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창을 지하 6층, 플로어의 중앙에 설치하라고 하여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게 가능한가?'
그리고 연락이 오면 보스 몬스터를 꽂아둔 창의 근처로 유도하라고 하여 그렇게 했다.
지하 6층에서 현균이 이끄는 이들을 기다리던 건 다름 아닌 비홀더.
허공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눈알의 형상을 한 몬스터다.
현균 일행으로는 필사적으로 공격을 해도 치명타를 날릴 수 없는 몬스터였다.
그래서 세한이 말했던 것처럼 창의 근처로 유인했던 것인데...
.
"형,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옆에서 자신과 함께 싸우던 일행이 말을 걸었지만, 현균은 말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그 구멍은 끝없이 이어져 타워의 정상까지 도달해 있었다.
"저 위에서 떨어트린 건가...?"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 얇은 창에 정확히 떨어트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이렇게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다.
"둘 다, 죽은 거 맞죠?"
"...그런 거 같다."
현균의 앞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천장을 부수며 떨어진 바질리스크가 창에 꿰뚫리며 처박힌 장소다.
현균과 그 일행이 사투를 벌이던 비홀더도 한줌의 핏덩이가 되어 바질리스크의 거대한 덩치에 깔려 있었다.
'옵저버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인데.'
평소라면 허공을 정신 사납게 날아다녀야 할 옵저버들이 바질리스크의 사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하에 있던 몬스터가 이 스테이지에 보스 몬스터라면 이 바질리스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일까.
[메인 퀘스트 2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당신의 퀘스트 달성도는 '은'등급입니다.]
[잠시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팡파레가 울리며 알림창이 떠올랐다. 이걸로 두 번째 메인퀘스트가 완벽히 클리어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엔 은 등급인가.'
도움말을 읽어보면 퀘스트 달성도는 최대 백금까지이며, 그 아래로 금은동. 더 아래로 내려가면 숫자로 매겨져 1, 2, 3등급으로 매겨진다.
은 등급이면 충분히 높은 달성도지만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금'을 달성했던 현균으로선 아쉬운 수치였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은 등급에 걸맞은 보상이 지급되었다.
보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금 등급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평범했지만, 이어서 떠오른 알림창에 현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부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조건을 만족하면 자동으로 활성화됩니다.]
"뭐?"
당연히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될 거라 생각했던 플레이어들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여태 명확한 목적이 있다가 사라지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형, 이제 어떡하죠?"
"글쎄."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니 어찌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우선 지하철역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의논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응?'
그때, 바질리스크의 사체에 고정되어 있던 옵저버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옵저버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니, 이번 퀘스트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세한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질리스크가 떨어져 생긴 커다란 구덩이를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체 정체가 뭐야?'
이전부터 묘한 이질감을 느꼈지만 이번 일은 보통이 아니다.
얼마 전만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 무사하신 모양이네요."
"...응, 그렇지. 네 덕분에 말이야."
어떻게 잡긴 했지만 솔직히 얼떨떨한 기분이다.
"모두 형이 제 말대로 해주신 덕이죠."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하긴 했는데, 도저히 우리들 실력으로는 못 잡을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만약 이런 식으로 죽이지 못했다면 자신들은 기간 내에 보스몬스터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자들이었으면 충분히 잡았겠지.'
주원이 이끄는 플레이어 무리라면 잡았을 것이다. 세한이 없었다면 경쟁에서 밀려나 죽은 건 자신들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몸이 오싹했다.
'이대로는 안 돼.'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바로 시작하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헛차."
세한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 바질리스크의 시체에서 창을 뽑아내었다.
'역시 오리하르콘이군.'
만약 자신의 능력치가 최소 D만 됐어도 이걸 직접 휘둘러 바질리스크를 죽였을 거다.
그게 안 돼서 이런 일을 벌인 거지만.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런 세한을 조용히 응시하던 현균이 물었다.
"세 번째 퀘스트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고 했으니 좀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돌아다녀? 어디를?"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요."
슬슬 필요한 스킬이나 장비를 얻을 필요가 있었고, 위험한 싹은 미리미리 제거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GM이 뭔가 일을 꾸밀지도 모를 일이지만.'
큰 틀은 다르지 않겠지만 소소한 면에서 전생과는 달라졌을 확률이 높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도와드릴 테니까."
세한은 주머니의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곤 창을 어깨에 짊어진 후, 가볍게 등을 돌렸다.
혹시나 계속 같이 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현균으로선 아쉬운 모습이다.
"그래, 너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고."
"예."
세한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현균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아마 다시 그와 재회하는 건 꽤나 후의 일일 것이다.
비장한 얼굴을 한 현균을 보며 세한은 피식 웃었다.
'아마 이번 일로 느꼈겠지.'
자신들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이번에는 세한이 도와주긴 했지만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적어도 일곱 번째 메인 퀘스트까진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
현균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라고 세한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현균을 아바타로 선택한 신은 누구지?'
생각해 보니 물어보는 걸 깜박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보지 뭐.'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거다.
세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상으로 향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
***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약속한 장소로 향하자, 지수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옷이 바뀌었다? 혹시 찢어졌어?"
"아뇨, 조금 더러워져서 다른 걸로 갈아입었어요."
여전히 검은색 원피스이긴 했지만 묘하게 디자인이 달랐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내가 사준 방어구를 입고 있었지만, 방어구는 이미 제 기능을 못할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골백번은 죽었겠군.'
칼로 난자된 흔적이 남은 방어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뭐야, 왜 나한텐 아는 척도 안 해?"
"넌 계속 봤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민아는 새치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역시 감정이 풍부한 고등학생은 상대하기가 힘들다.
"그럼...."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녀석은?"
"이쪽이에요. 혹시 몰라서 저기 가둬뒀어요."
오른손을 들어 지수가 뒤를 가리키자, 탈의실 문이 보였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폐허가 되어버린 의류 매장이기 때문이다.
끼익.
"오, 그러네. 여기 있구만."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전신에 새빨간 피가 말라붙어 있는 남성이 주저앉아 있었다.
"너, 너는...."
녀석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 박동권 씨."
그동안 지수가 아주 잘 교육해 준 모양이다.
벌벌 떠는 녀석의 목에 걸려있는 은색 팔찌를 보며,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 21
021. 파밍은 야비하게(1)
"이, 이 새끼. 당장 이거 안 풀어?! 이게 대체 뭔데 남 목에 거는데?!"
박동권은 나를 보자마자 목에 걸려 있는 은색 팔찌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거 진정 좀 해라. 그거 별거 아냐. 내가 살짝 조정하면 네 목을 동강내 버릴 수 있는 팔찌... 아니 목에 걸렸으니 초크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런 거지."
"뭐?"
박동권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다는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 이런 건 실제로 체험해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석을 조작했다.
"컥?!"
박동권의 몸이 크게 기울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꺽꺽 거리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게 대략 200kg정도거든. 일반인이면 목숨이 위험했겠지만 그래도 플레이어니 견딜 만하지?"
"사, 살...!"
박동권이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바닥을 긁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보석을 조작하며 무게를 원래대로 돌렸다.
"크헉! 헉, 허억, 헉. 이, 이까짓 거!"
녀석은 목에 걸린 초크를 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초크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거 네가 백날 그래봐야 안 부서져."
왜냐면 캐쉬템이거든.
정확히는 DLC 전용 아이템이지만 편의상 캐쉬템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씨발!"
녀석은 대략 5분 정도 발버둥 치다 결국 포기했는지 욕설을 내뱉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지랄을 하는 거냐!"
이 녀석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빤히 녀석을 바라보면 정말로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평범한 사람과 가치관이 다른 녀석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너 처음에도 사람들 강당에 몰아넣고 죽이려 했지."
"...!!"
"그리고 이번에도 배신 때렸잖아. 내가 모를 거 갔냐? 민아가 네가 하는 짓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
민아는 동권을 감시하는 남성으로 변신하여 며칠간 같이 있었다.
동권의 의견에 동조하여 녀석이 하는 대로 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맡았고.
"그, 그렇지만 전부 실패했잖아!"
"그래, 나 때문에 전부 실패했지. 아니었으면 다 성공했을 거야."
이 녀석은 벌써 두 번이나 일을 저질렀다.
솔직히 죽여 버리는 게 마음은 편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죽이는 건 쉽다.
나는 이 녀석을 이용할 수 있는 한 이용해 먹고, 살아서 계속 고통 받기를 원했다.
"그건 1차적 구속이다. 단순한 물리적 구속이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이건 계약서다.
DLC 상점에서 구매한 특수한 계약서.
나는 이것으로 녀석을 아주 건전하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이건 정신적인 구속이다. 이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면 넌 이 계약서에 적힌 행동은 결코 하지 못하게 되지."
"뭐...?"
동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계약서의 내용은 상당히 길었지만 첫줄만 읽어도 이해가 가능했다.
「을은 앞으로 이타적이며 견실하고,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을은 당연히 박동권이다.
녀석은 앞으로 사람을 해하거나 혹은 피해가 갈만한 짓을 하게 된다면 이 계약서를 어긴 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초크가 네 목을 조이는 건 물론, 이틀간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며. 끝내 머리가 터져 죽을 거다. 그렇게 쓰여 있지?"
"미...친."
동권의 성향 상 손발이 다 묶이는 계약서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계약서 맨 아래를 보면 '갑이 허락해 주는 일에 한해서는 계약서를 어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남겨뒀다.
물론 갑은 나다.
"이딴 계약서에 사인을?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알...!"
"그럼 죽일까요?"
쿵.
동권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지수가 피와 살점으로 젖은 메이스로 바닥을 두들기며 말했다.
메이스를 휙휙 휘두를 때마다 살점이 휙휙 날려서 솔직히 나도 질겁할 비주얼이다.
민아에 이르러선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니, 펜을 줘야 하지. 딸랑 종이만 내밀면 내가 사인을 어떻게 해?"
악을 쓰던 동권의 표정이 단번에 비굴해졌다. 지수에게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나야 편하긴 한데, 찜찜하네.'
뭔가 내가 아니라 지수에게 굴복한 거 같은...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저... 사인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응? 아, 이제 가도 좋아. 어차피 이제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언제든 알 수 있거든."
"아, 예."
동권의 태도가 단번에 공손해졌다.
계약서에서 '갑'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하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동권은 똥 씹은 얼굴로 탈의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거죠?"
"가라니까. 나도 볼 일 끝났어."
지금 당장 동권이 필요한 일은 없다.
어디에서 뭘 하든 난 언제든 알고 있고, 계약서를 통해 이번과 같은 헛짓거리는 아마 할 수 없을 것이다.
녀석의 선택은 아마 크게 두 개.
현균의 옆에 계속 붙어서 돌아다니거나 여기서부터 따로 행동하는 것.
만약 계약서만 아니었어도 후자를 선택했겠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현균과 함께 다니지 않을까 싶다.
눈치를 살피며 문을 열고 나가는 동권에게 나는 가볍게 외쳤다.
"야."
"옙!"
"다음에 보자. 그때까지 건실하게 살고."
"아, 알겠습니다."
말투는 지극히 순종적이었지만 표정은 그야말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가 어쩌겠는가.
덤비면 걍 뒈지는데.
"근데."
동권이 사라지자 잠자코 있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저대로 보내도 괜찮아요?"
"어. 상관없어."
DLC상점에서 구매한 계약서는 절대적이다.
만약 뭔가 꼼수를 부리려고 해도 내가 물리적으로 언제든 저지할 수 있었다.
동권은 쓰레기지만 능력은 있는 놈이니 알아서 강해질 거다.
그럼 나중에 써먹으면 된다.
"좋아,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지. 지수 너는 이번에 무슨 등급으로 클리어 했어?"
"저는 금 등급이요."
예상한대로 높은 등급이었다. 아마 '파티원'으로 취급되어 어느 정도는 내 공적이 지수에게도 적용된 덕이겠지.
더불어 내가 얻은 포인트가 많을수록 지수도 일부 받을 수 있기에 현재 모여 있는 포인트가 상당할 게 분명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 나는 이제 돌아다닐 곳이 좀 있어. 너는?"
"저는 잠시 가볼 곳이 있어요."
"따로?"
"네."
지수는 귀중한 전력이었기에 되도록 같이 갈까, 생각했지만 표정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아마 혼자서 따로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넌 파티원이라 언제든 위치도 알 수 있고. 너도 내 위치 알 수 있지?"
"네. 파티원 관련 시스템은 이미 익혀뒀어요. 볼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 게요."
"그래, 천천히 일보다 와."
파티원끼리는 서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민아."
"응?"
시선을 돌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민아에게 말을 걸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속한 대로 보상을 줄 테니 이리 와봐."
"아, 진짜?"
민아가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왔다.
"우선 물건은 천천히 사고. 너에게 줄 게 있어."
"뭔데? 별거 아니면 알지?"
"너야말로 보고 놀라지나 마라."
나는 녀석에게 작은 반지를 내밀었다.
"바, 반지?"
"맞아."
"...나 아직 미성년자인데. 아무리 내가 매력적이라도 그렇지 이건 초큼."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반지가 보상이라는 거다. 아이템이니까 제대로 확인해 봐."
"아, 이게?"
민아는 반지를 받아들고는 조심스럽게 아이템을 확인했다.
==
은밀의 반지(B)
하루 두 번, 최대 1시간 동안 완벽히 모습을 감출 수 있다.
==
능력치는 극히 심플하다.
하지만 무려 B급 아이템이다. 심플한 만큼 우수한 장비였다. 생존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하고, 민아의 능력을 생각하면 어떤 장소라도 침입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야 백금등급 보상이니 좋을 수밖에.'
나로서도 꽤 탐이 나는 장비였지만, 나보단 민아에게 어울리는 물건이기에 투자하는 기분으로 줬다.
애초에 바질리스크는 민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못 잡았을 테니.
'거기다 나는 추가로 스킬도 보상을 받았고.'
추가 보상인 스킬은 저 B급 장비보다도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우와, 우와! 이거 B급 장비잖아! 이거 진짜 받아도 돼? 혹시 밤길에 뒤통수치는 거 아니지?"
"이번 일 도와준 보상이라니까. 내가 그런 짓을 할 거 같이 보이냐?"
"...조금."
"크흠."
솔직히 전생에는 몇 번 그러긴 했다.
하지만 난 나쁜 놈이 아니면 그런 최저의 행동은 안 한다고.
"그럼 나 이거 가진다? 진짜 가질 거야?"
"가지라니까."
희희낙락한 얼굴로 받아든 반지를 끼는 민아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래?"
"아뇨, 별로."
지수의 표정이 묘하게 뚱한 느낌이었다. 사실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말이지.
아, 혹시 똑같이 도와줬는데 민아에게만 보상을 줘서 그런가.
"지수는 다음에 만날 때 줄게. 그때면 괜찮은 걸 줄 수 있을 거 같거든."
"네? 아, 괜찮은데... 알겠어요."
괜찮다는 것 치고는 굉장히 기대가 된다는 얼굴이다.
얘가 언제 이렇게 속물적인 성격이 된 거지.
"후, 이제 계산도 끝냈으니 슬슬 이동하자. 가만히 있어봐야 좋을 거 없잖아."
아까부터 주위를 돌아다니는 옵저버들이 상당히 거슬렸다.
"참 근데 아까 따로 가실 곳이 있다고 했는데, 거기가 정확히 어디예요?"
"아, 그거? 그냥...."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지수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파밍 좀 하려고."
자고로 게임을 즐겁게 하려면 적절한 파밍이 필요한 법이다.
***
"근데 너는 왜 따라오냐?"
"응? 왜 안 돼?"
지수와 헤어진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혼자가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민아가 내 옆에 찰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안 되는 건 아닌데...."
솔직히 민아보단, 녀석을 쫒아다니는 옵저버가 거슬렸다.
'됐다. 어차피 옵저버가 하나쯤 더 늘어난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두 번째 퀘스트가 끝난 이후, 나를 따라다니는 옵저버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야 센티넬을 잡고, 그토록 눈에 띄는 활약을 했으니 당연할 수밖에.
거기에 아직 '아바타'도 아니니 옵저버가 이리 많을 수밖에 없다.
"근데 왜 따라온 거야?"
"오빠가 꽤 괜찮아 보였거든."
"뭐가."
"능력도 있어 보여서 말이야. 이번처럼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민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과연 내가 아는 이민아답다. 이익에 민감한 녀석이니 내 옆에 있으면 이득이 된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지수랑 비슷한 이유지만, 이 녀석은 좀 더 속물적이다.
'상관없겠지.'
민아는 귀중한 전력이다.
