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삼 세 개
계속 웃고 있을 순 없기에, 엔크리드는 곧 웃음을 멈췄다.
그걸 본 렘이 엔크리드의 손목을 낚아채곤 품에서 붕대를 꺼내 칭칭 감았다.
"오늘은 내 뒤에만 있으쇼. 손이 이래서야, 뒈지기 딱 좋겠네. 대련하다가 이 모양이 됐다고 하면 소대장 새끼가 지랄 염병을 떨 거요."
"됐어."
"되긴 뭐가 됐다고 그러는 거요. 이 손으로 전장 나가면 죽는다니까? 혹시 장래 희망이 자살이슈? 그럼 나도 방해 안 하고."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손으로 전장에 나서면 뒈지기 딱 좋을 거다.
다만, 엔크리드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 더 죽으면 그만이니.
그럼 백스물다섯 번째의 아침이 밝아 올 테고.
'지겹지는 않지만.'
반복된 오늘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엔크리드가 그동안 단순히 검술만 단련한 건 아니었다.
백스물네 번의 하루를 반복하며 '오늘'을 헤쳐나갈 방법도 궁리해 뒀다.
평범한 병사가 첫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는 걸 두고, 행운의 여신이 흘린 동전을 주웠다고 말하곤 한다.
딱히 뛰어난 재능이 없다면 목숨을 지키는 데 운이 큰 힘이 된다는 거다.
엔크리드가 계산하기에 죽지 않으려면 그런 운이 몇 번은 필요했다.
'그렇다고 운에 기댈 순 없지.'
엔크리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특히나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안다.
그러므로 대비할 수 있고.
그러므로 준비할 수 있었다.
백스물네 번째, 엔크리드는 이번에도 찌르기에 목이 꿰여 죽었다.
손바닥이 엉망이라 칼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래도 단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기 싫었기에, 적병의 찌르기를 눈에 담았다. 마지막까지 숨을 고르고 버텼다.
그는 그렇게 했고.
"아프겠어. 자비다."
적병의 목소리를 들으며 목을 통해 느껴지는 화끈한 날붙이의 통증을 견뎠다.
혀에 뭔가 걸리기에 죽기 직전 툭 하고 뱉으니 깨진 어금니였다.
고통에 어금니를 꽉 깨문 탓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 지겨운 일은 아니다.
반복되는 오늘을 값지게 보냈기에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뒈지기는 싫다는 거지.'
죽는 게 즐거울 리는 없었다.
그것도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변태 새끼한테 죽어야 했다.
끝낼 수 있다면 끝낼 것이다. 하루에 갇혔다는 걸 깨닫자마자 엔크리드는 그걸 결심했었다.
그리고.
깡! 깡! 깡!
백스물다섯 번째 아침이 밝았다.
* * *
자리에서 일어난 엔크리드는 렘의 신발부터 들고 털었다.
"뭐하슈? 그거 내 건데?"
"알아, 냄새가 고약해. 이대로 적군에게 던지면 발 냄새로 적군 쉰 명은 잡겠다."
"아침부터 지랄 맞은 걸 보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요?"
툭- 하고 렘의 부츠 안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떨어진 벌레를 엔크리드가 발로 짓이겼다.
"아침에 들어간 거 봤다."
"...거, 고맙수다."
렘이 픽 웃으며 부츠를 고쳐 신었다.
렘을 뒤에 두고, 엔크리드는 천막을 젖히며 밖으로 나갔다.
동이 막 텄기에 새벽의 푸른색과 햇볕의 노란색이 섞인 광경이 보였다.
분주히 움직이는 막번 불침번은 냄비를 후리기 바쁘고.
막 일어난 병사는 눈을 비비며 짜증을 내거나, 말없이 할 일을 하곤 했다.
"염병, 그만 두드려. 대가리 깨지겠다."
"그러니까 누가 어제 퍼마시고 자래?"
뒤쪽 막사였다.
"안 닥치냐? 술 처먹은 거 걸리면 징계라고."
"지랄한다."
막번 불침번과 어제 술을 퍼마신 아군의 대화다.
그걸 들으며 엔크리드는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 술 처먹은 병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부대의 십인대장이자, 분대장이었다. 그리고 저 작자는 좋은 어머니를 뒀다.
예순여섯 번째 날, 그날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저 친구에게 말을 걸어 괜히 친한 척을 했었다.
"아침 당번 아니유?"
"네가 해 줘."
그리 뒤쪽을 살피는 사이, 뒤따라온 렘에게 엔크리드가 대뜸 말했다.
"내가 왜?"
"한 번쯤 해 줄 수도 있잖아. 그동안 내가 대신해 준 게 다섯 번이 넘는다."
"치사하게 그런 걸 세고 있었수?"
"응, 네 것만."
"왜 내 것만 세."
"얄밉거든, 너."
백스물다섯 번 동안 렘 새끼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망 따윈 없다. 감정이 있다면 오히려 고마움만 남았지.
어쨌든 렘은 해 줄 것이다.
렘에게 아침 당번을 맡기는 건 몇 번이고 반복한 오늘 중 가장 생존 확률이 높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패턴이었다.
"알겠수다. 염병, 내가 하지 뭐."
대강 몸을 움직여 열을 내니, 오전의 싸늘한 공기에 몸이 떨리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면서도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둘 분대원이 밖으로 나섰다.
처음은 작센이다. 부지런한 쪽에 속하는 분대원이다. 눈을 마주친 작센이 눈인사를 해 왔다.
엔크리드도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몇 명이 줄줄이 나온 뒤다.
엔크리드는 가장 늦게 눈이 반쯤 감긴 채 나오는 분대원을 붙들었다.
"왕눈아."
"음?"
별명 왕눈이, 본명 크라이스 올맨.
곱상한 외모의 분대원이다.
그리고 꼴통만 모아 놨다고 하지만 전투력만큼은 뛰어난 444분대원 중 유일하게 평범 이하의 실력을 갖춘 분대원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엔크리드와 싸워도 쥐어 터질 놈이었고.
"하암, 아침부터 왜요? 나 같은 고급 인력에게 이른 아침 기상은 고문이라고."
입을 찢어지게 벌리며 크라이스가 말했다.
눈곱도 떼지 않았고 얼굴에 물기 하나 묻히지 않았지만, 꽤 봐 줄 만한 얼굴이다.
남색에 관심 있는 놈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그런 외모다.
"물건 몇 개 구해 줘."
엔크리드의 말에 크라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 이럴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문이 들었다.
"연초 배웠어요? 아니면 술? 여자는 안 돼요. 아무리 나라도 이런 시기에는 못 데려온다고."
크라이스는 구하지 못하는 게 없는 부대 내 암거래상이었다.
"내가 여자를 구할 것 같아?"
"아니요.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쓰로잉 나이프 다섯 자루, 기름 먹인 가죽하고 큰 바늘, 사슴 가죽 장갑, 마지막으로 흰말꽃 열 송이 정도랑 백반(白礬) 한 주먹."
엔크리드는 가죽 부분을 말할 때 대강 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줬다.
성인 남성 몸통을 감쌀 정도의 크기였다.
"...당최 뭘 할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데요?"
"그래서 못 구해?"
크라이스는 잠시 엔크리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못 구하는 건 없죠. 대신 아무리 분대장이라고 공짜로는 안 돼요. 알죠?"
"얼만데?"
"은으로 열일곱 닢은 줘야겠어요."
사기꾼이로군.
쓰로잉 나이프 다섯 자루는 대장간에서 은화 한두 닢이면 살 거다.
물론 철값이 치솟으면 세 닢이 넘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랬다.
하물며 크라이스가 구해 오는 건 순수하게 강철을 넣어서 만든 물건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쓸 만한 칼은 구해 올 테지.
질 좋은 가죽이야 부르는 게 값이라지만, 유명한 공방으로 들어가는 가죽을 가져오는 것도 아닐 테고.
여기서 유일하게 금액이 들어가는 건 바늘과 사슴 가죽 장갑인데.
이건 확실히 아무리 조금 줘도 은화 세 닢은 줘야 한다.
흰말꽃은 뭐, 마을로 가면 몇 푼이면 구하는 거고.
백반도 근처에 가죽 공방이 있으면 그리 큰돈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다.
엔크리드도 이런 쪽에 눈이 밝은 편이지만, 따지진 않았다.
일단 여기는 부대 안, 즉 크라이스가 아니면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닌 열일곱 닢이란 애매한 가격 때문이다.
그게 아마도 크라이스가 정한 적정값일 테니.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침 먹고 나서 바로 받아 볼 수 있겠지?"
"그게 나보고 아침을 거르라는 의미인 건 알아요?"
"어차피 잘 챙겨 먹지도 않았잖아."
"헹, 그건 그렇죠. 근데 음, 제가 알기로 분대장은 이게 넉넉하지 않을 거란 말이죠?"
크라이스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지금은 없지."
봉급을 모을 때도 있지만, 최근에는 검을 새로 구한다고 다 썼다.
지금은 빈털터리가 맞았다.
전투가 끝나면 봉급이 나오겠지만, 그걸 지금 달라고 하면 탈영병 취급을 받을 것이다.
"씁, 이러면 곤란하다니까요."
크라이스의 말에 엔크리드는 미소를 보였다.
믿는 구석이 단단히 있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동화 다섯 닢만 빌려줘."
크라이스는 보통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엔크리드라면 얘기가 조금 달랐다.
'분대장이니까.'
그동안 봐 온 엔크리드는 허튼 짓거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아닌가.
크라이스가 동화 다섯 닢을 꺼내 건넸다.
엔크리드는 짤랑거리는 동전을 손에서 굴리며 바로 옆 막사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른 아침부터 판을 벌인 놈들이 보였다.
마지막 불침번과 아침잠보다 도박을 좋아하는 놈 서넛이 모인 주사위 판이었다.
엔크리드를 보며 놀란 눈들이 곧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문을 표했다.
"뭐야? 444분대장 나으리 아닌가."
"이른 아침부터 아주 열심이네."
크라이스가 그걸 보더니, 감탄했다. 그는 도박을 싫어했다. 사기꾼에게 걸려서 된통 털리는 것도 싫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기껏 번 돈을 운에 맡겨 불리거나 잃는다는 것 자체도 싫어했다.
불리면 좋지만, 한 번 그 맛을 보면 도박에 빠져들 것이고.
잃으면 손에 든 돈주머니가 허무하게 사라질 것 아닌가.
크라이스가 보기에 도박은 모자란 놈들이나 하는 놀이였다.
그런 자리에 엔크리드가 꼈다.
"나도 껴도 되나?"
"여길?"
옆 막사의 막번 불침번이다.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도박꾼 동료를 흘깃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어디나 호구는 환영받는 법이었다.
엔크리드가 들어가 쭈그려 앉으려니, 크라이스가 옷깃을 손으로 쥐었다.
"내 동화 다섯 닢을 여기에 버리려고요?"
눈곱은 꼈지만, 초롱초롱하고 큰 눈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여자 꽤 울렸겠어.'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크라이스의 손목을 잡아 밀었다.
"빌렸으면 이제 내 돈이지."
그리 말하고 엔크리드는 결국 자리를 차지했다.
모인 도박꾼들이 궁둥이를 움직여 자리를 넓혔다.
"주사위 놀음은 할 줄 아시고?"
나무통에 돼지 뼈로 깎아 만든 주사위를 굴리던 병사가 물었다.
"같은 수가 나오면 두 배, 적거나 높은 수에 걸면 건 만큼 주고. 맞지?"
어깨너머로 스치듯 봤지만, 백스물다섯 번을 봤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주사위는 총 세 개.
합은 18이다.
고로 9보다 높거나 낮은 숫자를 부르면 된다.
가운데 앉은 놈이 딜러다.
이쪽이 주사위를 굴리고 나머지가 거는 쪽이었다.
"그럼 첫판 가 봅시다."
아침 식사를 마련하기 전까지 잠깐 즐기는 판이다.
판돈은 크지 않았다.
최소 동화 다섯 닢, 최대 은화 두 닢.
엔크리드는 동화 다섯 닢을 걸었다.
"작은 수."
"큰 수."
"작은 수."
"작은 수."
"큰 수."
"큰 수."
"작은 수."
근 십 분도 되지 않아, 엔크리드의 손에는 은화 두 닢이 쥐어졌다.
주사위 게임의 묘미는 속도다.
그야말로 짧은 시간에 팍팍팍 치고 나가는 재미에 하는 놀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처음 엔크리드는 재미 삼아 나오는 숫자를 외웠다.
과연 주사위는 매일 같은 수가 나올 것인가.
반복된 오늘이지만, 자신 주변에 일어난 일은 미묘하게 달라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알고 있었다.
주사위의 눈은 항상 같다.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흘린 게 아니라 키스라도 갈기고 갔나 본데."
엔크리드의 손에 든 은화가 열 닢이 넘어가자 딜러를 맡은 병사가 말했다.
"사기 아니야?"
본래라면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병사가 할 말을 딜러가 했다.
"사기는 무슨, 오늘 운이 좀 좋네. 여신이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 같거든."
엔크리드는 의심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들도 따질 수 없었다.
주사위를 굴리는 건 딜러요.
짜고 친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했으니까.
하물며 중간부터는 은근히 엔크리드가 거는 쪽에 같이 걸어 이득을 보기도 했다.
"사기라니, 주사위 굴리는 건 네놈 손목이잖아."
"염병할 주문이라도 부리는 건가 했지."
"잘도 그러겠네."
"다른 날에는 미친 듯이 따도 계속했지? 운 나쁘다고 멈추기 없기다."
엔크리드 덕에 돈을 좀 만진 병사가 낄낄 웃었다.
딜러는 알았다며 몇 판 더 돌리다가 말했다.
"막판 하자고. 시간 없으니까."
어느새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손에서 은화 열 닢을 굴렸다.
동화 다섯 닢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됐다.
전부 딜러를 차지한 병사의 돈이었다.
"재밌었어. 막판인데 열 닢 받아 줄래? 털고 그만 가고 싶은데."
최대로 거는 액수는 본래 은화 다섯 닢이다.
그 말에 딜러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적중률을 보면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동수에 걸고 털고 갈게."
엔크리드는 상대가 뭐라 답하기 전에 이어 말했다.
주사위 세 개가 같은 수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주사위를 굴리는 병사도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했다.
그것도 실제 판에서는 한 번도 못 봤다.
혼자 장난질이나 치다가 본 게 전부였다.
고로 엔크리드는 제 말마따나 장난이었고, 번 은화를 다 토해 놓고 간다는 거였다. 적어도 그의 귀에는 그리 들렸다.
쿡.
뒤에서 크라이스가 엔크리드의 등을 찔렀다.
크라이스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미쳤어요?'
아니, 전혀.
엔크리드는 미치지 않았다.
"동수에 은화 열 닢."
"...좋아."
따그르르륵!
병사는 주사위를 돌렸고 바닥에 요란하게 내려놨다.
혹시나 살살 굴려서 생길 불상사를 대비해서다.
"보자고."
기대감 섞인 미소를 보인 딜러 병사가 주사위 통을 열었다.
"...와, 시발."
"행운의 여신이 깃들었네, 깃들었어."
"니미, 이게 말이 돼?"
모인 모두가 놀랐다.
엔크리드만 빼고.
삼 세 개.
주사위는 동수였다.
8. 뱀, 술, 꽃, 나이프.
더 뒈지기 싫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
엔크리드는 '오늘'을 반복하며 다른 공포를 느꼈다.
여기에 안주할까 봐, 오늘을 넘기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봐, 여기에 멈추고 싶은 욕구.
그 욕구가 엔크리드에게는 공포였다.
'내가 원했던 게 이거였나?'
오늘에 안주하는 건 도태된 삶이다.
나아갈 수 없는 삶이다.
내일을 바라는 건 인간의 당연한 심리.
하물며 엔크리드는 부족한 재능으로 내일을 꿈꾸던 인간이었다.
거기에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도 있었다.
'배울 건 다 배웠다.'
여기서 단련을 거듭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적다.
그렇다면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리라.
'살아남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럼 이 오늘이 끝나 버리는 걸까?
수없이 고민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모른다.
몰랐다. 살아남은 이후가 어떻게 될지.
'나아갈 수 있다면.'
나아가자.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삶 아닌가.
무엇보다 엔크리드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오늘을 반복해서 얻은 것으로 과연 내일을 볼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자의 마음가짐은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오늘 하루는 긴 하루가 될 것이다.
그동안 쌓아 둔 걸 다 활용해야 할 테니까.
* * *
"어떻게 한 거예요?"
"운."
"그게 운이란 말로 넘어갈 일이에요?"
천막을 나오자마자 크라이스가 평소보다 눈을 더 크게 뜨고 되물었다.
주사위를 굴린 딜러 친구는 얼이 빠졌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된다며 난리를 치지도 않았다.
주사위를 굴린 건 제 손이다.
덕분에 엔크리드는 유유히 일어나서 나올 수 있었다.
양심에 걸릴 일도 아니었다.
