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빌드 -2-
검문소가 보인다.
탕탕탕!
뒤에서는 총격이 쏟아진다.
무시하고 내달린다.
퍽!
운전석 사이드미러가 총알을 얻어맞고 깨졌다.
펑!
심지어 타이어 하나도 펑크가 났다.
SUV가 끼기긱 미끄러지지만 운전대를 끝까지 붙잡았다.
가까스로 감속한 SUV가 검문소 앞에 정확히 정지했다.
동부군 병사들이 소총을 꼬나쥐고 튀어나왔다.
잔뜩 마력 파장을 발하는 상태.
나는 창문을 열고 사냥 증서와 초인증을 내밀었다.
"사냥꾼 협회 소속 4레벨 초인 김전사입니다. 사냥 마치고 복귀합니다."
"어? 며칠 전에 산왕 잡았던 분 아닙니까?"
공교롭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산왕을 잡고 통과할 때 날 검문했던 장교.
장교가 만신창이가 된 SUV,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나, 그리고 뒤쪽에서 달려오는 사냥꾼들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죠? 철원 시국은 사냥터의 분쟁에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국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군단장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니까 조용히 있으셔야 합니다."
"그럼요. 저도 군단장님 존경합니다. 절대 소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통과!"
병사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쫓아온 협회장이 항의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놈은 범죄자입니다! 사람을 죽였다고요!"
"철원 시국은 사냥터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협회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작년 조약 갱신 때 직접 오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건······"
"아니면, 소란이라도 일으켜 보시게요?"
장교가 검을 빼든다.
비록 4레벨에 불과했으나 동부군 소속.
게다가 장교.
잘못 건드렸다간 동부군 전체가 들고 일어나는 수가 있다.
협회장도 목소리를 낮췄다.
"그럴 리가요. 답답해서 한마디 해봤습니다."
"살인 사건이라면 서울 가서 고소하든 고발하든 하십쇼. 철원은 동부군이 지배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4레벨이지만 목에 힘을 주는 동부군 장교.
5레벨이어도 머리를 숙이는 사냥꾼 협회장.
우열이 명백히 갈려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협회장과 사냥꾼들도 검문을 받고 통과했다.
몇 시간 동안 추격전을 벌인 것이 무색하게, 검문소 통과 뒤에는 금방 따라잡혔다.
타이어 펑크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못 냈거든. 그나마 특수 타이어라 저속 주행은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강기석! 도망치는 걸 보니 아주 쥐새끼가 따로 없던데? 어디서 전속 레이서라도 고용했나?"
협회장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강 이사가 지지 않겠다는 듯 입대포를 발사한다.
"아, 그야 그쪽 애새끼들이 총을 아주 지랄 같이 잘 쏴서 그랬지! 진작에 타이어 맞췄으면 내년 오늘이 내 제삿날이었겠어! 그건 그렇고 우리 잘나신 협회장 나으리께선 어디 숨어 있다가 기어 나오셨어? 몇 시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제 그 못생긴 얼굴을 보여주시네?"
"이 새끼가!"
"주 이사는 잘 있대? 벌써 제삿밥 뜨신 건 아니지? 우리 김 사냥꾼님이 로켓탄 탄두를 맞춰서 하늘나라로 보내 드렸잖아! 캬, 아주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니까? 사냥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총도 잘 쏘고. 딸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어 아주!"
그건 좀.
투머치토커 사위가 된다?
상상만 해도 귀에서 피보라 터지는 느낌이다.
협회장이 구겨진 얼굴로 날 보았다.
"이래서 김 사냥꾼을 영입하려고 했던 건데······"
나이든 사냥꾼의 육감이라고 할까?
정 사냥꾼을 통해 날 초청한 협회장도, 소식을 듣자마자 중국행을 취소한 강 이사도 행동력 하나는 대단했다.
나는 시청을 향해 SUV를 몰았다.
강 이사의 지인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거였는데, 사냥꾼 협회 SUV들이 우리를 앞질러 앞을 잔뜩 가로막는다.
아예 도로 자체를 차단.
빵빵빵!
애꿎은 철원 시국 시민들만 피해를 보았다.
"뭐야!"
"도로는 왜 막아!"
"비켜!"
"당신들이 도로 전세 냈어!"
시민들이 고함을 지르고 경적을 울리자 사냥꾼들이 눈을 부라렸다.
"시끄러!"
"우리도 이판사판이야!"
저러다 동부군이 열 받아서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저러지?
사냥꾼들이 우리를 완전히 포위했다.
SUV로 둥글게 벽을 치고는 흉흉한 얼굴로 내린다.
꿇릴 거 없다.
나도 강 이사도, 두 과장도 마력 파장을 피우며 내렸다.
그나마 무기를 든 자는 없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동부군의 권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와중에도 최후의 선만은 넘을 수 없었던 것.
"강 이사."
협회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얌전히 따라오지 그래? 꼭 피를 봐야겠어?"
"이거 왜 이래. 이미 피는 봤고 막장까지 간 거 몰라서 그래?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였어. 소주랑 맥주에 독을 탔더라고? 조합독이라고 하지 그거? 협회에 소맥 먹는 놈은 나밖에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뒈질 뻔했지 뭐야."
"흠."
"그리고 시발 새꺄, 최 부장 배신하게 만든 새끼가 뭐? 피를 봐야겠냐고? 죽은 최 부장을 봐서라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너랑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해!"
강 이사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최 부장이 죽었다는 말에도 협회장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강 이사를 노려보면서도 뒤에, 파주 시청을 연신 힐끔거릴 뿐.
누구 기다리나?
그러나 엉뚱하게도 뒤쪽에서 불청객이 등장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쾅! 펑! 꽈앙!
SUV들이 하늘을 날았다.
폭죽처럼 치솟아서 근처에 떨어지고, 폭발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화염이 터지고 금속마저 모조리 증발하는 비현실적인 광경.
구경하던 철원 시민들이 환호를 질렀다.
"구 사단장님이다!"
"역시 화끈하시네!"
"개 같은 놈들, 길막하더니 잘 됐다!"
"사단장님! 저 새끼들 다 죽여 버리세요! 바빠 죽겠는데 길 막는 놈들입니다!"
뻥 뚫린 공간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
40대, 걸친 것은 동부군 군복.
덩치는 크고 눈은 부리부리했다. 허리에는 투박한 외형의, 검집에 호랑이 조형이 양각된 검이 달랑거린다.
동부군의 4대 사단장 중 하나.
구형원.
7레벨 전사 계열 초인이었다.
마력 파장이 유형의 빛을 뿌리며 사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혼자 온 것도 아니다.
수십은 넘을 초인들이 절도 있게 서 있다.
"안녕하십니까, 사단장님."
"이거, 저희가 잠깐 대화를 한다는 게 조금 소란스러웠나 봅니다. 송구스럽습니다."
협회장도 강 이사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동부군 사단장이자 7레벨 초인.
구형원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다.
사냥꾼 협회가 제법 큰 단체라곤 하나 협회장도 이사도 가볍게 날리고도 남을 정도의.
구형원이 둘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건넸다.
"부하들과 회식할 일이 있어서 기분 좋게 나왔는데 기분 잡치게 하는군. 다른 곳도 아니고 철원에서 이게 무슨 짓거리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냥꾼들이 서로 총질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당신네들가 뭔 짓을 하든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철원에선 하면 안 되지. 여기가 당신네들 놀이터인 줄 알아?"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걸 아는 인간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구형원.
막 사자후가 터지려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멈칫하더니 시선을 시청 뒤 높다란 마천루에 던진다.
군단 본부.
흔히 호왕궁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곳.
이어서 입술을 달싹이기까지.
전사 계열 초인 중 무사들이 자주 쓰는 전음이었다.
'뭐지?'
구형원이 얼굴을 굳혔다.
명백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낸 말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동부군 차원에서 너희 관계를 중재하겠다. 내일 정오, 시청 앞 광장에서 명예 결투를 치러라. 단, 외부 대전사는 불허하겠다. 오직 여기 있는 너희 중 한 명이 나서야 한다."
갑작스러운 선언.
바로 협회장이 항의하고 나섰다.
"사단장님! 저는 사단장님을 존경하고 공경하지만, 이건 엄연히 사냥꾼 협회 내부의 일입니다. 아무리 사단장님이라고 해도 우리 협회 일에 간섭하실 수는 없습니다!"
"흥."
구형원은 코웃음만 한 번 쳤다.
"이건 명령이다. 너흰 거부하지 못해."
"명령이라니요! 사단장님께서는 우리 협회에 명령하실 권한이······"
"내가 내린 명령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하늘.
즉, 군단장.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다들 당황한 표정이다.
강 이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군단장님께서 왜······"
"어허!"
직함을 입에 담는 것조차 거슬렸나 보다.
구형원이 강 이사를 보며 뜨거운 눈빛을 날렸다.
"내일 정오. 늦지 않도록 해라. 내가 직접 공증인이 되겠다. 지는 쪽은 이긴 쪽에서 목숨을 요구하더라도 얌전히 목을 내놓도록. 만약 거부하는 자는 내가 직접 나서서 단죄하겠다."
철원 시국에서 군단장은 성역 그 자체.
구형원이 손을 떨치며 자리를 떴다.
남은 것은 협회장측과 우리뿐.
협회장과 강 이사가 눈을 마주쳤다.
"흥! 차라리 잘 됐다.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지."
협회장은 벌써 승리한 듯한 얼굴이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요."
반면 강 이사는 초조한 기색이다.
생체 변이 변신마 대 의체 삽입 저격수의 싸움.
누가 유리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거리를 주고 시작한다면 모르겠으나 평범한 명예 결투라면 변신마 필승.
협회장이 강 이사와 나를 한 번씩 보고는 입을 비틀며 웃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죽을 때까지 봉사할 각오는 해둬. 아주 개처럼 부려 먹어주지."
"누가 보면 이미 이긴 줄 알겠어? 난 당신을 살려두지 않을 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전력을 다하라고."
"푸하하! 아주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네. 내일 보자고."
협회장이 몸을 돌렸다.
비로소 막힌 길이 뚫리고 SUV들이 빠져나간다.
나도 SUV를 적당한 곳에 댔다.
"하아아아."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 이사가 한숨을 내쉰다.
"이사님······"
"괜찮겠습니까?"
과장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명예 결투의 결과를 뻔히 다 아니까.
"군단장님은 어째서 우리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거지? 설마, 협회장이 군단장님한테까지 선을 댔나?"
"그럴 리가요."
"군단장님 아닙니까."
"협회장 따위가 비벼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럼 왜 갑자기 군단장님께서 협회장 편을 든 거야?"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나 때문이다.
얽힌 8레벨 초인만 두 명.
내게 강제 세례를 했던 성녀, 그리고 내기라는 명목으로 영입 우선권을 가져간 태양 마탑주.
군단장의 귀에도 그 사실이 들어갔겠지.
이번 일은 날 직접 확인하려는 군단장의 의도가 분명했다.
'뭐, 좋아.'
날 확인해 보시겠다?
이번에는 당해드리지.
미래의 암살 조직 수장과 끝없는 암투를 벌이느니 여기서 끝을 보는 게 낫다.
기왕에 성녀와 마탑주 눈에 띈 몸이다.
거기 한 명 더 추가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문제는 협회장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냐는 것.
'가능해. 가능하긴 한데······'
2레벨 후반에 박대엽을 이기고 3레벨에 오두식을 쓰러뜨린 몸이다.
4레벨인 지금이라면 5레벨 협회장을 이겨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지.
전사와 다르게 강화병에게는 의외의 한 수가 있으니까.
협회장은 의외성 끝판왕인 변신마고.
"이사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정말로 이길 수 있습니까? 숫자로 표현하면 이길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됩니까?"
강 이사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흠, 흠, 헛기침을 하는 강 이사.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대답한다.
"냉정하게 따져서 5프로 미만이지."
사실상 이기기 힘들다는 뜻.
그나마 주제 파악은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괜히 똥고집을 부렸으면 나까지 말려 들어가잖아.
"이사님······"
과장들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가 나가겠습니다."
"김 사냥꾼, 자네가? 하지만 자네는 4레벨이잖아! 협회장은 5레벨이야!"
"전 2레벨 때 이미 청소부 협회장과 싸워 이겼고 3레벨 때 사자 기사를 죽였습니다. 제가 이길 가능성이 5퍼센트보다는 높습니다."
"협회장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저도 압니다. 흡혈귀 변신마지요? 눈이랑 송곳니를 보니 알겠습니다."
"자신은 있어?"
"있죠. 필승을 자신합니다."
[SR 흡혈마]
게임에서 쉬운 보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흡혈마의, 협회장의 특성과 내가 곧 완성할 빌드를 비교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최소한 5%보다는 낫지. 암.
"단, 필요한 게 있습니다."
"뭐든 말만 해.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내가 무슨 수를 쓰든 구해주지."
"다이아가 필요합니다."
"다이아?"
"예. 최대한 많이요."
그날 저녁.
강 이사가 다이아 여덟 개를 구해왔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맷집, 인내, 철갑, 성채, 결의, 극기 여섯 특성을 조합하여 금강체를 조립.
그리하여.
삼위일체 빌드가 완성되었다.
삼위일체 빌드 -3-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날 저녁.
한 사냥꾼이 목소리를 냈다.
"뭐가 이상하지?"
"군단장님 말입니다. 갑자기 결투 명령을 내리다니요. 평소에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묵하시던 분이."
이상하긴 이상하다.
협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흐, 그만큼 우리 협회장님이 대단하시다는 얘기지요."
"암요. 군단장님이 협회장님을 밀어주시려는 게 분명합니다. 그게 아니면 굳이 결투를 지시할 필요가 없어요."
"강 이사 따위 협회장님한텐 한주먹거리 아닙니까? 간단히 때려눕히시고 비상하실 일만 남아 있습니다."
"협회장님! 세 번째 군단장 되시고 저희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이 사람들도 참, 김칫국부터 마시긴."
