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회귀
쏴아아아아아-
굵은 빗방울이 내 몸을 두드렸다. 간간이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방울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헉, 헉."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것 같았다. 젠장, 괴물 같은 자식. 왜 이런 경기에 고위리그에서 내려온 플레이어가 참가한 거지?
나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제법 거대한 나무의 뒤로 돌아가 숨었다. 엉킨 덤불들이 부디 나를 숨겨주길.
[<은신> 스킬을 사용합니다.]
"흡."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 꾸욱 참았다. 펼쳐두었던 마력장도 거두어들였다. 상대는 아주 미세한 마나의 흐름만으로도 내 위치를 알아챌 만큼 대단한 고수.
아마 내가 숲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상대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귀를 쫑긋 세우자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싸늘한 냉기를 머금은 한줄기 삭풍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제발 지나쳐가길. 부디 나를 발견하지 못하길. 이 위기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기를.
내 바램은 근처에서 뚝 멈춰서는 소리와 함께 바스러졌다.
"어디에 숨었나요? 이런 날씨에 숨바꼭질이라니, 좋지 않네요."
옥구슬이 구르듯 아름다운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듣는 순간 단두대에서 목이 내리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빗방울인지, 땀인지 모를 무언가가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아직 모른다. 저년이 혹시 나를 시험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있는 위치를 알았다면 저따위 말이 아닌, 부채부터 휘두르고 봤을 것이다.
투둑투두둑-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에 빗방울이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야. 마력장이 없어서 소리와 냄새만으로 위치를 파악해야 했는데.'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의 소리는 그녀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려주는 확실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어쩔 수 없군요. 불쌍한 나무들아, 부디 날 욕하지 말고 숨어있는 쥐새끼를 원망하렴."
슈우우우우
갑자기 그녀의 주변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기현상에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혔다.
뭘 하려고 저러는 거지?
불안감이 차올랐다. 상대가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진 않을 터.
지금이라도 피해야 하나?
"폭풍화우暴風花雨!"
순간 그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양의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마나들은 뭉실뭉실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주위로 몰려든 바람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콰과과과과광!
이게 무슨 소리지?
마치 여러 개의 회오리가 생겨나더니 그녀의 주변을 난도질하며 점점 커져가는 것 같았다. 굉음은 내가 숨어든 곳까지 휩쓸며 다가오고 있었다.
미친!
참았던 호흡을 내쉬며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젠장. 회오리에 공간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를 인식할 수가 없었다.
급히 마력장을 펼쳤지만, 마나를 머금은 회오리는 내 마력장까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내 <초감각>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쐐애애애액!
그때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미세한 파공음이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창에 마나를 담아 휘둘렀다.
그러자 소름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부딪히고 나서야 날아온 게 마나를 머금은 바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휴우, 폭풍화우는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바람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 됐잖아요?"
서서히 회오리가 멎어 들자 마력장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거리는 50미터. 처음 서 있던 자리 그대로였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상위리그 네임드 플레이어들도 나를 상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했는데, 설마 두 눈도 보이지 않는 분이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이야."
그녀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옷에 묻은 빗방울들을 툭툭 털었다.
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콜로세움에서 우산이라······.
뭐랄까, 그녀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동시에 부러웠다.
압도적인 강함이 있기 때문에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마력장에 느껴진 주위는 조금 전 그녀의 기술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거나, 그게 아니라면 작은 부스러기들을 남기고 조각조각 났다.
날 숨겨줄 수 있는 엄폐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건 포기.
상성은 최악에 가깝다. 그녀가 일으키는 마나를 머금은 바람은 내 마력장을 흐트러트린다. 싸우는 도중에 마력장으로 그녀의 행동을 느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필이면 날씨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쏟아지는 빗방울은 그녀의 기척을 느끼기 어렵게 만들었다.
"후후, 더 놀아볼까요?"
후욱!
부채를 휘두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마나를 머금은 싸늘한 바람이 내게 불어왔다.
가장 문제는 먼 거리에서 뿌려대는 저 강기 공격이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일단 그녀에게 가까이 붙어야 한다.
흐읍!
날아오는 강기를 피하며 그녀를 향해 질주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데도 그녀는 호호 웃으며 팔랑팔랑 부채만 휘두를 뿐이었다.
쐐애애액!
강기가 소름끼치는 파공음을 내며 스쳐 지나갔다. 순간 귓불에서 따끔한 느낌이 났다. 범위를 잘못 계산한 것인지 귀 끝이 조금 잘려 나간 것 같았다.
최소한으로 피하며 돌진한 덕분에 어느덧 그녀와의 거리는 10미터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폴짝 뛰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내가.
놓칠 것 같아?
[<귀영환령보> 스킬을 사용합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이전보다 확연히 빨라진 속도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휘익-! 휘익-!
하지만 내 창은 허공 가르는 소리만을 남길 뿐이었다.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마다 창을 휘둘러 보았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과 같았다. 자유롭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후후."
흡!
나는 가쁜 숨을 들이켰다.
이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공격하는 동안엔 부채를 휘두르지 못할 터.
하지만 내 예상을 비웃듯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는 듯하던 그녀가 한순간 엄청난 속도로 내게 파고들어 왔다.
파앙!
내디뎠던 무릎이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나갔다.
이게 부채로 때린 거라고?
마치 쇠몽둥이로 후드려 맞은 것 같았다.
파앙! 파앙! 파앙!
어깨와 허벅지, 쇄골에 화끈한 느낌이 났다. 엄청난 고통에 한순간 창을 놓칠 뻔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창을 휘둘렀다. 방어를 버린, 공격 일변도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붙어서 기회를 노려야 해.'
하지만 나의 그 무엇도 그녀의 옷깃 하나 닿지 않았다.
그녀와 내 스텟 차이는 절망적일 정도였다.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짜악!
부채에 내 왼팔이 터져나갔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아마 저 공격에 맞으면 머리가 터져 죽겠지.
씨발, 이판사판이다.
'죽더라도 반드시 몸에 구멍 하나는 내주겠어.'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한 팔로 창을 찔러 넣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쉽게 죽어줄 마음도 없다.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맞찔러 들어가자 그녀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가팔라졌다.
"앗!"
그녀가 경악성과 함께 휘두르던 부채의 방향을 급히 꺾는 게 느껴졌다.
됐어, 기회가 왔어!
그녀의 부채로는 내 창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이대로 찔러 들어가면서 숨겨둔 단검을 꺼내 목을 그으면······!
빠악!
순간 엄청난 통증이 내 몸을 휘감았다.
한동안 내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크윽. 도대체 뭐에 당한 거지?
무엇에 당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나는 한참을 날아가다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쿨럭, 쿨럭."
목구멍 너머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나는 마력장을 펼쳐 그녀의 모습을 확인했다.
젠장.
그녀의 우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하아. 쫄딱 젖어버렸네."
이전과 다르게 싸늘한 목소리.
그녀가 곁에 떨어져 있던 내 창을 들고 다가왔다.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푹-
"정말 터프한 분이시군요. 깜짝 놀랐네요. 싸움을 좋아하시는 분 같은데, 아마 저승에 가서도 싸우실 일이 많으실 거예요."
"쿨럭, 쿨럭."
가슴에 무언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져갈 때 잃어버리지 말라고 가슴에 박아드리는 거니까 고. 맙. 게. 생각하세요."
손을 탁, 탁 턴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줍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온몸에 가득했던 통증들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포션을 쓰면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해. 창은 정확히 내 폐를 관통했어.
수십 경기를 치르며 많은 상처를 입어봤기에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포기하라며 내 몸을 두드렸다.
띠링!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체력이 1% 남았습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안우진)] [소속 : Team 정의]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73(+5)] [민첩 : 76(+5)] [체력 : 71(+5)]
[정신 : 92(+5)] [지력 : 37(+5)] [마력 : 82(+5)]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보유 스킬(5/5) : <은신> <귀영환령보> <살혼> <뇌룡아> <회광반조>]
[업적 특전 : 전체 능력치 +5]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1%]
젠장. 이렇게 죽는 건가.
어떻게 상위리그까지 올라왔는데······.
살이 찢기고, 뼈가 갈리는 나날을 견뎌내며 여기까지 왔는데······.
억울했다. 너무 허무했다.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둘렀는데도 고위리그에서 내려온 플레이어의 옷깃 하나 스칠 수 없다니.
내 지난 나날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에게도 조금만 재능이 있었더라면. 다른 차원의 플레이어들처럼 뭐라도 재능이 있었더라면.
목구멍에서 울컥, 피가 솟아 나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반드시 이뤄야 할 소원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포기할 거 같아?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등급 알 수 없음>을 꺼냈습니다.]
손끝에서 어렴풋하게 무언가가 만져졌다. 나는 그걸 가슴 위에 올리고, 소매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단검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띠링! 띠링! 띠링!
[관객들이 당신이 꺼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관객들이 당신이 꺼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관객들이 당신이 꺼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푹-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책에 찔러넣었다.
띠링! 띠링! 띠링!
[관객들이 당신이 꺼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관객들이 당신이 꺼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관객들이 당신이 꺼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잠이 쏟아지고, 감각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갈 때였다.
내 귓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빗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숲에 가득했던 풀 내음도, 싸늘하던 비바람도, 내 온몸을 잠식하고 있던 통증들도. 그리고 숨 막히던 고통도.
모두 사라졌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그때 무시무시한 귀곡성이 퍼져나갔다.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을 만큼, 살을 찢어발기듯 엄청날 정도로 악의에 찬 음성이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엄청난 존재감이 나를 짓누르며 나타났다.
―모습이 말이 아니구나.
"왕이여······."
―내게 두 눈을 바쳐 초감각을 얻고도 그런 한심한 모습이라니.
"하, 그래봤자 상위리그가 한계던 걸."
―나를 탓할 것 없다. 그대의 재능이 여기까지였을 뿐.
왕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끔찍했다.
―날 왜 불렀는가. 또 바칠 것이 남아 있는가.
"아직 남아 있지. 바로 내 영혼."
―영혼이라······. 무척 구미가 당기긴 하다만, 영혼의 지급은 죽은 이후로 미뤄지겠군.
"당연하지."
―후후, 영악한 놈이로고. 초월리그에 올라가면 반신半神이 돼서 내가 영혼을 수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겠군.
"왜, 쫄려?"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발.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나는 초조하게 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놈의 영혼을 유황불에 던져넣고 영원히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지.
후-
정말 다행이다. 왕이 미끼를 물었다.
나는 그제야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상관없어. 보잘것없는 이 한 몸뚱이 바쳐서라도 초월리그의 챔피언이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내 소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 지옥에 묶여 평생 고통받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귀곡성이 점차 잦아들고, 왕의 존재감도 희미해져 갔다. 마치 열린 문이 조금씩 닫혀가고 있는 것 같았다.
―좋다. 그대의 영혼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노라. 초월리그까지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대의 영혼은 내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짓누르던 왕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쏴아아아아-
빗방울이 다시 내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통증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미친 듯이 시스템 창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스템에 알 수 없[email protected]
#$#!%$!]
띠링!
[콜로세움에 처음 입장했던 때로 시간을 되돌립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환한 빛이 나를 감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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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더미(1)
정신을 차리자 천장에 걸려 있는 밧줄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니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방.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에반게리온 브로마이드,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꽂이 등.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위태롭게 나를 지탱하고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금부터 시작해서 실핏줄까지, 눈에 생생하게 보였다.
손을 내리자 손바닥은 점점 멀어지고, 내 시야도 점점 넓어졌다.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
내 두 눈이 보이던 그 때로.
띠링!
[콜로세움에서 초대권이 도착했습니다.]
[콜로세움의 챔피언이 되면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드립니다.]
[당신은 10초 뒤에 죽을 운명이므로 입장을 거절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콜로세움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es / No]
내 시야에 반투명한 메세지창이 나타났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콜로세움에 처음 입장했을 때부터.
고위리그라는 벽에 직면해 절망하던 순간까지.
고통스럽지 않은 나날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지은 죄가 너무 컸으니까.
이 괴로움은 내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내 원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였다.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한 기억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Yes(선택) / No]
나는 망설임 없이 입장을 눌렀다.
내 몸을 감싼 하얀 빛이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주변에선 하얀 빛무리와 함께 사람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주위엔 동그랗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 위로 반투명한 파란색 막이 쳐져 있고, 하늘 위에는 낮인데도 온갖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눈을 잃기 전까지 매일 보던 풍경이었다.
다시 팜(Farm)에 들어왔다.
잠시 후 빛무리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자 하늘 위에서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우리 앞으로 날아왔다. 그녀는 우아하게 날개를 접으며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반갑다. 나는 앞으로 그대들을 가르치고, 인솔할 7급 권천사權天使 피넛엘 이다."
"처, 천사다······!"
"천사라니. 도대체······!"
"조용, 조용!"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웅성대자 피넛엘이 호통쳤다. 순식간에 공터가 침묵으로 감돌았다.
"그대들은 천계에 있는 콜로세움에 입장한 것이다. 앞으로는 나와 같은 천사들을 자주 볼 것이니,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된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할 것이다. 딱 한 번만 얘기할 것이니, 집중해서 듣도록."
피넛엘이 콜로세움의 시스템과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기에 나는 신경을 끄고 주위를 둘러봤다.
팜은 익숙하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뭐지?
분명 시간을 되돌려 왔으니, 처음 소속되는 팜도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처음 들어왔던 곳이 아니지?
나는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띠링!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미정)] [소속 : Team 성장]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 [민첩 : 2] [체력 : 1]
[정신 : 87]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100%]
띠링!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1개 있습니다.]
가장 먼저 빈약한 스텟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옥에 갇혀있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내 육체 스텟은 바닥을 찍고 있었다.
어? 근데 정신 스텟이······87?
87이면 내가 회귀하기 전의 스텟이었다.
아, 하긴. 나는 그동안의 경험들을 온전히 가진 채 과거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경험이 쌓여있으니, 정신 스텟도 그대로인 게 당연한 거였다.
어쩐지,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스텟으로 인한 나비효과였나 보다.
이렇게 되면 육체적 스텟이 낮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될 것이다.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그 이후에 눈에 들어온 건 각성 능력이었다.
이건 정말 희소식이었다.
그중엔 내가 눈을 바쳐 얻어낸 <초감각>도 들어있었으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거로 회귀한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날 정도였는데, 정신 스텟과 각성 능력까지 온전히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니.
할 수 있어.
이 정도면 고위리그까진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거야.
나에게 절망을 선사했던, 그 높다란 벽이.
더 이상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팀 '성장' 이라.
이곳은 과연 어떤 컨셉의 팜일까.
"······그리하여 지금부터 바로 본격적인 훈련을 진행할 것이다. 각자에게 장비와 숙소를 배정해 주겠다. 장비를 건네주면 곧바로 방에 가서 갈아입고 다시 이곳으로 나온다. 그럼 한 명씩 앞으로 나오도록."
앞으로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사이, 장황하게 이어지던 피넛엘의 설명이 끝났다. 그러자 피넛엘과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사람을 시작으로 한 명씩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어느새 내가 나갈 차례가 되었다.
피넛엘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가죽으로 된 상하의와 부츠를 내밀었다.
"이름."
"안우진입니다."
"안우진이라······여기 있군."
내게 보급품을 건네주던 그녀가 상태창을 열어 내 스텟을 확인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랜덤 뽑기'로 팜에 소속된 자들. 그렇기에 어떤 스텟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보급품을 주면서 한명 한명 확인하는 것이다.
"하, 스텟이 미쳤군. 정신이 87? 근력과 민첩은 왜 이래?"
"······."
"너, 복장을 딱 보니 지구인이군. 전에 하던 일이 뭐지?"
"상인입니다."
그러자 피넛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휴, 간만에 대박을 건지나 했는데 하필이면 지구인에다가 쓸모도 없는 정신 스텟이라니······"
피넛엘이 고개를 저으며 내게 이동하라고 손짓했다.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난 상위리그까지 올라갔던 플레이어.
곧 이 안에서 두각을 드러낼 테니까.
내게 배정된 방은 고시원 정도 크기의 좁은 방이었다.
이건 완전 닭장 수준인데?
내가 현재 소속된 팀은 '성장'.
'성장' 팀의 팜이 어떤 컨셉으로 운영되는지 모르지만, 이 정도로 열악한 숙소는 처음이었다.
팀의 재정이 안 좋나?
서둘러 장비를 착용하고 공터로 나서자 바닥에 검과 방패가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검과 방패 하나를 하나씩 챙겨라."
검이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무기였다. 콜로세움에 입장한 초기에는 검을 사용했었다. 물론, 이후에 창으로 바꾸긴 했지만.
검의 무게는 대략 2킬로그램 정도였다.
방패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크기가 내 몸통만 해서 5킬로그램 정도 나갔다.
뭘 하려는 거지? 곧바로 훈련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대련부터 시키려는 걸까?
"다 모였군. 그대들은 지금부터 이 공터의 외곽을 3바퀴 돌 것이다. 완주하지 못하면 오늘 식사는 없으니, 무조건 끝까지 뛰어야 한다."