자신은 사기를 친 적이 없으므로.
그저 예언가 나부랭이를 흉내 내듯, 주사위가 토해 낼 모든 숫자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나중에 마을에서 맥주 한 잔 살게."
엔크리드 덕분에 한몫 잡은 병사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진짜 운이다. 나 도박에 재주 없어."
엔크리드가 걸음 방향을 돌리며 말했다. 크라이스가 바짝 쫓아왔다.
"그게 재주가 없는 거면 재주 있는 사람은 다 땅 밑에 묻혀 있을 겁니다."
"어쩌다 운이 따르기도 하는 거지."
"...운 두 번 따르면 주머니가 두둑하다 못해 터지겠는데요?"
걸으며 엔크리드는 은화 열일곱 닢을 건넸다.
짤랑.
은화가 부딪치는 소리에 크라이스가 주머니를 챙겨 들었다.
그걸 받은 크라이스는 '좋아요, 제가 알 바는 아니죠'라며 넘어갔다.
그러더니 대뜸 엔크리드를 빤히 보며 그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나 알았어요."
뭘?
엔크리드가 눈으로 되묻자.
배시시 웃으며 말을 잇는다.
"내일 온다는 사령관한테 작업 걸려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꽃을? 아니, 그럼 흰말꽃보다는 장미나 리시안셔스 같은 게 좋을 텐데요?"
도박은 그렇다 쳐도 구해 오라는 물건이 참 묘한 종류였나 보다.
"...되겠냐?"
이 새끼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걸까.
내일 새로운 중대 지휘관이 오는데 여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 여자가 온다고 하긴 했지.
그런데 꽃다발 하나 준다고 홀라당 넘어오겠냐.
시골 마을 처자한테도 안 먹힐 방법이다.
물론 준비물로 크라이스 같은 얼굴이 있으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그래도 안 되지 않을까? 잘해야 본전이고 못 하면 상관 모독으로 곧바로 즉결 처형일 것 같다.
"분대장도 꾸며 놓으면 꽤 괜찮은 얼굴이니까."
"물건 구해 달라고 할 때마다 이렇게 꼬치꼬치 다 물어보냐?"
지금부터 발에 땀 나도록 뛰어야 점심 전에 물건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눈으로 말하니, 크라이스가 알았다며 몸을 돌렸다.
크라이스는 부지런히 움직일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곤란하다. 몇 번 해 본 일이지만, 저 친구가 구해 오는 시간에 따라 엔크리드도 발에 땀 나도록 움직여야 할 테니.
그러니까 지금은 쉴 때다.
엔크리드는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잘 부순 보리와 밀 따위를 넣은 수프, 딱딱한 빵, 말린 고기가 아침이었다.
고기는 사흘에 한 번만 나온다.
마침 그날이 오늘이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고기는 구경도 못 해 봤을 테니까.
평소라면 침으로 녹여 먹을 빵을 수프에 부숴 넣었다.
적당히 걸쭉해진 국물을 입 안에 넣고 씹으니, 씹는 맛은 있었으나 아직 맹맹했다.
말린 고기를 뜯어내듯 찢어 넣고 섞은 후에야 간이 적당히 맞았다.
엔크리드는 꼭꼭 씹었다. 식사는 곧 움직일 활력이 된다.
실력 차이와 별개로 며칠을 굶은 병사와 든든히 먹은 병사는 전투력에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따뜻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뱃속에 안착했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니 그릇이 비었다.
"맛있수? 부대원의 노동을 착취시키고 먹는 맛이?"
렘이 다가와 투덜댔다.
"무척."
"안 가리고 먹으면 좋긴 하지. 내가 음식 가려 먹는 놈치고 오래 사는 놈 못 봤수다. 우리 분대에도 그런 놈 있지 않수."
"그런 것치고는 그 친구도 계속 잘 살아 돌아오는 것 같은데."
"이제 곧이우."
제 분대원을 향해 악담을 퍼붓던 렘은 곧 그릇을 챙겨 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히 그릇을 닦아야 할 시간이다.
멀건 수프에 빵과 말린 고기를 말아먹은 거로 든든히 배를 채운 뒤다.
엔크리드는 기름 먹인 헝겊을 꺼내 검을 정성스레 닦고 다시 마른 헝겊으로 또 닦았다.
새로 구한 검은 유명한 강철을 쓴 것도 아니고 이름난 장인이 만든 검은 아니지만, 꽤 쓸 만했다.
무게 중심도 괜찮고 칼날도 잘 섰다.
두툼한 천 갑옷이나 얇은 가죽 갑옷 따위는 그대로 베고 뚫을 만큼 날카로웠다.
검 손질을 끝내고 막사 앞에 나서니, 크라이스가 보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다가오는 걸 보며 엔크리드가 그를 불렀다.
"왕눈아."
크라이스가 손에 보따리 같은 걸 쥐고 다가왔다.
"여기요."
보따리는 당연하게도 엔크리드가 시킨 물건이었다.
받아 보니, 딱 기대한 대로였다.
적당히 불순물이 섞인 쓰로잉 나이프 다섯 자루.
질은 나쁘지만 기름은 제대로 먹인 가죽 뭉텅이와 큰 바늘 하나.
"사슴 가죽 장갑은 겨우 구했어요."
쓰로잉 나이프의 날을 손가락으로 비벼 보는데 크라이스가 말했다.
과연 그랬다.
장갑이 한 쌍이 아니라 왼손 한 짝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크라이스가 한 닢을 되돌려줬다.
"사슴 가죽 장갑은 두 닢으로 계산했거든요."
왕눈이 새끼, 돈을 참 밝힌다.
이미 아는 사실이다.
따지면 받을 수야 있겠지만, 그럼 시간을 써야 했다. 그럴 바에는 오늘 할 일에나 집중하는 게 나았고.
이것저것 하려면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흰말꽃은 말라비틀어진 걸 가져왔다.
"고백할 것도 아니라면서요? 싱싱한 놈은 못 구해요."
사기꾼 놈.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예상 안쪽이었으니까.
전장 한복판에서 어떤 미친 새끼가 생화를 열 송이나 구하나.
"대신 열두 송이고요."
그나마 양심은 있는 사기꾼이다.
"그리고 여기요."
크라이스가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을 열어 보니 백반이 들어 있었다.
아마 거래가 틀어지면 백반은 못 구했다고 강짜를 부리다가 나중에 겨우 구했다며 수습할 생각이었겠지.
속 보이는 짓거리지만, 엔크리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다 구했으니까.
"수고했다."
"근데 진짜 뭐 하시게요?"
크라이스는 이 성격 좋은 분대장이 무슨 짓을 할지 어지간히도 궁금했다.
"바느질하고 술이나 담글까 하는데."
그래서 엔크리드의 답에 고개를 모로 꺾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바느질? 술은 또 왜 담가?
"뭐, 알겠어요."
크라이스는 더 묻지 않고 떠났고, 엔크리드는 나이프를 허리춤에 잘 꽂아 둔 후에 나머지는 천막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 뒤 성큼성큼 걸었다.
목적지가 이미 정해진 발걸음이다.
쉬지 않고 걸어서 막사 외곽 쪽으로 향하자, 병사 하나가 걷는 엔크리드를 빤히 보더니 외쳤다.
"어이, 거기, 뭐야? 사사사분대장이네? 볼일 보러 가는 거면 거기는 가지 마."
"왜?"
"어제 거기서 오줌 갈기던 놈이 뱀에 물렸어. 독사야. 독한 놈은 아닌데, 종일 몸을 긁어 대고 난리야."
"급해. 후딱 싸고 나올게."
"난 말했다."
적극적으로 말릴 일은 아니다. 병사는 엔크리드를 그냥 보냈다.
'운이 어지간히 나쁘지 않고서야, 괜찮겠지.'
병사는 그리 생각하며 엔크리드를 외면했다.
엔크리드는 적당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막사 외곽, 용변을 보는 용도로 정한 구역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구덩이 몇 개와 큰 나무 몇 그루 사이로 마른 잎이 즐비했다.
엔크리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구역을 피해 백반을 뿌렸다.
그리고 풀잎이 없는 곳을 찾아 쪼그려 앉아,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그 끝을 쓰로잉 나이프 끝으로 다듬었다.
칼날을 톱 삼아 반복해서 나뭇가지를 긁어내기도 하고, 힘을 줘서 밖으로 칼날을 뿌리며 가지 끝을 가다듬었다.
몇 번의 칼질 끝에 나뭇가지의 끝이 좌우로 갈라져 끝이 쪼개진 창과 같아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지만, 속내는 달랐다.
엔크리드는 작업을 하면서도 마른 풀잎 사이를 주시했다.
나뭇가지 작업이 끝나고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스락거리며 풀잎이 움직였다.
뱀은 백반을 싫어한다. 한쪽에 백반을 뿌려 뒀으니, 뱀이 그쪽을 피해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뱀 사냥도 가끔 했던 일이었다.
괜찮은 독사를 잡으면 좋은 가격에 거래가 되곤 했으니.
그때 도시 주당에게 뱀을 팔며 이건 어디다 쓰냐고 물었더니, 그 술주정뱅이는 껄껄 웃으며 말했었다.
"뱀 술 안 먹어 봤지? 안 먹어 봤으면 말을 말아."
호쾌한 주정뱅이였다.
샤샤샥.
마른 잎을 헤치며 꿈틀꿈틀 움직이는 놈이 보였다.
갈색 몸통에 적당히 각진 대가리를 가진 놈이었다.
엔크리드는 나뭇가지 끝으로 목 부위를 눌렀다.
쿡.
이 단순한 동작에 배운 찌르기를 섞었다.
뱀은 피하지 못했다.
그리 잡은 뱀의 머리를 나이프 뒤로 후려쳐 기절시켰다.
'일단 한 마리.'
같은 작업을 몇 번 반복했다.
남은 백반을 몽땅 뿌린 뒤, 뱀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해가 머리 위를 채 넘어가기도 전에 끝났다.
엔크리드는 뱀 다섯 마리를 잡았다.
잡은 뱀을 한 마리씩 주둥이를 잡고 얇은 가죽을 댄 수통에 붙여 눌렀다.
놀라서 깬 뱀이 독샘에서 독을 줄줄 흘렸다.
그걸 다시 다섯 번 반복하고서 남은 뱀을 두꺼운 가죽 주머니 하나에 집어넣었다.
"변비야? 하도 안 나와서 진짜 뱀에 물렸나 확인하러 갈 참이었다고."
앞서 말했던 병사였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진짜 걱정 비슷한 걸 한 듯싶었다.
"덕분에 쾌변이었다."
엔크리드는 아무 말이나 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 * *
엔크리드가 있는 바로 뒤쪽 막사, 그쪽 분대장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삯바느질을 했다.
손재주가 괜찮았던 이 친구는 어머니의 바느질을 어깨너머로 배워서 하곤 했는데, 그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느질을 하면서 살 순 없다고 생각해 입대했다.
여기에 하나 더.
'술을 더럽게 좋아하는 것까지.'
엔크리드가 바느질 분대장에 대해 아는 내용이다.
엔크리드는 가죽 뭉텅이를 숙취에 시달리는 분대장 앞에 던졌다.
"볼일 있어?"
안색이 좋진 않지만, 이 친구의 바느질은 진짜 쓸 만했다.
이미 몇 번 해 본 일이다.
중대장한테 술 마신 걸 이른다고 위협해도 해 주긴 하지만, 그럼 바느질을 대충 한다.
"이거로 손이랑 무릎, 팔꿈치, 보호대 좀 만들어 줘."
"내가 왜?"
분대장이 인상을 썼다. 당연한 반응이다. 평소에는 딱히 교류도 없던 사이니까.
그렇다고 공들여 설득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지금 당장 착수해도 전투 전에 받는 게 아슬아슬하다.
"숨겨 둔 술 좀 있지?"
그 말에 안색이 변한 놈이 눈썹을 씰룩였다.
성질이 난 멧돼지 같았다. 실제로 멧돼지가 연상되는 외모이기도 했다.
이런 외모로 섬세한 바느질 솜씨라니.
"이거로 담가서 먹으면 맛 죽여줄 거다."
말하며 잡아 온 뱀 보따리를 슬며시 내려놨다.
꿈틀거리며 가죽 위로 뱀들이 춤을 췄다. 광란의 댄스다.
"뱀이네."
안을 보지도 않고 놈이 말했다.
"뱀 술 마셔 봤냐?"
그 말에 분대장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 죽여주는 거 알지?"
엔크리드는 안 마셔 봤다. 하지만 호쾌한 주정뱅이 덕에 안다.
"안 마셔 보면 모르는 맛인 거 알지?"
재차 말하니, 분대장 놈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뱀 줄게. 이거 좀 만들어 줘."
"내가 바느질 잘하는 건 어떻게 알았냐?"
"엊그제 중대장이 말하는 거 들었다."
그런 적 없다. 이 친구가 취해서 직접 말해 준 내용이다.
뭐,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염병, 입 싼 새끼."
그리 투덜거리면서도 바늘을 잡아챈다. 정당한 거래였다.
"그럼 부탁한다."
"씹, 그래, 알겠다고."
동료 병사의 눈이 꿈틀거리는 뱀 주머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지간히 뱀 술 좋아하네.
엔크리드는 막사 안으로 돌아와 남은 걸 챙겨 렘과 대련하던 곳으로 움직였다.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이럴 땐 444분대라는 게 좋았다. 따돌림받는 역할도 겸하는 분대였으니까.
오가는 사람이 드문 작은 동산 뒤.
엔크리드는 사슴 가죽 장갑을 낀 채, 흰말꽃을 돌로 찧어서 짓이겼다. 흰색의 꽃잎이 암녹색으로 물들 때까지 그 짓을 반복한 뒤, 뱀독을 섞었다.
본래 이 뱀의 독은 간지러움을 유발하는 선에서 그친다. 하지만 흰말꽃과 섞이면 달랐다.
일흔일곱 번째의 오늘에서 이 독에 당했고, 마비된 엔크리드 앞에서 낄낄거리던 적병 놈이 있었다.
뭐가 좋다고 이거 만드는 법을 줄줄이 말해 주던지.
그래서 몇 번 만들어 봤더니, 꽤 괜찮았다.
꽃을 으깨고 독을 섞고 편편한 돌 위에 만들어진 찐득거리는 녹색 액체를 투척 단검을 뽑아 칼날에 발랐다.
나이프가 햇볕을 반짝이며 먹먹한 암녹색 빛을 반사했다.
'이거로 준비는 끝.'
땅! 땅!
"각 소대 집합!"
때마침 병영 안쪽에서 시끄러운 외침이 들렸다.
반복한 오늘을 통해 엔크리드는 잘 아는 일이다.
전투 명령 하달 소집이었다.
9. 하루하루가 다른 남자
전투 명령 하달이라고 해서 크게 전략을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게 전부지.
엔크리드는 명령 하달을 듣자마자, 뒤쪽 막사로 향했다.
지금쯤 아프다는 핑계로 분대장 소집에 분대원을 대신 보낸 바느질의 귀재가 물건을 다 만들었을 터였다.
"너 실 안 줬어."
과연 그랬다.
단단한 가죽을 엮어서 만든 손과 무릎, 팔꿈치 보호대가 그럴듯한 모습으로 엔크리드를 반겼다.
"실?"
시치미를 떼자, 술 좋아하는 분대장이 콧김을 뿜었다.
"가죽만 주고 가면 어쩌란 거냐?"
어쩌긴.
'네가 알아서 모포 실을 풀고 잘 꼬아서 만들겠지.'
이것도 몇 번 해 본 일이다.
실 따위를 안 줘도, 꿈틀거리는 선물을 받은 이 친구는 알아서 잘해 줬다.
"깜빡했네."
"전혀 깜빡한 눈치가 아닌데?"
숙취가 남아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눈치는 있었다.
"아니야. 진짜 잊었다."
"씁."
안 믿는 눈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엔크리드는 주섬주섬 가죽 보호대를 챙겼다.
꼼꼼한 바느질 솜씨다. 엔크리드가 직접 만든 적도 있지만, 확실히 이 친구가 만드는 게 질이 좋았다.
흡족했다.
"속는 기분이야."
"고생했다."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고 막사로 돌아왔다.
엔크리드는 돌아오자마자 오후에 전투라는 말만 남기곤 제자리에 앉아 바삐 손을 놀렸다.
스릉.
엔크리드는 검을 꺼내 사슴 가죽 장갑을 양손에 쥐고 슥슥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잘랐다.
그렇게 반쯤 찢다시피 자른 가죽을 길게 늘어뜨린 뒤, 뚝딱뚝딱 쓰로잉 나이프의 검집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죽의 끝을 검으로 여러 갈래로 길게 잘라 매듭을 만들곤 허리띠처럼 찼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었다.
엔크리드에게는 수십 번 반복한 일이니, 익숙했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그걸 본 렘이 고개를 어깨너머로 쑥 빼서 물었다.
"뭐하슈? 작은 칼 있구만, 왜 그거로 그러는 거유?"