뻔히 보이는 아첨이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결투에서 강 이사가 자신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기분좋게 술을 한 잔 마셨지만 처음 말했던 사냥꾼이 초를 쳤다.
"어쩌면 협회장님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응?"
"협회장님 때문이 아니면 누구 때문이야?"
"제 생각이지만, 내일 상대로 강 이사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강 이사 말고는 협회장님 상대가 될 사람이 없어!"
"이 과장과 박 과장은 4레벨인 거 몰라?"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머리를 좌우로 젓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협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사냥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겠어. 김 사냥꾼, 김전사가 청소부 협회장과 사자 기사를 단신으로 이겼다고 했지?"
"예. 청소부 협회를 이겼을 때만 해도 소문이 과장된 것 아니었겠냐고 했지만 사자 기사를 이긴 후로는 그 말이 쏙 들어갔습니다."
"사자 기사라고 해봐야 고작 4레벨입니다! 협회장님과는 상대도 안 됩니다!"
"아니지. 사자 기사면 자네들도 나도 이름은 들어본 인간이잖아. 그리고 사자 기사와 싸울 때 김 사냥꾼은 3레벨이었어. 4레벨이 아니라."
청소부 협회와 싸웠을 때는 몇 레벨이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김전사는 1레벨에서 2레벨을 건너뛰고 3레벨을 바로 인증받았으니까.
아마도 그때도 3레벨이지 않았을까?
협회장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청소부 협회 생존자들 말로는 신열로 인한 흑염이 그때 이미 보이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3레벨에 4레벨을 이긴 김전사.
협회장은 본능적인 경계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3레벨에 4레벨을 이겼다면, 4레벨에 5레벨을 이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설마.'
군단장이 그걸 알아보았다면?
이번 결투판을 벌인 게 그 때문이라면?
동부군 군단장은 극도로 호전적이고 힘을 숭상하는 인물.
특히 전사 계열 유망주를 좋아했다. 싹수가 있다 싶으면 제자로 삼거나 자기 무예를 전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
그렇게 받아들인 제자 집단이 동부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단장님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고작 4레벨 전사 하나 때문에 우리 협회를 적으로 돌리다니요?"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군단장님이 그 김 사냥꾼이라는 작자를 언제 봤다고 밀어줘요?"
"혈연이 아니고서야······ 으음?"
천 이사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설명된다.
혈연관계.
성은 다르지만 외가 쪽이라면?
혹은 숨겨놓은 자식이라면?
"맞는 것 같지요?"
"김 사냥꾼이 구 군단장님 손자나 제자라면 가능하지요."
"그랬다면 레벨 차이를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묵호무적검법을 익혈을지도 모릅니다."
"묵호무적검법이라니······"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유명한 검법.
김전사가 들었으면 그거 익히느니 3대 검법 익히겠다고 코웃음을 쳤겠지만 이들은 진지했다.
협회장의 얼굴도 침중하게 굳었다.
"이거 방심하면 안 되겠어."
사냥꾼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협회장님. 지금이라도 물러나시는 게······"
"흥. 물러나라고? 택도 없는 소리. 이미 성사된 명예 결투를 취소하면 군단장이 좋아하겠나? 자기 명예를 짓밟았다고 화를 내겠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협회장은 주먹을 꾹 쥐었다.
"압도적인 승리. 그것뿐이다."
주먹에 핏줄이 돋는다.
눈에 힘을 주자 세상이 붉게 물든다.
그리고 빨간 세상 위 거미줄처럼 돋아난 어떤 마력 문양.
몸에 이식된 어떤 변이 인자가 반응하고 있었다.
'진혈.'
협회장은 몇 년 전 힘들게 구한 변이 인자를 떠올렸다.
이식은 했어도 차마 각성하지 못한 그것.
사용하면 반드시 강해지겠지만 이성을 잃고 변이체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여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이 변이 인자를 각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정오.
협회장은 시청 앞 광장에서 김전사와 마주 섰다.
날씨는 우중충하다.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시작 전에 비약을 만들겠습니다."
"순수하게 본인의 능력으로만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못 만들면 불허하겠다."
"당연하지요."
김전사가 능숙하게 연금술 도구를 써서 비약을 만든다.
누구도 본인 능력이 아니라 주장하지 못할 지경.
'군단장의 혈육이 연금술을 익혔다고?'
저런 잡기를 허용할 인간이 아닌데?
그러거나 말거나 비약을 마시고 무장을 갖춘 김전사.
"시작하라!"
구형원이 마력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시작.
우드득!
즉각 변이 인자를 활성화시켰다.
진혈이 아니라 기존의 변이 인자만.
혈류가 빨라진다. 심장에서 마혈이 뿜어져 나온다. 근육이 질겨지고 피부에 각질이 번진다. 손톱이 쇠칼처럼 자라나고 송곳니가 검치호처럼 변했다.
"히익!"
"흡혈귀다!"
"변신마였어?"
구경하던 시민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렇겠지.
흡혈귀는 이미 멸종한 마물.
그 변이 인자를 얻기란 굉장히 어려웠으니까.
변신이 완료되자 자신감이 차오른다.
흡혈귀는 강하다.
아무리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전사 계열 초인이라 해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자신은 수십이나 되는 전사를 쓰러뜨린 적이 있다.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근력과 반사신경으로!
탓!
김전사가 땅을 박찬다.
벼락처럼 공간을 좁혀서는 방패를 휘두른다.
가소롭다.
통짜 강철 방패를 휘둘러도 모자랄 판에 접이식 방패라니?
반짝반짝 빛나는 게 마법이 깃들어 있다만, 그렇게 따지자면 자신도 풀세팅을 마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마법 무구라고!
"멍청한 놈!"
힘껏 팔을 휘두른다.
무쇠도 구부리는 근력.
철판도 뚫는 강화 손톱.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어둠 마력까지!
단번에 방패를 쪼개고 치명상을 입힐 작정이었다.
일그러질 얼굴이 눈에 선히 보였다.
그리하여 손톱과 방패가 격돌한 순간.
꽈앙!
느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크억?"
세상이 뒤집혔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었다.
심지어 몇 바퀴를 그대로 회전한 다음 어둠이 찾아왔다.
잠깐 기절하고 만 것.
가공할 재생력을 가진 흡혈귀답게 곧바로 정신을 차렸지만, 눈앞에 보인 것은 은색 빛무리를 머금은 성검이었다.
"으허억!"
가까스로 쳐냈다.
손톱에 깃든 어둠 마력이 뭉텅이로 깎이며 자랑스러운 쇠칼 손톱에 쩌적 금이 갔다.
협회장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마법검과 마주쳐도 멀쩡하던 손톱이 왜 저런단 말인가!
협회장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일격에 [거인의 힘][실전 격투][강타][참격]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꽂혔던 돌진도 마찬가지다. [거인의 힘][실전 격투][돌진][방패 치기]가 한꺼번에 쏟아진 탓에 5레벨을 뛰어넘는 공격이 나왔다.
그러고도 [금강체]와 [불사] 덕에 김전사는 어떤 반동도 받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5레벨 전사보다 강하다!'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다.
검기와 신들린 몸놀림 대신 우악스럽고 강인한 육체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지금도 방패가 빛을 발하며 날아오지 않나!
가까스로 두 팔을 교차하여 막았다.
포탄에 맞은 듯한 끔찍한 충격이 팔을 뚫고 쏟아졌다.
"끄흑!"
이대로는 필패.
'레벨을 숨겼구나!'
하지만 어떻게?
4레벨 인증을 받은 게 고작 며칠 전인데?
사냥꾼 협회에서 봤을 때도, 어제도 분명히 4레벨 마력 파장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된다.
레벨과 레벨 사이, 근본적인 무력 차이는 어지간해서는 극복할 수 없다!
용력을 타고난 천하장사거나 신화에나 나올 마법 무구를 풀 세팅하지 않는 바에야.
"으아아아아!"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전신 혈관이 터지며 피가 뿌려진다.
변이 인자, 진혈을 각성한 것.
이 수밖에 없었다.
전사에게 한 번 밀린 이상, 강화병이 이길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파파팍!
덩치가 커진다.
하체는 그대로인데 상체가 주르륵 길어진다.
허리는 앞으로 굽어 꼽추처럼 변하고 안 그래도 빨갛던 눈이 위아래로 쭈욱 찢어졌다.
거의 한 뼘이 넘게, 생물의 눈이 아니라 공간에 뚫린 균열처럼 변이된 기괴한 눈.
"괴, 괴물이다!"
"변이체다!"
구경하던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적당히 떨어져서 관전하던 구형원이 검을 뽑는 것이 보인다.
협회장은 속으로 오직 한마디만을 되뇌었다.
'나는 윤병진이다. 나는 윤병진이다······'
생체 강화병이 변이 및 각성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폭주하는 마력을 제대로 추슬러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한 마리 괴물로, 변이체로 영락하고 말 테니.
'나는 윤병진이······ 커헉!'
뻐억!
관자놀이를 강타하는 충격!
변이 각성 진행 중임에도, 김전사가 달려들어 방패를 후려갈긴 것이다.
협회장은 기괴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각성 중이다! 공격하지 마라!"
"뭔 개소리야? 공격받기 싫으면 결투 시작 전에 각성했어야지."
김전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임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격을 퍼부을 뿐이다.
협회장 [SR 흡혈마]의 특성은 [흡혈귀][돌연변이 손톱][돌연변이 근육][진화].
진화가 완료되어 2페이즈로 완벽히 진입하면 난이도가 몇 배로 상승한다.
5레벨 풀 파티도 전멸시킬 정도로.
흡혈귀, 돌연변이 손톱, 돌연변이 근육, 세 특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전에 끝낸다.'
김전사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검이 협회장을 긋고 지나갔다.
방패가 명치를 후려치고 손도끼가 머리를 찍는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흑염!
신의 불꽃이라 믿어지지 않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화염이 전신을 불사른다.
어둠 마력이 사정없이 잡아먹히고 신경계가 고문당했다.
"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협회장.
크게 팔을 휘둘렀다.
고무 채찍처럼 탄력 있게 변한 팔이 김전사를 강타했다.
"큭!"
변이 인자가 제대로 정착하지도 못했건만 어마어마한 힘.
거인의 힘과 거구 중첩으로 키 2미터를 넘는 김전사도 감당하지 못하고 몇 미터도 넘게 날아간다.
그러나 한 호흡조차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일어선다.
오뚜기처럼.
"으아아아!"
직후 다시 돌진.
아직도 각성 진행 중인 협회장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두툼하게 부푼 팔을 뻗어보지만 부족하다.
흑염에 휩싸인 성검이 손바닥을 뚫고 눈앞까지 다가왔다.
"이이익!"
팔을 휘두른다.
바위도 깨뜨릴 타격이 쏟아진다.
그러나 몇 번을 두들겨도 김전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더욱 몸을 들이밀며 반격을 가할 뿐이다.
분명히 유효한 타격을 입히고 있는데도 보이는 반응이라고는 눈을 꿈틀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크아아악! 으아아! 죽어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5레벨 전사라고 해도 뼈가 부러질 공격이다.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제대로 소화하면 7레벨이 되고도 남을 변이 인자, 진혈.
아무리 각성 중이라고는 하나 고작 4레벨 전사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이.
5레벨이라고 잠깐 착각했으나 이 연약한 마력 파장을 보건대 4레벨임이 분명한데도!
"크아아아!"
회심의 일격을 꽂았다.
마침 손도끼를 휘둘러 자신의 어깨에 공격을 꽂은 직후.
김전사는 피하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제대로 때렸으나 당연히 기절해야······
아니었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버텼다.
뭘 했는지 전신이 잠깐 무쇠덩어리로 변한 것.
[무쇠주먹]의 고유 발동 효과.
여기에 특성 전환으로 방어 특성 여섯 개를 쫙 깔았다.
그 결과 김전사는 협회장의 일격을 버텨냈고 이로써 승패가 갈렸다.
자세를 취하는 김전사.
검을 살짝 뒤로 돌리고 몸을 틀었다.
손도끼는 아예 버리고 성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진하게 풍기는 마력 파장에 협회장 또한 최후를 직감했다.
"내가 이렇게 끝날 줄 아느냐!"
각성 완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위기감이 이성을 붙잡았다.
마력이 제대로 통제되는 중이다.
괴물처럼 변했던 육체도 정상으로 되돌아가기 시작.
이 위기만 넘기면 된다!
이 공격만 막으면!
그때는 내 세상이다.
최소한 6레벨.
어쩌면 7레벨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사냥꾼 협회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세 번째 군단장이 될 수도 있다!
펼쳐지는 장밋빛 환상.
그러나 김전사가 검을 뻗었을 때.
몸에서 새하얀 마력이 전개되었을 때.
황홀하게 타오른 빛이 유성의 형태를 갖추었을 때.
그 유성이 한 자루 검이 되어 질주할 때.
협회장은 직감했다.
이건 못 막는다고.
"아······"
부질없이 내미는 손.
곧,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의식이 끊어졌다.
영원히.
묵호검 -1-
묵호검
손이 떨린다.
숨이 가쁘다.
허탈하게 비어버린 마력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섬광은 여전히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4레벨이 된 지금도 한 번 쓰면 기진맥진할 정도였다.
아마 5레벨이 되고 마력혼을 장착해야 마음껏 쓸 수 있겠지.
"대단하네!"
구형원이 감탄을 터뜨렸다.
"자네 정말 4레벨 맞나? 과연 군단장님께서 눈여겨 보실 만한 재목이야."
스스럼없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구형원.
가만히 손을 맞잡았다.
구형원이 빙그레 웃더니 힘을 꽉 준다.
이 인간이?
나도 손에 힘을 주었다.
근육이 꿈틀꿈틀 일어나 구형원과 힘 겨루기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조금 밀렸다.
아무리 거인의 힘에 근력, 괴력, 강건을 총동원했어도 7레벨 초인에게는 안 된다.
구형원이 마음만 먹었으면 내 손을 으스러뜨리고도 남았겠지.
하지만 내 손을 부수는 대신, 구형원은 친근하게 내 어깨를 툭 쳤다.