어쨌든 후원을 하는 신이 신이니 이 녀석만큼 포텐셜을 가진 플레이어는 몇 없다.
후일을 생각하면 좋은 관계를 쌓아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서 B급 장비를 준거고.
"물론, 쫓아만 다니는 건 아니야.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제대로 도와줄게."
"그건 당연한 거다."
"뭐어?"
"잠깐."
뭐라 민아가 입을 열기 전에 나는 녀석의 입을 막았다.
왜냐면 앞에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너희는 누구야? 여기는 우리가 공략 중인 던전이다. 저리 꺼져!"
한 남자가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던전이라는 말에 민아가 눈을 반짝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돌아가죠."
"말귀가 통하는 놈이군."
내 답변이 만족스러웠던 듯, 남자는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특별히 헤코지를 하지 않았다.
"던전이 있다는데 그냥 돌아가는 거야?"
얌전히 뒤돌아온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듯 민아가 투덜거렸다.
"아니. 대충 위치는 알았으니 들어가야지."
"아, 진짜? 역시 그래야지. 근데 보아하니 던전을 공략하는 게 한두 명이 아닌 거 같던데?"
"그야 그렇겠지. 슬슬 무리를 이룰 시점이니까."
조금 있으면 '길드'도 생길 거다.
위기에 몰릴수록 사람들은 뭉치려하니까.
"그럼 어떻게 들어가게? 또 내가 뭔가 선동해야 되나?"
"그럴 필요 없어. 입구라는 게 거기에만 있으란 법은 없잖아?"
"앗, 그럼 혹시 다른 입구라도 찾아둔 거야?"
"아니."
내가 단호히 대답하다 민아의 얼굴이 단번에 실망으로 물들었다.
"뭐야 그게. 그럼 이제 다른 입구 찾자고? 그건 저기에 점거중인 사람들이 이미 다 했을 거 같은데."
민아의 말은 정론이었다.
이제와 새로운 던전의 입구를 찾아봐야 발견될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입구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
"??"
자고로 게임에서 캐쉬템으로 불가능한 일은 없다.
# 22
022. 파밍은 야비하게(2)
이 세계의 던전은 다른 게임과 마찬가지로 아이템과 장비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다.
그러니 대부분 플레이어는 던전을 발견하게 되면 정보를 숨기게 된다.
그만큼 던전에 대한 정보는 무척 귀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건 플레이어간의 이야기일 뿐이다.
정직한삶: 아오, 열 받아. 계속 플레이가 꼬이네. 저놈 뭔데 내 아바타를 계속 방해해?
어릿광대: ㅋㅋ깨소금맛.
정직한삶: 변신능력 쓰던 거 네 아바타지? 그렇지?
어릿광대: 전 몰라연~!
정직한삶: 아오, 저걸 진짜.
불금: 그만 좀 싸우고, 여기 던전있는데 선착순 세 명만 받아준다.
정직한삶: 난 바빠.
후레쉬바: 위치가 어딘데?
불금: 로메월드 타워에서 한 시간 거리. [지도표시]
후레쉬바: 아, 난 멀다.
'빙고.'
서울 지역 채팅방에는 여러 정보가 오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던전에 대한 정보도 심심치 않게 보였는데, 아까 남자들이 지키던 던전의 위치도 정확히 나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직한삶은 꽤나 화가 난 모양이네.'
박동권의 후원자로 추측되는 만큼 당연한 일이다.
어릿광대는 민아의 후원자이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을 거다.
"이쯤인가."
"뭐가 이쯤인데? 아까부터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민아가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채팅방을 한쪽에 열어둔 채 이동한 터라 민아를 상대를 할 틈이 없었다.
"당연히 던전을 공략하려는 거지."
"던전 입구는 저쪽인데?"
"내가 말했잖냐. 입구는 만들면 된다고."
나는 씩 웃으며 아스팔트로 된 바닥에 손을 짚었다.
채팅방에 올라왔던 던전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쪽까지 충분히 퍼져 있을 거다.
"탐사."
스킬명을 말하는 순간, 손바닥을 타고 마력이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
탐사(B)
손을 댄 장소를 중심으로 반경 50미터를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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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50미터 내에 존재하는 시설의 구조나 함정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우수한 스킬이다.
'과연 백금등급 보상.'
이런 보상을 받은 건 아마 내가 건물의 이점을 이용해 센티넬을 잡은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지면에 투사된 마력의 방류가 지면 아래의 정보를 읽어 들였다.
"여기는 아니군."
"뭐야, 뭔데?"
"좀 더 이동하자."
분명 이 아래에 던전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쯤이면 보스방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큰 던전인 모양이다.
"여기다."
몇 번을 더 사용하며 이동한 결과 제대로 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뭐가 여기인 거야? 제대로 설명 좀 해주라."
"여기 20미터 아래에 보스방이 있어."
"보스방? 아까 그 사람들이 지키던 던전을 말하는 거야?"
"그래."
보통 던전의 보상은 보스를 쓰러트리거나, 보스를 처치한 이후에 열리는 특수한 방에서 얻을 수 있다.
던전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긴 하지만 보스방에서 얻는 보상에 비하면 별거 없다.
"그래서? 그게 다야?"
"그게 다지."
"아니 20미터 아래에 있다며?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져? 오빠는 굴착기 기사 자격증이라도 있는 거야? 20미터를 어떻게 파겠다고."
민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리 말한 후, 짙은 한숨을 쉬었다.
"난 또 뭐라고. 거기다 몰랐을까 봐 말해주는데, 던전은 특수한 마력으로 보호받아서 그냥 땅을 뚫고 간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냐."
"네 신한테 들었냐?"
"응. 방금 쪽지 왔어."
꽤나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채팅방에서도 낄낄 거리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줄 알았더니 황당한 소리나 한다나.
'보통은 그렇지.'
민아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다.
나도 DLC 상점만 없었다면 이런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사용하면 어떨까?"
"뭐, 뭐야, 그건? 어디서 꺼냈어?"
"당연히 인벤토리에서 꺼냈지."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두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난 이후 모든 플레이어들은 일명 '인벤토리'가 지급되었다.
인벤토리는 이런 거대한 장비도 언제든지 꺼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을 자랑했다.
"자아."
나는 손에 들린 굴착 드릴을 지면에 댔다.
당연히 그냥 드릴이 아니다.
명색이 캐쉬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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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파괴자의 굴착드릴: 지면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던전의 지형마저 변화시킬 수 있지만 던전의 등급에 걸맞은 드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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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000포인트에 구매한 굴착 드릴이다!
이번 백금 등급 보상으로 받은 2000포인트를 전부 사용해서 구매한 캐쉬템이다.
어차피 남는 포인트가 많아서 더 비쌌어도 별생각 없이 구매했을 거다.
참고로 드릴은 별도 구매.
DLC 상점에서 판매하는 건 최하급인 철을 사용한 드릴뿐이다.
아마 더 좋은 드릴은 직접 만들어야 되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가변형 오리하르콘이 있단 말씀."
옅은 금빛을 발하는 드릴의 날을 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이 아래에 있는 던전이 어느 정도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하르콘 드릴로 뚫리지 않을 턱이 없었다.
"오, 오오.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잘 봐라. 보스방까지 직진하는 거야."
위이이잉!
거세게 회전하는 드릴을 천천히 지면에 가져다대었다.
두두두두!
지면을 부수며 들어가는 드릴의 모습에 민아가 놀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걸로 언제 파?"
아무래도 감탄해서 놀란 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도 심히 느렸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그 전에 저쪽에서 먼저 공략하는 거 아니야?"
"던전 공략은 최소 일주일 정도 잡아먹으니 그럴 일은 없다."
암 그렇고말고.
자유 퀘스트를 받는 건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플레이어 한정이니 저쪽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거다.
기껏해야 던전을 발견한 지 하루나 이틀 정도.
그사이에 공략을 해봤자 얼마 진행하지도 못했을 거다.
"애초에 그런 드릴은 땅 파는 드릴이 아니지 않나?"
"게임적 허용 모르냐?"
대략 한 시간 정도 두들기자 5미터 정도는 파고들어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정도 두드리니 내 어깨와 허리도 아주 말이 아니었다.
"야. 이민아"
"왜."
바닥에 누워 잡지를 보던 민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근처 서점에서 적당히 가져온 잡지인 모양이다.
"교대하자, 교대."
"오빠가 그렇게 힘들어할 정도면 애초에 난 무리 아냐?"
"단순히 피로가 쌓이는 거라 근력과는 상관없어. 아 진짜 한 시간만 교대하자."
더 이상 두드리다간 내 몸이 바닥보다 먼저 아작 날 것 같았다.
"알겠어. 대신에 나중에 던전 보상 나도 제대로 챙겨줘야 해."
내가 열심히 판 구멍으로 민아가 폴짝 뛰어내려 들어왔다.
나는 민아가 파는 걸 옆에서 구경하며 몸을 풀다가, 민아가 못 하겠다고 말하면 다시 교대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다섯 시간.
이미 해가 져서 하늘에 별이 반짝일 무렵에야 우리는 던전의 바로 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나 이거 두 번은 못할 것 같아."
"근데 해야 될 걸."
앞으로 갈 던전이 많거든.
콰드득!
던전의 천장을 드릴이 파고들자, 거미줄처럼 지면이 갈라졌다.
콰쾅!
"엄마야!"
바닥이 부서지자 민아가 비명을 질렀다.
[던전의 최심부에 도착했습니다.]
"제대로 왔군."
바닥에 착지하자 알림이 울렸다.
주변을 살피며 적당히 드릴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긴장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민아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에 있는 거, 보스 몬스터 아니에요?"
"맞아. 저 녀석이 이 던전의 보스다."
갑자기 던전의 천장을 부수며 들어온 탓에 주변의 몬스터들이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멘티스잖아?"
"으, 벌레는 질색인데."
거대한 사마귀의 형상을 한 몬스터, 멘티스.
주변에는 크기가 작은 리틀 멘티스들이 멘티스 주변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직은 보스라고 해봐야 이 정도겠지."
좀 더 등급이 높은 던전이었으면 일반 멘티스가 보스가 아니라 퀸 멘티스나 킹 멘티스가 등장했을 거다.
"너는 새끼들을 맡아라."
"알겠어."
지수 정도는 아니지만 민아도 어느 정도 전투력은 있으니 리틀 멘티스 정도는 견제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드릴의 날에서 다시 돌려받은 변이형 오리하르콘을 이전처럼 창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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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창(오리하르콘 코팅)(F → C+)
내구도: F → B
예리도: F+ → C
마력전도: F → C
특수능력: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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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하르콘이 코팅된 강철 창은 바질리스크의 가죽을 꿰뚫을 정도.
멘티스의 껍질 정도는 문제없이 뚫을 수 있으리라.
"키에에엑!"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멘티스의 날카로운 손을 피했다.
멘티스는 사마귀와 동일한 현태를 가진 만큼 공격패턴도 비슷하다.
공격은 매섭고 날카로우며, 곤충형 몬스터 중에선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쉬익! 쉬익!
저 날카로운 팔에 걸리면 단번에 대여섯 명의 사람도 단번에 잘려나간다.
명색의 보스 버프까지 걸려서 크기도 크다보니 처음 상대하는 플레이어들은 멘티스의 맹공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이다.
'공격만 조심하면 껌이지.'
반대로 껍질은 곤충형 몬스터 중에 약한 편이다.
특히 목이 지나치게 얇아, 제대로만 노린다면 단번에 죽이는 것도 간단하다.
"바로 이렇게."
서걱!!
금색 궤적이 스쳐지나가자 멘티스의 머리가 단번에 잘려나갔다.
"우와. 되게 능숙하네. 저거 그래도 E급 몬스터 아냐?"
"뭘 이 정도 가지고. 멘티스는 약점만 알면 쉬워."
멘티스가 쓰러지자 리틀 멘티스들이 바르작거리며 밖으로 달아났다.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모든 플레이어중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추가로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업적 '처음이 아니면 싫은 남자'를 달성하셨습니다.]
아니, 업적 이름 뭔데.
이런 업적명이 뜨는 것도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이후부터다.
그전에 달성한 업적은 퀘스트에 가산되어 보상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내가 보상을 여러 개 탈 수 있었던 거지.'
아무튼 이 '업적'은 최대한 많이 달성할수록 좋다. 업적의 숫자로 할 수 있는 게 늘어나니까.
"그럼 이제 뭘 떨궜는지 확인해 보자."
나는 점차 부스러지기 시작한 멘티스의 시체로 가까이 다가갔다.
"오, 마석."
멘티스가 드랍한 아이템은 F급 마석과 날카로운 일격이라는 스킬이었다.
"대단한 건 없네."
날카로운 일격도 고작 E급 스킬이었다.
"겨우 이걸로 끝이야?"
"설마. 이건 보스를 잡고 나온 것뿐이지, 던전 클리어 보상은 따로 거든."
보통 그런 건 보스가 있던 장소 바로 뒤편에 있는 방에서 나오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멘티스가 아까 서 있던 장소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다양한 아이템이 쌓여 있었다.
던전은 보통 다수의 인원이 공략하다보니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의 수가 많았다.
"와! 이거 다 가져가도 되는 거야?"
"딱 좋네. 다 챙겨."
"맡겨 둬!"
민아가 잔뜩 신난 얼굴로 인벤토리에 각종 아이템을 집어넣었다.
우리가 모든 아이템을 챙기고 던전을 빠져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
***
그로부터 4일 후, 열 명이 넘는 무리가 보스방 입구에 도착했다.
"형님,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아마 모든 플레이어 중에 최초로 던전을 공략한 게 분명해요."
"이제 벌레 새끼들하고도 작별이구나. 어서 가자! 던전 최초 공략은 우리의 것이다!"
"예, 형님!!"
점액으로 뒤덮인 바닥을 거닐며 남자들은 발길을 재촉했다.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하며 왔던가.
온갖 벌레형 몬스터들을 죽이며 지저분하고 끔직한 악취를 풍기는 던전을 헤집으며 겨우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이제 여기서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막대한 보상이 주어질 거다.
자신의 '신'이 그리 이야기했으니 분명할 거다.
"엥?"
긴장한 얼굴로 보스방으로 들어가자, 어째선지 휑했다.
"보스는?"
"안 보이는데요."
무언가 있었던 흔적은 있지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살충제를 뿌린 벌레둥지 같았다.
"형님! 저기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옳지! 그곳에 있나 보구나!"
당황했던 남자들도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없는데. 넌 좀 뭐 보이냐?"
"아뇨. 진짜 텅 비었는데요."
하지만 그곳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이 방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만 느껴질 뿐이다.
"신이시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남자는 울분을 표하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지만, 어쩐지 신은 대답이 없었다.
# 23
023. 파밍은 야비하게(3)
[익명 48번 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불금: 이런 시벌. 내가 공략하던 던전 누가 털어갔어?
어릿광대: ㅋㅋㅋㅋㅋㅋㅋ
불금: 뭐야 너냐?
어릿광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존나 웃겨.
불금: 아니 시벌, 말을 해. 빡치게 하네.
익명48: 저기, 제가 괜찮은 던전을 하나 발견했는데요.
불금: 뭐? 진짜 어딘데. 거짓말이면 알지?
익명48: 교대역 근처에요. 제가 좀 봤는데 거기에 C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불금: 뭐 C급?
어릿광대: 너 벌써 세 번째지? 확실히 믿을 만한 정보이긴 하네. 근데 어떻게 알아?
익명48: 다 아는 법이 있죠.
정직한삶: 얘 예지 계열 신 아냐? 출신이 어디야?
익명66: 출신 묻는 거 공지위반이다.
정직한삶: 예지 능력 깠으면 다 말했지 뭘. 예지 능력 가진 신이 몇 명이나 된다고. 어디야 너? 그리스냐?
어릿광대: 찐.
익명48: ^^;
정직한삶: 아씨, 애 나한테만 그래? 가뜩이나 일도 안 풀리는데.
불금: 가뜩이나 일주일 날려서 빡치는데 그거나 먹으러 가야겠다.
익명25: 나도 가야지.
불금: 와, 드루와. 내가 조져줄 테니까.
익명25: ㅋㅋ쌘 척 오진다잉ㅋㅋ
바람바람바람: 나도 간다.
"휘유."
확실히 C급 아이템이라고 하니 어그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계속 C급 아이템이 맞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이 근방의 아바타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 던전은 어디야? 우리 신님은 교대역으로 가라는데."
"응. 안 간다고 전해."
아무리 회귀했다지만 내가 기억하는 던전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내가 과거에 갔던 던전이나 혹은 대단한 보상이 나온 던전이 전부다.