"칼날이 잘 드는지 시험 삼아서."
"손재주도 좋네. 칼 솜씨도 그만큼 좋아야 할 텐데 말이유."
이 새끼는 꼭 한마디씩 말로 사람을 찔렀다.
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다.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할 때도 대수롭지 않았던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기껏 구해다 줬더니, 그걸 찢어서 겨우 칼집을 만들어요?"
반대쪽 어깨 너머에서 크라이스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을까?'
머리통이 고장 나서 자신을 진짜 엄마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끔찍하네.'
"다 썼으니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어디서 뭐 잘못 주워 먹은 거 아니죠?"
"그러고 보니, 오늘 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더니만. 무슨 일 있수?"
"일은 무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검날을 다시 한번 더 닦고 엔크리드는 조용히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곤 그동안 수없이 겪었던 전장을 떠올렸다.
일어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백스물다섯 번을 반복한 전장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되뇌었다.
잡다한 준비는 살아남기 위한 것이지.
검술 향상을 위한 게 아니다.
'전장은 검술 훈련소가 아니니까.'
검술 실력이 떨어져도, 긴 시간 살아남은 경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엔크리드를 살려 준 게 과연 검이었을까?
아니었다.
상황, 운, 준비, 침착함.
모든 걸 버무려서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찬가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엔크리드는 오늘을 벗어나기로 했다.
* * *
"돌격!"
아군의 외침이 들린다.
엔크리드는 곧 전장의 한복판으로 내몰렸다.
당황하진 않았다.
흥분해서 뛰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어 눈으로는 전장을 보고 입으로는 호흡을 고른다.
후우.
짧지만, 차분한 호흡의 끝.
적군이 보였다. 아군도 보였다.
내달리는 적군, 흘러가는 아군.
스릉.
검을 뽑는다.
그리고 날아드는 칼날.
엔크리드는 왼손에 든 방패로 창날을 쳐 냈다.
퉁!
몇 번이고 반복한 작업이다. 실수는 없었다.
창날을 쳐 내고 한 걸음 앞으로.
"으잇!"
당황한 적군의 뒤꿈치 안으로 오른발을 쑤셔 넣고 무릎을 굽히며 충격에 대비한다.
모든 게 한 호흡이었다.
약속 대련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발이 걸린 상대가 뒤로 자빠졌다.
쿵!
뒤통수부터 떨어진 놈이 눈을 깜빡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겠지.
창을 찌르고 물러나려고 했는데 발이 턱- 하고 걸려 넘어진 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넘어진 상대의 곁을 지나며 발끝으로 턱을 찍어 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에서 치아 조각과 핏물이 흘러나온다.
기절이다.
죽일 필요조차 못 느꼈다.
나아가며 왼팔을 들었다.
땅-! 까가가각!
방패를 후린 몽둥이가 비켜나며 엔크리드의 팔꿈치를 훑었다.
드드득!
가시를 박아 둔 몽둥이였다.
부상은 없다. 팔꿈치에 감아 둔 가죽 방어구가 제 역할을 했으니.
"이익!"
적군이 이를 악문다. 얼굴의 반만 가리는 투구 밑으로 턱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보였다.
이놈은 제대로 상대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지난 오늘 중에서 이 녀석에게 왼팔을 당한 날이 많았다.
손잡이를 쥐고 왼발을 앞으로.
발렌 식 발검술이다.
상대와 눈이 마주친다. 검을 뽑으면 한바탕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상대도 알고 엔크리드도 안다.
둘의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다.
검과 몽둥이를 맞대고 싸우기로.
상대의 눈이 엔크리드의 오른손을 주시했다.
스릉.
검이 채 한 마디가 뽑히기도 전, 엔크리드의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
허리춤에 꽂아 둔 투척 단검이 허공을 날았다.
몽둥이를 든 상대가 당황해서 팔을 들었다.
푹- 하고 칼날이 적군의 팔에 꽂혔다.
갬비슨(천 갑옷)을 입었다곤 해도 팔 쪽에는 천을 두껍게 두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럼 움직임에 제약을 주니까.
고로 칼날은 충분히 살가죽에 도달해 찔렀을 것이다.
"이 비겁한 놈!"
적군이 말했다.
싸움에 비겁하고 치사한 게 어디 있나.
엔크리드는 말없이 도로 검을 착- 하고 집어넣었다.
발렌 식 발검술이란 본래 검을 뽑는 척하며 단검이나 돌을 던지는 것.
"이-노옴!"
분노한 가시 몽둥이 적군이 이마에 핏대를 세운다.
그럼 약효가 더 빨리 퍼질 뿐이었다.
놈이 달려들다 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비 독이 제대로 발동했다.
쿵 하고 코부터 땅에 꼬라박았다.
그러곤 꺽꺽거리며 숨을 거칠게 뱉었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유유히 지나쳤다.
다음 상대는 불알을 걷어찬 뒤, 옆으로 밀어 버렸고.
그다음은 조용히 걸어가 뒤에서 등을 떠밀었다.
밀려서 당황한 적군의 머리를 아군의 망치가 후려쳤다.
빡!
투구를 써도 둔기에 당하면 머리는 터진다.
하물며 철제 투구도 아니고 가죽 투구다.
엔크리드가 딱히 대단한 활약을 보인 건 아니었다.
그저 순간순간 필요한 움직임과 행동을 보였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주변 아군의 자잘한 승리로 돌아왔다.
"덕분에 살았다."
얼굴도 모르는 놈이 말했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친다.
딱히 대수로울 일도 아니었으니까.
"신세를 졌군."
"사사사분대장? 운이야, 실력이야? 하여간 나중에 술 한잔 사지."
"시발, 죽을 뻔했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 죽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장.
그 중심에 야수의 심장이 있다는 건 당연했다.
'고요하게.'
그리고 또 차분하게.
야수의 심장은 함부로 요동치지 않는다.
야성을 품었기에 모든 걸 태연히 바라볼 수 있다.
전장 한복판에서 엔크리드는 심장의 울림을 느끼며 다시 걸었다.
수십 번을 넘게 반복한 전장.
그렇다고 긴장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익숙해질수록 변수에 당한다.'
오늘이 반복된다고 해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건 아니었다.
엔크리드가 어떻게 대응하냐에 따라 상대의 행동도 변한다.
그러므로 천천히 걷고, 주변 상황을 눈에 담는 걸 우선으로 삼는다.
'이쯤에서.'
슥.
밑에서 누군가 단검을 긋는다.
싸우다 넘어진 참에 다리를 노린 참신한 공격이다.
'이거에도 당했었지.'
몇 번은 피하려고도 했다.
그러다 더 쉬운 방법을 찾았다.
화살을 막는 것과 같다.
피할 수 없다면 막으면 된다.
턱.
가죽 각반을 때린 단검은 엔크리드의 정강이를 베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
멍청한 적군의 외마디 말이 그의 유언 대신이었다.
엔크리드가 방패를 두른 쇠테로 바닥에 엎드린 놈의 등판을 찍었다.
콱!
"꺽!"
비명은 짧고 작다.
"우아아아!"
그 대신 전장의 함성이 귀를 울릴 뿐.
엔크리드의 분전이 전장의 향방을 바꿀 순 없었다.
오롯이 그 주변에 놓인 이들만 조금 편해졌을 뿐.
'전부를 구할 순 없다.'
이곳은 전장, 죽어 나가는 숫자가 수십 또는 백이 넘어가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전부를 살리겠다고 덤비는 건 아둔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후아, 다 덤벼! 이 새끼들아!"
외침의 주인은 다른 분대의 창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엔크리드가 걸으며 잡은 적군 숫자가 다섯이 넘는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저놈은 사실 수십 번 죽었다.
엔크리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오늘도 죽었을 거다.
정강이를 베이고 바닥을 구르다가 뒈지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허리를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게 첫 번째.'
수십 번을 반복한 전투다.
엔크리드는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다.
다치지 않고 전방에 합류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으며.
'다친 데 없고.'
조금 전 막 목표를 달성했다.
두 번째는.
'난전 속에서 아는 얼굴을 찾는 것.'
물론 난전에서도 부상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 그 변태 찌르기 적병과 제대로 붙어 볼 만할 것이다.
백 번이 넘게 전장을 구르며 생각한 건 딱 하나였다.
'만전의 상태로 싸워 보고 싶다.'
과연 자신이 오늘을 반복해서 익히고 배우고 훈련한 건, 통할 것인가.
자비를 선호하는 변태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의 노력으로 오늘은 넘길 수 있을 것인가.
두근.
심장이 뛴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담대함과는 별개로.
'오늘을 넘긴다.'
목표를 오롯이 세웠기에, 목적이 분명하기에.
엔크리드의 심장은 뛰었다.
다시 전장, 걷는다. 때로는 뛴다.
"우아아!"
"시발, 살려 줘."
"여어어엄벼어어엉!"
"개자식들아!"
욕설과 함성의 이중주 속.
엔크리드는 사방으로 고개를 휙휙 돌렸다.
'몸을 숙이고 눈치 보는 놈.'
찾는 놈이다. 어렵지 않게 보였다.
적군 사이로 슬그머니 숨어다니는 덩치가 보였다.
'일단 하나.'
찌르기 적병과 마주하기 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보였다.
'뒤통수 몽둥이.'
나름대로 애칭까지 지워 준 놈이다.
살려 두면 번번이 싸움에서 엔크리드의 뒤통수를 후리는 자식이다.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물론, 엔크리드는 운명 따윈 믿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다 개소리지.'
검이 부러졌다면 부러진 검날로라도.
무기가 없다면 주먹으로라도.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라도.
재능으로 안 된다면.
'이렇게라도 기어 올라가 보겠다.'
과연 기사란 어떤 자들인가.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무력이란 무엇인가.
이룰 수 없는 소망은 망상이 된다.
다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건 곧 꿈이 되는 법이다.
엔크리드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후."
숨을 내뱉고.
툭.
단검 하나를 꺼내 팔을 뒤로 힘껏 당긴다.
혼탁한 전장의 한가운데.
단검의 무게를 손끝으로 느낀다. 표적을 눈에 담고 일직선으로 가상의 선을 그린다.
어느 날 술집에서 벌어진 단검 던지기 대회 우승자 놈이 가르쳐 준 투척술이다.
이것도 오늘을 반복하며 수십 번을 연습했다.
그대로 왼발을 살짝 들었다가 떼며 허리를 돌려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다.
마지막은 손끝 감각에 집중하며 손목 스냅을 넣는다.
쌕!
단검이 엔크리드가 그린 가상의 선을 따라 날았다.
"윽!"
날아간 단검이 몽둥이 놈의 어깨쯤에 꽂혔다.
갑옷이 허술했기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떤 개자식이."
놈이 욕설을 뱉는다. 사방을 둘러본다. 굳이 눈을 마주쳐 줄 필요는 없었다.
신관도 없고 해독제도 없다면 얌전히 드러누워야 할 테니.
곧 놈은 쓰러졌고,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유유히 두 번째 놈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투척 도끼를 잘 던지는 놈이다.
이 자식도 번번이 도끼를 던져 훼방을 놨다.
미리 조져야 결투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신이시여!"
독실한 아군 병사의 외침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살기 어린 말이 들린다.
엔크리드는 주변을 살피면서도 정확히 원하는 것을 찾아 걸었다.
자잘한 공격은 방패로 막고.
빈틈이 보이면 발을 걸어 준다.
검면으로 머리를 때린다. 멍청하게 투구를 눌러 쓴 놈은 머리 위에서 검을 내리친다.
그것만으로도 엔크리드의 주변에 선 아군들은 한결 편해졌다.
'남은 단검은 세 자루.'
투척 도끼를 던지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매번 있는 곳이 바뀐단 말이지.'
그래도 대강 이 일대는 맞다.
'일단 벨부터.'
매의 눈깔인지 하는 놈한테 머리통이 뚫릴 아군을 구할 차례다.
'여기서 우측으로.'
아군의 움직임을 보며 걷는다.
걸으며 몇 번의 공격을 막다가 망가진 방패를 버렸다.
이건 몇 번이고 반복했는데도 항상 망가졌다.
'이쯤에.'
백 번을 넘게 반복한 전장, 매번 바뀐다고 해도 어느 정도 눈에 익고 몸에 익은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방패다.
엔크리드가 방패 모서리를 발로 밟았다.
박힌 돌 위에 있던 방패가 퉁- 하고 허공으로 솟았다.
그걸 턱하고 잡아챈다. 묘기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허리를 굽혀 줍는 것보다 편했다.
"...거, 재주 좋네."
우연히 이걸 본 아군 병사의 목소리였다.
"뒤에 적."
몇 번의 오늘에서 자신을 넋 놓고 보다가 뒈지는 친구다.
죽지 말라고 말해 주니.
휙 하고 몸을 돌린다. 그러자 창을 들고 오던 적군과 마주쳤다.
"시벌, 쥐새끼 같은 놈이."
곧 둘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아군이 이긴다.
한 스무 번은 지켜본 싸움이다.
그러므로 볼 필요도 없다.
눈에 익다 못해 익숙한 전장 위.
엔크리드는 머릿속으로 구역을 나누며 지도를 그렸다.
'벨부터 가자.'
걸음을 옮긴다.
"억!"
넘어지는 벨.
탁.
화살을 막는 방패.
"으어, 뭐야, 나 살았네?"
"대가리 들지 말고 기어서 돌아가라. 화살 날아온다."
내 조언을 벨은 충실히 따랐다.
반복된 오늘 중에서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벨의 머리를 뚫은 게 수십 번이다.
그러니 기어서 가는 게 맞다.
"...뭐요? 행운의 여신이랑 몰래 연애라도 하기로 한 거요?"
렘이다.
하여간 야만인 새끼.
독실한 여신의 신자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생채기 하나 없네?"
최상의 컨디션으로 찌르기 놈과 마주치기.
그게 오늘 엔크리드의 최종 목표다.
"가서 할 일이나 하지?"
"그럴 거요. 그럴 건데, 오늘 뭔가 달라 보이는데?"
"난 하루하루가 다른 남자다."
반복된 오늘 중 같은 날은 없었다. 매일 성장하는 날이었기에.
"...약을 처먹어야 할 것 같수, 분대장은."
그 말을 끝으로 렘이 떠났다.
'조금 전에는 너무 재수가 없었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나, 진실이 그러한 걸.
마침 엔크리드의 눈에 투척 도끼를 즐겨 던지는 놈이 보였다.
허리에 덜렁거리는 도끼를 찬 적군이다.
기다려서 뭐 하나.
엔크리드는 독이 묻은 단검을 뽑았다.
10. 찔렀다.
"꺽."
투척 도끼를 돈 놈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옆구리에 독이 묻은 단검이 꽂히고 목구멍에는 창날이 꽂혔다.
"끄르르르륵."
피거품을 물며 눈에서 빛이 스러진다.
그거로 끝.
엔크리드는 놈의 눈을 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우아아아!"
바로 옆에 있던 아군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앞에 있던 적군도 같이 괴성을 내지른다.
"크아아!"
둘 다 덩치가 컸다. 쾅 하고 부딪치는 게 마차가 맞돌진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이 서로를 맞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뒤로 물러났다.
몸을 보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백이십여 번 동안 목숨을 던져 가며 배운 교훈이 어디 한두 개일까.
몸을 보전하는 법.
그건 최대한 싸우지 않는 거다.
엔크리드는 몸을 사렸다.
"뒈져!"
"시이발, 새끼."
기합 대신 욕설을 뱉고 달려드는 칼과 창, 도끼, 몽둥이.
"내 동생 건드리지 마라. 시방새야."
죽어가는 병사가 남기는 유언.
"지랄 마. 그렇게 말해도 네 동생 책임 안 진다."
동료의 죽음을 듣고 태연한 척하는 병사.
"죽엇! 죽엇!"
전장의 열기에 이성을 잃은 신병.
"저 미친 새끼."
"놔둬, 광전사 흉내라도 내나 보지."
날뛰는 신병을 보며 제 부대원을 챙기는 베테랑.
"내 이름은 바르-, 꺽!"
겉멋이 들어 이름을 밝히다 뒈지는 적병.
찌른 창을 빼며 그를 비웃는 아군.
팍.
땅을 찍은 발끝이 흙먼지를 피어 올린다.
내리쬐는 햇살에 먼지가 둥실 떠다니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 푸왁 하고 피를 쏟아 내는 적병이 있었고.
다시 그 옆으로는 넘어져 머리통이 깨진 아군이 있었다.
살점이 바닥에 흩어졌고 피가 땅을 적셨다.
아무리 몸을 사린다고 해도.
전장의 한복판에서 아무 짓도 안 하고 살아남을 순 없다.
'흡, 후우우우.'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쉰다.
엔크리드는 호흡을 조절했다.
호흡을 다지기 무섭게 흙먼지 사이로 날아드는 창날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방패를 느슨하게 잡으며 창날을 막았다.
따-앙.
