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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죽었나?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바노스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이따금씩 꿈틀 거리는 것을 보아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상처가 좀 얕았던 거 같은데.'

찰나의 괴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순보로만 레바노스의 목을 베었다.

숙련도 부족인지, 아니면 저 단단한 몸 때문인지 칼이 그리 깊게 들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급소를 베었다는 건 상대에게 치명적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성 속성에게 데미지 200%를 가할 수 있는 어둠 계열의 능력이 있다.

처음 써보는 능력이었지만, 레바노스에게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사기적인 능력 중 하나인 치유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아직 죽은 건 아니니까.'

확인 사살을 해야겠지.

나는 혹시 놈이 벌떡 일어나서 칼을 휘두를까 두려워 조심조심 하며 천천히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 문득,

'잠깐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얘는 천계 핏줄이잖아?'

내가 알기로 얘 엄마가 사르디엘이고, 아빠가 인간이다.

대체 인간이 어떻게 천사를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 생긴 걸 보면 아빠가 오질나게 잘생겼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방랑자 레바노스라고 하면 음침하게 후드 하나 뒤집어 쓰고 모래 바람을 뒤집어 쓸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놈 별명이 하늘에서 만든 조각인만큼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모델링이 잘 되어 있다.

'이놈을 죽이면 이놈 어미가 날 죽이려 하겠지?'

테키나 족속처럼 천계도 대륙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고 왕래하는 길도 사라졌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천계에서 대륙으로 내려오는 길은 항상 열려 있으나, 그쪽 동네도 지금 워낙 시끄러워서 잘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 내려오는 것은 아니고 알게 모르게 소수 인원이 가끔 내려오고 있었다.

즉, 레바노스가 죽었다는 얘기를 이놈 엄마 되는 천사가 듣게 되면 날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며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인게임 플레이 때도 레바노스 엄마가 나오긴 했었지.'

레바노스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의 엄마가 게임에 등장했던 씬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계의 천사를 내 적으로 돌릴 순 없지 않은가.

특히 그 여자는 천계에서도 나름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라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이걸 어쩐다?'

레바노스와 첫 만남부터 꼬여 버렸다.

첫 만남에 칼부림이라니.

'근데 잘못은 이놈이 한 거잖아.'

그러게 누가 칼들고 남의 집 앞마당에 쳐들어 오라고 했냐?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죽일 수도 없고.'

놈이 언제 살아날지 모른다.

과연 이놈이 일어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기사단장님!!"

"아슬란님!"

때마침 아론과 부하들이 내 곁으로 몰려 들었다.

"이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엄청난 실력자인 거 같았는데······."

레바노스와 칼을 섞어 봤으니, 금방 감이 잡혔을 것이다.

상대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것을 말이다.

"레바노스라는 자다."

"레바노스!?"

"방랑자 레바노스 말입니까?"

"그래."

그러자 알렉산더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레바노스의 실력은 가히 엄청 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방금 붙어 보니 알겠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를 대기사단장님께선 단번에······."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느라 사그라 들어 있던 허세가 강렬하게 끓어 올랐다.

거만하게 턱을 올리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내게는 그저 하찮은 실력일 뿐이다."

"······."

"명성에 걸맞은 실력 발휘를 해주길 바랐는데······ 시시하군."

그때 아론 허리춤에 있는 수통이 눈에 띄었다.

"그 수통. 물이 남아 있나?"

"아! 항상 아슬란님의 축복을 가지고 싸우고자 많이 준비를 해뒀습니다."

저 수통 말고도 여분으로 5개나 더 있는 아론이었다.

"······."

이제 조금 무섭다.

"하나 줘 보거라."

"예!"

나는 아론에게서 받은 수통 뚜겅을 여러 쓰러져 있는 레바노스에게 부었다.

이놈 엄마 손에 죽나, 아니면 이놈 손에 죽나.

둘 다 개차반 같은 결과라면 한번 도박을 걸어 보는 것이다.

내 쪽으로 유리할 수 있게 말이다.

"읍-!"

혹시나 해서 부어본 건데, 효과가 있다.

놈의 치유력은 빛의 힘과 관련 있지 않은가.

현재 놈을 갉아 먹고 있는 저 어둠을 이 황금물로 밀어낼 수 있다면 금방 회복될 거라 생각했다.

과연 내 예상대로 레바노스는 곧 정신을 차렸다.

"허튼 짓 하지 말고 가만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

그러자 아론과 부하들이 그에게 칼을 겨누며 경계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미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레바노스 정도면 이런 위협 따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나는 맹수의 그것을 닮은 레바노스의 눈빛을 보며-.

'괜히 살려줬나.'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물은 엎질러졌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

그는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더욱 내 허세를 자극했다.

"소드마스터라고 불리는 놈이 고작 악마의 술수에 놀아나다니. 한심하구나."

뭔가 좋은 말로 시작을 해보려 했지만, 저 멍청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허세가 치밀어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악마에게 놀아나는 모습이 역겨워 그 목을 베어 버리려 했으나, 손속의 정을 두어 살려줬으니 이만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방랑자여."

그 말만을 남기고 나는 레바노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라도 짓밟아 놓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안 나타나게만 하면 된다.

여기서 내 말에 따라 사라질지, 아니면 복수를 할 것인지는 놈의 선택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성으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닥~

그때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입에는 당근을 한 움큼 우물우물 씹고 있던 말 새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주인이 어떤 개고생을 했는지도 모른 채 놈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허세보다 더 강렬한 살의가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 *

펄럭~.

레바노스는 붉은 망토를 화려하게 펄럭이며 사라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그는 정신을 차린지 조금 됐다.

물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건 똑같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괜히 잘못 일어났다가는 목이 날아갈까 두려웠다.

그래.

두려웠다.

한번도 눈을 마주하고 싸운 자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던 그가 난생 처음으로 숨 막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아슬란, 저자에게 말이다.

"칼을 거두시오. 당신들과 더는 싸울 생각이 없소. 내 의지로 한 것도 아니고."

레바노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자신을 아직도 경계하고 있던 아론에게 물었다.

"방금 전 당신의 상관이 내게 뿌린 물이 무엇이오?"

아슬란이 물을 부어 주면서 신기하게 치유력이 갑자기 급상승하고 몸에 힘이 돌아왔다.

"아. 이것 말인가?"

아론은 여분으로 있던 수통 하나를 던져 주었다.

"아슬란님께서 우리를 위해 직접 만들어 주신 성수다."

"성수?"

그럴 리가.

인간이 어떻게 성수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어둠의 힘을 다루는 자가!

레바노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통에 담긴 물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물은 성수가 맞다.

아니. 레이어스 교단에서 만든다는 성수보다 몇 배는 더 신성력이 가득 들어 있는 성수였다.

"이걸 정말 아슬란, 그자가 만들었다는 것이오?"

"무엄하다! 감히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

레바노스는 이들의 눈동자에 담긴 아슬란을 향한 충성심을 볼 수 있었다.

아슬란이 불에 뛰어들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충심이라고 해야 할까.

벌컥-.

그는 성수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굉장했다.

몸에 생기가 넘치고 사그라 들었던 신성력이 불끈 솟구쳤다.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아슬란.

그자는 뭐하는 작자이기에 이런 엄청난 걸 만들 수가 있는 거지?

"근데······ 방금 그 성수로 상처가 다 치유된 건가?"

아론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레바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성수의 질이 무척 높아 가능했던 일이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천계에······."

"과연! 과연 그랬군! 역시 이 성수는 치유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던 거였어!"

"······?"

"어서 병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상처가 입은 자가 있다면 이 성수를 부으라고."

"아니. 이건 그러니까 평범한 인간에게는 효과가 그다지······."

잔뜩 흥분한 아론을 진정시키고자 말을 정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기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저 악마들이 아직도 날뛰고 있습니다! 어서 이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방어선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한 차례 몬스터 웨이브의 풀이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저것들의 숫자는 많았다.

레바노스는 자신이 나설 차례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놈들을 처리하도록 도와 주겠소."

"그대가?"

"이건 나의 잘못이기도 하니까."

마침 이 넘치는 신성력을 어딘가에 풀고 싶었다. 그리고 감히 자신을 조종했던 저 악마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파앗-!

그는 번쩍 날아올라 줄에 매달린 대검을 돌렸다.

회오리를 일으키며 나아가는 대검은 몰아쳐 오는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리며 그 힘을 과시했다.

내가 바로 이 대륙의 소드마스터 레바노스라는 것을 보여 주듯, 그는 넘치는 힘으로 아낌없이 실력을 뽐내었다.

그렇게 깔끔하고 마무리를 한 레바노스는 멋있게 착지한 뒤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활약을 감명 깊게 보고 뒤에 있던 기사들이 반응해 주기를 원했지만-.

"모두 성수를 부어라!"

"아슬란님이 만들어 주신 성수는 우리의 모든 부상을 해결해 주신다!"

"과연 힘이 끓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 멈추지 말고 싸워라! 지치면 성수를 마시고 또 싸워라! 아슬란님의 힘을 온몸에 받아 들이는 것이다!"

"예!!"

아론을 필두로, 저들은 완전히 성수에 미쳐 있었다.

"······."

뭔가 다른 의미로 저들이 악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81화

0.01초 소드마스터 81화

[테르카나. 내가 친히 힘을 빌려줬는데도 건방진 인간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냐?]

검은 구슬 수정에서 나오는 탁한 목소리에 테르카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헤르테미스 님.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만나 그리되었습니다."

[그런 변수조차도 능히 해결할 수 있도록 내 힘을 들여 레바노스를 주지 않았더냐?]

"예. 그리하셨지요. 하지만 레바노스 조차 넘을 수 없는 산이 있더군요."

[······.]

헤르테미스는 잠시 침묵하다 이내 테르카나에게 물었다.

[그 산이라는 것이 아슬란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저희가 생각을 잘못한 듯합니다. 지금까지 아슬란이 테키나 종족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네 말은 그자의 힘이 우리 대악마 중 하나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냐?]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렇습니다. 천계의 천사를 상대하는 것만큼 무척 까다롭고 위험한 인물입니다."

두려울 것이 없는 테키나 족속이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상대하기 꺼려하는 것이 바로 천계였다.

그런데 아슬란이 그들과 같은 동급이라.

[그래서 네 계획은 뭐지?]

"위대한 테키나 족속의 부활을 꿈꾸는 숭배자들이 이 대륙에는 아주 많습니다. 조만간 어둠이 대륙을 삼키게 되는 건 시간 문제. 다만, 그 시작하는 위치가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시작하는 위치?]

"그동안 우린 최약체라 여겼던 일라이 왕국을 중심으로 부활을 꾀했지만, 더 이상 그곳은 최약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왕국을 노리는 수밖에요."

이번에도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너를 믿어 보지.]

"감사합니다, 헤르테미스 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

검은 수정구는 다시 정상적인 푸른 수정으로 돌아왔고, 테르카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가 아니면 이 땅을 밟지도 못하는 것들이 여전히 자존심만 살았구나."

테르카나는 일라이 왕국을 완전히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다.

테키나 족속의 부활을 원하는, 어리석은 숭배자들은 대륙 전체에 득실거리고 있으며, 악마를 소환하는 건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획대로 테키나 족속을 소환해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면 되겠지만.

"너희를 위해서도 내게 새로운 계획이 있지."

그 중심에는 바로 아슬란이 있었다.

* * *

'뭔가 오한이 드는 거 같은······.'

100% 확률로 누가 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내 생존 본능이 말해 주었다.

나는 옆에 있던 호레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는지?"

"흠- 아무것도 아니다."

호레스는 내 의심 가득한 눈총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영토 대부분에 감시탑을 추가로 설치했습니다. 이대로 유지가 된다면 앞으로 빈틈없는 감시를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중갑병에 대한 건?"

"그 부분도 준비가 거의 다 됐습니다. 중갑 기병단을 새로 신설해 장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당장 오늘부터 훈련을 시작할 겁니다."

"그 외 것들은?"

"대기사단장님이 만드신 신성한 성수를 이용한 마법 무기도 추가 제작에 들어가는 중입니다. 저번처럼 공성 무기와 칼루탄을 활용해 공중에서 터트릴 수도 있고, 아니면 마법진을 활용하여 큰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우주 방어진이 차츰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일라이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나와 크게 상관없었다.

결국 중요한 건 내 몸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영토 전체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방어 강화에 힘쓰고 있었다.

저번과 같은 몬스터 웨이브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언제 어디서 악마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수 난이도만 해도 숭배자들이 미쳐 날뛰니까 더 조심해야 된다.'

게임 난이도에 따라 숭배자들의 숫자가 결정된다.

난이도가 쉬우면 쉬울수록 숭배자의 숫자가 적어 소환되는 악마의 숫자도 같이 적어지고 그 빈도 역시 현저하게 줄어든다.

하지만 난이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숭배자들이 미친 듯이 소환만 해대서 악마가 곳곳에 득실거리게 되는데, 이건 무려 극악 난이도이지 않은가.

스토리가 벌써 이렇게나 진행된 것도 다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이템 수급인데.'

여기 주변에서 뽑아 먹을 만한 게 없다.

이 게임의 악랄한 점이 바로 난이도가 높을수록 플레이어가 시작한 왕국 주변에는 먹을 만한 아이템을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저번에 작성해 놓은 비밀 노트를 기반으로 일라이 왕국 영토 내에 있는 아이템을 찾아 나섰지만 수확이 없었다.

즉, 이 게임이 의도적으로 아이템을 나와 먼 곳에 배치해 두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아이템 삭제까진 안 했다는 거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스펙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막히지 않았다는 뜻이니.

'그럼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 봐야 하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일 가까운 할라즈 왕국부터 넘어가서 아이템 수급하는 것도 꽤 좋아 보이던데.

'몰래 국경을 넘어가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건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금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건가?"

"예. 중갑 기병의 훈련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한번 점검을 해봐야겠군."

나는 호레스와 혹은 다른 놈들이 뒤에서 한탕 해 먹고 대충 만든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자 직접 훈련소로 발걸음을 했다.

둥-! 두둥-!

"오오오!!"

훈련장 안은 북소리와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으로 가득하다.

두껍고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중갑 기병단은 위엄찬 모습으로 앞에 나와 신호에 맞춰 천천히 앞으로 진격했다.

"쏴라!!"

이윽고 궁병단장의 명령에 궁병들이 화살비를 내렸다.

쏴아아아-!!

일반 기병이었다면 날아오는 화살비를 보고 우왕좌왕 거렸겠지만, 중갑 기병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무게 때문에 움직임이 빠르진 않았지만, 이들은 무엇 하나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천천히 똑바로 나아갔다.

티팅-!

타타탕-!

수백 발의 화살이 기마대를 덮쳤다.

그러나 그 어떤 화살도 중갑을 뚫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러졌다.

"오오-."

"과연 저것이······."

훈련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이르다.

"쏴라-!!"

이번에는 화살비와 더불어 마법 병단이 만들어낸 마법탄이 쏟아져 나갔다.

콰앙-! 콰쾅-!

마법탄이 터지고 화살이 비처럼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중갑 기마병 중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이 없었다.

이들 모두 두꺼운 갑옷, 두꺼운 방패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타고 있는 말들 역시 마법탄이 터질 때 깜짝 놀라 몸부림을 조금씩 칠 뿐, 낙마할 정도의 어수선함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거운 무게 때문에 몸부림을 힘껏 칠 수가 없던 까닭이다.

'과연 최상위 클래스 병단답네.'

중갑 기병은 사실 왕국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강 기병단이다.

보통 게임을 하게 되면 최고의 병단을 뽑기 위해 업그레이드를 하고 막대한 돈을 쓰지 않던가.

중갑 기병이 딱 그런 병종이었다.

내가 저들을 뽑을 수 있었던 건 샤를렌 가문과의 활발한 교역 때문인데, 칼루탄과 엘프족을 통해서 파는 특산품으로 지금 일라이 왕국은 떼돈을 벌고 있다.

문제는 그 떼돈을 전부 다 국력 강화에 쏟아붓고 있다는 것.

'조금만 기다려라.'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땐 세금도 팍팍 올리고 내 주머니를 가득 채워 대륙 최고의 부자가 되어 줄 것이다.

"진격!"

"오오오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중갑 기병단은 진격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허수아비로 세워 둔 방패병들을 단숨에 격파하고 궁병단과 마법 병단이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워······."

"엄청나다······."

"이게 일라이 왕국의 기병이라니."

사방에서 탄성을 터트렸다.

'이게 돈의 힘이구나.'

역시 게임이나 현실이나 돈이 최고다.

"크흡- 으흐흑."

한창 돈맛에 취해 있을 때 옆에서 갑자기 누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호레스였다.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있던 호레스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이것이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아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저희 군의 수준은 처참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저 칼라 왕국과 맞붙어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

저기, 감동을 깨고 싶진 않지만.

지금 이 수준으로 칼라 왕국과 싸웠다가는 그대로 전멸이다.

'그래도 다른 왕국에 비하면 엄청 강한 건 맞지.'

스토리는 풀악셀을 밟은 것처럼 진행됐지만, 왕국들의 발전은 아직 미미한 수준.

우리처럼 중갑 기병을 뽑은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딱 칼라 왕국 하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칼라 왕국은 시작부터 대륙 최강 왕국이었으며, 그곳을 다스리는 왕 역시 대륙 최강자라 불린다.

그렇기에 게임을 수월하게 플레이하고 싶으면 칼라 왕국부터 선택해 시작하라는 것이 뉴비를 위한 조언이었다.

