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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화. 증명의 서(9) >

띠링!

[<창:벽력섬전>을 집어넣었습니다.]

[<채찍:통한의 가시>를 꺼냈습니다.]

창을 집어넣고 꺼내 든 것은 채찍.

내가 나름대로 자신 있어 하는 무기 중 하나였다.

사슬낫이랑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졌지만, 무게 중심이 다르다는 것 하나 때문에 아예 다른 활용도를 보여주는 무기랄까.

'이 맵이랑 상성도 좋지.'

"드디어 만나게 됐군. 내 이름은 엔키두. 바빌론 출신이다."

쏴아아아아아― 찰랑― 찰랑―

100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판자 위.

엔키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 성계 대항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보고 싶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오랜만에 피가 끓는 기분이란 말이지."

"······."

녀석이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야생미 가득한 몸매도 그렇고,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초리, 거기다 말하는 것까지.

'한 마리 야수를 보는 느낌이네.'

엔키두는 투박하지만, 굉장히 강렬해 보이는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엔키두]

[성향 : 야성]

[근력 : 268(+?)] [민첩 : 250(+?)] [체력 : 261(+?)]

[정신 : 122(+?)] [지력 : 3(+?)] [마력 : 258(+?)]

[각성 능력 : <사냥본능> <강철육체> <특급살기> <특급마나운용> <하급치료술>]

[업적 특전 : 야성의 포효]

'치고받기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본데.'

전체적으로 스텟도 무척 준수하고, 능력도 좋다.

주먹과 발을 주로 사용하는 플레이어답게, 내구 관련 능력도 존재하는 데다가, 호인족에게나 볼 수 있는 사냥본능도 가지고 있었다.

하위 리그에서, 유일하게 벽력을 피했던 소호가 가지고 있던 능력.

아마 육감 쪽으로도 뛰어날 것이다.

"그럼, 한번 치고받고 싸워 보자고!"

팟! 파밧! 파밧!

상태창을 체크하는 사이, 엔키두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과 다르게, 그가 밟고 지나간 나무판자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육체 감각이 뛰어나다는 뜻.

'이런 녀석들에겐 채찍이 딱이지.'

날아드는 주먹을 피한 나는 근처에 있는 나무판자로 이동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짝! 콰지직!

"크읏! 뭐, 뭐냐!"

그러자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이 경직되는 엔키두.

뇌전 특성의 스킬은 제법 희귀한 편이라, 이런 느낌은 처음 받아봤을 것이다.

'일단 좀 맞자.'

"흥! 얌생이같은 기술을 쓰는군. 네놈이 남자라면 제대로 한 번 붙어 보자!"

짝! 콰직!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것이냐!"

짝! 콰직!

"현 상위 리그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녀석이 이렇게 겁쟁이였을 줄이야······."

짜아아아악! 콰지직!

판자와 판자 사이를 넘나들며 채찍을 휘두르길 한참.

"크아아아! 이 비겁한 놈!"

일방적인 구타에 엔키두가 야수처럼 소리를 질렀다.

씩씩거리며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게, 무척 열받은 모습이었다.

반면에 때리기 바빴던 난.

'진짜 단단하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아무리 날붙이가 붙어있지 않다고 해도, 채찍은 무시무시한 속도를 가지고 있는 무기.

거기다 내 스텟까지 더해지니까, 마치 한줄기 섬광이 뿜어져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런 공격을 수차례 얻어맞았는데도 저렇게 멀쩡하다고?'

물론 데미지는 쌓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피부가 단단하다고 해도, 장기까지 그러진 못할 테니까.

그때였다.

"잡히면 가만 두지 않겠다!"

'뭐지?'

마치 자석에 끌려오는 것처럼, 녀석의 속도가 급상승했다.

녀석과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놈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 하나인 모양.

'때리는 것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지.'

나는 이동하던 자세 그대로 크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지막에 팔목을 살짝 꺾자, 채찍이 엔키두의 왼팔을 둘둘 감는 게 느껴졌다.

'따라오기 쉽지 않을거야.'

채찍을 힘껏 잡아당긴 나는 엔키두가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흔들었다.

나무판자를 뛰어넘으며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기에, 어지간한 플레이어가 아니면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이까짓 것 쯤이야아아아아악!"

콰지지지지직!

그러자 채찍을 풀려고 하는 엔키두.

그 상태 그대로 뇌전을 불어넣자, 녀석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엄청난 데미지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악! 하악! 이 개같은 자식이!"

가까스로 풀어낸 엔키두가 채찍을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채찍을 뺏어서, 상황을 타파하려는 모양인데.

'마음처럼은 안 될 걸.'

보기와 달리, 내 근력 스텟이 훨씬 높은 상황.

나는 계속해서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며, 녀석을 괴롭혔다.

"제길!"

결국 얼마 못 가 힘으론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엔키두가 채찍을 놨지만.

'놨으면 또 맞아야지.'

그때부터 일방적으로 후려패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채찍을 막으려고 하면, 팔을 휘감아 뇌전으로 공격하고.

"이런 개같은 상황을 봤나!"

짝! 콰지직!

풀어내면, 구타당한다.

그럼에도 녀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네놈을 어떻게든 찢어 죽이고 말겠다!"

'근데 좀 멍청하긴 하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녀석은 잔머리를 굴리는 대신, 언제나 일직선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거리상으론 그게 가장 짧으니 파고들기엔 가장 좋겠지만, 문제는 내 움직임이 더 빠르다는 데 있었다.

들어오는 만큼, 나 또한 좌우로 이동하며 거리를 벌리고 있는 상황.

녀석이 날 잡으려면 조금 더 변칙적이고, 창의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엔키두가 이 맵이랑 상성이 잘 안 맞는 것도 있고.'

싸아아아아― 찰랑― 찰랑―

수상전, 그것도 지금처럼 나무판자 위로만 다닐 수 있는 맵은 근거리 딜러에겐 최악이었다.

채찍보다 주먹이 훨씬 짧으니까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들어와야 하는데, 이동에 제한이 존재하는 맵이었기 때문.

아마 녀석에겐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그때였다.

"크하하하하!"

"······?"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크게 웃는 엔키두.

'실성했나?'

너무나 뜬금없는 웃음이었기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녀석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마력을 끌어올렸다.

"더 이상 도망 다니지 못하게 해주마!"

그러고는 다시 무서운 기세로 쇄도해 들어왔다.

녀석의 주먹엔 권강拳罡이 서려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잠시 고개를 갸웃한 나는 짧게 점프하며 판자 사이를 이동했다.

쐐애애애애애액!

"······!"

"크하하하! 이러면 도망칠 공간이 없지!"

그러자 내가 향하던 나무판자로 주먹에 응축된 권강을 날리는 엔키두.

쾅! 콰광! 쾅! 찰랑― 찰랑―

권강에 직격한 나무판자가 조각조각 났다.

순식간에 밟을 곳이 없어진 상황.

'이걸 노렸군.'

나는 재빨리 섬전을 사용하며, 근처에 멀쩡하게 떠 있는 나무판자로 순간 이동했다.

거대한 폭발로 인해 바다가 크게 출렁였지만, 초감각 덕분에 균형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

아무렇지도 않게 위기에서 벗어나자, 멍한 표정을 짓는 엔키두.

아무래도 회심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통하면 계속 맞아야지.'

짝! 콰직!

"이런 제기랄! 이런 개같은 상황이 있나!"

짝! 콰직!

"멋진 대결을 기대했거늘!"

짝! 콰지직!

"제에엔자앙!"

짜아아악! 콰지직!

공기 터지는 소리가 바다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진짜 단단하네.'

그리고 그 소리는, 50분이 넘도록 계속 이어졌다.

└ㅋㅋㅋㅋㅋㅋㅋ아 씨발 ㅋㅋㅋㅋㅋㅋ ㅈㄴ 웃기넼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고 배얔ㅋㅋ 아이고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무슨 맹수를 길들이는 사육사 같냐? ㅋㅋㅋ 엔키두 상대로 이런 싸움이 만들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 ㅋㅋㅋㅋㅋ

└저게 말이 됨? 아니 ㅆㅂ 거의 일방적인 구타자나 ㅡㅡ

└ㅋㅋㅋㅋㅋ 맞는 거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함 ㅋㅋㅋㅋ

└무자비한 새끼 ㅠㅠ 우리 엔키두..ㅠ

└ㅎㅎ; 어이가 없네..ㅋ 내가 저런 애 때문에 바빌론에 걸었다니.. 존나 허탈하다ㅎ

└렌 저 새끼가 제일 나빴음 ㅋㅋㅋㅋ 그냥 편하게 보내줄 수도 있는데,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고 마지막까지 이 악물고 채찍 휘두름 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는 좀 지쳐 보이더라 ㅋㅋㅋㅋㅋ 때리다가 체력 다 떨어짐 ㅋㅋㅋㅋㅋㅋ

'아직도 어깨가 뻐근한 느낌이네.'

나는 어깨를 살살 돌리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7라운드에서 무려 1시간 가까이 일방적으로 구타한 이후, 8라운드에선 알프하임 출신의 랭커 카시아를 상대하게 되었다.

정령사였던 그녀의 무기는······.

'완드였지.'

그래서 나는 주변에 있던 나무를 잘라, 완드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뭐 이름만 완드고, 사실상 나무 몽둥이랑 다를 바 없었지만.

띠링!

[4경기 9라운드]

[생존자 : 5명(부전승 1명)]

[맵 : 팀 '성장' 팜의 공터(소)]

[렌 vs 몽연]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생존자는 5명.

10라운드에 3명이 남고, 한 명이 부전승으로 올라가면 결국 11라운드에서 결승전을 갖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준준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

'어? 잠깐만.'

맵의 이름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불이 꺼진 각종 건물과, 그 너머로 둘러져 있는 울타리.

하늘 위로 처져 있는 반투명한 파란색 막.

그 모든 게 낯이 익었다.

'팀 성장?'

이곳은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소속되었던 팀 성장의 팜.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건물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낡아 보였다.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은 모습.

그 광경을 보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망했군.'

바로 팀 성장이 파산했다는 것.

'시노엘이 왜 갑자기 타락해서 내 손에 죽었나 했더니.'

아무래도 내가 나간 뒤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때 소속된 팀이었지만, 사실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몽연이라······.'

지금 내 상대가 쿠 훌린, 을지문덕과 함께 상위 리그 랭커 3강이라고 불리는 몽연이라는 것.

100미터 전방에서 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한 도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던 주창범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미남자.

칠흑색 도복을 걸치고 있고, 머리 위에는 관이 씌워져 있다.

'3강 실력은 어떨지 궁금하군.'

지금까지 내가 싸워본 랭커는 아시카가, 주소월, 엔키두, 카시아 이렇게 네 명 뿐.

네 사람 중 누구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독 미션과 코드 제로에서 내가 갑자기 너무 강해졌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몽연과의 싸움은 기대가 됐다.

'과연 얼마나 강할까.'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대개 콜로세움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어느 성계든 상관 없이 실용적인 장비를 추구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각 성계의 아이덴티티가 희미해지는데, 무림은 이상하게도 성계 특유의 복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몽연만 봐도 무림의 색채가 확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자부심 같은 거겠지.'

몽연은 굳이 머리 위에 <무림>이라고 쓰여있지 않아도, 무림 출신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이었다.

[경기 시작!]

시작 콜과 동시에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서로의 스타팅 포인트가 1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보니,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올 수도 있었다.

"몽연이라고 하오. 한 수 부탁드리겠소."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검을 역수로 쥔 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몽연.

녀석은 내가 기습할 거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멍청하거나, 아니면 기습이 들어와도 자신 있거나.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몽연]

[성향 : 중용]

[근력 : 288(+?)] [민첩 : 292(+?)] [체력 : 299(+?)]

[정신 : 122(+?)] [지력 : 87(+?)] [마력 : 288(+?)]

[각성 능력 : <현천칠성검玄天七星劍> <천재> <현천보> <태청강기> <특급살기> <특급박투술> <고급치료술>]

[업적 특전 : 불세출]

몽연의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흠칫했다.

'제법 강한 녀석이었군.'

지금까지 만나왔던 랭커들과 다르게, 특급 이상으로 가득한 각성 능력.

게다가 준수한 스텟까지 가지고 있다.

이전에 만났던 랭커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

"······."

"하하, 무기로 나누는 대화를 좋아하시는군요."

내가 묵묵부답으로 검을 겨누고 있자, 몽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한순간에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지체하지 않고 바로 들어가겠소."

선해 보이던 인상의 미남자는 온데간데없고, 한 명의 살인귀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챙! 콰지직! 챙! 콰직!

'뭐야?'

몽연과 격돌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뇌전 공격에도 녀석의 표정이 무척 평온했기 때문.

아니, 되려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반격을 펼쳐왔다.

녀석의 무기는 면검緬劍.

검의 탄성이 좋아, 휘두를 때 낭창거린다는 특징이 있다.

'제법인데?'

