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끄으읍-!"
"으헙-!!"
기사단장들은 성벽만 한 크기의 돌을 밧줄로 묶어 옮기며 갖은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보통 사이즈의 돌이 아니었다.
성벽 보수를 위해 만들다 남은 부분을 훈련 목적으로 남겨 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성벽 한쪽을 칼로 예리하게 자른 듯한 무거운 돌덩이를 밧줄로 묶은 채 맨손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었다.
"으억. 도, 도저히는······."
"이건 절대 못 옮깁니다!"
힘 좀 쓴다는 단장들은 결국 포기하고 바닥에 벌러덩 쓰러졌으며, 알렉산더와 아론은 끝까지 악을 쓰면서 어떻게든 돌을 옮기고자 했다.
그래도 그들이 힘을 잘 발휘해 준 덕분에 돌이 조금씩 움직였다.
"쯧. 한심하구나.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이것 하나 옮기지 못하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돌이 너무 무겁습니다."
단장들의 나약한 소리에 내 허세가 강렬하게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내려와 그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바닥에 내려놓은 밧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밧줄들이 염력을 통해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모든 근육과 핏줄이 곤두선 채 돌덩이를 옮기고 있던 알렉산더와 아론에게서도 밧줄을 빼앗았다.
"고작 이런 것이 무겁다고 징징대는 것이냐?"
나는 밧줄들을 한꺼번에 붙잡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찰나의 괴력이 발동되면서 나는 밧줄을 끌어당기다 못 해 번쩍 들어 반대 방향으로 집어 던지듯 내려쳤다.
그러자,
콰아아앙-!!
저 무겁디 무거운 돌덩이들이 한꺼번에 번쩍 들려 반원을 그린 뒤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밧줄을 던지며 말했다.
"한번만 더 본좌 앞에서 나약한 소리를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예!"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정해 놓은 선까지 꼭 저 돌들을 가져다 놓을 수 있게 훈련하도록."
"예!!"
가끔씩 이렇게 군기를 잡아줘야 기사들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훈련을 받는다.
나는 적당히 그들에게 훈계한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옆에서 무언가를 맛있게 쩝쩝 대며 먹고 있던 플레임이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애들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 시켜도 가능한 걸 시켜야지."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것은 없다, 플레임. 각자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호오~ 이제 그런 명언까지."
그러면서 플레임은 다시 맛있게 과자를 주워 먹었다.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며 뭐라 하던 놈이 다시 터덜터덜 밧줄을 잡으려고 돌아가는 기사들에게 빨리빨리 움직이라며 재촉을 하고 있었다.
"왕이시여.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때 라파엘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오메르 왕국에서 새로운 광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광물?"
"예. 주황빛을 띠는 광물인데, 손으로 만지려고 하면 무언가가 강력하게 밀어내는 느낌이 난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주황색 광물인데, 만지려고 하면 밀어내는 느낌?
이거 설마······.
'알브레늄 아니야?'
정말 맞다면 엄청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알브레늄이 무엇인가.
칼루탄에 이은 굉장히 쓸모 있는 광물이다.
칼루탄이 가진 살상력이 뛰어나다면 알브레늄은 방어에 특화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로 갑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알브레늄은,
'방어막을 만드는 거니까.'
말 그대로 알브레늄은 밖으로 뿜어내는 에너지로 다가오는 무언가를 막아내고 튕겨내는 효과를 지녔는데, 이것을 모아 마법으로 그 힘을 잘 컨트롤 하게 한다면 광역 방어막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게 된다.
즉, 마을이나 성벽 전체에 방어막을 만들어 적들의 침입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이놈이 어디에 있나 엄청 찾아다녔는데.'
알브레늄 같은 광물은 랜덤으로 발견이 되는 거라서 대륙 전체를 이 잡듯이 뒤져야 찾을 수 있다.
아니면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찮게 발견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알브레늄에 대한 소문이 퍼져 다른 곳에서 눈독을 들이기 전에 얼른 내가 먼저 가서 차지해야만 한다.
'안 그래도 그 미친 마검 새끼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천상의 눈동자로 봤을 때, 그 마검의 주인이라는 놈은 내게 굉장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는 꼬라지를 봐서는 언제라도 날 죽이려고 올 거 같은데,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알브레늄을 이곳에 가지고 와 방어막을 구축해 놓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플레임."
"응?"
"다 먹었느냐?"
"아니. 아직."
"그럼 일어나라. 나와 갈 곳이 있다."
"잠깐. 아직 다 안 먹었다니깐?"
혼자 가기는 좀 그러니, 호위병사처럼 플레임을 데려가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나는 라파엘에게 말했다.
"그 광물을 당장 채광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내가 먼저 그곳에 가 있을 테니, 라파엘 네가 책임지고 오메르 왕국으로 병력을 데리고 오너라."
"아, 네."
그런 뒤 나는 아이 모습을 하고 있는 플레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가지."
"아니. 나 아직 다 안 먹었······으아아악!"
난 오메르 왕국을 떠올리며 공간이동 능력을 사용했다.
* * *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엘버스테인이었다.
"억울한가? 너의 나약함으로 저들을 지킬 수가 없어서? 나도 알고 있다. 한때 나 역시 너처럼 나약했으니까."
단신으로 성벽 위에 있던 왕의 기사단을 쓸어 버린 카릴리페는 바닥에 쓰러져 벽에 기대고 있던 엘버스테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너도 이제 나의 일부분이 될 것이니, 기뻐하거라. 넌 최강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 말에 엘버스테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네놈의 오만함이 너무나도 한심해서 그렇다. 어딜 감히 최강자라는 명예를 그 입에 담는 것이냐?"
카릴리페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엘버스테인의 목을 붙잡은 뒤 그를 높이 들었다.
"네 실력이 소드마스터에 버금간다 들었다. 그렇다면 네놈도 알 텐데. 나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지."
그러자 엘버스테인은 여전히 비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네가 강한 것은 인정하나, 결코 최강은 아니다."
"뭐라?"
"내가 아는 최강자는 오직 이 대륙에 한 분뿐. 그분이 지닌 힘은 네놈이 발톱만큼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 말에 카릴리페가 꽉 엘버스테인의 목을 붙잡았다.
"그분이라 함은 아슬란을 말하는 것이냐?"
"흐흐. 그래. 잘 알고 있구나."
"미안하지만, 이제 그놈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리 믿고 싶은 거겠지. 만약 그분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우리와 함께 있으셨다면 네놈은 감히 이 성벽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네놈의 목이 떨어졌을 테니!"
아슬란을 향한 엄청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엘버스테인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카릴리페는 분노하며 악력으로 그 목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런데,
피이이잉-!!
"······?"
저 멀리서 번쩍이는 황금빛과 이어지는 붉은 빛이 땅을 가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성 밖에 가득하던 카릴리페의 군사들을 쪼개 놓으며 점점 올라와 마침내-
"!?"
카릴리페를 덮쳤다.
콰아앙-!!
카릴리페는 그것을 맞고 성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엘버스테인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그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 아슬란 님?"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드래곤 머리 위에 서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124화
0.01초 소드마스터 124화
플레임과 함께 공간 이동으로 오메르 왕국 근처에 도착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또 다 뭔 일이야?'
하늘에서 신성한 기둥과 함께 떨어진 나와 플레임에게 어그로가 끌린 악마들.
아니. 악마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놈들은 내가 이제껏 이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흉측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팔인지 다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들이 여섯 개가 달려 있고, 검게 그을린 얼굴과 몸통에 갑주가 씌워진 상태였다.
"아아아~."
공간 이동을 사용하게 되면 이렇게 기둥 주변을 아기 천사들이 빙글빙글 돌게 된다.
또 그 뒤로 천사들이 합창을 하며 신성한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 누구라도 어그로가 끌릴 수밖에 없는 상황.
악마인지, 아니면 새로운 몬스터인지 모를 괴물들이 전부 나와 플레임에게 시선을 돌렸다.
"······플레임."
"흐흐. 그래. 오랜만에 싸움이로군."
플레임은 괴성을 지르며 아이의 몸에서 드래곤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날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크게 흥분한 듯보였다.
[내가 바로 하늘의 제왕, 드래곤이다!]
콰아아아아-!!
저 커다란 몸통만 한 에고를 터트리며 쏟아 보낸 브레스가 땅을 긁으면서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그 아래에 있던 몬스터들의 몸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브레스는 저 성벽 윗자락까지 닿아 쭉 뻗어 나갔다.
그런 뒤 플레임은 길게 트림을 했다.
"꺼억-."
"······?"
"아-. 여기 오기 전에 먹은 게 이제 소화가 돼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눈짓을 보냈다.
그런 내 제스쳐를 찰떡 같이 알아들은 플레임은 사방에 있던 이 몬스터들을 향해 마음껏 불을 토해냈다.
콰아아아-!!
"캬오오오-!"
과연 드래곤은 비대칭 전력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많은 숫자의 몬스터라고 해도 플레임이 브레스로 지져 버리니, 순식간에 그 숫자가 줄어 들고 있었다.
놈들이 기를 쓰며 달려 들어도 플레임은 크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브레스를 쏘아내면 그만이었다.
더군다나 드래곤은 각자 특성에 맞는 광역 마법도 부릴 줄 알아서, 그야 말로 오직 파괴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콰쾅-! 콰콰쾅-!!
플레임이 일으키는 불의 폭풍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들이 사방을 불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동안 먹을 걸 좋아하는 멍청한 모습만 보여줘서 그렇지, 역시 대륙 최강의 종족 드래곤다운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크하하하! 이 버러지 같은 놈들. 나약하기 짝이 없······ 크엑!"
저 성벽에서부터 날아온 검은 검강이 빠른 속도로 치달아 플레임과 부딪혔다.
날개로 막아내긴 했으나, 살이 타들어 가는 강력한 마기에 플레임은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그르렁거림이 이빨 사이로 튀어 나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검은 구체 같은 것이 성벽 위로 튀어 올라 바람을 가르며 플레임에게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리석은-!"
플레임은 입에 가득 머금은 브레스를 날려 마주오는 검은 구체를 정면으로 맞췄다.
콰아앙-!!
브레스에 맞은 검은 구체는 튕겨 나가듯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곳에서는 내가 저번에 잔상으로 보았던 그 마검의 주인이 있었다.
놈은 차마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달려들어 플레임의 다리부터 머리 끝까지 비행하듯 솟구쳐 올라가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댔다.
콰콰콰콱-!!
휘몰아치는 검은 검격이 플레임의 거대한 몸통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이런 쥐새끼 같은 놈!"
플레임은 날개로 놈을 내려치며 땅에 처박았다.
그리고 몸에 나 있던 상처들은 금방 회복이 되었다.
괴랄한 전투 능력과 더불어 괴랄한 회복 능력이었다.
