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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무기를 들어라!!"

"오늘 이 땅에서 악마들을 전부 몰아낼 것이다!"

"우우-!"

드높은 호드의 사기.

"일라이 왕국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우린 자랑스러운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기사단이다!"

"악마들을 처단하라!"

드높은 기사단의 긍지.

'이 정도면 싸울 만 하려나.'

봉인이 잠시 풀렸다는 건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인데, 과연 그 사이에 몬스터들이 얼마나 쏟아져 나왔을지는 모른다.

아직까지 별다른 징조가 없는 것을 보면 네임드 악마는 안 나왔다고 봐야 하는 건가?

"대기사단장님! 전투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정찰조의 보고입니다! 현재 다수의 몬스터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쳐들어올지 몰라 나는 지금 초긴장 상태였다.

물론,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내 표정과 자세는 아주 여유만만이었다.

"놈들의 숫자는?"

"족히 수천은 넘어 보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만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만 단위로 보는 게 맞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기사단 전체를 끌고 오는 건데.

그래도 다행인 건 호드가 우리와 같은 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숫자가 너무 많다.

지금이라도 냅다 튀어야 되나?

"대기사단장님!"

그때 아론이 나를 불렀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그 파동이 점점 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그것도 많은 숫자의 몬스터 웨이브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옆으로 빠지는 놈들이 있는 거 같은데.'

우회를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저 옆에 있는 것인지 그 파동이 옆쪽으로도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 저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우선은 눈앞에 있는 적을 상대해야 할 때다.

"악마들이 몰려온다!!"

"전투 대형을 갖춰라!"

기사단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대형을 갖추었다.

지금까지 훈련을 빡세게 시킨 보람이 있었다.

전에는 저놈들을 언제 사람 구실 하게 만드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주 늠름한 기사단의 위용을 드러냈다.

"호드는 싸운다! 호드는 두렵지 않다!"

"얼마든지 와라!"

호드들도 그들의 기마 역할을 하는 벨랍토르를 올라타 길게 늘어섰다.

이제 곧 몬스터 웨이브가 몰려오기에, 나는 아론을 불렀다.

"아론."

"예, 대기사단장님!"

그 어느 때보다 아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난 죽어도 몬스터 웨이브에 갇히고 싶지 않다.

그 징그러운 놈들 손에 죽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내가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해라."

나를 지켜라.

내가 죽는 일이 없도록.

"예!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미 전달은 잘 된 것 같았다.

이윽고,

"캬오오오-!!"

저 멀리서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검은 몬스터들의 웨이브가 우리가 있는 언덕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크록들이구나.'

테키나 족속이 어둠의 힘으로 만들어낸 잡몬스터 종류다.

하지만 잡몹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테키나 족속을 놓고 봤을 때 잡몹인 것이지, 절대 약한 놈들이 아니다.

거기다 놈들은 떼로 몰려다니는 놈들이기에 아차 하는 순간 웨이브에 휩쓸려 버린다.

"대기사단장님. 명령을-!"

"명령을!"

기사단이 일제히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심장을 타고 뜨거운 허세가 치밀어 올랐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쓸어 버려라."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에 따라 아론이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기사단! 진격!"

"오오오-!!"

"일라이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 그의 외침에,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위하여!!"

기사들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기사단이 용맹하게 앞으로 돌진했다.

그것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호드들이여! 선조들이 남기신 이 땅을 지켜라! 그분들의 명예를 지켜라!"

"우우-!!"

막투르를 선두로 호드의 전사들도 적을 향해 달려갔다.

"캬오오-!!"

"죽여라!!"

콰앙-! 콰콰콱-!!

몬스터 웨이브와 호드, 그리고 기사단의 충돌.

그 피 튀기는 싸움이 이곳 자스트라에서 펼쳐졌다.

나는 뒤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팔짱을 낀 채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주 대단한 지휘관이 납신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발, 제발 별탈 없이 잘 끝나게 해주세요.'

속으로는 아주 간절히 빌고 있었다.

그런 내 간절한 소원을 들어 준 것일까.

"하아압-!!"

콰직-!!

"전부 섬멸하라!!"

네임드 캐릭터들이 아주 큰 활약을 해주고 있었다.

'옳지. 잘한다!'

아론은 뛰어난 검술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도륙내고 있었고, 알렉산더 역시 자신이 왜 이 게임의 주인공인지 알려주듯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거기에,

"필리엣!"

라파엘이 소환하는 정령 마법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공격을 구사하는 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키루우우-!"

사파이어 자쿤도 하늘을 비행하며 지원 공격을 해주고 있었다.

'흐름이 나쁘지 않다.'

각성을 마친 호드들의 전투력은 과연 기대 이상이다.

특히 대족장 막투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도끼를 휘두르면 몬스터들이 죄다 썰려 나가 버린다.

"전부 덤벼라!!"

콰아아앙-!!

강하구나.

역시 네임드 캐릭터.

'쓰읍-.'

부러움에 배알이 꼴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몬스터 웨이브 숫자가 많긴 했지만, 다행히 압도적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 저놈들이 우리에게 달려왔을 때, 그중 일부가 옆으로 빠져나가면서 공백이 생긴 덕분인 것 같았다.

'대체 그놈들은 어디로 간 거지?'

처음에는 우회를 해서 돌아오나 싶었는데,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면 다른 적을 상대하러 갔다는 것인데······.

쿠웅-! 쿠웅-!

"아니?"

"저, 저건 뭐야?!"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전장의 공기를 바꾸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오오오-!!"

크록과 비슷한 생김새와 몸통이었지만, 그 크기는 몇 배에 달하는 대형 몬스터!

"이, 이건······."

"대형 몬스터다!!"

어림 잡아도 4m는 되어 보이는, 저 거인 막투르보다 두 배는 큰 크록 몬스터.

그것들이 1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나 동시에 등장해 기사단과 호드들을 당황케 했다.

콰콰쾅-!

"으아악!"

그놈들이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며 난동을 피우자 기사들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막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저 대형 크록을 상대할 네임드 캐릭터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론은 번쩍 날아올라 대형 크록의 머리에 칼을 박았고, 그 뒤를 알렉산더가 따르며 엄호했다.

막투르 역시 무지막지한 힘으로 대형 몬스터를 넘어뜨린 뒤, 그 미간에 도끼를 처박는 등, 아주 침착하게 대응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라파엘도 마법을 이용해 대형 몬스터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이 정도면 케어 가능한 수준이다.'

잠깐 흔들렸지만, 다행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솔직히 이 타이밍에 대형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잘 해결만 된다면야 만사 오케이였다.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인가.'

······라는 말을 하면 안 됐었다.

메인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였다.

쿠우웅-!! 쿠우웅-!!

저 대형 크록들이 만들어내는 진동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숲 전체를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울창한 숲 위로 솟아오른 머리와 몸통이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그것은,

콰아아앙-!!

땅을 내리찍으며 그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크워어어-!!"

마치 킹콩처럼 단단한 가슴을 두드리는 몬스터의 정체는 바로,

'네피림!?'

대형 몬스터의 다음 단계라 볼 수 있는 네피림 등급 몬스터.

거인이라는 뜻에 네피림이란 단어에 걸맞게 그 크기는 엄청 났다.

높이 7m나 되는 그 거대함에 막투르가 마치 벌레처럼 보일 정도다.

'저게 왜 여기서 나와?'

네피림 등급의 몬스터라니.

그것도 저 몬스터는 나도 여러 번 봤던 몬스터였다.

[데키나콩]

킹콩 같은 생김새에 거대한 크기와 힘으로 적을 압도하는 놈이다.

지금 테키나 족속이 봉인을 깨고 나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것도 기가 찰 일인데, 벌써부터 네피림 등급이라니!

"마, 막아라!"

잠시 그 거대함에 할 말을 잃었던 아론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크기에 압도당한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질 못했다.

그건 호드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데키나콩 역시 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놈의 눈이 향하는 곳은 바로,

'난가?'

아니겠지?

"푸흥-!!"

검은 털, 검은 피부, 거기다 힘차게 내뿜는 콧김까지 검다.

놈은 발바닥에 힘을 꽉 주더니, 곧 높이 날아올랐다.

콰아아앙-!!

놈이 낙하한 곳에 있던 호드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붕 떠버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데키나 콩은,

쿠웅-!

또 한 번 날아올라 낙하하더니,

쿠우웅-!!

두 번,

쿠우우웅-!!

세 번.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에 이르러,

"크오오오오-!!"

놈은 바로 내 밑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뭐, 뭐야.'

그와 동시에 놈의 검은 주먹이 뻗어졌다.

'대체 왜 나한테 그래!?'

아론이, 라파엘이, 알렉산더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대, 대기사단장님!!"

그리고,

콰아아앙-!!

데키나콩의 거대한 주먹이 내게 떨어졌다.

그것이 일으킨 파동은 넓게 퍼져 나가, 온 숲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아니!?"

"대기사단장님!"

그 주먹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마치 주먹이 허공에 멈춘 것처럼 바로 내 코앞에서 멈춰 버렸다.

"······크릉?"

당황한 몬스터의 얼굴이 내 눈에 똑똑히 보였다.

콰콱-!

그리고 내 방어막을 뚫지도 못 하고 흡수조차 되지 않은 데키나콩의 무지막지한 힘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놈의 주먹을 타고 몸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크오오-!"

놈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온몸에 핏줄이 터져 버리고 팔은 부러진 것인지 축 아래로 늘어졌다.

그런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감히-."

스르릉-.

천천히 칼을 빼 들었다.

"더러운 마물 따위가."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허세와 분노에 온몸이 전율을 일으켰다.

"죽어라."

나는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을 타고 뻗어 나가는 찬란한 빛의 검강이,

키이이잉-!!

저 거대한 몸뚱이를 빠르게 갈라 버리며 나아갔다.

53화

0.01초 소드마스터 53화

"······."

무거운 정적이 자스트라 숲에 흘렀다.

쿠웅-!!

두 쪽으로 갈라진 데키나콩을 보고도,

펄럭~!

내 뒤로 펄럭이는 망토를 보고도,

"······."

마치 무언가 믿을 수 없는 걸 목격했다는 듯, 여전히 모두가 침묵했다.

하지만-.

"키루우우-!!"

사파이어 자쿤이 데니카콩의 시체 위로 내려와 두 날개를 펼쳐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우와아아-!!"

"우우-!!"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기사단이, 저 호드들이 크나큰 함성을 내질렀다.

"적을 섬멸하라!!"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위하여!!"

"우우-!!"

사기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 그들은 몬스터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활약을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이런 씹······.'

심장이 벌렁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지, 진짜 뒤지는 줄 알았잖아!'

숨을 헐떡이며 이 진정되지 않는 패닉을 가라 앉히고 싶었으나, 이놈의 허세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저놈은 대체 왜 나한테 뛰어들어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나한테 데키나콩이 뛰어들었다.

'만약 거기서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저 주먹에 으깬 두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제 제발 끝내라.'

한 번 더 이 짓거리를 했다가는 가슴 졸여서 죽겠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콰직-!!

호박을 두 쪽 내듯, 대형 몬스터의 머리를 쪼개 버린 대족장 막투르가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이 언덕에 살아 있는 몬스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 도끼를 높이 들며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다!!"

"우우-!!"

"이겼다!!"

"우리의 승리다!!"

기사단도 호드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드디어 악몽 같았던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것이었다.

'휴우-.'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이구나.

솔직히 이 정도 똥꼬쇼를 했으면 보상도 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뭐야?'

왜.

대체 왜.

'퀘스트 완료창이 안 뜨는 건데?'

다시 패닉이 올 거 같다.

'침착하자.'

처음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옆으로 빠진 몬스터들.

그놈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딘가 남아 있는 몬스터들이 있을 것이다.

그놈들을 마무리 한다면 퀘스트는 완료다.

'진짜 더럽게 빡세네.'

보상으로 10골드를 준다고 했을 때 의심부터 해볼걸.

왠지 쉽게 쉽게 간다 했더니.

'아직 끝이 아니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아직도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기사단에게 천천히 말을 몰며 다가갔다.

"푸르르르-!"

내 말이 기분 좋게 울음을 터트리자,

"키루우우-!"

옆에 꼭 달라붙듯이 따라 걷고 있던 사파이어 자쿤도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난 그런 자쿤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네 이름을 정했다."

"······?"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네 이름은 '키루'다."

놈의 울음소리에서 딴 이름이었다.

"키루우우-!"

마음에 들은 건지 놈은 날갯짓을 몸을 흔들었다.

"키루우~! 키루우우-!!"

하지만 그게 좀 과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키루는 흠칫거렸다.

"가서 정찰이나 하고 와."

"키루-!"

놈은 숲을 향해 높게 날아올랐다.

그래. 얼른 가서 밥값을 해라.

그래야 네 머리에 박힌 보석이랑 비늘을 안 뜯지.

"대기사단장님!"

"저희가 승리했습니다!"

기사단이 내게 달려와 기뻐했다.

대기사단장으로써 기사단을 치하할 때가 왔다.

"고생했다. 오늘의 승리가 너희에게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예!!"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사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

대족장 막투르와 호드들도 내 곁으로 몰려들었다.

얘네들은 자기 족장한테 갈 것이지, 왜 나한테 왔어.

그들은 내게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한 마디 해줄까.

"너희는 오늘 스스로 증명해냈다. 너희가 위대한 전사의 후손이라는 것을."

"우우-!!"

나도 허세에 전염이라도 된 건가.

허세가 들끓지도 않았는데, 아주 뻔뻔스러운 얼굴과 목소리로 이들을 치하했다.

갑자기 조금 무서워졌다.

이러다 설마 나중에 완전히 이 허세에 먹혀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평상시에도, 나 혼자 있을 때도 제대로 눕지도 못 하고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소름 돋는 생각하지 말자.'

난 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얼른 부상병들을 데리고 가서 치료해라. 승리를 만끽하는 것은 좋지만,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 말에 기사단과 호드들의 안색이 굳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

"어딘가에 몬스터 잔당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것들을 전부 없애지 않으면 이 땅은 영원히 정화할 수 없다."

정화든 뭐든 사실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그러니 어서 다들 준비하거라. 이 땅을 너희 손으로 지켜야 하지 않나?"

그러자 호드들은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우우-!!"

이 퀘스트를 끝내고 얼른 이 땅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흐아압-!!"

콰득-!

하늘을 비행하듯 날아오른 키엔은 대검으로 거대 몬스터의 머리를 찌른 뒤,

"이 역겹고 지겨운 놈들!"

그대로 비틀어 숨통을 끊어 버렸다.

"후우-."

그렇게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몸에는 몬스터들에게서 튄 검은 피로 가득했다.

"제기랄."

분명 피가 끓고 치열한 전투를 원한 것은 맞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이 구역질 나는 몬스터들이나 잡자고 여기 온 게 아니란 말이다!"

잔뜩 화가 나 있는 그의 곁으로 라이에르가 다가왔다.

"진정하게."

그 역시 많이 지쳐 보였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몬스터 웨이브의 습격이었다.

거기다 대형 몬스터들까지 상대하느라 키엔과 라이에르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기사단의 피해는?"

그의 물음에 단장 하나가 빠르게 알아 와 답했다.

"500명가량이 현재 전투 불능 상태입니다."

2천에서 500이나 당했다는 것인가.

만약 키엔과 라이에르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피해가 얼마나 더 커졌을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인 건가."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몬스터 웨이브를 막지 않았다면 이놈들은 자스트라 경계선을 넘어 우리 왕국까지 닿았겠지."

그럼 여러 마을이 그 웨이브에 쓸려나가 쑥대밭이 되었을 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야 한다."

"동감이다. 이놈들이 갑자기 왜,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아내지 못하면 넋 놓고 당할 수도 있겠어. 거기다······."

키엔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었다.

"라이에르 네 말대로 이놈들은 악마가 맞다."

아카데미에서 스치듯 배웠던 내용들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검은 피에 흉측한 생김새, 여섯 개의 팔.

크록이라 불리는 악마 몬스터였다.

"그걸 이제 알았다니, 유감이군."