그러다 보니 검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여 들어왔는데, 쾌검술을 구사하다 보니 공격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챙! 콰지직! 채챙! 챙! 콰직!

'이 자식.'

검을 휘두르자, 몽연이 내 공격을 흘려낸다.

그 잠깐의 부딪힘에서, 뇌전이 내 검을 타고 녀석에게 흘러 들어간다.

그 순간 한 가지 이상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뇌전을 흘리고 있어······?'

면검을 타고 들어가던 뇌전이 어느 순간 공기 중으로 흩어진 것이다.

'저게 가능하다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교로는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녀석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서 뇌전을 흘려낼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는 모양.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

몽연의 검은 그 이치에 통달해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해 보이시는구료."

내 모든 공격을 흘려 내던 몽연이 여유롭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 이것 봐라.'

내 공격을 모두 흘려낸다고?

'누가 더 잘 흘리는지 보자고.'

그럼 나도 모든 공격을 흘려내 줄 생각이었다.

< 175화. 증명의 서(9) > 끝

< 176화. 영혼의 반쪽(1) >

불세출의 천재.

언제나 몽연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쳤고,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했다.

―이 아이는 무당의 미래가 될 것이다.

장문인, 장로님들, 심지어 사형제들까지.

모두들 몽연이 언젠가, 무당을 지키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누구보다 성취가 빨랐기도 하고.

―강함을 좇지 말거라.

그런 모두의 기대 속에서, 몽연은 절대 자만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부님께서 내면의 성숙을 강조하셨기 때문.

사부님은 천애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길러주셨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어.'

때로는 아버지처럼, 힘들어 할 땐 형처럼, 그리고 외로움에 잠겼을 땐 친구처럼.

언제나 몽연을 진심으로 대했던 사부님의 가르침 덕분에, 그는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예를 다했고, 지위의 고하와 상관없이 존중해 주었으며, 의와 협을 위해 움직였다.

―과연 무당의 기재로다!

―무량수불.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저 아이보다 더 나은 이의 이름을 댈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내 지금이라도 당장 이 결정을 철회하도록 하지.

―······없습니다.

그 덕분에 몽연의 이름 곁엔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별호가 따라붙었다.

무당칠검武當七劍.

검의 조종祖宗, 무당파에서 가장 날카로운 일곱 개의 검에게 붙는 수식어.

그의 명성이 사해에 울려 퍼졌다.

'무당의 이름에 먹칠을 해선 안 돼.'

그럴수록 몽연은 사문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더욱더 자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당산 근처에서 마두가 출현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간 몽연.

그는 그곳에서 거대한 악과 조우하게 되었다.

―네가 무당칠검이라고 불리는 아이로구나.

마교의 교주 천세운.

그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고작 백여 합도 받아내지 못하고, 몽연이 패배한 것이다.

'앞날이 걱정되는구나.'

검 끝이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도, 몽연은 무당의 안위를 걱정했다.

눈앞의 노룡老龍이 몸을 일으키면 강호에 파란波瀾이 불어닥칠 테니까.

정파 무림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인 무당.

그곳에 혈겁이 드리울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로군. 아이야, 만약 내가 살려 준다면, 내 제자가 되겠느냐?

그럼에도 몽연은 기꺼이 죽음을 감내했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

그저, 무당파가 온전하길 바라는 수밖에.

[콜로세움의 챔피언이 되면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 드립니다.]

[콜로세움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사후 세계의 전장, 콜로세움.

'신기한 세상이네.'

그곳에 처음 발을 디딘 몽연은 감탄했다.

자연의 힘이 담긴 사술詐術을 사용하고, 무구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올려준다.

늑대와 호랑이, 토끼를 닮은 종족들이 사람말을 한다.

거기다 날개를 가진 상위 개체, 신神이라고 불리는 경외의 존재까지.

지금껏 몽연이 쌓아 올린 상식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사부님 곁으로 돌아가고 말겠어.'

그 낯선 환경에서도, 몽연은 꺾이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가 스승께 받은 은혜를 다 갚지 못했으니까.

다행히 그가 이곳에서 적응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같은 팀 안에, 그와 친분을 가진 무림인들이 제법 있었던 덕분이었다.

―무당칠검, 현정賢正 도인 아니시오?

현정은 몽연의 도호道號.

그들의 도움으로 빠르게 적응한 몽연은, 콜로세움 안에서도 금세 두각을 드러냈다.

[플레이어 '몽연'이 상위 리그로 승급하셨습니다!]

열두 개의 세상에 모인 그 누구도 그의 검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단숨에 상위 리그로 올라온 몽연.

초반에는 제법 애를 먹었지만, 이곳에서도 그의 활약은 달라지지 않았다.

―상위 리그 탑 랭커의 자리를 위협할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어느 성계에서? 바로 무림에서!

―쿠 훌린, 라그나 로드브로크, 을지문덕. 세 사람의 닉네임 곁에 '몽연'을 추가해야 한다.

―참가한 모든 경기에서 보너스를 휩쓰는 몽연! 그의 질주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금세 상위 리그의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참가하게 된 성계 대항전.

'세상은 정말 넓구나.'

1경기에서 맞부딪히게 된 쿠 훌린은 정말 강했다.

상위 리그 최강자 중 한 명이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을 정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몽연은 쿠 흘린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크게 밀리지 않으며 싸웠고, 마지막엔 양패구상으로 끝나게 되었으니까.

비록 1경기의 승리를 챙기진 못했지만, 몽연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무림의 랭커는 세 명.

'주소월 님과 예천화 님이 계시니까 충분히 할 수 있어.'

남은 네 경기에서 승리를 챙긴다면 무림을 우승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맞이하게 된 2차전.

콰지지지지지지직!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뭐······ 야······?'

몽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한줄기 섬광이 몽연의 눈을 어지럽힌다.

'저게······ 상위 플레이어라고······?'

창을 휘두를 때마다 악마들이 녹아내린다.

그 모습은 지상에 강림한 뇌공雷公을 연상케 했다.

플레이어 렌.

요 근래 상위 리그에서 명성이 울려 퍼지던 신흥 강자.

실제로 보게 된 그의 무력은, 몽연이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정말 대단해.'

자신이 절대 보일 수 없는 위용.

아마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사방을 휩쓰는 뇌전의 칼날에, 단숨에 도륙당하겠지.

몽연의 마음에 허탈함이 피어올랐다.

―1경기와 2경기를 승리로 가져간 렌. "아직 우승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지금부턴 내 실력으로 도전하겠다."

'어?'

2경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생각해 보니, 플레이어 렌은 성계 대항전 특전을 받은 상태.

'그랬구나.'

그제야 그 압도적인 무위가 이해됐다.

감히 범접할 수 없게 느껴졌던 그 실력이, 사실은 특전 덕분이었다는 걸 알게 된 몽연은 안도했다.

자신이 약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이번 경기에서 보이는 게 진짜 실력이겠지.'

그리고 시작된 3경기.

꽈앙! 꽈앙! 꽈앙! 꽈앙!

―무, 무슨!

―말도 안 돼!

벼락이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전장이 강렬한 빛에 잠기고, 온 세상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눈으로도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

'이, 이럴 수가.'

지금 이 순간, 경쟁해야 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몽연은 경외심이 피어올랐다.

우리와는 격이 다른 플레이어였다.

절대 이길 수 없다.

몽연의 마음이 완벽하게 꺾여 나갔다.

―결국 세 경기를 내리 쓸어가며, 지구가 우승을 확정짓다.

―압도壓倒. 그 단어 이외에는 생각나지 않던 경기.

그리고 맞이하게 된, 4경기.

[4경기 9라운드]

[생존자 : 5명(부전승 1명)]

[렌 vs 몽연]

몽연은 자신이 상대하게 된 플레이어의 닉네임을 보고 눈을 번쩍 떴다.

'렌······.'

계속 올라가면 끝끝내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

하지만 몽연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길 생각은 버린다.

지더라도 저 대단한 고수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

그걸 통해 부족한 걸 채우고 싶다.

이번 싸움을 통해 무엇이라도 얻어내고 말 것이다.

"몽연이라고 하오. 한 수 부탁드리겠소."

그런 각오로 검을 들어 올렸다.

스르릉―

플레이어 렌이 창 대신 검을 꺼내 들었지만, 몽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강함을 손에 쥔 자가 멍청할 리 없으니까.

분명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기에 검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챙! 콰지직! 챙! 콰직!

'뭐지?'

렌과 격돌하게 된 몽연은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무당의 검이 가진 극치.

그의 검은 한 줄기 바람 같고, 도도히 흐르는 물 같다.

가지고 있는 다섯 개의 기술도 모두 부드러움을 살려줄 수 있는 것뿐.

그래서 렌의 무력을 어느 정도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 경기랑 같은 플레이어 맞아?'

하지만 뜻밖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검이 부딪히자, 렌에게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이전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대일에 특화되어 있던 것인가?'

몽연은 렌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챙! 콰지직! 챙! 콰직!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이 정도라면 충분히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몽연의 검이 더욱 빠르고, 부드러워졌다.

그때였다.

챙! 콰지직! 챙! 콰직!

'어······?'

렌의 눈빛이 달라지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급변했다.

순간 뒷목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울리던 쇳소리가.

"······!"

들리지 않았다.

몽연과 렌, 둘 다 격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검 끝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게······ 가능하다고?'

렌 역시, 자신의 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몽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낸다는 건 기교만으론 절대 불가능했으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검 좀 쓴다는 사람들은 전부 다 무당의 검을 터득했을 것이다.

'말도 안 돼.'

이건 기교가 아닌 감각의 문제였다.

검의 속도, 무게 중심, 향하는 방향 등.

그 모든 걸 감안한 상태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휘둘러야 한다.

어설프게 따라 하려 했다간 상대의 검에 맞아 죽기 딱 좋았다.

그런데 그걸.

후웅― 후웅― 후웅―

렌이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하······.'

격렬하게 싸우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몽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천재.

하늘 위의 하늘.

그런 수식어는 자신이 아닌, 이런 사람에게 붙어야 하는 말이었다.

서걱!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진다.

왼쪽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했다.

렌의 재능에 감탄하는 사이, 평정심이 흐트러진 것이다.

서걱! 서걱!

그때부터 몽연의 몸에 생기는 상처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아예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이었어.'

렌의 주무기는 창.

거기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을 주로 구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싸움은, 몽연에게 완벽한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걸 배웠다.'

몽연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서걱!

그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와 미친;; 이걸 이긴다고?

└중간에 검 부딪히는 소리 안 들릴 때부터 소름 돋았음 ㅁㅊ

└1경기랑 2경기까지만 해도 특전빨인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이가 없네ㅋㅋㅋㅋㅋㅋ

└3경기까지도 사실 스킬빨이라고 봐도 무방했음 ㅎ;;

└까도 까도 뭐가 계속 나오는 느낌ㅋㅋㅋ 진짜 상위 리그 경기 보면서 감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진짜 대박이네 ㅋㅋㅋㅋㅋ

└스킬빨, 템빨 제외하고 순수 기량으로 압살 ㄷㄷ 저런 애들이 보통 롱런하지ㅎ 어서 고위 리그 ㄱㄱ

└심지어 주무기도 아님 ㅋㅋㅋ 렌이 저런 스타일 구사할 줄 안다는 것도 처음 알았음; 강했다가 부드러웠다가~

└상식 외의 괴물이네 진짜ㅋㅋㅋㅋ 그냥 고위 리그로 올려라ㅋ 저런 애들은 여기서 노는 게 오히려 손해임ㅅㅂ

* * *

'후, 쉽지 않네.'

목이 분리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몽연.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테크닉이 너무 뛰어났다.

'흘리는 스킬도 가지고 있었지.'

몽연의 검에는 내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아마 보정을 받은 거겠지.

그럼에도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건 초감각과 스텟, 그동안의 경험 덕분이었다.

'전투가 더 길어졌으면 위험했을지도.'

중간에 그의 검술이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싸움이 더 길어졌을 것이다.

그랬으면 꼴사납게 창을 꺼내야 할 수도 있었고.

'이제 3명 남았군.'

앞으로 두 경기.

이제 준결승, 그리고 결승만 남은 상황.

띠링!

[4경기 10라운드 부전승 대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플레이어 '쿠 훌린' vs 플레이어 '을지문덕']

[두 플레이어 중 승자와 결승전을 치르게 됩니다.]

'또 부전승이군.'

뭐랄까, 이번에는 내게 일부러 부전승을 줬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상위 리그 최강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상황.

쿠 훌린과 을지문덕 중에서 이긴 상대와 내가 결승전에서 맞부딪히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이다.

'누가 이길까.'

사실, 내가 원하는 결승전 상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1분여 후.

띠링!

[잠시 후 11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다행히도 미카엘은 나를 오래 내버려 두지 않았다.

포근한 빛이 내 몸을 감쌌다.

띠링!

[4경기 11라운드]

[생존자 : 2명]

[맵 : 명예의 전장(소)]

[렌 vs 쿠 훌린]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직경 1킬로미터 정도의 원형 투기장.