그러자 앞줄에 서 있던 남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이 검과 방패를 들고 뛰어야 합니까?"
"물론이다. 콜로세움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면서 싸우는 전장이다. 힘들다고 무기를 내팽개칠 텐가?"
"······."
팜의 크기는 대략 반경 500미터 정도. 3바퀴라고 했으니까, 10킬로미터 정도 된다. 그 거리를 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검과 방패를 들고 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 혹시 그대들 중에 이 모래주머니를 차고 완주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 체력 훈련을 열외시켜주지."
피넛엘이 발치에 놓여있는 모래주머니를 툭, 찼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없군. 이번 기수도 고작 이 정도인······."
뚜벅뚜벅.
"제가 착용하겠습니다."
내가 앞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피넛엘도 나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하겠는가? 완주하지 않는 이상 훈련 열외는 없다."
"하겠습니다."
"음,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것인가? 그대의 체력 스텟이 1이라는 걸 내 모르지 않거늘······."
피넛엘이 작게 읊조리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바닥에 놓여있는 모래주머니 네 개를 팔목과 발목에 착용했다.
모래주머니의 무게는 대략 2킬로그램 정도 나갔다. 착용하자마자 온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거웠다.
"그럼, 더 이상 착용 희망자가 없는 걸로 알겠다. 출발!"
피넛엘의 외침에 나는 사람들과 섞여 외곽을 뛰기 시작했다.
후, 몸 상태가 최악이긴 했구나.
뛰기 시작한 지 고작 1분도 되지 않아서 숨이 가빠졌다.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검과 방패를 쥔 손은 무게를 못 이겨 허공을 휘저어댔다.
얼마 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몰랐다. 회귀 전에는 체력 스텟이 70을 넘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도 그다지 힘들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죽을 것 같네.'
첫 바퀴 반의반도 뛰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격렬하게 호흡하고 있지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현재 내 체력으로는 검과 방패가 없어도 완주를 할 수 있을까 말까.
그런데도 모래주머니까지 착용한 것은 관심을 끌거나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착용해야 하기 때문에 착용한 것뿐이었다.
언제 하위리그 첫 번째 경기를 치를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전에 최대한 체력 스텟을 올려두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진 비교적 편안해 보였다. 그들은 벌써부터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관심병자 새끼였군."
"꼭 저렇게 나대는 애들이 있지."
작게 읊조리는 말들이었지만, 초감각이 있는 내겐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내 목표는 초월리그의 챔피언. 저들은 내 경쟁상대가 아니다. 그런 녀석들에게 낭비할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슬슬 오를 때가 됐는데.'
멈추고 싶은 유혹이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나자빠지기엔, 그동안 내가 겪어온 지옥 같은 시간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다시 절망에 빠지고 싶지 않다.
반드시 초월리그의 챔피언이 돼서 이뤄야 할 소원이 있었다.
띠링!
[체력이 3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체력 스텟의 상승률이 증가합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이제부터는 체력 스텟이 미친 듯이 상승한다. 물이 일정한 온도에 도달해야 끓듯, 모든 육체적 스텟은 일정 구간 이후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보통은 30% 미만이 남으면 지쳐 쓰러지겠지만, 높은 정신 스텟을 가지고 있으면 이 구간을 오래 버틸 수가 있었다.
내가 정신 스텟을 가장 좋은 능력치로 꼽는 이유가 이거였다.
열을 맞춰 뛰던 초반과 달리,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달리는 사람 간의 격차가 벌어지며 줄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 끄트머리에서 이를 악문 채 악착같이 따라갔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증가합니다.]
한 바퀴를 돌 때쯤에는 거의 다리를 질질 끌듯이 뛰고 있었다.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쳤고, 내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띠링!
[체력이 2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생명에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느리더라도, 계속 뛰다 보니 어느새 나는 많은 사람을 추월할 수 있었다. 지나친 사람의 대다수가 지쳐서 걷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엔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도 있었다.
우웩-
머리가 핑 돌았다. 토악질이 나오고, 내 몸은 꼿꼿하게 서 있는 것도 힘들어 구부정한 자세였다. 팔다리에선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간간이 뜨는 메시지는 그런 내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체력 스텟이 눈에 띄게 오르는 걸 본 나는 계속해서 달릴 수 있었다.
띠링!
[체력이 1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뛰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10% 미만으로 떨어지자 한계에 달했다.
가장 빠르게 체력 스텟이 오르는 구간이지만, 가장 버티기 힘든 구간이기도 했다.
"헉, 헉."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래, 맞아. 뛰고 있었어.
왜 뛰고 있었더라······.
아, 우리 가족들한테 가고 있었지, 참.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고 뛰고 있었던 거야.
만나서,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몸이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온몸을 잠식했던 고통도 모두 사라졌다. 어느새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만!"
"헉, 헉."
누군가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땅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몸의 통제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정말 대단하다! 결국 끝까지 완주하다니. 근성이 대단하군!"
결국 다 뛰었구나.
체력이 10%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얼마나 버텼지?
나는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체력 : 8]
어느새 체력이 8배나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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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더미(2)
정신을 차려보니 깜깜한 방 안이었다.
한쪽에 딸린 책상에 내가 벗어놓은 옷들이 보였다.
내게 배정된 방이었다.
"으윽."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비명을 질렀다.
'상태창.'
띠링!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미정)] [소속 : Team 성장]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3] [민첩 : 4] [체력 : 8]
[정신 : 87]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24%]
띠링!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1개 있습니다.]
고작 10킬로미터를 뛰었을 뿐인데 근력 스텟 1, 민첩 스텟 2, 체력 스텟 7이 올라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스텟이 상승하지 않는다.
내 초기 스텟이 워낙 낮기도 했고, 체력 30% 미만 구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모두 정신 스텟 덕분이었다.
체력 30% 미만 구간부터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버틸 수 없으니까.
'아, 이걸 확인 안 했군.'
상태창 밑에 미확인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까도 봤었는데, 피넛엘에게 보급품을 받는 바람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다.
띠링!
[피조물 중 최초로 시간을 역행하셨습니다.]
[신화에서나 나오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보상으로 <신화업적:역천자> 칭호를 획득합니다!]
[<신화업적:역천자>]
[피조물 중에서 최초로 시간을 역행한 자에게 지급되는 칭호.]
[적용 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신화업적:역천자> 칭호를 적용하시겠습니까?]
[Yes / No]
"······."
메시지창을 보던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예상치 못한 내용에 정신이 멍했다.
신화 업적?
모든 스텟 20% 상승?
심장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20% 상승이면 어느 정도지?
나는 그 상승 폭을 가늠해보았다.
아마 내가 죽기 직전에 싸웠던, 고위리그에서 내려온 플레이어와 내 스텟 차이가 20% 정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회귀 전이었다면 나는 상위리그 하위권에서 단번에 고위리그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특전을 얻게 된 거였으니까.
딱딱한 침대에 누운 채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온몸의 통증이 가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후, 침착하자.
정말 대단한 칭호를 얻긴 했지만, 그래봤자 나는 이제 막 하위리그에 들어온 새내기에 불과하다.
스텟이 아무리 높아져도 여전히 초월리그는 꿈도 못 꿀 수준.
부채를 사용하던 그 여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높은 스텟을 가지고도 고위리그에서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상위리그로 내려왔으니까.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초월리그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을 뿐.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역천자:신화업적> 칭호를 적용하시겠습니까?]
[Yes / No(선택)]
나는 일단 칭호 적용을 보류했다.
칭호를 적용하는 순간 높아진 만큼 훈련으로 스텟을 올리기가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회귀 전에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경기에 들어가는 순간에만 특전을 적용시켰다.
땡! 땡! 땡! 땡! 땡! 땡!
상태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모두 식당으로 내려오도록!"
분명 뛸 때만 해도 환한 대낮이었는데,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공터에서 쓰러진 지 제법 시간이 흘렀나 보다.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일수록 식사를 잘 챙겨야 한다.
앞으로의 큰 그림을 잡는 건 자기 직전에 해도 충분할 터.
일단은 당장 닥친 일부터 차분하게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
"······."
나는 식판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올라와 있는 것은 내 손바닥만 한 빵 한 개와 수프가 전부였다.
혹시 내가 늦게 와서 그런 건가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식판을 받은 상태였다.
내 안색이 굳어졌다.
누가 보면 쪼잔하게 음식 가지고 그러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곳은 콜로세움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장에 서서 피를 뿌리며 싸울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콜로세움에 출전하지 않을 때에는 훈련이 정말 중요한데, 이런 식단으로는 훈련의 효율성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몸을 고되게 움직이는 것만이 훈련의 전부가 아니다.
휴식도 훈련의 한 부분이고, 충분한 영양분 섭취는 휴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런 식단이 나온다고?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나는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왔다.
팜에 있는 건물은 네 개.
하나는 숙소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내가 나온 식당이다.
다른 두 개의 건물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서둘러 다른 두 개의 건물에 들어가 보았다.
"······."
젠장.
최악의 팜에 걸린 것 같았다.
다른 두 개의 건물은 육체 스텟 단련실과 정신 스텟 단련실이었다.
가장 중요한 대련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공장 컨셉이었군.'
공장 컨셉의 팜은 경기를 뛰지 않는다. 아니, 뛰긴 하지만 주 수익원은 경기를 통한 수수료가 아니다.
랜덤 뽑기로 뽑은 플레이어들에게 기초 교육을 하고, 스텟을 올려서 조금의 이윤을 붙여 다른 팀에 파는 식으로 수익을 올린다.
그러므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악착같이 굴리면서도 식사는 개같이 나오기로 유명했다.
아, 그리고 공장 컨셉의 팜에서 경기를 뛰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다.
'악성 재고로 팜에 남은 플레이어들을 더미로 내보내는 것.'
처음 두 경기는 관객들이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한다. 이제 막 입장했기에, 그들에게도 경기에 빠져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위리그의 처음 두 경기에서는 플레이어들이 피를 뿌리고, 잔인하게 죽으며 경기의 흥을 돋구는 역할을 했다.
그 잔인하게 죽는 용으로 출전하는 플레이어들을 '더미'라고 불렀다.
플레이어가 죽어도 경기 포인트는 지급된다. 다만, 원래대로라면 플레이어 7, 팀에서 3을 가져가는데 플레이어가 죽었기 때문에 팀에서 10을 모두 가져간다.
대전 포인트가 낮아도 수익이 쏠쏠한 것이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서 최대한 훈련해서 빠르게 스텟을 끌어올린 다음에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쪽으로 계획을 잡아야겠다.
이곳은 나를 좋은 플레이어로 성장시켜 수수료로 돈을 벌 생각이 없는 곳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하늘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피넛엘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피넛엘이 날개를 접으며 우아하게 내 앞에 착지했다.
"호오, 감각도 뛰어나구나. 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다니. 근데 벌써 깨어났는가? 조금 더 쉬지 않고."
"······."
"오늘 정말 멋있었다. 이곳에서 트레이너엔젤을 맡은 이후로 그대처럼 미래가 기대되는 플레이어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아, 네."
"앞으로도 꾸준한 활약상을 기대하겠다."
피넛엘이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의 칭찬에도 나는 시큰둥했다.
하필 공장이라니.
나는 포인트가 무척 필요하다. 지금 시기라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히든 피스들이 중개소에 넘쳐날 테니까.
그것들을 쓸어모아 빠르게 강해질 계획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획이 어그러졌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젠장.
2회차는 시작부터 더럽게 꼬였네.
"피넛엘!"
"아, 시노엘님."
피넛엘과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 위에서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빠르게 날아왔다. 그녀는 피넛엘 바로 코앞에서 멈추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 모든 플레이어들을 집결시켜라."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더미로 출전할 플레이어들을 뽑을 것이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더미를 제공하기로 했던 팀에 무언가 변고가 생긴 것 같다. 우리 팀에서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시간이 없다. 잠시 후면 바로 경기가 열릴 것이다."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시노엘은 그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피넛엘은 시노엘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공터로 나온다! 늦으면 큰 벌을 내릴 것이다!"
피넛엘의 음성이 팜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식당과 숙소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물밀듯이 빠져나왔다.
나는 나대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필 이런 시기에 더미로 출전할 플레이어들을 선발한다니.
'더미로 출전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물론 상위리그까지 올라갔다 왔던 경험과 실력이 있기 때문에 더미로 출전하더라도 극복해낼 자신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 큰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문제는 지금 내 수준에는 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리스크가 너무 컸다.
피넛엘에게 어필해볼까?
아니, 그녀는 결정권자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머리를 굴려봤지만 뚜렷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제길, 이렇게 두 손 놓고 잘 되길 기도하는 것은 딱 질색인데.
플레이어들이 다 모이자 사라졌던 시노엘이 다시 우리 앞에 등장했다.
"갑작스럽게 우리 팀이 콜로세움에 출전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콜로세움에 입장할 인원들을 호명하겠다. 신들 앞에서 기량을 뽐낸다는 것은 플레이어로서 영광과 같으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자부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더미로 출전한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더미의 상대편으로는 하위리그를 몇 경기 치른 베테랑들이 나올 것이다. 그들은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더미들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려고 할 것이고.
"호명하는 자는 앞으로 나온다. 에이든, 브로디, 코비, 단테, 김민지······."
시노엘이 20명의 인원을 호명했다. 거의 대부분이 나와 같은 시기에 랜덤 뽑기로 팀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다행히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휴.'
콜로세움에 입장한 첫날.
하마터면 훈련다운 훈련도 하지 못한 채 더미로 콜로세움에 내몰릴 뻔했다.
현재 내 스텟은 아직 일반인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
아무리 내가 상위리그 플레이어였다고 할지라도, 절대적인 피지컬 차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경기에 뛰려면 못해도 1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더미로 호명된 사람들은 다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앞으로 나갔다.
보통 경기가 잡히면 1달 전에서 늦어도 1주일 전에 알려주는 게 관례다. 그래야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고, 그에 맞춰 계획도 세우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호명된 자들은 갑작스럽게 출전이 통보된 상황이다.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공터 앞에 하얀색 바탕의 동그란 원이 생겨났다.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였다.
"입장하라!"
시노엘의 성화에 한 명씩 쭈뼛거리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호명된 인원이 모두 들어가자 게이트가 까맣게 변했다.
정원이 가득 찼다는 뜻이다.
"남은 인원들은 해산시킬까요?"
"아니. 한 경기가 더 남아있다."
피넛엘과 시노엘의 대화에 안도의 한숨을 뱉던 나와 플레이어들의 몸이 다시 경직됐다.
무거운 침묵이 공터에 내려앉았다.
시노엘과 피넛엘은 허공을 응시한 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아마 시스템으로 경기를 보고 있을 것이다. 천사들과 달리 플레이어들은 경기를 볼 수가 없기에 손가락만 꼼지락대며 기다릴 뿐이었다.
"엇, 다시 색깔이 변한다!"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보니 게이트가 다시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의 내부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 죽었군.'
"애석하구나. 아쉽게도 출전한 인원 모두가 전사했다. 잠시 그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갖겠다."
"······."
"자, 다음 경기에 출전할 인원을 호명하겠다. 로이, 파브로, 필립, 그레디······."
시노엘이 다시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앞으로 나가는 대다수 인원이 나와 같은 시기에 들어온 자들이었다.
"······조지, 게빈, 안우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시노엘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
젠장.
부디 난 아니길 바랐는데.
나는 곧바로 검과 방패부터 챙겼다.
이미 결정된 이상 되돌릴 순 없겠지.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주겠어.'
회귀한 첫날.
나는 '더미'로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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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더미(3)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낯익은 경기장의 모습이 보였다.
내부엔 이미 100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자리해 있었다.
다른 네 개의 팀이 더 참석한 것이었다.
젠장.
오늘의 메인 이벤터가 제법 네임드급으로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다.
빅매치 전에 100명이 넘는 더미들의 피로 흥을 돋우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곤란한데.
그렇다는 건 우리를 잔인하게 죽이러 들어올 상대편의 숫자도 제법 될 것이다.
이번 경기에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상대편을 모조리 죽여야 하는데······.
더미는 아무리 많아도 도움이 되질 않으니, 결국 나 혼자 해내야 했다.
'어려운 경기가 되겠군.'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1 의 2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팀 대항전(개인 PvP)]
[게임명 : 학살의 밤]
[맵 : 원형 투기장(소)]
[관객 수 : 17,204 명]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지만 나는 무시하고 입구의 반대쪽으로 뛰었다.
현재 내 체력은 8.
처참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낮다.
띠링!
[승리 조건 : 적들을 모두 섬멸하세요.]
[현재 상황 : R 30 vs B 100]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적을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부터 상대편 녀석들의 표적이 되어선 곤란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플레이어들이 많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은 피한다.
저곳으로 제일 많은 어그로가 끌릴 것이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경기장의 8시 방향 구석.
저곳이라면 적들과 일대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경기 시작!]
상태창이 경기 시작을 알려왔다.