"역시 드래곤은 쉽지 않군."
마검의 주인, 카릴리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아 놓고도 멀쩡한 걸 보니, 저놈도 스텟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놈이 바라보는 곳은 플레임이 아닌 내 쪽이었다.
"아슬란."
놈은 내 이름을 불렀다.
"네가 저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을 죽였다지? 저런 거대한 괴물을 어떻게 죽일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군."
"······."
나도 플레임이 저렇게 날뛰면 끽소리도 못 하고 죽어, 인마.
"아직 나는 부족한 것인가.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건만. 이 정도의 힘이라면 충분히 네놈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그 말에 잠잠하던 내 허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누구를 넘어서?"
나는 거만한 고갯짓으로 카릴리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따위가 본좌의 힘을 넘어서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이 천지가 뒤집힌다고 해도 감히 이 아슬란을 뛰어넘을 순 없다."
카릴리페가 작게 웃음 소리를 냈다.
"너는 항상 그런 자세였지. 모두가 자신의 아래라는 듯이 말하는 그 태도 말이다."
"난 너희가 내 아래라는 듯 행동한 적이 없다."
난 한 발자국 카릴리페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너희는 이미 본좌의 아래이니까."
"······!"
잠시 멍하니 날 바라보던 카릴리페는 곧 미친 사람마냥 웃음을 터트렸다.
마기에 잠식되어 있어서 그런지, 그 웃음 소리마저도 위협적이었으며, 끓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슬란."
놈은 불안하게 갑자기 뒤에 두둥실 떠 있던 마검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직 내 힘이 네놈 발끝에도 미치지 못 한다는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저 밑바닥에 있는 지렁도 밟히면 꿈틀 거린다는 것을 보여 주마!"
아니. 굳이 안 보여줘도 되는······.
콰악-!!
카릴리페는 검을 반대로 들어 땅에 꽂았다.
그러자 강력한 마기가 그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힘의 전부를 보여 주겠다."
더욱 검을 땅 밑으로 집어 넣자, 검 위로 붉은 눈동자가 나면서 그 밖으로 강력한 마기가 솟구쳐 나왔다.
콰아아아-!!
부채꼴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마기 폭풍에 의해 플레임은 날개로 스스로를 방어했지만, 그 힘에 떠밀려 저 먼발치까지 밀려났다.
다행히 나는 본능적으로 펼친 수호의 방패가 몰아치는 마기를 막아내는 중이었다.
"······."
속에서는 심장이 벌러덩 거리며 쿵쾅 대는 중이었지만, 겉으로는 아주 덤덤하게 방어막 너머에 있는 카릴리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구 때문에 보이지는 않으나,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아 하니 이를 악물며 정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는 듯보였다.
'이거 너무 길어지면 곤란한데.'
슬슬 방패의 지속 시간이 지나가려 한다.
그런데 저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쿨타임을 초기화 시켜 한번 더 수호의 방패를 써야 할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이 마기 폭풍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냥 죽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공간 이동을 쓰는 게 아닌데.
그랬다면 진작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인가.
"이런 건방진 놈!!"
마기 폭풍에 떠밀려 저 먼발치까지 밀려났던 플레임이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브레스를 발사했다.
콰아아아-!!
그 덕분에 마기 폭풍이 쓸려 나갔고, 내 방어막도 지속 시간이 끝나 함께 사라져 버렸다.
"······."
카릴리페는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한 듯했다.
"그렇게 힘을 쏟아냈는데도 털끝 하나 닿지 못 하다니."
땅에 꽂혀 있던 검이 저절로 띄어 올라 카릴리페의 옆에 나란히 섰다.
"하지만 기다리거라. 곧 너의 힘을 내가 뛰어 넘게 될 테니."
놈은 이대로 도망치려는 듯보였다.
하지만 내 허세가 놈을 그냥 보낼 리 없었다.
"멈춰라."
나는 강렬하게 끓어 오르는 허세를 따라 허리춤에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받은 선물이 있으니, 그에 따른 보답은 해줘야겠지."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휘두르는 순간.
⎯⎯⎯!
하늘 높이 솟아 오른 검강이 카릴리페를 향해 치달았다.
"!?"
놈은 다급하게 검은 방어막을 펼쳐 마주오는 검강을 막아 보았지만,
콰직-! 콰드득-!!
검강과 부딪힌 방어막은 그 파괴적인 돌진력을 막아내지 못하며 점점 금이 가고 망가지려 하고 있었다.
결국 카릴리페는 냅다 옆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검강은 그대로 카릴리페의 방어막을 부숴 버린 뒤, 그의 오른팔도 가볍게 자르며 지나갔다.
"크아아아악!!"
마기에 절여 있어도 고통은 느낄 수 있는지, 카릴리페는 괴성을 질러댔다.
"아슬란!!"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놈은 끝끝내 내게 달려들지 못했다.
오히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 수모는······ 결코 잊지 않겠다. 반드시 네놈의 사지를 찢어 내가 하나 하나 씹어 먹어 줄 것이다."
아주 살벌한 말을 아끼지 않고 내뱉는 카릴리페였다.
지금 기회를 잡았을 때 놈을 죽여야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도 더 이상 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못해도 플레임은 할 수 있었다.
"크하하하-! 겁대가리 없이 날뛰더니, 꼴 좋다."
그런데 이놈은 얼른 브레스를 쏴도 모자를 판에 상대방을 비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다 이놈의 허세는,
"감히 본좌를 해하려 했으니, 그 죗값을 치러야겠지. 목을 내놓거라."
쥐뿔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면서 입만 털어댔다.
하지만 그게 먹히기라도 한 것일까.
파앗-!
놈은 얼른 자리를 피하고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자신의 투구를 왼손으로 부숴 뜨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아슬란. 나를 기억하겠느냐?"
얼굴이 먹칠을 하고 있어 처음에는 잘 못 알아볼 뻔했지만, 저 특이한 이목구비에서 나는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또한 그것을 마치 확인시켜 주듯, 정보창이 내 앞에 나타났다.
[카르펠]
카릴리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인소프 왕국의 국왕, 카르펠이었다.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다. 다음에는 반드시······ 반드시 네놈을 죽일 것이다!"
이윽고 그의 뒤로 포탈이 생겨났다. 놈은 주저 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 사라졌고, 오메르 왕국을 공격하던 몬스터들도 썰물처럼 빠져 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다 도망치고 있잖아?"
심술을 부리듯이 플레임은 도망치는 몬스터 군단을 향해 브레스를 가볍게 날렸다.
놈들은 엉덩이에 불을 붙인 채로 잘만 도망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웃기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 거지?'
카릴리페라는 정체불명의 캐릭터가 사실은 마검에 의해 타락한 카르펠이었다니.
심지어 이런 스토리는 게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단 한번도 이런 스토리가 있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카르펠은 굉장히 나에 대한 원한이 깊어 보였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저번에 천상의 눈동자 때문에 그런 건가?'
내가 천상의 눈동자로 카르펠을 크게 놀래킨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카르펠은 갑자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왔고, 왕이 저 모양이니 당연히 나라 꼴이 잘 돌아갈 리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더욱 왕국 상황이 좋아지지 않아 반란까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반란은 금방 제압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그 이후로도 왕국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은······.
'왠지 저놈이 이끌고 다니는 몬스터 군단도 뭔가 이상했지.'
게임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몬스터들이지 않은가.
저런 흉측한 생김새라면 잠깐만 마주쳤어도 금방 기억이 났을 텐데 말이다.
즉, 카르펠이 정신 이상을 보이면서 새로운 스토리가 열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치겠네.'
언제 테키나 족속이 대륙 전체를 침공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소드마스터 중 하나이자 일국의 왕이라는 놈이 마검에 의해 타락해 버리다니.
'내 잘못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설마 나도 모르는 새로운 스토리가 열리게 될 줄 알았나.
"아슬란 님!"
그때 엘버스테인이 말을 타고 내게 달려왔다.
놈은 눈물을 글썽 거리며 말했다.
"역시······ 역시 저희를 구하러 오셨군요."
차마 너희가 발견한 광물을 빼앗으려 왔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 대신 짧게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쯧. 고작 이런 놈들에게 쩔쩔 매다니. 아직 부족하구나, 엘버스테인."
"아직 가르침이 많이 필요합니다. 헌데 혼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본좌의 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플레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엘버스테인을 다그쳤다.
"난 안중에도 없냐?"
"앗. 플레임 님. 송구합니다."
"뭐, 아슬란 혼자 왔어도 해결될 일이긴 했으니까, 할 말은 없네."
플레임 없이 혼자 왔다면 진짜 아찔했을 것이다.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앞장섰다.
"들어가겠다. 지금부터 할 일이 많아 보이니."
"예!"
나는 엘버스테인과 함께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검의 주인, 테키나 족속, 거기다 이번에 새로 발견한 광물까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날 몰아 붙이듯이 말이다.
이것이 정말 난이도 때문인가?
아니면······.
125화
0.01초 소드마스터 125화
"크으으윽."
포탈을 타고 간신히 도망을 친 카르펠은 잘려 나간 팔을 매만지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테르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내가 우습게 보이나?"
"아닙니다. 아슬란의 검강을 맞고도 살아 남으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대악마들은 그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아슬란이 위대하다고 칭송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대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대륙 최약체인 왕국을 최강의 왕국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닥쳐라!"
카르펠은 테르카나에게 칼을 던진 뒤, 고통이 치밀어 올라 다시 신음을 뱉었다.
테르카나는 씨익 웃으며 그런 카르펠에게 다가가 말했다.
"얼른 상처를 회복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법은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테르카나가 포탈을 열자, 그 밖으로 보이는 곳은 다름 아닌 카르펠이 통치하고 있는 에인소프 왕국이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이미 내가 거느리고 있는 기사단을 몬스터 군단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왕국의 백성들까지 그리 만들라는 것이냐?"
아무리 마검의 주인이 되었어도 마지막 남은 선을 넘지 않고 있던 카르펠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테르카나가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를 보냈다.
"아니요. 저들을 모두 몬스터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저들을 당신의 힘으로 흡수하는 겁니다. 그럼, 이 팔도 다시 자라나게 될 것이며, 전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닥쳐라! 네놈이 감언이설로 내 왕국의 백성들을 전부 죽이려고 해?!"
"죽이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신의 왕국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은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백성뿐이겠습니까. 당신이 필요하다면 에인소프 왕국에 있는 기사들과 신하들 역시 당신의 힘이 되어야지요. 당신이 바로 그들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게 그들의 운명인 겁니다."
"운명······."
"그렇습니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운명. 하지만 당신은 그걸 거부하고 있군요. 대체 무엇 때문에? 알량한 양심? 이 대륙을 정복해야 하는 운명 앞에서 그깟 양심이 중요하겠습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아슬란을 꺾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슬란이라는 이름에 카르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저 드래곤마저 뒤로 밀려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으며,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고작 한 방에 카르펠을 제압했다.