그 너머로 거대한 관중석이 만들어져 있다.

높이가 50미터를 넘을 정도.

굳이 비교하자면, 이탈리아에 있는 고대 투기장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크기는 몇십 배 더 거대했지만.

'저들이······ 관객인가?'

관중석에는 엄청난 숫자의 인형人形이 빼곡하게 앉아있다.

등 뒤에선 후광이 흘러나오고, 모습이 흐릿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과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플레이어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연출이 제법 뛰어난데.'

그동안은 관객이 보이지 않기에, 그냥 의미 없이 죽고 죽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지다 보니, 내가 저들 앞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과연 결승전답다고나 할까.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드디어 만났군.'

100미터 앞, 하얀 장막에 둘러싸인 플레이어를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무척 강인한 인상의 사내.

부리부리한 눈을 뜬 채, 창을 들고 있다.

상위 리그에 올라왔을 때부터 나와 비교되던 플레이어.

1회차에도 고위 리그까지 무난히 버텼던 강자.

상위 리그라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존재.

'쿠 훌린.'

[경기 시작!]

시작 콜과 동시에, 나는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시작해 볼까.'

상위 리그라는 커다란 시험의 피날레를 장식할 때였다.

< 176화. 영혼의 반쪽(1) > 끝

< 177화. 영혼의 반쪽(2) >

"······."

철컥!

시작 콜과 동시에 오연한 표정으로 창을 들어 올리는 쿠 훌린.

내가 상대했던 녀석 중, 처음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녀석과 싸워보고 싶었지.'

나와 비슷한 부류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서로가 검 끝을 겨눠야 하는 상황.

대화 같은 건 무의미했으니까.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쿠 훌린]

[성향 : 저돌]

[근력 : 312(+?)] [민첩 : 273(+?)] [체력 : 300(+?)]

[정신 : 136(+?)] [지력 : 51(+?)] [마력 : 291(+?)]

[각성 능력 : <감각 증폭> <오뢰신창五雷神槍> <마력 상쇄> <특급살기> <고급박투술> <기아스> <최상급치료술>]

[업적 특전 : 빛의 왕자]

'대박인데?'

쿠 훌린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상위 리그 최강자로 언급되던 플레이어답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 중, 유일하게 천세운과 비벼볼 수 있을 정도의 스텟이었다.

'능력도 다양하네.'

내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감각 증폭.

처음 보는 능력이었지만, 이름만으로도 어떤 류의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초감각과 비슷한 거겠지.

"흡!"

그때, 짧게 호흡을 끊어 쉰 쿠 훌린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콰지지직!

'어?'

녀석의 몸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챙! 콰직! 콰지직!

서로의 창이 교차하자, 스파크가 사방으로 터졌다.

보기 드물게, 쿠 훌린 역시 뇌전 속성의 스킬을 다루고 있었다.

마력 상쇄 덕분에 데미지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창을 잡고 있는 손이 저릿저릿했다.

'이러니까 계속 비교됐던 거군.'

창을 사용하고, 뇌전 속성을 다루며, 성격이나 스타일도 비슷하다.

관객들 입장에선 나랑 쿠 훌린의 싸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두 사람 중 누가 이기나 궁금했겠지.'

한 명은 상위 리그에서 군림중인 최강자.

그리고 또 한 명은 하위 리그 역대 최고라고 불리며 승급한 신입생이었으니까.

"흡! 흐읍! 흡!"

후웅! 후웅! 챙! 콰직! 콰지직!

짧은 기합을 내뱉으며 격렬하게 밀어붙이는 쿠 훌린.

탐색전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초반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뇌전의 데미지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모습.

'얘도 마력 상쇄를 가지고 있었지?'

스킬로 가지고 있는 나와 다르게, 쿠 훌린은 마력 상쇄를 각성 능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혼자서 마력을 상쇄하는 방법을 깨우쳤다는 뜻.

스킬처럼 엄청난 효율을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슬롯 하나를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유용할 것이다.

챙! 콰직! 콰지직! 챙!

'스텟의 우위로 밀어붙여야겠군.'

서로가 마력 상쇄를 가지고 있어, 데미지가 제대로 안 들어가는 상황.

나는 자세를 낮추며, 빠르게 대쉬할 준비를 했다.

팟! 파바밧!

그러자 민첩하게 반응하며 뒤로 빠져나가는 쿠 훌린.

그 모습에 내가 몸을 세우자, 녀석이 다시 치고 들어왔다.

감각이 좋다 보니, 녀석은 지금 내 근육 움직임을 읽고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왠지 내 분신이랑 상대하는 것 같네.'

창술, 감각, 스킬, 거기다 구사하는 스타일까지.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상대했던 내 분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녀석이 가지고 있다는 감각 증폭이 초감각보다 뛰어나진 않을 것이다.

쿠 훌린에게선 마력장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내 하위 호환이랄까.

챙! 콰지직!

"······."

"······."

쿠 훌린의 창이 뱀처럼 휘며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나는, 역으로 녀석의 심장을 노리며 맞찔러 들어갔다.

채챙! 챙! 콰직!

'제법이네.'

감각이 좋다 보니, 수비가 무척 훌륭하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한 박자 더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여러모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흡! 흐읍!"

창을 짧게 쥔 채,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쿠 훌린.

'어림없지.'

나 역시 창의 리치를 조절하며 맞불을 놓았다.

챙! 콰직! 파바밧!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는 쇳소리와 뇌전의 스파크가 터지는 소리.

"습, 후우."

짧게 끊어 쉬는 숨소리, 그리고 흙바닥을 긁는 소리만이 커다란 경기장을 메웠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상대하기 힘들었겠는데.'

창술도 뛰어난 데다가, 보유하고 있는 능력들도 훌륭하다.

뇌전 속성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서 장기전도 힘들다.

게다가 감각이 좋아서, 상대의 강점과 약점 공략에 수월하기까지.

'슬슬 끝내볼까.'

하지만 쿠 훌린의 불행은, 그 모든 게 내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뇌신 강림을 발동시킨 나는, 그때부터 전력을 다해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망치게 놔둘 줄 알고?'

이상함을 감지한 쿠 훌린이 재빨리 뒤로 빠졌지만, 그것까지 감안해서 대쉬했던 것이기에 날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지금까진 쿠 훌린이 주로 공격하고, 나는 방어에만 집중했다면.

채애앵! 콰지지직! 챙! 콰지지지지직!

이젠 내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쿠 훌린은 수비를 견고히 하며 내 공격을 막기 바빠졌달까.

"······!"

서로의 역할만 바뀐 채, 똑같은 전투 양상이 펼쳐졌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평온했던 나와 달리 쿠 훌린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는 것.

채앵! 콰지직! 채앵! 챙!

창을 받아낼 때마다 녀석의 팔이 한 마디씩 꺾여나갔다.

'상위 리그에 들어온 초창기에 상대했다면 곤란했겠지만.'

쿠 훌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챙! 콰지지직!

녀석의 호흡이 무척 거칠었다.

그리고.

'이젠 내 하위 호환일 뿐이야.'

채애앵!

내 힘을 견디지 못한 녀석의 창이 경기장 한쪽으로 날아갔다.

제대로 마음먹고 싸우자, 단숨에 승패가 결정난 것이다.

'잘 가라.'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서 있는 쿠 훌린.

서걱!

녀석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띠링!

[4경기 <상위 리그 최강자> 결승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4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당신이 상위 리그의 최강자입니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나는 한동안 알림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이 상위 리그의 최강자입니다.

저 글귀가.

'나쁘지 않군.'

오랫동안 내 마음속을 맴돌았다.

―승리, 승리, 승리! 그리고 또 승리! 그 누구도 질주를 막지 못한다!

―스킬빨? 스텟빨? 왜, 이젠 테크닉빨이라고 해 보시지? 모든 면에서 플레이어들을 압도한 렌.

―감히 얘기할 수 있다. 상위 리그 역사상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라고!

└이제야 논란이 종결됐네ㅋㅋㅋㅋㅋ. 쿠훌린무새 새끼들은 앞으로 커뮤니티에 글 남기지 마라 ㅋㅋㅋㅋ

└편안~ㅋㅋㅋㅋㅋ

└렌이랑 붙는데 쿠 훌린이 이긴다고 하는 애들은 그냥 지능적 안티인 거 아니냐?ㅋㅋㅋ 어떻게 렌을 안 고를 수가 있는 거지?ㅋㅋㅋㅋ

└예전에 라그나 로드브로크랑 싸울 때 누가 봐도 쿠 훌린이 지는 각이었는데, 오히려 라그나가 압살당해서 그럼 ㅋㅋㅋㅋ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ㅋㅋㅋㅋ 렌이 가지고 놀다가 끝낸 수준이던데?

└이제 더 이상 렌 vs 쿠 훌린 이딴 거 안보이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쿠 훌린 vs 몽연 님들 누구 보시나여?

└아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만 좀 쳐 기어 나오라고 ㅋㅋㅋㅋㅋㅋ

띠링!

[지금부터 5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5경기 : 보물 쟁탈전(개인 PvP)]

[게임명 : 깃발 쟁탈전]

[맵 : 나블루스 화산섬(중)]

[관객 수 : 8,794,177명]

[알림!]

[앞선 경기들과 달리, 5경기엔 스킬 임팩트가 그대로 보여집니다!]

머리 위에 <7>이란 숫자가 쓰여있다.

근처를 둘러보니,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지형은 산지.

경사가 제법 있고, 계절은 여름인지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산의 꼭대기엔 구름이 걸려 있다.

높이가 제법 있······.

'뭐지?'

맵을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인지 나뭇가지가 어지러이 엉켜 있다.

흔적이 남기 쉬운 지역이라는 뜻.

'익숙한 이름이다 했더니.'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린 나는 피식 웃었다.

[승리 조건 : 경기 종료 시점에 붉은 깃발을 소유한 자]

[붉은 깃발을 만지면 자동으로 머리 위에 표식이 남게 됩니다.]

[붉은 깃발의 소유자를 처치하면 자동으로 붉은 깃발의 표식이 옮겨지게 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103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2:00:00]

[경기 시작 후 30분이 지날 때까지 붉은 깃발을 아무도 차지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집니다.]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천 명 가까이 되는 플레이어들이 피를 쏟으며 죽었고.

'오랜만이군.'

마지막에 빅터와 생사결을 펼쳤던 맵.

팀 투지에 들어오고서 처음으로 뛰었던 경기.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붉은 깃발전이 펼쳐졌던 곳.

나블루스 화산섬이었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붉은 깃발전이 열렸을 때와 비교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1회차까지 통틀어, 내게 처음으로 퍼오블과 파오블을 안겨 주었던 경기.

그렇기에 나한텐 제법 의미 있는 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은데?'

저 멀리, 지평선 끝으로 해가 지고 있다.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올 것이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이번 경기는 마음 놓고 플레이해도 되겠지.'

굳은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쭉 켰다.

우승에 대한 부담감, 거기다 MVP에 대한 걱정까지 내려놓은 상황.

아마, 이번 경기는 내가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치르는 경기가 될 것이다.

[경기 시작!]

'좀 돌아다녀 볼까.'

비탈진 산길.

나는 섬의 외곽 방향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는 것.

그건 심리적으로 어마어마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게다가 꼭 이겨야 하는 경기도 아니고, 만약 승리가 필요하다면 마지막 순간 깃발을 쟁취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걸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5분 정도를 돌아다녔을 때였다.

'쯧, 벌써 만났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300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 위에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

활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선 궁수인 모양이었다.

"······."

때마침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궁수.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죽이고 가야겠군.'

마음을 먹은 나는 창을 고쳐잡으며, 궁수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온달]

[성향 : 신뢰]

[근력 : 204(+?)] [민첩 : 219(+?)] [체력 : 198(+?)]

[정신 : 109(+?)] [지력 : 2(+?)] [마력 : 203(+?)]

[각성 능력 : <궁왕> <특급창술> <특급마나운용> <고급박투술> <고급추적술> <상급치료술>]

[업적 특전 : 졸본의 신성新星]

'어?'

이게 누구야.

악마의 눈으로 상대를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반가운 이름이었다.

긴급 미션 당시 파티의 리더를 맡았으며, 고결한 수정의 정보를 공유해 줬고.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순박한 미소가 잘 어울렸던 플레이어, 온달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담아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지지지지지지직!

흑막이 가리고 있어서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번 경기에선 스킬의 임팩트는 가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창을 들고 있으면서 뇌전을 뿜어대는 모습을 보면 온달 또한 나를 알아볼 것이다.

뿌드드득―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온달이 활시위를 끝까지 당겼다.

목표는 내가 있는 방향.

'날 못 알아봤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 나는 뇌전만 끌어올렸을 뿐, 아무런 공격 의사가 없는 상태.

게다가 이 정도 정보라면 온달 또한 날 알아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활을 겨눈다고?

핑-!

시위가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한 발의 화살.

하지만 내가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푹!

느릿느릿 날아오던 화살이 발치 언저리에 꽂힌 것이다.

