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와아아-!!"
"오오오-!!"
이 척박한 황무지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사단도 그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피가 절로 들끓게 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
라파엘은 저 가운데에 우뚝 서서 붉은 망토를 휘날리고 있는 아슬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 저분은······. 다르구나.'
악마의 피가 섞인 자들이다.
저주받은 족속이라 불리며 모든 종족이 배척하는 악마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라파엘 본인 역시 그 역겨운 피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아슬란은 저들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대해 주고 있었다.
저들이 언제 폭주하여 악마로 변할지 모르는데도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정말 저들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거야.'
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들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저들을 받아들였다.
하나의 인격체로, 하나의 종족으로 인정해 주면서 말이다.
'정말 다행이야.'
라파엘은 저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저들이 잘 되기를 바랐다.
만약 아슬란이 아니라 다른 왕국이 먼저 저들을 발견했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역시 저분 밑으로 들어가기 잘했어.'
이번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뽑으라면 아슬란의 마법사가 된 것이었다.
저 잘생기고 화려한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것 역시 매번 직업 만족도를 높여 주었다.
"라파엘."
"······에? 아, 네!"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느새 아슬란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항상 그랬듯,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무슨 흉계라도 꾸미고 있었느냐?"
"휴, 휴, 흉계라니요! 무, 무슨 소리를······!"
라파엘은 어느새 자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슬란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그러고는 그녀를 지나치며 말했다.
"방금 전 저들에게 했던 말은, 너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네?"
"난 너를 믿고 있다, 라파엘."
"!?"
그 말을 남긴 뒤, 아슬란은 화려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멀어졌다.
라파엘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왜인지 저 망토가 바람도 없이 펄럭일 때마다 성스러운 빛이 번쩍이는 것처럼 보였다.
* * *
"요즘 불쾌한 소문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불쾌한 소문?"
"예. 아슬란에 대한 소문 말입니다."
또 아슬란인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게 아니라, 잊을 새도 없이 계속 그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칼루탄에 있는 루너들을 우리가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루너들.
어떤 이유에서인지 엘티히가 크게 진노하여 그들을 한 차례 쓸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는 더더욱 세력이 약해져 현재는 마을 하나를 이루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신전도 구태여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딱히 지금 그들을 척살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아슬란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부정한 놈들과 손을 잡다니!"
"아슬란 그자는 이단이 확실하오!"
요즘 교단 분위기는 계속 이랬다.
아슬란을 계속해서 이단으로 몰아가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달까.
참다못한 하리엘이 입을 열었다.
"아슬란은 지금까지 여러 악마를 처치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자스트라 숲에서도 그렇고, 칼루탄에서도 키야르트를 무찔렀다는 정보도 분명 함께 전달해 드렸을 텐데요?"
그러자 교단의 장로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하리엘, 자네 눈으로 직접 봤나?"
"그건······."
"난 솔직히 우리 교단의 정보력을 의심하는 중이네. 뜬금없이 테키나 족속이 다시 나타나지를 않나, 오랜 역사 속에 파묻힌 전설적인 악마가 튀어나오지를 않나. 이건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이들은 작금의 사태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키야르트 같은 악명 높은 악마가 봉인을 깨고 나타났다가 아슬란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것 역시 믿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키야르트는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죽어도 끝없이 육체를 옮겨 다니며 부활을 하기 때문이지. 그런 그를 아슬란이 죽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거기다 그놈은 우리 교단의 요청을 매번 거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히 교단의 뜻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반드시 놈을 신의 이름으로 벌해야 합니다. 라할이 선택한 빛의 기사라니! 신앙심도 없는 자에게 이게 가당키나 한 호칭입니까?"
아니. 과연 믿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을 하는 것일까.
요즘 들어 하리엘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로님들은 어쩌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어쩌기는. 당연히 신의 이름으로 심판을 해야지!"
"그 오만방자한 놈은 라할과 교단을 모독하고 있다. 마땅히 이에 대한 처결을 내려야겠지."
이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아슬란을 탄압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그를 못 죽여서 안달인 것일까.
질투심? 아니면······.
"대체 누가 그를 벌한단 말이오? 이미 한 차례 로엔과 성기사들을 그곳에 보내봤지만, 그들은 오히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혼비백산하여 교단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소이다."
제사장 이스마엘의 말에 장로들은 헛기침을 터트렸다.
사실 그 일은 이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로엔을 교단의 대표로 일라이 왕국에 보낸 건, 싸움을 좋아하고 어떤 강자라도 그 괴팍한 성격을 숨기지 않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슬란을 마주하고 나서 겁에 질린 얼굴로 교단에 돌아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성기사단 역시 아슬란의 이름만 들어도 발작을 할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우리 교단에서는 아슬란을 직접 상대하려는 자가 없소. 성기사단 역시 모두 겁을 먹어 아슬란과의 싸움을 두려워하고 있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처단하겠다는 것이오?"
"······."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 그는 엘프와도 교역을 열기 시작했고, 호드와 루너들. 거기다 타 왕국과도 점점 관계를 넓혀가고 있소. 특히 엘버스테인이 통치하고 있는 오메르 왕국은 거의 그를 숭배하고 있지. 아슬란과 전쟁을 하겠다는 건, 그들 모두를 상대하겠다는 뜻이오."
더 이상 일라이 왕국은 최약체가 아니었다.
아슬란의 활약으로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아슬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명분도 필요하거니와, 그와 힘을 합치고 있는 종족과 왕국들도 상대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 우리 교단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봅시다. 만약 그가 우리의 소환에 응하고 협력을 해준다면 우리도 그를 배척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느 장로의 말에 이스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그 의견에 따라 이번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보지.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이스마엘의 시선에 닿는 곳에 하리엘이 있었다.
"그대가 다녀오도록 하게. 아슬란과는 친분이 좀 있지 않은가?"
장로들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하리엘 역시 군말 없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예. 제가 직접 가서 그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리 대답한 뒤 신전을 나서는 하리엘은,
"흐음."
평소보다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무겁고 진중한 일로 가는 것인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왜인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를 만나러 간다.
그러다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얼굴을 매만졌다.
왜인지 전보다 피부가 푸석푸석한 느낌이다.
"조, 조금 꾸미고 가야 하나······."
살면서 처음으로 외모 고민을 하게 된 하리엘이었다.
63화
0.01초 소드마스터 63화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온 나는 이번에 새로 생긴 능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기 포식자]
-마기의 핵을 흡수할 수 있게 됩니다.
-마기에 완전한 저항력을 얻습니다.
-이제 모든 공격을 어둠 속성으로 변환이 가능합니다.
-성속성을 가진 상대에게 200%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흐음"
스펙업을 할 방법이 하나 더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문제는,
"악마를 잡아야 된다는 거네?"
그 방법이 무척 괴랄하고 힘들다는 점이었다.
"이번에야 운 좋게 키야르트를 잡았다고 해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도 지금처럼 운이 좋을 수 있을까?
"하아- 하필이면 마기 포식이냐."
그냥 일반 포식 스킬이었다면 자잘한 것들부터 차근차근 먹어 치우며 힘을 키웠을 텐데, 이건 무조건 악마를 잡아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래. 쉽게 꿀을 빨 수 있게 해 줄 리 없지."
이 극악 난이도에서 사실 이런 히든 패시브 능력을 찾아낸 것도 기적이었다.
"작은 것들부터 시범 삼아 잡아 봐야 하나."
네임드급이 아니고 아론, 알렉산더, 그리고 라파엘 선에서 정리가 가능한 놈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세 명이 악마를 처리하고 전리품은 내가 갖는, 아주 공평한 방법이었다.
"그럼 정보가 필수적이라는 건데."
어디서 악마가 출몰하고 있는지, 어느 구역이 마기에 오염이 되었는지 등등.
악마와 관련된 정보를 얻어야 그곳으로 가서 이 능력을 쓸 것인지, 아니면 방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정보를 얻지?"
일라이 왕국으로는 정보를 얻는 데에 한계가 있다.
당장 우리 구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마당에 외부 정보까지 다루는 건 역시 어려웠다.
"샤를렌 가문에 한번 연락을 넣어 봐야 하나."
우리 왕국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있는 나의 소중한 돈주머니, 샤를렌.
그러나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으려면 막대한 돈을 내야 한다. 심지어 악마와 관련된 정보는 가격이 뻥튀기 돼서 더욱 비쌌다.
"쓰읍-. 그냥 자력으로 알아내는 수밖에."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이 게임을 많이, 그것도 너무 많이 플레이 해봤다는 것이다.
"네임드급 악마 놈들이 어디 쪽에서 나타나는지는 대충 알고 있고······"
그곳들은 알아서 피해 가면 되고 그 외 게임을 플레이 할 때마다 가장 먼저 마기에 오염 당해 땅이 변질 되어 버리는 곳들을 몇 군데 체크해 놓았다.
"그래. 여기도 항상 마기로 오염되어 있어서 건너갈 때 빡치긴 했어."
내가 유독 이걸 잘 기억하고 있는 건 맵을 이동할 때마다 마기에 오염된 구역을 만나면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았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을 하기 전 어디가 마기 구역인지 미리 체크하고 가는 습관이 생겼었다.
이건 아마 이 게임을 플레이 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그리 할 것이다.
"그럼 가장 가까운 곳은 여긴가."
검의 왕국 '만'의 국경선과 연결되어 있는 통로.
또 '만', 그놈들이냐.
"자스트라 숲 주변에서 처음 키야르트가 나타났었으니깐."
그놈이 마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놈에 의해 오염된 구역들이 있을 것이다.
"아님 말고."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그러자 기사 하나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지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이 주변으로 정찰병들을 보내거라. 숫자가 몇이든 상관없다. 이 근방을 빠른 시간 내에 확인할 수 있으면 된다."
"예! 그대로 기사단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명령을 받들어 기사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 * *
"여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구나."
소수의 인원으로 교단을 대표해 일라이 왕국에 찾아온 하리엘.
그녀는 저번과 확연히 달라진 왕국 모습에 감탄을 터트렸다.
허름했던 성벽은 이제 쉽사리 뚫을 수 없을 만큼 위용 있게 보수가 되었고, 그 높이도 달라졌다.
또한 거리를 지나다니는 백성들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으며, 거리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 중에서 가장 대도시로 불리는 칼라 왕국의 수도보다 여기가 훨씬 더 관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바로 아슬란이다! 나를 따르라!"
"악마들을 다 죽여라!"
거리에 목검을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신나게 기사 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시 중앙에는 큰 분수대가 있었는데, 그 주변에서 연인들이 해맑게 웃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고, 상인, 용병, 모험가 등등.
도시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모든 게 다 아슬란님 덕분입니다."
"그분께서 매번 도시를 순찰해 주신 덕분에 치안도 엄청 좋아졌어요."
"저희 모두 아슬란님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허허."
왕국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서는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 물어보면 된다고 했던가. 그들은 전부 아슬란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는 권력가라니.
다른 왕국에서는 감히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리엘 님. 저, 저쪽을 봐보세요."
"음?"
타샤가 가리키는 곳에는 놀랍게도 엘프가 상점을 열고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엘프가 인간의 도시에 나와 상점을 여는 날이 오다니······."
"그 옆에도 보세요. 저거 호드 아니에요?"
엘프 상점에 이어 그 옆에는 덩치 큰 호드가 자스트라 숲에서 가져온 고기들을 판매하는 중이었다.
"와. 진짜 줄 긴 거 봐."
"엘프는 아무래도 포션을 파는 모양입니다."
"엘프가 만든 포션은 최상급이라고 했는데······."
타샤와 에길론이 나누는 얘기를 들으며 호기심에 다가가 봤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 뭔가를 구경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여긴 다음에 와봐야겠구나."
"으으. 꼭 한 병 사갈 겁니다. 언제 또 여길 올지 알 수 없으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키루우우-!!"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우며 위협적인 울음 소리가 들렸다.
"모, 몬스터!?"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몬스터의 습격에 주민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와아-!"
"키루다!"
"키루우우-!"
몬스터가 사뿐히 내려앉자 방금 전까지 기사 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몬스터의 머리와 부리를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키루. 이거 가져왔어. 먹어."
"키루-!"
몬스터는 아이들이 주는 음식을 열심히 주워 먹었다.
그 모습에 주민들도 다가와 음식을 내주었다.
"키루. 앞으로도 대기사단장님을 잘 지켜드려야 한다?"
"키루우~!"
주민들에게 둘러 싸여 음식을 받아 먹고 있는 몬스터를 하리엘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게 그······사파이어 자쿤이구나."
교단에 들어온 기이한 정보 중 하나가 바로 사파이어 자쿤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슬란이 그 귀하고 보기 힘들다는 사파이어 자쿤을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정보라 다들 믿지 않았는데, 오늘 그 몬스터의 존재를 확인했다. 거기다 여기 주민들과 매우 친한 것인지 이들도 전혀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자쿤은 엄청 난폭한 몬스터라고 알고 있는데······."
타샤와 에길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긴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도시였다.
"키루?"
그런데 그때 몬스터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갑자기 먹던 음식을 제쳐 두고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엇. 하리엘님. 저쪽을 봐보세요!"
사파이어 자쿤이 날아가는 곳에는 기사단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론가 급히 가는지, 빠르게 말을 몰며 성문 밖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아슬란?"
바로 아슬란이 있었다.
* * *
검의 왕국 '만'의 대기사단장, 크라엘.
자스트라 숲에서의 일이 있은 뒤 크라엘은 키엔과 라이에르의 대기사단장직을 박탈해 버렸다.
무단으로 기사단을 움직인 것에 모자라 국경을 침범해 일라이 왕국과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간 이유였다.
그 당시 키엔은 큰 부상을 당해 선택권이 없었고, 라이에르 역시 군말 하지 않고 크라엘의 뜻에 따랐다.
"대체 이건 무엇이냐?"
그렇게 후방을 키엔과 라이에르에게 맡기고 국경 근처는 크라엘이 맡았다.
대기사단장의 직책으로 맡기에는 너무 하찮은 일 같았지만, 지금처럼 대륙이 격변하고 있는 시기에 언제 어디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크라엘은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아슬란이 있는 일라이 왕국에 거의 모든 신경을 쏟아 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언제 이런 것이······."
기사들의 기이한 보고를 받고 도착한 곳은 일라이 왕국의 국경선과 연결된 긴 통로였다.
분명 며칠 전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곳이었건만.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변해 버렸다.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숲이 검게 변하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하였느냐?"
"예. 일라이 왕국 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은 이후부터 점점 숲이 검게 변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완전히 통로 전체가 변해 버렸습니다."
일라이 왕국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것인가?
혹시 아슬란의 흉계?
"으음."
아니. 저번에 자스트라 숲에서 만나봤을 때 아슬란은 직접 칼을 들고 국경을 넘어오면 넘어왔지, 이런 짓을 꾸밀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가?
"대기사단장님. 여길 보십시오."
그때 부장 하나가 바닥을 가리켰다.
"이것들이 줄기처럼 이어져 점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 말대로 검은 줄기들이 바닥으로 이어져 사방에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래. 이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만 놔두면 안 될 것 같구나."
크라엘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너희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보거라."
"예!"
기사 몇이 천천히 숲 안으로 진입했다.
검게 변한 수풀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횃불을 켠 뒤 소리쳤다.
"안에는 별 이상이 없습니다."
"좋다. 모두 들어간다."
크라엘은 100명의 기사들을 데리고 숲 안을 들어가 보았다.
대낮인데도 횃불을 켜지 않으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숲이 너무나 어두웠다.
"이대로 쭉 가게 되면 일라이 왕국의 국경입니다."
"그럼 그 직전까지만 가보도록 하지."
그렇게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을까.
바스락-.
앞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크라엘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아니나 다를까.
"키에에엑-!"
몬스터 하나가 튀어 나와 크라엘에게 몸을 날렸다.
스걱-!!
그는 아주 가볍게 날아오는 몬스터의 몸을 베어 버렸다.
기사들은 반으로 갈라진 몬스터를 횃불로 얼른 비춰 보았다.
"이곳에서 서식하는 몬스터인 것 같습니다. 헌데 그 생김새가······."
이 숲처럼 검게 변한 것은 물론, 그 생김새도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언가가 이곳에 있는 것들을 전부 이런 식으로 바꿔 놓은 것 같았다.
"대기사단장님. 이걸 보십시오."
어느 기사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길게 솟아 오른 가는 몸통과 닫힌 입구 안에 뭔가를 빵빵하게 가득 채운 식물이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구나."
기사들도 신기하게 그 식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촤악-!
갑자기 그 식물이 닫혀 있던 입구를 열더니, 밖으로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으악!"
"억!"
그 연기에 노출된 기사 몇몇이 신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무슨 일이냐? 독에 당한 것이냐?"
"크아악!"
크라엘은 기사들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몸에 올라온 검은 핏줄과 검게 충혈되는 눈동자.
예전에 이런 현상을 배운 적이 있다.
이건 분명······!
"설마 마기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대기사단장님!"
부장이 그를 다급하게 불렀다.
"저, 저런 흉측한 식물들이 사방에······."
방금 전 마기를 내뿜은 식물들이 지천에 깔려 있음을 알게 됐다.
거기다 저 이름 모를 식물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가득한 나무들 역시 무언가를 머금은 듯,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이런!"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 둘 닫힌 입구를 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검은 마기가 사방에서 몰려온다.
마기라니.
대체 어떻게?
"으, 으아아악!"
"크아악!"
마기에 노출된 기사들은 자리에 쓰러져 괴로움에 몸부림을 쳐댔다.
크라엘 역시 순식간에 몰려든 마기에 노출되어 몸을 비틀거렸다.
"이, 이게 마기인가······!"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마기에 잡아 먹혀 떼죽음을 당할 것 같았다.
"모두 바닥에 엎드리거라!"
그리 크게 소리치며 크라엘은 몸을 둥글게 회전시켜 검강을 발현했다.
콰아아아-!!
그러자 강한 검강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마기를 거둬 냈다.
"우웁-!"
"크읍!"
크라엘 덕에 간신히 마기에서 벗어난 기사들은 여전히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저것들이 언제 또 몰려올지 모른다. 서둘러 이곳에서 나가야 돼!"
마기가 잠시 주춤하는 틈을 타서 얼른 저 바깥까지 뛰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모두 마기 중독으로 죽을 게 뻔했다.