이 마검의 힘을 얻고 나서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일이라 여겼건만, 그때 깨달았다.
아직 너무나도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
카르펠은 말없이 칼을 붙잡았다.
그리고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누, 누구냐!"
"요리스."
그곳에서 자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오른팔이자 에인소프 왕국의 대기사단장, 요리스였다.
"당신은 설마······."
요리스는 어렵지 않게 카르펠을 알아보았다.
"왕이시여! 이게 대체 무슨······! 당장 힐러들을 부르겠습니다!"
카르펠은 호들갑을 떨고 있던 요리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요리스. 넌 나의 충신인가?"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왕과 왕국에 충성을 다 하는 기사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너의 충심을 난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넌 내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지?"
"왕이시여. 대체······ 크헉!"
요리스는 비명을 토해내며 무릎이 꺾였다.
카르펠이 들고 있던 마검이 그의 배를 찔러 등 뒤까지 꿰뚫었기 때문이다.
"와, 왕이시여, 어, 어째서······."
"나의 힘이 되거라, 요리스. 너의 목숨을 내게 바쳐라."
콰아아아-!!
"으아아악!"
요리스는 그렇게 검에 빨려 들어가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읍-!"
잘려 나갔던 카르펠의 팔이 다시 재생되면서 그는 새로운 팔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카르펠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크흐흐-. 그래. 이것이 진짜 힘이지."
그는 아직 포탈에서 나오지 않고 있던 테르카나를 향해 말했다.
"뭘 하고 있느냐, 테르카나. 모든 병력을 이곳으로 보내라. 오늘 에인소프 왕국은 위대한 미래를 위한 희생양이 될 것이다."
카르펠의 음흉한 웃음 소리에 테르카나 역시 비열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에인소프 왕국은 그 찬란했던 영광이 사라지고 멸망하게 된다.
* * *
카르펠의 진격을 막아내긴 했으나, 크나큰 피해를 입은 오메르 왕국은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엘버스테인은 비록 왕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직접 현장으로 나가 백성들을 도왔으며, 때마침 도착한 일라이 왕국의 기사들과 인부들이 함께 일을 도와주었다.
"왕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더 늦기 전에 어서 에인소프 왕국을 정벌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에인소프 왕국의 왕, 카르펠이 정녕 악마에게 넘어간 것이라면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놈이 언제 다시 힘을 모아 이곳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 오메르 왕궁 내부에서는 진지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왕좌에 앉아 있었고, 이곳의 왕인 엘버스테인은 저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저 아래에 서 있었다.
조금 이상한 구도이긴 했으나, 엘버스테인을 포함해 누구도 이 광경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왕이시여. 왕의 위대함과 일라이 왕국의 강함을 드디어 만천하에 보여 줄 때가 되었습니다. 기사단을 이끌고 가서 에인소프 왕국을 정벌하고 카르펠을 붙잡게 된다면 온 대륙이 왕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놈들은 전쟁광인가.
뭐만 하면 싸우자고 난리야.
거기다 놈들은 내가 직접 선봉에 서서 에인소프 왕국을 정복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래 왕이 되면 어디든 잘 못 나가게 막는 거 아니었나?
괜히 저번에 세게 허세를 부렸다가 그것이 스노우볼이 되어 지금에 이른 것 같았다.
보통은 왕이 전쟁에 나서지 않고 왕국에 남도록 설득을 해야 하는데, 지금 이것들은 나를 전쟁터에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지 않은가.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냐.'
당연히 나는 안 가고 기사들만 보낼 생각이었지만-.
[메인 퀘스트, 황제의 길이 발동됩니다.]
-에인소프 왕국으로 직접 출진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이놈의 시스템도 내가 직접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상도 나쁘지 않다.
에인소프 왕국으로 내가 직접 출진하는 것만으로도 10골드를 준다니.
거기를 정복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건 나름 할 만한 거 같은데?
에인소프 왕국과 전쟁을 벌여도 난 그냥 뒤에서 구경만 하면 되는 거잖아?
'지금까지 내가 군사력을 키운 이유가 다 이것 때문이지.'
내가 앞에 나설 필요도 없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제껏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군력을 강화시켰다.
그 결실을 여기서 보면 되는 것이다.
거기서 계산을 마친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본좌는 감히 악마와 손을 잡은 카르펠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마땅히 그를 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카르펠이 악하다고 하여 그 왕국의 백성들조차 악하다 할 수 없지 않은가. 만일 본좌의 진노가 에인소프 왕국을 내려치게 된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생명이 죽을 것이다."
"······."
말도 안 되는 허세였으나, 이들은 모두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본좌가 직접 출정하여 에인소프 왕국을 정벌할 것이나, 전투에 임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나의 기사단이다. 그러니 아론."
"예, 왕이시여!"
"본좌가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만일 그리 된다면 에인소프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이 본좌의 칼날 아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허세가 이럴 땐 좋다.
아주 잘 양념을 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면 나는 뒤에서 가만히 있다가 기사단이 알아서 에인소프 왕국을 정복하는 걸 지켜만 보면 된다.
지금의 군사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다.
물론, 카르펠이 더 많은 몬스터 군단을 데리고 오면 큰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것도 해결 방법이 있지.'
내가 이곳 오메르 왕국에 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지 않던가.
칼루탄 다음으로 게이머들에게 사기적인 광물로 뽑히는 것.
바로 알브레늄이다.
* * *
"흐음- 너무 난해하네."
라파엘은 알브레늄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결국 다시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뭔가 쓸만한 구석이 있어 보이긴 하는데."
알브레늄에 담긴 신비한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던 라파엘이었다.
여러 마법을 사용해 봤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라파엘. 진전이 좀 있느냐?"
그녀와 함께 오메르 왕국으로 넘어온 켈린의 물음에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흠. 그럼 다시 한번 해보지. 왕께서 주신 공식대로 말이다."
"왕께서 주신 공식?"
"그래."
아슬란이 양피지에 적어 준 공식.
지금껏 연구가 막힐 때마다 아슬란은 이렇듯 공식을 적어서 이 둘에게 건네주었고, 늘 그것은 성공에 다다랐다.
그래서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이것을 진리의 공식이라 칭했다.
"당장 해보죠."
이 두 사람과 마법사들은 아슬란이 건네준 공식에 따라 마법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 복잡한 마법식은 아니었다.
대신 알브레늄에 어떤 마법을 써야 하고, 또 어떤 마법 물약을 사용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밤을 새워가면서, 며칠 동안 이어진 연구.
그렇게 며칠 동안 이어진 시도 끝에 마침내-
촤아아아-!!
알브레늄에서 아름다운 주황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둥그런 막이 생겨나 점점 퍼져 나갔다.
"오오-"
켈린은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질렀다.
"이, 이게 뭘까요?"
"글쎄."
켈린은 주황빛 막에 약한 마법탄을 날려 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마법탄을 막아내며 견고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기서 켈린은 아슬란이 왜 이런 공식을 알려 준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방어막이로군."
"방어막?"
"그래. 그것도 굉장히 순도가 높은 방어막이다. 아슬란 님께서는 이걸 만들려고 하셨던 거야."
"하지만 대체 왕께서는 그걸 어찌 알고······."
"후후. 왕께서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분. 우리가 모르는 것을 모두 아시고, 미리 꿰뚫어 보는 분이시지. 이것 역시 그분의 작은 지식 중 하나일 뿐일 터."
새로운 발견에 라파엘과 켈린은 흥분감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알브레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연구를 위해 쓴 것보다 더 큰 알브레늄을 가져와 아슬란이 건네준 똑같은 공식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훨씬 더 큰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정말 대단한 광물이로다. 이거라면 그 어느 곳이든 쉽게 지킬 수가 있겠어."
그때 그들의 뒤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연구는 잘 되고 있는가?"
그 음성에 화들짝 놀란 켈린과 라파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슬란과 그의 기사들이 함께 있었다.
"왕이시여. 오셨습니까?"
"연구의 성과를 알고 싶어서 왔다. 어떻게 되었지?"
"왕께서 조언을 해주신 대로 만들어 보니, 정말 엄청난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슬란 옆에 있던 엘버스테인은 환하게 펼쳐진 방어막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이 정말 방어막이라는 겁니까?"
"시험해 보고 싶다면 칼을 뽑아 보거라, 엘버스테인."
"아, 예."
엘버스테인은 칼을 뽑아 방어막을 향해 칼을 크게 휘둘렀다.
터엉-!!
큰 소리가 나긴 했으나, 방어막은 뚫리지 않았다.
오기가 들었는지, 엘버스테인은 이번에 강한 힘을 칼에 불어넣어 내려쳤다.
터엉-!!
이번에도 역시 소리만 요란할 뿐, 방어막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아론을 비롯해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칼을 뽑아 방어막을 내려쳤다.
하지만 모두 결과는 같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리도 견고할 수가!"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적잖은 힘을 불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막에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점은 강력한 내구성이겠으나, 단점은 우리 역시 방어막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원래 마법사들이 만들어내는 방어막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내부에서 날리는 공격을 통과시켜 적에게 피해를 준다.
하지만 이 방어막은 내부나 외부에서도 쉬이 뚫을 수가 없어 보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광물을 캐낼 수 있는 인력은 충분하니, 곧바로 생산에 들어가도록."
아슬란은 그리 명령을 내리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 정도라면 대륙의 그 누가 와도 깨부수지 못할 겁니다!"
켈린이 그의 심기를 건드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
아슬란이 날이 선 눈동자로 쳐다보자 깜짝 놀란 켈린은 히끅 딸꾹질을 해댔다.
"여기 있는 기사들이 이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고 해서 본좌까지 똑같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예? 아, 아니. 그, 그럴 의도는 저, 전혀 없었습니다."
흉포한 아슬란의 눈동자에 완전히 겁에 질려 버린 켈린은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그리고 아슬란은,
"가소롭구나."
대수롭지 않게 방어막 쪽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그것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쩌엉-!!
"!?"
지금까지 멀쩡하기만 했던 방어막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와 더불어 광물까지 쪼개지면서 가루가 되어 버렸다.
"······."
이어지는 무거운 적막.
아슬란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보다는 더 강한 방어막으로 만들어 오너라. 만일 다음에도 지금처럼 허무하게 깨져 버린다면 그땐 네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켈린."
"······."
"왜 대답이 없지?"
잠시 굳어버렸던 켈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아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던 켈린은 그제서야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라파엘은 그런 켈린에게 달려가 부축을 해보았지만,
"으어어-"
아마 반나절은 지나서야 간신히 일어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126화
0.01초 소드마스터 126화
"출진하라!!"
"일라이 왕국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왕, 아슬란 님을 위해!!"