'반갑다고 인사하던 거였군.'

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인사 목적으로 쏜 화살이지만, 숨겨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이 박힌 곳 이상으로 넘어오면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이곳은 콜로세움의 아레나 내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이다.

제아무리 이벤트 전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특히 친목 활동은 관객들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는다면, 그때 다시 보자고.'

내 등 뒤쪽.

마력장을 통해, 온달도 등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목걸이:몽환의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5% 상승합니다.]

[달빛의 힘으로 인해 <몽환의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1%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어느새 지평선 끝에 걸려 있던 태양이 사라지고, 나블루스 화산섬에 암흑이 내려앉았다.

머리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나를 반겨 주었다.

'정말 효과가 있나 본데?'

나는 왼쪽 귀에 걸린, 대천사의 눈물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모르게, 운이 좋아진 것 같았다.

< 177화. 영혼의 반쪽(2) > 끝

< 178화. 영혼의 반쪽(3) >

머리 위에 <6>이라는 숫자를 달고 있는 플레이어.

'또 밤이야?'

머리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을 본 안우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1경기와 3경기에 이어, 5경기까지 경기장엔 싸늘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후우, 운이 안 좋군.'

무려 12시간을 생존해야 하는 미션이다.

게다가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은 각 성계 상위 100명.

태양이 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최대한 외곽으로 빠져나가야겠어.'

안우정은 숲 곳곳에서 들려오는 벌레와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조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하위 리그에선 나름 네임드로 불렸던 안우정.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 하늘에 홀로 뜨는 태양이 되고 싶었는데.'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홀로 고고히 떠오르는 태양.

강렬한 빛으로, 저 하늘 가득한 별들을 모두 집어삼킨다.

닮고 싶다.

안우정의 마음에 언제부터인가 그런 마음이 싹터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젠장.'

미세한 인기척에 안우정이 곧장 자세를 낮췄다.

누군가가 안우정이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피할까?

안우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이동하려고 하면, 상대도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결국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것.

'침착해, 안우정. 할 수 있잖아.'

옅은 한숨을 내쉰 안우정이 자신의 애검, 레바테인의 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상대는 그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으니, 단숨에 달려들어 기습할 생각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상대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10미터.

'일격에 죽여야 해.'

안우정이 숨을 죽인 채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지금!'

터질 듯이 수축되었던 허벅지 근육이 순식간에 팽창한다.

그 탄력으로 어마어마한 가속도를 얻은 안우정이 전력을 다해 소태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채애애앵!

주변을 경계하느라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던 상대는, 안우정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처음부터 완전히 꼬였어.'

그 반발력으로 3미터가량 물러난 안우정의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

순간 무거운 정적이 숲속에 내려앉았다.

안우정도, 그리고 상대도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3미터라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긴장감.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니, 평소보다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훨씬 스텟이 높아.'

보이는 건 검을 쓴다는 것과, 머리 위에 쓰여진 <901>이라는 숫자뿐.

그럼에도 안우정은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기습을 막아낼 때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이 경기에서 자신보다 스텟이 낮은 플레이어는 찾기 어렵겠지만.

'후우, 하나씩 하자. 일단 압박해 나가는 것부터. 최대한 차분하게.'

화륵― 화르륵―

판단을 마친 안우정이 청염靑炎을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아, 뭐야. 삐―이라는 녀석이었어?"

갑자기 피식 웃으며 경계 자세를 푸는 901번.

살 떨리는 긴장감이, 순식간에 여유로움으로 바뀌었다.

"고작 지구 플레이어한테 괜히 쫄았네!"

녀석이 검을 휘- 휘- 돌리며 건들거렸다.

'지구 플레이어?'

그 모습에 안우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번 성계 대항전을 혼자서 씹어먹은 지구 플레이어 렌.

과연 녀석이 렌 앞에서도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었을까?

'완전히 무시하고 있어.'

이를 빠득 갈았다.

저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분했다.

앞선 네 경기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던 안우정.

죽음이란 건, 언제 느껴도 기분이 무척 더러웠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죽고 싶지 않았다.

온 세상의 피를 다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큰코다치게 해주지.'

각오를 다진 안우정이 901번에게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하핫! 덕분에 따뜻하겠는걸!"

화륵! 화르륵!

레바테인을 휘두를 때마다 청염이 사방을 휩쓸었다.

* * *

바스락― 바스락―

어지러이 엉켜 있는 나뭇가지를 치우는 소리.

"스읍, 후."

누군가의 호흡.

탁― 탁―

살금살금 이동하는 고양이 걸음 등등.

'9명이나 있어?'

주변에서 무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확실히 중심부 쪽이라서 그런지, 제법 숫자가 많은 모양.

그중 한 명은 내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슬슬 사냥을 시작해 볼까.'

창을 고쳐 잡은 나는, 다가오는 상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초반부터 싹쓸이한 다음, 깃발을 쟁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스락― 바스락―

"······!"

풀숲을 빠져나오던 플레이어가 나를 발견하곤 경계 자세를 취했다.

번호는 673번.

검과 방패를 들고 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오디세우스]

[성향 : 모험]

[근력 : 189(+?)] [민첩 : 193(+?)] [체력 : 177(+?)]

[정신 : 109(+?)] [지력 : 38(+?)] [마력 : 156(+?)]

[각성 능력 : <용맹의 검> <특급마나운용> <최상급박투술> <상급치료술>]

[업적 특전 : 대서사시의 주인공]

'이게 누구야?'

상태창을 본 나는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유독 낯익은 플레이어를 많이 보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앞서 마주쳤던 온달과 같이, 긴급 미션 당시 만났던 플레이어.

함께 연합해서 루에타 요새를 공략하던 파티의 파티장, 오디세우스였다.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지.'

물론 온달과는 다른 의미의 반가움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그때, 혼자 살겠다고 우리 파티를 버리고 갔던 녀석이었으니까.

물론 그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다.

목숨은 하나뿐.

자기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경기를 뛸 땐 누구도 쉽게 믿어선 안 되지.'

다만, 내가 녀석이 아니꼬웠던 건 딱 하나였다.

도망치지 않은 척 다시 돌아와서 고군분투하는 녀석이 가증스러워 보였기 때문.

'기회주의자.'

보통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는다면, 오디세우스 같은 녀석일 확률이 높다.

그런 이유로, 녀석을 꼭 한 번 손 봐주고 싶었다.

"흡!"

나와 눈이 마주친 오디세우스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달려들었다.

방패를 앞세운 채, 검을 뒤로 쭉 뺀다.

일격에 날 죽이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렇겐 안 되지.'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활성화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25% 상승합니다.]

카앙! 콰지지지직!

전력을 다해 창을 내리치자, 뒤로 튕겨 나가는 오디세우스.

"······!"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뇌전 공격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모양.

"자, 잠깐!"

오디세우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카앙! 카앙! 카앙! 콰지지직!

"잠, 윽! 잠시만······. 저, 오디세······. 윽!"

카앙! 콰지직!

한동안 공격을 퍼붓고 있자, 창날에서 강렬한 뇌전이 응축되었다.

'벽력.'

내가 가진 최고의 공격기.

상위 플레이어들에게 한해선, 필살기와 같은 기술.

뿜어져 나온 빛이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잘 가라.'

"젠장······!"

눈을 치켜뜨는 오디세우스.

녀석이 멍한 표정으로 창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게 녀석의 마지막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하하하하! 1경기의 복수다!"

"으윽! 제, 젠장······."

챙! 챙! 서걱!

어둠에 잠긴 숲속에, 붉은 선혈이 흩날린다.

무기를 겨눈 채 서로를 죽이겠다며 살기를 뿜어대는 플레이어들.

"자, 잠깐만! 마법사가 영창하고 있잖아! 녀석부터 죽이고 다시 싸우는 게 어때!"

"흥! 그래 놓고 또 뒤통수 칠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차가운 냉기를 동반한 마법이 떨어진다.

꽈과과과과광! 서걱! 서걱!

나무가 터져 나가고, 땅이 헤집어지며,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안우정의 로브를 두들겼다.

"이게 진정한 축제지! 나랑도 한번 놀아보자!"

'끝이 없어.'

그런 상황 속에서 안우정은 곤란함을 느꼈다.

거대한 불길을 보고,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끊임없이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킬을 안 쓸 수도 없고.'

현재 그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생존을 위해선 청염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

문제는 그가 뿜어내는 불길이, 어두운 밤에는 눈에 너무 띈다는 것이었다.

"흐흐, 가볍게 1킬 더 챙겨볼까?"

거대한 도끼가 날아든다.

두 명을 죽인 1,072번이 어느새 다가와 그를 노리고 있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눈빛.

후웅-! 후웅-!

아슬아슬하게 피할 때마다 들리는 파공음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쉽게 죽어줄 것 같아?'

자세를 낮춘 안우정이, 이를 앙다문 채 1,072번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도끼날이 느껴진다.

"헛, 이놈이!"

그건 곧.

'됐어!'

1,072번이 무방비 상태라는 뜻.

서걱!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녀석의 머리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허억, 허억."

양손을 무릎에 댄 채, 거칠게 호흡하는 안우정.

하지만 쉴 시간이 없었다.

"상위 리그에 막 올라온 녀석치고는 제법인데? 지구 출신은 원래 다 이런가?"

전방에서 또 한 명의 플레이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번호는 499번.

손에는 검과 방패가 들려있다.

주변에 제법 많은 플레이어들이 존재함에도, 녀석의 호흡은 무척 평온했다.

손쉽게 도륙하며 이곳까지 왔다는 뜻.

'젠장.'

"미안하지만 더 크기 전에 싹을 밟아놔야겠어. 삐― 같은 녀석이 또 나오면 곤란하거든."

그 말을 끝으로 499번이 안우정에게 달려들었다.

쉴 새 없이 싸우느라 지쳐 있는 상태였지만, 안우정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살아남기 위해서.

채앵! 화륵!

방패를 앞세운 채 안우정을 밀어붙이는 499번.

'크윽. 무슨 힘이······!'

그 평범한 대쉬에도 안우정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갔다.

스텟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상황.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쇄도하는 검과 방패를 피하는 것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던가.'

안우정의 마음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으며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왔는데.

분명 상위 리그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하, 생각보다 별것 아닌데?"

방패로 공간을 자르며,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던 499번이 이죽댔다.

그 모습을 본 안우정의 눈동자에서 독기가 철철 흘렀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순 없어.'

띠링!

[<스킬:염왕>이 활성화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안우정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스킬을 꺼내 들었다.

근력과 민첩 스텟 20% 상승.

마력 수치에 비례해서 불꽃 속성 데미지 최대 2배까지 증가.

대신에 체력 소모가 3배로 늘어난다.

'죽더라도 너만큼은 길동무로 데려가주지.'

아직 경기가 시작된 지 2시간밖에 안 된 시점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리스크가 큰 스킬.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한몸을 불사르는 한이 있어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효과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띠링!

[<스킬:염왕> <스킬:화신> <스킬:화룡의 분노>에 깃든 불꽃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팔찌:태양신의 진노>의 숨겨진 옵션 <연옥煉獄>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연옥煉獄>]

[불꽃에 심판의 힘이 깃듭니다.]

[한 번 붙은 불꽃은 대상의 모든 것을 태우기 전에는 꺼지지 않습니다.]

화륵! 화르륵!

'이 섬을 통째로 없애주겠어.'

안우정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무, 무슨!"

"끄아아아악! 무, 물! 물!"

"으아아아아악!"

숲의 중심부가 화마에 휩싸였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499번, 주변에서 난전을 펼치전 91번, 248번 등등.

그 누구도 청염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저 멀리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순간 깜깜한 숲속이 대낮처럼 보일 정도.

"레, 삐―이다!"

"젠장, 아직 3킬밖에 못 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뇌전의 폭풍.

그걸 본 플레이어들이, 안우정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 온다.

지옥의 겁화에 잠식된 숲의 중앙부에서.

'렌······.'

안우정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 * *

밤이슬이 맺히며 풀잎 향이 가득한 숲속.

"씨발! 5경기 정도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잖······."

창을 휘두를 때마다 서너 개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서걱!

몸속에서 뿜어져 나온 한 움큼의 피가 초록 잎을 가득 적셨다.

'잘 하면 여기서도 피의 각성을 발동시킬 수 있겠는데?'

띠링!

[<피의 각성>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92/100)]

어느새 피의 각성 스텍이 92포인트까지 채워져 있었다.

악마 사냥이 아닌 플레이어들과의 전투.

게다가 맵도 제법 넓어서 중간에 스텍이 초기화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플레이어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모두들 숲의 중심부로 모이고 있는 모양.

'이번엔 피의 강화가 각성됐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각성했던 능력은 피의 흡수와 섬전, 두 개뿐.

둘 다 내 예상을 크게 상회할 정도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만약 피의 강화가 발동된다면?

지금도 모든 스텟을 30%나 올려주는데,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상승하지 않을까?

'어서 8킬을 더 채워야겠군.'

마침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제법 많았다.

모두들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상태.

