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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4)

흰 셔츠와 옅은 베이지 색 바지.

금사로 테두리를 그려낸, 종아리를 덮을 만큼 긴 길이의 붉은 재킷. 그리고 금색 태슬과 자수로 장식된 하얀 망토.

왕자의 정복이나 티 타임 때 입었던 수수한 의상과는 확연히 다른 화려한 예복의 칼리안이 들어서자 일순간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또 루비 펜던트.'

화려한 의복에 시선을 돌렸던 이들의 눈에 이전에 착용했던 루비 펜던트가 다시 보였다.

'같은 것을 했어. 역시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는 소리인데.'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칼리안.

그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엄청난 의미를 가진 것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반응들을 보건대, 과연 이것이 르메인을 위한 연회인지 칼리안을 위한 르메인의 연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곧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 뚜벅, 뚜벅.

작은 구두 소리가 연회장을 울린다.

입구에 서 있던 지그프리드 공작부터 얼마 전 함께 석찬을 나눈 브리센 자작, 오늘 티 타임 때 만난 귀족들을 거쳐 연회장 가장 안쪽에 위치한 왕족의 자리에 도착하기까지. 가능한 많은 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보였다. 엄숙한 표정을 한 얀이 그런 칼리안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 걸어갔다.

르메인이나 다른 왕자들이 도착하기 전이었으니 아직 연회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던 탓이다.

이유 없이 사람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모습에, 다시 한 번 속삭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고작 열 넷이라는데. 앞으로를 기대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는군."

"맞아요. 저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물론 이런 반응을 보이는 대다수의 귀족들과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칼리안이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한 공작 슬레이만의 청회색 눈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 꼬맹이 기세 한번 훌륭하다! 비리비리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칼 근처도 못 가봤을 상인데 사방으로 서슬을 뿜어대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기사로군.'

그런 슬레이만의 시선을 먼저 느낀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얀이었다. 얀이 잠시동안 슬레이만을 쳐다보다 그 얼굴에 확연히 새겨진 표정을 읽고는 칼리안에게 전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왕자님께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슬레이만이 왜 관심을 보이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라 했으니.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것 만으로 다른 의심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칼리안이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아직은 일러. 우선은 모르는 척 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같은 생각을 한 얀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짐작한 것, 바로 좌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신나게 뿜어대던 기세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칼리안에게서 눈을 돌렸고 그들 중 몇몇이 다시 슬레이만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되니 슬레이만 역시 칼리안에게 보내던 관심을 일단 접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 두 왕자들이, 그리고 조금 뒤 국왕 부부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며 입장했다.

르메인의 감사 인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자 칼리안은 정확히 30분간 자리를 지킨 뒤 정원에 나가는 척 빠져나왔다. 칼리안을 함께 따라나온 얀이 레이븐의 고삐를 쥐고 다가왔다.

같이 걸어가겠다 했으나 하얗게 바래지는 얼굴을 걱정한 얀 때문에, 칼리안은 결국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얌전히 칼리안을 태우는 레이븐을 보며 얀이 말했다.

"신기하네요. 왕자님 앞에서는 순한 양인 것이."

칼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레이븐의 갈기를 헝클어뜨렸다.

"레이븐. 얼마나 착한데."

"속지 마세요. 왕자님 안 계실 때는······ 어우."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왕궁의 정문이 잘 보이면서도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간 칼리안이 눈을 부릅뜨고 정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옆에 선 얀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원하던 것을 얻은 뒤 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칼리안이 얻고자 하는 것.

바로 앨런 마나실이었다.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눈에 확 띄는 하얀 망토 탓에 그 주변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있었음에도 지나가는 왕궁 수비대원들이 칼리안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얀은 연회에 함께 참석하느라 평소 입던 시종의 제복이 아닌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덕에 어둠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잠시 후회했다.

