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Episode 20] BLOODY FEST (4)
쿠구구구구-
건물이 부서지며 생겨난 콘크리트 가루가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장성준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파괴의 현장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아직 밤인데다 흙먼지가 전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염력 사용자인 그는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느껴지고 있었다.
'확장'
염력을 이용한 공간 감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과 함께 장성준의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
그동안 꾸준히 염력을 사용한 덕분에 그의 공간 감지 능력은 족히 수백 미터까지 뻗어나가는 게 가능했다.
'이럴 수가.'
그렇기에 남들보다 먼저 현장의 실체를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말도 안 돼.'
목표 건물이라던 호텔의 자리에는 고층 건물 대신 수십 미터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폭탄이라도 터뜨린 듯한 흔적이었다.
또한 주변 건물들은 완전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은 반파된 상태였으며, 폭발의 중심지에서 백여 미터가 떨어진 곳의 건물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재현님께서는 도대체....'
폭발이 있기 바로 전 김재현의 경고가 있었고, 그 이전에 목표 건물에서 상당한 거리를 떨어져 있기를 주문받았다.
그러니 이 광경은 김재현의 힘에 의한 것이 확실했다.
'이게 진정...'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광경이란 말인가.
허나 장성준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김재현의 계산보다 훨씬 위력이 약해진 상태의 것이라는 걸.
바벨은 너무 많이 가속된 상태였다.
공기와의 마찰로 인해 생겨난 열로 바벨의 질량 중 절반 이상이 그대로 증발해버렸고, 그로 인해 파괴력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그로 인해.
꿈틀.
"응?"
장성준의 염력이 크레이터 안쪽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감지했을 때였다.
[다들 조심하세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김재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헉!'
장성준의 감각에 꿈틀거리던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기겁해서는 소리쳤다.
"다들 피해요!"
그리고 그것은 이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던 핏덩이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꼴이었다.
'위험해!'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느끼며 장성준은 자신의 몸에 염력장을 단단하게 둘렀다.
한겹, 두겹 세겹.
그렇게 그가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푸욱!
그 무언가는 손쉽게 장성준의 염력장을 뚫고 그의 배를 관통했다.
"커헉!"
그리고.
꾸욱꾸욱
그것을 통해 장성준의 피가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자신의 배를 관통한 것이 붉은 피로 만들어진 촉수라는 것을 인지한 장성준이 정신을 집중했다.
"흡!"
염력을 날카롭게 벼려 자신의 배를 관통한 촉수를 향해 휘둘렀다.
촤아아악!
촉수가 잘리며 그곳에서 빠져나온 검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아마도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 중 일부는 필시 장성준의 것이 분명했다.
"허억, 허억."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코앞에 뒀던 장성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촉수가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촉수와는 달리 천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을 제대로 맞은 탓에 놈도 정상은 아닌지 쩔뚝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슈슉!
장성준의 감각에 어떤 존재의 뒤쪽으로 누군가가 나타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분이다! 재현님의 아버지라던..!?'
그의 무위를 두 눈으로 목격한 장성준이었다.
과연 김재현의 가족답게 엄청난 능력자였는데, 다리 위에서 혼자서 폭주한 흡혈귀들을 죄다 쓸어버리던 그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마치 장판교의 장비처럼 혼자서 그 많은 흡혈귀들을 막아서는 장면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었으니까.
그런데.
'...어?'
자신을 공격했던 놈과 김동혁의 움직임이 한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염력으로 전해져 오는 감각에 오류가 생긴 듯한 감각이었다.
콰아앙! 콰아아앙-!
멀리서 폭음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내 그것이 자신의 감각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장성준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가 끼어들 수 있을만한 수준이 아니다.'
염력을 사용해 싸움을 보조하려던 생각은 자신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쿠우웅! 콰르르르르-
그나마 뼈대를 유지하고 있던 옆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장성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였다.
꿈틀
바닥에 고여 있던 핏물이 꿈틀거렸고,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장성준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화아아악!
장성준은 곧바로 염력을 사용해 그곳에서 멀리 벗어났다.
그 직후.
꿀럭꿀럭.
핏물이 부풀어 오르더니 그곳에서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한 흡혈귀가 나타났다.
몸 전체가 핏물로 이루어진 기형적인 흡혈귀였다.
그리고 장성준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장성준은 침착하게 염력으로 된 칼날을 만들어 그것의 심장을 노렸다.
서걱!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제압되는 듯 했으나.
촤아아악!
이내 갈라진 핏물이 장성준을 덮쳤고,
치이이이익-!
장성준의 몸에 달라붙은 핏물은 그의 몸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그것은 그곳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도시의 밤.
보름달이 되기에는 아직 조금 모자란 달이 거리를 환하게 비춰주었고, 핏물로 이루어진 흡혈귀들과 가신들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시민 김 건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김건은 이미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시민 장성준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장성준은 이미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어마어마한 광경을 본 탓인지 가신들 중 두 명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하면서 한계치가 2개나 늘어났다.
그러나 가신 등록의 한계치가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도 나는 인상을 펼 수 없었다.
'어째서 저놈들이?'
지금 가신들과 싸우고 괴물들은 상급 흡혈귀들이 분명했다.
'일곱 마리.'
핏물로 이루어진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들의 특징적인 외모 덕분에 한 눈에 놈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그놈과 함께 찾아왔던 여자 흡혈귀를 제외하고는 다 모여 있군.'
상급 흡혈귀를 사냥했다는 알림이 단 하나도 뜨지 않기에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이야.
'그놈에게 잡아먹힌 건가?'
놈들의 꼴을 보아하니 자신들이 그분이라 칭하며 떠받들던 그놈에게 잡아먹힌 모양이었다.
'골치 아프군.'
문제는 잡아먹히면서 놈들의 힘이 더 증폭된 것 같다는 점이다.
'게다가 약점도 없어졌다.'
심장을 박살 내면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가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전신이 핏물로 이루어진 탓인지 놈들의 몸에는 심장도 뭣도 없었기 때문이다.
'피어싱 화살, 소환.'
김가영의 화살을 사용해 놈들의 가슴을 정확하게 관통해도 소용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효력이 있는 건 이준혁의 능력과 쌍둥이의 능력 정도인가.'
물을 컨트롤하는 이준혁과 피를 얼리는 문지훈과 문상훈 형제의 냉기 발산 능력 정도가 능력적 특성으로 인해 놈들에게 먹히고 있었고, 나머지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들 무리에 김다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레벨을 올린 김다정의 힐 능력은 심각할 정도의 중상조차도 단번에 회복시킬만큼 그 능력이 뛰어났다.
물론 힐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성준 퀘스트 부여, 퀘스트 보상 완전 회복.'
[시민 장성준이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비용 100,000,000 원이 소모됩니다.]
돈이면 안 될 게 없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퀘스트 부여를 활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일인당 세 번 정도가 한계다.'
전장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가신들이 밀리고 있었다.
'좋지 않아.'
죽지 않는 흡혈귀들을 상대로 전투를 이어나가봤자 체력만 소모할 뿐이었다.
게다가 놈들은 한 놈 한 놈이 전부 상급 흡혈귀였다. 피를 활용한 고유 능력을 사용하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놈들은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다.'
결국 본체를 죽여야 이 상황이 끝나는 것이다.
'아빠 혼자서는 벅차다.'
바벨을 떨군 것의 충격과 김다정의 축복 덕분에 간신히 힘의 균형을 이루고는 있었지만, 점점 아빠 쪽이 밀리고 있는 형세였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가는.."
파국이었다.
퀘스트 부여의 기회를 다 소모하고 내 지원이 끊기게 되면 가신들은 저 핏물 흡혈귀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후 저것들이 아빠와 진조의 싸움에 합류하게 되면 결과는 뻔했다.
'이왕이면 아빠가 사냥해주길 바랐는데.'
현재 최대 효율로 경험치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혈육이 직접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받는 모든 버프와 함께 5배의 경험치 증가 효과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경험치 손해를 보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죽이려고 했던 놈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아쉬워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밖에 없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저기 있는 가신들 중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오언주씨. 타겟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수 있을까요?]
오언주가 빠지게 되면 가신들이 조금 힘들어지겠지만, 꼭두각시 흡혈귀들을 조종하는 본체를 처리하면 어차피 끝날 일이었다.
"크르릉!"
오언주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땅을 크게 박찼다.
방금전 폭발의 여파로 창문이 모조리 깨져나간 건물의 벽을 밟고는 폭발의 중심지를 향해 점프했다.
콰아아앙!
콘크리트 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오언주의 몸이 크레이터의 중심지를 향해 나아갔다.
쿠우웅! 콰직-!
흡혈귀 놈과 아빠는 살벌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진조의 주변을 휩쓸고 있는 핏물이 끊임없이 아빠를 공격했고, 호신강기를 전신에 두르고 있는 아빠는 그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호신강기 위로 희미한 빛은 김다정의 축복이었는데, 희미한 것을 보면 축복의 효력이 곧 끝난다는 소리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텔레포트를 사용하여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놈의 등 뒤를 잡았지만,
빼어억!
아빠의 발차기는 순식간에 생겨난 피막의 방어막에 막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다시 핏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콰과광!
아빠를 향해 모여들던 핏물이 그대로 폭발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보기만 해도 살벌한 싸움은 쉽사리 끼어들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가까이 붙을 수 있을까요?]
"크릉...."
망설이는 오언주의 모습을 보며 레벨을 올려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50레벨인 그녀를 51레벨로 만들기 위한 비용은 무려.
'300억이지.'
부담하지 못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다.
흡혈귀들과의 전투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가신 관리, 오언주 레벨업.'
1500억 이라는 거금을 들여 그녀의 레벨을 55레벨로 만들자, 망설임으로 흔들리던 오언주의 눈동자가 아빠와 진조의 전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릉!"
해볼만하다 판단한 오언주가 곧바로 진조를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갑작스레 놈의 주변에서 일렁거리던 핏물이 일시에 폭발했다.
그리고.
"크릉?"
쏴아아아아아-
주변의 땅이 온통 붉어졌다.
마치 피의 강 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이건...?'
오언주의 시선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김 건의 시야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였다.
도시 전체에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울산 전체에 깃든 죽음과 피가 정확히 놈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외곽에서부터 시작된 피의 강이 놈을 향해 흘러들어가는 구조였다.
마치 그 모습이 피의 축제를 벌이는 것 같았다.
'이게 놈들이 말하던 피의 축제인가.'
꽈르르릉!
거대한 번개가 몰아치며 크레이터 중심에서부터 자욱한 피 안개가 흘러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그 속에서 광기에 찬 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을.
불길한 핏빛 기운이 놈의 몸 전체를 둘러싸며 그 크기를 불려나가던 순간.
"크릉!"
오언주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영역 전개.'
우우웅!
이번에는 오언주를 중심으로 밝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반경 15m의 좁은 반원에 불과했지만, 그것에는 강력한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전에 올려두었던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이 레벨 6이 되면서 새롭게 개방된 기능의 '사전 준비' 과정이었다.