'지금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지.'

아직 칼라 왕국만큼의 수준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나저나 저놈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냐?

"······."

나는 저 멀리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있는 레바노스를 불편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레바노스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고개를 까닥이자 놈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있는 쪽으로 총총 다가왔다.

그런데,

"흠흠."

"저희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두 분.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갑자기 수하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아닌가.

나도 소드마스터고, 저놈도 소드마스터이니, 두 강자끼리 진득하게 얘기를 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너희가 다 가버리면 어쩌라고.'

저런 괴물과 나를 단둘이 남겨 놓고 가다니.

이런 책임감 없는 놈들.

"······."

어색한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조금씩 끓어 오르기 시작하던 허세가 곧 머리끝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머무를 수 있게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소?"

"소?"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 왕국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민폐만 될 뿐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이냐?"

"그, 그건······."

"아니면 방랑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언제든 떠날 것이냐? 한 가지만 해라."

"자, 잠시 머무르다 가는 건 안 됩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을 내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난 나의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에게만 곁을 내어 준다."

레바노스는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확인할 것이라는 건 나에 관한 것인가?"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미리 말을 해 두지만, 난 사르디엘 종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

"그걸 알고 싶어서 여기 남고 싶어 했던 게 아닌가? 더군다나 난 테키나 족속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레바노스는 내가 두 개의 힘을 동시에 다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직접적으로 어둠의 힘을 이용해 타격을 가했으니, 맞은 사람은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빛을 집어삼키는 어둠의 힘을 말이다.

"역시 그랬군요······."

"네가 천계의 핏줄이라고 해서 나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나?"

내 말에 그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 제게 천계의 피가 섞였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이 대륙에서 알지 못하는 건 없다, 레바노스."

"······."

나는 그런 그를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궁금증을 풀었으니, 떠나겠느냐?"

하지만 그는,

"아니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더더욱 이곳에 남고 싶어졌습니다."

"이유는?"

"당신이 가진 그 힘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어둠과 빛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는지, 당신의 정체가 정녕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네가 알고 싶어 하는 힘의 정체가 전부 템빨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무려 레바노스가 내 부하 역할을 자처하겠다면 이건 완전 대박 중의 초대박이었다.

"좋다. 허락해 주지."

그러니 당연히 허락을 해주었다.

물론,

"하지만 만약 우리 왕국과 나의 명예를 더럽힌다면 그땐 그 목을 확실하게 잘라 주지."

허세를 부리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레바노스는 흠칫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잘 알겠습니다."

난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레바노스가, 그것도 무력 96짜리의 무시무시한 강자를 부릴 수 있는 날이 오다니.

감동에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

"대기사단장님!!"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와 내게 아뢰었다.

"아뢰옵니다! 할라즈 왕국에서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할라즈 왕국?"

사신단도 아니고 달랑 서신 하나만?

나는 기사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그러는 순간.

[메인 퀘스트, 황제의 길의 가이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할라즈 왕국의 구원

-위기에 빠진 할라즈 왕국을 구원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내가 애써 무시하고 포기해 버렸던 황제의 길 퀘스트가 제멋대로 시작되었다.

82화

0.01초 소드마스터 82화

할라즈 왕국은 내가 이 게임에 던져졌을 때 처음으로 맞붙은 곳이다.

내 일격에 죽었던 소드마스터 유한의 왕국, 그리고 지금은 나의 든든한 기사가 된 아론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게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글은 길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사방에서 출몰하는 악마들 때문에 지금 왕국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라즈 왕국이 예전이랑 많이 다르긴 하지.'

유한이 죽고 아론이 우리에게 투항한 뒤부터 할라즈 왕국은 일라이 왕국보다 약한 곳이 되었다.

이제 그곳이 대륙 최약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마법사 켈린이 있긴 하지만, 그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순 없을 터.

더군다나 마기를 뒤집어쓴 악마들이 쳐들어오면 우리 왕국처럼 마기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아무리 실력자라도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두 왕국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검의 원탁에서 켈린은 나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렸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할라즈 왕국과는 간간이 교역하며 별다른 다툼 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구원군을 요청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나?'

유한이 내 손에 죽은 것도 있고, 아론과 몇몇 기사가 내 밑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고.

칼을 겨누며 싸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하 호호거릴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딱 중간 부분에 놓인 사이라고 해야 하나.

딱히 놈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구원군 요청이라.

[빛의 기사라 칭송을 받으며 악마 처단에 앞장선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부디 할라즈 왕국을 가엽게 여기시어 악마로부터 저희를 구원해 주십시오.]

서신에 적힌 내용 중 일부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슬슬 왕국끼리 연대할 때가 온 건가.'

왕국의 연대.

원래 스토리대로 게임이 흘러갔다면, 보통 플레이어는 각 왕국을 정벌해 힘을 규합하고 테키나 족속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낸다.

하지만 지금 스토리가 미쳐 날뛰는 중이라 사실상 당장 왕국 정벌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왕국을 정벌하지 않고 외교적 화합을 이루었다면 왕국 간의 연대를 통해 테키나 족속을 막는 방법도 있다.

이 게임은 생각보다 선택할 수 있는 루트가 많고, 클리어 방법도 무조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근데 이거 함정 아니야?'

의심병이 도질 수밖에 없다.

이놈의 난이도가 얼마나 내 뒤통수를 쳐왔던가.

'퀘스트가 뜬 걸 보면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황제의 길] 퀘스트.

이 게임의 엔딩으로 달려갈 수 있으며, 이 아슬란의 몸으로 맞이하는 첫 메인 퀘스트였다. 문제는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 아슬란의 몸으로 제국을 세운다?

'차라리 내가 신이 된다고 해라.'

카르만 같은 괴물과 맞붙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운 좋게 내가 찰나의 괴력으로 상대를 죽인다고 한들, 그 뒤에 있는 수만, 수십만의 대군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황제의 길은 둘째 치고 할라즈 왕국을 어떻게 할 건지, 그게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할라즈 왕국을 돕는 것을 성공하면 무려 10골드를 준다.

'좀 있으면 상점을 다시 열 수 있을 텐데.'

이번 퀘스트를 끝내고 보상을 받은 뒤, 조금 더 노가다를 하면 상점 오픈이 가능해진다. 그럼 그때 새로운 아이템과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가 있다.

'하지만 할라즈 왕국의 영토를 잘못 밟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지.

그게 걱정이었다.

"대기사단장님."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론이었다.

나는 그에게 손짓해 내 곁으로 오게 했다.

그는 부름을 받은 강아지마냥 헐레벌떡 내게 달려왔다.

"아론."

"예, 대기사단장님. 부르셨습니까?"

"이걸 한번 보거라."

할라즈 왕국에서 보낸 서신을 읽은 아론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난 그런 아론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넌 이들을 돕고 싶나?"

"······."

잠시 말이 없던 아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부 옛날 일입니다. 저는 아슬란 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얻었고, 제 고향과 삶의 터는 할라즈가 아닌, 이곳 일라이 왕국입니다. 그러니 저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

나는 힐끗 입꼬리를 올렸다.

거기서 마음을 정했다.

'원래는 안 가려고 했지만.'

나도 청개구리인가.

아론이 저렇게 말하니, 왠지 가야 할 거 같단 말이지.

심지어 지금 내 곁에는,

'레바노스가 있다.'

그냥 존재 자체가 깡패인 레바노스.

사르디엘의 핏줄이라 빛의 힘을 이용할 줄도 알기에 악마에 최적화된 놈이다.

웬만한 악마는 혼자서 다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레바노스는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었다.

"레바노스."

"예."

"네 실력을 증명할 때가 된 거 같군."

"······?"

"난 아직 네 실력을 모른다. 나는 짐덩이를 곁에 두고 싶지 않구나. 그러니 이번 출정에 따라와 네 실력을 보여 보거라."

그러자 레바노스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대꾸했다.

"제 실력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 대륙의 소드마스터입니다."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제 실력을······."

바로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허세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

"네 말에 목숨을 걸 수 있느냐?"

"······?"

"다음 할 말을 조심하거라, 레바노스여."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의 간단한 일격조차 받아내지 못한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실력을 운운하는 것이냐?"

레바노스는 주춤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이 억울하다면 언제든 내게 도전해도 좋다. 단,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스르릉-

그와 동시에, 내 옆에 놓여 있던 검이 검집에서 나와 허공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

그것을 보고 레바노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서 네 목숨을 걸고 증명해 보이겠느냐, 아니면 전장에서 악마를 상대로 보여 주겠느냐?"

레바노스는 위협적인 칼끝을 보이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이내 대답했다.

"전장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전장에서'라는 말을 유독 강조했다.

착-!

검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럼 결정되었군. 우린 할라즈 왕국으로 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펄럭이며 훈련장을 나섰다.

그러면서 내 허리춤에 있는 칼을 꽉 붙잡았다.

'야. 너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튀어나오래? 깜짝 놀랐잖아.'

[······.]

놈은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나와 의지를 공유하는 검.

이놈도 점점 허세가 심해져서 큰일이다.

* * *

"캬오오오-!!"

"키에에엑-!!"

시커멓게 사방에서 몰려드는 악마 군단.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안에 섞여 있는 건 절반이 악마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마기에 중독된 몬스터들이다.

범람하는 몬스터 웨이브와 함께 악마 군단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케, 켈린 님. 놈들이 다가옵니다!"

"이곳은······. 이곳만큼은 지켜야 한다."

이미 할라즈 왕국에 소속된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고, 다른 성들도 벌써 악마 군단에 의해 무너진 상태.

이제 남은 거라고는 여기 이곳 왕궁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저 많은 악마 군단이······."

언제 어떻게 저 많은 군단이 생겨난 것일까.

저 정도의 군단을 모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렸을 텐데, 그 어떤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았다.

"악마라니. 그냥 다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교단에서는 매일 같이 아슬란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륙 사방에 이야기를 전파했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고, 아슬란이 맞았다.

악마는, 테키나 족속은 정말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할라즈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다가오는 중이다.

"목숨을 다해 막아라! 여기가 뚫리면 할라즈 왕국의 멸망이다!"

"예!!"

켈린은 대마법사라는 위용에 걸맞게 광역 마법을 뿌려대며 미친 듯이 달려오는 몬스터들에 천벌을 내렸다.

콰쾅-! 콰콰쾅-!!

"캬오오오!!"

그러나 아무리 대마법사 켈린이라고 한들, 저 많은 몬스터의 진격을 혼자 막을 순 없는 노릇.

그는 마법의 힘을 터트리고, 또 터트리며 조금이라도 더 몬스터들을 죽여 나갔다.

하지만,

"노, 놈들이 올라온다!"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마침내 그들이 성벽에 다다라 서로의 등을 밟으며 그곳을 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놈들에게서 흐르고 있는 마기에 병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읍!"

"마, 마기가!"

"크악!"

켈린은 그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아······."

여기까지인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존심까지 버리며 아슬란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는 끝끝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할라즈 왕국이 이대로 멸망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겠지.

"할라즈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마지막 마력까지 쥐어짜며 몬스터 군단을 막아 세워 봤지만, 결국 켈린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끝없이 몰아치는 저들을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 이때 유한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까.

"······."

여러 성과 마을을 지키고자 뛰어다니며 마력을 쥐어짠 탓에, 이제는 간단한 파이어볼조차 만들 수 없는 실정.

그는 덤덤하게 할라즈 왕국의 멸망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쐐애애액-!!

허공을 가르는 거친 소리에 고개를 위로 올렸다.

"저건 뭐지?"

투석인가?

아니. 뭉텅이로 뭔가 날아오는 거 같은······.

퍼펑-! 퍼퍼펑-!!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들이 하늘 위에서 폭발했다.

그 강한 폭발음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그 위를 올라와 공격하던 몬스터들도 전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쏴아아아-!!

"······황금비?"

황금빛으로 물들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중,

"키에에엑!!"

"캬오오!!"

몬스터들이 그 비에 맞으며 괴로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빗물에 닿은 몸은 녹아내리며 연기를 뿜어냈고, 마기는 정화되어 사라졌다.

"서, 설마 이게 전부 성수인가?!"

하지만 어떻게 저 많은 성수를 뿌릴 수가 있는 거지?

대체 누가? 어디서?

그제서야 켈린은 저 멀리 여러 대의 투석기와 함께 다가오는 기사단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위로 붉은 망토를 휘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 * *

'많이 늦진 않았군.'

할라즈 왕궁이 악마 군단에 의해 넘어가기 직전에 도착한 것 같았다.

'여기서 할라즈 왕국이 멸망하면 골치 아파진다.'

내가 굳이 이 위험을 무릅쓰고 온 이유는, 레바노스의 존재 때문도 있지만 할라즈 왕국이 멸망하면 저곳을 기점으로 테키나 족속이 몬스터를 무한으로 생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건 그러니까······. 앞마당 멀티 같은 거지.'

악마들은 성안에 있는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을 악마를 소환하고 몬스터를 만드는 재료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짜 무서운 점이었다.

한 왕국이 통째로 악마 손에 넘어가는 순간, 우후죽순 몬스터 숫자가 한꺼번에 불어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싹을 자른다.'

그렇기에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단과 네임드 캐릭터들이 나서 줄 차례였다.

"대기사단장님! 모두 돌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론은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

자기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본인의 고향이다 보니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이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니깐.'

이 수천 명의 사람이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나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정수리를 뚫을 것처럼 고양감이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허세와 심취는 덤덤하고 차갑게 그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

여기서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거나, 대단하게 뭔가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전군-!"

가볍게 손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진격."

그러자,

"일라이 왕국을 위하여!!"

아론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아슬란 님을 위하여!!"

기사단 전체가 함성을 지르며 용맹하게 악마 군단을 향해 쇄도했다.

83화

0.01초 소드마스터 83화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은 거침없이 돌진을 이어 갔다.

그들의 창과 칼 아래 몬스터들이 썰려 나가며 말발굽에 짓밟혔다.

더군다나 이들은 단단한 중갑 기병을 앞세운 터라, 몬스터들이 공격해도 끄떡없어 보였다.

퍼펑-! 퍼퍼펑-!

"캬오오오!"

그리고 위에서는 연신 성수 폭탄이 터지면서 악마들을 괴롭혔다.

악마의 덩치가 크든 작든, 성수가 피부에 닿는 순간 타들어 갔으며, 몸부림을 치다 기사들이 날리는 창칼에 맞아 죽기 일쑤였다.

거기다 무엇보다,

쐐애애액-!!

선봉에 서 있는 자들의 무력이 압도적이었다.

"저건 설마······. 레바노스?"

켈린은 줄에 매달린 대검을 크게 휘둘러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휩쓸어 버리는 레바노스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대체 저자가 언제부터 일라이 왕국과 함께 싸우기 시작한 거지?

그 자존심 높고 고고한 소드마스터가?

콰아아아-!

특히 저 빛의 힘은 레바노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아슬란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전, 한때 레바노스가 빛의 기사로 불렸던 이유도 바로 저 때문이 아니던가.

"키에엑!"

"캬오오!"

하지만 몬스터들은 끝없이 몰려오고 있다.

놈들은 레바노스를 죽이고자 한번에 들이쳤는데, 하늘에서 무언가가 괴성을 지르며 내려왔다.

"키루우우-!!"

영롱한 푸른 빛으로 비행하며 지면을 휩쓰는 사파이어 자쿤.

그것이 거센 날갯짓으로 몬스터들을 흐트러 놓았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레바노스는 대검을 휘둘러 포위망을 뚫어 버렸다.

"진격!!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와아아-!!"

기사단은 무서울 것 없이 진격했고, 그 많던 악마 군단은 어느새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일라이 왕국이 이 정도였다니."

환골탈태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일라이 왕국은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저것이 과거 대륙 최약체라 불리던 왕국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건 아마도,

"저 사람 때문이겠지."

저 무시무시한 기사단과 레바노스라는 소드마스터를 휘하처럼 부리는 한 사람.

일라이 왕국을 강대국으로 바꿔 놓은 대기사단장 아슬란.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유자적하듯 저 뒤에서 화려하게 망토를 휘날리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대륙을 정복해 나가는 위엄 넘치는 군왕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음?"

그런 그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그림자는 곧 거대한 형상으로 바뀌었고, 그 높디높은 몸뚱이로 아슬란을 내려다보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콰아아앙-!!

그 악마가 아슬란을 향해 두 주먹을 내려쳤다.

* * *

'역시 키운 보람이 있구나.'

할라즈 왕국에 잘 왔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일종의 테스트라고나 할까.

그동안 내가 키워 놓은 기사들이 얼마나 악마와 잘 싸우는지, 얼마만큼의 전투력을 가졌는지 오늘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마기에 쩔쩔맸던 나약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네.'

그만큼 현재 내 기사단은 강한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이다.

마기라는 건 결국 훈련과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다른 악마 군단이랑 싸워도 해볼 만하겠어.'

성수 폭탄 세례에 중갑 기병단, 거기다 무시무시한 무력을 발휘하는 레바노스까지.

이 아름다운 삼박자가 맞춰지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래. 내가 여기다 돈을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이 정도도 못 해주면 섭섭하지.'

역시 돈값을 하는구나.

투자하기 참 잘했다.

나중에 여기 게임을 탈출하고 나면 주식 투자나 해볼까?

그런 헛소리를 속으로 지껄이고 있던 중.

"······?"

나는 내 아래로 드리워지는 시커먼 그림자에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다.

나를 호위하고자 주변을 경계하던 기사들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우리 눈앞에는,

"아,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거대한 악마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또.'