후자의 경우에는 대부분 좀 더 나중에 생기는 던전들이어서 이때 생긴 던전들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다.
'그래도 하나.'
꼭 가야 할 던전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속적으로 채팅방에 다른 던전에 대한 정보를 흘리며 내가 찾는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몇 개 알고 있는 던전에 대한 정보도 다 풀었고.'
전생에 내가 갔던 던전 세 개다.
대다수는 꼽사리 껴서 갔던 거지만 보상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다지 내게 쓸모는 없지만 등급은 높아, 이렇게 미끼로 사용하기엔 아주 그만이었다.
"역시 오빠를 따라오길 잘했어. 이대로만 가면 곧 부자 되겠는데? 그냥 던전만 털어도 되는 거 아냐?"
"아니. 조금만 더 하다가 메인 퀘스트하러 가야지."
"꼭 그럴 필요 있나? 시간 제한도 없잖아."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그렇지. 하지만 네 번째 메인 퀘스트는 아니거든."
"어?"
세 번째는 제한이 없다.
하지만 네 번째는 제한이 있다.
즉, 세 번째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전에 네 번째 퀘스트가 시작되게 된다.
세 번째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한다고 죽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퀘스트 하나를 지나치게 되는 거지.
그것 자체로 굉장한 패널티다.
메인 퀘스트 보상은 일반 서브 퀘스트나 던전 보상보다 훨씬 큰 것이 주어지는 법이니.
"그, 그럼 바로 세 번째 퀘스트를 하러 가야 되는 거 아냐?"
"그전에 구하고 갈 스킬이 하나 있어."
잡다한 스킬이나 아이템들은 챙길 만큼 챙겼다.
던전의 위치도 채팅방으로 알아뒀으니 슬슬 그곳으로 향해야 할 때였다.
"세 번째 퀘스트를 찾는 게 먼저 아냐?"
"그건 이미 알고 있어."
"어딘데?"
여기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장소다.
"로메월드."
"거긴 최근까지 있었던 곳이잖아."
"거기 말고 놀이동산."
내 말에 민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물었다.
"진짜?"
"그래. 거기에 가면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활성화될 거야. 이미 상당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그곳에 있겠지."
"그럼 서둘러야 되는 거 아냐?"
그럴 필요 없다.
그곳에서 진행된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될 거다.
클리어한 사람이 나와도 끝나지 않고 계속.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대부분 죽을 거다.
그런 장소니까.
"오빠 표정 보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건 알겠네."
민아는 흥, 하고 코웃음 치며 바닥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도시의 빛 때문에 별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잘 보여."
"이 근방은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응, 맞아. 세상이 망해가니까 이렇게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다니, 참 웃겨."
민아는 묘한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나 또한 그런 민아의 시선에 이끌려 하늘을 보았다.
별이라.
그래, 저 별들이 필요하지.
"...별자리가."
"응?"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굳이 지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차차 알게 될 테니까.
***
송파역 4번 출구 근처. 텅 빈 던전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땅 파고 안가?"
"여긴 생각보다 깊어서 보스방 위치가 안 잡히더라."
"어쩔 수 없지."
이 던전은 전생에서 얼핏 들었던 장소다. 정확한 위치는 몰랐지만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알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거 둘러."
"응?"
나는 지수의 몸에 긴 천을 둘렀다.
"뭐야 이게."
"화살 공격을 막아줄 거야."
여태 많은 던전을 순회한 것도 결국 이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다.
C급 아이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 아래에 있는 물건과 스킬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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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막이 가호의 천(D): 5회의 원거리 공격을 반드시 막아준다. 모든 횟수를 소모하면 아이템이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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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급 아이템치고는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다.
목도리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거리 공격이 날아오면 자동적으로 방어한다.
소모성인 만큼 효과가 탁월하지.
나 역시 민아와 같이 목에 천을 둘렀다.
이걸 두 개나 구하느라 뼈 빠지게 던전을 돌아다닌 거다.
덕분에 '전문 굴착꾼'이라는 업적도 달성하긴 했지만, 그다지 기쁘진 않다.
"...조용하네. 진짜로 던전 맞아?"
"던전이 아니라면 지하철역에 이런 이상한 장소가 있을 턱이 없지."
"그건 그렇지만 너무 어둡잖아. 손전등이나 랜턴이라도 가져오지."
투덜거리는 민아에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가져오면 안 돼."
"왜?"
"이유가 있어."
던전은 굉장히 깊었다.
사방이 시커멓고, 지독히도 고요했다.
몬스터라곤 보이지 않고, 어두운 동굴 벽에 매달린 박쥐의 모습만 간간히 눈에 띄었다.
여태까지의 던전과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이런 던전도 있어. 모든 던전이 단순한 건 아냐."
오로지 트랩으로만 이루어진 던전도 있고, 혹은 들어가면 바로 보스방인 경우도 있다.
그걸 흔히 '레이드'식 던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던전은 그 레이드식 던전과 무척 흡사하지만, 다른 던전이기도 하다.
"근데 우리 계속 비슷한 곳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아."
"실제로 그래."
"아씨, 그럼 말을 했어야...."
"쉿."
투덜거리는 민아의 입을 막으며 조용히 경고했다.
"온다."
"응?"
한참을 걸어 내려왔다고 생각할 무렵, 후방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쉬익!
파앙!
"꺅?!"
민아의 목을 감싸고 있던 천이 움직여 날아온 화살을 방어했다.
"뭐, 뭐야?"
"4회 남았다. 조심해."
"으, 으응."
나는 바닥에 떨어진 화살은 주워들며 주변을 경계했다.
바닥에 떨어진 건, 시커먼 색의 화살이었다.
가뜩이나 어두운 던전 안에서 이런 화살이 날아온다면 눈치채기도 전에 목숨을 잃으리라.
실제로 채팅방에 올라왔던 정보도 바로 그것이었다.
'몬스터도 없는 던전에서 갑자기 죽었어!'
이 시기에 그런 던전이라고 한다면 역시 여기 하나뿐이지.
"작은 걸로 변하면 안 맞지 않을까?"
"그럴 리가. 저 녀석은 어떤 걸로 변해도 반드시 명중시킬 거다. 하나만 빼고."
"하나만 빼고? 그게 뭔데."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민아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해?"
"화살 조심하면서 보고 있어. 신호를 주면... 알지?"
"알겠어."
주위를 경계하며 민아의 손에 하나의 아이템을 쥐어줬다.
이것이라면 녀석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을 거다.
"자, 그럼."
쉬익!
파앙!
나 역시 횟수가 하나 까였다.
화살막이 천이 막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4회.
녀석은 쏘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으니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내가 특별히 널 위해 구해온 아이템들이다."
아까 전 녀석이 날린 화살에 품에서 꺼낸 실을 감았다.
"쫒아라, 추적의 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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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의 실(D)
물건에 감으면 원래 소유주가 있는 장소로 실이 뻗어나간다. 1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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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용 아이템이고 아주 먼 거리는 추적하지 못하지만 이런 던전 안이라면 얼마든지 쫒아갈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잡을 수는 없겠지만.'
녀석은 이 던전에 들어온 플레이어 중 가장 민첩이 높은 플레이어의 영향을 받는다.
녀석이 지나치게 빠른 것도 내 민첩이 현재 카운터스톱 상태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치를 안다 해도 내가 녀석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놓치지 않게 시야에 두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실이 쫒아가지 않았다면 제대로 윤곽조차 잡기 힘들었을 거다.
'보인다.'
[암야의 사수]
이 골치 아픈 몬스터의 이름.
센티넬을 제외하면 이 녀석보다 까다로운 몬스터는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을 거다.
'귀찮구만.'
녀석의 능력은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
다른 공격은 대부분 자신이 착용한 아이템의 보조를 받는다.
불빛이 비춘 곳으로는 이동하지 못하니, 언뜻 생각하기에 공략이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녀석은 자신의 약점을 알기에 빛이 보이면 애초에 다가가지 않는다.
내가 이런 던전에 랜턴 하나 들고 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파앙!
"3번."
녀석은 자신을 쫒아오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민아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는 녀석을 계속해서 몰았다.
잡지는 못해도, 이렇게 쫒아가며 위협하는 건 가능했다.
파앙!
"2번."
얼마 남지 않았다.
파앙!
"1번."
목에 감겨진 천의 내구도가 한계였다.
녀석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어둠속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파앙!
"끝."
목에 감겨 있던 천이 산산이 부서졌다.
"...!"
얼굴이 없는 암야의 사수지만, 그런 나를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에게 나도 비웃음으로 답했다.
"끝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
녀석은 쫒으면 계속 도망친다.
그러면 어떻게 녀석을 잡느냐.
쫒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 던전의 구조는 참 거지같아서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지나가기도 하거든.
아까 민아가 짜증을 부렸던 것처럼.
"짜잔!"
동굴벽에 매달려 있던 박쥐가 인간으로 변하며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
섬광의 표식(E)
반경 10미터가 밝은 빛에 휩싸인다. 3미터 내에 있던 몬스터나 플레이어가 이 빛을 2초간 응시할 경우 10초간 실명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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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 내가 민아에게 몰래 쥐어줬던 물건이다.
본래는 실명 상태를 유발하는 아이템이지만, 조건이 까다로워 그다지 좋은 아이템은 아니다.
하지만 반경 10미터를 빛으로 휩싸이게 만드니 이 녀석을 잡는 데 이보다 좋은 아이템이 없다.
파아아아!!
내가 암야의 사수를 몰고 간 사이, 민아는 벽에 붙어 박쥐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암야의 사수가 아까의 위치로 돌아오는 순간, 박쥐로 변해 대기 중이던 민아가 아이템을 사용한 거지.
"...!!"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던전 안에 있는 건 우리와 암야의 사수.
그리고 박쥐들뿐이다.
녀석은 박쥐를 쏘지 않는다.
흔히 게임을 하면 던전에 돌아다니는 작은 동물들이 있다.
일명 그것을 오브젝트라고 부르며 플레이어나 몬스터는 그것을 보통 터치할 수 없는 게 보통이다.
박쥐는 아마 그런 기믹으로 던전 내에 존재했을 것이다.
분위기를 살리는 용도.
이 지역의 GM은 '게임'이라는 것에 집착하며 겉멋이 잔뜩 들어 있는 녀석이니까.
"죽어 새끼야."
섬광탄이 터지고 사그라지는 몇 초.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녀석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24
024. 시작되는 변화(1)
"던전 아래로 더 내려갈 필요 없어?"
"어, 이 던전은 이 녀석이 떨군 아이템이 전부야."
레이드식 던전은 대체로 그런 식이다.
보스 몬스터를 제외하면 다른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다보니 던전 자체의 보상이 없다.
대신 보스 몬스터를 잡고 나오는 보상이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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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야의 외투(B)
내구도: C
방어도: E+
마법저항: E+
특수능력: 그림자 질주(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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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장 눈에 띄는 아이템은 녀석이 입고 있던 외투였다.
내구도를 제외하면 그다지 쓸 만하다고 볼 수 없는 물건이지만 특수능력이 살렸다.
덕분에 등급은 무려 B등급.
이것과 동등한 아이템은 당분간 볼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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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질주(B+): 반경 10미터 내에 있는 그림자로 이동할 수 있다. 5분에 1회 충전되며 최대 3회까지 충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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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질주는 바로 녀석이 계속 사용하던 능력.
당연히 녀석이 사용하던 것보다는 너프되긴 했지만 그림자를 이용해 이동하는 건 굉장한 메리트다.
생존기도 되고, 기습용으로도 아주 좋다.
'능력치는 나중에 수선해서 올리면 되고.'
색깔도 검은색이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난 이거랑 이거만 가질 테니, 나머지는 네가 가지고 싶은 거 가져."
"아, 진짜? 근데 그 외투도 맘에 들었는데.... 어쩔 수 없지."
민아는 흔쾌히 양보하며 남은 아이템을 챙겼다.
내가 챙긴 건 이 암야의 외투와 하나의 장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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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야의 장갑(C)
내구도: D
방어도: E
마법저항: E
특수능력: 필중(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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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C등급 아이템.
민아가 가져간 아이템 중에 C등급 아이템만 세 개가 더 있던 걸 생각하면 이 암야의 사수라는 보스는 일반적인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최소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이나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겠지.
보상도 그에 걸맞은 초호화 사양이다.
실제로 전생에 이 던전이 공략된 건 꽤나 후였다.
"생각보다 룩도 나쁘지 않은데?"
검은색 상의를 입고, 장갑을 끼자 조금 폼이 나는 기분이다.
'이제 챙길 건 다 챙겼나.'
내가 이 던전을 공략한 건, 사실이 장갑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암야의 장갑에 붙어있는 스킬 '필중'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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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중(B): 자신이 목표로 한 장소로 정확히 물건을 던지거나 쏘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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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중 스킬은 무려 B급 스킬. 사실상 그림자 질주와 같은 등급의 스킬이다.
심플한 효과와 달리 이 스킬을 얻는 방법은 무척 고되고 힘들다.
B급 스킬치곤 굉장한 레어도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난 이 스킬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제 3번째 메인 퀘스트로 가면 되겠어."
나머지 스킬들은 던전을 순회하며 이미 얻어둔 터라 사실상 준비는 이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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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세한
칭호: 2회차 플레이어
특성: 싱글 플레이어
힘: F (100 +10)
민첩: F (100)
마력: F (100)
체력: F (100)
보유 스킬:
[결전의 시간(F)(성장형)], [재생(F)(성장형)], [천살성(S)(공유스킬)], [소음차단-하(E)] [인챈트(화)(E)], [탐사(B)], [그림자 질주(B)], [필중(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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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비하면 스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능력치는 아마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야 1단계 능력치 제한이 풀려 올릴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이 정도가 내가 준비할 수 있는 한계였다.
세계의 어떤 플레이어보다도 내가 강하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부족해.'
녀석을 죽이기 위해선 이걸로는 부족했다.
현재 이룰 수 있는 플레이어의 '한계'로는 녀석을 죽일 수 없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건 문제 없겠지만, 내 목표는 겨우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올 클리어'이니까.
"흐음...."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상태창 구석에 있는 한 알림창을 확인했다.
그것은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이후에 올라온 한 알림이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 시, '1회차 계승 패키지'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1회차 계승 패키지라....'
처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패키지 중에 하나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이후, 이 패키지의 내용물을 대략적으로 확인이 가능해졌다.
'그나마 다행이야.'
만약 이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을 거다.
이 시기에 직접적인 맞대결을 벌이기보단 좀 더 힘을 키우는데 집중했겠지.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녀석을 죽인다.'
그 썩을 까마귀 새끼는 오래 살려둬서 좋을 것이 없었다.
***
딩동.
강남에 있는 한 아파트.
이름만 들어도 대부분 알 수 있는 부자 동네에 있는 아파트였다.
"...없나?"
지수는 대답이 없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문은 제대로 잠겨 있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이 몬스터였다.
대부분 강하지 않은 F급 몬스터였지만 당연히 평범한 사람보다는 강하다.
아마 아파트 단지에 대량의 몬스터가 나타났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곳도 '스테이지'였던 건지도 모르지.
"아무도 없나요?"
초인종을 눌러보고 손가락으로 문을 두들겨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파트에 인기척은 없었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우직.
"이크."
지수는 무심코 발을 뒤로 빼다가 방금 전 자신이 죽였던 몬스터의 머리를 짓밟았다.
이곳으로 오며 상당한 몬스터를 처죽인 터라 꼴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지수는 손에 들린 철퇴를 들어 문을 후려쳤다.
콰아앙!
두터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현관문이지만 지수의 철퇴에 우그러지며 부서져 나갔다.
플레이어인 지수의 근력은 이미 인간의 것을 한참 초월해 있었다.
"엄마, 아빠."
현관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어온 지수는 자신의 부모를 불렀다.
"캬아아악!"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모가 아닌, 날개가 달린 몬스터들이었다.
'인면조'라고 불리는 하급 몬스터들.
이미 이곳으로 오며 몇 번이나 마주쳤던 괴물이다.
아마 배란다의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귀찮게."
당연히 지수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철퇴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인면조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콰지직!
몬스터의 피가 지수의 몸을 적실수록 지수의 공격은 더욱 강맹해졌다. 몇몇 인면조가 지수의 몸을 물어뜯었지만, 지수는 도리어 그것을 노려 머리를 뽑아버렸다.
지수가 모든 인면조를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투둑, 투둑.
"음...."
지수는 인면조들의 살점을 밟으며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살점이 뜯어 먹혀 있는 한 남성이 있었다.