"승리를!!"
일라이 왕국은 에인소프 왕국의 만행을 온 대륙에 알리고 전쟁을 선포했다.
원래 전쟁은 보급과 명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가.
그런 현실성은 이 게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명분 없이 싸우게 될 경우, 제 아무리 강대한 왕국이라 해도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며, 반란 위험도 높아진다.
또한 보급 역시 군의 강함과 별개로 제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하지만 우리 군은,
'두 가지 모두를 충족했지.'
샤를렌 가문을 통해 활발한 무역을 해오면서 곳곳에 무역로가 뚫렸고, 무역로를 지나는 상인들을 보호하고자 만든 전초 기지들이 보급 역할을 하면서 우리 군은 보급에 쪼달릴 일이 없었다.
또한 에인소프 왕국의 왕, 카르펠이 마검의 주인이 되고, 그가 이끄는 악마 군단이 대륙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명분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빛의 기사로 인정을 받으면서 악마를 처단하는 일은 일라이 왕국에게도 사명처럼 여겨지는 일이 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처럼 군사들의 사기가 높은 것이었다.
"빛이 우리와 함께한다!"
"아슬란 님이 곧 빛이시다!"
"우오오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사기가 높은 데에는 아론의 결정적인 역할도 있었다.
사이비 종교처럼 나를 숭배하는 신도들을 모으고, 또 포섭을 해오던 아론은 어느새 기사단 전체를 아슬란교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아론이 한번 선동을 하기 시작하면 이 광신도들은 내 이름을 외치며 불구덩이에 뛰쳐 들어갈 만큼의 수준이 되었다.
"빛의 이름으로!!"
"아슬란 님의 이름으로!!"
행군하는 내내 군사들을 독려하며 내 이름을 드높이고 있던 아론.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서운 놈.'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는 건 고맙다만, 왜인지 무서운 기분도 들었다.
저것이 종교의 광기란 말인가?
어쩌다 우리 군이 광신도 집단으로 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군사들이 모여 있을 땐 늘 팔짱을 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선봉에 서기 때문이다.
어떠한 마법적인 보호도, 군사들의 경호 역시 없다.
화살이라도 한 발 날아오면 죽기 딱 좋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아갔다.
푸르르~!!
이놈의 말 새끼도 똑같이 허세에 전염되어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명마가 되어 앞발을 내딛는다.
"왕이시여. 이제 곧 루에스 마을입니다."
루에스 마을은 에인소프 왕국의 영토 중 하나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었다.
거기서부터 수비군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
루에스 마을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가 않았고, 습격을 받았는지 마을 곳곳이 망가져 있었다.
"정찰병을 보내라."
"예."
중갑을 착용한 정찰병들이 먼저 마을로 들어가 주변을 수색했다.
이윽고 그들이 내게 달려와 보고했다.
"마을에 아무도 없습니다."
"확실한가?"
"예."
누가 여기를 공격한 거지?
설마 카르펠 이 미친놈이 자기가 다스리는 영토를 공격하기라도 했나?
일단 마을에 아무도 없다고 하니, 나는 경각심을 누그러뜨리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쿠웅-!
불길한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마을 중앙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런 게 나오면 보통 무언가가 땅 밑에서 솟구쳐 올라오던데.
콰콱-! 콰콰콱-!!
과연 다년간 단련된 나의 게임 빅데이터에 따라 흉측한 몬스터들이 땅 위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적이다!!"
"모두 전투 준비!!"
기사들은 갑작스럽게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몬스터 군단을 보고 당황하며 재빨리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모두 당황하지 마라."
그때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라파엘."
"네?"
"새로운 발명품을 실전에서 쓸 때가 온 거 같군."
그러자 라파엘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군사들의 행렬 사이에 끼어 있던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미리 챙겨 두고 있던 알브레늄을 꺼낸 뒤 간격을 맞춰 바닥에 올려 두었다.
라파엘은 눈을 감은 뒤 짧은 주문을 외웠다.
촤아아아-!!
그 주문에 반응한 알브레늄들이 주황빛을 번쩍이며 서로 연결되더니, 곧 둥근 원형의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캬오오오!!"
쿵-! 쿠쿵-!!
미친 듯이 달려오던 몬스터 군단은 우리 군 주변으로 펼쳐진 방어막과 부딪혔다.
알브레늄의 단단한 내구성을 뚫지 못하고 있던 놈들은 억지로 몸을 비비며 어떻게든 방어막을 뚫으려고 했다.
그러나 간신히 몸을 비벼 방어막을 뚫었어도 그 힘에 몸이 전부 타 버리거나, 아니면 몸통의 절반만 간신히 넘어갈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알브레늄의 능력이었다.
저 강력한 방어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렇게 방어막만 펼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랜스병 앞으로!"
"오오-!"
아론을 포함한 기사단장들의 지휘에 맞춰 랜스병들이 방어막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이 쭉 창을 앞에 내밀며 조준을 마쳤다.
라파엘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명령을 내려달라는 그녀의 눈동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착-!
방어막이 한순간에 사라지면서 무식하게 앞으로 밀기만 하던 몬스터 군단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 기회를 우리 군이 놓칠 리 없었다.
"발포!"
콰콰콰쾅-!!
랜스병들이 마법탄을 발포하자 사방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모두 저 흉측한 몬스터 군단을 터트리면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연이어 발포되는 랜스의 마법탄에 의해 잔뜩 몰려 있던 몬스터 군단은 우리 기사단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터져 나갔다.
그로 인해 정말 순식간에 그 많던 몬스터 군단 대다수가 죽어 버렸다.
나는 그 속 시원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박수를 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사기긴 하다.'
이것이 나의 자랑스러운 군대구나.
특히 칼루탄 랜스와 알브레늄의 방어막이 만들어내는 합작은 가히 예술이었다.
실제로 이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면 사기적인 조합을 꼽는 것이 있는데, 바로 칼루탄과 알브레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늘 컴퓨터 화면으로 봐왔지, 실제로 보게 된 건 처음이라 그 엄청난 파괴력과 효용성을 보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제법."
이놈의 허세 때문에 그 기쁨을 온전히 겉으로 표현하진 못했다.
"우와아아아-!!"
"우리의 승리다!!"
그에 반해 기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고작 이따위 승리에 함성을 지르고 있을 시간이 없다. 계속 진격한다."
"예!!"
그렇게 여러 마을과 성을 지났다.
방금 전 마을과 똑같이 그곳들도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아까처럼 몬스터 군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마치 방금 전 그건 환영 인사였다는 듯이 말이다.
"왕이시여. 저곳입니다. 저곳이 바로 에인소프 왕국의 수도, 리레프 성입니다."
지독한 마기를 내뿜고 있는 리레프 성.
다른 곳들과는 확실히 겉모습부터가 달라 보였다.
찬란한 대도시의 모습이 아닌, 누가 봐도 악마들에 의해 잡아 먹혀 버린 도시라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저 성벽을 잘 보세요. 악마들의 마법이 씌워져 있어요. 성벽 주변 바닥들도 그렇고요."
놈들은 나를 막고자 철저히 대비한 것이 느껴졌다.
성벽 주변으로 검은 바닥에 흑마법이 깔려 있었고, 성벽 역시 검은 마법으로 떡칠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성벽 위에 악마들이 잔뜩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검의 주인 카르펠이 테키나 족속과 한패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광경이리라.
'생각보다 빡세겠는데.'
저 정도로 두꺼운 방어벽을 쌓고 있을 줄이야.
흥분해서 먼저 우리한테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름 방어도 할 줄 안다는 건가?
"아론."
"예, 왕이시여."
"너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겠지."
나는 옆에 있던 아론을 쳐다보며 말했다.
"본좌가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왜냐하면 난 저기서 싸울 생각이 요만큼도 없거든.
괜히 잘못 휘말렸다가 악마들의 밥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뒷짐만 지며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활로를 열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꺼내서 쓰는 거 같네.'
나는 손을 펼쳐 아란의 창을 소환했다.
[아아. 주인. 너무나도 오래 기달렸어. 한번만······. 제발 한번만 더 나를 던져줘. 이 몸이 다 부셔져 버릴 정도로 세게.]
"······."
내가 이놈을 지금까지 안 꺼낸 이유가 있었다.
다시 집어넣을까 싶었지만, 지금은 놈의 힘이 필요한 때이지 않은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입 좀 닥쳐. 다시 집어넣기 전에.'
[읍-!]
나는 아란의 창을 꽉 붙잡았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그립감 하나는 뛰어난 녀석이었다.
그러고는 저 먼 성벽을 향해 찰나의 괴력으로 냅다 놈을 던져 버렸다.
[으아아아~! 바로 이거야!!]
아란의 창이 내뱉는 행복한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왔군. 아슬란."
일라이 왕국이 에인소프 왕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카르펠은 이곳을 완벽한 방어 시설로 만들었다.
다른 마을과 성에 있던 사람들은 대다수 마검에 의해 흡수되거나, 혹은 몬스터 군단으로 변모하여 사실상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카르펠은 몬스터 군단 하나만 마을에 남겨 두고 나머지는 전부 이 성으로 데려왔다.
거기다 테르카나가 악마들을 데리고 와 이곳에 주둔시키면서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고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야말로 아주 완벽한 방어 기지가 된 것이었다.
"저는 왕께서 흥분하여 아슬란을 당장 공격하러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 테르카나의 말에 카르펠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놈이 오겠다는데, 굳이 내가 먼저 나갈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일라이 왕국의 군대가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저놈들을 먼저 꺾어 버릴 필요가 있어. 최강이라 여기던 군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절망하는 아슬란을 천천히 죽여 주는 것이 더 통쾌하지 않겠느냐? 크크."
그 작은 웃음소리에도 살벌한 마기가 퍼져 나온다.
에인소프 왕국에 있는 백성들과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은 카르펠은 그 힘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테르카나도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함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테르카나. 네놈의 목적은 잘 알고 있다."
"그렇습니까?"
"나를 이용해 테키나 족속으로 하여금 이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것이겠지. 뭐,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가 허락을 해주지. 아슬란을 죽인 뒤, 나는 곧바로 일라이 왕국으로 진격할 것이다. 그 이후에도 다른 왕국들을 침공할 것이고. 테키나 족속은 알아서 내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 말에 테르카나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카르펠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은 단순히 테키나 족속으로 하여금 이 대륙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저 멀리서 붉은 망토를 펄럭이고 있는 아슬란 쪽이었다.
그런데······.
"음?"
무언가 아슬란 쪽에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테르카나에 이어 카르펠도 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사라진 정체불명의 물체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쐐애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창 하나가 성벽에 꽂혔다.
쿠우우우웅-!!
그 진동이 온몸에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충돌이었으나, 그 창이 방어막을 부숴 놓진 못했다.