신뢰도 100, 충성도 100을 찍은 가신을 기준으로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지속시간도 짧은 스킬이었지만.
'강림.'
번쩍 -
효과 하나는 누구보다 확실한 스킬이었다.
나를 둘러싸던 풍경이 번쩍이며 점멸하였고, 천천히 눈을 뜨자.
"캬아아아악!"
사방이 온통 핏물로 가득 찬 지옥도의 중심에서 검은 불꽃에 휩싸인 흡혈귀들의 정점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놈을 향해 말했다.
"축제는 끝났다. 빌어먹을 모기 새끼야."
093화 [Episode 20] BLOODY FEST (5)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강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강림을 위해서는 하나의 사전 작업이 필요했는데, 내가 이동할 곳을 영역화 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이곳은 집구석 영역이나 전초기지 안과 같은 성질을 띠고 있었다.
굳이 놈의 앞에 강림하여 도발을 한 것은.
[집구석 절대자에게 적대적인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나에게 적대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는 시스템의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제거합니다.]
간결한 알림과 함께.
퍼억!
진조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상황이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놈의 생명력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끈질겼다.
촤아아악-!
머리를 잃은 놈의 몸이 핏물이 되어 터져나갔다.
그리고.
"크헝!"
수인화 상태인 오언주의 다급한 울음이 들려왔다.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그녀의 두 눈이 내 등 뒤를 향해 있었다.
그 직후.
콰아아앙!
등 뒤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충혈되다 못해 완전히 빨갛게 물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진조가 그곳에 있었다.
녀석이 기습적으로 뻗어낸 핏물의 촉수가 내 앞쪽에서 멈춰서는 부들거리고 있었다.
지잉
나를 중심으로 반경 1m 정도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방어막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흡혈귀 놈들의 본체가 심장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절대자의 눈.'
스킬을 사용해 놈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강림하기 전보다 움직임이 확연하게 둔해졌으며, 찌그러진 표정과 거친 숨결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원래라면 지금 이 공간은 시민권 없이는 움직일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나의 허락 없이 이곳에 침입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 불꽃에 무언가 있다.'
화르륵!
검붉은 불꽃이 여전히 놈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크아아악!"
고통을 버티지 못한 진조의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 울렸다.
그리고 나는 놈의 전신을 불태우는 검붉은 불꽃을 보며 무언가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 싸우고 있어?'
절대자의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검은 기운과 붉은 기운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두 개의 불꽃 중에 검은 기운은 하동건이 사용하는 기운과 꼭 닮아 있었다.
'이건...?'
그것을 인지했을 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검은 기운이 나에게서 비롯되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놈이 감히 내 영역 안에서 저항할 수 있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놈의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 붉은 기운 덕분이구나.'
일전에 투명 방벽을 뚫을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이렇게 내 영역 안에서 내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도 저 붉은 기운의 힘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때.
[집구석 절대자에게 적대적인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제거합니다.]
다시 한 번 시스템 알람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진조의 몸과, 나를 향해 뻗어 나온 피의 촉수가 울긋불긋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퍼억!
이번에는 공중에 떠 있던 놈의 몸이 아예 통째로 터져나갔다.
털썩!
사방으로 터져나간 놈의 육편이 피로 적셔진 바닥 위에 떨어져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러나.
'시스템 알림이 뜨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냥 완료 알림이 뜨지 않는다는 것은 놈이 죽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방금 전에는 머리뿐만 아니라 분명 심장이 함께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리였다.
'...심장이 본체가 아니라고?'
그때였다.
부글부글
바닥을 적시고 있던 핏물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더니 이내 붉은 안개를 피어 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급격하게 좁아졌지만, 절대자의 눈을 유지하고 있던 내게 놈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언주의 등 뒤에서 피 안개가 뭉쳐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즉시 스킬을 사용했다.
'보이지 않는 손'
그리고 놈의 몸이 실체화 되는 순간.
푸욱!
오언주를 노리려고 하던 놈의 심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 꿰뚫었다.
그리고.
'거대화'
퍼억!
심장을 관통한 보이지 않는 손이 거대화하며 놈의 전신이 박살났다.
그러나 박살난 놈의 신체는 금세 피 안개와 동화되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군.'
절대자의 눈은 단순히 그 장소를 보고, 공간을 느끼는 데 그치는 스킬이 아니었다.
3레벨 때 개방된 '현자의 눈'기능은 영역이 아닌 곳에서는 겨우 몬스터의 레벨이나 간단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영역 안에서의 기능은 그 수준이 달랐다.
제대로 된 영역 안에서의 절대자의 눈은 스킬의 이름에 '절대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만큼의 역할을 해 주었다.
공간 전체를 관조하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순식간에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놈의 본체는 심장이 아니라 여기 있는 피, 그 자체다.'
진조가 자꾸만 살아나는 이유.
그것은 실체화 되어 있는 놈의 몸이 본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손이나 발처럼 신체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놈의 본체는 머리도, 심장도 아닌 여기 바닥에 드넓게 깔려 있는 핏물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 핏물 전체를 불살라야 했다.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며 내가 원하는 바를 요구했다.
그 순간.
파아앗-
[집구석 절대자에게 적대적인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제압합니다.]
퍼억!
사방에 깔려 있던 피 안개와, 바닥을 적시고 있던 핏물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역시'
시스템의 발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집구석 영역이 확장되어 갈 때마다 어째서 누군가는 시민권 부여가 가능한 개체로 인식되고, 어떤 생명체는 제거해버리는 것일까.
시스템 알림에서 나오는 '적대적인 개체'라는 표현이 무척이나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시스템이 절대적이었다면 일전에 제갈성규가 내 영역 안으로 들어와 시민들을 흡혈귀로 만들거나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 기준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상황에 어느 정도 들어맞고 있었다.
'처음에는 놈의 머리가 터졌고, 그 다음에는 심장을 중심으로 몸이 터졌다.'
시스템이 힘을 발현하는 것의 기준은 내 의식과 깊게 관여가 되어 있다면 지금 상황이 모두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놈의 본체가 핏물 그 자체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힘 조절도 성공이군.'
지금까지는 '제거'한다고 표현되던 시스템 알림이 '제압'한다는 표현으로 변했다.
'시스템의 자동 반응 같아 보이는 것도 내 의지로 조절이 가능하다.'
이번에 확실히 증명이 된 셈이었다.
가설이 맞았다는 것에 희열이 느끼며 완벽하게 제압된 진조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땅을 가득 적시던 많은 양의 핏물과 주변을 가득 메우던 피 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내 눈앞에는 가녀린 한 남자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몸을 덜
덜 떨고 있었다.
더 이상 검붉은 불꽃이 놈의 몸을 불태우는 일은 없었다.
'제압'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놈이 사용 가능한 모든 기운과 힘을 박탈시켰다는 것.
심지어 시스템은 놈의 젊음까지 앗아갔다.
흡혈귀가 가진 힘의 원천인 생명력까지 극도로 제압해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단숨에 늙어버려 반쯤 대머리가 된데다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얇고 새하얗게 새어 버린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봐."
그냥 이대로 죽여 버릴 수도 있었지만, 진조에게 궁금한 점이 남아 있었다.
"네가 가지고 있던 그 붉은 힘의 정체는 무엇이지?"
그리고 천천히 놈의 얼굴을 제압하고 있던 힘을 풀어주었다.
한순간에 늙어버린 남자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참담한 표정의 남자는 내 물음에 대꾸하지도 않고 내게 물어왔다.
"너는 무엇이냐?"
놈은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물어본다고 가르쳐 줄 리가 없나.'
애초에 정보를 빼내기 위해 놈을 제압한 건 아니었으니,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흡혈귀 놈은 이빨이 사라져 어눌한 발음으로 계속해서 물어왔다.
"어째서 너 같은 존재가, 현세에- 쿨럭!"
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검은 피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한계인 듯 했다.
진조는 눈물마저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아- 위대하신 분과의 연결이・・・ 축복이...!"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오언주씨."
"...네."
"마무리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오언주는 현재 수인화가 풀려 있었다.
그녀의 몸도 상당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강림을 사용하기 직전, 진조의 힘이 해방되면서 울산 전체가 피로 물들었을 때 이곳에서 강력한 힘의 파장이 터져나갔다.
그로 인해 가장 가까이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아빠는 태화강 인근 지역까지 날아가 버렸을 정도였다.
당연히 근처에 있던 오언주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진조에게 접근을 해 주었다.
그러니 이놈의 마무리는 오언주에게 맡기는 것이 맞았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도 그게 맞고.'
흡혈귀들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가신들에게 돈을 쏟아 부었다.
새롭게 합류한 이들도 웬만하면 전부 돈을 들여 최대한 레벨을 올려주었으니 당연했다.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비효율의 극치란 말이지.'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소극적으로 투자했다면, 분명 많은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푸욱!
모든 힘의 원천을 봉인당한 진조는 오언주의 손이 심장을 꿰뚫는 것과 동시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한순간에 추하게 늙어버린 놈의 몸이 심장에서부터 사라지며 정산되었다.
[진조(眞) (Lv. 62)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995,858,494,923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어?'
순간적으로 내가 숫자 단위를 잘못 본 줄 알았다.
'백만, 천만, 억, 십억...'
진조를 사냥하고 나온 돈은 무려.
'구천구백억?'
거의 1조에 달하는 돈이 입금된 것이다.
'아니...? 이게 맞나?'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보다 진조 한 마리를 잡고 번 돈이 더 많을 정도였다.
'아무리 여러 가지 혜택이 겹친다지만....'
아마도 이 거금을 만들어내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지금도 머리 위에 놓여 있는 왕관 덕분일 것이다.
왕관이 시민들이 받는 효과와 오언주가 가지고 있는 자작의 칭호 덕분에 최종적으로 원래 정산금의 9배를 받게 되니까.
그리고.
'정산금이 이만큼 엄청나다는 것은....'
당연히 경험치의 양 또한 말도 안되게 엄청나다는 것을 뜻했고.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레 폭발적인 스킬 레벨 상승으로 이어졌다.
'아, 시발 좆됐네.'
그 직후.
슈슉-
강림의 시간이 끝나며 내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
미칠듯한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094화 [Episode 21] 정비 (1)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과 내가 확인하지 못한 시스템 알림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집구석 선포가 30레벨에 도달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3개 획득합니다.]
스킬 포인트 획득 알림과.
[시민의 숫자가 100,00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의 숫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별의 힘'을 개방합니다.]
시민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새롭게 개방된 기능이었다.
시민 정보를 확인해보니 일종의 강화 시스템이었는데, 돈을 들여서 시민을 강화 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강화를 하면 별 하나가 달리면서 전체적인 능력치가 올라가는 식이었는데, 꽤나 쓸모 있어 보였다.
당연히 시민의 테두리 안에는 가신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가신들을 강화가 가능해졌다는 말과도 같았다.
'왕관 덕분에 강화 효과도 2배로 적용될 테니.'
다른 시민들의 강화는 가신들 강화를 모두 끝낸 이후에 생각해도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고통 속에서 기절했다가 곧바로 고통에 깨어나기를 반복하던 시간이었다.