나이는 대략 5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빠."
공교롭게도 그 남성은 지수의 아버지였다.
지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죽어버렸네."
다행인 점은 자신의 어머니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죽으면 어떡해."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지수는 양손으로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삐삐삐삐.
그때, 거실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
지수는 눈물을 닦고 거실로 향했다.
전화기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지수의 눈에 안도감이 서렸다.
"다행이다."
지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엄마. 응. 나야."
그렇게 말하는 지수의 눈동자는 피와 같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
"어, 사람이다."
로메월드의 입구로 향하자, 깔끔하게 직원복장을 입고 있는 여성이 서 있었다.
마치 입장표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싱긋 웃으며 친절하게 인사하는 직원의 모습에 민아의 표정이 점점 괴상하게 변했다.
"설마 여기 영업하는 거야? 여기는 몬스터가 피해 가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있냐. 그런 건 주변만 봐도 알잖아."
로메월드 입구에는 분명 몬스터나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이 존재했다.
"그럼 이건 뭔데? 오빠는 이상하지도 않아?"
"애초에 여태까지 이상하지 않았던 일이 뭐가 있냐."
"그건 그렇긴 해."
민아는 유심이 여성을 관찰했다.
혹시 몬스터가 아닌지 살피는 눈치다.
"그만 좀 봐라. 사람 맞으니까."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언니. 몬스터가 무섭지도 않아요?"
꽤나 무례하다면 무례한 민아의 질문에도 직원 아가씨는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현재 로메월드는 무료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내가 직원 아가씨의 말에 태연히 답하자 민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팔을 잡아당겼다.
"앗, 오빠!"
"아, 왜."
"이렇게 수상한데 들어가려고?"
"그럼 안 들어가고 퀘스트를 어떻게 깨?"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에 민아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끙,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은 민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았어."
"그럼 들어가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 아가씨가 입구의 문을 열어줬다.
"그럼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나가실 때는 이곳이 아닌 출구를 이용해 주세요."
그림 같은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에서 멀어지자. 옆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아에게 말했다.
"가뜩이나 곤란한 사람 좀 그만 괴롭혀라."
"하지만 이상한 걸 어떡해."
"얼굴을 보고도 모르겠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애초에 저 직원분은 플레이어도 아냐."
"그렇긴 한 것 같았지만... 그럼 왜 그런 걸 하는 거야?"
"이곳을 지배하는 녀석의 악취미지."
화장으로 감추고 있지만 창백한 얼굴과, 문을 열 때 떨리는 손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눈동자에 가득 찬 공포.
아마 그녀는 지금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을 거다.
"저 사람들도 플레이어 아니지?"
"그래. 아마 다 일반인들이다."
"그래도 죽이진 않았네."
민아의 시선이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고정됐다.
플레이어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솜사탕이나 풍선을 팔고 있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나는... 아니. 아니다."
민아의 목소리가 조금 우울해졌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나는 민아의 능력에 대해선 알아도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내 말은 정말로 죽을 수도 없어서 저렇게 살고 있다는 거다."
"응?"
"놀이공원은 기구만 있다고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
녀석은 이곳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즐기는 법을 알고 있는 거지.
무작정 죽이는 것보다, 그냥 이런 상황을 만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는 게 즐거운 거다.
"근데 메인 퀘스트는 언제 시작해? 혹시 구라 아냐?"
"좀 더 들어가면 뜰 거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어느 정도 걸었을 무렵 퀘스트 알림이 들려왔다.
=
메인 퀘스트 3
유원지의 사람들을 구해라!
현재 유원지의 사람들은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다. 누군지 모르는 살인범과 목숨을 노리는 몬스터들! 당신은 그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유원지를 탈출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을 구해 유원지를 탈출할수록 보상이 상승한다.
현재 생존자
플레이어: 138명
일반인: 725명
난이도 C 제한시간: 4번째 메인 퀘스트 시작 전까지 클리어
==
"봐라. 퀘스트가 뜨잖...."
허공에 뜬 퀘스트 알림창을 보며 말하던 나는 말을 멈췄다.
잠깐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아, 정말 떴다! 응? 뭐야. 오빠 말대로 떴는데 표정이 왜 그래?"
"예상한 것과 좀 달라서."
"뭐가?"
뭐냐고? 내가 알던 퀘스트 내용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몇 번을 읽어도 아니야. 내 기억으로 여기서 발생한 퀘스트는 결코 C급이 아니었어.'
아무리 봐도 퀘스트 내용은 내 기억과 전혀 달랐다.
이런 내 생각을 알리 없는 민아는 그저 밝게 웃었다.
"퀘스트가 쉬워 보이네. 그냥 놀이기구만 타면 되잖아?"
"...뭐라고?"
"뭐냐니. 놀이기구 타고 도장 다섯 개만 받으면 끝나니까 쉬워 보인다는 건데?"
말하는 걸보니 나와 퀘스트 내용이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도장'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분명 내 기억속의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분명했다.
'분명 이런 내용이었지.'
==
메인 퀘스트 3
유원지를 즐겨라!
당신들은 놀이공원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놀이공원은 당신이 아는 즐거운 곳이 아니다. 다양한 어트럭션을 즐기고 다섯 개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
난이도 D 제한시간: 없음.
==
이것이 원래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다.
분명 민아가 받은 메인 퀘스트도 이것일게 분명했다. 다섯 개의 도장을 운운하는 걸 보면 확실하지.
'등급도 하나 올라갔고, 전혀 다른 퀘스트 내용이라니.'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GM과, 시스템 정도.'
전자는 아니다.
만약 GM이 관여했다면 녀석은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경고를 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인가.'
뭔가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던 거다.
뭐, 센티넬을 두 번이나 잡은 시점에서 아웃이긴 하다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센티넬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후의 메인 퀘스트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왜, 왜 그래?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이거 그렇게 어려운 퀘스트인 거야?"
"아니."
"아닌 표정이 아닌데? 완전 어려운 거 아냐?"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하자."
애초에 나와 민아의 퀘스트가 달라서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민아가 받은 퀘스트라면 이미 공략을 숙지한 상태라 어려운 퀘스트는 아니었다.
"후우."
단지 퀘스트 난이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지.
이번에는 그저 퀘스트가 달라졌을 뿐이지만 앞으로는 또 뭐가 달라질지 모른다.
'좋게 생각하자.'
내가 무언가를 할수록 미래는 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변화만 있는 게 아니다.
분명 긍정적인 변화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왜냐면 이건 내가 하는 행동으로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25
025. 시작되는 변화(2)
"그래서 이번 퀘스트는 결국 쉽다는 거야 어렵다는 거야?"
유원지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굳은 내 얼굴을 살피던 민아였지만, 역시 오래가지는 않았다.
애초에 민아는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니니 그럴 만도 하지.
"원래는 쉽지."
"무슨 뜻이야? 원래는 쉽다니."
"이곳엔 쉬워야 할 퀘스트를 어렵게 만드는 원흉이 있거든."
가만히 서 있어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건 그 탓이다.
본래 내가 이곳에 오려했던 이유 중 하나인 '녀석'이 이곳에 있었다.
바로 까마귀 자리의 카라스가.
"야. 너 혹시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라는 게임 아냐?"
"갑자기 게임 이름은 왜 나와?"
"이곳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게임이니까."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라는 게임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원지를 경영하는 게임이다.
새로운 놀이기구를 개장하거나, 손님들을 영업하여 매출을 올리는 게임.
참으로 건전한 게임 같지만, 비상적으로 플레이한다면 얼마든지 또라이 같은 플레이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출구를 만들지 않고, 지하세계로 보내 버린다든지."
"뭐야 그게."
"아니면 결함 놀이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도 있어."
"...진짜로?"
"그래. 그리고 이 놀이동산은 그런 마인드로 경영 중이라는 거야."
매출은 아무래도 좋다.
그냥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마인드로 놀이공원을 운영 중인 녀석이 있다.
"헐, 누가? 혹시 그 두 번째 퀘스트의 센티넬인가 하는 녀석 같은 놈이야?"
"아니."
"그럼... 게임의 GM이라거나?"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뭔데?"
민아가 새치름한 눈매를 한층 위로 치켜 올리며 말했다.
"나도 몰라."
"뭐?"
"나도 모른다고. 나라고 뭐든 다 아는 줄 아냐? 아마 어떤 또라이 같은 놈이겠지."
"그, 그건 그렇지만... 뭔 다 안다는 것처럼 말하고선 맥 빠지게."
볼을 긁적이며 무안하다는 얼굴로 민아가 중얼거렸다.
"분명 어떤 놈이 지 마음대로 놀이공원을 운영하고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한 사람들이 이 상황에 알바를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아마 그놈이 퀘스트 난이도를 높인 원흉일 게 분명해."
"으음. 난 모르겠다. 하지만 D랭크 퀘스트니까 오빠 말도 일리가 있네."
현재 우리 수준에서 D랭크 퀘스트면 보통 나올 수 없는 수치다.
분명 다른 뭔가가 관여하고 있다는 거니까.
'실수로 다 말해 버릴 뻔했네.'
이곳에 카라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그걸 아는 건 이상하다.
'거기다 이 시기에 '별자리'에 대해 아는 플레이어가 있을 리도 없고.'
이 세계에는 강한 몬스터들은 수없이 많다.
센티넬은 그중에서 정점에 위치하는 계층이다.
그리고 별자리는 그 센티넬과도 격이 다르다.
강함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격이 다르다.
순수하게 강함만 따지면 센티넬이 별자리보다 강한 경우도 있다.
극히 드문 경우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곳을 지배하는 녀석은 까마귀자리의 카라스.
격은 별자리 중에서도 낮은 편이지만 엄연히 신성을 가진 녀석이다.
'아주 말이 많은 놈이지.'
신화를 보면 말을 못 해야 정상이지만, 입이 가벼운 수다쟁이 까마귀다.
'본래라면 아직 별자리가 등장할 시기가 아니지만.'
이 녀석의 경우만 예외.
워낙 급이 낮아서 신성만 낮춘다면 얼마든지 현계할 수 있다는 꼼수를 부린 거다.
이 시기에는 자신을 해할 녀석이 없으니 신나게 놀다 가려는 속셈이겠지.
실제로 전생에서는 신나게 놀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후에 등장해서 인간들을 괴롭히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낮은 신성을 지닌 별자리지만 인간에게 끼친 피해는 상위 신성을 지닌 별자리 못지않았다.
"아무튼 뭔가 쎈 놈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이잖아? 조심하면 되겠지."
"그렇지. 그런 생각으로 방심하지 마."
"응."
민아의 작은 머리가 끄덕여졌다.
"근데 오빠. 내가 예전에 왔던 로메월드랑은 구조가 좀 다른 것 같아."
"그야, 이곳을 지배하는 놈이 지 맘대로 바꿨을 테니까."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이 세계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으니 당연하다.
우리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자,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아까부터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사람 중 하나였다.
"저, 잠시 이곳은 어떠신가요? 아주 재밌습니다."
그들은 로메월드에서 어트럭션을 관리하는 알바생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억지로 웃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웃고 있다기보단 공포에 젖어 있는 표정이었다.
"어떤 건데요?"
"그, 그게."
그들의 얼굴에 인상을 찡그린 민아가 물었다.
"유령의 집인데요, 아주 재밌습니다! 한 번만 와서 해주세요!"
직원은 절실한 얼굴로 유령의 집의 입구를 가리켰다.
툼 오브 피어라고 적혀있는 유령의 집은 딱 보기에도 으스스한 기운이 풍겨왔다.
"윽, 유령의 집은 조금...."
"뭐야, 너 저런 거 싫어하냐?"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꺼려진다는 거지, 무섭다는 건 아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소리친 민아는 휙 고개를 돌렸다.
"좋아요, 들어갈...."
삑삑삑삑.
민아가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은 직원의 목이었다.
"헉."
마치 은색 띠의 형태를 한 초크의 중앙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시뻘건 빛을 내며 연신 깜박이고 있었다.
"잠깐만. 아직 시간 남았잖아. 기다려. 기다리라고!"
"저기요, 왜 그러시는...."
"우아아아아!"
퍼걱!
남자가 울부짖으며 초크를 잡아 뜯으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점차 보석이 깜박이는 속도는 빨라지며 이윽고.
퍼걱!
후두둑.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초크를 잡고 있던 남자의 손과 머리가 터졌다.
머리가 사라진 사내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어?"
아연한 얼굴을 한 민아에게 다른 직원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계속 영업에 실패해서 시간이 다 된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민아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바닥에 쓰러진 직원의 시체를 보았다.
도저히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렇게 펑펑 사람을 죽이는 걸 보면, 그만큼 대체할 수 있는 이도 많다는 거다.
'플레이어가 138명, 일반인이 725... 아니, 724명.'
아까 받았던 메인 퀘스트를 살펴보면 일반인의 숫자가 한명 줄어 있었다.
난이도가 C랭크에서 짐작은 했지만, 진짜 거지같은 퀘스트다.
"오빠."
"네 잘못 아냐. 애초에 이런 식으로 설계한 걸 거다."
자신이 느리게 대답해서 직원이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민아의 눈가가 약간 촉촉했다.
강한 척하기는 해도 민아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나는 민아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새끼.'
전생에 이곳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일반인이나 플레이어나 구분 없이.
하지만 생존자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극히 소수의 생존자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플레이어들에게 전했다.
그 생존자가 내가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였다.
'다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걸리는데.'
아직 놀이공원에 보이는 건 일반인들의 모습뿐이다.
다른 장소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분명 그들이 운영하는 놀이기구를 이용하면 도장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민아와 퀘스트가 다른 나는 굳이 놀이기구를 이용하고 도장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우선 간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모양세라도 도장을 얻어두는 편이 유리했다.
"갑시다."
"정말 가실 건가요? 가시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겁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직원의 모습은 뭔가를 초탈한 기분이었다.
"포기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어차피 다 죽을 겁니다. 이곳에 들어왔던 플레이어 분들도 얼마가지 못해 대부분 죽거나 숨었거든요."
"...그렇군요."
카라스가 운영하는 놀이동산이니 일반적인 플레이어들로서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늘에 돌아다니는 옵저버도 없는 걸로 보아 신의 아바타도 없는 것 같았다.
"이곳은 말 그대로 유령의 집입니다. 클리어 방법은 간단, 끝까지 통과하시면 됩니다."
"간단해서 좋군요."
"간단한 만큼 무서운 법이죠."
직원 남자의 짤막한 경고였다.
아마 진심이겠지. 이곳을 이용한 플레이어가 우리만 있을 리는 없으니까.
"예, 조심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즐거운 관람되시길."
직원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입구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연 것만으로 섬뜩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으."
민아가 내 소매를 잡으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무서워하는 거 아냐? 겨우 입구다. 입구."
"그, 그냥 어두우니까 잡았을 뿐이야. 혹시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
전에 암야의 사수가 있는 던전에서는 안 그런 것 같은데.
어둡기도 거기가 더 어둡다.
"알았으니까. 조심하면서 쫒아와."
"응, 아, 알았어."
목소리가 아주 달달 떨린다.
요즘 고등학생 중에 유령의 집을 이렇게 무서워하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솔직히 신선한 느낌이다.
우리 때는 '야, 이딴 게 뭐가 무섭냐.'라고 말하며 뛰어다니기 일쑤였는데.
'음?'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기척이 느껴졌다.
"야, 숙여!"
"어, 엄마야!"
머리를 노리며 휘둘러지는 시퍼런 칼날.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대략 서너 개의 칼날이 우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건 그냥 던전이잖아, 미친."
하긴 당연한 결과긴 하다.
이곳이 평범한 유령의 집일 턱이 없으니.
"히, 히익. 딸꾹."
얼마나 놀랐는지 민아에 이르러선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비주얼은 죽이네."
"씨잉, 그런 말이 나와? 딸꾹!"
안에 있는 건 하급 스켈레톤과 구울과 같은 좀비류 괴물들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몬스터의 모습이라기보단 가뜩이나 흉측한 모습을 더더욱 공포스럽게 꾸민 얼굴이었다.
구울의 경우에는 손에 전기톱을 들고 있는 놈도 있었다.
몬스터는 오로지 마력이 담긴 장비만 통하지만 플레이어는 그렇지 않으니까!
"꺄아아아악!!"
"야, 시끄러."
거기다 옆에 있는 녀석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의 모습에 비주얼 쇼크를 받은 모양이다.
'솔직히 지릴 만하네.'
전생에 온갖 몬스터를 잡아서 적응된 거지, 아니었다면 나도 민아랑 같은 꼴이었을지도 모른다.