크라엘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뒤쪽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때였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 겁니까?"
저 시커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횃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
크라엘은 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형체이나, 그 뒤에 펼쳐진 검은 날개와 머리 위에 있는 검은 뿔.
저것은 필시······.
"악마-!?"
제대로 맞췄다는 듯 치명적인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악마가 말했다.
"제 정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 전투 준비!"
기사들은 크라엘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허리춤에 칼을 뽑아 들었다.
"이런. 제 아름다운 정원에 그런 무기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놈은 사악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들었다.
촤르르륵-!
"아니!?"
"엇!"
크라엘과 기사들이 들고 있던 검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일제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염동력?"
하지만 이리도 강한 염동이라니.
검들이 일제히 그 끝을 세워 기사단을 향해 조준했다.
"그럼 모두 행복한 잠에 드시길."
그리고 악마가 손을 내리는 순간, 검들도 동시에 비처럼 땅으로 쏟아졌다.
64화
0.01초 소드마스터 64화
과연 예상대로 내가 점찍은 구역이 마기에 오염되었다는 정찰병의 보고가 올라왔다.
그 보고를 받자마자 나는 내가 가진 최정예 멤버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만약 위험한 곳이었다면 보고를 들어도 절대 가지 않았겠지만-.
'거긴 네임드급이 나오는 곳이 아니니까.'
게임을 플레이 했을 때, 그곳을 지나다니는 게 귀찮았을 뿐이지 위협적인 보스급 몬스터가 나타나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아예 몬스터가 없지는 않다.
자잘한 악마들이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며, 내가 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마기 포식자를 쓰려면 그만한 곳이 없지.'
내게는 알렉산더, 아론, 그리고 라파엘이 있다.
거기다 기사단도 데리고 가는 중이니, 그곳에 있는 악마들쯤은 금방 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별 거 아닌 놈들이라서 마기 포식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런 불안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기사단을 이끌고 성문 밖을 나왔을 때였다.
"아슬란님!"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저 멀리서 내가 아는 얼굴이 뛰어오고 있었다.
"하리엘?"
이 여자는 또 왜 여기에 나타났어?
"다행히 따라잡았네요. 조금만 늦었으면 못 뵐 뻔했습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더냐?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테고."
"저는 뵙고 싶었는데, 아슬란님은 그렇지 않았나 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니, 라파엘이 하리엘을 위 아래로 살피며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가야 할 곳이 있으니, 동행이 괜찮다면 가면서 말하지."
"아, 예."
하리엘까지 우리 파티에 참여하다니.
이것보다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우리 국경 근처에 마기로 오염된 구역이 있다기에 그곳으로 가고 있다."
"마기라면······ 악마인 겁니까?"
"그렇겠지. 헌데,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하리엘이 왔다는 건 필시 교단에 관련된 일일 게 뻔했다.
"교단에서 저를 보냈어요. 자스트라 숲에서, 그리고 칼루탄에서 악마들이 나타났다는 정보도 받았죠. 심지어 수백 년 전 악명을 떨쳤던 키야르트가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놈이었지."
"정말입니까? 정말 키야르트였습니까?"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놈은 이미 내 손에 죽었으니."
"그럼······ 칼루탄에 있는 루너들과 손을 잡으셨다는 건-."
난 하리엘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다, 하리엘. 그저 척박한 땅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발버둥을 치는 불쌍한 자들이지."
"······그렇군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악마들이 빠르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교단에서 그들을 정화할 것입니다."
"그 잘난 교단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나섰던 적이 있더냐? 지금까지 여러 악마들이 나타났었지만, 교단은 한번도 나선 적이 없다. 그저 방관만 하고 있지."
내 말대로 교단은 지금까지 그 이름값을 하지 못 하고 있다.
하긴. 그놈들이 제 할 일을 똑바로만 했다면 이 게임에 주인공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네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다, 하리엘. 교단에서 나를 여러 번 나를 소환하려 했지만, 내가 전부 거절했었지. 그 때문에 온 것이 아니더냐?"
저번에 교단이 성기사들을 잔뜩 보냈다가 도망친 이후부터 별다른 소식이 없다, 자스트라 숲을 다녀온 이후부터 계속 신전으로 오라는 서신을 보냈었다.
하지만 나는 이놈들과 엮이기 싫어 그냥 무시를 했었다.
"아슬란님께서는 그들을 악마로 보고 계시지 않아도 교단에서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고 있어요. 그들의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 주신다면 교단은 아슬란님의 큰 힘이 될 거예요."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나는 교단이 왜 나를 신전으로 불러 들이는지 알고 있다.
솔직히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냥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들으면 될 것을, 굳이 나를 신전으로 불러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전에 뿌락지들이 있다는 거지.'
오메르 왕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전 역시 악마에 의해 타락했음을 뜻한다.
이 게임을 플레이 해본 사람이라면 신전은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다 알고 있다.
놈들은 날 신전으로 유인해 죽이려는 속셈이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그놈들과는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계속 신전과 갈등을 빗으시는 건 위험해요. 장로회에서는 루미네르 대성기사단장을 출격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요."
그건······ 좀 무섭다.
루미네르가 누구인가.
레이어스 교단이 가진 최강의 기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미네르는 교단이 가진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정말 큰일이 난 게 아닌 이상, 그 카드는 마지막까지 꺼내지 않는다.
문제는,
"루미네르라-."
그 이름을 듣고 이놈의 허세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만약 그가 나를 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다."
"······!"
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제발 루미네르만은 오지 않게 해주세요.'
간절히 빌었다.
"대기사단장님."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오염된 구역.
수풀과 나무가 온통 검게 그을려 있었고, 저 통로 안은 시커먼 어둠만이 가득했다.
"여긴 제가 도움을 드릴게요."
하리엘은 칼을 꺼내 뒤에 있던 타샤와 에길론과 함께 주문을 외웠다.
"라할이시여. 저희에게 빛을 내려 주소서."
그러자 그녀의 검을 타고 흐르는 신성한 빛이 번쩍이더니, 동그란 구체가 빠르게 솟아 올라 검은 숲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조명탄처럼 구체는 그 안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오오······."
"이것이 성기사의 힘인가······."
기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 감탄을 터트렸다.
나도 하리엘이 보여 준 신성 마법에 놀랐으나, 겉으로는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가겠다."
"예!"
과연 어떤 악마가 있으려나.
가급적이면 여기 근원을 빠르게 찾아 없애고 싶은데.
"여기 숲을 오염시킨 자를 찾아 죽인다면 금방 정화가 될 거예요."
과연 신전의 사람답게 하리엘도 이곳을 정상화 시키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정 구역을 마기로 오염시키는 특정 악마나, 생물을 근원이라 칭한다.
그것을 없애 버리면 이곳은 차츰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너무 조용하네요."
어두운 통로를 하리엘이 만들어낸 빛을 따라 걷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발견이 없었다. 거기다 하리엘의 말대로 너무나 조용했다.
쥐새끼 한 마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러면 갑자기 뭐가 튀어 나오던데.'
다년간 단련된 게임 짬밥의 직감대로,
"키에에엑!!"
몬스터들이 땅을 뚫고 나와 우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다!"
"막아라!"
몬스터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우리 전력도 마찬가지였다.
네임드급 캐릭터들이 여럿 있으니, 저런 몬스터 떼가 다가와도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아론에게 말했다.
"아론."
"예!"
"빠르게 처리해라. 내가 칼이 뽑는 일 없도록 말이다."
"예, 대기사단장님!"
내 명령에 따라 아론은 기사단과 함께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소탕해 나갔다.
하리엘도 놀고 있지 않고 그를 도왔다.
'생각보다 숫자가 좀 많은데.'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여긴 이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나올 만한 곳이 아닌데.
혹시 난이도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해는 간다만-.
"정리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무적 함대나 다름 없는 이들에게는 숫자가 무의미해 보였다.
역시 든든하구나.
하리엘까지 끼어 있으니, 거의 두 배는 세진 것 같았다.
그런데,
츠츠츠-.
우리 주변으로 땅밑에서부터 줄기가 나오더니, 마치 짐승의 입을 닮은 식물들이 지천에 깔렸다.
"이건 뭐지?"
"이렇게 생긴 꽃은 처음 보는데."
난 저것들이 뭔지 금방 알아차렸다.
"마기초로군."
"네? 마기초요?"
"마기를 뿜어내는 놈들이다. 모두 물러나라."
하지만 기사들의 발밑에서 빠른 속도로 자라난 마기초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시커먼 마기들이 뿜어져 나와 우리 모두를 덮쳤다.
"헉!"
"크악!"
"푸히힝!"
마기에 닿은 기사들이 신음을 터트렸다.
말들도 화들짝 놀라며 몸부림을 쳐대서 기사들이 낙마하고 있었다.
하리엘 역시 처음 경험해 보는 마기에 검은 핏줄이 온몸에 솟아 오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에 반해 나는,
'진짜 아무렇지가 않잖아?'
마기 포식자 능력을 얻게 되면서 나는 마기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되었다.
저번에는 가까스로 허세를 통해 버텼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웃긴 건,
푸르르~.
내 말도 아주 멀쩡하다는 것이다.
이놈은 대체 왜?
"라파엘."
"아, 네!"
악마의 피가 섞인 라파엘 역시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이것들을 치우거라."
그녀는 정령 마법을 펼친 뒤 강한 바람을 일으켜 마기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윽-."
그렇게 간신히 마기에서 벗어난 하리엘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슬란님은 마기가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마기 저항력이 있어 나는 이제 마기에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었다.
"교단의 검이라는 자가 나약하구나."
"······."
하지만 이놈의 허세는 그걸 그냥 넘어가지 못 하고 허장성세를 부렸다.
"단단한 정신이 있다면 이 정도 마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다. 정신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하리엘."
하리엘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뭐, 틀린 말을 한 건 아니긴 했다.
당장 나도 그 지독했던 마기를 이 정신 나간 허세로 버티지 않았던가.
"저의 정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바로 그때.
"모두 편안하게 즐겨주시길."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합친 듯, 섬뜩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올려 보니,
'뭐, 뭐야. 저건.'
검은 날개에 검은 뿔을 가진 인간 형상의 악마가 하늘을 비행하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로스 아니야?'
염동의 악마, 벨로스.
키야르트와 마찬가지로 마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악랄한 놈이다.
더군다나 상대법도 까다로워 가급적 부딪히고 싶지 않은 놈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별명대로 놈은 매우 강력한 염동력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올 놈이 아닌데?'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이놈도 키야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깨져 버린 봉인을 뚫고 나온 건가?
'아무리 그래도 왜 하필 여기야?'
여긴 잡몹에 가까운 하급 악마들만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벨로스는 하급이 아니라 무려 보스급 악마였다.
'침착하자. 그래도 나한테는 네임드급 캐릭터들이 다수 있잖아.'
그러니 놈의 염동력만 조심을 한다면······.
"저의 정원에는 그런 상스러운 무기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촤르르륵-!!
벨로스의 손짓 한번에 기사들이 들고 있던 모든 무기가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아니!?"
"거, 검이!"
기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아론, 알렉산더, 하리엘, 거기다 하리엘까지.
여기 있는 모두가 고작 손짓 한번에 무장 해제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 저놈은 저게 짜증났었지.'
벨로스는 항상 저런 식의 공격을 펼쳤다.
염동력으로 플레이어와 그를 조력하는 동료들의 무기를 빼앗아 하늘 높이 올린 뒤, 그것을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쏟아 버리는 것이 놈의 공격 패턴이었다.
그래서 검을 빼앗기지 않게 미리 조치를 취하고 가는 것이 정석이다.
'근데 여기서 저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건 불공평하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저런 게 나타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지금쯤 내 검도 저기 어딘가에서 나를 조준하고······.
잠깐. 내 검?
나는 왼쪽 허리춤을 내려다 보았다.
'아직 여기 있잖아?'
다른 이들의 무기는 전부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며 우리를 조준하고 있었는데, 내 검은 여전히 내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제가 빼먹은 것이 하나 있군요. 순순히 내놓으십시오."
저 재수 없는 말투로 비아냥 거리는 벨로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내 검을 가져가려는 것 같았는데-.
"······?"
저놈이 조준을 못 하는 건가?
이상하게 내 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괜한 고집을 부리시는군요."
벨로스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놈의 강한 염동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
내 검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이 검을 가져가고 싶은 것이더냐?"
차갑게 식어 있던 허세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스르릉-!
나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은 뒤 놈을 향해 겨누었다.
"어디 한번 가져가 보거라."
벨로스는 오만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놈은 내 검을 가져가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났는지, 놈은 아예 두 팔을 뻗어 더욱 강력한 염동을 퍼부었다.
콰직-! 콰콰콱-!!
땅이 갈라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다.
저 악마 놈과 이 허세에 절여진 검 사이에 끼어 있어 새우등이 터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강한 힘을 발휘했는데도 놈은 끝끝내 검을 띄우지 못했다.
그런 벨로스를 보며 나는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는 허세를 느꼈다.
"형편없구나. 고작 검 하나를 움직이지 못해서야. 역시 저급한 악마라서 그런 건가?"
놈은 나를 당장이라도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허세는 더 큰 화마가 되어 타올랐다.
"정 원한다면-."
그 강렬하고 충동적인 허세에 나는,
"너에게 주도록 하지."
들고 있던 검을 마치 선심 쓰듯 던져 버렸다.
'이런 미친-!'
던지고 나서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은 듯싶었다.
놈이 벌써 날아오는 내 검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 * *
턱-!
벨로스는 아슬란이 던진 검을 얼떨결에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그토록 강한 염동을 발휘했는데도 이 검은 꼼짝 하지 않았다.
어떤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가?
뭐, 이제 상관없다.
저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알아서 검을 던져줬으니, 이제 이 검으로 놈의 목숨을 끊어 버리면 될······.
[감히-.]
바로 그때였다.
[더러운 미물 따위가 이 몸을 만지다니.]
"······?"
[죽고 싶은 것이냐?]
머릿속을 울리는 둔중한 음성.
벨로스는 당황하며 주위를 바라보았지만, 저 인간들 말고는 보이는 자가 없었다.
"누, 누구냐?"
그 위압적인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용서할 수가 없도다.]
그는 곧 이 목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깨달았다.
"설마 이 검에서?"
그걸 깨닫자마자,
쿠웅-!
"크헉!"
온 세상이 뒤틀려 버린 듯 시야가 흔들리고 머릿속은 누군가가 망치로 계속 내려치는 것처럼 묵직한 고통이 일었다.
그리고,
[그 더러운 피로 이 몸을 건든 죄를 물어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여 주마.]
숨이 막히고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음성에 겁을 먹은 벨로스는 황급히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채앵-!
떨어진 칼은 곧 바닥에 박혀 버렸다.
"어, 어디서 저런 미친 검이······!"
악마가 깃든 에고 소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모든 것이 짓눌리고 혼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검이 존재할 수가 있다니.
"무례하구나."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검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였다.
"저 검이 누구의 것인지 알면서도 감히 그따위로 다루다니."
"!?"
놀랍게도 저 밑에 있던 붉은 망토의 인간이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처럼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인간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윽-!"
벨로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저 인간은 손가락을 펼쳐 벨로스를 겨누었다.
"넌 내 검으로 죽일 가치조차 없다."
그리고 그 손을 가볍게 긋는 순간.
푸확-!!
번쩍이는 검강이 지나간 자리에, 검은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65화
0.01초 소드마스터 65화
"여긴······."
크라엘은 기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제기랄."
입에서는 탁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내가 언제부터 정신을······."
흐릿한 기억이 그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름 모를 식물에서 마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대로 기사단은 그것이 중독되어 전투 불능에 빠졌다.
다행히 크라엘이 잠시나마 마기를 쫓아내긴 했지만-
"그 악마 놈······."
어디선가 나타난 악마가 엄청난 염동력을 발휘하여 무기를 전부 빼앗고. 그것으로 기사단을 쓸어 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대응조차 못 했지만, 크라엘은 제 팔에 꽂힌 칼을 뽑아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열심히 칼을 휘둘렀으나, 다시 한번 몰려든 지독한 마기에 기억을 잃은 듯했다.
아무리 위명 높은 강자라고 해도 마기 앞에서는 그저 나약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된다고 했던가.
그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크라엘은 자신이 어느 높은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저장해 놓은 것처럼, 크라엘 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 역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브록, 레니. 정신을 차려 보거라."
부장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길. 여길 얼른 벗어나야······."
바로 그때였다.
"넌 내 검으로 죽일 가치조차 없다."
숲을 울리는 둔중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아니. 머릿속에 강렬히 박혀 있는 목소리였다.
"설마······아슬란?"
아슬란이 이곳에 어떻게?
거기다 지금 그는 하늘을 날고 있다. 심지어 이 지독한 마기 속에서 아주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푸확-!!
"!?"
그의 가벼운 손짓에 솟아 나오는 검강이 저 악마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문제는 그 검강이 크라엘에게 치달아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런 제길!"
온몸이 칭칭 감겨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
이대로 죽는 것인가?
키이이잉-!!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 이게 무슨?"
저 악마의 몸을 순식간에 갈라 버린 빛의 검강이 자신의 코앞에서 멈춘 채로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폭주하는 힘을 무언가가 뒤에서 강하게 붙잡는 것처럼, 검강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그대로 소멸되었다.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던 검강을 그 찰나의 순간에 통제할 수 있다니.
콰아아-!!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반 토막 난 악마의 몸뚱이에서 마기가 치솟더니, 숲 전체가 뒤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땅이 꺼지고 마기에 의해 숲 전체가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또 대체······!"
검은 불길이 숲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땅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가면 여기 있는 모두가 불길에 휩쓸려 죽을 것은 자명한 일!
그런데 아슬란 저자는······.
"마지막까지 추잡스럽구나. 악마라는 것들은."
"!?"
불길이 자신을 삼키려 드는 것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사라져라."
그 말 한마디와 함께 악마에게서 나오는 검은 마기가, 그 맹렬한 불길이,
콰아아아아-!!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가면서 동시에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으헉!"
"으아아!"
휘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기사들은 제자리에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으며, 빛은 순식간에 어둠을 집어삼켜 오염되었던 숲을 정화했다.