"정말 대단한 강골이야! 4레벨에 이 정도면, 나중에 고레벨이 되면 아주 볼만하겠어! 숨을 조금 돌리고 나를 따라오게."
"사단장님을요?"
"그래. 자넬 보고자 하는 분이 계셔. 거절은 불가하네."
아마 군단장이겠지.
나는 협회장 시체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괴물처럼 변해 있는 협회장.
온몸이 보물창고다.
얼굴에 쓴 가면, 붉은 비단옷 세트, 마법 문자가 새겨진 가죽신, 마법 반지와 목걸이를 일일이 챙겼다.
'내가 쓸 게 있을까?'
사자 기사는 장비가 옛 아버지 교단에 귀속됐지만 협회장은 그런 거 없다.
마법 무구를 모조리 챙겨서 골프백에 집어넣었다.
강 이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걸어왔다.
"김 사냥꾼님!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김 사냥꾼님이 강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말투가 또 바뀌었네?
강 이사가 잔뜩 얼어붙은 협회장측 인사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어떤 조건을 달더라도 저들은 거부하지 못한다.
심지어 목숨을 요구해도 마찬가지.
"이사님이 알아서 하시죠."
"제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사냥꾼 협회는 이사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사냥꾼 협회에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들을 이용해서 김 사냥꾼님을 협회장으로 추대하고 싶습니다."
"싫습니다."
"네? 어째서요? 저희가 못난 꼴을 보여드리긴 했지만 사냥꾼 협회도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단체입니다."
"제 시간이 너무 줄어들어서요. 가끔 마수 사냥할 때만 사냥꾼 협회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강 이사가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탐색하는 눈빛.
나는 그저 진저리만 한 번 쳤다.
사냥꾼 협회를 맡으라고?
미쳤냐?
그럴 시간 있으면 열심히 특성이나 얻으러 다니지.
"김 사냥꾼님이라면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저요? 간단하죠."
나는 엄지를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듣고 있던 과장들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강 이사도 마찬가지.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좀······"
"그러니까 강 이사님이 알아서 하세요. 죽일 놈은 죽이고, 살려도 괜찮다 싶으면 살리고. 전 불안하다 싶으면 무조건 죽이고 보자는 주의지만, 이사님은 또 다르시지 않습니까?"
극단적인 대처긴 하지.
그게 이 막장 세상에 떨어진 나의 생존 방식이고, 적응한 결과였다.
귀찮은 일은 그렇게 강 이사에게 떠넘겼다.
골프백을 짊어지고 구형원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구형원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게. 거기 사냥꾼은 요구사항을 결정하면 내 부관에게 말하고."
"예, 사단장님."
구형원이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시청 뒤.
마왕의 탑처럼 서서 철원 시국 전체를 내려다보는 마천루.
흔히 호왕궁이라 부르는 곳으로.
스스스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솟구쳤다.
구형원이 내게 주의를 준다.
"군단장님을 뵈면 최대한 예의를 차려야 하네. 군단장님께서는 소탈하신 분이지만 나와 내 삼촌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사백과 사질들도 마찬가지고.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자네는 성한 몸으로 철원 시국을 나갈 수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구형원이 군단장 막내 손자였지.
마흔이 넘은 구형원.
새삼 군단장이 나이가 많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아마 100살이 넘었었지?
띠링!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호왕궁 최상층.
군단장 홀로 쓰는 집무실이 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관들이 딱딱한 얼굴로 다가와 나와 구형원, 둘을 모두 검사했다.
그런 다음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호왕 군단 4 사단장 구형원 소장과 사냥꾼 협회 소속 4레벨 초인, 김전사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낮고 중후한 목소리.
문이 열렸다.
수 톤은 넘을 법한 철문을 부관들이 순수한 근력으로 열어젖히자, 비로소 내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밝고 화사한 분위기.
벽 대신 사방을 감싼 통창으로 태양광이 환히 들어온다.
집무실보다는 전망대에 가까운 형태.
그 끝에 놓인 책상.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샜으나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에 홍조가 돌아 40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중노년의 남성.
실제로는 100살이 넘은 노인.
덩치는 곰처럼 크고 눈은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하다.
등 뒤에 걸어놓은 까만 검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남자 앞에 다부진 체격의 남녀가 줄을 지어 앉아 있으나 오로지 남자밖에 안 보였다.
'저게 군단장······'
마력 파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는 뜻.
대신 인간 자체의 위압감이 망치처럼 어깨를 두들겼다.
구형원이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군단장님. 데리고 왔습니다."
"오냐."
군단장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나도 공손하게, 그러나 비굴하지는 않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전사라고 합니다."
"오냐. 결투는 잘 봤다. 스승이 누구냐? 너 같은 전사를 길렀을 정도면 내가 알지도 모르겠구나."
"스승은 없습니다."
"없다?"
"예."
"하다못해 검술의 기본을 잡아준 스승은 있을 거 아니냐?"
"아, 기본 검술은 제일보안의 서우진 본부장에게 배웠습니다."
"서우진 본부장?"
군단장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는다.
구형원이 대신해서 대답했다.
"제검문과 일검문 소문주가 결혼해서 제일보안을 만든 것은 아시지요?"
"알다마다. 원수 집안끼리 결합한다고 한동안 시끄러웠지."
"그 둘이 낳은 아이가 서우진입니다. 올해 스물이 갓 넘었지요. 첫 인증에서 5레벨이 나와서 화제가 됐습니다."
"허, 그 핏덩이들이 결혼한 것도 신기한데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스물이 넘었다고? 그렇지, 저번에 부관한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녀석한테 검술의 기본을 배웠다고?"
"예, 군단장님."
"정말로 스승이 없단 말이냐? 기본 검술은 그렇다 치고, 경험은 꽤 있어 보이던데?"
"살아남으려고 하다 보니 이것저것 익혔습니다."
"독학했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군단장이 사슴 노리는 호랑이처럼 나를 노려본다.
줄지어 앉아 있던 초인들이 쓰게 웃었다.
몇몇은 내게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던져서 뒤통수가 심히 가려워졌다.
"하긴 움직임이 상당히 잡스럽긴 했지. 검술은 기본만 뗀 정도고 동작 연계도 무척 어설펐다. 그렇지 않느냐?"
"확실히 그랬습니다."
"명가의 손이 닿지는 않았지요."
"제대로 검을 배우면 몇 배는 더 강해질 겁니다."
"타고난 몸이 아까웠습니다. 육체적 능력과 마력 제어는 뛰어납니다만, 그게 전부였지요."
"감각은 있습니다만 검술은 뒷골목 갱단 수준이었습니다."
"모두 제대로 보았다."
군단장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무형의 기세가 나를 더듬고 있었다.
근육 한 올 한 올, 뼈 생김새, 혈맥의 두께와 마력 회로 분포까지 몽땅 다.
8레벨 초인은 모두 저런 걸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 마탑주 앞에선 특성 전환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군단장은 내가 특성 전환하는 것을 봤을 테니.
'아니야. 내 특성 전환까진 모를 거야.'
군단장은 전사 계열이니까.
탐지나 통찰 같은 특성도 없으니까.
"그러니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초인들이 일제히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또? 하는 얼굴이다.
나도 슬슬 감을 잡았다.
게임에서도 동부군 군단장은 똑같은 말을 하거든.
"김전사 자네, 내 제자가 될 생각 없나?"
제자, 제자라.
게임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제자가 되면 동부군에 소속되어 성장하게 된다. 전사 계열 초인이라면 군단장의 무공을 배우고 휴전선 마수들과 싸우게 되니 고속 성장이 보장되지.
거부하면?
특별한 불이익은 없다.
어차피 게임에서는 사냥터가 넘쳐나니까.
군단장의 무공을 배울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그에 비견되는 검법과 마력 연공법은 많고 많다.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이 제안, 분명히 좋은 제안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빨리 9레벨이 되는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자면, 역시 쉬운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어려운 길로 가야 한다.
남들이 보면 미쳤냐고 길로.
"죄송합니다. 대단히 영광스럽고 감사하신 말씀이지만, 저는 제 길을 걷고 싶습니다."
"으흠, 그래. 잘 생각했네. 이제 구배지례를······ 아니, 뭐라고?"
군단장이 머리를 끄덕이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군단장님. 저는 제 길을 걷고 싶습니다."
"잠깐만, 자네 혹시 거절한 건가? 내 제자가 되는 걸?"
"예.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기가 막힌다는 시선이 쏟아진다.
군단장만이 아니다.
동석한 초인들도 입을 쩍 벌리고 미친 사람 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저게 미쳤나?"
"감히 누구한테!"
"일생일대의 기회를!"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저 자식이!"
몇몇은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군단장이 호통을 쳤다.
"시끄럽다!"
당장 얼어붙는 분위기.
군단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어째서지? 자네도 알지 않나? 내 제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 대한민국에 내 제자가 될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겠다고 할 인간들이 여의도도 꽉 채우고 남을 걸세. 그런데 거부하겠다고? 왜?"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
"뭔가?"
"9레벨이 되는 겁니다."
9레벨.
현재 시점에서는 단 네 명만 존재하는 성좌지경.
게임 후반부에는 9레벨이 아주 넘쳐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흐."
군단장이 짧게 웃었다.
"9레벨이 되려면 제대로 된 스승이 있어야 하지 않나? 스승 없이 타고난 육체만 믿고 수련하다가는 반드시 길을 잃고 만다. 자네는 전사야. 강화병이 아니라. 전사가 강해지려면 고급 검법과 연공법, 그리고 깨달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네의 어설픈 검술과 투박한 움직임으로는 절대 9레벨, 아니 8레벨이 아니라 7레벨에도 도달하지 못해.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모르겠지만, 그 잘못된 습관들이 결국은 자네 발목을 잡을 걸세."
어린 손자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하는 군단장.
가슴이 조금 울컥했다.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제외하면.
그러나 나는 수락하는 대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저는 이미 제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이 맞든 틀리든 제 길을 가보려고 합니다."
"흠. 그 길의 끝에 9레벨이 있다고, 성좌경이 있다고 확신하나?"
"확신합니다."
군단장이 나를 주시한다.
듣고 있던 초인들이 입을 비틀었다.
하늘 같은 군단장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든 모양.
"보자 보자 하니까, 하룻강아지 주제에······"
"감히, 감히!"
"요즘 젊은 것들은 아주 간이 배 밖에 나왔구먼."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그러나 곧 닥치게 된다.
살기가 넘실거렸다.
마력 파장은 발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수한 기세가, 정신의 힘이 나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군단장밖에 안 보였다.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유형의 검이 되어 내 전신을 찔러온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뇌가 검에 찔린 듯한 감각이 내 자아를 휘저었다.
그러나 버틴다.
[거인의 힘][금강체][불사]
[결의][극기][투지]
기본적인 삼위일체 빌드.
여기에 정신 방어에 도움이 될 특성을 더한다.
마법 무구는 쓰지 않았다.
오로지 내 본연의 힘만으로 버텼다.
눈에 힘을 주고 군단장을 쏘아보았다.
산보다 큰 호랑이를 눈앞에 둔 느낌.
정신이 낱낱이 해체되는 듯하지만 어떻게든 버틴다.
혀를 씹고 아랫입술을 깨물어가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줄줄 흐르도록 버티고 또 버틴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는 군단장이지만 나를 무릎 꿇리지는 못했다.
내 허리를 굽히게 만들지도 못했다.
"흐."
결국 짧은 웃음과 함께 살기를 거두는 군단장.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실례라는 건 아냐? 이 어린 녀석아."
면전에서 거부당했지만 뜻밖에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옛다!"
허공섭물로 등 뒤 걸린 까만 검을 끌어당기더니, 검집째로 내게 던져준다.
엉겁결에 받자 군단장이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이제 네 것이다."
어······
뭐라구요?
SSR 등급 검을, 묵호검을 저한테 준다고요?
잠시 정적.
곧 비명과 괴성, 고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묵호검 -2-
"아버지!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
"저런 새파란 애송이한테 묵호검이라니요! 차라리 백호검을 내리십쇼! 백호검이라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나도 얼굴을 아는, 동부군의 어느 사단장.
조용하던 집무실이 아주 도떼기시장처럼 변했다.
군단장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벼락처럼 호통을 쳤다.
"닥쳐라, 이 못난 것들아!"
기세가 폭발한다.
여전히 마력 파장을 동반하지 않는 위압감.
맹호가 앞에서 으르렁대는 듯한 감각이 덮쳐온다.
나는 여전히 정신 방어용 세트를 장착한 상태.
덕분에 겨우 견뎌냈지만 다른 초인들은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어떻게든 마력을 끌어올리고 혀를 깨물어 피를 흘려가며 버텨낸다.
그걸 보고 군단장이 혀를 찼다.
"못난 놈들 같으니. 봐라. 7레벨이라는 놈들이 이 늙은이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 저렇게 빌빌대고 있어."
"천산의 천마가 오지 않는 한 군단장님을 감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응? 허허허. 아첨도 잘 하는구먼."
군단장이 껄껄 웃으며 살기를 거뒀다.
초인들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눈치를 본다.
'군단장 특성 중에 [의기상인]이 있었지······'
게임에선 조금 강한 디버프였는데 현실에서는 무시무시하네.
아까 소리 질렀던,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가 대표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잠깐 평정을 잃었습니다."
"쯧! 너도 일흔이 넘었는데 아직도 고작 검 한 자루를 아까워하느냐? 네가 8레벨만 됐어도 묵호검은 진작 네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야! 이 미욱한 놈들. 너희 중에 8레벨이 나왔으면 나는 진작 은퇴해서 낚시나 하러 다녔을 거다. 이 늙은이가 아직도 이 자리에 앉아 있게 한 불효막심한 놈들이 뭐가 어째? 말이 안 돼? 차라리 백호검을 줘? 에라, 이 한심한 것들아!"
평소에 쌓인 게 많았나 보다.
군단장이 한참을 퍼부은 후에야 진정하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더니 USB처럼 생긴 기억칩을 꺼내 던졌다.