방패를 때린 창날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손잡이를 느슨하게 쥔 덕에 충격을 흘릴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몽둥이가 대각선으로 날아왔다.
엔크리드는 앞으로 웅크리며 몽둥이를 피하고 몽둥이를 든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쿵 하고 상대의 가슴팍을 어깨로 민다. 넘어지며 단검을 뽑아 그대로 허벅지 어림을 찔렀다.
뿌드득!
두꺼운 천 따위를 찢고 들어간 칼날이 상대의 허벅지에 긴 상처를 냈다.
"이 개새끼가!"
적군이 외치며 엔크리드를 밀쳤다.
밀리는 힘을 이용해 몸의 중심을 잡은 엔크리드는 검을 뽑아 횡으로 휘둘렀다.
허벅지 부상은 움직임을 불편하게 만든다. 주춤한 상대가 피하지 못하고 칼날에 목덜미를 맞았다.
팍!
반쯤 들어간 칼날이다. 엔크리드는 힘을 주어 칼날을 당겼다.
드드드득.
근육과 신경, 힘줄, 뼈를 자른 칼날이 빠져나온다.
피가 왈칵 쏟아져 흐르기 시작하자, 병사는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당연하게도 저런 상처를 손바닥으로 막는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엔크리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방패를 때린 창병은 다른 이가 막을 것임을 알기에.
"염병할 새끼야!"
벨이었다. 괜히 구한 게 아니었다. 구해 두면 계속 자신 주변을 돌며 뒤를 봐준다.
의리가 있는 친구다.
땅! 땅!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엔크리드는 죽인 상대에게서 관심을 끊고 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웠다.
그러곤 돌아서서 곧바로 던졌다.
호각으로 싸우던 중 돌멩이에 등판을 맞은 적군이 멈칫했고.
빡!
벨이 창대를 휘둘러 머리통을 갈겼다.
훌륭한 일격이었다.
"빚은 갚은 것 같은데?"
벨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목숨 빚을 뭐 이렇게 쉽게 갚으려고 하나?
"반만 갚은 것 같기도 하고."
벨이 피 묻은 손으로 투구를 벅벅 긁었다.
그렇다고 시원하겠나.
벨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한 번 자빠진 뒤로는 적당히 몸을 사릴 줄도 알게 됐다.
전장의 흐름에 따라 엔크리드도 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살려 줘. 끄르륵."
애원하다가 피거품을 무는 병사가 보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몇 번이고 죽는 걸 본 주사위 도박꾼.
"넌 못 살리겠더라."
엔크리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없이 시도하긴 했는데 살리는 건 불가능하더라고.
그렇게 발을 디딘 전장.
다가오는 적병 사이에서 자비를 외치는 변태를 찾는다.
어렵지 않았다.
찾은 순간, 엔크리드는 마지막 남은 단검을 뽑고 달리는 박자에 맞춰 던졌다.
탁, 훙, 휙!
어지간한 놈이라면 피하지 못할 타이밍의 투척 단검이 허공에 실선을 그렸다.
땅!
놈은 몸을 비틀어 어깨로 단검을 받아 냈다.
비스듬히 들어간 단검은 견갑에 맞아 튕겨 나갔다.
반사적인 행동임에도 정답에 가까운 방어술이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다.
단검을 막자마자 던진 위치를 파악해서 이쪽을 바라본다?
거듭 생각하는 거지만, 저 찌르기 변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놈이 달려든다. 탁탁하고 땅을 박차는 걸음마다 피 묻은 흙이 뒤로 튀었다.
몇 걸음 되지도 않은 거리였다.
그러니까, 반복된 오늘에서 깨달은 모든 걸 시험할 차례였다.
그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좋았다.
고로 준비는 끝났다.
놈이 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었고. 엔크리드는 방패를 들었다.
빠-악!
기름 먹인 나무를 때리는 칼날에서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검술의 기본? 힘이지."
검술 교관 중 하나가 한 말이다.
"기술로 힘을 이겨? 헹, 웃기는 소리, 그럼 프록을 상대로 기술만 사용해서 이겨 보라지?"
"거인족을 상대하면서 흘리기 따위로 지랄하다가 죽은 놈이 어디 한둘인 줄 아나."
"검술의 기본은 근력이다. 근력, 그러니까 굴러."
그 선생 덕분에 몸은 제대로 만들 수 있었다.
방패를 든 엔크리드는 쉽게 뒤로 밀리지 않았다.
힘만큼은 상대와 비슷했다.
"흥!"
찌르기 변태가 코웃음을 쳤다.
방패로 시야가 가려진 사이, 놈이 발목을 걷어찼다.
엔크리드는 정강이 보호대로 놈의 발끝을 막았다.
철판을 댄 부츠는 그 자체로 흉기다.
퍽.
정강이 쪽에서 짜릿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부러지진 않았다.
그럼 된 거다.
방패를 밖으로 밀어내며 검을 뽑아 아래에서 위로.
훙!
찌르기 변태는 예상했다는 듯, 이미 검의 범위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곤 물러난 거리보다 더 깊숙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을 휘두른 틈을 노린 돌격이었다.
"핫!"
엔크리드는 기합을 내지르며 힘을 잔뜩 준 채 방패를 둔기처럼 휘둘렀다.
달려들던 찌르기 변태가 턱을 바짝 당겼다.
빡!
머리통을 맞은 놈이 옆으로 넘어졌다.
재차 칼을 휘두르려던 엔크리드가 뒤로 물러났다.
훙.
놈은 바닥에 넘어진 채로 단검을 뽑아 사선으로 휘둘렀다.
그대로 달려들었다면 정강이 보호대 위쪽에 칼침을 맞았을 것이다.
짧은 틈에 보호대 위치를 보고 빈틈을 찾은 거다.
세상은 저런 걸 재능이라 할 것이다.
엔크리드는 저걸 하기 위해 수없이 죽고 죽으며 야수의 심장이란 걸 배워야 했지만.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전장에서 수없이 굴러 본 능숙함은 없다.
엔크리드의 눈에도 그건 보였다. 상대는 신병 또는 전장 경험이 적은 병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무작정 돌진하지 않겠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자신의 찌르기에 당할 뻔했었다.
경험이 전무하나 가진 바 재능이 찬란하다.
그렇다고 부럽진 않았다.
'잡을 수 있어.'
할 수 있다. 자신감이 붙는다. 그동안의 오늘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한다.
죽음과 함께한 노력이 대가를 받을 때였다.
"이 새끼가."
독기 어린 눈이 보였다.
놈이 주섬주섬 일어났고, 그사이 엔크리드와 놈 사이로 다른 아군이 끼어들었다.
찌르기 변태는 주저 없이 몸을 수그리더니, 검을 쥔 손으로 아군의 정강이를 때렸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
아군이 끼어들면 언제나 저 패턴이다.
그 뒤 단검으로 아군의 목을 찌르는 것까지가 한 동작이다.
물 흐르듯이 유연한 공격 패턴.
이미 아는 패턴이었다.
찌르기 변태가 뽑은 단검을 쑤신다.
놀란 아군 병사는 아무것도 못 하고 눈만 부릅떴다.
그렇게 칼날이 제 목을 뚫기 직전.
훅 하고 병사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스걱, 드드득.
칼날이 목을 뚫는 대신 뺨을 찌르고 관자놀이를 훑으며 투구를 긁어냈다.
"흡!"
놀란 아군이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말도 못 하고 숨만 헐떡였다.
검 대신 아군 목덜미를 쥐었던 손을 쥐었다 펴며 엔크리드가 병사 앞에 섰다.
"뒤로."
이건 자신의 싸움이다.
저건 자신의 상대였다.
자신이 성취한 걸 확인해야 할 대상이었다.
두근.
심장이 뛴다.
엔크리드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당장 이 오늘을 넘어서는 게 맞는지부터.
상대를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무작정 피어나는 호승심.
눈앞의 상대를 넘어서야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이유 없는 직감까지.
"안 봐준다."
찌르기 변태가 말했다.
봐라, 이 얼마나 같잖은 짓거리인지.
재능과 별개로 경험이 적다는 방증이다.
진심으로 진지하게 할 거였다면.
'말 대신 빈틈을 보였어야지.'
맞았으니, 허술한 척하다가 역으로 공격했어야 했다.
이기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했었다.
그래서, 엔크리드가 대신 그렇게 했다.
"후욱, 후욱."
일부러 숨을 거칠게 내쉬고.
상대 손짓 하나에 움찔거리고.
어떤 순간에는 빨갛게 보였던 상대의 눈은 밋밋한 갈색이었다.
그 갈색 눈이 빛난다.
찌르기 변태가 성큼 다가오더니, 칼을 그었다.
훙!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쿵.
심장이 뛴다. 당황하거나 눈을 감는 일은 없다.
야수의 심장은 언제나 담대하니.
"끝까지 보고 슉 피하면 돼."
렘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놀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다.
보였다. 발목에 힘을 주며 몸을 튼다.
쌩하고 칼날이 어깨 어림을 스쳤다.
피한 직후, 칼을 횡으로 그었다.
팅.
상대는 단검을 세웠다.
엔크리드의 검과 놈의 단검이 십자 모양을 그렸다.
티디디디딩!
그 상태에서 힘을 줘 그으니 칼날이 마찰하며 불똥이 튀었다.
놈은 단검을 비스듬히 비틀어 칼날을 옆으로 흘렸다.
엔크리드는 검을 내지르다 말고 방패를 들어 몸에 붙였다.
땅!
칼날이 방패 모서리를 때렸다.
이쪽에서도 불똥이 튀었다.
찌르기 변태가 어느새 검을 도로 당겨 휘두른 거다.
한두 번 당해 봤을까.
패턴은 눈에 익었다.
휙 하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수직으로 들어 바닥을 찍었다.
자세를 낮게 해서 달려들던 놈이 멈췄다.
푹 하고 피 먹은 땅에 검 끝이 박히고.
놈은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고개만 들었다.
눈에 어린 살기가 살벌했다.
"잔재주를."
말과 함께 어금니를 까드득 깨문다.
잔재주도 실력이다. 자식아.
엔크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끝으로 흙을 찍어 상대에게 뿌렸다.
팍!
"웃!"
놈이 잽싸게 팔뚝으로 얼굴을 막았다.
이걸 또 반사신경으로 막네.
한두 번 본 장면은 아니긴 하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 새끼!"
승기를 잡으면 허세를 부리며 자비를 논하고.
비열한 희열을 눈에 담지만.
수세에 몰리면 금세 흥분한다.
성격은 진즉에 파악했다.
일어나며 놈이 재차 달려들었다.
깡! 딱! 빡!
방패로 연신 몰아치는 검격을 막자, 곧 방패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 몰아치면서 어느 틈에 간격을 좁힌 놈이 단검을 들고 찔렀다.
노리는 건 옆구리.
이전에는 이거에 당해서 헐떡이다가 죽었다.
엔크리드는 팔꿈치를 들어 세웠다.
팍!
단단한 가죽 보호구에 막힌 칼날이다.
그와 동시에 엔크리드는 앞으로 이마를 쑥 내밀었다.
발렌 식 용병검, 근접기.
박치기다.
빡!
"억!"
있는 힘껏 들이받았더니,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평소라면 이 타이밍에 뒤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놈이 있겠지만.
오늘은 없다.
투척 도끼를 던지는 놈도 없고.
그 둘 대신 벨이 있지.
"씹, 돕는다!"
벨의 외침에 내가 말했다.
"방해하는 놈이나 막아."
'내 상대라니까.'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꾹 참고 균형을 잡자, 독이 바짝 오른 상대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이 미친 새끼가."
'그래, 내 머리가 어지러우면 너도 어지럽겠지.'
현기증은 금세 가셨다.
"버둥거리며 죽는 걸 구경해 주마."
찌르기 변태가 자세를 취한다. 한 발은 앞으로, 다른 발은 뒤로.
돌격하는 기병과도 같은 자세.
저 자세에서부터 시작되는 건, 화살과도 같은 빠르기의 찌르기.
긴장감이 심장을 옥죄고.
옥죈 심장은 호흡으로 풀어낸다.
'담대하게.'
반복된 오늘로 재능이란 벽을 넘을 수 있는가.
그 답을 찾을 때다.
놈이 움직였다.
그저 점이었다. 그렇게만 보였다.
몇 번이고 겪었지만, 여전했다.
점은 곧 빛이 되고 칼날이 되어 엔크리드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팽.
칼날이 옆구리를 스쳤다.
자세를 보고 노리는 곳을 예상하고, 칼날의 움직임에 맞춰 피한다.
엔크리드의 몸은 그의 생각대로 충실히 따랐다.
옆구리가 스치며 화끈한 통증이 뒤따랐다.
무시했다.
대신 왼발을 앞으로 검을 든 손은 뒤로.
오른쪽 팔꿈치를 힘껏 당긴다. 시위에 올려진 화살처럼.
왼발에 힘을 주며 무게 중심을 옮긴다.
보면서 배웠고.
찔리면서 배웠으며.
렘과의 대련으로 완성했다.
툭.
나아갈 때는 힘보다는 균형에 중점을 두고.
칼날에는 의지를 담는다.
'찌른다.'
굳건한 의지가 곧 검에 담기니.
바짝 당긴 근육을 해방하며 검을 내질렀다.
퍽!
숫돌로 연신 갈아둔 검 끝이 변태의 심장 어림을 찔렀다.
가죽과 두꺼운 천 갑옷을 뚫어 내고.
그 심장에 닿는다.
마치 검과 손과 팔이 하나가 된 것과 같은 충족감.
노력의 대가로 성취감을 만끽할 순간.
"야!"
누군가 외쳤고.
엔크리드는 외침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기도 전에.
뻑!
왼쪽 옆구리부터 시작된 무지막지한 충격을 느끼며 몸이 허공에 뜨는 걸 느꼈다.
'어?'
이건 뭐지?
백스물다섯 번의 '오늘'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프록!"
벨인지 다른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외침이 들렸고.
그게 엔크리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는 기절했다.
11. 프록
"개쉬벌."
렘은 침을 퉤 뱉으면서 도끼로 묘기를 부리듯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매의 발톱인지 눈깔인지 하는 놈을 조금 전에 놓쳤다.
큰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것처럼 찝찝했다.
'사냥에 실패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활잡이 놈은 눈치가 빨랐고, 발도 빨랐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냅다 토꼈다.
튀면서 날린 화살이 매섭기도 했고.
렘은 왼쪽 옆구리 부근을 스쳤던 화살의 흔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상처는 없다. 다만, 완벽하게 피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뿐.
뒤가 구린 건 구린 거고.
적 진형을 비스듬하게 찌르듯 들어가서 돌격한 판이었다.
렘은 발을 물려 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새끼 뭐야?"
"죽여!"
주변에 아군이 거의 없었다.
조금 깊숙이 들어온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 신경 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렘은 투덜대거나 욕설, 기합을 내뱉는 대신 양손에 든 도끼를 휘둘렀다.
오른손에 든 도끼는 중간에 적이 쓰던 걸 주운 거라 무게 중심이 형편없었지만.
이 또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안 쓸 거면 던지면 되지, 뭐.
훙, 푸칵!
정면을 가로막은 놈의 턱과 목을 왼손에 든 도끼로 한 번에 가르자, 꾸물거리던 피가 솟구친다. 피 분수가 확 뿜어졌다.
피 분사를 슬쩍 피한 렘이 오른손을 힘껏 휘둘렀다.
손에 들린 도끼가 허공을 가른다.
훙-
투척용이 아닌데도 도끼는 세차게 날아가서 표적에 적중했다.
뻑!
도끼가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며 박혀 들었다.
렘은 그대로 돌진하듯 적진을 흔든 후에 아군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우리 분대장은 안 뒈지고 살아 있으려나.'
쉽게 죽을 인간은 아니다.
렘도 살다 살다 그런 악바리는 처음 봤으니까.
'부족원 중에서도 그런 인간은 없었는데.'
아마도 슬슬 눈치 보면서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을 거다.
여기서 죽긴 아까운 인간이다.
그렇다고 전장이 퍽 어울리는 인간도 아니지만.
'야수의 심장이 좀 몸에 붙으면 괜찮겠지만, 재능이 참 아쉽단 말이지.'
보고 있기 안쓰러워 부족의 비전 중 일부를 가르치기도 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스승 노릇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잖은가.
눈앞에서 뒈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인간.
자기 눈 밖에서 뒈지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리 본대로 돌아온 뒤다.
"망나니짓을 하고 성과도 없었군."
작센이었다.
444분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
분대장 엔크리드를 제외하면 사이가 좋은 이들이 없다는 거다.
그런 분대가 용케 굴러가는 걸 보면, 분대장한테 설명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게 분명할지도 모르겠다.
"응? 죽고 싶다고 말 거는 거냐? 도끼질에 머리통이 쪼개지고 싶다고?"
"활잡이를 놓친 덕분에 전장이 개판이다."
이건 확실히 시비였다.
굳이 멀리서 전장 전체를 아우르지 않아도 느껴지는 건 있는 법.