'씁, 어쩔 수 없지.'
이번만큼은 민아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앗!"
"이번만 참아."
혹시 모르니 손목을 꽉 붙잡고 몬스터들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위이이잉!
"크아아아!!"
"적당히 해라, 침 튀긴다."
전기톱을 휘두르며 덤벼드는 구울의 목을 잘랐다.
구울뿐이 아니다, 살점이 가닥가닥 붙어있는 스켈레톤들이 우리의 다리를 붙잡기 위해 기어오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체형 몬스터가 없었다는 점이다.
서걱!
"그래도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니야. 야, 이민아 너도 그냥 잡을 수 있는 놈들이라니까?"
"싫어싫어! 어헝헝!"
"그아아아!"
"꺄아아아아!"
각종 소음을 서라운드로 들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기본적인 구조는 유령의 집과 같아.'
간간히 분기가 나오며, 함정이 튀어나오고. 몬스터가 덮쳐드는 형식.
문제라면 함정이나 몬스터들이 우리를 진짜 죽이려고 한다는 거지.
"윽."
길을 걷다보면 비명횡사해서 시체가 되어버린 플레이어들이 얼핏 보였다.
"흐, 흐으. 엄마아아."
울다가 딸꾹질하고 경기를 일으키느라 바쁜 민아는 내 한쪽 팔을 아주 꽉 잡고 기어가는 속도로 이동했다.
덕분에 유령의 집 난이도가 무척이나 높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평범한 플레이어였으면 민아랑 사이좋게 이곳에서 시체가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기실 난이도는 내게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내 능력치와 스킬을 생각하면 하품을 하면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
'뭐, 남을 지키면서 싸우는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봤겠어.
언제나 독고다이였지.
새삼 느끼는 거지만 사람을 지키면서 싸우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느꼈다.
대략 15분쯤 지나, 우리는 유령의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빠져나오신 분은 처음입니다."
입구를 나가자 아까 우리를 안내했던 직원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근데 거기 아가씨는...."
직원의 말에 내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던 민아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저, 저도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그럭저럭 괜찮기는 개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으면서 말은 잘도 한다.
심지어 입에는 침 자국까지 있었다.
외투가 침 범벅이 되지는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 되는걸.
"괜찮았다니 다행입니다."
상냥한 직원은 민아를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저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목에 걸려 있는 그거."
"족쇄 말입니까?"
아무래도 저 목걸이를 족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딱 어울리는 명칭이기는 하네.
"예, 그거 어디서 구할 수는 없습니까?"
그는 내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목에 걸면 폭발할 뿐인 목걸이에 관심을 가지니 이상할 수밖에.
아마 이곳에 있는 일반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아이템일 테니 일반적인 경로로는 없을 수 없을 거다.
"이건."
직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신중해진 직원의 얼굴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인가?
"기념품 코너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아, 예."
난 대체 뭘 고민했던 걸까.
# 26
026. 시작되는 변화(3)
"정말로 구매하실 건가요?"
"네. 하나 주세요."
직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목걸이를 건넸다.
가격도 비싸다.
무려 500포인트나 한다.
내게는 껌값이지만 조금의 포인트라도 소중한 플레이어에겐 상당한 가격이었다.
"이걸 왜 사? 누구 목에 채우게?"
"잠시 실험하고 싶어서."
기념품 코너에서 목걸이를 구매해서 나온 나는, 적당히 벤치에 앉아 목걸이를 훑었다.
직원의 설명대로라면 목걸이의 원격으로 조작하여 폭파시키거나, 특정한 조건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한다.
"어디...."
목걸이를 대충 설정한 뒤, 인벤토리에서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꺼냈다.
내가 가진 물품 중에 가장 열일을 하는 건 아마 이게 아닐까 싶다.
스르륵.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목걸이에 가져다대자 병에서 흘러나온 오리하르콘이 목걸이를 감쌌다.
"코팅하면 위력이 쎄진데?"
"그럴 리가 있냐. 너 문과지."
"이게 문과나 이과가 무슨 상관인데!"
시끄럽게 떠드는 민아를 무시하며 목걸이를 훑었다. 오리하르콘이 감싼 건, 목걸이의 중앙뿐이다. 둥근 금속 덩어리가 있는 부분.
아까 목걸이가 터져 죽은 남성을 생각하면 폭발하는 부분은 여길 거다.
"그럼 이제."
나는 목걸이를 조작했다.
그리곤 목걸이를 바닥에 두고 조금 떨어졌다.
"뭐하는 거야?"
"보면 알아."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는 순간 목걸이가 크게 튀었다. 하지만 겉은 변화가 없었다.
"저거 왜 저래?"
"폭발시켰거든."
"멀쩡한데?"
"당연히 오리하르콘으로 감쌌으니까."
가변형 오리하르콘은 물건 내부에 침투하는 게 아닌, 외부에 막을 만드는 식이다.
굳이 말하자면 껍데기를 얇게 두른다고 할 수 있다.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로는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껍데기를 부술 수 없었다는 거야."
"아하."
그래도 혹여나 함께 부서지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오리하르콘에는 변화가 없었다.
고작 사람 머리를 날려 버릴 정도의 위력으로는 오리하르콘에 기스도 내지 못한다.
"정말 산산조각 났네."
오리하르콘을 해제하자 목걸이의 부서진 파편이 눈에 들어왔다.
민아는 잘게 부서진 파편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물었다.
"근데 이런 걸 실험했다는 건 사람들을 돕겠다는 거?"
"그러려나."
"난 오빠가 그렇게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민아가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차마 부정할 수는 없어서 난 그저 피식 웃었다.
'한 번 외면했던 이들은 두 번 외면하기도 쉽다.'
전생에 내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었던 사람이 했던 말이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는 이라면 무조건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코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나 역시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생의 난, 그 사람처럼 될 수 없었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우와, 오글거려."
괴상한 제스쳐를 취한 민아는 아까 전 우리가 들어갔던 유령의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제 다시 저기로 돌아갈 거야?"
"아니."
"사람들을 돕는다며? 아까 그 아저씨 도와줄 거 아니었어?"
"무작정 돕는다고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당장 목걸이를 해제한다고 쳐도 그 직원이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입구로 나갈 수도 없을뿐더러, 출구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도 아닌 그가 혼자서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우리가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섣불리 구해선 안 됐다.
'우선은 정보를 모아야겠어.'
도장을 모으면서 돌아다니면 되겠지.
지수의 퀘스트도 깨고, 유원지의 내부도 둘러보고.
"다음은... 어디 보자. 너 롤러코스터는 좀 타냐?"
"그런 건 완전 잘 타지. 유령의 집만 아니면 나 놀이공원 고수야!"
"그렇다면 거기로 가자."
"좋아!"
놀이공원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이제 싫어."
팔에 찍힌 네 번째 도장을 보고 있자, 민아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령의 집만 아니면 괜찮다며?"
"그건 평범한 놀이공원일 때 이야기지. 뭐 이런 게 놀이공원이야? 미쳤어?"
"하긴 너, 나 아니었으면 네 번쯤 죽었을 것 같더라."
"어트렉션을 네 번 이용했는데 네 번 죽었으면 전부 죽을 뻔했다는 거네.... 나 완전 파리목숨."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도 이해는 갔다.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안전 바가 없었다. 그뿐이랴, 주행하는 내내 비행형 몬스터가 달려들어서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다.
다른 놀이기구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후룸라이드의 경우에는 떨어지는 순간 몬스터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자이로드롭은 브레이크 없이 지면에 처박아 우리를 산산조각 내려고 했다.
솔직히 처음 유령의 집은 귀여운 수준이지.
이건 죄다 플레이어를 찢어 죽이겠다는 악의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하나 남았네. 빨리 끝내고 이런 놀이공원은 나가자, 오빠."
도장 다섯 개를 받으면 퀘스트는 클리어된다.
민아는 조금이라도 빨리 마지막 도장을 받고 나가고 싶은 눈치였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내 퀘스트는 아직 제대로 진행조차 하지 못했다.
도장을 아무리 받아봐야 내게는 그저 특이한 모양의 타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차피, 다음 거는 못 탈 것 같다."
"왜?"
"운영 시간이 끝났거든."
거기다 몇몇 어트렉션은 대놓고 직원이 사라졌다.
이용할 수 없다는 의미이리라.
난이도가 가장 어려운 것들로만 남겨둔 거겠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섯 번째는 절대 클리어할 수 없는 것만 남을 거다.
빰빠밤~!
"깜짝아."
갑자기 울리는 커다란 소음에 민아가 화들짝 놀랐다. 시선을 돌리자 반짝이는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저게."
"밤에 열리는 축제행사 같은 거겠지. 우선 숨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얼핏 보면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숫자의 무리.
플레이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흉흉한 분위기가 풍겼다.
우리는 근처 건물에 숨어 상황을 관찰했다.
"퍼레이드 같은데?"
"그래, 저거. 전부 몬스터들이다."
인형탈을 쓰고, 마치 할로윈처럼 꾸미고 있지만 전부 몬스터들이다.
거기다 등급도 강한 건 D급까지 있었다.
"아."
나는 퍼레이드를 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리곤 민아의 눈을 황급히 가렸다.
"뭐, 뭐야? 왜 그래?"
"미성년자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라."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행진하는 퍼레이드에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귀여운 곰의 탈을 쓴 몬스터가 들고 있는 작은 기둥에는 분해된 고기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미친 새끼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매달려 있는 '고기조각'들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본래 인간이었을 존재가 사지가 찢기고 몬스터의 놀잇감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아씨, 나도 볼래!"
"봐서 좋을 거 없다."
저건 플레이어들이다. 어찌된 건지는 몰라도 저 몬스터들은 플레이어들을 사냥하고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계속 이곳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겠어."
"아니, 나도 좀 보여...."
"아까 유령의 집에서 봤던 좀비도 있어."
"그럼 됐어. 다른 데나 가자."
민아가 흔쾌히 등을 돌렸다.
퍼레이드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모양이다.
"근데 이제 어트렉션도 거의 안 하는 것 같은데 어디로 갈 거야?"
"지금 무작정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 아까 그 퍼레이드에서 죽은 플레이어를 봤거든."
"어, 진짜?"
"그럼 내가 네 눈을 왜 가렸겠냐."
"...뭐 야한 거라도 있나 했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제야 민아는 내가 왜 자신을 눈을 가렸는지 이해한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플레이어들을 찾아야겠어."
내 중얼거림에 민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말했다.
"어디 있는 줄 알고?"
"대략 짐작 가는 곳은 있어."
놀이공원 내부는 몬스터가 활보하고, 건물이나 어트렉션에는 직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숨어 있을 장소는 극히 한정된다.
거기다 나는 전생에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아주 큰 사파리가 있다고 하더라고."
***
전생에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이 지역의 사람들은 첫 번째 메인 퀘스트부터 세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 줄곧 갇혀 있었다.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까마귀자리'의 카라스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마 카라스는 신들이 플레이하는 이 게임에 관심이 있었던 거겠지,
별자리는 '신성'을 지니지만 아무리 격이 높은 별자리라도 '신'이 아니라면 플레이할 수 없다.
그래서 카라스는 자신의 격을 낮추고, 신성을 억제했으며.
이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던 거다.
GM이랑 무슨 뒷거래를 했던지, 아니면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건지는 자세히 모른다.
"우와, 오빠 말대로 여기 사람이 엄청 많은데?"
"말했잖아.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다고."
우리는 곧바로 지도에 사파리가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입구에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지키고 있었지만, 도장 네 개가 찍힌 걸 보이자 곧바로 문을 열어주고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남성 플레이어가 손짓했다. 이름이 아마 형석이라고 했던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 도장을 네 개나 받으시다니! 대장도 세 개밖에 받지 못했는데.... 두 분 모두 도장을 네 개나 받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형석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이럴 때는 그냥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게 편했다.
"운이 좋았죠."
"뭣보다 이쪽 여성분은 아직 나이도 어리신 것 같은데 아주 대단하시네요."
"그치? 내가 좀 능력이 있다니까."
형석의 말에 잠자코 걸어가던 민아가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얘는 놀이기구 타는 내내 비명만 지르고 한 것도 없으면서 얼굴에 아주 철판을 깔았다.
"여기서 머무시면 될 겁니다. 대장에게는 제가 말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본래 동물들이 있었을 장소에는 저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플레이어도 있었고, 일반인도 있었다.
'어디 보자....'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분명 이 안에 내가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형석의 말로는 이 사파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플레이어와 일반인을 합쳐 이백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상당한 숫자이긴 했지만, 메인 퀘스트에 표시된 숫자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분명 다른 구역에서 몬스터들에게 사로잡혀 있을 테지.
'찾았다.'
사람들이 무리 지어있는 장소에서 동떨어진 곳.
그곳에 두 명의 남성이 있었다.
한 명은 대략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
그중 내가 찾는 사람은 10대 초반의 소년이었다.
'반드시 이곳에서 연을 만들어 둬야 할 인물.'
바로 최상위 신으로 분류되는 올림포스 12신.
헤파이스토스의 유일한 아바타인 송시우였다.
# 27
027. 시작되는 변화(4)
헤파이스토스의 아바타, 송시우.
전생에는 가장 유명한 탑 플레이어들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만든 무기는 언제나 경매장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되었고, 탑 플레이어들 중에 송시우의 장비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자는 없을 정도였다.
인류가 아득바득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송시우의 장비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시우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분명 전생에 들었던 대로라면 이때의 송시우는 제법 밝은 성격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내게 이야기했었다.
"우와, 저 애, 완전 세상 다 산 표정이다."
내 시선을 쫓아 시우를 본 민아가 중얼거렸다.
녀석의 말처럼 시우는 어두운 얼굴로 멍하니 구석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사람들 표정도 좋지 않았지만, 시우는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옆에 있는 건, 아마 형이겠지.'
시우에게는 형이 있었다.
다만, 세 번째 퀘스트 마지막에 죽었다고 했었지.
아직 살아 있는 건 그 시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괜찮으면 같이 앉아도 괜찮을까?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시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소년, 송시우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전생에 알던 송시우와는 달랐다.
시니컬한 분위기다, 어두운 모습은 그에게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때 나이가 아마 16살이었지.'
겉모습은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지만 민아와 3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누구 왔습니까?"
나와 민아가 옆에 앉자, 장님 청년이 바닥을 더듬으며 말했다.
바로 시우의 형이다.
'형이 장님이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전생의 송시우가 말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무언가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예, 주변에 있을 곳이 없어, 자리 좀 빌리려고 하는데 괜찮죠?"
"물론 상관없습니다."
남자는 해맑게 웃었다.
"다들 저희를 피해서 말이죠. 이렇게 다른 사람이 오니 기분이 좋네요."
"좋기는 뭐가 좋아. 어차피 다들... 후, 아니야."
청년의 말에 소년이 투덜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둘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다면 이름을 물어도 괜찮을까요?"
"예, 물론이죠. 제 이름은 송창우이고, 얘는 제 동생인 송시우입니다."
"그렇군요. 저는 김세한입니다."
"전 이민아예요."
민아도 순순히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나랑 지수한테만 반말하는 기분인데. 처음 만남이 그래서 그런가?
"좋은 이름이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부디 좋은 인연이 됐으면 하네요."
"하하, 그랬으면 좋겠군요. 분명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예."
경쾌하게 웃는 창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계속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는데.'
송시우는 내가 유원지에 온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다만....'
흘깃, 창우를 보았다.
송시우의 형인 이 남자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플레이어인데....'
장님이라는 특이점이 있지만,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가 앉아 있는 바닥에 놓여있는 길쭉한 검정도.
응? 검?
"거기 그건 검입니까?"
"아, 예. 이래봬도 검을 좀 사용할 줄 알거든요. 하지만 도망치는 도중에 눈을 다쳐 이제는 지팡이로 사용할 뿐입니다."
창우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창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우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형, 거기까지만 말해."
"아, 미안."
"그런 말을 하면 자꾸 생각난다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창우의 말이 시우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시우는 나와 창우를 번갈아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자리에 누웠다.
"됐어! 난 잠이나 잘래."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나로선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저...."
우리가 물러서는 기척을 느꼈는지, 창우가 느릿하게 우리를 쫒아왔다.
시우가 있던 장소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창우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많이 예민하거든요."
"아뇨, 괜찮습니다. 애초에 제가 먼저 말을 건 거니까요. 그리고...."
슬쩍 창우의 얼굴을 살핀 뒤, 말을 이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도 저희를 상대해 주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본 건 아니었지만, 주변 분위기가 그랬다.
우리가 옆으로 지나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저 시우처럼 어두운 안색으로 배회할 뿐이었다.