"인석아, 이것도 받아가라."
"군단장님? 이건 또 뭡니까?"
"호왕검법이다."
호왕검법!
초인들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지만 이번에는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한 차례 뜨거운 맛을 봤거니와 호왕검법은 묵호검과는 차이가 있었으니까.
동부군 군단장을 상징하는 무기, 묵호검.
마찬가지로 동부군 군단장의 대표 무공, 묵호무적검법.
호왕검법은 그 아래다.
정확히 말하면 상급 검법.
파산검법이 3, 4레벨이 쓰기에 적합하고 5레벨에 도달하기 좋은 중급 검법이라면 호왕검법은 그 위 단계 정도 된다.
제검문과 일검문의 검법보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네가 쓰는 검법, 제검문의 파산검법이 맞지?"
"예."
"파산검법은 패(覇)를 잘 펼쳐낸 검법이지. 호왕검법도 결이 같다. 패(覇)와 쾌(快)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으니 네가 쓰기에도 좋을 것이다. 생각 같아선 호왕심법도 주고 싶다만 마력 연공법은 내공심법이 아니라 유럽쪽 오러 연공법을 익힌 것 같으니 넘어가마. 나는 오러 연공법은 아는 게 없으니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나는 사양하지 않고 검과 기억칩을 받았다.
사실 속으로는 부담되서 죽겠다.
기억칩만 줬으면 좋다고 홀랑 받아먹었을 텐데 묵호검이 뭐냐, 묵호검이?
설마하니 날 후계자 삼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군단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9레벨이 되겠다고? 기쁘게 기다리고 있으마. 만약 네가 10년 안에 9레벨이, 아니 8레벨이 된다면 동부군은 네 것이다."
"구, 군단장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줘?
자식도 많고 손자 손녀도 많잖아! 제자도 엄청나게 많고!
그중에 7레벨만 거의 10명이 다 되어 가는데, 그중 한 명한테 물려줘야지!
"너희도 마찬가지다."
군단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초인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누구든 8레벨이 되는 순간 내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하지만 8레벨이 되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 일부는 국군에 주고, 일부는 보안회사로 만들고, 철원 시국을 나라에 반납해서 동부군을 내 손으로 해체하고 말겠다!"
"아, 아버지!"
"스승님!"
"그건, 그건 너무 하십니다."
"뭐가 너무해? 여지껏 8레벨이 못된 너희가 너무하지! 나는 말이다. 최소한 여든 전에는 은퇴할 줄 알았다. 생각해 봐라. 어, 그래. 정주 네가 군단장이 되면 여기 이놈들을 휘어잡고 마음대로 굴릴 수 있겠냐? 응? 진주랑 형주가 제대로 말을 들으려고 하겠어?"
"아버지. 큰오빠가 군단장이 되면 당연히 복종해야지요."
"당연히 복종할 겁니다."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너희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지목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큰아들일 구정주보다 확실히 젊은 얼굴.
거의 10년 이상.
군단장이 쐐기를 박았다.
"묵호검은 이제 네 것이다. 네 녀석 패기와 가능성을 봐서 주는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할 거다. 찾았다는 길을 찾아 걷되, 9레벨은커녕 8레벨도 못 될 것 같으면 묵호검을 차라리 반납해.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이 호랑이도 못 된 승냥이 같은 놈들이 조용히 있겠지만, 10년 뒤에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10년이다.
군단장은 본인이 10년 이상 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게임에서도 그랬지.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군단장은 자연사하고, 동부군은 내전을 거쳐 자멸한다.
나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10년, 아니 5년 안에 결과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동부군을 물려받을 생각은 없다.
너무 귀찮아.
하지만 가능성을 열어두는 건 나쁘지 않다.
나도 생각이 바뀔 수가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100살 넘은 할아버지가 이렇게 호의를 보여주며 퍼주고 있는데 죄다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응? 하하하!"
군단장이 나를 보며 파안대소했다.
"어린 녀석이 패기 한 번 대단하구나! 그래! 전사는 그래야지! 남자 새끼가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그 정도 패기는 보여줘야지! 좋다. 기대하고 있으마! 너무 늦지 않게 찾아와야 한다!"
군단장은 그만 가보라고 손을 내저었다.
정중히 인사하고 나오자 구형원이 따라붙는다.
냉막하던 얼굴이 부럽다는 듯 내 허리춤을 훔쳐보고 있었다.
"갖고 싶으세요?"
실소하며 웃자 구형원이 정색하며 부정한다.
"그럴 리가. 군단장님께서 자네에게 묵호검을 내린 이유가 있겠지."
"만약 사단장님께서 8레벨을 달성하시면 묵호검을 사단장님께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군단장님께서 내린 검을 자네 마음대로 처분해서는 안 될 일일세."
"대신 동부군 창고에서 묵호검에 비견되는 명검 한 자루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묵호검이 동부군에 어떤 의미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사단장님만 아니라, 누구든 8레벨이 되면 기꺼이 선사해드리겠습니다. 군단장님도 속으로는 그걸 원하실 겁니다."
"뭐······ 그렇긴 하지."
구형원이 쓰게 웃었다.
7레벨과 8레벨의 차이는 크다.
7레벨을 다른 말로 궁극지경이라고 한다.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는 뜻.
8레벨은?
초월이다.
거기서부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100살이 넘었는데도 주름살 하나 없이 탱탱하던 군단장.
군단장의 아들인데도 주름살 자글자글하던 7레벨 초인.
그 둘만 비교해도 차이는 명확했다.
"말이라도 고맙네. 자네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는 아니었군.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9레벨이 될 자신이 있나?"
흐리게 웃으며 날 보는 구형원.
그 눈동자 깊은 곳에 음험한 빛이 살짝 스친다.
거기 떠오른 것은 시기, 그리고 질투.
아니 금수저 중의 금수저가 나한테 이러면 어떻게 해?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까진 없죠. 그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무라도 썰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도 있으니, 여기서 멈추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하긴 그렇지······ 나도 자네 때만 해도 서른 전에 8레벨 밟고 쉰 정도 되면 9레벨 될 줄 알았어."
"구 사단장님은 대한민국의 영웅 아니십니까. 아까 뵀던 분들도 다들 기라성같은 분이지만, 구 사단장님이야말로 차기 군단장에 가장 가까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조만간에 8레벨이 되실 겁니다."
"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그럼 그때까지 묵호검을 맡겨 놓은 것으로 해도 될까?"
"당연하지요! 8레벨이 되시면 언제든 문자 한 통 보내주십쇼. 바로 묵호검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나는 답례로 줄 명검을 미리 생각해두어야겠군.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구형원이 기분 좋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8레벨 되기는 퍽이나.
게임 시작 시점에서도, 에피소드 9가 나오고 한참이 지난 시점에서도 구형원은 7레벨이다.
그래도 사단장은 사단장.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앞으로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게. 자네가 군단장님 정식 제자가 된 건 아니지만, 묵호검을 받은 이상 자네도 우리 식구나 다름없어."
"예, 사단장님."
"어허.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아, 그리고 아까 봤지? 우리 큰삼촌. 욕심 많은 분이니 조심하게. 대놓고 자네를 어쩌진 못해도 여기저기서 시비 거는 인간이 많이 생길 거야. 쯧, 그럴 시간에 수련이나 더하시지. 군단장님이 굳이 자네한테 묵호검을 하사하신 이유가 있다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억칩은 지금 바로 사용하게. 내가 보는 앞에서."
호왕검법 기억칩.
투명 USB처럼 생긴 칩을 또깍 부러뜨렸다.
정보가 내 뇌로 쏟아진다.
젊은 시절의 군단장.
지금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모습의 남자가 호랑이처럼 검을 찌르고 긋고 연속으로 휘두르고 멀리 날리는 장면이.
구형원이 내 눈을 확인하곤 흐리게 웃었다.
"이걸로 자네도 우리 식구가 되었군. 군단장님의 진전을 이은 걸 축하하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게나. 사승관계를 맺지 않았다곤 하나 자네도 사실상 우리 동부군의 일원일세."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절대 빈말 아니니 명심하게. 음, 난 바빠서 먼저 가겠네. 자네도 살펴 가게."
"예,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구형원이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멀찍이서 보고만 있던 강 이사와 과장들이 달려온다.
아까부터 시선이 내 허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김 사냥꾼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거 묵호검 아닙니까?"
"묵호검 맞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묵호검이요? 그 묵호검? 군단장님의 그 묵호검?"
"예. 맞아요."
강 이사가 뜨악해서는 입을 벌렸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김 씨가 아니라 구 씨십니까? 아니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구 씨이신건······"
"둘 다 아닙니다. 군단장님께서 제가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아니, 마음에 들었다고 자기 애검을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자가 되라고 하시더라고요."
"허억!"
강 이사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제, 제자가 되신 겁니까? 그럼 동부군 장교로 임관하시겠네요!"
"거절했습니다."
"예? 미치셨어요? 왜요?"
"저는 자립과 독립이 꿈이라서요."
강 이사가 미쳤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럼 어떻게 해?
3대 검법을 수집하려면 어디 소속되어서는 힘들다.
백소린과는 인연이 닿았고 마르스 검투법을 각성하길 기다리고 있지만, 쟈네트와 칼리는 아직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에인헤랴르 연공법의 상위 연공법도 마찬가지.
조만간 원정을 떠나야 하는데 덜컥 군단장 제자가 되면 자유가 사라진다.
에인헤랴르 연공법 따위 집어치우고 자기 독문 신공을 익히라고 강요하겠지.
"그릇이 큰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기왕이면 그릇이 크다고 해주시죠."
"후우, 도대체가······"
강 이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머리를 흔든다.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제자의 'ㅈ' 소리가 나자마자 구배지례를 올렸을 거라고.
"협회장측 사냥꾼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말씀드린다면서. 악랄한 몇 명만 끝장내고 나머지는 경고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게 적당하긴 하죠."
나라면 모조리 죽였겠지만 강 이사 입장에선 다르겠지.
애초에 사냥꾼 협회는 말 그대로 협회.
이익 단체다.
군단이나 교단처럼 강제적 결속력이 있는 집단이 아니다.
강 이사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전부 김 사냥꾼님 덕입니다. 김 사냥꾼님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제가 중국 간 사이 여기 두 과장이 협회장한테 넘어갔을 거고, 이후에는 협회가 둘로 쪼개졌겠지요."
옆에 서 있던 박 과장과 이 과장이 어색하게 웃는다.
둘도 그랬을 거라 인정하는 것.
실제로도 그랬고.
아마 강 이사가 중국에서 귀환한 다음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냥꾼이 죽었겠지.
결국 강 이사가 승리하긴 해도.
"원래는 적당히 마법총 몇 자루 선물하고 끝내려고 했습니다만 그래서는 안 되겠네요."
강 이사의 시선이 묵호검에 꽂혀 있었다.
암, 당연하지.
묵호검을 받은 이상 나는 평범한 4레벨 초인이 아니다.
동부군 군단장이 주목하는 신예이자 후계자 후보라고 봐야지.
어쩌면 나중에는 내가 [묵호검주]라고 불리지 않을까?
"김 사냥꾼님."
강 이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협회 이사가 되실 생각 없으십니까?"
묵호검 -3-
"갑자기 웬 이사요?"
"군단장님께 묵호검까지 받은 분을 평회원 자리에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냥꾼 협회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이사직을 수행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건도 안 들어보시고요?"
"예. 힘들겠습니다."
이사 자리?
나쁘진 않지만 굳이 할 이유도 없다.
사냥꾼 협회 이사하느니 차라리 동부군 장교가 낫지.
군단장 제자라는 후광에, 군단장 독문무공까지 전수받을 수 있잖아.
"음······"
강 이사가 눈살을 찌푸리고 과장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었던 모양.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강 이사가 두 번째 제안을 꺼냈다.
"그러면 명예 이사는 어떻습니까?"
"명예 이사요?"
"예. 김 사냥꾼님께 이사로서의 어떤 역할도 부여하지 않겠습니다. 석 달에 1번 있는 분기 회의에만 참석해 주시면 실수령 연봉 10억을 보장하고 모든 복지 혜택을 보장하겠습니다."
연봉 10억!
나야 이미 수십억 대 자산가지만 초고액 연봉에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들어보니 이사 복지 혜택도 장난이 아니다.
고급 오프로드 SUV 유지비 지원, 운전기사나 비서, 경호원을 4명까지 고용하는 비용 지원, 원하면 협회 근처에 50평대 단독주택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그 외에 병원비, 소모품 구매, 신전 헌금까지 지원이 되는데 이런 자질구레한 건 생략하도록 하자.
"음······"
솔직히 말해서 흔들렸다.
의무는 없는, 다시 말해 출퇴근 안 하고 월급만 타먹을 수 있는 꿈의 직장이잖아?
강 이사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김 사냥꾼님이 우리 협회 이사가 되어야 다산총을 드릴 수 있습니다."
뭐? 다산총?
"다산총이요? 그걸 주시려고요?"
"예. 평범한 마법총은 김 사냥꾼님 품격에 안 어울리지요. 최소한 다산총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억, 다산총이라니······"
"와······ 부럽습니다. 김 사냥꾼님."
다산총.
제작 당시에는 이런 별명이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이 이렇게 부르곤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산 정약용이 만들었으니까.
원래 세계에서는 유명한 실학자였던 인물.
이 세상에서는 8레벨 마법사이자 조선 후기 마도과학자로 이름이 높다.
특히 무기류 제작에 일가견이 있었지.
무기류 중에서도 총기류에.
"몇 점이나 주실 수 있습니까?"
"두 점까지 가능합니다. 우리 협회가 소장한 다산총이 딱 두 점이라서요."
그걸 다 준다고?
게임에서는 희귀 마수를 수백 마리를 넘게 사냥하며 공헌도를 쌓아야 한 점 내줄까 말까 했다.
묵호검과 군단장이 크긴 크구나.
이쯤 되면 거절하는 게 바보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주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실례겠지요. 수락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하하! 우리 협회가 김 사냥꾼님, 아니 김 이사님 앞날에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하하하하!"