"믿기 어려웠으니까. 차라리 내 착각이길 바랐다. 300년이 지난 지금, 그것도 이곳에서 악마가 나타나다니!"

그래서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가 말해 준다.

테키나 족속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메르 단장."

"예!"

"부상병들을 이끌고 왕국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지원군을 요청해라. 크라엘과 그의 기사단이 필요하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장에게 명령을 내린 뒤 키엔은 라이에르에게 물었다.

"크라엘이 올 때까지 대기할 건가?"

"아니. 이곳에 가만히 있는 건 위험해. 어디서 또 웨이브가 쏟아질지 모르니까. 그리고 크라엘이 오기 전에 이 몬스터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내는 것이 좋겠지."

"그럼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겠군."

"검의 왕국 '만'에게 후퇴란 없지."

둘은 그리 결정을 내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사방에 널려 있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보였다.

웨이브에 휩쓸려 죽은 것들이었다.

"······."

둘은 말 없이 계속 길을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음?"

저 멀리 키엔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초록색 피부에 큰 키.

호드들이다.

그런데,

"저 깃발은······."

"일라이 왕국의 깃발이군."

호드 무리 옆에 기사단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동행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보였다.

거기다,

"키엔. 저 위를 봐라."

하늘을 비행하고 있는 푸른 날개.

국경에서 기사단을 공격했다는 바로 그 사파이어 자쿤이었다.

놈도 '만' 왕국의 기사단을 발견한 것인지 키엔과 라이에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촤아악-!!

키엔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뽑아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놈은 약올리듯 재빠른 비행술로 날아오는 검기들을 피해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키루우우-!!"

그 울음소리에 저 멀리 행군하고 있던 호드와 일라이 왕국 기사단이 이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됐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키루-! 키루우우-!"

울부 짖으며 비행하는 사파이어 자쿤이 일라이 왕국 기사단 곁으로 돌아가 마치 그들과 한 편이라도 된 것처럼 낮게 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라이 왕국 기사단도 사파이어 자쿤을 전혀 견제하고 있지 않았다.

"자쿤 같은 흉포한 몬스터는 조련이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저건 그 귀하다는 사파이어 자쿤이지 않나?"

"설마······."

키엔의 눈동자가 분노에 일렁였다.

"놈들이 한패였나?"

호드가 갑자기 경계를 넘은 것도, 사파이어 자쿤이 공격을 한 것도, 전부 일라이 왕국의 소행이었던 것인가.

"억측일 수도 있지만······ 저 둘이 같이 있는 건 매우 수상하군."

"이런 쳐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상대는 벌써 전투 준비에 들어가는 거 같은데."

"어떡하긴. 놈들이 정말로 손을 잡고 우리 뒤통수를 친 거라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수적으로 열세인데?"

"너와 내가 있잖아. 이 정도 숫자 차이는 내 힘만으로도 채울 수 있다."

"만약 아슬란이 저기에 있다면?"

"······."

아슬란이란 이름에 키엔은 잠시 멈칫거렸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오늘 누가 강자인지 우열을 가려 볼 수 있겠군."

활활 타오르는 키엔의 기세를 보고 라이에르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자세다."

둘은 저기 멀리서 대형을 갖추고 있는 호드와 일라이 왕국 기사단을 향해 나아갔다.

* * *

'여기 어디쯤일 텐데.'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테키나 족속이 봉인되어 있는 입구를 찾고 있었다.

300년 전 만들어진 봉인이라 호드들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이곳 어딘가에 봉인된 입구가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나도 모니터 화면으로만 본 지형이라 실물과 매치하며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뒤로 빠져야 할 거 같은데.'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가급적이면 사방을 경계하며 병사들 사이에 껴서 가고 싶었지만-.

"······."

나는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며 가장 선두에 서서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서 공격이 날아 들어와도 괜찮다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놈의 허세 때문에 뒤로 갈 수가 없었다.

"키루우우-!!"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키루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대기사단장님!"

"저곳에 군대가!"

왠 기사단 하나가 수풀을 헤치며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공격을 하자 키루는 재빨리 우리 쪽으로 날아와 몸을 피했다.

"적군이다!"

"대형을 갖춰라!"

"호드! 전투 준비!"

"우우-!!"

기사단과 호드들은 빠르게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나는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만 왕국?'

검의 왕국 '만'.

대체 저놈들이 여기에는 왜 나타난 거지?

심지어,

[키엔]

무력: 94

지력: 65

[라이에르]

무력: 94

지력: 76

'미친.'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한 자리에 있었다.

만 왕국은 검의 나라라는 말에 걸맞게 오직 검만 쓰는 변태 같은 곳이다.

보통 왕국의 병력을 조직할 때 궁병, 방패병, 창병, 마법 병단 등등. 다양한 병종을 만들어 둔다.

하지만 이 미친놈들은 오직 검만 쓰고, 다른 무기는 전부 사파 취급을 해 버린다.

그래서인지 왕국에 무려 소드마스터가 세 명이나 있다.

'하필이면 저 사이코 같은 왕국을 마주치다니.'

검을 숭배하고, 오직 검을 우선시하는 미친 나라.

당연히 마주치기 싫은 부류였다.

"멈춰라! 너희의 신분을 밝혀라!"

아론이 먼저 앞에 나가 그들의 행진을 막아 세웠다.

그러자 키엔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보면 모르겠나. 나는 만 왕국의 대기사단장, 키엔이다."

"키엔!?"

"키엔이라면······ 소드마스터?"

기사단이 동요했다.

나는 키엔과 라이에르, 그리고 그들의 기사단 몸에 검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저들도 몬스터 웨이브를 뚫고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아슬란. 역시 여기 있었군."

아까부터 키엔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난 너희의 해명을 듣고자 왔다. 아슬란."

해명?

뭘 해명하라는 거야.

"호드가 우리 국경을 넘고, 사파이어 자쿤이 우리 기사단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일라이 왕국과 호드가 함께 있다라······."

설마 이놈들은 우리가 그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리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한다고?

"수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디 변명을 해보거라. 그 대답에 여하의 따라 너희의 처우를 결정하겠다."

하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키엔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저놈 혼자 저렇다면 미친놈이라며 비웃었겠지만-.

'라이에르까지 같이 있으면 위험하다.'

두 사람의 무서운 점은 바로 시너지다.

개인의 무력도 강한데, 이 둘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그걸 저 둘도 알고 있으니, 수적으로 열세여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눈빛을 보니까 이미 맛탱이가 간 거 같은데.'

이미 상황은 답정너로 가고 있었다.

저놈들이 원하는 해명을 해도 오해를 풀 거 같지 않고,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 같았다.

'내가 가진 네임드들의 힘을 믿어야지.'

막투르, 아론, 알렉산더, 라파엘, 그리고 호드와 일라이 왕국 기사단.

조금 위험해 보이지만, 방법은 이거 하나였다.

부딪혀 보는 수밖에.

"어디 해명을 해보라니······ 음?"

키엔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우리 바로 옆에 있는 큰 절벽에 무언가가 있었다.

"캬오오오-!!"

이걸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하나.

저 절벽 위에 크록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저기에 있었구나.'

남은 몬스터 무리가 전부 저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저놈들을 잡으면 내 퀘스트도 끝이 나는 것이다.

"저놈들이 또 나타났군."

키엔과 라이에르가 칼을 뽑아 들자 그들의 뒤에 있던 기사단도 함께 칼을 뽑았다.

우리 기사단과 호드들도 절벽 위를 경계했다.

그런데 나는,

"한 초의 상대도 되지 않는 것들이 감히-."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날뛰다니."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허세를 부렸다.

"뭐야!?"

키엔의 성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담긴 힘만으로 귀가 멍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이 들끓는 허세에 따라,

스르릉-.

격조 있고, 품위 넘치는 자세로 천천히 칼을 빼 들었다.

"가소롭구나."

그리고 그것을 옆쪽 절벽을 향해 가볍게 휘두르는 순간.

⎯⎯⎯⎯!

저 거대한 절벽이 빛의 검강에 의해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54화

0.01초 소드마스터 54화

"뭐? 키엔과 라이에르가?"

"예! 두분이 함께 기사단 2천을 이끌고 출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기사의 보고를 받은 크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 두 사람이?

거기다 자기와는 일절 상의도 없이 기사단을 움직여?

"도대체 왜 그 두 사람이 그런 짓을?"

"호드가 국경을 무단으로 침범하고, 그 과정에서 기사단이 공격을 받은 것 때문에 크게 분노하신 듯합니다."

"그 말은 지금 그 두 사람이 자스트라 경계선을 넘고 있다는 것이냐?!"

"예. 아마 지금쯤 국경에 다다르셨을 겁니다."

그 두 놈이 기어코 사고를 치는구나.

호드가 국경을 넘는 일은 가끔 있었다.

그렇다고 놈들이 악의적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아니었다.

도망치는 몬스터를 추적하고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눈 감고 넘어간 것이었다.

괜히 국경 근처에서 분란을 일으켰다가는 일라이 왕국과도 다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빨리 알아서 천만 다행인 건가."

키엔과 라이에르가 전쟁과 혈투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크라엘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사고를 치면 얼른 알 수 있게 주변에 사람들을 깔아 두었다.

그 덕분에 그 둘이 출정을 하자마자 보고가 들어온 것이었다.

"키엔님과 라이에르님이 올바른 선택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같이 보고를 듣고 있던 부장들이 하나 둘 동조하듯 의견을 내놓았다.

"호드가 건방지게 우리 왕국의 국경을 계속 넘고 있습니다. 당연히 처단해야 합니다!"

"이참에 놈들을 쓸어 버리시지요!"

하지만 크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호드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겠느냐?"

"······?"

"우리가 갑자기 군을 일으켜 국경 근처에 다다르게 되면 일라이 왕국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놈들도 함께 쓸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일라이 왕국은 대륙에서도 최약체로 뽑힙니다!"

부장들의 한심한 소리에 크라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냐. 일라이 왕국의 전력은 과거와 다르다. 특히 아슬란의 존재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우리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세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아슬란은 세분의 검을 막아내지 못할 겁니다!"

이어지는 부장들의 말에 크라엘은 일갈했다.

"멍청한 소리 그만 하거라. 너희는 검의 원탁 때 아슬란을 못 보지 않았더냐?"

"······?"

크라엘은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미뉴엘을 날려 버리는 것에 모자라 200년 넘게 부서지지 않았던 원탁을 쪼개 버렸다.

그뿐인가?

대륙 최강자라고 불리는 카르만조차도 아슬란의 거침 없는 행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때 크라엘은 느꼈다.

어쩌면 아슬란이야 말로 진정한 이 대륙의 최강자라고 말이다.

"아슬란의 힘은 예측불허다. 그 유한이 일격에 죽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지. 너희 말대로 우리가 힘을 합치면 '만' 왕국이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출혈이 엄청날 것은 자명한 일."

그래서 크라엘은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그는 아슬란이 두려웠다.

만 왕국의 기사들이 힘을 합치면 당연히 일라이 왕국을 못 이길 것도 없겠으나, 엄청난 피해를 각오하고 전쟁을 벌여야 할 터.

국운을 걸면서까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기사단을 준비시켜라. 더 늦기 전에 그 둘을 이곳으로 데려와야겠다."

제발 자신이 그곳에 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콰쾅-! 콰콰쾅-!!

"!?"

무너져 내리는 절벽을 키엔과 라이에르는 경악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건 아마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럴 것이다.

저 거대한 절벽이 저리도 쉽게 무너질 줄이야.

'말이 안 되는 경지다.'

보통 큰 기술을 날리려면 준비 동작이 길어진다.

정제된 기운을 모아 그것을 쏘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력의 우위를 결정 짓는 건 얼마나 짧은 준비 동작을 갖느냐였다.

하지만 방금 그것은,

'고작 검을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거늘.'

그 한번에 저 높디높은 절벽을 무너뜨렸다.

가벼운 준비 동작조차 없었다.

그저 허리춤에 칼을 뽑아 휘두르는 것이 전부.

그런데 결과가 저것이었다.

라이에르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방해꾼은 모두 사라졌군."

아슬란의 둔중한 음성이 사위를 갈랐다.

그는 모두를 아래로 내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명예로운 기사의 싸움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다. 그래도 명색이 소드마스터이니, 지루하진 않겠지."

저런 도발에 가만있을 키엔이 아니었지만,

"크윽-."

그조차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 아슬란이 보여주었던 그 경이로운 광경이 머리에서 잊히지 않는 것이리라.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저 정도의 힘을 보일진데, 작정하고 힘을 발휘한다면 이 숲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을 터.

'엘티히와 비겼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헛소문으로 치부했던 것이 오늘에서야 사실로 드러났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키엔과 라이에르가 경직된 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아슬란의 거만한 목소리가 더욱 깊게 울려 퍼졌다.

"내가 두려운 것이냐?"

"······."

"한심하구나. 대륙의 소드마스터라는 것들이 이리도 나약해서야."

아슬란의 모욕적인 언사에 키엔의 두 주먹이 떨려왔다.

하지만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조금 자비를 베풀도록 하지."

급기야 그는 선을 넘는 도발을 걸었다.

"너희 둘 다 덤비거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실력 차이를 좁힐 수 있지 않겠느냐?"

"!?"

순간 라이에르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정신인가.

무려 소드마스터 두 명을 혼자 상대하겠다고?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그때 옆에서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던 키엔이었다.

그만큼 분노로 절여진 눈동자가 점점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보였다.

"넌 나서지 마라, 라이에르."

그리고 그가 대검을 꺼내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키엔. 자중해라."

"뭐?"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네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키엔이 불이라면 라이에르는 물이었다.

그는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갈수록 냉정해졌다.

하지만 키엔은 불처럼 타오를 뿐이다.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 있으라고?!"

"그래서 고작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리고 싶은 것이냐?"

"라이에르!"

두 사람이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 서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슬란은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이 정도도 너희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그의 목소리에 키엔과 라이에르는 하던 말을 멈췄다.

"부담 갖지 마라. 그저 조금이라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러는 것이니."

아슬란은 두 사람 뒤에 있는 기사단을 가리켰다.

"그 뒤에 있는 기사단까지 모두 내가 상대해 주겠다."

"!?"

"이 아슬란 앞에서는 머릿수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인즉."

그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너라."

* * *

"······."

저질러 버렸다.

'내, 내가 지금 무슨 미친 짓을.'

처음에는 절벽을 부수는 것으로 기선 제압을 했으니, 적당히 허세를 부려주면 알아서 꼬리를 내릴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허장성세를 펼치며 저 둘을 도발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는 참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번 폭발하기 시작한 병적인 허세가 순간 통제를 벗어나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말았다.

이미 찰나의 괴력을 한 차례 써 버린 탓에, 쿨타임 초기화를 해도 딱 한번 밖에 쓰지 못 한다.

즉, 나 혼자서는 저 많은 기사단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저것들이 기사라면 진짜 한꺼번에 나한테 달려들진 않겠지.'

저놈들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슬란. 후회할 짓을 하는구나. 네가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순 없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라이에르는 칼을 뽑아 들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뭐 인마?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아슬란. 난 너처럼 기사의 명예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더러운 짓이라 해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행할 것이다."

잠깐. 이 미친놈이 진짜 기사단이랑 같이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야. 대기사단장이라는 놈이 그러면 안 되지.

지금 정정당당하게 일대일을 해도 모자를 판에!

"라이에르. 우리 만 왕국의 명예를 그만 더럽히고 뒤로 빠져라."

"키엔. 냉정하게 생각해라. 지금이 우리가 아슬란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그따위로 이긴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옳지. 잘 한다.

둘이 더 싸워라.

"상관없다. 이렇게라도 이길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겠다."

그런데 이미 마음을 정한 라이에르는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 모두 칼을 뽑아라!"

놈은 기어코 기사단을 끼고 나와 싸우려는 것이었다.

이런 비겁한 놈!

'이러면 늦기 전에 나도 기사단을 불러서······!'

이놈의 허세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죽어 줄 순 없는 노릇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뒤에 있는 기사단과 호드들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상황이 일촉즉발로 흘러 가려는 때에-.

"키엔! 라이에르!!"

