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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참으로 복되도다.'

이단심문관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옛 아버지가 직접 계시를 내리고 성녀가 공표한, 빛이자 구원자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아서.

악신의 힘과 신살자, 흑염을 모아 흑금광을 빚어내다니!

이거야말로 예언이 아닌가.

위대하신 옛 아버지께서 세상 모든 적을 쳐부수고 이 작은 행성을 지배할 거라는 복음.

성기사 여럿이 죽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들도 신국(神國)에서 기뻐할 터이니.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성기사들을 물리고 5레벨 셋이서만 구원자와 대적한 것까진 좋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신의 은총을 받았어도 4레벨 한 명이 5레벨 셋을 당할 수는 없었다.

악신의 사도도 개입하지 못하게끔 성기사들이 견제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런데······

이건 뭐냔 말이다.

어째서 기사단장들이 밀리느냔 말이다.

왜 서로 부딪히면 4레벨 구원자가 아니라, 5레벨 기사단장이 튕겨 나가느냔 말이다!

"있을 수 없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정하며 악을 쓰지만 소용없었다.

꽝!

또 한 번.

폭음이 터지고 기사단장이 나가떨어졌다.

숫자의 차이도 레벨의 차이도 무의미했다.

압도하지 못했다.

아니, 되레 압도당하고 있었다.

단 한 명.

김전사에게!

대미궁의 김사제 -4-

그러나 지금 가장 놀란 것은 이단심문관이 아니었다.

몸으로 부딪친 기사단장이었다.

"크윽!"

신음을 삼킨다.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력 파장의 농도를 보면 분명 4레벨이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반 기사단장도 아니고 상급 기사단장과 부딪힌 것만 같다.

방패와 방패가 마주칠 때마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하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심지어 내상을 입었는지 뱃속이 아릿하게 아팠다.

'말도 안 된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건 말건 눈앞의 괴물은 멧돼지처럼 돌진해 온다.

"이이익!"

마주 돌진하지만 기세에서 이미 밀렸다.

똑같은 방패 치기가 서로를 향해 날아들건만, 이상하게도 상대는 더욱 강하고 더욱 날카로운 일격을 퍼붓고 있었다.

"덤벼라! 덤비라고!"

오랫 동안 손발을 맞춘 클레망 경이 도발하지만 소용없다.

악마에게도, 마수에게도, 이단에게도 통하던 신성한 전언은 기이하게도 모조리 빗나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보였다.

눈앞의 괴물이 눈에서 이채를 발하는 것이.

마치 속에서 뭐라도 주문을 읊조리는 듯.

'맞아. 주문이다.'

그것도 굉장히 특수한 주문일 것이다.

필경 악신에게 받았을!

빛이자 구원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 괴물은 악신의 사도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파괴력을, 이토록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 줄 수가 없다!

6레벨이었으면 수긍했을 것이다.

5레벨만 되었어도 어떻게든 납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4레벨 주제에 이런 능력을 보여 준다고?

성녀께서 속은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악신에게 힘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기사단장은, 비록 평범한 재능을 가졌지만 평생 품은 신앙만큼은 진짜라고 자부하던 그는, 제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회의를 품고야 말았다.

너무나 압도적인 김전사 때문에!

"죽어라! 죽으란 말이다!"

절대로 죽이지 말란 명령을 받았던 기사단장.

뇌리에서 그 사실마저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

전력을 다해 뛰어들며 방패를 휘두른다.

벌써 수십 번째 돌진.

그러나....

기사단장도, 이단심문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괴물이 마주 휘두른 방패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는 점.

아이기스.

가이아 교단의 대표적인 보물.

양산품이라 하나 SSR 등급 무구인 아이기스는, 기사단장이 쓰는 방패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그 결과는 실로 궤멸적이었다.

쩌저정!

계속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수십 조각이 났다.

기사단장이 눈을 부릅떴다.

차가운 시선 속, 날카로운 살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파아앗!

살기와 함께 일어나는 빛무리.

일직선으로 그어지는 빛.

빛을 본 순간 죽음을 직감한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내밀지만 빛을 저지하진 못했다.

긴 꼬리를 머금고 이미 심장을 관통한 다음.

'아름답다....'

어느덧 멀어져 가는 의식.

마치 밤하늘의 유성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프레데릭 경!"

"안 돼!"

관전하던 성기사들이 목놓아 기사단장을 불렀다.

그러나 애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른 기사단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주교님을 지켜라!"

기사단장의 심장을 빼앗은 괴수.

김전사가 이단심문관을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 * *

"끄르륵!"

결론부터 말해서 성기사들은 너무 늦었다.

나는 돌진이 아니라 도약을 이용, 기사단장을 뛰어넘었고 이단심문관에게 참격을 날렸다.

[거인의 힘][마력혼][참격]

[호왕검법][시구르드 연공법][단월]

더블 파워로 인한 반동은 무시했다.

이 일격에 내 전력을 담았다.

그러자 번개처럼 치솟은 검기가 단숨에 이단심문관을 갈랐다.

신성 방어막으로도, 마법 방패로도 막지 못한 공격.

이단심문관은 목부터 가슴까지 베여 피거품을 뿜는 신세가 되었다.

"주교님!"

엘릭서가 있으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나는 이단심문관의 머리를 쪼개고 목을 잘라 확실하게 확인 사살을 했다.

"이노옴!"

남은 기사단장이 미치광이처럼 달려온다.

하지만 늦다.

돌진도 도약도 가속도 신속도 아무것도 없는 발고자 성기사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도발?

나한테는 금강체도 있고 불굴도 있다. 금강체만 장착해도 저항할 수 있고 불굴을 추가 장착하면 아예 무시해도 된다.

쿠웅!

또다시 도약을 사용해서 날아올랐다.

한 마리 새처럼 거의 수 미터는 뛰어올라 기사단장을 그대로 지나쳤다.

대신 노린 것은 성기사들.

특히 [통찰]을 통해 봤을 때 가장 약한, 3레벨 중에서도 특성과 장비가 부실한 자들이었다.

"검 그림자 기사단, 방어진!"

"방어진!"

"창 그림자 기사단, 방어진!"

"방어진!"

죽은 이단심문관을 대신해 상급 기사들이 소리쳤다.

성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만 확실히 모자라다.

이단심문관의 [지휘]와 [명령] 보정이 없으니까.

지금 내게는 약점이 훤히 보였다.

창 그림자 기사단 중 한 명이 반 박자 늦게 움직인 것이.

[거인의 힘][마력혼][시구르드 연공법]

[실전 격투][강타][투척]

통찰로 보고 있다가 던지는 순간 특성을 교체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쩌렁쩌렁 퍼졌다.

대미궁에 강림하는 벼락.

흰 선이 정확히 내게 조준한 지점에 날아가고 번개 폭풍이 휘몰아쳤다.

"으아아!"

"크어어어!"

"옛 아버지시어!"

저항력과 방어력은 모든 빌드 중 최강인 성기사들.

이 한 방으로 몰살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명만큼은, 망치가 머리를 직격한 단 한 명만큼은 끝장낼 수 있었다.

묠니르 다음은 묵호검 차례.

도약으로 접근하고 돌진하며 섬광을 꽂았다.

그야말로 유성검.

여기에 단월로 후속타를 날리자 성기사들이 허수아비처럼 썰려 나갔다.

"이익! 막아라! 막으란 말이다!"

"방어해라! 방어해!"

"기사단장님께서 오신다!"

4레벨 상급 기사만 그나마 내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집요하게 3레벨 성기사만 노렸다.

기사단장이 접근하면 물러나서 다산총과 유탄 발사기를 쏘고, 적당히 따돌리면 다시 돌진해서 섬광과 단월을 뿌리고.

콰콰콰콰.

여기에 견제에서 벗어난 김사제가 황금 축복을 꽂자 더욱 강해졌다.

내 공격이 모조리 치명타로 작용한 것.

여기에 황금 축복의 행운 효과까지 작용하자 성기사들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슬슬 도망칠 법도 한데 성기사들은 되레 눈을 까뒤집었다.

"물러서지 마라!"

"옛 아버지의 위엄을 보여라!"

"위대하신 옛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신국으로 가자!"

정말이지 광신도다운 행동.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다들 기쁘다는 듯이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기사단장은 내 검을 심장에 맞고는 기껍다는 듯이 말했다.

"옛 아버지께서 계시한 빛이자 구원자다우십니다... 쿨럭, 구원자님의 영혼이 신국에 오시는 날을, 옛 아버지께 공양하는 날을 즐거이 기다리겠습니다."

기사단장은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밝고 상쾌하기만 한 웃음.

소름이 쫙 돋았다.

역시 광신도와는 상종할 게 못 된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김사제가 지친 얼굴을 하고는 다가왔다.

"형. 고생하셨어요."

"너도 고생했다. 축복에 힘 좀 쓴 것 같더라."

"저야 뒤에서 구경만 했는데요, 뭘. 그나저나 형 엄청나네요. 5레벨이 셋에 4레벨이 여덟이나 됐는데 혼자 다 이기시고."

"나도 그동안 놀고먹진 않았으니까."

"아니... 이게 노력 좀 했다고 되는 일이에요?"

김사제가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손끝이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신님께서 주변에 아무것도 없대요. 아, 결계도 해체해 주셨어요. 진짜 다행이네요."

"다행? 뭐가?"

"이단심문관이 지원 요청을 하진 않았나 봐요. 은신 결계랑 차단 결계 설치 전후로 밖으로 나간 전파도 없어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신님이시니까요. 아직 힘이 약하셔서 그렇지 하실 수 있는 건 많아요."

신은 신이라 이거지.

나는 통찰 특성으로 시체들을 한번 살펴본 후 관심을 껐다.

혹시 좋은 마법 무구가 있나 본 거였는데 내가 쓸 건 없었다.

아마 이단심문관과 기사단장이 낮은 서열이었나 보다.

하긴 김사제네 교단이 허접한 교단이니 달라붙은 이단심문관도 허접한 놈이었겠지.

그래도 얻은 건 있다.

[파괴] 특성.

아까 방패를 부술 때 획득한 것.

앞으로는 여차하면 방어구부터 부수고 시작하면 되겠다.

"저건 제가 현금화해서 보내 드릴게요."

"진짜? 고맙다."

"헤헤, 수수료는 조금 챙겨도 되죠?"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감사해요. 그런데 형, 아까 저놈들이 형 보고 구원자라고 부르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도 몰라. 몇 달 전부터 그렇게 부르더라."

"음... 구원자라...."

내가 짐작하고 있는 건 있지만 고스란히 말할 수는 없다.

현 시점에서 옛 아버지 교단이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비밀이니까.

김사제가 구원자, 세 글자에 대해 생각하게 한 것만 해도 충분하다.

토르 교단과 가이아 교단에 정보가 흘러 들어갈 테니.

그 둘이라면 옛 아버지 교단의 목표를 눈치채겠지.

시체 밭을 지나 10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천장이 확 트이며 붉은 하늘이 보인다.

달팽이 껍질에서도 상당히 깊은 부분.

분명히 지저인데도 불구하고 공간 왜곡으로 지상으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10층에는 아주 중요한 거점이 있었다.

시작의 요새.

100층까지 이어지는 대미궁 공략의 첨병.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법이 적용되는 곳.

진정한 미궁 도시.

2층짜리 낮은 콘크리트 건물이 거북이 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총대주교님!"

입구에 모여 있던 사제들이 김사제를 보며 반색했다.

나 사제요, 광고하는 듯한 치렁치렁한 예복.

모두 금색이었다.

가슴에는 김사제네 교단 고유의 문양을 그려 놓았고.

"무사하셨습니까! 몇 시간 전에 이단심문관이 내려와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오다가 마주쳤어요."

"헉! 몸은 괜찮으십니까?"

"잘 따돌리셨나 봅니다."

"역시 총대주교님! 은신과 도망의 아드님답습니다!"

은신과 도망의 아드님?

못 본 사이에 이상한 별명이 붙었네.

김사제가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따돌린 거 아닙니다. 우리 형이 다 죽여 버렸어요."

"예에?"

"다 죽였다니요?"

"9층 통로에 가 보세요. 시체들이 널려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어... 4레벨 전사신데요? 6레벨 전사도 아니고, 혼자서 성기사단 두 개를 어떻게 다 죽입니까? 5레벨 이단심문관도 같이 있는데요."

"가 보면 알아요. 가 보면."

불신과 의구심에 찬 눈빛이 쏟아진다.

당연한 반응.

나 같아도 못 믿지.

4레벨짜리 하나가 초인 43명을 혼자 죽였다고 하면.

사실 그 4레벨짜리가 SSR급을 넘어 EX급은 되는 4레벨이긴 하지만.

교단 사제와 수호자들을 내보내고 나와 김사제만 신전에 들어왔다.

참 조그마한 신전.

2층짜리 건물 안을 터서 황금 도금 신상을 들여놓은 게 전부.

하지만 김사제네 교단에게는 뜻깊은 신전일 것이다.

무려 3천 년 만에 마련한 신전이니까.

"형한테는 여러모로 감사해요."

김사제가 신상을 보며 말했다.

"이 신전도 형 덕에 지은 거예요. 형이 황금번제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가이아 교단의 협조를 받을 정도로 신님이 강해지지 못했을 거니까요."

"네가 열심히 한 거지."

"아뇨. 형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요. 지금도 신림동에서 기공 치료사 흉내 내고 있었을걸요."

그건 그렇지.

내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자 김사제가 신상 뒤에 손을 넣어 뭘 하나 꺼냈다.

"레반트 지역 보물 창고에서 얻은 가장 귀한 성물이에요. 사실 고대 성검이랑 고대 성갑을 드리려고 했는데 더 좋은 걸 갖고 계셔서 이걸 드릴게요."

"가장 좋은 거라고? 그러면 네가 써야 하는 거 아니냐?"

"원래는 그러기로 했지만, 어제오늘 형이 도와준 것도 있는데 대충 아무거나 드릴 수는 없잖아요."

"예전에 네가 준 성검이랑 신상도 잘 썼는데... 고맙다. 잘 쓸게."

"형은 내숭을 안 떨어서 좋아요."

"하하하."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목걸이.

수십 종의 보석을 황금 줄로 엮은, 너무 화려해서 옷 밖으로 뺐다간 하루에 도둑을 수십 명도 만날 듯한 성물.

뭔지 안다.

게임에서는 옛 아버지 교단이 발굴해서 가져간 아티팩트.

[풍요의 심장]

능력은 간단하다.

모든 능력치 증가.

그리고 [행운].

묠니르나 아이기스에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풍요의 심장 역시 SSR급 장비.

올라가는 능력치만 따지면 아케인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행운 역시 소소한 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보상.

나는 흐뭇하게 웃었지만 김사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몇 개 더 드려야 하는데 황금으로 바꾸느라... 형,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어요? 대미궁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구해서 한국으로 보내 드릴게요."

"있지."

"뭔데요? 말씀만 하세요!"

"염소 악마의 심장 구할 수 있으면 하나만 주라."

염마룡의 심장은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6레벨이 될 때 먹어야 한다.

5레벨에는 수호자 연맹 이사가 추천했던 것처럼 염소 악마나 락샤샤의 심장이 가장 좋다.

"어... 확인해 볼게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염소 악마는 5레벨.

김사제 본인은 물론 김사제네 교단에서 사냥하기는 어려운 악마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사제가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형! 여기 경매장에서 판대요! 제가 하나 사 드릴게요!"

역시 자본주의가 최고야.

이리 쉽게 구해 올 줄은 몰랐네.

"고맙다."

"에이, 고맙기는요. 형이 저한테 해 준 게 얼마나 많은데."

이때쯤 사제와 수호자들도 돌아왔다.

다들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

그 얼빠진 얼굴을 감상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제야. 그럼 나중에 보자."

"예? 벌써 가시게요? 며칠 쉬다 가시지 왜요?"

"할 일이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지.

넥타르를 충분히 구했고 영약에 쓸 재료도 완비했다.

집에 가서 먹기만 하면 5레벨이 된다.

다만 함정이 하나 있지.

김전사가 태생 등급 N급이라는 것.

N급 캐릭터의 성장 한계는 4레벨.

즉, 첫 번째 한계 돌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연변이 -1-

나는 꼼꼼히 방어막을 살폈다.

그러다 있는 힘껏 주먹을 꽂았다.

꾸웅!

방어막이 굉음을 내며 흔들렸지만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거인의 힘][금강체][불사]

[마력혼][실전 격투][강타]

이 상태에서 주먹을 날렸는데도 불구하고.

3레벨 방어 전사가 전개한 마력 방어막도 깨뜨릴 일격.

거의 5레벨 방어막은 된다는 얘기다.

"좋네요."

"그렇지요? 전 집주인도 여기서 오래 사셨습니다. 그분도 전사 계열 초인이셔서 전사 계열 초인에 필요한 시설은 모두 갖추셨지요. 이번에 강남으로 이사 가시느라 급전이 필요해서 내놓으신 거지, 안 그랬으면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대형 단독 주택.

아니, 주택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집과 정원을 합치면 200평이 넘는 크기.

수영장, 미니 영화관, 골프 연습장이 설치되어 있고 상당히 큰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수련실?

그 수준이 아니다.

비밀 연무장이라고 해야겠지.

서우진네 집에서 봤던 연무장만큼이나 좋은 시설이 지하 깊숙이 갖춰져 있었다.