강 이사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어 젖혔다.
박 과장과 이 과장도 내게 악수를 청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 이사님!"
"김 이사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앞으로는 김 이사님 라인 타면 되는 거지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네들은 곧 죽어도 날 따라와야지 왜 김 이사님 라인을 타?"
"강 이사님 라인 타다가 죽을 뻔했으면 된 거 아닙니까? 저는 이제 김 이사님 딸랑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바로 사냥꾼 협회로 이동했다.
협회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미 소식이 전해진 것.
그런 가운데 강 이사가 나를 협회 창고로 인도했다.
창고 가장 깊은 곳.
두 점의 총이 벽에 걸려 있었다.
옛스러운 분위기.
총열과 총몸 모두를 고급스러운 흑단목으로 만들었다. 요소요소에 황금 무늬를 상감해 놓았다. 별자리처럼 박힌 작은 보석은 은은한 마력 파장을 발한다.
생김새는 머스킷이다. 영화에서 보던, 19세기 전열 보병이 쓰던 단발 소총을 닮았다.
그러나 총열은 짧은 편이고 개머리판은 확실히 달려 있었다.
심지어 머스킷에는 없는 탄창 꽂는 부분도 보였다.
19세기 총보다는 현대의 총을 닮은 형태.
기이이잉.
강 이사가 생체 인증과 마법 인증을 거쳐 잠금을 풀었다.
"다산총에 다섯 종류가 있다는 건 아시죠?"
"예. 권총 두 종류, 산탄총, 소총, 저격총이죠."
"잘 아시네요. 저희한테 있는 건 산탄총과 저격총입니다. 창립자분들께서 쓰다 기증하신 물건이지요."
"그걸 저한테 주셔도 됩니까?"
"완전히 드리는 건 아니고 영구대여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죽을 때 돌려주면 된다는 뜻.
창립자들이 기증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사냥꾼 협회 역사가 오래되긴 했네.'
연원을 따지면 조선 시대 착호갑사부터 시작한 조직이다.
마탑이나 교단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뿌리 깊은 단체.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산총 다섯 종을 모아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전설이긴 한데, 다산총 다섯 종을 모두 모으면 다산의 마법서를 찾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거 마법서 아냐.
총잡이 빌드의 상위 특성 개방하는 유물이지.
어, 잠깐만.
총잡이?
지금 나도 총잡이 완성이 눈앞에 있잖아.
난사 특성만 얻으면 총잡이 재료는 끝이다.
총잡이는 사람 상대할 때 매우 강력한 만큼 다산총을 미리 모아놓는 것도 좋겠지.
나는 강 이사에게 총 두 자루를 받아들었다.
현대의 총보다는 확실히 무거운 느낌.
군대에서 쓰던 K2 소총이 3킬로그램을 조금 넘는데 반해 이건 하나하나가 5킬로그램을 넘었다.
그래도 내 힘이라면 솜털처럼 가볍지.
철컥, 철컥.
노리쇠를 당기자 쇳소리가 울린다.
내부에 박힌 마력석이 내 마력을 빨아들인다.
철컹, 철컹.
발사되지는 않는다.
다산총은 마총과 다르게 마력을 탄환 삼는 마력총이 아니라 마법부여총이니까.
강 이사가 다산총 옆에 전시된 총알을 흔들었다.
"다산이 최초로 만든 총은 수석식 소총이었다고 합니다. 산탄총을 빼면 모두 단발식이었고요. 지금은 개조를 거쳐서 현대식 탄환을 쓰게 바꾸었습니다. 산탄총은 12게이지 산탄, 저격총과 소총은 7.62밀리미터 총알을 사용합니다."
"마력은 제가 공급해야 하는 거죠?"
"예. 산탄총은 10발, 저격총은 5발까지 충전할 수 있습니다. 전투 상황에 마력 충전하다가 큰일 날 수 있으니 마력 충전 장치나 마력 저장 아티팩트를 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하나 있다.
나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를 살짝 쓰다듬었다.
청소부 협회 이사 카론과 싸워 이기고 얻은 전리품.
통찰 특성으로 가늠해 보니 산탄총과 저격총 탄창 10개들이, 즉 100발과 50발까지 충전할 정도 된다.
꼭 마법 부여 안 써도 되지.
다산총은 그 자체로 훌륭한 총이니까.
"산탄총에는 충격 능력이, 저격총에는 영탄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죠? 다산총끼리는 능력 공유 되는 거."
"알죠."
그래서 사기다.
명중한 곳을 갈아버리고 밀쳐내는 [충격].
유형체를 통과하고 무형체를 타격하는 [영탄].
다산 저격총을 갖고 있으면 벽 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
그냥 통과시키고 직접 공격할 수 있으니까.
단, 이때는 육체가 아니라 영체를 공격하니 죽이지는 못한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 아니 저레벨 초인도 가뿐히 기절시킬 수 있다.
어찌 보면 단순히 죽이는 것보다 낫지.
'중첩이 안 되는 게 아쉽네.'
그랬으면 SSR 중에서도 1티어 취급인데.
어쨌든 다산총 각각은 SR등급이지만 세트를 다 모으면 SSR이다.
기회 닿는 대로 모아봐야겠어.
내가 총 두 자루를 골프백에 넣는 것을 강 이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쳐다보았다.
"어떻게, 취임식이라도 열어드릴까요?"
"아닙니다. 이사님도 바쁘시잖아요. 협회장 되시려면?"
"응? 하하하.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분위기도 어수선한데 빨리 정리하려면 이사님이 협회장 되셔야죠."
"절차가 복잡해서요. 집회도 열어야 하고······"
"이사님이라면 잘하실 겁니다."
어서 빨리 협회장 돼라.
그래야 나한테 개꿀 퀘스트를 내려주지.
호구 협회장!
너만 믿고 있을게.
이사 계약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부터 모든 혜택이 적용되지만 거기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내 집중력은 오직 한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우우웅.
진동하며 울음을 토하는 묵호검.
특별한 특성 효과는 안 붙어 있다.
대신 [파괴 불가] 특성이 붙고 공격력이 다른 SSR급 무기보다 높다.
아케인 서울의 모든 무기류 중에서도 최상위.
에피소드 5쯤 가지 않는 한, 지옥문이 열려서 마계산 무기가 공급되지 않는 한 거의 1, 2등을 다툰다고 보면 된다.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기억 속에서 본 기수식을 취한 다음 벼락처럼 쇄도한다.
쩌저정!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번뜩였다.
호왕출세.
무협 소설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초식 이름.
정확히 말하자면 돌진 찌르기다.
핵심은 마력 운용.
제대로 동작을 익히고 마력을 운용하면 찌르는 순간 검기가 발현된다.
"쉽지 않네."
몇 번 반복해서 써보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상급 검법은 본격적으로 검기를 활용하는 단계.
4레벨이 되었고, 다른 전사보다 마력이 훨씬 많은 나인데도 검기 한 번 쓰려고 하자 심장이 쓰라렸다.
'호왕출세부터 제대로 익히자.'
호왕검법은 네 초식으로 이뤄진다.
호왕출세, 호왕맹타, 호왕쌍격, 호왕비천.
간단히 정리해서 돌진 찌르기, 돌진 내리치기, 연달아 베기, 검기 날리기라고 보면 되겠다.
돌진 찌르기는 익숙하다.
섬광.
혹은 유성검.
그게 바로 돌진 찌르기잖아.
[호왕검법][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
[검술][집중][섬광]
특성을 바꿨다.
섬광은 장착만 하고 사용하진 않았다.
먼저 호왕출세에 익숙해지자.
그런 다음 세 특성을 쓰면서 사용하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위력이 나올 것이다.
'연공법이 조금 아쉽네.'
상급 연공법을 장착하고 마력심을 마력혼으로 강화한다면?
삼위일체 빌드 못지않은, 아니 파괴력은 더 강한 필살기가 나오겠지.
공격력만 따지면 무사가 정통 전사보다 나으니까.
번쩍!
쉬지 않고 몇 시간을 수련했을까?
마력이 텅 비는 바람에 마력천 욕조 신세도 여러 번 진 후.
마침내 검기 구현에 성공했다.
"아하하."
섬광에 기대지 않은, 순수한 검술로 일으킨 검기.
오로지 호왕출세 동작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내게는 큰 한 걸음이었다.
'다음은 호왕맹타다.'
돌진 내리치기.
이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싶다.
섬광처럼 내가 기존에 해온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정말로 그랬다.
꼬박 일주일을 수련한 끝에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 찌르기와 다르게 발현되는 검기도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야 실전에서 써먹기도 힘들겠다.
"후우!"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일주일을 더 수련하여 보름이 지났을 때야 성과를 보았다.
쩌저정!
길게 내리친 묵호검이 벽력성을 토한 것.
아울러 새하얀 빛이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그려졌다.
수면에 비친 달을 쪼갤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
그와 함께 새로운 특성이 내게 안착한다.
[단월]
참격계의 섬광.
참격과 검기가 결합한 강력한 특성.
섬광은 특수한 조건을 만족시켜 얻었지만 단월은 정석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이다.
호왕쌍격과 호왕비천은 접어두었다.
두 번 연속 검기를 뿌리거나 아예 검기를 유형화시켜 날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내 마력이 부족하다.
상급 연공법을 얻거나 마력혼을 조합한 다음에 수련하는 게 낫겠지.
대신 예전에 하던 수련을 마무리했다.
번쩍! 꽈르릉!
묵호검을 검집에 꽂았다가 뽑는다.
단순히 뽑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방에 뿌린다.
전력을 다해서.
섬광과 단월 특성을 장착한 채로.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어느 순간 묵호검이 검집 안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면서 번갯불이 전방을 갈기갈기 찢은 것.
[발도] 특성 획득.
"두 개 남았다······"
쳐내기와 흘리기.
그 둘만 개화하면 여섯 특성을 조합하여 검 전문가 특성을 만들 수 있다.
뭐부터 할까?
상급 마력 연공법? 마력혼? 검 전문가? 총잡이?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선뜻 고르기가 어렵다.
그래도 오늘은 쉬자.
4레벨이 되고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잖아.
산왕 사냥부터 콜로세움, 사냥꾼 협회에 보름 수련까지.
내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커피믹스를 진하게 타서 옥상에 올라갔다.
의자에 앉아 달달한 커피를 맛본다.
어느새 가을 초입.
쉬지 않고 달린 사이 9월이 되었다.
건우봉 산자락에선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수련 전만 해도 맴맴 울던 매미들은 쏙 들어갔다.
"좋다······"
얼마 만에 즐기는 여유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심장이 쑤시거나 옆구리가 결리는 증상은 없지만 내가 스트레스를 받긴 받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나를, 집을 감싼 성역의 힘을 느끼며 막 잠에 들려는 참이었다.
빵빵빵!
요란한 경적이 나를 깨웠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눈을 뜨자 시커먼 자동차가 보인다.
다 낡아서 여기저기 떨어진 중고차.
그리고 운전석 문을 열고 굴러떨어지듯이 뛰쳐나오는 한 남자.
"초인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낯익은 얼굴.
다급한 표정.
팔꿈치에서 잘린 오른팔.
상처투성이가 된 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김철권.
멀쩡히 갱단 운영하고 있어야 할 인간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내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강화 쌓는 김철권 -1-
강화 쌓는 김철권
성역에 김철권을 등록하여 잠시 들어오게 했다.
사실 찾아온 건 며칠 전이라고.
내 집에 성역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근처에서 기회만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옥상에 내가 올라온 걸 알고 쫓아온 거지.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대접했다.
김철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받아 마셨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후우······"
김철권이 비어버린 찻잔을 들여다본다.
한참을 그러다 겨우 대답했다.
"배신당했습니다."
"배신이요? 누구한테요?"
"누구긴 누구겠습니다. 제 부하들, 아니 그 개새끼들이지요! 개 같은 놈들! 뒷골목 막장 인생을 누가 주워서 키워줬는데! 사흘에 한 끼도 못 먹던 새끼들을 2레벨 초인으로 키워줬더니 등에 칼이나 꽂고! 다 죽여버리겠어!"
김철권이 이를 갈며 외친다.
2레벨 초인.
즉, 철권파 간부들.
나는 김철권을 빤히 쳐다보았다.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도 배신당했는데 여기서도 배신당하네.'
솔직히 저번 인간 사냥꾼 건 이후 끝난 줄 알았다.
철권파의 배신은.
그런데 철권파가 배신하는 건 예정되어 있었던 모양.
저번에는 말단 갱의 일탈이었다면, 이번에는 간부가 끼어 있을 정도로.
"세 명이 전부 배신한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한 명은 확실한데 다른 둘은······"
"누굽니까? 그 확실하게 배신한 놈은?"
"고준범 그놈입니다."
고준범?
그게 누구야?
내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김철권이 쓰게 웃는다.
"신원 시장 담당하던 놈 말입니다. 저번에 똘마니 하나가 초인님을 유인해서 죽이려고 했던."
"혹시 그때도 연관되어 있던 겁니까?"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왜 배신했대요? 쉽게 배신할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지요."
김철권이 머리를 저었다.
"이 바닥에 의리와 충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뒤통수치는 게 일상인데요. 당한 놈이 바보 병신입니다."
"뭐, 그건 그렇죠."
"마법 맹약을 맺든 해킹 코드를 심든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후우우, 동생처럼 대하면 형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지요."
가슴을 쥐어뜯는 김철권.
"특히 고준범 그 새끼는 인신매매 금지를 탐탁잖게 여겼습니다."
"뒷골목 수익이 인신매매에서 많이 나오긴 하죠. 신체 개조까지 하면 더 그렇고요."
"예. 초인님께서 건우봉 시설을 저한테 주신 후로 고준범 그 새끼가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도 청소부 협회처럼 애들 신체 개조해서 팔아먹자고요."
"사장님께선 반대하셨고요?"
"반대한 정도가 아니라 엄격히 금지했지요. 음, 사실······"
김철권이 잠시 망설인다.
본능적으로 자기 잘린 팔을 살피고는 말했다.