각성과 기절을 수도 없이 반복했던 탓에 정확한 시간 흐름을 인지하기 어려웠다.
'하루 정도 지난 건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쳐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진조를 죽이고 레벨 업을 한 것이 한밤중이었으니 최소 몇 시간은 흘렀다는 이야기였다.
'큰일 날 뻔했네.'
영역이 한꺼번에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러나 나는 고통 속에서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줄 여유가 없었다.
'시민권 부여를 자동으로 해 놔서 다행이다.'
울산에서 홈플러스로 쏟아지는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임시로 자동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부산에 있던 이들도 덕을 봤다.
만약 자동화 시스템을 켜 놓지 않았다면, 새롭게 유입된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의식이 없었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 큰 고통을 받아야 했겠지.
'다행이긴 하지만... 또 일거리가 늘어났네.'
새롭게 유입된 사람 중 혹시나 흡혈귀와 같은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 열심히 살펴야만 할 것이다.
'그나저나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한꺼번에 5개의 레벨이 오른 탓인지 역대급으로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레벨이 올라갈수록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는데, 27 레벨에서 32레벨로 앞자리마저 달라진 것이다.
'절대자의 눈.'
안정을 되찾고 의식을 각성하자마자, 곧바로 절대자의 눈부터 사용해 가신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까지 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흡혈귀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전투도 없었다.
가신들은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신들 중 몇 명의 연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 명이나 죽은 건가."
김지태, 신아영, 홍격택이 죽었다.
아무런 피해 없이 작전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피해를 직접 확인하니 입맛이 썼다.
"....."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 잠시 묵념하고 상황 파악을 위해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홈플러스 작전지휘소에서 가부좌를 튼 채로 열심히 생쥐들을 조종하고 있는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예진아.]
"오, 오빠?"
그러자 서예진이 두 눈을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상황을 브리핑해 줄 수 있을까?]
서예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오빠가 지시했던 대로 지난 이틀간 생존자들의 구출을 최우선하면서 움직이고 있어. 다행히 오빠가 우두머리 흡혈귀를 죽인 이후로는 최하급 흡혈귀 들을 제외하고는 폭주가 사라져서..."
[잠깐만. 이틀간? 그 말은 내가 이틀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응."
서예진이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거지? 몸은 좀 어때? 괜찮아?"
[・・・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집이야. 금방 그리로 갈게.]
"알겠어."
절대자의 문을 사용하여 홈플러스의 작전지휘소로 이동한 나는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는데, 딱히 내가 끼어들만한 구석은 없었다.
최하급 흡혈귀는 폭주 상태라고 해도 모든 가신들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약했고, 실제로 가볍게 처리되고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생존자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케에에엑!"
언뜻 보기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하급 흡혈귀와 중급 흡혈귀들이 생존자들의 틈에 숨어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멍청한 흡혈귀들은 시민권을 발급 받았다가 그대로 정체가 들통 나게 되었고, 곧바로 장성준의 염력에 제압되어 지하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흡혈귀임이 드러난 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이 시민권을 획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민권을 획득한 상대를 죽이게 되면 막대한 '살인자' 페널티를 감당해야 했으므로 그대로 이런 식으로 가둬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형하세요.]
일일이 한 놈씩 시민권 자격을 박탈시키며 사냥했고, 모든 흡혈귀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하에 갇혀 있던 모든 흡혈귀들의 정리를 끝낸 후 서예진에게 물었다.
"생존자들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네. 언제부터 이랬어?"
"음. 흡혈귀들의 폭주가 끝난 이후부터인 거 같아."
흡혈귀들이 폭주하며 생명을 앗아가려 할 때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홈플러스를 찾아왔는데, 진조가 죽음을 맞이하며 흡혈귀들의 폭주가 끝난 지금은 굳 이 우리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히려 우리를 더 의심하는 생존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슬슬 정리하자."
"생존자들은?"
"싫다는 데 어쩌겠어. 내버려둬야지."
"하지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서예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울산으로 점점 몰려들고 있어."
"몬스터들이?"
"응. 아무래도 진조의 죽음을 느낀 것 같아."
영역의 주인이 사라졌으니 그 빈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찾아오는 셈이었다.
"흐음."
울산에 있는 사람들은 몬스터에 대한 공포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흡혈귀들이 만들어 놓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이 가축이 된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일단은 철수하자."
"괜찮을까?"
"어차피 억지로 데려와도 반발심만 커질 거야. 저쪽에서 원할 때 받아주는 게 나아."
그 과정에서 몬스터에게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다수 나올 테지만, 괜한 분란의 씨앗을 품는 것보다는 나았다.
'가신 소환.'
울산 전역에 흩어져 있던 가신들을 모두 소환한 다음 말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작전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울산의 상황을 마무리 지은 다음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영역이 굉장히 넓어졌다.'
이미 27레벨일 때도 바다 근처까지 확장되어 있던 영역은 32레벨이 된 지금은 아예 바다의 일부까지 영역 안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바다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어찌된 것이 물고기나 해양 생물 보다는 플라스틱 쓰레기 같은 것이 더 자주 보였다.
'얼마나 넓어진 건지 가늠이 안 되는군.'
영역의 끄트머리 근처의 좁은 지역만 확인하니 도대체 영역이 얼마나 넓어진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하면 되려나?'
건설 모드를 사용할 때처럼 높은 하늘에서 영역 전체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바라보니 영역이 얼마나 넓어진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이젠 별채 영역과 반쯤 합쳐진 상태가 됐구나.'
부산역 부근에서 조금 겹쳐져 있던 두 개의 영역은 이제는 절반 이상 겹쳐진 벤 다이어그램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겹쳐진 두 개의 영역이 부산의 주요 도시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기에 이제 부산 전체가 내 영역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 겹쳐진 부분 덕분에 고통이 많이 경감된 것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었다.
'만약에 이 겹쳐지는 부분이 없었다면...'
정말로 고통 때문에 쇼크사 할 가능성도 있지 싶었다.
'진짜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영역이 넓어진 것을 보고 있자니 씁쓸해졌다.
'이 넓은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숫자가 겨우 10만 명밖에 안 된다는 건가?'
총 23만 명의 생존자들 중 울산에서 구출된 사람들의 숫자가 3만 명에 달했으니 부산의 생존자는 겨우 10만 명 정도라는 소리였다.
'너무 많이 죽었어.'
부산의 인구가 약 300만 명 정도였으니 20만 명이면 생존율이 7%정도 밖에 안 된다는 뜻이었다.
몬스터가 세상에 나타난 지 겨우 몇 달이 흘렀을 뿐인데 93퍼센트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새로운 생존자들은 대부분 물이 있는 곳에 뭉쳐 있구나.'
낙동강, 수영강, 온천천 등.
괴물이 나타나고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 근처에 몰려 있었다.
'여기도 그리 상황이 좋아보이진 않는군.'
강을 바로 옆에 두어 식수는 해결했지만, 언제나 식량이 문제였다.
내부 사정을 살짝 살펴보니 그동안은 몬스터를 잡아 연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다에서 올라온 하늘 청새치와 같은 몬스터를 식량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 영역이 넓어지며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박멸해 버린 상황이었다.
'졸지에 식량을 없애버린 게 됐네.'
그나마 낙동강 근처에 있던 일부 지역은 몬스터들이 남아 있는 곳과 맞닿아 있어서 사냥을 나설 수 있었는데, 시민권을 얻은 그들이 사냥을 해 봤자 시체가 사라질 뿐이었다.
'그나마 거래소 시스템이 있어서 다행인가.'
몬스터 사냥으로 얻은 돈으로 거래소를 이용하여 식량을 충당하고 있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근처에 상점도 지어주고 시설을 몇 개 만들어줘야겠어. 사냥꾼도 몇 명 선정해주고.....'
이들을 굳이 서면까지 데려와 병합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미 자기들끼리 서열과 규칙이 모두 정해진 집단이라 억지로 끌어들이게 되면 분명 잡음이 생길 게 분명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지원만 해주면 저들 나름대로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인스턴트 던전도 좀 만들어주면 알아서 살아가겠지.'
모든 사람을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시민권을 받는 게 훨씬 좋다고는 느끼게 해 줘야지.'
이제 슬슬 시민권 부여가 가능한 숫자에도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32레벨이 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시민들의 숫자는 총 32만 명뿐이다.'
그 중 과반수가 넘는 23만 명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저렙 때는 5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레벨에 따른 수용 가능한 시민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었는데.'
레벨 당 백명, 천 명, 만 명까지.
쭉쭉 늘어나던 기준이 어느 순간부터 레벨 당 만 명으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언젠가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좀 더 신중해져야 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은 강제로 내 영역 바깥에서 살아가야 할 테니까.
'음.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여기도 각성자가 좀 많네?'
내가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낙동강 하류 지역.
이전에 울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곳에는 각성자의 비율이 꽤 되는 것으로 보였다.
'높은 등급의 힘을 각성한 사람은 거의 없긴 해도, 낮은 등급의 힘을 각성한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
우연히 서면에만 각성자의 숫자가 적었던 것뿐일까?
'어쩌면 서면은 내가 있었기 때문에 비각성자들의 생존 비율이 높았던 걸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면...'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내가 있기 때문에 각성자들의 숫자가 적은 걸 수도.'
일정 범위 안에 각성 가능한 에너지가 정해져 있다면, 내가 그 모든 것을 먹어치웠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만큼 내 힘이 말도 안 되기는 한 편이지.'
내 능력으로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일반인'과 비교했을 때, 말도 안 되게 평균치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각성자가 아니라면 몬스터를 사냥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은 몬스터 사냥에 따른 경험치를 획득하고, 강해진다.
레벨이 15레벨보다 낮은 경우에는 헬스장에서의 운동만으로도 레벨을 높이는 게 가능했다.
그러니 시민들의 평균 레벨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받아들인 시민들 전부 낮은 등급의 각성자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새삼스럽게 내 힘의 크기가 실감이 났다.
'어마어마하군.'
문득 진조가 나를 향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놈은 마치 내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묘사했었다.
나는 손을 펼쳐서 힘을 발현시켰다.
화르륵
검은 기운이 불꽃처럼 넘실거렸다.
'이게 뭘까.'
그 놈이 나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진조는 인간에서 흡혈귀가 된 게 아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시스템이 그 놈을 시민권 부여가 가능한 개체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도.
터무니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놈과의 짧은 대화에서도.
그 놈은 다른 흡혈귀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놈은 몬스터야.'
고블린이나 오크와 같은 괴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녀석은 다른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괴물인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몬스터 놈들은 어디에서 온 거지?'
오래된 질문이었다.
아파트 산책로에 고블린이 나타나고, 내가 힘을 각성하며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순간부터 쭉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
'...후우. 모르겠고. 새로운 기능이나 실험해 보자.'
별의 힘.
제일 첫 번째로 1성을 달아줄 시민은 역시.
"문병호겠지."
095화 [Episode21] 정비 (2)
하동건이 아닌 문병호를 제일 먼저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시민 문병호에게 100,000,000원을 사용하여 별의 힘을 부여하시겠습니까?]