카르펠은 곧 비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놈. 테키나 족속의 방어 마법은 최고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고작 창 하나로 여기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콰직-! 콰드득-!
방어막에 일어나는 균열이 점점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콰아아아앙-!!
창이 크게 폭발하면서 방어막이 무너졌다.
또한 그 뒤에 있던 성벽 역시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캬오오오!!"
성벽 한 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서 악마들이 그 밑에 파묻혀 버렸다.
"저, 저게 무슨······!"
저 두꺼운 방어 마법을 창 하나로 뚫은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 뒤에 있던 성벽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리다니.
카르펠은 황당한 기함을 터트렸다.
그리고,
"돌격하라!!"
"우와아아아-!!"
잠잠하던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슬란······."
카르펠은 이를 뿌득 갈며 오늘도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말 위에 있는 아슬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127화
0.01초 소드마스터 127화
쿠쿵-!!
찰나의 괴력으로 던진 아란의 창은 쭉 뻗어 나가 방어막에 꽂혔다.
이윽고 그것이 폭발하자 방어막과 성벽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우와아아아-!!"
그것을 보고 기사단은 크게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걸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 아니. 드래곤도 하나 있었다.
"윽.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플레임은 그날 레어가 내 손에 박살난 트라우마가 떠올랐는지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을 높이 들고는 짧고 간결하게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진격."
그러자 기사단이 어마어마한 함성과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일라이 왕국을 위하여!!"
"아슬란 님을 위하여!!"
기사단은 맹렬한 속도로 돌진했다.
하지만 성벽을 부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놈들이 성벽 밖으로 온갖 함정을 설치해 두지 않았던가.
시커먼 구덩이에서 흑마법으로 탄생한 악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충분히 기사단의 진격을 멈출 수 있는 거대한 몸통을 가진 악마도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촤아아악-!!
가장 먼저 선두에 달리던 아론이 함정에서 튀어나온 악마들을 화려한 검술로 처단했고, 그 뒤를 따르는 알렉산더도 보조했다.
또한 이미 하늘 위를 거의 비행하다시피 뛰어다니고 있던 레바노스가 대검을 던지자 함정에서 나오는 악마마다 그 자리에서 펑펑 터져 버렸다.
'그래. 이게 군대지.'
네임드들이 앞장서서 골칫거리를 먼저 해결해 주면 중갑병은 거칠 것 없이 돌격한다. 그렇게 그들은 큰 어려움 없이 부서진 성벽까지 다다랐다.
"크오오오!!"
그곳에도 온갖 괴물들이 득실거렸지만,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기사단은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에서 그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전부 죽여라!!"
"아슬란 님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 기사단은 그리 쉽게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칼루탄 랜스로 무장하고, 또한 온몸을 중갑으로 방어하고 있어서 몬스터들이 달려들어 상처를 내려고 해도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더군다나 후방에서도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퍼퍼펑-!!
후방에 있는 투석기가 성수를 날려 보내며 그것들이 공중에서 폭발하자 악마들은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몸부림을 쳤다.
성수는 악마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아슬란 님의 축복이다!"
"모두 아슬란 님의 은총을 받으며 싸워라!"
그에 반해 기사단은 성수를 온몸에 적시고 입으로 그것을 마시며 더욱 사기를 드높였다. 그 가운데에는 아론의 광적인 선동이 함께 했다.
"나도 가서 날뛰고 오면 안 되나?"
플레임은 몸이 근질거린다는 듯 말했다.
"그냥 여기 있거라."
"왜? 내가 가서 싸우면 순식간에 다 쓸어 버릴 수 있을 텐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쩝."
플레임을 보낸다면 당연히 더 수월하게 놈들을 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레임을 내 곁에 두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직 그놈이 나서지 않았잖아.'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마검의 주인, 카르펠.
놈이 아직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놈이 나서게 된다면 전쟁의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도 몰랐다.
만약 놈이 저들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내 목숨을 앗아가고자 이곳으로 달려온다면?
'그땐 플레임을 고기 방패로 세워야지.'
그것이 내 완벽한 계획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소름 돋게."
플레임은 뭔가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눈치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플레임은 내 완벽한 계획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 * *
"이런. 역시 아슬란의 군대는 강하군요. 가히 최강이 이끄는 군대답습니다."
테르카나의 말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라이 왕국은 과연 강했다.
아슬란이 창을 던져 방어막과 성벽을 동시에 부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이 저토록 강할 거라는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카르펠은 짙게 숨을 내쉬며 검을 붙잡았다.
"테르카나."
"예, 말씀하십시오."
"일단 여기 밑에 있는 놈들을 대충 처리하고 나서 나는 곧장 아슬란에게 달려갈 것이다. 최대한 방해꾼이 없으면 한다."
"방해꾼이라면······. 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을 말씀하시는 거겠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악마 군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슬란 군대에 의해 유린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처럼 보였다.
카르펠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놈들."
그때 그를 향해 중갑 기마대가 다가왔다.
그들이 날린 랜스 마법탄이 카르펠에게 일제히 적중했다.
"고작 이딴 걸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하지만 카르펠을 쓰러뜨리기에는 한참 부족한 화력이었다.
그는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검강이 뿜어져 나가며 마주 오던 기마대를 한꺼번에 쓸어 버렸다.
"흐아아압-!!"
검강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뿌연 연기가 가득했으나, 곧 우렁찬 함성과 함께 그것을 가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론이었다.
그의 뒤로 알렉산더가 함께 있었다.
채앵-!!
아론과 알렉산더가 서로 협력하여 카르펠에게 파상공세를 펼쳤다.
이들의 화려하고 뛰어난 검술에 카르펠의 몸에 검상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카르펠은 마검을 높이 들어 주변에 있던 악마의 시체와 기사단의 시체를 모조리 흡수했다.
그러고는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며 그의 등 뒤로 검은 촉수 같은 것이 튀어 나왔다.
두 개의 팔, 그리고 네 개의 검은 촉수.
그 흉측하고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카르펠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촉수가 아론과 알렉산더를 공격하고, 그 뒤에 있던 기사단까지 덮치며 그들의 몸을 찔렀다.
"여기서 전부 죽여 주마."
마검으로는 검강을 토해내고, 한 손으로는 마기로 가득한 화염을 뿜어낸다.
또한 촉수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기사들의 몸을 찌르고 쪼갰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카르펠의 무시무시한 힘에 기사단이 주춤거리고 있을때였다.
스걱-!!
마법탄을 발사해도, 칼로 찌르고 성수를 부어도 꿈쩍하지 않던 촉수가 잘려나갔다.
카르펠은 감히 자신의 촉수를 자른 자가 누구인지 바라보았다.
"레바노스."
대륙의 10대 소드마스터 중 하나이자, 방랑자로 불렸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아슬란의 개가 되었구나.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말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이지. 그분의 힘을 한번이라도 마주한다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흐흐. 그래. 그렇다면 내가 놈의 목을 베어 너희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해주겠다."
"꿈도 크구나."
콰아앙-!!
레바노스와 카르펠이 충돌하면서 사방으로 파공음이 퍼져 나갔다.
아론과 알렉산더가 나서서 레바노스를 도왔지만, 벌써 잘려나간 촉수를 재생시킨 카르펠은 단신의 몸으로 이들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고립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크오오오-!!"
그가 포효하며 마기를 사방에 퍼뜨렸다.
그러자 일라이 왕국 기사단에 짓눌려 주춤거리던 악마 군단이 다시 힘을 되찾으며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이놈들이!"
"막아라!"
다시 한번 이곳은 기사들과 악마들이 섞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카르펠은 그 기회를 노려 레바노스에게 달려가 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발길질을 날려 그를 저 성벽에 처박았다.
이대로 레바노스와 결판을 낼 수도 있지만,
"······."
지금 카르펠의 눈에는 레바노스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저 뒤에서 망토를 휘날리고 있는 아슬란이었다.
파앗-!!
그는 번쩍 날아올라 아슬란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 착지하며 지독한 마기를 뿜어냈다.
"아슬란. 결판을 낼 때가 되었다."
그런 카르펠의 말에 플레임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인가? 넌 이제 뒤졌어."
플레임은 몸을 가볍게 풀며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응?"
갑자기 발밑으로 포탈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으에에에엑~!"
그대로 플레임은 포탈에 빠져 버렸고, 그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포탈이 닫혀 버렸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르펠은 비웃음 젖은 입가로 말했다.
"방해꾼은 사라졌군."
테르카나가 명령을 아주 잘 수행해 주었다.
그 덕분에 카르펠은 아슬란과 단둘이 남게 됐다.
"그 잘난 말 위에서 내려오너라, 아슬란."
아슬란은 그런 카르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건방지구나."
카르펠이 지독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데도 아슬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놈의 실력으로는 본좌를 말 위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흐흐. 끝까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그런 오만함도 이제는······. 음?"
그때 뒤에서 세차게 날아오는 대검이 카르펠을 덮쳤다.
"감히 그분에게 다가갈 수 없다!"
"레바노스! 또 방해하는 것이냐!"
카르펠은 역정을 내며 레바노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재빠른 몸놀림과 자유자재로 대검을 다루던 레바노스는 카르펠의 몸을 여러 차레 베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콰직-!
"크헉!"
그의 가슴 정중앙을 대검으로 꿰뚫기까지 했다.
"죽어라.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이 더러운 놈."
하지만 카르펠은 아직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기사의 명예라고 했느냐?"
치이이익-
그의 가슴에 박아 넣은 레바노스의 대검이 검게 물들어가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
레바노스는 얼른 대검을 뽑아 뒤로 물러났다.
만약 계속 자리를 유지했었으면 저 마기에 의해 잡아 먹혔을지도 모른다.
"기사의 명예란 힘을 끝없이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똑똑히 지켜보거라. 힘을 향한 나의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마검이 번뜩이며 붉은빛을 발했다.
그리고 소용돌이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몰아치더니, 저 성에서 싸우고 있는 몬스터들과 악마들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캬오오오-!"
그것들은 몸부림을 치면서 저항했지만, 한번 시작된 흡수는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마검에 강제로 끌려 들어갔다.
"이게 무슨······."
그 충격적인 광경에 레바노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콰득-! 콰드득-!!
카르펠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하나씩 뻗어 나왔다.
촉수에 이어 이번에는 검은 날개라.
그 흉측함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크하하하!!"
모든 악마 군단을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삼은 카르펠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소리에도 어마어마한 마기가 실려 있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취하며 소리쳤다.
"그래. 바로 이 힘이다. 이 정도 힘이라면 라할이 온다고 해도 이 몸을 막을 수 없다!"
레바노스는 몸이 떨려왔다.
카르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무시무시하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저 웃음만 터트렸을 뿐인데도,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힘에 의해 몸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푸욱-!
"크악!"