"이, 이것이······."
어둠을 정화하는 빛의 힘.
바로 아슬란의 힘이었다.
* * *
'뒤, 뒤지는 줄 알았네.'
잠시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악마에 의해, 그것도 네임드급 악마에 의해 오염된 곳은 그 근원이 되는 악마나, 혹은 힘이 사라지면 마기가 폭주하여 그 근방이 검은 불길에 휩싸이고 폭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원래는 그닥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근원이 폭발해도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그러나 내 몸이 아슬란이라는 것과 이 세계의 난이도가 극악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과연 벨로스가 죽자마자 근원은 폭발할 조짐을 보였고, 그 위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나,
'마기 포식자 덕분에 살았어.'
본능적으로 발동시킨 마기 포식자.
그것이 들끓던 마기를 빨아들이고, 벨로스의 몸을 흡수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생긴 나의 새로운 능력은 바로······!
쿠웅!
그때 저 앞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도 함께 들려오는 것을 보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또 있었다는 건가?
나는 기사들과 같이 소리가 들려왔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으윽."
신음을 흘리고 있는 크라엘이 있었다.
그의 뒤로 '만' 왕국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도 여럿 보였다.
'얘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우리가 오기 전에 먼저 벨로스와 싸웠던 건가.
벨로스의 악취미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붙잡은 인간을 매달아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고문을 하며 정기를 흡수하는 것인데, 이놈들이 딱 그 꼴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 아슬란······."
'만' 왕국의 최고 권력자, 크라엘.
비록 다른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크라엘이 한다.
그는 왕국에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크라엘을 죽이게 된다면 만 왕국의 기사단은 동귀어진을 할 각오로 우리 왕국에 쳐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놈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일라이 왕국과 만 왕국의 험악한 관계를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뿐.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한 어조로 크라엘을 대하는 것이다.
그가 나를 신뢰할 수 있게!
하지만,
"꼴사나운 모습이로군. 한 왕국의 대기사단장이라는 놈이."
"······."
악마를 죽이고, 그 힘을 포식하는 순간부터 머리 끝까지 차올라 있던 허세가 그걸 가만두고 볼 리 없었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생각이지?"
"크, 크윽."
그는 몸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 우릴 어쩔 셈이지? 여기서 다 죽일 건가?"
난 마치 너 같은 건 하찮아서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냥 거기 누워 있거라. 네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면 만 왕국에서 곧 구조대를 보내겠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 했으면 되려나?
"자, 잠깐! 우릴 정말로 이대로 보내겠다고? 여기서 날 죽인다면 '만' 왕국은 큰 전력을 잃게 된다."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저번처럼 또 우리를 그냥 보내 준다는 것이냐?"
그 말이 트리거가 된 것일까.
사그라들기 시작했던 허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내 긍지를 더럽히려는 것이냐?"
"······뭐?"
"검도 들지 못하는 상대를 죽이는 건 기사의 수치다. 우리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을, 그리고 나 아슬란을, 너희같이 한심하고 명예를 모르는 놈들과 똑같다 여기지 마라!"
크라엘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병적인 허세가 절정을 찍으며 폭발했다.
"정 나와 싸우고 싶다면 힘을 회복하고 와라. 그땐 원하는 대로 죽여 줄 테니."
"!?"
"알아들었으면 돌아가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펄럭~!
그리고 허세의 끝은 언제나 망토로 마무리가 되었다.
* * *
"어서 달려라! 크라엘이 위험하다!"
"예!!"
크라엘이 오염된 숲에 들어간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은 라이에르는 기사단을 이끌고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땐.
"분명 오염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숲은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광채가 나고 있었다.
"서둘러 들어간다!"
"예!"
라이에르는 빠르게 기사단과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크라엘!!"
초루한 몰골로 기사들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라엘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라!"
라이에르는 말에서 내려 크라엘에게 달려갔다.
"크라엘! 괜찮으냐?"
"라이에르······."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크라엘은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부축하는 라이에르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라이에르. 난······ 언젠가 우리가 힘을 키우면 가능할 줄 알았다."
"뭐?"
"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 우린 영원히 아슬란 그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크라엘."
"나는 보았다, 라이에르. 진정한 빛의 기사를. 그는 예언대로 악에 빠진 이 대륙을 구하게 될 거다."
"······?"
라이에르는 한동안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크라엘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의 음성은 숲 전체에 퍼졌고, 기사들은 머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아슬란. 그 두렵고 경이로운 이름이.
* * *
"교단은······. 당신을 크게 오해하고 있군요. 그들은 악마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지만, 전 오늘 똑똑히 봤어요. 그들이 하나둘 부활하고 있는 것을."
그걸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다.
"당신은 여전히 저를 따라 신전으로 갈 생각은 없으신 거겠죠?"
"그래."
"그렇다면······."
하리엘은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저도 여기 남을게요."
"······?"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교단을 설득하겠어요. 악마의 부활은 진짜이며, 당신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잠깐. 그렇다는 건.
'하리엘이 당분간 내 밑에 있다는 건가?'
이거야말로 반가운 이야기였다.
저 하리엘이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내 군단에 엄청난 힘이 될 것은 자명하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인력 자원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좋다고 손을 얼싸 잡고 흔들어도 모자를 판이었지만.
"손님을 오래 붙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들끓는 허세에 말이 좋게 나갈 리 없었다.
그러나,
"손님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당신의 수하처럼 부려 먹어도 좋아요."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생각된다면 가차 없이 쫓아낼 거다, 하리엘."
"예!"
다행히 좋게 마무리가 된 듯싶었다.
나는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와 병력을 재정비했다.
그동안 하리엘은 사람을 보내 이곳 상황일 세세하게 알렸다.
과연 하리엘의 설득이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교단과의 불필요한 충돌은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염동]
-15초 동안 염동을 발휘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초)
-반경 30m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염동의 힘은 사용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마기 포식자를 통해 얻은 벨로스의 능력, 염동이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마기 포식자는 피래미들을 흡수해봤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벨로스처럼 네임드여야만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마기 포식자를 쓰려면 무조건 네임드를 쓰러뜨려야 된다는 거잖아?"
더럽게 입맛 까다로운 능력이었다.
"그럼 한번······."
나는 내 옆에 있는 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염동을 사용하자,
스르르.
컵이 미끄러지듯 내 손에 다가와 잡혔다.
"하하."
이게 염동이구나.
나는 그 외의 것들도 하나씩 움직여 보았다.
컵처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이 힘이 어디까지 작용을 하는지 알아냈다.
"역시 아슬란의 힘에 비례한 거라 자잘한 것밖에 안 되나."
이번에는 내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르릉.
그러자 칼이 아주 천천히 검집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 조절에 미숙해서인지, 아니면 이게 내 한계치인지 검을 끝까지 빼었다고 컨트롤 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그냥 내 숙련도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계속 연습을 한다면 칼 하나 드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 있다.
턱.
나는 미리 가져온 네모난 미스릴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미스릴.
이것을 내 염력으로 찌그러뜨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적이라도 원거리에서 머리를 터트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하지만 다른 능력들처럼 이 염동에 찰나의 괴력을 섞는다면?
우우웅-!!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자 내 몸이 붕 뜰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힘이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저 미스릴을 향해 힘을 집중시키는 순간.
콰직-!!
저 미스릴이 나약한 철 쪼가리처럼 찌그러지다 못 해 찢어지고 있었다.
"돼, 됐다!"
그런 기쁨도 잠시.
쿠웅-!
"······?"
힘 조절을 잘못했던 것일까.
"어?"
미스릴를 기점으로 그 바닥에 갈라지더니, 곧 균열은 빠르게 일어나 기둥과 천장에까지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 건물을 넘어 그 바깥까지,
콰콱! 콰콰콱-!!
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온 세상이 비명을 지르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어?"
66화
0.01초 소드마스터 66화
넬라 기사단장은 오늘 새로 들여온 장비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샤를렌 가문의 가주인 비올레타 덕분에 새로운 교역길을 연 일라이 왕국은 다양한 장비들을 들여오는 중이었다.
이건 모두 아슬란의 명령 때문이었는데, 무기 품질과 실용성을 꼼꼼하게 따지는 건 넬라의 몫이다.
"그러니까 이게 내구성이 무척 뛰어난 방패라고?"
"예, 단장님. 무려 레튬이란 물질로 만들어진 방패로, 강철보다 단단하며 그 미스릴에 버금가는 내구성을 지녔습니다."
넬라는 상인이 가져온 방패들을 통통 두드리며 확인해 보았다.
그마저도 부족했는지 아예 칼을 뽑아 들고는 방패를 힘껏 내리쳤다.
터엉-!!
진하게 울리는 파공음에 방패를 팔고 있던 상인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민족이라 불리는 드워프들의 최신 제련 기술로 만들어진 방패입니다. 그 어떤 마법도, 그 어떤 검도 이 방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 할 수 있지요."
"흠. 방패 말고 다른 건 또 있는가?"
"예, 이것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성벽을 방어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지녔습니다. 이 장비들을 갖추기만 한다면 일라이 왕국 기사단을 무찌를 수 있는 군대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쿠우웅-!!
"으헉!"
"엇!"
기이한 굉음이 뒤에 있던 아슬란의 집무실에서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집무실로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콰직-!!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면서 사방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으, 으아아!"
"지, 지진인가!"
"대기사단장님! 으악!"
기사들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아슬란을 꺼내오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갑자기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들을 저 먼발치까지 밀어냈다.
그리고,
콰콰콰콱-!!
한번 더 심하게 땅이 흔들리면서 두 쪽 날 것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이게 어떻게 된······!"
지반이 갈라진 집무실 건물이 허공 위로 붕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주변에 있던 것들도 함께 떠오르더니, 넬라가 방금 전에 보고 있던 수십 개의 방패도 두둥실 떠올랐다.
콰콱-!!
"저, 저런!"
그 단단하다는 방패들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상인은 어린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댔고, 넬라 역시 이 경이롭고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었다.
이 기괴한 현상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쿠웅-!!
한순간에 모든 힘이 풀리면서 붕 떠 있던 집무실과 그 외 것들이 한꺼번에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대, 대기사단장님!"
"아슬란님!"
차마 접근할 수가 없어 그냥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집무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끼익-
아슬란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대기사단장님······."
"괘, 괜찮으십니까?"
"방금 그건 대체-!"
기사들의 외침에 아슬란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
그는 주변을 살피다 넬라와 상인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동그랗게 찌그러진 방패들을 아슬란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 이, 이번에 새로 만들어졌다는 방패들입니다."
넬라의 말에 그는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힘도 버티지 못해서야 쓰겠느냐?"
그러자 상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상인은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게 미스릴에 버금가는 내구성을 자랑한다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방패들이 지금 저 꼴이 되어 있으니,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더 단단하고 좋은 방패를 가져오너라. 그럼 전부 사 주겠다."
"예! 그, 그리하겠습니다."
아슬란이 망토를 화려하게 펄럭이며 떠나자 상인은 조아렸던 고개를 간신히 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덕분에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대체 아슬란님께서는 무슨 힘을 발휘하셨기에 이 단단한 방패들을 이 지경으로······."
넬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분의 힘을 감히 가늠하려 들지 마시게. 우리조차도 그 힘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니."
"······."
"뭐 하고 있는가. 어서 가서 새로운 방패를 가져오지 않고? 이번에도 대기사단장님을 실망시킨다면 자네나 나나 경을 칠 걸세."
"아, 예!"
밖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상인을 바라보며 넬라는 방금 전 자신이 방패를 향해 내려쳤던 검을 살펴보았다.
있는 힘껏 쳤는데도 방패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는데, 검은 작게 균열이 일었다.
"······."
저 정도로 단단한 방패이거늘.
대체 저것들을 어떻게······.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넬라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 *
"신성한 라할의 빛이 원로회에 함께하기를."
레이어스 교단에서 최고의 기사라 칭송하는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
그가 원로회에 모인 장로들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루미네르. 그 간악한 이교도 무리를 처단하는 일은 잘 해결이 되었는가?"
"예. 모두 라할의 이름으로 심판하여 빛을 바로 세웠습니다."
"고생했다. 그대의 활약으로 이 대륙은 위협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조금?
루미네르는 고개를 들어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이교도 무리를 색출해 처단하는 동안, 바깥에서는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슬란이라는 자가 있지."
"보고는 어느 정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자가 악마의 처단자로 불리며 여러 악마를 죽였다고 말입니다."
"그래. 아슬란 그놈은 이 대륙에 혼란을 가져오고자 악마가 나타났다는 거짓 선동으로 수많은 라할의 백성들을 꾀하고 있다."
레이어스 교단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기사들을 지휘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루미네르도 아슬란의 이름을 질리도록 들었다.
"그 말씀은 아슬란이 의도적으로 거짓을 만들어 퍼뜨렸다는 것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도······."
"전부 거짓이다! 물론, 대륙에 테키나 족속의 잔당이 아주 조금 남아 있다는 건 너도 잘 알 터. 하지만 그 세력이 미미하여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었지. 아슬란 그것들을 이용해 불안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이 목청을 높여 소리치자 루미네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리엘에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직접 악마를 목격했다고 보고했습니다."
"하리엘은 이미 아슬란의 꾀임에 넘어간 상태다. 듣자하니, 아슬란이 한때 그녀를 사모해 청혼까지 했었다는군. 어찌 된 이유인지 하리엘은 아슬란의 곁에 남아 교단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느냐?"
그 말에 루미네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지 말씀해 주십시오."
"라할께서 새로운 신탁을 내리셨다."
"!?"
신탁.
레이어스 교단이 지금껏 존속하며 명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바로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능의 신전이라 불리는 곳에서 신탁이 내려오는데, 그곳에 있는 선택 받은 제사장들만이 신탁을 해석하고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라할께서는 악마의 이름을 빌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아슬란을 처단하길 원하신다. 그 적임자는 루미네르, 바로 너다."
신탁이 적힌 양피지를 루미네르는 조심히 받아들였다.
그것을 펼치니, 그 안에 적힌 빛의 글씨가 그를 환하게 비추었다.
"가서 빛의 뜻을 행하거라, 루미네르."
"라할께서 그대를 항상 지켜줄 것이다."
"예!"
오직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있는 성기사.
그는 라할의 명령이 적힌 양피지를 들고 신전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루미네르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이성적이고 냉정하지 않다는 것을.
성기사라면 오직 신의 뜻에 따라 개인적인 감정은 버리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하리엘."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 * *
[권능의 염력]
-15초 동안 권능의 염력을 발휘합니다.
-반경 300m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권능의 염력.
찰나의 괴력과 염력을 합친 결과물이었다.
그냥 한번 슬쩍 써본 것뿐인데, 집무실은 물론 그 주변까지 개박살이 났다.
그 덕분에 나는 그곳 보수 공사가 끝나기 전에 집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업무를 봐야만 했다.
'쓰읍. 다음부터는 집무실에서 그러면 안 되겠다.'
새로운 능력이 생기면 무조건 지정된 훈련 장소에서만 써야지, 호기심에 잘못 썼다가는 아주 난리가 날 것 같았다.
'권능의 염력을 조절하는 법도 익히긴 해야 하는데.'
이걸 한번 잘못 쓰게 되면 건물 전체가 날아가 버릴 정도로 위력이 어마어마하니, 어디 겁나서 마음먹고 연습하기도 애매했다.
'거기다 쿨타임도 길어.'
찰나의 괴력과 같이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 만약 찰나의 괴력이 쿨타임이라면 권능의 염력도 쓰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반 염력은 계속 쓸 수 있다는 거야.'
나는 틈만 나면 염력 연습에 매진했다.
아무래도 이게 영화에서나 보던, 생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보니 매번 쓸 때마다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래서 지금은 칼 한 자루를 뽑아 들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왔다.
물론, 그 이상의 것을 하고자 한다면 찰나의 괴력을 써야 해서 딱 검을 다루는 것까지가 한계점 같았다.
"보수 공사는 내일이면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넬라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겠구나.
나는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훈련장을 살펴보았다.
이곳도 그날 크게 영향을 받아 멀쩡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훈련을 쉴 순 없기에 구역별로 나누어 훈련을 이어 나갔다.
"검에 집중하거라!"
"자세를 흐트러트려서는 안 된다!"
"예!!"
교관의 외침에 기사들은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채애앵-!!
서로 진검 승부를 벌이고 있는 아론과 알렉산더였다.
"흐아압!!"
[알렉산더]
무력: 84
지력: 85
무시무시한 성장세로 커가는 알렉산더다.
처음에는 아론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호각을 이루며 싸우고 있었다. 원래 제일 재밌는 것이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비록 대련이기는 하지만, 둘 다 실전처럼 검을 겨루고 있었다.
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채앵-!!
"오오. 역시 아론 단장님!"
"알렉산더도 검술 실력이 엄청 나다니깐? 저 단장님이랑 붙어도 밀리지가 않잖아!"
기사들은 뒤에 내가 온 지도 모른 채 둘의 대결에 빠져들었다.
나도 구태여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둘 중 누가 이길지 흥미롭게 구경했다.
촤아아-!!
두 사람은 서로의 힘에 밀려 각자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앞으로 달려가려는 아론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칼을 빠르게 거두었다.
"대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내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대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아. 한창 재밌었는데.
그냥 계속하지.
"훈련은 잘되고 있느냐?"
"예."
"알렉산더의 실력이 많이 는 거 같군."
"감사합니다, 대기사단장님. 하지만 요 근래 벽에 부딪힌 것 같아 계속 수련 중에 있습니다."
벽?
뭐, 다른 사람에 비하면 그건 벽도 아니지.
원래 성장세에는 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을 넘어서야 만이 더 크게 성장을 이룰 수 있는 법.
하지만 알렉산더는 다른 사람에 비해 그 벽의 높이가 무척 낮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알렉산더의 특성이 말도 안 되게 사기적인 게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너 같은 축복 받은 캐릭터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 안 된다고 한 대 쥐어 박고 싶었으나,
"정진하거라. 화살이나 창을 던질 때 태양을 향해 쏜다면 더 멀리, 더 높이 가는 법이다."
우리 소중한 주인공한테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예전에 자기계발서에서 읽은 걸 내 거 마냥 지껄였다.
"그 말씀은 목표를 크게 잡으라는 것이군요."
"그렇지."
