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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화. 해방(8) >

연변 시내를 벗어나자 곧바로 등장하는 장백산맥.

그때부터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후우, 스텟이 낮으니까 쉽지 않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던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200이 넘던 스텟이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든 상황.

이전이라면 5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를 1시간 넘게 오르고 있었다.

'MVP 특전으로 몽환의 달빛을 업그레이드시킨 게 신의 한 수였어.'

길이 나있지 않는 산을 타는 것은 엄청 고된 일이다.

길이 뚫린 산을 타는 것보다 체력이 몇 배는 더 소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 발걸음은 평지를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91%]

1분마다 체력이 5%씩 회복됐기 때문.

'이 속도라면 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겠군.'

만약 MVP 특전으로 목걸이를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다면, 이동에 많은 시간을 뺏겼을 것이다.

그때는 고작 분당 1%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조금 오르다 쉬고, 또 조금 가다가 쉬고를 반복해야 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산중턱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싸아아아아아―

'뭐지?'

풀잎 향으로 가득하던 산속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다.

밤을 놀이터 삼아 뛰놀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작아졌다.

어떤 경계선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한순간에 변한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뿐.

'포식자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지구, 그것도 장백산맥에서의 포식자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육중한 몸,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힘.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하고 민첩한 움직임.

거기다 뛰어난 사냥 센스까지.

'어이가 없네.'

정말 놀랍게도, 중국의 장백산맥에는 야생 호랑이가 산다.

한국인이라면 그 사실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산을 오른다고 해서 맹수, 그것도 몸무게 20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 맹수를 마주칠 거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테니까.

'영역을 피해서 움직여야겠군.'

나는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호랑이의 영역을 빠져나왔다.

사실, 호랑이와 싸워도 얼마든지 이길 자신은 있었다.

기초 스텟 20뿐이었으면 쉽지 않았겠지만, 나는 현재 온갖 특전으로 떡칠한 상태.

평균 스텟이 35에 가깝다.

'이 정도만 해도 지구에선 초인이라고 할 수 있지.'

설렁설렁 뛰어도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고, 웃으면서 마라톤 풀 코스를 뛸 수 있는 수준.

거기다 무기까지 갖추고 있으니 충분히 사냥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영역을 벗어나 돌아가는 이유는, 내겐 해야 할 미션이 존재했기 때문.

'여기서 체력을 뺄 이유가 없어.'

중요한 미션을 앞둔 상황에서, 굳이 변수를 만들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포식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영역을 지키려 할 것이기에,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이다.

쏴아아아아아아―

영역의 경계선을 타고 이동하며 산을 내려오자, 물 흐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

깜깜한 어둠 속, 작게 점멸하는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스톱 오버 포인트까진 무사히 도착했네.'

소도시 도문.

북한과는 도문대교로 이어져 있는, 중국 동북부 최외곽 도시.

미리 숙지해 뒀던 지리를 떠올린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두만강 근처에 도달한 것이다.

[제한 시간 : 671:42:11]

현재 시각은 밤 11시 18분.

일출 시간은 05시 02분이므로, 해가 뜰 때까지 6시간가량 남아 있다.

'이 정도면 시간적 여유는 충분해.'

척― 척― 척― 척―

곳곳에서 들려오는 중국 변방대원의 군화발 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은밀하게 이동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 모르게 움직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1회차 때 콜로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척을 숨기는 훈련을 많이 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도착하게 된 두만강.

'쯧. 생각보다 유속이 빠르네.'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두만강의 폭은 대략 250미터에서 500미터 사이.

맞은편에는 여러 명의 사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어둡고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아마 국경을 지키는 북한군일 것이다.

저들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으려면, 그나마 나무 같은 엄폐물이 있는 곳으로 건너야 하는 상황.

떠내려갈 것까지 감안해, 생각해둔 지점보다 조금 더 상류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세심하게 위치를 체크했다.

'이 정도면 원하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겠군.'

그리고는 조용히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도하.

'욱······.'

물 속에 들어가자, 순간 구역질이 났다.

띠링!

[각성능력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독을 저항합니다.]

[각성능력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독을 저항합니다.]

[각성능력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독을 저항······.]

"······."

잠수 중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새까맣게 보이는 5급수보다 오염도가 10배가량 높은 두만강.

침투로를 조사하며, 수질이 무척 나쁘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독극물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인데.'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강물을 퍼다가, 팀 투지로 가져가면 아세리안이 좋아하겠다고.

안 그래도 독 만들 재료비를 대느라 허덕이고 있었으니까.

'당소소한테 고마워해야겠군.'

그녀한테 별의별 독을 다 당하며, 그동안 독성을 길러왔다.

덕분에 오염된 두만강을 건너도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두만강의 물은 내장을 녹이거나, 온몸을 뻣뻣하게 마비시키진 않을 테니.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발을 놀려 강을 건너고 있을 때였다.

"담배 하나만 달라우."

"동무, 내래 동무한테 준 담배가 몇 개비인지 알간?"

두만강을 3분의 1쯤 건너오자, 들려오는 북한군의 목소리.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은 채 물속으로 깊게 잠수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보아, 내가 있는 곳의 바로 정면에 북한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물 속에서 최대한 참는 수밖에.

'10분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콜로세움에서 각종 미션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생존의 달인이 된 상황.

젤리처럼 끈적거리는 두만강 안에서 버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을, 만능 해독제와 회복의 물약을 믿고 있었기도 하고.

'갔나?'

10분의 잠수를 끝낸 나는, 물 위로 귀만 빼꼼 내밀었다.

"······."

다행히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잠수하고 있는 사이 모두들 이동한 모양.

'탈북하는 사람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해야겠군.'

나는 다시, 은밀하게 강을 헤엄쳤다.

그때였다.

타아앙! 타아앙!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총소리?'

아무래도 누가 두만강 상류에서 총을 쏜 것 같았다.

'쯧. 어쩔 수 없지.'

나는 숨을 들이마시곤, 다시 깊게 잠수했다.

총소리 때문에 경계를 서고 있는 군인들 모두 예민해져 있을 테니까, 10분 정도의 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젠장. 두만강 건너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마치 칼날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온몸에 벌집처럼 구멍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

고개를 내밀자, 다행히 근처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누군가 총을 쐈으니, 모두들 그쪽으로 몰려간 것 같았다.

'지금 건너야 해.'

그래서 더욱 과감하게 헤엄치며 두만강을 절반 가량 건너고 있을 때였다.

'뭐지?'

순간 눈을 의심했다.

강 상류에서 거대한 물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고기는 아닐 것이다.

바다가 아닌 강에 저렇게 거대한 물고기가 있을 리 없으니까.

한동안 물체를 주시한 나는, 이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상류에서 떠내려오던 물체.

그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도 두 명.

"······."

웬 남자가 품 안에 쪼그마한 무언가를 꼬옥 끌어안은 채 떠내려온다.

30대 중후반 남성의 품 속에는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가슴 부근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니, 사인은 총알에 의한 관통상.

'씁쓸하군.'

시체들과 더 가까워지기 전, 다시 깊게 잠수했다.

떠내려오는 시체를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할 수도 있고.

'가는 길이 부디 평온하길.'

구역질이 나는 두만강의 물 속에서, 나는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콜로세움이나 마계가 아닌.

죽은 자들의 안식처, 사후 세계에서.

'그리고 다시 만나, 행복하길.'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부녀.

부디, 두 사람 다 고통 속에서 해방 되었기를.

'거의 다 왔어.'

육지까지 앞으로 10미터.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위를 체크했다.

'쯧.'

하지만 나는 또다시 깊게 잠수해야 했다.

탁! 탁! 탁! 탁! 탁!

뚜벅― 뚜벅― 뚜벅­―

다급한 발소리를 내는 누군가와, 그 뒤를 쫓는 군화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육지로 오를 수 있기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녹조 속에 머리를 쳐박았다.

그리고 5분 후.

'지금쯤이면 갔겠지.'

고개를 내밀자 들려오는.

"이 간나 새끼!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날래 말하라우!"

"동지! 아닙네다! 증말로 오마이가 밭으 다니오나라 하셨습네다!"

퍽! 퍽! 퍽! 퍽!

"하, 통행금지 시간에 다니오나라? 내거이 머저리로 보이네? 이 반동분자 새끼, 바른 대로 말하라우!"

어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탈북을 시도하려다 잡혔군.'

나는 금세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북한군은 폭력을 휘두르며 추궁하고, 여자는 살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얘기해선 안 되는 상황.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하지만 여기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귀를 기울이자, 이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 주변엔 코 앞의 두 남녀밖에 없다는 뜻.