보안도 엄청나다.

보안 요원을 상주시키는 것도 가능.

여기에 성역에 저택 방어막에 방어 드론에....

이 세상 귀족의 정석적인 저택이란 느낌이다.

"고용인은 쓰지 않으시겠다고요?"

"예. 주기적으로 관리만 해 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저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만... 이런 저택은 의외로 손이 많이 갑니다."

"전 보안만 좋으면 됩니다. 보안 요원 대신에 골렘이랑 마법 정령을 놔둘 예정입니다."

저택에 성역은 이미 있다.

나는 지하실에 국한하여 성역 하나를 더 설치할 생각이었다.

김사제한테 받은 신상을 놀릴 필요는 없잖아.

옛 아버지 교단이 나를 여전히 탐내는 이상, 하나라도 더 대비해 두는 게 좋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일주일에 한 번만 관리인들을 보내서 청소하고 수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지하에는 안 와도 됩니다. 지상층만 관리해 줘도 충분해요."

"네, 초인님."

최 소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벅찬 얼굴로 저택을 둘러보았다.

무려 300억짜리 저택.

건물 면적만 200평에 가깝다 보니 침실이 5개에 욕실이 3개나 된다.

백미는 지하실.

전 주인이 어떻게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빈공간이 비밀 연무장의 2배나 되는 크기로 준비되어 있었다.

"저긴 차고로 써도 좋겠습니다."

"차 좋아하시는 분은 그렇겠죠. 전 차를 별로 안 좋아해서... 아 참, 저번에 차 부순 건 죄송합니다."

"네? 에이, 그거야 제가 초인님한테 그냥 드렸던 건데요 뭘. 그 차 덕에 초인님이 위험을 잘 넘기셨다고 하니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수리 다 됐으니까 차고에 놔두고 가겠습니다."

"매번 고맙습니다."

차뿐만이 아니다.

내가 부탁한 건 더 있다.

최 소장이 스마트폰을 조작해 내가 부탁한 설비 목록을 불러 왔다.

"필요하신 게 정밀 측정 장치, 마법 정령 컴퓨터, 엘릭서 욕조, 재구성 영약 레시피, 이렇게 넷 맞지요?"

"정확합니다."

게임에서 한계 돌파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넥타르나 암브로시아를 퍼먹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경험치 바가 깨지고 레벨 표기가 부서지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가끔 한계 돌파 실패로 [폐인] 디버프가 걸렸지만 마력천 욕조나 휴양지에 박아 놓고 잊어버리고 있으면 회복되었지.

문제는 여기가 게임 속이 아니고 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

폐인 디버프에 걸리면 정말로 곤란하다.

최소한 몇 달은 정양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내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거의 0레벨 캐릭터만큼 약해지는데 무슨 놈의 휴양이야.

최 소장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초인님은 7레벨까지는 무난하게 가시지 않을까요? 신열도 극복하시고, 마력 회로 중첩도도 6중 회로로 나오셨잖아요."

SSR급 아니냐는 물음.

태생 N급의 성장 한계가 4레벨이라면 R급은 5레벨, SR급은 6레벨, SSR급은 7레벨이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4레벨이 된 후, 저는 제 벽을 느끼고 있습니다."

"의외네요."

"어쩌면 제가 너무 빨리 성장한 것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필요한 게 재구성 영약이다.

게임에서는 레벨 올릴 때 넥타르만 먹였지만 이 세상에서는 넥타르 법제, 특성 영약을 마시는 게 상식인 것과 비슷하다.

한계 돌파에 최적화된 영약.

폐인이 될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낮춰지는 기적의 약.

"네 가지 다 주문은 해 놨습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습니다. 건우봉 집에 마력천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저번에 보셨잖아요."

"그때는 초인님이 따로 주문하신 줄 알았죠."

건우봉에서 청소부 협회와 싸운 직후, 나는 집에서 공수한 마력천 물에 몸을 담그고 기절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그때는 내가 미리 물을 빼놨었구나.

지하 수련실까지 개방하진 않았지.

"제자분들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집을 파시진 않을 거죠?"

"당연하죠. 마력천 가치만 해도 엄청납니다."

수십억 하는 엘릭서 욕조를 사지 못했다면 차라리 지하실 확장 공사를 하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설비가 착착 들어왔다.

빈 곳에 측정 장치가 설치되고 엘릭서 욕조도 자리를 잡았다.

슈퍼컴퓨터보다 큰, 대형 IT 회사의 서버실을 연상시키는 마법 정령 컴퓨터도 설치 완료.

재구성 영약 레시피를 마법 정령 컴퓨터에 입력한 후 사람들이 싹 빠져나갔다.

"정신없네."

이사 완료.

두 번째 집이다.

게임에서는 건우봉 집을 거쳐 철권 타워로, 송파구 마천루로 옮겨 가니 인연이 없었던 장소.

내 힘으로 마련한 집이란 생각에 저절로 힘이 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사하고 설비 설치한다고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빨리 레벨을 올려야 한다.

여러 상위 특성이 있어서 5레벨보다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레벨을 올리는 게 성장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특성은 결국 레벨에서 오는 기본 능력치에 곱연산으로 작용하니까.

파팟!

5레벨 마력핵을 넣고 작동시키자 컴퓨터가 부팅된다.

SSD보다 빠른 속도.

단 0.1초만에 부팅 완료되어 또렷한 형상이 떠올랐다.

투명 나비 날개를 단 손바닥 크기의 소녀.

페어리 형태 마법 정령이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을 보조하기 위해 태어난 마법 정령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우선 저택 시스템 장악하고 보안 레벨 최고로 올려."

[넷!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지상 3층, 지하 5층 소규모 저택 입력되었습니다. 보유한 전산 자원 마법 정령 컴퓨터 1대, 보조 컴퓨터 10대, 정밀 측정 장치 1개, 스마트 TV 2개, 스마트 냉장고 4개, 스마트 에어컨 10개, 스마트 침대 2개, 엘릭서 욕조 1개, 개인 태블릿 PC 없음, 검색된 스마트폰 1대... 스마트폰도 연결할까요?]

"연결해."

[넷! 연결 속행합니다. 성역 2개, 방어막 3겹, 보안용 전투 골렘 10기, 방어 드론 20기, 자동화 방어 기관총 25정, 비밀 CCTV 25개, 정규 CCTV 25개, 클레이모어 50개....]

솔직히 말하면 과화력이다.

하지만 나는 강박증에 가깝게 보안 시설을 설치했다.

돈도 많이 들었지.

지금까지 모아 둔 돈을 이 집에 거의 털어 넣었을 정도로.

[모든 동기화가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주인님의 저택은 제가 관리합니다.]

"좋아. 정밀 측정은 언제 시작할 수 있지?"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바로 시작하자."

측정 장치에 들어갔다.

커다란 유리관처럼 생긴 측정 장치.

이내 장치 전체가 빛나며 나를 샅샅이 비췄다.

바로 앞에 설치한 초대형 모니터에 결과가 실시간으로 전송되었다.

붉은 인체 그림 위 파란 마력 회로가 죽죽 그어졌다.

거미줄처럼 복잡하던 마력 회로가 하나하나 분리되더니 말풍선이 쭝쭝 뜬다.

[4레벨]

[전사 계열]

[6중 회로]

[근골격계 - 거인]

[근골격계 - 금강]

[회복계 - 불사]

[마력계 - 영혼]

[마력계 - 시구르드]

[전투계 - 호왕검법]

이런 식으로 표기가 되네.

내가 유리관 안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 있자 마법 정령이 살랑살랑 날아왔다.

[주인님. 재구성 영약 맞춤 설계 시작할까요?]

"어, 그래. 데이터는 충분해?"

[예. 삼위일체 영약과 더블 파워 영약을 잘 조합하여 만들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굳이 비싼 마법 정령 컴퓨터를 산 이유.

재구성 영약 레시피를 설계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정밀 측정 다시해 봐."

내 특성 전환 능력.

특성을 싹 다 바꾸었다.

그러자 화면이 재출력되며 새롭게 바뀐다.

[4레벨]

[전사 계열]

[6중 회로]

[방어계 - 마법]

[방어계 - 불굴]

[감각계 - 육감]

[감각계 - 통찰]

[전투계 - 실전]

[전투계 - 총잡이]

완전히 달라진 마력 회로.

마법 정령이 빽빽거리며 경고음을 냈다.

[오류! 오류! 마력 회로 측정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재측정에 들어갑니다. 재측정 시작!]

[오류! 오류! 마력 회로 측정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재측정에 들어갑니다. 재측정 시작!]

몇 번을 반복한 다음에야 날 빤히 보는 마법 정령.

나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유출하면 안 된다. 알겠지?"

[넷! 주인님. 저는 주인님한테 완전히 귀속된 정령이라 정보 유출은 아예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인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 능력이야. 난 마력 회로를 실시간으로 바꿀 수가 있어."

[그게 가능해요? 제 데이터에는 없는 능력이에요.]

"직접 봤잖아."

나는 특성을 몇 번 더 교체했다.

그때마다 측정 장치에서 다른 결과가 나온다.

심지어 체형이 변하는 것도 보여 주자 마법 정령이 드물게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킹 불가에 해킹되면 즉시 자신을 삭제하는 마법 정령이 아니었다면 절대 밝히지 않았을 일.

마법 정령이 화면 한쪽에 띄워 놓은 재구성 영약 레시피를 보다가 꾸깃꾸깃 던져 버렸다.

[주인님은 평범한 재구성 영약을 드셔서는 안 되겠어요.]

"그렇지?"

[네. 삼위일체 영약에 더블 파워 영약을 더하면 그쪽 방면으로만 특화돼요. 하지만 주인님은 근골격계와 마력계, 회복계, 전투계 능력만 있는 게 아니시잖아요. 방어계는 포함되겠지만 감각계와 이동계 능력은 제대로 활용하시기 힘들 거예요. 아, 제작계도요.]

솔직히 털어놓길 잘했다.

내가 가장 잘 쓰는 건 역시 거인의 힘이나 금강체 등이지만 총잡이와 탐지 계열 특성도 잘 활용하고 있으니까.

총잡이나 육감, 통찰 같은 게 약해지면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제작계도 그렇지.

나중에 장인이든 약사든 조합할 생각이니까.

[주인님의 능력을 모두 알려 주세요. 범용적으로 쓸 수 있게끔 재구성 영약을 설계하겠습니다.]

"오케이. 우선...."

하나하나 꼽아 본다.

우선 상위 특성은 [거인의 힘][금강체][불사][불굴][마법 저항][실전 격투][총잡이][육감][호왕검법][시구르드 연공법] 이렇게 11개.

범용 특성과 계열 특성을 다 포함하면 어떨까?

답은 136개.

장비에만 있고 이식하지 못한 격노나 탐지, 신속 같은 걸 다 빼도 그랬다.

[...136개요?]

"어."

[주인님 능력이 136개라고요?]

"그렇다니까."

[와, 와아, 와아아....]

갓 태어난 마법 정령인데도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한참을 눈을 떨던 마법 정령이 겨우 진정했다.

[그거 다 알려 주세요.]

"알았어. 우선 거인의 힘이랑... 아니다. 보여 줄게. 그게 더 낫겠다."

하나하나 특성을 장착하며 정밀 측정을 시행했다.

한 번에 특성 하나.

총 136번의 정밀 측정.

처음에는 6개씩 묶어서 하려고 했는데 몇 번 하더니 마법 정령이 요구한 거였다.

하나만 장착해야 마력 회로가 제대로 보인다고.

거의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보조 컴퓨터 10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마법 정령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고개를 갸웃하고, 볼을 부풀리면서 내 측정 결과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와... 주인님 진짜 엄청나네요. 어떻게 특성 바꿀 때마다 몸이 그렇게 막 늘어났다가 줄었다가 해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하하하."

[진짜 다른 사람 같다구요. 마력 패턴도 바뀌고 뇌파도 변하고 세포도 달라져요.]

"진짜? 그런 것까지 보여?"

[네. 간이 측정 장치로는 못 보지만 정밀 측정 장치로는 보여요. 초정밀 측정 장치로 보면 더 확실하고요. 혹시 구하실 수 없을까요?]

"그건 좀... 너무 비싸서 말이지."

[나중에는 꼭 구해 주세요. 그런데 특이하네요. 이런 엄청난 능력을 가지셨는데 벌써 초인의 벽에 부딪히셨어요. 몸이 자꾸 바뀌어서 그런가? 마력 회로가 확장될 공간이 없네요.]

그야 태생 N급이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마법 정령이 모니터 앞으로 날아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화면이 136개로 분할되며 마력 회로 136개가 바둑판처럼 늘어섰다.

입을 삐죽 내밀며 계산하는 마법 정령.

[삼위일체 영약이나 더블 파워 영약은... 썼다간 너무 편중되니까 패스. 주인님도 지금 능력 계속 갖고 가실 거라고 하셨죠?]

"응. 어떤 한 분야에 150% 능력을 내는 것보다 전반적으로 120%, 아니 110%만 돼도 만족해."

[전 분야 만능이요? 우리 주인님 욕심이 많으시네요. 천겁지고좌 영약을 참고해야겠어요.]

"천겁지고좌 영약?"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영약이에요. 전설에 나오는 천겁지고성이라는 축복에서 따온 이름이죠. 전사, 강화병, 마법사, 사제 전 계열 재능을 아울러 강화하는 영약이에요.]

"나랑은 안 어울리겠다."

[네. 주인님은 엄연히 전사 계열이시니까요. 관건은 전사 계열에 특화되어 있으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능력에 일정 이상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는 건데....]

구아아앙!

컴퓨터가 제트기 이륙하는 소리를 냈다.

저러다 과열되어 터지는 거 아닐까 싶을 지경.

마법 정령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에어컨을 풀로 틀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계산이 끝났다.

[주인님! 완성했어요!]

"고생했다."

[그런데 재료가 조금 많이 들어가는데 괜찮을까요?]

"얼마나 들어가는데?"

마법 정령이 허공에 양피지를 출력했다.

기껏해야 불사조 심장이나 천둥 이무기 뿔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재료가 튀어나왔다.

[거인 돌연변이 마력핵]

[악마체 돌연변이 마력핵]

[야차 돌연변이 마력핵]

[천둥새 돌연변이 마력핵]

돌연변이 마력핵.

일반적인 변이체와는 다르다.

인간의 이성을 유지한 돌연변이들.

현대에 비로소 인권을 인정받은 존재.

그들의 심장을, 마법 정령이 내 재구성 영약에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돌연변이 -2-

"진심이냐? 돌연변이 마력핵을 쓰라고?"

내가 정색하고 묻자 마법 정령이 부연 설명을 했다.

[주인님의 능력은 너무 많습니다. 그 능력을 모두 일정 이상 발휘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이다 못해 파격적인 신체 재구성이 필요하지요. 평범한 신체 재구성으로는 부족하고, 돌연변이에 준하는 신체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돌연변이에 준하는 신체 재구성이라... 그러다가 내가 돌연변이 되면?"

[주인님도 돌연변이 능력은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만."

[중간에 정화 작업을 거칠 예정입니다. 주인님께서 불굴 능력과 정화 능력이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그 마력 회로를 이용해서 돌연변이 인자를 제거하면 제 계산으로는 안전합니다.]

조금 걱정되긴 한다.

하지만 마법 정령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한번 믿어 보자.

마법 정령은 예지에 가까운 시뮬레이션 능력을 가진 인조 정령.특성 전환이라는 개사기 능력에 맞는 재구성 영약 레시피를 설계할 존재는, 소수 고위 마법사를 제외하면 마법 정령밖에 없다.

"돌연변이 마력핵만 있으면 돼?"

[다른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곤란한데...."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신원 시장, 마탑 경매장, 콜로세움....

세 수급처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젓게 된다.

한두 종류도 아니고 네 종류를 다 구하기는 어렵지 싶어서.

돌연변이 마력핵이다.

변이체나 마수에게서 얻는 평범한 마력핵이 아니다.

수식어로 [돌연변이]가 붙는 마력핵은 오로지 한 종족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아니, 종족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그들은 멀쩡히 사람과 피를 섞어 자손을 볼 수 있으니까.

돌연변이.

오랜 세월 대를 이어 DNA에 마력이 축적된 끝에 DNA가 변형되고 날 때부터 변이체로 태어난 사람.

그들을 가리켜 돌연변이라 하고, 그들의 심장을 가리켜 돌연변이 마력핵이라 한다.

조선 시대만 해도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했지만 현대에는 달라졌지. 요즘엔 강원도 산골 깊은 곳에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있다.

"돌연변이 마력핵은 어디서 구하지? 괴물촌으로 가야 해?"

[제 데이터상으로는 괴물촌이 유일한 공급처입니다. 간혹 암흑 시장에 물건이 공급되곤 하나 엄연한 불법입니다. 만약 괴물촌에서 알게 되면 형사 고발이 들어갑니다. 가끔 사적으로 복수할 때도 있고요.]

"후, 알았어."

돌연변이도 법률상 엄연히 인간 취급을 받는다.

그럴 수밖에.

성격이 흉포하고 성급한 경우가 많지만 멀쩡히 말을 하고 이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으니 말 다 했다.

"돌연변이 마력핵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아, 설계랑 준비 미리 끝내 놓고. 최 소장한테 연락해서 다른 재료도 구해 놔."

[넷! 조심히 다녀오세요!]

SUV를 끌고 강원도로 출발했다.