저 앞에서 어떤 이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엔과 라이에르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크라엘]

무력: 94

지력: 87

만 왕국의 또 다른 소드마스터이자, 셋 중에서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는 크라엘이 있었다.

'이런 미친.'

저 둘도 버거운데, 이젠 세 명이냐.

거기다 크라엘은 별도의 기사단까지 끌고 왔다.

더 이상 수적으로 우리가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예상보다 빨리 왔군, 크라엘."

"무슨 짓이냐, 라이에르. 허락도 없이 군을 움직이다니.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크라엘이 험악하게 눈을 뜨고 있자 키엔과 라이에르는 조금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아슬란 공."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도 흠칫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우리 '만' 왕국은 일라이 왕국과 다툼을 원하지 않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갈 테니, 평화롭게 보내주시오."

뭐야. 그럼 싸울 필요가 없는 거잖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라엘까지 나타났길래 이젠 진짜 끝이구나 싶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우리와 싸우는 걸 꺼려했다.

착-!

나는 일단 칼부터 집어넣었다.

크라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가."

하지만 이놈의 허세는,

"아쉽게 되었군. 저 둘이 어떤 재롱을 피우나 보려고 했더니."

마지막 순간에도 꺼지질 않았다.

"다음에는 겁쟁이가 아닌, 기사다운 모습을 기대하겠다. 키엔, 라이에르."

"······!"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키엔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돌아가겠다."

그러나 이놈의 허세 때문에 말머리를 돌리는 것조차 느릿하게 품위를 지켜야 했다.

그에 더하여,

펄럭~.

망토를 펄럭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하여튼 이놈의 정신병.'

이 병신 같은 허세 때문에 저 두 소드마스터 손에 사지가 잘려나갈 뻔했다.

그래도 적절한 타이밍에 크라엘이 끼어든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다 죽을 뻔했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을 몰았다.

그런데,

쿠웅-!!

뒤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그에 이어,

"아슬란!!"

키엔의 발악 섞인 목소리가 위에서 함께 들려왔다.

잠깐. 위라고?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라!!"

키엔의 붉은 대검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도발에 결국 키엔이 그 화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조, 좆 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콰아아앙-!!

키엔의 대검이 내 손끝과 맞부딪혔다.

"!?"

그 광경에 곧 경악 어린 탄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저 키엔의 일격을 고작 손가락만으로!"

나의 손끝에서 발현된 수호신의 방패.

그것이 키엔의 대검을 막아 주고 있었다.

"크읍-!!"

키엔은 눈을 부라리며 더욱 대검에 힘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쩌적-!!

내 방어막이 아닌, 키엔의 대검에 균열이 일어날 뿐이었다.

이윽고,

"뭐, 뭣?!"

콰직-! 콰콱-!!

힘을 버티지 못한 대검이 폭발하면서 그 파편들이 키엔에게 쏟아졌다.

"크아아악!"

얼굴과 몸에 파편이 박힌 키엔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러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건방지구나."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허세에 나는 아주 처연하게, 품위 있게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런 나약한 검으로 등을 노리면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고통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키엔의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55화

0.01초 소드마스터 55화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크라엘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 키엔을 바라보았다.

갑옷까지 뚫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그로 인해 키엔 몸 전체에 검의 조각들이 박혀 버렸다.

'어떻게 키엔의 검을 고작 손가락만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키엔은 저 대검을 보면 알 수 있듯, 기술보다는 힘을 중시하는 검사였다.

그렇기에 그가 힘을 잔뜩 실어 대검을 내리치면 크라엘조차도 정면으로 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저 아슬란은-.

'마치 어린 아이 장난처럼 키엔의 검을 쳐냈다.'

키엔의 힘을 알고 있는 자라면, 키엔을 곁에서 지켜봤던 자라면, 방금 전 상황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으리라.

"······."

그건 이미 기사단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라이에르를 비롯해 그의 기사들 모두가 제자리에 얼어 붙어 버렸다.

피를 흘리며 괴로워 하고 있는 저 키엔을 얼른 달려가서 구해야 하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전율이 일어나는 몸을 떨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는 아슬란을 바라볼 뿐.

"닿으면 부러질 것처럼 한없이-."

그의 중후한 음성이 바닥을 가르는 것만 같았다.

"나약하구나."

건방지고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감히 그 누구도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만' 왕국의 대기사단장이자 소드마스터인 키엔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대륙에 몇이나 될까.

아마 아슬란이 유일할 것이다.

"이런 비겁하고 나약한 놈이 대기사단장으로 있는 왕국이라면······ 그 수준이 어떤지 안 봐도 뻔하겠군."

아슬란은 키엔뿐만이 아니라 '만' 왕국 전체를 모욕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크윽-."

"······."

모두 작게 신음만 흘릴 뿐,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여기서 자칫 발을 내디디는 순간, 아슬란의 검에 목이 날아갈 것만 같은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왕국의 기사단 따위가 감히 내게 도전하다니. 이 자리에서 전부 죽고 싶은 것이냐?"

그 존재만으로도,

그가 말 위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기사단 전체를 짓누를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런. 하필이면 걸려도 저런 괴물한테 걸리다니.'

크라엘은 속으로 탄식을 터트렸다.

기사단은 이미 모두 겁을 먹은 상태.

거기다 그들을 이끌어야 할 라이에르와 크라엘도 이미 아슬란의 기세에 짓눌려 있었다. 여기서 저들과 싸운다면 틀림없이 전멸이다.

"허나-."

아슬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처럼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비겁한 놈의 피를 묻히는 건 나에 대한, 그리고 우리 기사단에 대한 모욕이다."

그는 한심하게 키엔을 바라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붉은 망토가 화려하게 펄럭였다.

"그러니 꺼지거라. 그리고 평생 그 상처를 되새기며 네가 얼마나 비겁한 사내인지를 깨닫거라."

그 말을 끝으로 아슬란은 돌아가 버렸다.

기사단은 그의 뒤를 따랐고, 호드들도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며 함께 떠났다.

'지, 진짜 이대로 보내주는 건가?'

분명 싸웠다면 '만' 왕국의 확실한 패배였다.

크라엘도, 라이에르도 이곳에서 목숨을 걸었어야 했을 터.

하지만 아슬란은 무려 소드마스터 3명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버렸다.

그렇다는 건,

"언제 싸워도 우리 따위는 금방 죽일 수 있다는 것이냐?"

그것 말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검을 뽑지도 않고 고작 손가락으로 키엔을 쓰러뜨린 자다. 그런 자에게 우리가 눈에 차겠는가? 준비 운동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

라이에르의 말에 크라엘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런 것인가.

아슬란. 너한테는 우리가 그저 그런 상대였는가.

"제길."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지금이라도 저자의 뒤를 쫓아 왕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맞으나,

"크, 크라엘! 라이에르!! 크아악!"

온몸에 파편이 박힌 채 몸부림을 치다 기절해 버린 키엔을 보고는 그러한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돌아가자. 키엔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

"그래."

크라엘도, 라이에르도 이를 악 물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 치욕을 갚으리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둘 다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만나면 그땐 이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떨려오는 두 손이 말해 주고 있었다.

* * *

'돼······ 됐나?'

살 떨려서 미치는 줄 알았네.

말의 배를 세게 차서라도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푸르르~.

이놈의 말 새끼가 기분 좋게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주 느릿하게, 평온하고 품위 있게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뒤에서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언제 비수가 날아와 꽂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심장이 쿵쾅 거렸으나, 천만다행으로 호드의 마을로 돌아올 때까지 어떠한 공격도 없었다.

'돼, 됐다.'

키엔의 공격을 막은 건 정말 천운이었다.

이 병신 같은 반사 신경으로 잘도 키엔의 대검을 막았다.

만약 그놈이 큰 검을 휘두르지 않고 다른 이들처럼 일반 검을 휘둘렀다면 어찌 되었을지······.

'거기다 크라엘이랑 라이에르가 눈 돌아가서 덤볐으면-.'

찰나의 괴력도 쿨타임이라 내게는 반격할 수단도, 방어할 수단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둘은 그렇게 내가 도발을 했는데도 끝끝내 칼을 뽑지 않았다.

'설마 이러다 뒤늦게 빡쳐서 쫓아오는 거 아니야?'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왕국 놈들은 검에 미친 또라이들이다.

언제 나를 쫓아와 죽이기 전에 얼른 여길 나가야겠다.

그런데,

'왜 아직도 퀘스트가 클리어 안 되는 거지?'

이놈의 퀘스트는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그때 호드의 대족장, 막투르가 내게 다가왔다.

왜인지 그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이 보였다.

막투르는 내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며 말했다.

"우리 호드를 위해 이토록 힘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종족이 악마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래. 이 퀘스트는 호드를 돕는 거였지.

대족장이 끝났다고 인정을 하면 퀘스트도 끝이 나는 것이었다.

'이 지랄 맞은 숲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럇! 소리치며 이 숲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별일 아니었다. 조금의 지루함도 달랠 수 없을 만큼 시시했지."

주둥이가 여태껏 살아 있는 이놈의 허세는 꺼져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런 개소리를 듣고도 막투르는,

"역시······ 아슬란님 같은 강자에게는 이 정도의 일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로군요."

뭔가 깊이 감명한 듯보였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당신은 호드 부족을 구해 주신 것에 모자라 우리의 썩은 정신을 바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 큰 은혜를 빚졌으니, 오늘 저 막투르는 여기서 맹세합니다."

막투르는 도끼로 땅을 찍으며 모든 호드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오늘부로 우리 호드는 맹세한다! 아슬란님을 적으로 두는 자, 우리의 적이 될 것이며, 그분을 친구로 두는 자,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우우-!!"

호드들은 그에 화답하듯 각자의 무기로 땅을 내리찍었다.

그에 따라 기사단도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두 종족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건······.'

열광의 도가니 속.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내가 주인공으로 게임을 플레이 하면 보게 되는 컷씬.'

난 옆에 있던 알렉산더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기사들과 함께 가슴팍을 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옆에 있어서 이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루트로 클리어를 해서 볼 수 있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나 아슬란은 이곳에서 선언한다."

이 낯 뜨거운 상황을 두고 이놈의 허세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 아슬란은 지금부터 너희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가슴 속에서부터 충만해지는 허세를 느끼며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보였던 그 용맹함을, 그 전사의 영혼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

방금 전까지 함성을 지르고 있던 호드들이 일제히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관심과 시선에 심취하며 소리쳤다.

"일라이 왕국과 호드는 영원한 우호 관계를 이어갈 것이다. 그대들이 위험에 빠지면 언제든 나 아슬란을 찾거라. 내가 너희를 위해 달려갈 것이다."

아니. 제발 찾지 말아 주라.

"일라이 왕국이 그대들을 필요로 한다면 그대들도 우리를 위해 달려오너라."

그리고 와서 나를 지켜라.

"이것이 서로가 서로를 돕는 진정한 형제의 관계이므로, 나는 그대들을 다른 종족이 아닌, 나의 형제로 기억하겠다!"

그러니 앞으로 평생 나를 위해 싸워라.

"우우-!!"

"우오오오-!!"

호드들의 뜨거운 함성 소리는 자스트라 숲이 떠나갈 정도로 한동안 길게 이어졌다.

* * *

"그러니까 이걸······ 훈련에 쓰라는 거죠?"

"그래."

"저, 정말로 이걸 훈련에 쓰라고요? 정말?"

라파엘의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같은 말 하게 하지 마라."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요."

왕국에 돌아온 뒤 나는 라파엘과 마법사들을 시켜 무언가를 만들어 오게 했다.

그것은 바로 이끼 나무라 불리는 것을 갈은 뒤에 이것 저것 재료를 섞어 만든 가루였다.

"지금이야 별 냄새가 안 나지만, 이걸 불에 태우면 엄청 독한 냄새가 나요."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걸······."

"마기에 대한 저항을 높이려는 것이지."

"!?"

이것이 바로 마기 가루.

스토리가 중후반에 이르면 테키나 족속이 활개를 치게 되는데, 기사단을 가장 골머리 앓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기였다.

마기에 중독되면 정신이 통제가 되지 않고 몸도 고통 속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에 적응하고자 훈련 목적으로 이 마기 가루를 쓰게 된다.

이걸 불에 태우면 연기가 나오는데, 신체에 해를 끼치는 건 없지만 마기와 비슷한 효과를 내서 만들어진 것이다.

게임을 플레이 하게 되면 나중에 필수적으로 기사단에게 시켜야 되는 훈련이기도 했다.

'좀 빠른 감이 있지만.'

지금 스토리가 흘러가는 꼬라지를 보니, 언제 대악마들이 나타나 대륙을 파괴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기사단을 마기에 적응시켜야만 한다.

뭐, 따지자면 화생방 훈련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이 가루를 기사단에게 나눠 주거라. 훈련 방법은 내가 일러 준 대로 알려주고."

"아, 네."

나는 라파엘에게 맡긴 뒤에 정무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기사들이 훈련을 한번씩 끝마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훈련소로 가보았다.

"우웨엑!"

"으아아아!"

"누, 눈이 매워!"

"수, 숨을 쉴 수가 없다!"

훈련소는,

"······."

아주 난장판이었다.

내가 예전 훈련소를 다닐 때 보던 그 광경이다.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 있는 그때의 훈련, 화생방.

추억이다······ 아주 좆 같은 추억.

나는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대, 대기사단장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눈물 콧물 다 쏟아내고 있는 그들을 나는,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고작-."

치밀어 오르는 허세를 참지 못 하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것 하나 버티지 못하다니."

"하, 하지만 너무 괴롭습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틸 수가 있는지······."

말단 기사부터 시작해 단장이라는 놈까지 난색을 표했다.

"라파엘에게 이 훈련의 목적을 들었을 터. 이 가루를 태워 너희를 버티게 하는 이유는 마기로부터 저항력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더욱 그들을 꾸짖었다.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약한 강도다. 너희를 배려해 처음부터 강도를 높이지 않았던 것이지. 원래는 이 상자에 있는 가루를 절반은 태워야 비슷해지는 수준이지. 그런데 고작 이 정도로 낙담을 한단 말이냐. 한심하구나."

"······."

그곳에는 아론과 알렉산더도 있었다.

"너희 둘은 어땠지?"

아론은 붉어진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이, 이 정도는 참을만 했습······ 푸헷치! 소, 송구······ 우읍-!"

아론이 저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볼 필요도 없었다.

그나마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건 알렉산더 정도?

역시 주인공이다.

"이런 거 하나 버티지 못해서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 역시 알고 있다.

이 훈련이 이들에게 힘들다는 것을.

하지만 반드시 참고 견뎌야 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마기 저항력을 높이려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마기는 이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이들이 마기를 직접 경험해 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떻게 나의 기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물론 나는 이 훈련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마기가 있는 곳에는 절대 들어가지도, 다가가지도 않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약 저 가루에서 나오는 연기가 조금이라도 나한테 닿는다면 울고 불고 펄쩍 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마기가 이 정도란 말입니까?"

"아니. 이것보다 몇 배는 강하다. 훈련 강도를 차츰 늘려간다면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가질 수 있을 터.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한다면 악마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 그렇다면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그 사악한 마기를 버티실 수 있으십니까?"

하필이면 아론의 저 말이 내 허세에 불을 질러 버렸다.

"내가 마기 따위에 굴복할 것 같으냐?"

방금 전 이 가루로 마기의 일부분을 경험했던 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물며 이 가루에 내가 무너질 것 같으냐?"

그것이 나의 허세를 더욱 자극하더니, 기어코 나는-.

"그렇다면 보여 주겠다. 이 아슬란이 마기를 어떻게 버텨내는지."

마기 가루가 한 가득 있는 상자에 불을 던져 버렸다.

56화

0.01초 소드마스터 56화

"저, 저런!"

아슬란이 마기 가루에 불을 던지자 기사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저 가루는 악마의 가루다.

숨을 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게 만들며, 이성적인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무시무시한 가루였다.

그런데 아슬란은,

"라파엘."

"에··· 예?"

"내 주변으로 방어막을 쳐라. 이 연기가 하나도 나가지 않게 말이다."

