렸던 인물.
라일라칸.
그의 이름에 엘티히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래. 엘프들이 유일하게 친구로 기억하는 인간이다. 그자가 내게 남긴 것이다. 그땐 왜 이런 귀찮은 걸 맡기나 싶었는데······. 어쩌면 오늘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받아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엘티히가 건네는 목걸이를 받았다.
[루겔로스의 펜던트]
-악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
-여섯 개로 나뉜 팬던트들을 하나로 모으면 전설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배의 신, 루겔로스의 가호가 함께 하는 팬던트입니다.
-펜던트 활성화 시 고유 능력이 부여됩니다.
무려 두 번째 펜던트였다.
이걸 정말 준다고?
이제까지 수많은 플레이를 해봤지만, 알렉산더 이외에 이 펜던트를 이런 식으로 받아낸 건 처음이었다.
"어디에 써야 하는 건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라일라칸의 말로는 신들이 만든 펜던트 중 하나라고 하더군.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 안에 영험한 힘이 담겨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쭉 가지고 있었던 건가?"
"허튼 말을 할 놈은 아니었다. 바로 너처럼 말이지."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엘티히는 라파엘을 알렉산더에게 맡기면서 이 펜던트를 함께 넘긴다. 내가 너를 믿고 있다는 증표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이 펜던트를 가장 쉽게 얻을 방법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말고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했을 땐 이 펜던트를 무척 어렵게 구해야 했다.
"······일단 갖고는 있겠다."
진짜 잘 갖고 있겠습니다.
"그래. 너라면 그 펜던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아낼······."
바로 그때였다.
파앗-!
내 손에 들려 있던 펜던트가 갑자기 빛을 번쩍이면서 분해되더니, 순식간에 내 손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
엘티히는 내 손목에 남겨진 펜던트의 표식을 보고 놀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이 만든 팬던트라더니. 거짓말은 아니었군."
펜던트를 활성화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흡수된 거라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신들이 선택한 기사······.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말 넌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로구나."
하지만 아슬란의 허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난 신들이 무엇을 택했든 상관하지 않는다."
엘티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 아슬란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의지뿐이다."
"······."
그런 장렬한 허세에 충격이라도 먹은 것일까.
엘티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대륙이 망하든 불에 타 없어지든 뒤에서 뒷짐만 지고 있는 신들의 뜻 따위 알게 뭐란 말이냐."
그러면서 그녀는 라파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라파엘. 몸조심하거라.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네, 여왕님. 잘 지내고 있을게요."
엘티히가 손을 뻗자 포탈이 생겨났다.
포탈 마법은 무척 힘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엘티히에게는 그냥 모든 마법이 쉬워 보였다.
"아슬란. 언제 한번 엘드라비로 오거라. 손님이니, 박대하진 않겠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기대하지."
엘티히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포탈과 함께 사라졌다.
* * *
"아-"
결국 가 버렸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상대는 300년 전 대전쟁을 치르기까지 한 영웅이지 않던가.
심지어 그녀는 엘프들의 여왕이다.
'그래.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감히······.'
알렉산더는 그리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족속, 엘프.
어머니의 고향, 엘드라비.
알렉산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는 엘프였다.
그렇기에 엘프와 그 족속이 산다는 숲의 낙원 엘드라비를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이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족인 엘프와 대화를 할 기회였을 것이다.
아, 라파엘이 이제 아슬란 님의 밑으로 들어왔으니 마지막은 아니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자신이 인간과 엘프에게서 나온 하프라는 사실을.
"왜 그러고 있지?"
잠시 멍하니 엘티히가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들리는 아슬란의 목소리에 알렉산더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아슬란의 앞에만 서면 긴장이 된다.
또 무슨 실수를 할지, 또 무엇이 저분의 심기를 건드릴지,
내가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 실망하고 쫓아내시는 건 아닌지······.
매번 걱정만 됐다.
그런데,
"네 마음을 난 잘 알고 있다, 알렉산더."
아슬란이 알렉산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토닥이듯 두드렸다.
"언젠가 엘드라비로 갈 일이 생긴다면 그때 널 꼭 데려가도록 하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설마······.
"저들도 너의 동족이지 않나?"
순간 알렉산더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아슬란은 알고 있다.
자신이 엘프와 인간에게서 나온 하프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아니. 그걸 알면서도 왜 날 받아 준 거지?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갈 때즈음.
"두려운 것이냐?"
묵직한 아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것이······."
"그럴 필요 없다. 너의 핏줄이 어디든, 설령 네가 악마의 핏줄이라고 해도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 말에 또 한번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넌 나의 곁을 지키고, 나의 수족이 되어 주는 기사다. 출신이나 핏줄은 상관없다."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심부를 후벼 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 네가 나의 기사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알렉산더."
그 말을 남기고서 아슬란은 등을 돌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펄럭이는 그의 망토가 오늘따라 더욱 위엄 넘치게 보였다.
"······."
다 알고 계셨구나.
그동안 모두에게 숨겨 왔던 나의 출생의 비밀을.
그걸 알면서도 저분은 나를 당신의 기사로 인정하시는구나.
"읍-"
울컥이는 마음에 알렉산더는 두 손이 떨려왔다.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제 왕국으로 돌아가고자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아슬란을 향해 정중한 기사의 예를 차렸다.
그리고 맹세했다.
저분의 말대로, 앞으로도 저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고, 수족이 될 수 있는 기사가 되겠노라고.
* * *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라파엘을 우리 왕국의 수석 마법사로 세웠다.
"예? 마, 마탑이 없다고요?"
"그래. 아직 제대로 된 마법병단도 없다. 마법사는 좀 있다만."
"헉."
일라이 왕국 수준이 이 정도로 처참했을 거라고 미처 몰랐는지 라파엘의 얼굴은 충격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이놈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 전에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하듯 말해 주었다.
"일라이 왕국 최초의 마탑을 네가 세우는 것이다."
"최초의 마탑······."
"그래. 네가 모든 규칙을 만들고 틀을 정립하며 대륙 최강의 마법병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넌 할 수 있다. 난 널 믿고 있다, 라파엘."
그러자 라파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뜬금없이 왕국에 합류해 수석 마법사가 된 라파엘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왕국 내에 있던 마법사들이 주로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놈들은 라파엘이 시범으로 보여 준 마법을 몇 번 보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오히려 엄청난 마법사가 왔다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을 할 때가 왔다.
일단 급한 것부터 처리를 하느라, 특히 부하들 앞이라 하지 못했던 일.
바로 이번에 새로 얻은 펜던트에 고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루겔로스의 펜던트]
솔직히 이걸 이렇게 쉽게 얻을 줄은 몰랐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쉽게 얻은 건 아니지.
엘티히한테 죽을 뻔한 게 몇 번이었는데.
"아이고. 제발 좋은 거 뜨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 좀 드립니다."
이 불쌍한 영혼을 봐서라도, 이 서러운 똥캐가 조금이나마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좋은 옵션 좀 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끝낸 뒤,
"간다."
계속 미뤄 두기만 했던 옵션 부여를 거행했다.
그리고,
[새로운 옵션을 부여합니다.]
팔찌에서 밝은 빛이 아닌, 검고 위압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더니 내 눈앞에 정보창 하나가 나타났다.
[의지의 피어]
-15초간 상대를 무력화 상태로 빠뜨립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초)
-피어의 강도는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피어 스킬?
"의지의 피어는 어중간한 스킬 아니었나."
피어라는 스킬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드래곤 피어, 기사의 피어, 권능의 피어 등등.
하지만 의지의 피어라.
거기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5초.
딱 5초밖에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스킬 자체 효과가 미미해서 거의 무한 즉발로 써도 상관이 없거든.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있었다.
"이것도 시전자의 힘에 비례하는 거라면······."
아슬란의 무력 상태로는 턱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도 수호 방패처럼 찰나의 괴력을 섞을 수 있다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면 된다.
나는 의지의 피어와 찰나의 괴력을 동시에 사용해 보았다.
"······?"
뭐가 된 건가?
좀 둔중한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는데.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스킬을 꺼보았다.
그러자,
털썩-!
"우욱-!"
"크헉!"
집무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
놀란 마음에 밖으로 나가 보니,
"으으-"
"대, 대기사단장님."
"우욱-"
집무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전부 창백해진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47화
0.01초 소드마스터 47화
신전의 아침은 오늘도 라할의 빛처럼 밝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외모가 더욱 광이 나는 듯, 하리엘의 뽀얀 얼굴에 신전 안을 거닐던 기사들과 사제들은 한번씩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연락이 한번도 없네.'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고 있던 하리엘은 괜히 심술이 났다.
'언제는 누군가의 소원이었느니 뭐니 하면서 다 해줄 것처럼 굴더니.'
그래서인지 양쪽 볼이 툭 튀어 나왔다.
'괜히 사람 기다리게만 하고 말이야.'
그래도 한번은, 지나가듯이 한번쯤은 연락을 해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하리엘 자신이 교단의 검이고, 어떤 남자와도 진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안부 삼아 한번쯤은 연락을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리엘 님."
에길론의 목소리에 하리엘은 정신을 차리며 뾰로통해 있던 표정을 얼른 풀었다.
"흠흠. 그, 그래. 무슨 일이냐?"