직경 200미터 정도의 조그마한 공간.
12시 방향 쪽에 달려 있던 쇠창살 문이 열리더니 상대편 녀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숫자는 총 30명.
레드 팀 플레이어들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다.
포인트를 벌어 장비 업그레이드를 많이 했다는 의미이다.
반면, 우리는 처음 콜로세움에 입장했을 때 받은 기초 가죽 상하의를 입고 있었다.
장비에서도 확실한 열세.
녀석들은 경기장에 들어오자마자 우리팀 플레이어들이 제일 많이 몰려 있던 곳으로 달려들었다.
화살과 마법이 날아들고, 검과 도끼가 춤을 추었다.
"꺄아아악!"
"으악!"
순식간에 관객들에게 바치는 붉은 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공포와 광기가 경기장을 잠식했다.
내가 있는 방향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으으, 저리 가!"
"크흐흐흐, 그걸 검술이라고 휘두르는 것이냐? 마치 한 마리의 싱싱한 생선 같구나."
내 앞에 있던 더미를 향해 바이킹 투구를 쓴 레드 팀 플레이어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더미는 높이 5미터의 외벽에 물러설 곳이 없어지자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꽥!"
그렇게 마구잡이로 휘두른 검이 상대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레드 팀 플레이어들은 모두 하위리그를 몇 경기는 치른 베테랑들.
가볍게 검을 피한 바이킹 투구가 거대한 도끼로 더미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더미는 단말마와 함께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허물어졌다.
곧이어 바이킹이 혀를 낼름 내민 채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녀석의 입가에는 악마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표정이었다.
다음 타깃은 바로 나였다.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미정)-지구] [소속 : Team 성장]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4(+1)] [민첩 : 5(+1)] [체력 : 10(+2)]
[정신 : 104(+17)] [지력 : 14(+2)] [마력 : 0(+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97%]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몸을 억누르고 있던 부담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 자리를 넘은 정신 스텟은 나를 단번에 고요한 상태로 만들었다.
"네 놈은 어디를 썰어 줄까? 응?"
거대한 도끼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진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두근. 두근.
녀석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다. 온몸에 피를 머금고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바닥을 쓸며 빠르게 달려든 녀석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후웅!
공기를 찢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상하다.'
혈향을 머금은 거대한 도끼가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뭔가 싱크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피하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는데 한참 뒤에서야 내 몸이 움직이는 느낌.
감각이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후웅!
다시 한번 도끼가 날아든다.
'젠장.'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방패를 내밀었다.
콰앙!
끄윽.
무시무시한 힘에 몸이 튕겨져 나갔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팔목까지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근력 스텟이 못해도 20은 넘을 것 같았다.
왜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혹시?'
나는 눈을 감았다.
후우우욱-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날에 묻은 피냄새를 맡는다.
몸을 비틀자 곤두선 온몸의 신경이, 도끼가 지금 내 곁을 스쳐 갔다는 것을 느낀다.
'눈 때문이었군.'
초감각은 무척 다루기 어려운 각성 능력이다.
온몸의 신경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어 섬세한 활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각이 증폭되는 만큼 조금만 감각이 틀어져도 크게 느껴진달까.
결국 내 새로운 육체에 초감각이 적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단 익숙해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어야겠군.'
그래도 시각을 제외하곤 모두 익숙한 감각들이기에 적응이 빨라서 다행이었다.
"크하하하, 한 놈은 검을 들고 춤을 추질 않나, 한 놈은 무서워서 눈을 감는 꼴이라니!"
눈이 보이지 않아도 녀석의 공격을 피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난 원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싸워왔으니까.
한참을 피하는 것에 집중하자 어긋났던 감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떠볼까?
미약하게 실눈을 뜨자 녀석의 도끼가 쇄도하는 게 보였다.
'음, 아까보단 훨씬 낫네.'
여전히 조금씩 감각이 뒤틀렸지만,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눈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을 안정시켜놓은 덕분이었다.
후웅!
녀석은 나보다 훨씬 강하고, 빨랐다. 스텟의 차이가 배 이상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흐흐, 제법 잘 피하는구나. 옳지, 일단 그 다리부터 잘라줘야겠다."
또다시 녀석의 도끼가 날아든다.
'이게······.'
위협적인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여유로웠다.
녀석의 도끼가 느리게 보였다.
'빈틈!'
나는 방패를 앞세우며 녀석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쾅!
근력이 얼마나 센지, 방패로 막았는데도 뒤로 한 움큼 밀려났다. 하지만 내 검은 이미 녀석의 가슴에 들어갔다 나온 후였다.
띠링!
[플레이어 '조나스' 를 처치했습니다.]
바이킹 투구를 쓴 녀석이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손에 쥔 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을 때린 핏방울이 잘게 쪼개지며 튀어 올랐다.
그 모든 광경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낯선 감각이 바로 시력의 초감각 능력.
생소한 느낌이지만.
보인다는 것은 무척 좋은 거구나.
"놈! 제법이구나!"
그때 곁에서 더미들을 학살하고 있던 검은 무복의 플레이어가 내게 달려들었다.
바닥을 박차는 허벅지.
허리를 트는 움직임.
그 회전이 어깨를 거쳐, 녀석의 팔을 지나, 검으로 전해진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푹-
나무 방패로 녀석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바이킹한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녀석의 빈틈에 검을 찔렀다.
"컥······!"
띠링!
[플레이어 '하태충' 을 처치했습니다.]
그러자 무복을 입은 사내 역시 너무나 쉽게 죽었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다.
이렇게 쉽게 쓰러진다고?
1회차의 난 언제나 내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시작부터 남들보다 크게 떨어지는 스텟.
검을 한 번도 쥐어보지 않은 물렁한 손.
살인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연약한 멘탈까지.
나는 언제나 콜로세움의 최약자였다.
그리고 최약자의 삶은 상위리그까지 이어졌다.
이전보다 좀 더 강해졌을지 모르지만, 상위리그엔 나보다 더한 괴물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두 명이나 쓰러트리는 걸 본 상대편 플레이어 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더미 주제에!"
"죽어!"
휘익-
날아드는 두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창.
두 자루의 검은 방패로 막고, 한 자루의 창은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했다.
그사이 나는 제일 왼쪽에 있던, 갑옷을 입은 녀석의 목에 검을 쑤셔 넣었다.
갑옷의 연결부에서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검을 놓친 채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띠링!
[플레이어 '루카스' 를 처치했습니다.]
"노옴!"
검을 비틀어 빼내며 뒤로 물러서자 눈앞에 검이 그려낸 작은 실선이 생겨났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검은 내 앞머리 몇 가닥을 자른 채 목표를 잃고 지나갔다.
"큭!"
방패의 아랫부분으로 검을 든 녀석의 무릎을 찍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목을 잃은 또 한 명의 플레이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띠링!
[플레이어 '루벤' 을 처치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바닥을 굴렀다. 창이 아슬아슬하게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아, 하아."
창을 든 동양인이 숨을 헐떡거렸다.
녀석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창을 들고 있는 녀석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저렇게 몸이 굳은 상태로는 창을 휘둘러도 무서울 것 같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내 호흡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은 체력 : 71%]
네 명이나 처치했는데 체력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간결하고 효율적인 동작으로 체력의 소모가 별로 없었다.
현재 내 체력 수치는 업적 특전의 적용을 받아 10.
지구에서라면 평범한 일반인 정도의 체력이었다.
실전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빠진다.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몸은 끊임없이 열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무척 고요하다.
칼이 날아들고, 피가 튀는 전장에 서 있는 것 같지 않았다.
100이 넘은 정신력은 내 체력 소모까지 잡아주었다.
"끄억······컥."
띠링!
[플레이어 '진진' 을 처치했습니다.]
녀석을 발로 차 검을 뽑아냈다.
주위를 둘러보자 잘려 나간 팔다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지가 통째로 뜯어진 채 몸통만 남아 있는 시체도 있었다.
대부분이 더미들의 시체였다.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욱- 후욱- 후욱-
나와 가장 근처에 서 있던 사내가 거대한 철퇴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녀석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으랴아아앗!"
철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왔다.
고작해야 나무로 이루어진 방패로는 막자마자 산산조각이 나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콰앙!
막지 않고 피하면 되니까.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철퇴로 인해 움푹 들어갔다.
나는 옆으로 가볍게 피해 녀석의 경동맥을 슥- 하고 그을 뿐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나를 적셨다.
씁쓸하고 비릿한 피냄새가 났다.
띠링!
[플레이어 '쿠마르' 를 처치했습니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녀석에게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을 한번 죽 훑어봤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들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콜로세움의 최약자였던 나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부채 여인을 바라볼 때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저러지 않았을까.
포식자를 바라보는 피식자의 눈빛.
나는 상위리그까지 올라갔던 플레이어였다.
현재 스텟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는 그동안의 실력과 경험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거기에 지금은 시력까지 되찾으면서 '완성된 초감각'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기에 하위리그에 서 있는 나는 저들에게 있어서 포식자인 셈이었다.
낮은 스텟?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잘못된 표현인지 깨달았다.
호랑이는 이빨이 없어도 포식자다.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고, 피식자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기세를 가지고 있다.
호랑이가 이빨이 빠졌어도, 초식 동물들은 호랑이를 사냥할 수 없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스스로를 포식자로 여기고 있는 사냥감들에게 누가 진정한 포식자인지를 알려줘야 할 때였다.
이제부터는 내 '사냥 시간' 이었다.
[플레이어 '에런'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브래들리'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코빈'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공진우' 를 처치······.]
[플레이어 '프랭키' 를······.]
[플레이어 '안여여' 를······.]
결국, 나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처치할 수 있었고.
띠링!
[상대편의 모든 플레이어를 처치했습니다!]
['블루' 팀 승리!]
경기장에 서 있는 사람은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미 측이 승리한 것이다.
[남은 체력 : 23%]
"헉, 헉."
혼자서 30명의 플레이어를 전부 상대하는 것은 역시 힘들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왜냐하면 곧.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킬 수 ― 30 킬]
[놀라운 업적!]
[홀로 모든 적을 처치했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띠링!
[30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3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혼자서 모든 상대편 플레이어를 처치했기 때문에 추가로 x 2 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1 의 2경기를 종료합니다.]
띠링!
[파이트 머니로 5,6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2,400 P 차감)]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2,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포인트가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미로써 출전한 첫 번째 경기에서.
나는 내 안에 숨어있던 포식자의 피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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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새 둥지(1)
팀 '성장'의 최고 관리자, 시노엘.
그녀는 팀을 소유하고 있는 신에게 전권을 부여받아 랜덤 뽑기부터 시작해서 플레이어들의 육성, 판매, 건물 관리, 그리고 재정까지 모든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팀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정 퍼센트를 급여로 가져가고 있었다.
'요즘 실적이 너무 안 좋은데.'
육성을 통해 팔리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까지는 악성 재고로 쌓여가는 녀석들을 '더미'로 털어내며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지만, 최근엔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팀 '성장' 처럼 공장 컨셉으로 팜을 운영하는 팀들이 전부 죽을 쑤고 있는 상황. 그러다 보니 최근엔 '더미'로 악성 재고를 처리하는 것도 경쟁이 붙어 버렸다.
공장 컨셉이 플레이어들의 하위리그 첫 경기 사망률을 크게 낮춰준다는 것 때문에 구매자가 증가하면서 크게 유행했던 것도 이젠 옛말.
하위리그의 미션들이 난이도가 점차 상승함에 따라 공장에서 찍어낸 플레이어들의 사망률이 크게 높아지면서 구매자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우리 팀도 변화에 따라가야 해. 공장은 이제 미래가 없어.'
이제 공장 컨셉은 끝났다. 팀 '성장'도 플레이어들을 육성시켜 콜로세움 대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데 게임 메이커에게 연락이 왔다. 갑자기 '더미'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악성 재고를 다 털어내고, 새 출발을 하려던 참이었다.
시노엘은 곧장 수락하며, 최근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을 위주로 더미에 밀어 넣었다.
기존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육성이 된 상태.
그러므로 신규 플레이어들을 쳐내는 건 어떻게 보면 그녀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자, 다음 경기에 출전할 인원을 호명하겠다. 로이, 파브로, 필립, 그레디······."
안 그래도 요즘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크게 늘면서 팜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시노엘은 속 시원한 마음으로 가장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플레이어들을 더미로 출전시켰다.
중간에 트레이너엔젤을 맡고 있는 피넛엘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후. 한숨 돌릴 수 있겠네.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나 관람할까?'
팀의 플레이어가 출전하는 경기에 한해서, 소속팀 천사들은 경기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사실상 기초 스텟 육성법 말고는 문외한인 시노엘은 이번 기회에 하위리그 플레이어들을 어떤 방향으로 육성하는지도 참고할 겸 경기를 관람했다.
그런데.
―오, 저 플레이어 정말 흥미롭군요. 벌써 세 명째입니다.
―스텟은 낮은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요. 무림 출신일까요? 움직임이 무척 간결하고 효율적입니다.
―더미로 출전할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깽판을 치기 위해 일부러 투입한 네임드일까요?
―하하, 그건 아닐 겁니다. 닉네임이 '미정'으로 되어있는 걸로 보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플레이어 같은데요. 팀 '성장'은 공장 컨셉으로 팜이 운영되고 있죠. 그리고 이런 더미 경기에서 주로 악성 재고로 남은 플레이어들을 내보내고요. 아마, 기초 스텟이 낮아 보이니까 그냥 던진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엄청난 원석이었던 거죠. 아, 말씀드리는 순간 닉네임 '미정'이 네 명째를 베어 넘깁니다.
―팀 '성장'이 엄청난 원석을 챙겼군요. 아, 경기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된다면 말입니다.
시노엘의 귀에는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신들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아름다워.'
남들이 보기엔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 같지만, 시노엘은 그가 최고의 효율을 위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공격을 피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멍하니 경기를 지켜보던 시노엘이 화들짝 놀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서둘러 시스템 창을 켰다.
그러자 눈에 나타나는 5개의 인터페이스.
시노엘은 그 중 [중개 거래소]를 눌렀다.
서둘러 판매 취소를 해야 한다.
팀 '성장'은 랜덤 뽑기로 플레이어를 뽑음과 동시에 경매소에 판매 등록이 올라간다.
금액은 랜덤 뽑기의 비용인 1,000 포인트보다 200포인트 더 높은 1,200 포인트.
그러므로 지금 경기에서 활약하고 있는 '미정'도 판매 등록이 되어있을 것이다.
시노엘이 발을 동동 굴렀다.
'부디 늦지 않았길······!'
가능성은 아직 있었다.
닉네임이 '미정'이기 때문에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경기는 이제 막 시작했다.
녀석이 죽을지 안 죽을지 아직 모르는 상황이라 구입하고 싶은 신이 있더라도 망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노엘의 기대는 판매 현황을 보는 순간 철저하게 부서졌다.
[판매 완료]
[닉네임 : 미정]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3] [민첩 : 4] [체력 : 8]
[정신 : 87] [지력 : 12] [마력 : 0]
[판매 금액 : 1,200 P ]
그사이 어떤 신이 녀석을 사 간 것이다.
"안 돼!"
시노엘이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12만 포인트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플레이어가.
1,200 포인트에 판매되어 있었다.
* * *
내 몸을 감싼 하얀 빛이 사라지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휑한 공터가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띠링!
[경기 도중 플레이어의 소속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팀 '투지' 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아, 다른 팜이었구나.'
어쩐지 원래 보였어야 할 숙소와 식당 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한 경기 만에 공장 컨셉의 팜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그 경기를 보고서도 나를 팔았다고?
혼자서 하위리그를 몇 경기씩은 뛰었던 놈들을 학살하고 다녔는데?
팀 '성장'이 무슨 생각으로 날 팔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라면 절대 안 팔았을 텐데.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서둘러 주위를 살펴봤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가 지내야 할 새로운 팜.
일단 어떤 컨셉으로 운영되는지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위로 반투명한 파란색 막이 쳐져 있는 건 팀 성장과 똑같다.
그런데 공터에는 아무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개도.
그리고 공터의 폭이 엄청 좁아졌다. 원래 직경 500미터 정도 되던 팜의 크기가 1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건 마치.
'방금 막 팜을 만든 것 같은데?'
그때 내 바로 앞에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빛무리는 이내 젊은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싸울 때 효율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풀거리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 커녕 작은 비수 하나 막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그대가 소속된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라고 합니다."
"안우진입니다."
"경기 정말 잘 봤어요. 어찌나 잘 싸우시던지, 보자마자 가슴이 콩닥콩닥했답니다. 특히 마지막에······."
"그런데 건물은 왜 하나도 없습니까? 여기는 어떤 컨셉으로 운영되는 팜이죠?"
내 말에 여신이 길게 흘러 내려와 도망칠 때 붙잡히기 딱 좋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아······사실 이제 막 만들어진 팜이거든요. 그러니까, 안우진님이 팀 '투지' 소속의 첫 번째 플레이어인 셈이죠."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공장 컨셉 다음은,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신생 팜이라······.
