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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혼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잊힌 신의 기사단', '백왕의 기사단', '황금률의 기사단'이 대결해 승리한 쪽이 3층계에서 획득한 모든 '불가사의 업적'을 갖게 됩니다.]

['백왕의 기사단'이 3층계에서 불가사의 업적 '17개'를 완료했습니다.]

시간이 종료되며 나타난 곳은 콜로세움이었다.

그곳에서, 백왕은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

날고 기는 괴수들만 모아서 그럴까.

역시나 '혼'의 육성도 제법이었다.

하기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시련이었으니.

'17개라.'

1층계와 2층계에서 달성한 업적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말인 즉슨 백왕의 기사단이 절대로 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설령 개수가 뒤처져도 괜찮다.

'모크.'

멸왕, 혹은 마왕이라 불리었던 백호족의 걸작이 자신의 곁에 있었으니!

혼자서 전부를 압도할만한 괴물이었으므로.

감히 누가 모크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슈우우우웅!

['잊힌 신의 기사단'이 등장합니다.]

마침내, 잊힌 신이 등장했다.

그를 본 백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생전 처음 보는 괴수들이 즐비했다.

허나 그럼에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슈우웅!

['황금률의 기사단'이 등장합니다.]

백왕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황금률의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어 떠오른 문구에 미소가 지워졌다.

['황금률의 기사단'은 3층계에서 불가사의 업적 '40개'를 완료했습니다.]

잘못 본 건가?

'40개?'

3층계에 40개나 되는 불가사의 업적이 존재한다고?

아니, 불가사의 업적은 중복이 되질 않으니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40개라니?

'그에 비해······.'

하지만 이내 백왕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달성한 업적의 숫자에 비해, 저들이 지닌 '혼'의 진화 정도는 처참하기 그지없었으므로.

대부분 별게 없다.

하지만 딱 한 명.

가장 신경 쓰이는 존재가 있었으니.

'황금률의 드루이드.'

동시에.

그를 본 백왕은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 저건 또 무엇이냐.'

내가 당첨인 모양이군.

이곳 세계수의 던전은 잊힌 것,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상(表象)한다.

'몬스터 혼'도 마찬가지.

성장과 진화를 반복하며 이제 없는 '옛것'을 불러오는 게 골자인 대결.

몬스터 혼이 전승, 신화, 전설, 혹은 '무언가'로 가지가 뻗도록 하는 승부인 것이다.

'잊힌 신은 취지에 맞다.'

그리고 잊힌 신은 취지에 맞게 몬스터 혼을 진화시켰다.

분명히 처음 보는 존재들이지만 어디선가 듣고 본 것만 같은 모습들.

마치 오래전 원형의 괴물들을 보는 듯했으니.

반면,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어떤가.

"극히 희귀하긴 하나, 별거 아니로군."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바라보며 그리즐리가 말했다.

붉은 털을 지닌 거대한 곰.

그의 말을 듣던 이들도 내심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드루이드의 신이며, 세계수의 던전을 연 자라면 달라도 다르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진화시킨 '몬스터 혼'의 상태가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다이아낙스라······."

"광산의 지네?"

"그야, 희귀하긴 하다만··· 흠."

"크큭. 이쪽으로는 재능이 없나 보군."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대놓고 비웃는다.

백왕도 그를 보며 당황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고작 다이아낙스라니?

멸종했다고 알려졌지만 그건 초금속을 구하기 위해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포획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낙스의 몸을 이룬 '오리하르콘'으로 검이나 갑옷 따위를 만들면 그 자체로 엄청난 효용을 자랑했으니까.

단단하긴 해도 강하진 않다.

이곳에서 대결을 펼칠 주체로는 걸맞지 않다는 이야기다.

백왕의 기사단 그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없으리라.

'실망이로군.'

백왕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멸왕 모크의 힘을 제대로 보여줄 만한 대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단원들 대부분도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기야 본인들부터가 진화를 통해 혼의 격을 쌓고 자아를 강화한 부류일 터이니 '몬스터 혼'의 진화쯤이야 간단했을 터.

'그나마 알비노인가.'

황금률의 기사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알비노다.

전설의 드루이드라 칭해지는 그의 '몬스터 혼'은 그래도 제법 봐 줄 만하였다.

'흰색 투구벌레. 특이하군.'

무식하게 커다란 새하얀 투구벌레.

저것도 고대의 종인 듯싶었다.

물론 그래봤자 벌레지만 말이다.

"대결 방식은 '토너먼트'입니다."

"최종 결승전에 올라 승리하는 1인의 기사단이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우승자는 '잊힌 신의 상징물'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잊힌 신'이 최종 우승할 경우, 두 기사단은 절반의 '잊힌 기사의 영혼'을 강탈당합니다."

"소환자가 직접 개입하면 실격패 처리됩니다."

"다만, 소환자에 한하여 자신의 '몬스터 혼'에게 버프류의 축복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장외로 떨어지거나, '몬스터 혼'의 HP가 0이 되어 역소환될 시 패배합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규칙들.

토너먼트.

무작위 상대와 대결해, 승자들만이 계속해서 올라가는 구조다.

'차라리 강한 놈과 대결을 했으면 좋겠군.'

이런 류의 대결은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

그리하여 다음 상대가 긴장케 만드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하여, 백왕은 '잊힌 신'을 바라보았다.

잊힌 신의 기사단이라고 했지만, 막상 등장한 것은 13마리의 괴물과 잊힌 신뿐이었으니.

'묘한 녀석이야.'

전신이 투명한 영(靈)의 형태.

허공에 살짝 발이 떠 있는데, 반인반묘의 여자였다.

토끼 귀를 가진 인간이 잊힌 신이라니.

녀석은 자신이 대동한 13마리의 괴물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다른 기사단에게는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다.

"대진표가 완성되었습니다."

"대결이 시작됩니다."

"39명의 도전자 중 무작위 한 명이 토너먼트 수호자 '언더 나이트(80등급, HP 3,000,000)'와 대결을 치르게 됩니다."

"40강, 백왕(멸왕 모크) VS 세렝게티(고대 곰인형)"

세렝게티.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단원으로 받은 인간 여자.

세렝게티 자체는 꽤 강하지만, 정작 '혼'은 고대의 곰인형일 뿐이었다.

"······."

백왕은 아쉬운 눈초리로 대진표를 다시 바라봤다.

고작 곰인형 따위, 모크의 능력을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할 테니.

"크하하하! 내가 당첨인 모양이군. 좋아, 아주 좋아!"

그때 옆에서 그리즐리가 크게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두 눈을 희번뜩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얌전한 척, 점잖은 척 같잖은 꼴을 떨지만.

정작 '광기의 그리즐리'라 불리는 거대한 산의 주인이다.

그리고 저 광소는 맛있는 사냥감을 찾았을 때, 혹은 갖고 놀 대상을 발견했을 때 녀석이 짓는 웃음소리였다.

무엇보다 고유의 영역에서 수십 년간 절대자로 군림한 괴물이니 그 강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를 증명하듯 그리즐리의 '몬스터 혼'도 녀석과 똑 닮아 있었다.

그나저나··· 당첨이라.

언더 나이트와의 대결에 당첨됐다는 걸까?

아니면?

'··· 과연.'

머지않아 백왕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곤 유심히 살펴보았다.

꽤나 흥미로운 대결구도였으니까.

*

나열되는 규칙과 대진표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40강, 황금률의 드루이드(다이아낙스) VS 폭군 그리즐리(광기의 살라만다)"

······ 이름 없는 수리가 변신한 형태를 주최측도 알아볼 수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름 없는 수리는 자신이 진화한 형태를 저장하고, 변신할 수 있다.

그중 굳이 다이아낙스로 변한 건 처음부터 전부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내보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지.'

변신할 수 있다면, 마땅히 변신으로 인한 이점을 챙겨야 함이다.

그 이점이란 상대의 방심일 수도 있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의 공격일 수도 있었다.

챙길 수 있는 이점이 많은데 시작부터 '이름 없는 수리'의 모습으로 싸우는 건 상대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닥 좋은 수는 아니었다.

'변신이라고 해도 그냥 형질을 빌려오는 것이다만.'

나는 다이아낙스를 바라보았다.

변신한 채로 파밍이 가능했다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안타깝게도 불가능했다.

아예 다이아낙스 자체로 진화했던 때와는 달리 그저 형상과 형질을 빌려오는 방식에 가까운 탓이다.

다시 변신하면 영영 사라지는 특징이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구려!"

경기장의 위.

어느덧 내 앞에는 붉은 곰과 전신에서 불을 뿜어대는 도마뱀이 있었다.

그리즐리, 그리고 광기의 살라만다!

둘 다 흥분한 듯 눈을 희번뜩이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얀티 산'의 주인이로군."

그러자 그리즐리가 두 눈을 깜빡였다.

"··· 나를 아시오?"

"서대륙 끝에 존재하는 그 아름다운 얀티 산의 주인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나?"

"······!"

동시에 미친놈처럼 번뜩이던 두 눈이 가라앉았다.

얀티 산의 폭군 그리즐리는 유저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하다.

전부 '찢어버리기'로.

손에 닿는 모든 걸 다 찢어버리기에 '찢는 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실제로 백 명이 넘는 게이머가 폭군 그리즐리에게 찢김을 당했다.

'칠대 히든 퀘스트 중 하나와 이어지는 놈이니.'

마냥 적대할 필요는 없으리라.

언젠가 다시 한 번 만날 수도 있었으므로.

"······ 드루이드의 신께서 서쪽 끝에 있는 산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군."

폭군 그리즐리가 가볍게 양손을 모았다.

"후에 한 번 놀러오시오. 극진히 대접하겠소."

나도 찢으려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눌러담았다.

"그러지."

"대결하게 되어서 영광이오."

"나도 얀티 산의 주인과 대결하게 되어 영광이다. 부디 명예로운 대결이 됐으면 좋겠군."

"걱정 마시오. 봐주진 않을 생각이오."

피식 웃고 말았다.

호전적인 '찢는 곰'의 성격은 그대로였다.

'재밌군.'

재밌는 녀석이다.

물론,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호전적이기로는 나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

폭군 그리즐리는 승리를 자신했다.

기껏해야 광물 지네.

속성 자체도 너무나도 유리했으므로.

지는 건 말이 안 된다.

"······."

하지만 이어진 대결에서 폭군 그리즐리는 입을 꾹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광기의 살라만다가 내뿜는 불길은 모든걸 녹일 만큼 강력하지만.

··· 다이아낙스는 꿈쩍도 안 했다.

'분명히 광물과 불은 상성일 텐데?'

속성 자체가 살라만다에게 유리하다.

허나 살라만다의 불길은 무용지물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이아낙스의 몸이 아무리 초금속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져 있다지만, 그건 그냥 껍데기일 뿐이다.

부분부분을 감쌀 뿐 전체를 감싸고 있지도 않다.

다이아낙스의 핵으로 이어지는 틈이 많아, 불길이 닿으면 타버려야 정상이다.

그러할진대.

'일반적인 다이아낙스가 아니구나···!'

폭군 그리즐리는 다이아낙스가 살라만더를 감싸는 장면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이아낙스의 모습만 하고 있지, 저건 다이아낙스가 아니라고.

"태초 속성에 의해 '살라만더'의 불길에 의한 피해가 50% 경감됩니다."

"'다이아낙스'의 형태변환에 따라 체력이 '150'으로 고정됩니다."

"방어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강신성'의 효과로 '다이아낙스'의 모든 공격이 '신성'으로 판정됩니다."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키에에에엑!

온 몸이 둘러싸여 조여지던 살라만다가 비명을 내질렀고.

"'다이아낙스'가 승리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폭군 그리즐리'가 패배했습니다."

승리를 확신했건만.

순식간에, 패배를 맞이했다.

*

40강이 끝나자, 20명의 탈락자가 발생했다.

그중 황금률의 기사단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세렝게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당해버렸으니.

압살당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멸왕 모크를 상대로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다.

하여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허나 패배한 건 세렝게티만이 아니었다.

"남은 게 다섯명뿐이라니······."

"··· 생각보다 강하군요."

열셋 중 고작 다섯.

절반이 넘게 패배한 셈이다.

20강으로 진출한 건 나를 포함해 허드슨과 알비노, 발테, 그리고 앤드류 사제뿐이었다.

"괜찮습니다. 결국 우승하는 건 최후의 한 명. 저만 믿으십시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알비노가 말했다.

하지만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너무 확연할 정도로 전력차가 났으니까.

'장기전에 불리하겠어.'

같은 기사단원을 만나 체력을 아끼는 상황은 앞으로도 없을 듯했다.

허나 알비노의 말마따나 남은 숫자는 상관없다.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 이기기만 한다면.

문제는······.

"20강이 시작됩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다이아낙스) VS 잊힌 신(원시 드래곤)"

진짜 문제는 '잊힌 신'이다.

원시 드래곤은 본래 저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같은 편을 대진에서 만나자, 돌연히 둘이 합체한 것이다.

'같은 편을 만나면 합체하고, 다른 기사단을 만나 패배하면 혼이 흘러들어가 진화한다.'