쏴아아아아아아아―

세찬 강물 소리 안에 숨어든 나는 육지 쪽으로 향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띠링!

[<단검:침묵의 대검帶劍>을 꺼냈습니다.]

'겨우 도착했군.'

강에서 빠져나온 나는, 단검을 입에 문 채 곧장 낮은 포복으로 전환했다.

몸에서 엄청난 악취가 뿜어져 나오고 있지만, 아마 알아차리진 못할 것이다.

두만강에서 나는 냄새라고 생각하겠지.

'타이밍은 좋아.'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달빛만이 주변을 비추고 있다.

마력장엔 이렇다 할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죽여도 되겠어.'

나는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남자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곧 죽을 여성에 대한 연민 따위의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나는 누군가와 마주쳐선 안 되는 상황.

하지만 북한 사람에게 표식을 남기지 않으면, 결국 또 이 짓거리를 하며 북한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선, 나와 마주치고도 입을 열지 않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탈북하다가 걸린 사람이라면, 내 존재를 발설하진 않을 거야.'

판단을 내린 나는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퍽! 퍽! 퍽! 퍽!

"제, 제발 살려 주시라요, 동지. 으윽!"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는 북한군과, 몸을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여성.

그 사이 5미터 안쪽까지 다가간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단검을 오른손으로 옮겼다.

'지금!'

띠링!

[<전광석화>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뒤에서 남자의 입을 막은 채 목을 그어버렸다.

서걱!

"읍, 읍읍!"

잘게 떨면서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남자.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오던 그는, 결국 얼마 못가 축 늘어졌다.

과다 출혈에 의한 쇼크로 사망한 것이다.

"······?"

잠시 후, 폭력이 멈춘 것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살짝 드는 여성.

나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으며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보였다.

"······!"

"조용히 하세요. 다른 군인들이 올 수도 있습니다."

끄덕끄덕.

눈을 동그랗게 뜬 여인이,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17세 정도의 어린 소녀였다.

'일단 뒤처리부터.'

이런 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필수.

다행히 핏자국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곳곳에 다른 핏자국들이 존재했으니까.

'아마 탈북하던 주민들을 죽인 거겠지.'

죽은 남자를 들쳐 멘 나는 총과 함께 시체를 두만강으로 던져 버렸다.

풍덩! 꼬르륵―

그리고는 소녀에게 돌아와 입을 열었다.

"탈북하려고?"

"아, 아닙네다. 진짜로 어머니께서 밭에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북한의 방언에서 갑자기 표준어로 바뀐다.

아무래도 자동 번역 시스템이 작동한 모양.

소녀는 끝끝내 진실을 숨겼지만, 나는 무시한 채 계속 얘기했다.

"며칠만 참아봐. 여기도 곧 살기 좋아질 테니까."

일분일초가 소중한 상황에서, 굳이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자 눈을 반짝이는 소녀.

"······남쪽처럼요?"

내 말의 속뜻을 단번에 이해한 것 같았다.

"그래."

"알겠어요. 참는 건 익숙하니까."

띠링!

[지구인 '림혜주'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림자를 밟은 나는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조심히 가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도 몸조심하세요."

그리고는 남양 쪽으로 향하는 소녀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야 해.'

인근엔 드넓게 펼쳐진 논밭뿐.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야산이 있어서, 그곳을 통해 움직일 계획이었다.

[제한 시간 : 670:58:37]

소녀와 헤어지고 30분 후.

'후우, 겨우 도착했네.'

야산에 오른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색하는 북한군을 피해 오느라, 고작 1킬로미터 오는 데에 30분이나 걸린 것이다.

'이제부터 지옥의 시간이겠군.'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직선거리로만 550킬로미터.

실제로 내가 지나게 될 경로로 계산하면 700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으니까.

'함경산맥을 타고 내려가서······. 태백산맥을 경유했다가 언진산맥으로 넘어가면······.'

그것도 무조건 산 위로만 지나다녀야 한다는 악조건 속에서.

'못 해도 하루에 50킬로미터씩은 움직여야겠는데.'

기초 스텟이 20까지 하락한 상태라, 아마 무척 힘든 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들면 힘들수록 좋았다.

'할 수 있어.'

이번 경기를 통해, 가면이 없어도 충분히 강하다는 걸 나 스스로에게 증명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북한 주민들과 함께 '해방' 될 것이다.

주민들은 독재자에게서.

그리고 나는 가면에게서.

띠링!

[<복수의 칼날>을 지정하시겠습니까?]

[지구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독재자'를 대상으로 지정했습니다.]

[대상과 조우하게 되면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100미터 안에서 활성화)]

품 속에서 물에 젖은 독재자의 사진을 꺼내든 나는, 영롱한 달빛 휘하 능력인 복수의 칼날을 사용했다.

< 189화. 해방(8) > 끝

< 190화. 여우 사냥(1) >

팀 '불굴' 팜.

안우정은 체력 단련실에서 트랙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허억, 헉. 이번에야말로 랩 타임 40초를 뚫겠어.'

마의 구간에 들어선 뒤로는 아무리 훈련해도 스텟이 거의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우정은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작게라도 스텟이 오르고 있긴 했으니까.

이게 쌓이다 보면 언젠가 거대한 힘이 될 거라는 걸, 안우정은 그동안의 교훈을 통해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마지막 바퀴.

안우정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결승선을 통과했다.

랩 타임 40초 07.

'제길.'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40초의 벽을 뚫을 수 없었다.

고작 몇십분의 1초 차이로.

"헉, 허억, 허억, 헉."

그 사실에 실망한 채, 바닥에 철퍼덕 누워 숨을 고르던 안우정.

그는 숨을 고르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오늘 실패했다면, 내일 다시 도전하면 돼.

깰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려 주겠어.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랜 것이다.

'우진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문득, 승급전을 치르고 있을 동생 생각이 났다.

'한번 볼까?'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안우정은 바닥에 누운 채로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여기 진짜 신기한 게 많은데? 나중에 마계 애들 완전히 봉쇄하고 아버지께서 중간계에 두른 차단막 해제되면 여행 한번 가봐야겠음.

└ㄹㅇ 나도 꼭 가볼 생각임. 다른 열한 성계랑 아예 분위기 자체가 다르네 ㅋㅋ

└할 건 많을 거 같은데, 다들 너무 평화롭게 돌아다니니까 생각보다 심심한 동네일 것 같음 ㅋㅋ

└그게 또 지구만의 매력이 될 수도 있지 ㅋㅋㅋ 아무튼 꼭 한 번 가 볼 만한 곳인 건 확실 ㅇㅇ

커뮤니티 댓글을 확인하던 안우정이 눈을 번쩍 떴다.

'어? 지구?'

고위 리그로 올라가기 위한 동생의 승급전으로, 지구 성계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안우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지구 성계라면, 어떤 미션이 나오든 큰 문제 없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천상계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동생을 위협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근데 이번 미션 너무 지루하지 않음? 도대체 며칠 동안 걷기만 하는 거야?

└북한이란 나라는 근데 산밖에 없냐? 왜 산으로만 다님?

└기초 스텟이 20으로 너프됐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렌이 스텟 낮은 거 치고는 굉장히 빨리 움직이고 있는 거임. 날개도 없는 상태에서 산으로만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ㅆㅂ 지금까지 렌 분석한 거 폐기해야겠네; 생명체 죽여야지 체력 회복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봄 ㅠ

└님들! 근데 기초 스텟 20 치고는 움직임이 너무 가볍지 않나여? 최소 30은 넘어 보이지 않음? 내 눈이 잘못된 건가?

하지만 댓글을 쭉 내려보던 안우정의 심장이 철렁했다.

'스텟이 20으로 하락한 채로 북한에 들어갔다고?'

지구는 다른 곳들과 달리, 열병기가 발달한 성계.

기초 스텟 20이면 한 분야의 최고 자리에 있는 스포츠 선수의 육체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총알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괜찮을까?'

안우정의 마음 한 켠에 불안감이 날아들었다.

미션의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북한이라는 맵만 놓고 봤을 때 절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봐, 우정. 왜 이렇게 얼굴이 심각해?"

안우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다가온 한 플레이어.

"아, 송준경 씨."

안우정이 팀 불굴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플레이어, 무림 출신의 송준경이었다.

"무슨 일 있어? 아, 맞다. 오늘 동생이 승급전이라고 그랬지?"

"네, 맞아요."

"하핫, 이게 형제의 마음인가 보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렌이라면 가볍게 부수고 올 테니까."