카르펠이 달려와 날개로 자신의 몸을 찌르는 순간에도 레바노스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이제 저 뒤에서 네놈의 주인이 어떻게 죽는지 잘 지켜보거라."
"크으읍-"
카르펠은 날개에 꽂힌 레바노스의 몸을 높이 든 뒤 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아슬란."
그는 천천히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보이느냐? 이것이 바로 신의 힘이다! 네놈 따위는 이제 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죽일 수가 있다! 크하하하!!"
마음껏 힘을 발산하던 카르펠은 아슬란을 철저히 짓밟아 버릴 심산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히-"
아슬란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시도 허공에 떠 있는 카르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하다니."
"······?"
"무엄하구나."
바로 그 순간.
콰아앙-!!
"!?"
허공에 떠 있던 카르펠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 이게 무, 무슨······!"
카르펠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콰아앙-!!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힘에 감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잊지 말거라."
그리고 그의 뒤통수에 무심한 시선이 꽂혔다.
"그곳이 바로 너의 자리다, 카르펠."
128화
0.01초 소드마스터 128화
콰득-! 콰드득-!!
나의 염력이 저 바닥 끝까지 뚫을 기세로 카르펠을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엄청난 염력도 지속 시간이 끝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내 허세는 이 힘이 영원할 것처럼 굴었다.
"악마의 힘을 빌려 본좌의 힘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구나, 카르펠."
"우으읍-!"
놈은 지속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기우뚱거리며 다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슬란······. 크윽-."
나는 망토를 과하게 펄럭이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드러내 보였다.
"기회를 주마. 네가 가진 모든 힘으로 부딪혀 보거라."
그러고는 병신 같은 허세를 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본좌가 단 일격으로 네놈의 처량한 인생을 끝내줄 터이니."
"······!"
카르펠은 몸을 부르르 떨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 기회인 것일까.
저놈이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일련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칼을 뽑아 검강을 날려 놈의 몸을 쪼개려고 할 때였다.
"그래."
카르펠이 검은 마기로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내 모든 걸 쏟아 부어 주겠다, 아슬란."
겁을 먹고 물러날 법도 한데, 저놈은 동귀어진이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고작 일격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이 목숨을 바쳐서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 테니까!!"
콰아아아아-!!
치솟는 어마어마한 마기.
이 미친놈이 정말 나랑 같이 죽을 생각인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잠깐. 이러면 나가리인데.'
적당히 겁을 줘서 일단 물러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갑자기 포탈에 떨어진 플레임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놈은 그냥 여기서 자폭해 다 같이 죽자는 마인드인 것 같았다.
'사내새끼가 뭐 이리 포기가 빨라?'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일단 수호의 방패로 놈의 공격을 막아낸 다음에······.
"윽-!"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힘을 끌어모으던 카르펠이 갑자기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에게 소리쳤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주인인 나를 먹으려 들어!?"
그러자 마검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더니, 천지를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은 터무니없이 약하군. 고작 한다는 게 자기 목숨을 버려서 상대를 죽이는 것이냐?]
"뭐야?!"
[난 오직 강한 자만을 주인으로 삼는다. 그리고 방금 난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닥쳐라! 네 주인은 바로 나야! 내가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누구한테 간다는 것이냐?"
[크큭. 살아 있다고? 네가?]
"!?"
마검은 카르펠의 몸에 담겨 있는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그만!"
카르펠은 마검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한번 달라붙은 것을 털어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넌 내게 모든 걸 바친 몸이다. 주인이면 주인답게 검을 사용했어야지. 검에게 모든 것을 바친 놈이 과연 주인이라 할 수 있느냐? 이제까지 내가 너에게 준 힘을 전부 가져가겠다.]
"아, 안 돼! 멈춰! 내가 네 주인이란 말이다!"
[더는 아니야.]
"으아아악!"
콰아아아아-!!
마검에 의해 카르펠의 힘이 빨려 들어가면서 놈의 형체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몸통이 찌그러져 가고, 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에 남은 것이라고는 손으로 툭 건들면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살가죽과 뼈대뿐이었다.
"······."
마검의 주인, 카르펠의 허무한 최후였다.
웅장하게 뻗쳐 있던 그의 날개도 깃털을 잃고 뼛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이, 이건 또 뭔 시츄에이션이여.'
황당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검이 주인을 집어삼키다니.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아슬란.]
아니.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내게 손을 뻗어라. 너의 힘이 되어 주겠다.]
마검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모든 풍경이 검게 물들고 오직 나와 마검만이 어느 아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카르펠은 내가 공을 들여 키운 놈이다. 그런데 너는 놈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압했지. 나는 이 대륙 최강의 검. 최강은 최강을 알아보는 법. 그러니 당연히 대륙 최강자가 최강의 검을 갖는 것이 맞다.]
내가 볼 때 저놈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
[나와 함께한다면 그동안 가지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힘을 갖게 해 주겠다. 그 누구도 너를 대적할 수 없을 것이며, 너는 영원히 최강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저 마검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파고들어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허세라는 든든한 방패가 있어서 쉽사리 뚫릴 일은 없겠지만, 그 유혹의 목소리에 점점 몸이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검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까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여러 마검을 만나봤다.
하지만 대부분이 쓸모없는 것들이라 그냥 무시했는데, 저건 달랐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카르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릴 만큼 분명 붙어 있는 옵션과 증가하는 스텟양이 엄청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설마 이 아슬란의 개똥 같은 스텟도······.
[감히-]
바로 그때였다.
[검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더러운 잡종이 입을 놀리는 것이냐?]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대체 누가 말을 하는 거지?
나는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검의 공명에 밑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너냐?
[가소롭구나.]
그동안 내가 수백 번이나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근엄하고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마검을 다그치고 있었다.
[뭣이? 아슬란에게는 너 같은 철쪼가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지 않느냐!]
뭐······. 마검이 딱히 틀린 말을 한 거 같진 않습니다만.
[최강에게는 최강의 검이 어울린다. 너 같은 철쪼가리는 내가 단숨에 쪼개 없애 주지.]
마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스멀스멀 모형을 갖추더니, 두 뿔이 달린 마귀의 형태로 변하였다.
저건 좀 징그러운 거 같은데.
[어리석구나. 그러니 네가 잡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검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놈을 신랄하게 까내렸다.
[너는 주인을 조종하고 삼키려 들지만, 나는 오직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최강의 검은 오직 최강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뭐야?]
[검은 검이었을 때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너는 이미 그 틀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그러면서 내 검이 강한 진동을 일으키며 스스로 검집에서 빠져나와 내 앞에 두둥실 떠다녔다.
[주인.]
그 강렬한 음성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힘은 나의 힘. 나의 힘은 곧 그대의 힘.]
그리고 나는 보았다.
검과 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 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검의 강한 의지가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나를 잡아라. 그리고 눈앞에 있는 너의 적을 베어라.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너를 위해 쓰겠다.]
나는 그 의지의 부름에 따라 검을 붙잡았다.
이제껏 느낄 수 없었던 강력한 기운이 내 몸 안에 흘러넘쳤다.
[이 어리석은!]
마검은 그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구나. 아슬란. 네놈의 선택은 틀렸다! 최강자가 되고 싶었다면 나를 붙잡았어야지!]
하지만 내 검의 목소리가 더욱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틀린 것은 너다.]
[뭐?]
[보아라. 마검이여. 이미 내 주인은······.]
나는 허세처럼 그 강렬한 끓어오름을 주체하지 못하며 천천히 그 힘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
[이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최강이다.]
바로 그 순간.
콰직-!!
[······!?]
검은 마기와 찬란한 빛이 한 데 섞인 검강이 솟구쳐 나가면서 허공에 떠있던 검을 베고 지나갔다.
마검은 반으로 갈라져 어스러진 마기를 흐트려 놓았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검이거늘······!]
그 말에 내 허세가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이 세상에서 본좌가 베지 못할 것은 없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다."
[크크······. 그런 것인가?]
짧은 웃음 소리가 지난 뒤, 온통 검게 물들어 있던 세상이 유리창에 금이 가듯 깨지면서 사라졌고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
주변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난 검을 들고 있었는데, 내 검은 허리춤에 잠잠이 있었다.
또한 마검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기만 했다.
환상을 본 것인가?
아니면······.
쩌적-! 쩌억-!
그런데 마검이 썩어 버린 나뭇가지처럼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의 음성이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지켜보겠다, 아슬란. 너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마검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고, 그 안에 박혀 있던 붉은 보석이 천천히 내 앞으로 날아와 손바닥 위로 사뿐이 내려앉았다.
[태초의 보석 - 갈망]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정말 이 보석이 마검에 박혀 있었다니.
드워프 이놈들이 설마 이걸로 무기를 만들 줄은 몰랐다.
이제까지 한번도 드워프가 이 위험천만한 보석으로 무기를 만드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인 이 보석을 애지중지하며 숭배하기까지 하니까.
'이것이 라일라칸과 같은 괴물들을 상대로 쓸 수 있는 보석.'
물론, 이 보석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라일라칸에 버금가는 놈들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의 마지막 발악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거기다 내게는 라일라칸이 있으니, 이 보석을 쓸 일도 없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 보석을 써야 한다는 건 그만큼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이니.
"왕이시여!"
"아슬란 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일단 보석을 안에 넣어 두었다.
이 게임을 엔딩까지 달리면서 절대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카르펠은······. 아니?!"
부하들은 그제서야 카르펠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그의 몸뚱이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 힐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아하니, 내가 카르펠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펠이 날뛰면서 내 뒤에 있던 수비대까지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나와 카르펠 단둘만 이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펠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 대가를 치렀을 뿐."
그러자 아론이 거들며 나섰다.
"맞습니다. 감히 아슬란 님에게 단독으로 덤비는 선택을 하다니. 그의 어리석은 선택이 결국 죽음으로 이르렀군요."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과연 아슬란 님이십니다. 그토록 자비로우시고 은총이 많으신 당신께서, 감히 당신의 힘에 반기를 드는 카르펠에게 그 진노를 보이셨군요."
"오오-."
"과연 우리의 왕이시로다."
아론은 기사들과 함께 내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로써 온 대륙이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의 힘을 의심하고 대적하는 순간, 하늘의 진노가 내려쳐 대륙이 갈라지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
그쯤 하면 됐다, 아론아.
지금껏 내가 여러 허세를 겪어 봤지만, 저런 다른 종류였다.
더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 할까.
"군을 정비해라. 감히 이런 짓거리를 벌인 드워프들을 벌할 것이다."
"예!"
나는 일단 아론에게 할 일을 던져 주고 얼른 내게서 멀어지게 했다.
더는 녀석의 말을 못 들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놈은 대체 뭐야?'
나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매만졌다.
그 무시무시한 마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을 최강이라 자부하던 놈이지 않았던가.