아마 벽력의 임팩트를 보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도망가 봤자야.'

멀어지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내게 존재하는 모든 특전들이 다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

내 민첩이 400을 넘어섰기 때문에, 저들은 절대 내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한동안 중심부 쪽으로 내달리고 있을 때였다.

'일단 한 명.'

300미터 전방에서, 등을 돌린 채 달아나고 있는 플레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번호는 277번.

"으으······ 제, 젠장!"

내가 뒤따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 277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서걱!

민첩 스텟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여기 있는 애들 다 잡으면 발동하겠군.'

맨 뒤 녀석을 처리한 나는, 그다음으로 도망가던 플레이어에게 따라붙었다.

그때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서걱! 서걱! 서걱!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100/100)]

[<피의 각성>이 발동합니다.]

[<피의 각성>이 <피의 강화>를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피의 각성> 능력의 효율이 100% 상승합니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60%까지 상승한다.]

'좋았어.'

도주하던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죽이자 등장한 알림창.

그걸 본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원했던 대로, 피의 강화가 각성되어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아졌어.'

대천사의 눈물에 들어있는 첫 번째 옵션.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유자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다.

확실히 대천사의 눈물을 얻은 뒤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효과가 있는 모양.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그나저나.

'피의 강화 효율이 2배라.'

이미 30스텍을 꽉 채우며 피의 강화 특전이 발동된 상태.

'끝까지 채우면 어떻게 되려나.'

그래서 무척 기대가 됐다.

60까지 다 채우면, 2차 특전이 풀릴 수도 있었으니까.

'일단 30명을 더 죽여야겠군.'

나는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3분이 지나기 전에 피의 강화 제물을 구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앙! 화륵! 화르륵!

'청염.'

저 멀리서, 파란 불기둥이 솟구친다.

숲의 중심부가 단숨에 불길에 휩싸였다.

'플레이어 룬이라고 그랬던가.'

게다가 주창범에게 재능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지.

순간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1회차엔 존재하지 않던 닉네임.

그럼에도 주창범을 제치고, 지구의 두 번째 네임드로 불리기 시작한 플레이어.

'한번 보고 와야겠군.'

나는 불기둥이 만들어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삐―! 나와도 한 번 겨뤄보······ 끄악!"

중간에 몇몇 플레이어가 등장했지만, 그 누구도 내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도착하게 된.

'이게 1티어급 스킬이라고?'

불에 잠긴 숲의 중심부.

띠링!

[<달의 메아리>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일렁이는 화염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보이는 건 눈동자와, 기다란 소태도 뿐.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안우정]

[성향 : 불굴→질투(진행 중)]

[근력 : 141(+?)] [민첩 : 148(+?)] [체력 : 144(+?)]

[정신 : 101(+?)] [지력 : 56(+?)] [마력 : 150(+?)]

[각성 능력 : <냉철> <칠전팔기> <고급검술> <고급마나운용> <상급박투술> <중급치료술> <악마표식>]

[업적 특전 : 염왕炎王의 화신]

상태창을 본 나는 멍하니 멈춰 섰다.

내가 이름을 제대로 본 건지, 아니면 헛것을 보는 건지.

'어······ 그, 그러니까······. 뭐, 뭐부터 해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갑자기 내 머리가 고장이 난 것 같다.

이다음에 해야 할 행동을 생각해야 하지만, 느껴지는 건 쿵쾅쿵쾅거리는 심장 박동과.

'이, 이게······.'

설렘, 불안함, 기대감, 초조함, 감사함, 슬픔······.

뒷목을 엄습해 오는 다양한 감정들뿐.

그 속에서 나는.

"안······ 우정······?"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 178화. 영혼의 반쪽(3) > 끝

< 179화. 영혼의 반쪽(4) >

"안······ 우정······?"

귀에서 삐- 하고 이명이 들린다.

새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안우정은 우리 형의 이름이고, 나는 현재 성계 대항전에 참가 중.

지금은 5경기 중이고, 깃발 쟁탈 미션임.

게다가 초인들만이 올라올 수 있다는 상위 리그.

따라서 우리 형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음.

그렇게 내 머리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놓았다.

'그래, 확률적으로 말이 안 돼.'

세상에 얼마나 많은 동명이인이 존재하던가.

물론 안씨 성이 흔한 것도 아니고, 거기에 남자 이름이 우정이라면 더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더욱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형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룬의 반응에서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눈앞의 검은 인영人影.

내 읊조림을 듣고 흠칫하는 플레이어 룬.

변조된 목소리, 하지만 평소 내가 기억하던 형의 말투였다.

'서, 설마.'

진짜 우리 형이라고?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제로에 수렴하던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형이 상위 리그에······ 올라왔다고?'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까만 그림자 위에 형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으로 확신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제대로 확인해야겠어.'

두근. 두근.

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혹시?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나, 나야. 우진이······."

그래서 처음으로 내 본명을 밝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발음이 어눌했지만,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만약 내 이름에도 반응한다면.

두근. 두근.

확실하게 우리 형일 테니까.

'제발······, 제발······!'

지금 이 순간, 내 닉네임이 렌이라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만약 안우진이 닉네임이었다면, 삐- 처리됐을 테니까.

그랬으면,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형이 아니면 어떡하지?'

기대, 불안, 우려 등등 다양한 감정을 담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 초조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6번, 플레이어 룬.

이름, 안우정.

잠시 정지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점점 커진 것이다.

"우진이? 아, 안우진? 내 동생?"

그 반응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형······."

우리 형이 맞다는 걸.

'진짜였어.'

└뭐야? 이게 무슨 상황임? 그니까 렌이랑 룬이 형제라는 거임?

└그런듯 ㅇㅇ 렌 본명이 안우진이고, 룬 본명이 안우정인듯. 두 사람은 형제라는 걸 이제야 안 것 같음 ㅋㅋ

└이야 ㅋㅋㅋㅋㅋ 상위 리그에 지구 출신 딱 세 명 있는데, 그중 두 명이 형제네 ㅋㅋㅋㅋㅋㅋ 저쪽 집안은 재능충들만 있나 본데?

└파..

└파..?

└팝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새끼네 이거 ㅋㅋㅋ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형!"

"동생아······!"

오랜만에 듣는, 형의 따스한 부름.

그 순간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갔다.

"형······. 흑흑······."

그대로 달려가, 형을 부둥켜안은 나는 목 놓아 울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감옥에서 2년, 1회차 10년, 그리고 2회차 2년.

무려 14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 형.

익숙한 체향이 맡아진다.

"흑흑······ 형······."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리워했던가.

꿈에서조차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

―동생아, 이 세상에서 피가 가장 비슷한 사람은 우리 둘이야.

―엄마는? 엄마가 우릴 낳아줬잖아.

―엄마도 물론 비슷하지. 하지만 너와 난 그보다 훨씬 더 닮아있어. 엄마와 아빠를 반반씩 섞어놓은 게 우리니까.

서로의 분신分身.

―그러니까 우린 영혼의 반쪽이야.

나를 꼬옥 끌어안은 형의 떨림이 느껴진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흑흑."

"형······."

내 오른쪽 어깨가 축축해졌다.

마찬가지로, 내 눈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 형의 어깨를 적셨다.

하고 싶은 말, 그리고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내 입은 같은 말만 반복할 뿐.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가슴 사무치도록,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울음소리에 잠겨, 뒷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도, 나도 정말 보고 싶었다, 동생아······."

품에서 떨어진 후, 형의 커다란 손이 다가온다.

그리고는 연약한 유리 공예품을 만지듯, 조심스레 내 얼굴을 쓰다듬는 형.

형의 손길에 담긴 체온을 느낄 수 없어, 처음으로 가면의 존재가 원망스러웠다.

"네, 네가 삐― 이었어······."

형 또한 같은 생각을 했던 건지, 더욱 오열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절절한 형의 목소리.

그 말을 듣자 순간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독하게 마음먹기 위해.

'정말 힘들었지······.'

숨겨두고 애써 억눌러두었던 감정이 튀어나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찾아오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중압감.

소중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압박감.

그럼에도 더 많은 누군가를 죽일, 힘을 갈망해야 한다는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너무 힘들었어, 형.'

또한 그 힘을 가지지 못했음에 절망했다.

평소 담담한 척했지만, 형을 만난 이 순간.

'너무······ 무서웠어.'

그 속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더 슬펐다.

형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상위 리그에 올라오기까지, 당신 또한 그 모든 것을 겪었을 것이기에.

당신도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은 채,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알기에.

형이 고통에 몸부림쳤을 걸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어차피 볼 수 없는 형의 얼굴인데.

그럼에도 눈물로 인해, 형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지금 이 모습이라도, 어떻게든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어.'

내 모든 감각이 형 한 명에게 집중된다.

흐느끼는 형의 떨림, 불안정하게 뿜어지는 숨결, 흐르는 눈물, 강렬한 심장 박동까지.

그 모든 게 고스란히 내게 쏟아졌다.

'형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흑막이 미치도록 미웠다.

살육의 광기와 살고자 하는 몸부림, 서로가 죽고 죽여야 하는 전장.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된 우리 둘.

이 암울한 상황처럼, 흑막이 우리 형제를 갈라둔 것 같았다.

"여길 왜 들어왔어, 왜! 도대체 왜! 이 바보야······. 흑흑······."

내 옷깃을 잡고 울분을 토하는 형.

당신이 훨씬 힘들었을 텐데도, 그 와중에 내 걱정을 하고 있다.

그 따스한 손길에 나는 어떠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리저리 흔들릴 뿐.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나는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있는 곳은 살육의 광기가 난무하는 전장.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형을 만났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

죄인인 나 따위가 누려선 안 되는 것들이다.

"형이랑, 엄마한테······."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팀 정의에 소속되어,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첫 경기에 출전했을 때.

나는 살기 위해 처음으로 피를 묻혔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었거든."

두 눈을 바치던 순간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내가 평생 누리며 살아온 것.

빛을 잃을 때의 그 공포는,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대가를 지불했다.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

"나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아······."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뭐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무언가가 마력장 끝에서 걸려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다섯 개의 각기 다른 무언가가 날아들고 있었다.

물, 불, 바람, 대지, 번개의 속성을 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역 마법!'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목표 지점은 숲의 중심부.

한마디로 우리 두 사람의 주위로 떨어지고 있다는 뜻.

'피할 수 없어.'

그 순간, 정지해 있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각 마법에 담긴 파괴력을 생각했을 때,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저 마법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제발······!'

"어어!"

그 순간 나는 형을 감싸 안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쐐애애애애애액!

그와 동시에 최고조에 달하는 파공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은데······!'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빛이 우리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크윽."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엄청난 위력에 한참을 튕겨 날아온 것 같았다.

'형은? 형은 어디 있지?'

나는 하나 남은 다리에 의존한 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근처에 내가 내팽개쳤던 창이 있어서, 사라진 한쪽 다리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었다.

[마력 상쇄율 : 50%]

"형!"

완전히 초토화된 숲의 중심부.

"혀어어어엉! 제발 대답해 줘! 제발······!"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나는 형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이렇게 헤어질 수 없어.'

아직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엔 온통 박살 난 나무의 파편들 뿐.

꿈틀―

'어?'

그때, 마력장을 통해 숲 한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제발. 제발······.'

나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아."

그리고 보게 된.

"아······."

끔직한 형의 모습.

"아아아······!"

심장이 철렁했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 안 돼······."

찢겨나간 두 다리.

덜렁거리는 왼팔은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

거기다 가슴엔 팔뚝만 한 나무가 박혀 있었다.

누가 봐도 즉사.

"아직 살릴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무시한 채, 인벤토리에서 회복의 물약을 꺼냈다.

"형, 눈 좀 떠 봐."

그리고는 구멍난 가슴에 들이부으며, 형을 흔들었다.

"눈 좀 떠 보라고!"

하지만 내 외침과 손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제바아아아알!"

찐득찐득한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해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단절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형의 머리 위에 있던 <6>이라는 숫자가 작게 점멸하며 사라진다.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던 흑막이 서서히 벗겨지고, 그 너머로 금이 간 악귀 가면이 보였다.

'왜 우리 형제한테만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가면에 손을 대자, 툭- 툭-, 가면이 조각조각나며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드러난 형의 맨얼굴.

살짝 그을린 피부에 가지런히 정리된 눈썹.

오똑한 코, 옆으로 넘겨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까지.

온갖 고생을 한 탓에, 범생이 같던 얼굴은 강렬한 인상으로 변해있다.

"하······. 하하하하!"

하지만 분명 형이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형의 얼굴이다.

형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염원했지만.

"하하하!"

이런 상황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

너무나 보고 싶고, 감사했던.

"하하하하하!"

그 사람이 죽은 모습에, 내면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죽여버리겠어어어어어!"

밤하늘에 대고, 크게 울부짖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뇌전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눈가가 아릿했다.

시뻘건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다.

'누가 쏜 거지?'

뜨겁게 끓어오르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얼음처럼.

아니, 그 아래의 극한으로.

띠링!