"그, 그러다 큰일나요! 아무리 가루가 몸에 크게 해를 입히지는 못해도 저 정도 대용량이면 다르다고요! 거기다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라파엘의 말을 잘라 버렸다.

"명령이다."

아슬란의 위엄 넘치는 눈동자에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난 몰라요. 분명 경고 했어요!"

"그래. 내가 따로 명령할 때까지 방어막을 풀지 마라."

그녀는 정령을 소환해 아슬란의 사방에 단단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러자 그 안이 마기 가루로 인한 연기로 자욱해져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 대기사단장님께서 지금 무, 무슨 짓을······."

기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고작 한 줌의 가루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는데, 아슬란은 저 큰 상자 안에 있는 가루 전체를 불에 태워 버렸다.

거기다 방어막까지 쳐 버렸으니-.

"저, 저러다 죽습니다!!"

"이, 이걸 어떡하면 좋단 말입니까!"

"진짜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신다면-!"

아론은 방어막 쪽으로 달려가 라파엘에게 소리쳤다.

"라파엘 공! 얼른 이 방어막을 거두시오!"

"네? 안 돼요. 대기사단장님이 명령할 때까진 거두지 말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이러다 아슬란님께 큰일이 생기면 어떡하려고! 정 거두지 못하겠다면······!"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직접 힘으로 부수겠소!"

그런 뒤 강하게 방어막을 내려쳤지만, 마치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

방어막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제 마법 방어막이 그 정도로 깨질 것 같으세요?"

"라파엘 공!"

"전 명령을 따를 뿐이에요!"

라파엘은 방어막을 거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론도 방법이 없었다.

그저 힘으로 이것을 부수는 수밖에.

"흐아압-!"

콰앙-! 콰아앙-!!

하지만 몇 번을 휘둘러 봐도 방어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론 단장님! 저도 돕겠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아론을 돕기 위해 나섰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내려치기 시작하자 방어막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짜 왜들 그래요! 아직도 대기사단장님을 못 믿는 거예요?!"

"라파엘 공은 저 악마의 가루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소! 저 가루가 얼마나 끔찍한 무기인데!"

라파엘은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 두 사람이 절대 방어막을 부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균열이 일어난 곳은 금방 복구가 되었고 방어막의 두께가 더욱 두꺼워졌다.

"라파엘 공. 이런다고 우리가 포기할 거라 생각하지 마시오."

"반드시 부셔 버리겠습니다."

둘은 눈을 번뜩이며 저 방어막을 단번에 부수고자 검에 불어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엇-."

알렉산더는 보았다.

방어막 안쪽에서 검 하나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반듯하게 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저 검은 분명······!

쩌적-! 콰콰콱-!!

아론과 알렉산더가 힘을 합쳐 공격해도 전혀 깨지지 않았던 방어막이 거짓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내 방어막이 어떻게!"

라파엘도 크게 당황한 것인지 수백 수천 조각으로 떨어져 나가는 방어막을 망연자실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뚜벅- 뚜벅-.

뿌연 연기 사이로 아슬란이 천천히 격조 있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대, 대기사단장님!!"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피부는 눈동자처럼 붉게 올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계속 껌뻑이거나, 다른 기사들처럼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놀라우리만치 꼿꼿한 자세로 걸어 나와 기사들 앞에 섰다.

"잠깐. 여, 연기가!"

"이쪽으로 온다!"

방어막이 깨지면서 마기 가루의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려 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려는데,

"모두 가만히 있거라."

아슬란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그들은 뒷걸음치던 것을 멈췄다.

그는 높이 검을 든 뒤, 위에서 아래로 세게 휘둘렀다.

후우웅-!!

그러자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강한 풍압이 순식간에 연기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워낙 바람이 거세서 몇몇 기사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

"우, 우와."

그 광경을 보고 기사들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사단장님!"

"존안이-!"

아슬란은 자신에게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치는 아론과 알렉산더를 못 마땅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아······ 예."

그는 짧고 굵게 일갈한 뒤 명령했다.

"통에 물을 가져와라."

"예!"

기사 하나가 후다닥 달려가 통에 가득 물을 담아 돌아왔다.

아슬란은 그것을 받아 들고 머리 위로 전부 뿌렸다.

촤아아-!

은빛의 긴 머리카락이 물에 젖고 갑옷 전체에 물이 흘러 내렸으나, 흘러넘치는 귀족의 품격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음-."

신기한 점은 그의 망토가 물에 젖어도 화려하게 펄럭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았느냐?"

"······예?"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기사들이 몸을 움찔 거렸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가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슬란이 정말 화가 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희가 정신을 잘 붙잡기만 한다면 가루를 아무리 태워도 끝까지 태연하게 버틸 수 있다. 마기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만 차린다면 마기로 너희를 통제하려는 악마를 능히 베어 버릴 수 있다."

"······."

"너희는 자랑스러운 나의 기사들이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알겠느냐?"

"예!!"

아슬란은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돌아가겠다."

그리고 태연하게, 여전한 발걸음으로 훈련소를 떠났다.

"대, 대단하시다."

"어떻게 저 많은 가루를 태워도 멀쩡하실 수가 있는 거지?"

"그거야 우리 대기사단장님이시니 그렇지!"

잠시 말 없이 기사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있던 아론은 뭔가를 결심한 듯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라파엘 공."

"······."

"라파엘 공?"

"예?! 아, 네."

넋을 놓은 채 아슬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라파엘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가루가 더 있소?"

"가루요? 네.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럼 새로 가져다주시오."

그리 부탁한 뒤 아론은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말했다.

"훈련을 계속하겠다."

그러자 기사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지옥 같은 훈련을 또 한다는 것인가.

"대기사단장님의 말씀대로,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대로, 우리도 끝까지 버텨낼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기사단이라는 명예에 걸맞게 모두 꼭 해내거라."

하지만 아슬란이 남기고 간 그 강렬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론이 말한 대로, 위대한 아슬란의 기사단이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버텨내야만 했다.

"예!!"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강한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자신들이 따르는 아슬란처럼 뛰어난 기사가 되고자 하는 그런 의지 말이다.

* * *

"대, 대기사단장님!"

"누, 눈과 얼굴이 시뻘겋게······!"

저택에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집사와 시종들은 기겁하며 난리를 쳤다.

"안 되겠습니다. 제, 제가 당장을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난 괜찮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그리고 내가 따로 부를 때까지 누구도 들여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아······ 예."

나는 집사에게 그리 명한 뒤 침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우으읍-!"

머리끝까지 충만해 있던 병적인 허세가 꺼져 들어가면서 엄청난 고통이 휘몰아쳤다.

"으아아아악!"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나는 물이 있는 화장실까지 갔다.

"따, 따가워! 따갑다고 씨발!"

얼굴, 몸, 팔, 다리.

어디 하나 안 따가운 곳이 없었다.

"진짜 이 병신 같은 허세!!"

마기에 가까이 다가갈 생각도 없었고, 마기 가루는 더더욱 쓸 생각이 없었다.

몸이라도 단단하면 내가 말을 안 하지.

지나가는 몬스터가 툭 쳐도 뒤지는 새끼가 이상한 허세뽕이 들어 가지고!

"우으으으-."

수전증이 온 것처럼 손이 떨리고 발이 떨린다.

물을 퍼부어도 이 따가움이 가시질 않았다.

화생방 훈련 때도 이랬던 거 같다.

수통에 있는 물을 얼굴에 부어도, 바람에 얼굴을 맡겨도, 정말 무슨 개지랄을 해도 그 따가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수십 배, 아니. 몇 백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크흐흑-. 내가 시발 왜 이런 새끼를 골라 가지고."

오늘도 눈물 한 접시를 흘리며 이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물에 몸을 담갔다.

* * *

콰직-!!

큰 도끼와 철심이 박힌 몽둥이로 아직까지 자스트라 숲을 돌아다니고 있는 크록들을 사냥하는 호드족.

아슬란 덕분에 크록은 대다수 잡힌 상태라, 이제 놈들은 위협 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언제 또 그 숫자가 늘어날지 모르기에, 대족장 막투르는 호드족에 있는 모든 전사를 끌고 나와 숲을 청소하고 있었다.

"캬오오-!"

"죽어라!"

뻐억-!

"자스트라 숲은 우리가 지킨다!"

"우우-!!"

아슬란이 다녀간 이후부터 더욱 결속력이 좋아지고 전사들의 정신 또한 탄탄해졌다.

"대족장 막투르님을 위하여!"

"아슬란님을 위하여!"

"우우-!"

그의 가르침을 잊지 않은 대족장 막투르와 그의 전사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대족장. 이 정도면 이 구역은 전부 청소된 듯합니다."

"흠-."

막투르는 콧김을 강하게 내뿜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돌아 간다."

"예!"

정화 작업을 마무리한 호드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은밀히 지켜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음?"

덩치가 좋은 호드 하나가 동료들을 따라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이리로 오너라."

저 어두운 수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멀스멀 흘러 나오는 검은 기운이 몸에 닿자,

"억!"

순간 몸에 마비가 오고 불룩 튀어 나온 핏줄들이 전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어어!"

이 흉측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쳐봤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호드 전사는 풀썩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으음-."

얼마 안 있어 호드는 흐느적 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덩치가 좋아 보여 들어왔더니만-. 그릇이 형편없구나."

익숙하지 않은 손과 발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 때.

"거기서 뭐하고 있나? 대족장이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뒤에서 다른 호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호드를 위아래로 살펴본 뒤,

"저놈은 조금 나으려나?"

"뭐?"

순식간에 몸에서 뻗어 나가는 검은 연기가 상대방을 덮쳐 버렸다.

"크헉-!"

"반항하지 말고 이 키야르트의 새로운 몸이 되거라."

"우욱-!"

그렇게 새로운 그릇을 얻게 된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르트.

그는 이번에도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호드인가-. 그릇으로는 쓸모가 없군."

마력이 없는 놈들이라 그릇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갑자기 제단 의식이 끊기지만 않았더라도······!"

봉인이 풀리고 게이트가 열리면서 크록들이 다수 밖으로 빠져 나갔을 때만 하더라도 일이 순조로웠다.

키야르트 역시 술사가 진행하는 의식에 따라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 했던 것인데, 갑자기 제단 의식이 끊기고 게이트가 닫히면서 자신의 의식과 액체처럼 흐물거리는 몸만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적당한 그릇만 찾는다면-!"

이 대륙을 검은 안개로 뒤덮어 악마의 땅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그릇으로는 안 된다.

뛰어나고 잠재력이 무한한 그런 육신이 필요하다.

"대족장 막투르라-."

키야르트는 자신이 삼킨 호드의 기억을 살펴보았다.

그때 보이는 건 대족장 막투르.

"대족장 정도라면······."

이 몸보다는 쓸만 할 터.

문제는 호드는 마력이 있지 않아 마법을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슬란?"

그런데 호드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있었다.

쏟아져 나오는 악마 몬스터들을 쓸어 버리고 대륙의 소드마스터라는 자들을 홀로 상대해 침묵 시킨 무시무시한 강자.

이 호드는 아슬란을 거의 신처럼 숭배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 자스트라 숲에 있는 호드족 전체가 비슷한 마음이었다.

"호오-. 이놈이 내 의식을 방해했던 것인가?"

그제서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아슬란. 이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흐흐. 멍청한 호드의 대족장보다는 대륙 최강자라 불리는 놈이 훨씬 낫겠지."

호드의 기억을 되새겨 봤을 때, 아슬란의 능력과 그 잠재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이 사내를 그릇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아슬란."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빠르게 그릇을 바꿔가며 힘을 키운다면 언젠가 놈을 자신의 육신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기다리거라, 대륙 최강자여."

키야르트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57화

0.01초 소드마스터 57화

"우에엑!"

"고작 이것도 버티지 못해서야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모두 끝까지 버텨라!"

마기 훈련을 시작한지 이제 3일째.

아론을 필두로 기사단은 거의 반 미친놈들처럼 매일 가스실에 들어가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우웨엑-! 나, 날 죽여라 이놈들!!"

넬라 기사단장도 호기심에 참여를 했다가 반 시체가 돼서 나와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기사단장이라는 것이 이런 추태를 보이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채찍질을 했다.

"마기 가루를 한 상자를 다 태워도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을 기르거라!"

"옙!!"

말도 안 되는 주문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군소리 하지 않으며 훈련에 임했다.

왜냐하면 내가 몸소 그들 앞에서 어떻게 이 연기를 버텨야 하는지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분에 나는 3일 동안 침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이 따가운 눈과 피부를 달래야만 했다.

'미리 포션을 쟁여 놓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거야.'

이 아슬란의 허세 때문에 저택에 포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내 침실 창고에다 비싼 포션을 가득 넣어 두었다.

그 덕에 최소 열흘은 밖에 나오지 못할 뻔했지만, 3일 만에 회복하고 나올 수가 있었다.

"사흘 동안 저택에서 또 수련을 하고 계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3일 내내,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포션을 얼굴에 퍼부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이 영감은 과연 알까.

조루 같은 이 체력 때문에 집에서 아무도 들이지 않고 푹 쉬고 있을 때면 이놈들은 내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이상한 착각을 하곤 한다.

"대기사단장님의 그러한 모습이 기사단에게는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

그냥 가만 있으면 될 것을.

나는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허세를 내뱉었다.

"검의 끝을 보았어도 수련은 늘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호레스 자네도 저 마기 훈련에 관심이 있나?"

"크흐흠-! 고, 곧 회의가 시작될 터이니, 얼른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지금 당장이야 기사단을 먼저 훈련시켜야 해서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지만, 어느 정도 기사단의 훈련이 끝나면 문관 놈들도 죄다 저 지독한 연기 안에 집어 넣을 생각이다.

마기는 무관과 문관을 나누지 않고 몰아치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겠지.'

이제 고작 3일째다.

벌써부터 성과를 바라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한 달을 죽어라 훈련해도 막상 마기를 경험하게 되면 그동안의 훈련은 정말 맛보기 수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법사의 보호막이나 아이템을 끼면 유용하긴 하겠다만.'

마법사가 보호막을 쳐도 마기는 그 미세한 틈을 뚫고 들어온다.

마법 저항력이 높은 아이템을 끼면 그나마 버틸 순 있어도 오래 머무르면 결국 마기에 중독 되어 버리니, 마기 연기가 가득한 곳에는 되도록 빨리 벗어나야 한다.

'뭐, 나는 절대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깐.'

이놈의 허세가 어떤 개지랄을 떨어도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키루우우-! 키루우우-!!"

"으어어!"

"조, 조심해!"

훈련소에 사뿐히 내려 앉아 울음을 터트리며 날개를 퍼덕이는 키루.

그것을 보고 기사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 큰 몸뚱이로 난리를 피우니, 그걸 제어할 수 없는 기사들이 진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저놈이 자꾸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

나는 그런 키루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낄낄 웃으면서(?) 장난을 치고 있던 키루는 그런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키룩······."

하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난 그런 키루에게 다가갔다.

놈은 가까이 내게 다가와 얼굴을 비벼댔다.

"키루."

"키루우-!"

나는 키루를 부르며 녀석의 귀에다 속삭였다.

"한번만 더 난리치면 그땐 진짜 머리에 박힌 보석부터 빼서 확 팔아 버린다."

"!?"

내 말을 아주 잘 알아 들었는지 녀석은 고개를 신명 나게 위아래로 흔들며 날갯짓을 했다. 그렇게 놈은 우리 성 주변을 비행했다.

절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지, 가끔 사냥할 때 빼고는 늘 성 주변을 배회한다.

결국 우리 왕국에서 놈이 잠을 자고 쉴 수 있는 둥지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휴. 저놈 유지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나중에 돈을 많이 잡아 먹는다 싶으면 바로 상단에 연락해서 팔아 버릴 생각이다.

"엘프들과의 교역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회의가 열리고, 나는 가장 큰 돈벌이가 될 엘프와의 교역부터 물어 보았다.

"현재 교역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엘프가 인간과 단절하고 있어서 길을 여는 데에 조금 애를 먹고 있는 중입니다."

가급적이면 대충 공사하고 빠른 시일 내에 교역로를 열라고 하고 싶지만-.

"조금 시일이 걸려도 좋으니, 교역로에 문제가 없도록 꼼꼼하게 만들어 둬라."