"저도 제 동생도 어렸을 때 팔려 가서 신체 개조당했거든요. 그 후유증으로 제 동생은 제대로 거동도 못 하는 몸이 되었고 전 그나마 잘 풀려서 개조된 몸으로 벌어 먹고살았습니다."
그랬지.
김철권 개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담담히 머리를 끄덕이자 김철권이 흐릿하게 웃었다.
"이미 알고 계셨나 봅니다."
"짐작은 했지요."
"하여튼 그 기억 때문에 저는 인신매매와 강제 신체 개조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건우봉 시설도 우리 갱단한테만 썼고요. 고준범 그놈은 그게 불만이었나 봅니다. 솔직히 건우봉 시설은 굉장히 좋은 물건 아닙니까. 성노예를 만들든, 수수료만 받고 불법 신체 개조에 쓰든 돈벌이에는 참 좋은 물건이지요. 그거 하나가 신림동 다른 구역에서 나오는 모든 보호비와 비슷할 정도로."
결국 돈이 문제.
다만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3레벨인데, 2레벨 간부 세 명, 아니 두 명이 배신했다고 이렇게 당하셨어요?"
"둘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3레벨 용병이 있었어요."
"3레벨 용병? 어떻게요? 제가 알기로 3레벨 용병을 쓰려면 수십억은 줘야 하는데요."
이재열이 인간 사냥꾼을 고용하며 쓴 돈이 200억이다.
암살과 비밀 엄수 조건이 붙어서 그런 거지만, 평범하게 용병을 써도 최소 수십억은 써야 한다.
갱단 보스도 아니고, 일개 간부한테 그만한 돈이 있다고?
김철권이 목소리를 낮췄다.
"습격당했을 때, 저는 독과 마약에 중독되고 정신 공격도 같이 받았습니다."
"어? 그거 혹시······"
"예. 독약파와 나체파가 개입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럼 말이 달라지지.
독약파는 마약을 팔아서, 나체파는 강제 헌금으로 돈 꽤나 모았으니까. 마침 철권파에게 맹공을 당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반격하고 싶었을 거고.
대충 윤곽이 그려졌다.
김철권을 몰아내는 대신 철권파 현재 영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딜을 치지 않았을까?
현재 철권파는 김철권을 제외해도 2레벨 초인 3명.
독약파도 나체파도 2레벨 초인 2명씩밖에 없으니 끝까지 가기는 부담스럽다.
김철권만 제거해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겠지.
"초인님!"
김철권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십쇼! 제가 기댈 곳은 초인님밖에 없습니다. 초인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저도 죽고 제 동생, 그 불쌍하고 착한 녀석도 죽고 맙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초인님께서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신발을 핥으라면 핥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제발!"
김철권이 처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협력 관계인 게 편하지 누군가를 온전히 책임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무수히 쏟아진 영입 요청을 거절하고 혼자 활동하는 것이다.
직장 생활, 조직 생활, 단체 생활.
그 많은 경험 중에서 좋았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김철권은 죽는다.
기껏 구축한 뒷골목 인맥이 소멸한다.
고준범?
다른 철권파의 간부?
그 둘이 김철권처럼 정정당당한 성격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김철권 잡아먹은 것처럼 나도 잡아먹겠다고 덤빌지도 모르지.
최소한 배신은 하지 않는 김철권.
이미 배신을 때려서 자기 인성을 증명한 승냥이들.
그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의리나 인간적 관계와는 거리가 먼, 차가운 계산으로 이뤄진 결정.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김철권이 잡을 수 있게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감사합니다, 초인님! 아니, 형님!"
"그냥 초인님이라고 부르세요."
"어떻게 형님을 초인님이라고 부릅니까! 절대 안 됩니다!"
"그럼 안 도와줄 겁니다."
"그, 어, 그, 음, 옙! 알겠습니다! 초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초인 형님! 아니, 초인님!"
항상 냉혹한 얼굴을 하고 있던 김철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갓 훈련소를 수료한 이등병처럼 보였다.
적당히 못 본 척하고 골프백을 가져왔다.
잘린 오른팔을 슬쩍 본 다음 물었다.
"예비용 의수는 없습니까?"
"차에 있습니다. 최하급이라 그거 착용하면 전 1레벨이 됩니다. 그거라도 쓸까요? 아, 그리고 초인님. 말씀 좀 제발 편하게 해주십쇼."
"그래. 그거 차고, 급한 대로 이거 써."
내가 예전에 쓰던 소총을 건넸다.
언더배럴 유탄 발사기까지 달아서.
밖으로 나가 차에 들어갔다.
어느새 해가 진 다음.
바깥은 조용했다. 나라면 내 집을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배신자들은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아하게도.
기잉, 척.
김철권이 예비 의수를 오른팔에 달았다.
평범한 1레벨 의수.
게임 튜토리얼에서 봤던 그 의수였다.
강화병, 김철권이나 강 이사 같은 의체 삽입 강화병의 특징이다.
레벨이 의체 레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
따라서 레벨을 올리기는 쉽지만, 의체에서 생산되는 마력에 역으로 잡아먹히기도 쉬웠다.
"준비됐습니다."
"가자."
부르릉!
낡아빠진 중고차에 시동이 걸렸다.
김철권이 결연한 얼굴로 차를 몰았다.
건우봉 자락을 쭉 돌아가는 길.
매복은 없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퀴퀴한 악취가 날아들 뿐이다.
나는 조수석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이상하네.'
어째서 이렇게 조용하지?
거기다 김철권은 며칠이나 내 집 근처에서 숨어 있었고?
철권파와 독약파, 나체파 세 갱단만 합작했으면 그럴 수 있다.
김철권만큼 그 셋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런데 분명히 용병도 고용했다고 했다.
3레벨 용병.
인간 사냥꾼만큼이나 사람 죽이는 데는 도가 텄을 용병을.
'혹시 이거······'
함정?
즉시 특성을 교체했다.
[육감][통찰]
지나가는 듯한 말로 김철권을 떠본다.
"사흘 전에 그랬다고 했지? 용케 도망쳤다."
"후우, 정말로 아슬아슬했습니다. 신께서 도우셨지요. 이 일이 끝나면 신앙을 가질까 생각할 정도로요."
김철권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 안에는 날 향한 경의와 존경만 가득 담겨 있었다.
배신하려고 하는 음험한 악의 따윈 한 오라기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고글을 뒤집어 썼다.
김철권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지만 곧 납득한다.
철권파 본거지가 멀리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모양.
실은 달랐다.
[탐지]
이 특성 때문에 굳이 고글을 쓴 거였다.
나는 철권파 본거지, 관리형 원룸 건물들을 성벽처럼 두르고 홀로 높이 솟은 10층 상가 건물을 주시하며 인상을 썼다.
시커먼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마력은 아니다.
그저 내 육감이, 영감이 내게 경고하며 시각화시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함정이다.'
김철권은 미끼.
정말로 노리는 건 나.
어째서? 누가?
짚이는 것은 많다.
워낙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어그로를 끌었어야지.
나로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둥글게 둥글게 살아서 강해질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중에 독약파, 나체파, 철권파 간부들이랑 연계할 만한 놈들은······'
게임 지식을 총동원한다.
관련한 모든 특성을 장착하고 머리를 굴린다.
육감을 넘어 영감에 닿아 있는 초월적인 감각이 곧,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인간 사냥꾼!'
뒷골목 생태에 익숙할 것.
갱단과 접점이 있을 것.
음모를 꾸밀 정도로 예전부터 나와 얽혔을 것.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건 인간 사냥꾼의 형제들밖에 없다.
폭탄마와 해체 전문가.
인간 사냥꾼을 추적하던 때 각오했던 연계 퀘스트가 뒤늦게 발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인간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둘을 놓친다면, 다음에는 더욱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테니.
나는 여유롭게 철권파 본거지를 주시했다.
무슨 계획인지 알겠다.
'폭탄마를 추적할 방법이 필요해.'
그러려면 사지에 걸어 들어가야 한다.
함정에 걸린 듯한 모습을 연출해서 폭탄마를 방심시켜야 폭탄마가 버릇대로 자취를 남긴다.
그 발자국만 잡아채면 인간 사냥꾼에게 그랬듯이 폭탄마를 추적할 수 있다.
해체 전문가는 분명히 폭탄마를 경호하고 있을 테고.
"들어가지."
"바로 들어가시게요?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우선 정보부터 모으는 게 어떨까요?"
"괜찮아. 나만 믿어."
나는 현재 4레벨.
단검파를 습격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마력 방패]
[사격][급속 장전][통찰]
쾅!
정면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철컥! 철컥!
이미 방어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강철 방어벽 뒤, 철권파 갱단원들이 소총과 산탄총, 심지어 기관총까지 거치해놓고 내게 겨누고 있었다.
그 수만 거의 백 명 이상.
철권파 간부들도 보였다.
이제는 이름을 아는 고준범과 또 한 명.
원래는 세 명일 텐데 자리를 비운 것인지 배신에 동참하지 않은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흐흐."
고준범이 앞으로 나서서 이죽거렸다.
무방비한 상태는 아니었다.
너울너울 춤추는 반투명한 벽을 앞에 세워두고 있었다.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얼굴 절반은 철가면으로, 양쪽 팔은 과장되게 큰 강철 의수로 바꾼 상태.
"정말 대놓고 쳐들어오네. 새꺄! 4레벨 초인이면 다냐? 나도 3레벨 초인이야!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가 적당히 챙겨줬겠지만 저 꼰대 새끼 편을 든 이상 너도······"
이놈은 또 왜 이래?
뭔가 속사정이 있고 심리 변화가 있었겠지만 관심 없다.
나는 산탄총, [충격] 다산총을 들어 고준범을 겨눴다.
고준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쏴 봐! 이거 방탄 역장이야! 쏴 보라고!"
방탄 역장.
일반적인 총격은 가뿐히 막아내는 물건.
나는 피식 한 번 웃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퍼퍼퍼펑!
보통 총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둔하고 무거운 소리.
10발을 모조리 쏴 갈겼다.
마력이 소진되고 반지에 저장된 마력이 전달되는 게 생생히 느껴진다.
그리고 방탄 역장.
펑펑 소리와 함께 뒤로 확확 밀려난다.
[충격] 능력이 방탄 역장을 유형의 물체처럼 밀어내는 것.
그렇게 몇 발 중첩되자 아예 고준범을 통과해서는 저 멀찍이 날아갔다.
눈을 부릅뜨는 고준범.
의수의 마력을 제대로 기동하기도 전에 12게이지 산탄이 틀어박혔다.
"끄아아악!"
산탄과 충격 능력의 결합은 무시무시했다.
쇠구슬 하나하나마다 충격 능력이 깃들어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밀쳐버린다.
그게 사람의 몸뚱이라면?
찢어진다.
사방으로, 갈기갈기, 천참만륙 당하듯이.
새롭게 의체를 삽입해서 3레벨이 됐다고?
그래서 뭐?
제대로 된 방어 특성이 없으면 일반적인 소총탄을 막기도 어렵다.
하물며 8레벨 마법사가 제작한 SR등급 마법부여총이라면 더 그렇지.
"어······"
"뭐, 뭐······"
"혀, 형님?"
철권파 갱단원들은 얼이 빠진 모습이다.
당연하지.
방탄 역장 뒤에 버티고 있던 3레벨 초인이 믹서기 갈리듯 터져 나가는 건 스너프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니까.
철컥.
급속 장전 특성을 활용, 단 1초 만에 장전을 끝냈다.
다른 간부에게 산탄총을 겨누자 간부가 발악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쏴! 쏘라고!"
퍼퍼펑!
타탕! 타타탕!
총소리가 교차한다.
내 뒤의 김철권이 반사적으로 움츠리지만 의미 없다.
어느새 자라난 마력 방패가 총알을 모조리 막아주었으니까.
마력 방어막이라면 집중 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깨졌겠지.
반면 마력 방패는 달랐다.
퍼퍼펑! 퍼퍼펑! 퍼퍼펑!
내가 총알과 마력을 퍼붓는 동안 훌륭하게 버텨 주었다.
"으아악!"
"커헉!"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방탄 역장도 강철 바리케이드도 의미 없었다.
탄창을 갈고 마력을 소진하며 쏴대는 충격 산탄은 내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갈아 버렸다.
단 1분.
철권파가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
"이 무슨······"
김철권이 나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았다.
강화 쌓는 김철권 -2-
총이 가볍다.
5킬로그램이 넘는 무게인데도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마지막 탄창을 비울 때는 반동마저 흐릿하게 느껴졌지.
[난사] 특성 획득.
총잡이로서 마지막 조각을 채운 것.
시간 끌 것 없지.
즉석에서 특성을 조합한다.
[총격술][사격][조준]
[저격][급속 장전][난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몇 초.
여러모로 실전 격투와 비슷했다.
총잡이도 실전 격투처럼 강력한 액티브 스킬이자 패시브 스킬이고, 캐릭터 강화 특전이었으니까.
그래서 제작사에서도 특성으로 퉁친 거지. 기본 특성을 벗어나면 스킬이나 탈렌트로 엄격하게 구분이 안 되니까.
내가 머리를 주억거리는 것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따르르르릉!
전형적이다 못해 고전적인 전화벨.
아까 고준범이 서 있던 곳 바로 뒤에 놓인 작은 탁자.
그 위에 놓인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김철권에게 말했다.
"나가자."
"예? 아, 예!"
처참한 광경이 펼쳐진 로비.
내가 부순 것은 철권파만이 아니다.
내부 CCTV도 빠짐없이 총알을 먹여주었다.
이것으로 외부에서 내부 상황을 알기란 불가능.
스마트폰을 챙긴 다음에는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다가갔다.
철권파 본거지는 게임에서 두 번째 거점으로 쓰이는 곳.
10층이 모두 구현되진 않았지만 1층과 생활 장소인 10층만큼은 충실하게 구현되었다.
따라서 나도 지리에 익숙했고, 항상 잠겨 있는 방범벽이자 후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제가 열겠······"
퍼퍼펑!