요즘 들어 조금 이상한 하리엘의 모습에 에길론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에길론이 건네는 서신을 받아 확인하던 하리엘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에, 엘티히? 엘티히가 움직였다고?"
"예. 소수의 인원과 함께 움직였다고 합니다."
엘티히는 대륙에 있는 마법사 중 누구도 상대할 수가 없는 최강의 엘프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그녀는 경호병력을 많이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이미 그녀 스스로가 최강이기에 누가 지켜 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아슬란이랑 엘티히가 왜 싸움을······."
뜬금없이 아슬란과 엘티히가 맞붙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워낙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탓에 정보원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으며, 그들의 싸움에 휘말려 애꿎은 몬스터 떼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충격적인 건 아슬란과 엘티히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는 것.
"무승부? 정말 무승부로 끝이 났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슬란이 그 엘티히와 비겼다는 건가?
아슬란에 대한 평가가 요즘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상대는 무려 엘티히다.
그녀는 신화 속에 나오는 전설 같은 마법사다.
100번을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아슬란이 비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둘이 무승부로 끝이 났다는 건······.
"아슬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에길론의 말에 하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했다.
둘이 무슨 이유로 싸운 것인지는 알려진 게 없지만, 그토록 터무니없이 강하니 엘티히와 싸워서 비긴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괜찮은 걸까, 그 사람.'
그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면 몸이 성치는 않을 터.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만약 다쳤다면 얼마나 다친 것인지.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그냥 짧게 편지라도 주면 되잖아.
"이런 나쁜 새······."
"네?"
휴.
짧게 숨을 내쉬며 하리엘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정보가 나오는 대로 보고해줘."
"알겠습니다."
요즘 따라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기분인 걸까?
* * *
왜 귀가 가렵지.
누가 내 욕을 하나.
나는 슬쩍 호레스를 노려보았다.
"······."
그러자 그는 흠칫거리며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왜 그러시는지······."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정체되었던 회의는 넬라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기사단의 해이해진 기강을 다잡기 위해
힘을 발휘하셨다고 말입니다."
호탕한 그의 웃음소리에 다른 신하들도 따라 웃었다.
어제 의도치 않게 발동되었던 피어가 집무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모조리 영향을 끼쳤다.
이건 명백히 스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남용한 내 잘못이었으나,
"이게 웃을 일인가?"
"······."
또 사람들 앞이라고 거만하게 튀어나오는 허세가 오히려 기사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한심하구나. 나의 기사라는 자들이, 최강의 기사단이라 자부하는 자들이 고작 그것 하나 버티지 못해서야."
그러자 넬라를 비롯해 기사들 모두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그걸 버티라고 하는 건 양심 없는 말이긴 했다.
무려 찰나의 괴력을 섞은 피어이지 않던가.
심지어 의지의 피어라고 했던 것이 지금은,
[혼돈의 피어]
-찰나의 괴력을 의지의 피어와 동시 사용 시 옵션 효과가 혼돈의 피어로 변경됩니다.
-최고 등급의 피어를 15초 동안 유지합니다.
-150m 안에 있는 대상을 무력화시키고 극강의 공포를 심어 줍니다.
혼돈의 피어로 뒤바뀌었다.
그것도 무려 최고 등급의 피어로!
'혼돈의 피어라면 혼돈의 드래곤이 쓰는 능력 아니었나?'
15초밖에 쓰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스킬 자체는 최고였다.
'컨트롤 연습만 하면 되겠어.'
어차피 사거리를 내 마음대로 늘릴 순 없으니, 적군과 아군을 가려서 쓸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잠시 길어졌던 침묵을 깨고 기사단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예!"
그렇게 오늘도 1일 1허세를 부려 준 뒤에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자스트라 경계선에서 요즘 푸른 빛을 띤 비행 몬스터 하나가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합니다. 생김새는 자쿤을 닮았으며, 그 깃털에서 나오는 빛이 심상치 않아 주민들이 종종 불안에 떨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자스트라 경계선 이야기면 충분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 된다.
그곳 너머에 있는 곳은 인간이 살지 않는, 인간 이외의 종족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호드, 드워프, 키나브 등등.
엘프같이 인간과 단절하여 자기들만의 영역을 가진 종족.
그중에서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인간과 교류를 하고 있는 곳은 드워프들 뿐이다.
또한 자스트라 경계선 너머로는 굉장히 많은 몬스터가 있어서 가끔 이곳에서는 잘 보지 못하는 몬스터가 툭 튀어나오곤 한다.
보통 때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자쿤을 닮은 푸른 빛의 비행 몬스터?'
그거 설마 네잎클로바 아닌가?
플레이어들에게 네잎클로바로 불리는 사파이어 자쿤.
머리 위에 솟아 나와 있는 뿔이 네잎클로바를 닮았기도 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 의미처럼 꽤 좋은 아이템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그리 불리는 몬스터였다.
길이 4m 정도 되는 몬스터인데, 전투력은 크게 높지 않지만, 비행을 한다는 까다로움이 있어 검으로 사냥하는 건 힘들다.
그러나 내게는 이제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라파엘이 있지 않던가.
"그 경계선과 마을이 가까운가?"
"다행히 조금 거리가 됩니다만, 문제는 그 몬스터를 쫓아 호드들이 자꾸 국경을 침범하고 있는 터라 보고가 올라온 것입니다."
호드.
유저들 사이에서는 오크라고도 불리는 족속.
날카롭고 두꺼운 어금니가 입 밖으로 나온 것도 그렇고, 피부가 초록색인 것도 그렇고 흡사 몬스터를 닮았다.
'뭐 이런 걸 일일이 반응하면 나만 피곤해지지.'
사실 그들이 국경을 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호전적인 그들은 몬스터 사냥 중에 경계선을 넘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냥 넘어 버린다.
그러다 다른 왕국 기사단과 싸움이 나면 그걸 또 피하지 않고 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지, 아니면 지능이 딸리는 건지, 수적으로 불리해도 일단 냅다 박고 보는 것이 바로 호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통 국경을 넘는 놈들은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고 숫자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어차피 그 안에 네임드가 섞여 있지 않으면 지휘 체계도 엉망인지라 크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보통 때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좋은 아이템을 뿌리고 다니는 네잎클로바가 있단 얘기를 들었으니, 이걸 그냥 넘길 순 없었다.
그놈이 아무리 비행 몬스터라고 해도 라파엘의 마법이면 얼마 못 버티고 쓰러질 터. 거기다 호드들이 뒤따라 나온다면 그건 아론과 알렉산더, 그리고 자랑스러운 나의 기사단이 처리할 것이다.
전면전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호드를 위협해 쫓아내면 끝이라는 것.
나는 나설 필요 없이 뒤에 있다가 일이 다 끝나면 아이템 회수만 하면 된다.
문제는,
"감히 미물들 따위가 우리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냐?"
오늘만큼은 막지 않고 풀어 주었던 병적인 허세가 정수리를 뚫을 듯이 치솟아 올랐다는 것이다.
"건방진 놈들. 우리 왕국을 우습게 보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놈들을 통해 모든 왕국과 족속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구나."
그러면서 나는 앉아 있던 상석의 팔걸이를 붙잡았다.
"만약 그들이 정녕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한번 날뛰기 시작한 허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콰콰콱-!!
손잡이부터 시작된 균열이 곧 의자 전체를 부숴 버렸다.
"!?"
기사들과 문관들은 일제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그동안 나는 속으로 탄식을 내질렀다.
'아끼던 의자였는데.'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착석했을 때의 느낌도 무척 좋은 의자였는데.
이놈의 허세를 순간 참지 못하고-.
'읏.'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촉감에 슬쩍 고개를 내려보았다.
손에서는 파편이 박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만약 회의장에 사람들만 없었다면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어다녔을 것이다.
* * *
"모두 그런 줄 알고 준비하도록."
펄럭~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먼저 전각 밖을 나서는 아슬란.
그런 그가 나가고 나서야 그들은 참았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후아-."
"휴우-."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넬라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저리 크게 분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호레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침묵하셨지만, 이제 강대국으로써의 면모를 보이시는 것 아니겠소? 그동안 오래 참으신 게지. 하지만 대기사단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왕국과 족속에게 경고할 때가 되었소."
국왕 카르만도 칼라 왕국의 경계선을 허락도 없이 넘는 자가 있다면 그 신분을 막론하고 엄히 벌한다.
함부로 다른 왕국과 족속이 자신의 왕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강대국의 국격이자, 품격이었다.
이제 일라이 왕국도 그런 강대국의 모습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기사단장님의 분노가 범상치 않은 건 확실하오."
강철보다 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상석이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저것을 종잇장처럼 찌그러뜨리다 못해 아예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거기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저 피.
그것도 무려 아슬란의 피다.
그 어떤 상대와의 싸움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피를 이곳에서 보여 주었다.
"일부러 피까지 보이셨다는 건, 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 주시는 것이오. 이거 자칫 잘못하면······."
호레스의 말에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호드족이 말살을 당할 수도 있겠구려."
그만큼 그의 분노가 크다는 뜻이리라.
"호, 호드족과 그럼 전면전인 겁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호드족의 규모도 모르는 상태이지 않습니까?"
저들의 우려에 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듣지 못하였소? 무려 엘프의 여왕, 엘티히와 호각을 이루신 분이오. 엘티히가 누구요? 제아무리 위대한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엘티히에게는 모두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300년 전 대전쟁까지 치른 대륙의 영웅이자 마법사 중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엘티히다.