[성공확률 : 65%]
별의 힘을 부여하는 데 확률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65%의 확률로 성공한다는 것은 즉 35%의 확률로 실패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당연히 성공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들도 많겠지만, 확률의 악랄함을 겪어본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저 35%의 확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것이다.
'한 번 시도하는 데 1억이니 들어가는 데 실패할 수는 없지.'
그렇기에 가신들 중에서도 가장 운이 좋은 문병호를 고른 것이다.
'부여한다.'
그 순간 문병호의 정보창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시민 문병호에게 별의 힘이 부여되었습니다.]
보란 듯이 성공했다.
「이름: 문병호 (Lv. 50☆) [+]
칭호: [두 번째 종] [기사] [암살자]
신뢰도 : 100 충성도:100
각성 능력:텔레포트, 투명화
경험치 분배율: 200% (+100%)
★퀘스트 부여」
[☆]
-모든 능력치가 100% 증가합니다.
'좋네.'
별의 힘은 시민에게 부여되는 효과이기 때문에 집구석 절대자의 왕관에 의해 그 효과가 2배로 증폭된다.
1성을 단 시민의 모든 능력치가 200%증가하여 적용된다는 소리였다.
문병호의 레벨을 올리는 데 들어간 비용만 수백억이다.
겨우 1억으로 이 정도 효율을 낼 수 있다면 무조건 시도하는 게 맞았다.
'다른 가신들도 무조건 강화시켜 줘야겠네.'
단순히 신체 능력만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강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스킬을 사용하는 주원료인 정신력도 강화가 될 것이다.
문병호의 뒤를 이어서 하동건, 김가영, 오언주에게 별의 힘을 부여했고, 모두 한 번에 강화가 되었다.
그러다 강덕수에게 별의 힘을 부여하던 순간.
퍽!
[실패했습니다.]
'아.'
최초로 실패 사례가 나왔다.
그리고 처음 보는 멘트가 등장했다.
[시민 강덕수에게 별빛 가루가 누적됩니다.]
'별빛 가루?'
그것의 정체는 다시 한 번 강덕수의 강화를 시도해보면서 알아낼 수 있었다.
[시민 강덕수에게 100,000,000원을 사용하여 별의 힘을 부여하시겠습니까?]
[누적된 별빛 가루(50%)가 성공 확률을 강화합니다.]
[성공확률 : 85%]
별빛가루로 인해 성공확률이 20%나 늘어나게 되었다.
85%면 열에 아홉은 성공을 한다는 소리였다.
'부여해.'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별빛 가루가 100%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퍽!
[실패했습니다.]
[시민 강덕수에게 별빛 가루가 누적됩니다.]
[시민 강덕수에게 누적된 별빛 가루가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았는데.'
어찌됐든 이것으로 별빛 가루가 가득 찼을 때의 효과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시민 강덕수에게 100,000,000원을 사용하여 별의 힘을 부여하시겠습니까?]
[별빛 가루가 가득 찼습니다.]
[성공확률: 100%]
'...부여해.'
번쩍-
[시민 강덕수에게 별의 힘이 부여되었습니다.]
성공은 했지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실패로 인해 누적된 별빛 가루가 가득 차게 되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별의 힘을 부여할 수 있게 되는 방식이었다.
'1성을 부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최소 1억에서 최대 3억이 되는 셈이군.'
나쁘지 않았다.
투자한 돈이 완전히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 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스물 한 명의 가신들을 모두 1성으로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은 30억 정도로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첫 시도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다음번에 시도했을 때 성공 확률이 무려 85%나 되니 대부분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다 됐다.'
모든 가신들에게 별의 힘을 부여하는 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수십억이 넘는 돈을 투자하여 그들을 40레벨 이상으로 만들어 준 뒤였다. 그 상태에서 겨우 몇 억을 투자하여 모든 능력치를 100%나 상승 시킬 수 있는데 돈을 아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가 부족해서 가신들을 잃는 것이 훨씬 더 큰 손해였다.
'2성 강화는...?'
첫 시작은 당연히 문병호였다.
[시민 문병호에게 300,000,000원을 사용하여 별의 힘을 강화하시겠습니까?]
[성공확률 : 55%]
한 번 강화하는 데 드는 비용은 무려 3억.
성공 확률은 겨우 55퍼센트였다.
반보다 조금 나은 정도.
두번 중 한 번은 실패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강화.'
빛이 번쩍이는 것과 함께.
[시민 문병호에게 부여된 별의 힘이 강화되었습니다.]
성공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
-모든 능력치가 200% 증가합니다.
-경험치를 50% 추가로 획득합니다.
'음?'
기존에 있던 모든 능력치 증가 효과가 강화되는 한 편, 새로운 능력이 하나 더 생겨났다.
그것을 본 내 직감이 요구하고 있었다.
'설마?'
지금 당장 3성 강화를 시도해 보라고.
[시민 문병호에게 1,000,000,000원을 사용하여 별의 힘을 강화하시겠습니까?]
[성공확률 : 45%]
비용이 10억으로 늘어나고 확률은 절반 아래로 떨어졌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리고.
[시민 문병호에게 부여된 별의 힘이 강화되었습니다.]
축캐 문병호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
-모든 능력치가 300% 증가합니다.
-경험치를 50% 추가로 획득합니다.
-정산금을 50% 추가로 획득합니다.
세 번째 효과로 정산금이 떴다.
'이렇게 되면 전부 3성까지는 만들어줘야겠네.'
시민들의 규모가 제법 많이 늘어난 지금도 내가 벌어들이는 자금은 대부분 몬스터 사냥에서 나오고 있었다.
특히, 가신들이 벌어오는 정산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50%면 엄청나게 크다.'
우선 절대자의 왕관으로 인해 그 효과가 100%로 늘어나게 될 테고, 가신들이 가지고 있는 칭호에 따라 다시 3배로 늘어나게 된다.
즉, 3성으로 만들기만 해도 300%의 정산금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현재 가신들에게 적용되는 정산금 효율이 900%였으므로 지금보다 약 1.3배 정산금이 늘어나게 되는 셈이었다.
가신들이 평소에 사냥으로 벌어들이는 금액이 억 단위라는 것을 생각하면 별의 힘을 부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금세 회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가신들에게 3성의 효과를 달아주기 위해 강화를 시도하고 있을 때였다.
[재현님. 다들 모이셨습니다.]
김다빈에게서 텔레파시가 전해져왔다.
절대자의 눈으로 바라본 공용시설에는 김다빈과 서예진, 하동건 파티, 그리고 김민호 파티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절대자의 문을 사용해 그곳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나도 완전히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깔끔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가신들을 향해 말했다.
"가실까요?"
내 방과 이어져 있는 문을 닫고 다른 곳을 향해 절대자의 문을 연결시켰다.
문이 열리자마자 옅은 곡소리가 이곳까지 전해져왔다.
이곳은 장례식장.
죽은 이를 저승으로 무사히 보내주기 위한 장소였다.
이번 흡혈귀들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가신들뿐만이 아니었다.
폭주하는 흡혈귀에게 죽기도 하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고로 죽기도 했으며, 다리를 넘어오려는 흡혈귀들에 맞서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이들이 모여 합동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슬픈 것은 이들 중 제대로 시체를 수습한 이들은 극소수라는 점이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구하는 것도 어려웠기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도 많았다.
울음소리와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흐흑, 여보...."
안타까운 것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이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이다.
울산에서 죽은 이들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추모해 줄 사람 하나 없이 길거리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합동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소를 지나 방 하나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재현님 오셨습니까."
"...네."
그들은 이준혁 파티였다.
파티 전체가 몬스터 사냥에 소질이 있어 모두 종속의 계약을 맺어준 파티.
이번에 죽은 가신들 중 두 명은 이준혁 파티 소속 멤버였다.
그래서 이준혁이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울산에 있던 생존자들과는 달리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신아영과 김지태의 영정사진이 안쪽에 안치되어 있었다.
장례식장의 예를 갖추고 나왔고, 내 뒤를 이어 다른 가신들도 들어가 예를 갖추었다.
상주로서의 책임을 다한 이준혁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당연히 와야죠."
흡혈귀들과의 전쟁은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한 희생은 내가 책임지고 짊어지는 것이 옳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모두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런 것뿐이라서 미안할 뿐이었다.
이준혁이 물었다.
"상 차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아직 갈 곳이 남아서...."
"알겠습니다."
짧게 위로를 전하고 다음 홍경택의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아까보다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홍경택은 장성준 파티의 사람이었는데, 이곳 장례식장의 상주는 장성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맡고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상복을 입고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홍경택의 딸, 홍진아였다.
일전에 장성준 파티가 목숨을 걸고 구하러 갔던 가족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홍경택의 유일한 가족.
아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듯한 투로 입을 열었다.
"...재현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반응으로 내 정체를 확신한 아이가 내 앞에서 무릎 꿇었다.
"재현님, 재현님 맞으시죠? 저희 아빠 좀 살려주세요, 네? 재현님이라면 가능하시잖아요. 그렇죠?"
시민들 사이에서 내 능력은 실제보다 훨씬 부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저 아이의 부탁은 내가 실현 가능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완전한 부활이야 아직까지도 모자랐지만, 오언주의 경우처럼 하루 정도 만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다.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못하며, 일전에 오언주에게 들었던 것처럼 분란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 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은 살려주지 않느냐고 울부짖을 테지.
그때였다.
오언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아이를 안아주었다.
잠시 당황하던 아이는 오언주를 밀어내려 하다가 이내 오언주의 뺨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발견했다.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는 그녀를 마주 안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세상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모진 세상에 다친 사람들은 너무 많은데, 세상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 많은 아픔을 도대체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내가 책임지겠다고 다짐했건만, 내가 감히 책임질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이 커다란 슬픔과 아픔을
'모르겠다.'
이런 아픔들이 세상에서 재생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도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세상이 문제라면, 세상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자고 다짐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의 통곡 속에서 밤이 깊어갔다.
096화 [Episode 21] 정비 (3)
이호범은 울산 출신의 생존자였다.
타다다닥
그는 가스 불을 키고 식용유를 두른 팬에 계란 두 개를 까며 생각했다.
'다시 이런 생활이 가능해질 줄이야.'
지극히 평범한 생활.
합숙 노숙 생활이나 다를 바 없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날마다 새롭고, 감사하고, 경이로웠다.
이호범은 처음 이곳에 왔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처음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인가 고민했다.
물론 울산에 있을 때도 아파트는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이나 옷 따위를 파밍하기 좋은 장소였지만, 안내원들이 숙소로 안내해준다고 말했기에 의아해 했었다.
당연히 체육관이나 대피소 같은 곳을 안내받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도착하고 아파트 전체에 가스, 전기, 수도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정말이지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린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었다.
청소는 좀 해야 했지만, 기본적인 가전제품이 전부 갖추어져 있어서 굉장히 편했다.
전기밥솥, 세탁기, 건조기, 냉장고 그리고 쓸모없는 티비까지.