진짜 이놈이 사실은 최강의 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이. 또 말을 안 할 셈이냐?'
[······.]
웃긴 놈일세.
아까는 뭐 내 힘은 어쩌구 지 힘은 어쩌구 지껄이던 놈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건지 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래. 네 좋을 대로 해라.'
이제 더는 나도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며 이 답답한 놈에게서 신경을 끄려고 했는데-.
[찬란한 베라크 보검에 새로운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
[찬란한 베라크의 보검]
-검과 주인이 강한 정신력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병적인 허세를 공유합니다.)
-히든 옵션, '검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단, 검의 포효는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새로 개방된 검의 옵션.
그것도 광역 스킬 중 하나로 알려진 검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다니!
하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 검이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아까 내가 검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 것도······.'
최강 어쩌고 지껄인 것도 전부-
'허세였던 거냐?'
129화
0.01초 소드마스터 129화
"뭐, 뭐라고? 다,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아슬란에 의해 마검이 파괴되고 마검의 주인 역시 죽었습니다! 또한 악마들과 개조 병사들까지 전멸을 당했다고 합니다!"
드워프들의 왕, 우데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드워프의 최고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검이 파괴되다니! 그 검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 검이다. 알고 있느냐? 그 검에는 무려 태초의 보석이 들어가 있단 말이다!"
태초의 보석.
전설적인 펜던트와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유물로 취급을 받는 보석이다.
그 보석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전을 통해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그 어떤 보석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당연히 모험가들이 그 보석들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지금까지 그들은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 하나를 드워프들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악마와 결탁하여 마검이라는 새로운 검을 만들어냈다.
그 검을 완성시켰을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강한 검은 나올 수 없을 것이며, 오직 이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만이 검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검이 파괴될 수가!"
"아슬란이 라할의 화신이라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라할이라고 해도 그 검은 결코 파괴될 수가 없다. 분명 뭔가 보고가 잘못된 것이겠지! 거기다 그 검을 정말 파괴했다면 그 안에 있는 태초의 보석은?"
"그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무엇 하나 단정 지을 수가 없는 상황.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카르펠을 따르던 악마 군단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다음 공격 목표는 드워프들이 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일.
"놈들이 공격을 해오기 전에 몸을 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격을 피해? 우리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이미 이곳으로 거점을 옮기는 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그리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곳에는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니까."
드워프들이 살고 있는 이 리베리엄 화산 안쪽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단 하나.
하지만 그 통로는 이 뜨거운 리베리엄 화산의 연기에 가로막혀 버렸다.
드워프들이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모든 열기를 통로에다 집중시켜 적의 침입을 완전히 막아 놓은 것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저 통로를 지나려고 하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악마 군단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거기서 한 차례 피해를 입고 저 통로까지 쉽게 뚫을 순 없겠지."
나름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둔 우데르였다.
"역시 왕이십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불편하긴 해도, 이곳만큼 안전한 곳이 없긴 하지요."
"그래. 감히 누구도 이 리베리엄 화산에 발 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고 있을 때였다.
콰직-! 콰쾈콱-!!
불길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들의 거점과 이어진 통로에서부터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통로 전체를 틀어 막고 있는 리베리엄 화산의 열기를 가득 담은 뿌연 연기들이 휘몰아치는 검강 소나기에 갈라지고 흩어지며 마침내 모든 연기가 사라져 버렸다.
"저, 저게 무슨!"
대마법사들이 와도 저 연기를 어찌하지 못할 거라 자신했건만.
소낙비처럼 몰아치는 검강에 의해 그토록 이들이 자부하던 방어벽이 전부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푸른 마력을 온몸에 휘감은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있었구나. 감히 악마들과 손을 잡은 더러운 족속이."
"너, 너는······."
"안타깝구나, 드워프들이여. 300년 전에는 그래도 꽤 협조적인 놈들이었는데. 어찌 이리도 타락을 했는지. 너희 선조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우데르는 전신에서 닿기만 해도 베일 것만 같은 칼날들이 마구 휘몰아치고 있던 사내를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저 매혹적인 푸른 마력.
강직한 인상에 노란 머릿결.
영웅적인 상을 타고난 얼굴.
옛 선조들이 그려 놓은 한 남자가 떠올랐다.
"다, 당신은 설마 라일라칸!"
"라, 라일라칸이라고?!"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칼라 왕국에서 아직 라일라칸의 공식적인 부활을 공표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그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내가 너희 드워프의 씨앗을 전부 말려 버릴 것이다."
"자, 잠깐만!"
우데르는 애처롭게 소리쳤다.
라일라칸의 힘이라면 능히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을 없애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간절한 부름에도 라일라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서 모두 죽어라."
그는 붙잡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하늘에서 푸른 검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지면에 있는 모든 생명을 쓸어 버리기 시작했다.
* * *
"아오. 내가 진짜 그놈 잡기만 하면 가만 안 놔둘 거야."
테르카나가 만들어 놓은 포탈에 빠진 뒤 간신히 빠져나온 플레임은 투덜거리기 바빴다.
테르카나를 붙잡아 어떻게 요리를 할 것인지 100번은 더 떠든 것 같은데도 끊임없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빡이 친 것 같아 보였다.
'태초의 보석도 얻었으니,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겠지만.'
드워프가 악마들과 결탁하여 또 이상한 걸 만들어 버리기 전에 그놈들을 얼른 잡아 놔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놔두면 위험하겠지.'
태초의 보석을 이용해 마검을 만들어 놓은 놈들이니, 더 기괴한 걸 만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차라리 그럴 거라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무력으로 굴복을 시킨 다음, 우리 왕국으로 데리고 와서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 되지.'
무려 드워프다.
기술력에 있어서는 대륙 최고라는 장인들의 종족, 바로 그 드워프라는 것이다.
이놈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기술력에 한층 도움을 받는다면-
'지금보다 더 군사력을 강하게 끌어 올릴 수 있다.'
가히 최강의 군대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데까지 문제가 있었다.
'리베리엄 화산이면 쉽게 접근을 못 할 텐데.'
이미 플레임을 통해 한 차례 그곳 주변을 정찰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이 침략에 대비해 방어를 철저히 해 놓았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통로를 막고 있는 그 연기를 뚫는 것이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을 어떻게 뚫느냐가 문제인데-
"왕이시여. 저곳을 보십시오!"
"······?"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 통로를 막고 있어야 할 리베리엄 화산 연기가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형이 죄다 망가져 있을 것을 보아하니, 우리가 오기 전에 다른 군대가 침공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 경계 태세를 갖춰라."
"예!"
나는 천천히 통로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멀리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지형이었다.
그런데 길은 뻥 뚫려 있었고, 그냥 지나가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말고 누가 온 거지?'
여기저기 뭔가 거대한 검으로 내려친 듯한 흔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플레임을 먼저 하늘로 보내 절벽 위에서 누가 매복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게 했다. 그리고 군사들과 함께 통로를 지나 마침내 리베리엄 화산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
수많은 시체 위에 홀로 서 있는 라일라칸을 만날 수 있었다.
"자네 왔군."
"······이들을 모두 그대가 죽인 건가?"
"그래. 어리석게도 드워프는 테키나 족속과 손을 잡았다. 선조들의 숭고한 뜻도 잊은 채. 그래서 놈들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 꼴만 봐도 라일라칸 혼자서 여기를 뒤집어 놓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드워프라고 해도 한 종족을 혼자 몰살시키다니.
과연 라일라칸이었다.
"잠깐 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떤가? 따라와라."
그리 말하며 라일라칸은 푸른 오러를 전신에 두르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일라칸이 오라는데 같이 안 갈 수도 없고.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비행했다.
그는 절벽 쪽으로 사뿐히 착지하며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내 오러를 전신에 둘러 하늘을 간신히 비행하는 수준인데, 너는 전혀 그런 것이 없군. 비결이 뭐지? 어떻게 마력 없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냐?"
"······잡기술일 뿐이다."
"하하. 하늘을 나는 것이 잡기술이라. 하긴. 너한테는 그럴지도 모르겠지."
그러면서 라일라칸은 절벽 위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다, 아슬란."
"······?"
갑자기?
"최강의 자리란 그런 법이지. 늘 외롭고 고독하다."
전혀 아닌데.
"그런 점에 있어서 난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처음으로 내가 바라보는 시야를 똑같이 볼 수 있는 사내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렇지 않느냐?"
라일라칸은 뭔가 단단히 크게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반박하진 않았다.
대신,
"원하는 것은 찾았나?"
"······무슨 소리지?"
"라일라칸. 나는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다."
겉으로는 악마들과 결탁한 드워프를 처단하고자 함이라고 하지만, 그의 본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 리베리엄 화산에 있는 영원의 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더냐?"
"······!"
그 말에 라일라칸의 안색이 비틀렸다.
영원의 불.
바로 이곳 리베리엄 화산을 뜨겁게 만들어 주는 핵 같은 것이다.
라일라칸이 여기에 있는 것을 보고 난 그것부터 떠올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300년 전 너와 함께 싸웠던 부하들을 살려내려는 것이겠지."
"!?"
라일라칸은 드디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내가 물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난 네가 아는 것을 전부 알고 있으며, 네가 모르는 것 또한 알고 있다."
"······."
라일라칸은 침묵했다.
"그래서, 찾았느냐?"
"글쎄. 과연 내가 찾았을까?"
말을 저렇게 돌리는 것을 보아하니, 찾긴 찾은 것 같았다.
원래 스토리에도 놈은 영원의 불을 찾아 이 대륙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자신들의 부하들 무덤을 찾아내 그들을 전부 살려냈으니까.
"이런. 악마들이 몰려오는군."
리베리엄 화산 주변으로 악마 군단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라일라칸은 인상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역겨운 놈들."
그러자 하늘에서 푸른 검들이 쏟아지며 악마들을 때렸다.
그러나 워낙 숫자가 많아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는 몰려드는 악마들을 내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내가 영원의 불로 내 부하들을 살려낸다면 넌 날 비난할 것이냐?"
원래 스토리 라인에서는 라일라칸이 네크로맨시를 한다며 수많은 사람이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그 군대를 앞장세워 테키나 족속과 맞서 싸우게 된다.
즉, 내게는 아주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비난하지 않는다."
"어째서지? 내가 그들을 일으킨다면 그 어떤 왕국의 군대보다 강력할 것이다."
그건 맞는 얘기였다.
아무리 일라이 왕국의 기술력이 발전했다고 해도 라일라칸의 정예 부대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들이 너의 왕국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은가?"
당연히 안 괜찮지.
하지만 라일라칸은 악마들과 싸우기 바빠서 우리 왕국을 위협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상관없다."
바로 그때였다.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허세가 내 머리 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넌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라일라칸."
그에 따라 허리춤에 있던 내 검이 강렬하게 울음을 터트려댔다.