이건 활잡이 때문이 아니라, 프록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프록 전사가 튀어나와서 전장을 헤집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렘과는 마주치지 않았고.
"지랄은. 뒈지기 싫으면 말 걸지 마라."
"미친 야만인."
둘은 그대로 서로를 외면했다.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었다.
일상처럼 서로를 비난한 게 전부였다.
444분대는 딱히 진형을 유지하지 않는다.
알아서 싸운다.
진형을 유지하지 않아도, 딱히 모여 있지 않아도 눈에 띄는 놈들이니까.
'왕눈이 새끼만 빼고.'
정작 렘 자신도 적진을 헤집는 바람에 이리저리 주목을 좀 받았을 거다.
작센이야 소리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게 특기인 놈이고.
저 멀리, 다른 분대원 몇이 보였다.
다들 알아서 활약 중이었다.
나른한 태도로 검을 휘두르는 놈.
경직된 채로 사람을 패 죽이는 놈.
누구 하나 평범한 놈이 없었다.
물론 그중 제일은 분대장이다.
평범 이하의 재능으로 아득바득 살아가는 걸 보라.
저걸 누가 '평범'하다고 할까.
'혹시 모르니까.'
렘은 분대장을 찾아서 지키기로 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뒤나 슬쩍 봐줄 셈이었다.
여전히 죽기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하물며 이쪽 대륙에서는 내 비전을 처음 배운 놈이잖아.'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리며 움직인다. 곧 렘의 눈에 엔크리드가 보였다.
'음?'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적군 하나가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달려드는 적군의 발을 걸고 도낏자루로 턱주가리를 올려친다.
맞은 놈이 부러진 치아를 뱉었다.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리며 팔꿈치를 횡으로 꽂는다.
뻑. 우득!
투구 위를 때리자, 두꺼운 장작 부러지는 소리 비슷한 게 났다.
한 방에 목뼈가 부러진 거였다.
렘은 휘두른 오른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도 시선은 고정했다.
아니, 덤비는 놈을 상대하면서도 아까부터 시선은 분대장을 향해 있었다.
'능숙해?'
평소에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 능숙함이, 먼저 나가서 돕는 게 아니라 지켜보게 했다.
질 것 같지 않았다. 하물며 직감에 가까운 현실이 되어 가는 중 아닌가.
꽤 하는 적병 하나를 상대로 싸우는 중이었는데.
전에 없는 침착함과 담대함이 엿보였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지?
"나도 신기하다."
옆, 또 작센이다. 왜 자꾸 동선이 겹치나 싶더니.
이 새끼도 분대장 뒤를 봐주러 온 건가?
"오늘 쭉 지켜봤지. 네놈이 헛짓거리하는 동안."
"그래서?"
"행운의 여신이랑 동거라도 하는 줄 알았다."
"뭐?"
"운이 따랐다고."
고작 운? 지금 모습에서 운만 논할 순 없을 것 같은데?
"실력도 몰라보게 좋아졌고."
작센은 다른 분대와는 희희낙락 잘 지내지만, 자신과는 사이가 나빴다.
뭐, 이 분대원 전부가 다 그런 편이니까.
가령 지금 나눈 대화가 이 분대에 소속된 이후 가장 길게 나눈 평범한 대화였을 정도로.
그만큼 놀랐다는 거겠지.
작센이 놀란 만큼 렘도 놀랐다.
게다가, 이후 렘은 그보다 더 놀라운 걸 두 개나 봤다.
하나는 적의 찌르기를 피한 뒤, 완벽에 가까운 자세로 검을 내지르는 엔크리드였다.
"좋수다!"
렘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고.
작센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한 노력.
분대장이 얼마나 피를 토하며 검을 쥐는지 알기에, 절로 응원하는 마음이 일었다.
재능이란 게 참 우습다.
한순간에 몇 개의 계단을 넘어설 때도 있으니까.
렘도 작센도 둘 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분대장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진 않았다.
저 작자도 그렇게 단숨에 몇 개의 계단을 넘어선 거로 보였으니까.
'이겼다.'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자신이 상대한다면 몇 번의 도끼질이면 충분하겠지만.
분대장은 열 번이면 열 번 다 졌을 상대.
그런데 이겼다. 손쉬운 승리로 보이진 않았다.
자잘한 상처가 눈에 띄었고.
왼손에 든 방패는 쪼개진 폐품이 됐다.
거기에 손등과 무릎 따위에 찬 가죽 보호대가 찢겨 너덜너덜해졌으니.
숨을 거칠게 내쉬는 것으로 보아, 호흡도 나갔다.
'야수의 심장.'
렘은 한눈에 분대장의 상태를 파악했다.
담대함과 침착함.
그 기반이 된 건 자신이 알려 준 비전 덕이었을 거다.
'그걸 이만큼이나?'
놀라울 정도로 숙달된 모습이었다.
렘은 모든 걸 뒤로하고 일단 농담이나 던질 셈이었다.
"프록!"
그때, 누군가 외쳤다. 분대장의 바로 뒤에 있던 다른 병사다.
이름이 뭐였더라? 벨이었던가?
자신의 이름과 어감이 비슷한 이름이라 기억에 남았다.
그의 말대로 프록이 검은 그림자가 되어 내달리는 게 보였다.
프록, 개구리 인간이다.
얼굴은 개구리의 그것과 닮았고.
피부 또한 그렇다.
그들의 피부는 기름이 맺힌 듯 미끌미끌해서 날붙이든 둔기든 전부 흘려 버린다.
그들을 죽이려면 심장을 꿰뚫거나 마법이나 주술 따위로 태워야 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프록은 인간보다 우월한 근력, 전투 감각을 지닌 타고난 전투 종족이니까.
손에 든 무기가 무엇이든 며칠이면 금세 능숙하게 쓴다는 전투 특화종.
프록은 땅과 수평이 되어 날 듯이 뛰더니, 발바닥으로 분대장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 일격으로 끝낼 생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 발차기에 옆으로 훙 날아가는 분대장을 보곤 쿵 하고 제자리에 떨어져 자세를 잡는다.
뒤로 팔을 뻗는가 싶더니, 그 손에는 창대가 잡혀 있었다.
놔두면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렘은 검은 그림자를 보자마자 땅을 찼다.
쾅.
폭음과 함께 땅이 파인다. 발 구르기에 힘을 실은 덕에 흙바닥이 작은 분수처럼 솟았다.
짧은 틈, 렘의 몸이 프록의 옆에 도달한다.
훙!
문답무용, 말을 걸 것도 없이 도끼를 길게 휘둘렀다.
위에서 밑으로 채찍처럼 휘어지며 어깨와 팔에서 도끼날까지 힘을 전달-
그러자 프록은 창을 던지는 대신 기가 막힌 묘기를 보였다.
내던지는 자세에서 오른발을 옆으로 빼더니, 창대를 나무 막대 튕기듯 위로 휘둘렀다.
자세를 바꾼 것도, 창대를 휘두르는 것도 전부 한순간이었다.
꽝!
도끼와 창대가 만났다.
찌-잉 하는 충격이 둘을 중심으로 퍼졌다.
"그륵, 방해꾼이냐? 못생긴 인간?"
"염병할 개구리 새끼야, 저 인간 우리 분대장이거든."
"...분대장이 분대원보다 약한 게 맞아?"
프록은 한순간에 렘의 실력을 알아봤다.
대쉬, 도끼질, 판단력.
프록은 타고난 전투 종족이고.
전투력만큼 뛰어난 게 있다면 안목이었다.
그들의 툭 튀어나와 데굴데굴 구르는 눈은 한눈에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곤 하니까.
재능 판독자의 재능을 타고난 종이란 거였다.
프록은 데굴데굴 눈을 굴리더니, 곧 뒤로 물러났다.
"됐다. 흥분은 가라앉혔으니까."
"뭐 이 새끼야?"
"못생긴 인간아, 저 인간이 내가 아는 인간의 '그것'을 꿰뚫었단 말이다. 그래서 순간 흥분했지 뭐냐. 그래도 내가 가르친 놈인데, 씁, 하여간 이제 됐다고. 여기서 목숨 걸고 싸우긴 좀 그렇다."
프록의 안목은 사람의 재능을 보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의 전투 감각은 한순간에 유불리를 파악한다.
렘이 생각하기에 꼭 상대가 불리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좋다.
푼돈 받아 가며 프록과 싸우라니.
손해 보는 싸움이다.
상대가 하는 말이 십분 이해도 갔다.
프록은 심장만 안 뚫리면 사지도 재생한다. 그 덕분인지, 이들은 심장이란 단어에 예민하다.
심장이란 단어도 안 쓰고.
옆에서 심장이 뚫려 죽는 걸 보면 이성을 잃기도 한다.
광전사가 된 프록은 정말 살벌한 기세를 뿜기에.
어느 정도 단련되지 않은 프록은 애초에 전장에 서지도 않는다.
렘은 아는 것들을 곱씹었다.
'염병, 나도 여기가 이제 더 익숙한가 보네.'
프록 따위의 정보를 이리 줄줄 외고 다니는 걸 보면, 이쪽 대륙 생활이 몸에 밸 만큼 밴 거겠지.
프록이 제 호심갑을 두드렸다.
오로지 심장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 호심갑(護心鉀),
하트 아머라고도 부르는 물건이다.
저걸 차고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절차를 밟고 나온 프록임에 분명했다.
프록의 도시는 정련되지 않은 칼은 부러뜨릴지언정 내보내지 않는다고 하니까.
호심갑은 프록의 신분 증명패 같은 거였다.
"또 보자. 못생긴 인간아."
근데 저건 왜 자꾸 못생겼다고 지랄일까.
프록은 보석을 좋아하며, 심미안이 독특하다.
그들은 잘생긴 인간을 선호했다.
"죽이기 아까운 얼굴이긴 했어."
프록이 혀를 휘릭 내밀며 말했다. 긴 혀가 파리를 잡아먹는 것처럼 튀어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저게 웃는 얼굴일 것이다.
그는, 아니, 그녀는 분대장이 있는 쪽을 힐끗 보며 말했고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여자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프록의 특징이다.
인간을 보는 눈과 달리 자기들끼리 짝짓기할 때의 기준은 또 다르다고 하던데.
어째서인지 예쁘고 잘생긴 인간을 좋아한다.
뭐, 그건 렘이 알 바가 아니었다.
"살았냐?"
작센이 분대장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옆구리 한 방으로 갈비뼈에 금이 갔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그래, 팔을 붙여 막았지."
훌륭하다. 가르친 보람이 있을 정도로.
타격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막았다는 건.
야수의 심장 덕일 거니까.
렘은 어쩐지 뿌듯했다.
"맞는 순간의 충격 때문에 머리가 흔들린 것 같군. 죽진 않을 것 같지만, 이대로 놔두면 죽을 수도 있겠지."
"전장의 열기도 한풀 꺾였네. 업어라. 데려가자."
"네가 업어라. 길은 내가 열 테니."
"...넌 진짜 언제 내 도끼에 머리통 찍힌다."
"너야말로 등에 꽂힐 비수나 조심하시지."
렘이 콧김을 훅 내뿜었지만, 싸움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래, 어쨌든 분대장이 활약했으니.
그거로 됐다.
렘이 엔크리드를 업었다.
작센은 그 앞에서 검과 방패로 슬슬 길을 열었다.
겉만 보면 딱히 뛰어난 실력 같진 않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것.
제 실력의 반의반도 안 보이고 길을 여는 거다.
'음흉한 들고양이 같은 새끼.'
렘은 속으로 작센을 욕하며 걸었다.
그의 등 뒤에 업힌 분대장은 잠이라도 든 것처럼 쌕쌕 숨을 내쉴 뿐이었다.
12. 이틀
프록은 자신의 눈에 담긴 장면을 되새겼다.
'이길 줄 알았는데.'
자신이 가르치기도 했고 재능도 꽤 있던 놈이다.
성격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거야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니까.
찌르기를 중점적으로 배운 병사.
재능이 꽤 쓸 만했던 놈.
고작 이런 소소한 전장에서 죽을 놈은 아니었다.
놔뒀다면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의 실력은 됐을 텐데.
프록은 병사가 죽은 이유를 떠올렸다.
'경험이 일천해서?'
아니지, 이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키운 병사가 한둘인가.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놈이 아니다.
'상대가 나빠서?'
고로 운이 좋지 않았다는 거다. 행운의 여신에게 외면당했다.
프록은 그륵그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운도 실력이니까.'
아군 진지로 들어서자, 부관이 다가왔다.
"한참 찾았습니다. 장군."
"어, 그래?"
"적지에 다녀오신 겁니까?"
"그냥 놀이 삼아 나갔다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거기'를 찔려 죽은 놈을 봤어."
프록에게 심장은 금칙어다.
옆에서 그게 찔려 죽는 것만 봐도 질색한다.
그런데 그걸 말하며 웃는 프록이라니.
부관은 장군의 머리통에 벌레가 있지는 않나 의심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부관은 의심하지 않았다.
경험 많은 프록은 심장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눈앞의 프록 장군은 노련한 군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심장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뱉을 만큼.
그러니 심장이 뚫려 죽는 걸 보고 웃을 수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장 뚫려 죽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걸 봤을 때, 이 프록은 웃을 수도 있다.
"재밌는 걸 보셨나 봅니다."
"뭐, 그냥, 이상하게 흥미가 가는 놈."
아군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진즉에 데려왔을 테니까.
프록은 싱겁게 말하며 저벅저벅 걸었다.
프록의 발바닥 가죽은 두껍다. 부츠조차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너무 미끄러운 탓에 프록 중에는 가끔 발바닥에 못을 심는 놈들도 있었다.
다만, 프록 장군은 발바닥에 못 따위를 심는 프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타입이었다.
훌륭한 감각과 적당한 훈련이 동반된다면.
미끄러운 발바닥 또한 무기가 되니까.
'찌르기를 그대로 흉내 냈다.'
재능의 영역은 아니었다. 프록의 눈은 상대가 익힌 기술의 정도를 파악한다.
프록 장군은 적의 병사가 찌르는 걸 봤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수없이 담금질하고 또 담금질한 기술.'
배웠다기보다는 목숨 걸고 익힌 기술에 가깝다.
재능이 아닌 무지막지한 노력의 영역.
'재능은 일천했으니까.'
운이 수십, 수백 번이 겹친다면 안 될 일도 아니다.
눈앞에서 찌르기를 수없이 보고도 살아남는다면, 저런 움직임도 가능하겠지.
다른 건 다 개판인데, 찌르기 하나만큼은 봐 줄 만했다.
근데 이게 말이 되나?
'그따위 실력으로?'
번번이 전장에서 살아남아?
목숨 걸고 배웠다는 건,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는 걸 증명한다.
분명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수없이 부딪치고 깨짐으로써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안 된다.
그러니 흥미가 생긴다.
'다음에 또 보면 좋겠지만.'
프록 장군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행운의 여신은 불공평하다. 그녀는 편애주의자다.
누군가에게 운을 몰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운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평생의 운을 다 써 버렸겠지.'
또 볼 일은 없다.
그게 오늘 죽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흥이 돋아 발로 걷어찼지만, 그걸 어찌어찌 막았으니까.
거기에 마지막에 그를 지키러 온 두 놈을 보니, 지금 전장에서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게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자기보다 뛰어난 상대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덤비면 미약한 재능으로도 실력은 늘겠지만.
목숨이 수백 개는 필요할 테니까.
"장군."
"밥 먹자."
프록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쪽에 관한 관심을 접었다.
이제는 다른 일에 집중할 때다.
즉, 밥이나 먹고.
전략을 수립할 때였다.
장군의 말에 금발의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 * *
뱃사공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앉은 곳이 나룻배 위임을 자각했다.
'꿈?'
이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꽤 오래된 기억이었다. 언제였지?
'처음 다시 깨어났을 때.'
입 없는 뱃사공.
호기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아련한 기억을 떠올려 깨운다.
'그때는.'
개꿈이라고 생각했었다. 꿈에서 만난 뱃사공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용케 하루를 넘겼네?"
뱃사공이 말한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엔크리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듣는 것만이 여기서 허락된 전부인 듯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네."
뱃사공이 노래하듯 말했다. 실제로 음률과 박자가 섞인 말이었다.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오감을 비롯해 무엇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갑갑하고 답답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꿈이라면 손에서 막 주문도 나가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꿈이지만, 꿈이 아닌 거다.
그걸 깨달은 엔크리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듣는 것뿐임을 알았다.
"계속해서 버틸 수 있니? 그럴 수 있겠니? 계속해서 네 앞을 가로막을 건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까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넌 아직 내 이름도 들을 수 없다."
뱃사공을 바라봤다. 검은 장막 위로 흐릿하게 상이 맺혔다.
새벽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이 눈앞을 가로막은 듯했다.
그만큼 흐릿했다.
다 검다. 처음에는 입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네가 들을 수 있는 건 내 변덕, 그리고 호의지."