악마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검은 두 뿔을 장착한 이 괴물의 이름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푸르카스]

내가 아는 네임드 악마였다.

왠지 저 많은 몬스터 군단 중에 네임드 악마가 하나도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서 줄곧 숨어 있었던 건가?'

이런 음흉한 놈을 봤나.

"대, 대기사단장님을 지켜라!"

혹시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일부러 내 호위 인원을 수백 명으로 늘려 놓았다.

하지만 상대가 푸르카스라면 지금 이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삐이이이-!!

푸르카스의 검은 뿔이 진동하자 고막을 흔드는 음파가 퍼져 나왔다.

그러자 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다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투석기로 성수 폭탄을 날리던 보병들까지 음파 공격에 휩쓸려 쓰러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크으윽-"

"대, 대기사단장님."

기사들의 귀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 수백 명의 기사가 한순간에 전투 불능이 되었다.

이것이 푸르카스의 고유 능력, 음파.

하지만 나는 이들과 다르게 아주 멀쩡했다.

'신성한 보호 때문인가.'

하루에 한번 즉사급 데미지를 흡수해 주는 신성한 보호.

그 덕분에 방금 전 공격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푸르카스는 나 혼자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러다 놈은 깍지를 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더니, 망설임 없이 내려쳤다.

콰아아앙-!!

나는 수호의 방패를 펼쳐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크르르-"

놈은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다시 한번 두 손을 들고 나를 내려치려 들었다.

하지만 놈은 제 두 손이 찢어지고 팔에서 피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멈칫거렸다.

수호의 방패를 내려치던 그 데미지를 고스란히 자신의 두 팔로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푸르카스의 당황하는 얼굴과 눈동자가 내 눈에 보였다.

바로 그때.

"건방지구나."

잠들어 있던 허세가 충만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악마 따위가 이 몸을 내려다보다니."

나는 천천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푸르카스는 인상을 쓰며 검은 뿔을 천천히 진동시켰다.

다시 한번 음파 공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피이잉-!

벌써부터 고막이 흔들리고 그에 따라 몸 전체가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강렬한 허세로 무장하여 우아하고 격조 있게,

"시끄럽다."

칼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푸르카스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는 휘둘렀던 검을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었다.

착-!

그와 동시에,

콰콰콱-!!

푸르카스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더니 이내 두 갈래로 쪼개져 양옆으로 쓰러졌다.

'미친. 조금만 늦었어도······.'

음파 공격에 머리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이놈의 허세는 가벼운 동작을 할 때도 기품 있고 격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만약 푸르카스의 뿔이 더 빠르게 진동했다면 쓰러지는 건 저놈이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대기사단장님!!"

마치 사건이 다 끝난 뒤에 나타나는 영화 속 경찰마냥 아론과 기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푸르카스의 시체를 보고 흠칫거렸다.

"역시······. 대기사단장님이십니다!"

"이 거대한 악마를 단칼에-!"

하지만 내 허세에 심취해 있는 이 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칭송과 찬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

"아론."

"예, 대기사단장님."

"호들갑 떨지 말거라."

"소, 송구합니다."

그런데 그때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대기사단장님! 저, 저걸 보십시오!"

방금 전 내게 죽임을 당한 푸르카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서로 합쳐지고 있었다.

'뭐야. 대악마급도 아니면서 이놈도 불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대악마가 특별한 건 바로 그들이 불사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푸르카스는 불사의 악마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놈의 영혼이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모두 공격 준비!"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각자 무기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저들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이런 걸로 소란 피우지 말거라."

나는 덤덤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기 포식이 발동되면서 하나로 뭉치고 있던 검은 기운이 내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내 손끝으로 흡수되고 있던 마기는 곧 황금빛으로 뒤바뀌어 마치 성스러운 불길이 푸르카스의 시체를 태워 버리는 것처럼 바꿔버렸다.

츠츠츠츠-

마기 포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맹렬하게 타오르던 황금 불꽃 역시 금방 사그라들었다.

[포효]

-15초간 포효 능력을 얻게 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15초)

-시전자의 포효를 듣게 된 아군은 사기가 올라갑니다. 적군은 사기가 저하됩니다.

-포효의 강도에 따라 적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게 됩니다.

-포효의 강도는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푸르카스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 포효였구나.

나는 돌고래 같은 음파 공격인가 싶었는데.

그럼 이것도 찰나의 괴력과 섞어 쓰면 어떻게 되려나?

"······이, 이것이 빛의 힘인가."

"대기사단장님께서 악마를 정화하셨다!"

기사들은 시끄럽게 함성을 질러댔다.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만 같았다.

"아론."

"아, 예! 대기사단장님!"

아론의 눈동자 역시 뭔가에 충만한 듯했다.

"여기 있는 부상병들부터 처리하거라."

난 방금 전 음파 공격을 맞고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을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쯧. 고작 그 정도도 버텨내지 못해서야, 너희들이 정녕 나를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

"······."

저들은 아마 내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아론. 왕국으로 돌아가면 호위 기사들의 훈련을 더욱 강화하거라."

"······예!"

아론은 부하들과 함께 부상병을 부축했다.

"자. 이 성수를 마셔라. 그럼 금방 나을 것이다."

"아슬란 님의 신성한 물이다. 이것을 귀에 붓거라."

그런데 부상병을 얼른 데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수를 들이붓고 있었다.

"······."

뭔가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 * *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성안으로 들어오자 켈린과 기사들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슬란 님께서 저희 왕국과 이 백성들을 살리셨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그런데 왕실 친위대가 보이지 않는군. 켈린, 너 다음으로 그들이 가장 쓸모 있는 놈들일 텐데."

할라즈 왕국의 왕실 친위대는 갑옷 색깔부터가 다르다.

평소에는 그냥 왕궁에 대기하고 있지만, 왕궁이 위험에 빠지면 그들이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나서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째서인지 코빼기도 보이지가 않았다.

켈린은 곧 이를 뿌득 갈며 대답했다.

"우리의 왕, 르데만은 친위대를 데리고 왕궁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왕이 왕궁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냐?"

"예. 그것도 모자라 가자르 왕국에 투항했습니다. 할라즈 왕국의 백성들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의 목숨만을 살리기 위해 그런 비겁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르데만이 원래 그런 놈이긴 하지.

왕국이 위험에 빠지면 보통 왕이라는 작자가 나서서 싸우기 마련인데, 르데만은 생존이라는 특성이 있어서 무조건 자기 살길부터 찾고 다니는 놈이었다.

그래서 이 게임을 할 때, 할라즈 왕국을 공격하면 항상 르데만을 붙잡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놈은 주변 왕국에 항복한 뒤, 그곳의 힘을 빌려 다시 역공을 펼치는 악랄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왕이 떠났다면 누가 여길 통치한다는 것이냐? 왕의 후계자는?"

"후계자도 없습니다. 르데만이 도망을 치면서 왕가의 자식들을 전부 데려가는 바람에······."

그래도 자기 가족은 챙길 줄 아는 놈이라는 건가.

"그럼 남겨진 이들을 이끌 수 있는 건 켈린, 너밖에 없다는 거군."

"······."

켈린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부담스럽게 내게 극진한 예의를 차렸다.

"줄곧 생각을 해왔습니다. 악마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지······. 하지만 결코 다음은 막아내지 못할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고, 사실은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대기사단장님의 위용과 당신이 이끄시는 강대한 기사단을 보고 결정했습니다."

"······?"

슬슬 불안감이 느껴지는 켈린의 대사였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할라즈 왕국은 왕가가 이곳을 버린 순간, 그 맥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저희는 더 이상 왕국의 지위를 유지하기도 힘이 듭니다."

잠깐, 이거 설마-

"그러니 당신께서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왕이 버린 이 할라즈 왕국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메인 퀘스트, 황제의 길을 시작합니다.]

-모든 왕국을 정복해 제국을 건설하십시오.

-제국을 건설할 시 게임은 끝이 납니다.

(첫 정복 왕국: 할라즈)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황제의 길 퀘스트가 자동 수락되면서 첫 정복 왕국이 할라즈로 표시되었다.

84화

0.01초 소드마스터 84화

"할라즈 왕국이 승리를 했다?"

"예! 할라즈 왕국의 군대가 성을 지켜냈습니다!"

가자르 왕국의 왕, 가이슈르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저 왼편에 앉아 있는 르데만에게 말했다.

"들었는가, 르데만? 악마에게 짓밟힌 줄로만 알았던 당신의 왕국이 승리를 했다는군."

"그, 그럴 리가."

르데만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 정도 숫자는 제아무리 대마법사 켈린이 있는 할라즈 군대라고해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할라즈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거지?"

보고를 하던 병사는 르데만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왕을 바라보았다.

가이슈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 대답했다.

"일라이 왕국에서 대기사단장 아슬란을 보내 할라즈 왕국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활약으로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호오. 일라이 왕국? 거기다 아슬란이? 하하하! 역시, 빛의 기사라는 위명이 거짓은 아니었던가? 할라즈 왕국과 일라이 왕국은 무척 껄끄러운 사이로 알고 있는데, 그걸 도와주다니."

가이슈르는 힐끗 웃으며 르데만에게 말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지? 애써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한테 달려와 항복을 했는데, 할라즈 왕국이 다른 놈 손에 들어가게 생겼군."

"······아직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다?"

"할라즈 왕국이 일라이 왕국 손에 넘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볼 겁니까?"

그 말에 가이슈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놔두지 않으면? 지금 나더러 일라이 왕국과 전쟁이라도 하라는 건가? 상대는 그 카르만과 필적한다는 아슬란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놈들도 분명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그 많은 악마 군단을 상대하였으니, 당연히 큰 출혈이 있었겠지요. 더군다나 할라즈 왕국이 아직 멀쩡하다면 나는 여전히 그곳의 왕입니다."

르데만의 말을 가이슈르는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일라이 왕국이 이렇게 할라즈 왕국을 흡수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은 힘을 모으느라 잠잠하겠지만, 힘을 다 모으고 나면 그다음 칼날은 바로 이곳, 가자르 왕국이 될 겁니다."

그 말에 기사들과 신하들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우릴 협박하는 건가?!"

"자기 왕국을 버리고 온 비겁한 왕 주제에!"

가이슈르는 손을 들어 부하들의 아우성을 진정시켰다.

"일 리가······. 아예 없는 말은 아니군."

"왕이시여!"

"저자의 말을 들으시는 겁니까?"

"자네들이 생각해도 그렇지 않나? 아슬란을 이대로 놔두게 되면 할라즈 왕국은 일라이 왕국에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군대를 이끌고 르데만을 그곳으로 데려간다면?"

비록 왕국을 버린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 적통성은 무시하지 못한다.

여전히 그 안에서는 저 멍청한 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할라즈 왕국 백성들은 일라이 왕국에 흡수되어 자신의 나라를 잃느니, 차라리 못 미덥더라도 저 왕을 받아들이려 할 터.

"르데만. 너의 뜻대로 해주지."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기억하거라. 할라즈 왕국을 되찾게 되면 너희는 평생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 조건으로 널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결정을 내린 가이슈르가 대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군사를 준비해라. 되도록 빨리 할라즈 왕국을 향해 진군하겠다."

* * *

격렬했던 악마와의 전투가 끝난 지도 이제 3일이 흘렀다.

할라즈 왕국은 현재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다.

사실 할라즈 왕국의 왕궁 쪽은 딱히 복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악마들이 성벽을 넘기 전, 내가 놈들을 전부 쓸어버렸으니 말이다.

문제는 할라즈 왕국에 포함되어 있는 마을들과 성들이었다.

"마을 다섯 곳은 회생 불가능이며, 두 개의 성 역시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켈린 이놈은 내게 다 무너져 가고 있는 왕국을 통째로 넘겨 버렸다.

심지어 왕궁 안에도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왕궁 안에 있는 재산이란 재산은 전부 다 긁어 가져갔네.'

가자르 왕국에 투항하기 위해 할라즈 왕국의 왕이었던 르데만은 재산을 전부 가지고 튀었다.

즉, 할라즈 왕국을 일라이 왕국 영토에 온전히 편입시키려면 복구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을 내가 다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금이라도 좀 남겨 두고 가지······.'

이 옹졸한 놈 같으니라고.

거기서 좀만 남겨 두고 갔어도 이 정도로 배가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엄한 내 돈만 나가는 거 아니야?'

나는 잠시 할라즈 왕국 재건에 필요한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빠르게 계산부터 들어가 보았다.

성벽을 아예 새로 쌓아야 하고, 마을 재건에, 경계 강화까지 한다면······.

얼추 가격이 나왔을 땐,

"······."

할 말을 잃었다.

'비상금까지 싹싹 긁어야 재건이 가능하겠네.'

그냥 재건이고 뭐고 이대로 놔둘까.

여기 있는 노동력만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럼 분명 반란이 일어나겠지?'

반란의 불씨가 우리 왕국까지 닿으면 무척 곤란해진다.

나는 잠시 옆에 있던 켈린을 노려보았다.

왜 이 자식은 이딴 쓰레기 왕국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선언해서는······!

"왜 그러시는지."

"다들 나가 있어라. 잠시 생각을 좀 해야겠다."

"아, 예."

나는 할라즈를 비롯해 부하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곳은 왕과 기사들, 그리고 신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전각이다.

저 맨 끝에는 오직 이 나라의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왕좌가 있었다.

난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뭐 같은 왕국을 어떻게 운영한다?"

아주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꼿꼿하게 세우느라 통증이 아려오는 허리를 나름의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포효]

-15초간 포효 능력을 얻게 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15초)

-시전자의 포효를 듣게 된 아군은 사기가 올라갑니다. 적군은 사기가 저하됩니다.

-포효의 강도에 따라 적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게 됩니다.

-포효의 강도는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이번 마기 포식으로 새로 얻게 된 능력, 포효.

다른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찰나의 괴력과 함께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흠."

나는 한번 시범 삼아 포효를 써봤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자 그것이 조금 크게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에 비례한다고 했으니, 딱 이 정도인가."

그냥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커진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포효와 찰나의 괴력을 섞어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다.

"잠깐. 너무 크게는 말고. 정말 작게만 해보자."

괜히 또 일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최대한 작게, 바로 옆에서 들어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정말 입만 벙긋하듯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아아-"

그러자 새로운 스킬 설명창이 나타났다.

[전장의 포효]

-15초간 전장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보다 너무 짧은데.

"······된 건가?"

바로 그 순간.

콰직-!! 콰콰콰콱-!!

내 의도와는 다르게 갑자기 어마어마한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전각의 기둥을 갈라지게 만들고 유리창을 깨뜨렸으며, 저 입구를 부숴 버렸다. 마치 이 안에서 크게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미친.'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그대로 닫아 버렸다.

15초간 이어지는 포효 능력이 전각 전체를 무너뜨려 함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

"아슬란 님!"

소란을 듣고 기사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대기사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아슬란 님!"

기사들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재촉 좀 그만해.

아직 15초 안 끝났단 말이야.

나는 간신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아. 괘, 괜찮으십니까? 방금 건 대체······."

"별일 아니다."

"그, 그렇군요. 전각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지만······ 아무튼,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침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르데만이 가자르 왕국의 군대와 함께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방금 들어왔었습니다."

뭬야?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부하들이 들어오면서 가득 차오른 허세가 아니었다면 벌떡 일어나 화를 냈을 것이다.

'르데만. 이 양아치 같은 놈.'

할라즈 왕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자르 왕국의 힘을 빌려 다시 왕 자리를 되찾으러 오는 거구나.

내가 3일 동안 여길 뼈 빠지게 복구하고 있었더니, 이제와서 숟가락을 올리려 들어?

"놈들을 마중 나가야겠군."

"바로 군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나도 바로 나가겠다."

"예!"

이대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나는 곧바로 왕궁 밖을 나가 모든 복구 작업을 멈추게 한 뒤, 기사단을 이끌고 놈들이 오고 있다는 곳을 향해 나아가 보았다.

'생각보다 더럽게 많이 모였네.'

카르만의 칼라 왕국이 대륙 최강이라면, 가자르 왕국은 에인소프 왕국과 2위 자리를 다투는 강대국이라 할 수 있다.

놈들이 가진 기사단의 숫자는 일라이 왕국보다 많았으며, 마법 병단 역시 그 차이가 압도적이다.

과연 그 명성대로 가자르 왕국의 군대는 평야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아 보였다.

'괜히 나왔나.'

처음에는 레바노스가 있으니, 어떻게든 싸우면 상대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저들의 숫자를 보니, 그 군세가 참 대단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군을 돌려?'

이대로 정면충돌을 한다면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아니. 둘 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전투가 끝날 것은 자명한 일.

그럼 이이제이로 이득을 보는 건 바로 저 르데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대로 르데만에게 다시 왕국을 넘기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닐지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할라즈 왕국의 왕, 르데만이다!"

갑자기 르데만이 무슨 자신감인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우리 왕국을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도움을 준 일라이 왕국의 공은 내 절대 잊지 않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가라. 할라즈 왕국을 재건하는 건 내가 맡을 테니!"

한 마디로 니네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그만 꺼지라는 소리였다.

"만일 이대로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기회 삼아 우리 할라즈 왕국을 유린하겠다는 뜻으로 알고 가자르 왕국의 군대가 너희를 벌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여기를 맡아봤자 돈만 오지게 들지. 나한테 필요가 있겠냐.

하지만-

'듣다 보니 빡치네.'