나는 그 검을 천천히 뽑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검이 알아서 떠올라 저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내려갔다.
피이이잉-!!
베라크의 찬란한 보검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힘과 연결이 되어 있어, 암속성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통로 쪽으로 몰려들던 악마들은 그 빛을 보고 멈춰 선 뒤, 그것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 검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던 라일라칸에게 말했다.
"감히 네가 나와 같은 시야를 바라본다고 했느냐?"
나는 그 검으로 악마들이 전부 몰려들기만을 기다렸다.
"건방진 소리다. 넌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본좌와 같은 시야를 바라볼 수 없다."
"······?"
"과거에는 네가 최강이었을지 모르나, 이곳에서는 아니다. 오직 대륙의 최강은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저 수많은 악마가 검 주변으로 전부 몰려든 순간.
나는 보검에 깃든 힘과 찰나의 괴력을 합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쿠우우웅-!!
거대한 검의 포효가 일어나면서 사방에 있는 모든 악마를 단번에 휩쓸어 버렸다.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과 굉음에 라일라칸은 눈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넌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또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테니."
130화
0.01초 소드마스터 130화
콰아아아아-!!
"캬오오오!!"
정중아에서 일어난 어마어마한 폭발.
사방으로 퍼지는 강력한 파공과 검날 같은 것들이 사정없이 악마들을 쳐버렸다.
"······."
라일라칸은 지면을 휩쓸어 버린 아슬란의 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능력을 발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이 숲 전체를 둘러 싸고 있던 악마 군단이 괴멸을 당했다.
놈들은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터.
사실 라일라칸도 무엇이 저들을 휩쓸어 버린 것인지 아직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아슬란의 손끝에 의해 폭발이 일어나 사방에 몰려든 악마들이 전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과연······ 경이로운 힘이로군.'
적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리는 광역 스킬은 라일라칸도 지겹게 봐왔고, 또 지겹게 써봤다. 하지만 아슬란의 힘은 다르다.
저 압도적인 중압감과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카리스마.
그에 따른 놀라운 힘까지.
아슬란은 지금껏 봐왔던 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라일라칸은 보았다.
'저건······.'
아슬란에게서 나오는 붉은 기운을.
저 붉은 기운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바로 라일라칸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힘을 상대가 가졌다는 뜻이다.
그것이 라일라칸의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 누구도 날 죽일 수 없을 거라 믿었거늘.'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지옥의 왕 레메게톤조차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고 있자면 그러한 자신감이 사실은 허망한 자만함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슬란. 너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일라칸의 물음에 아슬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늘 사람을 둘로 나눈다. 배려를 해줘야 하는 약자와, 그럴 필요가 없는 강자로 말이지."
"······?"
"그리고 지금껏 난 단 한번도 강자를 만난 적이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아슬란은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먼저 내려가 버렸다.
"······"
절벽 위에 홀로 남게 된 라일라칸은 고요한 정적을 지키다,
"풉-!"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웃음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서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 거렸다.
"그럼 나 역시 너한테는 배려를 해줘야 하는 약자라는 것이냐?"
라일라칸은 처음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이해해 주고 이 고독한 외로움을 공감해 줄 수 있는 강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슬란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라일라칸을 약자로 보고 있었다.
한평생 최강자의 인생을 살아온 라일라칸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런 감정은 오랜만이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상대방을 뛰어 넘고 싶다는 승부욕일 것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잊어 버렸던 그 감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니 내 언젠가는······."
반드시 널 넘어서겠다.
"네가 날 똑같은 강자로 볼 수 있게."
라일라칸은 그리 다짐했다.
"일단은······."
그는 자신이 리베리엄 화산에서 얻은 영원의 불을 꺼내며 내려다 보았다.
"나의 수족들을 먼저 살려 내야겠지."
대체 아슬란이 이걸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들을 살려내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짧게 숨을 고른 뒤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자신의 새로운 집이 된 칼라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 * *
오늘도 한바탕 개소리를 지껄인 다음 나는 얼른 절벽에서 내려왔다.
더 있다가는 라일라칸이 검을 뽑아 내 목을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젠 하다하다 대륙 최강자한테도 지랄이냐.'
이놈의 허세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았다.
강자와 약자를 나눈다고 했던가.
이 허세 앞에서는 모두가 약자였다.
'그나저나.'
나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슬쩍 매만져 보았다.
'생각보다 세네?'
[검의 포효]
-시전자의 힘에 비례해 검의 포효를 날립니다.
-최대 반경 300m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찬란한 베라크의 보검이 새로운 옵션을 개방하면서 얻게 된 검의 포효.
찰나의 괴력을 섞어 사용하면 최대 반경 300m까지 포효가 뻗어 나가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포효란, 내가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 아닌 검이 힘을 폭발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 폭발의 위력은 가히 대단했고, 내가 암속성 불길로 유인했던 악마들을 한순간에 쓸어 버렸다.
'앞으로 쓸 일이 많겠어.'
나는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강력한 광역 스킬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왕이시여."
내가 지상으로 내려오자 아론이 내게 다가왔다.
"어찌 되었느냐."
"드워프들은 거의 다 죽은 듯합니다."
"거의 다?"
"10명의 생존자를 찾아냈습니다."
라일라칸이 다 죽여 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도 10명 정도 남아 있었다.
"데려와라."
"예."
이윽고 초조한 얼굴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드워프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고 나는 속으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최고의 대장장이들이 다 죽은 건 아니었구나.
하지만 겉으로는 냉담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악마와 손을 잡은 더러운 핏덩이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그러자 놈들은 알아서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던 것뿐입니다요."
이 게임을 하면서 늘 느끼는 거지만, 드워프들은 행동이 귀여우면서 웃기다는 것이다.
"우리 왕이 어느 날 갑자기 악마와 손을 잡고는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 우리를 데려오고 일만 시켰습니다요."
"저희는 억울합니다요!"
"우리도 악마가 싫습니다요!"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자기들도 악마와 결탁하기 싫었고, 억지로 일만 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의 죄악이 없어질 거라 생각하느냐?"
"······."
"너희가 마검을 만든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들의 억울함은 누구 풀어준다는 것이냐?"
"그, 그건······."
섣불리 답을 하지 못 한다.
난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이 드워프들은 마검을 만드는 데에 투입이 됐었고, 그 말은 마검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을 갖췄다는 뜻이리라.
만약 여기서 난 마검을 만들지 않았다고 발을 뺐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라 여겨 그냥 이 자리에서 죽게 놔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놈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본좌는 자비롭다. 또한 너희의 억울함 역시 알고 있다. 너희들의 왕은 이미 벌을 받았고, 마검은 파괴 되었으며, 그 주인도 죽었다. 그러니 기회를 주겠다."
드워프들이 눈빛을 반짝였다.
"일라이 왕국으로 너희를 데려갈 것인즉, 그곳에서 밤을 낮처럼 지내며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하고 우리 왕국을 위해 장비를 만들어라. 너희가 연구하고 만든 장비들은 모두 악마를 퇴치하는 데에 쓰일 것이다."
"오오······."
"저희에게 작업장을 주시는 겁니까요?"
"그래.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요!"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요!"
드워프들은 서로 부둥켜 안으며 살았다고 만세를 외쳐댔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이르다.
왕국에 들어가는 즉시, 쉬지 않고 작업장 안에서 굴리며 놈들을 부려 먹을 작정이기 때문이다.
* * *
"라일라칸 님!"
라일라칸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기사들과 신하들이 그에게로 몰려갔다.
갑작스레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 터라 성 안이 혼란스럽지 않았던가.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저희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라일라칸은 잔잔한 미소로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다녀온 것일 뿐. 그리고 내가 너희를 놔두고 사라지기라도 할까 두려운 것이냐? 이 대륙이 위협 받고 있는 한, 내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역시 라일라칸 님이십니다."
"항상 당신만을 믿고 있습니다."
"저희를 부디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라일라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
바로 칼라 왕국의 왕, 카르만이었다.
"······."
라일라칸이 칼라 왕국으로 온 뒤로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여전히 카르만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이 있는 반면, 라일라칸에게 노골적으로 충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라일라칸을 따르는 세력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왕이시여."
그런 기류는 단순히 카르만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팔이자 두뇌 역할을 하고 있는 제렌도 같은 것을 느꼈다.
"라일라칸을 따르는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
"지켜만 볼 작정이십니까?"
카르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라일라칸 님을 따르는 자들을 붙잡아 모조리 교수형에 처할까? 아니면 라일라칸 님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
"······."
제렌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주변을 살피다 조용히 말했다.
"지금 당장 척을 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천천히 물밑 작업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라일라칸 주변으로 첩자들을 심어,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왕조를 노린다면······."
"그만."
카르만은 제렌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저분은 나의 조상이시다. 나는 저분의 핏줄이기도 하고. 그런데 나더러 저분의 뒤를 치라는 것이냐? 그리고 저분이 정녕 내 왕좌를 노릴 거라고 생각하느냐?"
"주군. 권력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기 핏줄이라고 해도 권력 앞에서는 그저 썩어 빠진 뿌리일 뿐. 더군다나 라일라칸 님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셨습니까? 혈육의 정이 느껴지지도 않을 겁니다."
제렌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으나, 카르만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무작정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저분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수도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싸움을 벌이려고 하면 큰 위험이 따라올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르만은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군. 그러지 마시고······."
바로 그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카르만."
뒤에서 들리는 라일라칸의 목소리에 제렌은 화들짝 놀랐다.
언제 그가 가까이 왔는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카르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저 멀리 있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것일까.
"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갑자기 말도 없이 나가서 적적했느냐?"
"······."
"너한테 시킬 일이 있다, 카르만."
라일라칸은 카르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볍게 두드렸다.
"힘을 좀 쓸 줄 아는 기사단을 준비시켜라. 그들과 함께 갈 곳이 있다."
"예?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건······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채비를 하거라. 준비가 되는대로 바로 갈 예정이니."
"······."
라일라칸은 그리 말을 하고 카르만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카르만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라일라칸은 이 왕국의 왕인 카르만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말투에서 느껴졌다. 아무리 조상격이라고 해도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조금이라도 존중을 해 줘야 하는 것이거늘.
라일라칸은 늘 제멋대로였고, 항상 명령하는 투로 카르만에게 말했다.
그래서일까.
카르만은 점점 라일라칸이 의심스러웠다.
정말 저자가 칼라 왕국을 위하는 것인지, 이 대륙을 위하는 것인지.
"제렌."
카르만은 뒤에 있던 제렌을 불렀다.
"예, 왕이시여."
"아까 네가 말한 것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첩자를 심는다고 했던가?"
그러자 제렌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대답했다.
"예. 제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래. 내 귀는 열려 있다."
제렌은 카르만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린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낌 없이 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