괜히 문제 생겨서 돈줄 끊기는 건 사양이니,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만들고 싶었다.

"호드족과의 교역은?"

"현재 자스트라 경계선 쪽에 새로운 교역로를 만드는 중입니다. 다행히 길을 내는 것은 어렵지가 않아 조만간 활발하게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엘프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스트라 숲에서만 나오는 것들이 있으니, 그것들을 가져다 팔면 나름 큰 돈이 될 것이다.

'돈 모이면 왕국 병단부터 강화해야지.'

무기도 사고, 성벽도 새로 높이고, 장비도 업그레이드 하고, 정말 할 게 많았다.

'갑자기 행복하다.'

돈, 돈이 홍수처럼 몰려 온다.

교역로만 잘 만들면 돈을 펑펑 써도 남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기사단을 이끌고 나갈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 교역로가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이니, 지금은 열심히 뛰어 다닐 때였다.

"교역로도 확인하고 여러 마을과 성도 확인할 겸, 돌아다닐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곳."

나는 지도에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으로 갈 생각이다."

"여긴 칼루탄이 아닙니까?"

버려진 땅이라는 의미의 칼루탄.

완전한 황무지이며, 땅을 개간할 수가 없을만큼 척박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또한 주변에 활화산 하나가 있어서 더더욱 사람 살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여기에 반인반마들이 살고 있지?'

자신들의 핏줄 때문에 숨어 사는 반인반마, 루너.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 한다.

그 음흉한 신전 놈들만 반인반마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처음에는 그들을 심하게 배척해 지금은 그 숫자가 무척 줄어 들었고, 칼루탄에 들어가 조용히 살고 있어서 그런지 현재는 거의 터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딱히 말썽을 피우는 놈들은 아니니까.'

악마의 피가 꿈틀거려 폭주하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놈들은 세력도 무척 작고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거의 없는 세력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스토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내가 기사단 3천을 이끌고 가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번 자스트라 숲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느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기사단은 많이 데리고 다니면 좋다는 것을 말이다.

거기다 내가 그 어떤 왕국도 거들떠 보지 않고 자기 영토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국경에서 빼 버린 이 칼루탄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있었다.

'그 악마 놈들이 더 날뛰기 전에 최대한 할 수 있는만큼 스펙업을 해야지.'

테키나 족속이 예상보다 빠르게 튀어나오기 시작하니, 그들에게서 내 한 몸 지키기 위해서라도 힘을 키워야 한다.

왕국의 힘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한 몸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언제나 스펙업을 하는 건 즐겁다지만-.'

그게 하필 아슬란이라니.

에효효.

스펙업을 해도 즐거움이 없구나.

다른 캐릭터였으면 정석 루트를 따라서 무기 강화도 하고 무력도 올리고 다 했을 텐데.

'이놈의 난이도만 아니었어도.'

뭐, 캐릭터가 좀 하자 있어도 괜찮다.

무력과 지력을 열심히 올려놓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 극악 난이도는 그런 가장 기본적인 스펙업 조차 막아 버렸다.

그렇기에 무조건 아이템에 붙은 옵션을 떡칠해서 힘을 키워야 했다.

'두고 봐라. 개발자 놈들.'

그런 스펙업이 없어도 템빨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겠다.

그리고 마침내 게임을 클리어해 당당히 이곳에서 탈출할 것이다.

* * *

검의 왕국 '만'.

자스트라 숲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왕국 전체에 소문이 다 퍼진 상태였다.

기사단의 사기를 위해, 그리고 대륙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크라엘은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하지만 단속을 한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키엔이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초주검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많은 백성이 목격했다.

"제길."

크라엘은 오늘도 술잔에 담긴 술을 쓰게 넘겼다.

이번 일을 분노해야 할 왕은 오히려 아슬란에게 겁을 먹었고, 그날 현장에 있었던 기사단은 아슬란이 보여 준 힘에 압도되어 그 두려움이 다른 기사단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지금 이들에게 아슬란은 불사의 대마왕 같은 존재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는 것인지, 방법이 보이지 않던 차에-.

"대기사단장님!"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아슬란이 기사 3000명을 이끌고 출정을 했다고 합니다!"

"뭐?"

"그뿐만이 아니라 현재 저희 왕국 인근 국경 근처까지 다다랐다는 보고입니다!"

크라엘은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3천 명을 이끌고 왔다는 건 분명 최고 정예병만 모았다는 뜻.

성 하나를 공격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일 수도 있는 숫자지만, 상대가 아슬란이라면 다르다.

그의 힘이라면 어디까지 그 위력을 뻗칠지 알 수 없었다.

"전 기사단에 경계령을 내려라! 얼른!"

"예!"

비상령이 떨어진 건 '만' 왕국뿐만이 아니었다.

인근에 있는 왕국들과 거리가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왕국들까지 모두 경계령이 내려졌다.

아슬란이 어디로 튈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아슬란!"

* * *

'누가 또 내 욕을 하나.'

나는 귀가 간지러운 것을 느끼며 기사단과 함께 척박한 땅 위를 걸었다.

버려진 땅이라는 이름이 걸맞게 이곳은 그저 어둡고 삭막했다.

'그래서 오히려 찾기가 더 쉽네.'

뭔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그랬으면 지형을 찾는 데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이 모양이라 내가 원하는 위치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크르르-!"

물론 황무지라고 해서 몬스터들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곳도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것이다.

"아론."

"예."

"내 칼이 저런 천박한 것들에 닿게 하지 마라."

"예!"

기사단을 많이 끌고 오기 잘했다.

아론과 나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쓸어 버렸다.

난 그들을 이끌고 더 나아가 높은 절벽과 절벽 사이에 있는 길을 지나갔다.

이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전부 제거해 끝까지 나아가면 그 끝에 보석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일반 보석이 아닌, 무려 옵션을 부여해 주는 보석.

아슬란 스펙업에는 보석만 한 것이 없었다.

찾기도 그리 어렵지 않고 효과도 랜덤이지만 나름 준수한 편이다.

"대기사단님. 저기를 보십시오."

그렇게 하염없이 말을 몰면서 나아가다 아론이 저 끝부분을 가리켰다.

"무언가가 저 비석 같은 곳에 박혀 있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

아슬란이 늙어서 그런가.

난 안 보이는데.

"빠르게 간다."

"예!"

속도를 높여 나아가 보니, 과연 아론의 말대로 그곳에는 길을 가로막는 큰 비석 같은 것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

정확히 어떤 보석인지는 직접 만져봐야 알 것 같았다.

"크르르르-!!"

문제는 일단 이곳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이곳을 몇 번 와봤는데, 여긴 다른 건 다 괜찮으나, 절벽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이 귀찮아 잘 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는 3천 명의 기사들이 있지 않은가.

거기다 아론, 알렉산더, 라파엘까지 있어서 몬스터 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스걱-!

마지막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처리한 아론은 내 명령에 따라 저 높은 비석에 박혀 있는 보석을 빼내기 위해 위로 올라가려 했다.

'이번에는 쉽게 얻는구나.'

그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저 탐스러운 보석이 얼른 내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촤아아-!

그림자처럼 검은 복장으로 누군가가 절벽에서 나타나더니,

카앙-!

놈은 비석에 박힌 보석을 빼버리고 반대편 절벽으로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뭐야'

저 개 같은 도둑놈의 새끼가!

'눈앞에서 저걸 놓치다니!'

내 보석!

내 보석-!!

"활을 쏴라!"

"놈을 잡아라!"

기사단은 저 도둑놈을 잡기 위해 얼른 활을 들었지만, 날래게 절벽을 뛰어다니는 놈을 조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벌써 저 멀리까지 뛰어가 버려 사정거리에도 닿지 않을 듯싶었다.

더군다나 라파엘도 조준이 어려워 섣불리 마법을 발동시키지 못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절벽이 무너져 내려 우리가 꼼짝없이 매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씨발.'

이 좆 같은 게임.

이런 식으로 보석을 날려 버리게 만들다니.

왠지 쉽게 준다 했어.

대체 저놈은 어디서 나타나 가지고······.

"키루우우-!!"

그렇게 희망을 놓고 있을 때였다.

내가 출정하는 그날부터 계속 뒤를 따라오던 키루가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놈은 빠른 비행과 아주 정확한 날갯짓으로 절벽을 오르던 도둑놈과 부딪혔다.

뻐억-!

옳지!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키루!

"키루우-!"

그 정도로는 부족했는지 아예 키루는 놈을 발톱으로 붙잡은 뒤 내 앞으로 던져 버렸다.

"으아악!"

콰앙-!

문제는 놈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바닥에서 일어나는 흙먼지와 파편들이 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놈이 굳게 쥐고 있던 보석도 함께 튀어 올라 빠른 속도로 내게 치달았다.

"대기사단장님!"

그러자 나를 호위하고 있던 알렉산더가 손을 뻗어 보석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보석은 알렉산더의 손이 아니라 그의 팔목을 지켜주고 있는 갑옷과 부딪혔다.

째앵-!

그렇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 안 돼!'

파아앗-!!

보석이 수십 조각으로 깨지면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와 나를 덮었다.

"······."

정말 황당하게도 보석이 그대로 파괴되었다.

보석은 플레이어에게 흡수되지 않고 깨지면 그대로 사라진다.

"괜찮으십니까?!"

알렉산더 이놈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주인공이라는 놈이 그거 하나 못 잡냐?'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보석의 효과로 붉은 망토가 찬란한 붉은 망토로 변경됩니다.]

"······?"

갑자기 멀쩡히 있던 망토에 보석 효과가 부여되었다.

58화

0.01초 소드마스터 58화

[찬란한 붉은 망토]

"······?"

이, 이게 뭔 경우여.

알렉산더의 단단한 갑옷에 맞아 그대로 파괴된 줄 알았던 보석이, 천재일우의 행운으로 내게 흡수가 된 모양이다.

웃긴 건, 보통 보석이 흡수가 되면 검이나 팬던트, 혹은 반지 같은 곳에 들어가는데, 이건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망토에 빨려 들어갔다.

"대기사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방금 대기사단장님 앞에서 큰 폭발이······!"

어수선하게 떠들어 대는 기사들을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고작 이런 일로 호들갑 떨지 마라."

너희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대기사단장님. 이놈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바닥에 처박혀 쓰러져 있는 놈을 내려다보았다.

[로벤]

무력: 83

지력: 80

어. 잠깐만.

이거 내가 많이 본 이름인데.

로벤이라면 분명······.

"놈을 일으켜라."

"예!"

······죽었나?

곤죽이 돼서 기사들 손에 축 늘어져 있는 로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놈을 포박해라. 추후 깨어나면 그때 심문할 것이다."

로벤을 기사단에게 맡긴 뒤 우리는 절벽 사잇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행군하면서 나는 망토부터 살펴보았다.

[찬란한 붉은 망토]

-착용자와 의식을 공유합니다.

-착용자와 속성을 공유합니다.

-망토의 펄럭임이 더욱 화려하게 변합니다.

-랜덤으로 능력 하나를 부여합니다.

"······?"

이건 또 뭔 괴랄한 아이템이야.

착용자와 의식을 공유한다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검과 비슷한 효과였다.

그렇다는 건 설마······!

'검에 이어 이제는 망토까지 허세를 부린다는 건가?'

손발이 부르르 떨려왔다.

대체 어디까지 이놈의 허세가 전염되는 것인가.

'그래도 여기서 좋은 옵션만 떠준다면.'

허세든 뭐든 다 받아 줄 자신 있었다.

[옵션을 부여하시겠습니까? 한번 옵션을 부여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망토에 새로운 옵션을 부여했다.

잠잠했던 망토에 밝은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 * *

"저런 멍청한 놈-!"

기사들 손에 끌려가고 있는 로벤을 보며 자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라니깐!"

자칼의 조언을 무시하고 로벤은 끝끝내 저 절벽 사잇길로 들어가 거대한 비석에 박혀 있는 신비한 보석을 강탈했다.

하지만 거의 다 성공한 일이었는데, 별안간 나타난 저 사파이어 자쿰에 의해 그는 기사단의 손에 붙잡혔다.

"그래도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영영 없었을 겁니다, 대장."

"예. 로벤 부대장이 무리를 하긴 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칼도 알고 있다.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사실 그들이 그 보석을 갖고자 시도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벽에 가득 모여 있는 몬스터들 때문에 쉽사리 길을 뚫지 못했으며, 몰래 보석만 가지고 가려고 해도 몬스터들의 예민한 감각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때에 저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 나타난 것이었다.

저들이 압도적인 군사 숫자로 절벽을 뚫어 주면서 그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거의 다 정리가 됐다.

문제는 이들이 원하는 걸 저들도 원했다는 것이다.

그걸 깨닫고는 로벤이 무리하게 달려가 보석만 쏙 빼내 오려 했지만······.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리 놔뒀다가 심문을 당한다면 우리 마을의 위치가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

100년을 넘게 이곳에 터를 잡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온 자들이다.

만약 마을의 위치를 들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구해야겠지. 하지만 상대는······."

아무리 숨어 살고 있다고는 해도 상대가 누군지는 자칼도 알고 있었다.

그 위명이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는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

여러 소드마스터를 죽이고 거짓말 같은 업적만 쌓아 가고 있는 기사였다.

다른 때라면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로벤을 구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아슬란이라니.

"구출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면 원칙대로 하겠다."

"예? 그, 그 말씀은······."

"로벤을 죽이는 수밖에. 놈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런 멍청한 자식."

"······."

가족과 친구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일단 놈들의 뒤를 밟는다."

자칼을 선두로 그들은 일라이 왕국 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중간에-.

"음?"

자칼은 화려하게 펄럭이고 있는 아슬란의 망토에서 흩뿌려지고 있는 빛을 보고는 멈칫거렸다.

"너희도 방금 그걸 봤느냐?"

"예. 실로 아름다운 망토입니다."

"순간 빛이 번쩍인 거 같았는데······."

묘하게 눈을 사로잡는 망토였다.

"잠깐. 그런데 지금 놈들이 어디로 가는 거지?"

"저 방향은 설마······."

아슬란과 그의 기사단은 칼루탄을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깊숙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이곳에서 오래 정착하고 있던 이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금지된 땅이었다.

"저놈들이 죽으려고 들어가는 건가?"

이걸 어떡해야 할지 고민이 됐지만, 차마 로벤을 버리고 갈 수가 없어 그들은 은밀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 * *

나는 멍한 눈으로 찬란한 붉은 망토의 옵션창을 바라보았다.

"······."

꿈인가?

이게 정말로 여기서 나온다고?

[찬란한 붉은 망토]

-착용자와 의식을 공유합니다.

-착용자와 속성을 공유합니다.

-망토의 펄럭임이 더욱 화려하게 변합니다.

-비행술을 1분 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분)

랜덤으로 부여한 옵션에 어마어마한 것이 걸렸다.

지금까지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고작 몇 번밖에 써보지 못했던 바로 그 옵션이다.

비행술!

비행술이라니!!

'비행술은 마법사들도 무척 쓰기 어려운데'

마력으로 비행이 가능하긴 하지만, 마력 소모가 무지막지하고 가성비가 좋지 않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마법 빗자루나 양탄자를 타고 다니는 것이다.

당연히 소드마스터나, 마검사 중에서도 비행술을 쓸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만큼 유니크하고 굉장히 갖기 어려운 능력이라는 것이다.

'역시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인내하니, 이렇게 복이 오는구나.'

게이머로서 가장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생각지도 못한 확률을 뚫어 엄청나게 좋은 옵션을 갖게 되었을 때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무척이나 행복하다.

그래. 망토야.

네가 허세에 절인다고 해도 난 너를 사랑할 자신이 있단다.

'푸흐흐-.'

마음 같아서는 깔깔 웃으며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으나, 지금은 대기사단장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기사단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하아- 얼른 써보고 싶다.'

새로운 아이템을 얻으면, 그것도 엄청난 옵션의 아이템을 얻으면 빨리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나고,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도 그 아이템이 생각나 실없이 웃게 된다.