2회차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기껏 시간을 되돌려서 왔는데, 그 소중한 시간들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팀을 만나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호호······. 그런 표정 짓지 마셔요. 안우진님을 서포팅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을 테니까."
뭐지?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거지?
보통 신들은 플레이어들을 인격체로 취급해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우리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제 훈련을 제대로 서포팅하지 못한다면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 주시겠습니까?"
"어······그건 힘들겠지만, 뭘 우려하시는지는 알아요. 근데 걱정하지 마셔요. 제가 팀을 창설하기 전에 얼마나 콜로세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는데요?"
아세리안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보자 믿음이 가질 않았다.
"혹시 천사들도 없습니까?"
"네, 제가 혼자서 할 거예요."
가관이다.
팀을 운영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천사들이 필요하다.
팜을 관리할 천사도 있어야 하고, 훈련을 도와줄 천사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재정적인 부분도 담당할 천사가 필요하고, 이래저래 할 일이 많다.
그 모든 일들을 눈앞의 여신이 혼자서 감당한다는 뜻이었다.
"플레이어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을 텐데요."
"아, 괜찮아요. 어차피 당분간은 안우진님 한 명만 케어할 예정이니까."
이거였군.
어쩐지 너무 저자세로 나온다 싶었다.
한마디로 가능성이 보이는 소수 정예로 이끌어나갈 생각인데, 그런 녀석들을 쉽게 얻을 리도 없고.
결국 당분간 내가 팀 '투지'의 유일한 수입원이라는 뜻.
'어쩔 수 없군.'
눈치를 보아하니 나를 프리 에이전트로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태업을 해서 어떻게든 나를 다른 팀으로 팔아넘기게끔 하던가.
아니면 이곳을 내 입맛대로 끌고 가던가.
다행히 나는 팀 '투지'의 첫 번째 플레이어.
당분간은 모든 서포팅이 집중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맞춰 팜을 꾸려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장점만큼 단점도 크다.
전문적인 케어를 받기 힘들다는 것.
혼자서 훈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괜히 지구에서 격투기 선수들이 체육관에 소속되어 관리받으면서 훈련하는 게 아니다.
혼자서 하는 것은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막 팀을 창설한 아세리안이 플레이어 육성법을 제대로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훈련은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일단은 숙소를 지어드릴게요."
아세리안이 허공을 몇 번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 순식간에 1층짜리 집이 생겨났다.
레벨 1짜리 숙소였다.
"아마 안우진님이 제 서포팅을 못마땅해하실 일은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럼 오늘은 푹 쉬시길."
뿅!
아세리안이 환하게 웃더니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금 막 지어진 숙소로 들어갔다.
첫 번째 경기에서 5,600 포인트를 벌었다. 첫 경기를 뛰는 신입 플레이어의 기본급이 1,000 포인트니, 나는 그 5배를 번 셈이었다.
포인트는 지구의 돈으로 환산한다면 대략 1포인트당 1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
그러니 한 경기 만에 5천만 원의 수익을 올린 것.
나는 침대에 철퍼덕 누워 상태창에서 '시스템 상점'으로 접속했다.
[체력 스텟을 구매하시겠습니까?]
[1스텟 당 500 P 가 소모됩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경기를 통해 번 포인트로 스텟을 상승시킨다.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계. 약한 자는 도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스텟을 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스텟을 올리는 것은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니까.
'당분간은 훈련으로도 충분히 올릴 수 있어.'
1회차에서 포인트가 생기는 즉시 스텟을 올리고 크게 후회했었다.
스텟이 높을수록 훈련을 통해 올리기가 힘들어진다.
물론 스텟이 10단위로 올라갈수록 포인트를 통해 올리는 가격 또한 500씩 상승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계산해보면 당장 올리지 않는 게 훨씬 이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스텟 10 이하에서 1 스텟 올릴 때 드는 포인트가 500 포인트.
그리고 20에서 1 스텟 올릴 때 드는 포인트가 1,000 포인트다.
2배의 상승.
그런데 훈련으로 올리는 건 20% 정도 더 고생할 뿐이었다.
'근데 그 상승폭이 위로 올라갈 수록 커지지.'
그런데 61에서 1 스텟 올릴 땐 3,500 포인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71에서 1 스텟 올릴 땐 4,000 포인트가 든다.
대략 14%의 상승.
하지만 훈련으로 올리는 데엔 그보다 몇 배나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토나올 정도지.'
그렇다고 당장 강해진다고 해서 경기를 많이 뛸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
오히려 빠르게 강해질수록, 그 수준에 비슷한 플레이어들과 매칭이 되기 때문에 차라리 저스텟 구간에서 오래 있는 게 이득이다.
적어도 저 스텟 구간에선 테크닉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코메인 이벤트나 메인 이벤트까지 올라가면 상위리그에 도전하는 컨텐더들이 넘쳐난다.
'당장 포인트로 스텟을 올리지 않아도 돼.'
그리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특전과 테크닉, 그리고 경험.
내겐 남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강점이 있으니까.
그리고 스텟으로 안 되면 스킬과 장비빨로 밀어붙이면 된다.
남들보다 월등한 스킬과 템트리를 세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일단 훈련만으로 근력과 민첩, 체력 스텟을 80까지 상승시키자.'
그동안 벌게 될 포인트는 모두 모아둔다.
그리고 근, 민, 체 스텟이 80을 넘는 순간······.
모아뒀던 포인트를 한방에 터트릴 것이다.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1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마침 내가 더미로 뛰었던 리그가 끝이 났다.
후기라도 볼까 해서 커뮤니티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띠링!
[과반수 이상의 관객들이 당신을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로 선정하셨습니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에 선정됐다고?'
믿겨지지가 않았다. 1회차에서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었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퍼오블에 선정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는 그날 경기를 뛴 모든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선정한다.
그리고 하위리그는 1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데, 보통 10개의 시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퍼오블 보너스는 그날 콜로세움에서 가장 압도적인 플레이를 보여준 단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콜로세움에는 퍼오블 보너스뿐만 아니라 가장 잘 싸운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라는 보너스도 존재했다.
'잠깐, 그럼 오늘 하루동안 번 포인트가 얼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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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새 둥지(2)
[남은 포인트 : 12,600 P]
'하······.'
한 경기 만에 12,600 포인트를 벌었다.
하위리그에 처음 들어온 플레이어가 기본급만 챙긴다고 가정했을 때 10경기는 뛰어야 벌 수 있는 포인트였다.
1회차의 내가 저 포인트를 버는 데 몇 경기가 걸렸더라?
8경기? 9경기?
그 정도 걸렸을 것이다.
'고맙다, 시노엘.'
나는 다시 시스템 상점으로 접속했다.
'이 정도 포인트면 능력치를 얼마나 올릴 수 있지?'
계산해보니 근력, 민첩, 체력을 모두 10으로 맞추고도 5천 포인트가 남았다.
10을 넘는 순간부터 1 스텟 당 1,000 포인트가 소모되니, 5 스텟을 더 올릴 수 있는 셈이었다.
물론 지금 올릴 생각은 없지만.
<시스템 상점>을 닫은 나는 바로 <중개 거래소>로 입장했다.
띠링!
[<중개 거래소>에서는 골드로만 거래할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골드로 환전하시겠습니까? 1 포인트 당 10 골드]
[주의!]
[골드 → 포인트 로 환전은 안 되니 신중하게 결정해 주세요.]
띠링!
[1,000 P 가 차감됩니다.]
[10,000 G 가 입금되었습니다.]
골드는 포인트와 다르게 플레이어 간의 거래가 가능하다.
그래서 경기를 뛰면서 얻은 아이템들을 골드로 거래하고 있었다.
포인트 상점에서는 장비나 스킬북을 판매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포인트를 골드로 교환해야 했다.
물론 나는 장비를 사려고 골드를 환전한 게 아니었다.
[<약초:블랙 허브>]
[티르너노그 성계에서만 나는 약초. 아직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등급 : 희귀]
[판매가 : 30 G]
'역시 아직 가격이 안 올랐군.'
블랙 허브는 엘릭서를 만드는 데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재료다.
아직까진 30골드 정도밖에 안 나가지만,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개에 1만 골드를 넘나드는 귀족 재료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 귀족 재료가 되는 것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블러드나이트180 에서 스토리 미션을 나갔던 어느 플레이어들에 의해 블랙 허브의 사용처가 커뮤니티에 나돌게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나는 300배가 넘는 차익을 보게 될 것이다.
띠링!
[<약초:블랙 허브>를 3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약초:블랙 허브>를 3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약초:블랙 허브>를 3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약초:블랙 허브>를 30 G 에······.]
현재 중개소에 올라와 있는 블랙 허브는 총 231개.
나는 그것들을 모두 다 쓸어 담았다.
'됐어.'
블랙 허브의 가격이 급등하기만 한다면 고급 스킬과 장비들을 맞출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부족한 스텟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다 샀고.'
지금 남은 골드로는 딱히 살 수 있는 아이템도 없겠다, 거래 중개소를 종료하려고 할 때였다.
중개소에 올라와 있는 아이템 중에서 내 시선을 빼앗는 아이템이 있었다.
[<가면:하얀 가면>]
[어떤 대귀족이 착용하던 가면이다.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착용 시 <피의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등급 : 일반]
[판매가 : 10,000 G]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가면이라는 아이템이 전투에 유용한 물건은 아니니까.
안면부를 막아주긴 하겠지만, 그만큼 시야도 제한된다.
눈이 안 보이던 시절에야 착용하는 걸 고민해 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가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 가면의 디자인을 어디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1회차 때,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음에도 순식간에 초월리그까지 올라간, 라이언이 쓰던 가면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벼락에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잠깐만.
자세히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진짜?
진짜로 1회차 때 녀석이 쓰던 가면인가?
그럼 진짜 대박인데?
띠링!
[700 P 가 차감됩니다.]
[7,000 G 가 입금되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포인트를 골드로 바꿨다.
마음이 급했다.
정말 귀한 것들은 골드를 주고도 살 수 없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 저 가면은 억만금의 골드를 줘도 살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제발, 그사이 팔리지 않았길······!'
다행히 가면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곧장 커서를 이동시켜서 가면을 터치했다.
띠링!
[<가면:하얀 가면>을 1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손 위에 생겨난 하얀 바탕의 가면.
나는 가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실물로 보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라이언이 쓰던 가면이야.'
몸이 잘게 떨린다.
"후······."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희열이라는 감정이 내뱉는 숨을 통해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대박을······친 것 같은데?"
이 가면의 등급은 일반. 가장 낮은 등급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면을 신화 등급까지 성장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1회차 때, 라이언의 담당 트레이너엔젤이 직접 커뮤니티에 올린 내용이었으니까.
다시 금방 지워지긴 했지만, 그때 읽었던 내용들은 내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라이언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자 홧김에 올렸다고 했었으니까, 아마 맞을 것이다.
'신화 등급 아이템.'
그 이름이 주는 무게는 묵직했다.
1회차 때 만났던 라이언은 무시무시한 위용을 선보였다.
몇천 명을 상대로 혼자서 압도하는 모습.
그래서 녀석에게 붙은 별명이.
'걸어 다니는 레이드 보스였지.'
그땐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몰랐는데, 이후에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가면의 성능을 보고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죽일수록 강해지는 가면.'
그게 이 가면의 특성이었으니까.
가면을 얼굴에 써 보았다. 그러자 가면이 얼굴에 녹아든 것처럼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시야도 전혀 가리지 않았다.
'좋은데?'
말 그대로,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스릉-
검을 뽑아 검면에 내 얼굴을 비췄다.
눈, 코, 입만 뚫려 있는 하얀 가면이 보였다.
뜻하지 않은 대박을 친 것 같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방에서 나와 숙소에 딸려 있는 식당으로 향하자 빵을 입에 문 채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아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아, 네. 혼자서 팜을 관리하려면 부지런해야 하거든요."
그녀의 맞은편에는 주인이 없는 식판이 놓여있었다.
고기와 채소, 과일이 골고루 섞여 있는, 균형 잡힌 식단이었다. 이곳엔 그녀와 나, 단둘뿐이니 아마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리라.
"멋진 가면이네요. 새로 장만하신 건가요?"
아세리안이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물었다.
"네."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했다. 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그녀는 입에 문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무언가를 쓰는 것에 열중했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두 개의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입구에는 <체력 단련실> 과 <대련실>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중 체력 단련실이라고 적혀져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바닥에 트랙이 깔려 있고, 한쪽에는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는 각종 기구들이 놓여져 있다.
다른 한쪽에는 장애물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체력 단련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플레이어 육성법을 제대로 공부했다는 티가 났다. 내가 생각하는 필요한 것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트랙 한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시작된 스트레칭.
'엄청 뻣뻣하네.'
스트레칭을 하는 부위마다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통증들을 무시한 채 꼼꼼하고 세심하게 근육들을 풀었다.
딱딱한 근육들이 부드럽게 풀려야 탄력이 나온다. 그리고 그 탄력은 육체가 폭발적이고 역동적이게 움직이는 걸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콜로세움에 막 입장한 지금의 육체는 오랜 시간 근육들이 뭉쳐 있어 탄력을 잃은 상태.
지금부터라도 근육들을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어줘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스트레칭에 열중하고 있자 체력 단련실에 아세리안이 나타났다.
"당분간은 시합을 잡지 않고 훈련에 매진할 거예요."
그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종이엔 하루 일과표가 적혀져 있었다.
아침에 기상해서 스트레칭, 런닝, 근력운동, 명상, 무기술······등등.
무려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오후 8시에 끝나는, 엄청 빼곡한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식사도 뒷전으로 재껴두고 뭘 하나 했더니, 내 일정들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대단하네.'
일정표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얼핏 보면 그냥 무식하게 굴리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각 일정 간의 상성이 무척 좋았다.
아침 식사 후 스트레칭을 하며 소화를 시킨다.
그리고 런닝을 해서 체력을 소모 시키고, 근력 운동을 해서 스텟 상승률을 높인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한 뒤에 육체 회복 겸 정신력을 위한 명상 시간을 가지고,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면 곧장 검을 수련한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단련과 휴식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알아요. 아마 제법 고된 일정이 되겠죠. 하지만 안우진님이 제 커리큘럼을 잘 따라오시기만 한다면 금방 상위리그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아세리안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이 과정을 꾸준하게 수행한다면 금세 강해질 것이다. 아마 지금 시기에 팜에서 짤 수 있는 최고의 훈련법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제 방법대로 훈련하고 싶습니다."
"훈련이 너무 고될 것 같아서 그러신가요?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콜로세움은 목숨을 걸고 서는 전장이잖아요? 이건 안우진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제 방법대로 하는 게 더 효율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일정은 흠잡을 곳이 없다. 모든 스텟을 골고루 상승시키면서 동시에 무기의 숙련도도 높이는, 완성도가 높은 커리큘럼이었다.
1회차의 내가 처음 입장했을 때 팀 '투지'에 소속되었다면 훨씬 더 강해졌을지도.
하지만 나는 콜로세움에서 싸워온 10년이란 경험이 존재한다. 덕분에 스텟을 빠르게 올릴 수 있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더 효율이 좋을 거라고요?"
아세리안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3일은 안우진님 방식대로 훈련하고, 3일은 제 방식대로 훈련을 진행하는 거죠. 그래서 최종적으론 더 효율이 좋은 방식을 따르는 걸로."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그녀에게 내렸던 평가를 수정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설득한다.
보스가 아닌 리더의 자세.
생각보다 그녀가 팀을 잘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제 말에 무조건 따라주셔야 해요. 자, 그럼 일단 스트레칭부터 빡세게 해볼까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내 등 뒤로 돌아가더니 꾸욱 눌렀다.
순간 무시무시한 통증이 가랑이에서 퍼져나갔다.
음, 리더와 보스의 중간 정도로 정정해야겠군.
"아직 한 바퀴 남았어요! 조금만 더!"
"자, 호흡 들이쉬고! 복부에 힘주고! 천천히!"
"자세 신경 쓰세요! 그래야 안우진님이 좋아하는 효. 율. 을 올릴 수 있으니까!"
"하체가 고정돼야 해요! 호흡 신경 쓰고! 한 번 흔들릴 때마다 100번 더!"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아세리안은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오히려 번아웃이 올 수도 있을 만큼 혹독한 훈련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진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누구의 훈련법이 더 효율이 좋은지를 두고 내기 하고 있는 상태.
스텟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나를 마른오징어 쥐어짜듯 체력을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
"헉, 헉."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미정)]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6] [민첩 : 6] [체력 : 10]
[정신 : 87]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34%]
"3일 동안 근력 3, 민첩 2, 체력 2가 올랐네요?"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내게 아세리안이 말했다.
입장 첫날 내가 하루 만에 근력 1, 민첩 2, 체력 7을 올린 것에 비하면 적은 수치.
하지만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것도 무척 빠른 성장세였다.
"내일부턴 제 방식대로군요."