기본적인 식기들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었고, 물이나 식량은 상점이라는 곳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지만, 처음에는 그것마저도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에 걱정할 거리가 없었다.
'아직도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사실은 진짜 자신은 그때 흡혈귀에게 당해서 죽었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죽기 전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이 기적 같은 일이 단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온다니.'
처음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구조대원들 덕분이었다.
구조대원들이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김재현'이라는 남자의 존재를 입에 담았다.
처음에는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들인가 했었는데, 기운이 없던 사람들이나 심각한 중상을 입은 사람들의 상태가 즉시 호전되는 것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
실제로 하동건에게 목숨을 구함 받았던 이호범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었다.
폭주하는 괴물과, 그 괴물을 단번에 끝장내 버리는 신비한 힘을 가진 남자를 눈앞에서 확인했었으니까.
그리고 김재현의 존재를 믿는 순간.
'온몸에 힘이 넘쳐났었지.'
최도연을 업고 달려오느라 모든 체력을 소진했던 그의 몸에 활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치 믿음에 대한 보답을 받은듯한 느낌.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여 기력이 없던 몸에 순식간에 활기가 도는 순간을 이호범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구원이 가장 절실했던 순간에 겪었던 기적이었기에 이호범은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작은 기적들에 대해 감사하며 마저 상을 차렸다.
밥솥에서 갓 지은 밥을 푸고 김을 꺼내는 것으로 식사 준비를 마친 이호범이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야! 최도연!"
불러도 반응이 없기에 방문을 열어보니 분명 아까 깨웠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불을 둘둘 만 굼벵이가 되어 잠을 자고 있었다.
"야! 언제까지 쳐 잘 거야?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자 최도연이 잠에 빠져 있는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10분만...."
이호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이불을 거두어 버렸다.
최도연은 살짝 몸을 떨더니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는 말했다.
"5분만..."
"아, 몰라. 그럼 나 혼자 밥 먹는다."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이호범은 주방으로 나와 식사를 시작했다.
계란 하나를 가져와 밥 위에서 노른자를 터뜨렸다.
반숙으로 잘 익은 계란과 밥을 잘 비벼 김에 싸 한 입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두세 번 정도 더 먹을 때 쯤 최도연이 방에서 나오더니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녀의 미소와 말 한 마디에 짜증이 사르르 녹는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며 이호범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호구가 따로 없구나.'
이곳에서 최도연과 동거를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두 사람 모두 부모를 잃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두 사람은 친구였다.
이호범은 그게 불만이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 이 평온한 일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시까지 나가야 하더라?"
"이거 먹고 바로 나가야 해."
"응? 나 씻어야 하는데 그럼."
"모자 있잖아."
"안 돼. 오늘이 첫 공략인데!"
최도연은 허겁지겁 밥을 입안으로 욱여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아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이호범은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웠다.
그리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고블린 던전이라고 그랬지.'
지난 일주일간 총기 사용 교육과 고블린 던전 공략 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첫 실습을 나서는 날이었다.
8명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는데, 이호범과 최도연의 팀원들은 부부 세 쌍이었다.
여덟 명 전부 첫 공략이어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만일을 대비해 감독관 한 명이 따라붙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호범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말해야 할까.'
그 순간.
찌릿-
그의 손에서 푸른 전기가 잠시 번쩍였다.
이 힘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은 겨우 나흘 전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몸속에서 미세한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때다.'
남대문이라고 불리던 그 불꽃의 문 안으로 이동하기 직전.
태화강 건너편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호범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죽음의 공포를 체험했고, 주변에 있던 이들이 패닉에 빠져 한순간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정확히 그때 이후로 몸속에서 이상한 힘이 느껴졌었어.'
그것은 분명 흡혈귀의 힘이었다.
이 힘을 얻은 게 정말 그 때문이라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아직 이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최도연 딱 한 사람뿐이었다.
'혹시라도 정말 흡혈귀의 힘이 전이된 거라면... 흡혈귀가 되기 전의 전조 현상일 수도 있다.'
흡혈귀들 중에는 신비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상상하기는 싫었지만, 만약 이 힘이 생긴 것이 흡혈귀와 연관이 있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단단히 숨기고 있는 것이다.
'들켜서 좋을 게 없어. 최대한 들키지 말아야 해.'
다시 한 번 힘을 발현시켜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파지직-
그의 손 안에서 푸른 전기가 살벌하게 튀어 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꽤 강력해 보이는 힘이었으나 이 힘을 사용할 상황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총을 들고 공략을 나서는데 굳이 고블리에게 근접하게 될 리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런 힘이 있는 것만 해도 든든하네.'
만일의 사태가 생긴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다는 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최도연이 밖으로 나오며 급하게 식탁으로 오더니 한 숟가락을 더 자신의 입에 욱여넣었다.
그런 최도연의 주변에 힘찬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에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게 머리카락을 말리려고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호범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너, 그거!"
"응?"
"내가 힘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그랬지?! 흡혈귀랑 연관된 힘일 수도 있다고 조심하라 그랬잖아!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에헤헤. 미안."
바람이 가라앉는 것을 확인하며 이호범이 추가로 말했다.
"밖에서는 절대 사용하지 마. 알겠어?"
"네에~."
"에휴."
나는 이호범과 최도연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흡혈귀의 힘 같은 게 아닌데 말이지.'
이호범과 최도연의 존재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진조와의 전투에서 검은 기운에 대해 자각하게 된 이후로 각성자들이 사용하는 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어떤 능력을 사용하든 내게 감지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호범과 최도연이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절재자의 눈 중 하나를 그들에게 향한 것이다.
'각성의 조건이라.'
이호범이 자신들의 능력을 흡혈귀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전에 두 사람이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입으로 직접 그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호범이 말하는 타이밍은 분명 진조가 각성한 시점이다.'
진조의 힘의 파동에 반응한 것은 분명했으나, 그 힘이 그들에게 옮겨 붙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힘을 각성시키는 건가?'
그러고 보면 네츄럴의 힘을 얻은 가신들도 모두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블린 사냥에 미쳐 있었던 오언주나 문병호의 할머니를 구하러 가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하동건은 물론이고, 내 바로 밑에 층에서 죽어가던 김다정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정말 죽음의 공포가 각성의 키워드라면 시민들 중에 각성자가 적은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시민권을 부여 받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할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시민들이 처음 고블린 사냥을 하던 때 유행하던 사냥 방식은 투명 장벽을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고블린들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고블린 사냥을 나선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도 차근차근 레벨을 올리고, 무기를 구하는 등 최소한의 안전 조치를 취한 다음에서야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치렀다.
그러니 진조가 내뿜었던 살기와 같은 극한의 공포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죽음의 공포에 노출된다고 누구나 각성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이호범이나 최도연뿐만 아니라 당시에 울산에 살아 있었던 모든 생존자들이 각성해야 맞을 테니까.
'그리고 조건이 그거 하나뿐일 거라는 보장도 없다.'
내 경우에는 죽음의 공포는커녕, 몬스터들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각성을 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충분히 고려해볼만 해.'
물론 각성을 위해 시민들을 죽음에 밀어 넣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연출할 수 있다면?
'그렇게 각성자를 양산할 수만 있다면 대박이다.'
전체적은 전력 상승은 물론 가신 등록 대상으로 삼을만한 인재풀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 중에 딱 한 명만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최근에 30레벨이 되면서 얻은 스킬 포인트 3개 중 2개는 이미 소모한 상태였다.
하나는 창고에 투자해서 창고의 용량을 늘렸고, 특수한 기능 하나를 더 얻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집구석 절대자의 건강'에 투자했다.
레벨업을 할 때마다 찾아오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다른 스킬들이 그러했듯이 절대자의 건강 스킬도 레벨업을 하자 생각지도 못한 기능 하나가 추가되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뜻을 고려해보면 정신과 관련되어 있는 기능인 것 같은데, 정확하게 어떤 기능인지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레벨업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있을지는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우."
남은 포인트 하나는 상점을 위해 남겨두었지만, 만약 다음 레벨업에서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다시 한 번 건강에 투자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가 볼까.'
오늘은 오랜만에 본가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한 번 깨어날 때 겨우 10분밖에 깨어있지 못하는 할머니를 뵙기 위해서였다.
철컥.
절대자의 문을 통해 본가로 이동했다.
097화 [Episode 21] 정비 (4)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곧장 안방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고?"
"저예요."
"재현이가?"
"네, 할아버지."
안방에 들어가니 여느 때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고 돌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와 그 옆에 앉아서 말없이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요?"
그때였다.
"아들~? 아들 왔어?"
부엌 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지금 밥 하고 있다. 밥 안 뭇제?"
"네."
"난중에 같이 묵자."
"네, 할아버지."
나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할머니의 이불 위에는 페어리(fairy)가 몸을 웅크리고는 졸고 있었다.
살짝 건드리니 몽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라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나도 반갑다."
현재 페어리의 레벨은 13.
까미가 벌써 20레벨을 넘은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느린 성장 속도였다.
그래도 10레벨을 달성하며 영역 내에서 모든 시민들의 자연 회복율이 900% 증가한 상태였다.
페어리의 존재 덕분에 가벼운 부상 정도는 영역 안으로만 들어와도 순식간에 치유가 가능했다.
어깨에 착지한 페어리에게 손등을 가까이 가져가자 두 팔로 내 손을 끌어안으며 손등에 볼을 부벼왔다.
그렇게 잠시 페어리와 놀아준 뒤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할머니는 좀 어때요?"
"평소랑 똑같지."
할아버지가 직접 초록빛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고, 엄마의 지극 정성의 간호가 있었기에 할머니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살이 조금 빠지신 거 같은데....'
아무리 할아버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벌써 몇 달 째 제대로 된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처음에는 페어리의 능력으로 눈을 뜨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
시간은 짧았어도 페어리의 레벨이 꾸준히 높아진다면 언젠가 완전히 깨어나게 되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페어리의 성장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전에 할머니의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말겠어.'
그럴 수는 없었다.
무언가 방법을 강구해 내야만 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힘을 사용했다.
우우웅
할아버지의 손에서 빠져나와 할머니의 몸으로 스며드는 초록빛 생명력을 본 순간.
'저 힘은?'
일전에 봤을 때는 그저 다양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결이 달랐다.
저 힘은 내가 가진 검은 기운이나 흡혈귀가 가지고 있던 붉은 기운과 비슷한 결을 가진 힘이었다.
그리고.
지이잉-
힘을 제대로 인지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습관적으로 절대자의 눈을 사용하여 할머니의 몸으로 흡수되는 초록빛 에너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맨눈으로 봤을 때는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하던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이잉-
초록빛 에너지가 할머니의 신체에 스며들며 조금씩 옅어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머니의 몸 내부에 존재하던 어떤 기운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뿜어내고 있는 초록빛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먹어치우고 남은 초록빛 기운이 간신히 할머니의 몸에 남아 생명력을 북돋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힘을 먹어치우는 그것의 정체는.
'투명한 기운?'
그제야 할머니의 몸속에서 투명한 기운이 불어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거 때문이다.'