심지어 패배해도 마찬가지다.

패배한 잊힌 신의 '몬스터 혼'은 승리한 '몬스터 혼'에게 흘러가 진화하였다.

말인 즉슨.

'끝에 다다르면 13마리 전부가 합쳐질 수 있다는 거다.'

······ 규칙 위반은 아니지만, 아무리봐도 치트키같다.

잊힌 신은 확실히 내 예상을 웃돌고 있었다.

'누가 더 많은 패를 갖고 있느냐의 싸움이 되겠군.'

허나 마찬가지다.

나도 잊힌 신을 모르듯, 잊힌 신도 내가 가진 패가 뭔지 모른다.

특히 이름 없는 수리의 형상 변환에 대하여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다이아낙스는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로가 패를 한 장씩 까며 전략을 짜고 대비하는 싸움.

당연히 더 많은 패를 갖고 있는 쪽이, 더 늦게 패를 까는 쪽이 유리할 건 자명한 일.

'당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진은 당첨이었다.

잊힌 신이 가진 패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볼 절호의 기회!

그렇게 대진표가 완성된 이후.

대결에 진입하며 나는 '잊힌 신'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단다. 가증스런 두 여신에게 사랑받는 아이야.

······'잊힌 신'이 내게 말을 걸었다.

지고의 혼.

우호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도리어 적대적이다.

분노에 찬 음성에 가까웠다.

절대로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잊힌 신'.

동시에 '잊힌 신'은 두 여신을 '가증스럽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여신에 대해 알고 있으며 괘씸히 여긴다는 뜻.

내가 그들의 축복을 받는 것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하여, 나를 이기게 할 생각 자체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 레아와 피나를 알고 있나?"

본래 두 여신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언급하는 건 불경한 짓이다.

여신교의 누군가가 보았다면 목덜미를 부여잡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른다는 건, 더욱이 '친숙한' 사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러러보는 게 아닌 수평상의 관계.

마치 친구처럼, 연인처럼, 혹은 이웃마냥.

한없이 편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존재.

내게는 두 여신이 그러했다.

빌헬름은 두 여신을 숭배하며 따랐으나, 나는 애당초 판게니아인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친숙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 그 가증스러운 이름을 내 앞에서 부르지 말거라, 아이야.

역시나.

예상대로 '잊힌 신'의 반응도 파격적이었다.

지나치게 날선 대답.

신의 자태에는 어울리지 않는 예민함이다.

'잊힌 신들은 감정 조절을 못하나보군.'

생각해보면 처음 만난 '잊힌 신'도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잊힌 신도 정해진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문제를 뛰어넘어 문을 부수자 미친 듯이 분노하지 않았던가.

"왜지? 레아와 피나가 사기라도 쳤나?"

-오냐, 네놈이 말로 해서 들을 놈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건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내멋대로 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궁금했다.

두 여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

하물며 그게 '신'이라면 더더욱.

특히 '가증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건, 이들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음을 암시했다.

어지간한 일로 그런 말을 쓰지는 않지 않나.

말 그대로 사기를 치거나, 배신을 하거나, 괘씸한 짓을 하고 다닐 때 사용하는 말인데.

'나는 여신에 대해 잘 모르는군.'

생각해보니 그랬다.

두 여신의 일대기는 대략 알고 있지만, 그걸 상대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여신의 일상에 대해 나는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건 빌헬름도, 여신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직접적으로 여신들과 엮여있는 듯한 '잊힌 신'을 마주했다.

나는 씨익 웃어보였다.

"레아와 피나가······."

-닥쳐라!

휘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래도 두 이름이 건드리지 말아야할 역린인 듯싶었다.

[불가사의 업적 '잊힌 신 도발하기'를 달성했습니다.]

잠깐.

···이런 것도 업적이 있어?

보고서도 어이가 없었다.

허나 단순 도발로 업적이 나타나진 않을 것 같았다.

여태껏 '잊힌 신'을 상대로 이 정도로 도발하는데 성공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불가사의 업적이 떠올랐다는 건.

['잊힌 신'이 당신을 '시험대' 위에 올립니다.]

······ 상대가 확실하게 분노했다는 의미였다.

-어디 뚫린 입만큼이나 실력이 있을지 궁금하구나.

너무나도 분노한 나머지 도리어 침착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

-······ 원래 절반만 가져갈 생각이었다만, 네놈을 상대로는 '영혼'의 전부를 가져가마.

잊힌 기사의 영혼.

그 전부를 잃으면, 길을 잃고 영원토록 방황하게 된다.

나만이 아닌 기사단원 전부가.

패배하는 즉시 절반이 아닌 전부를 가져가 그렇게 만들겠다는 엄포다.

"그 대가로 너는 뭘 걸 거지?"

하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하기 마련.

나만이, 황금률의 기사단만이 리스크를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미 잊힌 신을 상대로 승리하면 '상징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이상으로 걸 게 없을 것 같아서 되물은 것이다.

-나의 모든 아이들이 합쳐질 때 만들어지는 '지고의 혼', 모든 신들이 부러워하며 탐내던 것이란다. 그걸 주마.

13마리의 짐승들이 합쳐져 완성되는 혼.

고작 두 마리가 합쳐져서 '원시 드래곤'이 되었다.

13마리가 전부 합쳐지면, 무엇이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저장한 '혼'을 내게 그대로 넘기겠다는 말이다.

'지고의 혼이라.'

과연.

지고라는 이름이 붙은 혼이다.

보상으론 차고 넘친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결국, 마지막엔 '지고의 혼'과 한판 붙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으므로.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때와 달리 겁먹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침묵하자 역으로 도발한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다이아낙스, 계속해서 합체하는 혼들을 상대로는 무리라고 생각한 거겠지.

내가 가진 패를 전부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추가적인 보상을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름 없는 수리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게 확실하다.'

이름 없는 수리를 잊힌 신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잊힌 신'이 가진 마지막 패가 무엇인지.

지고의 혼.

그에 걸맞은 급의 괴물이 완성된다면 확실히 위협적이지만.

"받아들이지."

······ 그렇다고 아예 못해볼 수준은 아니었으니.

['잊힌 신의 추가 시련'이 성사되었습니다.]

변한 건 없다.

계속해서 싸워나가면 그만인 일.

결과에 따라 걸어야하는 무게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처음 잊힌 신을 상대했을 때와 같았다.

'전부를 갖거나, 전부를 잃거나.'

그러니, 한 번 전부를 걸고 부딪혀보자.

너의 전부와 나의 전부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

나도 궁금하던 참이니까.

*

-······.

'잊힌 신'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곤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고작 강화된 다이아낙스를 가지고······ 잘도.'

이곳 세계수의 던전에는 수많은 '잊힌 존재'가 있다.

그중 다이아낙스는 별 게 아니다.

더 대단하고 엄청난 존재들이 즐비한 곳이니까.

심지어 그녀조차 모르는 '혼'들이 많았다.

자신의 도발에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왜인지 찝찝하다.

놈이 너무 흔쾌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숨겨둔 패가 있더라도, 어차피 이곳에서 나를 이길 수는 없느니라.'

물론 주어진 시간동안 진화시킨다고 해봤자 한계가 있기 마련.

반면 잊힌 신의 '혼'은 처음 그녀가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함께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능하다.

시간이란 '혼'에 격을 불어넣고, 더 강화하는 요소.

녀석에겐 그게 빠졌을 터이니.

'원시 드래곤조차 이기지 못할 것이다.'

13마리의 합체까지 도달하지도 못하리라.

비로소 완성되는 '지고의 혼'은 감히 무엇도 견줄 수 없는 존재다.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물론, 녀석이 그 완성체를 볼 일은 없겠지만.

구아아아아아!

그렇게 시작된 대결.

'원시 드래곤'은 시작부터 다이아낙스를 몰아붙였다.

이전 대결에서 다이아낙스가 상성의 불도 이겨낼만큼 단단한 걸 보았으나.

'원시 드래곤의 꿰뚫기는 단순히 단단하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원시 드래곤은 높은 수준의 물리 관통력을 지녔다.

무엇보다도 다른 드래곤들처럼 브레스를 발사하거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사나움을 지녔기에.

고오오오오오-!

"원시의 저주, '용의 울음'이 시전됩니다."

"모든 내성이 -50%만큼 깎입니다."

"체력이 20 하락합니다."

"정신력이 크게 소모됩니다."

평범한 드래곤 피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저주다.

본능을 넘어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공포를 맞이하게 될 터.

시작부터 완전히 상대를 제압하는 셈이다.

한데.

"다이아낙스의 '저주 반사' 40%!"

"'원시 드래곤'에게 가해지는 저주의 유지시간이 30% 증가됩니다."

용의 울음이 원시 드래곤에게도 40%만큼 적용되었다.

'저주 반사능력을 다이아낙스가 갖고 있다?'

아니다.

다이아낙스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 녀석이 지닌 능력이다. 설마 여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저주와 관련된 능력을 지녔을 줄이야.'

단순히 성스럽다하여 가질 수 있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저주의 체계를 확실하게 깨우쳤기에 가지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흔치 않은 능력이었다.

그렇다는 건, 놈이 '저주'를 안다는 것.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익혔다는 의미.

'어느 계통의 저주를 익힌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물론, 상관없다.

의외이긴 하지만 상대가 저주를 익혔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쉽다.

저주는 더 강한 저주에게 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잊힌 신'은 재앙과 불행에 관한 저주에 통달한 신이었다.

"'저주받은 혼(축복 제거)'이 시전됩니다."

"'약화(감각저하)'가 시전됩니다."

"'느릿느릿(속도저하)'이 시전됩니다."

"'생명력 추출(지속적인 출혈데미지)'이 시전됩니다."

"'자연재생력 감소(-10,000%)'가 시전됩니다."

······.

끊임없는 저주의 행렬.

특히 자연재생력 감소로 인해 출혈 데미지가 크게 와닿을 것이다.

'방어력이 높아도 지속적인 출혈을 견디지 못하겠지.'

이제 느긋하게 싸움을 방관하면 된다.

자연재생력을 무려 10,000%나 감소시키는 저주는 자신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설령 재생의 신에게 축복을 받는다한들 저 정도 수준의 감소율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 없었어야만 한다.

'출혈의 타격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다이아낙스는 멀쩡했다.

출혈보다 재생의 능력이 더 클 때 나타나는 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생능력이 그럼 1만 퍼센트를 훌쩍 넘긴 상태라는 건데.

이 또한 다이아낙스에게는 없는 능력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저주보다 '원시 드래곤'에게 들어가는 피해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크르, 크르르르!

다소 지쳐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저주 반사······!'

······ 저주 반사라는 희대의 능력을 놈이 지니고 있었으니까.

반사 계통의 저주를 사용한 게 아니라, 아예 몸에 익혀있다.

하지만······ 사용하는 저주가 아닌, 고유의 지속효과를 지닌 '반사'의 능력은 그녀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저주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중첩되면 중첩될수록.

다이아낙스보다 원시 드래곤의 체력이 더 빠르게 닳고 있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재생능력.

상대의 저주를 되받아치고, 저주의 유지시간마저 늘리는 저 빌어먹을 능력으로 인해.

'자신이 있던 이유가 있었구나.'

잊힌 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그녀의 대결을 호언장담하며 받아들인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 박살을 내줘야겠어.'

"'광룡(자신의 체력을 전부 소모해 강화)'이 시전됩니다."

사용하기 싫었으나, 대결은 한 번으로 족한다.

놈과 다시 대결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끝내려거든, 이 수밖에 없을 듯했다.

구오오오오오오!

원시 드래곤의 전신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모든걸 소모해 일격에 상대를 끝장내는 자기희생의 저주.

이미 다이아낙스 역시 저주의 효과를 받고 있는 상황이니, 이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쉬이익!

원시 드래곤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리곤.

슈우우우우우우웅-!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신을 태워, 그대로 다이아낙스를 들이박았다.

일점폭발.

동시에 콜로세움 전체가 흔들렸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마지막 수.

하지만 괜찮다.

'무승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패한 것으로 간주되겠지.'

녀석에게 다음이란 없을 테니.

그거면 족한다.

곧이어.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승리했습니다!]

-······?

대결의 결과가 떠오르고, 잊힌 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원시 드래곤의 자폭마저 이겨냈다는 건가?

허나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는 먼지가 걷히며 나타난 존재를 바라보았다.

원시 드래곤은 이미 '혼령'의 형태로 변해, 다른 '혼'에게 합쳐졌지만.

그 위에 살아남은 개체가 분명히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건 다이아낙스가 아니었다.

먼지가 걷히며 나타난 건······.

-······ 엔젤······ 베헤모스?

······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사이에 진화라도 했다는 말인가?

무한진화.

꿀꺽!

허드슨이 땀으로 얼룩진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뾰롱! 뾰로롱!

콜로세움의 대결장.

그 위에서 대결을 펼치고 있는 '포오링'을 바라보면서.

몬스터 혼으로 진화시킨 슬라임 종류의 괴수.