말하고 킥킥 웃는다. 웃는 게 보여서 아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아이야,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넌 벗어날 수 없단다. 네 앞을 막는 '벽'은 계속 있을 거란다. 그게 네 운명이 될 것이고."
벽이란 단어는 이상하게 들렸다.
실제로 말한 건 다른데, 벽이라고 들린 것 같았다.
당최 이게 뭔지.
"너 살아남을 수 있겠니?"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당연한 말을."
어? 말이 나오네?
의문을 가질 것도 없었다.
상대가 더 놀란 것 같았다.
"너...."
뱃사공이 뭐라 속삭였지만, 금세 정신이 아득해졌다.
풍덩.
나룻배가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물 깊은 곳에 빠졌다.
물 위, 이슬 너머로 맺힌 검은 덩어리가 말을, 아니 의지를 전했다.
"이건 기억에 안 남을 거다. 하지만."
피식피식.
뱃사공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진짜 재밌는 애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 깊은 곳에 빠지며 정신을 잃는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깊은 심연에 빠져들었다.
* * *
"...이 전장의 영웅은 누구?"
"사이프러스!"
"이 전장의 주인은 누구?"
"사이프러스!"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건 누구?"
"사이프러스!"
"판결을 내리는 건 누구!"
노랫소리였다. 경쾌한 음률, 굵은 목소리, 박자가 딱 맞는 그런 노래.
'군가?'
아니, 군가는 아니다.
이 부대에 소속된 뒤로 군가 몇 개를 배웠지만, 이런 건 없었다.
여기서 배운 건 군가라기보다는 박자만 있는 기합 같은 거였다.
우리는 이긴다!
지지 않는 태양의 가호를 받아!
주신의 힘이 깃들어!
뭐, 이런 종류다. 음률 따윈 없고 악이나 지르며 내치는 외침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음률이 있고 박자가 살아 있다.
귀에 익은 노래이기도 했다.
'음유시인의 노래.'
음유시인도 다 같은 종류는 아니다.
개중에는 한쪽 편에 서서 군대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종군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사이프러스 찬양가 따위를 만들어 부르고 싶은 음유시인이 어디 있으려고.
하물며 저 작자는 그 사이프러스라는 기사를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살아났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렘이 보였다.
옆구리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손을 들어 만지려고 하자, 렘이 툭 그 손을 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부러지진 않았으니 걱정 마슈. 대신 머리통이 한 번 제대로 흔들렸다고 합디다. 자, 이거 몇 개요?"
렘이 손가락 몇 개를 폈다 접으며 흔들었다.
"엿이나 처먹어."
엔크리드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오늘'이 끝났다.
그 상황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사납다.
렘이 하는 농지거리를 받아 주기 어려웠다.
"봐, 정신이 나간 것 같다니까. 나 렘이유, 분대장의 영원의 단짝."
"미친 새끼."
"날 잊은 거유? 이러면 너무 섭하지."
엔크리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늘은 넘겼다.
그럼 하루가 지나갔다는 거고.
정신이 산만하다. 꿈이 너무 난잡했다.
'기억 못 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너무도 또렷이 남아 있다.
까만 물, 나룻배, 눈코입이 없는 뱃사공.
그가 한 말도 전부 기억에 남았다.
조금 흐릿한 느낌이라, 먼 과거의 일 같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기억력 하나는 좋은 편이었다.
엔크리드는 전부를 기억했다.
"안 잊었다. 귀족 사냥꾼."
한때 렘의 별명이었던 걸 읊어 주자.
"쉿,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수."
그제야 농지거리가 멈췄다. 그리고 눈으로 힐난한다. 그 얘기는 왜 꺼내냐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정신을 다잡았다.
일단.
"나 어떻게 된 거냐?"
그제야 제대로 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죽은 병사, 몰라보게 늘어난 실력, 그리고 프록.
'개구리가 끼어들었다?'
용병질만 몇 년째지만, 프록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물론 프록에게 맞은 것도.
갈비뼈가 몽땅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전장에서 프록을 적으로 만난다면?
"튀어."
"숨어."
"뒈져."
노련한 용병 셋은 각기 다른 답을 내놨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였다.
튀거나 숨지 못하면 뒈진다는 것.
프록은 그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다.
전투 종족이라는 게 다 그렇다.
거인도, 용인도, 요정도.
어떤 종도 인간보다는 우월한 능력을 타고났다.
하지만 기사급으로 성장하는 건 인간이 가장 많다.
그게 인간이 이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이유겠지.
"그 뒤에 내가 '직접' 업어서 전장에서 뛰쳐나왔지. 그야말로 험로였소. 죽을 뻔했지."
진짜 위험했다면 이렇게 말할 리 없었다.
"신세를 졌군."
"그걸 알면 설거지 당번 열 번쯤은 그냥 해 줄 수 있겠수다."
이 새끼는 진짜.
엔크리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끝났으면 가라고 했는데도 렘은 쉬이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웃는 낯 그대로다.
"혼자 연습한 거요? 나 안 보는 데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니.
"심장이 무르익었던데?"
음?
"내가 가르친 건데 못 알아볼까 봐?"
'아!'
엔크리드는 렘이 자신을 지켜봤다는 걸 알았다.
하긴 보고 있었으니, 적기에 도와줄 수 있었겠지.
"어쩌다 보니까. 죽을 고비 몇 번 넘기니까 뭔지 알겠더라고."
이미 그럴듯한 핑계야 수십 번을 생각했다.
그중 제일 그럴듯한 말이었다.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실이기도 했다.
약간 축소한 것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지 않고 진짜 뒈졌다고 말할 순 없지 않나.
"잘했수다."
렘이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푹 쉬쇼. 몸이 회복되어야 다음이 있지."
엔크리드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의무 막사였다.
부상자가 모인 곳.
일어나 볼까?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한쪽에 앉은 병사가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됩니다. 무리하면 덧나요. 머리가 많이 흔들렸어요."
일개 사병한테 군의관이라도 다녀간 듯싶었다.
일개 사병 따위야, 다치면 동료 중에 약초 좀 볼 줄 아는 놈이 있으면 다행인 거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뒈지는 일도 다반사인데.
'용케 의무 막사까지 왔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중에 알아보면 그만이다.
그것보다는.
'오늘을 넘겼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는 게 중요하지.
천막 입구 쪽을 보니,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햇빛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횃불의 빛, 그와 함께 오가는 그림자.
음유시인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영웅은 누구!"
"사이프러스!"
후창으로 병사 무리가 외치는 소리도 함께다.
오늘을 넘겼고 다음 날을 살았다.
그런데 오전과 오후를 몽땅 기절한 채로 보내고 저녁에나 깨어난 듯싶었다.
"하루를 넘긴 겁니까?"
대기하던 의무병에게 물으니.
"하루라니, 이틀째요."
충격이 컸구나.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어쨌든 오늘을 넘긴 게 중요했다.
그 찌르기 병사를 이겼다.
실력으로 넘었다.
이후 엔크리드는 뱃사공에 관해 생각했다.
그가 한 말을 떠올리고 곱씹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복될 거라고 했으니까.
그러므로.
'죽으면 오늘은 다시 반복된다.'
뱃사공은 마치 벌이라도 받으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게 왜 벌이지?'
엔크리드에게 그건 형벌이 아니라, 상이었다.
13. 복기
이틀을 내리 기절한 뒤에도 엔크리드는 반나절을 더 잤다.
깨어나 보니, 눈앞에 빵과 수프 따위가 놓여 있었다.
빵과 수프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눈을 반쯤 열린 천막 입구로 돌렸다. 새벽인 듯했다.
사람이 오가는 소리도 안 났고, 횃대도 몇 개 안 세워 뒀는지 막사 입구로 들어오는 빛도 아까보다 훨씬 적었다.
이 막사 안에 있던 모두가 다 자고 있었고.
엔크리드는 빵으로 손을 뻗었다.
'팔은 무리 없이 움직이고.'
엔크리드는 손을 뻗은 김에 아예 몸을 반쯤 틀어서 일어나려고 했다.
찌릿.
그러자 옆구리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뒤통수까지 저릿저릿할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이 정도면.'
렘이 부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의 판단으로도 그랬다.
머리가 흔들려서 기절했다고도 했지만, 다행히도 머리통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어지럽지도 않았고 눈도 코도 귀도 다 멀쩡했다.
푹.
찢은 빵을 식은 수프에 찍어서 입에 쑥 넣었다.
'혀도 멀쩡하네.'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이조차도 맛있다고 느꼈다.
밀가루가 주는 은근한 단맛에 혀가 반응했다. 뭘 넣고 끓였는지 수프는 맹물보다 조금 간이 있는 정도였으나 빈속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걸쭉한 수프와 빵이 제대로 된 식당에서 나온 메뉴라도 되는 양, 엔크리드는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천천히 삼켰다.
'기절한 뒤에 급히 먹으면 속이 뒤집힌다.'
경험으로 아는 거다.
본래라면 의무 막사를 지키는 병사가 해 줘야 할 얘기지만.
저녁나절에 본 그 병사는 만사가 귀찮아 보였다.
애초에 의무 막사를 지키는 병사라니, 그게 필요한 병과인가?
'뒷배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사지 멀쩡한 놈이 여기서 다친 병사를 지키는 일이나 할까.
속을 채우고 나서 억지로 앉았다.
먹자마자 누우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
다쳤다면 일단 잘 먹고 잘 쉬어야 하는데.
잘 먹는 일에는 먹은 걸 제대로 소화하는 것도 포함이었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엔크리드는 천막 입구의 흔들리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빛은 흔들리는 횃대를 보고 있으나, 정작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했다.
반복된 하루, 오늘, 결국 넘어선 그날.
엔크리드는 그 '오늘'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꿈에서도 나올 만큼 그 순간을 되새겼다.
찌르기 자체만 보자면 훌륭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더없이 깨끗한 일격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싸움을 끌어간 것도 나쁘지 않았어.'
발렌 식 용병검의 도움이 컸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한 오늘을 통해 단련한 덕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잘했다고 할 순 없었다.
'어설펐어.'
수없이 그 순간을 되새긴 결과다.
막사 앞을 누군가 지나갔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횃대 앞을 지나가는 병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늘어진 그림자는 곧 엔크리드의 상상 속에서 찌르기 변태가 됐다.
'내가 찔렀을 때.'
만약 상대가 피했다면?
그림자가 찌르기를 피한다. 피한 뒤, 검을 휙 돌려 벤다.
검날이 너무도 쉽게 엔크리드 역할을 한 그림자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그럼 죽는 건 나.'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퍽이나.
'부족했다.'
상대가 조금만 영리했다면, 조금만 싸울 줄 알았다면.
아주 약간의 경험만 더 쌓았다면.
최소한 다음 전장까지만 살아남았다면.
'아니, 너무 나갔다.'
이건 비약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검을 들고 싸우던 그림자는 상상의 산물, 생각을 털어 내자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이미 일어난 일에 신경을 껐다.
'그랬다면 따위를 하느니, 다음 스텝을 생각하자.'
렘은 전심전력으로 찌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 공격을 그렇게 할 순 없을 터였다.
그래서 머리를 굴렸다.
찌르기를 보여 주는 건 한 번.
그전에는 계속해서 상대의 속을 긁는다.
도발에 빠진 상대가 찌르기를 시도하면 역공.
'찌르기 한 번에 전부 걸었다.'
실패하면 죽는 찌르기.
그게 과연 옳은가.
싸움을 그런 식으로 이끌면 안 된다. 그건 엔크리드도 안다.
만약 안 됐다고 새로운 오늘을 맞이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찌르기가 안 먹혔다면 운에 기대야 했을까?'
아니지, 그럴 순 없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운이 아니라 실력.
엔크리드는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는 최선이라고 했다.
궁리한다고 해서 자괴감에 휩싸인 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되새기고 부족했던 것과 잘한 것을 나누는 작업이다.
전투나 대련 후에 언제나 해 왔던 대로.
"만약 목숨 반 개쯤 걸고 싸워서 살아남았다면, 그 싸움은 네 재산이 될 거다. 엔키."
늙은 검사는 한적한 해안 도시에서 애들이나 가르치는 검술 선생이었다.
실력만 보자면 대도시는커녕 작은 상업 도시에도 이름 날리기 부끄러운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에게만은 아주 훌륭한 선생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밥을 먹을 작정이라면 전투가 끝난 뒤, 그 전투에서 얻은 모든 걸 소화하고 싸고 다시 소화해라. 그게 네가 살 길일 테니."
늙은 선생이 직접 경험하고 걸어온 길일 것이다.
그는 왼쪽 발을 절었고.
전신에 칼자국이 가득했으니까.
그야말로 몸을 굴려 가며 얻어 낸 교훈.
그 교관은 수업료도 많이 받아먹었다.
그게 아깝지는 않았다.
꽤 값진 시간이었으므로.
지금 그에게 배운 것을 되새길 때였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매 순간 전심전력으로 찌를 순 없다.
그럼 죽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렘도 그렇게 싸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미친 렘 새끼와 대련할 때가 되면, 놈의 도끼질은 한 번 한 번이 전부 묵직한 무게감과 살기를 담았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찌르기를 성공했다는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엔크리드는 성취감에 취하지 않았다.
아니, 기쁘긴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벽을 넘었다는 것에 만족감도 컸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진 않았다.
자연스레 엔크리드는 내일을 그렸다.
찌르기에 성공한 이후를.
그걸 성공하기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내일이 보이므로.
그는 그 내일의 태양을 향해 손을 뻗고 걷는 중이었다.
'전력으로 뻗되 마음을 전부 싣지는 않는다면?'
그렇게 정답에 가까워지는 중이었고.
머리만 굴려서 알 수 있는 건 너무 적었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이 엔크리드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는 아닐 테니.
얼굴 없는 뱃사공은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벽은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럼 다시 목숨을 걸고 도전하면 될 일이다.
또 그런 순간이 온다는 걸 알자, 심장이 뛰었다.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된 묘한 열기가 전신을 달궜다.
엔크리드는 그 열기를 못 본 체했다.
지금은 몸을 굴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휴식부터.'
욱신거리는 옆구리는 의사가 아니라 자가 진단으로 봐도 며칠은 푹 쉬어야 했다.
'근데 난 대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병사가 다치면 보통 어떻게 되나.
위중의 정도를 떠나, 소속 막사에서 치료하다가 뒈지거나.
'끗발이 좋으면 곁에 의사를 두고 치료를 받겠지.'
또는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다발로 쏟았다면 사제의 기도를 받을지도 몰랐다.
신성 치료는 그야말로 운과 뒷배가 합쳐져야만 가능한 수준이니까.
물론 상급 지휘관쯤 되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엔크리드는 셋 다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누군가의 수작이 있었다는 건데.
'모르겠다.'
슬슬 트림이 나오고 하는 걸 보니 소화는 다 된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드러누워 잤다.
아주 푹 잤다.
다쳤을 때는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니까.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크고 동그란 눈알이 보였다.
"얼굴 좀 물려."
손으로 왕눈이 얼굴을 밀자, 왕눈이가 손이 닿기도 전에 뒤로 물러났다.
"하도 곤히 자길래 깨우기가 뭐 했는데 타이밍 좋게 일어났네요."
"퍽이나."
시간 아깝다고 발로 걷어차 깨우지나 않으면 다행인 놈이다.
"씁, 여기에 분대장을 넣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왕눈이가 어깨를 펴며 말했다.
누구 솜씨인가 했더니.
하긴, 분대원 중에서 왕눈이나 작센이 아니면 이런 수완을 가진 작자는 없으니까.
"이 일로 저 주머니 좀 풀었습니다. 신세 진 거예요. 잊지 말아요."
넣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의무 막사는 식사 수준도 일반 막사보다 더 낫고 후방에 있으며.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근무고 뭐고 간에 전부 열외니까.
여기가 아니었다면 아픈 옆구리 부여잡고 낑낑거리며 부대원 단속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 없어도 분대는 잘 돌아가려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444분대의 최약체가 누굴 걱정한다고.
'아, 최약체는 얘지.'
왕눈이는 싸움에 젬병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주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전투만 일어나면 특수 병과라고 해서 후방으로 잘만 빠져나가니까.
재주도 좋지.
이번에는 엔크리드가 그 재주 덕을 보기도 했다.
"고맙다고 머리라도 박아 줘?"
"거창한 인사는 됐고. 잊지 말라고요."
'내가 안 잊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알았다."
"좋아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바쁜 와중에 병문안까지 와 주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왕눈이와 렘만 온 건 아니었다.
작센이 지나가다 들렸다며 툭 하고 작은 통 하나를 던져 줬다.
"하루에 한 번 옆구리에 바르면 통증이 좀 덜할 겁니다. 어디서 이런 거 받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특히 우리 분대원에게 비밀이겠지?"
작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훌쩍 떠났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통을 비틀어 열어 보니 진녹색의 연고가 보였다.
'약초라도 으깨서 만든 건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면 지극정성이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일전에도 몇 번 봤던 물건이었다.
써 보는 건 처음이지만.