"그건 그렇죠."
창우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당연합니다. 그놈에게서 도망 온 지도 얼마 안 됐거든요."
"그놈?"
까마귀 카라스를 말하는 건가 싶어 되묻자. 창우가 크게 놀랐다.
"설마 그놈을 모르십니까?"
"아, 예. 저희는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들어온 거니까요."
"저런."
창우는 진심으로 안 됐다는 듯 혀를 찼다.
"하필 이곳에 오시다니 운도 없으시네요. 이곳에는 괴물이 있습니다."
"괴물이라면 까마귀를 말하시는 겁니까?"
놀이공원을 지배하는 건 까마귀자리의 카라스였다.
나는 당연히 녀석을 말하는 건가 싶어 말했지만, 창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확실히 녀석이 이곳을 지배하는 녀석인 건 맞지만, 저희들에겐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더 큰 문제?"
"네. 이곳을 지배하는 센티넬... '철웅'이라는 놈이 말이죠."
"철웅?"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보다 센티넬이라고?
'왜 여기에 센티넬이 있지?'
카라스의 영역에 지역을 지배하는 센티넬이 존재하다니.
서울 지역의 현재 이 근방 스테이지를 지배하는 센티넬은 내가 죽인 바질리스크 오르가다.
로메월드 타워와 여기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장소다.
그런데 센티넬이 하나가 더 있다고?
'이거구나.'
현재 문제가 생긴 원인이.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퀘스트가 달라진 것도, 송시우가 달라진 것도 녀석이 원인인 게 분명했다.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건가.'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GM이라는 존재가 서버를 나눠 관리하는 게임이다.
그렇다고 해서 GM이 이 게임에서 가장 높은 존재냐면 절대 아니다.
진짜는 그 위.
바로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존재와 퍼블리셔다.
시스템은 말 그대로 온 우주의 게임에 간섭하는 법칙.
퍼블리셔는 이런 행성에 게임을 유치시키고 관리하는 존재다.
사실상 GM도 퍼블리셔에 속한 알바다.
'이번 일의 경우엔 시스템이겠지.'
이래서 최대한 조심하려고 했지만, 연속해서 세 번이나 센티넬을 죽였으니 당연한 결과다.
센티넬이라는 존재는 시스템이 자율적으로 배치하는 히든 몬스터이니까.
아마 내가 계속해서 센티넬을 죽인 탓에, 이변을 느끼고 이 구역에 새로운 센티넬을 배치했으리라.
'짜증나는 일이군.'
언제 한번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치니 짜증이 치밀었다.
눈앞의 창우의 눈이 다친 일이나, 송시우가 그렇게 변한 것도 그 탓일 거다.
'아마 원인은... 대략 알겠어.'
전생의 송시우는 가족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아까 봤던 송시우의 근처에 가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 철웅이라는 놈에게 죽었던 거겠지.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찌 보면 일이 이렇게 된 건 내 탓이기도 하니까.
'우선은 녀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게 먼저겠어.'
나는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내일로 미뤄야할 것 같았다.
***
'일어나면 우선 형석에게 가봐야겠어.'
그나마 우리를 호의적으로 대해줬던 그라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얘는 어디서나 잘 자네. 간이 크다고 할지, 대범하다고 할지.
나는 옆에 누워 있는 민아를 빤히 응시했다.
녀석은 코까지 골며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후우.'
나 역시 눕기는 했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당장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바빴으니까.
'앞으로는 좀 더 신경을 써야겠어.'
이런저런 생각하다 보니 대략 두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스윽.
'응?'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송창우인가?'
지금 우리가 누워 있는 곳에서 좀 떨어진 장소였지만, 나는 또렷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우는 지팡이라고 말했던 검을 손에 쥐고는 매끄럽게 움직였다.
분명 눈이 보이지 않을 텐데, 그 동작은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뭔가, 느낌이 묘한데.'
오늘 처음 본 순간부터 묘하게 신경 쓰였었지.
좀 더 유심히 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창우는 길쭉한 검을 지팡이 삼아, 앞을 두드리며 입구까지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경계를 서던 플레이어가 돌아보았다.
"뭐야?"
"저,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눈도 안 보이는 새끼가 어떻게 가려고? 혹시 따라와 달라는 거냐?"
"괘, 괜찮습니다. 이 주변은 길을 알아서 혼자서 괜찮습니다."
"그래, 다녀와라, 혹여 안 돌아와도 찾지 않을 거다."
"예, 예."
어리숙한 모습으로 창우는 연신 고개를 숙인 후 입구를 나갔다.
'정말로 돌아올 수 있나?'
그보다 화장실에 간다는 건 진짜일까.
'그럴 리가.'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왜냐면 창우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몇 개의 옵저버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보통 옵저버들은 플레이어들의 사각에서 움직이기에 눈치채기 힘들었지만, 전생에 질리도록 시달린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쫓아가 봐?'
창우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몸을 움찔거리며 밖으로 나갈지 말지 고민하다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다. 그보다 간편한 방법이 있지.'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익숙한 창이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접속."
순간 눈앞이 밝게 빛난 터라, 눈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다행인 점은 이 빛은 내게만 보이는 것이라는 거다.
[익명 48번 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익숙한 문구가 채팅창에 뜬 걸 확인하자, 나는 재빨리 지금 접속해 있을 한 신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익명 48: 어릿광대님, 잠시 괜찮으세요??
민아가 이곳에 있는 만큼, 분명 어릿광대도 이곳에 있을 거다.
멀리서 민아를 관찰하고 있는 옵저버가 바로 그 증거였다.
어릿광대: 응? 나 바쁜데. 너 누구야?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익명 48: 기억 안 나세요? 저번에 같이 아바타 구경했잖아요
어릿광대: 아~ 너구나. 그러고 보니 최근 채팅방에서도 본 기분이네. 정보 자주 공유하지?
익명 48: 네. 맞아요.
어릿광대: 난 관심 없지만 너 꽤 쓸 만한 정보를 자주 말하는 것 같더라? 불금이가 저번에 네가 말한 던전 가서 꽤 쏠쏠했나 봐.
불금이라면 저번에 욕설을 내뱉던 그 신인가? 나한테 던전을 가로채기 당했던... 뭐 상관없지만.
익명 48: 아, 그런데 괜찮으시면 잠시 옵저버 좀 움직여 줄 수 있으세요?
어릿광대: 응? 왜?
익명 48: 신경 쓰이는 플레이어가 하나 있거든요.
어릿광대: 네 옵저버 쓰면 되잖아.
익명 48: 아바타를 선택하지 않으면 개인 옵저버 지급이 안 되잖아요. 개인적으로 노리고 있는 플레이어가 하나 있는데, 요청을 해도 거절하더라고요.
어릿광대: 헐 대박이네. 아바타를 거절해? 너 좀 듣보잡 신인가 보다.
익명 48: 아니에요. 그 어릿광대님 아바타와 함께 다니는 플레이어인데, 아바타가 될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어릿광대: 아, 걔. 맞아. 최근에 걔 노리고 있는 신이 많은데 한 명도 아바타로 만들지 못했다고 하더라. 내 아바타가 같이 다녀서 쭉 지켜봤는데, 지금 아바타인 민아만 아니었어도 나도 한번 요청해 봤을걸?
뜻하지 않게 최근 내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익명 48: 그보다 옵저버는 빌려주실 수 있나요?
어릿광대: 나야 상관없지. 대신 나중에 좋은 정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기다?
익명 48: 물론이죠.
어릿광대: 그럼 네가 노리고 있다는 플레이어 비추면 돼? 걔 지금 자기 상태창 보고 있는 것 같던데?
상태창이나, 개인정보와 같은 인터페이스는 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이렇게 태연히 채팅을 할 수 있는 거다.
익명 48: 아뇨, 그 플레이어 말고 방금 나간 장님 플레이어요. 뭔가 느낌이 쎄하더라고요.
어릿광대: 흐음. 좋아.
[어릿광대 님이 자신의 옵저버에 당신을 초대했습니다.]
전처럼 온 초대메시지에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어릿광대: 이쪽으로 갔나?
채팅창 구석에 떠오른 옵저버 화면을 보며 창우의 뒤를 쫒았다.
'역시 단순히 볼일을 보러 간 건 아닌 모양이군.'
만약 단순히 볼일을 보러갔다면 이 근처에 있어야 할 텐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응?'
그런데 바로 그때.
은색으로 빛나는 새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 28
028. 불가사리(1)
어릿광대: 어, 저건 설마?
옵저버가 비추는 화면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릿광대도 방금 전에 날아간 새를 본 모양이다.
어릿광대의 옵저버는 새를 빠른 속도로 쫒았다. 추격은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는 나뭇가지 위에 사뿐하게 올라섰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 찾아다니던 사람의 앞에.
"어?"
화면에 비친 영상을 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화면에 비치는 영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특별한 일은 없었나?]
[예, 특별한 일은... 아 그러고 보니 새로 온 플레이어 두 명이 이곳에 왔습니다.]
[새로운 플레이어?]
은색 털을 지닌 새, 아마 '까마귀'인 게 분명한 그것의 입에선 거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까마귀는 어떤 존재의 전령인 모양이다.
까마귀의 앞에 서있는 자는 바로 송창우.
그는 까마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보고하고 있었다.
나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눈을 찡그렸다.
'까마귀는 아니야.'
내가 기억하는 까마귀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오늘 들은 철웅이라는 이름의 센티넬이 분명했다.
[과연 그렇군.]
창우의 보고는 길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 온 나와 민아에 대한 보고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너는 계속 그 둘을 지켜봐라. 그리고 그곳의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게 되면 바로 보고하도록. 슬슬 카라스 님도 인원보충을 원하신다.]
[예. 알겠습니다.]
까마귀의 말에 창우는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명백한 복종의 표시다.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지만, 잠자코 지켜보던 어릿광대는 이 상황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던 모양인지 신나서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어릿광대: 헐, 대박. 완전 반전이다. 너 이것도 예지한 거야? 설마 스파이일 줄 몰랐자너.
익명 48: 비밀입니다.
어릿광대: ㅋㅋㅋ신비주의 하고는. 맘대로 해라.
어릿광대는 그저 작금의 상황이 재밌는지 연신 창우를 빙빙 돌며 관찰했다.
까마귀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창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수도 없이 본 탓에 어느 정도 진심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나다.
아까 보았던 창우의 모습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뭣보다 전생의 송시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형은 굉장히 선량한 성격이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해 송시우를 살렸다고 했다.
'흐음.'
나는 영상에 비친 창우를 보며 깊이 고심했다.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혹시....'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선 송창우와 한번 대화의 시간을 가져 봐야할 듯 싶었다.
***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우선 주변에게 물어 정보를 모았다.
우선 모은 건 센티넬 철웅에 대한 정보였지만, 전생과 달라진 점을 체크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
현재 유원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철웅이 사람들에게 어떤 위협을 끼치고 있는지, 등등.
다행인 점은 철웅을 제회하면 전체적인 흐름은 전생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저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갑자기 등장한 철웅에 사망자가 제법 있었다는 정도.
'불가사리라...'
형석의 말에 따르면 철웅은 까마귀의 말을 받아 실행하는 행동대장격인 놈이다.
센티넬인 만큼 평범한 플레이어들로는 감히 덤빌 생각도 할 수 없으며, 몬스터 중에서도 극히 희귀한 편인 '불가사리'다.
불가사리는 금속을 먹을 수 있으며, 속도는 느리지만 단단한 외피와 강력한 힘을 지닌 몬스터다.
아마 현재 내 공격으로도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겠지.
던전을 돌며 미리 준비를 해오긴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센티넬을 죽일 무기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무리려나."
"뭐가?"
"그런 게 있다."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옆에서 하품을 하던 민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치 이번엔 또 뭐야? 라는 눈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 센티넬이라는 거 잡으려는 거 아니지?"
"...글쎄."
"뭐야! 그 개고생을 하며 잡았으면서 또 잡는다고?"
"당장은 무리야."
"마치 나중에는 가능하다는 것 같은 말이네."
"여건이 되면 말이지."
슬쩍 송시우를 봤지만 여전한 모습이었다.
당장은 무엇을 말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리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줄 테고.'
그러니 일단은 얌전히 두기로 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다른 일들도 많았으니까.
"아무튼 난 오후에 볼일이 있어서 밖에 나갔다 올 거야."
"응? 오빠는 어디 가게?"
"잠시 만나러 갈 녀석이 있어."
마음 같아선 먼저 창우에 관한 일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일렀다.
나중에 저녁시간에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그사이에 다녀와야지.'
조금 있으면 정오가 가까워졌다.
아침에 들었던 정보에 따르면 슬슬 나가지 않으면 위험했다.
"누군데?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되는 거야?"
"아니."
"뭐야, 궁금하게."
민아는 인상을 와락 찡그렸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심통이 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릴 뿐이었다.
'불가사리인 철웅에게 민아는 상성이 안 좋으니까.'
민아의 변신 능력이나 트릭키한 다양한 스킬들은 분명 대단했지만, 철웅에게는 대부분 소용이 없었다.
단단한 방어력을 앞세워 피지컬로 몰아붙이는 불가사리들에게 통용되는 공격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저 둘을 잘 지켜보고 있어라."
"저 둘? 왜?"
창우와 시우를 가리키며 말하자 민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 내가 올 동안 같이 있어. 혹시 이상한 기색이 보이면 연락하고."
"음.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 알겠어."
어차피 내가 없으면 퀘스트를 깨는 것도 에로사항이 꽃필 거다.
민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녀석을 만나봐야만 했다.
바로, 철웅을.
***
로메월드 아일랜드 캐슬.
로메월드에 이어진 긴 다리를 지나면 있는 장소다.
거대한 성과 같은 그곳에 거대한 까마귀가 거만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지금 한창 재미있는데 무슨 일이야?"
넓은 공간에 부서진 잔해들.
그 잔해들 틈에 서있는 괴물을 보며 까마귀 카라스가 말했다.
신화시대에 목소리를 잃은 적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간신히 되찾을 수 있었다.
자랑스런 은빛 깃털 또한 잠시라면 겉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좀 더 격을 올릴 필요가 있어.'
그런 의미에서 이 유원지는 카라스에게 최적이다.
인간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얻을수록 조금씩 자신의 '격'이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유원지에 둥지를 튼 건 반쯤은 재미 때문이었지만, 그런 이유도 있었다.
"즐기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괴물은 전신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덩치는 대략 5미터가 넘는 상당한 크기로,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느낄 법한 괴물이었다.
"뭐냐, 철웅."
"어트렉션 관련 일입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 말이죠."
"아, 그거? 지금 최고 많이 깬 플레이어가 세 개던가? 도장 두 개도 못 받은 애들이 대다수라 벌벌 떠는 꼴이 우습던데."
"예, 어제까지는 그랬습니다."
철웅의 말에 카라스가 깍깍, 거리며 웃던 웃음을 멈췄다.
"뭐?"
"네 번째 도장을 받은 플레이어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둘이나."
"...진짜?"
"예."
"어떻게?"
까마귀자리의 카라스.
그는 그다지 대단한 격을 지닌 별자리는 아니었지만 머리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다.
인간들을 가지고 놀고 괴롭히기 위해 구상한 어트렉션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세 번째 도장을 받은 플레이어도 솔직히 대단할 정도인데 네 번째 도장까지 받은 놈이 있다고?
"이 두 명입니다. 네 개의 어트렉션에서 촬영한 영상입니다."
화면에 비친 건, 인상이 나쁜 남성 하나와, 새치름한 인상의 여고생이었다.
"이런 애들이 네 번째 도장까지 받았다고?"
카라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역전의 용사와 같은 이를 생각했는데, 이 둘은 도무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진 영상을 본 카라스는 부리를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같이 다니는 여자도 꽤 능력이 있는 플레이어인 건 분명했지만, 그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선이었다.
그러나 같이 다니는 남자가 문제였다. 분명 특출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지극히 능숙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매끄럽게 일을 진행했다.
분명 대단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신의 후원을 받는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저 본인의 기량을 통해 어트렉션을 가볍게 극복했다.
그것도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극악의 난이도라 부르짖으며 포기했던 어트렉션들을.
"유령의 집과 후룸라이드. 거기에 자이로드롭과 롤러코스터까지."
하나같이 플레이어를 죽이기 위해 설계된 어트렉션이다.
이 유원지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만 쏙쏙 골라서 탔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도장을 네 개까지 받았다면 거기서 추가적인 난이도 상승도 있었을 터.
"이대로 가면 오늘 안에 다섯 번째 도장을 받고 퀘도 깨겠는데?"