겉보기엔 별거 없지만, 슬라임 고유 특성인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능력 덕분에 20강에 오를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의 상대.

'하필이면 하피라니.'

공중형의 괴수를 만난 것이다.

포오링은 느리다.

그렇다고 손이나 발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피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한 건 당연지사.

어떻게 해야 할까.

가진 능력이라곤 방어와 소화뿐인데.

"푸하하! 슬라임 따위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그냥 기권해라."

하피를 다루는 소환자, 웨어울프가 말했다.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두 발로 서있는 괴물.

그는 대놓고 포오링과 허드슨을 비웃었다.

하지만 기권할 수는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드려야 해.'

3층계의 시련은 '몬스터 혼'을 기르고 진화시키는 능력을 보는 장이다.

알비노를 제외하면 '황금률의 기사단'이 지극히 불리한 내용.

물론, 여태껏 불리하지 않은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란돌프가, 박현명이 해결해왔다.

'매번 달라지자, 이번에야말로 강해지자 다짐했지만,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지.'

허드슨은 이를 악물었다.

······ 언제까지 그의 도움만 받고 있을 셈인가.

언제까지 뒤에 숨어 그의 원조만을 바랄 텐가!

'현명님은 약하지 않다. 멸악의 거인을 혼자 쓰러트릴 정도로 강해.'

창피하다.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란돌프의 형상을 잃은 박현명이 약할 것이란 망상.

하지만 멸악의 거인을 혼자 쓰러트리는 남자다.

그런 남자가, 약할 리 없다.

반면에.

'현명 님은 다시금 자신을 증명하셨다. 그런데 나는?'

······ 약해 빠졌다.

몇 번이나 강해지자고 다짐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계란 자신이 정해놓은 선에 불과하다.

란돌프와 박현명을 보며 몇 번이나 깨달았던 사실이지 않나.

뾰롱!

포오링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피의 장난 같은 공격에 포오링은 속수무책이었다.

발에 치이고, 발톱으로 몇 번이나 공중에서 떨어지길 반복했다.

잔뜩 먼지가 묻은 상태로도 포오링은 사력을 다해 하피를 상대하고 있었다.

'포오링조차 포기하지 않잖아.'

모든 걸 건다.

사력을 다한다.

말은 쉽다.

하지만 허드슨은 생각해보았다.

그가 그랬던 적이 있었는지.

······ 세렝게티에게 구원할 때를 제외하면, 단언컨대 없다.

"이제 재미도 없군. 황금률의 기사단에 합류한 놈치곤 정말 별 볼 일 없어."

웨어울프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황금률의 기사단에 합류한 단원이니만큼 무언가가 다르리라고 딴에는 약간의 기대라도 했지만, 이토록 허접할 줄이야.

웨어울프가 허드슨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도 보는 눈이 없나 보구나. 네깟 낙오자를 단원으로 다 받아주다니."

"······ 상인의 신이시여."

빠드득!

허드슨은 이를 갈았다.

자신을 폄하하고 욕하는 건 괜찮다.

삿대질하고 발길질해도 참아줄 수 있다.

그러나 허드슨이 참지 못하는 게 딱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세렝게티를 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명 님을 욕보이는 건 참을 수 없다.'

······ 자신이 따르는 주군을 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딱 한 가지, 상인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제가 가진 모든 '가치'를 지불하고 맹세하겠습니다."

가치를 거는 것.

돈이 됐든, 장비가 됐든, 무엇이 됐든 간에.

상인은 '지불'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허드슨은 모든 것을 걸었다.

상인들에게는 금기된 지불 방법.

"승리의 맹세를!"

스아아아!

순간, 허드슨의 눈앞에 저울이 나타났다.

허드슨은 저울 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가지고 있던 모든 재화와 무기, 도구, 심지어 옷가지마저도.

하지만 부족하다.

아직 저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목숨이라도 걸고 싶지만, '가치의 저울'은 오직 재화의 가치만을 따진다.

그러니,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걸어야 한다.

'카지노도, 내가 가진 이권과 관련된 모든 계약서도 전부 걸겠다.'

지금 갖고 있지 않아도 걸 수 있다.

상인의 신에게 담보를 주고 승리의 맹세를 부여받는 것이니까.

슈우웅!

허공에 계약서들이 소환되어 저울 위에 올려진다.

"··· 승산이 없어서 미치기라도 한 거냐?"

웨어 울프가 당황하며 허드슨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허드슨은 맨몸이다.

진짜로 전부를 걸었다.

그러나 저울은 움직이지 않았다.

상인의 신이 이 상황을 역전할 정도의 가치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남은건 하나.

'······ 뼈 목걸이.'

허드슨이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작게 세공된 뼈 목걸이.

아무런 능력도 없으나 세렝게티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 이것이었다.

허드슨에게 있어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이나, 그렇기에 망설여진다.

한 번 저울 위에 놓으면 끝이니까.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그리고 저울이 이것을 가치있는 물건으로 평가할지.

만약 움직이지 않는다면······ 걸었던 모든 게 허사다.

'낙장불입!'

박현명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사자성어.

허드슨은 그간 틈틈이 한글을 배웠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말이 낙장불입(落張不入)이다.

이미 시작했으면, 되돌릴 수 없다.

허드슨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뼈 목걸이를 저울 위에 올렸다.

그 순간.

끼이익.

······ 마침내 저울이, 움직였다.

"저울 위에 올려진 재화가 '100,000'의 가치를 달성했습니다."

"'상인의 신'이 가치만큼의 축복을 부여합니다."

"'포오링'이 '엔젤 포오링'으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아······!"

부르르르!

허드슨이 몸을 잘게 떨었다.

동시에 포오링의 양쪽으로 작은 날개가 돋아났다.

하늘로 날아오른 '엔젤 포오링'은 순식간에 하피의 뒤를 점거했다.

그리고.

끼아아아악!

하피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뿐이다.

엔젤 포오링이 몸을 불리며, 단번에 하피를 집어삼켰다.

[허드슨(엔젤 포오링)이 승리했습니다!]

이겼다.

······ 이겼다!

[20강 마지막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바로 10강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허드슨(엔젤 포오링) VS 백왕(멸왕 모크)]

하지만 기뻐할 틈도 없었다.

하필이면 다음 상대가 백왕이라니.

떨리는 눈으로 허드슨은 등판한 백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왕은 나타난 즉시.

쿵!

자리에 앉아버렸다.

멸왕 모크도 마찬가지다.

딱히 싸울 의사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앉거라."

"······?"

"구경이나 하자꾸나. 황금률의 드루이드와 잊힌 신의 대결을."

싸움은커녕 다른 사람을 구경이나 하자니.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허드슨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 됐다.'

엔젤 포오링이 체력을 회복할 시간도 필요했으니.

백왕 정도의 존재가 거짓을 말하진 않을 터.

허드슨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박현명과 잊힌 신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흠······ 생각보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지켜보던 백왕이 턱을 쓸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허나 허드슨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저게.'

······ 압도되었으니까.

지금 보고 있는 대결은, 방금 자신이 치른 대결과는 격이 달랐다.

잊힌 신이 '원시 드래곤'의 다음으로 내민 몬스터 혼은 '원시 네크로맨서'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저주를 걸고 '데스 나이트'들을 소환해 엔젤 베헤모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수십의 데스 나이트들이 마치 몰이사냥을 하듯 엔젤 베헤모스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오호라. 저 데스 나이트들은 모두 '잊힌 기사의 영혼'인가?"

하물며 일반적인 데스 나이트도 아니었다.

강하다.

하나하나의 개체가, 미친 듯이 강했다.

잊힌 기사들의 혼을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도 별수 없나 보군. 이대로면······ 음?"

한데, 그때였다.

엔젤 베헤모스의 패배가 확정된 시점에서.

"또 진화했다?"

······ 진화한 것이다.

다이아낙스, 엔젤 베헤모스.

그리고.

"열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

"십미호!"

십미호라니.

구미호조차 전설로 치부되는 시대.

당연히 십미호의 존재는 여우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계속해서 페이즈를 올려가고 있었다.

마치 레이드 보스 몬스터처럼.

"이제야 좀 싸울 맛이 나겠군."

백왕의 두 눈이 처음과 달리 흥미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 그러나 더 이상의 진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

원시 드래곤의 자폭공격을 '엔젤 베헤모스'로 진화하며 막았다.

그 압도적인 덩치에 걸맞은 체력으로 인해 죽지 않은 것이다.

하여, '잊힌 신'은 다음 계획을 세웠다.

엔젤 베헤모스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종을 내세워 싸움을 건 것이다.

'······ 어디까지 진화하는 것이냐?'

예상대로.

잊힌 신은 '원시 네크로맨서'를 통해, 엔젤 베헤모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다.

한데, 궁지에 몰리자 다시금 녀석은 모습을 바꾸었다.

'십미호······!'

이제는 잊혀졌으나, 틀림없이 존재하였던 신령한 여우.

그 여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두 번의 연달은 진화.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아름답군."

"허억!"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모든 이들이 십미호를 바라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인지를 초월한 매혹의 능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심장이 요동쳤을 테니.

설령 '죽은 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원시 네크로맨서와 데스 나이트들이 공격을 중단했다.

'무려 여섯 아이가 합쳤거늘.'

13마리의 짐승 중 여섯이 합쳐 만들어진 개체가 원시 네크로맨서다.

거의 절반에 다다르는 숫자였고, 신성에 반대되는 '암흑력'을 타고났다.

반신격에 준하는 괴물이 '원시 네크로맨서'였다.

그런데 고작 저따위 매혹에 어쩔 줄 몰라하다니.

-정신 차리거라.

저주를 담아 말했다.

그제야 네크로맨서와 데스 나이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십미호의 꼬리에서 쏘아지는 성력은 극상성의 힘.

다시금 상황이 역전되자, '잊힌 신'은 인상을 구겼다.

반복되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다크로드. 저주 받은 왕관을 쓴 자여.

잊힌 신은 더욱 강한 저주를 걸었다.

십미호가 아닌, 자신의 원시 네크로맨서에게.

그러자.

쿠쿵! 쿠르르릉!

작은 블랙홀이 생겨났다.

데스 나이트들과 원시 네크로맨서가 그곳으로 빨려들어갔다.

쫘아아악!

이윽고, 블랙홀을 찢어발기며 거인의 해골병사가 나타났다.

저주 받은 왕관을 쓴 채로.

저것이 진짜 '원시 네크로맨서'의 본체였다.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자이며, 어떠한 매혹도 이능도 통하지 않는 전무후무의 괴물!

-이제 슬슬 끝을 보자꾸나, 가증스런 두 여신의 아이야.

잊힌 신은 자신했다.

십미호가 아무리 신령스럽다고 해도, 다크로드는 이길 수 없다.

먼 옛날 가장 강력했다 전해지는 네크로맨서.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바쳐 악신과 계약한 진짜배기 괴물 말이다.

'나의 아이야.'

그녀가 바로 계약을 해준 악신이었으니까.

다크로드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어차피 더 이상의 진화는 없을 터.

아니, 이젠 진화해도 소용없다.

다크로드가 나타난 이상 무엇이 되었든 무용할 테니.

-어디 이번에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느냐?

잊힌 신이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다크 로드가 십미호를 몰아붙였다.

십미호의 공격은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크로드가 목을 내려치기 직전.

"······ 저, 저게 뭐야?"

"미친. 또 진화한다고?"

"벌써 세 번째야!"

"이번엔··· 백룡?"

"저, 저건······ 설마 저게 다 염원구슬은 아니겠지?"

······ 설마설마 했건만, 또 진화했다.

게다가 이번엔 백색 용의 형태로.

하지만 사람들이 기겁하는 이유는 백룡이 지닌 염원구슬의 숫자에 있었다.

무려 열한 개.

-열한 개의 성천······!

하지만, '잊힌 신'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이아낙스도, 엔젤 베헤모스도, 십미호조차도.

··· 저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성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자.

그것은 아주 오래전.

··· '천상'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의 일.

'태초, 천상은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있었고, 그중 열한 개의 하늘을 지배했던 존재가 바로 저 십일성천이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십일성천은, '몬스터 혼'으로 진화할 수 없는 경로에 있었으니까.

여신의 사랑을 받아서?

아서라.

그렇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저건 아예 바깥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는.

-네놈······ 네놈은 정체가 뭐냐, 어떻게 '진리' 바깥의 존재를······!!

······ '진리'에 의해 지워진 것이었다.

프러포즈.

'몬스터 혼'을 진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환자다.

소환자의 격이, 영혼이, '몬스터 혼'과 동화하면 가장 비슷하고 본질적인 형태의 형상으로 진화하게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3층계는 '영혼의 본질'을 보는 시험의 장인 것이다.

자신과 가장 닮은 모습으로 진화시키거나, 자신도 몰랐던 모습으로 만들어 본질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리 바깥'의 존재는 이곳에 존재할 수 없다.

지워진 것.

삭제되어 영영 사라진 것을 어떻게 불러온단 말인가!

만약 그게 가능해지려거든, 소환을 시킨 주최 역시 '진리 바깥'에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말인즉슨, 지금 눈앞에 있는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그러한 존재라는 뜻인데.