대강 손가락 끝으로 연고를 떠서 옷 사이로 손을 쑤셔 넣고 옆구리에 슬슬 펴 발랐다.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연고를 바른 부위가 화끈해지며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좋은데?'
엔크리드는 아껴서 발라야겠다고 생각하며 통을 잘 여며 침대 밑에 넣었다.
'그런데 의무 막사가 우리 막사랑 가까웠나? 지나가며 들를 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약효 좋은 연고를 받았으면 된 거지.
그 뒤에 다른 분대원 둘도 더 왔다 갔다.
"미안하군요, 분대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꼭 뭔가를 해 줄 수 있는데 안 해 준 것처럼 말하는 분대원 하나와.
"분대장이 없으니 분대가 개판입니다. 이거 드십쇼."
먹던 사과 반쪽을 던지고 간 분대원까지.
마지막에 들른 놈은 확실히 지나가다가 들른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은 툭하면 길을 잃곤 하니까.
의무 막사 앞에서 '여기에 우리 분대장이 있다고? 왜?' 이렇게 말하는 걸 듣기도 했으니까.
'저 새끼는 애초에 내가 다친 것도 몰랐네.'
분대원 키워 봤자 다 헛거다.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엔크리드 자신만 빼고는 다 알아서 잘 싸우고 잘 내빼는 놈들이다.
'내 일이나 걱정하자.'
자기 하나 없다고 분대가 개판이 되면 얼마나 개판이 된다고.
다들 알아서 잘 지낼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 두는 게 맞다.
그것보다는.
"너 이 새끼."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혼자 잘 쉬고 있는데 들어온 새로운 손님.
점심나절에 막사로 들어온 작자다.
의무 막사는 컸다. 끼어서 누우면 열 명은 넘게 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큰 막사에 있는 환자는 총 셋이었다.
옆구리가 아픈 엔크리드와.
오늘부로 합류한, 자신을 쳐다보는 소대장 하나.
그리고 저 구석에 누워서 하릴없이 천장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금발 하나.
엔크리드에게 말을 건 건 소대장 쪽이었다.
"실력은 최하급 병사 수준, 거기에 용병 출신이면서 분대장이라니. 분대원에게 돌아가며 엉덩이라도 대주는 건가? 어떻게 분대장이 된 거지?"
그러니까 이쪽이 더 문제라니까.
이쪽 소대장은 구면이었다.
툭하면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옆 중대 소대장이다.
이름은 벤젠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 참 야무지게 잘 지었지.
벤젠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 모른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으르렁거리는 놈이었다.
"거기에 의무 막사라니, 팔자 편한 새끼."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팔자가 참 편하긴 하지.
옆자리 벤젠스 소대장만 없었으면 더없이 완벽했을 것이고.
"네, 만나서 반갑군요. 소대장님."
"반가워?"
그럼 엿 같다고 할까?
엔크리드는 성인이었다.
그는 가면을 쓸 줄 알았다.
"네, 조금."
"조금?"
"아주 반갑지는 않아서."
"이 새끼가."
벤젠스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다고 덤비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이전 전투에서 허벅지를 깊게 베였다고 했다.
당장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 만큼.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완벽하게 놀리기 좋은 기회가 아닐까?'
엔크리드는 성인이었다. 그는 가면을 쓸 줄 알았고.
아니꼬운 놈을 놀릴 줄도 알았다.
14. 기사
"너 이리 와!"
"목소리가 큽니다. 여기 의무 막사입니다."
"어쩌라고, 이 자식아."
으르렁거린다곤 하나, 아무리 거친 짐승이라도 닿지 않는 곳에 있다면 위협이 되지 않는 법이다.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처음 봤을 때가 아랫마을이었죠?"
악연이었다. 툭하면 마주치는 악연.
"재수 없는 새끼가 어디서 친한 척이야?"
말을 먼저 건 건 벤젠스 쪽이었다.
엔크리드는 굳이 그걸 따지지 않았다.
그런 걸 따질 만큼 그는 속이 좁지 않으므로.
"그럼."
대신 몸을 돌렸다. 작센이 준 연고 효험이 아주 좋았다.
몸을 이리 움직여도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너 뭐하냐?"
"친한 척하지 말라기에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이 새끼가 장난하나!"
벤젠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난인 걸 알았다면 그리 화를 낼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근데 뭐랄까.
'평소에 하도 살벌한 분대원 사이에 있어서 그런가.'
오랜만에 만난 벤젠스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렘이나 작센, 그 외 분대원들의 다툼을 보다 보면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아, 눈치채셨군요. 역시 소대장님, 사이프러스 사단의 미래."
"너, 너!"
이마에 핏대를 올린 벤젠스가 제 부츠를 들어 던졌다.
엔크리드는 잽싸게 그걸 받았다.
"선물입니까?"
"죽여 버린다, 이 새끼!"
그 언젠가 렘이 그랬던가.
자기도 어지간하면 사람 속을 잘 긁는 편이지만.
"작정하고 입 터는 분대장이랑은 대거리하고 싶지 않수다."
라고.
태연한 얼굴로 부츠를 쥔 엔크리드.
그걸 보며 콧김을 뿜어내는 벤젠스.
그리고.
"파하하하하!"
허공을 보며 시간 죽이기에 여념이 없던 병사가 세차게 웃었다.
정말 즐거워 미칠 것 같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 웃음소리에 벤젠스의 살벌한 눈빛이 뒤로 휙 돌아갔다.
한바탕 웃어젖힌 금발 남자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손가락을 구부려 바깥쪽으로 콕 찍어 닦곤 말했다.
"아니, 선물입니까? 라니. 이건 참을 수가 없었다고. 모르는 척부터 꾹 참고 있었는데. 후우."
까드드득.
엔크리드는 벤젠스 소대장의 어금니가 마흔이 되기 전에 부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금니를 자꾸 갈면 잇몸에도 안 좋은데.
이 얘기까지 할까 말까 했다.
조금 더 하면 화를 못 참고 머리에 피가 몰려 죽은 병사로 기록될 것 같았다.
"소속이?"
벤젠스는 침착했다.
상대에게 욕설 대신 소속을 물었다.
"나? 음, 그냥 지나가던 병사."
오호?
엔크리드는 내심 상대의 포부에 감탄했다.
자신은 분대장이라도 되지.
하지만 저쪽은 정말 일개 병사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다만, 저리 말하니 오히려 소속과 지위를 숨기는 느낌이었다.
벤젠스도 과연 머저리는 아닌지라.
"소속을 밝힐 수 없다는 겁니까?"
"그게 좀 그래. 하지만 병사라고 한 건 진짜야. 소속은 까먹었거든."
태평하다. 엔크리드는 금발 남자에게서 귀족의 품격을 보았다.
제 소속 부대를 잊어버리는 머저리가 귀족이 아니라면.
'뒈지게 맞아야지.'
정말 죽도록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까 지금 보이는 태도는 품격이다.
까득까득.
벤젠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다.
"그런데 지금 날 보고 그럴 게 아니라. 뒤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엔크리드와 벤젠스의 시선은 아까부터 금발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고로 둘 다 뒤로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 사람이 있었다.
'언제?'
기감이 뛰어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전장에서 구른 가락이 있다.
어느 정도는 육감이란 게 있는데, 지금은 뒤에 누가 선지도 몰랐다.
소리도 안 들렸고.
"여기라고? 사사사분대장이 있는 곳?"
여자였다. 그것도 대체로 인간보다 몸의 선이 얇고 눈빛은 선명하며 귀가 더 큰 종족.
요정이었다.
그녀가 금발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말투가 자연스러운 걸 보니, 상급자였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판단하고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사 중대 사 소대 사 분대장 엔크리드, 이쪽입니다."
요정족 여자의 시선이 그제야 금발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천막 입구가 펄럭이며 의무 막사를 지키던 병사가 들어오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쪽이 휘하 분대장이시고."
"요정?"
꽤 놀랐는지, 벤젠스가 그제야 반응했다.
그걸 들은 요정은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렸다.
"그쪽은 이 중대 삼 소대장입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의무 막사 담당 병사가 말했다.
이어진 요정족 여자의 말투는 무척 건조했다.
누군가 말하길 요정은 풀과 나무의 상징이라던데, 그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사막의 모래와 같았다.
"2중대는 상급자를 보면 종족을 말하라고 가르치나? 내가 요정인 건 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는데?"
'죽여주네.'
엔크리드는 요정족 여자에게서 타고난 기품과 카리스마를 봤다.
말 한마디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
"아, 아, 아, 아닙니다! 이 중대 삼 소대장, 벤, 벤젠스입니다!"
"부탁 하나 하지."
"네!"
"벤벤젠스 소대장, 내가 있는 동안에는 그 입을 제발 닥쳐 주길 바란다. 지금 내 요청에 대답 안 해도 된다. 그 주둥이를 열면 얼굴에 칼이든 주먹이든 꽂아 버리고 싶을 것 같거든. 벤벤젠스 소대장."
엔크리드는 굳이 벤벤젠스 소대장의 이름이 벤젠스라고 말하지 않았다.
벤젠스는 입을 열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 재밌는 분대원을 잘 이끌고 있다고 들었다."
중대장의 시선이 다시 엔크리드에게 돌아왔다.
"네, 감사합니다."
새로운 중대장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었다.
깍듯하게 답했다.
이후 나눈 대화에서 엔크리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 여자가 여긴 왜 온 거야?'
하등 쓸데없는 얘기가 전부였다.
전투에서 활약했다고 하질 않나.
엔크리드 개인으로 보자면 활약이 맞다.
찌르기 적병을 격살했고.
그 와중에 손 닿는 범위 내에서 주변 아군을 꽤 살렸다.
하지만 그게 전장에 영향을 줬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그런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
가진 바 실력과는 별개로, 엔크리드의 전장을 보는 안목은 꽤 좋은 편이었다.
"프록을 만나고도 살아남았다고?"
"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흘리는 일은 자주 있는 게 아니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따위 대화를 하러 굳이 여기까지?
엔크리드는 당최 상대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요정족 중대장 여자는 녹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고.
엔크리드는 충실히 답했다.
얼마 안 있어 중대장이 '그럼 앞으로도 활약을 기대하지'라고 하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떠나기 직전, 다시 뒤를 돌아봤다.
금발 남자를 향해서다.
"그쪽은 이름은 뭐지?"
"에, 음, 크랑입니다."
이름을 말하면서 눈알을 굴리고 이마를 찌푸린다. 누가 봐도.
'방금 지어냈네.'
그런 이름이었다.
"그렇군."
중대장은 덤덤하게 답했고 막사를 떠났다.
그때까지 말은 물론이고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벤젠스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시벌."
"엇, 중대장님."
욕설을 들으며 엔크리드가 말하자, 벤젠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군. 지나가는 병사였네."
"이 씹새끼가 진짜."
벤젠스에서 오늘 하루만큼은 벤벤젠스가 된 소대장은 불같이 화를 냈고.
크랑이라고 자신을 밝힌 금발 남자는 또 세차게 웃었다.
의무 막사를 지키던 병사는 이 세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서 슬쩍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엔크리드는 벤젠스 소대장을 보며 여기에 있는 동안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싸움의 복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엔크리드는 두 가지에 집중했다.
'전력으로 찌르되 마음을 전부 담지 않는 것.'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실마리를 찾고 나니, 몸이 근질거렸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몸을 굴릴 순 없었다.
옆구리가 아프니, 할 수 있는 훈련은 악력 훈련뿐.
엔크리드는 손가락과 전완근을 단련했다.
어찌 보면 미련한 짓처럼 보이나.
'육체는 모든 기술의 근간.'
아무리 작디작은 나뭇잎이라도 무게는 있는 법이며, 물 한 방울이라도 시간의 도움을 받으면 바위를 뚫는 법이었다.
고로 지금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노력 또한 후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자신의 탑을 쌓았다.
"되게 열심이네."
크랑이다.
중대장이 가고 난 뒤, 이틀.
엔크리드는 싸움의 복기, 악력 훈련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안 했다.
휴식에 전념했다.
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변한 게 있다면.
크랑이라고 자신을 밝힌, 소속을 까먹었다는 핑계를 댄 반쯤 미친 병사가 제 곁을 떠돈다는 것뿐.
"왜 그렇게 열심이야?"
크랑은 누구한테나 말을 놨다.
엔크리드한테는 당연했고.
벤젠스한테도 마찬가지였다.
"난 소대장이다. 상급자라고!"
하물며 놀리기도 했다.
그걸 보니, 어디 다쳐서 여기에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실력도 꽤 있는 것 같았고.
일부러 벤젠스 앞을 지나치다가 잡힐 듯 말 듯 피하는 발걸음을 보니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뭘?"
상대가 병사라고 했으니까.
엔크리드도 말을 놨다.
"매일 손만 쥐었다가 폈다 하잖아. 그 외에는 허공을 보며 넋 놓고 있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까지 하나 싶고, 또 뭘 그렇게 손을 열심히 쥐었다가 펴나 싶고."
여덟 살 어린애도 아니면서 궁금한 게 참 많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귀찮은 건 또 아니었다.
'나도 심심하긴 하니까.'
벤젠스 소대장을 놀리는 것도 한두 번이다.
소소한 대화와 그럴 상대가 있다는 건 지루함을 이겨 내는 좋은 도구였다.
"이건 악력 훈련이고 가만히 있는 건 넋 놓고 있는 게 아니라, 지난 전장에서 내가 실수한 걸 복기하는 거다."
"그러니까 그런 걸 왜 하냐고."
왜 하냐니.
"다음 전장에서 안 뒈지려고."
"안 뒈지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병사는 못 봤거든."
"그럼 그런 병사 중에 오래 산 놈은 있고?"
"음, 꽤?"
이쪽은 뭘 보며 살아왔으려나.
엔크리드는 진즉부터 상대가 평민 놀이 따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지만.
상대가 원하면 이런 거에도 어울려 줄 수 있었다.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가지지 못한 걸 상대가 가졌다고 샘이 나지도 않는다.
이런 거로 샘을 내려 했다면, 검술 재능에서 이미 질투 때문에 반쯤 미쳐 지내야 정상일 것이다.
엔크리드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아가야 할 길이 있고.
성장하는 기쁨에 더 충족감을 느꼈다.
'찌르기는 더 연습하면 될 것 같고.'
전심전력은 훈련이 필요했다.
야수의 심장은 여전히 엔크리드를 지켜 주는 한 축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 더.
매일 걷는 한 걸음.
오늘이 반복되지 않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다.
물론 모든 게 변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넌 뭐가 되고 싶은 건데?"
크랑이 물었다.
이전의 렘이 물었을 때와 비슷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게 엄청 오래된 과거 같냐.'
이미 없어진 날이다.
자신이 죽었기에 사라진 날.
그래서 그 장난처럼 뱉은 포부는 정말 장난처럼 사라졌다.
만약 입을 열어 미래를, 꿈을 말한다면.
'오늘이 사라질 일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꿈은 현실에 침묵하고 잡아먹혀 찢겼어도, 흔적은 남았으니.
흔적, 그래, 고작 흔적만 심장 어림에 남았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흔적만 남은 건가.'
엔크리드는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굳은살이 생겼다가 터져서 흉하게 일그러진 손바닥이 보였다.
손가락 마디마다 인이 박인 굳은살은 아마도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바라온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아직도 흔적만 남아 있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리고 답을 구한다.
아닐 것이다. 아니라고 믿는다.
우습게도 그 흔적만 남았던 시절에도 엔크리드는 포기한 적이 없었다.
"기사."
삼류 용병 출신의 하급 병사.
그 주제에 분대장.
고작 분대장.
작디작은 지위요, 보잘것없는 실력이다.
그런 자가 입에 담은 건 모든 이들의 꼭대기였으니.
벤젠스는 옆에서 그걸 듣고 세차게 비웃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크랑의 답이 빨랐다.
"그래. 기사구나."
이상했다. 비웃어야 했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크랑의 태도가 그걸 막았다. 강제하진 않았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본능이 말했다.
그저 담담한 말투뿐이지만, 묵직했다. 무게가 담겼다.
크랑은 그 우스운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전력으로, 마음을 다해 들었다.
듣는다는 행위를 이렇게까지 할 수도 있었다.
"널 보니까 나도 어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는 것 같다."
크랑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순간 의무 막사 안을 휘감았던 묘한 공기는 갑자기 생긴 것만큼이나 갑자기 사라졌다.
"푸헷 기사? 웃기시네!"
그래서 벤젠스는 마음껏 비웃었다.
하지만 꼴이 우스웠다.
엔크리드도 크랑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상급자다."
벤젠스가 소심한 반항을 시도했다.
물론 먹힐 턱이 없었다.
* * *
딱 일주일.
엔크리드는 더는 옆구리가 아프지 않았다.
'연고 덕분인가?'
빨리 나았다.
취침 시간이 다 되어 크랑이 물었다.
"내일 복귀지?"
"응."
오늘 하루는 단출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음유시인은 아침부터 사이프러스의 찬미가를 의무 막사 바로 옆에서 불렀고.