그런 그녀와 호각을 이룬 아슬란이라면······. 그의 강함이 어디까지인지 호레스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분께서 진정으로 호드를 쓸어 버리겠다고 하신다면 반드시 그리될 것이오."
"······."
그 말에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호드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것도 아슬란의 손에!
"우리는 그저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될 뿐."
그들은 전부 의기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48화
0.01초 소드마스터 48화
"여기서는 마력 조절을 간결하게 해야 돼요. 잘 보세요. 여기서 휘리릭 마력을 바람처럼 내보낸다는 생각으로 보냈다가 빠르고 간결하게 회수를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콰아아앙-!!
라파엘이 보여 주는 폭발 마법에, 마법사들은 모두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와아-."
내가 봐도 눈을 즐겁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비록 눈은 즐거우나, 저걸 내가 맞는다고 생각한다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근데 저걸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지?"
"넌 이해했냐?"
"아니."
라파엘은 열정을 가지고 마법사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정작 이들 중 그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제일 높은 마력을 가진 자의 스텟이 고작 57,
나머지는 30~50 사이에 머무르고 있어 실력차가 월등하게 나는 라파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놔두면 알아서 잘 성장을 하겠지.'
당장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라파엘을 수석 마법사로 세웠으니, 곧 실력이 올라갈 것이다.
드라마틱한 성장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잔잔해도 괜찮으니, 사람 노릇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컸으면 좋겠다.
"헉!"
"대, 대기사단장님!"
"언제부터 거기에 계셨는지······!"
나는 마법사들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잘 배우거라. 라파엘 같은 대단한 마법사 밑에서 배우는 건 무척 귀한 경험이니."
너희 키우면서 들어가는 세금이 생각보다 많단다.
"옙!!"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이놈들도 언젠가는 밥값을 하겠지.
나는 오늘의 마법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어? 대기사단장님!"
라파엘은 다가와 내 손부터 살펴봤다.
"어제 피를 좀 많이 흘리시는 거 같던데. 손은 다 나으셨나요?"
말도 마라.
안 그래도 어제 집에 돌아가서 포션이란 포션은 다 쏟아 부었다.
그때 느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별거 아닌 상처였다."
별거 아니긴.
어제 아프다고 밤새 팔짝 팔짝 뛰었으면서.
이놈의 허세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따끔거리는 고통 때문에 눈물을 질질 흘렸을 것이다.
진짜 나중에 회복 능력 하나는 만들어 둬야겠다.
"마법 병단 구성은 잘 되고 있는냐?"
"네. 마탑도 아주 순조롭게 잘 지어지고 있고요. 마탑이 완성만 되면 다양한 마법을 연구할 테고, 그럼 마법 병단의 질도 엄청 높아질 거예요."
마탑의 존재가 그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마탑은 이 왕국에서 연구실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이 발전해야 하는 것만큼, 왕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마탑의 연구가 필수적이었다.
'역시 라파엘을 데려오는 건 신의 한수였어.'
엘티히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숱하게 넘기면서 받은 아주 값진 보상이었다.
'나중에 하프 데빌들을 만날 때도 쓸모가 있겠지?'
하프 데빌.
다크 엘프가 된 라파엘처럼 악마의 피가 섞인 하프들을 뜻한다.
엘티히가 저번에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이 무리를 이루어 사는 마을이 있다.
훗날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한번은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떠날 채비를 하거라."
"아-. 오늘 바로 떠나시나요?"
"그래. 기사단과 함께 떠날 것이다. 비행 몬스터라고 하니, 마법의 힘이 필요하겠지."
"예. 그럼 마법 병단은요? 같이 데려가나요?"
나는 마법 병단들이 있는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들은 얼른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데려가라.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 백번 훈련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질 테니."
"그렇게 할게요."
라파엘이 내 말을 마법사들에게 전달하자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도 드디어 대기사단장님 뒤에 서서 싸우는 거야?"
"흑흑. 우리의 설움을 드디어 풀게 되는 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어떻게든 왕국에 도움이 되어 보려고 하는 그들의 기특함에 칭찬을 하려고 했으나,
"모두 들어라."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허세는 이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낙오된 자는 버리고 간다."
"헉."
라파엘은 조용히 다가와 내게 말했다.
"저기, 그래도 기사들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슬란의 허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얘기였다.
"너희들이 마법사라고 해서 봐주는 건 없다. 보병들과 함께 뛰어라. 당장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뛰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며 망토를 과하게 펄럭였다.
"끝까지 낙오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내 너희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것이다."
그러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예!!"
그들의 대답에 라파엘이 깜짝 놀라며 몸을 움찔 거렸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마음에 드는군."
막상 자기보고 말에서 내려와 뛰라고 하면 10분도 못 버틸 놈이 허세는.
그래도 의도치 않게 마법 병단의 사기를 제대로 높여 준 듯했다.
* * *
"대족장. 저기 '만' 왕국의 기사단입니다!"
호드족의 대족장, 막투르는 자스트라 경계선을 넘어 '만' 왕국의 경계선까지 넘었다.
허락도 없이 국경선을 넘는 건 모든 왕국이 금지하는 일.
그러나 막투르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도 가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상관없다! 우리는 저 몬스터만 잡으면 된다. 가자!"
그는 하늘을 높이 비행하며 마치 막투르와 그의 부족을 놀리는 것만 같은 사파이어 자쿤과 그 무리였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국경을 넘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 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저놈들을 꼭 잡아야만 했다.
"멈춰라! 너희는 무단으로 '만' 왕국의 국경을······ 으헉!"
콰콰쾅-!
만 왕국의 기사단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쿤들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들이 우왕좌왕 하는 동안, 호드들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자쿤들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비행하여 달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족장! 여기서부터는 일라이 왕국의 국경입니다!"
"상관없다!"
"하지만 상대는 그 아슬란이 있다는 일라이 왕국인데······."
막투르는 부하들의 표정을 살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을 즐기는 호드.
그들의 얼굴에 묘한 흥분감이 돌고 있었다.
"아슬란이 여기까지 직접 올 일은 없겠지만, 만약 온다면 영원히 잊지 못할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우우-!!"
그러면서 그들이 타고 있던 코뿔소 벨랍토르의 배를 힘차게 찼다.
조금만 더 가면 사파이어 자쿤을 잡을 수 있다.
"대족장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너희들을 몇 번이나 보냈지만, 허탕만 치지 않았느냐. 계속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막투르는 자쿤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리 가운데에서 비행하고 있는 사파이어 자쿤을 향해 창을 힘껏 던졌다.
퍼억-!
"키에엑!"
하지만 다른 놈이 대신 맞아 추락하면서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날 위로 올려라."
"우우-!"
부하 몇 명이 달리는 벨랍토르 위에 있는 막투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발을 강하게 내디디며 위로 떠오르는 순간, 그들도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몸을 위로 올렸다.
파앗-!
육중한 몸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키에엑-!!"
자쿤 무리가 필사적으로 그를 막아 보려 했으나,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들을 밀어내고 기어코 막투르는 사파이어 자쿤의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자쿤들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달려 들었고, 막투르는 양날 도끼를 꺼내 그들을 무참히 내리 찍었다.
"키에에엑-!!"
그를 등에서 떨어뜨리고자 사파이어 자쿤은 몸부림을 쳐댔다.
그러나 녀석의 등을 발바닥으로 꽉 붙잡으며 막투르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비행을 거듭했을까.
"대족장!!"
부하들의 다급한 외침에 막투르는 끝을 봐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달려드는 자쿤들을 몰아내며 도끼를 높이 들었다.
"이제 끝이다!!"
한방에 끝을 보기 위해 도끼를 내려치는 순간.
파직-! 파지직-!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날벼락이 내려쳤다.
콰아앙-!!
그것을 맞고 사파이어 자쿤은 기절을 한 것인지 퍼덕이던 날갯짓을 멈추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같이 번개 공격에 맞은 막투르 역시 놈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크으-. 대체 어디서 갑자기 번개 공격이······."
한참이나 바닥을 굴러서야 막투르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다.
다행히 크게 피해를 입은 곳은 없다.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걱정은 되지 않는다.
호드에게는 뛰어난 회복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족장!!"
부하들이 소리를 치며 빠르게 자신의 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호들갑 떨기는.
사파이어 자쿤은 바로 앞에 꿈틀거리며 누워 있는 상태.
이제 사냥은 끝났다.
"뒤! 뒤를 보십시오!!"
그런데 부하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뒤를 보라고?
그러기도 전에 막투르는 자신의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느꼈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자신을 냉담하게 내려보는 한 남자와 기사단이 서 있었다.
* * *
[막투르]
무력: 94
지력: 60
이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파이어 자쿤과 함께 떨어진 막투르.
라파엘이 만들어낸 뇌격에 이놈이 같이 떨어졌다.
'막투르라면 아직 나올 때가 아닐 텐데?'
나는 황급히 뒤따라 오는 호드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덩치가 크고 어금니가 길게 솟아 나왔다.
"대족장!!"
전부 각성을 마친 호드들이다.
그 말은 호드에게 네임드급 대족장이 생겨났다는 뜻.