알렉산더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렴.
그래야 내가 이 미친 게임에서 벗어나지.
마저 할 거를 하라고 이제 그만 돌아가려는데,
"그렇다면 대기사단장님!"
알렉산더가 나를 붙잡았다.
그는 아주 정중한 자세로 내게 청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저의 태양이 되어 주십시오!"
"······?"
"저와 대련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뭐라고?
아니. 이게 사람 죽일 일 있나.
"대기사단장님께서 제게 주신 가르침대로 태양을 바라보며 수련하고 싶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알렉산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놈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자 아론이 알렉산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 몸을 떨어서야 대기사단장님과 칼을 섞을 수나 있겠나?"
그래. 잘한다.
머리 한 대 쥐어 박고 돌려보내라, 아론아.
그런데-.
"대기사단장님께서 조금이나마 덜 지루하실 수 있도록 저도 함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믿었던 아론까지 내 뒤통수를 쳐버렸다.
이것들이 줄곧 가만있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당연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거절을 해야겠지만.
"건방지구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허세가 내 몸에 잠식했다.
"그런 알량한 실력으로 가르침을 받겠다라."
나는 손가락을 살짝 까닥였다.
그러자 허리춤에 있던 검이 스르릉 빠져나와 허공 위를 두둥실 날아다녔다.
그것을 보고 기사들이 놀란 기함을 터트렸다.
"저, 저건!?"
신검합일에 이르면 손을 쓰지 않아도 오직 의지만으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어검술.
물론,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염력이었지만······.
"어검술이다!"
"이, 이럴 수가!"
아무래도 기사들은 이것이 극강의 경지인 어검술이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나는 그 칼끝을 아론과 알렉산더에게 날카롭게 세우며 말했다.
"오너라. 태양이 아니라 저 우주 끝으로 가도 닿을 수 없는 경지를 보여 주마."
67화
0.01초 소드마스터 67화
"······."
이 정도로 겁을 줬으면 이놈들도 쉽사리 덤비진 못하겠지.
그런 생각도 잠시.
"대기사단장님께서 주시는 이 가르침! 감사히 받겠습니다!"
알렉산더 저 정신 나간 놈이 있는 힘껏 칼을 휘둘러 허공에 떠있는 내 칼과 부딪혔다.
카아앙-!!
염력으로 버티고 있던 내 검은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돌며 위로 쭉 날아올랐다.
알렉산더 저 미친놈이 가한 힘과 나의 염력이 서로 검에 엉키면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너라도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저 역시 피하지 않겠습니다!"
에라이 미친 새끼.
나는 하늘 위로 붕 떠 버린 검을 간신히 붙잡아 내렸다.
그러나 내려오기만 했지, 여전히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어 빙그르르 회전하며 내려와 아론에게로 떨어졌다.
"하압-!"
아론도 그걸 알렉산더처럼 냅다 쳐버렸다.
이놈들이 기어코 날 죽일 셈이구나.
그런데,
"헛-!"
카아앙-!!
"이런!"
채앵-!!
아론이 때린 검은 알렉산더에게 날아갔고, 그것을 재빨리 방어하고자 쳐낸 검은 다시 아론에게로 돌아갔다.
'쟤네 둘이 뭐 하는 거지?'
둘은 그렇게 마치 테니스를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때리며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검이 저러다 훅 하고 떨어질까 두려워 계속 중심을 잡아 주려고 염력을 불어 넣었다.
그런 환장의 콜라보가 벌어지면서 정말 허공 위에 화려한 검술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오오-!"
"이것이 어검술인가!"
"대기사단장님의 검술에 둘 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나는 딱히 하는 게 없었다. 그냥 저 둘이서 오두방정을 다 떨고 있는 것인데, 기사들 눈에는 내가 저 둘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고작 그 정도밖에 못 하는 것이냐?"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촤아아아-!!
아론과 알렉산더는 드디어 검을 완전히 쳐내며 지겨운 어검 테니스를 끝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참 검을 많이도 휘두른 탓인지, 둘의 이마에 땀이 주륵 흐르고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던 알렉산더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자신의 몸에 있는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에 따라 아론 역시 푸른 오러를 뿜어내며 그것을 검에 담았다.
"대기사단장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가겠습니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하지만 저놈들은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아이고. 내가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구나.
이놈들이 기어코 주인의 목덜미를 물려고 작정을 했다.
'지금이라도 수호신의 방패를 꺼내서 막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하면 이 두 미친놈을 무사히 막아내고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알렉산더와 눈을 마주쳤다.
화르르-!
그의 몸에서 타오르고 있는 오러와 마찬가지로 그 눈빛에 엄청난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허세를 더욱 들끓게 했다.
"고작 그 정도의 투지로 감히 누구를 쓰러뜨리겠다는 것이냐?"
"!?"
"죽을 각오로, 너희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 올리거라."
그러자 그 둘은 거기서 더 힘을 끌어모았다.
콰콱-!!
두 사람이 디딘 땅이 거미줄처럼 균열이 일어나고 그들이 일으키는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후끈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 역시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은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우우웅-!!
저 허세에 절여진 나의 검도 강렬하게 공명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난 본능적으로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너희에게 내가 가진 투지를 보여 주마."
* * *
아렌과 알렉산더는 눈앞에 보이는 태산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동안 너무 편해져 있었던 것일까.
저 아슬란을 아군이 아닌 적으로 상대하게 되니, 숨 막히는 위압감에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검술이었다.'
신검합일에 이른 자만이 다다를 수 있다는 경지, 어검술.
매일 쉬지 않고 검술 연습을 하고 있지만, 감히 그 경지에는 이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건 그저 이야기책에 나오는 경지가 아닐까 싶었지만, 오늘 그 놀라운 능력을 직접 목격했다.
심지어 저 어검술로 화려한 검술까지 보여 주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면 저 검에 의해 둘 중 하나는 크게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면······!'
알렉산더와 같은 생각인지, 아론 역시 몸 안에 있는 모든 오러를 불태워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옷깃을 스치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젖 먹던 힘까지 모아 부딪힌다면!
키이이잉-!!
바로 그때.
"어······."
알렉산더와 아론은 허공 위에 떠있는 검이 만들어 내는 엄청난 크기의 검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저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아오른 검강.
설마 저걸 정말로 날려 버릴 생각인 건가?
그 거대한 위세에, 애써 끌어 올렸던 투지가 뚝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저 검이 무심하게 휘둘러지는 순간.
콰아아아아-!!
빛의 검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아론과 알렉산더의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콰콰쾅-!!
검강은 두 사람의 몸을 가르는 대신, 저 뒤에서 보수 중이던 정문을 부수고 땅을 저 깊은 곳까지 가른 뒤에 사라졌다.
"······."
눈을 껌뻑일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두 사람은 잠시 넋을 잃었다.
한껏 끌어 올렸던 오러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어검술을 쓰는 상태로 저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니!'
놀라움에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둘이 할 말을 잃은 채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자,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덤비지 않고."
아슬란은 이제 몸풀기가 끝났다는 듯 손을 까닥였다.
거기서 아론은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냉큼 칼을 집어넣었다.
"전 이 정도 가르침이면 충분한 듯합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황급히 그를 불렀다.
"아, 아론 단장님!"
너만 이렇게 쏙 빠져나가면 어떡하냐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아론은 그런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자네도 대기사단장님께 가르침을 받지 않았나? 저 태양을 향해 쏘라고. 하지만 그 태양이 대기사단장님이 될 수는 없네. 저분은 태양보다 훨씬 더 높이 계신 분이니까."
그러면서 죽고 싶지 않으면 얼른 칼을 집어넣으라고 눈짓을 보였다.
"아-"
뒤늦게 알렉산더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방금 전 그 일격을 보고 알았다.
아슬란은 결코 가볍게 하지 않을 생각이다.
누군가 그랬던가.
대련을 실전처럼.
토끼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하여.
그것이 바로 아슬란이다.
이 갈라진 땅을 보라.
이렇게 몸을 갈라 버리겠다는 아슬란의 마지막 경고였다.
만약 아론이 저지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알렉산더의 갈라진 몸뚱이는 저 밑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시시하구나. 하지만······현명한 선택이었다."
허공에 있던 아슬란의 검이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스르르- 착!
"오오."
"우와."
검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 우아한 검의 몸짓에 기사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알렉산더."
"아, 예!"
"항상 정진하는 모습은 좋지만, 무모한 도전은 화를 부를 뿐이다. 알겠느냐?"
"예!"
"지켜보고 있겠다. 네가 더 성장하는 모습을."
강렬한 눈빛으로 알렉산더에게 일침을 날린 뒤, 아슬란은 망토를 펄럭이며 훈련장을 나섰다.
"휴우."
기사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은 제자리에 경직되어 있는 알렉산더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좋은 시도였다, 알렉산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어떤 피나는 노력을 해도 대기사단장님께는 영원히 제 검이 닿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누가 감히 대기사단장님과 자웅을 겨룰 수 있겠느냐."
"하지만-"
알렉산더는 아슬란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하셨으니,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제 검이 조금이라도 닿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알렉산더를 기특하게 여기며 아론이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래. 넌 잠재력이 무척 뛰어난 기사이니, 난 할 수 없어도 언젠가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다음에 또 도전을 해보거라."
그렇게 덕담을 해준 뒤 아론도 이제 그만 오늘 훈련을 접으려고 했는데-
"꺄아아아악-!"
뒤에서 거센 비명이 들렸다.
바로 라파엘이었다.
"이, 이게 대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너진 건물은 잡부들이 고칠 수 있어도 갈라진 땅은 마법의 힘으로 고쳐야 한다.
그래서 라파엘이 고생을 해가며 간신히 균열이 일고 갈라졌던 땅을 복구시켜 놓았는데, 이번에는 갈라지다 못 해 아예 두 쪽이 나 버린 땅을 보고 그녀는 졸도 직전이었다.
"하하. 이, 일이 그렇게 되었소. 흠흠. 우린 얼른 가지."
"예!!"
아론은 기사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훈련소를 나왔다.
"잠깐! 당신들. 어디가! 어디 가냐고!!"
한동안 훈련소에는 라파엘의 절규 어린 비명이 이어졌다.
* * *
"······왠지 오한이."
기분 탓인가.
왕궁 안에 임시로 마련된 집무실에 돌아온 나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매만졌다.
"아까 그게 그렇게도 되는 거였구나."
검의 의지가 발동되어서 그런지, 내가 직접 검을 만지지도 않았는데도 검강이 검에서 만들어져 그것을 쏘아 보내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 블러핑이 먹혀 아론과 알렉산더는 바로 꼬랑지를 말아 내렸다.
"휴. 앞으로 훈련소는 가지 말아야지."
그놈들이 단체로 미쳐서 또 언제 날 죽이려 들지 모른다.
대체 내게 안전한 곳은 어디란 말인가.
이 왕국에 가만히 있는데도 위협이 사방에서 도사리다니.
"그래도 그 정도로 겁을 줬으면 또 덤비진 않겠지?"
아까 아론도 그렇고 알렉산더도 제대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후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는 그리 되뇌며 책을 펼쳤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내 개인 노트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현재 게임이 어디까지 진행되었고, 앞으로 발생할 이벤트가 무엇인지 빼곡히 적어 놓은 내 비밀 노트였다.
거기다 여기에는 아이템이 어디에 드랍이 되고 또 무엇을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지도 정리를 해두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경우의 수를 따진 시나리오도 적어두기까지 했다.
그래서 벌써 비밀 노트만 7권이 생겼다.
"다행인 건 나 말고는 아무도 이걸 못 읽는다는 거지."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글자, 한글.
이게 바로 위대하신 세종대왕님의 힘이라는 것이다, 개발자놈들아.
그래서 이 책이 들켜도 딱히 해가 될 건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이 책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검은 안개의 악마, 키야르트가 벌써 나왔고, 벨로스까지 나와 그 깽판을 쳤다.
대체 어디서 이놈들이 자꾸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이 정도 속도라면.
"대악마들이 지금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겠어."
순간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대악마.
키야르트처럼 그냥 네임드 보스가 아닌, 정말 미친놈들이다.
키야르트 같은 놈은 솔직히 어느 정도 마기에 익숙해진 네임드 영웅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대악마는 그 급이 달랐다.
웬만한 네임드로는 턱도 없기에, 서로 힘을 합쳐 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잡기가 불가능한 등급이다.
중반부터 나와야 할 네임드들이 지금 줄줄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악마가 빠른 시일 내에 등장할 확률이 높았다.
"그럼 슬슬 숭배자들도 나오겠네."
라할을 섬기는 레이어스 교단이 있다면, 테키나 족속의 힘에 매료되 악마를 섬기는 숭배자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악마를 찬양하며, 테키나 족속이 남긴 의식을 익혀 악마를 봉인에서 풀어 소환하는 등, 아주 끔찍하리만치 도시를 괴롭히는 놈들이다.
자스트라 숲에서 의식을 펼쳤던 그 호드도 숭배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사이비 종교가 성행을 하는 것처럼, 놈들은 조용히 도시 안으로 들어와 악마교를 만들어 백성들을 꾀하는데, 이걸 모르고 있다가 방치하는 순간 도시에 있는 백성들 전체가 악마 숭배자로 변질되어 대도시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대기사단장님. 하리엘입니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나의 소중한 새로운 네임드 캐릭터, 하리엘.
얼굴도 예쁜 것이, 내가 가진 네임드 중 가장 강한 무력까지 지녔다.
물론, 언제 신전으로 쏘옥 내뺄지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 아주 착실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냐?"
밥은 잡쉈냐고 예쁘게 묻고 싶었지만, 하리엘 얼굴을 보자마자 치솟는 허세 때문에 목소리가 딱딱하게 나갔다.
"예, 보고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하라."
"로난 성 근처에서 검은 낙뢰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검은 낙뢰?
그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의식을 펼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내가 우려했던 숭배자들이 벌써 어디선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가?
'이놈의 게임은 쉴 틈을 안 주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은 낙뢰라면 악마와 관련된 것이겠군."
"예. 잘 아시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의식이라고 해서 다 나쁜 건 아니었다.
개발자들이 왜 악마 의식을 넣어 놨겠는가?
그냥 플레이어들을 엿 먹이려고?
뭐, 그런 의도도 없잖아 있겠지만.
'파밍하라고 만들어 둔 것도 있지.'
보통 의식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에 들어가는 재료가 있기 마련이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그와 더불어 이것저것 비싼 재료들을 섞어 놓는다. 그래서 일부러 검은 낙뢰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곳을 급습해 숭배자들을 죽이고 그들이 가진 것을 전부 빼앗는 것이 하나의 파밍 루트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당연히 나 혼자였다면 접근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내게는 하리엘까지 있다.
그리고 검은 낙뢰가 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네임드급 악마가 나오는 것도 아니며 의식이 끝난 것도 아니다.
보통 한번 의식을 시작하면 며칠을 걸쳐 진행하기에 놈들을 죽여 파밍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마기 포식자가 있잖아?'
과거 봉인된 악마의 심장 같은 거라든지, 아니면 뿔 같은 것이 의식에도 쓰여서 정말 운이 좋으면 마기 포식을 할 수 있는 재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을 처단하는 일에 있어서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느냐."
오늘도 허세를 부리며 망토를 펄럭였다.
"거기다 일라이 왕국에 악의 힘이 창궐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내가 조금이나마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이 게임을 얼른 클리어해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뭔가 얻을 것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곳으로 나를 안내하거라, 하리엘."
네가 해줘.
68화
0.01초 소드마스터 68화
레이어스 교단이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엄청나다 할 수 있다.
보통 다른 왕국의 기사가 무단으로 국경을 넘게 되면 그것이 전쟁의 단초가 될 수도 있지만, 레이어스 교단의 기사라면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레이어스 교단의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 님이십니다. 성문을 열어 주십시오."
끼이익-!
성문도 활짝 열어 줄 만큼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의 지도자들도 괜히 교단을 적으로 만들었다가는 민심은 물론 대의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도 레이어스 교단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으나, 교단의 힘이 막강하기에 그냥 꼬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도자들의 말이지, 백성들은 달랐다.
교단의 기사단이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백성들은 라할의 이름을 칭송하며 기사단을 정성스레 받아 들인다.
"교단이 여기는 무슨 일이지?"
"이제서야 얼굴을 나타내는 건가?"
"쯧, 쓸모없는 놈들."
하지만 여기 오메르 왕국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려 만민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기까지 했다.
"이곳 백성들은 조금 무례하군요."
"루미네르 님이 오셨는데 저런 자세라니."
성기사들이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지만, 루미네르는 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백성 하나가 목청껏 소리쳤다.
"이 대륙은 아슬란 님께서 구원하신다!! 교단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러자 다른 백성들도 하나둘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 이 쓸모없는 교단 놈들!"
"우리가 고통받을 땐 외면하더니!"
"아슬란 님이야 말로 진정한 빛의 기사이시다!"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열을 내고 있는 군중을 보며 기사들은 위협을 느끼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을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진정하시오!"
오메르 왕국의 기사단이었다.
그것도 입은 갑옷으로 보아, 황실 직속 기사단 같았다.
"오메르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왕실 기사단의 단장, 루케테입니다."
"환대해 줘서 고맙소."
"저희 왕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같이 왕궁으로 가시지요."
루미네르는 루케테 단장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백성들은 그런 그들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여기도 한때 교단에 대한 신뢰가 높았지만, 선왕의 폭정과 악마를 섬기는 이교도 무리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만일 교단에서 우리의 사정을 알고도 외면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라졌겠지만 말입니다."
말에 가시가 있는 루케테의 말에 성기사들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루미네르는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교단보다 아슬란 대기사단장에 대한 신뢰가 높아 보이는구려."
"그야 그럴 수밖에요. 모두가 외면한 곳이었지만, 아슬란님께서는 이곳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군을 전멸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꾐에 넘어간 루시안을 처단하여 최소한의 피해로 왕국을 존속시켜 주셨지요."
아슬란이 엘버스테인과 함께 왕국을 수복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백성들이 이 정도로 교단을 싫어하고 아슬란을 따를 줄은 몰랐다.
"그 이후에도 오메르 왕국이 재건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셨으니, 우리 왕국에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은 큰 은인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타 왕국의 대기사단장을 이 정도로 신뢰하다니.