최 소장이 말한 것처럼 깨끗이 수리된 SUV.

그래도 완전히 성하지는 않았다.

[운전]과 [탑승], [통찰]을 장착해서 알 수 있었는데, 기어를 변경할 때마다 미묘한 쇳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속도를 올리자 풍절음이 거칠게 터졌고.

'조금만 더 타다가 탈것 구해야지 진짜.'

지금은 돈이 없으니 패스.

부아아앙!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생각에 잠겼다.

'돌연변이 마력핵은 어떻게 구하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평판작.

괴물촌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고, 돌연변이들끼리만 모여 살다 보니 부족한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다.

가려운 부분만 긁어 줘도 평판이 쑥쑥 오를 터.

그렇게 올린 평판을 바탕으로 많은 소재를 얻을 수 있다.

'마력핵은 평판작이 다 끝나야 받을 수 있다는 게 문젠데....'

살아 있는 돌연변이의 마력핵을 받는 것은 불가능.

이미 죽어 추려 놓은 마력핵을 받는 게 최선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괴물촌 평판작 방법을 모조리 꺼냈다.

'반복 퀘스트, 반복 수집, 반복 사냥... 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하자.

아케인 서울에서 괴물촌 평판을 뭉텅이로 주는 퀘스트가 몇 개 있었다.

대표적인 게 돌연변이 캐릭터 개인 퀘스트였지.

그중에 지금 시점에서 가능하면서 그 캐릭터가 없이도 발동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한다.

'거수곰, 썬더, 해골뱀... 아, 이게 좋겠다.'

하나를 찾았다.

미리 알고만 있으면 하루 만에 해치울 수 있는 퀘스트.

게임에서도 이거 하나면 평판 등급 한 단계는 올리고도 남았으니 여기서는 말만 잘하면 마력핵 4개는 얻어 가지 싶다.

부아앙!

생각을 정리하고 속도를 올렸다.

강원도 양구와 인제에 걸쳐 있는 대암산.

가기 전에 마트에서 필요한 걸 챙겼다.

각종 생필품.

음식.

부식거리.

또, 괴물촌과 거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래소에서 0레벨 마력핵을 대량으로.

"외지인이 여기엔 웬 일이슈?"

"볼일이 있어서요."

"그려?"

수상쩍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래소 주인.

뒤로하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차 안에서 마력핵에 모종의 처리를 하고 등산 시작.

대암산 정상, 용늪이라 불리는 고층습원에 괴물촌이 있었다.

도로는 산 중턱까지만 이어진 상태.

차를 적당히 도로 옆에 주차해 놓고 뛰어 올라갔다.

[시구르드 연공법][마력혼][마력 회복]

[도약][질주][기동]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속도였다.

험준하기로 유명한 대암산이지만 내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빼곡한 나무 사이를 번개처럼 가로지르고, 큼직하게 앞을 막아선 바위를 사슴처럼 뛰어넘으며 정상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쌔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우웃!"

동시에 발동하는 위기 감지.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 직후 몸을 꺾었다.

거의 90도로 방향을 전환한 후 빠르게 속도를 줄인다.

스키드 마크 남듯 땅에 고랑이 패이고, 내 몸이 덜커덕 멈춰섰다.

퍽!

그때, 하얀 물체가 날아와 나무에 박혔다.

흡사 화살처럼 보이는 물체.

나는 그걸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흔한 화살이 아니었다.

손가락 뼈였다.

누군가 화살이나 총알 대신 손가락 뼈를 날린 것.

아울러 마력 담은 목소리가 음울하게 퍼졌다.

"그만. 여긴 출입 금지다."

목소리가 울린 지점.

한 괴인이 서 있었다.

전신을 펑퍼짐한 몸으로 가리고 얼굴에 방독면을 덮어쓴 여자.

노출된 것은 딱 하나, 새하얀 해골 손밖에 없다.

[SR 해골뱀]

옷 아래 모습은 끔찍하다.

전신이 뼈만 남아 있으며, 뱀의 머리와 뱀의 꼬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언데드이자 돌연변이.

성능이 좋아서 많은 유저들이 애용했었지.

"출입 금지라니요?"

"말 그대로다. 누구도 여기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고 싶다면 출입증을 제시하도록."

원래는 특수한 퀘스트를 통해야 하지만, 나는 마법의 단어를 하나 알고 있다.

"여기 희망 마을로 가는 길 아닙니까?"

"...으음."

희망 마을.

돌연변이들끼리 괴물촌을 부르는 이름.

사실 이게 정식 이름이다.

돌연변이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가 없으니 보통은 괴물촌으로 통용되지만.

나는 해골뱀을 보며 의뭉을 떨었다.

"희망 마을을 찾아왔습니다만, 출입증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누구한테 들었지?"

"친구한테요."

"친구 누구?"

"어...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풍기자 해골뱀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독면과 고글, 벙거지로 가린 얼굴.

빈 눈두덩 속에서 녹색 안광이 고글마저 뚫고 내게 폭사되었다.

뭐 어때.

나는 당당하다.

게임 속 친구도 친구 아니겠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도 친구지. 따라와. 우리 마을은 결계 안에 있어."

"감사합니다."

해골뱀이 순찰 중이라 다행이었다.

다른 초인이었다면, 특히 융통성 없는 썬더가 순찰 중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넘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조금 따라가자 안개가 짙어졌다.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마력이 물씬 풍기는 안개.

탓, 타탓.

해골뱀은 바위만 밟으며 이동했다.

그것도 십여 미터씩 떨어진 바위만.

바위 순서를 잘 기억하며 나도 도약으로 밟고 지나갔다.

해골뱀이 웅얼거리듯 내게 경고했다.

"잘못된 바위를 밟으면 바로 추방돼. 여긴 성역이 설치되어 있거든."

"저도 들었습니다."

"매일 밟아야 하는 바위가 바뀌니까 이상한 생각하지도 말고."

"그럴 거였으면 아가씨를 보자마자 이놈부터 달렸겠죠."

나는 허리띠에 단 묠니르를 툭툭 건드렸다.

아가씨라고 불러서 이상하게 생각한 걸까?

해골뱀이 나한테 묘한 눈빛을 던지고는 다시 날아올랐다.

한참을 바위 뜀뛰기를 한 끝에 마을에 도착.

"이야!"

게임 속 광경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괴물촌이라는 이름과는 안 어울리는 광경.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연상시켰다.

나무를 변이시켜 기둥 삼고 담쟁이덩굴을 넓게 펼쳐 벽 삼은 나무집들이 조르륵 서 있다.

장미와 백합, 국화가 집마다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어떤 집은 꽃을 이용해 벽화를 그려 놓았다.

괴물촌이 아니라 꽃과 나무의 마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집들을 구경하고 있자 주민들이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인간?"

"어어? 인간이네?"

"여긴 왜 왔지?"

각양각색.

수도 많고 종류도 많다.

키가 5미터에 달하는 거인.

팔이 여섯 개에 머리 양쪽에 혹이 있어 머리 셋처럼 보이는 남자.

대미궁에서 봤던 악마를 닮은 여자.

몸에 번개 깃털이 돋은 아이.

시체처럼 얼굴이 창백하고 그림자가 없는 노인.

전신이 육체 대신 불로 이뤄진 화염 인간.

바깥에서 봤으면 변이체겠구나 하고 공격부터 퍼부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는 무슨 볼일이지?"

"촌장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따라와."

마을 중심.

다른 나무집보다 다섯 배는 큰 나무집이 있었다.

"촌장아, 들어갈게."

해골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보인다.

거대한 곰.

전신이 갑주 같은 강철 껍질에 싸여 있고 머리에는 웅장한 뿔이 솟아 있는 돌연변이가.

[SSR 거수곰]

거수곰이 나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인간? 인간이 우리 마을에는 무슨 일이지?"

"너한테 볼일이 있대."

"쯧, 너는 존대 좀 배워라. 아무리 외국인이어도 그렇지 언제까지 반말만 할 거냐."

"이게 편해."

"마을에 온 지 20년이 넘었으면서...."

"순찰 중이었어. 난 갈게."

"마음대로 해라."

꾸웅.

해골뱀은 사라지고 나와 거수곰만 남았다.

거수곰이 송아지 같은 촉촉한 눈망울로 날 주시했다.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현실로 보니 더 적응 안 되네.

누가 저걸 7레벨 초인이자 돌연변이로 보겠어.

덩치 작았으면 거수곰이 아니라 귀염곰이라고 했겠다.

"처음 보는 분이네요.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다고요?"

"예.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 인간 초인이 저한테 무슨 부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씀해 보세요."

잠시 심호흡.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역시 대놓고 말하는 게 낫다.

한 대 맞긴 하겠지만 음흉한 놈으로 의심받는 것보다는 훨씬.

"마력핵이 필요합니다."

"음?"

거수곰의 눈이 묘해졌다.

자기 귀를 의심하는 눈치.

다가올 파국이 뻔히 보였지만, 나는 물러나는 대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거인 돌연변이 마력핵과 악마체 돌연변이 마력핵, 야차..."

"이 새끼가!"

예상대로였다.

거수곰이 격하게 분노를 터뜨린다.

두 눈에서 불을 토하며 팔을 휘둘렀다.

그 큰 거체 탓에 나무 기둥처럼 보이는 오른팔을.

쌔애액!

공기가 갈라진다.

아예 공간이 찢어지는 것 같다.

무방비 상태로 맞았다간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특성을 교체하면서 왼팔을 쭉 내밀었다.

[금강체][불사][시구르드 연공법]

[마력 방패][실전 격투][방어]

촤르륵!

아이기스가 전개된다.

금속 날개가 날렵하게 펼쳐지며 무형 역장이 벽을 만든다.

그 위에 덧대지는 방패 모양 방어막.

마침내 검은 무쇠팔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꽈르릉!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금강체가 아니었다면, 금강체에 포함된 결의가 아니었다면 여기서 끝장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몸이 붕 떠서는 거의 10미터도 넘게 날아갔다.

"크윽!"

왼팔이 부러진 듯이 아팠다.

그러나 실제로 부러지지는 않았다.

아이기스도 잘 버텨 주었다.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나자 거수곰이 입에서 불을 뿜듯이 외쳤다.

"제법이구나! 오냐, 그래야 때려죽이는 맛이 나지! 죽여 버리겠다!"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서 포효하는 거수곰.

고막이 팽하고 터져 버렸다.

이어 거수곰이 살짝 몸을 굽혔다.

도약하여 단숨에 날 깔아뭉개려는 준비 동작.

저거 맞으면 아무리 나라도 못 견딘다.

거수곰이 막 도약하려는 찰나 목에 힘을 주며 외쳤다.

"잠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여기 사시는 분들을 밀렵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왜 주먹부터 날리세요?"

"흥! 인간 초인들이 생각하는 게 다 뻔하지. 마력핵을 달라고? 그래, 살아 있는 주민의 마력핵을 가져가진 않겠지. 너도 납골당에 모셔진 마력핵을 노리는 게 아니냐! 너 같으면 네 가족, 네 친구의 시체를 돈 몇 푼에 팔아넘길 수 있겠냐? 필요 없다! 우린 돈도 금도 필요 없어! 그저 우리끼리 살 작은 천국이 필요할 뿐이다!"

거수곰이 앞발을 천천히 그러모았다.

마력 파장이 넘실거린다.

강렬한 적갈색 마력이 유형화되고 있었다.

권강.

혹은 오러 블레이드.

권강 쓰는 곰이라니, 실화냐?

"값은 치르지요."

"값? 가앖? 네놈 같으면 돈 몇 푼에 가족과 친구의 시체를 팔 수 있겠냐?"

"당연히 돈 받고는 안 팔죠. 하지만 제 영혼을 받으면 팔겠습니다."

"뭐? 영혼?"

뭔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는 거수곰.

나는 계속 메고 있던 골프백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지퍼를 열고 한 물건을 꺼낸다.

거수곰에게 잘 보이도록 물건을 높이 들며 말했다.

"이겁니다."

손바닥보다 살짝 더 큰 크기.

알맞게 부푼 용기.

살짝 미끈거리는 스티로폼 재질.

원래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이 세상에서도 국민 간식인 그것.

거수곰의 눈이 짜게 식었다.

"컵라면이 왜?"

당연히, 그냥 컵라면은 아니었다.

돌연변이 -3-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마트에서 사온 가열병을 꺼냈다.

라면 스프와 건더기를 면 위에 뿌리고 물을 붓자 거수곰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린다.

"그걸 나 보고 먹으라는 거야?"

"맞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해? 어?"

우어어엉!

거수곰의 포효가 재생된 고막을 또다시 터뜨렸다.

평범한 사람은 뇌가 터져서 죽었겠다.

나는 금강체와 결의로 견뎌냈다.

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골프백에 넣어 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거래소에서 샀던 그것.

미리 가루로 만들었던 그것을 면 위에 솔솔 뿌렸다.

뚜껑을 닫고 나무젓가락을 올려 놓자, 노호하던 거수곰이 코를 움찔거렸다.

"어어어?"

빡친 가운데 혼란스러운 표정.

그럴 것이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냄새일 테니.

돌연변이들의 후각이, 또 미각이 사람과 같을까?

시각과 촉각, 청각은 어떨까?

당연한 말이지만 돌연변이마다 제각각이다.

사람과 비슷한 돌연변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돌연변이가 훨씬 더 많다.

"제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희망 마을에 사는 분들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고요."

미각과 후각 때문이다.

"촌장님도 미각은 쓴맛밖에 못 느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약을 그렇게 좋아하신다고요."

"흥. 어디서 듣기는 들은 게 있군."

"어떻습니까? 처음 맡아 보는 맵고 얼큰한 냄새가."

"맵고 얼큰한 냄새...."

매운맛은 열감과 통증이 합쳐진 자극이다.

거수곰의 경우 온도 감각이 결여되어 있어서 매운맛을 느끼지 못한다.

후각으로도 마찬가지.

거수곰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를 내고는 싶은데 이미 타이밍을 놓친 얼굴.

어느새 3분이 지났다.

나는 웃으며 나무젓가락을 떼어서는 컵라면과 함께 내밀었다.

"한번 드셔 보시죠. 인간들이 왜 그렇게 라면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꿀꺽.

목울대가 넘어갔다.

거수곰의 얼굴에 또렷한 감정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도 정체를 모르는 감정, 혹은 욕구.

식욕이었다.

"흠, 흠! 나는 희망 마을의 촌장으로서 인간 문물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에 먹는 거네! 이 냄새가 궁금해서 먹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럼요. 촌장님이 희망 마을에 헌신하는 건 저 같은 인간들도 다 압니다."

"어디 한번...."

거수곰은 그 큰 앞발로 능숙하게 젓가락을 집었다.

라면을 한 번 휘저어보고는 꿀꺽, 침을 삼킨 뒤 면발을 파스타처럼 똘똘 말아서 들어 올렸다.

젓가락질 한 번에 면발 대부분을 건진 거수곰.

한입에 집어삼킨다.

어린아이 주먹 크기 면발 덩어리가 입속으로 사라지고.

거수곰이 정지했다.

팔이 부르르 떨린다.

눈은 동그랗게 떠져선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때?

현대 문물의 맛이?

짜고 맵고 얼큰한, 건강에는 절대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그 맛.

하지만 평생 한약의 쓴맛을 유일한 맛으로 알고 있던 거수곰에게 이건 신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이, 이건, 이건...."

거수곰이 충격받은 얼굴로 비어 버린 컵라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건더기 조금 남은 국물을 원샷 때린다.

목울대가 벌컥벌컥 움직이고 거수곰이 진저리를 떴다.

살짝 치뜬 눈, 벌어진 입은 거수곰이 천국에 다녀왔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더, 더, 더! 더 내놔! 더 내놓으라고!"

"진정하세요. 다른 분들도 드셔야죠."

"음, 다른 사람들은...."

거수곰이 갈등하는 표정을 짓는다.

너 왜 그래?

넌 콩 한 쪽도 다른 돌연변이랑 나눠 먹는 놈이었잖아.

컵라면 하나에 마을 버려?

동족 버려?

나는 컵라면 대신에 보냉팩을 꺼냈다.

드라이아이스를 한계까지 넣어 온 탓에 내용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아이스크림.

원래 세계의 메로나를 꼭 닮은 물건.

곱게 포장지를 벗겨서 살살 가루를 뿌렸다.

벌써 냄새가 나는지 거수곰이 살벌하게 아이스크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번 드셔 보시죠."

"누누이 말하지만 이건...."

"압니다, 알아요. 맛이나 보세요."

거수곰이 혹시 떨어뜨릴세라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였다.

눈을 질끈 감고, 냄새 한 번 맡고, 손을 떨면서 마침내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간다.

그리고 한 입.

"흐어억!"

거수곰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길쭉한 혀를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다.

아, 실수.

핥아먹지 못했다.

혀 근육에 힘이 들어가면서 아이스크림이 두 조각 난 것.

부러진 아이스크림이 낙하하는 것을, 거수곰이 개구리처럼 혀를 쏘아 낚아챘다.

"흐으윽!"

졸지에 두 입으로 아이스크림을 결딴낸 거수곰.

급살 맞은 것처럼 몸을 떨다가 나를 쳐다본다.

"하나만, 하나만 더 줄 수 없겠나?"

"그러죠."

생필품 물가가 싼 세상이라 이깟 아이스크림은 500원도 안 한다.