할머니가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신 것은 분명 저 힘 때문이라는 것을.
'저 힘만 어떻게 하면.....'
투명한 기운이 특히 가득 차 있는 곳은 할머니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곳으로 손을 가져간 순간.
번쩍-!
"!!"
내 손에 닿은 투명한 기운이 발작하듯 번쩍이며 퍼져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드넓은 숲과 그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
지평선을 울긋불긋하게 장식하는 장엄한 산의 모습까지.
파아앗-
투명한 기운에서 손을 떼며 나는 다시 현실로 귀환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재현아! 와그라노?"
갑작스러운 내 반응에 당황한 할아버지가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초록빛 기운이 몸을 감싸자 따스한 느낌과 함께 빠르게 호흡이 진정됐다.
"스읍. 하아. 전 괜찮아요."
"무슨 일이고?"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방금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저 투명한 기운이 연관되어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때였다.
화륵-
검은 불꽃이 일어나며 곧장 할머니의 머리를 차지한 투명한 기운을 불태워버리려 했다.
그 기운이 감히 내 영역 안에서 나에게 적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막아 세웠다.
'섣불리 저 기운을 불태웠다가는 할머니가 무사하지 못한다.'
불태우려 하면 얼마든지 불태울 수 있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고 할머니 몸에 깃든 투명한 기운은 사면초가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투명한 기운은 내가 이곳에 별채를 설치하기 전부터 할머니의 몸에 기생한 놈이었고, 할머니의 머리 안에 자신만의 작은 영역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저 기생충 같은 기운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할머니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할머니의 안전을 지키며 저 힘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언제 깨우실 거예요?"
"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할미한테?"
"네."
"밥 다 먹고, 가족들 다 모였을 때 깨울 거다."
페어리가 할머니를 깨울 수 있는 것은 겨우 사흘에 한 번 정도.
그것도 한 번에 10분이 한계였다.
그렇기에 가족이 모두 모여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대에 할머니를 깨우는 것이다.
"할미가 좋아하겠구만. 저번에 일어났을 때 재현이 니는 어디 갔냐고 노래를 불렀다. 아나?"
"아빠한테 들었어요."
그때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재현아! 밥 먹자!"
부엌에는 엄마가 정성껏 차린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된장찌개와 여러 가지 반찬, 그리고 고등어 찜과 볼락 구이가 식탁에 올라 식욕을 자극해 왔다.
할아버지가 상석에 앉으며 농담했다.
"귀한 아들내미 왔다고 비싼 아까모찌를 구웠네?"
"아빠도 좋아하잖아. 그리고 상점에서 얼마하지도 않아."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된 만큼 고등어나 명태부터 참치까지 여러 가지 횟감이 되는 고기들을 전부 상점에 등록시켜 놓은 상태였다.
품목화가 된 탓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대어를 구입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볼락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엄마는 얼마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 크기라면 객관적으로도 비싼 가격에 구입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돈 걱정 따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김 서방은 어디 갔노?"
"일하러 갔죠. 이제 곧 도착할 거예요."
아빠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금액만 해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혈족 칭호로 인해 아빠가 사냥하는 몬스터는 온전히 아빠에게 정산이 되는데, 몬스터 사냥으로 아빠가 벌어들이는 돈은 기본이 억 단위였다.
벌이가 워낙 엄청나다보니 먹을 것에 쓰는 돈은 푼돈에 불과한 것이다.
'요즘은 더 늘었겠지.'
진조를 잡고 부산 대부분을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는 사냥을 위해서는 상당한 거리를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대문을 이용해 울산의 전초기지로 자유롭게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두었다.
투명장벽에 설치해야 되는 남대문의 특성 탓에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전포역을 전초기지로 만들어야만 했지만, 그 정도 투자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더군다나 영역 안에 전초기지를 만드는 것은 반값 할인이 들어가고, [기사]급 칭호를 가진 가신이 없어도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운용하기도 편했다.
띠띠띠띠 - 띠로리~!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아빠가 들어왔다.
"음~ 맛있는 냄새. 아까모찌네?"
엄마가 구워준 볼락은 살이 탱탱하고 맛있었다.
대어인만큼 굉장히 살이 많이 있었지만, 네 사람이 달려들어 젓가락질을 해대니 금방 뼈를 드러냈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있는 1층 안방으로 모였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할머니를 향해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엄마. 오래 기다렸지? 이제 곧 깨워줄게."
그 말과 함께 할아버지가 페어리를 향해 초록빛 기운을 방출했다.
페어리는 초록빛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위에서 이리저리 날갯짓하며 반짝이는 가루를 흩날렸다.
그 순간.
스르륵-
절대자의 눈으로 투명한 기운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머리에 있는 자신의 영역 안으로 도망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전신을 잠식하고 있던 투명한 기운이 머릿속에 있는 좁은 영역 안으로 온전히 들어갔을 때,
"으음."
할머니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엄마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몸은 좀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고?"
할머니는 몽롱한 눈빛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 여기 좀 봐. 재현이가 왔어."
"재현이...?"
엄마의 말에 할머니는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네... 우리 손주 왔네."
"네, 할머니. 저예요."
"엄마, 목마르지? 여기 물."
할머니는 좀처럼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지 못하셨다.
'시간이 길어졌어도 그건 마찬가지 인건가.'
일전에 내가 찾아 왔을 때에는 겨우 3분 정도 깨어나실 수 있으셨다.
그때는 금방 다시 잠에 드시니 계속 몽롱한 정신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10분 이상으로 늘어난 지금, 깨어나신지 벌써 5분이 다 되어 가도록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할머니."
"응...?"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향해 내가 물었다.
"혹시 거대한 나무와 숲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거대한 나무...?"
"네, 거대한 나무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울창한 수림과 거대한 나무를 보는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마치 세계수 같은...."
어쩌면 할머니의 잠이 세계수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한 생각 말이다.
"세계.. 수...?"
그때였다.
우우웅-
자신의 영역 안에서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투명한 기운이 갑자기 급작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그것은 빠르게 할머니의 전신을 집어삼켰고,
"어, 엄마!"
할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다.
그리고.
파아아앗-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집구석 절대자의 정신이 공격을 차단합니다.]
시스템 알림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풀썩-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098화 [Episode 22] 세계수 (1)
하동건 파티는 흡혈귀들과의 싸움이 끝난 이후로 긴 휴가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부지런히 몬스터 사냥에 전념하던 시절과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는데,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는 점이었다.
김재현에게 선택받아 힘을 얻은 그들은 그동안 여러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어마어마한 자본을 축적했다.
에이스 파티인만큼 강력한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그들은 기본급만으로도 수십 억 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었다.
진조를 직접 마무리한 오언주의 경우 천억이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고, 그런 그들이 몬스터 사냥에 목 맬 이유는 없었다.
둘째로, 적당한 사냥터의 부재였다.
현재 사람들의 주 사냥터는 울산으로 옮겨지게 됐는데, 그 이유는 김재현이 다스리는 영역이 너무나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부산 전체를 둘러싸게 된 터라 이제 사냥을 하려면 10km 정도는 나가야 했다.
몬스터 사냥을 위해 김해나 양산, 기장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차를 이용할 수 있으면 사정이 나을 텐데, 도로가 정비된 구역은 아직 서면을 중심으로 일부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사냥 한 번 나가기 위해서는 더럽게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면 중심에 있는 전포역과 울산의 홈플러스가 이어지니 영역 밖의 몬스터를 사냥하던 수준의 파티는 죄다 울산으로 몰리게 됐다.
처음에는 도시에 남아 있던 중급 흡혈귀들을 사냥하고 다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구심점을 잃은 흡혈귀들은 제 살 길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고, 대신 주변 산맥에 있던 잡다한 몬스터들이 울산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영역의 우두머리였던 진조가 사라졌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 챈 것이었다.
그 결과 울산은 수많은 몬스터들로 가득 들어차게 됐는데, 그 대부분이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로 굳이 시간을 내서 사냥할 만큼 메리트가 있는 사냥감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김재현이 따로 지시한 업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동건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정찰을 마치고 온 김 건을 향해 물었다.
"찾았어?"
김건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대답했다.
"...아뇨, 선배. 던전 출입구로 보이는 건 없었어요."
김재현이 그들에게 맡긴 임무는 바로 던전의 탐색 및 공략이었다.
"동건아 너 괜찮냐?"
옆에 있던 강덕수가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뭐가?"
"그게, 아니다...."
강덕수 뿐만 아니라 하동건을 바라보는 김 건의 표정도 비슷비슷 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탐색하고 있는 이곳은 세 사람이 함께 나고 자랐던 장전동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근처에 그들의 본가가 있었다.
블랙오크에게 점령당했던 아파트 단지.
그저 집이 엉망이 된 선에서 그친 강덕수와 김 건이야 가족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하동건은 달랐다.
집안이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있었던 그의 경우에는....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강덕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20년 지기 친구로서 하동건이 애써 강한 척 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는데.'
하동건 파티는 두 개 조로 나누어 탐색을 진행 중이었고, 강덕수는 일부러 하동건을 이곳에서 먼 곳으로 보내려 했었다.
하지만 하동건이 고집을 부려 구태여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고작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효율이 좋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련한 놈'
물론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피 칠갑이 되어 있던 집의 모습을 봤더라도, 가족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을 테니까.
"...나도 그리 다를 건 없나.'
피만 제외하면 자신도 하동건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처지였다.
이런 세상에 가족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부산 전체가 안전지대가 됐으니 잘하면...'
정말로 운이 좋으면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던전 탐색을 진행하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상상을 계속 하곤 했다.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희망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하동건이 말했다.
"건이 너는 조금 쉬다가 해가 지고 나면 다시 한 번 하늘 위에서 살펴줘. 던전 입구가 있는 곳이라면 티가 날 테니까."
"...알겠어요, 선배."
"내가 3번 라인을 맡을 테니까 덕수 너는 4번 라인을 뒤져 봐."
"오케이."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부산대학교 부산캠퍼스 안이었다.
대학교 안이라 그런지 건물들 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는데, 덕분에 분담이 편했다.
강덕수는 '416 생물관'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베이지 색 건물을 마주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느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건물 내부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핏자국과 시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는 복도를 지나며 내부를 꼼꼼이 확인했다.
그러다 화장실에 진입하던 강덕수는 안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움찔 놀랐으나, 이내 그것의 정체가 자신을 비추고 있는 거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래라.'
강덕수는 굳이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던전 입구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두운 화장실 안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을 테니까.
굳이 안쪽까지 뒤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스마트폰을 꺼내 불빛을 켜 가볍게 안쪽을 살펴봤다.
화장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똥오줌이 가득해 악취가 풍기는 것은 물론이고 몬스터 시체 한 구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시체가 뒤엉켜 썩어가고 있었다.
늑대를 닮은 몬스터였는데, 덩치가 성인 남자만한 괴물로 부산대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놈이었다.
'이런 놈들이 활개치고 다녔다면 살아남기에는 절망적이겠네. 그러면 그 녀석도..?'