"어서 오시오. 내가 오메르 왕국의 국왕, 엘버스테인이오."
루미네르는 얼마 안 있어 엘버스테인을 알현할 수 있었다.
금발 머리에 선한 눈동자.
그 인상만으로도 이 왕이 어떤 성격인지 알 것 같았다.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라고 합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엘버스테인의 성격은 꽤나 급해 보였다.
"관례상 하는 순찰입니다."
"관례상 하는 순찰을 무려 대성기사단장이나 되는 인물이 한다라. 교단에서 꽤나 진심인 것 같소. 거기다 데려온 기사들과 사제들의 숫자도 3천이 넘던데."
엘버스테인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 루미네르가 답했다.
"그만큼 교단도 진심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대륙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 빛의 이름으로 심판할 겁니다."
"진작 그리 했다면 우리 오메르 왕국도 많은 도움을 받았을 텐데, 아쉽구려."
이 왕은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건가.
하지만 교단에서 진행한 조사에 의하면 어떤 악마의 흔적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교단에서는 분명 입장을 밝혀 드렸을 텐데요?"
"그대는 그것을 믿소? 난 이 두 눈으로 직접 본 걸 믿을 뿐이오."
교단이 의도적으로 조사 내용을 조작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그대들이 우리 왕국에 오래 머무르는 걸 보고 싶지 않소. 내가 잘 아는 분께서 그러셨지. 서로 신뢰가 없으면 같이 싸울 수 없다고. 난 교단을 신뢰하지 않소."
"······교단을 믿지 않는 건 큰 실수이십니다."
"그 책임은 내가 지지. 그러니 이제 그만 왕국에서 나가 주시오."
차가운 엘버스테인의 반응에 루미네르와 성기사단은 쫓겨 나듯 왕궁 밖으로 나왔다.
"저런 무례한 자가 이 왕국의 왕이라니!"
"교단을 모욕한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기사들은 불만이 많았으나, 반대로 루미네르는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악마를 보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교단에서는 분명 오메르 왕국에서 악마와 결탁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혹시 그게 가짜일 수도 있는 것인가.
아니. 아니다.
평생을 교단에 충성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단 한번도 교단을 의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이들이 혼란에 빠진 건 모두 아슬란 때문이다.
"너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말거라. 우린 오메르 왕국과 싸우고자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
바로 아슬란을 처단하는 것.
무려 라할께서 신탁으로 내리신 명령이다.
그 명령에 따라 당장 일라이 왕국으로 달려가 아슬란의 목을 쳐야겠지만.
'그의 힘이 카르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면 섣불리 공격할 순 없지.'
더군다나 한 가지 더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리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슬란 곁에 남아 있는 하리엘이었다.
"너희는 이곳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예? 바로 일라이 왕국에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잠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 하리엘이 휩쓸리도록 가만 놔둘 순 없었다.
그리고 루미네르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 *
검은 낙뢰가 떨어진 곳은 바로 여기.
오메르 왕국 국경선과 인접한 래피들의 서식지였다.
래피라고 하면 나무를 타고 다니는 몬스터들인데, 원숭이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다. 물론, 그 양아치 같은 동물처럼 사람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공격성이 짙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시끄럽지만, 온순한 놈들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서 최초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 이상은 없어 보이는군요."
아론의 말대로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너무 조용하지 않느냐?"
"예?"
"래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놈들이다. 그런데 이곳은 무척 고요하군.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 흔한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구나."
"아-"
분명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나는 기사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주변을 샅샅이 탐색해 보거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대기사단장님. 나무에 이런 것이 적혀 있습니다."
피로 적힌 붉은 글씨.
이들은 처음 보는 문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게임에서 하도 많이 봤던 문자였기에 단번에 알아차렸다.
"테키나 족속의 문자로군."
흑마법 의식에 쓰인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곳에도 비슷한 글자가 있습니다, 대기사단장님!"
이곳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문자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숲 전체를 의식에 사용했다는 것인데, 대체 무얼 하려고 이렇게까지 해놓은 거지?
'이 자식들 설마······.'
한 가지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끼이이-!!"
방금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래피들의 울음 소리가 숲 안을 가득 채웠다.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변해 버린 래피들은 떼거지로 우리 기사단을 향해 사방에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론이 소리쳤다.
"기사단!! 전투 준비!"
기사들은 칼을 뽑아 들고 밀려오는 래피들을 경계했다.
'광폭 마법이었구나.'
아무리 온순한 몬스터라도 날뛰게 만드는 광폭 마법.
테키나 문자들이 숲 곳곳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직감했었다.
검은 낙뢰는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몬스터들을 광폭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번 광폭화 마법에 걸려 버리면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든다.
'저것들을 일일이 다 잡을 수는 없는데.'
이 마법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보통 이런 광폭 마법에 근원이라고 한다면-
쿵-! 쿠웅-!!
이 무리의 최고라 할 수 있는 보스 몬스터밖에 없었다.
"크오오오-!!"
자이언트 래피.
모험가들이, 플레이어들이 래피의 서식지를 지나도 그냥 건들지 않고 지나가는 이유는 바로 저 자이언트 래피 때문이다.
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평소에는 무척 온순하고 조용하며, 그냥 한량처럼 먹고 잠만 자는 몬스터이나, 누군가가 래피들을 괴롭히면 벌떡 일어나 응징을 해버리는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저기에 근원이 있구나.'
래피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마기에 의해 검게 변한 자이언트 래피의 몸 중앙에 검은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저기에서 나오는 기운이 래피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라파엘, 알렉산더. 너희 둘은 몰려오는 래피들을 상대하거라. 그리고 하리엘, 아론. 너희 둘은 저 자이언트 래피를 죽이고 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이런 일을 대비해 기사 1,000명을 데리고 왔으나, 지형이 험하고 좁아서 저 많은 래피들을 다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가진 네임드들이 잘 활약만 해준다면 큰일은 없겠으나,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 나한테는 오지 마라.'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내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쏴라!"
"몬스터들이 접근하도록 허용하지 마라!"
라파엘은 마법의 힘으로 래피들이 다가오는 족족 녹여 버렸고, 알렉산더는 모두 활을 들게 하여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요격했다.
그리고 아론과 하리엘은,
"흐아압-!"
"크오오오!!"
고릴라처럼 가슴을 치며 다가오는 자이언트 래피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역시 쉽지 않네.'
두 실력자가 협공을 펼치고 있었지만, 자이언트 래피는 쉽사리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단한 맷집도 맷집이겠지만, 저 가슴에 박혀 있는 근원이 광폭화를 시켜 고통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거기다,
"우끼이이-!!"
"마, 막아라!"
벌레떼처럼 몰려오는 래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결국 기사들은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지형이 험하고 좁아서 저것들이 나무를 타고 내려와 공격을 해버리면 기사들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크오오-!!"
하리엘과 아론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자이언트 래피가 갑자기 몸에서 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엇!"
"윽!"
갑작스러운 마기 공격에 균형을 잃은 두 사람은 저 큼지막한 손에 맞아 저 먼발치까지 날아가 버렸다.
저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크르르르-"
저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는 것이다.
"어어? 여, 여기로 온다."
"마, 막아!"
내게 래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열심히 칼을 휘두르고 있던 호위 기사들은 쿵쾅 거리며 다가오는 자이언트 래피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저 둘이랑 싸울 것이지. 왜 나한테-!'
속으로 원망하고 있을수록 놈과 나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윽고,
"크오오-!!"
놀라운 점프력으로 높이 날아오른 자이언트 래피가 괴성을 지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감히."
강렬한 허세가 등허리를 타고 치밀어 오르면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크, 크르-."
자이언트 래피의 몸이 일직선으로 허공에 붕 뜬 채로 멈춰 있었다.
"미물 따위가 누구의 몸을 만지려 드는 것이냐?"
그뿐만이 아니라,
"크, 크윽······."
"으으······."
칼을 들고 래피들을 베어 버리려 하는 기사들,
상대를 물어뜯으려 높이 날아올랐던 래피들 역시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제자리에 얼어 버렸다.
권능의 염력.
긴박한 상황이라 능력을 펼친 것이었는데, 적아를 가리지 않고 반경 300m에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염력으로 붙잡은 것이었다.
"거기다 이 몸을 내려다보다니. 건방지구나."
나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허세를 느끼며 놈에게 명령했다.
"꿇어라."
쿠웅-!!
그러자 그 육중한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히며 비명을 토해냈다.
"크, 크오오-."
광폭화에 미쳐 버린 탓에 놈은 몸부림을 치며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꿇어라."
쿠우웅-!!
다시 한번 놈의 몸이 저 바닥 밑까지 처박혀 버렸다.
"너는 감히 나를 내려다볼 수도, 올려다볼 수 없다."
자이언트 래피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69화
0.01초 소드마스터 69화
"언령······인가?"
멀리서 은밀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미네르는 몸을 잘게 떨었다.
언령.
오직 말의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능.
라할의 보좌관이라 불리는 천상의 존재들만이 그 힘을 가지고 들었다.
하지만 루미네르도 그것을 그저 기록으로만 접했을 뿐, 실제로 목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저자가 저런 힘을······!"
꿇으라는 말 한마디에 저 거대한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에 있던 래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마터면 나도 당할 뻔했군."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길 잘했다.
만일 조금만 더 가까이 접근을 했다면 자신도 저 언령에 휩쓸려 버렸을지 모른다.
"아니. 내가 뭔가를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작 인간이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언령은 신의 권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분명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콰직-!!
"크오오오-!!"
바닥에 처박힌 자이언트 래피가 괴성을 질러대며 밖으로 검은 기운이 퍼져 나갔다.
마치 생기가 다 했다는 듯, 그 마지막 포효에 다른 래피들도 함께 괴성을 질러댔다.
그와 동시에 검게 물들었던 그들의 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노, 놈이 다시 일어난다!"
자이언트 래피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자 기사들이 경계하며 칼끝을 세웠다.
"모두 물러나라."
"예? 하지만······."
"물러나라."
아슬란이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려는 것인가?
"미물이여."
그러나 루미네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슬란은 검을 뽑지 않고 마치 저 거대 몬스터와 대화하듯, 아니. 명령하듯 말했다.
"네 터전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크오-"
기우뚱 거리며 자이언트 래피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다른 래피들도 그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자이언트 래피의 뒤를 따랐다.
"······!"
루미네르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슬란, 저자는 정말로 언령을 부릴 줄 아는 것이다.
그는 잠시 제자리에 가만 있다 이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모두 돌아간다."
"예!"
루미네르는 제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칼을 뽑아 이곳에 꽂는다면 빛의 부름이 발동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부하들이 순식간에 이곳으로 텔레포트 된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접었다.
"이곳은 싸울 만한 지형이 되지 못한다."
거기다 아슬란이 언령의 힘을 발휘한다면 전면전은 결코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방금 전 저 몬스터들이 그러했듯, 성기사들이 아슬란의 말 한마디에 꼼짝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하리엘."
아슬란 뒤를 따르고 있는 하리엘이었다.
"음-"
루미네르는 살짝 뽑아 들었던 칼을 다시 집어넣으며 숲을 나가고 있는 아슬란과 그의 기사단을 다시 은밀히 따라가 보았다.
* * *
"이 숲을 더럽힌 놈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 놈들의 뒤를 쫓겠다."
"예!"
아슬란의 명령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하마터면 밀려드는 몬스터 웨이브에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뻔했다.
'근데 방금 그건 대체 뭐였을까?'
온몸을 압도하며,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
그런 엄청난 힘은 하리엘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몇 번을 고민해 봐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으나, 아슬란의 힘이라고 한다면 그냥 이해가 됐다.
애초에 상식을 벗어난 힘을 가진 남자니까.
"하리엘."
"······네? 아, 네."
"정보를 모으면서 성안에 있는 백성들을 도울 것이다. 너도 돕거라."
오늘도 성안을 순찰하며 백성들을 도우려는 거구나.
저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밑의 사람들을 시킬 만도 한데, 아슬란은 한번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항상 백성들을 돕고자 자신이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섰고, 사소한 일이라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이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제일 높은 사람이 저렇게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당연히 그 부하들은 더욱 열심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하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이 성안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고자 열심히 뛰어다녔다.
저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자신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 같았다.
"꽤나 열심이로군, 하리엘."
그런데 그때.
"······루미네르 님?"
"그래. 나다."
변복을 하고 있는 루미네르의 모습에 하리엘은 당황했다.
"여기는 어떻게-"
"너야 말로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지? 이제 그만 교단으로 돌아와라."
"하지만······. 전 아직 여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아슬란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잡일을 하는 것인가?"
"잡일이라니요. 이건 왕국 백성을 위한 일이에요. 루미네르 님도 보셨을 거 아니에요? 대륙 그 어떤 권세가도 아슬란 님처럼 백성을 챙기지 않아요."
"······."
그건 루미네르도 할 말이 없었다.
아슬란.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오는 인물이었다.
하리엘의 말대로 그 어떤 권세가도 이 정도로 백성들을 위하진 않는다.
"그래서 끝까지 여기 남아 있을 생각인가?"
"교단에서 아슬란 님에 대한 오해를 전부 풀 때까지요. 저분은 악마의 이름을 빌려 누군가를 현혹할 분이 아니세요. 언제부터 여기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전에도 마기에 중독된 몬스터들이······."
"되었다. 너의 뜻은 잘 알겠다."
아무래도 하리엘은 교단으로 돌아올 생각이 당분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자꾸 미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성기사단이 아슬란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피바람에 하리엘이 휘말려 들 건 자명한 일.
"마지막으로 묻겠다, 하리엘. 넌 정말로 여기에 남아 있을 생각이더냐?"
"네."
"그게 네 목숨을 위협한다고 해도?"
"옳다고 믿는 일에 목숨을 걸 줄 알아야 한다고 루미네르 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런가······. 그렇군."
그녀의 선택이 그러하다면야 루미네르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곧 성기사단이 아슬란을 죽일 것이니, 너도 같이 죽기 전에 얼른 빠져나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하리엘이 이 일을 아슬란에게 고할 수도 있다.
그럼 기회를 놓칠 수도 있기에 루미네르는 가까스로 치미는 감정을 다스렸다.
그리고 때마침.
"검은 낙뢰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저 멀리서 기사 하나가 성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아-!"
하리엘이 눈짓을 보내자 루미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거라."
"네. 그럼······."
그는 하리엘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는 하리엘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그런 뒤 다시 떴을 땐.
"······."
어느새 그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서 있었다.
"검은 낙뢰라."
루미네르는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과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검은 낙뢰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곳인가."
그는 또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의 앞에는,
"오오. 강력한 마기가 느껴진다."
"이것으로 위대한 악마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리라."
금지된 의식을 진행 중인 이교도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일이군.'
테키나 족속이 쓴다는 문자가 사방에 적혀 있고, 더러운 악의 힘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이교도 무리를 붙잡아 왔으나,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의식을 펼치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곳도 그렇고 아까 래피들의 서식지에서 일어난 일도 그렇고.
대체 이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스르릉-!
"음?"
"너, 넌 누구냐!"
길게 생각할 건 없었다.
교단의 대성기사단장답게, 라할의 명령만을 따르는 기사답게, 눈앞에 있는 이교도 무리를 없애고 철저히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
"모두 빛에 정화되어라."
스걱-!
"크악!"
"서, 성기사다! 으악!"
루미네르는 100명이 넘어가는 이교도 무리를 혼자서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마법진이 그려진 중앙에는 심장처럼 펄떡대는 검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이것이 검은 낙뢰를 일으키며 의식을 빠르게 활성화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악마를 소환하는 마법진이었다.
"이런 건 보고를 받지 못했는데."
래피들도 이것 때문에 그렇게 폭주를 했던 것일까.
왜 교단에서는 이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던 거지?
심지어 악마 소환이라니.
설마 엘버스테인의 말대로 교단에서 정보를 조작하는 건······.
"으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루미네르는 그 검은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려다 높이 솟은 양쪽 절벽을 보고 칼을 멈췄다.
"······."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절벽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 매복한다면 꼼짝 없이 당해야겠구나."
검은 낙뢰가 치는 것을 보고 지금 아슬란의 기사단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곳에 성기사단을 매복시켜 공격을 퍼붓는다면.
"틀림없이 전멸이다."
그럼 그곳에 있는 하리엘도 휩쓸리게 될 것이다.
루미네르는 주먹을 꾹 쥐었다.
언령으로 몬스터들을 제압하는 그 무지막지한 힘과 백성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아슬란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멤돈다.
그를 죽이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인가.
하지만 이미 라할의 신탁까지 받은 상태.
거기다 마치 운명처럼 상대를 단숨에 괴멸시킬 수 있는 지형에서 아슬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신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라할의 뜻이었다.
루미네르는 칼을 바닥에 꽂으며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성스러운 빛이 칼을 타고 넓게 퍼지면서 저 어딘가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과 사제들이 한꺼번에 절벽 위로 소환되었다.
* * *
'역시 악마가 아니면 마기 포식이 안 되는 거였구나.'
자이언트 래피를 염력으로 제압하고 나서 놈에게 박혀 있는 구슬을 꺼내 마기 포식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놈의 몸에 박혀 있는 구슬로는 마기 포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로 잘 끝내서 다행인 건가.'
검은 구슬이 파괴되면서 자연스레 래피들의 광폭화가 풀렸고, 자이언트 래피 역시 공격성 없는 순수한 초식 몬스터로 돌아왔다.
기사들이 눈치 없이 다시 공격을 하려고 해서 식겁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번에는 뭔가 있긴 하겠지.'
지금 검은 낙뢰가 발견된 곳은 몬스터 서식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숭배자들이 무언가를 소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막아야 한다.
마기 포식이든 뭐든 우리 왕국 영토에서 악마가 소환된다면, 그것도 만약 네임드급 보스가 소환된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난 뒤에 있어서 지켜만 봐야겠다.'
아까처럼 그런 위기 상황은 이제 제발 사절이었다.
우리 네임드 캐릭터들이 알아서 잘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곳입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을 해가는데, 아직도 검은 낙뢰가 간간이 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아직도 의식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뭐가 소환되기 전에 쓸어 버려서 의식에 사용되는 재료들만 싹 챙겨오면 되겠다.'