아낌없이 아이스크림을 베풀었다.

덤으로 그 위에 살랑살랑 뿌리는 가루 한 줌.

가루가 아이스크림에 녹아들 때마다 거수곰의 얼굴도 녹아들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얼굴은 물론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무슨 냄새야?"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이게 냄새야? 코 있는 놈들은 맡을 수 있다는 그거?"

"맞다... 넌 코가 없었지...."

"어허! 어딜 부르지도 않았는데 들어오나!"

거수곰이 호통을 쳤으나 돌연변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아 거 구경이나 합시다."

"촌장이라고 유세 부리기 있기요?"

"뭐지? 이건 도대체 뭔 냄새야?"

"인간들이 뿌린다는 향긴가?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네."

모두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돌연변이들은 유독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

냄새 역시 마찬가지.

짠맛과 신맛을 느낄 수 있으면 다행. 거수곰처럼 쓴맛만 알고 평생을 사는 돌연변이도 많고 아예 미각이 없는 돌연변이도 꽤 많았다.

그런 이들이 생전 처음으로 단내를 맡았으니 코를 벌름거릴 수밖에.

나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맛들 보세요. 여러분도 즐기실 수 있는 아이스크림입니다."

"아이스크림?"

"이거 그냥 차갑기만 하던데...."

돌연변이라고 돈이 없고 현대 문물을 모를 리 없다.

당장 거수곰의 집에도 TV와 콘솔 게임기, 대형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같은 가전이 늘어서 있었다.

당연히 아이스크림도 컵라면도 먹어 보았다.

맛을 느끼지 못할 뿐.

돌연변이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받았다.

녹색 직육면체 아이스크림.

저마다 눈치를 보다가 이윽고 입에 넣는다.

그리고 한 입씩 깨물.

"어?"

"응?"

"헉!"

"어엉?"

느낌표 떠오르듯 눈이 커진다.

사람 눈동자가, 짐승 눈동자가, 뱀 눈동자가, 식물 옹이구멍이, 카메라 조리개가 일제히 벌어지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도 잠시.

돌연변이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더, 더 내놔!"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있는 거 다 줘!"

거리낌 없이 촌장의 집에 밀고 들어올 정도의 강자들.

즉, 최소가 6레벨인 돌연변이들.

나는 손도 못 써 보고 보냉팩을 털렸다.

정확히 말하면 털려 주었다.

천둥새 돌연변이가 보냉팩을 낚아채서는 저 높은 천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이스크림은 내 거다!"

"이리 내놔!"

"내 거야!"

돌연변이라 본능이 더 강한 걸까?

다들 나이 좀 들었을 텐데 애들 장난치는 걸 보는 듯했다.

심지어 거수곰까지 거기 끼어선 천둥새 돌연변이에게 앞발을 뻗는 걸 보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이히히!"

천둥새 돌연변이가 콘 종류 아이스크림을 포장도 안 뜯고 깨물었다.

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까만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진득하게 흘러내린다.

천둥새 돌연변이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맛이 없잖아?"

"어? 정말?"

"맛이 없다고?"

"진짜네!"

"그냥 얼음 가루야! 얼음 가루!"

보냉팩이 찢어지고 분분히 떨어진 아이스크림.

그걸 주워 먹은 돌연변이들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달달 고소하던 조금 전과 다르게 얼음 가루 뭉치에 불과했으니까.

냉감조차 모르는 돌연변이들은 [이게 뭐임?] 하며 눈만 끔뻑거렸고.

나는 작은 주머니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올렸다.

"핵심은 이겁니다."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워 뜯은 후, 가루를 살짝 집어서 뿌렸다.

나는 [개코]를 장착하지 않는 한 아이스크림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돌연변이들은 달랐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코를 벌름거린다.

평소 후각이 예민한 돌연변이도, 후각이 아예 없는 돌연변이도 똑같았다.

"이 가루를 뿌리기만 하면 어떤 음식이든지 여러분은 그 음식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맛없는 음식도요."

"그 맛없다는 게, 인간들이 말하는 맛없다는 뜻이야?"

"바로 그렇습니다."

거수곰이 자연스럽게 내게서 아이스크림을 받으며 물었다.

한입에 꿀꺽 삼키는 것을 돌연변이들이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흐아아!"

근엄하던 괴물촌 촌장은 없다.

그저 아이스크림 먹고 행복감에 몸부림치는 곰탱이만 있을 뿐.

당장 성토가 쏟아졌다.

"저, 저, 저 곰 새끼 좀 봐!"

"지 혼자만 처먹고!"

"네 입만 입이고 우리 입은 주둥이냐?"

"나도 줘! 나도!"

나는 주머니를 통째로 거수곰에게 넘겼다.

거수곰이 주머니를 받고는 신중하게 안을 살폈다.

"이게 뭐지?"

"한번 맞춰 보세요."

"거참. 평범한 조미료는 아닌데 도대체 뭐지?"

거수곰이 혀를 내밀어 가루를 핥았다.

동공이 쫘악 확장되더니 나를 홱 돌아본다.

"이 무슨! 지금 나를 죽이려고!"

0레벨 마력핵 가루.

거수곰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돌연변이에게 마력핵은 치명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선천적 돌연변이에게 후천적 변이가 더해지면 그건 걷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미 정화한 물건입니다. 절대 부작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장담하지?"

"정말입니다. 제가 드린 거 드시고 변이되는 분 계시면 절 죽이세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음...."

"정 걱정되시면 최하급 성수에 담갔다가 드시면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맛이 더 좋아질걸요? 마력 반응성이 좋아지니까요.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0레벨 마력핵만 쓰셔야 합니다. 1레벨부터는 위험합니다."

내 말에 비로소 가루의 정체를 알아차렸나 보다.

돌연변이들이 여기저기 웅성거렸다.

"마력핵? 저거 마력핵이야?"

"마력이 느껴진다!"

"우웩! 우리한테 마력핵을 먹였다고?"

"정화했대잖아."

"그래도 마력핵이야!"

"마력핵이건 뭐건 좋아. 난 아이스크림 다시 먹을 수만 있으면 마력핵이든 뭐든 처먹을 수 있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우리도 이제 드라마처럼 아이스크림도 먹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먹고 팥빙수도 먹고 젤라또도 먹을 수 있는 거야?"

걱정하는 눈빛 반. 욕심에 찬 눈빛 반.

나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여러분께는 수호신도 계시지 않습니까. 정 걱정되면 수호신께 한번 여쭤보세요. 예언의 능력을 가진 그분이라면 이걸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알려 주실 겁니다."

"대모님에 대해선 어떻게 알았지?"

"말했잖아요. 친구한테 들었다고."

게임으로 알았다고는 절대 말 못 하지.

거수곰이 날 내려다보다가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거실 한쪽에 놓인 초대형 마도과학 TV.

그걸 향해, 정확히 말하면 초거대 원목 TV장을 향해 절을 열 번 하고는 괴이한 방언을 읊조린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초저주파와 초고주파가 결합하여 괴상하게만 들리는 소음.

이게 대모, 괴물촌의 수호신, 나무 신(神, god)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한참을 엎드려 있던 거수곰이 일어났다.

날 한 번 보고, 돌연변이들을 한 번 보고, 자기 나무집을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대모님께서 안전하다고 하셨다. 단, 반드시 직접 만들어서 먹고 정화하거나 성수에 담갔다가 먹어야 한다."

"저, 정말이야?"

"대모님께서 그러셨다고?"

"마력핵을 먹어도 돼?"

"0레벨 마력핵이래잖아! 0레벨 마력핵! 우리 마을 사람이면 최소한 3레벨은 되는데, 고작 0레벨 마력핵에 변이될 약골은 우리 마을 사람 중에는 없어!"

"아암!"

"그딴 약한 놈들은 애초에 태어나질 못하지!"

돌연변이들이 침을 줄줄 흘렸다.

시선은 오로지 거수곰이 든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눈만 보면 소드마스터가 따로 없다.

시선이 마치 검강을 보는 것 같았다.

7레벨 초인인 거수곰이 잠깐 몸을 떨 정도.

나는 조용히 골프백을 열어 비닐봉지를 휙휙 꺼냈다.

"뭐야?"

"삼겹살이다!"

"치킨도 있어!"

"짜장면! 저거 짜장면 맞지?"

어지간한 자동차 트렁크 크기를 자랑하는 골프백.

오늘은 총과 유탄 발사기, 폭탄 대신에 음식을 꽉꽉 채워왔다.

말 그대로 마트를 탈탈 털었지.

봉투를 뜯고 음식을 내밀자 돌연변이들이 눈이 뒤집혀서는 음식을 약탈했다.

"고맙다! 인간!"

"넌 좋은 인간이구나!"

"왜 우리 마을 사람이 널 친구로 인정했는지 알겠다!"

"정말로 고맙다! 내 간이 필요하면 기꺼이 이식해 줄게! 나는 간이 네 개거든!"

여기에 주머니를 몇 개 더 건넸다.

거수곰에게 줬던 가루가 다가 아니었던 것.

돌연변이들이 침을 줄줄 흘리며 가루를 뿌렸다.

나는 맡을 수 없는, 그러나 돌연변이에겐 개미 페로몬보다 강력한 유혹.

"흐어어어...."

"흐아아...."

돌연변이들이 양초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어떤 무정형 돌연변이는 아예 자기 형체를 잃고 슬라임처럼 바닥에 퍼져 버렸다.

벌써 이러면 어떻게 해?

나는 비장의 무기, 자가 가열형 대형 냄비를 골프백 깊은 곳에서 꺼냈다.

물을 받아 끓이며 라면을 넣는다.

동봉된 라면 스프에 더해 추가로 후추와 소금, 고춧가루, 설탕을 아낌없이 투하.

거의 한 주먹씩.

겁나게 짜고 맵고 단 대혼종 잡탕 라면 완성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숟가락 먹고 뱉을 라면.

하지만 돌연변이라면 어떨까?

맛을 혀로 느끼는 게 아니라, 마력 회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는 이들이라면?

돌연변이들이 홀린 얼굴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한 숟가락, 한 젓가락.

"와...."

"워...."

폭풍이 불어닥쳤다.

그야말로 맛의 폭풍.

모든 돌연변이가 일거에 침몰했다.

돌연변이 -4-

라면 10인분은 금방 동이 났다.

돌연변이들은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었다.

"더 없어?"

"한 입만 더 줘!"

"너무 아쉬운데...."

"집에 라면 없어요?"

"없지."

"우린 영양 캡슐이랑 떡만 먹고 사니까."

맛을 못 느끼니까 대충 먹고 산 모양.

거수곰처럼 한약이라도 먹으면 잘 먹는 거라고.

"마트 가서 사 오시면 되죠. 아니면 사냥이라도 해 오시던가요. 고기에 소금이랑 후추, 마력핵 가루만 뿌려 먹어도 맛있습니다."

"꿀꺽!"

"당장 가지!"

"휴전선 갔다 올 사람?"

"얌마, 휴전선이 동네 뒷산인 줄 알아?"

돌연변이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누구는 읍에 갔다 온다고 하고 누구는 사냥갔다 온다고 했다.

심지어 거수곰까지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도 인제읍에 갔다 올까?"

"촌장아, 아서라. 그 덩치로 어딜 간다고 그래?"

"인간들이 다 괴물인 줄 알걸?"

돌연변이들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멧돼지를 짊어지고 온 돌연변이, 꿩 수십 마리를 엮어 가져온 돌연변이, 라면박스 탑을 약탈품처럼 들고 온 돌연변이, 아이스크림을 자기 입김으로 얼려서 보존한 돌연변이.

때아닌 축제가 열렸다.

괴물촌 전체가 들썩였다.

5레벨 6레벨의 고레벨 돌연변이는 물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과 겨우 몸을 가누는 환자들까지 몽땅 걸어 나왔다.

"마, 맛있어!"

"아아, 이건 단맛이라는 거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에...."

"으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특이한 말씨를 쓰는 돌연변이들도 하나둘 합류했다.

"이거이 얼음보숭입네까?"

"즉석국수가 아주 맛납네다!"

"잘 먹겠습네다!"

아니, 대체 어디 사는 사람들이기에 저런 말씨를 써?

기가 막힌다는 눈빛을 보내자 거수곰이 감출 수 없는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우리한테는 남북 차이가 의미가 없다네. 어딜 가나 박해받는 신세거든."

"그야 그렇습니다만...."

"너무 눈치 주지 마. 저 사람들도 힘들게 넘어왔다고. 북쪽 사정 알잖아. 먹고살기 힘든 거."

마도과학이 발전한 이 세상에서도 북한은 최빈국.

돌연변이는 살기가 더 힘들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법적으로 인간 취급을 받지만 북한에서는 걸핏하면 사냥당하고 마력핵을 적출당한다던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거수곰이 큼지막한 주석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자세.

내가 말아 준 소맥이 마력핵 가루를 머금고 황금빛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술이나 마시자고. 건배!"

"건배!"

술은 썩 좋아하지 않지만 이럴 때 뺄 수는 없지.

내가 꼴랑꼴랑 술을 마시는 사이 거수곰은 자기 머리통 같은 주석잔을 통째로 비웠다.

"캬! 인간들이 왜 술을 그리 좋아하는지 알겠어. 아주 시원하고만!"

"촌장님도 인간이면서 왜 인간이라고 따로 부르는 겁니까?"

"입에 붙은 거지. 솔직히 우리가 사람 취급받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말하는 짐승 취급이었어. 나도 수십 번 넘게 죽을 고비를 넘겼고. 후, 그때 사냥꾼 놈들은 진짜 지독했지. 그나마 이번에 바뀐 사냥꾼 협회장은 이야기가 통하지만. 아, 자네도 사냥꾼 협회원이라며?"

"맞습니다."

"사냥할 때 상대가 돌연변이인지 평범한 마수인지 꼭 확인하고 방아쇠 당기게. 1년에 한두 번은 우리 마을 사람이 총을 꼭 맞거든. 내 손으로 자넬 죽이고 싶진 않아."

"명심하지요."

돌연변이 사냥에 대한 괴물촌의 답은 항상 똑같았다.

결투.

그리고 복수.

대한민국의 돌연변이 법에 명시된 권리였다.

듣기로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6‧25)에 참전한 거수곰과 돌연변이들이 일궈 낸 대가였다고.

"그건 그렇고 마력핵이 필요하다고 했지?"

"예."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거수곰이 고심하며 술잔을 들여다본다.

소를 닮은 눈망울에서 황금빛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게임에서라면 택도 없는 평판 수치.

하지만 현실에서라면?

맛의 신세계에서 허우적대고, 맛의 폭풍에 휘말린 지금이라면?

"원래는 안 되는데 말이지...."

거수곰이 마을 주민들을 쭉 둘러보았다.

축제가 한창이다.

다들 눈이 뒤집혀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조금 진정해서 적당히 즐기고 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꺼끌꺼끌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나무 돌연변이.

"두둠칫! 둠칫!"

괴상하게 몸을 꺾는 삼두육비 야차 돌연변이.

"맛있어요!"

"하나 더 먹을래요!"

"어허, 그러다 배탈 난다."

아이스크림을 달라며 보채는 병아리 형태 돌연변이 아가도 있다.

괴물촌에 보기 드물게 웃음과 행복이 넘쳐났다.

거수곰도 입가에 순둥한 미소를 매달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정말로 오랜만이야...."

늙은 곰은 어떤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을까?

간만에 추억에 젖은 눈망울.

잠시 몸을 일으킨다.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 큰 앞발에는, 서광을 뿌리는 보석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받게. 자네가 원하던 마력핵일세."

정확히 네 개.

각각 거인, 악마체, 야차, 천둥새 돌연변이의 마력핵.

누구의 것일까?

알 수 없다.

거수곰의 동료일 수도, 친구일 수도, 혹은 가까운 친지나 가족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마력핵을 골프백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게. 그들도 납골당에서 잠만 자느니 자네 같은 인간 친구에게 쓰이는 걸 원할 걸세. 설마 팔진 않겠지?"

"제가 쓸 겁니다. 경지의 벽에 부딪혀서 재구성 영약을 만들려고 하는데, 제 마법 정령이 돌연변이 마력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뭐? 재구성 영약에 쓴다고?"

"예. 혹시 안 됩니까?"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곤란한데.

눈치를 슬쩍 살피자 거수곰이 파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내 공격 막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자네 정말로 대단한 인간이었군!"

"그렇습니까?"

"그래! 예전에 재구성 영약에 필요하다고 돌연변이 마력핵을 나한테 달라고 한 인간이 있었어. 그게 누군지 아나?"

"누굽니까?"

"바로 동부군 군단장이라네. 묵호검 그 인간 말이야. 어, 잠깐만. 자네 그거 묵호검 아니야? 백호검이 아니라?"

군단장이랑 아는 사이였어?

하기야 둘 다 독립 유공자에 전쟁 유공자다.

안면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맞습니다."

"그 영감 제자였으면 미리 얘기를 하지. 괜히 나한테 한 대 맞았잖아."

"제자는 아닙니다. 군단장 님께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 영감탱이가 선물로 줬다고? 제자도 아닌데?"

헛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 거수곰.

금방 얼굴을 바꾸고는 납득했다는 시선을 보낸다.

"하긴 그 영감 아들이랑 제자들 상태가 좀 안 좋긴 하지. 표범과 살쾡이는 많은데 호랑이가 없어."