호드라는 족속은 원래 여러 부족으로 나뉘는데, 자신들을 각성시켜 줄 수 있는 대족장이 나타나면 하나로 뭉치게 된다.
그리고 막투르가 바로 저들의 대족장이다.
'아직 나와서는 안 될 놈이 이렇게나 일찍 나와 버리다니.'
만약 상대가 대족장이 있는 호드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엉성하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 같다.
"보아 하니,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군."
키가 2m 30은 되어 보이는 막투르가 높게 솟은 두 어금니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호드의 대족장, 막투르다!"
그 목소리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세가 느껴졌다.
기사단의 말들이 전부 그 험악한 음성에 푸르르 몸을 움찔 거렸다.
물론, 내 말은 그냥 현실 감각이 없는 건지 아주 태평해 보였다.
"우우-!!"
"막투르!!"
뒤에 있던 호드들이 호응을 하며 함께 울부짖었다.
"일라이 왕국의 기사들이여. 죽음이 두렵다면 그냥 돌아가라. 어차피 너희의 국경을 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당분간 없을 거라는 말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든 넘겠다는 뜻이었다.
"우린 그만 이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가겠다."
막투르는 저벅저벅 걸어가 꿈틀 거리고 있는 사파이어 자쿤에게 다가갔다.
그 뒤에 있던 호드들은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콧김을 강하게 내뿜는 중이었다.
그냥 일반 호드들이었으면 가소롭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들은 무려 각성한 호드들이지 않던가.
심지어 저들을 이끌고 있는 건 무려 막투르다.
정상적인 생각이 박힌 놈이라면 그냥 보내주는 게 맞다고 판단하겠지만,
"감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듯,
저런 건방진 도발을 듣고도 병적인 허세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등허리를 타고 전율을 일으키며 올라오는 허세에 나는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내 허락도 없이 누가 움직이라고 했지?"
"······뭐?"
그리고 막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쿠웅-!!
내 발밑에서부터 땅이 움푹 파이더니 그것은 역병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
쿠웅-!!
"!?"
막투르와 그 뒤에 있는 호드들이 디디고 있는 땅까지 움푹 파였다.
그와 동시에,
"크헉!"
저 거구의 몸이 신음을 터트리며 비틀거렸다.
호드들과 그들이 타고 있던 벨랍토르들 역시 비명을 지르면서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크악!"
"키르르-!"
충만하게 끓어 오르며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허세를 따라 나는 무심한 눈빛으로 막투르를 내려다 보았다.
"건방지구나."
막투르의 얼굴은 경악과 공포로 얼룩져 식은땀이 주륵 흐르고 있었다.
"한낱 미물 따위가 이 몸을 앞에 두고 꼿꼿하게 서 있다니."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허세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꿇어라."
49화
0.01초 소드마스터 49화
'이, 이게 대체 무슨······!'
난생처음 느껴보는 공포다.
어깨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고, 모든 장기가 뒤틀려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눈앞은 초점을 잡을 수 없을만큼 회오리 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는 저 사내였다.
"꿇어라."
쿠웅-!!
여기서 더 위압감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인가.
필사적으로 이를 악 물고 버텨 보려 했으나,
"크헉!"
콰직-!
결국 막투르는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미물이여."
이런 치욕을 겪어본 적이 있던가.
피가 거꾸로 솟으며 분노가 치밀었지만,
"크읍-!"
단단하고 두꺼운 두 어금니가 부서질 것만 같은 위압감에 감히 고개조차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
뭐지?
심장을 움켜쥐며 숨을 막히게 만들었던 위압감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보았다.
여전히 상대는 영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도끼를 들어 놈의 머리를 쪼갠다면······.'
입을 세게 다물어 흐르는 피가 그의 분노를 일깨워 준다.
자신은 숲의 전사, 호드임을.
그들을 이끄는 대족장임을.
그러므로 그 모든 분노를 담아 한번에······!
"누가 고개를 들라고 했지?"
그런 생각도 잠시.
"크악-!"
쿠웅-!!
마치 상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
너 따위는 내 털끝조차 닿을 수 없다는 듯,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며 막투르와 그의 전사들을 짓눌렀다.
"감히 네가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이겨내야 한다.
이것을 뚫고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당당히 보여줘야 한다.
내가 바로 호드의 대족장, 막투르임을!
하지만-.
"크으읍-!"
일어날 수가 없다.
저 힘을, 저 압도하는 기세를 이겨낼 수가 없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인가.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정말 심장이 터져 버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서서히 정신이 끊어지려고 할 때쯤.
"······?"
모든 걸 압도하던 피어가 다시 한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푸하-!"
"크윽-!"
간신히 살아난 부하들과 짐승들도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신음을 터트렸다.
'일부러 그런 건가?'
저자가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발산했다면 막투르와 그의 부하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분명 상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은 거지?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상대의 의도가 무엇이든, 막투르는 옆에 있던 도끼에 시선을 옮겼다.
저것만 잡는다면, 저것을 잡아 앞에 있는 저 무시무시한 작자를 단번에 처단한다면-.
"그 도끼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그때 들리는 묵직한 음성에 도끼를 향해 뻗던 팔을 멈췄다.
"이 몸 앞에서 재롱을 피울 생각이라면 말리지 않겠다."
재롱?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소리를!
이를 악다물며 도끼에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러나 그것을 들진 못했다.
"허나,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저 중후한 음성이 자신의 이성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내 허리춤에서 칼이 뽑히는 순간, 너와 너의 부하들은 오늘 전부 죽을 것이다."
"!?"
그 말을 듣고 차마 도끼를 들 수가 없었다.
상대는 무려 위압만으로 자신과 부하들을 공포 상태에 빠뜨린 무시무시한 자다.
고작 기세만으로 사람을 능히 죽일 수 있을진데, 여기서 만약 도끼를 들었다가는-.
'전부 죽는다···!'
하지만 자신은 호드의 대족장, 막투르다.
적을 눈앞에 두고 겁을 먹어 도망쳤다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순 없다.
부족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자랑스러운 호드의 전사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을 즐기는 그들의 얼굴이 지금은,
"대, 대족장."
온통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해 있었다.
끓어 넘치던 전사의 영혼 역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뭘 하고 있지?"
"?"
"얼른 도끼를 들어라."
바로 그때였다.
우우웅-!!
저자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강하게 진동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것에 응답하듯,
우웅-!!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막투르의 도끼도 잘게 몸을 떨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 이게 검명인가?'
오직 검의 끝을 보았다는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
세상 모든 무기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달인.
그 경악스러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있던 막투르의 손발이 부르르 떨려왔다.
'대체 이 괴물은 누구란 말이냐!'
* * *
입가에 피를 흘리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던 대족장 막투르는,
"······크윽!"
완전히 싸울 의지를 버린 듯, 결국 손을 거두었다.
'좆 되는 줄 알았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쓸 스킬도 없었는데.'
쿨타임 초기화까지 해서 혼돈의 피어를 무려 2번이나 써버리는 바람에 막투르를 상대할 수 있는 수단이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것이 있다면,
"현명한 선택이다. 부하들의 생명을 아낄 줄 아는 놈이군."
아슬란의 병신 같은 허세 뿐.
"네가 정녕 싸우고자 했다면 단칼에 네놈들을 절멸 시키려 했으나······ 오늘은 봐주도록 하지."
우우웅-!!
아. 이놈도 잊고 있었구나.
아슬란의 허세에 물들어 버린 허세 소드가 아쉽다는 듯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시끄러우니까 그만 울어.
"놈들의 무기를 전부 거두어라."
"예!"
나는 이놈들이 난동을 피우기 전에 기사단을 시켜 무기부터 거두었다.
다행히 막투르를 비롯해 호드들은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무기를 내주었다.
물론, 막투르가 쓰는 도끼는 한 사람이 들기 벅차서 몇 명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들 수가 있었다.
"허락 없이 국경을 넘는 일이 중죄라는 것을 아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대답에 허세가 들끓으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짧구나. 죽고 싶으냐?"
"······알고 있었습니다."
막투르는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놈의 허세가 자꾸 성질을 긁어대다 크게 한 방 맞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호신의 방패도 없어서 막투르한테 한 대라도 맞으면 그냥 즉사일 텐데.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 엄중한 규율에 따라 네놈의 두 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옳을 터."
한번 끓어 오르기 시작한 허세는 상대가 누구라도 얄짤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한번 들어는 보지. 그 대답의 여하에 따라 네 처우를 결정하겠다."
호드와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특히 각성한 호드라면 더더욱 사이가 험악해져서는 안 된다.
이미 첫 조우부터 사이가 틀어져 버린 거 같긴 하다만, 여기서 더 발전해 전쟁까지 번지는 건 곤란하다.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몬스터를 추적하느라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나오게 된 겁니다."
사파이어 자쿤은 날개 한쪽을 상처 입은 채로 꿈틀 거렸다.
나는 지그시 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파이어 자쿤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키룩?"
"······."
딱히 쓸만 한 아이템은 보이지 않는다만, 저 머리에 박혀 있는 푸른 보석이 내 눈길을 끌었다.
저걸 빼서 팔면 돈이 꽤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놈의 비늘과 가죽은 귀하기 때문에 분명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리라.
"이놈을 죽여서 돈을 벌려고 했던 건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 부족을 위해서였습니다."