송준경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스텟이 20으로 하락된 걸 모른다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

"자, 자. 훈련 끝났으면 이만 가 볼까? 슬슬 베르네트의 승급전이 끝날 시간이야."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이걸로 상위 플레이어가 또 한 명 늘겠군. 어서 축하해 주러 가자고."

송준경의 말에 안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공터.

"여기도 참 많이 변했어.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금방 망할 것 같았는데 말이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을 본 송준경이 말했다.

"팀에 소속된 상위 플레이어들이 한 번에 죽었을 때 말하는 거죠?"

"맞아.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덜덜 떨려. 굶어 죽어서 이곳에 왔는데, 또 배를 쫄쫄 굶게 됐었으니까. 당시에 자네랑 나랑, 없는 골드 모아서 감자 하나를 나눠 먹으며 버텼지."

안우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팀에 소속된 사용인들이, 재료가 없어서 요리를 해주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때가 생각날 정도였지.'

배고픔.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이후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

동생이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를 우승시키지 못했더라면, 자신들은 분명 굶어죽었으리라.

물론 팜도 망했을 테고.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상태창에 표시된 시각은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송준경도 그걸 깨닫고는 말문을 닫았다.

"······."

10초.

게이트가 평소보다 늦게 열리는 것에 의아해하는 안우정.

30초.

마음 한켠에서 불안감이 조금씩 싹튼다.

1분.

그 불안감은 서서히, 안우정의 온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린 지, 어느덧 5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제길.'

주먹 쥔 안우정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며 피가 뚝뚝 떨어졌다.

끝끝내 공터에선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베르네트가 죽었다는 뜻.

"······후우, 이만 가세."

먼저 동료의 죽음을 받아들인 송준경이 안우정을 잡아끌었다.

콜로세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서로의 심장에 검을 겨눠야 하는 전장.

플레이어에겐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건, 안우정과 안우진 형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디 잘 끝나야 할 텐데.'

동생을 떠올린 안우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꼴값을 떨고 있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아냥.

안우정과 송준경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고작 누구 한 명 죽었다고 슬퍼하고 있는 꼴이라니, 과연 하등한 종족답구나."

온몸에 수북하게 난 털, 엉덩이 근처에서 살랑이는 꼬리, 길다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리는 남성.

"왜 시비지, 세호."

2주 전 팜에 새로 들어온 네임드, 호인족 세호였다.

송준경의 물음에 세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별것도 아닌 것들이,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에 힘주고 있는 게 아니꼽더군."

"······."

"너무 슬퍼하지 마라, 하등한 종족들이여. 어차피 너희들도 곧 따라가게 될 테니까. 다시 만나서 찐하게 회포를 풀도록."

방금 막 동료가 죽은 상황.

'이 고양이 새끼가.'

순간 욱! 하고 무언가가 올라온다.

안우정이 살기를 뿜어대며, 인벤토리에서 레바테인을 꺼내 들었다.

"참게, 우정!"

그러자 급히 가로막으며 안우정을 말리는 송준경.

"비키시죠. 저런 녀석은 팀에 있어봤자 도움 될 게 없습니다."

안우정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도 알고 있다네. 허나, 녀석은 루디악 님이 눈여겨보고 있는 대형 네임드 아닌가."

"······."

"만약 손을 봐줘야 하는 상황이라도, 감정적으로 접근해선 안 돼. 자네 지금 너무 흥분했어."

"후우."

송준경의 만류에 온몸을 바르르 떨던 안우정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준경 씨의 말이 맞아.'

같은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에게 칼을 뽑는다?

그 순간 팜의 단합력은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선례를 남겨두면, 조금 기분 나쁘다고 검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분명 생겨날 것이다.

'너무 흥분했어.'

팜에서, 그것도 이렇게 많은 팀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피를 보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안우정이, 다시 인벤토리에 레바테인을 넣었다.

"크흐흐흐. 칼을 뽑아 들고도 다시 집어넣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크하하하하!"

그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등을 돌리는 세호.

차분하게 가라앉던 안우정의 분노가, 다시 수직 상승했다.

'그냥 죽일까.'

안우정의 몸에서 살기가 새어 나오자, 송준경이 등을 토닥였다.

"잘 참았네. 어차피 녀석도 곧 알게 될 것이야. 지금 우정이 검을 휘둘렀으면 100퍼센트 죽었을 거라고."

"······예."

"제까짓 게 네임드라고 해 봤자, 상위 플레이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 물론 이제 갓 들어온 녀석이 나보다는 강하지만."

송준경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쯧.'

그 말을 듣자, 순간 허탈했다.

맥이 탁- 풀렸다.

만약 내가 저 몸으로 콜로세움에 들어왔다면.

'그럼 우진이를 따라갈 수 있었을 텐데.'

지구인은 왜 이렇게 약한 걸까.

그 사실이 못내 서글펐다.

'처음 들어왔을 때 저 정도의 스텟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니, 질투가 났다.

저 당당함이.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저 강함이.

"자, 우리도 이만 가세."

잡아끄는 송준경의 손에 이끌린 안우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안으로 삭혔을 분노.

거기다 넘어선 안되는 암묵적 규칙인, 팜 내에서 칼을 겨누기까지.

'동생을 만나서 그런 걸까.'

요즘 들어 감정 기복이 무척 심해진 것 같았다.

* * *

'하, 씨발.'

산 아래로 거대한 도시가 보이자, 나는 실 끊긴 인형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2주일이나 걸렸네.'

북한의 최북단 남양에서 출발한 지 무려 14일 만에,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제한 시간 : 330:02:26]

오는 동안의 여정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옥이었지.'

한반도의 산세가 얼마나 험준한지 깨달았다.

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데다가, 하나하나의 높이가 얼마나 높던지, 체력이 회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 미만 구간을 아홉 번이나 터치한 것이다.

거기다 사람을 마주치면 안 되기에, 길이 없는 곳으로만 다녀야 했고.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평양은 확실히 사람이 많네.'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58분.

저 멀리 지평선에선 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근처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일단 좀 쉬어야겠군.'

나뭇잎이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 위로 오른 나는 회복의 물약 하나를 들이켰다.

지금은 못 들어가기에, 밤이 찾아오면 침투할 생각이었다.

'일단은 타깃의 위치를 찾아야 하는데.'

나는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았다.

숙면을 취하려는 건 아니었다.

침투 및 암살까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려는 것.

'미션이 어렵다고 호언장담한 이유가 있었군.'

타깃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그런데 북한 최고 특수부대라는 974부대의 호위망, 게다가 총이라는 화기까지 고려한다면?

'확률이 너무 낮은데.'

미션을 성공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깎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콜로세움에서 싸워온 지 어느덧 13년 차.

그동안 무수히 많은 미션을 받았고, 실행했고, 도전했다.

그 모든 것들을 돌이켜 보면, 이번 미션은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를 정해야 해.'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은 나는, 평양의 지리를 떠올리며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십수 개의 은신처, 서른세 채의 별장, 그리고 북한 곳곳에 존재하는 관사.

나는 그중에서 한 군데를 찝었다.

'조선 노동당 1호 청사.'

독재자의 집무실이 있으며, 다른 곳들과 달리 경계가 가장 삼엄한 곳.

별장이나 은신처는 확률상, 기간 내에 오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1호 청사는 다르다.

'처리할 업무도 있을 테니까 무조건 한 번은 들를 거야.'

내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1호 청사의 경계가 가장 삼엄하기 때문.

이곳은 안전하다고 느낄 테니, 무조건 한 번은 올 것이다.

이걸로 작전은 끝.

이제 남은 건 딱 하나였다.

'밤이 기다려지는군.'

바로, 때를 기다리는 것.

"스읍, 후우. 스읍, 후우."

나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달빛의 힘으로 인해 <영롱한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5%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45%]

그 순간은 금방 찾아왔다.

'평양까지 강행군한 온 보람이 있네.'

산을 내려가는 길.

하늘에 걸린 둥근 달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힘이 샘솟는다.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호흡도 안정화되었다.

이제 남은 건 타깃을 제거하는 것뿐.

"······."

밤이 되자, 평양 내외를 분주히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북한은 현재 전력난에 허덕이는 상황.

수도인 평양, 그것도 신분이 고귀한 몇몇만이 밤에 불을 켤 수 있다.

그 탓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내까진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겠어.'

서울과 다르게, 평양 외곽은 논밭으로 가득했다.

먹을 것을 자급자족하는 북한의 특성상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논두렁을 따라 이동하길 한참.

'여기서부턴 신중하게 움직여야겠군.'

어둠이 내려앉아 깜깜하던 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밝아졌다.

집 안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길거리를 비춘다.

드디어 시가지로 들어온 것이다.

'후우.'