방범벽에 산탄총을 갈겼다.
두꺼운 철문이자 벽이었지만 충격 산탄 앞에선 장사 없었다.
전부가 갈가리 찢어져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렸다.
김철권이 멍하니 무너진 철문을 바라보았다.
"화, 화끈하십니다."
"시간이 없어."
바로 밖으로 나갔다.
뒤쪽은 주차장.
고급스러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어!"
시체 같던 김철권의 얼굴에 활기가 돌아왔다.
"다 멀쩡히 있네요!"
"그래? 차키는?"
"모두 생체 인증입니다. 작동시킬까요?"
"오토바이 두 개만. 최대한 여기서 멀리 벗어나야 해."
김철권이 오토바이 두 대를 깨웠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최고급 오토바이.
과아앙!
호랑이 울음소리와 함께 철권파 본거지를 벗어났다.
지하 비밀 통로를 통해서.
후문은 비상문이자 비상용 탈출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상으로 나온 다음에야 멈춰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내 스마트폰이 아닌 철권파 본거지에 있던 물건.
"뭐야?"
일부러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연기하자 음험한 웃음이 들렸다.
[선물은 잘 받아보셨습니까?]
"선물?"
[후후. 예. 조금 전에 뜨겁게 환영해 줬을 텐데요. 총소리가 그친 걸 보면 화끈하게 처리하신 모양입니다.]
목소리.
낮고 웅얼거리는 듯한, 그래서 기억에 남는 목소리.
폭탄마.
나는 가만히 특성을 교체했다.
[추적] 특성이 활성화되고 허공에 붉은 화살표가 생성되었다.
"너 누구야?"
[글쎄요. 그게 중요합니까? 내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게 중요하지. 잘 가라, 씨발 새끼야. 우리 형이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거의 울부짖는 듯한 음성과 함께 벼락이 터졌다.
꽈과과광!
철권파 본거지에서.
10층 상가 건물에서.
화광이 치솟고 화염이 폭발하며, 거친 충격이 사방으로 질주했다.
그대로 박살나는 철권파 건물.
폭발은 1층에서 터졌지만 피해가 1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건물 전체 유리창이 깨지고 기둥이 뒤틀렸다.
이어 삐그덕삐그덕 소리와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다.
김철권이 멍하니 상가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처, 철권 타워가······ 내 건물이······"
"정신 차려! 달리라고!"
"예, 옙!"
거리는 충분히 떨어져 있지만 혹시 모른다.
철권 타워가 붕괴하면서 우리를 덮칠지.
오토바이 스로틀을 힘껏 당겼다.
과아아앙!
오토바이가 급가속하여 앞으로 달려나간다.
바로 도로에 진입.
눈앞에 일렁이는 화살표를 따라 빠르게 질주했다.
"형님! 초인님! 어디 가십니까!"
뒤에서 김철권이 소리쳤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운전과 탑승 특성을 이용해 밤의 도로를 빠르게 더듬었다.
'지금쯤 폭탄마도 우리를 포착했겠지.'
CCTV를 부수고 지하 비밀 통로를 이용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폭탄을 터뜨리며 승리감에 젖은 것도 잠깐.
지금은 나와 김철권을 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도망칠 수도 반격할 수도 있다.
혹은 두 가지를 다하거나.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뒷목이 뻑뻑해졌다.
[육감][위기 감지][통찰]이 합창하며 내지르는 경고!
순간적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토바이가 땅에 스치듯이 달라붙고 엔진이 한계를 넘어선 출력을 뽐낸다.
과아앙!
중앙선을 넘어가 반대편 차들 사이를 요리저리 파고드는 오토바이.
빵빵! 빠바방!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날아왔다.
불꽃이.
혹은 흰 궤적이.
내가 아슬아슬하게 지나친 자동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꽈아앙!
폭음과 함께 수직으로 치솟는 자동차.
이미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기름통에 불이 붙었는지 이내 거칠게 폭발하면서 적색 파괴를 사방에 흩뿌린다.
'로켓탄!'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 수십 미터 앞 건물을 보았다.
20층짜리 상가 건물.
로켓탄은 바로 그 건물 옥상에서 날아왔다.
눈에 힘을 주었다.
밝은 눈과 민감 특성을 장착하고, 고글의 확대 기능까지 발동되자 옥상을 코앞에서 보듯이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남자가 보인다.
짜리몽땅하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남자.
그리고 대조적으로 키가 껑충하고 비쩍 말라 대나무처럼 보이는 남자.
폭탄마와 해체 전문가.
둘 다 로켓포를 들고 있었다.
쌔애액!
벌써 두 번째 공격.
이번에도 오토바이를 꺾어 피해냈다.
그다음 공격도, 그다음 공격도, 또 그다음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악!"
"테러다!"
"사람 살려!"
"도망쳐! 도망치라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도로.
사람들이 급하게 도망치고 자동차들이 역주행한다.
고글을 미리 쓰길 잘했다.
얼굴이 팔리기라도 했으면 골치 아팠겠지.
끼이익!
둘이 대기 중인 건물에 도착.
마스크를 뒤집어쓴 김철권이 도착하자 함께 옥상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비상계단을 이용해서.
탐지와 통찰을 써서 보니 형제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다.
막 돌입하려는 찰나 김철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초인님. 이것도 함정 아닐까요?"
"당연히 함정이지."
"예?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쳐들어가도 됩니까?"
"놓치는 것보단 백 배 나아. 아, 넌 여기 있다가 조용해지면 들어와라. 난 괜찮은데 넌 죽을 수도 있어."
"아, 알겠습니다."
퍼퍼펑!
옥상 문을 날려버리고 진입했다.
그러자 시뻘건 화염과 시퍼런 전격이 날 직격했다.
인간 사냥꾼 때와 비슷하다.
그때는 대지 마법 함정이었다면 폭탄마는 화염 마법 함정을, 해체 전문가는 전격 마법 함정을 깔았다는 게 달랐지만.
당연히 내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마법 저항]
이 특성 때문에.
"죽여!"
"뒈져라, 이 씹새야!"
"기다리고 있었다!"
강철 바리케이드 뒤 총염이 번뜩였다.
기관총.
그것도 12.7 밀리미터 구경 중기관총.
흉탄이 마력 방패를 찢어버릴 듯이 작렬했다.
여기에 불도 무시하는 마법적인 독연이 피어오르고 기이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내 정신을 억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건재했다.
[금강체][독 저항][결의]
특성 칸 한 칸만 더 있었으면 [마약 저항]까지 채용했겠지만 마력 방패와 에인헤랴르 연공법을 쓰느라 그럴 수는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격 관련 특성이 없으니 산탄총을 정확하게 겨눈 다음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쏘았다.
퍼엉! 퍼엉! 퍼엉!
"끄억!"
"꺽!"
"커허억!"
초인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른다.
이번에 쓴 능력은 [영탄].
마법부여된 총알이 강철 바리케이드를 통과하여 초인들을 후려갈긴다.
벽 두 개를 통과할 수는 없어 이 자리에서 써야 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독을 뿌린 독약파 간부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내게 세뇌를 걸던 나체파 간부도 게거품을 물었다.
일반 갱단원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다산총!"
폭탄마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3레벨 정도 되면 영탄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
철컥.
나는 번뜩이는 속도로 탄창을 교체했다.
특성도 함께.
[총잡이][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 방패]
[마법 저항][통찰][육감]
바로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내 머리 위, 옥상문이 연결된 구조물에서.
"뒈져!"
길게 내민 강철 손가락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의체다.
독약파 쇠전갈.
내게 버릇없이 손가락 욕을 날리기에 뽑아주었던 그 물건이, 진득한 녹색으로 물들어서는 내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안 됐지만 바깥에서 이미 탐지로 보고 들어온 참이다.
투시만큼 완벽하진 않아도 실루엣은 보인다고.
나는 놀라지도 않고 산탄총을 휘둘렀다.
흑단목 개머리판이 떨어져 내리던 강철 손가락을 쳐낸다.
쇠전갈의 눈이 커진다.
정확히 반 바퀴 회전한 산탄총 총구가 정확히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잘 가라."
퍼엉!
잠시 후, 머리 잃은 시체가 스르륵 무릎을 꿇었다.
"형! 도망가!"
해체 전문가가 달려든다.
손에 든 꼬챙이가 날카롭다.
잔혹하고도 섬뜩한 빛이 줄기줄기 흐른다.
실명 저주가 걸린 마법검.
나도 묵호검을 뽑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어울려줄 필요가 없다.
필요 없어진 마법 저항 대신 난사를 장착하고, 총잡이와 난사 보정을 받으며 산탄총을 갈겼다.
퍼퍼퍼펑!
박살 나 고기 조각이 되는 해체 전문가.
최후의 발악으로 마법 약병을 던지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충격 산탄에 깨져 고기 조각 위를 질척한 액체가 뒤덮었다.
고기 조각이 증식하고 변형되는 것을, 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해체 전문가는 세균 배양에 일가견이 있었지.'
인간 사냥꾼이 약물에 장기가 있던 것과 같다.
삼형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큰형이 내게 여러 특성과 전리품을 선사한 것처럼, 막내는 내게 질병 저항과 불굴 특성을 선물해줄 모양이다.
'그 전에······'
나는 골프백을 열어 저격총을 꺼냈다.
평범한 저격총이 아닌 다산 저격총.
이때쯤 김철권도 망가진 철문을 넘어 옥상으로 들어왔다.
"다 끝난 겁니까?"
"아니."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들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윙슈트를 펼친 짜리몽땅한 인영이 마력 추진 장치를 터뜨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두고 보자!"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는지 악다구니를 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시바 신께 맹세코, 네놈을 불과 폭탄 속에 처넣고 말겠다! 네놈의 재를 형님과 동생의 영전에 바쳐서 둘의 영혼을 위로하겠다!"
나라면 악쓸 틈에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렸을 텐데.
다산 저격총을 들었다.
조준경에 눈을 가져간다.
벌써 1킬로미터 밖으로 달아나 조준경 안에서도 작게만 보이는 폭탄마.
이건 단순한 저격 실력을 넘어선 무언가가 필요하다.
[총잡이][저격][조준]
[집중][통찰][육감]
집중력이 가파르게 상승한다.
초월적인 감각이 오롯이 조준경 안을 향한다.
조준경 속 세상이 화악 다가왔다.
그리하여 점처럼 보이던 폭탄마가 세상을 가득 채울 듯이 확대되었다.
뭔가 직감한 걸까?
폭탄마가 뒤를 돌아본다.
눈썹 한 터럭마저도, 유난히 큰 모공마저도 내 심상에 들어와 맺히는 순간.
숨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쿠우웅!
다산총 특유의 총성.
1500미터를 단숨에 가로지른다.
사선을 그리던 비행경로와 직선으로 날아간 총알 궤적이 교차한다.
그 결과.
꽈과광!
폭탄마가 소지하고 있던 폭탄이 충격탄에 찢어지면서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화염.
전리품은 못 챙기겠지만 살려 보내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나는 냉담한 얼굴로 저격총을 챙겼다.
"으, 으으으······"
"여기가 어디······"
때마침 독약파와 나체파 간부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총알을 박아 넣었다.
충격탄도 영탄도 아닌 일반 총알.
그것으로 충분했다.
옥상에 모여 있었던, 오직 나를 상대하기 위해 매복했던 수십 명의 초인이 그대로 씨몰살을 당했다.
"하아아."
구경하던 김철권이 머리를 흔들었다.
"초인님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하십니다. 4레벨이 아니라 5레벨 초인도 이렇게는 못 할 겁니다."
"전투력과 레벨은 비례하지 않아. 너도 명심해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솔직히 3레벨 된 후로 조금 방심하고 있다가 당했지요."
"방심이야말로 최악의 적이지."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도시가 불타고 있다.
삐뽀 삐뽀 삐뽀.
경찰 순찰 구역 안이라 그럴까?
소방차는 물론 경찰차들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중.
여기서 붙잡혔다간 여러모로 곤욕을 치를 것이다.
급하게 해체 전문가의 품을 뒤져 약병 몇 병만 챙긴 다음 김철권을 보고 말했다.
"얼른 튀자."
"예, 초인님."
과아아앙!
철권파 영역으로 돌아갔다.
공권력 바깥, 방치된 세상.
10층 건물이 폭발했는데도 원룸 주민들이 알아서 뒷정리해야 하는 구역으로.
"하······"
김철권이 착잡한 얼굴로 무너진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다행.
옆으로 넘어졌으면 희생자가 수백 명은 나왔겠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할까요······"
김철권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이 정도 일을 겪었으면 은퇴할 만도 하다.
그러나 김철권은 정해진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게임에서 그랬듯이.
이내, 김철권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내 동생!"
다행히 김철권의 동생은 비밀 안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세 간부에게 각각 알려준 다른 안가.
그곳에 배신하지 않은 간부가 김철권의 동생을 데리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형님! 살아 계셨습니까!"
"민석아! 인마! 너 괜찮냐!"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공격이 김철권에게 집중된 탓일까?
아니면 만약의 사태에 인질로 쓰려고 살살 공격한 탓일까?
마지막 간부도 김철권의 동생도 무사했다.
김철권이 눈물을 흘리며 간부와 식물인간 상태인 동생을 얼싸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그리고 그날 저녁 김철권이 나를 찾아왔다.
내 앞에 꿇어앉아서는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초인님.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화 쌓는 김철권 -3-
"강해지고 싶다고?"
"예. 강해지고 싶습니다."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최후의 순간 믿을 건 결국 자기 자신뿐.
본인의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어떤 거대한 조직을 쌓더라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강화병이 어떻게 해야 강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는 사이.
김철권이 미리 챙겨온 마법 맹약서를 꺼내들었다.
내게 무릎 꿇고 공손히 바치는데, 한 번 살펴보니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하나, 김전사를 갑이라 한다.]
[하나, 김철권을 을이라 한다.]
[하나, 을은 갑에게 절대 복종한다.]
[하나, 갑은 을의 생사여탈권을 가진다.]
이 네 항목이 전부.