"아마 그렇게 생각됩니다."
"끄응."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직접 나서는 건 부담이 있다.
고작 메인 퀘스트 세 번째인 시점이다. 아직 별자리급에 속하는 자신이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다.
사실 이렇게 게임에 관여하는 것도 편법에 속하는 거다.
'하지만 만약 녀석이 직접 이곳에 온다면....'
아니, 아니지.
카라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내버려 둬."
"예?"
"두 명 정도는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있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어트렉션에 도전하는 플레이어가 좀 줄고 있거든."
"아무래도 난이도가 높으니 플레이어들도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신규 유입도 적고요."
"하지만 만약 단 두 명이라도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리고 그놈들이 성공적으로 유원지를 나간다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자극을 받지 않겠어?"
사람의 심리란 참 단순한 법이지.
카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깍깍 웃었다.
'하여간 새대가리 주제에 나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요.'
철웅은 그런 카라스를 보며 그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센티넬이라고 하더라도 '별자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법이었다.
거기다 카라스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두 명이 클리어하고 나가게 되면, 그 모습을 본 플레이어들이 예전처럼 어트렉션에 적극적으로 도전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철웅은 화면에 비치는 두 명의 플레이어를 보았다.
여성 플레이어도 대단한 실력자인건 분명했지만, 남성 플레이어는 뭔가 격이 달랐다.
'어차피 녀석에게 말해뒀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카라스는 다섯 번째 퀘스트를 깨게 두라고 했지만 철웅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카라스에게 한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서둘러 처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아, 슬슬 순찰 갈 시간인가?"
"예."
담담한 철웅의 말에 카라스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참 성실한 녀석이네. 처음 봤을 때만해도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때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됐으니까요."
"그렇겠지. 그렇게 갑자기 센티넬이 추가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카라스는 새까만 날개로 자신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이야 철웅과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GM에게 문의를 해봤지만 GM도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이야 편해서 좋다만. 귀찮은 일을 떠넘기기도 딱 좋고."
"그러시겠죠."
"깍깍! 그러면 잘 다녀와라! 아, 그리고 인원 부족해지면 알지?"
"그렇지 않아도 슬슬 한번 뒤집을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그래!"
즐겁게 웃어재끼는 카라스를 뒤로하며 철웅은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보고가 좀 길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에 딱 맞췄군."
현재 시간은 정오.
언제나 정기적으로 철웅이 순찰을 나가는 시간이었다.
어트럭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플레이어들을 죽이거나, 간혹 도망치려는 일반인들을 다시 잡아들이는 것이 철웅의 역할이었다.
정확히는 카라스에게만 즐거운 이 유원지에서 철웅이 가지는 유일한 취미생활이기도 했다.
"오늘은 벌레들이 좀 많이 보였으면 좋겠는데."
철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히죽 웃었다.
# 29
029. 불가사리(2)
오전에 들었던 말에 의하면 철웅은 정기적으로 유원지를 순찰한다.
주요 코스는 유원지의 입구와 출구.
밖으로 도망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함이라지만, 실상은 그냥 심심풀이로 돌아다니는 거라던가.
애초에 입구나 출구로 도망치려고 하면, 다른 몬스터들이 막아서며 철웅에게 곧바로 보고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럼 몬스터가 막아서는 사이 철웅이 오게 되니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철웅이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에서 계속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30분은 된 거 같은데."
분명 정오에 자주 모습을 보인다고 했으니 올 때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10분 정도를 더 기다리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이 아닌, 괴물의 기척이.
"드디어 왔나."
멀리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철의 거인.
얼핏 보면 골렘과 비슷하지만, 무생물적인 느낌이 강한 골렘과 달리 불가사리는 생명체의 느낌이 강했다.
전신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괴수라고 할까.
상대하는 것도 골렘보다 불가사리 쪽이 상대하기 힘들었다.
쿵.
쿵.
쿵.
무겁게 울리는 지면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철웅 역시 그런 나를 눈치 챈 듯, 무거운 머리를 움직였다.
"흐음?"
녀석은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신을 보고 도망치지 않는지 의문스러운 눈치다.
"미친놈을 죽이는 건 재미가 없는데 말이야."
심히 실망한 얼굴로 철웅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같은 지역에 있는 놈들이 아니랄까 봐 똑같네.'
녀석은 플레이어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겠지.
전생에 그런 녀석은 수도 없이 봤다. 카라스 역시 그런 부류였고, 철웅이라는 놈도 분명 비슷한 녀석이리라.
"오늘 처음으로 내 눈에 띈 보답이다. 고통 없이 죽여주지."
코앞까지 다가온 철웅은 천천히 팔을 치켜들었다.
그리곤 특별한 말도 없이 나를 향해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콘크리트로 된 지면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튕겨져 날아갔다.
물론, 나는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한 후, 녀석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단단해.'
혹시나 금속을 먹기 전이라면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무리였다.
이정도로 단단한 걸보면 이미 금속을 섭취하고 움직이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꽤 신중한 성격이군.'
굳이 금속을 섭취하지 않았어도 철웅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이정도의 방어력을 항시 유지하고 있다는 건 녀석이 꽤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증거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창우에게서 일일이 보고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겠지.
"호오, 피해?"
철웅은 내가 훌쩍 물러서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다만, 설마 이 정도의 플레이어가 있었을 줄은 몰랐군. 하긴 그러니 내 앞에 태연히 모습을 드러낸 거겠지."
녀석이 뭐라 말을 하건 말건, 나는 손에 쥔 검을 흔들었다.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한 검이었지만, 철웅의 방어력을 뚫기는 무리였다.
"재미없는 놈이군. 조금은 말을 하는 게 어떠냐."
녀석은 실실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와 같다.
녀석의 움직임도 전력이라기보단 놀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나는 오늘 녀석의 전력을 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
"덤비기나 해라. 말이 참 많네."
"...건방진 것."
실실 웃던 철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구나!"
그제야 철웅은 전력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좋아, 도발은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그럼 이제 제대로 확인을 해보실까.'
철웅의 주먹이 내 몸을 스치며 거친 파공음을 냈다.
지면에 격돌하면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콘크리트가 부서져 나갔다.
캉! 캉캉!
나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공격했다.
관절부위나 눈, 입이 벌려진 순간 검을 쑤셔 넣어보기도 했고, 고간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쯧."
오리하르콘으로 코팅된 무기가 상하지 않은 걸보면 철웅이 현재 먹은 금속은 오리하르콘보다 단단한 금속은 없었다.
녀석의 몸을 부수지 못한 건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는 내가 훨씬 빨라.'
철웅과 싸우기 위해, 나는 현재 찍을 수 있는 최대치까지 능력치를 찍었다.
즉, 카운터 스톱이 풀리자마자 다시 카운터 스톱 상태에 돌입한 거다.
현재 내 능력치는 올 E(100).
지금 존재하는 어떤 플레이어보다 높은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철웅에게는 생체기하나 줄 수 없었다.
'정말 거지같군.'
이 정도면 거의 나를 엿 먹이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리하르콘 무기를 들고, 한계까지 능력치를 찍어도 전혀 데미지가 안 박히다니!
예상은 했지만 그냥 죽이지 말라는 거지.
'이러니 플레이어들이 녀석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지.'
오히려 이 정도면 능력치가 너프된 카라스보다 강한 거 아냐?
'아니, 잠깐만.'
센티넬인 철웅이 이 정도라면 이 지역을 지배하는 카라스의 능력치도 더 상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정말 1회차 계승 패키지 외에는 답이 없겠는데.
'하필 퀘스트가 달라져서.'
본래 목표는 도장 다섯 개를 받아 퀘스트를 빠르게 클리어한 후, 바로 카라스를 죽이는 거였다.
하지만 퀘스트가 변한 이상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놈!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 구나!"
"네가 느린 거겠지."
"반드시 죽여주마!"
주먹을 횡으로 휘두르자, 궤적에 있던 바이킹의 기둥이 부러졌다.
거대한 배가 기울어지며 나와 철웅을 덮쳤다.
쿠구구궁!
뿌연 연기를 내며 부러지는 놀이기구의 모습에 나는 재빨리 몸을 뺐다.
"이노오옴! 어디냐! 어디로 간 것이냐!"
콰쾅! 콰콰쾅!
분개한 철웅이 자신의 머리 위로 쓰러진 바이킹의 잔해를 헤집으며 소리쳤지만, 나는 그 틈에 조용히 녀석에게서 멀어졌다.
'미안하지만 볼 일을 다 봤다.'
지금 내가 가진 아이템과 수단으로는 철웅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방어력을 관통할 만한 스킬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으니까.
녀석을 죽이기 위해선 심플하게 강력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공격이 필요했다.
"정리하자면...."
멀리서 날뛰는 철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애꿎은 어트럭션들이 철웅의 손에 하나씩 부서지고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거지."
답은 간단하다.
당장 녀석을 죽일 방법이 없다면, 이제부터 만들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
"민아 씨와 세한 씨는 혹시 남매 사이입니까?"
"예?"
4구역, 굴 안에 누워 가져온 잡지를 보고 있던 민아는 창우의 말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란 말인가.
"성부터 다른데 남매일 리가 없잖아요."
"아, 그 그렇죠. 근데 사이가 무척 좋으셔서 남매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어이없네. 남매면 오히려 사이가 좋을 리가 없잖아요?"
민아는 그렇게 말하다 지금 무기를 만들고 있을 시우를 떠올렸다. 확실히 창우와 시우는 형제치곤 무척 사이가 좋은 느낌이었다.
"형제가 사이가 좋다니 이상한데. 오히려 그쪽이 형제가 아닌 거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확실히 형제라고요!"
이번에는 창우가 펄쩍 뛰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 탓에 주변 플레이어들이 시선이 창우와 민아에게로 향했다.
창우는 눈은 보이지 않지만, 따끔거리는 등에 헛기침을 했다.
"그럼 세한 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죠?"
"제가 은행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는 옆에 무서운 언니도 있었는데."
"무서운 언니?"
"있어요. 세한 오빠 말고는 죄다 벌레처럼 보는 언니."
민아는 지수를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고요한 눈동자만 떠올려도 오한이 생겼다.
그래도 나중엔 자신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럭저럭 잘 대해주긴 했다.
'나름 동료 취급은 해준 건가? 음, 모르겠네.'
나중에 다시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혼자 어디론가 가긴 했지만, 지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지수와 마주친 사람들이 문제지.
"그렇군요. 세한 씨는 평범한 사람 같지 않아서요. 저는 볼 수 없지만 분명 대단한 플레이어시겠죠. 도장도 네 개나 받으셨고."
"저도 도장 네 개인데요."
"헛, 그렇긴 하죠. 민아 씨도 대단해요. 시우와 세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민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세한만 아니면 확실히 자신도 한가닥했다. 도장은... 세한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애초에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세한이니 조금은 책임을 질 필요가 있었다.
암, 그렇고말고.
"뭐가 그런데?"
"까, 깜짝아!"
"뭘 그렇게 놀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민아가 화들짝 놀랐다.
언제 왔는지 세한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옷에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또 어디서 뭔 일을 하고 오셨네.'
민아는 그런 세한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좀 인기척은 내고 다녀!"
"특별히 숨긴 적도 없다만."
거짓말하고 있네.
민아는 입수를 뾰루퉁 내밀었다.
세한은 눈에 약간 다크서클도 있고 얼굴도 전체적으로 어두운 인상이다.
그렇다보니 묘하게 존재감이 없는 편이었다.
보여준 실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무시당하는 건 그런 인상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다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인기척을 내지 않고 걸어 다녔다.
옷도 검은색인지라 밤에는 바로 옆에 있어도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잠시 세한 씨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제 이야기요?"
"별이야기 아니야. 그냥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만나긴 어떻게 만나. 네가 은행 털다가 나한테 걸린 거지."
"와악!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내가 범죄자 같잖아!"
사람들도 내쫓고 경찰인 척하며 은행을 털려했으면 범죄자 아닌가?
세한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돈은 쓸모도 없고 남을 해친 것도 아니니 사실상 민아의 삽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후후후,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으으, 뭐라고 하고 싶은데 할 수도 없네."
눈이 삐었냐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창우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도덕성이 있긴 했구나."
"당연하잖아!"
민아는 빽 소리를 지른 후, 휙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조금 삐진 모양이다.
'나중에 적당히 달래주면 되겠지.'
예를 들어 적당한 아이템을 하나 준다던가.
민아는 무척 까칠한 성격 같지만 사실 굉장히 쉬운 녀석이었다.
"창우 씨. 괜찮으면 잠시 저 좀 볼 수 있을까요?"
"예?"
"할 말이 있는데 여기서 하긴 좀 그래서요."
세한의 말이 꽤 의외였던 듯, 창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예, 전 괜찮습니다."
창우는 지팡이 대용으로 검을 집어 들며 느릿하게 일어섰다.
"저쪽으로 가죠."
세한은 창우가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걸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창우는 그런 세한을 똑바로 쫒았다.
"세한 씨,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풀숲 근처로 오고 나서야 세한의 발이 멈췄다.
본래라면 맹수들이 머물던 장소지만, 지금은 동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면 되겠네요."
"대체 하실 말이 무엇이기에...."
"창우 씨."
"예."
창우는 지극히 무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세한이 이런 곳으로 자신을 데려왔다는 것에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혹시 철웅에게 정보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슈아악!!
바람을 가르며 내질러진 검의 소리.
시퍼런 칼끝이 세한의 눈앞에 우뚝 멈춰 섰다.
# 30
030. 불가사리(3)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법이 있죠."
"여유로우시군요. 제대로 답변하지 않으신다면 전 당신을 해칠 수밖에 없습니다."
여태까지 가볍고 선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창우는 없었다.
한없이 차갑고 냉랭한 기운만이 남아있었다.
"절 해친다, 라...."
세한은 엄지로 턱을 쓸었다.
"사실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뒤로 물러야겠습니다."
"무슨 뜻이죠?"
"한번 재주껏 덤벼보란 말입니다."
세한은 입가를 삐뚜름하게 치켜 올리며 웃었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좀 봐보게."
물론, 그 웃음은 창우가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쉬이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우의 칼이 휘둘러졌다.
검의 예기가 살을 애일 듯 시렸다.
'제법 괜찮은데?'
창우는 아바타가 아니다.
그런데도 무척이나 강했다.
특히 검술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뛰어났다.
마치 눈이 보이는 것 같은 세밀한 검술이다.
'설마.'
세한은 한 가지 스킬이 떠올랐다.
천살성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희귀한 스킬을.
'심안(心眼)인가?'
보통 무에 극에 달한 자가 익히게 되는 스킬이다.
하지만 창우는 확실히 놀라운 실력을 지녔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애 때문에 특수한 스킬이 발현된 게 아닐까 추측됐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도 그런 이가 있었지.'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던 이가 시각이 극도로 발달하며 스킬로 발현된 경우가 있었다.
이것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오만하게 말했던 것 치곤 겨우 피하기만 하는군요."
아슬아슬하게 피한 탓에 창우는 세한이 겨우겨우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것이라 인지했다.
그것도 당연했다.
창우는 자신의 검에 무척이나 자신이 있었다.
심안이라는 스킬과, 단련된 자신의 검술은 신의 아바타가 된 이들조차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할 생각이 없다면 전 여기서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검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허리를 향해 휘둘러지던 검이 뱀처럼 휘며 단숨에 세한의 목덜미를 노렸다.
"오."
그 매서운 검술에 감탄하며 세한은 중얼거렸다.
"검술은 이 정도고...."
캉!
단번에 세한의 목을 잘라낼 줄 알았던 검이 멈췄다.
휘둘러지던 검의 칼날을 세한이 잡았기 때문이다.
단 두 손가락으로.
"...맙소사."
창우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잡혔다고? 자신의 검이?
그것도 겨우 두 손가락에?
"한번 빼보시죠."
그런 창우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전혀 관심 없는지 세한은 태평하게 말했다.
"능력치는 어느 정도인가 테스트해 보게."
"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창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심안이 보내온 정보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두 손가락에....'
자신의 검이 잡혔다.
힘을 줘 봐도 검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마치 두터운 바위틈에 검이 끼어버린 것 같았다.
"큭!"
"대략 힘은 E 50정도인가?"
세한은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이해할 수 없다.
휘둘러진 검을 잡은 것도 이상한데, 고작 두 손가락에 잡힌 칼날을 빼낼 수가 없다니.
마치 접착제로 붙인 양, 세한의 손에 잡힌 칼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까 보니 민첩은 대략 60에서 70사이."