그렇게 부푼 꿈을 꾸며 절벽 사이를 지나 가던 중.
"이교도들이여. 어딜 그리 가는 것이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나는 달리던 말을 멈추고 위를 바라보았다.
'저, 저게 뭐여.'
절벽 위에 가득 모여 있는 성기사들과 사제들.
대체 저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빛의 심판이 너희에게 가까워졌다."
[루미네르]
무력: 95
지력: 80
그리고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였다.
'빛의 부름이구나.'
오직 교단에서 루미네르만 쓸 수 있다는 텔레포트 능력.
교단이 그의 능력을 마법으로 증폭시켜 저 수많은 병력을 한꺼번에 이동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저 정도의 병력이 우리 정보망에 걸리지 않고 이곳 절벽을 가득 채울 정도라면, 빛의 부름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래서 루미네르를 경계했던 건데.'
교단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가 움직이면 언제 어디서 그의 기사단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이거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새끼 신세잖아.'
이곳은 적은 숫자로도 대군을 이길 수 있다는 절벽 지형이다.
저런 곳에서 매복해 있다가 한꺼번에 공격을 퍼붓는다면 이 좁은 길에 갇혀 하루 종일 공격만 받다가 죽어야 한다.
더 심각한 건, 저들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루미네르는 곧 칼을 뽑아 들고 우리를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이교도들에게 라할의 심판을-!"
그러자 기사들과 사제들이 동시에 소리를 외치며,
"심판을-!!"
수천 발의 화살비와 마법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것도 마치 노린 것처럼, 모든 공격이 일제히 내가 있는 곳으로 쏟아졌다.
"아-"
나는 실로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운 그 광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기사의 명예나 정정당당한 싸움은 루미네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라할의 명령에 따라 이교도를 처단하는 데에 있어서 그런 건 일절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상대는 언령을 쓰는 자다.
정면으로 부딪혔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기에, 이렇듯 폭풍우처럼 한번에 공격을 퍼부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리라.
그래서 일부러 루미네르는 모든 공격을 아슬란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니,
"죽어라."
죽어서 라할의 심판을 받거라, 아슬란.
그런데-
"······?"
빛의 마법이 깃든 화살과 강력한 마법탄을 한꺼번에 쏟아붓던 기사들과 사제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지금쯤이면 저 아래는 지옥이 되어 비명 소리로 가득해야 하거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놀랍게도,
"뭐, 뭣!?"
"저게 무슨 해괴한-!"
그 수많은 화살과 마법탄이 허공에 얼어붙은 듯 머물러 있었다.
기사들은 놀란 기함을 터트렸고, 사제들 역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스르르르-
허공에 가만히 떠 있던 화살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꿔 그 촉이 아래가 아닌 위를 향했다.
"서, 설마-."
하는 생각도 잠시.
쏴아아아-!!
아래로 내려갔던 화살들이 다시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 보냈던 마법탄들도 전부 튀어 올랐다.
"피, 피해라!!"
이미 그런 말을 하기에도 늦은 것 같았다.
콰콰콰쾅-!!
"으, 으아아악!!"
"크아악!"
절벽 아래에서 펼쳐져야 할 지옥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위로 솟아오른 화살비에 이어 함께 튀어 올라 절벽을 깨부수는 마법탄에 절벽 위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루미네르는 일이 터지기 직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피해 화를 면했다.
하지만 기사들과 사제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이럴 수가."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피해를 입은 거지?
절반? 아니. 절반 이상.
어쩌면 대다수의 병력이 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공격을 당했으니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죽어야 하는 건 아슬란과 그의 기사단일 텐데, 대체 왜 교단의 성기사단이······!
"인간은 항상 착각을 하곤 하지."
"!?"
그때 위엄 넘치는 음성이 절벽을 갈랐다.
"더 많은 숫자가 있으면, 확실한 지형의 우위를 잡으면, 반드시 상대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흠칫 놀란 루미네르는 쓰러진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런 것들은 전부 내게 무용할 뿐이다."
절벽 위에 가득한 뿌연 연기 속에서 아슬란이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70화
0.01초 소드마스터 70화
"······."
나는 절벽 위에 널브러진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고, 찰나의 판단이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화살과 마법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고 수호신의 방패를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생각을 바꿨다.
나 혼자 살아남는다고 해서 이 많은 군대를 혼자 상대할 순 없기 때문이다.
'래피들의 서식지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기에 망정이지······.'
권능의 염력을 조금이라도 잘못 다루었다면 이 정도의 반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스킬이 없다.'
쏟아져 내려오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15초.
다시 그것들의 방향을 돌려 되돌려 주는 데에 15초.
이미 두 번의 스킬을 다 쓴 뒤라 더는 내게 이들을 상대할 만한 힘이 없다.
물론, 이놈의 허세에 취해 여기까지 잘 올라오긴 했으나.
'루미네르가 저기서 칼을 뽑는다면······.'
이 나약한 아슬란의 몸으로는 한 초의 상대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보라.
단 한 번의 반격으로 괴멸 수준에 이른 교단의 군대.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나.
그리고 저 겁먹은 눈동자까지.
완벽한 무대가 이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어리석구나. 교단의 개들이여."
발을 앞으로 내디디기만 하면 된다.
"너희의 역겨움에 구역질이 나는구나."
나는 천천히 한 걸음씩 허공 위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갔다.
"으으."
"이, 이런 괴물 같은······!"
그러자 방금 전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쳐댔다. 이들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두려움이 내 허세를 자극했다.
이미 아슬란의 허세에 나도 뼛속 깊이 물들어 버린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하면 더 허세를 부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들을 더 공포에 빠뜨릴 수 있을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스르르.
찰나의 괴력은 다 써서 쿨타임 동안 쓰지 못하지만, 가벼운 염력은 무한으로 쓸 수 있다.
나는 염력으로 검을 들어 내 주위를 비행하게 만들었다.
마치 그것이 자의로 나를 호위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 검이!?"
"저게 무슨-!"
난 아주 태평하게 팔짱을 낀 채 비행하는 검의 끝을 천천히 세웠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 아슬란이 이곳에 있다."
들끓는 허세에 심취하여 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가 기사의 명예를 안다면 검을 들고 내게 맞서거라."
"······!"
하지만 감히 내 앞에 검을 들고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그 흔한 마법탄 하나 내 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거기서 느꼈다.
이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는 것을.
"네가 이들의 대장인가?"
내 시선이 닿는 곳에 루미네르가 있었다.
그 역시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붙잡은 채 손을 바들바들 떠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칼을 들어라. 정녕 네가 이들을 이끄는 대장이라면 목숨을 내놓아 기사의 명예를 지켜라."
지금 루미네르와 싸운다면 나의 필패였지만, 난 나의 직감을 믿었다.
그동안 쌓일 만큼 쌓여온 나의 허세 데이터를 믿었다.
루미네르는 절대 내게 맞서지 않는다.
아니, 맞설 수 없을 것이다.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도 어찌 내게 칼을 겨눌 수 있을까.
과연 내 예상대로,
"크읍."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칼을 잡은 자세가 내게 대적하기 위함이 아닌,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준비 동작으로 보였다.
난 거만한 눈동자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미네르."
"!?"
"난 네가 누구지 알고 있다."
두 번 다시 그가 내게 칼을 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 네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도 알고 있다. 이대로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이냐?"
루미네르의 두 손이 멈칫거렸다.
"원하는 대로 하거라. 허나, 네가 쥐꼬리만큼 가진 기사의 명예도, 그 긍지도 이곳에 전부 두고 가거라. 네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아니. 교단의 기사라는 것들에게는 과분한 것들이지."
나의 모욕적인 언사에 루미네르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내 주변을 맴돌고 있던 검을 루미네르에게 천천히 보냈다.
"선택하거라. 이곳에서 기사의 명예를 지키며 함께 죽을지. 아니면 그 알량한 목숨을 보전할지."
물론, 루미네르가 여기서 내게 공격을 가하면 난 그대로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군."
나는 그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도록 부추겼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
"진정으로 기사의 긍지를 아는 놈이라면 이런 매복 공격을 하진 않았을 터. 너 같은 놈의 피를 묻히는 것조차 내게는 수치다."
루미네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크윽-!"
검을 비틀어 땅에 꽂았다.
그러자 천상의 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루, 루미네르님!!"
"설마!?"
그 빛을 보고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저 빛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우,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루미네르의 저 특별한 능력.
교단에서는 저것을 빛의 부름이라 부르는 텔레포트 능력이다.
저렇게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심지어 군대 전체를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이들과 함께 데려갈 수 없는 건 마법 보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마법의 도움 없이는 군대를 한꺼번에 텔레포트 시킬 수 없었다.
"용서해라. 누군가는 이 일을 교단에 알려야 한다."
루미네르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복수를 다짐하거나, 살의로 가득 찬 눈빛이 아니었다.
앞으로 다시는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 물든 눈동자였다.
"교단에 내 뜻을 알리거라. 또 한번 나를 자극한다면 그땐 내가 직접 교단으로 군을 이끌고 가겠다고. 그럼 그날이 교단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내 말을 끝으로 루미네르에게 내려오던 빛이 사라졌다.
그렇게 그는 빛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갔다.
"아아- 루미네르님."
"어, 어째서 우리를······."
절벽 위에 남게 된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히익!"
"도, 도망가!"
더는 반격의 의지도 없어 보이는 그들은 내게서 멀어지고자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대기사단장님!!"
내가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언덕길을 타고 올라오던 나의 기사들이 양쪽 절벽 위에 도착했다.
"아······."
"이, 이제 우린 다 죽었다."
싸울 의지도 없던 그들이, 이제는 도망칠 의욕까지 꺾여 버렸다.
"이 더러운 놈들!"
"우릴 매복해 죽이려 하다니!"
"당장 놈들을 이 자리에서 도륙하겠습니다!"
기사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러운 매복 공격에 전멸을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특히 우리와 동행 중이었던 하리엘도 큰 충격에 빠진 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놈들을 다 죽여 버리는 건 그냥 기분만 풀 뿐, 가성비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 버러지 같은 놈들을 죽여 너희의 검과 명예를 모욕하지 말거라."
"하, 하옵시면······."
"포로로 붙잡아 두거라. 이들에게 달콤한 죽음을 선사할 순 없지."
"예!!"
이놈들을 붙잡아 두면 두고두고 쓸 일이 많다.
노동력으로 쓸 수도 있고, 더욱더 나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켜 교단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원래 포로를 잡으면 우리 왕국에 대한 공포심을 끝없이 심어 준 뒤, 다시 돌려보내 적국의 사기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 전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곧 나의 화살이 되어 교단을 향해 쏘아질 것이다.
* * *
레이어스 교단의 원로들은 오늘도 태평하게 자리에 앉아 승전보가 오기를 기다렸다.
교단이 가진 최고의 검이자, 지금껏 단 한번도 주어진 임무를 실패하지 않은 루미네르다. 이번에도 반드시 그 임무를 충실히 해낼 것이라 이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쯤이면 결판이 났겠군."
"루미네르가 매복 공격을 하겠다고 했으니, 아슬란은 라할의 심판을 받고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후후. 그렇겠지. 상대는 우리의 자랑거리인 루미네르이지 않소?"
그렇게 차를 마시며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투웅-!!
전각 밖으로 보이는 빛의 기둥에 이들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루미네르가 왔구려."
"승전보를 가지고 온 기사로군."
"그를 환대해 주도록 합시다."
원로회 장로들은 빛의 기둥이 떨어지는 곳으로 직접 나가 보았다.
아주 큰 전공을 세운 루미네르를 직접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초췌한 루미네르의 모습에 장로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 라할께서 신탁으로 내리신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을 하였나?"
"······."
대답은 하지 않고 넋을 놓은 채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루미네르였다.
그러자 대장로가 언성을 높이며 그를 불렀다.
"루미네르!"
그제서야 루미네르가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라할께서 제게 맡기신 그 신성한 임무를 다 해내지 못했습니다."
"뭐, 뭐라!?"
"기, 기사단은? 기사단은 어쩌고 자네 혼자만 이곳에 왔는가?"
"······."
여기저기서 질문을 쏟아내도 루미네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대장로가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봤는지 우리도 봐야겠다. 눈을 열어라, 루미네르."
루미네르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은 채 양팔을 벌렸다.
대장로는 손을 뻗어 그에게 심어져 있는 교단의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루미네르가 직접 보고 느꼈던 기억들이 머리 위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언령?!"
그 첫 시작부터가 요란했다.
언령이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으로 폭주하는 몬스터들을 잠재우는 것으로 모자라, 무슨 힘인지도 모를 것으로 매복하고 있던 기사단을 순식간에 쓸어 버렸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이들의 심장에 비수로 꽂혔다.
[또 한번 나를 자극한다면 그땐 내가 직접 교단으로 군을 이끌고 가겠다고. 그럼 그날이 교단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그 둔중한 음성을 듣는 듯, 루미네르의 생생한 기억이 투영되어 이들의 머리에 박혔다.
"이, 이게 대체······."
"어찌 인간이 저런 힘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신비스럽고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는 언령의 능력을 가진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그 많은 성기사와 사제를 한꺼번에 쓸어 버린 그 힘은 대체 어찌된 것인지-.
그동안 꾸준히 교단은 아슬란이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그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측정하고자 정보를 모아 왔으나, 매번 그는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으로 이들의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그, 그래서 교단의 대성기사단장이라는 자가, 라할의 위대한 뜻을 받드는 자가 눈앞에 있는 표적을 앞에 두고 그냥 돌아왔다는 것인가!"
크게 충격을 받은 대장로의 호통에 루미네르는 검을 앞에 두었다.
"······죽여 주십시오. 전 교단의 기사가 될 자격을 잃었습니다."
"뭐, 뭐라?!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적의 목을 반드시 베어 오겠다고 말해도 모자를 판에!"
"아슬란의 말대로 전 기사의 긍지도, 명예도 없으며 그저 겁을 먹어 도망친 놈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라할의 뜻을 이룰 수 있단 말입니까."
축 처진 루미네르의 고개를 보고 장로들은 할 말을 잃었다.
교단의 자랑거리이자, 그 어떤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빛의 뜻을 행해 왔던 루미네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완전히 겁에 질려 검 한 자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 이걸 대체 어떡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대장로는 그저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었다.
* * *
'교단이랑은 이제 완전 쫑이구나.'
이 개 같은 놈들이 설마 그런 식으로 공격을 감행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최소한 전조라는 것이 있을 법도 한데, 이건 다짜고짜 빛의 부름으로 매복을 해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니, 하마터면 게임이 끝날 뻔했다.
이것도 아마 난이도 영향 때문이겠지.
'당분간은 안 엮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게임을 계속 진행하려면 언젠가는 교단과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미 악마에 굴복한 교단 사람들이 있는 반면, 진짜 빛의 뜻에 따르고 선한 의지를 중요시하는 교단의 기사들과 사제들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 스토리대로라면 그들은 알렉산더를 대륙의 영웅으로 앞세워 빛의 신들 앞에서 표증을 얻어내고 그것을 온 대륙에 공표하기에 이른다.
즉, 알렉산더를 완벽한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교단과의 끈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놈들 빼고 진행해야지."
물론 교단을 완전히 배제하고 플레이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어떻게 진행될지는 앞으로도 쭉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당분간 교단 놈들이 안 날뛰게 하려면 포로들을 잘 이용해야겠지?"
이미 아론과 호레스에게 붙잡아온 포로들을 맡겼다.
나에 대한 공포심을 가득 심어 준 다음 교단으로 돌려보내 그 안에 있는 기사단들도 함께 공포에 빠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면 교단에서도 당분간 쉽사리 우릴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 잘하고 있는지 한번 봐볼까?"
나는 집무실을 나가 아론과 호레스가 열심히 세뇌 교육 중인 장소로 이동해 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분의 위대하심은 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저 악마마저도 두려워하는 그분의 힘을 너희도 그날 절벽에서 느꼈을 터!"
분명 나는 저들에게 나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라고 했는데, 이건 공포가 아니라 마치 기사단 자원을 독려하는 연설처럼 보였다.
"그동안 너희는 기사의 명예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지만, 위대하신 아슬란 님을 따르게 된다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너희도 명예로운 기사가 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닥을 치고 있는 군의 사기도 반짝 끌어 올릴 수 있는 아론의 특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저 성기사들이 멍청한 것일까.
"오오!"
"우리도 명예로운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교단은, 그리고 루미네르는 우리를 버렸습니다!"
겁을 먹고 눈물을 질질 짜며 교단으로 돌아가야 할 놈들이 눈물은 커녕 아주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교단과 루미네르가 너희를 버렸을지언정,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너희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헛된 것에 너희의 아까운 목숨을 바치지 말고 우리 아슬란 님을 위하여 새롭게 태어나거라!!"
"와아아아-!!"
나는 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 저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저놈들을 교단으로 돌려보내 공포가 전염되도록 만들려 했더니 오히려 먹여 살려야 할 입을 늘리고 있었다.
"······."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친 아론은 내게 조용히 기사의 예를 차렸다.
마치 임무를 아주 잘 수행했으니, 얼른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71화
0.01초 소드마스터 71화
"오직 이 대륙의 운명을 이해하고 거짓된 신에 놀아나는 백성들을 구해낼 사람들은 바로 우리밖에 없소."
숭배자들은 빛이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키고, 어둠만이 대륙의 구원이 된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빛으로 오염된 이곳을 어둠으로 정화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금까지는 빛이 대륙을 지배해 왔으나, 이제는 다르다. 곧 어둠이 대륙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지난 300년간 대륙은 빛의 지배 아래 살아왔다.
숭배자들은 빛을 피해 지하에 숨어 때를 기다려 왔고, 마침내 그때가 도래했다.
어둠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테키나 족속이 하나둘 봉인을 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되는 곳이 있소이다."
원탁회의에 모인 숭배자들은 그게 누군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 그자가 우리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소!"
"그놈이 나타난 이후로 간신히 부활시켜 놓은 어둠이 전부 사라지고 있는 중이오!"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또 다시 어둠은 빛에 의해 사라질 것이오."
숭배자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테키나 족속에게 걸려 있는 봉인을 조금씩 풀어 이 대륙에 어둠을 다시 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슬란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다.