"맞아요. 만약 스텟 총합 상승이 7보다 낮으면 제 훈련을 군말 없이 따라주셔야 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스텟이 높아질수록 올리기가 더 힘든데, 그녀가 교묘하게 이전의 스텟과 비교하고 있었다.
뭐, 상관없지.
그래봤자 어차피 내 훈련법이 훨씬 좋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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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새 둥지(3)
아침에 일어나 식당으로 나오자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식사 중인 아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빵을 입에 문 채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모습.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오늘도 맛있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음식 솜씨는 뛰어났다.
고기와 채소, 과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식단이지만 먹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와서 곧바로 체력 단련실로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스트레칭부터.
고작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근육이 제법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아침 훈련 전 2시간, 저녁 훈련 후 2시간.
총 4시간으로 이루어진 스트레칭은 내 몸을 빠른 속도로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호오, 다행히도 스트레칭은 꾸준히 하시는군요."
스트레칭이 끝나갈 즈음, 어느새 나타난 아세리안이 말했다. 그녀의 손엔 무언가를 필기하기 위한 종이와 볼펜이 들려 있었다.
내 훈련법을 보면서 필기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나쁘지 않은데?'
요 며칠, 아세리안의 평가가 계속 좋은 쪽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녀는 마치 회사에 막 들어온 신입사원처럼 무언가 배울 점이 있으면 꼭 필기하는 습관이 있었다.
"기본적인 게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아주 좋네요. 자, 그럼 이제 뭐부터 하실 건가요?"
"시작 전에 지어주셨으면 하는 건물이 있습니다."
"네, 어떤 걸로 지어드려요?"
"휴식의 방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레벨 3 이상으로."
그러자 아세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훈련을 시작한다고 해놓고 쉴 생각부터 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레벨 3 이상이라면 꽤 많은 포인트가 필요한데요. 차라리 그 포인트로 대련실이나 체력 단련실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쉽지만 제가 그렇게 많은 포인트를 융통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보시면 압니다. 왜 휴식의 방이 필요한지."
내 말에 아세리안이 검지를 입가에 댄 채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언젠가는 만들었어야 할 건물이니까."
그녀가 허공에 터치 몇 번을 하자 바깥에서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휴식의 방이 지어지는 소리였다.
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졌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곧장 체력 단련실 한쪽에 놓여있는 방독면을 집어 들었다. 미리 중개 거래소에서 구입해둔 물건이었다.
방독면을 쓰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후읍- 후읍-
그리고 이어지는 팔벌려뛰기. 가벼운 몸풀기 운동인데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다 보니 급격하게 숨이 차올랐다.
옆에서는 아세리안이 내 사소한 행동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팔벌려뛰기 30회 종료.
코와 입을 통해 최대한 산소를 빨아들인다. 그러면서 상태창 우측 하단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팔벌려뛰기가 끝난 지 10초가 지나자 나는 곧바로 버피 테스트를 시작했다. 개수는 20개.
'끄윽. 벌써부터 죽을 것 같네.'
산소가 부족하니까 머리가 핑 돌았다. 체력 스텟이 어느 정도 오른 덕분에 이제는 10킬로미터도 어렵지 않게 뛸 수 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았다.
[남은 체력 : 87%]
버피 테스트 20개를 마무리하자 온몸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여기까지 체력 소모는 13%.
시작한 지 이제 2분이 지나있었다.
이번에도 10초 휴식을 하고 곧장 다음 자세로 전환한다.
엎드린 채 양 무릎을 교차로 차올리는 자세.
바로 마운틴 클라이머 였다.
"끄아아악."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아서 악을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무호흡에 가까운 속도로 빠르게 30개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헉, 헉, 헉."
이제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참아야 한다.
훈련은 이제 시작했다.
시계를 힐끗 보자 7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참고로 훈련은 7시부터 시작했다.
"괜찮으신가요, 안우진님?"
옆에서 우려 섞인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아주 짧은 대답이나 사소한 동작도 할 여유가 없었다. 1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산소를 빨아들이며 숨을 골라야 한다.
찰나와 같은 휴식 시간이 끝나자 나는 곧바로 다음 운동을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점프했다가 내려오는 반동과 함께 무릎을 90도까지 꺾는, 점프 스쿼트였다.
"헉, 헉."
눈앞이 핑 돌았다. 폐는 당장 더 많은 산소를 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육체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건 아직 맛보기에 불과하다. 아직 1세트도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세트들은 정말 지옥을 맛보게 될 터.
점프 스쿼트 20개를 끝내자 몸이 축 늘어지려고 했다.
"허업, 허업, 허업."
이제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들이쉰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부족한 게 당연한 이치이긴 하지만.
다 왔어.
조금만 더 하면 돼. 그럼 잠시 쉴 수 있어.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느새 10초가 지나있었다.
이제 마지막 동작이야.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푸쉬업을 시작했다. 개수는 30개.
"끄으으윽!"
마지막엔 이를 악문 채 숨도 안 쉬고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푸쉬업을 끝내자마자 나는 방독면부터 벗어 던졌다.
그제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헉, 헉, 헉, 헉."
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 숨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아세리안이 뛰어나가더니 다급하게 물 한 병을 들고 와 내게 건넸다.
"헉, 아뇨, 헉, 헉. 아직. 헉, 헉."
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숨 쉬는 것 때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괜찮으신가요? 효율이 좋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하실 줄은······."
"헉, 헉, 헉, 헉."
"고작 5분밖에 안 지났는데······."
"헉, 헉, 헉, 헉."
그녀가 뭐라 떠들어 대든 다 무시했다.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곧 있으면······.
'하, 벌써 2분이 지났네.'
나는 땀에 젖어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방독면을 주웠다.
[남은 체력 : 62%]
"지금 뭐 하시는······?"
"헉, 헉. 다음 세트. 헉, 헉."
"네······?"
놀라는 그녀의 얼굴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세트도 죽을 것 같았는데, 두 번째 세트를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문으로 다시 시작된 두 번째 세트.
인간은 정말 위대하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진 않는다.
그러한 교훈을 되새기며 나는 끝끝내 세 번째 세트까지 마친 채 실신하듯 쓰러졌다.
[남은 체력 : 18%]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분명 나는 체력 단련실에서 쓰러졌는데.
여기가 어디지?
[휴식의 방 Lv.3 에서는 휴식의 효율이 3배 상승합니다.]
[남은 체력 : 92%]
눈앞에 떠 있는 알림창을 통해 내가 휴식의 방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세리안이 나를 업어다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나이스, 아세리안.
정신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미리 얘기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그녀가 센스 있게 나를 휴식의 방에 눕혀주었다.
현재 시각은 9시 17분.
내가 7시부터 훈련을 시작해서 7시 20분쯤에 3세트를 끝마쳤으니, 대략 2시간쯤 쓰러져 있었던 셈이다.
휴식의 방에서는 효율이 3배 상승하니까, 내 육체는 대충 6시간의 휴식을 취한 것이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미정)]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6] [민첩 : 7] [체력 : 11]
[정신 : 87]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97%]
스텟을 확인해 보니 민첩이 1, 그리고 체력이 1 상승했다.
고작 20분 운동했는데, 총 2의 스텟이 오른 것이다.
아세리안과 함께 훈련한 3일 동안 7이 올랐으니, 이런 식으로 4번만 더 훈련하면 그녀를 이길 수 있다.
띠링!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몸에 있던 피로감이 모두 사라집니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 사이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문을 열고 휴식의 방을 나서자, 숙소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는 아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곤, 보고 있던 서류를 내팽개친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깨어나셨나요?"
"아, 네. 다시 훈련하러 가야죠."
"······아까 그 훈련을 또 한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맞습니다만."
내가 대답과 함께 체력 단련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체력 단련실.
내부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마 내 체력 단련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나 보다.
후-
방독면을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손발이 벌벌 떨린다.
곧 이어질 고통스러운 시간 때문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마치 고문을 당하기 직전인 것처럼.
이 훈련 방법이 효과 하나는 확실한데 한 가지 단점이 있다.
훈련 강도가 토 나올 정도로 극악 수준이라서 정신력이 강하지 못하면 오래 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해내야 한다.
포인트를 쓰지 않으면서 상위리그까지 올라가려면.
이 정도 훈련량은 되어야 포인트로 스텟을 구매하는 플레이어들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까.
'오늘 깔끔하게 세 번만 더 하자.'
전투에 나서는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방독면을 썼다.
이 고통에 익숙해져야 해. 습관처럼 굳어지면 괜찮아.
습관으로 형성만 되면 그 고통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결국 나는 오늘 하루 동안 근력 1, 민첩 2, 체력 4를 올릴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식당으로 갔다.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하루.
그런데 식당 문을 여는 순간 어제와 다른 것이 존재했다.
아세리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저 표정은.
"일어나셨어요?"
내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왜 이러지? 설마 내기를 무효로 해달라고 저러는 건가?
"······예."
"어서 식사하셔요. 식기 전에 먹어야 더 맛있으니까."
평소와 다르게 살갑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고기를 한입 베어 물려는 순간.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스텟이 그렇게 빨리 오르는 거죠? 어차피 체력을 소모시켜서 훈련하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요? 휴식의 방은 왜 필요한 거예요? 어차피 훈련 끝나고 명상을 하면서 체력을 회복시키면 효율이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제 방식보다 더 효율이 좋은 거죠?"
그녀가 다다다다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움찔하며 입가로 가져가던 포크를 멈췄다.
아, 그게 궁금한 거였나.
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녀는 배우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에 장학생이라는 시스템이 있다면, 분명 아세리안이 되었을 것이다.
"······스텟이 상승하는 메커니즘이 궁금하신 거군요."
"네 맞아요! 도대체 제 훈련법과 뭐가 달라서 그렇게 효율이 차이 나는 거죠? 저와 했던 일정도 절대 쉬운 게 아니었는데······."
밤새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눈빛이 초롱초롱했구나.
나는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아침 식사는 잠시 뒤로 미뤄둬야 할 것 같았다.
"모든 스텟들이 체력을 소모하면서 상승하는 건 아시겠죠."
"네, 그래서 최대한 체력을 많이 소모시킬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짰죠."
"거기서 요점은 딱 두 개입니다. 첫 번째로는 체력 소모가 극심할수록 스텟이 빨리 오릅니다. 한마디로 짧은 시간 안에 폭발적인 스테미나 소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자 아세리안이 아하, 하는 추임새와 함께 열심히 필기를 시작했다.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집념이 느껴졌다.
"그리고 두 번째로 피로도입니다. 체력 회복이 100%가 되면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건 아시겠죠?"
"아, 그래서 휴식의 방을 지어 달라고 하신 거군요! 그것도 레벨 3씩이나 되는 걸로요."
"네. 피로감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하지 않으면 스텟이 오르는 효율이 떨어지게 되죠. 몸에 데미지가 남아 있는 상태로 훈련을 하게 되면 훈련이 아니라 혹사가 됩니다. 그게 심해지면 가끔 스텟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아세리안의 손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메모하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 그래서 그랬군요. 안우진님은 이런 내용들을 다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연구했습니다, 라는 짧은 말을 끝으로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굳이 내가 회귀자라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다행히 그 이후로의 질문 폭격은 없었다.
이제야 좀 식사를 할 수 있겠네.
아세리안은 내가 식사를 집중하는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적을 게 저렇게 많나?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식사를 끝마친 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오늘의 일과도 어제와 똑같다.
몸을 충분히 풀어준 후, 어제 했던 육체 단련을 반복한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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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붉은 깃발(1)
핑-! 피핑! 피웅!
빠르게 트랙을 달리며 화살을 날렸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짚단으로 이루어진 허수아비에 박혔다.
쉽지 않네.
화살이 모두 허수아비에 적중하긴 했지만, 내가 맞히려고 했던 심장과는 조금 떨어진 부위에 박혀 있었다.
'1주일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한데.'
뭔가 아쉬웠다.
조금만 더 하면 뭔가 감이 잡힐 것 같은데.
"인정해야겠네요."
그때 내 훈련을 구경하던 아세리안이 한마디를 툭, 뱉었다.
후우-
내가 숨을 돌리며 다가가자 아세리안이 수건을 건넸다.
"뭘 말씀이십니까."
"안우진님의 훈련법이 이번에도 맞았다는 것을요."
아세리안의 표정은 무척 복잡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오늘부터 활 쏘는 걸 훈련할 겁니다. 그리고 1달 뒤엔 채찍, 그리고 1달 뒤엔 단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바꿔나갈 거고요."
일주일 전, 내가 어떤 방법으로 훈련을 할 것인지 설명하자, 극구 말린 사람이 아세리안이었다.
그녀는 내가 더미로서 경기를 뛰는 것을 지켜보았다면서, 내게 가장 잘 맞는 무기는 검이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내게 가장 잘 맞는 무기가 검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시죠?"
"네······?"
"설령 검이 가장 잘 맞는 무기라고 해도, 내가 왜 검을 써야 하는지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텐데요."
"······맞아요."
물론 내 설명에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첫날 내가 활을 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으니까.
열 발을 쏴서 단 한 발도 허수아비를 맞히지 못했다. 그것도 비교적 가까운 20미터의 거리였는데.
하지만 내 활 솜씨는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둘째 날엔 열 발을 쏴서 일곱 발을 맞혔고, 셋째 날엔 열 발을 쏴서 모두 맞혔다.
넷째 날부터는 쏘는 것마다 가슴에만 적중했고, 다섯째 날에는 움직이다가 멈춰서 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곱 째 날. 이제는 뛰어다니면서 쏴도 허수아비의 몸에 모두 적중하는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게 다 초감각 덕분이지.'
활은 감각이 무척 중요하다. 활을 겨냥하는 방향, 활시위를 당기는 힘, 쏘는 순간의 무게 중심 등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정확히 맞히려면 많이 쏘면서 감각을 익혀야 하는데, 초감각 덕분에 예민해진 내 오감은 그 모든 것들을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초감각이 없었다면 한 달 안에 활을 배우겠다는 목표 자체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정정할게요. 안우진님께 가장 잘 맞는 무기는 활인 게 틀림없어요. 단시일 내에 이렇게 쏠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천부적인 재능이라구요!"
아세리안이 무척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1년 안에 하위리그 최상위 플레이어로 등극할 수 있을 거라는 둥,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게 제일 잘 맞는 무기는 창이지.'
사실, 어떤 무기가 어울리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활 연습을 하는 이유는 오히려 창술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내가 왜 창을 써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었으니까.
현재 내 창술의 경지는 고급창술. 최상급의 한단계 위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벽에 부딪힌 상태.
고급을 넘어 특급창술로 나아가기 위해선 단순히 창을 연마하는 것 이상의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아세리안에게 해준 말은 회귀 전, 창술의 고수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그땐 눈이 안 보여서 할 수 없는 수련법이었지.'
물론 그것 외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가장 까다로워하는 상대가 궁수였기 때문이다.
궁수를 잡으려면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예측해야 한다.
그걸 아는 데에는 내가 직접 활을 사용해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을 것이고.
핑-! 푹.
자세도 제대로 잡지 않고 가볍게 쏜 화살이 허수아비의 가슴에 박힌다.
조금만 더 하면.
격렬하게 움직이면서도 화살을 목표물에 정확하게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읍, 후우-. 흐읍, 후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엎드린 채 바닥을 기어 철조망을 넘는다. 이어서 밧줄을 타고 5미터 벽 위로 오른다. 점프해서 바닥을 딛자마자 앞구르기를 하며 부드럽게 착지. 그리고 지그재그로 놓여져 있는 구조물을 피한다.
지금 나는 장애물을 피하며 민첩 스텟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2분 7초! 한 바퀴 남았어요! 조금만 더 힘내요!"
내가 한 바퀴를 완주하자 아세리안이 랩타임을 알려왔다.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무려 1분 이상이 줄어든 기록.
팔다리가 무겁다. 숨은 당장이라도 꼴깍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문 채 마지막 바퀴까지 소화했다.
"허억, 허억."
당장이라도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지탱해서 휴식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곧장 바닥에 대자로 철퍼덕.
아세리안이 건네주는 물병을 익숙하게 받아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온몸에 거추장스럽게 달려 있는 모래주머니들을 내팽개쳤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미정)]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10] [민첩 : 17] [체력 : 19]
[정신 : 88]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하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23%]
일주일 사이에 근력 스텟을 3, 민첩 스텟을 10, 체력 스텟을 7 올렸다.
거기다가 절대 안 오를 것만 같았던 정신 스텟도 1이나 올랐다.
스텟이 높아지면서 훈련을 통해 오르는 스텟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졌지만, 그걸 감안해도 총합 21이나 올린 셈이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현재 내 육체 스텟의 총합은 46.
1회차에 내가 46을 만드는 데에 얼마나 걸렸더라.
한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다.
'10배나 빠르게 올렸네.'
경험의 힘은 정말 위대했다.
아무리 한 번 걸어본 길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성장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물론 높은 정신 스텟 덕분이지만, 결국 그 정신 안에 경험이 녹아있는 거니까.