부족을 위해 사파이어 자쿤을 잡으려 했다고?
"우리 호드족이 사는 바쿰이란 곳은 아름다운 숲입니다."
막투르의 말을 듣고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이거 설마-.
"하지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마기가 숲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수풀이 말라 죽고 나무는 썩어 버렸습니다."
내 착각이 아니었다.
엘티히 때와 마찬가지로 이건 주인공이 처음으로 호드의 대족장, 막투르를 대면했을 때 받게 되는 퀘스트였다.
그것도,
"우리 호드족에 있는 술사가 말하기를, 이 악한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사파이어 자쿤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가이드 퀘스트: 깨져 버린 봉인]
-봉인을 깨고 나타난 악마를 호드족과 함께 정화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무려 가이드 퀘스트였다.
가이드 퀘스트가 무엇인가.
그건 바로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주인공을 플레이 하는 플레이어를 위해 만들어진 퀘스트라고 할 수 있다.
원활한 스토리 전개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가이드 퀘스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이것을 깨야만 게임 클리어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빠르다.'
호드의 대족장이 나온 것도 그렇고, 호드와 관련된 가이드 퀘스트가 나온 것도 그렇고. 전부 속도위반 수준이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이번 가이드 퀘스트는 별로 어렵지 않다는 거야.'
물론 이런 식의 만남은 처음이긴 했다.
거기다 게임마다 막투르가 쫓는 몬스터의 종류도 달랐다.
왜냐하면,
'술사, 그놈이 구라를 친 거니까.'
대족장 막투르에게 사파이어 자쿤의 피로 마기를 정화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술사. 그놈이 악마의 끄나풀이었다.
그놈의 목적은 하나였다.
막투르를 부추겨 놈을 부족민들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가이드 퀘스트에, 보상도 10골드나 주는 거면 해야지.'
수백 번도 더 깨본 퀘스트다.
그리고 난이도도 클리어 방법만 알면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내 옆에는 새로운 네임드 캐릭터, 막투르가 있다.
악마와 싸울 일이 있으면 이놈을 보내서 뚝배기를 깨게 만들면 된다.
"그 술사라는 놈이 거짓을 말했군."
"······예?"
"사파이어 자쿤의 피로 어떻게 마기를 정화한다는 것이냐."
"그가 제게 거짓을 고할 리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놈이 네게 거짓을 고했다."
"다, 당신도 마기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통에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러나 이 정신병 같은 허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막투르를 거대한 몸집을 내려다보았다.
놈도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른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나는,
스르릉-!
"!?"
칼을 뽑아 들었다.
"마기라고 했느냐?"
레길로트의 팔찌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성스러운 빛이 곧 칼에 스며 들었다.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다니. 건방지구나."
"!?"
모든 공격이 성속성으로 변하게 해주는 레길로트의 팔찌 효과.
호드는 예부터 빛을 따르고 빛을 섬기는 족속이라 했던가.
그래서 원래 스토리의 주인공이 라할에게 받은 빛을 보여 주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물론, 이건 라할의 빛이 아니지만, 그와 비슷해 보이는 덕분에 나는 이런 허장성세를 부릴 수 있었다.
"보거라. 그 술사라는 놈이 나보다 더 악마에 대해 알 거 같은가?"
"이, 이 힘은······!"
막투르는 놀란 얼굴로 내 검에서 번쩍이고 있는 빛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토록 성스러운 힘을 쓰시는 겁니까?"
두려움이 담겨 있던 그의 목소리에 이제는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병적인 허세는 그것에 자극을 받아 더욱 고개를 높이 들고 거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다."
그런데도 막투르의 자세는 한없이 낮아졌다.
"역시 당신이 그 소문의 기사······.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과연 그 영광스러운 힘이 사실이었군요."
"이제 누가 거짓을 말하는 건지 알겠나?"
"하지만 대체 왜 술사가 제게 그런 거짓을······."
"네가 부족에 없기를 바랐던 것이겠지."
"그, 그런!?"
크게 충격을 먹은 듯한 막투르는 내게 간곡히 청했다.
"부디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마기를 어떻게 정화해야 하는지 저는 도저히 알지 못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래. 절대 잊으면 안 된다.
"한번 봐보도록 하지."
원래 스토리대로 쭉쭉 진행이 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일라이 왕국과 호드 간의 사이가 원만하게 풀렸다고 봐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사파이어 자쿤.
아직 이놈을 처리 안 했구나.
그냥 부하들을 시켜서 마무리를 지으면 되려나.
"키루룩-."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사파이어 자쿤이 비틀 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놈이 설마 날 물어 뜯으려는 건가 싶어 경계했으나,
"키루룩······."
놈은 머리를 빼꼼 내밀어 내 다리에 비벼댔다.
그 모습을 보고 라파엘이 웃으며 말했다.
"저 몬스터가 대기사단장님이 좋은가 봐요."
"······?"
이 대륙에는 조련이 가능한 몬스터들이 있다.
하지만 자쿤 같은 놈은 완전히 정반대다.
절대 길들일 수 없는 몬스터.
그중 하나가 바로 자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놈은,
"키룩?"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난만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50화
0.01초 소드마스터 50화
"신기하네요. 비행을 하는 몬스터들은 조련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고 들었는데. 저희 엘프족도 몬스터와 교감을 많이 하지만, 비행 몬스터들은 유독 힘들거든요."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엘프는 몬스터와도 교감을 통해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자쿤 같이 포악한 놈들은 애초에 교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가 알기로 자쿤은 드래곤을 따르는 몬스터 중 하나라고 해요. 그래서 가끔 드래곤 뒤로 자쿤 무리가 따라 붙기도 하죠. 그런데 인간을 따르는 자쿤은 처음 보네요."
라파엘은 아까부터 내가 툭툭 발로 밀어내도 내게 얼굴을 비비고 있는 자쿤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주었다.
"이 자쿤은 혹시 대기사단장님을 드래곤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자 기사들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드, 드래곤?"
"하긴. 우리 대기사단장님이라면······."
"······."
아주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다.
나는 사파이어 자쿤과 눈을 마주쳤다.
"키룩-."
그러자 놈은 잔망스럽게 얼굴을 비빌 뿐이다.
'설마 혼돈의 피어 때문인가.'
정말 그 스킬 때문에 나를 드래곤으로 착각하는 건가?
'웃기는 놈이네.'
나는 놈의 머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보석을 살펴보았다.
저걸 떼다 팔면 꽤나 돈이 나올 텐데.
그럼 내 주머니도 두둑해질 테고.
'이걸 지금 죽여, 말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치유 마법이 끝났다.
"회복력이 무척 뛰어난 아이네요."
라파엘은 벌써부터 애완펫이 생긴 것마냥 놈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렇게 덩치 큰 놈을 펫으로 데리고 다니고 싶지 않다.
언제 이놈이 돌변해서 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죽일 수도 없고.'
일단 놔둬 볼까.
정말 나를 잘 따라만 준다면 자쿤 정도의 펫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중에 필요가 없어지면 그땐-.
'보석이랑 비늘만 쏙 빼서 팔아야지.'
내 주머니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비상금으로 딱 맞았다.
"그만 비벼대라."
"키룩-."
"어허."
"키룩······."
사파이어 자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보이다가도 저 무시무시한 발톱과 이빨을 보면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간다.
"말썽부리지 말고 따라오도록. 방해된다면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키룩-!"
내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사파이어 자쿤은 날개를 쫙 펴며 울부짖었다.
나는 멍하니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던 막투르에게 말했다.
"앞장서거라. 너희들의 영토로 가겠다."
* * *
검의 왕국 '만'
검이 대륙 최고의 무기이며, 오직 검만을 신성시 하는 왕국.
그들에게 검은 전쟁은 찬란한 무대이고, 그곳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영광스러운 명예였다. 그러므로 오래 이어지는 왕국 간의 평화는 이들의 좀을 쑤실 뿐이었다.
"호드가 또 침범을 했다는 것이냐?"
"예! 경계선에 있던 기사단 수십 명이 호드와 함께 경계를 넘어온 자쿤에게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만' 왕국에 존재하는 3명의 소드마스터.
그래서 이 3명 모두 대기사단장직을 맡아 군을 이끌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키엔이 입술을 짓씹었다.
"이 건방진 놈들이 우리 왕국을 우습게 보는군. 이걸 언제까지 가만히 지켜만 봐야 하는 거지?"
그런 키엔의 말에, 또 다른 소드마스터인 라이에르가 천천히 술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가 대응을 미적지근하게 하고 있으니, 호드가 겁도 없이 우리 국경을 넘는 것이겠지."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다! 대체 우리 '만' 왕국이 왜 그런 미물들에게 모욕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키엔은 상을 쾅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자스트라 경계선을 넘어 호드를 도륙하고 오겠다."
"······진심인가? 크라엘이 그리 되는 걸 원치 않을 텐데."
크라엘.
이들과 똑같은 소드마스터이자, '만' 왕국의 대기사단장이었다.
"그놈은 너무 생각이 많고 겁도 많아. 호드 따위가 무서워서 여기 박혀 있으라는 건, 우리 기사의 나라 '만'에 대한 모욕이다!"
"호드가 최근 대족장이 생기면서 그 영향력이 심상치 않게 달라졌다고 들었다."
"그래 봐야 호드가 호드지. 그들이 두렵나?"