'진리는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을 지우거나 덮어씌워 없앤다'

잊힌 신은 알고 있었다.

'진리'의 무서움을.

진리는 수많은 조각으로 난립했던 성천을 하나로 합쳐 '천상'을 만들었으며, 모든 '신'들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두려운 위력을 지녔다.

'진리'는 자신이 정한 규칙 바깥의 존재를 지우거나 덮어씌워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여, 지우거나 덮어씌워지면 그 전의 것은 영영 말살된다.

말살.

단어 그대로 지워진다는 의미다.

애초에 그게 뭐였는지 아무도 모르게 된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며, 모든 존재의 인지 바깥에 존재하게 되기에 '진리 바깥에 있다'고 말한다.

본래라면 그녀도 모르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녀가 '잊힌 신'이기에 그 개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잊혀진 것 또한 지워진 것과 일맥상통했으니.

'지워지지 않고, 덮이지 않았다······?'

한데, 이놈은 그렇지 않다.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진리 바깥'의 존재라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존재하며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진리의 문을 벤 자······!'

잊힌 신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베었다.

진리의 문을.

세상의 모든 규율이 담긴 절대적인 진리의 문을, 베어 없앴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는 힘을 지닌 게 아닌 이상에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벨 수 없는 것을 베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놈은 단순히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능을 지닌 자.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하지만 잊힌 신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벨 수 없었던, 감히 벨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진리의 문을, 필멸자가 베어내다니.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아아아아아!

찰나 다크 로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곤 다크 로드의 뼈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크 로드가 잊힌 신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

잊힌 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으나, 다크 로드의 눈이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을 읽었지만.

이미 그녀의 역량을 벗어난 일이다.

열한 개의 성천.

그 이름대로 열한 개의 '염원구슬'이 빛나며, 잊힌 신인 그녀가 유보한 다크 로드의 죽음을 앞당긴 탓이다.

'십일성천이 지워진 이유를 알겠구나.'

시간을 다뤘으니까.

진리로선 가만히 놔둘 수 없었겠지.

지워지고 사라진 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개념을 다루는 존재들뿐이다.

비록 그 힘이 크지 않아도 그저 '지니고 있다면'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반드시 지우거나, 혹은 아예 덮어씌워 다른 존재로 만들버린다.

다시는 관련된 힘을 사용할 수 없게끔.

"'황금률의 드루이드(십일성천)'가 승리했습니다!"

놈이 승리했고, 그녀는 패배했다.

하지만 패배의 쓰라림보다도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게 있었다.

십일성천을 만들어낸 저 황금률의 드루이드 말이다.

'······ 너는 어떤 절대적인 개념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게냐?'

십일성천과 같은 시간의 힘일까?

아니면 아예 다른 개념일는지.

무엇이 되었든, 진리를 위협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잊힌 신은 비로소 인정했다.

저 존재야말로.

-내 낭군님이 되려무나, 그대여.

······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그녀가 기다리고 기다려온,

이곳에 존재하는 그 어떤 영혼보다도 더욱 탐나는 영혼이라는 걸.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보다도 말이다.

가증스러운 두 여신 따위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 만큼.

뺏고 싶다.

갖고 싶다.

잊힌 신의 눈이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낭군님?'

······ 정말 난데없는 프러포즈였다.

자신의 남편, 혹은 연인이 되라는 말.

여태껏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눈빛도 달라졌다.

부담이 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 간악하고 가증스러운 여신들은 그대를 이용할 생각뿐이다. 하지만 나는 달라. 내 전부를 바쳐 그대를 지고지순의 반열에 올려놓으마.

호칭도 '아이'에서 '그대'로 바뀌었다.

느닷없는 변화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아무래도 진리의 바깥에 있는 십일성천의 존재가 잊힌 신의 태도를 변화시킨 모양이었다.

지고지순의 반열.

최고위의 신으로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 답했다.

"거절한다."

전부를 걸고 대결하는 와중이다.

투쟁할 대상이지, 반쪽을 찾는 여정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처음 만났던 '잊힌 신' 때도 느꼈지만, 잊힌 신들은 하나같이 어그러져 있었다.

사도의 제안이 아닌 건 의외지만, 잘못 선택했다가 그대로 코가 꿰일 수도 있는 노릇.

-······ 여신들 때문이냐? 허나, 잘 생각하거라. 그 간악한 년들은 배신을 일삼아 그대를 끝내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 정도면 자격지심의 수준을 넘어섰다.

하지만 내가 알고, 빌헬름이 아는 '두 여신'은 결코 배신을 일삼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을 희생하면 희생했지.

처음에는 여신을 증오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악신이다.'

저 잊힌 신의 정체가 확실해진 지금, 더 이상 궁금해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잊혀졌으나, 잊혀지기 전 저 존재는 악신이었을 게 분명하다.

상대를 저주하고 제물로 바쳐 어둠의 힘을 강화하는 존재는 악신뿐이었으므로.

게다가 내가 아는 악신들은 가장 어그러진 존재들이었다.

잠시의 미혹에 속아 그 힘에 손을 댄다면, 더 깊은 심연으로 빠질 뿐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거절한다."

하여, 거절했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이 정도로 철벽을 쳤으면 내 의사는 확실하게 알아들었을 터.

-마지막으로 물······.

"거절한다."

-세 번이나······!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으으으.

짙은 검은색 연기가 '잊힌 신'에게서 마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잊힌 신의 두 눈은 완전히 새까맣게 변했고, 등 뒤에선 두 장의 거대한 검은색 날개가 솟아올랐다.

머리 위로는 '검고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검은 태양에 핏빛처럼 붉은 점들이 마구 떠 있는 모습.

흑화했다.

······ 한데, 저 태양의 형태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

'앙그라 마이뉴?'

4대 악신 중 하나, '앙그라 마이뉴'의 상징이 바로 저 검고 붉은 태양이었으니.

혹, 앙그라 마이뉴와 무슨 관계가 있던 악신인 걸까?

곧이어 완전하게 변해버린 잊힌 신이 나를 향해 말했다.

-··· 나를 거절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한기가 흘러나오는 음성.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울하며 어둡다.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저게 바로 '잊힌 신'의 진정한 모습이리라.

그으으으으으-!

고오오오오오오-.

또한, 변한 것은 잊힌 신만이 아니었다.

곧이어 '잊힌 신'이 지닌 괴수들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13마리의 '혼'이 마침내 하나가 되며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지고의 혼.

가장 강력한 형태로.

"뭐, 뭐야 저 모습은?"

"괴수가······ 아니잖아?"

보고 있던 이들 모두가 기겁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완성된 모습이, 너무나도 예상 외였으니까.

도리어 익숙했다.

누구나 알고,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형상.

그 모습은 분명······.

[지고의 혼, 시초의 인간]

······ 인간이었으니.

*

"'백왕(멸왕 모크)'가 승리했습니다!"

허드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과 진배없었다.

압도적인 차이로,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해 패배했다.

하지만 생각보다의 상실감은 없었다.

'가능성을 봤으니까.'

자신의 전부를 쏟아넣었다.

그리하여 결과를 내었고, 가능성을 보았다.

몬스터 혼이 '엔젤링'으로 진화하며 허드슨 역시 진화한 것이다.

"소질이 있군."

그때였다.

반대편에 서 있던 백왕이, 불현 듯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순간 의아했으나 곧이어 허드슨은 자신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백왕이 다시금 말했다.

"너는 재능이 있다, 인간."

"제게 무슨 재능이······?"

"너는 너 자신보다 누군가를 키우는 게 체질이다. '엔젤링'은 우리 백호족도 극소수만 진화시키는데 성공한 '진화의 상징'이니."

"······."

허드슨이 다시금 자신이 지닌 '몬스터 혼'을 바라보았다.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엔젤링은 단순한 몬스터와 거리가 멀다.

겉보기엔 날개달린 슬라임에 불과하나, 저것은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백호족도 인정하는 진화의 상징!

"그것은 너의 역량에 따라 '엄청난 괴물'이 될 수있다. 잘 키워보도록."

"··· 멸왕 모크보다 말입니까?"

"뭐?"

허드슨의 대답에 백왕이 순간 당황하여 되물었다.

하지만 허드슨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방금전 겪은 저 멸왕 모크의 힘은 경천동지라는 말이 실로 어울렸다.

이곳에서 대결을 펼치는 그 어떤 몬스터 혼보다도 파격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잊힌 신도, 박현명이 진화시킨 존재들보다도 더욱 인상이 깊었다.

만약 그보다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하하! 가능성은 있다. 엔젤링은 우리도 잘 모르니. 백호족도 닿지 못한 영역이 틀림없이 있을 테지."

백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크게 웃었다.

엔젤링은 진화의 상징이지만, 그것을 만드는데 성공한 백호족이 거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엔젤링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백왕에게 인정받자 허드슨의 두 눈에 광명이 깃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왕은 저 멀리있는 황금률의 드루이드와 잊힌 신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모든 괴수가 합쳐지며 만들어진 형상.

그 형상이 만들어지자마자 절로 오한이 들었으므로.

'시초의 인간이라······.'

얼마나 강한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저 불길할 따름이다.

저토록 불길한 인간은 이전에도 본 적이 없었다.

확실한 건, 근질근질하다는 것.

마음 같아선 그가 직접 싸워 보고 싶을 정도였다.

뿐만인가.

이곳에서의 대결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처음에는 싸울 만한 놈이 안 보였는데, 상대들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도, 잊힌 신도.

그리고 또 한 명.

예상을 웃도는 의외인 자가 있었다.

'앤드류.'

자신과 함께 태초의 숲에서 엘프들을 도왔던 인간.

비록 타락했으나, 앤드류의 힘은 백왕에게도 꽤 인상적이었다.

한데, 그 이상으로 특이한 개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머지않아 눈앞으로 안내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5강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남은 한 명은 '데빌 언더 나이트(90등급, hp 5,000,000)'와 대결을 치르게 됩니다.]

[대진표는 아래와 같습니다.]

[잊힌 신(시초의 인간) vs 앤드류(어둠의 심장)]

[황금률의 드루이드(십일성천) vs 백왕(멸왕 모크)]

[파뷸라(광신의 사냥개) vs 데빌 언더 나이트]

'드디어!'

백왕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고대하던 녀석과의 대결이 마침내 성사되었으니!

녀석을 꺾고, 잊힌 신마저 꺾어, 백왕 자신이 정점에 설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최강임을 증명하리라.

네놈, 오주력이냐?

-너는 왕의 피를 이었단다.

-백호족의 왕이 되어 북부를 이끌 거라!

······ 지금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

모질게 자신을 매질하던 그들의 한(恨)이.

'왜 갑자기······.'

백왕은 한차례 고개를 저었다.

느닷없이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돌아보지 마라.

-도망치지 마라.

-꿋꿋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게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백왕이 지금보다 한참 어렸던 시절.

이제 막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가.

······ 지금이야 북부에서 백왕을 거역하는 이는 없으나, 그때만 하더라도 백왕은 잡아먹기 좋은 사냥감에 불과했으므로.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진 탓에 도망치기 급급했으며, 겁이 많아 언제나 숨을 자리부터 확인하던 그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부터 자신의 피해와 관련해선 미래시라 불릴 정도로 감이 좋았다.

승리와 패배를 싸우기 전부터 이미 안다.

하여, 오직 승리하는 자리에만 나섰다.

굳이 패배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됐다.

무적, 무패의 제왕.

그렇게 북부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며 크람델을 다스렸건만.

'내게 유일하게 패배를 안겨준 건 빌헬름뿐이었지.'

처음이었다.

그토록 짙은 냄새를 풍기는 놈은.

먼발치에서 놈을 봤을 때, 백왕은 그 즉시 알았다.

절대로 놈과 정면으로 싸워선 안 된다고.

하지만 정면대결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잡히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문제는 빌헬름이 사주력을 포함한 크람델 전역을 볼모로 붙잡은 것이다.

백왕은 그때 처음으로, 패배가 확정된 자리에 섰다.

그는 북부의 왕.

다스리는 자들 없이 왕으로서 군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고 패배했다.

'그 패배는 내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허나 쓰라린 아픔도 잠시.

결과적으로 백왕은 그 덕에 성장할 수 있었다.

백호족의 진정한 능력을 일깨웠다.

마치 운명처럼.

왕으로서의 선택을 하자 왕의 능력을 각성한 것이다.

'빌헬름. 놈과는 다시 붙어보고 싶군.'

만약 다시 빌헬름을 만난다면 다시 한번 붙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는 피하지 않을 각오가, 자신이 생겼으니.

"황금률의 드루이드. 너에겐 묘한 냄새가 난다."

킁킁.

한차례 냄새를 맡은 백왕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는 승리의 냄새를 맡았다.

강렬한 승리의 감각.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묘한 냄새가, 하나 있었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지?"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의문을 표했다.

물론 일반적인 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 깊게 있는 존재 자체의 냄새에 관한 것이다.

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익숙한 냄새다. 오주력······ 그 까마귀의 냄새가 왜 너에게서 나는 걸까?"