독재자를 죽이기 위해.

그리고 고위 리그를 위해.

'시작해 볼까.'

단검을 꺼내든 나는 은밀하게 중심부로 향했다.

* * *

안녕하세요, 하루하온입니다.

어제 한 독자님께서

<장백산맥 → 백두산맥> 이 정확한 표현 아니냐.

혹시 작가가 한국말 잘 하는 중국인인 것 아니냐. 이건 동북공정이다.

라는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백두산맥 : 원래 이름은 마천령산맥. 북한에서는 백두산맥이라고 불린다.

장백산맥 : 요동반도~흑룡강+송화강 유역 = 북한 국경 바깥에 있는 산맥.

백두산맥과는 아예 별개의 산맥이다.

한마디로 제 소설에 나오는, 북한 국경 전에 만난 장백산맥은 애초에 국내에 없으며, 백두산맥이라고 불리지 않는 산맥입니다! (백두산맥은 위 언급과 같이, 마천령산맥이라고 북한 내부에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한국인(교포 X 순수하게 대한민국 혈통)입니다!

이상입니다!

< 190화. 여우 사냥(1) > 끝

< 191화. 여우 사냥(2) >

이곳에서 조선 노동당 1호 청사까지의 직선거리는 4.5킬로미터.

실제로 내가 움직여야 할 거리는 7킬로미터에 가깝다.

'청사를 앞두기 전까지 발각되선 안 돼.'

나는 숨죽인 채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아들, 어둡진 않아? 양초 좀 더 켜줄까?

―올해는 비가 좀 와야 할 텐데······. 이러다간 올해도 굶겠어.

―오늘 아침에 김씨한테 들었는데, 이번 9.9절에는 특식이 나올 거라더군.

'평양도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서 다행이야.'

대부분 불이 꺼져 있는데도, 골목을 지날 때마다 말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촛불을 켠 채 생활하는 모양.

만약 통행금지가 없었다면 깜깜한 밤이라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꽤 있었을 것이다.

'묘한 분위기네.'

북한의 수도.

사진으로만 접했을 뿐,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인 도시.

평양은 서울의 1980년대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촌스럽고, 투박하다.

그리고 낡았다.

싼 가격에 빨리, 그리고 많이 지어야 했기 때문.

'대동강까지는 문제 없이 침투할 수 있겠어.'

혹시나 암살에 실패하면, 그림자 이동으로 도망쳐야 한다.

그럼 이 거리를 또다시 지나야 한다는 뜻.

그래서 나는 침투뿐만 아니라, 지리 숙지 및 정보 수집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뚜벅― 뚜벅―

그렇게 좁은 골목길만을 이용해, 숨죽인 채 평양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순찰을 돌고 있는 녀석들이군.'

귓가에 미세하게 들려오는 둔탁한 발소리.

통행금지 시간에 평양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군인밖에 없을 테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곧장 왼쪽 집의 담장을 넘었다.

담장 내부엔 작은 마당이 펼쳐져 있고, 출입문에 나 있는 작은 창문 너머로 촛불의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온다.

"······."

여러 개의 숨소리가 들리지만, 규칙적인 걸로 미루어 봤을 때 당분간 움직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흠······."

"왜 그러십니까, 특무 상사님?"

"여기 폐가인가?"

담벼락 너머로 들려오는 군인들의 말소리.

마력장에, 내가 숨어든 맞은편 집을 가리키는 군인들의 모습이 느껴졌다.

"맞습니다. 가족 중에 반동분자가 있어서, 모두 정치범 수용소로 격리조치했습니다."

"이봐, 상급 병사. 안에 누가 없나 확인해 보게."

"옛!"

끼이익―

중년인의 말에, 맞은편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병사.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쯧. 생각했던 것보다 순찰을 꼼꼼하게 하는군.'

외곽인데도 이 정도면, 내부로 들어갈수록 침투 난이도가 더 빡세질 것이다.

물론 모두가 중년 군인처럼 꼼꼼하진 않겠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좋아, 이만 가지."

다행히 군인들은 내가 숨어든 집까지 수색하진 않았다.

'후우.'

골목을 빠져나가는 군인들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꺼내 들었던 단검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타깃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로 발각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으니까.

녀석들이 여기까지 수색했으면, 결국 죽여야 했으리라.

'그랬으면 시간이 촉박했겠지.'

순찰조가 돌아오지 않으면, 중앙에서는 추가 수색대를 파견한다.

그리고 결국 순찰조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호위에 더욱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독재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면 안 된다.

'오늘 밤은 제법 길겠군.'

담장을 뛰어넘은 나는, 옅은 달빛을 맞으며 조용히 이동했다.

└렌 수준이면 그냥 푸슉푸슉 하고 다 학살한 다음에 타깃 죽이면 되는 거 아님? 왜 저렇게 조심스럽지?

└지구에서 들어오는 애들 보니까 검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더만 ㅋㅋ 이렇게 약해 빠진 성계에선 스텟 20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ㄴㄴ 검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쓸 필요가 없어서 그럼. 제대로 침투 시작되면 님들도 알 게 될거임 ㅋㅋㅋ

└두만강이었나? 뭔 강 건널 때 들려온 굉음 있지? 그게 지구 성계가 주로 쓰는 총이라는 무기에서 나는 소리임. 손가락만 까딱해도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님.

3시간 후.

'후우. 결국 여기까지 왔어.'

조선 노동당 1호 청사까지 남은 거리는 2킬로미터.

쏴아아아아아아아―

눈앞에는 커다란 강이 펼쳐져 있었다.

대동강이 평양을 관통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두만강을 건너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있었다.

'냄새가 밸 수도 있지.'

이번에는 시내로 들어간다는 것.

악취가 난다면, 아무리 은신을 잘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리를 건너는 수밖에 없겠군.'

나는 대동강 옆에 난 샛길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대교 쪽으로 쭉 올라갔다.

그리고 500미터쯤을 앞두고, 낮은 포복으로 전환했다.

대교 입구를 다섯 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

'당연히 병력이 배치돼 있을 줄 알았지.'

평양은 강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

남쪽에는 대동강이, 서쪽과 북쪽은 보통강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북쪽은 합장강이 흐른다.

결국 시내로 들어가려면 무조건 대교를 지나야 한다는 뜻.

그런 요충지에 순찰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

'확실히 최정예들로만 구성해 뒀네.'

야심한 시각,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법 지루할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현 상태에서 대교를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뿐.

첫 번째는, 저 다섯 명을 죽이고 지나가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대교 밑으로 지나가야겠군.'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통과하는 것.

다리를 만들기 위해선, 가장 먼저 철골로 뼈대를 세워야 한다.

하지만 통짜로 지으면 경제성이 떨어지기에, 마름모꼴로 교차해 가며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턱을 잡고 이동하면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것이다.

'후우.'

판단을 마친 나는 어둠 속에 스며든 채, 대교를 향해 기어갔다.

5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1시간 넘게 걸렸지만, 다행히 내가 다가온 걸 알아채는 군인은 없었다.

'얼마 안 남았어.'

대동강만 건너면 1킬로미터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

나는 대교의 난간을 잡고, 조용하게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철골에 스파이더맨처럼 매달린 채, 팔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며.

"이봐, 영광 거리 쪽 순찰은 끝났나?"

"옛!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대교를 건너고 중심부로 들어오자, 무수히 많은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1호 청사 코앞인 데다가, 바로 위에 호위 사령부가 있다 보니 철통같이 경비를 하는 것.

'여기부턴 문제없지.'

이걸 예상하고, 여기서부턴 세세하게 경로를 짜뒀다.

육각형 모양의 건물, 조선 중앙은행을 지나.

"정지! 지금은 통금 시간입니다!"

"정찰총국 소속 리명철 대좌요. 나는 야간 통행증이 있소."

국립 연극 극장, 그리고 평양 제2 백화점을 통과하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위님. 특이 사항 있었습니까?"

"회의가 늦게 끝나서 고위 관료분들이 많이 돌아다니시더군. 평소보다 더 엄격하게 신원 확인을 하라는 명이 있으셨다네."

조선 민속박물관을 거쳐 이동하는 것.

다행히 지나오는 동안 날 발견하는 북한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거의 다 왔어.'

현재 내 눈앞에는 고위 당원 아파트가 있다.

바로 뒤에는 2개의 경비 초소가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내 목적지, 1호 청사였다.

이제 목적지를 코앞에 둔 상황.

그런데 문제는.

'방법이 없군.'

아파트에 딱 달라붙은 채 포복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워낙 빽빽하게 병사들이 자리하고 있는 탓에, 도저히 침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민대학습당 쪽으로 돌아가야 하나?'