"잠깐 뵀었는데, 다들 용맹하고 지혜로운 분들이었습니다."

"그 영감탱이 눈에는 안 찰걸? 포스트 천마를 노렸던 양반이잖아. 최소 8레벨은 해야지."

거수곰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주시했다.

"고작 4레벨에 경지의 벽을 마주했으면서 재구성 영약에는 돌연변이 마력핵이 4종이나 들어간다라... 자네 아나? 그 영감탱이가 마력핵 먹을 때 몇 레벨이었는지?"

"7레벨이셨겠지요."

"아냐. 5레벨이었어."

5레벨에 성장 한계가 왔다?

SSR급이 아니라 R급이었다는 얘기네.

게임에서는 시작 시점에 성장 한계 다 돌파했으니 SSR급으로 처리된 거고.

거수곰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네야말로 진정한 묵호검왕, 아니 검성이 될지도 모르겠어."

"검성이라니요. 너무 과합니다."

"기질이 그 영감과는 다르긴 한데 강하면 검성이지 별것 있나? 하여튼 이번에 마력핵 4종이 필요하면 다음에는 더 필요하겠구먼."

"그렇겠지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우리도 차기 군단장과 인연이 있으면 좋지."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우리도 몇 가지 부탁을 할 수 있어. 그건 생각해 두게."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나야말로 바라던 일.

괴물촌의 퀘스트는 보상이 빵빵한 게 많으니까.

내가 워낙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과연 할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몸을 털고 일어났다.

골프백을 짊어지자 돌연변이들이 모여든다.

다들 아쉬워하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또 오는 거지?"

"넌 우리 마을의 은인이야!"

"전 세계 돌연변이의 희망이지!"

"정말 고마웠어!"

"보고 싶을 거야!"

이성보다 본능이 강하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돌연변이.

그래서인지 인간보다 순수하고 정이 있었다.

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하자 돌연변이 수십 명이 따라왔다.

대부분 금방 뒤처졌지만 나와 비슷하게 달리는 돌연변이도 몇 명 있었다.

그중 얼굴과 몸을 완전히 가린 여자, 해골뱀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맙다."

"고맙기는요."

"너 덕분에 2백 년 만에 밥을 먹었어."

2백 년?

알고 보니 화석이었네.

"오래 사셨네요?"

"쓸데없이 나이만 먹었지. 수십 년 만에 즐거웠다."

"수십 년...."

"재구성 영약에 돌연변이 마력핵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혹시 해골뱀 마력핵이 필요하면 말해라. 내 걸 내어 주지."

미친 거 아니야?

왜 자기 걸 줘?

나는 다급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필요해도 살아 있는 사람 마력핵을 쓸 생각은 없어요. 이 넓은 세상에 마력핵 하나 없겠습니까?"

"정 없으면 말해. 기꺼이 내어 줄 테니."

심장이 두 개도 아니면서 어떻게 자기 걸 준다는 거야.

어느덧 차를 대 놨던 곳에 도착했다.

시동을 걸자 해골뱀이 손을 흔들었다.

"몸조심해. 내 마력핵 가져가기 전에는 죽지 말고."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하지만 진짜인걸? 나는 갓 태어났을 때 예언을 받았어. 내게 혀와 피와 살을 돌려준 사람에게 마력핵을 바칠 운명이라고. 그로부터 나도 세상도 태양처럼 부활할 거라고 했지."

해골뱀의 개인 퀘스트가 그런 내용이긴 한데....

마력핵을 받는다는 것만큼은 금시초문이다.

심장 떼어 주면 아무리 2백살 돌연변이라도 죽잖아!

나는 손을 휘저었다.

"은유겠죠. 예언인데 명확하게 해석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럴지도...."

"잘 해석해 보세요. 괜히 이상하게 해석했다가 망치지 말고."

"응. 조언 고마워."

"다음에 봐요."

"잘 가."

부아앙!

하루도 안 되는, 체감상으로는 며칠 묵었던 것만 같은 괴물촌 탐방이 종료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음주 운전 아니냐고?

[금강체][불사][시구르드 연공법]

[불굴][약물 저항][독 저항]

이 특성 세트 앞에서 알코올 몇 모금쯤 의미가 없다.

아마 방사능을 퍼먹어도 소화할걸?

"마력핵 구해 왔어."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재료 칸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재료 칸에 넣자 이내 바닥이 열리며 마법솥으로 이동한다.

바로 제조 시작.

내가 손대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었다.

전 과정이 자동화되어 단 1밀리미터, 1밀리리터의 오차도 없이 재구성 영약이 제조되었다.

금방 완성된 네 개의 재구성 영약.

붉고 까맣고 파랗고 하얀 액체가 마법 수정병에 담겨서 뽀얗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넥타르 세 병이 필요합니다.]

"특성 영약까지 하면 네 병이지?"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드네."

[다음 재구성 때에는 더 많이 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넥타르 다섯 병은 필요합니다.]

"특성 영약은 하나만 필요하고?"

[예. 그리고 넥타르에 포함된 마력을 강제 배출하는 방법을 설계하는 중입니다. 넥타르 다섯 병의 마력을 주인님께서 모두 흡수하면 반드시 마력 폭주가 일어납니다.]

나한테 있는 게 열한 병이니까 다음 레벨 업까지는 쓸 수 있다.

금고에서 넥타르 네 병을 꺼내 와 재료 칸에 넣었다.

재구성 영약을 압축하기 시작.

치이이익!

수증기가 뿜어진다.

황금빛 연기가 뿌옇게 뿌려지다가 흩어진다.

적잖은 마력이 배출되고 있다.

내가 가진 마력보다 더 많이.

[완성되었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재구성 영약.

돌연변이 영약이라고 해야 할까?

황흑백청홍 오색을 품고 다섯 갈래로 흩어져 소용돌이치다가 모여서 일렁이기를 반복하고 있다.

[주인님. 모든 능력을 제거하고 복용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완전 생으로 먹으라고?"

[예. 그래야 영약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단, 매우 고통스러우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

예전엔 특성 풀로 장착하고 넥타르 먹어도 죽는 줄 알았는데 생으로 맞고 품으라고?

어쩔 수 없다.

강해져야지.

대충 살다가 죽을 거 아니면 지금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당장 옛 아버지 교단만 해도 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잖아.

신멸 조약 아니었으면 진작 끌려가서 개처럼 세뇌당했을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재구성 영약을 들이켰다.

"커허억!"

몸이 부서진다.

낱낱이 깨지고 허물어진다.

뼈가 조각나고 근육이 해체된다.

세포 단위로 뜯어져 나갔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느낌이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몇 번을 까무러치고 기절하고 실신했다.

실제로 숨통이 끊어지고 심장이 정지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내가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순전히 영약 안의 기본 성분, 즉 넥타르 때문이었다.

마법 정령이 넥타르를 괜히 세 병이나 가져오라고 한 게 아니었던 것.

"허억,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는 내게 마법 정령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특성 영약을 복용하세요. 지금 바로 복용하셔야 효과가 제대로 발휘됩니다.]

"후, 알았어."

특성 영약이라고 약하지는 않았다.

죽을 듯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좋았다.

[맹공]

염소 악마의 심장이 준 선물과 함께.

마침내 5레벨이 되었으니까.

금오 그룹 -1-

나는 5레벨이 됐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인증을 위해 초인탑만 한 번 다녀왔을 뿐이다.

"초인님!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걸까?

최 소장이 나보다 큰 10단 케이크를 들고 쳐들어왔다.

"선생님! 5레벨 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그 뒤로 백소린과 쟈네트가 들어왔다.

최 소장처럼 눈에 띄는 선물은 없었지만 와인과 샴페인을 한 병씩 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하늘에선 마법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퍼엉! 펑펑!

[김전사 선생님의 대성취를 축하합니다!]

[축! 5레벨 김전사!]

[제일보안 일동]

누가 폭죽을 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서우진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돈 쳐발랐을 폭죽쇼가, 부산하게 날며 레이저를 쏘는 드론쇼와 함께 펼쳐지는 중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 철권파 일동]

[축대성 - 사냥꾼 협회]

[5레벨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 태양 마탑]

[이 작지만 거대한 발걸음을 축하합니다. - 동부군]

[꽃길만 걸으세요! - 토르 교단]

[당신의 승천을 기원합니다. - 수호자 연맹]

[여신의 축복이 있기를. - 가이아 교단]

[대성 축하합니다.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 하얀 머리 동생이]

[옛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대를 기다리십니다. - 옛 아버지 교단]

화환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원래 세계에서 보던 그 심심한 화환이 아니다.

마력 품은 영초 꽃만 선별하여 화환을 엮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한 화환이었다.

심지어 마법을 심어 놓았는지 주위 공간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나는 그중 마지막 화환을 보고 입을 일그러뜨렸다.

옛 아버지 교단.

이건 도발이냐 뭐냐?

"정말 대단하세요!"

백소린이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곳이랑 알고 지내는지 전혀 몰랐어요!"

마침 도착한 김철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습니다. 4대 세력 중에 재벌 빼고는 다 화환을 보냈네요. 언제 이렇게 인맥을 만드셨습니까?"

"열심히 살다 보니 이렇게 됐지."

그러고 보니 금오 그룹은 어떻게 된 거지?

태양 마탑에서 내 정보를 빼 가려고 했으니 금방 접촉해 올 줄 알았는데 소식이 없다.

"파티다!"

최 소장이 어느새 불판을 설치하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백소린이 옆에서 돕고, 김철권은 자기 차에서 술을 궤짝째로 꺼내 왔다.

쟈네트는 뭘 할 줄 몰라 구경만 하고 있었고.

"소장님. 금오 그룹에 대해 들은 것 없습니까?"

슬쩍 묻자 최 소장이 뜻밖이라는 시선을 보낸다.

"초인님도 들으셨나 봅니다. 하긴 아무리 언론을 틀어막아도 알 사람은 다 알지요."

응?

무슨 일 있어?

"초인님도 아시다시피 점입가경이죠. 승계 전쟁이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입니다."

승계 전쟁?

"쓰러진 회장한테 자식이 일곱 있었다는 건 아시죠? 그중에 장남과 차남, 막내딸이 삼파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다른 자식들은 다 탈락했고요. 모은 세력은 비등비등하고 셋이 능력도 비슷해서 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남은 건 전쟁밖에 없죠. 이사회에서 이미 전쟁 방식을 결의한 모양입니다."

어, 이거....

원래대로라면 한참 뒤에나 벌어지는 일 아니야?

금오 그룹의 승계 전쟁.

내 기억으로는 에피소드 6 핵전쟁 직전에 발발했었는데.

금오 그룹 회장이 핵전쟁 흑막에게 암살당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이었지.

"장남, 차남, 막내딸이라고요?"

"예.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초인님께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어떤 의뢴데요?"

"간단합니다. 결투죠."

"결투?"

"세 세력이 5연속 결투를 벌일 모양입니다. 거기 참가해 달라는 의뢰입니다. 성공 보수로 엄청난 금액을 걸었습니다."

들어 보니 무시무시했다.

우선 현금으로 100억.

이건 셋 다 똑같았다.

추가로 장남은 다이아 30개, 차남은 마법 무구 3점, 막내딸은 다산총 1정을 걸었다고.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100억이 기본이라고요?"

"재벌이잖습니까. 그리고 초인님이라면 분명히 5레벨은 이기실 거니까요. 6레벨도 이길지 모르고."

"레벨 제한이라도 있대요?"

"예. 이사회에서 6레벨 2명, 5레벨 3명을 제한으로 걸었답니다. 7레벨은 참가할 수 없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제가 알기론 차남과 막내딸의 합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남 스승이 7레벨이어서요."

"아하."

"그래서 장남이 5레벨까지 집어넣었답니다. 6레벨은 차남과 막내딸도 꿇리지 않지만 장남 처남들이 5레벨 중에선 아주 손꼽히는 이들이에요."

정치질은 진짜 복잡하네.

5연속 결투에만 이런 밀고 당기기가 있을 줄이야.

"그런데 재벌집 승계를 5연속 결투로 결정해요?"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5연속 결투는 3연전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3연전?"

"총재 결투와 단체전이 또 예정되어 있습니다."

"재벌은 돈 버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요? 그걸 무력으로 결정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세력도 능력도 비슷하니까요. 그리고 돈 버는 건 무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힘이 없으면 돈도 못 법니다. 금오 그룹은 특히 쓰러진 회장이 무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기로 유명해서 이런 쪽에 더 민감합니다."

하긴 그랬지.

게임에서도 거의 빌런 집단에 가까운 단체였으니까.

듣기로 세 명 모두 경영 능력은 검증이 됐다고 하고.

'다이아, 마법 무구, 다산총이라 이거지.'

나도 끼어들까?

셋 다 쉽게 구하기 힘든 품목이다.

다대일도 아니고 일대일 결투면 솔직히 날로 먹을 수 있지.

대미궁에선 3 대 1도 이겼잖아.

이단심문관이랑 기사단장 둘이 N급이라 그런 거긴 하지만.

"저도 참가하죠."

"초인님도요?"

"안 그래도 금오 그룹과는 풀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몇 달 전에 태양 마탑에서 마법사 한 명이 추방당한 거 아십니까?"

"알지요. 뉴스로 봤습니다. 지금은 금오 그룹 장남에게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됐다고 들었습니다."

장남?

뒷선이 그쪽이었어?

"그럼 막내딸 쪽에 참가하겠습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막내딸이 주는 보상이 가장 좋으니까.

게임에서는 막내딸이 셋 중 제일 불리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겠지.

금오전자의 원로들은 장남을 지지할 거고, 금오보안의 실력자들은 차남을 지지할 테니.

막내딸은 금오금융을 갖고 있지만 이 시점에선 그나마도 약할 터.

하이 리턴 하이 리스크는 불변의 진리다.

"초인님. 결정하시기 전에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쓰러진 회장 말입니다."

내가 아는 내용이겠지?

게임에서는 단순 노환처럼 보였던 죽음.

나중에 핵전쟁 배후로 진리 마탑이 지목되면서 비로소 전말이 밝혀진다.

진리 마탑 레이드 끝에 입수한 비밀 서류에서 에피소드 4 악룡, 에피소드 5 지옥문, 에피소드 6 핵전쟁 모두 진리 마탑이 일으켰다는 사실.

4대 마탑에도 못 속하는 주제에 탑 내부가 구현되어 있던 이유가 있었지.

"태양 마탑에서 손을 썼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태양 마탑?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와?

얼쩡거리던 백소린이 냉큼 끼어들었다.

"태양 마탑이요? 태양 마탑이 왜요?"

"음... 저도 내밀한 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금오 그룹에서 태양 마탑에 실수를 했고, 태양 마탑이 보복했다고 들었습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재벌 회장을 어쩌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그건 소린 씨가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김철권이 옆에서 말했다.

"흔히 4대 세력이라고 퉁 쳐서 말하지만 4대 세력 간에도 엄연히 강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6강 12약이라고 해야지요."

"6강 12약이요?"

"김 사장님 말이 맞습니다. 동부군, 서부군, 신화그룹, 태양 마탑, 옛 아버지 교단, 시바 교단, 이 여섯 세력을 6강으로 꼽습니다. 이들과 나머지 세력은 차이가 크죠."

2대 군단, 4대 재벌, 5대 마탑, 7대 교단.

총 18개 세력 중 강약을 구분하는 척도는 간단하다.

"8레벨 초인님이 있는 곳들이네요."

"바로 그거죠. 이번에도 태양 마탑주님이 직접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회장님 심장이 까맣게 타 있었다고요. 그런데도 정체불명의 마력이 피를 순환시키고 있었다고 하니 뻔하죠."

"우리나라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은 태양 마탑주님밖에 없습니다. 외국에는 꽤 있다고 합니다만."

최 소장과 김철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왜 태양 마탑주가 움직인 걸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몇 달 전의 그 일이었다.

내 정보를 빼내려고 했던 것.

아마도 태양 마탑주가 은밀하게 경고를 보낸 게 아닐까?

그러다 시비가 붙었겠지.

금오 그룹 회장도 보통 성격이 아니니까.

그 과정에서 태양 마탑주의 분노가 폭발했다면?

단순히 암수가 아니라, 아예 한 판 치고받았을 것이다.

금오 그룹은 안간힘을 써서 그걸 감추려고 했겠고.

외부 시선을 가장 신경 쓰는 것도, 가장 무시하는 것도 재벌이니까.

괜히 TV 방송사와 신문사를 손에 틀어쥐고 있는 게 아니다.

'이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금오 그룹 회장이 죽었다고?

마탑주가 급발진하는 성격이긴 해도 뒷일 다 무시하고 재벌 회장을 죽일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아마 내가 모르는 뒷사정이 있지 싶다.

"거기 남매들도 이상하네요. 태양 마탑한테 자기 아버지가 당했으면 복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집안이 아닙니다."

"거기 인간들은 하이에납니다. 누구도 성녀나 법왕을 모셔 오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발견 당시에 엘릭서를 쓰고 성녀나 법왕에게 부활 기적을 받았다면 살아났을 건데도요."

"회장이 민심을 잃긴 잃었었죠. 걸핏하면 암살자를 보내고 승진이라고 하고 오지로 좌천을 보내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자식들도 회장을 치료하려고 하기보단 경영권 갖겠다고 박 터지게 싸우고 있으니 말 다 했습니다."