내 기사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악마를 몰아내 줬더니, 도망친 왕 주제에 이제와서 주인 노릇을 해?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가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와 동시에 허세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

머리끝까지 허세가 차오르자, 분노로만 가득했던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았고, 뜨거웠던 심장은 다시 차갑게 변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들어라."

그런 뒤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망국의 왕이여."

* * *

가자르 왕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대기사단장, 레키엘.

그리고 그의 곁에는 두 명의 대마법사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총력전.

제 왕국을 버리고 도망쳤던 왕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들은 왕의 판단을 믿었다.

할라즈 왕국이 이대로 아슬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그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에는 이 세 명도 동의하기에 군말 없이 여기까지 나온 것이다.

"레키엘. 네가 아슬란과 일대일로 붙는다면 잡을 수 있겠나?"

"너희 둘이 힘을 빌려준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음."

레키엘 혼자서는 무리일 수도 있어도 대마법사 둘이 마법의 힘을 빌려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거기다 가자르 왕국의 군대 숫자가 일라이 왕국보다 훨씬 많다.

물량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가자르 왕국이 한 수 위였다.

그렇기에 저 멍청한 르데만의 도발에 아슬란이 넘어가기만 한다면······.

[들어라.]

바로 그때였다.

[망국의 왕이여. 그리고 그의 개 노릇을 하는 가자르 왕국이여.]

"!?"

[어리석구나.]

갑자기 천지가 요동치고, 두 개 골을 흔드는 음성에 기사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으, 으아아악!"

푸히히힝-!!

기사들은 귀를 막아봤지만, 광활하게 울려 퍼지는 저 음성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말들 역시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레키엘과 두 대마법사 역시 고막을 파고들다 못해 찢어 버리는 저 거대한 음성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른 보, 보호막을······."

마법사답게 보호막을 펼쳤지만,

[감히 한 초의 상대도 되지 않는 것들이 누구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더냐?]

콰직-!!

보호막조차 소용이 없었다.

저 음성에 보호막이 산산조각이나 무용지물이었다.

"크으윽!"

"으으으."

고막이 터져 두 귀에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원한다면 오너라.]

저 무시무시한 음성은 여전히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나 아슬란이 오늘 너희의 피로 이 평야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85화

0.01초 소드마스터 85화

르데만은 쓰러진 자리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를 따라 할라즈 왕국으로 출정한 가자르 왕국의 군대는 결코 오합지졸이 아니다.

칼라 왕국 다음으로 강하다는 정예 병사들이다.

제 아무리 아슬란의 위명이 대륙을 떨치고 있어도 가자르 왕국은 그 이름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우으으-."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 살려줘. 귀가 안 들려."

"괴물이다. 저, 저건 괴물이야!"

이들을 보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으며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 하고 있다.

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사내를 모두 경배 하듯이 말이다.

'이것이 아슬란인가.'

악마 사냥꾼, 빛의 기사, 카르만에 필적하는 강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남자, 아슬란.

그의 힘은 그저 소문에 불과한 허상이라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그 소문이 축소된 것이었다.

'카르만이 와도 과연 저 남자를 이길 수 있을까?'

목소리만으로 이 대군을 굴복시킨 남자다.

하물며 카르만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그도 똑같은 인간이거늘.

"이,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사람의 욕심이라 했다.

르데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자빠져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얼른 일어나라! 너희는 최강의 가자르 왕국 기사다! 그런데 겨우 목소리 하나에 벌벌 떨며 여기 처박혀 있을 거냐!?"

"······."

그러나 그들은 반응이 없었다.

설마 방금 전 그것으로 청력을 전부 잃은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못 들은 척을 하는 것인가.

"얼른 일어나라고, 이 한심한 놈들아!"

그는 급기야 쓰러져 있는 병사들에게 발길질까지 했다.

"가서 싸워라! 가자르 왕국의 명예를 이대로 짓밟아 버릴 셈이냐? 가서 내 왕국을 되찾아 오란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뿌우우우-!

둥-! 두둥-!

뿔나팔 소리와 함께 북소리가 울리면서 일라이 왕국의 군대가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저건······."

화살과 웬만한 마법으로는 뚫리지 않는다는 중갑 기병.

벌써 일라이 왕국은 저 정도의 군사 기술을 만들었다는 건가.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무언가가 하늘 위로 번쩍 날아오르더니, 그것이 땅에 닿자마자-.

콰앙-!! 콰쾅-!!

큰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크악!"

이건 또 무슨 기술이란 말인가.

분명 마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폭발력을 보이다니!

가뜩이나 아슬란에 의해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가자르 왕국 군대는 쏟아지는 칼루탄에 의해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 도망가!!"

"괴물의 군대다!! 도망쳐라!"

결국 그들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을 쳐댔다.

"안 돼! 어딜 가는 것이냐! 이놈들!"

르데만은 도망치려는 기사들을 붙잡아 못 가게 막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저지하는 건 다름 아닌 가자르 왕국의 대기사단장, 레키엘이었다.

그는 르데만의 몸에 걷어 차며 대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 기사들에게 무슨 짓이더냐."

"레, 레키엘 대기사단장. 당신이야 말로 뭐하는 것이오? 이대로 물러날 생각인가? 당신의 왕은 분명히 할라즈 왕국을 수복하라 했을 텐데!"

"우리 왕께서도 지금 이 상황을 보셨다면 내 결정에 따르셨을 것이다."

"뭐, 뭐야?"

레키엘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일라이 왕국의 군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일라이 왕국을 우습게 봤어. 지금 이 상태로 싸운다면 필시 우리의 패배다. 그럼 주력군을 잃은 가자르 왕국은 할라즈 왕국처럼 멸망하겠지. 저 아슬란의 손에 말이다."

"······!"

"남의 왕국 싸움에 우리 왕국까지 멸망하게 놔 둘 순 없다."

"아, 아니오. 지, 지금이라도 힘을 모아 싸운다면 이길 수 있소!"

"닥쳐라! 방금 전 그 힘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레키엘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건······ 내 평생 경험해 보지 못 한 힘이었다. 저런 힘을 보고도 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게야!"

레키엘은 르데만에게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슬란의 말대로 넌 망국의 왕이다. 난 네 개가 되어 줄 생각이 없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르데만을 놔두고 레키엘은 두 대마법사, 로멜리오스와 아르산에게 달려갔다.

"둘은 괜찮나?"

"그래. 좀 충격이 크긴 하지만······ 괜찮다."

두 사람은 보호막을 펼쳐 떨어지고 있는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저것이 일라이 왕국이 개발했다는 칼루탄이라는 것이군."

"마법탄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사거리도 길다. 저런 살상 무기를 일라이 왕국이 가장 먼저 개발할 줄이야."

왕국의 대마법사이기에 항상 새로운 마법과 무기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레키엘은 그런 둘을 못 마땅하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인가? 일라이 왕국 군대가 물 밀 듯이 치고 들어오면 우린 모두 전멸이야."

"알고 있네. 설마 우리 왕국의 군대가 고작 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무력해질 줄 누가 알았겠나?"

"······."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아슬란이 선봉에 서서 돌격을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멸절할 텐데 말일세."

그건 레키엘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아슬란이 아닌, 다른 이가 선봉으로 서서 공격을 감행했다면 한번 부딪혀 봤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슬란이 선봉에 서서 저 무시무시한 포효를 또 한번 터트린다면 손 쓸 새도 없이 가자르 왕국 군대는 쓸려 나갈 터.

"그런데도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건······."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거겠지."

"우리 가자르 왕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떤 보복을 할 줄 알고?"

"방금 보지 않았나. 우리가 보복을 하려고 군을 일으킨다고 해도 자네는 정녕 저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레키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로멜리오스의 말대로 지금 여기서 두 배가 넘는 군을 모은다고 할지언정 아슬란을 쓰러뜨리는 그림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제기랄."

결국 그는 쓴 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모두 왕국 경계선까지 빠르게 퇴각한다!! 자네들은 후방을 맡아 주게."

"그러지. 얼른 군을 수습하시게. 아슬란의 인내심이 다 달하기 전에."

레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혼비백산 하고 있는 군을 수습하고자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아슬란은 여전히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저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퇴각하라!!"

"퇴각! 퇴각이다!!"

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물러나고 있는 가자르 왕국의 군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드디어 가나?'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의 포효를 터트린 뒤, 칼루탄을 쏟아부어 놈들의 전의를 꺾어 버렸다.

그게 제대로 먹혀 들면서 저렇게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저놈들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버텼다면 우리 군의 피해도 막심했을 것이다.

"대기사단장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당장 가서 놈들을 도륙하고 오겠습니다!"

아론과 기사들이 소리쳤다.

이거 완전 전쟁광들 아니야?

"······."

나는 그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아론과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버리고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가고 싶다는 것이냐?"

"그, 그것이······."

"저런 놈들을 도륙하여 너희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거라. 놈들의 피를 묻히는 것조차 기사의 수치다. 알겠느냐?"

"예!!"

"과연 옳으신 말씀입니다!"

옳긴 개뿔.

괜히 따라가다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

가자르 왕국의 대기사단장, 레키엘은 [반격]이라는 특성이 있어 잘못 따라갔다가 역관광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냥 도망치도록 놔두는 게 상책이다.

물론 레바노스도 있기 때문에 우리 군이 패배하진 않겠지만, 압도적으로 이길 수도 없기에 그 이후에 벌어질 후폭풍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대기사단장님. 저기 한 놈이 남아 있습니다."

가자르 왕국의 군대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할라즈 왕국의 왕, 르데만이었다.

"저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힐긋 르데만을 쳐다본 뒤 이내 몸을 돌렸다.

"제 왕국을 버리고 간 자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알아서 하거라."

저대로 놔두면 르데만은 알아서 죽을 것이다.

난 신경 쓰지 않고 이제 그만 왕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대기사단장님. 성에서 백성들이 모두 대기사단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제 할라즈 왕국은 일라이 왕국의 아래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한 말씀을 해주신다면 안정이 될지도 모릅니다."

켈린 이놈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니다.

보통 성이나 왕국을 정복하게 되면 그곳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직위가 높은 이가 나서서 연설을 하곤 하다.

아슬란에게는 군림과 중후한 매력이라는 특성이 있어서 조금 잘 먹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강렬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때 나는 포효 스킬 설명에 있는 문장이 떠올랐다.

-시전자의 포효를 듣게 된 아군은 사기가 올라갑니다. 적군은 사기가 저하됩니다.

혹시 이게 먹힌다면······?

* * *

"······."

망연자실하며 무릎을 꿇은 채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르데만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망국의 왕다운 모습이구나."

고개를 들어 보니 대마법사 켈린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르데만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켈린. 감히 네가 나를 배신해?!"

"웃기지 마라. 할라즈를 먼저 버린 건 네놈이지 않나!"

"나와 같이 가자고 분명 말했을 텐데? 그건 거절한 건 바로 너였다."

"미친놈. 왕국의 백성들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바로 왕이 가져야 할 자세 아닌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켈린은 르데만의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

"그래. 죽여라."

"······아니. 이대로 죽이는 건 아깝지."

"뭐, 뭐라?"

"너에게 똑똑히 보여주겠다. 너의 왕국, 할라즈가 이제 어떻게 변하는지."

켈린은 그의 머리채를 놓은 뒤 부하들에게 명했다.

"놈을 끌고 와라. 성까지 갈 것이다."

"예!"

그를 데리고 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백성들이 전부 모여 있었고, 단상 위로 아슬란이 올라가 있었다.

켈린은 그 인파 속에 르데만과 함께 끼어 들었다.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자신들에게 닥친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서 보였다.

망국의 백성들은 보통 노예로 팔리거나, 인간보다 못 한 삶을 살지 않던가.

그런 불안감이 이들에게 닥친 것이었다.

"······."

오랫동안 말 없이 백성들을 둘러보던 아슬란.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할라즈 왕국의 백성들이여.]

웅장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까 평야에서 듣던 그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울렸으나, 그때와는 달리 위협적인 느낌이 나진 않았다.

여전히 위압적이나, 부드러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혼란스러웠던 백성들이 저 한 마디로 고요해졌다.

[근심하지 마라. 난 너희를 굴복시킬 생각이 없다.]

아슬란은 그런 그들을 보듬어 주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어떤 이름으로 살아갈지는 너희에게 맡기겠다. 끝까지 할라즈 왕국의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그대로 살거라. 핍박하지 않겠다.]

"······?"

"할라즈 왕국을 이대로 놔둔다는 건가?"

"그럼 우리 왕국은 안 망하는 거야?"

백성들의 웅성 거림에 켈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아슬란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허나······ 너희가 할라즈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라이 왕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결심한다면 나 아슬란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약속해 주겠다.]

이어지는 아슬란의 음성에 강한 힘이 깃들었다.

[너희가 타 왕국의 백성이라고 해서 난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나와 내 기사들이 너희를 지켜 줄 것이며, 너희를 죽이는 자가 있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 복수할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이 싫다면 난 이곳에서 미련 없이 떠나겠다.]

무거운 침묵이 성안에 감돌았다.

그러던 중 어느 청년 하나가 소리쳤다.

"우리 왕은 우리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맞습니다! 당신도 우리를 언제든 버리려는 게 아닙니까!?"

왕조차 버린 곳이다.

그런데 외지인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언제든 버려질 것이라는 강한 두려움이 이들에게 남아 있었다.

이런 의심이 강하게 자리 잡는다면 누구도 이들을 품어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스르릉-!

갑자기 아슬란이 천천히 칼을 뽑더니, 그대로 자기 손바닥을 그어 버렸다.

"!?"

그러고는 손에서 흐르는 피를 바닥에 뿌렸다.

"저, 저런!"

"피에서 성스러운 빛이?!"

놀랍게도 바닥에 떨어지는 피가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슬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아슬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너희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내가 너희를 먼저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뿌리며 말을 이었다.

"이 피는 그 증표가 될 것이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피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빛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망국의 백성으로 계속 살아 가겠느냐, 아니면 새로운 왕국의 백성이 되어 나와 함께 꿈을 꿔 볼 것이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 둘 소리쳤다.

"다, 당신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도 일라이 왕국의 백성으로 삼아 주십시오!!"

잠시 잦아 들었던 아슬란의 포효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정녕 망국의 이름을 버리고 일라이 왕국의 백성이 되고 싶으냐?]

"예!!"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백성들을 스윽 훑어보며 아슬란이 말했다.

[너희는 이제 일라이 왕국의 자랑스러운 백성들이다.]

그 진한 울림에 백성들이 다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나의 약속이 의심된다면 이곳에 뿌려진 나의 피를 보고 새기거라. 앞으로 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와아아-!!"

그곳에서 퍼져 나가는 어마어마한 떨림에 켈린은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상황을 통탄스럽게 보고 있던 르데만조차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보아라, 르데만."

켈린은 그런 르데만에게 말했다.

"저분이 이제 우리의 새로운 왕이시다."

르데만은 켈린의 눈동자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보았다.

이제껏 자신에게는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는, 뜨거운 눈빛이었다.

86화

0.01초 소드마스터 86화

"이게 대체······. 무슨 꼬라지란 말이냐?"

가자르 왕국의 국왕, 가이슈르는 허름한 꼴로 돌아온 레키엘과 부하들을 바라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제아무리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칼라 왕국이라도 가자르 왕국의 정예병과 맞붙는다면 그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 정도로 군사 강화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오랫동안 가자르 왕국의 명맥을 이어오며 강군이 되었던 기사단이다.

그런 그들이,

"이게 대체 무슨 꼬라지냐고 묻지 않느냐!!"

아주 처참하게 패배를 하고 돌아왔다.

"······죽여 주십시오."

"그런 한심한 말만 하지 말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을 해봐라!"

레키엘은 입술을 꾹 깨물며 할라즈 왕국 영토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깟 목소리에 겁을 먹어서 도망쳤다는 것이냐?"

고작 그 목소리 한번에 이 강한 대군이 무엇 하나 해보지 못하고 퇴각을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어도 싸웠어야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놈에게 맞서서 가자르 왕국의 명예를 지켰어야지!"

"······그랬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럼 차라리 죽어서 그 이름과 명예를 남기고 오지 그랬나? 우리 왕국의 대기사단장이라는 자가 적에게서 등을 돌려?!"

"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만약 기사단이 그곳에서 전멸을 당했다면 그날로 가자르 왕국도 할라즈처럼 아슬란에게 넘어갔을 겁니다."

"뭐, 뭐야!?"

가이슈르는 칼을 뽑아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레키엘에게 다가가 그 목에 들이댔다.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떠드는 것이냐? 레키엘."

그러자 양옆에 있던 로멜리오스와 아르산이 만류했다.

"왕이시어. 고정하십시오."

"레키엘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닥쳐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놈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으나, 가이슈르 역시 알고 있다.

이 남자는 가자르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여기서 죽으면 가자르 왕국의 전력이 크게 소실되고 만다.

거기다 레키엘은 그저 무력만 강해서 대기사단장이 된 것이 아니다.

그 뛰어난 무력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런 그가 설마 허무하게 패배를 하고 돌아올 줄이야.

그는 곧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았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레키엘."

"예······."

"가서 아슬란의 목을 가져와라. 그럼 너희를 용서해 주겠다."

"!?"

하지만 레키엘은 무릎 꿇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가서 놈의 목을 가져오라 하지 않는가!"

"······불가합니다."

"뭐?"

"지금 우리 군의 전력으로는 아슬란을 꺾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군력을 배로 늘린다 해도 아슬란을 죽일 수 없을 겁니다."

"······!"