그냥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행복한, 아주 충만한 기분을 한동안 느낄 수 있다.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마냥 웃음만 나오고 얼른 이 옵션을 써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대기사단장님. 길이 막혀 있습니다."

"음?"

속으로 실실 쪼개면서 나아가고 있던 중.

아론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앞을 보니, 정말로 저 멀리서부터 길이 막혀 있었다.

'이상하다? 왜 길이 막혀 있지?'

보석을 얻었음에도 내가 아직 이 황무지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더 찾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칼루석.

오직 이곳 칼루탄에만 나오는 희귀한 돌로, 불을 붙이면 불이 붙고 돌을 갈아 가루로 만들면 화약처럼 쓸 수 있는 아주 뛰어난 자원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칼루석을 모를 때이니까.'

스토리 중반부터 칼루석의 능력이 알려지면서 그때부터 각 왕국에서 관심을 보이는데, 이로 인해 그냥 버려져 있던 칼루탄을 갖고자 왕국끼리 서로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내가 먼저 이곳을 점거해 칼루석을 독점으로 채광하려는 것이었다.

문제는,

'원래 여기 길이 나야 하는데.'

내가 지금 뭘 착각하고 있나.

이 뻥 뚫린 길을 따라 걸으면 칼루석이 밭처럼 널려 있는 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길 앞에 성벽이라도 생긴 것마냥 넓은 돌 같은 게 길을 막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우회를 해야 할지, 아니면 이 앞을 그냥 넘어갈지······."

양옆도 돌산이라 우회를 하려면 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아니면 뒤로 쭉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럼 시간이 배로 더 걸릴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길을 막고 있는 돌판을 성벽처럼 기어올라 넘어가면 된다.

'내가 정말 뭔가를 착각하고 있나?'

이상하네.

내가 이걸 착각할 리 없을 텐데.

분명 이 길이 맞다.

대륙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원으로 뽑히는 칼루석이 있는 곳인데, 내가 그 지형을 어떻게 착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혹시 모르니-

'올라가서 확인을 해봐?'

길을 정말 착각한 거라면 내가 저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 확인을 하면 될 일이다.

마침 잘 됐다.

이 망토에 새로 부여된 비행술을 언제 써보나 했더니, 이렇게 기회가 생기는구나!

"대기사단장님?"

내가 말 위에서 내리자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 보겠다."

"예? 아, 아닙니다. 그런 건 저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나는 비행술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마치 엔진이 가열하듯,

츠츠츠-.

내 발밑으로 바람과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거세게 회전하더니,

투웅-!!

나는 쏜살같이 위로 튀어 올랐다.

"아, 아니!?"

"우와아아!"

기사단은 그 광경을 보며 기함을 터트렸다.

나는 위로 쭉 날아올라 순식간에 절벽 끝에 다다랐다.

"······미쳤다."

이것이 비행술이구나.

저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이렇게나 간단하고 빠르게 올라올 수 있다니.

사람이 하늘을 날면 이런 기분이구나.

그래. 이 맛이다.

이게 게임이지!

펄럭~!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망토가 과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나 잘했지? 라고 내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내 검보다 낫다. 어휴. 이쁜 새끼."

비행시간 1분.

쿨타임 5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무슨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나야 할 때 이 비행술은 내게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처음으로 이 망토가 좋아졌다.

"어디 보자."

나는 절벽 끝에 서서 주변을 확인해 보았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무서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여기서 떨어져도 비행술로 언제든 다시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 여기가 맞잖아?"

내 착각이 아니었다.

저 막힌 길을 따라가면 칼루석을 채광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그렇다면 대체 길을 막고 있는 저건······.

"그르르르르르-."

땅울림 같은 울음 소리가 길게, 천지를 진동하며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직감했다.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그오오오오-!!"

바로 몬스터라는 것을.

"모, 몬스터다!!"

"앞에 괴물이 있다!!"

길을 막고 있던 것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기사단은 모두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들은 곧 눈 앞에 펼쳐지는 그 압도적인 크기에 할 말을 잃었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몸 전체가 돌로 이뤄진 트롤.

이곳 주변에 트롤이 서식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트롤들은 온순하고 공격성이 낮아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거기다 메가 트롤이라니!"

심지어 이놈은 우리가 시비를 걸지도 않았는데, 매우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르르르르-"

분노 섞인 깊은 울림으로 놈은 기사단이 아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왜 나를?

저기 사람도 많잖아, 인마.

"그오오오오-!!"

그러고는 강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포효했다.

그 소리만으로도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이고. 이놈의 망토 때문에 내가!"

위기일수록 절로 튀어나오는 남 탓!

왜 갑자기 비행술 같은 옵션을 부여해서!

"일단 얼른 여기를 벗어나야······."

나는 비행술을 써서 빠르게 여길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콰아아앙-!!

성난 메가 트롤이 냅다 주먹을 절벽 아래로 날려 버렸다.

그러자 내가 디디고 있던 절벽 끝부터 균열이 일어나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씹!"

콰콰쾅-!

"대기사단장님!!"

"아, 아슬란님!!"

다급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균형을 잃고 눈을 질끈 감아 버린 나는-.

"음?"

아주 멀쩡했다.

나는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채로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절벽이 처박혀 뿌연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펄럭~.

이 망토 덕에 살았구나.

"그오?"

메가 트롤은 내가 둥둥 떠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저럴 수가!"

"대체 어떻게?!"

아래에 있던 기사단도 경악 어린 기함을 터트리고 있었다.

나는 1분밖에 되지 않는 비행술이 꺼지기 전에 얼른 이곳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건방지구나."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허세에 나는 뒤가 아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허공에 마치 바닥이 깔린 것처럼, 격조 있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감히 누구의 길을 막는 것이냐? 미물이여."

"그르르르르르-"

트롤의 성난 울음에 땅이 진동하고 내 몸도 함께 떨려왔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게 쏠린 기사단의 시선과 트롤의 성난 눈동자에 심취하며 허리춤에서 칼을 서서히 빼 들었다.

"그오오오오오-!!"

그리고 놈이 크게 괴성을 지르는 순간.

"시끄럽다."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59화

0.01초 소드마스터 59화

콰콱-! 콰콰콱-!!

"그오오!"

저 높은 절벽 만한 몸통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았었던 메가 트롤.

하지만 그것이 괴성을 지르며 직선으로 갈라진 몸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었다.

콰아아앙-!!

쪼개진 몸뚱이 절반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 아래 덩그러니 남은 몸통도 역병처럼 퍼지는 균열로 인해 차츰 무너져 내렸다.

"!?"

부하들과 함께 은밀히 기사단을 뒤따르던 자칼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대, 대장. 저, 저게 대체!"

"이, 인간이 어찌 저런 힘을!"

그의 곁에 있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입을 쩍 벌린 채로 먼지 속에 파묻혀 버리고 있는 트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우와아아아-!!"

"대기사단장님 만세!!"

기사단의 함성소리에 자칼은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건 비행술입니까, 대장?"

특히 바닥이 무너졌는데도 그 위에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다니.

"비행술이었다면 마력이 흐르는 게 보여야 돼. 하지만 어떤 것도 보이지가 않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력도 없이 허공 위에 떠 있는 존재라.

더욱 가관인 것은,

뚜벅- 뚜벅-.

마치 계단을 내려오는 것처럼 아슬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격조 있는 발걸음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품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특히,

펄럭~!

빛을 흩뿌리는 듯한 저 붉은 망토가 유독 두드러지게 보였다.

아슬란의 품위를 한 단계 더 올려주는 느낌이랄까.

'인간이 아니구나.'

마력도 없이 하늘을 땅처럼 걷는 경지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아슬란은 아주 태연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말 위에 올라탔다.

기사단은 여전히 뜨겁게 함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을 앞으로 몰았다.

"대, 대장."

"어, 어떻게 하죠?"

부하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물들었다.

방금 전 그 광경을 봤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자칼 역시 심장이 아직도 쿵쾅 거리며 뛰고 있으니까.

거기다,

'저놈도 넋이 나갔군.'

멀리서 보이는 로벤도 그 광경을 봤던 것인지, 완전히 얼이 나간 표정이었다.

"일단······ 은밀하게 따라간다. 들키지 않게 은신술을 최대한으로 써라."

처음에는 기습을 통해 로벤을 데려오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최대한 저 괴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말이다.

* * *

'미친 트롤 새끼.'

나는 바닥에 널려 있는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객기 부렸다가 뒤질 뻔했네.'

비행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올라갔다가 영원히 구천을 날아 다니는 원혼이 될 뻔했다.

'사실 이건 다 개발자의 음모가 아닐까.'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비행술 옵션을 넣어 준 것이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놈은 죽이면 뭐 안 주냐?'

메가 트롤은 몸뚱이 전체가 돌이라서 죽여도 얻을 게 없었다.

'진짜 가성비 없는 놈이네.'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여기 온 건 저놈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여기.

황무지에서 잠자고 있는 황금을 캐러 왔기 때문이다.

우린 칼루석이 아주 넘치게 쌓여 있는 검은 돌밭에 도착했다.

"역시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군요. 개간할 곳이 마땅치 않고 이렇게 쓸모없는 돌들만 널려 있으니 말입니다."

아론아. 네가 아직 보는 눈이 없구나.

이 황금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런 게 바로 황금을 돌 같이 보라는 건가.

"알렉산더."

"예, 대기사단장님!"

"적당한 크기의 돌을 아무거나 주워 오너라."

"예!"

알렉산더는 후다닥 뛰어가 자기 얼굴 만한 크기의 돌을 가져왔다.

검은 돌, 칼루석.

앞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아주 든든하고 치트키 같은 자원이었다.

"라파엘."

"네."

"이 돌 위에 불을 붙여 봐라."

라파엘은 곧바로 불을 소환해 돌 위에 올렸다.

하지만 돌에 불이 붙지 않고 있었다.

"너희도 보다시피 돌에는 불이 붙지 않는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지. 허나-."

나는 알렉산더를 시켜 돌을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다 불을 붙이자,

화아아악-!!

"이렇게 안쪽은 불이 맹렬하게 붙게 되지."

"오오······."

"이리도 신기할 수가."

겉표면에는 불이 붙지 않지만, 돌 안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불이 붙으면 강하게 타오른다. 쉽게 말해서 화약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것이다."

"그렇겠네요. 이 정도의 발화력이라면 무기로도 쓸 수 있을 테고, 마법적 용도로도 활용이 무궁무진할 것 같아요."

제일 신나 보이는 건 라파엘이었다.

이곳 세상에서의 과학은 곧 마법이니, 마탑에서 연구를 하는 마법사는 과학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척박한 땅이지만, 이곳에서 채광을 하며 땅을 천천히 개간시킨다면 어느 정도는 사람이 살만 한 곳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 여기가 발전 가능성 없는 황무지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게임이 계속 진행되고 나면 왕국들이 채광 독점권을 위해 이곳에다 성을 쌓기까지 한다.

개간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런데 여기를 개발할 만한 인력이 될까요? 호드와 엘프, 두 종족과 교역을 하기 위해 교역로를 열고 있잖아요. 투입된 인력이 엄청 많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배치시킬 만한 노동력이 부족했다.

어쩌다 보니 일을 많이 벌려서 두 교역로를 동시에 여느라 투입할 인력이 없었다.

'어디 써 먹을 만한 공짜 인력 없나.'

라고 생각할 때쯤.

"대기사단장님. 그런데 아까 붙잡은 저놈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정신을 차린 거 같던데······."

아론의 말에 퍼뜩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반인반마, 루너들이 있었지.'

인간과 닮은, 인간 형체의 루인 등급 악마.

그들에게서 나온 반인반마 루너.

물론 반드시 그 절반이 인간이라는 법은 없다.

이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마을에는 악마의 피를 이어 받은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놈들을 잘 구슬려서 쓸 수만 있다면-.'

나는 칼루석을 싼 노동력에 얻어서 좋고, 음지에서 고통 받으며 살고 있던 그들은 일자리를 얻어서 좋고.

이것이 바로 일석이조였다.

'어떻게 구슬리느냐가 중요하겠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주인공이 엘프와 인간의 하프라는 공감대를 형성해 서로 으쌰으쌰 하는 그림이 나온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니 똑같이 할 순 없겠다만, 지금 내 곁에는 알렉산더도 있고, 무려 악마와 엘프의 피를 이어 받은 라파엘도 있다.

로벤 저놈을 살살 구슬려서 마을에 숨어 살고 있는 루너들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해가 곧 지겠군. 이곳에서 야영을 하겠다. 그런 다음 놈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내가 직접 놈을 심문할 것인즉."

"예, 대기사단장님."

그렇게만 된다면 칼루석 공급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나는 금방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후후후-.'

입 꼬리가 쉼 없이 씰룩이고 있었다.

* * *

"대장. 저 돌에 불이 붙는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멀리서 아슬란과 그의 기사단이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있던 자칼과 그의 부하들.

그들은 돌에 붙은 불꽃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니. 나도 몰랐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루너들도 모르는 일을 아슬란, 저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근데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보아하니 여기서 야영을 하려는 거 같은데, 그때 기회를 노려 부대장을 데려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습을 하면 저들도 당황해서 부대장이 도망쳤는지도 모를 겁니다."

"기습? 미쳤어? 너 방금 그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맞아. 잘못 기습했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저 거대한 트롤을 단칼에 죽여 버린 사람이잖아."

부하들의 두려움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슬란, 저자는 무척 위험한 자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졌고, 저자의 분노를 사게 된다면 그 불길이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번지게 된다.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기습은 이미 물 건나 갔고, 위험하지만 그래도 통하면 효과는 확실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딱 3명만 움직인다."

"고작 3명이요?"

"그래. 저들의 갑옷을 빼앗아 입은 뒤 기사단인 척 군영을 돌아다니며 로벤을 찾는다. 최대한 놈을 살리는 쪽으로 빼와야겠지만, 만약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죽여야겠지."

안타깝지만, 부하들도 동감하는 일이었다.

"그럼 간다."

"예."

자칼은 어둠 속에 몸을 맡기며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한창 야영지를 만드는 곳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기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푸슉-!

"음?"

"엇-."

보초병들은 자신의 목에 박힌 침을 확인하고는 눈을 껌뻑였다.

쿠웅-!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바닥에 하나 둘 쓰러졌다.

"서둘러라. 다른 이들이 보기 전에."

자칼은 그들의 몸을 끌고 와 빠르게 변복을 마친 뒤 군영 안으로 들어갔다.

야영지 설치가 거의 끝나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기사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

자칼과 그의 부하들은 티나지 않게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하며 걸었다.

그리고 눈으로는 로벤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다녔다.

"대장. 저기······."

얼마쯤 걸었을까.

부하 하나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기에 있군."

군영 가운데에 놓여 있는 간이 감옥.

누구든 감시가 가능하도록 천막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 로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로벤."

"······대장?"

"쯧. 멍청한 새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그런 로벤의 얼굴을 보니 괜시리 또 마음이 약해지는 자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로벤을 꺼내고 싶지만, 주변에 눈이 너무 많다.

이렇게 개방된 곳에서 감옥을 부숴 놓는다면 금방 저들이 알아차릴 터.

이를 어찌해야······.

"거기 너희 셋."

그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자칼은 몸을 흠칫 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슬란 옆에 줄곧 붙어 있던 기사단장이 있었다.

"마침 잘 됐구나."

"······?"

"그 안에 있는 죄인을 꺼내 오너라."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마법사가 손을 까닥이자 옥실에 잠금되어 있던 마법이 풀리면서 문이 열렸다.

"놈을 데리고 따라오너라."

"······예."

얼떨결에 호송을 맡게 된 자칼은 로벤 뒤에서 은밀히 속삭였다.

"몸 상태는 괜찮으냐?"

"보다시피 손에 마법으로 된 속박구가 걸려 있어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소."

탈출을 위해서 저 속박구를 먼저 풀어줘야겠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설마······.'

머지 않아 그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 군영에서 제일 큰 막사를 하고 있는 곳.

"대기사단장님. 아론입니다. 죄인을 데려왔습니다."

바로 아슬란이 있는 곳이었다.

곧 그의 둔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들어오너라."

"예."