"이젠 골든타임도 지나서 살릴 수도 없답니다. 생명 유지 장치에 넣어 놓고 심장만 뛰게 하고 있어요. 이사회에서 부회장이 선출되는 순간이 회장이 죽는 순간이겠지요."

막장은 막장이네.

게임에선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하던데.

여기선 아예 죽으라고 등을 떠밀어?

"돈이 뭔지... 알겠습니다. 최 소장님이 정식으로 연락 넣어 주세요."

"막내딸이 여러모로 불리합니다만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불리해서 좋은 점도 있죠."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아마 며칠 뒤에나 약속이 잡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샴페인을 터뜨렸다.

백소린이 어느새 4레벨에 가까워진 것을 알고 조언과 축하를 해 주고 있을 때였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면서 최 소장의 스마트폰이 찌르릉 울음을 토했다.

"어...."

최 소장이 스마트폰을 확인하곤 눈을 치켜떴다.

"밖에 도착하셨다는데요?"

"예?"

"그 막내딸, 아니, 금오금융 성 사장님이 밖에 도착하셨답니다."

의뢰받겠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정도면 연락받자마자 자동차, 아니 비행차 타고 날아온 거다.

성역을 조정하고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한 여자가 도도하게 서 있다.

비서도 경호원도 없이 혼자서.

그러나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목덜미에 난 까마귀 깃털이 시선을 잡아끈다.

귀밑머리에 가려진 작은 보석이 진한 마력을 뿜고 있다.

내가 김철권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던 리바이어던 빌드.

생체 변이와 기계 의체의 조합.

재벌가쯤 되면 자기 가문에 맞는 강화 지식 정도는 있었다.

"성 사장님?"

"예. 성희영입니다. 이메일은 받았습니다. 제 의뢰를 받으시겠다고요?"

성희영이 날 아래위로 훑어본다.

물건 품평하는 듯한 태도.

나도 마찬가지다.

게임에서는 독사이자 독전갈로 묘사되던 인물.

경계하는 한편으로 호기심이 들었다.

어머니가 톱스타라 외모만큼은 대단했으니까.

"들어오세요. 조촐하게 파티 중이었습니다."

"5레벨이 되셨다는 건 들었어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본인도 6레벨 초인.

성희영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시끌벅적하던 저택이 정적에 잠겼다.

마력 파장을 발하지도 않음에도 풍기는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한 까닭이다.

"흐응."

성희영이 백소린과 자네트를 보고는 콧소리를 냈다.

"저분들이 초인님의 천재 제자들인가 보죠?"

"예. 둘 다 3레벨입니다. 한 명은 한 달 내로 4레벨이 될 거고요."

"제가 봐도 그렇게 보이네요. 서 본부장한테도 들었지만 초인님은 교육에 천부적인 능력이 있으신가 봐요. 일곱이나 되는 제자들이 전부 3레벨 이상인 걸 보면."

일곱?

아, 서우진이랑 그 친구들까지 포함해서 말한 거구나.

정식 제자는 아니고 무협식으로 말하면 외문 제자나 속가 제자라고 봐야 하지만 어쨌든 제자는 제자.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그런 셈이죠."

"가능하다면 우리 보안팀, 아니 금오보안의 대표 이사나 상임고문으로 모시고 싶네요. 괜찮을까요?"

"겨우 5레벨짜리를 대표 이사로요?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가능하죠. 평범한 분도 아니고 묵호검주시니까."

성희영의 눈이 내 허리에 꽂혀 있었다.

다름 아닌 묵호검에.

하긴 누가 나를 단순한 5레벨로 판단하겠어.

태양 마탑과도 연줄이 있고, 토르 교단과 가이아 교단의 명예 성기사인데.

워낙 조용히 들어와서 화제가 되진 않았지만 알 사람은 다 알았다.

"죄송합니다만 단체에 소속되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군단장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거절하신 분이니 금오보안의 사장 자리도 눈에 차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초인님도 좋아하시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성희영.

김철권이 바싹 긴장해서는 몸을 일으킨다.

기관단총에 손을 가져가지만 성희영은 본 척도 하지 않는다.

호주머니에서, 아마도 공간 확장이 되어 있을 마법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권총을 하나 꺼낼 뿐.

눈에 익은 권총이었다.

게임에서도 많이 보았고, 지금 내 골프백에서 잠자고 있는 두 자루 총과 형제처럼 닮아 있었으니까.

"다산총입니다."

성희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 자루를 수임료로 드리고, 성공하면 한 자루를 더 드리지요."

금오 그룹 -2-

거 통 큰 아가씨네.

게임에서도 그랬지.

장남과 차남에게서 보이는 쪼잔함이 성희영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들과 맞서기 위한 생존 전략이 아닐까?

나는 성희영이 든 권총을 확인했다.

"파괴 능력 권총인가 보죠?"

"맞아요. 성공 보수로 드릴 물건은 정지 능력 권총이고요."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

다산총끼리는 능력을 공유한다고.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충격] 산탄총, [영탄] 저격총.

여기에 파괴와 정지가 추가된다?

파괴는 특히 방어구 파괴와 시설 파괴에 강점이 있고 정지는 일시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멈추는 효과가 있었다.

있어서 손해 볼 건 없지.

특히 한참 전투 중일 때 좋다.

멈춰 놓고 방어구 박살 내 버리면 뭐 어쩌겠냐고.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대로 화통하신 분이네요. 좋습니다. 바로 계약서 쓸까요?"

성희영이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계약서 가져왔으니까 사인해 주세요."

성희영이 귀밑머리 보석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파란빛이 번쩍이더니 양장된 종이 계약서가 구현된다.

신기한 의체를 박아 놓고 다니네.

최 소장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초인님. 제가 먼저 검토해 보겠습니다. 어디... 어? 결투 일자가 내일이네요?"

"내일요?"

"네. 문제 될 것 있나요?"

성희영이 도도하게 코를 치켜들었다.

아, 그래.

문제는 안 되지.

답신을 보내자마자 뛰어온 이유가 있었어.

당당한 태도에 되레 웃음이 나왔다.

"시간 낭비 안 하고 좋네요. 5연속 결투라는 건 들었는데, 거기서 제가 정확히 뭘 하면 됩니까?"

"간단해요."

성희영이 날 직시하며 말했다.

"승리죠. 최소한 한 번은 이겨 주셨으면 해요. 가능하면 두 번, 세 번이면 더 좋고요."

"연승제입니까?"

"네. 주인공 탄생하기 딱 좋은 방식이죠."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장남과 차남에겐 꽤 유명한 6레벨 초인이 있지만 성희영이 확보한 초인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한 번만 성공해도 성공 보수를 드릴게요. 두 번, 세 번 이기면 그때마다 추가 보수를 드리고요. 아, 평균 냈을 때 얘기예요. 저희는 총 두 번 싸워야 해서요."

"네 번이랑 다섯 번은요?"

"네 번이요? 또, 다섯 번? 5명 중에 2명은 6레벨인 걸 알고 하시는 말씀이시죠?"

성희영이 말이 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깐.

내 허리춤에 매달린 묵호검과 가슴에 꽂힌 휘장 세 개를 보고는 생각에 잠긴다.

"하긴 초인님이라면... 그래도 4레벨과 5레벨, 6레벨은 다른데... 좋아요. 성과를 내면 성과급을 지급해 드려야죠. 제가 뭘 드릴지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약속은 드릴게요. 승수를 쌓은 만큼 추가 보수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초인님이 제 조커예요. 세 번째로 생각하고 있어요."

세 번째라.

5레벨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내보내겠다는 소리다.

아예 첫 번째로 옮겨 달라고 할까?

5레벨이고 6레벨이고 다 박살 내고 5연승을 거두면....

'에이, 관두자.'

관심 종자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 뭐 있어.

이번 결투는 비밀 결투도 아니다.

반드시 뉴스를 탈 터.

전국에 얼굴 팔려서 파파라치 쫓아다니게 만드느니 적당히 하는 게 좋다.

적당히.

"좋습니다. 세 번째면 적당하겠습니다."

"목숨을 걸라는 얘기는 안 할게요. 한 번만 이기시면 언제든 항복해도 좋아요. 항복하면 그 즉시 끝내기로 합의를 봤어요."

"명심하지요. 다만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세 번만 이겨 드리면 사장님께서 5연속 결투에서 승리하고, 그룹 이사회 인정을 받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시는 겁니까?"

정확한 승리 조건을 들어 놔야 한다.

질문을 들은 성희영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건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이번 5연속 결투는 제가 이길 가능성이 작아요. 오빠들끼리 먼저 한 번, 승자와 제가 한 번, 마지막으로 패자와 한 번 이렇게 결투하기로 했는데 오빠들한텐 유명한 6레벨 초인이 붙어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이사회 재개최까지 시간이 있어요. 이번 결투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그때까지 까마귀 칩을 찾으면 제게도 승산이 있어요."

"까마귀 칩이요?"

성희영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있어요. 저희 가문 비밀이니까 잊어 주세요."

다 아는데 뭘 잊고 말고 해?

까마귀 칩.

금오 그룹 비전의 강화 레시피다.

황금 까마귀 변이 인자와 보석 마법진 기계 의체의 조합식을 담은 기억칩.

반송장이 된 회장의 유산이라고 할까?

게임에서는 승계 전쟁의 승자를 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이번 결투는 연승제라서 제한이 있어요. 초인님은 비약과 강화 촉매 제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 결투에서는 쓰시기 힘들 거예요."

"그건 좀 아쉽네요."

빠른 진행을 위해 규칙을 조정한 걸까?

슬쩍 묻자 노리는 대상이 있어서라고 했다.

장남의 측근 중에 유명한 6레벨 암살자가 있다고.

독과 약물을 어마어마하게 잘 써서 그자를 저격한 항목이라나.

"초인님. 검토 끝났습니다. 평범한 대전사 계약서입니다. 아까 성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추가 보수 사항만 기입하면 되겠습니다."

"뭘 드릴진 생각 못 했는데...."

"천천히 정하세요. 아, 전 현금 말고 마법 무구나 다이아, 넥타르를 선호합니다."

"마법 무구, 다이아, 넥타르... 좋아요. 그 셋 중 하나를 지급하는 걸로 하죠."

"감사합니다."

계약서 수정과 사인은 금방 끝났다.

성희영이 내게 악수를 청하며 눈을 찡긋했다.

"이걸로 한배를 탔네요. 내일 본사 사옥에서 봐요."

"그러죠."

또각또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성희영.

도착했을 때만큼이나 오만하고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후아!"

눈치만 살피고 있던 백소린이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아우라가 장난 아니네요. 진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금수저에 6레벨이잖아."

"저 나이에요? 저랑 비슷해 보이는데..."

사실 나랑도, 김전사랑도 비슷하단다.

게임에서는 30대였지만 지금은 게임 시작 몇 년 전 시점이니까.

백소린이 날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선생님. 위험하신 거 아니에요? 재벌 계승 전쟁에 참가할 정도면 진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잖아요."

"어떡해요?"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쟈네트.

나는 그저 한 번 웃었다.

"너희 선생도 한가락 하는 사람이거든?"

"그래도요."

"최소한 결투에 나올 사람 중에 날 어쩔 사람은 없어."

5레벨 중에선 그렇다.

6레벨은?

사실 조금 위험하다.

5레벨만 돼도 상위 특성을 가진 캐릭터가 출현하고, 6레벨쯤 되면 상위 특성을 여럿 가진 경우가 많으니까.

예전처럼 상위 레벨 초인을 뭉개기가 힘들다는 뜻.

'상황 봐서 판단하자.'

나 혼자 5연승을 할 필요는 없다.

5연속 결투에서 성희영이 지더라도 그건 성희영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다.

성희영을 재벌 총수로 만들고 싶다면 앞서 언급된 까마귀 칩을 찾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기도 했고.

조용히 듣고 있던 김철권이 잔을 높이 들었다.

"초인님의 승리를 위해 건배!"

"건배!"

내일 있을 결투는 잊고 파티에 빠져들었다.

시간은 금방 흐르고 결투 일이 되었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사옥.

신화 그룹, 대성 그룹, 용왕 그룹, 금오 그룹, 승천 그룹, 5대 재벌 사옥이 모두 모여 있는 곳.

초인탑이 위치한 송파구만큼이나 마천루들이 솟아 있었다.

그중 날렵한 날개 모양 마천루에 들어갔다.

결투는 옥상에서 치러진다.

입체 마법진이 까마득한 상공을 꽁꽁 감싸고, 개성 있는 디자인의 비행차가 속속 도착했다.

장남과 차남은 오지 않았고 성희영 진영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성희영도 조금은 긴장한 기색.

"반갑습니다. 고일석 팀장입니다."

"정문영 팀장입니다."

"김전사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성희영 측 대전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눈에 차는 사람은 없다.

특성을 보니 모두 R급 정도였으니까.

장남과 차남도 이 정도 초인만 나오면 나 혼자 다 이기겠다.

파앗! 파파팟!

빛이 폭사되며 비행차가 도착한다.

흔히 보이는 날렵한 스포츠카 형태 비행차가 아니라, 하늘을 떠다니는 요트 같은 형태 비행차들.

어찌 보면 리무진과 요트를 섞어 놓은 듯한 모습.

서로 짠 것처럼 반대편에 착지해서는 비행차에서 내리고,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왔냐, 동생아?"

"예. 왔습니다."

전기가 튄다.

힘껏 발하는 마력 파장에 입체 마법진이 출렁일 지경.

한편 성희영에게는 둘 다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경쟁자는 상대밖에 없다는 듯이.

그러나 성희영도 신경 쓰지 않는다.

높은 코를 치켜들고 자기 오빠들을 내리깔아 보고만 있었다.

"사장님들? 어서 진행하시지요. 15번이나 결투해야 하는데 갈 길이 멉니다."

보다 못한 진행자가 끼어들었다.

"흥!"

"흥!"

코웃음을 치며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둘.

빠르게 결투가 진행되었다.

첫 순서는 결정된 대로 장남과 차남.

분위기만 보면 결승전이었다.

10명의 대전사들 모두 살기를 피워 올리는데 마력 파장이 어찌나 거친지 대기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나는 성희영의 배려로 바로 옆에 앉아 결투를 관람했다.

"큰오빠 측에서 주의해야 할 건 김 팀장이에요."

"저 사이보그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역시 초인님이네요. 보는 눈이 있어요."

전신을 사이보그로 개조한, 덩치 큰 남자.

키 3미터에 기계 의체가 아주 우락부락하다.

마블 영화의 헐크를 사이보그화시키면 비슷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EMP 폭탄도 통하지 않는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반사 처리를 했으니까.

"작은 오빠 쪽에선 이 팀장이 유명하죠."

여기는 돌연변이다.

얼굴 빼고는 전신이 불꽃인 인간.

한계의 한계까지 변이 인자를 투여해서 저렇게 변한 거다.

약점이 얼굴밖에 없는데 얼굴을 얻어맞을 것 같으면 [화염화]로 전신을 불꽃으로 변이시켜 빠져나가곤 한다.

각각 [SR 기갑병] [SR 화염마].

확실히 재벌이라 강화병이 많네.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얼굴을 아는 건 저 둘이 전부였거든.

그런데 시작부터 이변이 발생했다.

장남 쪽 대전사가 시작 즉시 불을 뿜어 차남 쪽 대전사를 구워 버린 것이다.

"태양불꽃!"

성희영이 경악하여 벌떡 일어났다.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후드티를 입고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가린 대전사.

언뜻 드러난 양팔은 강철 의수였다.

그런가 하면 후드티 아래 드러난 얼굴에도 강철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강화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사였던 것.

'혹시 저놈?'

[통찰]을 장착한다.

자세히 대전사를 살펴본다.

[태양불꽃][태양 심장로][마력 집중]

[마광포][융합 심장][의체 적응]

여기에 보이는 것 하나 더.

[낙인] 디버프!

[일식] 버프!

확실했다.

예전에 나와 얽혀서 추방당했던 그 마법사였다.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됐다더니 대전사로도 나왔네.

거기다 강화병 계열 특성을 얻고, 특수한 버프까지 걸린 상태로.

'일식 버프까지 있네.'

전에는 저런 거 없었는데.

태양 마탑을 이루는 학파 수십 개.

그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흑마법 태생의 일식 학파.

일식 학파 수장인 조 장로가 전투 시 달고 나오는 게 일식 버프였다.

마법 위력을 크게 강화하고 마력 능력치도 많이 증가시키지.

장기전에서는 상대 마력까지 빨아먹고.

'쉽지 않겠어.'

흔히 마법병 빌드라고 부른다.

성기사가 전사 계열과 사제 계열에 걸쳐 있듯, 강화병과 마법사의 융합 빌드.

특성을 뜯어 보니 장난이 아니다.

태양 심장로와 융합 심장.

여기에 태양불꽃을 마광포로 쏜다?

마력 파장은 확실히 5레벨인데, 어쩌면 6레벨한테도 통할지 모르겠다.

"다음."

공기가 얼어붙은 가운데 기계음이 울렸다.

의체 적응을 장착하느라 성대까지 기계로 갈아 버린 모양.

"훗!"

다음 대전사가 총을 들고 나섰다.

"태양 마탑 출신인가? 강화병인 줄 알고 꼼짝없이 속았어. 하지만 이미 정체를 파악한 이상 다 끝이다! 그 후드를 벗겨서 네 얼굴을 공개해 주지! 덤벼라!"

그러나 당당한 건 말뿐이었다.