"쉬고 계세요. 저는 다른 일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아세리안이 내가 마신 물병과 젖은 수건을 들고 휴식의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회귀 직전의 나를 따라잡는 데 얼마나 걸릴까?
1년? 2년?
내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걸렸으니까······.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위리그로 올라가는 승급전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린다.
1회차의 나는 그 입구에조차 다가서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몸에 있던 피로감이 모두 사라집니다.]
"아, 일어나셨네요."
휴식의 방에서 나오자 숙소 앞 벤치에 앉아있던 아세리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우진님이 뛰었던 경기의 후기가 올라왔어요. 한번 보시겠어요?"
아, 블러드나이트171의 후기가 올라왔나 보군.
평소라면 굳이? 라는 생각이 강했겠지만, 블러드나이트171은 내가 퍼오블 보너스를 받은 경기.
그래서 솔직히 좀 궁금했다.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음······. 지금 링크 보내드릴게요!"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더미의 반란! 콜로세움을 피로 물들이다!
―메인 이벤트와 코메인 이벤트가 언더 카드 경기를 돋보이게 해주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1, 올해 최고의 이변이 발생!
아세리안이 보내준 상태창에는 3개의 링크가 올라와 있었다.
'조회수가······ 70만?'
하위리그 경기인데도 불구하고 조회수가 무척 높았다.
물론 그래봤자 상위리그의 후기에 반도 안 나오는 조회수지만.
나는 대충 하나를 클릭해 들어가 보았다.
―더미의 반란! 콜로세움을 피로 물들이다!
'더미 경기'라는 용어를 아는가?
'더미 경기'란 관객의 수가 적고, 경기의 수준이 낮은 하위리그에서만 볼 수 있는 이벤트이다.
언더 카드 경기 시작 전, 관객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레드 진형과 블루 진형으로 나누고, 한쪽의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지는 게 '더미 경기'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척 잔인한 살육전이 펼쳐지는데, 그 가학성에 매료되어 하위리그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신들이 있을 정도이다.
보통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는 쪽의 플레이어들을 '더미'라고 부르는데, 최근에 열린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1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잔인하게 죽는 용으로 투입된 '더미'들 사이에서 엄청난 플레이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레드 진형의 플레이어들이 더미들을 학살하는 형세였다. 피가 흩뿌려지고, 비명이 난무했으며, 광기가 투기장을 잠식했다.
그런데 더미들이 거의 다 죽어갈 즈음 반전이 시작됐다. 경기장 한쪽 구석에서 소수의 레드 진형 플레이어들을 죽인 더미가 나타난 것이다.
그 더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투기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레드 진형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투기장에서 살아남은 건 이변을 만들어낸 더미 단 한 명뿐이었다.
결국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까지 선정되며 올해 하위리그의 최고 이변을 만들어낸 '미정' 플레이어. 향후 네임드 플레이어로 성장해서 상위리그까지 뚫고 성장할지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참고로 팀 '성장' 소속인 이 더미는 콜로세움 경기가 처음인 듯 '미정' 닉네임을 달고 등장했다.
└나 이 경기 직관했음. 진짜 개쩔었음ㅋㅋㅋㅋ 신들 막 흥분해서 뒷경기도 제대로 안 보고 더미 얘기만 함.
└이 더미가 기대되는 이유. 1. 스텟이 엄청 낮은데도 상대편 다 찢고 다님 2. 검을 다루는 기교라던가, 간격을 파고드는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음
└씨발, 개 빡치네. 원석인지 똥인지도 모르고 더미로 던지는 병신같은 팀에 저런 녀석이 들어가다니······ㅠ 하, 인생 무엇? 내 랜덤 뽑기에선 똥밖에 안 나오던데······.
└저 더미가 무림 출신이라는 데 내 한쪽 불알 건다.
└네 부랄 줘도 안 갖는다, 퉤.
후기에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무림 출신일 거라고?
나는 자신의 소중이를 건 저 불쌍한 신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대단하죠? 다들 안우진님이 여전히 '성장'에 소속된 줄 알더라구요. 호호, 그 이변의 플레이어가 알고 보니 다른 팀으로 팔려나갔다는 사실까지 알았다면 댓글 수가 몇 배는 더 많았을걸요?"
"나쁘지 않네요."
확실히 긍정적인 일이다. 이슈가 많아질수록 좋다.
그래야 관객들에게 인기 있는 플레이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기가 상승하면 기본급도 더 많이 상승한다.
이번 경기로 인해 다음부터 내 기본급은 2,000 포인트.
무려 첫 번째 경기보다 100% 인상된 숫자였다.
앞으로 이어지는 경기에서도 관객들에게 나를 각인시킬 수만 있다면.
상위리그의 커트라인인 기본급 10,000 포인트도 금방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지명 오퍼가 들어 왔는데요."
뭐? 지명 오퍼가 벌써?
이제 콜로세움에서 한 경기밖에 안 뛰었는데?
지명 오퍼라는 건 나를 콕 집어서 출전시켜달라고 연락이 왔다는 뜻이다.
보통 5경기 이상 뛰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지명 오퍼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전까지는 일반 오퍼로 최대한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일반 오퍼는 팀 전체에 출전 의향을 물어보는 것이다. 혹시 언제 경기가 열리는데, 팀 투지에 티오를 5개 줄 테니 출전시킬 플레이어가 있느냐, 라는 식으로 오는 게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지명 오퍼가 들어왔다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쪽에서는 블러드나이트176 에 안우진님을 출전시키고 싶다는 의견이었어요."
"게임 유형은 뭡니까?"
"개인 PvP요. 참가하는 플레이어는 1,000명."
천 명이라······.
지명 오퍼에다가 심지어 대형 경기라고?
게임의 룰과 미션이 무엇인지는 경기에 출전한 이후에나 알 수 있겠지만,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전 출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저는 좀 더 스텟을 끌어올리고 나서 경기를 가졌으면 해요."
"음······."
솔직히 고민됐다.
천 명이나 참여하는 대형 경기. 아마 경기의 룰도 까다롭고 미션도 어려울 가능성이 컸다. 팀 성장에 있었더라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달랐다.
위기는 바꿔 말하면 기회가 왔다는 뜻이니까.
2회차에서는 내가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고.
그리고 현재 내 스텟은 다른 하위리그 플레이어들에게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테크닉 쪽은 내가 압도할 것이고.
그렇기에 경기에서 최종 승자로 올라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두근- 두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경기에 뛴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흥분이 찾아왔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구나.
경기에 뛸 날이 오기를.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세리안을 바라봤다.
"뛰겠습니다. 그 경기."
내 심장이 이렇게 원하는데.
거절할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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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붉은 깃발(2)
"닉네임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이름으로 하려고 했는데요."
"흐음······."
아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품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우진은 아닌 것 같아서요. 닉네임만 딱 들으면 무림이나 지구 출신이라고 생각할텐데, 지금 복장이 좀······."
지금 내 복장이 어때서?
나는 기존에 입었던 지급용 가죽옷 위에 검은색 로브를 두른 상태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 검은색이잖아요! 거기에다가 머리 색깔까지······. 그 상태에서 흰색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마치 유령 같다구요. 닉네임이랑 전혀 매칭이 안 되잖아요?"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 합니까?"
"그럼요! 투기장에서 싸우는 플레이어도 결국 상품성이 중요하다구요. 그래야 관중들이 찾게 될 거고, 그래야 컨텍이 들어올 거 아니예요. 그런데 이렇게 온몸을 꽁꽁 싸매서야······."
아, 그런 거였나.
그녀의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1회차의 나는 이상하게 지명 오퍼가 많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눈에 안대를 쓰고 경기를 뛰는 맹인 창술사 라는 상품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콜로세움은 살아서 경기가 끝나면 훼손됐던 육체의 모든 부위가 회복되니까 사실상 내가 유일한 맹인 플레이어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컨셉이 중요하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닉네임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고민됐다.
"흐음······ 아예 신비주의로 나가는 건 어때요?"
"신비주의요?"
"네. 온 몸을 칠흑으로 감싼 채 흰 가면을 쓰고 다니는 유령 플레이어. 딱 봐도 신비롭잖아요. 그러니까 닉네임도 신비주의로 가는거죠."
신비주의. 신비주의라······.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해서 더 관심을 모으자는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렌으로 하겠습니다."
"렌이요?"
"네. 닉네임이 짧아서 어느 성계 출신인지 가늠하지 못할테니까요.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겠죠."
"음······ 좋네요. 렌이라."
아세리안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2회차의 내 닉네임은 렌이 되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경기는 앞으로 3주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텟을 끌어올리는 거다.
더미 경기에서 내가 레드 진영의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강해서라기보단 상대가 약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더미 따위를 죽이기 위해 고급 인력을 내보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기는 다르다.
무려 1,000명이나 참가하는 개인 PvP 경기.
물론 1,000명이 개인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이 될지, 아니면 개인으로 참가했지만 진영을 나눠 겨루는 경기가 될지는 그날 돼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쉬운 미션을 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오진 않는다는 거지.'
뭐, 그래도 상관 없다.
내가 이런 대형 경기를 하루이틀 참가해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1회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평소처럼 훈련하고, 준비하면 된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0] [민첩 : 29] [체력 : 31]
[정신 : 88]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중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100%]
3주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드디어 경기에 출전하는 날이 되었다.
"안우진님!"
체력 단련실에서 명상을 하고 나서는데 숙소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아세리안이 불렀다.
"아니, 긴장도 안 되세요? 몇 시간 뒤면 경기에 출전하시잖아요."
왜 긴장이 안 될까.
어젯밤에는 잠도 제법 설쳤다.
하지만 많은 경기를 치뤄오면서 긴장을 최대한 누그러트리는 법을 깨달았을 뿐.
그래서 지금까지 명상을 하다가 나온 것이고.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경기 전에 플레이어들이 많이 예민하다고 그러던데."
내 생각엔 당신이 더 긴장한 것 같은데?
아세리안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했다.
마치 자신이 경기를 뛰기라도 하는 양.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7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8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마침 시스템이 곧 경기가 시작됨을 알려왔다.
시각을 보니 어느덧 오후10시.
이제 우리 경기가 끝나면 코메인 이벤트와 메인 이벤트만 남은 셈이었다.
각 경기는 무조건 1시간 씩이다.
경기 자체가 얼마나 걸리든 상관 없다.
24시간이 걸리든, 48시간이 걸리든, 관객들에겐 1시간 밖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른다.
나는 경기를 뛰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슈우우우웅-
잠시후, 마나의 유동과 함께 공터에 하얀색 바탕의 동그란 원이 생겨났다.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
"기분이 어때요?"
"······?"
워프 게이트가 생기자 마자 아세리안이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에도 떨림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같은 방향의 손과 발이 나가던 사람 맞아?
"나쁘지 않군요.
"가서 증명하고 오세요. 당신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걸."
그녀가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더니 나를 토닥였다.
어떻게든 내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려는 것 같았다.
난 이미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피식.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검은색 로브를 펄럭이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지형은 산지. 제법 경사가 있고, 계절은 여름인지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산의 꼭대기엔 구름이 걸려 있다. 높이가 제법 있다는 뜻.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인지 나뭇가지가 어지러이 엉켜 있다. 흔적이 남기 쉬운 지역이라는 것.
주위에는 아무도 없음. 참가 인원이 천 명이 넘는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맵의 크기가 제법 넓은 것 같았다.
산지 바깥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싶다. 맵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늘 위에는 해가 중천에 걸려있지만, 나무 그늘로 인해 주위가 어두워 보였다.
저 멀리 먹구름이 보이는 걸 보니, 곧 비가 쏟아질 수도.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의 8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개인 서바이벌(개인 PvP)]
[게임명 : 붉은 깃발전]
[맵 : 나블루스 화산섬(중)]
[관객 수 : 20,274 명]
개인 서바이벌이라······.
관건은 생존 조건인데.
그 조건이 뭐든간에, 나블루스는 피에 잠기겠군.
띠링!
[승리 조건 : 경기 종료 시점에 붉은 깃발을 소유한 자]
[붉은 깃발을 만지면 자동으로 머리 위에 표식이 남게 됩니다.]
[붉은 깃발의 소유자를 처치하면 자동으로 붉은 깃발의 표식이 옮겨지게 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000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플레이어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붉은 깃발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2:00:00]
[경기 시작 후 30분이 지날 때까지 붉은 깃발을 아무도 차지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집니다.]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룰이 제법 많았다.
유형은 보물 쟁탈전이었다.
'휴, 살았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간혹 제한시간 없이 몇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라는 극단적인 미션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 경기는 플레이어 분쇄경기라고 불리며 생존률이 1% 대로 뚝 떨어진다.
주로 하위리그 같이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리그에서 주로 나오는 미션이었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그에 비하면 붉은 깃발전은 어렵지 않은 미션이다.
경기가 끝나는 최후의 순간에만 깃발을 차지하고 있으면 되니까.
설혹 깃발을 쟁취하지 못해도 괜찮다.
비록 경기에 승리하여 많은 포인트를 챙기진 못하겠지만, 살아남아 있다면 다음 경기를 노려볼 수 있으니까.
[경기 시작!]
상태창이 경기 시작을 알려왔다.
오늘 내 무기는 활.
이렇게 넓고 은폐할 곳이 많은 지형에서는 최고의 무기였다.
'운도 따르는 군.'
창이 아닌 활을 들고 시작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였다.
어떤 무기든 실전에서 사용해봐야 느는 법이니까.
한달 사이에 궁술이 엄청나게 늘었다. 어떤 자세로 쏴도 다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내 한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달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하위리그라고 하더라도 활을 들고 오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천천히 외곽을 돌면서 사냥을 해볼까.'
붉은 깃발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4시간 정도 남았을 때 해도 된다.
그정도면 맵이 아무리 넓어도 붉은 깃발이 어디있는지 찾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미리 알아둬봤자 계속해서 깃발의 주인이 달라질 것이기에 의미 없는 짓이기도 하고.
깃발을 쟁취하는 건 최대한 뒤로 미룬다.
깃발을 가지고 있는 순간부터 999명의 플레이어가 나 하나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그러니 초반부터 깃발을 들고 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
'쟁취하는 건 한 시간 남았을 때 하자.'
그러면 미리 함정 지대도 만들어둘 수 있어서 남은 플레이어들이 나를 노리고 달려든다고 해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산의 중턱에서 초입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어느정도 이동하자 누군가가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뿌드드드득-
그리고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느껴졌다.
잠시후, 거대한 대검을 든 채 산의 중턱으로 뛰어 올라오고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미리 덤불이 엉켜있는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에 나를 발견하진 못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화살의 진로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대검을 든 플레이어는 일정한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화살이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하고.
그 사이 녀석이 이동할 거리를 예측한 다음.
핑!
쏜다.
푹! 털썩.
띠링!
[플레이어 '로맥'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로맥이라는 닉네임 이었군.
로맥이라는 플레이어의 시체에서 빨간 안개가 생겨나더니 내게 흡수되었다.
하얀 가면에 들어있는 피의 회복 효과인 것 같았다.
녀석은 아마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죽었을 것이다.
궁수가 무서운 이유는 먼 거리에서 기습적으로 저격해 오기 때문.
화살이 날아온다는 걸 모르면, 방금 죽은 저 녀석처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마가 꿰뚫려 죽는 것이다.
'이 맛에 활을 쓰는 거군.'
쓰면 쓸수록 활이라는 무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검이나 창으로 싸우는 건 기본적으로 상대와 직접 맞부딪히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무척 크다.
하지만 활은 미리 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먼 거리에서 화살을 시위에 걸고 정확하게 쏘는 것만으로도 끝난다.
효율성이 무척 높은 무기인 것이다.
'못 맞추더라도 상관은 없지. 거리만 주지 않으면 되니까.'
나는 죽은 로맥이라는 플레이어의 시체로 다가가 품 속을 뒤졌다.
아쉽지만 갖다 팔거나, 내가 쓸만한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외곽쪽으로 나가며 그때마다 보이는 플레이어들을 사냥했다.
띠링!
[플레이어 '애스크'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묵관책'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루네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942 명]
[킬 수 현황]
[1위. '렌' 4킬]
[2위. '티시온' 3킬]
[3위. '붉은 거미' 3킬]
[4위. '르노바' ······.]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1:32:17]
[경기 시작 후 30분이 지날 때까지 붉은 깃발을 아무도 차지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집니다.]
어느새 경기가 시작한지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킬 수 1위라······.'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4킬이나 했다.
그중에서 내가 화살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플레이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치렀던 경기 중에서 오늘이 제일 편한 날이랄까.
챙! 챙! 챙!
산의 초입으로 내려가자 검을 맞대고 있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녀석들은 은밀한 죽음의 손길이 자신들에게 뻗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
화살통에서 화살 두 발의 화살을 꺼내 한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발은 시위에 걸었다.
뿌드드득-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분 좋은 울림을 냈다.
숨을 참은 채 몸의 떨림을 누른다.
그리고······.
띠링!