치욕과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일까.

레키엘과 그 뒤에 있던 기사들 역시 부르르 몸을 떠는 중이었다.

한번도 본적 없는 모습이다.

항상 용맹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런 겁쟁이들만 남게 되었단 말인가.

'대체 아슬란 그놈이 무슨 짓을 했기에!'

가이슈르는 밀려오는 충격에 검조차 제대로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 * *

"흠."

오늘도 귀가 가렵다.

얼른 긁고 싶었으나, 부하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놈의 병신 같은 허세가 그런 사소한 행동조차 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할라즈 왕국······아니. 이제는 일라이 왕국의 영토라고 해야겠군요. 새롭게 이름이 부여된 이곳, 할라즈 성과 그 외 성들을 복구하기 위해서 얼마의 금액이 드는지 계산해 왔습니다."

나는 호레스가 건넨 문서를 보고는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진짜 더럽게 많이 드네.'

그동안 돈을 많이 벌어두기 잘했다고 해야 하나.

원래 계획은 그 돈으로 일라이 왕국에 우주 방어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돈을 고스란히 여기다 쏟아붓게 생겼다.

'좋게 생각하자.'

이제 할라즈 왕국이란 곳은 사라졌다.

이곳을 거점화시켜 나의 새로운 방어벽으로 쌓으면 될 일.

그리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 되뇌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이 많은 돈을 충당하려면 더 열심히 교역해야겠군."

"예. 이곳에서만 파는 교역품들이 있으니, 샤를렌 가문과 잘 상의를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관광 수입도 꽤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관광?"

그건 좀 의외인데.

뭐, 아무튼.

"호레스, 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일단 머리 아픈 일은 호레스에게 맡겨 놓았다.

앞으로 이 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내가 쏟아부은 돈이 똥값으로 변할 수 있고, 정말 황금 같은 투자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위인데.'

당분간 가자르 왕국이 우리를 건드릴 일은 없을 테니, 다른 왕국과의 전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문제는 할라즈 왕국 위에 있는 곳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곳은 바로 자스트라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선을 넘어봤자 다른 부족이 살고 있는 게 아니긴 해.'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 경계선을 넘어가 쭉 올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다름 아닌,

'드래곤의 둥지가 있으니까.'

그래서 부족들이 그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괜히 드래곤에게 잘못 찍혔다가는 멸족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문제없겠지?'

심심풀이 땅콩으로 인간의 영토를 넘어와 행패를 부리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평소에는 잠잠하다.

워낙 귀차니즘이 심한 녀석들이라 행패를 부릴 때도 잠깐 부리다 그냥 훌쩍 사라지곤 한다.

우리가 먼저 건들지 않으며 상대도 그냥 가만히 있는다는 것.

'되도록 여기 경계선으로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따로 기사들에게 명령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론 그놈이 잘하고 있으려나.'

할라즈 왕국에 소속되어 있던 기사단이 일라이 왕국으로 흡수되면서 당연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나는 아론을 배치해 그들을 잘 단속할 것을 명했다.

'지금 훈련을 하고 있겠지?'

서로 다른 왕국의 기사단이었으니, 같이 훈련을 하려면 어려움이 많을 터.

아론이 잘 수습하며 훈련을 시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훈련장으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하라는 훈련은 하지 않고 아론이 기사들을 불러 모아 뭔가 열심히 연설하고 있었다.

"모두 보아라. 이것이 바로 오직 일라이 왕국의 기사만이 마실 수 있다는 성수다."

"오오-"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걸 마시면 몸이 건강해지고 더욱 힘이 강해진다고 말입니다."

"맞다. 그뿐만이 아니라 상처도 빠르게 치유되는 기적의 물이며, 그 어떤 악마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아론의 말에 할라즈 기사들이 눈을 반짝였다.

"이제 너희는 자랑스러운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다. 그러니 아슬란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아-"

"감사합니다!"

할라즈 기사들은 나눠 주는 성수를 영광스럽게 받아 챙겼다.

"앞으로 겪을 훈련은 무척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성수를 마신다면 그 어떤 고강도 훈련도 버틸 수 있을 터. 그러니 너희에게 이러한 특권을 주신 아슬란 님을 평생 찬양하며, 그분이 가르치고자 하시는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기억하거라. 알겠느냐?!"

"예!!"

"자. 모두 마셔라! 오늘 다 같이 성수를 나눠 마시면서 우린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치 부장님의 건배사를 보는 듯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사들이 눈을 반짝이며 아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함께 성수를 벌컥 들이마시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삼켰다.

"벌써부터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성스러운 힘이 느껴집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 광신도들의 간증이 이어졌다.

아론은 그런 광신도들의 교주답게 소리쳤다.

"그래. 그것이 아슬란 님의 은총이다! 그 영광스러운 힘을 마음껏 느끼며 훈련에 임하도록!"

"오오오!!"

함성을 지르고 있는 기사들을 나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

뭔가 미묘했지만, 아론이 나름 군의 사기를 잘 올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 * *

'아- 덥다.'

괜히 나왔나 싶을 정도의 더위가 이어졌다.

이놈의 말 새끼도 많이 더운 모양인지 투덜거리듯 푸르르 울음을 터트렸다.

아예 가기 싫다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난 짧게 한숨을 내쉬며 놈의 귀에다 속삭였다.

"너 계속 이러면 여기서 확 도축해 버린다."

"푸르르~!"

이런 건 안 먹히나.

"계속 이러면 이따 고기 안 준다."

"!?"

역시 이게 잘 먹혔다.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꼭 먹을 거로 협박을 해야 잘 들어요.

'그런데······.'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

할라즈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난 뒤, 나는 여기 주변에서 아이템을 파밍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기억을 떠올려 체크해 두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가르탄 산맥이었는데, 왜인지 인파가 많아 보였다.

우연인가? 아니면 정말 무언가가 있는 건가.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는 그곳이 아닙니까? '아란의 창'이 꽂혀 있는 곳."

아란의 창?

아니. 그게 여기에 있었다고?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아론의 말대로 이곳은 아란의 창이 꽂혀 있는 성지였다.

저기 언덕 위에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창을 보고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런 미친. 괜히 허탕만 쳤네.'

아란의 창.

이 대륙의 영웅만이 뽑을 수 있다는 전설의 창.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한번씩 저걸 뽑으려고 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할라즈 왕국이 관광 수입을 많이 벌고 있었구나.'

호레스가 관광 수입을 얘기할 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더니.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 창을 뽑으려고 하는 호승심 많은 사내들을 노려 할라즈 왕국에서 통행세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있는 아이템이 저거였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지.'

어차피 난 뽑을 수 없는 창이다.

저 창은 플레이어도 뽑지 못한다.

이 게임에서 오직 딱 한 명.

알렉산더만이 저 창을 뽑을 수 있다.

그는 예언된 이 대륙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저 창을 잡으면 목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상대방에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 준다고 하더군요."

별로 관심 없다.

어차피 내가 얻지도 못할 아이템이기에.

'이왕 온 거 알렉산더한테 뽑으라고 해야 하나?'

아란의 창은 나중에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필요한 아이템이긴 했다.

물론,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기에 나중에 뽑으라고 해도 된다.

'생각해 보니까 저게 없으면 통행세를 못 걷잖아?'

지금은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껴야 할 때다.

여기 할라즈에다 쏟아부어야 할 돈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도 한번 도전해도 되겠습니까?"

아론과 기사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알렉산더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번 해보거라."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모여든 인파를 물리기 위해 소리쳤다.

"모두 비켜라!"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시다!"

"헉!"

"지, 진짜잖아?"

그들은 알아서 길을 열어 주었다.

아론과 기사들은 당당하게 걸어 나가며 창을 붙잡았다.

하지만-

"윽!"

"흐읍-!"

어림도 없는 일이다.

게임 설정상 알렉산더 말고는 저 창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거 절대 안 뽑히는데."

"끙. 창이 나한테 자격 없는 놈은 꺼지라는구나."

아론은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옆에서 슬쩍 눈치를 보고 있던 레바노스도 도전을 해봤지만,

"······."

그 역시 창을 뽑을 수 없었다.

하리엘도 시도를 해봤으나, 그녀도 창을 뽑지 못했다.

이제 남은 건,

"알렉산더."

"예."

"넌 관심이 없나?"

"아론 단장님과 레바노스 공까지 뽑지 못하는 창을 제가 어찌 뽑을 수 있겠습니까. 보나마나 한 일입니다."

"······."

가끔 보면 이놈은 멍청한 건지, 아니면 겸손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지. 현실적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뭐, 잘 됐다.

지금 저걸 뽑아 버리면 우리 관광 사업에 큰 문제가 생기니까.

그런데,

"대기사단장님!"

불안하게 아론이 내 곁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저 창을 잡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

"저 창의 주인은 바로 아슬란 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뭬, 뭬야?

"저 창이 원하는 건 이 대륙의 구원자가 될 사람, 영웅이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건 아슬란 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갑자기 하나둘 기사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아슬란 님 말고는 저 창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니. 이놈들이 왜 이래.

저건 알렉산더 말고는 못 뽑는다고.

하지만 그때 갑자기 단전에서부터 허세가 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큰일이다.

"고작 창 따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구나."

"아······그, 그것이······."

"저걸 내가 뽑지 못한다고 하면 너희는 나를 이 대륙의 영웅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냐? 만일 악인이 저걸 뽑는다면? 그땐 그를 영웅으로 대접해 줄 것이냐?"

"······송구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찌어찌 잘 넘긴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의 자세에 더욱 허세가 타올랐다.

나는 그 충동적이고 격렬한 감정에 이끌려 어느샌가 창 앞까지 걸어 나갔다.

"그저 누군가가 장난으로 박아 놓은 창일 뿐이다."

그 창을 향해 난 손을 뻗었다.

"이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우습구나."

그리고 붙잡았다.

[뭐? 누군가가 장난으로 박아 놓은 창?]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네가 뭔데 그따위 말을 지껄여? 야. 이 쥐뿔도 없는 게 감히-!]

아란의 창에는 에고가 섞여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다.

주인공이 이 창을 붙잡았을 땐 온갖 똥폼은 다 잡던 놈이, 내가 잡으니까 말투가 아주 걸걸해졌다.

[넌 내가 기다리고 있던 대륙의 영웅도 뭣도 아니야. 빨리 더러운 손 치우고 꺼져!]

문제는 그것이 나의 허세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히 나무 쪼가리 따위가-"

[뭐? 나, 나무 쪼가리? 이게 미쳤나.]

"건방지구나."

[풉- 어차피 뽑지도 못할 놈이 허세는.]

나를 조롱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허세와 함께,

콰콱-!!

[어? 어어? 자, 잠깐.]

찰나의 괴력으로 안에 박혀 있던 창을 강제로 뽑아 버렸다.

[미, 미친! 이게 뭐야! 대체 이게 어떻게······!]

당황한 창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도 잠깐 놓고 있었던 이성의 끈을 되찾았다.

"아-"

이곳 영토의 엄청난 수입을 자랑하는 관광 수입이 뿌리째 뽑혀 나간 순간이었다.

"우, 우와아아아!!"

"대기사단장님께서 아란의 창을 뽑으셨다!"

"역시······ 역시!!"

"저분께서는 하늘이 인정한 영웅이시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놈이 아니라고오-!!]

울분을 토하고 있는 창의 목소리는 저들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87화

0.01초 소드마스터 87화

[아란의 창]

-수호의 신, 아란이 후손들을 위해 남긴 창입니다.

-아란의 가호가 깃들어 있어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창이 어디에 있든, 반드시 주인의 의지에 따라 돌아오게 됩니다.

-창으로 표적을 맞힐 경우, 강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단, 일정 이상의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귀속 효과로 언제든 창을 사라졌다 나타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아란의 창을 바라보았다.

분명 바닥에 꽂혀 있을 때만 하더라도 낡디 낡은 창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새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설마 이게 뽑힐 줄은 몰랐지.'

게임에는 설정값이라는 것이 있다.

그 설정값을 벗어나게 되면 오류가 발생하고 버그가 터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 설정값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알렉산더 아니면 절대 못 뽑는 창 아니었나?'

아니. 분명히 이건 알렉산더만 뽑을 수 있는 특별한 창이었다.

주인공의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그리고 플레이어가 함부로 주인공을 없애지 않게 만들기 위해 만든 일종의 장치라고 해야 할까.

이 창은 단순히 가지고 있는 옵션 때문에 높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아란의 창은 훗날 어떤 봉인된 장소를 열고자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알렉산더한테 줘야 하나?'

하지만 창에 달린 옵션을 보니, 그냥 주기도 아까웠다.

거기다 창은 뽑은 사람에게 자동으로 귀속된 터라, 내가 준다고 해서 주인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하아- 이걸 뽑지만 않았어도 관광 수입을 달달하게 빨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허세가 발동하는 바람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기도 하고, 설마 이게 뽑힐 줄도 몰랐다.

'대체 찰나의 괴력은 뭘까?'

찰나의 순간에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 스킬은 쓰면 쓸수록 의문이었다.

분명 게임 제작자가 만들어 놓은 설정을 무시하면서까지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니.

그냥 그 능력 자체가 버그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수준이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대체 이걸 어떻게 할 거야!]

더군다나 아까부터 시끄럽게 이놈의 창이 떠들어대고 있는 터라 다시 돌려놓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대체 네가 어떻게 날 뽑은 건데? 난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 대륙을 구원할 영웅에게 뽑혔어야 한다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번 획 창을 던져 보았다.

텅-!

창은 기둥에 박히지 않고 그대로 떨어졌다.

내가 손을 뻗으니, 창이 알아서 휘리릭 날아돌아왔다.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악! 누가 마음대로 던지라고 했어!]

"한번 더 해볼까."

나는 다시 있는 힘껏 창을 던져 봤다.

터엉~!

이번에도 창은 기둥을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고작 이거 하나 못 뚫는단 말이야? 무려 이 몸을 던져 놓고도?!]

"······."

자존심 때문이라도 저 기둥만큼은 꼭 뚫어야겠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며 창을 던져댔다.

그런데도 기둥은 아주 멀쩡했다.

아란의 창이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안 돼. 내가 이딴 쓰레기 같은 놈한테 뽑히다니! 아란! 다시 돌아와서 날 가져가 줘!]

아란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창만 꽂아 놓고 사라진 놈이 고작 이 창 쪼가리를 위해 다시 돌아올 리 만무했다.

[만지지 마! 이 더럽게 약한 새끼야! 내 몸에서 손 떼!]

슬슬 듣다 보니 빡치네.

안 그래도 아슬란의 처참한 스텟 때문에 나도 화가 나는데, 이놈이 내 성질을 박박 긁고 있었다.

[만지지 말라고! 저런 기둥 하나 뚫지 못하는 놈이 감히 어떻게 날 쓰겠다는 거야! 차라리 날 길바닥에 던져 줘. 너랑 같이 있느니, 차라리 지나다니는 사람들 발에 짓밟혀 사는 게 훨씬 나아!]

하찮은 작대기한테 이런 얘기까지 들어야 하나.

나는 창을 꾹 붙잡은 뒤 말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뭐야? 또 던지려고? 이제 그만 포기해. 너 같은 놈이 저걸 어떻게 뚫······으아아아!]

순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나는 찰나의 괴력으로 놈을 냅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콰직-! 쐐애애액-!!

창은 흠집조차 내지 못하던 기둥을 뚫어 버리고 저 높은 지붕까지 뚫은 뒤, 그대로 저 하늘 높이 로켓처럼 날아가 버렸다.

"······."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쿠우웅-!!

"아-."

밖에서 들리는 폭발 소리에 나는 또 한번 크게 사고를 쳤음을 깨달았다.

얼른 집무실 밖을 나가 보니,

"대, 대기사단장 님!"

"저걸 보십시오!"

이곳 할라즈 왕국에 있는 내 집무실에서 보이는 저 먼 산 절벽에 큰 폭발이 일어나 절벽이 무너져 내리고 잔해가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대체 저게 뭐지?"

"몬스터인가?"

"하지만 저런 강한 폭발을 일으키는 몬스터라니······. 혹시 드래곤?!"

나는 당황해 하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호들갑 떨지 말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거라."

"아, 예. 대기사단장님."

그런 뒤 손을 뻗으며 가만히 기다렸다.

"······대기사단장님?"

기사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라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윽고,

쐐애애액-!!

저 먼 거리까지 날아갔던 창이 바람을 가르며 내게 돌아왔다.

"와-"

"저, 저 창은!"

내 의지에 따라 돌아온 창이 손에 착 달라붙었다.

[하아아-]

그런데 또 돌아오자마자 육두문자를 써가며 욕지거리를 할 줄 알았던 아란의 창이 진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아까처럼 던져줘.]

"······?"

[그 짜릿한 기분을 한번 더 느끼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또 던져줘. 그럼 네가 하라는 건 뭐든 할게, 주인!!]

갑자기 180도 태세 전환이 된 아란의 창이었다.

나는 놈이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귀속화 시켰다.

그러자 창이 잔상처럼 뿅 사라져 버렸다.

'이것도 나름 쓸만하네.'

이것이 아란의 창이 가진 하나의 장점이었다.

굳이 귀찮고 무겁게 창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그냥 사라지게 만들었다가 필요하면 다시 나타나게 만들면 된다.

'폭발력도 꽤 되는 거 같고.'

여전히 지진 난 듯 흔들리고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저 밑에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아마 인명 피해는 없을 것이다.