추방 마법사가 손을 들어 태양불꽃을 시전하자 불의 기둥에 삼켜져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저것이 태양불꽃의 위력.

나는 마법 저항과 화염 저항, 흑염으로 버텼지만 태양불꽃이 태양 마탑의 간판 마법인 이유가 있었다.

'어마어마하네.'

원래 태양불꽃은 5레벨이 쓰기 힘들다.

그걸 마법병은 태양 심장로와 융합 심장, 마력 집중 조합으로, 또 의체에 저장된 마력으로 사기 치고 있었다.

의체가 통째로 마력 저장 아티팩트였던 것.

거의 걸어 다니는 인간 배터리.

차남 측 대전사들은 마법병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순식간에 3연승을 가져간 장남 진영.

둘밖에 없는 6레벨 중 한 명이 씩씩거리며 나섰지만 마법병은 미련 없이 기권을 선언했다.

이것으로 3대 1.

장남에게 5레벨 2명이 남아 있어 확실히 유리해졌다.

"김 비서. 저건 도대체 누구야?"

"태양 마탑 출신 5레벨 마법사 박형주입니다. 7레벨 마법사 조미연 장로의 수제자이며 태양 마탑에서는 선임 연구원직을 맡았습니다. 수개월 전 추방된 후, 금오전자 사장님의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레벨이 어떻게 저 정도 화력을 내! 제대로 조사가 안 된 것 아니야?"

"지급으로 조사하겠습니다. 의체가 마력 저장 아티팩트인 건 확실합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마력만 많다고 태양불꽃을 쓸 수 있어? 아니잖아! 써도 저 정도 화력은 안 나와!"

"죄송합니다. 조사가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야? 이 과장이랑 조 과장이 죽게 생겼어!"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가기로 했던 대전사들.

표정이 좋지 않다. 곧 죽을 사람처럼 안색이 완전히 흙빛이 되어 있다.

장남과 차남의 5연속 결투는 벌써 끝을 향해 가는 중이다.

5레벨 둘을 찢어 죽였지만 6레벨 대전사에게 진 차남 쪽 대전사.

화염마가 1승을 따냈지만 소용없다.

뒤이어 나온 기갑병과 혈전 끝에 분패하고 말았으니까.

그나마 항복해서 목숨을 건진 게 위안거리.

1차전은 장남의 승리로 돌아갔다.

장남이 다 이긴 것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어떠냐? 네 대전사들도 잘 싸우긴 했다만 내 전략에 밀린 소감이?"

"염병."

"쯔쯔. 금오 그룹 회장이 되기는 한참 멀었구나. 네 전략의 실패다, 동생아. 많이 배워야겠어."

이젠 우리 차례.

저쪽에서 마법병이 몸을 푸는 것이 보인다.

쉬면서 마력 충전을 끝낸 상태.

통찰로 보는 의체에 태양 같은 마력이 넘실거렸다.

가만히 놔두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게 생겼다.

우리 쪽 대전사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일어서기 전, 내가 한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성 사장님."

"네?"

마법병도 나를 보고 있었다.

진작 나를 알아본 것.

살벌한 기세가 느껴진다.

적반하장으로 품은 원한이, 분노가 조금 전부터 나를 쑤셔 댔다.

나도 그때의 감정을 떠올렸다.

날 속여서 나를 초정밀 측정하려 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조작해서 골탕을 먹이려 했던 주제에 뭘 잘했다고 화를 내?

과거의 악연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

나는 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서 성희영에게 말했다.

"제가 첫 번째로 나가겠습니다."

지독히 낮고도 비릿한 목소리로.

살의를 가득 품어서.

금오 그룹 -3-

"괜찮겠어요?"

성희영이 나를 본다.

우려 섞인 눈이 내게 꽂힌다.

지면 어쩌지.

나마저 패배하면, 혹시라도 제대로 된 승리를 한 번이라도 따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나는 느리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길 수 있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시선이 쏟아진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대전사였던 과장들이 특히 그렇다.

내게 감사하다며 목을 꾸벅 숙인다.

텁.

짊어지고 있던 골프백은 내려놓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오로지 넷.

묵호검, 묠니르, 아이기스, 마총.

아직은 아침. 태양광이 마법 무구에 부딪혀 부서지자 장남이 얼굴을 찌푸린다.

"묵호검... 묵호검주?"

차남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묵호검주라도 태양불꽃에는 안 되지. 흥, 송장 하나 치우겠군. 형님도 늙은 호랑이 그 영감한테 할 말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요."

"내가 알아서 한다."

"예이, 예이, 어련하시겠사옵니까?"

장남과 차남 측 초인들은 나를 죽은 사람 보듯이 보고 있다.

차남 측 예비 대전사들이 특히 그랬다.

자기들이 예비여서 다행이라고, 선발로 나오지 않아서 전화위복이 됐다고 노골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마침내 마법병과 마주했다.

치지직.

마법병의 입가에 전깃불이 튀었다.

강철 가면, 아니 입과 턱까지 통째로 기계 의체.

멀쩡했거나 평범한 의체를 삽입했다면 작은 미소를 지었을 부위가, 미소 대신 전깃불만 튀기는 것이다.

"드디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계음.

그러나 마력 파장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깊은 동굴처럼 음험해진 한편 지옥불처럼 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마법병을 주시하며 물었다.

"조 장로는 네가 이렇게 된 거 알고 있냐?"

"이 개새끼가!"

마법병이 머리를 쳐든다.

후드 아래 주황색 마력 안광이 작은 불덩어리처럼 이글거렸다.

"스승님께선 알고 계신다."

"그래?"

"모든 걸 알고 계시지. 모든 걸."

어째 뉘앙스가 이상하다?

육감 특성을 찬 것도 아닌데 묘하게 가슴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있었다.

"모든 거라니?"

"알 것 없다."

마법병이 입을 꾹 다문다.

하지만 내 통찰 특성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마법병의 시선이 잠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장남에게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어, 이거....

뭔가 있다.

[육감][민감][집중]

파스슥 꺼질 뻔한 직감에 집중했다.

조 장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마법병 빌드도 조 장로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장남과는 예전부터 협력 관계거나 고용 관계였다.

또, 장남과 연관된 비밀이 한 가지 있다.

조 장로-마법병-장남 삼각으로 연결되는 비밀이....

'설마?'

한 가지 끔찍한 가정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죽음.

거기에 이들이 얽혀 있는 거라면?

단순한 시비로 끝났을 태양 마탑주와 금오 그룹 회장의 다툼을 이들이 생사결로 키운 거라면?

발견 즉시 7대 교단에 SOS를 쳤으면 살렸을 회장을 방치되게끔 손을 썼다면?

'어쩐지 이상했어.'

억측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셋이라면, 게임에서 본 셋이라면 충분히 고를 법한 선택지.

조 장로나 마법병은 그렇다 치고 장남은 해도 너무하네.

실질적으로 패륜을 저지른 거잖아?

"말이 길다. 시작하지."

위이잉, 철컥.

마법병이 오른손을 들었다.

오른손이 변형되어 커다란 대포처럼 변한다.

끄트머리에는 포구 대신 커다란 수정이 박혀 있다.

일식을 품은 듯 시커멓게 빛나는 수정.

성희영이 또다시 벌떡 일어났다.

"마광포!"

"헉? 마광포?"

"저걸 달아 줬다고?"

"젠장!"

"다 끝이야! 우린 망했다고!"

성희영 진영에서 탄식이 터졌다.

어떤 사람은 넋을 잃고 마법병을 쳐다보고, 또 어떤 사람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본다.

차남 진영도 상황은 비슷했다.

허탈한 표정으로 마법병을, 장남을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다.

마광포.

강화병 의체 부품 중에서도 손꼽히는 물건.

몸 안의 모든 마력을 일거에 쏟아 내는데, 지구력은 빵점이지만 순간 화력만큼은 어마어마하다.

태양불꽃까지 생각하면 어설픈 6레벨은 잡고도 남지.

장남이 태평하게,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가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쯧, 6레벨한테 쓰라니까 굳이...."

3연속으로 태양불꽃을 쓰면 마광포를 쓸 마력은 남아 있고?

되도 않는 허세지만 먹히는 허세이기도 하다.

우우웅!

나는 뭐라 말하는 대신 아이기스를 펼쳤다.

무형 역장이 펼쳐지며 내 앞을 빈틈없이 감싼다.

마법병이 안광을 번뜩였다.

"아이기스...."

"알지? 내가 막으면 내 승리라는 거."

"스승님께 들었다. 태양불꽃 시현을 15초 동안 막았다고? 그래, 인정하마. 태양불꽃 15초 방어는 확실히 대단한 게 맞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내 태양마광을 막지 못한다. 얌전히 재가 되도록 해라. 묵호검에 대한 경의로 고통 없이 보내 주지."

누구 마음대로 보내 준대?

나는 말없이 묠니르를 뽑았다.

별다른 특성 없이 공격력만 강한 묵호검보단 5중첩 특성의 묠니르가 더 유리하니까.

마법병이 내게 마광포를 겨눴다.

심장이 광광광 돌아간다.

태양 심장로와 융합 심장이 한계까지 마력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자연히 공기가 차가워진다.

모두가 우리를, 아니 마법병을 주시한다.

날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내가 방어하리라 믿지 않는 것이다.

그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한 땀 한 땀 특성을 교체했다.

[마법 저항][화염 저항][흑염]

이 셋은 기본.

[시구르드 연공법][금강체][마력 방패]

조금 아쉽다.

마력혼, 마력심, 실전 격투, 방어, 인내, 결의 같은 좋은 특성이 많은데 딱 여섯 개만 써야 한다니.

하지만 괜찮다.

나한테는 아이기스와 묠니르가 있으니까.

또, 죽음 장인 조철이 만들어 준 방호복의 거구와 극기 특성이 발현되고 있으니까.

"결투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손을 들었다.

"3, 2, 1... 시작!"

펑!

손끝에서 마력 불꽃이 분출되는 것과 함께 태양이 들이닥쳤다.

확실히 빨랐다.

전사의 반사 신경보다.

미리 프로그래밍해 놓은 듯 벼락처럼 발동한 마광포.

콰아아아!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주황색 화염이 강물처럼 내린다.

내 뇌에 시각 정보가 입력된 순간 태양불꽃은, 태양마광은 전방위적으로 번지고 있었다.

피하는 것도 쳐 내는 것도 불가.

오로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우우웅.

아이기스 위에 방어막이 덧씌워진다.

반투명한 방패 모양 방어막.

내 마력을 몽땅 때려 박아 만든 마력 방패다.

아이기스와 반응하여 더욱 짙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흑염.

방패와 방패가 결합하여 영롱하게 빛나는 방어막 중심에서 피어오른다.

꽃잎처럼 퍼져 나가 방어막 전체를 자기 색깔로 물들인다.

그렇게 검은색으로 변한 무형 방패.

날 완전히 감싸고 태양마광을 맞이한다.

화아악!

뜨겁다.

지옥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태양마광은 완벽히 방패에 가로막혀 두 갈래로 갈라졌고, 열기만 받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나는 방패를 주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견딜 만해.'

태양 마탑에서 겪었던 태양불꽃보다는 확실히 강력하다.

당시에 내가 3레벨밖에 안 됐다는 것을 계산해도 그렇다.

하지만 그만큼 나도 강해졌다.

재구성 영약으로 신체 능력치를 크게 올렸고, 상위 특성을 갖췄음은 물론 아이기스와 묠니르가 있다.

묠니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타닥타닥, 작은 번개가 불똥을 튀긴다.

순간 화력은 최강인 대신 지속력은 최악인 마광포.

벌써 약해지는 중이다.

입체 마법진을 잔뜩 흔들고 콘크리트 바닥을 녹이긴 했으나 내 머리카락 한 터럭도 그슬지 못했다.

나는 멀쩡했고 마력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어?"

"어어어?"

"음?"

"살아 있어?"

"저걸 맞고도 살았다고? 5레벨 전사가?"

"아이기스와 묠니르가 좋긴 좋구나."

틀렸다.

태양마광에서 버틴 건 오롯이 내 힘이다.

후드 아래, 마법병의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딱 봐도 당황한 모습.

"이건 말도 안... 어!"

마법병이 멈칫한다.

내가 든 묠니르가 번개 덩어리로 화했기 때문.

[거인의 힘][금강체][마력혼]

[시구르드 연공법][실전 격투][투척]

"항...."

항복하려 했으나 늦었다.

묠니르를 던졌다.

벼락이 마법병에게 꽂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화력은 최강이지만 순발력이나 민첩성 따윈 다 포기한 것이 마법병 빌드.

묠니르가 얼굴을 짓뭉갰다.

꽝!

그것으로 끝.

폭발과 함께 머리가 터지면서 마법 불꽃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치직, 치지직.

머리가 달아난 마법병.

끊어진 전선들이 전기를 튀기고, 혈압을 어찌나 낮춰 놨는지 혈관에선 피가 터지는 대신 꿀렁꿀렁 나오는 것으로 그쳤다.

시체는 머리를 잃고도 한참을 서 있다가 쓰러졌다.

쿠웅!

거의 전신을 의체로 갈아 놓은 탓에 땅이 둔하게 울렸다.

착!

때마침 돌아오는 묠니르.

가볍게 받았다.

손에 휘리릭 감기는 손잡이의 촉감이 어쩌면 이리도 상쾌하고 좋은지 몰랐다.

답답하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

쓰러진 시체를 보면서 코웃음을 한 번 쳐 주었다.

"흥!"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성희영이 방방 뛰었다.

"잘하셨어요! 완전 잘하셨어요! 최고예요! 완전 최고!"

대전사들도 몸을 일으켰다.

"최곱니다!"

"역시 묵호검주!"

"정말로 대단한 일격이었습니다!"

"막는 것으로도 모자라, 단 일격으로 끝장을 보시다니!"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왔다.

조금 전까지 초상집 같았던 성희영 진영은 불사조처럼 살아났고 장남 진영은 아예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묠니르 대신 묵호검을 뽑으며 말했다.

"다음."

마법병이 차남 측 대전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푸하하!"

"걸작이네, 걸작이야!"

"저놈들 꼬라지 좀 보라지!"

"얼굴 펴! 웃으라고!"

내심 통쾌했나 보다.

차남 측 대전사들이 장남 진영을 비웃는 걸 보면.

"웃는 것도 잠깐이다!"

얼굴을 찌푸린 채 등장한 두 번째 대전사.

제법 건실한 강화병 계열 초인이었지만 내게는 단 1분을 버티지 못했다.

쏴 대는 총과 터뜨리는 폭탄을 쳐 내고 피하며 접근한 다음 목에 검을 겨눴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항복하시죠."

"하, 항복! 항복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남 진영이 적이라곤 하지만 나와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적당히 여기서 끊는 게 좋겠지.

강화병 초인이 묵호검이 닿았던 목을 쓰다듬고는 침을 삼켰다.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다음 분 나오라고 하세요."

"네, 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파죽의 3연승이었다.

마법병과 3레벨 두 명을 연거푸 격파했다.

처음에 태양마광을 막을 때를 제외하면 마력을 거의 쓰지 않고서.

[불사][시구르드 연공법][마력혼]

[마력 회복][마력 흡수][활기]

그나마 소모된 마력을 짬짬이 회복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할 수 있었다.

장남 진영에서 네 번째로 나선 R급 6레벨 강화병.

30분이 넘는 치열한 혈전 끝에 꺾어 버리고 만 것이다.

"기권하겠습니다."

화염마가 나오자 미련 없이 기권.

내 바닥까지 보여 준다면 이길 수는 있다.

그럴 필요가 없잖아?

지금 이 결투는 반드시 뉴스를 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고생하셨어요."

성희영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할 만했습니다."

"4연승이라니... 정말 예상 못 했었어요. 1승, 2승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결투에서도 부탁드릴게요."

"맡겨 주세요."

장남과의 5연속 결투는 무난하게 성희영의 승리로 끝났다.

전적으로 내가 4연승을 거둔 탓이었다.

마지막 화염마를 5레벨 2명, 6레벨 1명이 차례대로 싸워 마력을 소모시키고 마지막 대전사가 끝낸 것.

죽은 사람은 없었다.

나처럼 다들 적당히 마무리했기 때문.

애초에 모두 아는 사이다. 망설임 없이 죽였던 마법병이 이상했던 거였다.

"쯧!"

장남이 마법병의 시체를 일별하고는 혀를 찼다.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인상 깊은 활약이었습니다. 묵호검주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 여동생이 뭘 대가로 주겠다고 했는진 모르지만 저는 그야말로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장남이 금박 명함을 꺼내 건넸다.

이 사람은 상도덕도 뭣도 없네.

성희영이 불편한 눈길을 보내건 말건 차남이 헛웃음을 터뜨리건 말건 당당했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면서 명함을 받긴 받았다.

"예. 생각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음은 차남 진영과의 5연속 결투.

차남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이미 결과를 직감했으니까.

이변은 없었다.

장남 진영과 싸울 때와 똑같았다.

내가 먼저 4연승을 거둔 뒤, 5레벨 2명과 6레벨 1명이 기갑병의 마력을 소모시키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차남이 씁쓸하게 웃었다.

"동생아. 네가 이겼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한다고 했죠?"

"제법이긴 하다만 이것으론 부족하지. 동생아, 우리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무력이란다. 우리가 세 번 전투를 치르기로 했지? 1 대 1 대 1로 가져가면 누구에게 유리할 것 같으냐?"