[30분이 지났음에도 붉은 깃발의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표식'이 주어집니다.]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순간 화살을 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지금······ 천 명 가까이 되는 플레이어들 중에 하필 내가 걸렸다고?
고개를 들자 내 머리 위에서 펄럭이는 빨간색 표식이 보였다.
그리고.
"표식이다!"
검을 맞대고 있던 두 명의 플레이어가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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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붉은 깃발(3)
둘이서 방금 전까지 원수처럼 싸워댔으면서 갑자기 나한테 달려든다고?
나는 서둘러 당겼던 활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화살도 곧장 걸어 발사했다.
핑-! 핑-!
두 발의 화살이 아주 미세한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날아갔다.
녀석들도 궁수를 하루 이틀 상대해 본 게 아닐 터.
기습적인 저격이 아니라 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명에게만 쐈다.
첫 번째 화살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틀, 그 방향을 예측해서 날아간 두 번째 화살은.
푹-!
띠링!
[플레이어 '데니얼'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완수했다는 듯이 이마에 꽂히며 부르르 떨었다.
"어딜!"
그사이 남은 한 놈이 내게 달라붙기 위해 달려들었다. 녀석과의 거리는 20미터.
'거리를 줘선 안 돼.'
뒤로 물러서며 견제용으로 한 발을 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른 한 명이 화살을 피하려다 죽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검날로 쳐내며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왔다.
침착하자.
거리가 가까워져도 괜찮잖아.
녀석 또한 나에게 다가올수록 화살을 쳐내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침착하게.
핑-! 핑-! 핑-!
다시 한번 세 발의 화살을 빠르게 날렸다.
첫 번째 화살은 쳐낼 것을 예상하고서.
팅!
그리고 두 번째 화살은 미처 막지 못해 피할 것을 예상하고서.
휙!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발은······.
푹!
띠링!
[플레이어 '이철호'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기습적인 저격이 실패하는 순간 절대적인 유리함이 사라진다.
실시간으로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적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다.
젠장.
활에 대한 실전 감각이 많이 부족하다.
고작 이 정도에 긴장하다니.
[현재 생존자 수 : 919 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1:25:08]
남은 시간은 11시간 25분.
일단 최대한 버텨야 한다.
관건은 거리를 주지 않는 것과,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것.
결론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이네.'
현재 내 체력 스텟은 31.
앞으로도 계속 적들이 달려들 텐데,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 거리를 벌리는 것도, 적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까.
나에게 달려드는 놈들은 적당한 곳에서 짱박혀 쉬다 나오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 한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겠지.'
하지만 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손을 들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매끈한 가면이 만져진다.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이 하얀 가면뿐.
적을 처치할 때마다 회복되는 1%의 체력은 내게 가뭄의 단비가 되어줄 것이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0:37:11]
바스락- 바스락-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아직까지는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에 가려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한 걸음.
'지금!'
핑-!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나무를 지나자마자 날아오는 화살.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챙!
하지만 내 예상은 너무나 쉽게 깨졌다.
상대가 들고 있던 방패에 화살이 맞고 튕겨져 나간 것이다.
어떻게 안거지?
상대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무를 지나는 순간 내 쪽으로 고개를 틀어 날아오는 화살을 보았다.
기척을 숨긴 채 먼 거리에서 날린 저격이었는데.
'설마?'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나며 머리 위를 보았다.
하, 씨발.
이건 뭐 여기 있다고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는 꼴이구나.
표식이 빨간빛을 사방에 뿌려대고 있었다.
녀석이 내 붉은 깃발 표식을 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무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민 채 쏘는 화살을 적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 거기 서라!"
'이래서 실전을 경험해봐야 해.'
활을 수련할 때만 해도 상대를 죽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틈이 보이질 않아.'
그런데 막상 방패를 든 상대를 만나자 어디에 쏴야 할지 보이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화살집에서 화살을 한 움큼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 화살들을 바닥에 꽂은 채 엄청난 속도로 화살을 쐈다.
핑-! 핑-! 핑-! 핑-! 핑-!
무려 1초에 3발씩 쏘아지는 화살들.
하지만 날아간 화살은 무의미하게 방패 위를 때릴 뿐이었다.
그사이 상대와의 거리는 15미터까지 좁혀졌다.
'더 다가와라.'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후후, 방패 앞에서 화살이나 쏘아대고 있다니, 멍청하구나. 이만 죽어라!"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내게 검을 휘둘렀다.
'지금!'
나는 활을 내팽개치며 소매 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상대는 내게 검을 휘두르느라 겨드랑이와 가슴이 비어있는 상황.
나는 검을 피하며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푸슉-!
핏방울이 공기중으로 비산한다.
경동맥부터 시작해서 거의 목의 절반이 잘려 나간 상대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띠링!
[플레이어 '수흐랍'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사실 난 활보다 단검을 더 잘 다룬다고.'
후.
녀석을 방심시킨 덕분에 그나마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방패를 들고 있으니까 화살로 공략하기가 쉽지 않네.'
새삼 활이 다루기 까다로운 무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저격이 실패하는 순간부터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꼴이라니.
이제부터는 몰래 저격하는 것도 안 될 것 같은데.
하필 표식으로 인해 은신이 안 되는 상황.
'어렵네.'
나는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활과 화살을 챙겼다.
싸우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대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9:12:47]
"흡!"
나는 경사 아래로 몸을 날렸다.
사각-
뒤이어 등 뒤에서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몸을 틀며 경사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화살 한 발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핑! 푹-
띠링!
[플레이어 '마르퀴뇨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검을 휘두르는 와중이었고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인지 상대는 미처 화살을 피하지 못한 채 머리가 꿰뚫려 경사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어디가 잘린 거지?'
서둘러 등을 만져봤지만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로브의 만져보니 끝부분이 조금 잘려 있었다.
다행히 종이 한 장 차이로 상처를 입지 않았다.
'후, 쉽지 않네.'
남은 체력은 49%.
어느새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피의 회복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인거지, 그마저도 없었으면 30%대를 기웃대고 있었을 것이다.
젠장.
도무지 끝이 없었다.
[현재 생존자 수 : 602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8:33:17]
"헉, 헉."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입으로 소매를 찢어 손가락을 둘둘 싸맸다.
훈련을 통해 굳은살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이 찢어진 것이다.
'진짜 징글징글하네.'
죽인 숫자가 20명을 넘길 때부터 숫자 세는 것을 포기했다.
플레이어들은 개인전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일대 다수의 대결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미친 듯이 화살을 쏴댔더니 어깨와 팔이 뻐근했다.
고작 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몇천 발을 쏜 것 같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두 놈이 뒤쪽에서.
그리고 한 놈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1시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다.
무려 세 명에게 10분째 쫓기고 있는데도 둘러싸이지 않은 건 온전히 초감각 덕분.
엄폐물이 많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내 청각은 녀석들이 몇 명이고 어디쯤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핑!
막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1시 방향에 있는 녀석에게 화살을 한 발 날려주며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팅!
젠장.
상위리그에 있던 궁수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저격만으로 모든 적들을 상대했을 리는 없을 터.
'일단 녀석들을 서로 마주치게 해야 해.'
붉은 깃발전은 엄연한 개인 PvP 전투.
일단 마주치게 하면 서로가 검을 뽑든, 왈츠를 추든 알아서 할 것이다.
'일단 뒤에 두 놈부터.'
미끄러지듯이 멈춘 나는 곧장 7시 방향에 있는 녀석에게 속사를 해댔다.
그러자 녀석의 움직임이 쏟아지는 화살을 막느라 조금 느려졌다.
이제 얼추 5시 방향에서 쫓고 있는 녀석과의 속도가 맞을 것이다.
'둘이 지지고 볶고 해보라고.'
나는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달렸다.
"비켜라!"
"이 자식이, 비겁하게 기습을!"
됐다.
눈이 마주치면서 한쪽이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두 놈이 나를 쫓는 걸 포기하고 서로에게 칼질을 시작했다.
이제 나를 쫓고 있는 녀석은 한 놈뿐.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
조금 더 이동한 다음 두 녀석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된 나는 1시 방향에서부터 쫓아오던 녀석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핑! 핑! 핑!
시위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살들을 밀어냈다.
"잡스럽긴!"
그러자 1시 방향에서부터 쫓아오던 창술사가 화살을 튕겨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놈, 끝이다!"
휘익!
창으로 화살을 튕겨낼 때부터 알아봤지만, 녀석의 창술이 제법 매섭다.
나는 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단검을 꺼내 녀석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딜!"
젠장.
이놈 제법인데.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창을 휘두른다.
내가 단검을 사용할 수 있도록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활을 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도 아니다.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거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내게 달려들 것이다.
'민첩 수치에서 차이가 많이 나네.'
그래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녀석의 공격이 빠르게 눈에 익고 있었으니까.
허리를 비틀며 녀석이 창을 찌르고 들어왔다.
시력의 초감각은.
상대가 공격하는 순간의 좁은 틈을 파고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푸슉-!
가볍게 자세를 낮추며 점프하듯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어 단검을 찔러넣었다.
"제, 젠장······."
심장이 찔린 녀석은 움찔하더니 이내 무너져 내렸다.
띠링!
[플레이어 '손문'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 32%]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한참을 달렸더니 다리근육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나는 곧장 몸을 움직여야 했다.
여전히 사생결단을 펼치고 있는.
띠링!
[플레이어 '윌슨'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아슈와타마' 를 처치했습니다.]
나머지 두 녀석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힘드네.'
진짜 딱 10분만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치유의 물약과 붕대를 꺼냈다.
치이익-
아까 전에 추격 과정에서 당한 어깨의 상처에 회복의 물약을 뿌리자 수증기가 피어나며 상처가 아물어갔다. 그 위를 풀어지지 않도록 붕대로 꽉 묶었다.
'후. 아세리안이 꼼꼼하게 챙겨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리고는 새로운 화살통을 꺼내 어깨에 멨다.
무려 1만 발의 화살을 챙겨줄 때만 해도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는데.
'하, 씨발.'
이젠 그것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현재 생존자 수 : 451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7:01:59]
"헉, 허억, 허억, 허어억!"
숨을 몰아쉬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사방에 플레이어들이 쫙 깔려 있었다.
"저 붉은 깃발은 이제 내 꺼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그 다리부터 잘라주마!"
젠장.
결국 포위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녀석들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파리들이 너무 많이 꼬여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원래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했다.
좀 더 실전 감각을 익히고 싶었으니까.
근데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숨겨둔 한 수를 꺼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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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붉은 깃발(4)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4(+4)] [민첩 : 35(+6)] [체력 : 37(+6)]
[정신 : 105(+17)] [지력 : 14(+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중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32%]
칭호를 적용하자마자 온몸에 힘이 흘러넘쳤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정신 스텟이 100을 넘어서자 순식간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미쳤네.'
특전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스텟이 35나 늘었다.
모든 스텟이 20% 상승한다는 건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100미터를 10초에 뛰던 사람이, 8.3초 만에 뛸 수 있다는 거니까.
'다시 사냥을 시작해볼까.'
체력이 거의 바닥나기 직전이었지만 괜찮다.
체력 스텟이 상승하면서 체력이 소모되는 속도가 느려졌으니까.
"젠장, 어째서 더 빨라진 거지?"
"이 개자식! 잡히면 반드시 토막을 내 버리고 말 테다!"
"서라!"
내가 갑자기 더 빨라지자 따라오던 추격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핑! 핑! 핑!
어느 정도 거리에 여유가 생기자 화살을 시위에 걸어 왼쪽 방향에서 나를 쫓고 있는 플레이어에게 연속으로 쐈다.
녀석은 두 발까진 어떻게 막아내나 싶었는데, 세 발째에서 화살이 몸에 박히며 철퍼덕 쓰러졌다.
킬 콜이 뜨지 않는 걸로 봐서 죽지는 않은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일단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핑! 핑! 핑!
"젠장, 저 녀석은 도대체 체력이······ 컥."
띠링!
[플레이어 '니코타'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숨통이 좀 트인다.
새삼 스텟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거리를 벌린다고 전속력으로 뛰느라 미처 화살을 쏠 시간이 없었지만, 고작 민첩 스텟 6 늘어났을 뿐인데 상황이 180도로 뒤바뀐 것이다.
덕분에 내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포인트를 아껴두는 게 맞아.'
핑!
지금 당장은 조금 힘들겠지만.
푹.
이 힘듦을 감내한다면 상위리그에 올라가서도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
띠링!
[플레이어 '올리버'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상위리그에 올라가서도 지금처럼 플레이어들을 사냥하고 다닐 상상을 하자.
온몸에서 희열이 솟구쳐 올라왔다.
[현재 생존자 수 : 398 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5:22:13]
[남은 체력 : 61%]
쏴아아아아-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며 엄청난 폭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달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깜깜한 산속에서 오직 내 머리 위에 존재하는 붉은 깃발의 표식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젠장. 내 욕심이었군.'
고작 한 달 만에 활을 마스터하겠다고?
꿈도 꾸지 못할 소리였다.
한 종류의 활과 화살에만 능숙해서는 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11시 방향으로 간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해!"
내가 들고 있는 이 활은 리플렉스 보우.
활의 림이 전방으로 휘어있는 게 특징이다.
장점은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간다는 것.
그리고 단점은······.
'씨발. 비를 맞기 시작하자마자 상태가 맛이 갈 줄이야.'
활을 만드는 재료가 습기와 물에 약하다는 데에 있다.
물이 닿자마자 화살이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죽리! 다리를 노려!"
쐐애애액!
등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목표는 95% 확률로 내 오른쪽 허벅지.
나는 왼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
휘익- 푹.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오른쪽 허벅지를 스쳐 가며 바닥에 박히는 화살.
쐐애애액!
불행하게도 날아오는 화살은 한 발이 아니었다.
'이번엔 어디지?'
첫 번째 화살에 집중하느라 두 번째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젠장.
나는 일단 흙바닥 위로 몸을 던졌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바닥에 쓸리며 아릿한 통증을 피워냈다.
녀석은 나와 다르게 여러 종류의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활과 화살이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 쓰는 건 복합궁인지, 내 활과 다르게 폭우 속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날아왔다.
'일단 저 궁수부터 어떻게 해야 해.'
현재 나와 가장 가까운 녀석은 6시 방향에서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뛰어오는 녀석.
거리는 70미터 정도.
그렇다면 3초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창술사가 도달하기 전에 처리한다.'
쐐애애액!
날아오는 화살을 고개만 틀어 피한 나는 곧장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정확하게 조준해서 맞출 수가 없다고?
'그럼 존나게 많이 쏘면 되지.'
핑! 핑! 핑! 핑! 핑! 핑! 핑! 핑! 핑! 핑! 핑!
원래부터 속사가 제법 빨랐는데, 특전 효과로 모든 스텟이 20% 상승하자 더 빨라졌다.
고작 3초 만에 날아가는 10발의 화살.
상대에게 맞았는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창과 방패를 든 녀석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그저 맞기를 바랄 뿐.
안 맞으면 또다시 거리를 벌린 다음에 쏘면 된다.
나는 곧장 활을 챙겨 전속력으로 달렸다.
띠링!
[플레이어 '고죽리'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현재 남은 체력 : 37%]
"젠장, 죽리가 죽었다!"
마침 알림창이 궁수가 죽었음을 알려왔다.
휴.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네.
궁수가 포함된 파티에게 쫓긴다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궁수를 처리했으니까 이제 나는 계속 도망 다니면서 한 놈씩 잘라먹으면 된다.
놈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8명이 팀을 이룬 채 행동하고 있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 걸로 봐서는 한 팀에서 출전한 녀석들인 것 같았다.
개인 PvP에서는 생존율을 올리기 위해 같은 팀에서 여러 명이 출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꼭 생존율이 높냐면, 그것도 아니긴 하지만.
"헉, 헉. 젠장, 몰이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는 거야!"
"그것보다 저 자식 체력 스텟이 도대체 얼마야?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아무래도 나를 몰아넣기 위해 작전을 짰던 녀석이 죽은 궁수였나보다.
궁수가 죽자 녀석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제법 수준이 높은 사냥꾼이었군.'
어쩐지 나를 몰아넣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초감각이 아니었다면 언제고 둘러싸였을 정도로.
하지만 추격대의 대가리가 죽었으니까.
핑! 핑! 핑!
이제 내가 사냥할 차례가 되었다.
"크윽, 안 되겠다. 빼! 이봐, 한슨! 빼라고!"
띠링!
[현재 생존자 수 : 297 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3:21:37]
[킬 수 현황]
[1위. '렌' 112킬]
[2위. '르노바' 49킬]
[3위. '빅터' 47킬]
[4위. '붉은 거미' 44킬]
[5위. '일리자드' 41킬]
[6위. '내가제일쎔' 24킬]
'징글징글하네, 진짜.'
밤이 되면 좀 나을 줄 알았더니 더 심각해졌다.
먹구름 때문에 달빛조차 존재하지 않다 보니, 내 표식이 너무 눈에 띈다는 게 문제였다.
이건 뭐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방들도 아니고······.
비를 계속 맞고 있다 보니 몸이 무거웠다.