남은 거리는 400미터.

무척 가까운 거리지만, 청각과 마력장의 범위가 미치는 곳은 아니다.

'어쩔 수 없지.'

딱 100미터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마지막 관문이 너무 높았다.

'돌아서 가는 수밖에.'

해가 뜰 때까지 앞으로 3시간.

그 전에 어딘가에 숨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이라,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때였다.

투둑― 투둑―

'어?'

고위 당원 아파트에 딸린 공원.

예쁘게 심어져 있는 잔디와 나무를 무언가가 때린다.

한줄기 물방울이 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이스.'

어두컴컴한 하늘 위에서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거야.'

나는 내심 쾌재를 질렀다.

우의를 입든, 아니면 비를 피하기 위해서든.

녀석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뭐야, 이 미친 새끼들은?'

하지만 내 기대는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청사 앞을 지키던 군인들.

녀석들은 단 한 치의 움직임 없이, 그대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비가 오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눈치.

'후우. 어쩔 수 없지.'

나는 엎드려 있던 자세 그대로 반대 방향을 향해 꿈틀거렸다.

이곳을 통해서는 침투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 또한 곧 멈춰야 했다.

"정지! 손 들어! 불응하면 발포하겠다!"

누군가가 공원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

50대 중반 정도의 중년인이었는데, 그를 발견한 군인들이 총을 겨누었다.

"쏘지 마시게, 젊은 친구. 나는 전략군 부사령관 김정대 중장일세."

등장한 인물은 별 두 개의 계급장을 달고 있는 김정대 중장.

하지만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부사령관님이라도 신원 확인과 몸수색을 해야 합니다. 그대로 손을 들고 계십시오."

"편하게 하게나."

김정대의 말에, 총을 겨눈 채 천천히 다가가는 군인들.

나는 그 모습에 제법 놀랐다.

'진짜 훈련이 잘돼있네.'

중장이면, 한국에서는 소장급의 지위.

무려 별 두 개의 고위 장성에게 총을 겨눈 채 다가가고 있음에도, 군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기색이었다.

경계에 흐트러짐이 없고, 맡은 임무에 예외도 두지 않는다.

'쯧.'

이들이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숨죽인 채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군인들이 이동할 때마다, 근처에 있던 나무의 귀퉁이를 천천히 돌았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군인들이 수색을 위해 다가가자, 철통같던 경계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사락― 사락―

잔디를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실례하겠습니다."

그 사이 김정대 중장에게 도착한 군인들.

'지금!'

나는 다른 나무 뒤로 숨기 위해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번쩍!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순간, 사방이 환해졌다.

"······?"

"······!"

그 바람에 뒤를 돌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군인들.

"누, 누구냐!"

'씨발.'

그 순간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또 다른 단검을 꺼내며, 녀석들을 향해 빠르게 짓쳐들어갔다.

푹!

"커헉!"

빠르게 날아간 단검이, 선두에 있던 군인의 목에 박히고.

철컥!

그사이 다른 두 명의 군인이 노리쇠를 당겨 총알을 장전했다.

녀석들이 개머리판을 견착하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쏘게 하면 안 돼.'

띠링!

[<전광석화>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야심한 밤, 총소리는 더욱 크게, 그리고 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녀석들에게 달렸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손가락 마디의 관절이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꺾이고 있었다.

'씨발.'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엄습해 오는 불안감.

뒷목이 쭈뼛쭈뼛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마력장으로 총구 방향을 읽은 나는 재빨리 <섬전>을 사용했다.

꽈아앙! 탕! 탕! 탕! 탕!

굉음이 침묵을 찢어발긴다.

"헉, 무슨!"

원래 내가 있던 방향으로 총을 쏘던 두 명의 군인이, 급하게 총구를 바꿨지만.

'늦었어.'

섬전을 통해 이미 거리가 1미터까지 좁혀진 상황.

서걱! 서걱!

푸슈우우우욱!

경동맥이 잘리며, 사방으로 피가 솟구쳤다.

"꺼어어어억······."

발밑에서 두 명의 군인이 꿈틀거리며 죽어갔다.

"헛, 누구냐!"

그러고는 허리춤에 달린 권총을 빼 들려는 김정대 중장의 턱을 때려 기절시켰다.

띠링!

[지구인 '김정대'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6시 방향 총소리다!"

"사령부에 어서 보고해!"

'젠장.'

주변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어.'

주변에 나뒹구는 소총 하나를 발등으로 차올려 잡은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겨눈 채 총알을 발사했다.

탕! 탕! 탕! 탕! 탕!

'쯧. 잘 안 맞네.'

총구 방향은 정확했지만, 제대로 견착하지 않은 탓에 격발 중 흔들리는 게 문제.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크윽!"

"끄아악!"

계속해서 쏘다 보니, 이 상태에서 쐈을 때 총알의 궤적이 어떻게 날아갈지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쏘는 족족 적들의 심장 혹은 머리를 꿰뚫었다.

'일단 1호 청사를 수색하고 와야겠어.'

탕! 탕! 피잉! 피이잉! 탕!

나는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며, 청사 쪽으로 돌진했다.

지금의 스텟으로 총알을 피하는 건 무리지만, 마력장의 범위 안에 있다면 총구 방향을 읽는 정도는 가능한 상황.

총알이 그릴 궤적 안에만 있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적들 사이를 파고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앗! 녀석이 관저로 향한다!"

"막아! 절대 수장님께 보내면 안 돼!"

'어? 관저?'

경계병들의 외침을 들은 나는 곧장 오른쪽으로 틀었다.

1호 청사 바로 옆에는 15호 관저가 있다.

그리고 15호 관저 또한 독재자의 집무실 중 하나.

'제발 관저에 있어라.'

나는 마음속으로 염원하며, 관저로 향했다.

'왼쪽 모퉁이 뒤.'

탕!

'세 번째 나무 옆.'

탕!

'왼쪽 건물 옥상'

탕!

그렇게 곳곳에 있는 북한군을 처치하며, 관저까지 30미터 정도를 남겨뒀을 때였다.

'이건?'

관저 내부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말소리.

―수장 각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도련님과 여사님은 저희가 모실 테니, 어서 이쪽으로!

―몇 명이나 쳐들어왔지?

―한 명입니다!

―위대한 공화국의 전사들이 고작 한 명을 못 막아서야, 쯧.

―송구합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독재자!'

< 191화. 여우 사냥(2) > 끝

< 192화. 여우 사냥(3) >

관저로 향하는 내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어졌다.

수많은 은신처, 관저 중에서 오늘 딱 1호 청사 옆에 있는 곳에 머물 줄이야.

'운이 좋군.'

탕! 탕! 휭! 타다다당! 휭! 휭!

지그재그로 달리며 날아드는 총알을 피한 나는, 공원의 나무 사이를 돌파하며 관저의 입구로 향했다.

"저 녀석이 침입자다!"

"어서 사살해!"

그러자 날 막아서는, 정장에 007가방을 들고 있는 열다섯 명의 남자.

키가 190은 넘는 데다가, 떡 벌어진 어깨, 스포츠로 짧게 깎은 머리칼.

총을 든 누군가가 다가오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까지.

'훈련된 군인이야.'

녀석들이 독재자를 근접 호위한다는 974부대원들일 것이다.

철컥! 철컥!

007 가방에서 꺼낸 권총의 총알을 장전하며, 내게 겨누는 974부대원들.

'이마에 넷, 심장에 둘, 왼쪽 허벅지에 다섯, 오른쪽 허벅지에 넷.'

"죽여!"

탕! 타다당! 탕! 탕!

총구 방향을 읽은 나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크게 점프했다.

타다다다다당!

그러고는 총알이 날아들 궤도를 피해, 덤블링하며 손을 쭉 뻗어 녀석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끄아아악!"

"커헉!"

총에 맞은 974부대원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남은 숫자는 다섯.'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나는 곧바로 바닥을 박차며, 또 한 번 덤블링했다.

휘이잉! 휘이이잉!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를 스쳐가는, 총알의 파공음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이런 미친!"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다시 내 차례야.'

탕! 타다당!

바닥을 짚고 일어나 총을 갈기자, 네 명의 974부대원들이 추가로 쓰러졌다.

이걸로 관저 입구에 있던 녀석들은 끝.

―조장님, 우리도 엄호할까요?

―아니! 너네들은 날 따라온다. 서둘러!

관저 뒤쪽에서 또 다른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로 가는 거지?'

다만 날 막으러 올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녀석들은 관저를 크게 우회하며 빠져나갔다.

'뭐, 나야 상관없지만.'