답은 일대일 결투 승리자다.

이 야만적인 세상에서는 권력도 재력도 모두 무력에서 나오니까.

성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했잖아요?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안다고."

"후후, 세상에는 대 보지 않아도 길이 차이를 아는 것들이 많단다. 누가 황새랑 뱁새를 비교하냐? 안 봐도 뻔한걸."

"오빠가 황새라는 거예요?"

"당연하지."

"같은 6레벨인데 너무하신다."

"하하하. 레벨이 같다고 실력도 같은 건 아니지. 네가 모셔 온 묵호검주님만 봐도 그렇지 않냐?"

차남이 슬쩍 마력 파장을 드러냈다.

광폭하고도 거친 힘이 까마귀 떼처럼 하늘을 가린다.

잠깐 위축되어 몸을 움츠린 성희영.

금세 마음을 다잡고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차남이 웃으며 성희영의 등을 두드렸다.

"다음 단체전 때 보자꾸나."

겉보기에는 다정한 모습.

그러나 속은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아주 은밀하게 마력이 성희영의 몸에 투사된 것.

같은 6레벨이 아니었다면 저항하지 못했을 정도로 날카롭고 치명적인 암격이었다.

"카악, 퉤!"

장남과 차남이 떠난 자리.

성희영이 걸쭉하게 가래침을 뱉었다.

그러더니 내 시선을 의식하고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잊어 주세요."

"이미 잊었습니다."

"고마워요. 정산해야죠? 묵호검주님께서 제 의뢰를 추가 달성하셨네요."

성희영이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서가 진은 쟁반에 물건들을 가져왔다.

금괴 백 개 이상.

권총 한 자루.

다이아 무더기.

넥타르 두 병.

여기에 황금 까마귀 형상 마법 신발까지.

완전히 종합 선물 세트였다.

까마귀의 유산 -1-

하나하나 뜯어 보자.

우선 금괴.

겉면에 금오금융 문양과 함께 [1KG]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게 최소한 100개 이상.

이 세상 금 시세는 모르지만 원래 세계 시세에 비춰 생각해 보면 100억 원어치는 될 것이다.

'들고 가기도 힘들겠다.'

비서가 금괴를 받쳐 온 진은 쟁반은 마력을 폴폴 날리고 있지만, 내 골프백은 경량화 마법은 안 걸려 있으니까.

그리고 권총.

성희영이 약속했던 4번째 다산총이었다.

저번에 받은 권총보다 확연히 작고 얍실한,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

이것으로 [충격][영탄][파괴]에 이어 [정지]를 획득했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물건.

전투 중에 정지 먹이고 묵호검을 찌르면 누구라도 끝장날 테니까.

'마총은 안 들고 다녀도 되겠다.'

추가로 다이아 20개에 넥타르 2병.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푸근해졌다.

넥타르도 넥타르지만 다이아를 받은 게 가장 기뻤다.

내가 아직 이식하지 못한 특성들을 몽땅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조만간 콜로세움에 갈까 했는데 가지 않아도 될 정도.

나중에 백소린의 개인 퀘스트를 시작할 때 가면 되겠다.

이제 마지막.

딱 한 가지 물건만이 남았다.

나는 쟁반 위에 놓인 신발을 집었다.

"이거 주셔도 됩니까?"

뭔지 알아서 하는 소리다.

황금 까마귀를 조각한 듯한 신발.

[금오신]이라는 SR급 마법 신.

내가 가진 묵호검, 묠니르, 아이기스, 풍요의 심장 같은 SSR등급 마법 무구보다는 떨어진다.

그러나 금오신에도 장점이 있었다.

세트 아이템이라는 것.

투구, 허리띠, 신발, 이렇게 세 부위로 나뉘어 있으며 다 장착하면 SSR급 못지않은 성능이 나온다.

원래는 회장이 갖고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하나씩 배분했다고.

그중 금오신의 특성은 [금오 도약].

공중 도약은 물론 관성 무시가 붙은 강력한 능력이었다.

"이건 성공 보수면서 수임료예요."

"수임료요?"

"예. 묵호검주님께 새로운 의뢰를 맡기고 싶어요."

뭔지 알겠다.

나는 속으로는 눈치챘지만 겉으로는 의뭉을 떨었다.

"새로운 의뢰라니요?"

대답하기 앞서 성희영이 주위를 돌아본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의중을 눈치챈 것.

조금 전만 해도 북적북적하던 옥상이 조용하게 변했다.

아울러 입체 마법진이 은막 마법진으로 변하여 주위와 차단하기까지.

"비밀은 지켜 주세요."

"당연하죠."

"묵호검주님께서도 보셨다시피 제가 아직 불리한 처지예요. 묵호검주님 덕에 기사회생하긴 했지만 마찬가지죠. 제가 오빠들보다 약하거든요."

나이 때문이다.

이미 40대에 들어간 장남과 차남.

반면에 김전사 또래인 20대 초반의 성희영.

6레벨을 달성한 것이 용하다.

몇 년만 시간이 있었으면 오빠들에게 밀리지 않았겠으나 지금은 성희영이 확실히 약한 시점.

"단체전은 분명히 큰오빠가 가져갈 거고, 일대일 결투는 이변이 없는 한 둘째 오빠가 이길 거예요. 그러면 이사회에서 결정 나는데, 누가 이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저는 아니겠죠."

"그럴 겁니다. 사장님이 여러모로 불리한 게 사실이니까요."

"그렇다고 그냥 당해 줄 수는 없어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딱 하나예요."

성희영이 자기 귀를 매만졌다.

정확히는 귀 아래 박힌 보석을.

빛이 뿌려지며 공중에 작은 칩을 만들었다.

태양빛 까마귀가 발톱으로 움켜쥔 마법칩.

"까마귀 칩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사장님께 들었습니다."

"네. 사실 제가 일부러 흘린 거예요. 어쩌면 묵호검주님의 힘을 빌려야 할지도 몰라서요."

성희영이 날카로운 눈으로 마법칩을 노려본다.

"여기엔 우리 가문의 비밀이 담겨 있어요. 오직 우리 가문의 DNA에만 반응하는 변이 인자가 숨겨 있죠."

"변이 인자라...."

"그걸 확보해서 저한테 주입할 수만 있으면, 그래서 7레벨이 되면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어요."

말처럼 쉽진 않다.

궁합 좋은 기계 의체 정보 역시 같이 있겠지만, 변이 위험과 마력 폭주 가능성은 강화병에게 항상 따라오는 법이니까.

넥타르가 있어도, 맞춤 영약을 미리 준비해도, 돈과 마법을 처발라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성희영은 그것조차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군림하고 싶어서.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까마귀 칩을 찾아 달라는 거죠?"

"정확해요. 이미 제 부하들이 사옥을 샅샅이 찾고 있지만 가망이 없어서요. 분명히 아버지께선 생전에 사옥 안에 숨겨 뒀다고 하셨는데."

"좋습니다. 그 의뢰 받아들이지요. 성공 보수는 어떻게 됩니까?"

"성공 보수는...."

성희영이 마법 쟁반을 또 가리켰다.

"이거랑 비슷하게 드릴게요."

"이거랑 비슷하게요?"

"네."

즉석에서 상세 품목을 결정했다.

100억에 준하는 금괴.

다이아 20개와 넥타르 2병.

머리 방어구인 금오모.

지금 받은 금오신이 성공 보수인 동시에 수임료이니 비슷한 가치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성희영과 악수하며 정식으로 의뢰를 받았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착수하지요. 작은 사무실 하나만 내주시겠습니까?"

"제가 쓰는 사무실이 있어요. 거길 내드릴게요.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거길 쓰세요."

"사장님은요?"

"전 아무 임원실이나 쓰면 돼요."

성희영이 내준 사무실은 차상 층에 있었다.

최상층은 회장이 혼자 쓰는 공간.

그리고 차상 층은 그 자식들이 썼던 것이다.

서로 마주치지 않게끔 엘리베이터까지 분리된 채로.

"햐...."

사장실에 들어간 직후, 나는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유리 통창으로 강남구 정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깔끔하고도 현대적인 디자인의 인테리어에, 청소 드론들이 새처럼 날아다니며 공기를 정화하는 중.

벽에는 너무 고차원적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현대 미술 그림이 잔뜩 걸려 있고 바닥에는 마법진을 그대로 드러낸 타일이 깔렸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성희영이 내 감탄을 듣고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이런 좋은 곳을 써도 될지 모르겠네요. 제 집보다 좋아 보입니다."

"겸손하시네요. 묵호검주님 집도 나쁘진 않던데요. 묵호검주님 품격에 안 어울리긴 했지만요."

새삼 내가 출세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세계에서는 2평짜리 고시원에서 살던 나.

그런 내가 재계 서열 4위 재벌의 유력한 후계자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

이 세상이 안정만 된다면, 고대신 부활에 핵전쟁에 차원 균열 같은 대재앙이 줄줄이 예약만 안 되어 있으면 눌러앉고 싶은 심정이다.

"부탁드릴게요."

성희영이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100평도 넘어 보이는 사장실을 돌아다니다가 중역 의자에 가 풀썩 주저앉았다.

중역 의자도 평범한 중역 의자가 아니다.

최고급 가죽이 나를 감싸는 것은 물론, 인체공학적 구조가 작용하여 나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그와 함께 마법진 발동.

청결, 쾌적, 안정, 정화, 회복 등등 수십 가지 마법이 중첩되면서 내 피로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돈이 좋긴 좋네."

사장실은 그렇다 쳐도 의자만큼은 탐난다.

이거 성공 보수로 달라고 할까?

하나 집에 들여놓고 피곤할 때마다 10분만 쉬어도 남는 장사지 싶다.

쓸데없는 생각.

나는 피식 웃고는 걸치고 있던 마법 무구를 하나하나 해제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탐지]의 투구.

[신속]의 신발.

[격노]의 손도끼.

[위기 감지] 반지.

내가 아직 특성을 이식하지 못했던 마법 무구들이다.

다이아 20개면 이것들을 모두 가져올 수 있었다.

그동안 꽤 오래 써서 장비 숙련이 쌓였으니까.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다이아를 밀어 넣어 장비를 빛나게 만들었다.

특성이 내게 흡수되는 것이 느껴진다.

"후우."

가슴이 두근거렸다.

벌써 상위 특성을 몇 개나 조합했지만, 새로운 특성을 개방할 때는 항상 이렇게 심장이 뛰곤 했다.

[돌진][도약][질주]

[기동][이탈][신속]

특성을 조립한다.

마력 회로가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한 잎 한 잎 잎사귀처럼 해체되었다가 블록 쌓듯 결속된다.

그렇게 웅대한 전모를 드러낸 특성.

[대공습]

백소린의 폭주 기관차와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폭주 기관차가 오로지 전진, 전진만을 외칠 때 대공습은 후퇴하거나 멀리 돌아가기도 한다는 점.

'이동기는 확보했어.'

다음 목표는 감각 계열 상위 특성이다.

육감이라는 아주 좋은 특성이 있지만, 기왕이면 하나 더 뽑으면 좋잖아?

안 그래도 [통찰][탐지][추적][위기 감지] 이렇게 4개가 준비되어 있기도 했고.

'2개만 더 모으면 돼.'

선택지가 여럿 있다.

천리안, 관심법, 마안....

'나한텐 귀안이 낫지.'

마안도 탐났지만 귀안이 나한텐 더 맞다.

상대의 모든 정보를 읽어 내는 귀안.

일시적으로 상대에게 마비 등 디버프를 거는 마안.

다산총도 있고 하니 귀안을 선택한 것이다.

'약점 파악이랑 투시를 모아야겠네.'

다음 목표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도발기도 만들까?'

나는 보통 혼자 다니니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도발이 아니더라도 포효 같은 건 익혀 두면 좋다.

다대일 싸움에 쓸 만하고, 일대일에서도 기습적으로 디버프를 걸 수 있으니까.

그 끝을 사자후로 향하든, 전신의 포효로 향하든 간에.

"그리고...."

새롭게 특성을 교체했다.

[투지][맹공][격노][파괴]

두 개가 모자라다.

무쌍과 학살 특성이 있어야 [일기당천] 상위 특성을 조합할 수 있다.

[거인의 힘]이 순수하게 육체에 작용한다면 일기당천은 능력치를 올려 주는 한편 전투에도 실질적인 보너스를 주는 특성.

순수하게 전투력만을 따지면 일기당천이 거인의 힘보다 낫다.

범용적으로 쓰기엔 거인의 힘이 좋지만.

'하나 더 있지.'

다름 아닌 검 전문가.

이미 다섯 개 특성을 완비했고 [흘리기] 특성만 남겨 놓고 있다.

이건 날 잡아서 훈련하면 되겠지.

서우진은... 바쁘니까 힘들고 백소린을 부르든 적당한 호구 물어서 훈련 같은 실전을 치르면 충분하다.

"좋아, 좋아."

여기까지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재료를 가진 것 중에 방패 전문가도 있지만 미뤄 두었다.

필수 재료인 방패술도 없고 방패 관련 특성은 방패 치기밖에 없으니까.

지금은 까마귀 칩을 찾아야 할 때.

금오신은 신고, 신속 신발과 격노 손도끼는 골프백에 넣은 다음 투구를 쓰고 반지는 손가락에 끼웠다.

[통찰][추적][집중]

[육감][민감][밝은 눈]

탐지와 위기 감지는 마법 무구에 내장되어 있으니 굳이 장착할 필요가 없다.

'까마귀 칩은 로비에 있었지.'

진짜 사기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

남들은 쌔빠지게 사옥을 샅샅이 뒤질 때 설렁설렁 찾아가서 심봤다 외치면 끝이잖아.

로비에 있는데 왜 못 찾냐고?

회장이 엄청나게 돈을 처발라서 그렇다.

아차원 결계.

로비 중심에 설치된 태양 까마귀 조각에 깊이 파묻고 아차원 결계로 아예 격리시켰다.

여기에 온갖 탐지 방해 마법진은 덤.

아니, 태양 까마귀 조각을 통째로 특수 합금으로 만들었다.

외부에는 세계철로 만들고 황금으로 도금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금오 그룹 오너 가문의 비전.

태양 까마귀 조각을 부수지 않는 한 탐지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금오 그룹의 설립자, 전대 회장이 직접 조각했다는 태양 까마귀를 부술 배짱을 가진 사람도 없고.

'이틀 뒤에 얘기하자.'

갑자기 태양 까마귀 조각을 지목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마음껏 호사스런 생활을 만끽했다.

심심하면 사옥을 기웃거리며 탐지 특성을 돌리고, 지겨우면 사장실에 돌아와 라면 끓여 달라고 직원을 호출하고, 그마저도 따분해지면 지하 돌아다니면서 콕콕 쑤셔 대고.

"묵호검주님? 거긴 저희가 진작 점검했습니다."

"목표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거긴 아닐 겁니다."

"그야 모르죠."

"묵호검주님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건 알지만 추적은 저희가 더 나을 겁니다. 저희한테 맡겨 주세요."

"기필코 목표를 찾고야 말겠습니다."

"149층 야경이 그렇게 멋있다면서요? 저도 죽기 전에는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사장실에서 떡이나 먹으라는 태도.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탐지][추적][질주]

이렇게 세 특성밖에 없는 것들이 유세 떠는 게 웃겨서.

나 혼자 맨땅에 헤딩하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을 흘려보낸 후 성희영을 불렀다.

성희영이 혹시나 하는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묵호검주님. 부르셨어요?"

"예, 사장님."

나는 내가 주인이 된 것처럼 커피를 내려 성희영에게 대접했다.

성희영은 역시 재벌 2세다웠다.

속으로 조바심이 날 텐데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나를 주시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성희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움찔.

섬세하고 하얀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움직이지만 날 보는 눈가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찾았다고요? 어디서요?"

"시간 끌 필요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가지러 가시죠."

"좋아요."

성희영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딸그락, 평소 절대 내지 않았던 소리가 났다.

커피잔에 남은 커피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팔짱을 끼고 도도히 서 있는 성희영.

그런데 구두를 까딱까딱 엘리베이터 바닥에 부딪힌다.

그만큼 초조해하고 기대에 차 있는 것.

"어떻게 찾으신 거죠? 특별한 보고는 없었는데."

"영업 비밀입니다. 사장님도 저한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의뢰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사실 기대 안 했어요. 금오신을 굳이 성공 보수로 드린 건... 아니에요."

성희영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추적 능력이 있는 거 알고 의뢰한 거 아니었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어떤 의도가 있었나 보다.

일단 무시하고 1층에서 내렸다.

로비의 태양 까마귀 앞에 정지하자 성희영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거라고요?"

"예."

"저도 의심은 했었어요. 초정밀 검사도 몇 번이나 했고요. 하지만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그럴 겁니다. 부수기 전에는 탐지가 안 되거든요."

묠니르를 들었다.

쿠르릉!

마력을 주입하자 천둥이 터졌다.

번개 덩어리로 변해서 무지막지한 힘을 뿜어내는 묠니르.

성희영이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요! 부수면 안 돼요! 일단 초정밀 검사부터 다시, 4대 마탑에 연락해서 초정밀 검사를...."

아, 글쎄 그걸론 안 된다니까.

무시하고 묠니르를 던졌다.

꽈르릉!

태양 까마귀상이 폭발하고 뒤늦은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