'까만 것을 오늘 입을걸.'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칼리안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여기서 뭐하시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란츠 때문이었다. 성질머리가 하도 나빠서 그런 것을 물었다가는 난리를 쳐 댔다.

'란델은 그런 것을 물어보기엔 너무 무섭게 생겼고.'

그러므로 저 정문을 나가려고 하거나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에 침입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또 다른 수비대원이었다. 아마 이 근방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듯 했다. 그렇게 총 여섯 번의 인사를 받고 난 뒤,

- 다각, 다각.

멀리서부터 왕궁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말 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세우며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본 얀도 덩달아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누굴 기다리셨던 거군요."

칼리안이 작게 '그래' 라고 대답한 뒤 검지 손가락을 펼쳐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얀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 발굽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문 쪽에 서 있던 네 명의 왕궁 수비대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둘은 정문을 막고 둘은 다가오는 말을 세웠다. 수비대원의 뒷모습과 말의 머리는 보였으나 방문객의 모습은 정문의 두꺼운 기둥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정문으로 바로 가볼까 하던 칼리안은 우선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앨런이 아니라면 수비대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비대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잠시 말에서 내려주시겠습니까."

기사 특유의 높낮이 없는, 그렇지만 정중한 목소리였다.

조금 뒤에 '탁' 하고 바닥에 발이 닿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수비대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제라 하여 왔네만."

드디어 방문객의 목소리가 울렸다.

칼리안이 알기로 앨런 마나실의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젊게 느껴졌다.

앨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하던 찰나.

"나는 앨런 마나실이라 하네. 마법사일세."

맞다.

칼리안이 어깨를 움찔하며 긴장했다.

- 다각.

놀랍게도 레이븐이 한 발을 내딛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칼리안의 의도를 이해한 것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히 산책하다 상황을 보고 다가온 것처럼.'

근처에서 기다리다 갑자기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앨런은 7서클의 마법사였고 인근에 누가 움직이는지 정도는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소리는 들리지만 가능한 먼 곳에서부터 빙 둘러 정문을 향해 가고자 했다.

- 다각.

레이븐은 칼리안의 생각을 눈치채고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녀석이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칼리안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구분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레이븐, 똑똑하네."

칭찬을 알아들은 레이븐이 목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정문 쪽에서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한 눈치였다.

초대장을 찾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 몰라도 한동안 소리가 없었다. 그러다 난처해하는 듯한 앨런의 말이 들렸다.

"이를 어쩌나. 초대장을 잃어버린 것 같네."

칼리안이 알고 있는 내용과 같았다.

앨런은 초대장을 내어 놓지 않았다. 수비대원이 살짝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내 이름도 말하였고. 한번 다른 곳에 확인이라도 해 주면 안되겠나? 아주 멀리서 왔다네."

수비대원에게는 참석자 명단이 있고 사람들에게는 신분 증명서가 있다. 그러니 초대장이 없어도 명확한 신분이 확인된다면 왕궁에 들어올 수 있다. 사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라면 애초에 초대장조차 필요치 않을 인물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다가가던 칼리안이 낭패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수비대원이 앨런의 차림새를 슬쩍 훑어봤다.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초대장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 외양으로 격을 가르는구나."

허름한 차림.

거기에 더해 초대장을 손에 들지 않은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앨런은 뭘 확인하려 했던 것인지 몰라도 굳이 꼬투리 잡을 일을 만들어냈다. 카이리스에 오지 않을 이유를 찾고 싶던 것처럼, 핑계거리 만들듯이 억지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넘어가 상대방의 차림새만 보고 사람 가린 대원도 완전히 잘한 것은 아니었으나 앨런이라 해서 목소리 높일 일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나라에 발 들이기 싫어하는 저 앨런을 잡아야 했다.

"그래. 내, 돌아가지."

말에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레이븐의 것이 아닌 다른 발굽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정문까지 조금 더 가야 했는데 생각보다 앨런의 포기가 너무 빨랐다.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다잡으며 말했다.