완벽한 불공정 계약이자 노예 계약.
하다못해 알바를 해도 이런 계약은 안 하겠다.
나는 마법 맹약서를 가볍게 흔들었다.
"진심이냐? 이건 좀 심한데."
"진심입니다. 초인님."
김철권은 무릎 꿇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전 이미 죽은 몸입니다. 초인님이 아니면 진작 죽었을 거고 제 동생도 결과는 똑같았을 겁니다. 초인님께서 절 살려주셨으니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두 눈 가득 각오가 어려 있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충격이었던 것.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도 경계하게 된 모양이다.
혹시나 나중에 나를 배신하게 될까 봐.
말뿐인 구속은 공허한 법.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것 같다.
"좋아. 받아들이지."
나는 김철권의 뜻을 존중했다.
마법 맹약이 성립된다.
종이가 즉석에서 불타오르고 마법진이 허공에 나타났다.
이어 도장처럼 서로의 심장에 박히는 마법진.
생경한 경험이었다.
심장과 심장이,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고 한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다는 것은.
이제 김철권은 나를 배신한다는 생각조차 못한다.
나는 언제든 김철권의 심장을 터뜨릴 수 있다.
두렵고 무서워할 만도 한데 김철권은 훨씬 더 편해 보였다.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것마냥.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아니, 주군."
"오글거리니까 초인님이라고 불러."
"하하하, 알겠습니다."
김철권이 어린 소년처럼 웃어 보였다.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말했다.
"강화병이 강해지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어. 너도 그건 알 거다."
"생체 변이랑 의체 삽입 아닙니까?"
"바로 그거지."
생체 공학적 변이. 기계 공학적 의체.
게임에서 등장하는 강화병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레벨을 올린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지.
정말로 강해지려면, 강화병으로서 고레벨 초인이 되려면 둘을 함께 써야 한다.
"너도 리바이어던은 알지?"
"그럼요. 리바이어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강화병 중에서요."
천마와 동급.
4명밖에 없는 9레벨 중 하나.
강화병의 최고점이자 궁극.
리바이어던이 의체 삽입과 생체 변이를 같이 쓴 대표적인 강화병이었다.
"강화병이 강해지려면 리바이어던처럼 해야 해."
"위험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리바이어던처럼 하다가 변이체 되거나 마력 폭주 일으킨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신분이나 방송에서도 절대 금기로 통하던데요."
"변이 인자와 의체 부품 중에 궁합이 맞는 걸 쓰면 돼. 제대로 조합을 맞추면 반발하거나 억제되는 대신 오히려 상승효과가 나타난다. 변이는 더 안정적으로 변하고, 의체는 마력 효율이 크게 상승하지."
"그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리바이어던이 최초로 9레벨을 찍은 거지. 그리고 우리나라 재벌들 말이야. 그 사람들도 비슷한 지식을 갖고 있어. 그걸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야."
"아······"
김철권의 눈이 흔들린다.
"혹시 아시는 조합법이 있습니까? 생체 실험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요?"
"내가 아는 게 몇 개 있다. 그중에는 건우봉 시설에 있는 재료로 구현할 수 있는 것도 있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건우봉에 가야겠습니다."
"그래야지."
건우봉 탈환은 쉬웠다.
우리를 보자마자 건우봉을 지키던 인원들이 총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은 것.
어차피 핵심은 어제 다 전멸했다.
건우봉에 남아 있던 것은 말단 중의 말단.
한 명 남은 간부에게 정리를 맡기고 신체 개조 시설로 들어왔다.
"들어가."
"괜찮겠지요?"
"당연하지. 대신 좀 아플 거다. 생체 변이와 의체 삽입을 동시에 하니까."
아케인 서울에는 수많은 변이 인자와 의체 부품이 존재한다.
여기서 조합을 결정하는 것은 변이 인자 종류, 의체의 재질, 삽입된 마력핵 속성이었다.
나는 컴퓨터를 조작하여 남아 있는 재료를 확인했다.
'3레벨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지.'
내 선택은 가장 표준적인 오컬트 빌드.
늑대인간 변이 인자에 혈마은, 쇼핑몰 금역 보스 유령 집합체의 마력핵을 사용했다.
늑대인간, 흡혈귀, 유령의 조합.
강화병 빌드에서 중요한 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완전히 똑같은 놈을 쓰면 100% 마력 폭주가 일어난다.
'마법진은······ 뭐가 없네.'
여기서 혈마은은 의수의 마법진 재료로 들어간다.
기본적으로 무른 금속이고 굉장히 비싸서 통짜 의수를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혈마은으로 마법진을 새겨야 하는데 입력된 마법진이 너무 적었다.
돈 벌어서 뭐한 거야.
마법사, 하다못해 마학자라도 한 명 고용해서 연구시키지.
'품격이나 흡혈이 좋은데.'
선택지는 고작 셋.
근력, 활기, 재주.
기본 중의 기본 특성이다. 공용 특성 중에서도 3티어따리.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막 이 세상에 떨어져서 특성 모으던 때가 생각나서.
'재주로 하자.'
늑대인간 변이 인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특성을 제공한다.
[괴력], [강건].
김철권이 전사거나 근접 공격수라면 근력이나 활기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좋다. 아예 의수에 강철 손톱을 달아도 괜찮고.
하지만 아케인 서울의 김철권은 전천후 공격수였다.
근접에서는 의수로, 중거리에서는 기관단총을 갈겨대던.
그렇다면 선택지를 바꿔야겠지.
[재주] 특성 선택.
기이이잉.
의체 제작 장치가 돌아간다.
원래 세계의 3D 프린터와 비슷한 물건.
날렵한 의수를 허공에 그림과 함께 혈마은으로 은빛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끄으으윽!"
옆에서는 김철권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관 안에 들어 있는 김철권.
목에 꽂힌 고무관을 통해 늑대인간 변이 인자가 주입되는 것이다.
몸이 울룩불룩 부풀고 검은 털이 자라는 게 보인다.
고생은 하겠지만 결국 버틸 것이다.
이미 3레벨까지 찍어봤던 김철권이니까.
게임에서는 늑대인간 변이 인자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
나는 골프백에서 마법 상자를 꺼냈다.
안에 담아온 마력핵을 의체 제작 장치에 집어넣는다.
거의 완성된 강철 의수, 그 중심으로 마력핵이 제대로 꽂혔다.
활성화되는 마법진.
그리고 뿜어지는 음산한 기운.
나는 모니터에 뜬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제대로 됐네.'
가공된 마력석이 아닌, 야생의 마력핵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한 가지 특성이 더 딸려 온다.
유령 집합체의 마력핵이 제공하는 특성은 다양하지만······
아마도 [차가운 손길].
의수를 갖다 대고 활성화하면 상대를 얼리는 한편 생명력을 갈취할 것이다.
'역시 부족해.'
재료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지 못한 느낌이다.
잘하면 차가운 손길 정도가 아니라 [유령의 손]이나 [죽음의 손]도 가능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시작이다.
[괴력][강건][재주][차가운 손길]
원래 김철권이 가지고 있는 [격투술]까지 더하면 무려 다섯 개.
태생 등급이 N급이긴 해도 이만하면 3레벨에서는 수위권.
어설픈 R급 초인 정도는 가볍게 찜쪄먹고도 남는다.
우웅, 위이이잉.
철컥.
"끄아아아!"
완성된 의수가 변이 중인 김철권에게 삽입되었다.
잘린 부위와 결합되고 신경이 이어지자 김철권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른다.
의수가 반짝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
흐릿한 회색광이 내부에서 번지고 표면의 마법진은 불길한 붉은 빛을 뿜는다.
그러자 늑대인간 변이가 급가속되었다.
얼굴은 늑대로 전신은 털북숭이로 변한다.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마력광이 전신을 뒤덮자 금세 원래대로 돌아간다.
늑대 머리는 사람 머리로, 온몸에 났던 검은 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곤 가슴에 난 약간의 검은 털이 전부.
이전보다 근육질로 변하긴 했으나 확 띄는 변화는 아니다.
기이잉, 처억.
유리관이 열리고 김철권이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걸쭉한 침을 줄줄 흘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허억, 허억, 허억."
"좀 어때?"
"죽겠습니다······"
"의수에 정신을 집중하고 마력을 끌어올려 봐."
김철권은 혼미한 와중에도 내 말에 따랐다.
반짝이는 의수.
강렬한 마력 진동이 울려퍼진다.
모든 특성이 발동하며 김철권의 몸이 부풀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로.
심지어 검은 털이 전신에 돋자 김철권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늑대인간 변이 인자다. 싸울 때만 끌어올리면 돼."
"기분이 이상합니다······"
"당연하지. 늑대인간인데. 그래도 보름달 보거나 피 좀 본다고 변이하는 일은 없을 거다."
늑대인간, 흡혈귀, 유령의 세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었기 때문.
서로 견제하며 강화되는 완벽한 황금 비율.
"그리고 앞으로 네가 레벨을 올리려면 명심해야 할 게 있어."
"경청하겠습니다."
"마법사나 마학자를 고용해라."
"마법사, 마학자······"
"변이 인자랑 마력핵은 내가 괜찮은 걸 골랐어. 4레벨까지는 무난하게 써도 된다. 그런데 의수 마법진이 문제야. 재주가 뭐냐, 재주가? 최소한 품격이나 흡혈 정도는 있어야 해. 네 의수를 다시 제작하면 넌 바로 4레벨이 될 거다."
김철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4레벨이 그렇게 쉽게 됩니까?"
"강화병의 특권이지. 5레벨이 문제다. 지금 조합을 그대로 쓰려면 피의 주인 능력, 그리고 5레벨 유령 마력핵이 필요해. 5레벨 유령 마력핵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피의 주인 능력을 마법진으로 구현하려면 정말 힘들어."
"피의 주인 능력, 5레벨 유령 마력핵······"
"차라리 다른 조합으로 갈아타는 걸 추천한다."
김철권이 신뢰 어린 눈빛을 보냈다.
"초인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일단 4레벨부터 되고 보자. 최대한 많은 마법진을 모아. 우선 순위는 첫 번째, 품격이고 두 번째, 흡혈이다."
"예, 초인님."
무턱대고 다른 조합으로 갈아타면 안 된다.
100% 부작용이 발생하니까.
최선은 다이아로 특성을 삭제하고, 즉 변이 인자와 의체를 제거해서 0에서 시작하는 것.
이식 과정에서의 고통과 불협화음도 다이아로 무시할 수 있다.
조만간 콜로세움 가서 다이아를 벌어와야겠어.
쿠르릉.
거의 대화를 마무리하던 시점.
갑자기 건우봉 시설 전체가 흔들렸다.
지하 깊이 있는데도 느껴진 격렬한 진동.
진원지가 멀지 않았다.
나와 김철권은 서로를 마주 본 다음 급하게 뛰쳐나갔다.
"집합! 무슨 일이냐!"
김철권이 고함을 지르자 철권파 갱단원들이 모여들었다.
"혀, 형님."
이상하게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매는 갱단원들.
김철권도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되찾은 기관단총을 허리에서 뽑더니 철컥, 일부러 쇳소리를 크게 냈다.
"뭐야? 바른대로 말해. 조금 전 그거, 시설 안에서 난 소리 맞지?"
갱단 보스다운 냉혹한 얼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한 분위기.
갱단원들이 머리를 푸욱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실은 고준범 형님······ 아니 그 배신자 새끼가 숨겨놓은 물건, 아니 사람이 있습니다."
"뭐? 사람?"
쿠르르릉!
또다시 시설이 흔들린다.
형광등이 위태롭게 깜빡이고 머리 위에서 흙먼지가 쏟아졌다.
상태를 보니 이런 일이 꽤 많았던 모양.
김철권이 입에서 불을 뿜듯 고함을 질렀다.
"내가 뭐라고 했어! 인신매매는 절대 금지라고 했지! 어?"
"저, 저희가 한 게 아닙니다!"
"고준범 그 새끼가 시킨 겁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다 죽여버린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겁니다!"
김철권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부하들을 노려본다.
이미 기관단총을 겨눈 상태.
언제 방아쇠를 당겨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김철권을 말렸다.
"그만해. 쟤들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냐? 배신자 새끼가 까라고 하면 까야지. 반항했다가 뭔 일을 당할 줄 알고."
"형님!"
"초인님이라고 부르라니까. 그건 그렇고 누굴 가둬놨길래 이래? 고레벨 초능력자라도 잡아왔어?"
갱단원들이 서로를 마주 본다.
니가 말해, 니가 얘기해, 하는 태도.
김철권이 눈을 부라리자 개중 나이 많은 갱단원이 나서서 말했다.
"그, 마녀입니다."
"마녀?"
"예. 마탑이나 교단에 넘기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고레벨 아티팩트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떠들곤 했습니다."
[마녀] 특성을 가진 캐릭터라면 그럴 수 있지.
아, 혹시 고준범이 이것 때문에 배신할 걸까?
인신매매로 얻을 이익 때문에?
엄청난 위력의 마법검을 손에 넣거나, 5레벨 의체를 받아 삽입하면 서울의 밤을 지배하는 것도 꿈은 아니니까.
"직접 보지."
"옙!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김철권의 충성 맹세를 받은 건 다 아는 사실.
갱단원들이 급히 나를 안내했다.
신체 개조 시설에서 멀지 않은 곳.
예전에는 청소부 협회가 성노예 감금 장소로 썼던 감옥으로.
"저년입니다."
쿠르릉!
격렬하게 진동하는 강철 감옥.
흰빛이 광선포처럼 발사되어 벽과 천장을 때린다.
빛무리가 감옥을 때릴 때마다 강철이 패이고 시설이 흔들렸다.
타오르는 하얀 빛 안에 어린 소녀가 있었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금발.
거무죽죽하게 죽어버린 파란 눈동자.
몸에 걸친 홑겹의 거적때기 한 장.
보는 순간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새장 같은 강철 감옥에 갇혀 있는 그녀는.
전사 계열 3대장 중 하나.
쟈네트였으니까.
쟈네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