"글쎄. 나는 호드 보다는······."
라이에르는 잔을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일라이 왕국이 더 신경 쓰이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일라이 왕국의 아슬란이 말이다."
"······!"
아슬란이란 이름에 키엔은 잠시 멈칫 거렸다.
검의 원탁에서 봤던 그 강렬한 인상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크라엘도 그것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 아니겠나?"
호드를 잡겠다고 나섰다가 괜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 일라이 왕국과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염려하는 것이었다.
국경 쪽에 있는 자스트라 경계선이 하필이면 일라이 왕국 경계선과 걸쳐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라이 왕국은 아슬란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놈들이다. 거기다 아슬란 그자가 혼자 우리 '만' 왕국의 힘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만' 왕국에는 무려 3명의 소드마스터가 있다.
거기다 이들이 이끄는 기사단의 전투력 역시 최강이다.
제 아무리 아슬란이라고 해도 이들의 공격을 혼자 막아낼 순 없을 터.
"그놈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 겁쟁이 크라엘에게 내가 직접 행동으로 나서서 보여 줄 것이다. 우리 왕국의 기사단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 말은 자스트라 경계선을 기어코 넘어 보겠다는 뜻인가?"
"싫으면 따라오지 마라. 어차피 나 혼자 기사단을 끌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키엔의 말에 라이에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내 친우를 전장에 혼자 보낼 수는 없지. 그리고 사실 나도 자네가 나서주기를 은근 기다리고 있었거든."
키엔도 함께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래. 네가 이런 싸움을 피할 녀석이 아니지."
"그럼 크라엘 그놈이 우리를 방해하기 전에 얼른 움직이지. 그놈도 우리가 빠르게 기사단을 끌고 떠나 버리면 어찌하지 못할 게야."
"크크. 우리가 호드의 대족장 목을 가져오면 크라엘 그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군."
키엔의 음흉한 웃음 소리가 오늘은 왠지 좋게 들리는 라이에르였다.
* * *
'여길 이렇게나 빨리 넘게 되다니.'
미지의 땅, 자스트라.
물론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수도 없이 넘어본 곳이지만, 아슬란처럼 이렇게 나약한 몸으로 이곳을 넘는 건 처음이었다.
자스트라는 스토리 중후반쯤에 넘어가야 하는 곳으로, 그때가 되면 어느 정도 스펙이 다 맞춰져 있을 시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네임드들이 내 곁에 있다는 거지.'
아론, 알렉산더, 라파엘, 그리고 막투르까지.
이 가이드 퀘스트를 깨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인원 구성이었다.
'가서 그 술사라는 놈부터 잡아 족치고, 검은 구슬만 깨면 되자 않나?'
이번 가이드 퀘스트는 사실상 테키나 족속이 봉인을 깨고 본격적으로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려 주는 전조 퀘스트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난이도가 어렵지 않았다.
"더 빨리 달려라!!"
"우우-!!"
대족장 막투르는 빠른 속도로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술사라는 놈이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아차린 뒤부터 마음이 급해져 있는 듯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금방 호드족이 모여 있는 부족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우-! 대족장!"
"대족장이 돌아왔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생각 이상으로 규모가 크다.
성벽처럼 높지는 않지만, 이들은 나무로 높게 벽을 세워 나름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대족장. 이놈들은 누구입니까?"
"이놈들이라니. 말을 삼가라."
"······?"
막투르의 일갈에 그에게 몰려 들었던 호드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키에에에!"
"자, 자쿤!"
"몬스터다!!"
아까부터 줄곧 우리 뒤를 따라 비행하고 있던 사파이어 자쿤을 보며 각자 무기를 들었다.
"괜찮다. 저건······ 아슬란님의 애완 자쿤이다."
"예?"
"애완 자쿤?"
"그보다 리락투는 지금 어디에 있나?"
"술사라면 제단에 가 있습니다."
"마기를 없애는 기도를 올려야 한다면서 부족민들을 함께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막투르의 얼굴에 금이 갔다.
"이런!"
그는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제단을 향해 뛰어갔다.
막투르가 달려간 곳은 게임 플레이를 하며 수백 번도 더 넘게 봤던 호드들의 제단 동굴이었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콰아아아-!!
술사 리락투가 부족민들을 제물 삼아 흑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리락투!!"
분노한 막투르의 목소리에 리락투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냐!!"
"뭐지? 이, 이렇게나 빨리 오다니."
막투르는 검은 불길 위에 녹아내리고 있는 부족민들을 발견하고는 분노의 괴성을 질러댔다.
"크오오오-!!"
그는 리락투에게 뛰어가 놈의 목을 붙잡은 뒤 동굴벽에다 던져 버렸다.
"크악!"
하지만 놈의 머리통을 그 자리에서 터트려 버리진 않았다.
"네놈을 당장 죽이고 싶지만, 기다려라. 이 일이 끝난 뒤에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널 죽일 것이다."
지금은 급한 불부터 처리를 해야만 했다.
검은 불길을 일으키고 있는 건 바로 저 거대한 암흑 구슬을 말이다.
"이건 대체······."
동굴 천장과 바닥을 가득 채운 저 암흑 구슬을 깨야만 이 의식을 멈출 수가 있다.
만약 여기서 저 구슬을 깨뜨리지 못 하면 봉인되어 있던 문이 계속해서 열려 아비규환이 펼쳐지게 된다.
나는 당황해 하는 막투르에게 말했다.
"막투르. 얼른 저 구슬부터 깨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높이 들었다.
'쉽네. 역시.'
원래 스토리대로 상황이 잘 풀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막투르가 도끼로 구슬을 깨면 봉인이 풀리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고, 그럼 퀘스트도 완료가 된다.
분명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크워어어-!!"
콰아아앙-!!
힘껏 막투르가 구슬을 내려쳤지만, 오히려 암흑 구슬은 더욱 어둠의 기운을 뿌리며 그를 멀리 밀어냈다.
"크헉-!"
하마터면 날아오는 저 거대한 몸뚱이에 부딪혀 내가 깔려 죽을 뻔했다.
나는 여전히 멀쩡하게 검은 기운을 퍼트리고 있는 암흑 구슬을 바라보았다.
'뭐지? 원래는 막투르가 깨야 하는 게 맞는데.'
거기다 거인 막투르를 밀어내는 저 마법의 힘은······.
"저희가 깨뜨리겠습니다!"
그때 알렉산더와 아론이 동시에 앞으로 내달렸다.
그 뒤로는 라파엘이 마법진을 펼쳤다.
콰아앙-!! 콰콰쾅-!!
하지만,
"으헉!"
"꺄아아-!"
알렉산더과 아론의 공격도, 라파엘의 마법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을 받은 구슬이 반격을 하며 그들이 펼친 공격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날아오는 공을 스파이크 치는 것만 같은 저 이펙트.
저건 분명-.
'반사 마법?'
상대가 가하는 힘의 강도에 따라 그대로 돌려주는 반사 마법.
테키나 족속 중에서 대악마에 속해 있는 몇몇 네임드 보스들이 이런 마법을 가지고 있어서 알고 있다.
저 암흑 구슬에 그 악랄한 마법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난이도가 극악이라지만, 이건 미친 거 아니야?'
반사 마법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악랄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어떤 공격이든, 그 어떤 마법이든 무조건 튕겨내는 판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슨,
'내 찰나의 괴력도 튕겨낸다는 거잖아.'
찰나의 괴력이라고 이 개발진이 정해 놓은 게임의 규칙을 깰 순 없다.
그래서 반사 마법 패턴이 나왔을 땐 공격을 하지 않고 잠시 뒤로 빠져 있는 것이 기본적인 플레이 방법이다.
그래야 반사 마법이 끝난 뒤에 파상공세를 퍼부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저건 왜 안 꺼지는 거야?'
암흑 구슬에 걸려 있는 반사 마법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크오오!!"
"흐아압-!"
콰쾅!!
막투르와 기사들이 몇 번을 다시 일어나 공격해 봐도 똑같았다.
점점 늘어나는 건 그들의 상처일 뿐.
'이걸 어떡하면 좋지?'
반사 마법만 아니었으면 내 찰나의 괴력으로 진작 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으로 지속 되는 반사 마법이라니.
그건 존재서는 안 되는 마법이다.
왜냐하면 저게 무한 지속이 되는 거라면 구슬을 깨뜨릴 방법도 없어지거니와, 게임을 클리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버그 아니야?'
난이도가 극악이라고 해도 최소한 깰 수 있는 구멍은 만들어 줘야 할 거 아닌가?
대체 저걸 무슨 수로 깨라고!
"크하하하! 이런 멍청한 놈들. 위대하신 카야라트 님의 마법을 너희들이 깨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때 술사 놈이 우리를 비웃으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절대로 그분의 마법을 깰 수 없다! 그 누가 와도 결과는 똑같다. 이제 악의 힘이 이 대륙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감히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허세가 몸 전체에 퍼져 나가더니,
"절대 깰 수 없다고 했느냐?"
허세에 찌들어 버린 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건방지구나."
나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우우우웅-!!
검이 울음을 터트리며 내 손을 타고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 끝까지 차오른 허세에 취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뚜벅- 뚜벅-
살갗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어둠의 불꽃에도, 그 위협적인 광경에도 내 걸음걸이는 흔들림 없이 격조 있고 품격 있게 이어졌다.