소총을 내팽개친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권총 두 자루를 주웠다.

양손으로 써야 하는 데다가 한 번에 한쪽 방향밖에 죽일 수 없는 소총 대신, 양손에 권총 한 자루씩 잡고 싸우는 게 나한텐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놈이 관저로 들어간다!"

"어서 죽여!"

내부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군인들이 총을 연발로 난사한다.

카가가가강!

건물 입구 양옆에 있는 기둥들이 터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시멘트 가루가 팍! 하고 퍼져나갔다.

'어디냐.'

그 사이 건물 안으로 침투하자, 날 맞이하는 새하얀 공간.

놀랍게도 관저의 로비는 5성급 호텔의 그것처럼,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양의 다른 곳들과 달리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2층 계단 위.'

타앙!

'왼쪽 기둥 옆.'

탕!

'로비 데스크 뒤.'

타다당!

권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곳곳에 숨어 있던 974부대원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 진짜. 자고 있는데, 꼭 이래야겠어요?

―어서 가셔야 합니다, 도련님! 긴급 상황입니다!

―아빠는요? 아빠는 어디에 있어요?

여러 명의 목소리.

'찾았다.'

로비 왼쪽 귀퉁이 돌아서 끝 쪽.

대략적인 위치를 체크한 나는 곧바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귀퉁이를 돌기 직전, 멈춰섰다.

'쯧, 까다롭네.'

'ㄱ'자형 복도 한쪽에서, 내가 머리를 들이밀기만을 기다리며, 다섯 명의 경호원들이 권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

이대로 나갔다간 총을 쏘기도 전에 내 머리가 터져 나갈 것이다.

'일단 한 명씩 줄여나가는 수밖에.'

코너 끄트머리에 등을 기댄 나는, 품속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코너 부분 너머로 휙 하고 던졌다.

탕! 타당! 탕! 탕! 탕!

'지금!'

허공에 떠 있던 단검이 총알에 맞아 깨지며, 이리저리 튕겨 나간다.

그 순간 나는 몸을 내밀어, 녀석들에게 권총을 겨냥했다.

"······!"

"······!"

다섯 명 모두 총구 방향은 단검 쪽.

녀석들이 급하게, 궤적을 수정했지만.

'늦었어.'

그래봤자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나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탕! 탕! 탕!

"큭······."

머리 한쪽이 수박처럼 터져 나가는 두 명의 974부대원들.

'이제 남은 숫자는 셋.'

"이런 미친!"

"침착해! 뒤에서 백업이 올 거다."

벽 뒤에 몸을 숨긴 나는, 관저의 입구 방향으로 총구를 돌렸다.

녀석들이 얘기한 백업이 도착했으니까.

'머리만 내밀어도 바로 죽여주지.'

"모두 서둘러!"

"총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침입자와 아직 교전 중인 것 같다!"

뒤쪽에서 들어오는 군인의 숫자는 넷.

마력장으로 녀석들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체크하던 나는, 녀석들이 복도 안으로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여기······."

"모두 피······."

털썩! 털썩!

그러고는 네 명 모두 깔끔하게 죽여버렸다.

"백업이 왔다, 전진해! 양쪽에서 동시에 덮쳐야 한다!"

탕! 탕! 탕! 탕!

그 상황을 모르는 세 명의 경호원이, 내가 나오지 못하도록 총을 쏘며 슬금슬금 다가온다.

총알의 궤적은 내 머리 높이까지.

즉, 바닥에서 183센티미터 정도 안에서 총알이 계속해서 날아든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벽에서 등을 떼고 일어난 나는, 맞은편 벽을 박찼다.

그러고는 공중을 180도 크게 돌며, 'ㄱ'자 형태의 코너 밖으로 나왔다.

"······!"

파쿠르를 통해 예상하지 못한 높이와 자세에서 총을 겨눈 채 나오자, 눈을 부릅뜨는 세 명의 경호원들.

탕! 탕!

양손의 권총이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두 명의 경호원이 가슴에 구멍을 낸 채 고꾸라진다.

이제 남은 경호원은 한 명.

"젠장!"

남은 한 놈은 총알이 다 떨어졌는지, 품속에서 새로운 탄알집을 꺼내 장착하고 있었다.

'잘 가라.'

그리고 마지막 녀석에게 총구를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씨발.'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날아가지 않는 총알들.

어느새 권총에 장전된 총알을 다 쓴 것이다.

'이거라도!'

들고 있던 권총들을 녀석에게 던진 나는, 곧장 바닥을 박차며 거리를 좁혔다.

"헛!"

다행히 내가 던진 권총 중 하나가 녀석의 손을 때리며, 들고 있던 총과 함께 튕겨 나갔다.

이걸로 우리 둘 다 맨손.

"큭, 젠장."

그러자 주변을 두리번대던 녀석이 아까 내가 던졌던, 끝이 조금 깨져나간 단검을 주워들었다.

총알에 맞아 튕겨 나간 게, 놈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앗!"

그렇게 시작된 근접 전투.

'제대로 배웠군.'

한 손으로 내 가드를 무효화시키며, 일격필살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단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고 깔끔한 동작에 내심 감탄했다.

지구인 치고, 이 정도 수준의 실력자가 별로 없기 때문.

'뭐, 그래 봤자지만.'

녀석의 손목을 쳐서 단검을 가볍게 날려버린 나는, 놈의 한쪽 발등을 밟으며 남은 한 손도 바깥으로 쳐냈다.

"컥!"

그리고 팔꿈치로 녀석의 턱을 쳐서 기절시켰다.

이걸로 'ㄱ'자 복도에서의 싸움은 끝.

'후우,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

―조장님! 여기 시체가 있습니다!

―어서 서둘러! 수장님의 신변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관저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고 있는 단검을 낚아채며, 복도를 내달렸다.

'이쪽에서 들렸던 거 같은데.'

아까 전에 들렸던 여러 명의 목소리.

마력장을 펼쳐서 주변 공간을 읽은 나는 망설임 없이 빈방 사이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보이는.

"헛, 벌써 여기까지!"

"무조건 녀석을 죽여야 해!"

정장을 입은 네 명의 군인과 한 젊은 여인, 그리고 다섯 명의 아이들.

'어딜!'

나는 그중 한 명에게, 직전에 허공에서 낚아챈 단검을 던졌다.

띠링!

[<섬전>을 사용합니다.]

꽈과광!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장검 하나를 꺼내, 순간 이동하며 나머지 세 명에게 휘둘렀다.

"윽끄윽끅······."

"쿨럭······."

침실로 보이는 방 안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퍼레지는 장검의 검신劍身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으아앙! 엄마아아!"

"무서워어!"

그 광경에, 젊은 여인에게 들러붙으며 엉엉 우는 아이들.

"······."

사색이 된 얼굴로 아이들을 감싸 안은 젊은 여인이,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쯧.'

그 모습을 본 나는 혀를 찼다.

연민 따위 감정이 아니었다.

'김정대 중장한테 표식을 사용하지 말걸.'

그저 젊은 여인에게 표식을 등록했다면, 만약 타깃을 죽이는 데 실패했더라도 리스크가 훨씬 많이 줄어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웠을 뿐.

하지만 그림자 표식의 쿨타임은 아직도 7시간 넘게 남은 상황.

'잘 가라.'

서걱! 서걱!

나는 망설임 없이, 침실에 있던 모든 사람을 죽였다.

"······."

'여기 어디에 비밀 통로가 있을 텐데.'

그러고는 마력장을 세심하게 느끼며 침실 내부를 살폈다.

죽은 여인과 아이들은 딱 봐도 독재자의 가족들.

974부대원들이 그들을 아무 이유 없이 이곳으로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찾았다.'

방 한 켠에서 느껴지는 빈공간.

나는 권총을 주우며, 바닥에 깔린 카펫을 들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대리석 바닥이었지만, 미세하게 틈이 보인다.

그 사이를 부러진 단검으로 쑤셔 넣자, 대리석 바닥이 들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사다리형 계단이 보였다.

높이는 5미터쯤.

'서둘러야 해.'

나는 그 높이를 그냥 뛰어내렸다.

지금 내 육체 스텟 정도라면, 이 정도 높이쯤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지하 대피로였군.'

일자로 쭉 뻗어져 있는 깜깜한 지하.

천장에 달린 작은 전구들이 미세하게 빛을 뿜고 있다.

탁! 타닥! 탁! 탁!

그리고 들려오는 발소리.

'지하라서 소리가 울리는 모양인데.'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독재자는 모든 은신처와 관저, 그리고 집무실 지하에 대피 방법을 만들어 놓은 걸로 알려져 있는 상황.