이 정도면 아바타가 아닌 플레이어 중에선 굉장히 높은 수치이지 않을까.
대신 다른 능력치가 바닥을 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말하자면 힘과 민첩에 올인한 상태라는 거지.
'지수보다는 못하겠지만.'
멀티 플레이 패키지의 효과로 지수는 세한이 얻는 포인트를 일정량 가지고 가고 있었다.
거기에 아이템도 세한이 모두 지원해준 탓에 얻는 포인트는 모조리 능력치에 쏟아부어, 웬만한 아바타들도 압도하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툭.
"다, 당신은 대체...."
손을 놓자 창우의 몸이 기울어졌다.
검에 힘을 주고 있던 탓에 순간 균형을 잃은 탓이다.
하지만 세한은 창우가 재차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압!"
창우는 재차 자세를 잡고 세한을 향해 덤벼들었다.
뱀처럼 날아드는 칼날을 향해 세한이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튕겨냈다.
"이 무슨!"
"제가 아이템이 좀 좋거든요."
암야의 사수를 쓰러트리고 얻은 암야의 장갑, 그것에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씌웠으니 창우의 검으로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애초에 세한은 무기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앙!
"헉, 허억. 헉."
전심전력으로 검을 휘둘러도 세한에게는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창우를 보며 세한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대단한 실력이네요."
감탄하듯 말하는 세한의 말에 창우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누가 누구보고 대단한 실력이라고 하는 것인가.
"...당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실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비꼬는 창우의 말에 세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이 시점에서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는 없다.
그러니 애초에 비교가 잘못됐다.
'민아랑 비교하면 민아보다는 강할 것 같고.'
지수와 창우를 비교하면 지수가 우위에 있다. 심안도 대단한 스킬이긴 하지만 천살성과 지수 본인의 재능이 워낙 뛰어난 탓에 창우가 이기긴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민아랑 비교하면 창우가 더 뛰어났다.
신의 아바타인 민아보다 창우가 강하다는 건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민아는 전투는 곁다리지만.'
창우와 지수가 딜러라면 민아는 유틸계 서포터다.
단순 전투로 비교하는 건 사실 무의미하다.
'거기에 기본적인 전투 실력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고.'
센스가 있다고 할지.
확실히 미래의 탑플레이어는 떡잎부터 남다르다.
"그런 실력으로 왜 철웅에게 정보를 보내는 겁니까?"
"...."
창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검을 꽉 움켜쥘 뿐이다.
"시우 때문입니까?"
검을 쥔 손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세한은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그랬던 거다.
"철웅이 자신을 돕는 대가로 시우의 생존을 약속했군요."
"...예."
창우는 쓰게 웃었다.
"처음 철웅에게서 도망치던 날. 저는 혼자서 그를 상대했습니다. 아니, 상대라기도 뭣하군요. 녀석은 놀이 상대로 저를 지목했을 뿐입니다."
창우는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던 순간 닥친 비극을.
부모님이 눈앞에서 살해당하자 창우는 어떻게 해서든 시우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철웅을 막아섰다.
"결과적으로 무리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전 시각을 빼앗겼죠."
홀로 남아 죽음을 각오한 그때, 철웅은 창우에게 한 가지를 제의했다.
자신의 수족이 되어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대신 시우의 생존은 확실히 보장하겠다는 말에 창우는 어쩔 수 없이 철웅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그때 느낀 철웅의 힘은 정말 그 자체였으니까.
"그놈은 무슨 수를 써도 죽일 수 없는 괴물입니다. 그러니 저는 시우만은 반드시 살리고 싶었습니다.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얼마동안 정보를 보냈던 겁니까?"
"사파리에 온 이후 계속입니다. 대부분은 사람들의 동향에 관한 이야기죠."
창우는 거기까지 말한 후,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뭐가요?"
"이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실 건지 묻는 겁니다."
여태 스파이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창우는 더 이상 다른 플레이어들과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자신만이라면 상관없었지만, 시우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데요?"
"예?"
"사파리에 온 이후의 정보만 제공했으니 아직까지 특별히 피해를 끼친 건 아닌 것 같고. 도리어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생각되거든요."
"이 상황을 이용한다고요?"
이것을 대체 어떻게 이용한다는 말인지 창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대로 녀석이 어떻게 행동알지 저희가 알 수 있잖아요?"
"그건... 그렇죠."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창우를 보며 세한은 턱을 쓸었다.
"정확히 녀석의 목적이 뭐죠? 지속적으로 정보만 얻고 그대로 방치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요?"
"아마 아직 추가인원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겁니다."
"추가인원?"
"네. 아시다시피 이 유원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카라스라는 놈의 놀이에 희생되는 사람들이죠. 주요 구역은 사파리에서 한참 떨어진 유원지 상단부에 있는 어트럭션 지역입니다. 플레이어들이 아닌 일반인들을 모아둔 장소죠."
창우의 말에 세한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이 줄어들면 사파리에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온다는 거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동하거나 도망치려는 기색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죠.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 조만간일 것 같습니다."
"조만간?"
"예, 대략 일주일 후에 움직일 것 같습니다."
역시 나머지 사람들은 그곳에 있는 건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이군.'
녀석이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게 준비를 끝내야 한다.
그나마 창우를 통해 정확한 시간을 들은 게 다행이었다.
세한은 그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만약 언제 움직일지 몰랐다면 계속 미적거리며 움직였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녀석이 움직인다면 세한의 퀘스트도 상당히 차질을 빚을 게 분명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만약 녀석과 싸운다면 그때겠네요."
"싸운다니요! 세한 씨가 강한 건 알지만 녀석은 격이 다릅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아까 만나고 왔으니까요."
"...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창우는 입을 쩍 벌렸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만나고 왔다고? 그 철웅과?
"확실히 몸이 단단해서 저도 당장은 못 죽이겠더군요."
"그, 그렇죠."
"어디가지나 당장 죽이지 못한다는 거지. 죽일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세한의 태연한 말에 창우는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세한의 말은 마치 철웅을 죽일 수단이 있다는 것 같았으니까.
"창우 씨는 여태 하셨던 일을 계속하시면 됩니다. 다만 저에게도 정보를 주시면 고맙겠네요."
"그럼 세한 씨는...."
"그건 돌아가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죠."
묘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세한의 말에 창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철웅을 그가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아, 물론 시우에게는 모든 이야기를 하셔야 합니다."
"예? 시우에게요? 대체 왜죠?"
창우의 얼굴이 재차 새파랗게 질렸다.
그럴 만도 했다. 여태 시우를 위해 철웅에게 정보를 팔았던 것이었으니.
다른 사람보다 시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이번 일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철웅을 죽이기 위해선 다른 누구보다 송시우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
나와 창우는 곧바로 민아와 시우에게 돌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둘에게는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좋았으니까.
민아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수긍했지만, 시우의 경우에는 반응이 격렬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해도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이야기가 끝난 지금은 창우를 추궁하기 바빴다.
"왜 진작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데!"
"미안하다. 네게는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만약 형마저 잘못되면 나는 어쩌라고. 그런다고 내가 기뻐할 거 같아?"
"...미안."
한창 신파극을 찍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며 민아가 중얼거렸다.
"이래서 오빠가 저 둘을 지켜보고 있으라고 했구나?"
"그래. 뭔가 느낌이 쎄하더라고."
"정말 감이 좋다고 할지. 아니면...."
민아는 머리를 살며시 기울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고양이처럼 나를 요모조모 살피던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떨어졌다.
"뭐, 나로선 나쁠 건 없으니까. 그보다 이제 어떡할 거야?"
"당연히 그놈을 죽여야지."
"누구를? 설마 그 철웅이라는 괴물을?"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실 거 같았어. 그럼 나는 퀘스트나...."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도장 받으러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철웅 녀석이 나를 찾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대체 이 사람은 밖에서 뭐하고 온 거야?"
뭐하긴, 그 녀석과 한판 싸워보고 왔지.
한창 속만 긁고 도망친 터라 분명 나를 찾아다니고 있을 거다.
이런 때에 밖에 돌아다니면 아무리 민아라도 목숨이 위험했다.
# 31
031. 파일 벙커(1)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철웅을 잡는다니?"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시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대화는 다 끝났나 봐?"
"아, 예."
심드렁하게 답하자 시우가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과 다른 내 태도 때문이겠지.
전이라면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며 살살 구슬리려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들었겠지만, 네 형이 이곳의 정보를 철웅에게 전해주던 터라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야. 언제 이곳에 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해 가도 이상하지 않지."
"...알고 있어요."
"그러니 시간이 별로 없거든."
남은 시간은 대략 일주일 정도.
그사이에 철웅을 쓰러트릴 수단을 준비해야했다.
"형은 정말로 철웅을 죽일 생각인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애초에 이 유원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그건 그렇지만... 형이 도장 네 개를 받은 실력자라고 해도 무리예요."
"그 말이 맞다. 나 혼자선 무리야."
아무리 내가 강하더라도 현재 내 능력치와 스킬로는 철웅을 죽일 수단이 없었다.
"그러니 네 도움이 필요해."
"제 도움이요?"
시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전 아직 어리고, 몸도 둔해서 싸우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될 텐데요?"
"하지만 너 신의 아바타잖아."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숨을 들이켰다.
"그걸 알고 있었던 건가요? 어떻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알 수 있거든. 느낌이 달라."
민아나 동권처럼 아바타의 기운을 숨길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신이 아니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굳이 말하자면 '격'이 다르다.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저도, 그리고 저를 선택한 신님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니까."
쓸쓸한 눈으로 눈물짓는 시우의 모습에 근처에 돌아다니던 옵저버 하나가 부르르 떨렸다.
추측이지만 저것이 시우를 선택한 신, 헤파이스토스의 옵저버가 아닐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저도 뭔가 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그저 무력감만 느낀 체, 이곳에서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어요. 형에게도 민폐만 끼치고...."
시우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 말한 것이 송시우가 여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이유였겠지.
부모님이 죽고, 형이 시력을 잃은 것도 원인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체 보호받기만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 컸을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일과 관련된 말을 창우가 입에 담으면 그토록 분노했던 거다.
과거의 일은 송시우에게 있어 역린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너를 선택한 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특정한 조건이 필요한 거냐?"
"예. 이제야 말하지만 저는 대장장이 신의 아바타에요. 그러니 화로나 망치와 같은 제작 도구가 없다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신의 명칭은 말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건 아바타가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려하면 자연적으로 금제에 걸리기 때문이다.
어차피 난 송시우를 선택한 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아마 장비를 제작하는 지식은 있는 거겠지?'
헤파이스토스의 아바타가 되며 기본적인 지식은 습득했을 테니.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스킬의 사용법도 알고 있고, 지식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유원지에서 장비 제작에 필요한 금속이나 망치, 그리고 화로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예?"
시우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을 껌벅였다. 그리곤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좋아."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말을 꺼낸 지금부터 바로 일을 시작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간 안에 장비를 제작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기회요?"
"그래, 기회."
분명 할 수 있다. 나는 미래의 시우를 알고 있었다.
아직 부족할지언정, 제대로 된 도구만 주어진다면 지금도 충분히 본연의 능력을 발휘할 플레이어였다.
"혹시 너.
"
나는 씩 웃으며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이 소년이야말로 이번 퀘스트의 열쇠였다.
"철웅을 쳐 죽일 무기를 만들어 볼 생각은 없냐?"
시우의 머리가 끄덕여진 건, 그로부터 5분이 지난 후였다.
***
생산직 플레이어가 활약하기 시작한 건 다섯 번째 퀘스트부터였다.
왜냐면 네 번째 퀘스트가 끝나야 각 지역이 개방되며 오픈월드가 되기 때문이다.
일정 구역을 포인트로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며 자신만의 공방을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생산직의 주가가 오르게 된다.
'생산직의 단점은 제작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힘들다는 점이지.'
예를 들어 대장장이만 해더라도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다. 화로나 모루, 각종 제작 도구들.
일반적인 플레이어로선 구하기 힘들다.
대부분 금속을 구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의 힘을 빌려 구축해야 하는 요소다.
하지만 당장 그런 일은 무리나 마찬가지이니 시우가 무력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
"자. 이 정도면 됐냐?"
"...."
나는 시우와 민우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작은 화로와 모루, 그리고 기본적인 대장장이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이전 퀘스트 보상."
"진짜로?"
"진짜."
진짜일 리가 없잖아.
이것들은 미리 내가 구매해서 이곳에 놔둔 물건들이다.
'이름하야, 기초 제작 패키지.'
더 높은 등급의 패키지도 살 수 있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띄는 데다 시우가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거다.
"어때? 이 정도면 할 수 있냐?"
"네, 아마...."
시우의 눈동자는 한쪽 구석으로 향해 있었다.
아마 신으로부터 귓속말이나 알림을 듣는 건지도 모른다.
"충분해요. 이정도면 무기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형."
"야, 너는 이런 것들이 여기에 떡하니 놓여 있는데 이상하지도 않아? 뭘 그리 태연히 수긍해?"
의욕적으로 말하는 시우의 모습에 민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저 제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니까요."
"뭐래니...."
지금은 그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쁜 모양인지 시우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를 보는 민아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어린애에게 대체 무슨 노동을 시킬 생각이냐고 추궁하는 시선이었다.
"저번에는 나더니, 이번엔 얘야?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던 거지?"
"뭐가?"
"시치미 떼기는, 오빠가 남을 아주 잘 부려먹는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설마 어린애에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네."
"너 얘랑 3살밖에 차이 안나."
"...뭐?"
민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시우를 돌아보았다. 시우는 갑자기 민아가 자신을 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저 중학교 3학년이에요."
"너 진짜 완전 동안이구나. 초등학생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역시 민아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애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보다 이민아."
"왜?"
"여기에 결계 좀 설치해 봐."
"무슨 결계?"
"사람 물리는 결계. 너 사용할 수 있지?"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세 번째 퀘스트이니 신으로부터 새로운 스킬을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민아의 주요 능력은 사람을 교란하는 계열의 능력.
그중에서도 탑클레스의 신의 후원을 받는 아바타다.
이것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는 기껏해야 동권 정도지만, 솔직히 민아 쪽이 격이 더 높다.
동권은 신보단 본인이 머리가 좋은 경우지.
물론 동권보다 민아가 못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순수 재능이라면 동권은 상대도 안 된다.
단지 동권은 극히 비열하고 나쁜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다 보니 본인의 신과 상성이 좋다는 것뿐이다.
"자, 이 정도면 됐지?"
"충분해. 근데 무슨 스킬이냐?"
"뭐야, 알지도 못하고 쓰라고 한 거야?"
민아는 손가락을 들어 이 근방에 선을 그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삼각형 형태의 공간이 되었지만, 물건을 제작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건 공간박리(空間剝離)라는 스킬이야. 이 근방은 주변에서 도려낸, 일종의 컷아웃이 되는 거지."
"다시 돌아오려면?"
"내가 지정한 인원은 도려내지지 않은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으니 평범하게 오면 돼."
아마 민아는 변신을 통해 적진의 가운데네 진입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런 스킬을 신으로부터 받은 모양이다.
'뭐야, 이 사기 스킬은?'
어찌 보면 무협소설에 나오는 진법과 같지만 아예 공간자체를 괴리시켜버린다는 점에서 급이 달랐다.
전생의 이민아를 알기에 남들의 시선을 피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러니 이민아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누구도 못 찾지.
이래서 신의 아바타가 되려면 최상위 신에게 되어야 한다는 거다.
"자, 받아. 이걸 녹여서 무기를 만들면 될 거야."
"헉!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난 거에요?"
"던전 좀 돌면 이정도 쌓여."
나는 던전을 돌며 나온 필요 없는 무기들을 시우에게 건넸다. 그다지 질이 좋은 무기들은 아니었다.
"그럼 이걸로 뭘 만들면 되는 건가요? 검? 아니면 창?"
일반적인 무구를 이야기하는 시우에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말고. 넌 그런 검이나 창으로 철웅을 죽일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다른 무기가 있나요? 활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테고, 그럼 둔기류? 둔기류라면 확실히 괜찮을 지도...."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내가 설계도를 줄 테니까, 이걸 좀 부탁해."
"이거?"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설계도를 꺼냈다.
이건 전생에 내가 다른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 직접 만들어 본 무기였다.
내가 가장 애용했던 무기중 하나이기에 설계도 정도는 금방 그릴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뭐예요?"
설계도를 본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헤파이스토스의 지식에는 없었던 무기인 모양이다.
그야 신화시대에는 없었던 무기니까.
"파일 벙커(Pile Bunker)."
불가사리를 죽이기에 이만한 무기가 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