처음부터 그랬다.

명예의 세계수가 있는 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까마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른 자들은 맡을 수 없는.

오직 각성한 백왕만이 맡을 수 있는 녀석의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댔다.

그리고 그 냄새를 지니고 있는 게 황금률의 드루이드라는 걸 알아봤을 땐 순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까마귀가 아니니까.

그 칠흑의 까마귀가 풍겨대던 악취와 한없이 어두운 마력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도리어 반대다.

신성하고 또 신성한 자.

그런데도 왜, 황금률의 드루이드에게서 오주력의 냄새가 나는가?

마음 같아선 대놓고 묻고 싶었다.

네놈, 오주력이냐고.

"······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야··· 오주력 그 까마귀가 감히 황금률의 드루이드로 변할 수 있겠나.

오주력의 그 불길함은 직접 겪어봐서 안다.

그러니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사기이고, 기만이며, 드루이드의 신비성에 금이 가는 행위다.

모든 신성족들이 등을 돌리리라.

별 수호자들도, 엘프들도, 어쩌면 같은 드루이드마저도.

'불길함의 상징과도 같은 놈이 황금률의 드루이드일 리가 없으나······.'

정상적인 사고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오주력, 그 까마귀의 '비정상적'인 작태에 있었다.

'오주력은 평범함을 거부하는, 상식을 깨트리는, 뿌리와 잎사귀가 바뀌어있는 것만 같은 위반 그 자체의 존재였으니.'

오주력. 놈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처음 신비의 탑에서 등장했을 때부터 그랬다.

절대로 깨지 못할 기록을 깨고, 개념을 파괴했다.

뿐만인가.

이후로도 놈이 행한 것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게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어금니'를 되찾아주었으나, 도무지 상식 밖에 있었기에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혼'을 부딪혀보면 확실해지겠지."

몬스터 혼.

그 혼은 소환자의 영혼에 빗대어 진화토록 설계된 매개체다.

그런고로, '혼'의 대결을 펼친다는 건 서로의 영혼을 부딪힌다는 말과 같다.

부딪히다 보면 땀이 나듯 영혼의 냄새도 더욱 강렬해질 것이고, 보다 확실하게 정체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물론.

'나의 영혼이 최강임을 증명하마.'

······ 그가 진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는 북부를 다스리는 군주.

신들도 두려워해야 할 절대자였기에.

*

나는 백왕의 말을 듣고 내심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오주력의 냄새를 맡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악성향'은 란돌프에게로 넘어갔다.

지금 내겐 찬란한 빛의 성향뿐이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백왕은 정확히 '오주력'을 짚어서 말했다.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진짜로 냄새가 날 리 만무하다.

'내 존재를 읽었다?'

아무도 읽지 못한, 양면으로 나뉜 존재의 일면을 읽어냈다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백왕이 지닌 능력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미래시라 불릴 정도로 감이 좋았으니까.

'······ 감. 느끼는 거다. 본능적으로.'

그래.

결국 '감(感)'이다.

떠본 것에 불과하다.

내가 당황하지만 않는다면 걸리지도 않을 터.

'이전보다 더 감이 좋아졌나 보군.'

의외였다.

백왕 역시 성장한 모양이다.

어금니를 되찾아 힘을 회복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듯싶었다.

나는 다시 백왕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진짜 왕의 권좌에 오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 상당히, 기세가 달라졌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십일성천) VS 백왕(멸왕 모크)]

하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5강의 대결이 시작된 탓이다.

"어디 한 번 놀아보자꾸나."

자신감 넘치는 백왕.

그 태도만큼이나 멸왕 모크의 기세도 일기당천이었다.

꽈릉!

대결이 시작된 즉시 발을 박차고 십일성천에게 뛰어든 멸왕 모크.

엄청난 속도다.

가아아악-!

순식간에 십일성천의 목을 조여왔다.

손이 거대하게 늘어나더니 훨씬 커다란 용의 목을 부러트릴 듯이 비틀어댔다.

휘이익!

그 순간 염원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륵?

멸왕 모크의 행동이 다시 역재생되기 시작했다.

목을 풀고, 뛰어들기 전의 자리로 되돌아간 것이다.

'신체의 시간을 움직이는 힘.'

십일성천은 시간을 다룬다.

세계의 시간이 아닌, 생체의 시간을.

앞으로 감거나, 뒤로 되돌릴 수 있다.

그롸아아아악!

멸왕 모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몸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몸이 굽으며,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침범불가."

채챙!

마치 균열이 가듯 모든 게 깨지면서.

동시에 멸왕 모크의 신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백왕이 시동어를 걸자 벌어진 일이다.

"멸왕 모크에게 이능은 통하지 않는다."

이능이라 칭해지는 능력들.

무언가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기타 모든 능력이 멸왕 모크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크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모든 능력을 취소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멸왕 모크'가 '이능 침범불가(40Lv)'의 속성을 지닙니다."

저 또한 '불가'의 영역이다.

심지어 내 숙련도 레벨을 넘어섰다.

아직은 무신의 심검으로도 베어낼 수 없다는 뜻.

아무래도 녀석은 단 한 가지에만 특화된 개체인 듯싶었다.

바로 육탄전.

다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었다.

'눈 하나가 감겼다.'

멸왕 모크의 신체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눈들.

그중 하나가 '침범불가'를 말하자 감겼다.

저 '눈'들이 이능을 억제하는 권능을 지닌 것이다.

즉, 저 눈을 모두 감게 하면 '이능 침범불가'도 해제된다는 의미.

'시간의 감속과 가속도 결국 이능의 결이니.'

이제야 왜 멸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알겠다.

어째서 백왕이 자신하는지도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꽝! 꽝!

꽈아아아앙!

······ 이능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눈을 감게 하여 결계를 해제해야 하나, 모크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거대하게 늘어나는 양손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십일성천을 타격했다.

단순 육탄전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남은 수는 하나.

"더 진화할 구석이 남아있던 거냐?"

백왕이 웃었다.

모크의 움직임도 멎었다.

진화하는 걸 기다려주겠다는 듯.

그는 강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십이천자'의 형태로 변신합니다.]

꼬리에 저장된 마지막 형태.

신령하며 거대한.

"······ 까마귀?"

흰 까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이천자를 본 백왕은 인상을 찌푸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오주력······ 은 아닌데."

까마귀는 까마귀다.

게다가 오주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성하다.

머리 위에서 이글대는 작은 태양과 붉게 빛나는 꼬리들은 아름답기까지했다.

저걸 과연 까마귀라고 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완성된 형태를 보곤.

"그럼, 다시 놀아보자꾸나."

백왕이 재차 웃어 보였다.

*

-······.

'잊힌 신'은 가만히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눈여겨보았다.

십이천자.

저 신령한 까마귀 역시 진리 바깥의 존재였으니.

한때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짐승이다.

생명을 주고, 잇는, 신화 속의 주인이었다.

그 힘이 너무나도 강해 진리 바깥으로 추방되어 지워진 것.

'처음부터 십이천자의 기능이었구나!'

잊힌 신은 보자마자 깨달았다.

다이아낙스도, 엔젤 베헤모스도, 십미호도, 열 한 개의 성천도.

결국 모두 십이천자가 연결하여 변형한 형태였던 것이라는 사실을.

진화가 아닌, 변신이다.

그렇다면 저 모습이 완전한 끝이라는 뜻인데.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저게 끝이라면 이길 수 없다.

십이천자는 결국 자신이 변신한 형태의 힘을 증가시키는 데 특화된 개체.

허나 멸왕 모크는 진정으로 강하다.

시간을 다루고, 생명을 잇는 능력은 없으나, 그 모든 걸 넘어설 만큼 강력했다.

생각보다 더, 상상 이상으로.

'저것은 종의 최종형태라 봐야 할 테지.'

종의 시초가 잊힌 신이 만들어낸 인간의 형태라면.

저것은 '종의 최종 진화 형태'라 봐도 무방했다.

설마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으나, 아마도 그것은 소환자의 역량 때문일 것이다.

백왕.

저놈은······.

'백호제(白虎帝)의 피를 이었다.'

다스리는 모든 것을 진화시키는 백호족의 제왕.

한때 가장 찬란했던 문명의 세계에서조차 넘볼 수 없는 두각을 나타내었던 자.

그 피를 이은 듯싶었다.

까아아악!

십이천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멸왕 모크의 타격을 용케 버텨내고 있으나, 그 또한 시간문제.

잊힌 신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받아들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을.'

모든 것을 주려 했건만.

여신을 버리고, 자신을 맞이한다면, 이곳에서의 승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악신들 중에서도 최강의 반열에 올랐을 터인데.

-······ ?

그 순간이었다.

십이천자가 끝이라 생각했건만.

-저건······?

잊힌 신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십이천자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것'을 본 잊힌 신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회색의 왕.

세계수.

세계를 지탱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나무.

모든 세계의 생명은 세계수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렇기에 최초의 세계수는 세상의 어머니라 불리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시초의 세계수'는 너무나도 강력한 생명의 힘을 품고 있는 탓에 오랜 시간을 살지 못한다.

다른 세계수의 씨앗을 뿌린 뒤 말라 죽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큰 문제는 '시초의 세계수'가 잉태한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다.

시초의 세계수가 가진 힘이 너무나도 강력해 감히 그 어떤 생명체도 쉽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위를 얻은 신들조차 엄두도 못 냈으니.

'시초의 세계수에 다가가는 게 허락된 유일한 짐승이 있다고 했다.'

······ 하지만 단 한 마리.

세계수의 위에 자리를 잡은 새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잊혀졌으나.

세계수의 던전에서 함께 잊힌 그녀이기에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이름 없는 수리이며, 창공의 제왕이니라.'

이름이 없다.

아무도 그 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대한 수리는 시초의 세계수에서 씨앗을 옮겨, 수많은 세계수를 탄생시켰다.

창공을 누비는 그 거대한 수리를 막아서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잊히고, 사라졌지만.

'······ 그 새는 분명 드루이드의 기원일 테지.'

자연을 만드는 종족, 드루이드.

이름 없는 수리의 역할은 그대로 드루이드에게 전해졌다.

드루이드 역시 '이름 없는 수리'가 만들어낸 종족 중 하나일 터이니.

그래, 이름 없는 수리가 잊히고 지워진 이유는 바로 저것이다.

진리의 눈 밖에 나서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종의 창조!'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것.

이름 없는 수리는 '기원자'였으므로.

단순히 세계수의 씨앗만을 옮긴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종을 만들고, 그들의 기원자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창조된 종들은 이름 없는 수리를 모른다.

'진리'에 의해 그들의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졌기 때문이다.

-어······ 떻게······.

잊힌 신의 눈이 불신으로 가득 찼다.

분명 저것은 가장 신령한 짐승이다.

감히 빗댈 수 있는 짐승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우월한 존재다.

그러나.

'몬스터 혼'으로 빚어낼 수 있는 형태에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진리 바깥'에 있는 존재를 다시금 불러올 수 있다 한들, '이름 없는 수리'는 그 한계영역마저 넘어서 있었다.

-어떻게 '올드 원'을······!

······ 올드 원.

그것은 초고대문명에서 '짐승의 신'을 뜻하는 언어다.

태초의 짐승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력했으며, 수많은 종이 난립하여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았다.

그중에서도 초월적인 힘을 지녀 '신격'을 가진 극소수의 짐승이 있었고, 그들을 일컬어 짐승들은 '올드 원'이라고 칭하며 떠받들었다.

그리고 저것은 틀림없이 '올드 원'이라 불리었던 수리다.

감히 혼으로는 빚어낼 수 없는 지고의 형태라는 의미.

한데, 놈은 빚어냈다.

자신을 거절한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이름 없는 수리'를 불러내고 더 나아가.

-······먹어치웠단 말이냐.

······ 또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먹어치운 것이다.

무언가가.

더없이 불길하고 더없이 멸망적인······.

저주를 흩뿌리는 악신인 그녀조차 전율이 이는 존재에 의해!

분명히 '이름 없는 수리'였을 그것은, 새하얗고 찬란하게 빛나야만 하는 수리는 회색의 깃털을 가진 또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잊힌 신'은 눈을 떼지 못한 채 '그것'을 계속해서 바라만 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의 정체가, '잊힌 신'이 상상하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색의 왕, 이름 없는 포식자]

······ 짐승의 왕이라.

하지만 저것은 단순한 '왕'이 아니다.

태초, 수많은 종의 짐승이 난립하고 신격을 지니기도 하였으나, 그중 '왕'이라 불린 존재는 단연코 없었다.

그럴진대.

'태초 짐승의 왕······.'

저것은 감히 '태초 짐승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

하물며 녀석이 사용하는 힘은 그마저도 뛰어넘었다.

*

진화하고, 진화하고, 또 진화한다.

끝없이 무한하게 진화하고 있다.

이제는 기가 질려버릴 정도였다.

끝이라 생각하면 또 다음이, 이제는 끝났겠지 여기면 또 다음이 나타났다.

그러나 상관없다.

종의 끝에 이르른 멸왕 모크를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회색의 왕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르륵. 그르르륵.