단 1분, 아니 1초 차이로 놓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수야 없지.'

[<복수의 칼날> 지정 대상 : 지구인 '독재자']

[대상과 조우하게 되면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100미터 안에서 활성화)]

여전히 복수의 칼날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아직 100미터 이상 거리가 벌어져 있다는 뜻.

'이거 제법 유용하네.'

활성화 거리 안쪽으로 들어오는 순간 발동될 테니, 이걸 통해 거리를 유추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자로 뻗은 복도의 끝에서, 'ㄱ'자 형태의 코너를 돌 때였다.

"헉! 수장 각하, 녀석이 왔습니다!"

"조금만 더 서둘러 주십시오!"

"뭐야! 자네들이 얘기하던 헉, 헉, 일당백의 용사들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속도를······."

"헉, 헉, 고작 한 명을 어쩌지 못해서 도망쳐야 하다니!"

코너를 돌자, 8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세 명의 남자가 뛰고 있다.

그중 한 명은 뒤뚱뒤뚱 달리고 있었는데, 딱 보아하니 녀석이 독재자였다.

'왜 발동 안 한 거지?'

내심 의아했다.

다른 사람으로 잘못 지정이 된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려가던 상태 그대로 권총을 겨눴다.

80미터 거리에서, 권총으로 정확히 맞추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궤도가 단 0.1도만 틀어져도 아예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 때문.

거기다 지금처럼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확률이 낮아진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탕! 탕!

'좋았어.'

정확하게 맞출 자신이.

"커헉······!"

"윽!"

독재자를 호위하던 두 명의 남성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수장 각하!"

그러자 복도 끝에 주차되어 있는, 대형 세단에서 세 명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나는 녀석들 또한 가볍게 총알 한 발씩 먹여주었다.

탕! 탕! 탕!

"으윽!"

'쯧, 마지막 한 발은 빗맞았군.'

문을 열고 튀어나오다, 그대로 총알을 맞은 채 고꾸라지는 두 명의 남자.

다만, 운전석에 있던 남자는 쇄골을 맞은 탓에 죽지 않은 상태였다.

'서브 미션을 수행해야지, 참.'

탕!

그리고 독재자를 향해 겨누던 나는, 허벅지를 맞춘 뒤 녀석에게 다가갔다.

총은 세단의 운전석 뒤쪽을 겨눈 채로.

'서브 미션 수락.'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어? 미안하다. 너가 아니네?'라고 얘기하기.

[보상 : 130,000 P]

"끄으으으윽!"

허벅지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독재자.

―이럴 수가! 여기까지 뚫렸다고?

―A팀한테 연락은?

―모두 두절됐습니다!

―젠장, 서둘러!

지하의 입구 쪽에서 우르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보다 빠를 수는 없을 테니까.

"뭐, 뭐냐? 용병? 특수부대? 혹시 얼마에 고용됐지? 내가 그 10배를 주마! 그러니 제발!"

독재자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한다.

나는 그래서 짧게 대답했다.

"10억 달러."

"뭐?"

"10억 달러라고."

"······!"

내가 1조 원을 부르자, 당혹스러워하는 독재자.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죽는 순간에도 그 돈을 아까워하다니.'

녀석에게 다가가, 우악스럽게 머리칼을 잡았다.

'흠, 흠. 표정 관리.'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뭐야? 내 타깃은 너가 아닌데? 아, 미안하다."

"이런 미친······!"

독재자가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트렸다.

어금니를 깨문 채,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

현재 녀석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잘 가라."

"뭐? 내가 아니라······!"

탕!

나는 미련 없이 독재자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후우.'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이걸로 승급전은 끝.

고위 리그.

나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장벽을 넘어섰다.

이제 남은 건 딱 하나······어?

'뭐야?'

왜 종료 콜이 안 뜨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타깃을 제거했는······.

'아, 씨발.'

그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

끝끝내 발동하지 않은 복수의 칼날.

그리고 1조 원이라는 돈에 당황하던 표정.

그것들을 종합하자,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했다.

'이 새끼, 대역이었어.'

즉, 눈앞에 쓰러진 인물이 독재자가 아니라는 것.

< 192화. 여우 사냥(3) > 끝

< 193화. 여우 사냥(4) >

서초구 내곡동.

반원의 곡선 형태로 지어져 있는 건물.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指向한다>

입구에 원훈을 새긴 바위가 놓여 있고, 그 위로 태극기가 펄럭인다.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이자, 대공 관련 최고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단체.

국가정보원.

"팀장님! 빨리 들어오셔야 합니다! 빨리요!"

"예, 맞습니다. 까치 7호가 전달해 온 정보니까 틀림없어요!"

"뭐? 어디서 문의가 들어왔다고? CIA가 왜?"

그곳은 현재 한바탕 난리가 난 상태였다.

건물 내부에서 일하던 모든 직원이 전화를 붙잡고, 서류를 뽑으며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03시경, 이곳에서 총성이 울렸다고 합니다. 청사와 관저에 딸린 초소 앞입니다."

"세 개의 초소 중 가장 안쪽이군."

대공수사팀 윤철우 과장은 빔 프로젝터로 위성 지도를 띄어놓은 채, 회의실에 자리한 10명의 남자들에게 설명했다.

"이후 까치 7호가 보고하길, 총격전이 벌어진 뒤 한 사람이 관저로 향했으며, 이후 수많은 사망자가 실려 나왔다고 합니다."

"인상착의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망자 규모는 어떻게 되지?"

"100명가량입니다."

직속상관인 소진우 2차장의 물음에, 윤철우 과장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흠, 100명가량이라······. 그 정도면 관저를 호위하던 녀석들도 거의 다 사살됐다는 건데."

"저희가 파악한 걸로는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독재자가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군. 북한 내부 동향은?"

"비상사태에 돌입했습니다. 호위사령부가 평양을 봉쇄했으며, 전군이 무장한 채 대기 중입니다. 이 내용은 국방부에도 전달되어, 우리 군도 현재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어 있습니다."

윤철우 과장의 말에, 회의실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사람.

팔짱을 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 사람 등등.

모두들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흠, 혹시 독재자가 사망했을 확률은 어떻게 됩니까?"

가장 상석에 앉은 중년인.

국정원장의 물음에, 대북 업무를 담당하는 3차장이 입을 열었다.

"제로입니다."

"백 명이 넘게 죽었는데도요?"

"예. 고작 한 명으론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망자 규모가 제법 되긴 하지만, 내부엔 안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루트가 마련되어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974부대원들이 막는 사이 안전한 곳으로 몸을 빼냈을 겁니다."

"아뇨, 전 생각이 다릅니다."

3차장이 단언하자, 반박하고 나서는 2차장.

그 모습에 국정원장이 팔짱을 낀 채, 말해보라는 듯 2차장을 향해 턱짓했다.

"근거는요?"

"우리 또한 만일에 대비해 암살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사내社內 최고의 브레인들이 모여 독재자를 암살할 방법을 연구했죠."

"흐음, 계속 얘기해 보세요."

"당시 업계 스페셜리스트들을 투입시킨다고 가정했음에도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북한에 침투하더라도 평양으로 가기 전에 모두 사살당할 수밖에 없더군요.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말입니다."

"······."

"그리고 평양에 도착해서도 문제였습니다. 우리와 다르게 북한은 각 구역마다 순찰 병력을 배치해 두니까요. 그 경계망을 뚫고 1호 청사까지 다가간다? 신분을 세탁해 위장 잠입하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2차장의 말에 국정원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단어만 바꿨을 뿐, 3차장이 얘기한 것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

"결국 3차장님의 말씀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아뇨, 근데 결론적으로 그 제로에 가까운 일을 누군가가 해내지 않았습니까? 결국 사살했을 가능성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무시해선 안 된다라······."

"이쪽 업계는 알려지지 않은 스페셜리스트가 무척 많습니다. 그들 중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흐음, 쉽지 않군요. 아, 참. CIA에서도 연락이 왔다고 하던데?"

국정원장의 말에,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던 30대 후반의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외정보국을 맡고 있는 류대승 국장이었다.

"예. 혹시 이번 사태에 대해 아는 바가 있냐는 물음이었습니다만, 우리가 벌인 짓 아니냐는 걸 돌려서 얘기하는 뉘앙스였습니다."

류대승 국장의 말을 1차장이 이어받았다.

"사실상 독재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울 만한 곳이 몇 곳 없으니까요. 그 중 우리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겠죠."

그러나 1차장의 말에 난색을 표하는 국정원장.