자칼과 부하들은 당황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수가 없으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

사자의 눈을 닮은 아슬란이 옆으로 턱을 괸 채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엄청난 위세로구나.'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도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 거리고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자칼과 마찬가지로 부하들 역시 손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그와 눈을 마주친 자칼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

한동안 막사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로벤을 무릎 꿇리고 조금 뒤로 나와 있던 자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왜 날 계속 바라보고 있는 거지?'

아슬란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왠지 어디선가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아슬란은 그런 자칼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쥐새끼들이 숨어 들어왔었구나."

"!?"

설마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건가?

마치 그런 자칼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모른 척할 필요 없다. 감히 겁도 없이 내 군영 안으로 들어오다니. 간이 크구나."

그러자 기사들도 자칼과 그의 부하들을 바라보며 눈을 험악하게 부릅 떴다.

"이놈들!"

"너희는 누구냐!"

그들이 칼을 뽑아 겨누면서 자칼은 하는 수 없이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몸을 무겁게 만드는 갑옷들도 전부 풀어 헤쳤다.

"악의를 갖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동료를 구하러 왔을 뿐."

"······내 기사들의 옷을 빼앗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코 해치진 않았습니다. 모두 잠들어 있을 겁니다."

자칼은 정중하게 예를 차리며 청했다.

상대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저희를 보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우린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드립니다."

하지만 상대는,

"만약 거절한다면?"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칼 역시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저희를 쉬이 잡으실 수 없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속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로벤의 속박을 부순 다음 그를 데리고 달린다면 순식간에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있으리라.

"무례하다! 감히 대기사단장님께 그따위 말을!"

아론이 역정을 내며 칼끝을 세웠다.

자칼은 로벤의 뒷덜미를 붙잡고 서서히 다리를 예열시켰다.

빠른 속도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론."

"예."

"물러나 있거라."

"······예."

아슬란이 아론과 기사단을 뒤로 물렸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좋다. 너희를 보내주지."

정말?

정말 이렇게 쉽게?

"그러니 어디 갈 수 있으면 가보거라."

마지막 말이 뭔가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상대가 보내준다고 했으니, 그대로 빠져 나가기만 하면······.

"음?"

그런데,

"이, 이게 왜······."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로벤의 뒷덜미를 붙잡은 손부터 시작해 마치 온몸에 마비가 찾아온 것처럼 꿈쩍도 하질 않았다.

거기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자칼은 고개를 들어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여전한 자세로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슬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색깔이 서로 엉켜 번지는 것처럼,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동시에-.

쿠웅-!!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몸을 짓눌렀다.

"커헉!"

신음을 터트리며 자칼은 그대로 주저 앉았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다.

고동치던 심장이 말라비틀어져 가는 것만 같았고, 온몸에 있는 핏기가 전부 빠져 나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크악!"

"우욱-!"

그건 그의 부하들과 로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이한 점은 이들을 제외하고 다른 기사들은 전부 멀쩡하다는 것이다.

그들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그리고-.

"왜 아직도 그러고 있지?"

아슬란의 위압적인 음성이 사위를 갈랐다.

자칼은 쓰러진 자리에서 어렵사리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곳에는,

"보내 준다는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한 것이냐?"

싸늘한 눈동자로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60화

0.01초 소드마스터 60화

3, 2, 1.

정확히 15초가 흐르자,

"크어억!"

"크학-!"

저 네 명의 루너들이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혼돈의 피어에서 벗어난 그들은 얼굴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칼]

무력: 88

지력: 85

또 다른 네임드의 등장인가.

자칼은 루너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행동 대장이라 볼 수 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 우리는······."

그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항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건방지구나."

그런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내 기사들을 공격하고 죄인을 몰래 탈출시키려 한 놈들이 이제 와서 항복을 운운하는 것이냐?"

"그건······."

"거기다 네놈들은 아직 스스로의 정체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자칼이 대표로 나섰다.

"저희는 그저 보물 사냥꾼입니다."

예상대로 자칼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이해는 된다.

미쳤다고 나는 사실 악마의 피가 섞인 루너입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소문을 좇아 떠돌이처럼 떠돌아다니며 보물을 찾아다니는······."

저런 자칼의 말이 나의 허세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감히-"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눈을 부라렸다.

"내게 거짓을 고하다니."

그러자 자칼은 머리를 흔들며 강하게 부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난 너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허세가 뜨겁게 타오를 뿐이다.

"너희 몸에서 흐르는 악마의 피가 내 코를 찌르는구나."

"!?"

자칼과 그의 부하들은 흠칫거리며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그걸 어떻게······."

"그런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도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상대방이 루너인지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보랏빛 눈동자나 생김새를 통해 알아볼 수 있으나,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법 약물을 통해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육안으로 저자가 루너인지 아닌지를 자세히 알아낼 수 없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내가 저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네임드 캐릭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름 모를 캐릭터였다면 나도 뭣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난 너희 루너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루너?"

"루너라면······."

기사들은 생소한 루너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자칼과 그의 부하들은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다.

"내 너희를 딱하게 여겨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했으나, 기어코 너희가 먼저 나를 건드는구나."

나는 더욱 허장성세를 부렸다.

이것을 빌미로 잘 구슬린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히 나와 내 기사단을 모욕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콰직-!

자칼이 바닥에 균열이 일어날 정도로 세게 머리를 박았다.

'깜짝이야.'

나한테 공격이라도 날리는 줄 알았네.

병적인 허세가 없었다면 화들짝 놀라 의자 뒤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건 오롯이 제 독단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난 속으로 미소를 띠며 겉으로는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러니 제 죄를 다른 이들에게까지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자 그의 옆에 포박당해 있는 로벤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이건 대장의 잘못이 아닌, 제 잘못입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조용히 하고 있거라, 로벤!"

"대장!"

아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훈훈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난 이들의 목숨을 거두어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너희를 죽여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내가 원하는 건 이들의 목숨이 아닌, 바로 이 마을이 가진 노동력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루너들과 교류하여 이곳에서 열심히 채광하도록 만든다면 난 별도의 비용 소모 없이 막대한 부를 챙길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여기서 잘만 입을 놀린다면······.

[새로운 퀘스트를 얻으셨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루너들의 마을]

-칼루탄 마을의 촌장과 대화하여 그들의 사연을 들으십시오.

-보상으로 5골드를 얻습니다.

* * *

"확실히 루너가 다른 그릇들보다는 버티기가 수월하구나."

그릇을 옮겨가며 주변 몬스터들을 붙잡아 힘을 키우고 있던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트르는 최근에 우연찮게 붙잡은 루너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쓸모없는 몸뚱이라는 건 변함이 없군."

악마의 피가 흐르는 루너는 그릇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으나, 지금 얻은 몸뚱이는 그리 강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아 얼마 못 가 붕괴할 것 같았다.

"분명 어디선가 기이한 힘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찌릿 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었다.

그 근원지를 찾고자 키야르트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키에엑!"

"시끄럽다."

콰직-!

그렇게 눈에 띄는 몬스터들을 붙잡아 흡수하며 힘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이건······?"

방금 전 흡수한 몬스터에게서 흘러들어온 기억.

그건 바로,

"아슬란?"

아슬란에 대한 기억이었다.

"과연······."

그가 허공 위를 걸어 다니며 거대한 트롤의 몸을 반토막 내는 광경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하찮은 미물조차도 그 기억이 선명할 정도로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강렬했다.

"이만한 그릇이 또 없겠구나."

이번 기억으로 다시 한번 확신했다.

아슬란 그를 그릇으로 삼게 된다면 어마어마한 힘을 폭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크크. 아주 운이 좋구나. 네가 여기에 있었다니."

놈을 찾으러 일라이 왕국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주변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최대한 많은 힘을 키운 뒤에 놈을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럼 먼저-"

흡수한 루너의 기억을 따라 키야르트는 반인반마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위치를 알아냈다.

"불쾌하지만, 이 더러운 잡종들부터 먹어 치워야겠군."

키야르트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몸에서 넘쳐 흐르는 마기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이곳입니다."

나는 자칼을 따라 루너들이 사는 칼루탄 마을로 들어섰다.

자칼과 그의 부하들은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혹여 내가 해코지를 할까 두려운가?"

"아, 아닙니다."

"너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외부인을 들인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히 걱정될 만도 하겠지."

그냥 대화만 나눠도 5골드를 주는 미친 퀘스트.

걱정 마라.

진짜 딱 얘기만 나누고 갈 거니까.

"너희가 먼저 나를 적대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해라."

난 싸우기 싫거든.

"······."

"기, 기사단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주민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첫 이방인이기도 하고, 그 숫자도 많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 칼루탄 마을의 촌장,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에이든]

무력: 50

지력: 84

이 노년의 남성이 바로 이 마을의 촌장, 에이든이다.

겉보기에는 힘없고 쭈굴쭈굴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캐릭터의 별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데빌 헐크.'

루너들이 무서운 점이 바로 마기 폭주인데, 저 나약해 보이는 영감도 마기 폭주 하나로 헐크처럼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물론, 다 저렇게 강해지는 것은 아니고 특정 몇몇이 마기 폭주를 겪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중에서 에이든은 굉장히 강한 축이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마기 폭주할 일이 없으니까.'

본인의 의지로 폭주를 시키는 건 마기 제어라고 부른다.

마기 폭주는 본인의 의지가 아닌, 마기 중독에 의해 일어난다.

그래서 에이든을 무시하고 있다가 스토리 중후반쯤에 일어나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갑작스레 저 노인이 괴물로 변해 버려 끔살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다."

"예. 그 위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미리 자초지종을 들었던 에이든은 정중히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척박한 곳이라 대접해 드릴 것이 얼마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그들이 내게 내놓은 것은, 뭔가 마시면 안 될 거 같은 검은 찻물이 전부였다.

"네 부하들에게 얘기는 들었겠지."

"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헌데······. 대체 저희를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저희를 외형상으로 구분할 수 없으셨을 터인데······."

라파엘처럼 특정 종족의 루너라면 외형으로 충분히 구분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과 악마 사이에서 나온 루너는 마법 시약이 없으며 판별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나도 위에 떠 있는 이름을 보고 안 거라서 딱히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쓸데없이 많은 걸 알려고 들면 늘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지."

내가 가볍게 인상을 한번 써주자 에이든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그럼 이제 말해 보거라. 왜 내 일을 방해하면서까지 그 보석을 노렸던 거지?"

여기서 에이든의 자초지종을 듣기만 하면 퀘스트는 완료다.

그럼 나는 보상을 챙기고, 나한테 잘못한 게 있으니 그것을 빌미로 채광도 시키면 여기서의 할 일은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칼투탄 영역 끝자락에서 마기에 오염된 땅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잘못 발을 들였다가 마기가 폭주하여 목숨을 잃은 자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마기에 오염된 땅?

벌써 그런 게 나오고 있다는 건가?

"지금은 통행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마기 중독이 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중이고, 점점 그 영역이 넓어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마을까지 위험한 수준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염된 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건 테키나 족속이 곧 미친 듯이 들고 일어날 거라는 징조였다.

문제는 이게 아직 스토리 초반인데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는데.'

괜히 잘못 걸렸다가는 우리 기사단이 크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비록 지금 마기 훈련을 하고 있다지만, 얼마 하지도 않은 상태로 마기를 버티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어서 할 일을 하고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 같았다.

"하여 저희 선조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의식을 통해 오염된 땅을 조금이나마 정화시키는 것이 저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석을 노렸던 것인가?"

"예. '란느'라고 불리는 아주 귀한 보석입니다. 마기를 잠잠하게 하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몬스터들이 워낙 그 절벽에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지금까지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고요."

그러다 필요한 때가 생겼고, 공교롭게도 나와 동선이 겹쳤다는 것이다.

에이든은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부하들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랬군. 그렇다면 너희를 탓할 생각은 없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언제까지 음지에 머무를 생각이지?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너희도 숨어 살기보다는 이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때도 되지 않았나?"

그 말에 에이든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만약 저희 몸에 섞인 피가 악마의 것이라는 걸 안다면 온 왕국이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저희를 멸시할 것이며, 탄압하려 들 게 분명합니다."

그런 그의 말이 트리거가 되었던 것일까.

잠자코 있던 허세가 전율을 일으키며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든. 내 눈을 보거라."

"예?"

"내 눈빛에서 멸시가 보이는가?"

"······."

"내가 너를 악마로 보고 있는가?"

에이든은 말없이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난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단 한번도 너희를 악마로 보지 않았다. 어떤 경멸 어린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봤을 뿐."

"아슬란님이 저희를 그렇게 보고 있으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시선을 만드는 건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가 스스로를 악마로 정의한다면 그들은 너희를 악마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그들도 너희를 인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저, 정말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끓어 오르던 허세가 마침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가능하다. 나 아슬란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너희를 악마로 정의하고 대적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나를 믿어라."

누가 들어도 사기꾼이나 할 법한 개소리였다.

그러나 에이든은,

"아, 아슬란님."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저희를 그렇게까지······."

그거야 당연히 채광 때문이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

에이든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 완료창이 뜨면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게 떴다는 건 에이든의 마음이 내게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채광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는 건데······.

'문제는 마기에 오염된 땅인데.'

그걸 가만 놔두면 역병처럼 번질 게 뻔하고, 그것 해결하자니 꽤 까다롭고.

'어쩔 수 없이 신전 놈들을 불러야 하나.'

레이어스 교단과 가급적이면 엮이고 싶지 않으나 이번에는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안정적인 채광을 위해서라도 불안 요소를 없애야 하지 않은가.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저는······."

바로 그때였다.

"대기사단장님! 아론입니다!"

밖에서 아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

그는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대기사단장님. 밖에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폭풍 같은 것이······."

검은 폭풍?

나는 아론의 뒤를 따라 서둘러 밖을 나가 보았다.

"우으으-"

"저, 저게 대체 뭐야?"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기사단 역시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검은 모래 폭풍 같은 것에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저거 설마······.'

난 저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키야르트?!'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르트.

그가 일으키는 마기 폭풍이 딱 저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새로운 퀘스트를 얻으셨습니다.]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르트를 물리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말도 안 돼.

키야르트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그때 자스트라 숲에서 잠깐 열렸던 봉인의 틈으로 정말 키야르트가 나왔던 것일까?

"저, 저걸 보십시오!"

검은 폭풍이 곧 흉측한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키야르트의 생김새를 따라 마기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것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슬란-"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61화

0.01초 소드마스터 61화

"마, 마기 폭풍이다!"

시커먼 연기를 몰고 오는 폭풍.

닿는 것을 타락시키고 굴복시키며, 종국에는 그것을 완전히 통제하기에 이른다.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르트가 무서운 건 놈이 다루는 마기에 중독되면 놈에게 조종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놈의 특징이 육체를 바꾸는 거였지.'

놈을 육신을 파괴해도, 그 안에 있는 영혼을 쪼개지 않으면 놈은 끝까지 여러 몸을 넘나들며 살아남는다.

그래서 키야르트를 죽이기 위해서는 놈이 파괴된 육신에서 빠져나올 때 봉인구로 영혼을 빨아들여 그 안에 가둬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놈의 육신을 파괴하는 것도 어렵지만, 저 영혼을 담을 만한 봉인구가 없잖아.'

더군다나 놈이 이끌고 오고 있는 저 검은 안개에 닿게 되면 여기서 과연 얼마나 버틸지도 의문이었다.

'루너들은 괜찮겠지만-'

악마의 피가 흐르는 루너들은 어느 정도 마기에 저항이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기사단은 제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루너들 역시 마기에 오래 노출되면 폭주 상태가 돼서 오히려 더 골치 아파진다.

'지금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최악의 적을 만났구나.'

마기에 저항하는 마법도, 장비도, 심지어 훈련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저런 놈을 만나다니.

'차라리 놈의 육신을 파괴한 다음에 그 영혼을 라파엘 몸 안에 넣어 놓는다면?'

라파엘도 루너이고, 강한 마력을 다스리는 마법사이니 키야르트의 영혼을 자신의 몸에 잘 봉인해 둘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으로 라파엘이 먹혀 버린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마법사의 그릇을 키야르트가 얻게 된 꼴이니, 그건 더 큰일이었다.