"감히 흑마법 따위가, 악마의 힘 따위가 내 칼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벽에 처박혀 있는 리락투를 내려다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놈은 몸을 움찔 거렸다.
"네,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 아무것도 없다!"
놈은 저 구슬이 부서지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저 조롱 섞인 눈빛에 내 허세는 더욱더 뜨겁게 끓어 올랐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주는 가르침을 네 뼛속에 깊이 새기거라."
잠깐.
설마.
"나 아슬란의 칼을 막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나는 그대로 구슬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51화
0.01초 소드마스터 51화
테리슈나.
그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어둠의 방어막.
모든 공격을 상쇄하는 것에 모자라 그것을 튕겨내기까지 하는 테키나 족속의 최강 마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저 남자는 테리슈나의 마법이 걸려 있는 구슬을 향해 칼을 힘껏 내리쳤다.
"멍청한 놈!"
뚫을 수 없다.
상대가 누구든, 저 마법은 뚫을 수가 없다.
마법의 신이라 칭송받는 엘티히조차도 저 어둠의 마법을 뚫어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콰콱-! 콰콰콱-!!
누구도 뚫어내지 못 한 저 어둠의 마법이, 진리와도 같았던 어둠의 힘이,
키이이잉-!!
눈이 멀 것처럼 성스럽게 빛을 발하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검강에 의해,
콰직-!
파괴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되는!"
콰아아-!!
빛에 의해 소멸하고 있는 검은 마기가 이것이 꿈이 아님을 증명한다.
정말로 저 사내는 파괴가 불가능 하다는 테리슈나를 깨뜨린 것이다.
"다, 당신······."
리락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했던 테리슈나의 마법이 저 남자 손에 최초로 파괴 되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역시 하찮구나. 악마의 힘은."
마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자,
펄럭~.
그의 붉은 망토가 화려하게 펄럭였다.
* *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동굴 밖을 걸어 나오던 나는 태연한 겉모습과 다르게 속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어떻게 테리슈나를 뚫은 거야?'
테리슈나는 함정 같은 마법이다.
대악마와 싸우는 플레이어들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한 개발자들의 게임적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공격도, 그 어떤 마법도 테리슈나를 뚫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찰나의 괴력은 그걸 뚫었어.'
그것도 빛의 검강을 만들어내서 반으로 갈라 버렸다.
'버그인가?'
그 생각 밖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테리슈나를 파훼하는 방법은 사실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건 직접적으로 테리슈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우회하는 방법들이었다.
이렇게 완력으로, 그것도 공격 스킬 하나만으로 뚫어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찰나의 괴력이 최강의 괴력 스킬이라고는 하지만······.'
찰나의 괴력 스킬 설명에도 최강의 괴력 스킬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긴 했다.
그렇게 따지면 테리슈나는 최강의 방어 스킬이었다.
이건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는 것.
그리고 승자는 바로 나였다.
대체 어떻게?
'팔찌 효과 때문인가?'
모든 피해를 성속성으로 바꾸고 어둠 계열에게 추가 데미지 200%를 주는 레길로트 팔찌에 담긴 옵션 효과.
즉, 방금 전 내 찰나의 괴력은 2배의 위력으로 가해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내가 살았다는 게 중요하다.
휴.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이놈의 허세 때문에 내가 이렇게 심장 떨면서 살아야 하나.'
혼자 가슴을 쓸어내리던 나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막투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 옆에는 사이좋게 아론과 알렉산더, 그리고 라파엘이 있었다.
모두 저 구슬을 파괴하려고 나섰다가 여기까지 밀려 떨어진 것이었다.
다들 몸 상태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얼른 일어나서 치료를 하라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려 했으나,
"한심하구나."
등허리를 타고 차오르는 허세가 그걸 용납할 리 없었다.
나는 경멸 어린 눈동자로 막투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호드의 대족장이라는 자가 고작 악마의 마법 하나를 부수지 못해 쩔쩔매다니."
"······."
막투르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 옆에 있는 내 부하들에게도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기어코 내가 칼을 뽑게 만들다니. 부끄러운 줄 알거라."
"소, 송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아론과 알렉산더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라파엘은 자기 할 말을 끝까지 했다.
"죄송해요······. 그런데 저건 테리슈나였다고요. 엘티히님도 테리슈나는 깨뜨릴 수 없는 절대 방어 마법이라고 하셨어요."
당연히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 들끓기 시작한 허세는 라파엘을 다그쳤다.
"그래서 너는 엘티히와 똑같이 될 생각인가?"
"······네?"
"엘티히가 할 수 있다고 말한 것만 하고, 할 수 없다고 말한 건 하지 않을 생각이냐는 것이다."
"그, 그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라파엘에게 나는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한계를 세우지 마라."
"······?"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한계를 믿는 순간, 그것은 존재하게 되지."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파엘을 지나치며 말을 이었다.
"왜 너는 나보다도 더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
"여기 있는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믿지 말고, 너희의 힘을 믿어라."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보통 이 타이밍에 퀘스트 완료창이 뜨는데, 이상하게 아직 뜨질 않았다.
'설마 아직 안 끝난 건가?'
원래는 구슬을 파괴하기만 하면 끝나는 퀘스트였다. 하지만 퀘스트 완료가 되지 않은 것을 미루어 봤을 때, 분명 뭔가가 더 있다는 뜻.
그렇다면 이 네임드들이 여기서 골골 거리고 있을 게 아니라 나를 위해 빨리 회복을 해줘야 한다.
"언제까지 멍청하게 앉아만 있을 게냐?"
"예?"
"얼른 상처부터 치료하고 와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봉인이 깨진 거라면 서둘러 그 입구를 찾아봐야 한다.
* * *
"······."
펄럭이는 붉은 망토.
길게 흩날리는 은발 머리.
때마침 내리쬐고 있는 밝은 태양 빛까지.
기사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아슬란의 뒷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저게 기사라는 것이군.'
막투르는 누군가가 이토록 멋있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저것이 인간들이 명예롭게 생각한다는 기사인가?
"한계를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옆에서 라파엘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흐으읍-!"
그리고 혼자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막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좋겠구려. 저런 분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다니."
그 말에 아론이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나도 매일 저분 곁을 지키는 기사가 된 것을 감사하며 살고 있소."
막투르는 조금 허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한때 내가 최강인 줄로만 알았소. 하지만 저분을 만나면서 깨달았소. 이 대륙에는 강자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인간은 나약한 놈들이라며 무시했다.
이 대륙에 자신을 대적할 만한 적수는 없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오늘 그 자신감이 전부 깨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강자가 있는 것일까.
"겸손함을 배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한 가지 틀린 것이 있소."
"······?"
아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대륙에 우리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같은 강자는 없다는 것이오."
"!?"
막투르가 놀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저분이 대륙 최강자라는 것이오?"
"그렇소. 저분의 곁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지. 저분을 능가할 자는 이 대륙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저분이 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오롯이 노력 덕분이었소."
"노력?"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게 재능이 아닌 노력으로 이뤄진 힘이란 말인가?
"그, 그게 가능한 일이오?"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노력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절대 영역 말이다.
하지만 아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방금 말씀하지 않으셨소?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슬란님께서는 한때 재능 없는 기사로 낙인찍혀 온갖 조롱을 당하셨소.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강해지셨지. 그것은 뼈를 깎는 노력과 한계를 믿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역시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렇기에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었구나.
"······."
막투르는 그런 아슬란을 보며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왠지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언가를 아늑히 초월한 인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도 노력을 한다면-.'
그럼 언젠가 자신도 저 대단한 기사처럼 더욱 강해지는 날이 올까?
* * *
"이런 나쁜놈!"
"우리 부족을 배신하다니!"
"우우-!!"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서 호드들은 붙잡힌 리락투를 향해 돌을 던졌다.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스토리에 맞게 여기까진 잘 흘러가고 있으나,
"막투르."
"예?"
"네가 보낸 정찰조는 아직인가?"
문제는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문구가 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참 전에 떴어야 할 퀘스트 완료창이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후발대를 보낼 예정입니다."
그래서 나는 막투르를 시켜 자스트라 숲 주변을 정찰하게 했다.
하지만 한참 전에 나갔던 정찰조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서둘러라. 낌새가 이상하다."
이놈들이 길을 잃어버렸을 리는 없을 터.
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때 대롱대롱 매달려 호드들에게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던 리락투가 소리쳤다.
"곧 악의 힘이, 카야르트 님의 위대한 어둠이 이곳을 잠식하게 된다! 너희는 절대 피할 수 없다!"
카야르트?
'카야르트면······ 네임드 보스 아닌가?'
악마 중에서 마법을 다루는 네임드 보스.
기억난다.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르트.
내가 고인물인 것도 있지만, 놈을 기억하는 이유는 키야르트의 짜증 나는 공격 패턴 때문이었다.
모든 게임이 그렇듯, 네임드 보스들은 각자 특색이 있는 공격 패턴을 가지고 있다.
키야르트는 검은 안개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욱한 마기를 뿌린다.
'그거에 잘못 걸리면 끔찍하지.'
테키나 족속이 강한 이유는 그들이 다루는 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기에 저항력이 없는 일반 종족은 그것에 노출되면 중독에 이른다.