"우리라고 해도 이득 볼 게 없지요. 아니, 현 시국에선 손해 볼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독재자를 죽인다고 해서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통일이 된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 하지만 주변 시선은 그럴 거란 뜻이었습니다. 이봐, 요원 중에서 연락 두절된 자가 있나?"

1차장의 물음에 윤철우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까치가 둥지를 사수 중입니다. 저희 쪽은 절대 아닙니다."

"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원······."

국정원장의 혼잣말에, 회의실에 자리한 사람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낸 건 하나도 없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두들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삐―

―원장님, VIP께서 호출하셨습니다. 바로 청와대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그때, 인터컴이 울리며 전해진 지시.

"예. 바로 나갈 테니까 차 대기시키세요."

―알겠습니다.

국정원장이 정장 상의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낸 건 없지만 이거라도 보고하고 와야겠군요. 차장님들께서는 계속 정보를 모아주세요."

"예."

"최우선은 사살 여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부 동향. 어느 단체인지는 가장 후순위입니다. 일단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니까요."

"알겠습니다. 이봐, 팀원들 모두 모이라고 해. 시간 없으니 서둘러!"

그때부터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국정원이 들썩였다.

하지만 국정원장의 지시에도, 사람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궁금증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혼자서 저기까지 뚫고 들어간 저 괴물은 도대체 누구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 * *

'하······.'

눈앞에 쓰러진 인물이 독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난 줄 알고 긴장을 풀고 있었던 탓인지, 더욱 허탈했다.

챙! 땡그랑―

'뭐야, 이건.'

그때, 세단의 운전석 쪽에서 내 발치로 떨어지는 작은 돌멩이.

마치 악어의 그것처럼,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돌멩이같은 데다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는 딱 하나 뿐이었다.

'수류탄······!'

그 순간 나는 재빨리 스킬을 사용했다.

[지구인 '송윤일'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4평 정도 크기의 어두운 방 안.

'여긴?'

각종 필기구와 공책으로 어지럽혀진 책상, 방 한쪽을 가득 채운 침대, 그리고 옷장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침대 위에는 웬 20대 중반의 남성이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총알이 빗발치던 직전의 상황과 다르게, 너무나 평화로운 풍경.

'송윤일의 집 안이군.'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 상황.

만약 바깥이었다면 곤란한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었으리라.

'후우,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겠어.'

인벤토리에서 당소소에게 얻은 수면제를 꺼낸 나는, 자고 있는 송윤일의 입에 뿌렸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다른 가족들에게도 똑같이 수면제를 사용했다.

이 정도면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 내가 한 일은.

'사이즈가 맞았으면 좋겠는데.'

피로 범벅된 옷을 갈아입는 것.

송윤일의 옷장에서 무난한 상, 하의 한 벌씩을 꺼낸 나는, 화장실로 가서 피를 씻어 냈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 머리맡에 2골드를 꺼내 올려두었다.

이걸로 서울을 돌아다니는 건 안심.

'어디 가서 조금이라도 쉬어야겠어.'

문을 열고 나서니, 시원한 밤바람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걷자, 흥분됐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았다.

'후우, 설마 대역일 줄이야.'

그리고 향한 곳은 24시간 운영하는 카페.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미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다.

'이제부턴 더 어려워지겠군.'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독재자는 분명 꽁꽁 숨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누군가가 암살을 시도한 상황.

제2의 나, 제3의 내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 사망 여부와 관계없이, 더 깊숙이 숨어들려고 하겠지.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시 북한에 침투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한층 촘촘해진 호위망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반드시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내주지.'

고위 리그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다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후우. 할 수 있다.'

영리한 여우는 굴을 여러 개 판다고 한다.

각종 은신처, 호위 부대, 거기다 대역을 세울 정도로 철두철미한 독재자.

그런 녀석을 잡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굴에 연기를 피워, 여우가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

'하얗게 불태워 주겠어.'

그때부터 나는, 영리한 여우를 사냥할 궁리를 시작했다.

└와 여기 전투 스케일 미쳤네 ㅋㅋㅋㅋㅋㅋㅋ

└ㄹㅇ ㅋㅋㅋ 왜 지구 애들이 검만 잡으면 멍청해지는지 알았음 ㅋㅋㅋㅋ 가만히 서서 손가락만 까딱하면 픽픽 쓰러지는데, 누가 검을 씀?ㅋㅋ

└개인적으로 총격전이 박진감 넘치더라. 은엄폐하고 총 쏘고 ㄷㄷ 피지컬이 좋아야 하는 냉병기랑 다르게, 전략이나 전술이 개입할 요소가 넘쳐서 더 흥미로움. 복도를 점거하는 방식이라든가, 침투 등등.

└근데 도대체 저 빠른 총알을 어떻게 피하는 거냐?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거임

└ㄴㄴ 렌은 피한 게 아니라 미리 궤도 읽은 거임. 어차피 총알은 일자로 쭉 뻗어나가니까 궤도 안에만 없으면 됨.

└근데 그게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겨누고 있는데 어떻게 다 읽음?

└아! 이제 알았닼ㅋㅋㅋ 원래 지구에서 특수부대 출신이었던 게 아닐까? 그니까 저런 총격전 경험도 많아서 궤도를 읽고 피할 수 있는 거지 ㅇㅇ 어때? 내 추리가 제일 그럴듯하지 않음?

└ㅋ? 렌 상대하던 애들은 그럼 일반인이었냐?

└어... 그것도 그러네..?ㄷㄷ

16시간 후.

강원도 고성의 외딴 지역에 방을 구한 나는, 마지막으로 장비들을 점검했다.

"읍읍! 읍!"

방 한 켠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소아성애자 강간범.

녀석은 내가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때 사용할, 세이프 포인트로 잡아둔 놈이었다.

[표식 목록]

[지구인 '림혜주']

[지구인 '김정대']

[지구인 '지앙훈밍']

'이 정도면 됐어.'

필요한 장비는 모두 착용했고, 컨디션도 완벽하다.

거기다 강간범 새끼도 팔다리를 다 부러뜨린 채, 움직이지 못하도록 칭칭 감아뒀다.

준비는 끝.

스르릉!

"읍읍! 으읍!"

서슬 퍼런 장검을 뽑아 들자, 발광하는 강간범.

녀석의 바지 가랑이 색깔이 진해졌다.

지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쯧.'

내가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빼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

나는 녀석을 무시한 채 스킬을 사용했다.

'가 볼까.'

띠링!

[지구인 '김정대'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시야가 바뀌자마자 크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푸슈우우우욱!

일격에 누군가의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아마 표식에 등록되어 있던 김정대의 얼굴일 것이다.

"······?"

"······?"

김정대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20명 정도의 북한군들.

놈들은 피를 흠뻑 맞은 채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이게 무슨······?"

비현실적인 상황에 몸이 굳은 모양.

"자, 장군님이 갑자기······."

그와 동시에 책상을 밟고 뛰어넘은 나는, 남은 녀석들에게도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헉!"

"이런 미친!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순식간에 난도질당하는 20명의 북한군.

'이 녀석은 남겨놔야겠네.'

나는 그 중 딱 한 명만은 턱을 때려 기절시켰다.

띠링!

[지구인 '김광성'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이후 침투할 때 경유할 포인트를 만들어둬야 했으니까.

'이 정도 계급의 녀석이면 되겠지.'

기절한 북한군의 계급장엔 별 하나가 그려져 있다.

한마디로 장성이라는 뜻.

놈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든 나는, 녀석을 질질 끌며 방을 빠져나왔다.

"······?"

탕! 탕! 탕! 탕! 탕!

그리고 복도에서 총을 든 채 경계를 취하고 있는 북한군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으아아악!"

"침입자다! 놈이 장군님들을 죽이고 나왔, 윽!"

아무래도 비상사태다 보니, 실내에서도 모두 총을 소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로 내부에 있는 병력은 끝.

바닥에 떨어진 소총 하나를 주워 밖으로 나오자, 육각형 모양의 건물 하나가 보였다.

'위치는 나쁘지 않아.'

그 옆에는 제법 세련되어 보이는 빌딩 하나가 존재했다.

백두산 건축 연구원.

어제 내가 침입했던 1호 청사에서, 고작 8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스킬:뇌신>을 활성화합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뇌전을 끌어올린 나는 근처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화르륵!

그러자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나무.

"헉, 반동분자가 여깄다!

"어서 사령부에 보고, 으윽!"

곳곳에 불을 붙인 나는 그때부터 평양 시내를 활보하며 총을 난사했다.

'어디, 언제까지 연기를 참나 보자고.'

독재자에게, 정말 지독한 연기를 피워줄 생각이었다.

< 193화. 여우 사냥(4) > 끝

< 194화. 여우 사냥(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