그 어떤 강력한 악마를 소환해 놓아도 아슬란의 손에 족족 죽어 버리니, 이들 입장으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노트라드의 예언서에 나온 대로 아슬란 그자가 예언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소."
"흥. 빛의 기사에 대한 예언 말인가? 그 노망난 늙은이의 예언 따위, 난 믿지 않소."
"마냥 무시할 것은 못 되오. 노트라드는 당대 최고의 예언자였소. 그렇기에 그가 남긴 예언서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겠지."
노트라드의 예언서.
앞으로 이 대륙에 닥칠 재앙이 무엇인지, 대륙이 어떤 위기에 빠지는지 기록되어 있는 예언서였다.
사람들이 이 예언서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단순히 파멸적인 재앙이 예정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바로 이 대륙을 구원할 빛의 기사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
항상 사람은 영웅에 열광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백성들이 이 무시무시한 예언서에 열광하는 것이었다.
"아슬란을 빛의 기사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소. 비록 신전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소? 그가 가진 힘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중 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숭배자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특단의 조치라면······."
"대악마를 소환합시다."
"!?"
화들짝 놀란 이들의 눈빛에는 지금 진심이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대악마라니······. 그건 기존의 계획보다 너무 이르지 않소?"
"우리가 테키나 족속의 봉인을 한꺼번에 풀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통제 가능한 범위여야 하기 때문이오. 무분별하게 소환했다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을 것이오."
이들은 마냥 흑마법에 미쳐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어둠으로 빛을 몰아내고자 함은 사실 간단했다.
권력욕.
이 대륙을 자신들 발아래 두고 싶다는 욕망.
그 수단으로 테키나 족속의 봉인을 풀려는 것이지, 절대 테키나에게 이 대륙을 넘겨주려고 이런 짓을 꾸미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악마 소환은 엄청난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
"그건 아직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않소? 그동안 여러 차례 경험을 쌓으면서 우린 마침내 다양한 악마들을 소환해 낼 수가 있게 되었소. 그리고 조금씩 그들을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까지 성공했지. 대악마 소환도 그와 같은 이치요."
"아무리 그래도 대악마는······."
대악마.
이들 중 그 누구도 대악마를 마주한 적은 없다.
하지만 300년 전 대악마들은 이 대륙을 지옥도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들의 강함과 잔인함에 대한 정보는 다 기록될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대악마 하나만 나타나도 성 하나가 쑥대밭이 된다는 말이 있다.
대악마 중에서도 급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왕국 전체가 쓸려나갈 정도로 그들의 힘은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보자는 것이오? 이러다가는 영원히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없소! 대악마의 힘이 두렵기는 해도 시도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 더군다나 이대로 있다가는 어차피 이도 저도 되지가 않소."
오랫동안 음지에 숨어 어둠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렸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 지독한 지하 세계로 돌아갈 순 없었다.
"까짓것 해봅시다!"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제아무리 대악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300년 전 전쟁으로 그 힘이 예전 같지 않을 테니, 우리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것이오!"
흩어졌던 의견이 모였다.
세상을 움켜쥐겠다는 욕망이 모인 결과.
그것은 바로 이 땅의 가장 큰 재앙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대악마의 부활이었다.
* * *
"숲도 정화하고 숭배자들도 처단하고, 교단의 매복 공격도 막아내고. 그런데 정작 나는······."
얻은 것이 없구나.
마기 포식이라도 하나 했다면 모를까.
"진짜 가성비 지리네."
무엇 하나 얻은 것 없이 열심히 봉사만 한 기분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이 있다면,
"이 염력 스킬 하나는 건졌다는 거?"
나는 염력으로 천천히 검을 띄웠다.
다른 스킬들과 마찬가지로 내 힘에 비례하는 능력이지만, 계속 꾸준히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염력은 하면 할수록 조금씩 그 힘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근육처럼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검 하나뿐만이 아니라 두 개까지도 내 염력으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물론 찰나의 괴력을 쓴다면 검 두 개가 아니라 수천 자루도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겠지.
언젠가 나도 찰나의 괴력에 의지하지 않고 이 염력 하나만으로 적들을 쓸어 버릴 날이 올까.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다 보면 결국에는 키우던 캐릭터의 힘이 너무나도 강해져 나중에는 혼자 무쌍을 찍게 되는데, 이 아슬란으로도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찰나의 괴력을 무한으로 쓸 수 있게 되면 가능할지도?"
그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이곳저곳에서 능력과 아이템을 수집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아이템 하나만 줘라, 좀."
그렇게 개발자들을 원망하며 빌고 있을 때였다.
"대기사단장님. 아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목소리에 굽어 있던 고개가 펴지고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들어와라."
"예."
집무실 안으로 아론, 호레스, 알렉산더, 라파엘, 그리고 하리엘이 들어왔다.
"대기사단장님을 뵙습······ 헉!"
그들은 들어오는 길에 내 주변을 비행하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발견하고는 멈칫거렸다.
"앉지."
"아, 예."
나는 두 검을 원래 자리로 천천히 돌려놓았다.
빠르게 내려놓고 싶어도 아직 염력이 익숙하지가 않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대단한 경지이십니다. 검들이 오직 대기사단장님의 명령만을 따르다니."
"저것이 신검합일에 이르면 닿을 수 있다는 어검술입니까?"
아론에 이어 알렉산더까지 눈빛을 반짝였다.
신검합일이니 어검술이니 전혀 나와는 관계없는 능력이었다.
그냥 염력으로 보일 수 있는 잡기술 정도랄까.
너희가 가진 특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
하지만.
"끝없이 정진하도록."
이놈의 허세가 이걸 그냥 지나칠 리 없지.
"너희도 끝까지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이 경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예!"
아론과 알렉산더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의지를 다졌다.
만약 저 두 사람이 내게 신검합일도, 어검술 같은 것도 없는 깡통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흠.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성기사들에 이어 사제들도 모두 대기사단장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호레스의 말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교단에 대한 충성심이 강할 줄 알았는데."
"루미네르가 겁을 먹고 자기 혼자 도망치는 것을 보고 교단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린 것 같더군요."
"성기사들이 전투 경험도 많아서 앞으로 기사단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뭐 썩어도 준치라고.
무려 루미네르를 따르던 성기사에 사제들이니, 평타 이상은 할 것이다.
"저희 마법 병단에 새로운 인재들이 들어와서 너무 좋아요."
라파엘도 만족해하는 거 같고.
그럼 그냥 쓸 수밖에 없나.
혹시라도 그놈들이 나중에 다시 교단의 꾐에 넘어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방비도 미리 해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하리엘."
"······."
"하리엘?"
"아, 네."
하리엘은 내가 루미네르와 충돌한 이후부터 쭉 저 상태였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흔들리지 않게 네가 잘 붙잡아주도록 하거라."
"······네."
힘없이 대답하는 하리엘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면 혹시 넌 벌써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냐?"
"······?"
"이해한다. 나와 교단이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너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다."
"지, 진심이세요?"
"그래. 네가 교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비록 그들이 루미네르를 움직여 나와 너를 동시에 죽이려 했지만, 그럼에도 네가 교단을 버릴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하리엘."
제발 교단으로 돌아가지 말아 주세요.
제발.
하리엘은 잠시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말했다.
"제 선택에 달린 일이라는 것이군요."
"그래. 오롯이 네 선택이다. 항상 교단에 의해, 교단을 위해 선택했겠지만, 누구도 너의 선택을 강요해서도 억압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너를 위한 선택을 하거라."
"제가 교단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고 해도 정말 막지 않으실 건가요?"
당연히 막고 싶지!
할 수 있다면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고 싶다.
그녀는 내가 가진 아주 소중한 네임드 캐릭터니까.
하지만 나는 하리엘의 특성을 알고 있다.
[자유의지]
선택을 강요받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의지를 통해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특성이다.
지금까지의 하리엘은 교단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단이 선택을 강요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모두 하리엘 본인의 선택이었다.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녀는 내 곁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부하들을 먼저 교단으로 보내 놓고 혼자 이곳에 남아 있다 루미네르 손에 죽을 뻔했다.
정작 하리엘은 자신이 교단에 의해 지금껏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을 강요한다면 오히려 반발심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일부러 선택권을 그녀에게 넘긴 것이었다.
"그래. 난 널 막을 생각이 없다.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
"······."
"앞으로도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하리엘. 그것이 설사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하리엘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대기사단장님! 급히 아뢸 것이 있어 왔습니다!"
집무실 밖에서 들리는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에 나는 그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냐?"
"아뢰옵니다. 오메르 왕국의 국왕, 엘버스테인이 현재 국경을 넘어 이곳 왕궁으로 오고 있다는 급보입니다!"
엘버스테인이?
부하를 보낸 것도 아니고, 별다른 통보도 없이 직접 국경을 넘어?
엘버스테인의 [의리] 특성으로 인해 내 뒤통수를 치려고 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통보를 할 새도 없이 뭔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
"모두 가자. 엘버스테인이 무슨 연유로 말도 없이 여기까지 오는지 알아야겠다."
"예!"
나는 엘버스테인을 만나고자 부하들을 데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 뒤를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건 아직도 고민에 빠져 있는 듯 보이는 하리엘이었다.
* * *
"······."
화려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집무실을 나간 아슬란의 뒷모습을 하리엘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하리엘.'
지금까지 한번도 누군가에게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전장에서는 한없이 차갑고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이던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 때는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난 어떻게 하면 좋지?"
교단에 평생을 바쳐온 몸이다.
자신의 목숨을 라할께 바치기로 맹세한 몸이다.
절대 부숴지지도, 깨지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맹세가 지금 여기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슬란이 말했던 것처럼,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지금까지는 교단을 위해, 교단에 의해 결정을 내렸지만, 이제는 단 한번만이라도 스스로를 위해 선택을 하고 싶었다.
뚝-!
그녀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성스러운 빛의 마법이 깃들어 있는 목걸이이자, 그녀가 교단의 소속이며, 교단을 지키는 검이라는 신성한 표증이었다.
"이제 이건 나한테 필요 없어."
오랫동안 자신을 구속해 왔던 것을 떼어 내고 나니,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리엘은 그 목걸이를 아슬란의 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한번 부드럽게 쓸어내린 뒤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남긴 목걸이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72화
0.01초 소드마스터 72화
기사단과 함께 왕궁을 나선 뒤,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엘버스테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먼저 달리던 말을 멈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기사들을 잔뜩 끌고 오긴 했으나, 역시 악의를 품고 온 건 아닌 듯보였다.
그러나 결코 좋은 일로 온 거 같지도 않았다.
긴장 풀지 말자.
"오랜만이오, 국왕 엘버스테인."
엘버스테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 딱딱하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한 왕국의 국왕을 내가 어찌 가볍게 대하겠소."
"제가 일라이 왕국을 떠나기 전, 당신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록 신분은 달라져도 저는 당신의 영원한 기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의리]라는 특성이 이래서 좋다.
상대방을 배반하지 않고 처음 품었던 마음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엘버스테인은 역시 나의 적이 아니었다.
그 어떤 스토리로 플레이를 해도 엘버스테인은 항상 선의의 역할을 하는 캐릭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그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 고집을 꺾지 않는 건 여전하구나, 엘버스테인."
예전처럼 내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나 좋은지 엘버스테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고지식한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옆에 있는 아론이 거들자 엘버스테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론. 그동안 잘 있었는가?"
"오랜만일세, 엘버스테인. 근데 살이 좀 쪘군. 역시 군왕의 삶은 그런 것인가?"
"후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덕분에 내 삶이 조금 편해졌어야지."
반갑게 회포를 푸는 건 좋으나, 엘버스테인이 굳이 왜 여기까지 기사단을 끌고 왔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엘버스테인. 아무리 너라도 절차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허락도 없이 기사단을 끌고 와 국경을 넘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먼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사안이 급박하여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엘버스테인은 그동안 오메르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마을에 역병이 무섭게 퍼지기 시작하고, 그것이 성안에도 퍼지려는 조짐이 있어 엘버스테인은 총력을 다해 그것을 막아내려고 했었다.
그러다 수상한 몬스터 하나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역병을 뿌려대는 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쫓다 이곳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가 마을에 역병을 뿌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놈을 추적 중에 하필이면 놈이 여기 국경을 넘는 바람에······."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있던 나는 엘버스테인이 설명한 몬스터의 생김새를 곱씹어 보았다.
두더지처럼 땅 아래로 다니는 거대한 전갈 같은 몬스터라.
거기다 놈이 뿌려대는 검은 연기 같은 것에 닿으면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는 건······.
'이건 아무리 들어봐도 렉카디잖아?'
그 생김새와 특징을 미뤄 떠오르는 몬스터가 하나밖에 없었다.
렉카디.
전갈 같은 몸뚱아리로, 놈의 특징이라고 하면 바로 역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었다. 놈은 근처에 있는 사냥감에 마기를 뿌려 상대를 약하게 만들고, 그들의 정기를 빼앗아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렉카디인 줄 모르고 그냥 역병이 도는 것으로 착각해 치료만 하고 있다 나중에 렉카디가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 먹고 강해져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치고 올라왔을 땐 이미 다 성장을 한 상태라고 봐야 했다.
'그땐 군대건 뭐건 눈에 띄면 그냥 냅다 박아 버리는 놈인데.'
나는 엘버스테인에게 물었다.
"놈과 전투를 벌었더냐?"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놈을 찾아냈고, 그대로 이 근처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직 성장이 덜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완전한 성장을 위하여 일라이 왕국 영토 내에 있는 마을을 노릴 가능성이 무척 크다.
'우리 엘베스테인이 선물은 안 가져오고 똥을 가져왔구나.'
이놈의 자식이 애써 잘 키워줘서 왕으로 만들어줬더니, 황금 덩이는 가져오지 못할망정 귀찮은 악마를 데려왔다.
'근데 그놈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숭배자들이 또 의식 같은 걸 펼쳐 소환해낸 건가?
렉카디가 마을에 들어가 역병을 퍼뜨릴 경우 굉장히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에 놈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전 얼른 가서 잡아와야 한다.
문제는,
'그놈이 한번 숨어 버리면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거지.'
레이더처럼 마법으로 놈을 탐지해 찾는 것이 된다지만, 그놈이 어떤 방향으로 도망쳤는지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 버리면 마법에 감지조차 되지 않는다.
이래서 플레이어들은 렉카디를 렉혐이라고 부르며 무척 싫어했다.
잠잠히 숨어 있던 놈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괴롭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엘버스테인."
"예. 대기사단장님."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기사단을 보낼 것인지. 왜 국왕인 네가 같이 왔지?"
엘버스테인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닌, 한 나라의 왕이다.
그런 자가 기사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여기까지 왔다.
"인재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일은 많지만, 정작 그것을 할 사람이 얼마 없어 요즘은 제가 직접 이렇게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주변을 스윽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엘버스테인은 국왕이면서 동시에 모험가였다.
스토리라인을 잘 따라가 보면 엘버스테인은 자신도 나가서 싸우고 모험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무척 강해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직접 기사단을 끌고 나간다.
옆에서 제발 왕궁에 가만히 좀 있으라는 조언을 해봐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할까.
분명 이번에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추격대는 그게 다인가?"
"예. 놈을 추적하고자 마법 병단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좋다. 그럼 우리 군과 힘을 합쳐 넓게 수색을 해보도록 하지. 기사들과 마법 병단을 주변에 있는 마을에 보내거라. 그 악마는 필시 주민들의 정기를 흡수하고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 말에 엘버스테인이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그 악마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난 웃으며 치밀어 오르는 허세를 부렸다.
"내가 악마에 대해, 이 대륙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다."
"역시······."
잠깐. 근데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 게임의 스토리와 등장인물, 거기에 악마들과 몬스터들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건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 서둘러 움직이거라."
"예!"
군사들이 렉카디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에서 멀뚱멀뚱 기다리기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우리 왕궁으로 같이 가겠나?"
그 말에 엘버스테인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예. 저도 오랜만에 가보고 싶습니다."
"따라와라. 그래도 손님이니, 박대는 하지 않겠다."
"예!"
오랜만에 엘버스테인까지 합류를 하니,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그냥 엘버스테인을 왕으로 만들지 말고 내 옆에 쭉 있도록 만들 걸 그랬나.
"오오. 저분은?"
"엘버스테인 님 아니야?"
"아니. 오메르 왕국의 국왕이 되셨다고 하지 않았어?"
"다시 돌아오신 건가?"
성안으로 들어오자 백성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엘버스테인은 내 밑에 있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 퀘스트를 위해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서 오시오, 국왕 엘버스테인."
우리 왕국의 왕, 리베르토도 왕궁 전각에서 엘버스테인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엘버스테인과 길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부디 우리 왕국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중요한 얘기를 나눌 것이 있다면 여기 아슬란 대기사단장과 상의를 하시오. 그의 뜻이 곧 나의 뜻이기도 하니."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잠깐만 얼굴을 비춘 뒤 리베르토는 내게 모두 맡긴다는 눈짓과 함께 전각을 나가 버렸다.
라울 사건 이후로 완전히 국정에 손을 떼버려 이렇게 전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왕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엘버스테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왕을 몰아내고 왕권을 찬탈해 새로운 왕국을 세웠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전권을 내가 가지고 있고, 나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도가 매우 높은 만큼, 지금 왕 자리를 뺏는다고 민심이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초보나 하는 짓이다.
'왕이 되면 제약이 너무 많아진다.'
당장 대기사단장이란 자리도 제약이 생기는데, 왕은 어떻겠는가.
아이템이나 마기 포식을 위해 함부로 왕궁을 떠날 수 없다.
모든 것을 아랫 사람에게 시켜야 하며 왕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 성의 민심이 빠르게 나빠지기 때문이다.
'엘버스테인 이놈이 미친놈이지.'
이놈처럼 막무가내로 플레이했다가는 왕국이 망하기 십상이다.
여기까지 잘 빌드업을 해서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서 무너뜨릴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왕이 되면 왕국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혹여 일라이 왕국이 망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여기 남아 죽어야 한다.
"엘버스테인."
"예, 대기사단장님."
"환영식을 거하게 해주고 싶다만, 언제 그 악마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올지 모르기에 옛 동료들과 따로 회포를 풀고 있거라."
엘버스테인은 저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론과 기사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 난 네가 싼 똥을 어떻게 치워야 될지 고민을 해야 하니까, 저기서 놀고 있어라.