의무 막사를 지키는 병사가 아침에 늦잠을 잤다.
점심나절에 가벼운 산책을 하다가 크라이스를 보기도 했다.
왕눈이는 안색이 안 좋았다.
뭐라 물을 새도 없이, 그는 쌩하니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의무 막사의 환자는 불침번도 안 서기에 정말 푹 쉬었다고 할 수 있었다.
"잘 자라. 엔크리드."
"너도. 크랑."
"돌아가면 두고 보자, 둘 다."
벤젠스도 매일 하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엔크리드는 눈을 감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음유시인의 노랫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늘도?'
돈맛을 보고 전장의 음유시인이 된 이 작자는 막사 곳곳을 돌며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한 번 온 곳에 이틀을 머물진 않는다는 말이었다.
오늘은 더 먼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야 했는데.
왜 이틀 연속 이쪽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농땡이를 피우는 건가? 아침은 왜 안 가져다줘?"
일어난 벤젠스가 투덜거렸다.
엔크리드는 그 말에 머리털이 삐쭉 섰다.
저 말을 어제도 들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반복된 오늘에서 들은 거겠지만.
"어제도 병사가 아침에 늦었던가요?"
엔크리드가 물었다.
벤젠스는 그런 엔크리드를 빤히 보더니 픽 웃으며 답했다.
"무슨 개수작이냐? 어제는 제시간에 가져다줬잖냐."
엔크리드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이거로 확실해졌으니까.
오늘이 반복됐다.
이 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다가 뒈졌다.'
라는 말이었다.
15. 그저 한마디 말.
'자면서 당했다고?'
엔크리드는 황당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둔했나?'
자다가 칼 맞고 뒈져도 모를 만큼?
그럴 리가 있나.
그 정도로 둔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죽었는지 짐작도 어려웠다.
엔크리드는 잠들기 직전의 순간을 떠올렸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어떤 징조 따위도 못 느꼈다.
잠들었고.
이후 깬 적은 없었다. 잠결에 벌레 소리 따위를 들었던가? 잠을 설쳤던가?
아니다.
푹 잤다.
하루만 지나면 복귀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잤다.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황당해하지만은 않았다.
당황했다고 머리가 굳으면 죽는다.
또 다른 오늘이 시작된 것뿐이었다.
이미 한번 해 봤기에, 엔크리드는 해야 할 일, 고민해야 할 부분을 알았다.
생각해야 할 건 두 가지.
하나는 '어떻게'다.
목이 베였든, 코와 입을 막았든.
어떻게 통증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둘은 '왜'다.
'날 왜?'
죽는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당했다.
어설픈 솜씨가 아니라는 거다.
상대가 암살자라면 일류 그 이상일 것이고.
적병이라면.
'일류 암살자보다 더한 놈이겠지.'
의무 막사는 후방이다.
여기까지 몰래 들어와 멱을 따고 가는 수준이라면.
기사의 뺨을 후리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준의 암살자일 것이다.
왜라는 질문의 답은 사실상 어느 정도는 나와 있는 거 아닌가.
막사 안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크랑과 벤젠스뿐인데.
'벤젠스를 노리려 이만한 위인이 올 리는 없고.'
그럼 답은 하나다.
크랑.
제 소속 부대를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개념 없는 병사.
그런 놈이 그냥 병사일 리가 없었다.
'왜'의 답은 나왔고.
'어떻게'는 집어치웠다.
오늘 밤 당해 보면 알겠지.
참 이상하게도.
찌르기 변태에게 당할 때, 죽을 때마다 겪는 그 지랄 맞은 통증 덕분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변태 새끼의 눈깔을 보는 게 가장 기분이 개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쪽이 더 지랄 맞네.'
기분이 더러웠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죽어 버렸다는 거.
정말 너무나 기분이 더러웠다.
똥을 밟는 걸 넘어 그 안에서 나뒹굴어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기분이 정말.'
개 같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기에.
엔크리드는 기분 따위는 잊었다.
그 대신 할 일을 떠올렸고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는 오늘 밤에 확인하면 그만이고. 왜는 크랑을 노리고 왔다고 보면 될 것이고.'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더 떠올랐다.
'어떻게'와 '왜'를 넘어서 '누구'라는 의문이다.
암살자는 누구인가.
적병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의무 막사의 위치를 알고 몸을 숨길 줄 알며 암살에 능할 만한 사람.
목표를 이미 확인했으며 접근이 용이한 위치의 아군.
번뜩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중대장?'
합리적 의심이었다.
요정의 발걸음은 조용하고 몸놀림은 은밀하고 날쌔다.
암살하기 딱 좋은 종족이었다.
하물며 자신이 여기에 있으니 이곳을 오갈 구실도 있다.
며칠 전에 와서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버린 것도 목적이 이쪽이라면 이해가 된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너 뭐 하냐?"
옆에서 벤젠스가 물었다.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생각."
"생각? 말 졸라 짧네. 진짜 돌았냐? 이 미친 새끼야?"
허벅지 자상이 어느 정도 나았는지, 벤젠스 소대장이 절뚝이며 일어났다.
"아, 크랑인 줄 알았습니다. 소대장님. 실수입니다."
"실수라고 하면 다냐?"
"미안합니다."
"사과하면 끝이냐?"
꼬리를 잡았군.
"먹을 걸 좀 챙겨 오죠."
엔크리드는 평소와 똑같이 벤젠스를 무시하듯 외면하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벤젠스가 악을 쓰는 목소리 사이로.
"난 안 먹어!"
크랑이 느지막이 일어나 외쳤다.
저 친구 덕에 죽었다고 해서 그가 얄밉진 않았다.
기분이 더러운 것도 맞고.
덕분에 짜증이 치솟는 것도 맞지만.
크랑이 자신을 죽인 건 아니다.
결국, 죽은 건 자신의 실력 부족 때문이 아닌가.
또는 운이 더럽게 나쁘든지.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고 있으면 안 당해.'
몰래 다가온 암살자다. 소란을 피우는 것만으로 주변에 있는 아군이 몰려올 것이다.
야밤에 들어온 고양이를 잡는 것쯤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직접 잡을 필요도 없단 거다.
얼마 안 있어 의무 막사 담당 병사가 눈을 비비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발을 질질 끌며 오는 게 참 만사 귀찮아 보이는 태도다.
이 새끼도 참 한결같네.
"그쪽이 늦은 덕분에 소대장 하나가 화가 잔뜩 났어."
"내가 늦어서? 그거야 분대장인 당신이 자꾸 놀려서 그런 거잖아."
공식적으로는 이 병사도 분대장급이었다.
고로 우리 둘은 계급이 같았다.
"최하급 병사라면서 간덩이가 부은 거야?"
만난 김에 같이 돌아가는 길, 게으른 병사가 물었다.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이었지만 알아듣는 게 어렵진 않았다.
자꾸 겁도 없이 왜 덤비냐는 거다.
"벤젠스?"
"그쪽은 중급 병사야."
사이프러스 사단뿐 아니라, 나우릴리아 왕국의 군대가 병사의 등급을 나눴다.
일종의 사기 진작을 위한 포상 제도나 다름없었다.
실력을 증명하면 그에 걸맞은 등급을 내리므로.
제 능력을 증명하고.
계급을 부여받는 체제다.
등급이 오를 때마다 포상금도 있다고 들었다.
엔크리드도 이게 여러모로 유용한 체제라고 생각했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총 다섯 개의 등급은 병사가 치열하게 훈련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기도 하니까.
나우릴리아는 무를 숭상하기에 어지간한 지휘관은 전부 상급 이상의 무력을 갖췄다.
그리고 기사는 등급에서 제외.
기사는 기사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이니까.
이런 체제 안에 묶어 둘 수 없는 거고.
그러니 소대장쯤 되면 중급 병사 이상이다.
분대장은 하급 수준이거나 중급.
물론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는 수준으로 등용하진 않는다.
소대장 이상쯤 되면 나름 가려 뽑는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최하급 병사면서 분대장이었다.
휘하 분대원은 최소 중급 이상의 병사였고.
"당신은 특이한 인간인 것 같아."
병사는 생각 없이 말했으나.
엔크리드는 기분이 묘했다.
'내가?'
평생 평범하다는 말만 들었다.
또는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이나.
"식사는 2인분이면 될 거야."
엔크리드가 말했다.
병사는 그를 보더니, '역시 조금 이상한 인간이라니까'라고 중얼거리면서도 2인분만 준비했다.
막사로 돌아와 벤젠스를 조금 달래 주고.
아침을 해결한 뒤, 평소와 똑같이 훈련하고 지나간 전투를 복기했다.
크랑은 아침을 먹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먹을 사람은 엔크리드와 벤젠스뿐.
"크랑은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고 갔나 보지?"
"뭐, 그렇지."
엔크리드의 물음에 의무 막사 담당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요정 중대장을 용의자로 삼았지만.
이쪽도 유력했다.
'이 병사도 여기에 언제든 드나들 수 있잖아?'
막사 앞을 지키는 불침번이 있지만, 의무 막사 담당 병사를 막진 않을 것이다.
'섣불리 단정 짓진 말자.'
아귀가 딱딱 맞긴 해도 결론을 내려 버리면 머리가 굳어 버린다.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게 낫다.
점심이 지나고 나서야 크랑이 돌아왔다.
똑같은 하루였다.
물론 엔크리드만은 달리 움직였지만.
"바쁘네?"
엔크리드가 말을 걸자, 돌아온 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물었다.
"그거 알아?"
대뜸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뭐가?"
"네가 먼저 말을 건 거 처음이다."
'그랬나?'
그러고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딱히 의식하진 않았다.
"그랬나 보지 뭐."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고.
크랑은 피식 웃더니, 엔크리드의 침상에 궁둥이를 붙었다.
엔크리드는 크랑의 정체가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아니, 않았었다.
하지만 이 정체를 감춘 병사 덕분에 오늘이 반복되기 시작했으니, 궁금증이 들긴 했다.
과연 뭘 하는 놈이길래, 암살자가 들이닥치는지.
살살 꼬드겨서 정체를 밝혀도 되지만.
자신의 꿈을 진심으로 들어준 상대이기도 했다.
때로는 돌려 묻는 것보다 상대의 마음에 진심을 전하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그의 옆에 앉아,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고 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벤젠스는 졸다가 일어나 둘이 붙어 있는 걸 보고 뭐라 하며 끼어들려다가 멈췄다.
그도 엔크리드의 질문을 들었으니까.
궁금한 건 벤젠스도 마찬가지였다.
엔크리드는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크랑은 웃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여유로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한동안 엔크리드의 눈만 바라봤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엔크리드는 한가롭게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참다못한 벤젠스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음, 말 못 하겠다."
"왜?"
"말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나름 지켜야 할 약속도 있고."
"그래?"
"그래."
밝히기 싫다는 말에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 침상에서 둘을 바라보던 벤젠스는 이 황당한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마물 방귀 뀌는 대화인지.
지가 물어놓고 저기서 수긍은 왜 하는데?
숨겨 둔 정체가 있긴 있는 거라는 거잖아?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적군인가? 첩자?
벤젠스의 사고가 끝났다. 동시에 입도 열렸다.
"너 첩자냐?"
"난 사사사 분대장인데요?"
"너 말고 새꺄."
"나? 아닌데."
크랑은 고개를 저었다.
벤젠스의 질문을 들은 크랑은 곧바로 부인했으면서도 음 하고 짧은 잇소리를 내더니 침상에서 일어났다.
엔크리드는 가만히 그를 지켜봤고.
그는 몇 걸음 걸어 의무 막사 가운데에 섰다.
의무 막사를 지키던 병사가 졸다가 그를 보더니,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정체를 밝힐 순 없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지."
묘한 느낌이었다.
막사 중앙까지 걸어갈 때의 걸음걸이, 말하는 태도, 손짓, 미소, 눈빛, 숨소리.
그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묘한 느낌.
마치 준비된 무대를 걸어가는 배우 같았다.
모두의 시선을 자연스레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묘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렀다.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크랑의 입술에 집중했다.
마음을 다해 들을 줄 안다면.
반대로 상대의 귀와 마음을 휘어잡을 말도 할 수 있는 것인지.
"난 이 왕국을 배신할 수 없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
그저 한마디 말.
때로는 거짓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소리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금세 스러질 사랑을 속삭일 때도 쓰이는 말.
그저 그런 말일 뿐일진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너무도 달라진다.
크랑이 한 말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진다는 것처럼 들렸다.
의심할 수 없는 법칙처럼 들렸다.
엔크리드는 환상을 봤다.
막사가 갑자기 확 넓어지는 것 같았고.
그 정중앙에 크랑이 선 것처럼 보였다.
넓다. 용병질을 할 때 나우릴리아 왕국의 곡창지대를 지난 적이 있었다.
그 드넓은 초원처럼 주변이 트였다.
그렇게 주변이 트였음에도 크랑은 선명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존재가 광야를 아우르는 것 같았다.
'보통내기 수준이 아니라.'
등급을 정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기사?'
아니다. 기사급이 겨우 이 정도 실력일까?
정작 그 기사급 실력자가 제 실력을 숨긴다면 알아볼 눈은 없지만.
직감이었다.
기사는 아닐 것이다.
"뭐, 못 믿으면 말고."
크랑이 가볍게 한마디 툭 내뱉자, 드넓은 초원도 광야도 사라졌다.
선명하게 보이던 크랑도 본래대로 보였다.
"믿어 주면 고맙지만."
"믿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래. 그렇게 말했으니까."
엔크리드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크게 상관 있는 건 아니니까.'
암살자만 막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
상대가 말해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후아."
벤젠스가 숨을 참고 있었는지, 이내 큰 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엔크리드와 크랑을 보고 뭐라 말을 하려다가.
"씨."
그렇게만 말하곤 몸을 돌렸다.
크랑의 정체가 아무래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벤젠스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걸 본 크랑이 파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소대장. 난 지금 그냥 크랑일 뿐이니까."
"...누가 뭐래?"
쯧, 바짝 쫄았구만.
엔크리드는 벤젠스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저러면서도 꾸준히 자신한테 시비를 걸어 오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렘을 보면 입을 싹 닫기도 한다.
다른 분대원에게도 딱히 시비를 걸진 않고.
'그러고 보면, 왜 나한테만 그러는지 궁금하긴 하네.'
벤젠스를 일별하며 엔크리드는 시간을 죽였다.
똑같은 하루가 흐른다.
"잘 자라, 엔크리드."
"너도."
"크흠."
벤젠스 소대장은 아무래도 후환이 두려웠는지 매일 하는 저녁 인사를 생략했다.
거, 사람 허전하게.
곧 배속된 불침번이 천막 앞에 선다.
엔크리드는 자지 않았다.
원하면 금세 잠들 수 있지만, 필요하다면 하루쯤 밤을 새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용병으로 활동할 때 그를 구해 준 건 검술보다는 체력과 잔머리였다.
시간이 흐른다.
밤이 깊어지고.
불침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벤젠스가 옆에서 고로롱 코를 골았고.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잊었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졸겠는데?'
일어나서 오줌이나 싸러 가 볼까 싶은 순간이었다.
따끔.
목 언저리가 따끔했다.
벌레한테 물렸나 싶어서 손으로 목을 쓸었다.
그러자 틱- 하고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침? 독침?'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뽑았다.
나무로 만든 얇은 침이었다.
'아니, 이건 예상 외인데?'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찔린 부위부터 둔한 통증이 일기 시작하더니, 곧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목과 몸을 잘라서 가져간 그런 기분이었다.
분명 있지만, 감각으로는 목 아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곧 현기증이 일어나며 머리가 핑 돌았다.
'독침이라니.'
당했다.
'어떻게'의 답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둔하다고 해도, 아무리 자고 있었다고 해도.
어떻게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뚫리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답은 여기에 있었다.
지독한 마비독이었다.
엔크리드는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뜨려 했다.
이 오늘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으므로.
흐릿한 그림자 따위가 보였다.
체형이 작았다.
특이 체질이 아니라면 성인 남성은 아니었다.
여자 또는 아이.
그런 체형으로 보였다.
그림자가 다가와서 팔을 휘둘렀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찬미가가 들린다.
새로운 오늘의 시작이다.
정확히는 세 번째 오늘이었다.
"빌어먹을 농땡이를 피우는 건가? 아침은 왜 안 가져다줘?"
똑같다. 아침에 오지 않은 병사를 두고 불평하는 벤젠스 소대장이었다.
오늘은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기에.
"제가 나가 보죠."
상대할 것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일단 병사를 데려오는 것부터.
새로 시작해 보자.
솔직히 말하자면 독침이 어디서 날아왔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누워 있지 않고 대비를 하는 거다.
지금 필요한 건 적절한 핑계다.
밤중에도 깨어 있고 일어나 있을 핑계.
이곳은 후방이라고 해도 전장.
깨어 있을 핑계야 차고도 넘쳤다.
'다시 해 보자고, 암살자 씨.'
엔크리드는 준비를 시작했다.
16. 실력 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