'시발.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이건 방법이 없었다.

공들여 키워 놓은 기사단을 이곳에서 몰살시킬 순 없지 않은가.

"키야르트. 저 악마가 나타나다니. 이럴 수가······."

에이든은 키야르트를 알고 있는 듯했다.

"저희 루너들에게도 여러 악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키야트르입니다. 지독한 마기로 상대를 중독시키고, 같은 악마들까지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악명 높은 악마라고 들었습니다."

그 역시 절대 상대해서는 안 되는 악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만히 있다가는 저 마기에 휩쓸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피해야 합니다만······."

그런데 그는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말했다.

"빛의 기사라고 불리시는 아슬란님께서 이곳에 계시니, 만약 당신이 싸우겠다고 하신다면 저희도 끝까지 남아 싸워 보겠습니다."

"······?"

"아까 아슬란님의 말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이 늙은이 가슴에 불이 일었습니다. 더 이상 음지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는 당신의 말에 깨닫는 바가 많았지요."

뭐, 뭐라는 거야, 이 영감이.

" 저도 당신과 함께 싸워 스스로 증명해 내겠습니다. 우리는 악마를 대적하는 인간임을!"

이 스노우볼이 이렇게 흘러간다고?

이 영감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싸우면 우린 키야르트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그러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저 마기 폭풍이 닿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나가야 하는 것이 맞았지만-

"그 선택."

병적인 허세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저 영감은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갑자기 혼자 흥분해 가지고.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죽는다.'

난 아직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끓어 오르는 허세를 필사적으로 짓눌렀다.

그것이 더는 날뛰지 못하게 저 밑바닥까지 꾹꾹 누르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싸우는 건 현명한······."

바로 그때였다.

"대기사단장님!"

"촌장님!"

우리 둘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뒤, 뒤에서도 옵니다!"

"옆에서도 오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마기 폭풍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야.'

한 방향으로 오는 것이 아닌, 그 어디로도 피할 수 없도록 네 방향에서 몰아치는 마기 폭풍!

지금까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수없이 키야트르를 잡아봤지만, 단 한번도 이런 패턴을 만난 적은 없었다.

자고로 게임이라는 건 어느 정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줘야 플레이어는 그것으로 퍼즐을 맞추듯 보스의 패턴을 파훼한다.

그것이 게임의 재미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것처럼, 절대 클리어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처럼 사방에서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모두 제 쪽으로 모이세요!"

이 마기 폭풍은 피할 수 없다고 직감했는지, 라파엘이 큰 목소리로 소리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법 병단과 함께 넓은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아-

화산재가 내려오듯이,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사방을 덮치고, 방어막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게 만들었다.

"······."

모두 긴장하며 방어막 안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필멸자들이여."

저 위에서 키야르트의 목소리가 사악하게 울려 퍼졌다.

"나 키야트르가 오늘 너희를 구원해 주겠노라. 그 족쇄에 불과한 육신에서 나와 이 어둠 속에서 영원한 삶을 살리라!"

그러고는 하늘에서 검은 발톱 같은 것이 떨어지며 라파엘이 펼친 방어막을 공격했다.

콰콱-!

"노력은 가상하다만, 고작 이런 걸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방어막이 너무 넓었던 탓일까.

아니면 키야르트의 마법이 터무니없이 강한 탓일까.

놈의 공격에 의해 방어막에 균열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콰직-!!

완전히 깨져 버리고 말았다.

"으헉!"

"마, 마기가!"

안으로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한 마기는 독가스처럼 퍼져 나갔다.

"크헉!"

"우웁-!"

기사들은 살면서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지독한 마기에 모두 바닥에 쓰러지며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루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마기에 저항력이 있지만, 키야르트의 검은 안개는 저들 안에 흐르는 악마의 피를 자극하여 폭주에 이르게 만들어 버린다.

"크아악!"

"으아아악!!"

처음에는 마기에 닿아도 괜찮았던 그들은 곧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윽고,

'미, 미친!'

뿌연 마기가 내게도 닿았다.

"······!"

어마어마한 고통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저번에 겪었던 마기 가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강도의 마기였다.

화생방 훈련은 애들 장난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고 싶었지만-

"······."

이 정신병자 같은 허세는 내 몸을 꼿꼿하게 세웠고, 감히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게 했다.

온몸에 핏줄이 곤두서고, 마기에 의해 그것들이 검게 변하여도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루너인 저희조차도 이리 버티기가 힘든데, 표정 변화 한번 없으시군요. 아슬란님께는 마기가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무슨 소리야.

지금 뒤질 거 같은데.

이 허세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마기에 중독되어 죽을 것 같았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심하구나."

하지만 곧 죽어도 이놈의 허세는 끝까지 입을 나불댔다.

"고작 이 정도의 마기도 버티지 못해서야."

스르릉-!

나는 천천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로 들어 아래로 가볍게 휘두르자,

콰아아아-!!

저번 훈련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검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풍압이 사방에 퍼져 있던 마기를 날려 버렸다.

"으, 으어어!"

"으악!"

그 강한 바람에 못 이겨 기사들과 주민들이 함께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마, 마기가 전부 사라졌다."

당황하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

검은 근두운 같은 것을 타고 저 위에서 한창 똥폼을 잡고 있던 키야르트 역시 당혹감 어린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무, 무지막지한 놈이로군. 칼을 휘두르는 힘으로 마기를 물러나게 만들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키야르트가 아니었다.

"흩어진 마기는 금방 다시 모이게 될 것이다."

놈의 말대로 내가 일으킨 풍압에 휩쓸려 간 마기들이 다시 스멀스멀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잠깐의 여유를 만든 덕분에,

"지금이다!!"

자칼과 로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키야르트를 향해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콰득-! 퍼억-!

몸에 여러 개의 칼날이 박힌 채 키야르트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어라!"

푸욱-!

자칼이 확인 사살을 위해 놈의 심부에 칼을 꽂고 비틀었지만,

"크흐흐. 잡종들 주제에 제법이구나. 마음에 들었다."

저것만으로는 키야르트를 잡을 수 없다.

놈은 검은 영체로 그릇에서 나와 포효했다.

"크악-!"

"컥-!"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의해 자칼과 그의 부하들이 사방으로 밀려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 키야르트는 절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놈은 이제 새로운 그릇을 찾으려 들었다.

원래 공략대로라면 저놈이 떠벌리듯이 대사를 늘어놓을 때 특별 제작된 봉인구에 집어넣어야 한다.

만약 그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이제 나의 새로운 그릇이 되어라."

저렇게 새 육신을 갖기 위해 튀어 나간다.

"대, 대장!"

그리고 이번에 놈이 고른 새로운 그릇은 바로 자칼이었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난 자칼은 코앞까지 다가온 키야르트의 영체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안 된다, 이놈!"

언제 저기까지 뛰어갔는지 모를 에이든이 날아오는 영체를 제 몸으로 막아 세웠다.

"초, 촌장님!"

"촌장님!!"

키야르트의 영체를 삼키게 된 에이든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을 보고 주민들이 뛰어갔다.

난 그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거라!"

"······예? 하지만 촌장님께서-"

"그는 더 이상 너희가 알고 있는 촌장이 아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크흐흐흐-"

에이든의 몸에서 키야르트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외의 수확이로군. 이 늙은이 몸뚱이, 생각보다 쓸 만하지 않은가?"

"초, 촌장······님?"

콰직-!

에이든이 뻗은 손아귀에 그를 부르던 주민의 머리가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히, 히익!"

하여튼 저 영감탱이가 그냥 가만 있을 것이지, 자기가 일을 더 키우는구나.

차라리 자칼이면 모를까.

하필이면 에이든의 몸을 가지게 되다니.

"느껴진다. 이 안에 담긴 강렬한 힘이!"

키야르트에게 지배당하기 시작한 에이든의 몸이 데빌 헐크라는 그 별명에 걸맞게 몸이 우락부락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놈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슬란."

바로 나였다.

'이놈들은 왜 자꾸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쿵쿵쿵-!!

키야르트가 땅을 울리며 내게 달려왔다. 그런 뒤 번쩍 날아오르더니, 주먹을 뻗으며 내 위로 낙하했다.

"아슬란!!"

콰아아앙-!!

놈의 주먹은 내가 펼친 수호신의 방패에 의해 막혔다.

"이 정도 방어막으로는 날 막을 수······. 음?"

퍽! 소리와 함께 놈의 큼지막한 주먹이 찌그러지면서 팔도 함께 부러진 듯 축 늘어졌다.

"······?"

키야르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늘어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튀어 오른 허세에 나는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그따위 힘으로 무엇을 부수겠다는 것이냐?"

그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키야르트는 마구 주먹과 발을 날려댔다.

콰앙-! 콰아앙-!!

그러나 놈의 공격은 방어막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키야르트의 팔다리만 부러지고 핏줄이 터지면서 힘없이 쓰러질 뿐이었다.

"인간 따위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군."

그와 동시에 수호신의 방패가 사라졌다.

15초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찰나의 괴력도 이미 써버렸고, 쿨타임을 초기화해 방패도 써버렸으니,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키야르트가 무리를 해 준 덕분에 에이든의 몸으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쓸모없는 몸뚱이는 이제 버려야겠군."

진짜 문제는,

고오오오-!

에이든에게서 빠져나온 키야르트의 영체가 새로운 그릇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방어막을 치우다니. 어리석은 놈!"

그리고 영체는 빠른 속도로 내게 치달았다.

'아-!'

차마 반응을 하기도 전에 영체는 벌써 내 몸과 충돌했다.

"대기사단장님!!"

"아슬란님!"

키야르트의 마기가 내 몸을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피가 검게 변하고 내 모습조차도 그의 흉측한 몰골을 닮아가는 것처럼 그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제 네 몸은 나의 것이다, 아슬란.]

내 머릿속에 울리는 악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네가 가진 모든 힘은 이제 나의······아니?]

그런데 오만방자한 키야르트의 목소리가 멎었다.

나를 장악하던 검은 기운 역시 그 멈출 줄 모르던 행진을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감히-"

발밑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강렬한 허세가 불길처럼 타오르며 내 몸을 장악하려 드는 마기를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의 몸을 갖는다는 것이냐?"

키야르트의 당황한 목소리도 함께 울렸다.

[무, 무엇이냐. 이 몸은? 왜 통제가 되지 않는 거지?]

놈의 마기는 그 어떤 것도 굴복시킬 만큼 지독했지만,

"어리석구나. 키야르트여."

그 어떤 약으로도, 그 어떤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이 병적인 허세를 끝끝내 몰아내지 못했다.

"나 아슬란을 정녕 네가 지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몸 전체에 가득 차오른 허세는 이미 키야르트의 모든 마기를 집어삼켜 버렸다.

놈이 발버둥을 치고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 대체 이 몸은 뭐란 말이냐? 그 넘치던 힘은 어디 가고 이런 빈 껍데기만······!]

이제야 깨달은 건가.

스킬을 다 써 버린 아슬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몸뚱이라는 것을.

하지만 빈 껍데기는 아니었다.

[이 말도 안 되게 거대한 혼은 또 무엇이냐?]

키야르트는 곧 마주할 수 있었다.

[드래곤도 이보다 강한 혼을 지니지는 않았다.]

내 몸에 가득한 허세를 말이다.

[이 정도로 광기 가득한 혼이라니······! 넌 어떻게 이런 끔찍한 걸 품고 살 수가 있는 거지?]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이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파도처럼 밀려오는 허세의 쓰나미를 바라보고 있는 키야르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키야르트."

[!?]

"그러니 그곳에서 어디 한번 견뎌 보거라."

그것은 곧 키야르트의 턱밑까지 차올라,

"내가 하루에도 백 번은 더 고통받는 이 아슬란의 허세를."

[아, 안 돼! 으아아악!]

마침내 저 깊은 밑바닥으로 수장시켜 버렸다.

"······."

그리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 완료창과 함께 다른 무언가가 나타났다.

[새로운 패시브 능력을 획득하셨습니다.]

62화

0.01초 소드마스터 62화

"······."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마기도, 놈이 발버둥치던 것도, 그 사악한 목소리도.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듯, 모든 게 고요해졌다.

그저 허세의 파도가 잔잔하게 내 안에서 넘실거릴 뿐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드디어 끝났구나.'

······라는 말을 하면 안 됐었다.

"!?"

고요하게 넘실 거리기만 하던 파도가 다시 거칠게 요동쳤다.

내 속에서 완전히 수장되었다고 생각한 악마의 기운이 용솟음치며 그 위를 뚫고 올라왔다.

설마 놈이 죽지 않았던 건가?

[새로운 패시브 능력을 획득하셨습니다.]

"······?"

뭐야. 이건.

[마기 포식자]

-마기의 핵을 흡수할 수 있게 됩니다.

-마기에 완전한 저항력을 얻습니다.

-이제 모든 공격을 어둠 속성으로 변환이 가능합니다.

-성속성을 가진 상대에게 200%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마기 포식자?!

포식자라는 능력은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상대를 먹어 치워 가진 능력을 빼앗는 것인데, 마기 포식자는 처음 들어봤다.

'키야르트를 흡수하면 얻을 수 있는 히든 능력이었나?'

이 게임에는 히든 스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하도 게임이 고여서 이제 모든 히든 스킬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못 찾은 것들이 있었구나.'

마기 포식자가 바로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찾는 방법이 키야르트를 몸에 흡수하는 거잖아.'

키야르트를 공략하는 방법은 마법 봉인구를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없다면 영혼을 쪼개는 마법으로 그를 죽이거나, 아니면 그를 영원히 봉인시킬 수 있는 육체에 넣어 두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영혼을 받아들인 육체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종국에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신성력을 바탕으로 정화 작업을 꾸준히 해주지 않으면 사실상 육신에 영원히 봉인해 두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내가 그걸 해냈단 말이지.'

사람의 정신을 미치게 하고 그 몸을 통제하는 지독한 악마라도 아슬란의 허세를 이길 순 없었다.

'미친.'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대체 이 몸은 얼마나 허세에 절여 있는 거냐.

저 키야르트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수장될 정도라니.

"아, 아슬란님."

"대기사단장님!"

"괘, 괜찮으신 겁니까?"

기사단과 주민들이 내 곁으로 모여 들었다.

"헉!"

"대, 대기사단장님! 모, 몸이!"

그때 갑자기 내 몸에서 검은 불길 같은 것이 일어났다.

이건 누가 봐도 마기였다.

"마, 마기다!"

"안에 들어간 악마 때문인가!?"

그러자 잠잠하던 허세의 물결이 다시 거친 파도가 되어 몰아쳤다.

"호들갑 떨지 마라."

"······."

나는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속성을 어둠에서 빛으로 변경시켰다.

"오오-."

"이, 이건······!"

기사들은 놀라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루너들은 나를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 아슬란님."

키야르트의 속박에서 벗어난 에이든은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키, 키야르트는······."

"놈은 이미 소멸되었다."

"······그렇군요."

의외로 그는 쉽게 납득해버렸다.

"역시 그 무시무시한 악마라도 아슬란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몸부터 얼른 치료를 받도록."

"예. 저희가 당신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꼭 그래야 한다.

여기서 너희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거든.

"감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당신이 우리를 구했습니다."

내게 몰려드는 칼루탄 마을의 주민들.

그들이 건네는 감사 인사에,

"너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강렬한 허세가 더욱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너희가 악마의 피를 받았다고 해서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다르다는 것을, 악마의 힘이 너희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온 대륙에게 보이거라."

"그, 그게 가능할까."

"신전에서 우리를 탄압하면······."

그들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이 표출하는 두려움은 곧 허세의 연료가 되었다.

"너희를 배척하는 것은 곧 나 아슬란을 배척하는 일이다. 너희의 적은 나의 적이며, 너희의 아군은 곧 나의 아군이다."

나는 사방에 모여든 주민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면 나를 의지하거라.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도 너희 스스로를 포기하지 마라."

나를 위해, 나의 막대한 부를 위해, 나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싸워라. 끈질기게 버텨내라. 그럼 이 마을에 무궁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며, 너희 선조들도 누려 보지 못한 무한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허세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주민들 모두가 손을 높이 들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