고작 절벽 조금 무너졌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 * *

"아란의 창을······. 아슬란이? 틀림없는 사실이더냐?"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칼라 왕국의 국왕, 카르만.

그는 오늘 저녁에 들어온 보고를 듣고 눈가가 꿈틀거렸다.

아란의 창.

하늘이 인정한 영웅이 아니라면, 그 예언된 존재가 아니라면 절대 뽑을 수 없다는 창이다.

그런데 그걸 아슬란이 뽑았다는 것인가?

'그렇다는 건 아슬란 그놈이······.'

왕좌에 앉아 있던 카르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고작 그런 창 하나 뽑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맞습니다. 대륙의 영웅이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까?"

"왕께서 그 창을 뽑고자 하셨다면 진작 뽑았을 겁니다."

"맞습니다!"

아마 여기 전각에 모여 있는 신하들은 모를 것이다.

카르만은 이미 오래 전 그 창을 뽑기 위해 몰래 잠행을 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창을 잡자마자 들었던 음성이 머릿속에 떠나가질 않는다.

[넌 힘이 강하긴 하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던 영웅이 아니야.]

신하들의 말대로 고작 창 하나 뽑았다고 해서 대륙의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 아닌,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날 카르만은 정말 온 힘을 다해 창을 뽑으려 했으나, 그것은 끝끝내 뽑히지 않았다.

오히려 헛수고를 한다며 창이 비웃기까지 했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그놈이 아슬란에게 넘어갔다라.

"왕이시어. 최근 들어 폭주하는 몬스터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 심지어 악마로 추정되는 몬스터들도 함께 섞여 나오고 있어 불안감이 날로 증폭되는 중입니다.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슬란이 가짜 성수를 만들어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고, 그것이 진짜인 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성수를 가지고자 큰돈을 들고 일라이 왕국으로 가고 있다는 정보가······."

카르만은 신하들이 하는 얘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슬란이 아란의 창을 뽑았다는 것이 그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륙에서는 말한다.

아슬란이 카르만에 필적하는 강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카르만은 그것이 개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아슬란 그자가 예전과 달라진 것은 맞으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힘에는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정말 모르겠군.'

훗날 아슬란과 자신이 맞붙게 된다면 과연 쓰러지게 되는 상대는 누구일까.

그날 원탁 회의에서 봤던 아슬란의 싸늘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카르만은 피가 끓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뒷덜미가 서늘해는 것도 같이 느끼고 있었다.

* * *

"레바노스."

"예."

"게으름 피우지 마라. 내 눈에는 다 보인다."

"아······. 예."

짬도 안 되는 놈이 벌써부터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

네 무력만 아니었으면 진작 쫓아냈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확실히 정리가 된 느낌이네.'

당분간 할라즈 영토가 안정될 때까지 나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바로,

"대기사단장님.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일라이 왕국에서는 이제 메말라 버려 거의 찾을 수가 없는 골드 퀘스트가 이곳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말하라."

나는 그들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이들이 주는 골드는 내게 무척 소중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부하들에게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이 전부였다.

"알렉산더. 이 노파의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하라."

"예!"

"라파엘. 너는 가서 부서진 곳을 마법으로 복원시켜 놓아라."

"네!"

부하들도 이젠 능숙해져서 그냥 말하면 척척 알아서 일을 잘 끝내고 돌아온다.

내가 일을 시키면 부하들이 달려가서 퀘스트를 완료하고, 보상과 칭찬은 내가 받는 아주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대기사단장님 덕분입니다."

그때 옆에 있던 켈린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요 며칠 동안 대기사단장님께서 힘을 보태 주신 덕분에 백성들의 삶이 훨씬 더 나아졌습니다. 또한 치안도 정말 많이 좋아졌고요. 과연 일라이 왕국이 왜 크게 부흥을 했는지 알겠군요. 이렇게 아슬란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백성들의 삶을 살피시니, 당연히 왕국이 강해질 수밖에요."

난 그런 켈린을 바라보며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

"켈린."

"예, 대기사단장님."

"너도 놀지 말고 일해라."

"······."

대마법사라고 해서 이런 잔업에 빠지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켈린까지 일을 시키러 보낸 뒤에도 나는 부하들과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퀘스트 수급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이렇게 부지런히 움직여야 얼른 골드도 벌고 이 게임에서 탈출을 할 것이 아닌가.

"아이고. 대기사단장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한번 와서 드셔 보시겠습니까? 미리 자리도 다 비워 놓았습니다."

저번에도 여기 식당 주인장은 내게 음식과 술을 제공하더니, 오늘도 또 이런다.

그냥 거절해도 되겠지만, 여기서 파는 바베큐가 정말 예술이라 거절하기 힘들었다.

사실 여기 주변을 거닐던 건 그 바베큐 때문도 있었다.

"성의를 거절하진 않겠다."

"감사합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대기사단장님."

저번에 연설을 한 뒤로 나에 대한 평판이 굉장히 좋아진 상태였다.

거기다 계속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있어서 내게 남아 있던 악감정 역시 이곳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나는 부하들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작은 체구의 한 아이가 식탁 앞에 앉아 과자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근데 저 아이는 주인장 아들인가?"

"아- 저 아이는······. 가끔 오는 아이입니다. 저런 행색에 배까지 굶고 있는 것 같아 과자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부터 가끔씩 나타나 저렇게 과자를 먹으러 오곤 합니다. 아! 물론, 올 때마다 과자와 바꿔 먹을 것들을 들고 오고요. 근데 어제도 왔는데 오늘도 온 건 좀 이상하군요."

그렇구나-하고 그냥 넘겨 들으며 자리를 찾아 앉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나는 안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멈칫거렸다.

저 아이, 왜인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그리고 과자를 먹는다라-.

설마······.

'아,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나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열심히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벨루로트 플레임]

"!?"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고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왜냐하면 저 아이의 정체는 바로,

'레드 드래곤?!'

무려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미친. 드래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88화

0.01초 소드마스터 88화

이 대륙 몬스터 중 최강이라 불리는 종족, 드래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벨루로트 플레임이란 놈은 레드 드래곤, 화염 드래곤, 플레임 드래곤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대기사단장님?"

내가 말없이 저 어린 아이로 변신해 있는 빤히 드래곤을 쳐다보고 있자 옆에 있던 아론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모두 재촉하지 말거라. 대기사단장님께서는 지금 저 작고 왜소한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는 거다."

"아아- 역시 그런······."

"······."

지랄도 풍년이었다.

우적우적-

아주 맛깔나게 과자를 처먹고 있던 플레임은 만족을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금화 한 닢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뚜벅뚜벅 식당 밖으로 나가려 했다.

"······."

플레임은 나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잠깐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불쌍한 인간 아이의 것이었다.

누구 하나 이 아이를 드래곤이라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정말 잘 만들어진 몸이었다.

놈은 곧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다행히 나한테 별 관심이 없구나.'

뭔가 해코지를 하러 온 거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레드 드래곤은 한 가지 이상한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이렇게 인간의 탈을 쓰고 내려와 인간의 문화를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드래곤들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내려오긴 하다만.

그것들은 보통 끝에 도시를 파괴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제발 빨리 좀 나가라.'

만약 나한테 관심이 없다면 땡큐다.

그리고 나 역시 드래곤의 고상한 취미에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존재와 눈을 마주쳐서일까.

이놈의 허세가 미친 듯이 차오르며 내게 강렬한 충동을 안겨 주었다.

그 멈출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충동은 곧 내 혓바닥으로 전해졌다.

"멈춰라."

그 낮고 위협적인 음성에 플레임은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니미.'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이미 늦었다.

내게 관심이 없었던 드래곤은 이제 관심이 생겨 버렸다.

놈은 표독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허세를 자극시킬 뿐이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뻔뻔하게 어린아이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는 플레임을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일 순 없어도, 이 몸의 눈을 속일 순 없다. 벨루로트 플레임."

아이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

"벨루로트 플레임?"

"그게 누구지?"

기사들은 옆에서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을 셈인가?"

그런 내 말에 플레임은 힐끗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인간이구나. 아무리 뛰어난 눈을 가진 자라도 내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거늘. 더군다나 내 정체를 알면서도 그리 꼿꼿하게 서 있다니."

"그럼 드래곤이 내 도시에서 활개를 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것이냐?"

그제서야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했다.

"드, 드래곤?!"

드래곤.

그 이름마저 두려움을 주는 존재.

하지만 기사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설마 이런 작고 왜소한 아이가 드래곤일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건방진 인간이군. 그래서 너 따위가 어떻게 할 작정이지?"

순간 저 작은 몸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기사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각자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

방금 전까지 멀쩡했던 기사들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두려움이 물들었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살기와 그 위압적인 기운일 테니, 당연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고민 중이다."

"무엇을?"

"널 이 자리에서 단칼에 베어 죽일지. 아니면 자초지종을 들어볼지."

"뭐, 뭐야?"

드래곤은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만으로도 식당 전체가 흔들렸고 땅이 갈라지기까지 했다.

"네가, 나를? 단칼에 베어?"

아이의 몸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는 곧 플레임 드래곤의 본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보고 기사들이 뒷걸음질을 쳐댔다.

"저, 저건!"

"드, 드래곤!?"

플레임은 내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재밌겠구나. 하지만 네게 정말 그런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로군."

놈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정신력을 갉아먹고 굴복시키는 드래곤 피어였다.

"윽-!"

아론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각자 들고 있던 칼을 놓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론도 간신히 칼만 들고 있을 뿐,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세로 무장한 나는 온몸이 뒤틀리고 내장이 뒤섞이는 느낌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한술 더 떴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드래곤."

실로 대단한 정신병이 아닐 수 없다.

플레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이 도시에서 파는 과자가 마음에 들어 가만히 놔두려고 했더니, 네놈이 기어코 나를 자극하는구나."

쿠웅-!

그런 뒤 놈은 더욱 강한 피어를 발동해 순식간에 주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크헉!"

"으악!"

드래곤 피어가 퍼져 나가자 아론부터 기사들, 그리고 식당 주인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

드래곤의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이 내 머릿속을 파고드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지? 왜 넌 멀쩡한 거지?"

이게 멀쩡한 걸로 보이냐.

안 그래도 숨 막혀 뒤질 거 같은데.

웃긴 건 드래곤의 피어조차 이 허세를 꺾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천근만근 변해 버린 몸뚱이가 버티지 못하고 먼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간단하다."

이번에도 역시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네놈이 나보다 약하기 때문이지."

"뭐야!?"

나는 플레임이 흥분해서 붉은 불꽃을 높이 피워올리기 전에 혼돈의 피어를 발동시켰다.

쿠우우웅-!!

강력한 피어가 플레임의 피어와 맞부딪혔다.

처음에는 비등비등해 보이던 두 개의 힘은 곧 한쪽으로 기울이고 말았다.

"!?"

플레임은 찰나의 괴력으로 만들어진 그 무지막지한 피어에 몸을 움찔거렸다.

점점 강해지는 압박과 짓누름에 그는 이빨을 뿌득 갈았다.

어떻게든 버텨 내기 위해 악을 썼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깊어질 뿐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급기야,

쿵-!

그의 무거운 한쪽 무릎이 바닥을 뚫었다.

그렇게 15초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면서 내가 뿌린 혼돈의 피어가 사라져 버렸다.

"······."

플레임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인간이······인간 따위가 이런 힘을······!"

난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간단한 일이라고."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나를 올려다보는 플레임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 * *

"······."

플레임은 앞서가고 있는 아슬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대체 저 인간은 무엇이기에, 모든 족속 중에서 최강이라는 드래곤의 피어를 견뎌내는 것에 모자라 자신만의 피어로 드래곤을 압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치욕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삶 속에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제아무리 대륙에서 강한 자들이라고 할지언정 드래곤 앞에서는 모두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가?

'분명 뭔가가 느껴지는 거 같진 않은데.'

드래곤의 눈은 특별하다.

상대에게 있는 오러, 혹은 마력의 양을 볼 수가 있다.

그것으로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약한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남자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 흔한 오러와 마력이 티끌만큼도 없는, 정말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피어를 발동하는 순간, 그때만큼은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만큼 어마어마한 힘을 뿜어냈다.

'그렇다는 건 의도적으로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건가?'

상대방이 자신의 힘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미처 깨닫지 못하도록 매 순간 스스로의 힘을 갈무리한다는 뜻이리라.

실로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대기사단장님.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아슬란을 맞이하던 호레스는 그의 옆에 있는 작은 아이를 보고 물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드래곤이다."

"아, 드래곤이군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서일까.

호레스는 아슬란이 플레임과 함께 집무실을 들어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 드, 드래곤? 드래곤이라고!?"

호레스가 뒷목을 붙잡고 쓰러지려 하자 기사들이 그를 다급하게 부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슬란은 플레임과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펄럭~

화려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아슬란이 자리에 앉았다.

물론, 아주 당연하게 상석에 앉으며 그는 턱을 괴고 거만한 자세로 플레임에게 눈짓했다. 너도 알아서 찾아 앉으라는 듯.

"······."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었으나, 플레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까 전 그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말해 봐라. 여기에는 대체 무슨 일로 온 거지?"

그리고 이 아슬란이라는 인간에게 흥미가 갔다.

평생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준 인간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겁먹지 않고 저리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이 대륙에 몇이나 되겠는가?

* * *

'심장 떨려 뒤지겠네.'

병적인 허세가 아니었다면 엄동설한에 맨몸으로 누워 있는 사람마냥 오들오들 몸을 떨었을 것이다.

나는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플레임을 노려보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번 허세로 저지른 이상,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찰나의 괴력으로 죽이는 방법도 있지만-'

놈이 지금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놈을 베어봤자,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본체는 베어내지 못한다.

즉,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서는 저 몸을 파괴하고 본체로 돌아온 드래곤을 한번 더 베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브레스 한번이면 그냥 녹아내릴 텐데.'

내가 칼을 들기도 전에 콧김으로 내뿜는 불길로 내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릴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곳 성 밖에 있는 로데오 산맥에서 나는 새로운 둥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새로운 둥지?

"그것이 이제 완성 단계에 이르렀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공격에 내가 애써 만든 둥지가 파괴되었다."

건드릴 것이 없어서 드래곤의 둥지를 건드려?

어떤 미친놈인지 그 면상을 한번 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공격이 날아온 곳이 바로 이 성이었단 말이지."

하필이면 드래곤 둥지를 건든 놈이 이 성에 있다는 건가?

"여긴 유독 맛있는 것들이 많아서 내가 가끔씩 오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쓸어 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시장을 돌아다니며 그동안 맛있게 먹어 왔던 걸 한 번 더 먹어보려 했지.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지 까먹고 말았다."

"······."

그러니까 성을 파괴하려고 씩씩대며 왔는데, 눈앞에 보이는 맛있는 거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왜 왔는지도 까먹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 새끼 이거 좀 모자란 놈인가.

"그러다 후식으로 과자를 먹고 있던 중 너를 만나게 된 거였고."

하지만 다시 떠올렸으니, 얼른 상황을 수습해야만 한다.

"그렇군. 헌데, 정말 이곳에서 공격을 날린 게 확실한가?"

"확실하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길쭉한 창 같은 것이 산맥에 꽂히더니, 곧 큰 폭발을 일으켜 내 둥지를 함몰시켰다. 그리고 그 창이 이쪽으로 되돌아가더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의 눈으로 본 것이니, 분명 틀림없을 것이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런 짓을······.

그런데 잠깐.

'창?'

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창이라는 게 아란의 창은 아니겠지?'

나도 창을 힘껏 던졌다가 애먼 절벽을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드래곤의 둥지를 박살 냈다는 미친놈이 설마······.

'난가?'

89화

0.01초 소드마스터 89화

"나의 소중한 레어가······. 나의 새로운 둥지가 어떤 자에 의해 잔인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분노를 어찌 내가 다 풀어낼 수 있을까."

이글거리는 화염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주변 공기가 후끈해진 기분이다.

그리고 난 지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이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그런 거 같은데.'

플레임의 증언과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그가 새로 만들고 있었던 레어를 부순 건 내가 그날 성질나서 던져 버린 아란의 창인 것 같았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아란의 창이 그런 거라고 하면······안 믿겠지?'

좋든 싫든 그 창의 주인은 나고, 내가 던진 것도 맞기 때문에 발뺌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모른 척하기!'

그냥 처음부터 모르쇠로 나가면 될 일.

레어를 부쉈다는 아란의 창은 내게 귀속되어서 내 명령 없이는 절대 밖으로 나올 일이 없다.

그런데,

"어차피 놈을 잡는 건 내게 일도 아니다. 그 정도의 힘이 가해졌다면 필시 흔적이 남아 있을 터. 이 드래곤의 눈을 피할 순 없지."

플레임이 뭔가 불안한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내 마력장을 펼친다면 금방 드러날 것이다."

드래곤의 마력장!

그게 여기서 펼쳐지면 나 같은 놈은 버티지 못하고 몸이 바스라진다.

설사 그것을 신성한 보호와 수호의 방패로 버틴다고 해도······.

'마력장이 추적 능력 같은 것도 있었나?'

이 모든 사달이 전부 나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는 걸 플레임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내가 여기서 당장 마력장을······."

"잠깐."

나는 손을 뻗어 아란의 창을 소환했다.

"혹시 네 레어를 파괴했다는 창이 이것이냐?"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아란의 창을 보고 플레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다! 그놈이다."

"정말? 확실한가?"

"그래. 내가 그 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플레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는 거지?"

"······."