여름 날씨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내 몸을 두들기는 빗방울들은 내 체온을 빼앗아 갔다.
'체력 소모가 더 심해졌어.'
여전히 남아있는 플레이어 수는 297명.
이제 3시간 정도만 버티면 된다.
[현재 남은 체력 : 38%]
핑! 푹-
"큭, 어······ 어떻게······."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나를 향해 조용히 다가오던 플레이어를 향해 기습적으로 화살을 날려 주었다.
초감각 덕분에 암살자 계열은 나에게 걸어 다니는 체력 포션이나 마찬가지였다.
띠링!
[플레이어 '도둑왕왕왕'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후.
마침 체력도 별로 없었는데, 스테미나 소비 없이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와줘서 다행이다.
이걸로 113킬 째.
나는 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레이어들이 별로 없길래 명당을 찾았나보다 싶었는데, 어느새 곳곳에서 시선이 꽂히기 시작했다.
굳이 화살을 쏴서 자극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먼저 저들에게 싸우지 말자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만약 창을 들고 왔으면 어땠을까.'
아마 고생다운 고생도 하지 않고 게임이 끝났을 가능성이 컸다.
창을 들고 있을 때의 나와, 활을 들고 있을 때의 나는 그 격이 다르다.
'후회는 하지 않아.'
무척 고생을 많이 하고 있지만, 배우는 게 너무 많았다.
특히 활.
실전에서 내가 직접 활을 들고 다니며 악전고투를 벌이다 보니, 앞으로 궁수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붉은 깃발!"
"조심해, 욘! 저 녀석 경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표식을 안 뺏긴 놈이야. 심지어 킬 수도 1위라고!"
"그래서 더 기회라고. 녀석을 봐. 엄청 지쳐있잖아."
이동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소곤대는 플레이어들의 소리가 들렸다.
후, 끝이 없군.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현재 생존자 수 : 107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2:25:14]
"헉, 헉, 허억, 헉."
잠시 플레이어들이 죽는 속도가 줄어들길래 나머지는 생존파 녀석들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아있는 놈들은 체력을 비축해서 날 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려가는 방향의 나무 뒤에 숨어있던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덮쳐 들어왔다.
핑! 털썩.
띠링!
[플레이어 '하이제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 30%]
후.
진짜 하얀 가면이 없으면 죽을 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똑똑히 실감하게 되었다.
체력 90%가 남아있을 땐 1% 회복되는 게 그렇게 큰 줄 몰랐는데, 20%에서 30% 정도 남아있으니까 체력 1% 회복은 가뭄의 단비 같은 녀석이었다.
쐐애애액! 푹-
날아오는 화살을 보지도 않은 채 방향을 틀어 피했다.
지긋지긋한 궁수 새끼들.
진짜 도망치는 입장에서 쫓아오는 궁수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등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데, 그걸 보고 피하자니 도망치는 속도가 느려지고, 그냥 무시하자니 언제 뒷덜미에 화살이 박힐지 몰랐다.
초감각이 있는 나도 이렇게 고생하는데,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궁수에게 쫓기고 있다면 그냥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쐐애애애액!
나는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로 몸을 날렸다.
날아오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쳐 나무에 박혔다.
핑! 핑! 핑! 핑! 핑!
서둘러 자리를 잡고 대응 속사를 했다.
"컥."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화살들 사이로 적 궁수의 단말마가 들렸다. 같은 어둠 속에서의 저격이라면 내가 더 유리하다.
녀석은 단지 표식으로 내가 있는 위치를 알아낼 뿐이지만, 난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보이거든.
띠링!
[플레이어 '일리자드'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죽이고 보니까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무려 킬 수 5위에 올라가 있던 플레이어.
어쩐지, 혼자서 나를 쫓아오는 건데도 아까 만났던 파티의 궁수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롭더라니.
쏴아아아아아아아-
폭우가 더욱 심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진짜 힘들어 죽겠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현재 생존자 수 : 83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57:22]
칭! 칭! 칭! 칭!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능숙하게 막아낸다.
아무리 전속력으로 도망쳐도 녀석과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다.
'젠장. 앞에도 있어.'
전방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포위되면 곤란하기에 나는 곧장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액!
'헉!'
나는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찍었다.
진짜 죽을 뻔했다.
내가 방향을 꺾자마자 내 목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창이 날아왔던 것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그대로 목이 꿰뚫릴 뻔했다.
"후후. 진짜 지금까지 버틸 줄은 몰랐군."
'고수!'
"무려 11시간이나 버티다니, 정말 대단해."
누구일까?
아마 킬 수 2위에서 4위에 랭크되어 있던 놈들 중 한 명일 것이다.
한두 시간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의 정체가 녀석들이었군.
하, 씨발.
11시간 동안 버티는 것도 힘들었는데, 남은 1시간은 더 지옥이 될 것 같았다.
나 또한.
애초에 1시간 남았을 때 붉은 깃발을 쟁취하려고 계획했었으니까.
한마디로, 진짜 고수들이 지금부터 나를 찾아오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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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붉은 깃발(5)
"후."
간담이 서늘하다.
앞에는 창술사가 창을 겨눈 채 노려보고 있고, 뒤에서는 검객이 달려오고 있다.
둘 다 수준은 하위리그 준컨텐더 급.
못해도 두세 경기를 더 치르면 컨텐더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을 정도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해.'
앞뒤로 쌈 싸먹히는 건 곤란하다.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바다 쪽으로 내달렸다.
"놓칠 줄 알고!"
쐐애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
그 안에 담긴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미약하게 빛이 나는 것 같기도······.
'빛?'
나는 서둘러 바닥을 박차고 점프했다.
콰아아앙!
창이 간발의 차이로 내 발밑을 지나 땅에 부딪혔다.
'씨발!'
벌써부터 창에 오러를 담아 던지는 수준이라니.
핑! 핑! 핑!
빠르게 세 발의 화살을 날렸다.
솔직히 맞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건 말하자면 견제용.
녀석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가?"
무척 부드럽고 여유로워 보이는 목소리.
하지만 내 귀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뒤에서 쫓아오던 검객이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도망치기만 해서는 153명이나 죽일 수 없었을 터. 내게도 그 실력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네만."
"헉, 헉."
어떻게 하지?
창술사도 그렇고, 눈앞의 검객도 그렇고 무척 여유로워 보인다.
체력이 충분하다는 뜻.
어쩐지 2위와 3위의 킬 수가 더 이상 오르지 않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순간을 위해 체력을 충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답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하루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머리 굴릴 시간이 있었어야지.'
매 순간 다급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내 체력이 얼마나 남았지?'
[남은 체력 : 24%]
현재 나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지금까진 어떻게 정신력으로 버텨왔지만,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은 불가능해.'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검객과 창술사의 민첩은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이다.
화살로 견제를 하지 않는 이상 거리를 벌릴 수 없다.
문제는 놈들이 두 명이라는 것이다.
검객에게 견제를 하려고 속도를 늦추면 창술사와 가까워지게 되고, 창술사를 견제하려고 속도를 늦추면 검객이 칼을 들이밀 것이다.
더 이상 도망치는 건 체력 낭비가 될 가능성이 컸다.
'이럴 때 녀석들은 어떻게 했더라······.'
상위리그에서 만난 궁수들은 거리가 가까워져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거리가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날 괴롭혔었다.
'그때 분명 베일리 녀석이······.'
"후후, 이제야 싸울 마음이 좀 생겼는가."
내가 속도를 늦추자 검객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녀석이 들고 있는 검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
베일리 녀석은 화살을 급소에 박아넣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았다.
'먼저 내딛는 발의 허벅지 쪽으로 한 발을 쐈고.'
핑!
내가 쏜 화살에 검객이 허둥지둥대며 몸을 틀었다.
무게중심이 잔뜩 들어간 오른쪽 다리로 화살이 날아가자 저도 모르게 급하게 피한 것이다.
'이어서 머리 쪽을 겨냥해서 한 발을 쐈지.'
핑- 챙!
검객의 이마로 날아가는 화살을 검객이 서둘러 검으로 쳐냈다.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막아내느라 그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빈틈!'
핑!
시위를 떼자 화살이 쏜살같이 검객에게 날아갔다.
목적지는 바로 심장.
푹-
"크윽!"
'아쉽네.'
화살은 검객의 왼쪽 어깨에 박혀있었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마지막 화살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검객이 몸을 틀어 왼쪽 어깨를 내민 것이다.
"흐흐, 넌 내 거다!"
검객은 화살이 박히자마자 몸을 뒤로 뺏다.
이어지는 화살의 추가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검객에게 화살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창술사가 창을 찌르며 들어왔다.
녀석의 창에는 오러가 서려 있었다.
챙!
나는 소매에서 단검을 빼 녀석의 창을 흘려냈다.
내 왼손에는 활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막아? 내 창을?"
정확히는 일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창의 방향을 튼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창술사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아쉽지만.
'창에 한해선 내게 안 되지.'
"쓰읍, 어딜!"
내가 자세를 낮추고 녀석의 품으로 달려드려는 자세를 취하자 창술사가 순식간에 뒷걸음질을 쳤다.
스텝이 제법이긴 한데, 애초에 나는 달려들 생각이 없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단검을 녀석의 가슴으로 던지고 바로 화살을 다발로 꺼내 시위를 당겼다.
핑!
화살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 보니 거의 동시에 날아가는 단검과 화살.
창술사가 몸을 숙이며 화살을 피하고, 창대로 단검을 쳐냈다.
그러다 보니 녀석의 자세도 어정쩡해졌다.
'잘 가라.'
핑! 핑! 핑! 핑! 핑!
이어지는 다섯 발의 속사.
"흡!"
창술사가 급히 창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허벅지와 명치, 심장, 목, 이마로 날아가는 다섯 발의 화살을 모두 쳐내진 못했다.
푹.
띠링!
[플레이어 '르노바'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그제야 내가 뭘 착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활을 단순하게, 적의 급소로 꽂아 넣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활도 검이나 창이랑 똑같아.'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정직하게 급소에 꽂아 넣을 생각만 해서는 적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쏴서 적을 조금씩 무력화시켜야 했다.
띠링!
[<상급궁술>을 각성하셨습니다.]
'빙고.'
역시.
이게 정답이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5(+4)] [민첩 : 38(+6)] [체력 : 41(+7)]
[정신 : 105(+17)] [지력 : 14(+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23%]
"정말 대단하군. 과연 처음부터 지금까지 깃발을 지켜낸 이유가 있었어."
"······."
"방금 전엔 정말 아찔했다네. 그런 방식으로 화살이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단 말이지."
검객은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혀있음에도 무척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내 등으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방금전에 죽은 녀석이 킬 수 2위였던가?
그렇다면 눈앞의 검객이 킬 수 3위였던 빅터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생존자 수 : 64 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32:45]
[킬 수 현황]
[1위. '렌' 154킬]
[2위. '빅터' 59킬]
[3위. '애커만' 11킬]
[4위. '서문창' 7킬]
[5위. '로렌스' ······]
이제 강적이라고 할 만한 녀석이 빅터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녀석만 처리하면 돼.'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녀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힘이 솟아났다.
녀석만 처리하면······.
12시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다시 한번 놀아보세!"
빅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쇄도했다.
핑! 핑! 핑!
나는 뒤로 점프하며 연속으로 세 발을 쏜 뒤에 몸을 틀어 바닷가 쪽으로 내달렸다.
녀석에겐 안됐지만, 이 싸움은 이미 내 쪽으로 승부가 많이 기울었다.
녀석은 어깨에 화살을 맞아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면 빠르게 달릴 수가 없다. 무게중심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달릴 때 괜히 양팔을 앞뒤로 흔드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녀석과의 거리를 계속 벌리면서 활을 쏘기만 하면······.'
슈우욱-
뭐지?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나는 서둘러 몸을 틀었다. 그러자 빅터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롱소드가 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미친!'
지가 들고 있는 검을 던져?
하필 검이 날아오는 위치가 절묘했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고.
'어쩔 수 없지.'
나는 들고 있던 활을 휘둘러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챙!
파륵!
검과 부딪힌 활시위가 끊어지며 활대가 꼿꼿하게 펴졌다.
젠장.
이제 화살을 쏠 수 없다.
'인벤토리 오픈!'
나는 활대를 내팽개치고, 바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하, 결국 꺼냈네.'
최대한 활의 숙련도를 높이고 싶었는데.
'넌 죽었어.'
"껄껄, 이런 행운이 있나. 그저 멈춰 세우는 걸로 만족하려 했는데, 하필이면 활대가 끊어지다니."
빅터가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이가 짧고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검, 시미터였다.
내 남은 체력은 그새 1% 더 줄어 23%.
아직 팔팔해 보이는 빅터와 다르게 나는 무척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헉, 헉."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호오, 도망치지 않고 맞서려는가?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궁수를 만났구나. 어디, 창술 실력 좀 볼까?"
흐읍!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채로 천천히 거리를 좁히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검과 창을 찔러넣었다.
'······!'
이렇게 서로가 검을 맞대자마자 알 수 있었다.
빅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였다.
챙! 채챙! 챙!
'이런 녀석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름 고급창술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하위리그에서는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활로 상대할 때는 알 수 없었던 실력이었다.
마치 상위리그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느낌.
그의 검은 폭풍 같았다.
몰아치는 공격을 단순히 막는 것에 급급할 정도로.
초감각이 없었으면 진즉에 목이 꿰뚫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생각보다 스텟 차이가 심하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나보다 스텟이 높은 상대를 만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차피 테크닉은 내가 한 수 위야.'
쉭! 쉬익! 쉬쉭!
내 창이 바람을 가르며 빅터에게 쇄도했다.
체력도 부족하고, 속도로 거리를 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 창술로 녀석에게 거리를 주지 않는 수밖에.
"궁수가 아니라 창술사였던가!"
빅터가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창을 막아내며 감탄을 터트렸다.
나는 그가 순간적으로 대쉬해서 품속으로 들어오려 할 때마다 하체를 견제하며 거리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체력이 너무 부족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발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허억, 허억, 헉, 허억."
이를 악물고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하길 한참. 나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빅터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하하, 조급했구나! 이런 실수를!"
그러자 빅터가 창을 피하며 내게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내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걸렸어.'
나는 앞으로 나아가던 자세에서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며 뒤로 빠져나갔다.
조급했던 건 내가 아니라, 빈틈이 보인다고 바로 파고든 빅터였다.
챙!
창자루로 쭉 뻗은 팔을 때리자 빅터가 순간적으로 검을 놓쳤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을 창날로 쳐냈다.
빅터의 시미터가 내 창에 튕겨져 날아갔다. 내 찌르기의 목표는 애초에 목이 아닌, 빅터의 시미터였던 것이다.
'내가 이겼어.'
빅터는 현재 무방비 상태.
더 이상 내 창을 막아낼 무언가가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창이 빅터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챙!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강한 충격에 내 창 또한 튕겨 날아간 것이다.
뭐지?
빠르게 백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리자 빅터의 손에 들려있는 허리띠가 보였다.
'허리띠!'
그 짧은 순간에 허리띠를 풀어 내 창을 막아낸 것이다.
제길.
허리띠를 채찍처럼 휘두를 생각을 하다니.
단순히 검만 잘 쓰는 게 아니구나.
빅터는 진짜 싸움꾼이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든 활용하여 상대를 공격할 줄 아는 싸움꾼.
"헉, 헉, 헉, 헉."
나는 서둘러 화살을 꺼내 손에 쥐었다.
맨손보다는 뭐라도 쥐고 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이제 서로의 손에는 화살과 허리띠만 남은 상태.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3:12]
남은 시간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도감이었다.
'살았다.'
이 정도 시간이면 괜찮아.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손에 든 화살로는 빅터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상대하지 않고 거리만 벌리면 된다.
빅터는 왼쪽 어깨에 입은 상처 때문에 빠르게 달릴 수 없을 테니까.
빅터 또한 남은 시간을 본 것인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알고 있으리라.
내가 맞상대하지 않는다면 3분이란 시간 안에 나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렌이라······ 이런 곳에서 그대와 같은 고수를 만날 줄 몰랐군. 새삼 콜로세움이 넓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네."
'누가 할 소리를.'
설마 하위리그에서 내 창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내 체력이 넉넉했다면 어렵긴 해도 결국 내가 이겼을 테지만.
'이런 곳에서 저런 강자를 만날 줄이야.'
빅터는 못 해도 최상급검술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체력도 부족하고, 스텟도 나보다 높았던 상황.
결국 녀석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창을 잃은 이상 오히려 내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띠링!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0:00]
"난 웨스테로스의 빅터라고 하네.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고대하지."
'웨스테로스······!'
그제야 빅터의 실력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전투 성계라고 불리는 웨스테로스 출신이었던 것이다.
띠링!
[붉은 깃발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렌' 승리!]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끝났다.'
경기 종료 콜이 뜨자 힘이 쭉, 빠졌다.
12시간 동안 모든 플레이어들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살아남았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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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붉은 깃발(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