[<갱생更生> 능력을 사용합니다.]

[손상된 육체를 100% 회복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167:59:59]

치이이이익―

몸에서 연기가 나며, 사라졌던 다리가 빠르게 돋아났다.

찢어지거나, 긁혀서 피가 나던 부위들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힘이 부족해.'

내가 약해서 형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죽은 형의 모습이.

'내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

주변에서 각종 소음이 들려온다.

챙! 채챙! 챙!

"제법이군. 어디 이것도 받아보시지!"

"뭐 이딴 사기 스킬이 다 있어!"

격렬하게 움직이는 플레이어와, 싸우는 소리.

피부로 스며드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다시 만난 형인데.

그래서였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그래.'

미치도록.

정말 미치도록 원해.

'어디 얼마나 강한 힘을 주는지 보겠어.'

이 세상을 피에 잠기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이를 빠득 갈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힘의 일부를 허하노라.

내 분노에, 가면이 응답했다.

* * *

마계의 최하층.

"하하하하하하하하!"

콜로세움 시스템에 강제로 접근하여 성계 대항전을 보고 있던 왕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왜 그러는가."

그 모습에 곁에 있던 한 남성이 물었다.

왕.

마계의 지배자.

그런 존재를 앞에 두고도, 무척 친근한 말투.

하지만 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곁에 있던 다섯 존재를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베리알, 릴리스, 바알, 사탄, 레비아탄. 내 친구들이여."

나태의 베리알.

질투의 레비아탄.

색욕의 릴리스.

식탐의 바알.

분노의 사탄.

왕의 부름에 다섯 군주가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블라디미르. 아니, 마몬이 깨어났다."

< 179화. 영혼의 반쪽(4) > 끝

< 180화. 영혼의 반쪽(5) >

―내가 가진 힘의 일부를 허하노라.

띠링!

[<스킬:열반>이 이상 기운을 감지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

정신 스텟이 빠르게 깎여나간다.

그와 동시에, 가면에서 흘러나온 알 수 없는 기운이 내 몸을 타고 내려간다.

싸아아아아아아아―

피의 각성 때와는 다른 느낌.

"······!"

피부, 뼈, 혈관, 근육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간 기운이, 이내 경동맥을 타고 머리 쪽으로 향했다.

―블라디미르.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은 자.

―그리하여 마몬이라는 신神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

―너는 마몬이다.

[<스킬:열반>이 이상 기운을 감지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개소리 하지마. 난 안우진이니까.'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포 하나하나가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블라디미르.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은 자.

―그리하여 마몬이라는 신神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

―너는 마몬이다.

누군가가 내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빨리 힘이나 주고 꺼져.'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내 몸에서 들끓고 있는 분노가 너무 거대했으니까.

띠링!

[계약에 따라 <가면:블라디미르의 열망>의 봉인이 일시적으로 해제됩니다.]

[<마력>이 <마기>로 전환됩니다.]

[마력 : 247(+5)(+122)] [마기 : 33]

[<피의 회복> 능력의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회복율 1% → 10%]

[<악마의 눈> 능력의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신> <군주> <천사> <악마>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의 강화> 능력의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한계 강화치 60%(1차 피의 각성) → 100%]

[<피의 흡수> 능력의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극소량의 스텟 흡수 → 소량의 스텟 흡수]

[<피의 각성> 능력의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 → 모든 능력을 강화]

[이미 발동되어 있으므로, 2차 <피의 각성>부터 적용됩니다.]

[등급 : 준초월]

싸아아아아아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마기.

'뭐야?'

상태창을 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이따위 대가로 내 몸을 가져가려고?'

이를 빠득 갈았다.

안 그래도 형이 죽은 것 때문에 열 받아 죽겠는데, 같잖은 대가로 내 몸을 가져가려는 가면이 무척 거슬렸다.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초월 리그의 챔피언으로 만들어 준다면, 얼마든지 주지.'

그게 가능하다면.

그래서 소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까짓 몸뚱이.

얼마든지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 쪽에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

그러자 갑자기 말이 없어진 가면.

[마력 : 213(+5)(+122)] [마기 : 67]

'어디냐.'

가면을 닥치게 만든 나는 살기를 내뿜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을 죽인 건 마법사.

하지만 누가 시전한 마법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이 섬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을 싸그리 도륙할 생각이었다.

내게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앗아간 원흉이었으니까.

'편하게 죽여줄 순 없지.'

고통 속에서 죽어간 형.

적어도 형이 당한 것, 그 이상은 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일단 두 다리를 자르고 한쪽 팔을 뽑아낸 뒤에.

그때부터 내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꽈아아아아앙!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굉음이 울렸다.

강한 충격파가 머리카락을 뒤흔든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보일 수 없는 위력.

'12시 방향.'

마력의 유동을 체크한 나는 굉음이 터진 곳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싸아아아아―

바닥을 박찰 때마다 끈적끈적한 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핫핫핫! 진정한 피의 축제를 즐겨보자고!"

"별것도 아닌 것들이 꼭 입을 나불대지."

가는 길에 전투를 펼치고 있는 서너 명의 플레이어들을 마주쳤지만, 나는 모두 무시했다.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본 결과,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

[마력 : 199(+5)(+122)] [마기 : 81]

"푸핫! 쫄았군."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자 오히려 내 앞을 가로막는 플레이어들.

'거슬리니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헉······!"

"젠장, 하필 삐―를 건들다니!"

'모두 꺼져.'

서걱!

단 한 번의 창질 만으로 녀석들을 모조리 베어 넘긴 나는, 마법사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마력 : 199(+5)(+122)] [마기 : 81]

그리고 찾게 된.

[새 생명의 불꽃을 담아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의 원수.

전방 100미터 앞에서 991번이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나는 창대가 으스러지도록 쥐며, 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발할라, 미카엘의 집무실.

그곳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미카엘님, 플레이어 렌에게서 마기가 검출되었습니다!"

"이, 이럴 수가······! 마기 폭주! 잠시 후 타락화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빨리 척살조를 보내야 합니다!"

성계 대항전이 막바지에 잇따르며, 한숨 돌리고 있던 천사들이 홀로그램을 보며 소리쳤다.

찰그락― 찰그락―

"어서 지시를!"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 무장을 마친 일부 천사들이 출격할 준비를 했다.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미카엘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자, 2급 지천사 파사엘이 그녀를 불렀다.

"서둘러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타락화가 완료될 것 같습니다!"

"지옥으로 넘어가기 전에, 지금 당장 죽여야 합니다!"

다른 휘하 천사들도 계속해서 미카엘을 재촉했다.

'후.'

그 모습에 옅은 한숨을 내쉰 미카엘.

펄럭! 싸아아아아아―

열 쌍의 날개를 활짝 편 그녀가 신성력을 내뿜었다.

"모두 조용."

"······."

"······."

"······."

아수라장이던 집무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지금부터 지시를 내리겠다. 키샤엘."

"영원한 빛을 위하여! 3급 좌천사, 키샤엘!"

"렌이 마기를 뿜는다는 걸 관객들이 모르게 처리하라."

"······명을 받듭니다."

"카서디엘."

"빛을 수호하라! 3급 좌천사, 카서디엘!"

"금지어에 마기라는 단어를 추가하라."

"······알겠습니다!"

"파사엘."

"평화를 위해. 2급 지천사, 파사엘."

"섬에서 흘러 나갈 마기를 신성력으로 정화하라."

"······수행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미카엘의 지시에, 천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모두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타락화는 무척 민감한 문제.

게다가 최근, 치천사 한 명이 타락하면서 전보다 더 예민해져 있는 상황.

미카엘의 명령을 납득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정작 지시를 내린 그녀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미카엘이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 건 하나였다.

―성계 대항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거라.

모든 이 위에 홀로 계시는 분.

단 한 명의 초월자.

사전에 아버지께서 지시하신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마기가 새어나가는 건 차단했고. 남은 건 플레이어들 입단속이 문제인데······.'

아버지의 말씀은 절대적.

그 어느 누구도 거슬러선 안 되는, 진리의 말씀.

그렇기에 그녀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이 놓친 건 없나 체크할 뿐이었다.

'그 가면 때문이겠지.'

사실, 그녀는 이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렌을 직접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이질감.

그건 보통, 마기를 숨기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께서 그간 플레이어 렌을 주시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걸, 그분이 모를 리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홀로그램 너머로 성계 대항전을 체크하던 미카엘이 눈을 번쩍 떴다.

아낌없이 마기를 방출하던 렌.

그가 돌아다니며 플레이어들을 학살한다.

너무나 평범한 플레이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당연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타락화가······ 멈췄어?'

경기장에서 튕겨 나가질 않고 있었으니까.

그건 즉, 타락화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아직 기회가 있어.'

현재 마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

천계 입장에서, 플레이어 렌은 소중한 전력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고위 플레이어의 숫자가 부족할 때는 더욱 그랬다.

당장이라도 고위 리그에 올려보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가 우승과 MVP를 걸고 승급샷을 요구했을 때, 아무 부담 없이 받아들인 거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오염을 정화시키······. 아······.'

생각을 이어가던 미카엘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래서였구나.'

천계에서 치유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단 셋.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아리엘.

그런데 아리엘은 신으로 승격한 후, 아세리안이라는 이름으로 팀을 운영 중이다.

플레이어 렌은 아세리안의 팀에 소속되어 있고.

'미리 다 안배를 해두신 거였어.'

갑작스러운 아리엘의 프리.

그와 동시에 영입된 렌.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내다보신 게 분명했다.

'나는 마기 억제에만 집중하면 되겠군.'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은 미카엘은, 그때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주시했다.

* * *

[마력 : 58(+5)(+198)] [마기 : 297]

"미, 미친······! 끄아아악!"

공허한 숲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 소리.

'더 크게.'

서걱!

"끄아아아악! 도,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고작 성계 대항······ 끄으으으으윽!"

"······."

서걱!

"아아아악! 이,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고. 씨바아알! 아아악!"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든, 나는 쉬지 않고 단검을 움직였다.

그 소리를 들은 몇몇 플레이어가 다가왔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단숨에 죽여버리곤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서걱!

"제, 제발 그만······. 내가 잘못했어. 제발, 부탁이야. 제발! 끄아아아악!"

털썩―

코를 잘라내는 걸 마지막으로, 파르르 떨던 녀석이 이내 축 늘어졌다.

띠링!

[플레이어 '릭'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상태창이 녀석의 죽음을 알려왔다.

'후우.'

이걸로 끝났다.

생존자의 숫자는 일곱.

남은 시간은 40분.

└렌 왜 이렇게 오버함? 콜로세움에서 누가 죽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ㅋㅋㅋ 거기다 다시 살아나지 않음? 저렇게까지 오버할 이유가 없는데?

└ㅇㅈ 너무 급발진해서 나도 모르게 읭? 했음 ㅋㅋㅋㅋㅋ

└가족과 관련해서 트라우마가 있나 보지 ㅋ

└다들 반응이 왜 이럼? 난 충분히 눈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 ㅇㅇ 커뮤니티로 부모욕만 들어도 기분 나쁜데, 실제로 죽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 이성 안 잃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음?

'미친 짓을 했군.'

마음속 가득했던 분노를 털어내자, 머리가 이성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력이 마기로 변환되던 것도 뚝 끊겼다.

'너무 흥분했어.'

성계 대항전이라는 이벤트전.

거기서 플레이어들을 고문했으니,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마 내 이미지가 많이 깎여나갔겠지.

'상관없어.'

오히려 이벤트전이라서 더 감사했다.

죽었던 형이······ 다시 살아날 테니까.

'형이 룬이었구나.'

마음 한 켠에 상반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찾아왔다.

두 눈을 바쳤던 나와 다르게, 본인의 재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내가 직접 키웠던 주창범이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강하다는 대견함.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형이 겪었을 고통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죽음의 기로에 서야 한다는 안타까움.

'다시 만날 수 있어.'

형의 닉네임도, 그리고 소속된 팀도 알고 있다.

성계 대항전이 끝남과 동시에, 형을 영입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말 거야.'

그러려면 일단, 이 경기가 끝나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현재 생존자 수 : 6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39:17]

이제부턴 사냥을 시작할 시간.

현재 내 상태는 체력 93%, 그리고 모든 특전이 켜져 있다.

그 말은 즉.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510(+5)(+174)] [민첩 : 591(+5)(+403)] [체력 : 395(+5)(+234)]

[정신 : 130(+5)(+86)] [지력 : 253(+5)] [마력 : 58(+5)(+198)] [마기 : 297]

각성한 피의 강화 특전으로 인해, 모든 스텟이 +100% 상승했다는 뜻.

상위 리그 랭커들의 평균 근민체가 300인데, 내 근력과 민첩은 500이 넘는다.

"뭐, 뭐야? 어떻게 저런 움직······!"

"말도 안······."

서걱! 서걱! 서걱!

남은 녀석들이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띠링!

[현재 생존자 수 : 1 명]

[5경기 <깃발 쟁탈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12:43]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플레이어 '렌']

[5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끝났군.'