나는 계속 옆에 찰싹 붙어 다니려 하는 엘버스테인을 떼어낸 뒤 집무실로 돌아갔다.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악마 놈이 어디쯤 갔을지 경로를 예상해 보려고 했는데-
"음? 이건 뭐야."
내 집무용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누가 여기다 놓고 간 거지?
꽤 비싸 보이는데.
[봉인된 영겁의 목걸이]
-신성한 축복이 깃든 목걸이입니다.
-히든 옵션이 존재합니다.
-오직 빛의 힘을 가진 자만이 목걸이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이런 아이템이 있었나.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 목걸이에 걸린 히든 옵션을 내가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빛의 힘을 가지고 있으려면 최소 제사장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건데.
내가 지금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철컥-!
바로 그때였다.
목걸이 중앙에 봉인되어 있던 입구가 열리면서 내 손으로 빛이 스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왜 되는 거지?
"설마?"
레길로트의 팔찌 덕분인 건가.
내 모든 속성을 성속성으로 바꿔주는 효과가 빛의 힘으로 인정되는 것이었다.
곧 목걸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신성한 보호의 목걸이]
-신성한 축복이 깃든 목걸이입니다.
-빛의 주인으로 인정받아 히든 옵션이 해제됩니다.
-신성한 보호: 하루에 한번.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즉살급 데미지를 모두 흡수합니다.
"!?"
나는 공개된 히든 옵션을 보고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미, 미친."
하루에 한번이지만, 내게 가해지는 즉살급 데미지를 흡수하는 옵션이라니!
이건 S급 능력이지 않은가?
이것으로 나는 목숨이 두 개가 되는 꼴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서프라이즈 선물을······."
나는 주변을 빠르게 획획 돌아보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 딱 이런 기분인 것일까.
"혹시 다시 돌려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얼른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벌써부터 가슴이 따뜻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이것이 축복이로구나.
그래. 아직 세상은 날 버리지 않았다.
개발자 놈들이 내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이런 선물을 안겨준 것일지도······.
* * *
"아뢰옵니다!! 동쪽에서도 전갈을 닮은 검은 몬스터가 국경을 넘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뢰옵니다! 남쪽에서 또 다시 몬스터가 출몰하여······!"
국경을 넘는 악마는 하나가 아니었다.
연달아 들어오는 급보에 하리엘은 당황했으나,
"······."
아슬란은 침착하게 보고를 듣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외쳤다.
"모두 출정 준비를 하라. 놈들은 필시 한곳으로 모이려 할 터. 그곳으로 가서 놈들을 소탕하겠다."
"예!"
아슬란은 상석에서 내려와 하리엘에게 다가왔다.
"하리엘."
"네. 대기사단장님."
"내가 악마들의 흔적을 쫓는 동안, 너는 이교도 무리를 찾아내거라."
"네?"
"이번 일은 숭배자라고 불리는 그들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한번 찾아 보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아슬란에게 명령을 받은 하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어?"
아슬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줄이 희미하게 보였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교단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겠다는 의지로 그녀는 교단에서 받은 목걸이를 아슬란의 집무실에 놓고 왔다.
그냥 서랍이나 다른 곳에 보관하거나, 아예 없애 버릴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것을 직접 착용하고 있을 줄이야.
이건 자신이 맡긴 것을 아슬란 그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겠다는 뜻인가.
"······."
"어디 아프냐?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는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흠흠. 저,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리엘은 웃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빠르게 전각을 나왔다.
왜인지 자꾸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
73화
0.01초 소드마스터 73화
S급에 달하는 옵션이 달린 목걸이를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연속으로 들어오는 황당한 보고들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엘버스테인이 보았다는 그 악마가 동쪽에서도 나타났다는 것이냐?"
"예! 국경을 지키던 수비대를 무시하고 통과해 그 뒤를 추적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벌써 이런 보고가 여섯 번이나 들어왔다.
즉, 사방으로 렉카디가 일라이 왕국의 국경을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렉카디가 단 한번도 기사단과 충돌하지 않았다는 것.
'그놈들 성격상 안 싸울 리 없을 텐데.'
그 흉포한 놈들이 마치 공통된 목적지가 있다는 듯 기사단과 추격대를 지나쳐 어디론가 모이고 있었다.
'잠깐. 이거 설마······.'
순간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렉카디는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여 힘을 키운다.
하지만 그것들은 때론 스스로의 힘을 키우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 정기를 흡수한 뒤 저장하곤 한다.
그 다른 것이라는 건 바로,
'의식이구나.'
렉카디가 골치 아픈 이유는 마을 사람들을 괴롭혀 힘을 키운다는 것도 있지만, 이놈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테키나 족속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의식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숭배자들이 또 모여든 건가?'
그래서 렉카디가 여럿 모이게 되면 플레이어는 어딘가에 숭배자들이 모여 있는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렉카디가 모아온 에너지를 바탕으로 의식을 펼쳐 봉인을 풀거나, 혹은 악마를 소환하는 짓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기서 계속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출정 준비를 해라. 놈들이 어디서 모이는지 찾아야겠다."
"예!"
나는 영토 지도에 놈들이 모일 만한 예상 장소를 체크해 두었다.
여러 방향에서 모이고 있는 렉카디들이 갈 만한 곳.
고인물 경험상으로 유추해 봤을 때 숭배자들이 의식을 펼칠 만한 장소.
그곳을 찾아야 한다.
'아니. 이것들은 허구한 날 내 영토에서 지랄이야.'
저 넓디넓은 땅들을 놔두고 왜 내 영토에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악마를 소환하기 딱 좋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들도 참 많을 텐데.
이것도 다 난이도 때문인 건가.
아니면 그냥 이 게임이 나를 억까하는 건가.
"출정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대기사단장님!"
그래도 다행인 건 엘버스테인까지 현재 우리 왕국에 합류한 상태라는 것이다.
사방으로 수색 작전을 펼친 뒤, 숭배자들이 어디서 의식을 펼치는지 알아내면, 그때 놈들을 막아내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무조건 악마가 소환되기 전에 끝을 낸다.'
대체 어떤 악마를 소환하려고 렉카디까지 끌어모아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 * *
쿠구구구-
물살 가르듯 땅 아래에서 헤엄치며 다가오는 렉카디들.
놈들은 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정기를 꺼내 꼬리에 집중시켜 그것을 마법진 안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지독한 마기가 꿈틀거렸다.
숭배자들은 그 광경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르르-"
정기를 다 바친 렉카디가 작게 울음을 터트리자 숭배자 중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뒤로 물러나라. 생긴 것도 역겹게 생긴 놈이. 쯧."
들고 있던 지팡이로 몇 번 땅을 찍자, 렉카디 목에 걸려 있는 검은 사슬 같은 것이 진동했다.
그 진동에 따라 렉카디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흐흐. 이 나약한 악마 놈들. 조만간 너희 모두가 우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숭배자들이 마냥 대책 없이 악마를 소환해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은 사슬이라는 흑마법을 통해 소환해낸 악마를 통제하고,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이들에게 있었다.
"이것이 전부 테르카나 님 덕분입니다. 이 건방진 악마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숭배자들이 악마를 소환해 자신들의 이익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된 건 전부 테르카나라는 흑마법사 덕분이었다. 그가 가르쳐 준 흑마법으로 악마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됐다.
"저는 오히려 여기 계신 분들의 큰 결단에 감탄할 뿐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악마 소환이라······.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저희에게는 테르카나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에게 알려 주신 마법은 확실하겠지요? 만약 대악마 통제에 실패하게 되면 그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테르카나는 자신에게 의문을 품고 있는 숭배자를 힐긋 바라보았다.
"정 믿음이 가지 않으신다면 지금이라도 의식을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허허. 의심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누가 감히 테르카나 님을 의심한단 말입니까?"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의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 여러분 곁에 있을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테르카나 님."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에게는 큰 힘이 될 겁니다."
테르카나는 주변 지형을 살펴보다 말했다.
"용케도 이런 곳을 찾으셨군요."
"예. 일라이 왕국에서도 낌새를 눈치채고 기사단을 풀어 수색 중에 있으나, 여긴 사방이 산맥으로 가려져 있어 쉽게 찾지 못할 겁니다."
소환 의식을 진행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의식을 통해 나오는 대악마를 곧바로 일라이 왕국에 보내 그곳을 공격할 예정이기도 했다.
"이제 준비가 거의 끝났군요."
"모두 갑시다."
숭배자들과 그들을 지키기 위해 고용된 용병의 숫자까지 더하면 천 명이 훌쩍 넘는 인원들이었다.
숭배자들은 완성된 마법진 앞에 섰다. 그리고 이번 의식에 쓰일 봉인구를 그 가운데에 놓았다.
"이것이 바로 대악마 케르슈만이 봉인되어 있다는 봉인구다. 우린 오늘 이 위대한 의식을 통해 대악마 케르슈만을 깨우고, 우리 숭배자들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우와아아-!"
숭배자들의 주문이 이어지고 그들의 마력이 마법진에 흡수되면서 봉인구에 점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콰직-!
얼마 안 있어 봉인구가 강력한 마기에 의해 부숴졌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힘이 소용돌이쳤다.
"오오- 드디어 봉인이 깨지는 것인가."
"이런 역사적인 순간이!"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봉인구에 갇혀 있어야 할 대악마 케르슈만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알 수 없는 힘이 폭발하듯 번쩍이다 마법진 위로 좁은 문 하나가 생겨났다.
"이게 무슨······."
이윽고 그 문틈으로 두 손아귀가 튀어 나왔다.
그 손아귀들은 위아래를 붙잡아 좁은 문틈을 넓게 벌리고 있었다.
"대, 대체 왜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것이냐?"
"이건 분명 봉인구일 텐데······."
숭배자들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갑작스레 열려 버린 게이트 밖으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반인반마(半人半魔).
인간의 몸통과 말의 몸통을 합친 괴물.
압도적인 크기와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살기에 숭배자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위협적인 존재는 크게 숨을 들이쉬다 내뱉었다.
"여기 공기도 오랜만이군."
그것이 내뿜는 공기와 목소리 모두 숭배자들에게는 공포스럽게 다가올 뿐이었다.
"뭐, 뭘 하고 있느냐! 어서 저 악마를 잡아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명령에 숭배자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준비했던 마법을 펼쳤다.
촤르르-!
검은 사슬이 팔과 다리를 묶고 마지막은 목까지 봉인해 버렸다.
완전히 상대를 붙잡았다고 생각한 원로 숭배자가 말했다.
"네 정체를 밝히거라, 악마여."
"뭐야. 이건."
하지만 악마는 자신의 몸에 걸린 사슬들을 하찮게 바라보며 그것을 간단하게 끊어 버렸다.
"아, 아니?!"
"사슬들을 저리 간단히!"
그 악마 곁으로 테르카나가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라이텐 님."
"테르카나. 이놈들은 뭐냐?"
"라이텐 님을 위해 준비한 제물들입니다. 마음껏 즐겨 주시길."
라이텐이라는 이름에 몇몇 숭배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라, 라이텐? 그 죽음의 말이라고 불리는 라이텐?"
라이텐은 양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으로 검은 낫이 생겨났다.
"몸풀기로는 적당한 놈들이로구나."
"노, 놈을 죽여라!"
하지만 그들이 마법을 펼치기도 전에 그들의 눈앞에서 라이텐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어디로 갔······."
"이놈들로는 준비 운동도 안 되겠다, 테르카나."
어느새 그는 그들의 뒤에 나타났다.
"대, 대체 언제?"
촤아아악-!!
그와 동시에 수십 숭배자의 몸이 난도질당하며 쓰러졌다.
라이텐은 자신의 낫에 묻은 피를 할짝거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역시 인간의 피 맛은 좋구나."
"으, 으아아악!"
한번 피 맛을 봐버린 라이텐의 눈동자가 광기로 얼룩졌다.
그는 자신의 눈에 띄는 인간들은 모조리 그 몸을 찌르고 가르며 살육을 즐겼다.
"테, 테르카나! 당신이 우릴 속인 건가?"
숭배자들의 원로가 떨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테르카나는 비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간이 악마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 정말로 당신들이 악마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냐?"
"이, 이 찢어 죽일 놈!"
"오만하구나, 인간들이여. 권력에 취해 악마를 이용하려 들다니. 하지만 너희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
"네 이놈!!"
원로가 테르카나에게 달려들었지만, 결코 그의 몸에 닿지 못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또 다른 악마에 의해 그 몸이 꿰뚫렸기 때문이다.
"테르카나. 이 냄새 나는 인간은 뭐냐?"
"커헉!"
테르카나는 라이텐과 마찬가지로 게이트 밖으로 나오고 있는 악마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보좌관님들도 오셨군요."
"그래, 주인님께서 오랜만에 날뛰시니 구경해야지."
보좌관들은 라이텐이 끝없는 학살을 저지르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감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그의 움직임에 숭배자들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다 죽어갔고, 그 피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며 라이텐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라이텐과 다르게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던 테르카나는.
"음······?"
저 멀리 한 남자가 이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뒤에 펄럭이는 붉은 망토가 유독 눈에 띄었다.
* * *
'아무리 찾아도 없다.'
기사단을 풀고 놈들이 의식을 펼칠 만한 장소를 예상해 뒤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숭배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렉카디의 모습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 이곳이 아니라 벌써 다른 영토로 도망친 것은 아닐지."
엘버스테인의 말에 나는 주변 지형을 살펴보았다.
렉카디가 목격된 곳들을 쭉 정리해 보면 이쪽 부근이어야 할 텐데.
그러다 내 눈에 높은 산맥이 띄었다.
혹시······.
"잠시 확인하고 올 것이 있다."
"예?"
"대기하고 있도록."
나는 찬란한 망토에 있는 비행술을 이용해 번쩍 높이 날아올랐다.
"헉!"
엘버스테인과 그의 기사단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나는 저 높은 봉우리까지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올라갔다.
"그래. 진작 이걸 쓸 걸 그랬네."
역시 높은 곳에서 봐야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다,
"응?"
저 둥그런 산맥 가운데에 어떤 무리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인가?"
나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 근처로 빠르게 비행해 날아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착지했다.
"찾았다."
내가 그토록 찾고 있던 숭배자들이 저기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
거기다 눈에 보이는 렉카디의 숫자도 보고된 것보다 많아 보였다.
뭐, 아무리 숫자가 좀 된다고 해도 내가 기사단을 이곳에다 부르면 저 정도쯤은······.
"어?"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콰콰콱-!!
"으, 으아악!"
"살려줘!"
이미 의식은 끝이 났다.
놈들이 성공적으로 악마를 소환해낸 것이었다.
문제는 그 악마가,
"뭐, 뭐야. 여기서 왜······."
바로 대악마 라이텐이라는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들. 소환할 게 없어서 대악마를 소환해?"
대악마.
지금까지 만났던 악마들과는 차원이 다른 등급이다.
이건 내 기사단을 다 끌고 와도 과연 상대할 수 없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특히 라이텐은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적을 학살한다.
초신속이라는 능력인데, 저것과 함께 낫을 휘두르면 순식간에 부대 하나가 도륙당하는 것이었다.
"이걸 어떡하지."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대악마다.
심지어 상대는 학살마 라이텐.
더욱 가관인 건,
"아-"
저 멀리 있던 악마들과 내가 눈을 마주쳤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곳까지 거리가 조금 되니까.
그러니 놈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얼른 도망부터 쳐야······.
"여기 벌레 한 마리가 숨어 있었군."
바로 그때였다.
내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오던 것이.
"동료들이 죽어가는 걸 재밌게 감상이라도 하고 계셨나?"
얼른 비행술을 써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직 비행술은 쿨타임이었다.
"뭐, 상관없지. 너도 여기서 죽을 테니."
그럼 놈이 내게 공격을 날리기 전에 얼른 수호신의 방패부터······!
콰콰콱-!!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놈의 두 낫이 내 몸을 무자비하게 베어 버렸다.
"······아."
대체 나를 얼마나 조각낼 심산인 건지, 한번도 아니고 수십 번이나 낫이 내 몸을 강타했다.
그것도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이다.
그 칼날이 내 몸을 인정 사정 없이 찢어 놓는 게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이리도 허무하게?
"음?"
그런데,
화아아악-!!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이 라이텐을 뒷걸음질 치게 했다.
[신성한 보호가 10초 동안 이어집니다.]
내 눈앞에 나타나는 정보창.
나는 내 몸부터 확인해 보았다.
털끝 하나 다친 것 없이 멀쩡했다.
즉사급 데미지를 신성한 보호가 전부 흡수해 준 것이었다.
"뭐야? 왜 안 죽는 거지? 분명 난도질을 해놨을 텐데?"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낫을 높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짜증 나는 빛과 함께 조각을 내주마."
나는 놈이 낫을 휘두르기 전에 재빨리 능력을 발현시켰다.
그러자,
쿠웅-!!
"!?"
두 낫을 높이 들며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던 라이텐이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크읍-! 이, 이건 또 뭔······!"
군림의 피어가 발동되면서 놈은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바로 그 순간.
"비키거라."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듯,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병적인 허세가 뜨겁게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내 앞을 가리고 있지 않느냐."
나는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라이텐의 두 눈동자는 그 칼이 자신의 몸을 향해 가볍게 휘둘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걱-!
그 짧은 절삭음과 함께,
푸확-!!
검은 피가 높이 솟아올랐다.
"크아아아악!!"
앞으로 뻗어 나가는 빛의 검강이 놈의 몸을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 버렸다.
하지만 이 질긴 놈은 그대로 죽지 않았다.
"크아아아악-! 이, 인간 따위가 감히! 감히!!"
반쪽이 된 두 몸으로 힘껏 비명을 터트렸고,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기가 절단된 몸을 다시 이으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악마의 무서운 점이다.
놈들은 몸을 갈아 버려도 죽지 않는다.
이 마기를 정화하지 않는 한 끝까지 살아난다.
그래서 결국 놈들을 죽이지 못하고 봉인을 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시끄럽구나."
이들의 마기를 한꺼번에 집어삼킬 수 있는 마기 포식자가 있었다.
"더러운 미물 따위가."
"!?"
나는 칼끝을 놈의 마기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휘몰아치던 마기가 순식간에 내 몸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