멸왕 모크가 묘한 소리를 내며 경계하는 자세를 취한다.

동시에 백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냄새가······.'

냄새가, 짙어졌다.

허나 패배의 냄새는 아니다.

알 수 없는, 묘하기 그지없는, 처음 맡아보는 종류의 향.

'뭐지?'

죽음의 향이라면 진즉에 알았을 것이다.

한데, 그보다도 더욱 음울하고 쾌쾌했다.

게다가.

"오주력······."

놈의 냄새 또한 더욱 짙어졌다.

본인이 아니라면 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무엇보다도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진화시킨 존재치고는 너무 어둡지않나.

저것이 드루이드가 지닌 영혼의 진짜 색이라는 의미다.

회색의 왕.

'이름 없는 포식자.'

일순간, 의문이 들었다.

진정으로 저게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지닌 정체성이라면.

회색의 왕이며, 동시에 포식자라면.

"네놈······."

백왕의 표정이 한없이 굳었다.

비록 가정일 뿐이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불쾌했으니.

"오주력을······ 먹은거냐?"

··· 도저히 그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오주력을 먹어치운 게 아닌 이상에야 지금의 냄새는 도무지 설명이 불가한 것이다.

"······."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면 됐다.

저 반응.

뭐라 대답할 수 없는 분위기.

그거면 충분하다.

백왕은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오주력이 불길하며 상하개념이 없는 미친 까마귀라고 해도.

'그럼에도 오주력이다. 나의 주력이니라.'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오주력은 그가 직접 임명한, 다섯 가신 중 하나인 게다.

오주력 역시 별 수호자들이 아닌 자신을 택하지 않았던가.

딸인 아리아와 깊은 관계를 지녔으며, 어금니를 되찾아줬으니,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였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그런 오주력을 먹어치웠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황금률의 드루이드에 대한 호의와, 예의는,

"죽여라, 모크."

없다.

그오오오오-!

멸왕 모크가 전신을 부풀렸다.

'갈기갈기 찢어버려주마.'

*

"차원이··· 다르군."

"······ 역시 황금률의 드루이드님이시다."

지켜보던 단원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숨막힐 듯 진행되는 전투.

자신들과 비교해도 너무 차이가 컸으니까.

드루이드 알비노가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영혼······이라 칭하지만, 이는 곧 욕망과도 같지."

몬스터 혼은 소환자의 영혼을 투영한다.

하지만, 영혼이란 무엇일까.

영혼의 격과 크기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알비노는 '욕망'이라 정의했다.

결국, 영혼과 욕망은 큰 결에서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얼마나 큰 욕망을 지니느냐가 그 영혼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강해질수록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벽을 넘고 한계를 초월해 극에 이르려거든 욕망해야하는 법이며, 또한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커지는 게 욕망이고 영혼이다.

"그럼 저 수리의 형태가 현이 지닌 욕망이라는 건가?"

라이가가 물었다.

영혼과 욕망이 일치한다면, 저 형태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단순히 회색의 왕이어서가 아니다.

전투가 시작된 직후.

저 회색의 포식자는 연기로 변해 멸왕 모크의 눈을 흐렸다.

연기는 곧이어 12개의 분신체가 되었으며, 모든 분신체의 중심에 쟂빛의 태양이 떠올랐다.

쟂빛의 태양은 점차 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모크의 육체에 새겨진 눈들이 빠르게 감겨갔다.

아니, 단순히 감기기만 하는 게 아니다.

'··· 지워지고 있다.'

눈이 사라진다.

마치 포식을 하듯.

잡아먹히고 있는 것이다.

라이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현이 지닌 영혼의 정체성이라면, 결국 모든걸 포식하는 자라는 의미.

실로 탐욕적이며 욕망적이지 않은가.

너무나도 압도적인 크기였다.

그롸아아아악-!

멸왕 모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연기에 스쳐 지나갈 따름이다.

열 두 개의 분신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놈들이 연기 속에서 부리를 쫄 때마다 모크의 살점은 처참하게 뜯겨나갔다.

그때였다.

"······ 뜻대로 놔두진 않을 것이다."

쉬익-!

꽈아아아아앙!

두 혼의 대결 와중, 백왕이 난입했다.

그는 난입한 즉시 정확히 '이름 없는 포식자'의 본체를 타격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각과 본능으로, 무엇이 실체이고 가짜인지 백왕은 구분해낼 수 있었으니.

허나.

그의 행위는 분명히 규칙을 위반한 것이었다.

['백왕'의 실격패입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다.

실격이든, 패배이든.

'감히.'

쩌적-

순간, 백왕의 전신이 푸불어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벗어던졌다.

힘을 억제한 상태가 아닌 '본체'로.

빌헬름과의 대결 이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형태로 말이다.

심지어 그때보다도 더 커졌다.

덩치도, 힘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오랜세월 북부의 지배자로 군림해온 백호족의 진정한 모습.

흑왕을 상대할 때나 보일 줄 알았으나, 그만큼 저 회색의 왕은 위협적인 존재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감히-.'

감히 자신의 주력을 먹어치운 놈이다.

······ 그런 존재를 살려둘 수는 없지 않나.

*

잊힌 신은 멸왕 모크가 당하는 과정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리의 힘마저 흉내냈다······?

저건 단순한 포식이 아니다.

먹어치우는 걸 넘어선 권한.

먹고, 지워버리는 힘이었다.

성공했다면 그대로 혼은 사라졌을 것이다.

다시는 멸왕 모크가 세상에 나올 일은 없었겠지.

틀림없는 진리의 힘이다.

하지만 어떻게 '진리'의 힘을 흉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진리로부터 한 번 승리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진리는 분명히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지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리의 방해로부터 살아남았다.

어떻게 해낸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겨냈고, 심지어 진리의 힘마저 은연중 영혼에 새겨버린 것이었다.

그게 저 포식자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리라.

'··· 너라는 존재는 정말 어이가 없구나.'

허.

대체 무엇을 만들어낸 것이냐는 물음이 깊숙이 차올랐다.

멸왕 모크는 저것을 당해낼 수 없다.

백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호제······.

백호제라면 어떨까.

멸왕 모크를 만들어낸 것도, 멸왕 모크를 죽인 것도 모두 백호제였다.

오랜 역사상 백호족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 군림했던 자.

백호족들 중 누구도 백호제의 업적에 다가선 이가 없었다.

그런데 본체를 드러낸 백왕은 그녀가 기억하는 백호제와 다르지 않았다.

잊힌 신은 더욱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백왕과 회색의 왕, 그리고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궁금했으니까.

백호제의 피를 각성한 백왕은 과연 저 권능으로부터 빗겨나갈 수 있을지.

비록 흉내에 지나지 않다고 하나 진리의 힘마저도 다룰 수 있게 된 황금률의 드루이드 중 누가 더 강할지가 말이다.

게다가 백왕은 더 이상 승패 따윈 상관이 없는 듯싶었다.

백왕의 목적은 단 하나.

-······!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최대한 빨리 끝내지.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콜로세움 전체가 흔들리는 폭음.

"···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네놈."

먼지가 걷히며 나타난 건 백왕과 알비노, 그리고 라이가였다.

순식간에 백왕의 공격을 인지하고 막아선 것이다.

"······."

하지만 백왕은 답하지 않았다.

거대한 백호의 모습으로 변신한 뒤 성난 짐승처럼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녀석의 눈빛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변했군.'

솔직히 놀랐다.

내가 알던 백왕이 아니었으니까.

언제나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백왕이다.

백왕은 이기지 못할 싸움에 절대 나서지 않는다.

제아무리 본체로 변신했다 한들 알비노와 라이가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 터.

짙은 패배의 냄새를 맡았을진대, 그런데도 거침없이 공격해온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서 나를 공격한 이유가 뭘까.

'오주력. 시체 까마귀의 왕.'

답은 하나다.

오주력.

란돌프가 변한 불길한 까마귀의 형태.

박현명과 란돌프로 모습과 성향이 나뉘었지만, 영혼까지 반으로 쪼개지진 않았다.

내 영혼은 나 하나뿐이다.

하여 백왕은 나의 영혼에서 까마귀의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백왕은 내가 오주력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그러한 향을 풍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확실했고.

한 마디로.

'오해다.'

··· 놈은 오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직접 오주력을 언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신성한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사실 불길한 시체 까마귀의 왕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을 구태여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순히 오해라고, 모른다고 해도 어차피 믿지 않을 기세.

백왕의 고집을 여기서 나보다 잘 아는 자는 없으리라.

이럴 땐 말을 아끼는 게 상책이다.

다만.

'잠깐. 설마 오주력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건가?'

······ 아무리 생각해도 백왕과는 딱히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매일 싸우면 싸웠지.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할 사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

그래서다.

백왕이 오주력의 죽음에 반응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고서.

이곳에서 알비노와 라이가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리스크를 안고서 말이다.

그어어어어어어!

백왕이 울부짖었다.

그 순간.

쩌억! 쩌어억!

백왕의 육체에 재차 변화가 생겼다.

멸왕 모크의 '눈들'이 백왕의 육신 위에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곤.

쉬익!

"······!"

"······!"

찰나와 같았다.

백왕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빠르다.'

그 속도는 여태껏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빨랐다.

빌헬름으로도 녀석이 도망치는 걸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빨라진 것 같다.

백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알비노와 라이가를 재친 뒤.

구오오오오오오!

··· 내 앞에 당도했다.

앞발에 동그랗게 모인 마력.

검환이다.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이고 삭제하는 검환의 묘리가 적용된 빛의 구였다.

만약 눈앞에서 터트릴 수만 있다면 신조차 죽이는 힘.

한 번의 주먹질에 모든 마력을 담은 백호신권(白虎神拳)이다.

곧이어 마주친 백왕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죽어라.

······ 진정으로 미친놈이 따로 없다.

백왕은 이 공격 한 번에 모든 걸 쏟았다.

뒤를 아예 생각하지 않는 총공격.

동귀어진이다. 함께 죽자는 거다.

"아, 안 돼······!"

-······!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듯했다.

하지만 이내 비명은 삭제됐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백왕의 마력이 바로 내 코앞에서 터졌기 때문이다.

*

굉음이 터진 즉시.

"······!"

라이가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구오오오오오-

마력이 한 차례 터지며, 이내 백왕을 중심으로 거대한 블랙홀이 나타난 탓이다.

그것은 반경 수 미터를 집어삼키고 닿는 모든걸 소멸시켰다.

밖에 있는 것도 이러할진대, 저 안쪽은 어떨지 안 봐도 뻔하다.

"화,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알비노는 사색이 됐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검은 구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치직! 치지지직!

타는 소리와 함께 닿은 알비노의 손이 사라졌다.

이에 알비노가 재빨리 손을 빼내자, 사라졌던 손이 다시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쩌어억!

검은 구의 위로 거대한 눈알 하나가 떠올랐다.

멸왕 모크의 눈과도 닮은 그것이.

동시에 라이가의 표정은 더욱 굳어버리고 말았다.

"소울 이터······."

"소울 이터?"

"영혼을 먹는 심연의 괴물이다. 멸왕 모크는 그 종으로부터 진화한 개체였나보군."

알비노의 되물음에 라이가가 답했다.

하지만 소울 이터는 심연의 깊숙한 곳에 사는 종이다.

숫자도 적고, 상대하는 건 더욱이 까다로우며, 심연의 괴물들조차 기피하는 '비홀더' 형태의 괴물.

그것을 계속해서 진화시킨 게 바로 멸왕 모크인 것 같았다.

문제는 멸왕 모크와 백왕이 합쳐졌다는 것.

그로 인해 저 '검은 구' 자체가 백왕이 되었다.

라이가는 백왕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먹어치울 생각이다. 똑같이.'

오주력을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먹어치웠다고 생각한 백왕은, 똑같이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먹어치울 생각이다.

스릉.

라이가가 검을 들었다.

놈은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모두 먹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허나, '검은 구'는 파괴불가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닿는 순간 영혼을 빼앗아가리라.

그나마 알비노의 영혼이 커서 휩쓸리지 않았을뿐.

-포기하거라.

라이가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잊힌 신'이 말했다.

-'저것'에 물리력은 닿지 않는다. 백호제보다 더욱 큰 영혼만이 영향을 줄 수 있지.

그리고 이곳에 백왕보다 큰 영혼의 그릇을 지닌 자는 없다.

애초에 백호제의 피를 강하게 이었다면, 영혼의 크기 자체를 따라올 이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수많은 종을 진화시키고 만들어온 백호제.

진화의 욕망만큼이나 큰 힘을 주는 건 존재치 않았으므로.

허나, 예외적인 경우라면 바로 황금률의 드루이드다.

'진리로부터 승리한 자. 완벽한 규칙 바깥의 존재이니.'

과연 백왕은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온전하게 소화할 수 있을까?

소화하지 못한다면, 역으로 잡아먹힐 것이다.

'진화의 구 안에서 무엇이 만들어질지 실로 흥미롭구나.'

그리고 저 '진화의 구'에 의해, 진화하리라.