눈앞의 상태창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승, MVP, 고위 리그의 승급샷.

성계 대항전에서 내가 얻어야 할 세 가지를 모두 챙겼다.

[1위 : 지구 / 5승]

[2위 : - / 0승]

[지구가 성계 대항전 최종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보상으로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을 획득합니다!]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

[성계 대항전에서 우승한 성계에게 지급되는 특전.]

[적용 시 모든 스텟이 + 17% 상승합니다.]

[MVP 플레이어 선정은 추후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스페셜 이벤트-성계 대항전을 종료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거기다 가면이 궁극적으로 내게 원하는 것도 알아냈다.

'내 몸을 뺏으려는 거였지.'

90%나 상쇄해주는 열반 스킬을 믿고 있었지만, 정말 아슬아슬했다.

정신 스텟이 39포인트까지 깎였으니까.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은.

'어서 팜으로 가야 해.'

우리 형을 만났다는 것.

'다시 만날 수 있어.'

팜으로 날 데려갈 하얀빛이 처음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

안녕하세요, 하루하온입니다.

연재되었던 179화에 대하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안우정에 대한 안우진의 감정.

그리고 독자님들이 생각하는, 안우정에 대한 안우진의 감정에 괴리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건 제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탓입니다.

몰입을 깨트리게 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 노력하는 하루하온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180화. 영혼의 반쪽(5) > 끝

< 181화. 영혼의 반쪽(6) >

띠링!

[<성계 대항전 특전>이 해제됩니다.]

[<스킬:열반>이 <스킬:명경지수>로 퇴화됩니다.]

[달빛이 사라져 <목걸이:몽환의 달빛> 능력이 비활성화됩니다.]

[<스킬:명경지수>가 비활성화됩니다.]

[<소모품:고결한 수정> 을 획득하셨습니다.]

두근― 두근―

팜으로 돌아오자, 내 예상과 다르게 아세리안이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이야.'

그 모습에 나는 안도했다.

만약 모든 플레이어가 나와서 축하한다고 나를 방해했으면, 감정 컨트롤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을 보고 싶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마력 : 19(+5)(+198)] [마기 : 336]

"고생 많으······."

"아세리안 님. 혹시 우리 형, 아니, 룬을 영입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일단 그 부분은······."

"지금 제 정산율이 30프로죠? 아니, 20프로던가······. 하여튼 그걸 더 올려드리겠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플레잉코치 계약도 해제해 드리겠습니다."

"부족하다면 다른 것······. 그러니까, 제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골드가······."

'젠장, 젠장!'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고 있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질 않아, 무척 답답했다.

'분명 경기 직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제법 굴러 갔던 것 같은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현재 내 상태 때문에 짜증이 났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 형을 다시 볼 수도, 못 볼 수도 있으니까.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일단 아세리안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 상황에서 뭘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차갑게 굳어지는 아세리안의 표정.

"진정하세요."

"······."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어떻게든 말을 쏟아내려던 나는 멈칫했다.

처음 보는 싸늘한 얼굴.

'후우. 침착하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하면 팀의 주인은 아세리안.

좀 더 이성적으로 그녀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정색하던 아세리안이 이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요. 경기 내내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평소와 같은 따뜻한 목소리.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일단 팀 불굴 쪽에 룬을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는 전달한 상태예요. 답변이 오면 바로 전달해 드릴게요."

"아, 감사······."

"그리고 안우진 님은 현재 무척 위험한 상태예요. 형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랬죠?"

"맞습니다."

"그럼 지금 안우진 님이 어떤 상태인지도 아시겠네요? 형을 영입했는데 타락해버리면 무슨 소용이에요?"

"······."

"아니, 오히려 타락한 안우진 님을 죽이기 위해 형님분이 검을 들어올려야 할 수도 있어요. 형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그런 상처를 주실 건 아니죠?"

[마력 : 14(+5)(+198)] [마기 : 341]

아세리안의 말에 온몸이 싸늘해졌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이미 어머니와 형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상황.

여기서 또 형을 괴롭게 한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해.'

두근― 두근―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산소가 두뇌까지 전달되자 조금은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자, 그럼 마기의 오염을 정화하러 가실까요?"

고개를 숙이자, 아세리안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내 뒤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창범 씨, 카이로시아 씨. 고생 많았어요. 제대로 반겨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여신님. 일단 형 치료가 먼저죠."

"잘 다녀왔습니다. 저흰 괜찮으니까 어서 가보셔도 돼요."

그러자 들려오는 주창범과 카이로시아의 목소리.

내가 엄청 흥분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뒤에 있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

[마력 : 9(+5)(+198)] [마기 : 346]

공터에 수백 개의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다.

각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각종 식기들.

아무래도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던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아세리안이 모두 들여보낸 것 같았다.

'민폐를 끼쳤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세리안을 따라 휴식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 어서 누우세요. 시간이 없어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침대 위에 몸을 뉘자, 내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올려놓는 아세리안.

띠링!

[<소성천사銷聖天使의 권능>이 마기를 제거합니다.]

[마력 : 9(+5)(+198)] [마기 : 346]

[마력 : 58(+5)(+198)] [마기 : 297]

[마력 : 132······.]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피부, 뼈, 혈관, 근육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시원해.'

두근― 두근―

뜨겁게 불타오르던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세차게 뛰던 심장 박동이 차분하게 변해갔다.

마기가 마력으로 빠르게 변환되었다.

그리고.

―다음엔 더 많은 힘을 안겨주겠노라.

띠링!

[계약이 해제되어 <가면:블라디미르의 열망>이 봉인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의 리미트가 설정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의 리미트가 설정······.]

가면의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가면의 각성이 해제되었다.

'어이가 없군.'

나는 가면의 말에 코웃음 쳤다.

더 많은 마기로 내 몸을 차지하겠다는 걸, 잘도 포장해서 얘기한다.

다음에 계약하는 순간.

'내가 뺏기는지, 아니면 네 놈의 힘이 뺏기는지 한번 해 보자고.'

녀석의 힘을 모두 빼앗아 올 것이다.

띠링!

[마기 제거가 완료되었습니다.]

[마력 : 294(+5)(+137)]

알림창이 뜸과 동시에, 아세리안에게 흘러들어오던 기운이 멈췄다.

'피곤하군.'

짙은 피로감이 찾아왔다.

5경기를 연달아 뛰었고, 눈물을 펑펑 쏟다 보니 진이 다 빠진 듯 했다.

눈이 사르르 감겼다.

"고생 많았어요. 다 잘될 거예요."

아세리안의 따스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마계 제20군단의 군단장, 고위 악마 키마리스.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갑작스러운 명령에, 모든 병력을 무스펠하임 최전방으로 집결시킨 상황.

총공세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규모인데, 이상하게도 천계 측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삼지옥을 모두 포기하려는 듯이.

'지금 진격하면 분명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즉시 진격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기다렸는데,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하나였다.

―군단장 키마리스는 지금 즉시 판데모니엄으로 들어올 것.

'대체 왜?'

이 좋은 기회를 어째서 날려 먹는 것인가.

키마리스는 천계에서 쌓아 올린 요새와 성들을 보며, 탄식했다.

평소라면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을 저것들을, 오늘만큼은 쉽사리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도착하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펄럭― 펄럭― 탁!

판데모니엄에 착지한 키마리스는 곧장 오만의 궁전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키마리스 님."

"부르심을 받고 왔다."

"예,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음."

거대한 문을 열어주는 근위 악마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키마리스가 본인의 복장을 점검했다.

그리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새로운 질서를! 제20군단장 키마리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대전 안에 있는 존재는 총 여섯 명.

'군주님들이 모두 모여 계신다고?'

그들을 확인한 키마리스는 당황했다.

각 거점을 다스리는 저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경우는 무척 드물기 때문이었다.

'대형 사고가 터졌군.'

무거운 존재감이 키마리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여섯 존재는 키마리스의 복귀 신고를 들은 체도 안 하며 자기들끼리 얘기할 뿐이었다.

"······끝끝내 타락하지 않았군."

"왜 타락하지 않은 거지?"

"아버지께서 개입하신 것 아니겠나."

"흥, 그분은 지금껏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진정하세요. 지금은 왜가 아닌, 앞으로의 계획을 새롭게 짜야 할 때예요."

"동감. 근데 귀찮으니 아무 생각도 하기 싫군."

'타락? 아버지?'

곁에서 쥐 죽은 듯이 서 있던 키마리스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다.

병력을 무스펠하임 최전방에 집결시켰던 건 오늘 타락할 누군가를 데려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계 쪽에선 아무런 대응이 없었던 거군.'

한마디로 천계는 누군가의 타락화를 예상하고, 조치를 취했다는 뜻.

그랬기에 아무 움직임도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높은 존재기에?'

거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여섯 존재가 이렇게 신경 쓸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존재라는 것.

네 명의 치천사, 혹은 열두 주신급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숙주가 계속해서 성장해 가고 있는 이상, 언젠간 우리의 손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단 그릇이라도 데려오도록 하지."

"그릇이 레비아탄의 신물을 쥐고 있던가?"

"그렇다. 최근 경기를 보니, 많이 잠식된 것 같더군."

"좋아. 그럼 나는 그릇을 회수할 준비를 하겠다."

'그릇? 숙주?'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키마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얘기하는 걸로 보아, 열두 주신이나 치천사는 아닌 것 같았기에.

'그게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지만, 그를 신경 쓰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

키마리스가 얼른 정자세를 유지했다.

여섯 존재 중 하나, 분노의 군주 사탄이 키마리스에게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키마리스."

"예, 군주시여."

"집결한 병력을 해산시켜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정예를 무스펠하임 전방에 배치하라. 단, 아주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옛!"

"그만 나가보도록."

여섯 군주를 향해 절도있게 경례한 키마리스가 대전의 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오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복잡해진 기분이었다.

* * *

좁은 방.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에반게리온 브로마이드를 뒤로하고, 나는 곧장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으으, 이러다 늦겠다.'

일을 빼지 못해서 엄마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

결국 형의 졸업식을 축하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꽃도 쥐여주고 사진도 찍어 줘야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줌마. 혹시 꽃 한 송이도 파나요?"

"졸업식에 가져가려는 거지? 그럼 한 송이는 보기 좀 그럴 텐데?"

꽃집 아줌마의 말에 나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수중에 있는 돈은 오천원뿐.

주변에 한 아름 만들어져 있는 꽃다발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 그, 그래도 한 송이만 주세요!"

돈을 쥐여주고, 도망치듯 꽃집을 빠져나온 나는 형이 다니는 고등학교로 향했다.

'학교 진짜 크다······.'

처음으로 들어온 고등학교는 신세계였다.

운동장도 내가 다니는 중학교보다 훨씬 넓었고, 건물도 무척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3학년 7반 교실을 찾아간 나는 곧바로 형부터 찾았다.

입구에는 꽃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까치발을 든 채 교실 안을 보고 있었다.

'어, 왜 없지? 분명 3학년 7반이라고 그랬는데?'

사람들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교실 안을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고생 많았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모두, 졸업 축하한다!"

"지금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졸업장 수여가 끝나고, 교실에 있던 고등학생 형들이 우르르 빠져나온다.

"병수 형!"

그 사이에서, 형의 친구를 발견한 나는 황급히 다가갔다.

"병수 형, 우리 형은요?"

"어, 우진아. 우정이? 요 며칠 동안 아예 학교 안 나왔는데?"

"네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침부터 부지런히 준비하고, 없는 돈 쪼개서 꽃까지 샀는데······.

'피시방이라도 갔나?'

아무리 그래도 졸업식을 안 나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나는 허탈해하며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후우.'

손에 쥔 꽃 한 송이가,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

중학교 정문 앞에서는 한 아저씨가 돗자리를 깔고 꽃을 팔고 있다.

'여기도 오늘 졸업식 하나 보네.'

졸업 시즌답게, 주변에는 꽃을 든 사람들이 무척 많이 보였다.

그때였다.

"이건 프리지아예요.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이 있죠."

"와, 좋네요. 이거 주세요. 얼마예요?"

"2만 원입니다! 꽃이 정말 예쁘죠?"

'어?'

익숙한 목소리.

정문 앞에서 꽃을 팔고 있는 아저씨.

아니, 젊은 남자.

"형······?"

원래대로라면 졸업식에서 꽃을 받아야 할 사람.

중학교 앞에서 꽃을 팔고 있던 아저씨는, 자세히 보니 우리 형이었던 것이다.

"어······."

눈이 마주치자, 형이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받아 챙기던 2만원이 땅바닥에 흩날렸다.

"여기서 뭐 해?"

나는 황급히 형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기서 꽃을 판다고? 자기 졸업식 날에?

'도대체 왜?'

"그, 그게······."

못 볼 꼴을 보여줬다는 듯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는 우리 형.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내가 패딩을 입고 싶다고 해서?'

며칠 전, 형한테 너무 추워서 나도 패딩이 입고 싶다고 했다.

사실, 핑계였다.

추위는 무척 익숙했으니까.