스멀스멀 플레임의 뜨거운 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성에 있을 때 어디선가 위험한 기운이 느껴져서 이 창을 보냈던 것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네 둥지를 파괴했던 모양이군. 그럴 의도로 벌인 짓은 아니었다."

"뭐?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그럼 결국 내 둥지를 파괴한 건 네놈이 맞다는 뜻인가?"

"정황상 그런 거 같군."

콰앙-!

급기야 놈은 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저 작은 몸으로 내려친 상이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졌다.

"감히 인간이······. 인간 따위가 내 둥지를 건드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럴 의도로 한 것이 아니었다."

"웃기지 마! 그래서 없던 일로 넘어가겠다는 것이냐? 이 건방진 놈.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주마."

플레임이 내뿜는 기운이 점점 더 거대해지고 흉포해지는 중이었다.

그냥 끝까지 모른 척을 할 걸 그랬나.

그 마력장인지 뭔지를 내세워서 내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 차라기 전에 그냥 자수한 것뿐인데.

'이러다가는 저놈이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타 죽겠다.'

활활 타오르는 플레임의 붉은 기운이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포악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중하거라, 드래곤."

상대방의 기운이 뜨겁게 타오를수록 나의 허세 역시 미친 듯이 치솟았다.

"자중 같은 소리하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것이냐?"

"그래 봐야 네 명줄만 재촉할 뿐이다."

문제는 이놈의 허세가 미쳐 날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플레임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아까 그 한번으로 네가 날 압도했다 생각하느냐? 천만에! 그저 인간 따위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워 놔뒀을 뿐이다. 그러나 유흥은 여기까지다. 네놈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

그 말과 동시에,

쿠쿠쿵-!!

플레임은 작은 몸에서 벗어나 저 천장과 양옆에 벽을 뚫을 정도로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종족, 드래곤이다! 너희 인간들은 감히 바라볼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신'이란 말이다!"

그 웅장하고 위엄 넘치는 드래곤의 형체와 거기서 터져 나오는 포효에 세상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놈의 건방진 오만함은 여기서 끝이다, 인간."

플레임은 나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개미가 인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일까.

나를 이곳에서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듯, 플레임이 입을 쩍 벌렸다.

피이이잉-!!

그리고 그 안에서 붉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씹-'

모든 것을 파괴하고 태워 버린다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레바노스는 이 왕국 생활이 썩 편안하진 않았다.

방랑자라는 이름답게 그는 어디에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남은 건,

'아슬란.'

바로 그 남자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신비스러운 남자.

성수를 만들어낸 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도 아슬란은 기묘한 힘들을 보여주며 점점 더 그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인간은 아닌 거 같은데.'

순수한 혈통의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는 사내다.

자기처럼 천계의 힘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 고민도 잠시.

"레바노스."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잔소리꾼이 서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놈팽이처럼 놀기만 할 겁니까?"

하리엘의 핀잔에 레바노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지?"

"당신이 오늘도 할 일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온 겁니다."

"내가 딱히 할 일이 있나?"

"여기서 누워 있지만 말고 나가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십시오. 그것이 싫다면 기사단 훈련에 참여하시든가요. 그것이 이 왕국을 위한 일입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은 아슬란 밑에 있는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일라이 왕국과 백성들을 아낀다.

당장 이 왕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아슬란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성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있으니, 그 밑에 있는 사람들까지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다.

레바노스는 사실 그게 제일 고역이었다.

아슬란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백성들이 고맙다며 인사를 할 때는 또 뿌듯함마저 드는 것이 참 신기했다.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건 알고 있나, 하리엘?"

"그대는 내가 당신보다 직급이 높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레바노스. 예의를 갖추십시오."

"쩝."

괜히 말만 꺼냈다가 욕만 먹었다.

"계속 그런 자세로 있는다면 대기사단장님께 제가 직접 보고를 올릴 겁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하는 말이라면 귀담아 들어주시거든요."

"풉."

"왜, 왜 웃는 겁니까?"

"아니. 대기사단장님이 널 편애한다고 생각하냐?"

"그건······."

"네가 그분을 사모하는 건 잘 알겠는데, 그분도 너와 똑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

레바노스가 그리 충고를 주고 있을 때였다.

"레바노스님."

그의 부하 기사 한 명이 들어와 말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왕궁으로 돌아가고 계십니다."

"그래? 오늘 할 일은 끝났나 보군."

그제서야 그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나 먼저 들어가 보지. 그대는 여기 계속 남이 있든가, 알아서 해."

레바노스는 잠시 넋이 나가 있는 하리엘을 놔두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슬란의 뒷모습에 그 뒤를 따르려는데,

"음?"

아슬란 옆에 있는 꼬맹이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꼬맹이 밑으로 드리워진 흉포한 그림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저, 저건 설마?"

저리도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지닌 건 악마나 천사가 아니라면 드래곤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저건 분명히 인간의 탈을 쓴 드래곤이리라.

그런데 드래곤이 왜 아슬란 옆에?

"설마 모르시는 건가?"

레바노스는 재빨리 뒤를 따라가 보았다.

아슬란은 저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과 단둘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알려야 하나?"

그랬다가 자칫 드래곤을 자극할 수도 있는 일.

그 존재는 레바노스도 어찌하지 못 하는 이 대륙의 영물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일단 이대로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크롸라라라라-!!"

레드 드래곤이 본모습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역시나!"

그 사악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인가.

레바노스는 얼른 대검을 꺼내려 했지만,

"윽-!"

레드 드래곤이 포효하며 펼치는 드래곤 피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건 깜짝 놀라하며 칼을 뽑고 있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모두 제자리에서 괴로운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피이이잉-!!

그러는 동안 드래곤은 입가에 브레스를 가득 머금은 뒤,

콰아아아아-!!

그대로 아슬란이 있는 곳을 향해 쏟아냈다.

"이런!"

무려 드래곤 브래스다.

그 용암보다 뜨겁고 파괴적인 브레스가 일직선으로 아슬란에게 꽂혔으니, 아무리 그라도 저 정도 위력의 브레스를 온전히 막아내는 건 어려울 터.

"이렇게나 허무하게······?"

그 남자가 죽는단 말인가?

그렇게 쭉 이어지던 파멸적인 브레스가 드디어 멈췄다.

이미 집무실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뜨거운 연기만이 그 위에 뿌옇게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

그곳에는 멀쩡하게 서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뭐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냐? 인간."

드래곤의 당황한 목소리가 마치 레바노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아슬란은 덤덤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다 천천히 칼을 뽑으며 말했다.

"가소롭구나."

키이이잉-!!

그리고 그가 가볍게 휘두른 검끝을 따라 드래곤의 몸통만 한 검강이 앞으로 솟구쳐 나갔다.

"흐읍-!"

콰아아앙-!!

붉은 쉴드와 충돌한 검강!

그것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방어막을 파고 들자, 드래곤의 이마에 박혀 있는 붉은 수정이 번뜩이며 쉴드에 강한 힘을 불어넣었다.

콰콰콱-!!

그런데도 검강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다른 누군가의 것도 아닌, 바로 저 드래곤의 쉴드가 검강에 의해 균열이 일고 차츰 망가져 갔다.

그 검강은 여려 겹으로 만들어진 방어막을 순식간에 뚫어내며 마침내 드래곤의 몸통 앞에 다다랐다.

"!?"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거라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드래곤은 재빨리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와 황급히 몸을 옆으로 던졌다.

콰아아아아-!!

검강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 땅을 갈라 버렸다.

"허억- 허억-."

아이로 다시 변신한 드래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 갈라져 버린 땅처럼 자신의 몸 또한 똑같이 두 개로 나뉘어졌을 것이다.

"대,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저런 힘을······!"

레바노스는 자신의 앞에 굴러떨어진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두 눈동자를 보았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이 지금 공포에 떨고 있다.

바로,

"가소로운 힘이로구나, 미물이여."

둔중한 음성과 함께 연기가 걷히며 걸어 나오고 있는 인간, 아슬란을 말이다.

90화

0.01초 소드마스터 90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저 밑에서 나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갈 데까지 가는구나.'

이놈을 여기까지 끌어 들이는 게 아니었다.

이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몬스터가 바로 드래곤이지 않은가.

성격이 불같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족속이기에 조금만 수틀려도 브레스를 날려 파괴해버린다.

'이제 찰나의 괴력도 다 써버렸는데.'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내고 반격까지 하느라 더 이상 내게 남아 있는 힘이 없었다.

방금 전 그 일격으로 드래곤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작 그따위 힘으로 이 몸을 해하려 들다니."

강렬한 허세에 취해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뒤편에는 여전히 드래곤 브레스가 남긴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라 몸 전체가 익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대륙의 최강이라 불리는 미물이여."

그럼에도 나는 꼿꼿한 자세로,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저 밑에 있는 드래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오늘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깨닫게 해주겠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머리끝까지 차오른 허세 역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타오르는 중이었다.

'이제 난 뒤졌다.'

이런 언사를 듣고도 드래곤이 가만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안 움직이고 있는 거지?

다시 그 거대한 몸뚱이로 돌아가 발톱으로 나를 잘게 다져 버릴 줄 알았는데.

"······크윽."

놈은 몸을 잘께 떨며 입술을 꾹 깨물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거 설마?'

내 허세가 먹히고 있다는 것인가?

이 드래곤한테도!?

그렇다면.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

"평생을 대륙 최강으로 살아왔던 네가 처음 마주하는 그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겠지."

나는 허세에 장작을 넣어 더욱 허장성세를 부렸다.

이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카드이기 때문이다.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거, 겁을 먹어? 내가?"

"상대가 나 아슬란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이런 건방진! 감히 인간 따위가······!"

플레임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 섬뜩한 살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오히려 허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숭고하고 끝이 없는 인간의 힘을 말이다."

"뭐야?"

"내 친히 네가 무시하는 그 인간의 힘을 이 자리에서 보여 줄 것인즉."

나는 천천히 칼을 들어 그 끝을 놈에게 바로 세웠다.

"오너라."

"······!"

저, 저질러 버렸다.

그것도 저 흉포한 드래곤을 상대로 말이다.

당장이라도 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으나-

"······."

마치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놈은 끝끝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먹혔다.'

거기서 난 확신했다.

나의 허세가, 나의 도박이 제대로 먹혀들었음을.

그렇다면 이제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착-!

나는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드래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돌아가라."

딱 여기까지 했으면 좋았으려만.

온몸을 뜨겁게 만드는 허세가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겁먹은 짐승을 잡는 취미는 없다."

"!?"

그것이 드래곤의 마지막 트리거를 건드린 것일까.

내 허세에 넘어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플레임은 모든 공기를 태워 버리는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감히 나를!"

이윽고 놈은 입을 벌려 붉은 브레스 모아 한번에 내게 쏘아 보냈다.

"죽어라!!"

콰아아아아-!!

나는 그저 브레스가 내게 치닫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겁한 새끼!'

천하의 드래곤이라는 놈이 자비롭게 보내 주려는 사람의 뒤통수를 노려!?

더 이상 내게는 저 브레스를 막을 만한 힘이······!

콰아아앙!!

브레스가 내 몸과 부딪히며 크게 폭발했다.

"대, 대기사단장님!!"

"아슬란님!!"

그 큰 폭발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뿌연 연기가 사방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근데 나 왜······.

'멀쩡하지?'

나는 내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흩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이 나를 지켜 준 것인지 거기서 깨달았다.

'신성한 보호가 아직 있었구나!'

즉사급 데미지를 하루에 한 번 막아 주는 신성한 보호.

그것이 드래곤의 브레스로부터 나를 지켜 준 것이었다.

이윽고 연기가 빠르게 걷히면서, 잠시 풀어졌던 허세가 다시 빠르게 차올랐다.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멍청이마냥 풀어져 있던 얼굴이 근엄하게 돌아왔고, 허리 또한 목각처럼 똑바로 세워졌다.

그리고 눈동자와 턱짓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레바노스와 드래곤 플레임의 모습이 보였다.

"흠집조차 내지 못하다니."

레바노스는 넋이 나간 듯 보였고, 플레임은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널 죽일 수 있는 것이냐, 아슬란?"

그의 물음에,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허락한다면."

이 오글거리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대답이 놈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플레임은 곧 허공에 두둥실 띄어 올랐다.

"크크. 재밌는 인간이로구나. 오늘 여기서 계속 싸웠다가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겠군."

설마 이대로 가려는 건가?

그래. 얼른 가라.

"내 집무실을 저따위로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이냐?"

"흥. 네놈도 내 레어를 박살 내버렸으니, 피차일반 아닌가?"

그런 뒤 아이의 몸에서 다시 플레임은 본래의 웅장한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와 날개를 넓게 펼쳤다.

"또 보도록 하지, 아슬란."

전 다시 보기 싫은데요.

"레어를 복구할 때까지 종종 놀러 오겠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놓도록."

그리고 플레임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크게 포효했다.

"크롸라라라라-!!"

그 어마어마한 울부짖음과 함께 놈은 본인의 땅으로 돌아갔다.

"······."

드디어 갔나.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아직 이곳에 부하들이 있기에 함부로 그럴 수도 없었다.

"으어어-"

"으헉-"

오히려 나자빠지기 시작한 건 기사들이었다.

"가, 갔다."

"드래곤. 저것이 드래곤인가?"

"저런 드래곤마저 쫓아내신 대기사단장님은 대체······!"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허세가 다시 들끓어 올랐다.

"한심하구나."

나는 미간을 좁히며 기사들을 꾸짖었다.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고작 저런 것에 겁을 먹고 쓰러진다는 것이냐?"

"······."

"이는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일 터. 오늘부터 훈련 시간을 두 배로 늘리겠다."

"헉!"

드래곤을 마주한 것보다 더 겁을 먹은 기사들을 놔두고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순간.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드 드래곤 플레임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이게 히든 퀘스트였다고?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총 56골드를 모으셨습니다. 이제 상점을 이용하실 수 있게 됩니다.]

드디어 인고의 시간이 끝나고, 상점이 열리게 되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가질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아까 분명 종종 놀라온다고 했었지?'

드래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 계속 찝찝하게 남았다.

'에이, 설마.'

오늘 이런 일을 겪고 또 오려고 하겠어?

* * *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우적- 우적-

평화로운 오후.

아니. 분명 그리 되었어야 했다.

이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 역시 인간들이 만든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이 있단 말이지."

이틀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둘이 피 터지게 싸우지 않았었냐.

그런데 무려 드래곤이라는 놈이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마치 친구집을 놀러오는 것마냥 할라즈 성에 찾아왔다.

종종 놀러 오겠다는 말이 진짜 성으로 찾아와 음식을 먹겠다는 말인지는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확 저 목을 쳐버리고 싶다만.'

나는 꾹 참았다.

상대는 드래곤이지 않은가.

심지어 저 어린 몸뚱이를 갈라 봤자,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영혼이 본체로 돌아가게 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왜 그렇게 보고 있지?"

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동자와 마주한 플레임은 작게 으르렁거렸다.

"넌 여기 처먹으러 왔느냐?"

"흥. 그래. 처먹으러 왔다. 불만이냐? 손님을 이렇게 박대하고 눈치까지 주다니. 여기 인심은 참 볼 만하구나."

"역시 드래곤답게 이기적이군."

마지막 그릇까지 깨끗하게 비운 드래곤은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살기 어린 눈동자로 플레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 기사들한테 살기 좀 거두라고 해라. 어차피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놈들이 괜히 불편하게 말이야."

"네가 저번에 그리 난리를 치고 갔으니, 당연히 저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전취식이나 하는 놈이 말이 많군."

"무, 무전취식이라니! 나도 정당하게 값을 지불할 줄 안다."

탕-!

플레임은 상을 내려치면서 뭔가를 올려 두었다.

깜짝 놀랐네.

"아주 귀한 보석이다. 영광인 줄 알아라."

나는 드래곤이 올려 둔 보석을 가만히 살펴보다 그것을 염력으로 끌어당겨 내 손으로 붙잡았다.

플레임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호오- 그런 것도 쓸 줄 아느냐? 신기하군. 오러와 마력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놈이 어떻게 저런 걸 잘도 쓰는지."

하지만 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응축된 빛의 보석]

-무기에 장착 시 모든 스킬의 사거리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

내 눈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이 보석은 아이템에 장착하여 쓰는 것으로, 보는 거와 같이 스킬 능력을 강화시켜 주고 있었다.

'사거리 두 배라는 건······.'

찰나의 괴력으로 날리는 검강부터 시작해 피어와, 그 외 스킬들 모두 사거리가 두 배로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다들 사거리가 애매했는데, 내게 딱 필요한 능력이었다.

"후후. 이 정도면 값을 충분히 치렀겠지?"

아이고.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드래곤님.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겠다. 또 오지."

"그만 와도 된다."

아니. 자주 와주세요.

아이템만 들고 오신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흐흐. 너처럼 대단한 인간이 과연 언제 쓰러지는지 내가 꼭 옆에서 지켜볼 거다. 그리고 이 할라즈는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잠깐. 그 말은 설마 이 할라즈를 지켜주겠다는 건가?

그것도 무려 드래곤이?

"네놈이 있는 이상, 여기가 다른 놈한테 무너질 리는 없겠다만. 혹시 모르니 이 몸이 지켜주도록 하지. 무한한 영광으로 삼거라. 인간."

크하하하! 웃으며 드래곤은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보면 볼수록 조금 머리가 안 좋은 놈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는 건,

'음식만 잘 먹인다면 호구로 쓸 수 있겠구나.'

내 평생 드래곤의 등을 처먹는 날이 오다니.