백왕이 이기든,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이기든 간에, 승리하여 나온 자는 다른 형태가 되어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때였다.

슈웅-!

한 줄기의 빛이, 진화의 구를 꿰뚫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라는 듯.

슈슈슈슈슝!

수많은 빛줄기가 구를 뚫고 나왔다.

'끝났나보군.'

생각보다 빠르지만, 결판이 났다는 의미.

진화의 구에서 무엇이 만들어졌을지.

하지만 한참을 지켜보던 '잊힌 신'은 이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쫘아악!

구를 찢어발기며 나타난 자.

허나 '잊힌 신'의 예상과는 다르다.

나타난 건 둘.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변신이 풀린 '백왕'을 둘러멘 채 나왔다.

영혼을 잠식하고, 먹어치운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달라졌다.

무언가가.

'저 투구는······?'

우선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본 적 없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독수리가 새겨진 황금 투구를.

게다가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마치 '이름 없는 수리'처럼 외관이 변했다.

인간형태의 이름 없는 수리가 된 것 같다고 해야할까.

그 순간.

"우아······?"

-······!

잊힌 신은 움찔했다.

······ 반응했으니까.

시초의 인간이.

그녀의 아이가.

정확히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바라보고 있다.

-······.

잊힌 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도 그럴게.

아무런 감정도, 반응도 없어야할 영혼 없는 인형이, 어찌 제스스로 입을 열고 움직인단 말인가?

*

결과적으로.

백왕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 영혼을 먹어치우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녀석이 '멸왕 모크'의 힘을 빌렸듯, 나 역시도 '이름 없는 수리'의 힘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시 '이름 없는 수리'가 투구로 변화하자 백왕의 힘은 나를 침범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는 내게 잡아먹히고 지워질 운명이었으나.

나는 백왕의 영혼에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오해해서 비롯된 일.

오주력인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몸을 던진 놈이었다.

다만, 그렇다한들 바라는 게 없진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진화의 힘.'

그가 가진 권능이다.

곧이어 나는 백왕의 영혼에 새겨진 '뿌리'를 읽을 수 있었다.

마치 DNA의 줄기처럼 오랜세월 두각되어 나타난 능력.

백호족의 권능과 백호제의 기록, 그 이름마저도 알아냈다.

그러자.

"'태초의 짐승들'에 관한 생명 정보를 획득합니다."

"히든 특성 '비스트 로드'가 '비스트 갓'으로 진화했습니다!"

*

결판이 났다.

나는 기절한 백왕을 바닥에 눕힌 채 다가오는 알비노를 만류했다.

"괜찮다. 놔두어라."

"허, 허나······!"

드루이드 알비노는 화가 끝까지 치밀었다.

예상하지 못한 속도였다고는 하나, 눈앞에서 백왕을 놓쳤으니까.

게다가 이대로 다시 눈을 뜨면 또 같은 짓을 반복할 놈이다.

"다시 공격하지 않을 거다."

······ 그런 알비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백왕과 한차례 영혼을 부딪혔다.

백왕 스스로도 느낀 게 있을 것이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으리라.

녀석이 의외로 오주력을 기껍게 여긴다는 것도 알았으니.

내가 연이어 괜찮다고 말하자, 알비노가 의외라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용서할 줄은 몰랐다는 듯.

"너희들도 보고만 있지 말고 데려가거라. 너희들의 단장 아닌가?"

"··· 고맙소."

그제야 쭈뼛대며 폭군 그리즐리가 다가와 백왕을 데려갔다.

나를 바라보는 괴수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경외, 고마움 따위가 뒤섞여있었다.

진짜 '신'을 대하듯.

아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나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명예로운 대결을 하도록."

"······ 그러겠소. 그렇게 전하리다."

백왕이 깨어나면 전하겠다는 말.

백왕의 돌발행동이 명예롭지 않았음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른 괴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결승전이 5분 뒤에 시작됩니다.]

나는 떠오르는 문구를 가만히 직시했다.

백왕은 실격했고, 앤드류도 결구 잊힌 신을 상대로 패배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옆으로 다가와 몸을 잘게 떨고 있는 앤드류가 있었다.

"조, 조심하십시오. 저 여자는······ 규격외입니다. 그 정도로 두려운 존재입니다."

어둠의 심장은 처참하게 박살났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앤드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신의 사도로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앤드류가 말이다.

툭.

나는 그의 등을 한 차례 토닥인 뒤, 대결장으로 나섰다.

-······.

여태껏 주절대던 잊힌 신은 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지."

잊힌 신에게 이 이상의 패는 없다.

시초의 인간, 감정 없는 인형의 여자.

물론 패가 없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투구를 한 차례 매만지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나는 '이름 없는 수리'와 동기화한 상태.

비스트 갓으로 히든 특성이 진화하자, 이름 없는 수리와 일체화 하여 아예 녀석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었다.

곧이어.

[경기가 시작됩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이름 없는 수리) VS 잊힌 신(시초의 여인, 릴리스)]

······ 릴리스라.

어두운 기운을 무한정으로 뽑아내는 여인.

척 보기에도 불길하다.

그 불길함의 정도가 상상이상이라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한데.

-릴리스, 뭐하는 짓이냐······? 내 명령에 따르거라!

잊힌 신이 당황한 음성을 내뱉었다.

'음?'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웅···?"

릴리스가 적의 없는 태도로 불쑥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곤.

"아우우!"

······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잊힌 신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짜증 섞인, 혐오스럽다는 얼굴.

여태껏 이 정도로 잊힌 신이 감정을 표현한 건 처음이었다.

'인형 따위가 내 말을 무시해?'

릴리스.

최초의 여인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라 불리는 존재.

그러나 릴리스에게는 영혼이 없다.

당연히 감정도 없고, 표현도 하지 못한다.

입을 열고 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잊힌 신이 거두었으나, 단 한 번도 릴리스가 누군가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것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꼭두각시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건만.

"아우우-!"

마치 어린아이가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것만 같았다.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며 묘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것.

저 행위는.

'구애다.'

······ 구애(求愛)의 표시다.

애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혼이 없는 릴리스는 마찬가지로 사랑도 할 수 없다.

한데 지금, 릴리스는 스스로 움직이며 구애를 하고 있었다.

잊힌 신의 명령도 듣지 않고서.

'······ 어떻게?'

불쾌하기 그지없으나 그 이상으로 의문이 들었다.

릴리스에게 영혼이 생긴 걸까?

'그럴 리가.'

잊힌 신은 고개를 저었다.

릴리스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텅 빈 그릇을 악이 채웠을 따름이다.

그러니 릴리스가 보이는 행동은 전혀 다른 결이라고 해야 할 테다.

말하자면.

'감정을··· 흉내 내고 있다.'

··· 흉내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왜?

잊힌 신의 지배력을 약화해가면서까지 릴리스는 황금률의 드루이드에게 집착하는가?

만악의 근원, 시초의 여인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럽다.

뭐에 반응한 건지 모르겠다.

다만 상대의 환심을 사고자 감정을 흉내 내고 있다면, 그 정도로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탐이 났다는 의미일 터.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변했다. 더욱이 신성하게. 태초 짐승의 형태로서.'

태초의 짐승과 인간이 융합했다.

도저히 그렇게 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름 없는 포식자가 인간의 형태로 변한 것만 같았다.

허나······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태초의 짐승은 절대로 누군가의 손에 길들지 않아. 동화하며 융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초의 짐승들.

그 거대하고 우악스럽던 짐승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다.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으며 끊임없이 진화해갔다.

물론 끝을 모르는 탐욕 때문에 결국 자멸하긴 하였으나, 그중에서도 '올드원'이라 불린 짐승들은 신조차 오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정 분야에 있어선 가히 압도적이며 초월적이지만.

문제는 태초의 짐승들 전부가 반목했다는 점이다.

너무나도 파괴적이고, 본능적인 탓에, 전부 사라져 잊혔다.

'만약 태초의 짐승이 계속해서 존재했다면 찬란한 문명 따윈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야.'

찬란한 모든 문명은 기초부터 밟혔으리라.

꽃을 피기도 전에 졌을 것이다.

그런 태초의 짐승을, '올드원'을 길들인다고?

아서라.

태초의 짐승에게 주인이라는 개념따윈 없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보이고, 호감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각인된 파괴본능은 몬스터 혼으로 진화시켰다한들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증폭되고 강화되면 모를까.

하지만······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완벽하게 길들여냈다.

태초의 짐승과 융화하는 이변까지 선보였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건.

'태초짐승의 신.'

······ 태초의 짐승들을 설계한 주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원시 시대의 신이다.

신은 죽지 않고 불멸한다고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뀔수록 신은 잊히며, 사라진다.

원시 시대의 신들 중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신은 없었다.

그러니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원시의 신일 리 만무했다.

'거짓이다. 그럴싸한 모습으로 유혹하고 있을 뿐이야. 모두 저놈에게 속은 거다.'

꽈아악!

잊힌 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우아! 아우우!"

······ 도저히 저 작태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형이, 릴리스가 고작 저따위 남자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했으므로.

-그만두어라.

멈춰라.

"아우우-!"

-놈은 가짜다. 너를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웅!"

-······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잊힌 신이 몸을 부들부들떨었다.

전혀 말을 들어먹질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구나.

스스슥!

순간 잊힌 신의 몸이 증발했다.

그리곤.

"아······!"

릴리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으으으!"

눈을 감고, 몸을 떨며 저항해봤지만 소용없다.

곧이어 모든 떨림이 멈추자 릴리스가 눈을 떴다.

하지만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까맣게 물든 동공.

머리 위에 솟은, 상처처럼 붉은 점이 곳곳에 나있는 검은색 태양.

툭!

릴리스의 몸을 차지한 잊힌 신이 손을 꺾었다.

그리곤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전과는 다른, 음습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아이야."

처음에는 여신들에게서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두 여신이 놈을 수호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모두 저놈에게 속은 것이다.

여자를 미혹하는 권능이라도 지닌 게 분명했다.

두 여신을, 자신을, 그리고 릴리스마저도 유혹해내다니!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겠다.

'경험해본적 없을 어둠에 질식시켜주마.'

······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

어둠이 몰려온다.

콜로세움을 전부 채우고도 남을 막대하며 막강한 어둠이.

하나, 둘 어둠 속에 잠식되어 사라져간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시여······!"

"이건······."

알비노와 라이가도 피해갈 수 없었다.

모두가 경험해본 적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의'속에 묻혔다.

"멈춰! 안돼!"

"아아악!"

모두가 어두운 유리 안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했다.

비명을 내지르고, 자신의 몸을 마구 쥐어뜯어대며,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다.

두 눈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스스로를 인지조차 할 수 없다.

그나마 나는 침범당하지 않았으나.

"'근원의 악의'가 흩뿌려집니다."

"'이름 없는 수리'에 의해 신성 효과가 강해집니다."

"'태초의 신성' 효과가 추가됩니다."

어둠이, 악의가, 끊임없이 내 주변을 돌며 틈을 찾는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내어준다면 그 즉시 침범하려 들 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네놈은 버틴다고 해도 다른 자들은 어떠할까?"

잊힌 신이 비웃었다.

명예로운 대결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잊힌 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추하군."

너무 추했으니까.

이 정도로 추한 신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처음 세계수의 던전에 입장하고 만난 잊힌 신이 양반이라 느껴질 정도다.

불쾌하긴 했으나 적어도 공정하긴 했다.

하지만 눈앞의 잊힌 신은 다르다.

"그만둬!"

"내 잘못이 아니라고!"

"죽일 거야. 죽일 거야······!"

꾸물! 꾸물!

어둠이 움직인다.

어둠에 잠식된 이들이 머지않아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았다.

···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다.

악신의 힘을 고스란히 사용하는 릴리스의 어둠은 너무나도 짙었다.

진짜 신성을 지닌 자가 아니면 버틸 수 없을만큼.

'이게 악신의 힘이로군.'

이 정도로 저열할 줄이야.

이윽고 하나, 둘, 나를 노려보던 자들이.

"죽어-!"

"으아아아아아!"

······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황금률의 기사단 전원이.

백왕의 기사단 전부가.

*

백왕은 자신했다.

아무리 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영혼의 그릇만큼은 자신이 더 크리라고.

그래서 '진화의 구'를 만들어 놈의 영혼을 포식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백왕의 생각은 틀렸다.

놈의 영혼이 생각보다 방대했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방대한 걸 넘어섰다.

그 결을 읽은 순간 백왕은 정신을 놓았다.

'내가······ 무엇을······.'

놈의 영혼에는 두 가지 결이 있었다.

하나는 황금률의 드루이드와 갖가지 신성적인 것들.

하지만 문제는 다른 한 가지 '결'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상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절대로 함께할 수 없고, 함께해서도 안 되는 이질적인 것.

그러나 영혼의 결이란 결코 나뉘지 않는 법이다.

생명체가 욕망을 분리할 수 없듯이.

모두 하나로 공존하기 마련이었다.

그럴진대.

'잡아 먹힌다······!'

본 순간, 알았다.

저것은 자신이 잡아먹을 수 없는 종류라는 걸.