새삼스럽게 스스로가 정말 운이 좋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 날 동건이네 집들이를 오지 않았다면...'
고블린 대신 저런 괴물을 만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지. 집에 있었으면 그 빌어먹을 블랙 오크 놈들의 손에 죽었겠네.'
김재현에게 선택받아 힘을 얻는 일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네.'
저런 괴물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이곳은 바로 자신의 집 근처였다.
'부모님이 성공적으로 도망쳐 나왔다고 해도...'
괴물 놈들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눈살을 찌푸리고 화장실을 나가려던 강덕수는 잠시 거울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닮았네.'
면도를 하지 못해 제멋대로 돋아난 수염이 있는 자신의 얼굴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아버지...."
그를 닮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리움의 향기가 더욱 짙어지는 듯 했다.
'보고 싶어요.'
그때였다.
덜컹!
화장실 안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덕수는 곧바로 그 소리에 반응했다.
'일어나라.'
이제는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지 않더라도 은빛 기사를 소환해 내는 게 가능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 대변기 칸막이 앞에서 은빛 기사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문을 열려고 했다.
덜컹덜컹!
문은 당연하다는 듯이 잠겨 있었고.
"꺄아아악!"
안에서는 하이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지금 이곳이 안전지대 안쪽이라는 것을 깨달은 강덕수가 소리쳤다.
"진정하세요!"
곧바로 은빛 기사를 역소환시켰다.
그리고 그 앞으로 이동해 핸드폰 라이트를 비추며 말을 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시, 싫어!"
칸막이 안쪽에서는 잔뜩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꺼져!"
여자의 목소리에선 깊은 불신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군.'
여기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어르고 달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기에 강덕수는 칸막이를 붙잡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빠직!
곧바로 잠금장치가 박살나며 문이 열렸다.
"헉!"
안쪽에서는 숨 넘어 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온몸으로 문을 막아보려 했지만 50레벨에 도달한 강덕수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강제로 문을 개방당한 여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강덕수를 올려다봤고, 강덕수는 그런 여자를 향해 무심하게 핸드폰 라이트를 비추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여자를 끌어내기 위해 손을 뻗는 그 순간.
"내 몸에 손 대지 마!!"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강덕수는 왠지 모를 익숙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어?"
이내 그 익숙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예솔아?"
"얼마나 버틸 것 같습니까?"
나는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보던 이성민 병원장이 말했다.
"네 분 다 단순히 잠드신 것뿐이라서 보통의 경우 제대로 된 케어만 받으신다면 몇 달이든 몇 년이든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베지테이티브 스테잇(식물인간 상태)에서도 몇 년을 버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이성민 병원장은 할머니 쪽을 바라보며 우려 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할머님 쪽은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하고 최고급 케어를 받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컨디션이 나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할머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함께 가족들이 정신을 잃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잠든 것뿐이라며 호언장담하던 이성민 병원장도 갈수록 나빠지는 할머니의 상태를 보고는 당황스러워했다.
"지금 속도라면 길어야 한 달, 짧으면 일주일 안에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이성민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일주일 안에 방법을 찾아야만 해.'
지금 가족들의 상태는 단순한 수면이 아니었다.
투명한 기운이 몸에 자리를 잡고 그들의 생명력을 실시간으로 갉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의 경우 아직까지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세 사람 전부 50대 레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체 능력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 수액과 영양소만으로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달랐다.
혈족 버프를 받았음에도 겨우 21레벨로 낮은 레벨인데다 이미 몇 달이나 잠에 빠져계시던 상태였다.
이미 몸의 컨디션이 조금씩 악화되고 있던 상황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할아버지의 힘이 사라진 지금 김다정의 힐로 그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해봤지만, 턱도 없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할머니는 빠르게 야위셨다.
'젠장.'
마음이 급했다.
'시도 해볼까?'
강제로 투명한 기운의 영역을 불살라버리는 것도 생각해봤다.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잃을 뿐이었다.
'퀘스트 부여만 가능해도 뭔가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답답한 마음이 커져만 가던 그때였다.
우웅-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의 오른 손이 짧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진동하듯 빛이 점멸하던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영역 전체에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너무나도 익숙해진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절대자의 눈.'
곧바로 그곳을 향해 절대자의 눈을 사용했다.
투명 장벽을 두들겨 온 것의 정체는.
「백룡(Lv. 63)」
일전에 한 번 이곳을 찾아왔던 거대 괴물이었다.
099화 [Episode 22] 세계수 (2)
백룡은 바다 속에서 투명장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갑작스레 나타났던 백룡은 자신이 지켜주겠다며 계약을 운운했었다는 게 기억났다.
할아버지 손등에서 빛나고 있는 저 문신이 그때 맺은 계약의 증거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태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그때 투명한 기운에 닿았을 때 보였던 울창한 숲과 거대한 나무의 모습을 떠올리면, 투명한 기운과 세계수는 반드시 연관이 있어 보였다.
처음에는 세계수의 짓이 아닌가 생각했었지만, 세계수의 수호자인 할아버지가 당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세계수의 힘과 할머니의 머리에 자리 잡은 투명한 기운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세계수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으나, 수호자인 할아버지까지 공격한 것을 보면 그리 좋지 않은 관계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백룡은 세계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었지.'
자신의 새끼를 맡겼던 것을 생각하면, 새끼의 부화에 세계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겠네.'
나는 경계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지만, 마침 백룡이 투명 장벽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으니 내가 가기만 하면 됐다.
'동대문을 열면 되겠네.'
동대문은 나름 심플한 기능이었는데, 영역 안이라면 '어디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기능이었다.
일반적인 문이 아닌 허공에 문을 생성해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자의 문의 발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상 북대문의 하위호환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대문은 영역 안이 아니더라도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개방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써 먹을 때가 오긴 하는구나.'
현재 이곳은 본가 바로 앞에 있는 병원의 4인 병실이었다.
이곳에서 영역의 끄트머리까지 거리가 10km나 되는 만큼 이동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텔레포트를 쓴다고 해도 지금의 내 정신력으로는 2km 정도의 거리를 두세 번 이동하는 게 한계였고, 게다가 현재 백룡이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다를 헤엄쳐가야 했다.
하지만.
'동대문 개방'
영역 어디든지 문을 생성할 수 있는 동대문을 활용하면 그런 생고생을 할 필요도 없이 백룡과 대화가 가능했다.
지이잉-
허공에 생성된 둥근 문이 점점 영역을 넓혀 갔다.
문 너머로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병실에서 문 안으로 뻗어나간 불빛이 바다 속을 훤히 비추었다.
다행히 병실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지거나 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었으니까.
백룡은 건너편에서 이곳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굳이 건너갈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놈을 향해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동대문 너머로 백룡의 기운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이 말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어째서 세계수를 노리는 것인가?]
"....네?"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아무리 초월자라 해도 그릇에 맞지 않는 신격을 탐하는 것은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
아무래도 백룡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맥락은 이해했다.'
우선은 오해를 풀어야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세계수의 힘을 노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동대문의 크기를 늘렸다.
문 너머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노출되자 날카롭던 백룡의 기운이 한층 누그러졌다.
"제 할아버지 되시는 분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이렇게 쭉 잠들어 계십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제 가족들 모두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상황입니다. 혹시 이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동대문 너머로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상태를 바라보던 백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빼미의 짓이군.]
"올빼미요?"
[세계수에 기생하며 연명하는 벌레 같은 존재지]
다행히 백룡은 이 사태의 원홍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희망을 가지고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룡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내용이었다.
[감염된 자들을 모두 불태워라.]
나는 잠시 백룡이 말한 '감염된 자'가 누구인지를 가늠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한 번 올빼미에게 수집 당한 영혼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올빼미의 힘이 퍼지기 전에 감염자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불태워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세계수는 무사할 것이다. 수호자의 힘도 혈육인 그대에게 전해지게 되겠지.]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백룡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화를 참으며 덤덤하게 말하는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올빼미라는 놈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세계수에 기생하는 것과 잠에 드는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세계수에 기생하는 것이라면 본체의 나무줄기나 뿌리에 붙어서 영양분을 빨아먹어야 할 것이다.
주변에 있는 애꿎은 인간에게 들러붙는 것이 어째서 세계수에 기생하는 것이 된단 말인가.
침묵하는 백룡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대답해. 세계수 뿌리에 있는 네 알이 산 채로 불타는 꼴이 보기 싫다면."
백룡은 잠시 갈등하는 듯하더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대의 눈에 보이는 세계수는 그저 큰 나무에 불과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지?"
[초월자라 하더라도 결국 필멸자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본체는 차원의 틈새에 존재한다. 올빼미는 인 간의 정신을 매개체로 하여 세계수의 본체가 존재하는 차원의 틈새에 접속하여 힘을 빨아먹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몇 번 더 질문을 해 봤지만 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 알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동대문을 닫아버린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성민 병원장을 향해 말했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병원 옥상으로 이동한 나는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웬만한 아파트보다도 키가 커진 세계수가 거기 있었다.
'우선 저것부터 알아봐야겠어.'
그때였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먼 바다에서 백룡이 투명장벽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놈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냉기가 바다를 온통 얼리고 투명 장벽을 두들겨댔지만, 투명장벽은 그 모든 충격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제법 살벌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애쓰는 군.'
진조 보다도 레벨이 높아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던 듯 했다.
'놈에게서는 내 검은 기운과 같은 결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내 허락이 없다면 백룡이 영역 안으로 진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놈에게서 신경을 끄고 세계수의 꼭대기로 이동했다.
쩌저적-
반경 수백 미터가 얼어붙은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룡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어째서?'
자신의 공격이 필멸자에 불과한 존재가 만들어낸 장벽에 보기 좋게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막는 장벽은 힘으로 뚫어버리고 올빼미에게 오염된 존재들을 직접 지워버리려 했다. 방금 만났던 어린 인간은 세계수보다도 자신의 혈육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다음 세대의 수호자에게 조금 미움을 받더라도, 그로인해 자신의 새끼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불태워진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막힌 것이다.
'불가능해.'
백룡의 숨결에 얼어붙은 바다의 모습과 공격 직후에 흔들리는 것으로 투명 장벽의 크기를 대충이나마 짐작이 가능했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투명 장벽은 거짓말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넓이로 보나 높이로 보나 투명 장벽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는데, 이런 거대한 장벽이 자신의 숨결을 자그마한 흠집 하나도 없이 막아낼 정도로 단단한 강도를 지니려면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저 단단한 투명 장벽에서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이런 짓이 가능한 것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 자그마한 인간이 신격을 갖추고 있다고?'
눈앞에 보이는 투명 장벽이 한 차원 높은 힘이라면 말이 된다.
신격을 침범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같은 격을 지닌 힘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됐다.
'신격을 갖춘 존재가 현세에 존재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 인간이 화신이라고 하여도 이 정도 힘의 구현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세상이었다면, 이 세상은 온통 신격이 깃든 힘으로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남은 가능성은 딱 하나.
'새로운 신이 탄생하려 하는가.'