아무리 강한 무력과 마력을 가진 네임드 캐릭터라고 해도 대다수가 아직 마기에 저항력이 없기 때문에 쉽게 중독이 되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다.
테키나 족속은 300년 전 대륙에서 거의 사라지지 않았던가.
당연히 마기에 저항력이 있는 캐릭터가 드문 시기다.
'그래서 원래 스토리 중반쯤에 훈련을 하지.'
마기 훈련.
맨정신으로 마기를 잘 버틸 수 있는 훈련인데, 이걸 거쳐야만 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차츰 적응하게 된다.
'설마 그놈이 여기 나타날 리는······ 없겠지?'
초반 가이드 퀘스트에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그것도 카야르트 정도나 되는 보스 몬스터는 그냥 다 죽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곧 어둠에 잡아먹혀 영광스러운 테키나 족속의 노예가 될 것이다! 크하하!!"
계속되는 리락투의 악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내뱉고 있던 호드들의 안색이 굳었다.
"아, 악마?"
"테키나 족속이 이곳으로 온다고?"
테키나 족속의 강력함과 그 악랄함은 이미 선조들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익히 들었을 터. 특히 호드는 악마에 의해 말살 직전까지 갔던 족속이라 그 공포심은 뿌리 깊게 내려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빛을 숭배하고 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악마를 물리치고자 말이다.
"모두 동요하지 마라. 악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막투르의 말에 리락투는 비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니. 반드시 나타난다. 너희가 내 의식을 방해해 문이 열려 있다 닫히긴 했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이놈이 끝까지 개소리를!"
"흐흐. 그렇게 믿고 있어라. 호드족의 최후가 머지않았으니."
그 말에 호드들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족장!!"
정찰을 나갔던 호드가 돌아왔다.
하지만 왜인지 혼자였다.
"다른 전사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 돌아왔느냐?"
막투르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 눈치였다.
"그, 그게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뭐?"
"갑자기 나타난 검은 악마들에 의해 같이 있던 전사들은 죽고 저 혼자 간신히 살아 남아 이 소식을 알리고자 온 겁니다!"
이래서 퀘스트가 안 깨진 거였구나.
"이럴 수가. 악마라니!"
"테, 테키나 족속이 정말 봉인을 깨고 나타났다고?!"
그 얘기를 들은 마을 주민들은 혼란 상태가 되어 우왕좌왕 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진정하거라!!"
막투르의 일갈에도 소용이 없었다.
마을 주민들에 이어 두려움을 모른다는 호드의 전사들 역시 차츰 그 공포에 물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떡해!?"
"악마라니. 우리 선조들이 악마에 의해 거의 다 죽었는데!"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돼!"
이들의 혼란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갔다.
'이대로는 위험해 보이는데.'
정말 악마들이 봉인을 깨고 나온 거라면, 이 상태로 싸우는 건 위험하다.
지금 이들은 호드가 아닌, 오합지졸이었다.
무언가 이들의 혼란을 잠재울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나는,
"크하하하! 받아들여라. 이제 너희들은 모두 위대한 테키나 족속의······!"
스걱-!
계속해서 악을 쓰고 있는 리락투의 목을 베었다.
"!?"
일갈을 하던 막투르도, 혼란에 빠져 있던 호드들도 그 광경을 보고 전부 고요해졌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잠자고 있던 허세가 꿈틀거리며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약한 놈들."
나는 거만한 고갯짓으로 검을 비틀었다.
검에 묻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용맹한 전투 민족이라는 호드는 어디에 가고, 겁쟁이들만 모여 있는 것이냐?"
"······."
들끓는 허세를 나는 억제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그러자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나갔다.
"고작 호드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덩치가 아깝구나."
이어지는 모욕적인 언사에 막투르가 소리쳤다.
"우리 호드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저 큼지막한 주먹으로 나를 한 대 칠 기세였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증명하거라."
오히려 그를, 저 호드들을 도발했다.
"너희의 도끼로, 너희의 강한 힘으로 악마의 머리를 쪼개거라. 왜 너희는 악마를 두려워하느냐?"
"······."
"너희 선조들의 피를 잊었는가? 테키나 족속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던 그들의 힘을, 그들의 용기를 잊었는가?!"
그들은 침묵하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난 한쪽에 도열 하고 있는 기사단을 가리켰다.
"나의 기사단을 보거라. 저들의 눈빛을 보거라. 저곳에 두려움이 보이는가?"
기사들은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늠름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마들이 몰려와도 저들은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저것이 기사이며, 저것이 전사의 명예다!"
"······."
"너희도 저렇게 용감한 전사가 될 수 있다. 300년 전 너희 선조가 그리했던 것처럼."
나는 들고 있던 칼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레길로트의 팔찌 효과가 발동하면서 찬란한 빛이 검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저, 저건!?"
"성스러운 빛?"
"라, 라할의 빛인가!"
침묵하고 있던 호드들이 그 빛을 보며 기함을 터트렸다.
난 둔중한 음성으로 그들의 소란스러움을 갈랐다.
"그러므로 내가 묻겠다. 너희는 싸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너희에게 남긴 용맹한 정신과 그 피를 잊고 도망칠 것인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펄럭-!
하늘을 비행하고 있던 사파이어 자쿤이 내 옆에 내려와 두 날개를 넓게 펼쳤다.
"키루우우-!!"
그리고 녀석이 큰 목소리로 울음을 터트리자,
"······!"
그것에 자극을 받은 호드들이 목청 높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호드는 싸운다!!"
"우린 겁쟁이가 아니다!!"
"악마 따위 머리를 깨버려 주마!!"
그들의 함성 소리가 자스트라 숲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우우-!!"
"우오오오-!!"
하늘과 땅이 울리는 어마어마한 함성이다.
그 함성을 만들어낸 건 놀랍게도 저 사내였다.
이 정도로 호드들이 드높은 사기로 뭉쳤던 적이 있던가.
심지어 저 안에는 노인, 여자, 아이들까지도 합세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것이······ 지도자라는 것인가.'
이방인이다.
그것도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 호드들은 저 인간의 말에 격동하며 의지를 높이고 있었다.
거기다,
"키루우우-!!"
저 흉포한 몬스터까지 숲이 떠나갈 것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막투르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것이 대륙 최강자.'
이것이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구나.'
막투르 역시 그 끓어 오르는 감정울 주체하지 못하고 호드들과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52화
0.01초 소드마스터 52화
"여길 건너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만' 왕국의 기사단이 자스트라 경계선 앞에 섰다.
라이에르의 말에 키엔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말이 안 되지."
이미 2천의 기사단까지 끌고 온 상태.
여기서 그냥 돌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지는 고요한 평화에 온몸이 쑤실 지경이었다.
키엔은 피맛이 그리웠다.
피를 끓게 하는 치열한 전투가 그리웠다.
"겁이 난다면 돌아가도 좋다, 라이에르."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저 마지막으로 네 의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럼 잡담은 그만 하고 가지. 지금쯤이면 크라엘 그놈도 우리가 기사단을 끌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결정이 섰으니, 이제 앞으로 돌진할 일만 남았다.
"가자!"
"예!!"
케인이 앞장을 서면서 그 뒤를 기사단이 따랐다.
그들은 경계선을 넘어 자스트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것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곳이었지만, 키엔은 신경 쓰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음?"
전방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그는 손을 들어 행군을 멈췄다.
"느껴지나, 라이에르."
"그래. 저 앞에 뭔가가 있군."
이들의 예리한 감각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캬오오-!"
팔인 거 같기도 하고 다리인 거 같기도 한 것을 여섯 개나 달고 있는 흉측한 몬스터가 수풀 사이로 튀어 나와 두 사람에게 달려 들었다.
스걱-!
하지만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라이에르가 쏘아 보낸 검기에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저런 몬스터는 처음 보는데?"
미지의 땅이라 불리는 자스트라이니, 처음 보는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키엔. 이 몬스터가 흘리는 피를 봐라."
"음?"
몬스터의 몸에서 흐르는 검은 피.
그것은 곧,
"검은 피를 가진 건 테키나 족속 밖에 없지."
"뭐?"
곧 키엔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놈이 악마라는 거냐?"
"악마가 만들어낸 몬스터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300년 전에 사라진 놈들이 무슨 수로 다시 나타난다고. 이야기 책을 너무 많이 봤구나, 라이에르."
그렇게 웃어 넘기려고 할 때였다.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캬오오오-!!"
방금과 똑같은 몬스터가,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수십, 수백이 넘는 놈들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이놈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키엔은 본인의 대검을 꺼내 길게 휘둘렀다.
푸확-!!
그곳에서 나간 검강이 몬스터들을 가르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키, 키엔님!!"
"라이에르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사, 사방에서 몰려옵니다!!"
여기 저기서 기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숫자가 몇인지도 알 수 없는 검은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대체 이것들은 뭐야?!"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모두 전투 준비!"
호드와 싸우기 위해 왔건만,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 웨이브에 기사들은 모두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몬스터들과 부딪혀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더러운 몬스터들이-!"
키엔과 라이에르는 화려한 검술과 강력한 힘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빠르게 제거해 나갔다.
기사단 역시 그 둘의 활약에 힘입어 전투를 하고 있던 중.
쿠웅-! 쿠웅-!
"······저건 또 뭐야?"
그들 앞에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