건드렸다간 역으로 자신이 잡아먹힐 것이라는 사실을.

하여 건들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음에도 기절한 것이다.

-떨어져라. 최대한 멀리.

-저것은 진화의 선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아서도 안 된다. 느껴서도 안 된다. 등을 돌리고 도망쳐라.

-잊어라. 지워라. 너는 아무것도 본 적이 없다.

백호제의 피가, 백호족의 염원들마저도 저 영혼을 거부하고 있다.

절대로 등을 보이지 말라던 그들의 목소리가.

백호족의 왕이라면 무릇 싸워야한다던 그들이.

도망치라고, 잊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제야, 정신을 놓기전 백왕은 '불쾌한 냄새'가 어디서 난 건지 알았다.

바로 저 어두운 '결'이다.

저것은 닿으면 지운다. 모든걸 먹어버린다.

죽음도, 패배도 아닌 소멸.

그래서 그토록 불쾌했던 것이다.

한데, 그 뒤로도 백왕은 계속해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어둠에 잠식되고, 악의에 물들었다.

"오오, 빌헬름이여."

자신의 앞에 놓인 상대가 왜인지 빌헬름으로 보인다.

백왕은 기꺼이 다시 싸우고자 하였다.

그런데 상대의 모습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오주력? 살아있던 것이냐!"

기뻤다.

죽은 줄 알았건만, 잡아먹힌 줄 알았건만.

다시 돌아와라.

크람델로. 자신의 품으로.

아리아를 선물로주마.

아리아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자식들도 있다.

북부를 가질 자격을 부여하마.

그런데······ 그 순간.

놈은 또 바뀌었다.

백왕은 처음으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넌············ 누구냐?"

*

"포기하고 어둠을 받아들이려무나."

잊힌 신이 여유롭게 말했다.

어느덧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탓이다.

그리고 잊힌 신의 말마따나,

··· 나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진화는 없다.

현재의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이들을 전부 상대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이름 없는 수리'와 융화했다고 한들 알비노와 라이가, 백왕을 전부 상대하려거든 턱없이 부족하다.

'버티면······.'

허나, 희망은 있다.

강력한 존재일수록 어둠에서 깨어나는 시간 또한 빠를 터.

실제로 알비노와 라이가, 백왕 전부 조금씩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그보다 나의 죽음이 더 빠르리라는 사실이다.

'명예로운 대결을 하라.'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이것이, 명예로운 대결인가?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나타난 규율에는 그리 적혀있었다.

오로지 명예로운 대결을 하라고.

허나······ 그 '명예'를 왜 나만 지켜야하는가.

게다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잊힌 신이 악명을, 악업을 싫어한다고?'

저 악신이?

되려 좋아 죽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명예와, 잊힌 신이 생각하는 명예가 다른 모양이군.'

다를지도 모른다.

애초에 명예라는 건 모두 다른 법이었다.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지기 마련이었고.

저들의 입장에선 '이기는 것'만이 명예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여, 나는.

"네가 이겼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지."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자 잊힌 신은 빙글 웃어보였다.

"늦었다, 아이야. 얌전히 죽으려무나."

··· 역시.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패배를 인정한다고, 상대는 멈출 생각이 없다.

저게 과연 명예인가?

처음부터 불공평한 싸움이다.

상대가 저렇게 나오는데 내가 예의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저 잊힌 신에게 명예를 보일 마지막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여태껏 규칙을 지켜가며 대결에 임했다.

몬스터 혼을 진화시키고, 수를 숨겨 마지막까지 임하려고 했다.

최선을 다하여 최대한 공정한 싸움을 구축해나갔다.

그것이 신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하기야 내가 언제부터 규칙을 지켰다고.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잊힌 신이여."

[흉의 장갑에 새겨진 '란돌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또 다른 멸망, 그 진정한 의미.

'··· 결국, 필멸자인 것을.'

'잊힌 신'은 여유를 되찾았다.

릴리스가 지닌, 절대로 항거할 수 없는 근원의 힘.

거기에 자신의 저주가 더해지자 판도가 뒤바뀌었다.

당연한 일이다.

여신의 사랑으로도 바꿀 수 없는 필멸의 운명을 지닌 자.

결국 멸할 존재가 릴리스와 악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예상 외의 신성을 지녔다만······ 그래봤자 모두를 구원하는 건 불가능하단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 외이긴 했다.

본래 필멸자라면 근원적인 어둠의 힘을 버틸 수 없다.

잠식되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인형이 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힘에 조종되고 있지 않은가.

북부의 지배자도, 전설의 드루이드도, 제국의 최강자도 마찬가지다.

필멸하는 운명을 지닌 자들은 모두 '근원' 앞에 무력하다.

한데, 황금률의 드루이드만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수리, 그리고 수많은 신성의 자격으로 말미암아 버텨낸 것이리라.

근원의 어둠을 버틸 수 있는 힘은 오직 신성뿐이니까.

하지만 역부족이다.

강력한 신성도 황금률의 드루이드 본인만을 구할 뿐이다.

그조차도 이곳에 모인 모두를 구원할 수준의 신성을 보유하진 못했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었다.

"포기하고 어둠을 받아들이려무나."

'잊힌 신'이 미소를 지었다.

비록 몇 차례나 그녀를 당황시킨 황금률의 드루이드지만, 힘에 부쳐 밀리고 있는 게 훤히 보였으므로.

진리 바깥의 존재를 불러오는 기행은 꽤 훌륭했다.

허나.

"'신'인 척하는 연기는 꽤 훌륭했다. 하지만 너는 신이 아니란다. 아이야."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녀석은 불멸하는 신이 아닌 필멸하는 인간이다.

그저 신의 신성을 보유할 '자격'만을 지녔을 따름이다.

하지만 자격을 지녔다고 해서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의 조각을 가진 거지 신 자체가 된 게 아니었으니까.

······ 하.

우습다.

실로 우스웠다.

여태껏 긴장하며 놈을 대한 게.

놈의 연기에 완전히 속아넘어간 것이다.

상당한 신성의 보유자이긴 하지만, 자신과 릴리스를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고작 이 정도로 진리의 시험을 이겨냈다고?'

말도 안 된다.

진리의 시련은 태초부터 검증된 '불가능'한 시험이다.

절대로 달성할 수 없는, 그리하여 수많은 신들도 좌절케 한.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이기에 세계의 법칙은 '진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직접 겪어봐서 안다.

그러니,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진리의 시련을 이겨내고 진리 바깥의 존재를 불러온 것도 어쩌면.

'진리의 힘이 약해졌다는 증거다.'

어쩌면 '진리' 자체가 약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희망이 보였다.

'이 대결에서 승리하거든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잊힌 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

잊었다.

틀림없이 한때 강력한 악신이었을 터이나, '진리'에 의해 지워졌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또한 이곳, 세계수의 던전에 존재하는 수많은 '잊힌 신'들 중에서도 그녀의 위치는 입지적이지만, 그녀조차도 이름을 되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하나.

세계수의 뿌리에 닿는 것.

하지만 '잊힌 신'들이 세계수의 뿌리에 닿으려거든 몇 가지 제약이 있었다.

우선 '도전자'들을 상대로 승리해 '잊힌 기사의 영혼'을 최소 100개는 획득해야한다.

다른 '잊힌 신'의 상징물도 필수다.

그래야만 '진리'의 눈을 피해 이름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진리'의 힘이 약해졌다면······.

'잊히고, 빼앗긴 전부를 되찾을 수 있다!'

세계수의 뿌리에 닿아봤자 찾을 수 있는 건 이름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각성하는 게 전부다.

하지만 '진리'가 빼앗아간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를 따르던 모든 자들을,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던 모든 것들을 파멸로 몰아갔다.

뿐만인가.

자신의 힘을 상징하던 전부가 사라졌다.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되찾는 방법도 간단했다.

바로 진리의 시험을 당당히 마주하는 것.

세계수의 뿌리에 닿아, '진리'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순간 '진리'가 그녀를 바라볼 터이니.

그때였다.

"네가 이겼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지."

수세에 몰린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말했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줄이야.

하기야 연기가 들통났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늦었다, 아이야. 얌전히 죽으려무나."

처음 잊힌 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차라리 자신의 반쪽이 되었다면 진정으로 영원불멸할 수 있었을 텐데.

놈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대결'이 속행됩니다.]

[규칙이 바뀝니다.]

['존재의 말살'만이 승리와 패배를 결정합니다.]

잊힌 신은 마음대로 규정을 바꾸었다.

이는 진리가 정해놓은 규율을 벗어난 행위.

'진리'가 눈을 돌려 그녀를 쳐다볼 수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리의 힘이 약해졌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바라는 건 말살.

저 가짜를 영원토록 없애버리는 것.

그리하여 전부를 빼앗고, 전부를 갖겠다.

특히 가증스러운 두 여신들은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내 자리다. 그곳은 본래 나의 자리였어야만 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여신들에 대한 깊은 후회와 원망이 남았다.

아마도 이름을 되찾으면 이유도 기억나겠지.

확실한 건 잊힌 신은 여신의 자리가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저 아이를,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빼앗음으로써 두 여신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려 했지만······.

'전부를 되찾은 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두 여신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면 그만이었으니.

진리로부터 전부를 되찾아올 수만 충분히 있다면 가능할 터였다.

악신이 어떻게 여신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 방법이 눈앞에 있지 않나.

두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

강렬한 신성으로 말미암아 신으로의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자!

저 존재를 죽여 인형으로서 가질 수만 있다면, 그녀가 여신이 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므로.

'죽어라. 죽어서 나의 인형이 되려무나.'

변수는 없다.

도망갈 곳도 없었다.

확정된 승리에 '잊힌 신'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그 순간이었다.

"······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잊힌 신이여."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진짜 어둠?

잊힌 신과 릴리스의 어둠은 진짜 어둠이 아니라는 말인가?

'헛소리를 하는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게다가 오롯이 신성한 자가 '진짜 어둠'을 어찌 알겠나.

하지만 '잊힌 신'은 짓던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또 진화한다고······?'

갑자기 모습이 또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기가 찰 노릇이지만, 또 진화라도 하는 듯싶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발악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잊힌 신은 곧 깨달았다.

푸스스스스-

신성이 사라져간다.

균열이 가고,

그 틈으로 '어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변한 것은 모습만이 아니다.

성향 자체가 뒤바뀌었다.

빛은 순식간에 어둠이 되었다.

찰나와 같이 순간 잠식되고 사라져 아예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어둠이 차지했다.

아니, 아니다.

저것은 그저 빛의 자리를 차지한 어둠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것은 방금 전 신성했던 모습이 빛바랠 만큼, 여태껏 펼쳐낸 신령한 신위가 무색할 정도로 거대하기 짝이 없는 어둠이었다.

하여, '잊힌 신'은 멈췄다.

모든 존재가 멈춰섰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그 현상은 이곳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쿠르르릉!

['???'가 출현했습니다.]

[모든 '잊힌 신'이 출현한 존재를 감지합니다.]

[모든 층계의 시련이 중단됩니다.]

[세계수의 뿌리가 흔들립니다.]

['???'의 존재력이 세계수의 던전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흔들린다.

세계수 전체가.

잊힌 신의 두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너, 너는······."

보자마자 알았으니까.

저 '존재'가 무엇인지.

동시에 깨달았다.

"진리의 시험을 이겨낸 건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아니라······."

바로 저 존재다.

저 어둠이다.

진리의 시험을 돌파한 것은, 바로 저 '멸망'이었다.

부르르르!

'잊힌 신'은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진리'를 겪어보았다.

그렇기에 멸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진리가 휘두르는 힘 중에는 '멸망'의 힘도 있었으므로.

'도망쳐야한다.'

잊힌 신은 두려웠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죽고싶지 않아······!'

······ 죽고싶지 않다니.

마치 필멸자들이나 할만한 이야기 아닌가.

언젠가 끝이 정해진 인간과 같은 생명체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신이다.

신으로 태어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대체 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든 걸까.

두려워서?

저 존재야말로 진리의 시험을 이겨낸 자니까?

단지 '멸망'의 힘을 느껴서는 아닐 것이다.

'완전 다른 것이다. 저것은, 저것은 또 다른 멸망일지니!'

······ 애초에 달랐다.

멸망은 신의 이름을 지우고 바깥으로 퇴출시킬 수 있지만, 신을 온전하게 소멸시킬 순 없다.

그러나 저것은 '또 다른' 멸망이었다.

멸망으로 불리우나 결코 멸망과 같은 게 아닌.

'아아!'

알겠다.

저게 뭔지.

어찌하여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너는······!"

잊힌 신은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놈의 어둠이 어느덧 자신을 휘어감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다.

악신의 어둠을 넘어서는 어둠이라니.

그런 게 있을 수가 있나?

하지만 저것은 더욱이 근원적이고, 진정으로 끝에 있는 것이었다.

멸망이되 멸망이 아닌 것.

신을 소멸시키는 어둠.

저런 존재를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그리고 만약,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다면.

"너는, 종말이로구나······!!!"

······ 그건 오로지 '종말'뿐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