살다 보니 별꼴이다.

"언제까지 다들 그렇게 서 있을 것이더냐? 모두 나가라."

"아, 예. 대기사단장님."

나는 아론과 기사들을 밖으로 보내 놓고 플레임에게 받은 보석을 칼에 이식시켜 보았다.

그러자 찬란한 빛과 함께 보석의 힘이 깔끔하게 스며들었다.

"룰루~"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후. 근데 상점은 어떻게 하지?"

내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점.

이틀 전, 히든 퀘스트를 깨면서 얻은 골드로 나는 상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곳에서 파는 물품들이 문제였다.

[라고스의 심장]

[지그렉타의 창]

[라비로르의 갑옷]

여기까지는 아주 괜찮았다.

옵션들도 뛰어났고, 당장이라도 전부 구매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물품들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물품이 문제였다.

[엘라의 팬던트]

-악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

-여섯 개로 나뉜 팬던트들을 하나로 모으면 전설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혜의 신, 엘라의 가호가 함께 하는 팬던트입니다.

-구매시 랜덤으로 옵션이 부여됩니다.

테키나 족속을 완전히 끝장내고 그들이 대륙을 집어 삼키고자 하는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 6개의 팬던트 중 무려 3번째 팬던트였다.

"젠장. 이렇게 되면 사실상 사야 될 건 이거밖에 없잖아?"

다음에 살 수 있으면 그리하겠지만, 이 악랄한 상점에게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의사항]

-상점 물품은 오픈 때마다 랜덤으로 바뀝니다.

-한번 상점에 판매 목록으로 올라왔던 것은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습니다.

-가격은 모두 동일하게 50골드입니다.

"쓰읍- 팬던트가 여기서 또 뜰 줄은 몰랐는데."

팬던트는 굉장히 구하기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에 차라리 상점에서 나온 것이 행운일지도 모른다.

아쉬운 건 다른 아이템들을 사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못 산다는 것 정도?

"좋은 옵션이 뜨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팬던트를 한번 갖게 되면 그 안에 부여되는 옵션이 매우 좋기 때문에 이건 기대해볼 만했다.

[엘라의 팬던트를 구매하시겠습니까? 구매 철회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 당장 내놔.

[상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안내 메시지와 함께 엘라의 팬던트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엘라의 팬던트에 새로운 옵션을 부여합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슨 옵션이 부여될지 기다렸다.

이윽고,

[천상의 눈동자]

91화

0.01초 소드마스터 91화

"요즘 참 기이한 일의 연속이지 않소?"

호레스의 말에 넬라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악마와 치열하게 싸우고 심지어 교단과도 크게 전투를 벌이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할라즈 왕국이 우리에게 완전히 복속했고요."

"그렇소.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괴이한 일을 뽑으라면······."

호레스는 저기서 아이의 몸으로 배부른 배를 땅땅 치다 드래곤 몸통으로 돌아와 하늘을 훨훨 날아가고 있던 드래곤을 가리켰다.

"드래곤······. 우리 왕국에 드래곤이 드나든다는 것이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호레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뒷목을 붙잡았다.

"구, 군사님!"

"드래곤이라니······. 저 파괴만 일삼고 이기적인 종족이 우리 성을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지 않소이까!"

파괴의 종족이자 대륙의 공포, 드래곤.

그 파멸적인 종족이 할라즈 성을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 호레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심지어 그 두려운 존재가 무려 아슬란과 친분을 맺었다는 것이다.

"친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저번에 보지 않으셨습니까? 드래곤이 아슬란 님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던 것을 말입니다. 하하!"

드래곤과 아슬란의 전투는 이미 왕국 전체에 퍼질 만큼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대결에서 승리한 것이 아슬란이라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내가 그래서 더 놀란 것이오. 이제까지 그 어떤 인간도 드래곤을 단신으로 상대해 승리한 적이 없소이다. 라일라칸조차 그런 엄청난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오. 그런데 우리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그것을 해내셨지. 아마 이 소식이 다른 왕국에도 퍼져 나간다면 그들은 이걸 믿지 않을 것이오."

테키나 족속도 아니고 천계의 족속도 아니면서, 고작 인간 따위가 드래곤을 상대로 승리했다?

당연히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슬란 님께서 세우신 공적을 생각한다면 솔직히 그다지 놀랍지도 않습니다."

아슬란은 지금껏 남들이 믿지 못할 업적만을 이루고 다니는 중이다.

그러니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도 왠지 믿음이 가는 것이었다.

"그래.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놀라운 업적만을 세우실 분이지."

"예.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나만 묻겠소, 넬라 단장."

"예?"

호레스는 진지한 어조로 넬라에게 물었다.

"지금 일라이 왕국을 다스리는 왕가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갑작스러운 물음에 넬라는 당황했다.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호레스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난 왕가를 지키고자 노력했소. 비록 모자란 왕이긴 하나, 우리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라 믿었소. 왕가가 바로 서야 만이 왕국이 사는 거니까. 그리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예?"

"왕국이 바로 서려면 왕가의 힘이 강해야 하오. 하지만 지금 어떻소이까? 왕가의 힘은 나약하기 짝이 없지."

"군사님. 그 말씀은······."

"오해하지 마시오. 이미 허수아비에 불과한 왕에게는 일말의 동정조차 없소. 하지만 왕가라는 자존심을, 왕좌라는 곳을 그리 놔둘 순 없는 노릇."

날이 선 호레스의 목소리에 넬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왕가와 왕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소."

"······?"

"바로 아슬란 님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오."

"!?"

넬라는 입을 떡 벌렸다.

설마 호레스에게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저번 날, 엘버스테인이 처음 이런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하더라도 아슬란은 두 번 다시 그런 헛소리를 입에 올리지 말라며 못을 박았다.

그때 호레스는 누구에게도 동조하지 않고 그냥 침묵하기만 했다.

워낙 보수적인 사람이니, 현 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저는 군사님이 반대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슬란 님이 우리 왕국을 어떻게 바꿨는지 보시오. 그분만큼 백성을 위하고 이 대륙을 위하는 분이 없지. 그런 분이야말로 왕이 되어야 하오. 아니. 가능하다면 이 대륙을 통째로 다스리는 황제가 되셔야지."

"마, 맞습니다! 저희 기사단 모두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자 넬라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대기사단장님께서는 이미 경고를 하셨습니다. 자신의 긍지를 더럽히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거야 우리가 어떻게 해드리느냐에 다른 것 아니겠소?"

"예?"

"지금 만약 명분 없이 왕을 폐하고 대기사단장님을 왕좌에 앉힌다면 그분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건 사실이오. 하지만 왕이 그 명분을 제공한다면 어떻소?"

"그게 무슨······."

호레스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 조용히 말했다.

"왕이 현재 타 왕국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소. 또한 악마와도 접선을 시도했다는 흔적이 있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왕이 지금은 국정에 관심이 없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뒤에서 모종의 계략을 꾸미며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이오. 언제든 아슬란 님을 죽이고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할 날을 말이오."

"저, 저런! 그동안 자기가 한 게 무엇이 있다고 그따위 계획을!"

넬라는 목에 핏대를 세울 정도로 분노했다.

일라이 왕국의 왕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라가 다 기울어져 가도 그는 놀고먹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의 일라이 왕국을 만든 것은 오직 아슬란.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일라이 왕국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제가 가서 왕을 처단하겠습니다!"

"자중하시오. 내 방금도 일렀듯, 명분 없이 일을 치른다면 그건 대기사단장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오. 확실한 증거가 잡힌다면 그때 다시 언질을 주겠소."

일라이 왕국은 이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니 급할 것 없다.

아슬란의 긍지를 지킬 수 있다면 넬라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 아깝지 않았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라이 왕국의 왕을 바꾼다라.

가슴 떨리고 피가 끓는 일이었다.

하루빨리 아슬란이 저 왕좌에 앉아 이 대륙을 다스려주길 바랄 뿐.

그런 행복한 상상 속에 잠시 빠져 있을 때였다.

"음?"

아슬란이 있는 집무실 쪽에서 갑자기 강렬한 빛이 발산되는 것이 보였다.

그 빛은 스멀스멀 하늘 위로 오르더니,

"아, 아니!?"

"저, 저게 무슨!"

거대한 눈동자가 되어 황금빛 불길이 그 겉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천상의 눈동자]

-1분 동안 천상의 눈동자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분)

-천상의 눈동자는 시전자가 장소를 떠올리면 만들 수 있습니다.

-천상의 눈동자를 통해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니, 이게 뜬다고?"

나는 멍하니 엘라의 팬던트에 부여된 옵션 효과를 바라보았다.

천상의 눈동자!

난 이 능력을 잘 알고 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마치 어두운 맵에 빛을 밝히며 그곳에서 적들이 뭘 하고 있는지 훤히 볼 수 있는 스킬이라고 해야 하나.

이 스킬의 장점은 사거리가 존재하지 않고, 어디든 내가 아는 장소라면 시야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꽤 쓸모 있는 스킬로 알고 있는데."

적이 어디서 매복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보급을 옮기고 있는지 등등.

이 눈동자 스킬 하나로 전부 파악할 수가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스킬이 좋은 건 이거 때문이 아니지."

이 스킬에 달린 부가 옵션이 하나 더 있었다.

[천상의 눈빛]

-지혜의 신, 엘라의 가호를 받아 1분 동안 천상의 눈빛을 갖게 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분)

-일시적으로 모든 신체적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죽음의 위기를 미리 알아채 자동으로 발동이 됩니다.

한 마디로 적이 나를 기습 공격하게 되면 천상의 눈빛이 미리 알아채 1분 동안 내 신체적 능력을 일제히 상승시킨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 똥캐 아슬란의 몸으로 어디까지 상승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플레이어로 게임을 했을 땐 이 능력으로 미리 살기를 감지하고 기습 공격을 여럿 막아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적용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 일단 한번 써볼까?"

나는 천상의 눈동자부터 사용을 해봤다.

잠깐 눈을 감고 천상의 눈동자를 발동시키자 일순 강렬한 빛이 내 몸에서 새어 나오더니, 그대로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오."

마치 높은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시야가 드러났다.

할라즈 성 저 먼 곳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시야를 만끽하며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보는 거였구나."

게임을 할 땐 그냥 맵을 밝히는 용도로만 썼었는데, 여기서는 직접 그곳을 이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음?"

집무실 아래에서 곡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으, 으아아!"

"저, 저게 대체 뭐야!?"

아래를 내려다보니 겁에 질린 기사들이 창칼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바닥을 기고 있었고, 오늘도 무슨 작당을 하려고 모인 건지 호레스와 넬라 역시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나는 궁금한 마음에 집무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도대체 뭘 보고 있기에 저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궁금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

내 집무실 위로 거대한 사우론의 눈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인간과 같은 눈동자에 그 겉에는 황금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 불길만으로도 이 주변을 태양처럼 환하게 비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러면 누구라도 오줌을 지릴 만하겠네.'

넬라 저놈이 아이처럼 꺅 비명을 지르는 게 이해가 됐다.

설마 천상의 눈동자가 저렇게 무서운 비주얼로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임에서는 저런 이펙트 없이 그냥 빛만 번쩍이고 말았는데.

"대, 대기사단장님!!"

"피하십시오!"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아론과 알렉산더, 그리고 레바노스까지.

그들은 저 황금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저건 무엇이란 말인가."

"내 평생 저리도 두려운 건 본적이 없습니다."

"겁먹지 마라. 우린 자랑스러운 아슬란 님의 기사들이다. 단칼에 저것을 베어 버리면 될 일! 모두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아라!"

아론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그냥 한번 지켜볼까?'

저 눈동자가 과연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가 되는 것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공격을 펼치든지 그냥 놔두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

[천상의 눈빛을 발동합니다.]

갑자기 두 눈이 생으로 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내 앞에 어떤 환상이 나타났다.

지금 이곳에서 잔뜩 힘을 모으고 있던 아론과 기사들이 저 위로 튀어 올라 눈동자를 공격하는 환상 말이다.

문제는 그게 환상의 끝이었다.

환상에서는 아론과 기사들의 공격은 눈동자에 닿지 않았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그대로 공격이 관통되어 버리고 만다.

여기까지는 괜찮으나, 그 공격들이 집무실을 무너뜨리고 그 여파가 내게 퍼져 버린다. 그리고 총알처럼 튀는 잔해들에 의해 나는 처참하게 맞아 죽는다.

이것이 환상의 끝이었다.

"잠깐!"

나는 아론과 기사들이 뛰어들기 전 그들을 잡아 세웠다.

"예?"

잠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이 천상의 눈빛이구나.

죽음의 위기를 감지하고 그 과정을 주마등처럼 환상으로 보여 주는 것.

이 스킬 역시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사용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냥 위기 감지만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걸 생생하게 보여주기까지 하다니.

심지어,

[아슬란]

무력: 85

지력: 85

일시적인 스텟 상향까지 되었다.

절대 올릴 수 없는 스텟이 스킬의 영향으로 반짝 오른 것이었다.

물론, 1분이 지나면 원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호들갑 떨지 말고 모두 칼을 거둬라."

"헉!"

"대, 대기사단장님! 누, 눈이!"

그들은 내 명령을 듣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 눈?

내 눈이 왜?

난 저 위에 떠 있는 천상의 눈동자로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 이게 뭐여.'

그리고 그 눈동자에 보이는 내 모습은 마치 폭주한 광전사가 된 것처럼 두 눈동자가 천상의 눈동자처럼 황금 불길로 타오르는 중이었다.

92화

0.01초 소드마스터 92화

"그날 나는 보았다."

아론은 잔을 높이 들며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이곳 할라즈 성 위로 밝게 떠오른 신의 눈동자를!"

"오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보았다. 그 눈동자와 우리 모두를 관통하는 아슬란 님의 눈동자를!"

"오오-!"

아론이 말을 한마디 던지면 기사들은 동조하며 환호성을 지르기 바빴다.

이들이 이토록 환호하는 이유는, 바로 어제 할라즈 성 꼭대기에 나타났던 그 거대하고 찬란한 눈동자 때문이었다.

또한 그 아래에 있던 아슬란의 눈동자가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을 여기 있는 모든 기사가 보았다.

특히 아론은 그 경이롭고도 두려운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간증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의 눈동자가 있다면 바로 아슬란 님의 눈동자를 뜻하는 것이다. 그분의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있는 사악함이 전부 정화되었다! 난 그날 확신했다. 아슬란 님이야 말로 인간을 초월한 이 대륙의 진정한 절대자라는 것을! 그리고 우린 그분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라는 것을!"

"우와아아아-!!"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기사들의 함성이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천천히 술잔을 들고 있던 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군."

가끔 이상한 종교로 선동하는 광신도들이 있다.

이렇게 일반 백성들이 오고 가는 대형 술집이나 거리에서 말이다.

지금 아론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하지만 보기에는 좋지 않습니까?"

보기에 좋다라.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특정 종교의 광신도가 저런 행동을 보였다면 몇몇 혈기왕성한 사내에 의해 제압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아론의 연설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듣고 싶어 하고, 더욱 그곳에 빠져들었다.

그건 아마도 아론 특유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람의 귀와 정신을 자극하는 언변 실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중심이 아슬란 님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또한 그가 다루는 주제가 늘 아슬란이기 때문에 이토록 기사들이 동조하며 환호를 하는 것이리라.

거기다 일반 백성들 역시 아론의 이야기를 들으며 건배를 외쳤다.

그런 모습은 보통 일라이 왕국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이제 할라즈 성에서도 일상이 되어 버렸다.

역병처럼 퍼뜨리는 아론의 광적인 신앙심은 언제 봐도 무시무시하다.

"우린 다른 왕국처럼 신격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각 왕국에서는 백성들로부터 왕권을 강화하고 더욱 그 위명을 드높이기 위해 신격화 작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백성들도 멍청한 것은 아니기에 그냥 고개만 숙일 뿐, 누구도 왕을 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신격화는 교단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왕국에서도 조심스레 하고 있다.

그러나 일라이 왕국은 그런 작업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당장 아슬란을 따르는 기사들이 제일 먼저 나서서 아슬란을 찬양하고 있고, 항상 아슬란에게 도움을 받고 사는 백성들 역시 그를 라할보다도 더 위로 추켜세우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아슬란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악마를 정화시킨 인물이다.

"거기에 이번에는 그 성스러운 눈동자까지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까?"

넬라 기사단장은 아직도 그때의 일이 생생한지 경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레스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기에 알고 있다.

이들이 이토록 그 거대한 눈동자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라온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자신의 종을 지상에 보내거나, 혹은 자신의 눈동자를 대륙에 보내 사방을 굽어본다고 했다.

실제로 여러 경전을 읽어 보면 라할이나 그 외 신들의 눈동자가 성직자를 마주하는 일이 종종 나온다.

거기다 라할의 생김새를 묘사할 때 늘 나오는 것이 바로 두 눈동자가 황금처럼 찬란하게 타올랐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저도 궁금합니다. 아슬란 님은 과연 인간이실까, 아니면 정말로 종족을 초월한 다른 존재일까."

아론이 기사들과 아슬란을 찬양하고 있어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던 넬라였으나, 오늘만큼은 그도 감성적으로 바뀐 듯 보였다.

어제 그 장면이 그에게는 그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겠소. 그분을 알아갈수록 놀랍고 두려울 따름이오."

그런 호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아슬란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온, 정말 신화 속의 '신'인 것은 아닐까?

그 강렬하고 성스러웠던 눈동자가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