다만, 친구들이 입고 다니는 게 부러웠을 뿐.

'아, 괜히 미안하네.'

나는 피식 웃었다.

그저 툭 내뱉었던 가벼운 한마디였을 뿐인데.

앞으로는 안 그래야지.

"······!"

내 시선을 피하던 형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당황이라는 감정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뭐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뺨을 만져보니.

'어······?'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띠링!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MVP 플레이어로 '렌'이 선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보상으로 <보석:시간의 각성>을 획득합니다!]

"아, 일어나셨······ 앗!"

내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본 아세리안이, 다가오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봐서는 안 되는 걸 봤다는 표정.

'하.'

가면 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바보 같은 인간.'

자기 졸업식 날, 동생을 위해 다른 학교에서 꽃을 팔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과연 형은 그때······.

'정말 미안.'

어떤 기분으로 남의 졸업식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자기가 주인공이었어야 할 그 날.

과연 어떤 심정으로······.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형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언제나 나를 위해 희생했기에.

그래서 더 미안하고, 죄송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안우진.'

서둘러 눈물을 닦은 나는 일부러 피식 웃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아세리안에게 말했다.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혹시 팀 불굴에서는 답변이 왔습니까?"

내 물음에 안절부절못하는 아세리안.

"그게······."

"······."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NFS. 판매 불가 통보가 왔어요."

< 181화. 영혼의 반쪽(6) > 끝

< 182화. 해방(1) >

"NFS. 판매 불가 통보가 왔어요."

'후우.'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뜸들이는 그녀의 반응에서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팀의 핵심 플레이어를 쉽게 내줄 리가 없지.'

"······알겠습니다. 일단 내일 얘기하시죠."

"아, 그게······."

"괜찮습니다. 아직 좀 피곤해서요."

피곤하다기 보단, 아직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컸다.

지금 상태라면, 또 욱! 하고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푹 쉬세요."

내 대답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휴식의 방을 나서는 아세리안.

그녀의 뒤를 이어 나도 숙소로 향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잠부터 잘 것이다.

형을 만나고부터, 이성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들었으니까.

'일단 감정을 추슬러야 해.'

감정에 휘둘려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특히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붙는 콜로세움에서는 더욱 더.

'엄마······. 형······.'

침대에 몸을 뉘인 나는, 금세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시각을 확인하니, 오후 한 시였다.

전날 저녁 6시쯤부터 잤으니까 무려 열아홉 시간가량을 잔 셈.

"좋은 아침입니다, 안우진 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숙소를 나서자 플레이어들, 그리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모두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준 나는 곧장 명상실부터 찾았다.

생각이 복잡할 땐 명상만 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후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으로 얀 무드라 자세를 취한 나는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시작했다.

'집중하자.'

끊임없이 상념이 날아들었다.

언제나 날 가장 먼저 생각해 준 엄마.

당신의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홀몸으로 두 형제를 키워 낸.

그리고 그 고생의 대가를 갚을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난.

우리 엄마.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흐트러지지 말자.'

항상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고, 힘이 되어 준 우리 형.

때론 아버지가 되어 꾸짖고, 힘들 땐 형으로서 조언을 해 주고.

외로워할 때면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우리 형.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할 수 있어.'

가족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 목표는 더욱 확고해졌다.

초월 리그의 챔피언.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줄, 그래서 내 과오를 바로잡게 해 줄 유일한 방법.

'흔들리지 말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쉬운 길로 가려 한 것에 대해서 반성했다.

형의 얼굴을 마주한다고 해서 내 원죄를 씻어낼 수 있을까?

그럼 어머니는?

'다른 방법은 없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 원죄를 씻어낼 방법은 딱 하나뿐.

그 길은 한눈 따위를 팔아도 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후우.'

눈을 뜨자,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평소의 내 모습.

'경기에 대한 정리를 좀 해볼까.'

명상을 끝낸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종이를 펼쳐 들고 성계 대항전의 득실을 계산했다.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얻은 건 총 네 개.

고위 리그에 대한 승급샷, 성계 대항전 특전으로 인한 모든 스텟 +7%.

그리고 고결한 수정 한 개, 마지막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MVP 보상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스킬 업그레이드부터 해야겠군.'

띠링!

고결한 수정을 먹자, 상태창이 나타난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스킬을 선택했다.

[<스킬:명경지수>를 강화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스킬:명경지수>가 <스킬:열반>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번 경기를 통해 한 가지를 깨달았다.

'먼저 기반이 안정화돼야 해.'

건물을 높게 쌓으려면 튼튼한 기둥을 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강함만 추구하니, 조그만한 충격에도 자꾸 흔들린 것.

하지만 이제부턴 다를 것이다.

'편한 길은 버린다.'

내게 존재하는 리스크를 모두 털어내고 새 출발 할 생각이었으니까.

이걸로 고결한 수정 포상은 끝.

그다음 해야 할 건.

'이건 도대체 뭐지?'

MVP를 통해 얻은 보상이었다.

[<보석:시간의 각성>]

[태초에 만들어진 바위가, 억겁의 시간 동안 부스러지며 모습을 드러낸 보석.]

[장비에 시간이 쌓이며 새겨진, 잠자는 성흔聖痕을 각성시킬 수 있다.]

[등급 : 신화]

"······."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뭐라는 거야?'

시간이 쌓이며 새겨진······ 잠자는 성흔을 각성시킬 수 있다고?

'어렵게도 써놨군.'

한숨을 내쉰 나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이럴 땐 사용해 보는 것이 가장 직관적일 것이다.

띠링!

[<보석:시간의 각성>을 사용했습니다.]

[성흔이 잠자고 있는 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면:블라디미르의 열망>]

[2. <창:벽력섬전>]

[3. <목걸이:몽환의 달빛>]

[장비를 선택하면 숨겨진 성능을 각성시킵니다.]

숨겨진 성능을 각성시킨다.

'이런 뜻이었군.'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써놓을 것이지.'

잠자는 성흔은 봉인된 능력을 말하는 모양.

그걸 깨워준다는 거니, 한마디로 장비를 한 등급 업그레이드 시켜준다는 뜻이었다.

'일단 하나는 제외.'

통제가 불가능한 힘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블라디미르 가면을 고려 대상에서 빼버렸다.

이제 남은 건 창과 목걸이뿐.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은 전설 등급이고, 목걸이는 준신화 등급이었으니까.

[<목걸이:몽환의 달빛>을 각성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목걸이:몽환의 달빛>이 <목걸이:영롱한 달빛>으로 각성하였습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

[영면에 빠진 달의 여신이 착용하던 목걸이. 달빛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

[달의 크기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최대 30%]

[달이 뜨면 1분당 체력이 5%씩 회복된다.]

[달이 뜨면 1분당 마력이 5%씩 회복된다.]

[착용 시 스킬 슬롯이 한 개 추가된다. 단, 달이 떴을 때만 추가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달빛의 가호>를 받게 된다.]

[<달빛의 가호>]

[달빛을 1시간 받을 때마다 1%의 게이지가 차게 됩니다.]

[100%까지 채울 경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 시 체력, 마력을 100% 회복시킵니다.]

[착용 시 <복수의 칼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복수의 칼날> ― 단일 대상 설정 후, 대상을 만나면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재사용 대기 시간 : 30일)]

[등급 : 신화]

'어?'

각성한 몽환의 달빛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기존에 있던 옵션의 효율이 대폭 상승한 것은 물론, 새로운 옵션이 두 개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엄청 좋아졌는데?'

기존에 있던 것들만 보자면, 달빛 아래에만 있어야 하던 체마 상승과 추가 슬롯 옵션이, 달만 뜨면 활성화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체마 1% 상승이 5%로 5배나 올랐다.

'체력이랑 마력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달빛의 가호, 복수의 칼날.

두 옵션 모두 사기급으로 좋은 능력이었다.

전투 시 다양한 효율을 보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제법 많이 얻었군.'

다섯 경기나 치르긴 했지만 스킬, 장비, 특전을 하나씩, 그리고 승급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엄청 큰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로 얻은 건 끝.'

이제는 손해 본 걸 계산할 때였다.

[정신 : 39]

'미친······.'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기 전보다 무려 60포인트 하락한 상태였다.

고작 한 번 사용한 것 치고는 손실이 너무 컸다.

환산하면 무려 444,000포인트.

'이미 지나간 일이야.'

무척 뼈아픈 일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삭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까.

'두 번 다신······.'

이걸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 상태에서 형은 내게 역린이자, 약점이나 마찬가지.

'분명 또 흔들리고 말 거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무리해서 형을 팀 투지로 데려와봤자, 초월 리그로 올라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형이 오면 팜 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어.'

형을 다시 보는 게 내 소원인가?

아니, 내 잘못을 바로잡는 게 소원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냉정해야 한다.

형이 곁에 있으면 걱정 반 기쁨 반 상태가 되어, 콜로세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이걸로 득실 계산은 끝.'

나는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 애써 미련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성공적으로 끝난 성계 대항전! 하지만 처음의 취지와 무색하게, 새로운 고위 플레이어의 탄생을 엿보는 자리가 됐다.

―쿠 훌린 "단 한 명이 상위 리그를 쥐고 흔들었다. 우린 그걸 무력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렌에게 경의를 표해!

―스킬 슬롯은 다섯 개뿐. 하지만 렌의 스킬은 몇 개? 매 경기 다른 스타일로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들다.

―싸움꾼의 피를 타고난 형제. 플레이어 렌, 그리고 룬! 두 사람은 과연 같은 팜에 소속될 수 있을 것인가.

예상대로 커뮤니티는 성계 대항전에 대한 후기로 들끓고 있었다.

초월 리그와 고위 리그는 아직 오픈되지 않은 데다가, 성계 대항전이 끝난 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 당연한 거였다.

'별말이 없어야 할 텐데.'

초조한 마음으로 게시글 하나를 들어간 나는 댓글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신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군.'

5경기에서 온갖 학살과 고문을 자행한 것.

그에 대해 대다수의 신들은 가족을 만났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때였다.

똑― 똑―

"안우진 님, 아세리안이에요."

"아, 들어오셔도 됩니다."

내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세리안.

그녀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후우, 죄송해요. 팀 불굴에 정말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해 봤는데······. 영입에 실패했어요."

아세리안이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룬은 팀의 핵심 플레이어일 테니까요. 판매할 리가 없죠."

"아······."

내가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슬쩍 내 눈치를 보는 아세리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예."

그녀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제부턴 고위 리그에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할 생각이거든요."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블라디미르 가면을 벗었다.

'더 이상 한눈 팔지 않겠어.'

"······!"

'여긴 정말 오랜만이네.'

아세리안과 헤어진 나는 체력 단련실로 향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안으로 들어서자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그리고 익숙한 땀냄새.

내 스텟이 마의 구간에 돌입한 이후, 체력 단련실에 온 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는 팜의 관리나, 테크닉에만 신경 써왔으니까.

'오랜만에 땀 좀 흘려 볼까.'

단련실 한쪽 빈 공간으로 향한 나는 바벨 바에 원판을 조립하며 운동할 준비를 했다.

"······?"

"······?"

그러자 내게 쏠리는 시선들.

단련실 내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운동하다 말고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려 1톤 가까이 끼워 넣고 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팀 투지에서 이 정도 무게를 들 수 있는 플레이어는 몇 없을 테니까.

"스읍, 후우. 스읍, 후우."

나는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스쿼트를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10분간 쉬지 않고 계속.

'힘들군.'

고작 한 세트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바벨을 내려놓고 싶었다.

오랜만에 해서 더 괴로운 느낌.

하지만 당분간은 이 감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스텟이 오르는 일은 없겠지만, 내가 다시 단련을 시작한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하락한 정신 스텟을 올려야 했으니까.

정신은 명상뿐만 아니라, 초고강도 단련을 해도 상승한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후우."

그렇게 무려 30분간 쉬지 않고 진행된 스쿼트.

바벨을 내려놓은 나는 입과 코로 최대한 산소를 들이마셨다.

이렇게 앞으로 9세트를 더 진행할 계획이어서, 빠른 회복은 필수였다.

"저기······."

"······?"

그때, 곁에서 운동하던 플레이어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

5기수에 들어온 플레이어, 양홍경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 누구신지······."

양홍경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로브, 가죽 갑옷, 목걸이 등등 항상 같은 장비들을 착용하고 다니기에, 당연히 날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찰력이 떨어지면 모를 수도 있지.'

"안우진입니다."

그래서 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헉!"

그러자 체력 단련실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팀원들.

"그······ 렌으로 활동 중인 안우진 님······?"

"예."

"······!"

파이팅으로 넘쳐야 할 단련실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나를 바라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후우.'

그 과도한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을 착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것 또한 익숙해져야 한다.

어차피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라서, 모두들 금방 적응할 것이다.

그때였다.

"안우진님······?"

단련실 한쪽에서 장애물 트랙을 돌고 있던 당소소.

그녀가 눈을 빛내며,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 182화. 해방(1) > 끝

< 183화. 해방(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