오직 신화의 탄생에서만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지금 이곳에서 신화가 시작하고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세계수의 크기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겨우 수십 미터였던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수백 미터 하는 아파트들보다도 더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란다면 바로 옆에 있는 천마산조차 내려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하군. 이게 본체가 아니라는 거지?'
백룡은 필멸자의 눈으로는 세계수의 본체를 감히 볼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인간의 눈이 아닌, 절대자의 권위가 깃들어 있는 눈은 어떨까?
나는 세계수 가지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절대자의 눈.'
조금이라도 세계수의 본질에 대해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다른 가신들의 상황이나 영역 내를 순찰하듯 돌아다니던 시야도 모두 꺼트리고 오롯이 세계수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내가 앉아 있는 세계수의 꼭대기, 세계수의 줄기, 세계수의 뿌리.
총 열두 개의 시야가 세계수 전체를 훑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비춰질 뿐이었다.
'포기할 수 없어.'
지금 이 일에는 가족들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세계 전체를 훑은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세계수의 본체가 존재하는 곳은 차원의 틈새라고 했었지?"
그곳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절대자의 시야를 겹쳐도 보고 한 가지의 시야에 집중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우웅
내가 앉아 있는 세계수의 가지에서부터 무언가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초록빛갈의 그것은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세계수의 생명력이 담긴 기운이었다.
내 몸을 천천히 감싸는 그 기운이 나를 자극했고, 그것은 한 가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검은 기운.
최근에 다루기 시작한 그 힘은 내 모든 스킬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품위 유지 스킬로 만들어내는 전기, 가스, 물이 그러했으며 공간을 잇는 문과 내 몸에서 뽑아져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이 그러했다.
모두가 검은 기운에서 태어나는 힘이었고, 지금 사용하는 절대자의 눈 또한 그랬다.
그러므로.
화륵
허공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절대자의 눈을 사용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더니 한 가지 형태로 굳어졌다.
그것은 검은 눈.
그것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아!'
그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세계수 나뭇가지에서 초록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검은 눈이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확장된다.
세계수의 전체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흐르고 있는 초록빛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순히 생명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틀렸다는 것을 알 아 차렸다.
'보인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초록빛 기운은 엄청나게 거대한 나무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진짜 세계수의 모습이 그곳에 존재했다.
100화 [Episode 22] 세계수 (3)
차원의 틈새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본체는 하나의 거대한 나무 같기도 했고, 동시에 수만 그루가 모인 드넓은 숲처럼 보이기도 했다.
넘쳐나는 생명력이 꿈틀거리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세계수의 본 모습.'
감탄이 절로 쏟아지는 절경이었다.
'아름답다.'
한동안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가족들이 누워있는 병실로 시야를 옮겼다.
검은 눈으로 바라본 병실은 온통 세계수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래서 기생한다고 표현한 건가.'
가족들의 정신을 잠식한 투명한 기운을 향해 세계수의 생명력이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뿌리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먹어대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생충이라고 해서 저 투명한 기운의 격이 엄청나게 낮은 것은 아니었다.
'저 힘도 내 검은 기운이나 세계수의 생명력처럼 기본적으로는 결이 같은 힘이다.'
백룡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격'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내 허락 없이 영역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대충 이해가 가는군.'
신격을 갖춘 데다 세계수의 본체가 존재하는 차원의 틈새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직접적인 부딪힘 없이 내 영역 안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것들이 잡아먹은 세계수의 힘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세계수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만큼 덩치가 커진다거나, 더 농도 짙은 힘을 품거나 해야 정상인데 투명한 기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그것이 빨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해.'
처음에는 단지 생명력을 흡수하는 효율이 나쁜 것인가 했으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자세히 들여다 본 결과 그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생명력이 투명한 기운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계수의 본체에 기생하고 있는 이 투명한 기운들은 자신들이 빨아들인 세계수의 생명력을 어디론가 보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기운을 먹이로 던져주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병실로 이동했다.
"재현님 오셨습니까."
그때까지 뜬 눈으로 병실을 지키고 있던 이성민 병원장이 곧바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특이사항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내가 세계수에 온 신경을 쏟는 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병실 허공에 떠 있는 검은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병원장님. 혹시 저게 보이십니까?"
이성민은 내가 가리킨 허공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냉장고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성민에게는 검은 눈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괜히 검은 눈을 사용할 때마다 시선을 모으게 된다면 조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병상에 누워 계신 할머니 앞에 섰다.
검은 눈을 통해 바라본 할머니의 머리는 투명한 기운에 완벽하게 잠식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검은 기운을 생성해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검은 기운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투명한 기운이 폭주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리스크는 있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시도해야만 했다.
'할머니, 꼭 구해드릴게요.'
우웅-
내 손에서 솟아오른 검은 기운이 서서히 할머니의 머리 쪽을 향해 움직였다.
차원의 틈에 들러붙어 세계수의 생명력을 먹어치우던 투명한 기운은 자연스럽게 내 검은 기운을 함께 집어삼켰고.
우우웅!
투명한 기운의 중심부로 빨려 든 검은 기운이 전송되는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부족해.'
그러나 그 양이 너무 적어 그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조금 더.'
이에 나는 조금 더 과감하게 검은 기운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우우웅-
'좀 더.'
그렇게 조금씩 양을 늘려간 덕분에 이제는 투명한 기운이 집어삼키는 에너지의 8할 이상이 내 검은 기운이 되었다.
그쯤 되자.
'여기다.'
에너지의 움직임을 확연히 인지할 수 있었다.
어딘가로 이동한 검은 기운들이 한 데 뭉치는 순간.
'동대문 개방.'
동대문.
영역 안이라면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하게 해주는 문이었다.
집구석 선포가 되어 있는 내 영역 또한 기본적으로는 검은 기운의 힘에서 오는 것.
투명한 기운이 전송하는 알 수 없는 장소에 충분한 양의 기운을 쏟아 부은 결과 일시적으로 영역이 생겼고,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지이이잉-
동대문 너머로 울창한 숲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이성민은 또 다시 김재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묵묵히 일을 시작했다.
병실에서 대기하며 위급 상황 발생 시 곧바로 대처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김재현의 가족들의 안위가 걸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들로만 팀을 구성하여 간호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별 의미가 없긴 했지만.'
최고의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진찰하고 간호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MRI도 CT촬영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나오질 않았다.
이 현상이 병의 문제가 아닌 괴력난신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간호 정도인가.'
그러나 이 마저도 딱히 쓸모가 없는 느낌이었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만큼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몸을 뒤집어준다거나 하는 행위가 필요했겠지만, 지금 이곳에 누워 있는 이들은 할머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인이었다.
몸의 내구도가 일반인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우리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번쩍-!
김재현의 할머님에게서부터 쏟아져 나온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털썩-
이성민은 자신이 쓰러지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정신을 잃었고.
"으음??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는.
'뭐, 뭐야?'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여긴 어디야?'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전신의 감각은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액체? 물인가?'
덕분에 자신이 현재 어떤 액체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냥 물은 아니야. 끈적끈적하다.'
의사답게 최대한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해나가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우웅
'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자신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느낀 이성민은 패닉에 빠졌다.
'사, 살려주세요. 재현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당장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이성민 병원장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병실에서 퍼져나간 빚은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근처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성민과 같은 처지에 놓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성민은 다른 이들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재현의 어머니인 이지숙으로부터 종속의 계약을 통해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각성과 함께 확 올라간 레벨 덕분에 이런 상황을 버틸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평범한 시민들의 경우에는 달랐다.
레벨 10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극심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가 적은 어린 아이들은 이틀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침묵 속에서 절망의 전조곡이 흐르고 있었다.
동대문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그곳으로 넘어간 순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검은 기운이 내게로 뭉쳐들었다.
그리고.
지이잉-
내 주변으로 익숙한 장벽이 생겨났다.
'집구석 영역과는 조금 다르군.'
가장 큰 차이점은 장벽의 위치였다.
현재 내 영역은 나를 중심으로 반경 10m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나를 보호하는 장벽은 내 몸에 딱 달라붙어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강림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야.'
그때도 장벽은 내 주변을 보호하고 영역은 사방으로 넓게 퍼진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역시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영역이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상태는 오래지속하지 못 한다.'
최대한 빠르게 목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곧바로 탐색을 시작했다.
'절대자의 눈.'
이곳에서는 검은 기운을 불어넣어 검은 눈을 활성화 시킬 필요도 없었다.
우우웅
주변이 온통 투명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이거 완전히 반대 입장이 되어버렸군.'
기생충이라고 해서 얕잡아 볼 놈이 아니었다.
놈은 신격을 갖추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 넓은 숲은 온전히 놈의 영역이었고, 나는 현재 적진의 중간에 자진해서 들어온 꼴이었다.
겨우 반경 10m 정도의 좁은 영역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들어오기 전에 좀 더 많은 힘을 쏟을 걸 그랬나.'
아쉽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번에는 탐색만 하고 동대문의 쿨타임이 돌아오면 다시 밖으로 나가면 돼.'
그리고 다음에 들어올 때는 내가 뽑아낼 수 있는 검은 기운을 최대한 뽑아내서 이곳으로 보낸 다음 들어올 계획이었다.
'숲이라.'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곳의 환경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무언가 이질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숲이라면 들려와야 할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벌레가 날아다니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심지어는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초자 들려오지 않았다.
불길한 고요함이 숲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마치 숲 전체가 죽어버린 것 같군.'
숲을 채우고 있는 수풀과 나무들도 어딘가 꺼림칙한 모습이었다.
'저건 뭐지?'
이곳에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 혹처럼 생긴 이상한 것을 달고 있었다.
어쨌든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절대자의 눈을 사용해 들여다보는 게 가능했으므로 절대자의 눈을 사용해 내용물을 살펴봤다.
대부분의 혹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는데, 다섯 번째 탐색에서 처음으로 무언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건.'
그곳에 있는 것은 끈적끈적한 액체 속에 빠져 있는 말라비틀어진 시체 한 구였다.
'인간은 아니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그 시체는 인간을 닮아 있었지만, 특유의 뾰족한 귀가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움찔-
말라비틀어진 시체인 줄 알았던 그것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보이지 않는 손을 활용해 혹을 뜯어내려 했지만,
스르르륵-
이내 이종족의 몸이 신기루처럼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뿌득!
뒤늦게 뜯어낸 혹 주머니 안에는 끈적끈적한 소화액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설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무 곳곳에 크고 작은 혹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광경이 보였다.
'텔레포트.'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나무 꼭대기로 이동했다.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무줄기를 잡아 중심을 잡은 뒤 주변을 살펴보았다.
끊임없이 이어진 나무의 바다가 나에게는 소름끼치게 다가왔다.
"허."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터무니없이 넓은 숲의 어딘가에 가족들의 정신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방금 사라져버렸던 이종족처럼 저 이상한 혹에 갇힌 채.
'이 넓은 지역을 죄다 뒤지는 건 불가능 하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나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머리를 치는 것.'
이렇게 된 이상 끝장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신 소환'
지이잉-
모든 전투 병력을 소환했다.
101화 [Episode 23] Lilith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