"얀. 무슨 수를 쓰든 수비대원들 막고 있어."

얀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네?"

"못 쫓아오게 해줘."

"왕자님, 설마······ 나가시려는 것은 아니죠?"

칼리안이 대답 없이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얀 망토를 두르고 흑마를 탄 채 달려오는 소년이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아본 수비대원들이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

"왕자님, 말을 멈추어 주십시오! 지금은 외출이 불가합니다!"

알아!

레이븐의 배를 박찰 필요도 없었다. 레이븐은 알아서 속도를 높였고 수비대원들의 사이를 유연하게 피해 가며 왕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비대원들이 황망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 훈련을 시켜둔 것인지, 두 필의 말이 그들의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들을 향해 뛰어가는 얀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수든 쓰라 했지만 칼리안은 지금의 일에 대해 책임 질 힘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간신히 좋은 인상을 만들어놨는데 남은 기간 동안 근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모두 허사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책임져 줄 수 있을 행동을 해야 했다.

곧 얀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한번 쥐었다 폈다. 그 뒤 시종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단정히 묶고 있던 블론즈 색 곱슬머리를 푼 뒤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시종의 제복을 입지 않아 다행이었다.

"멈춰라."

얀이 눈에 힘을 주며 수비대원들을 불러세웠다.

수비대원들의 눈이 일제히 얀을 향했다.

그리고 얀의 청회색 눈도 수비대원들을 향했다.

같은 색의 눈을 가지고 무도회를 즐기고 있을 이를 잠깐 생각한 얀이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장남 시로이안 지그프리드다."

지그프리드!

곧바로 수비대원들이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올려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카이리스 병사들의 인사법이었다.

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말했다.

"지그프리드 공작께서 칼리안 왕자님의 외출을 보증하셨다."

칼리안 때문에 잊고 살던 이름을 칼리안 때문에 꺼내든 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광장 쪽을 쳐다봤다.

새하얀 망토가 펄럭이는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5)

연회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지그프리드 관으로 급히 달려온 시종이 시종장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시종장이 안색을 굳히며 서둘러 르메인의 뒤로 다가왔다.

"전하."

르메인이 살짝 뒤를 쳐다봤다.

주변에 듣는 이가 많았던 탓에 손으로 입을 가린 시종장이 최대한 작은 소리로 말을 전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조금 전 왕궁 밖으로 나갔다 합니다."

르메인의 고개가 시종장을 향해 조금 더 기울어졌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종장의 말이 이어졌다.

"헌데 그것이, 지그프리드 공작이 보증을 하였다 합니다."

지그프리드 공작과 칼리안이 무슨 관계일지를 생각해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잠시 말 없이 있던 르메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알겠다."

그 뿐. 르메인은 별다른 지시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조치 없이 그대로 두라는 뜻을 알아들은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지그프리드라.'

르메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 * *

한편 그 시간.

정원에 나와있던 공작 슬레이만의 입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결국은 그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으하핫! 푸으어하하하!"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가도 폭소가 터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슬레이만이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다 입이 또 벌어졌다. 말 대신 웃음이 다시 쏟아졌다.

지그프리드의 남자들은 웃음이든 울음이든 한 번 터지면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푸······ 하. 으큽큽큽!"

"지금 웃을 일이 아니라고요!"

결국 그 앞에 서 있던 이가 두 손을 들어 슬레이만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들을까 걱정된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한 사람, 바로 얀이었다.

"내 아들이 나를 믿고 일을 벌였다는데, 내 기분이 좋지 않겠느냐?"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춘 슬레이만이 고불거리는 머리를 여전히 풀어둔 얀에게 말했다.

얀의 얼굴에 속이 터질 것 같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러자 슬레이만이 뭐가 걱정이냐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아마 이 모습을 칼리안이 봤다면 아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둘이 부자 사이임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둘 다 똑같이 얼굴에 모든 것이 나타났으니까.

"네 꼬맹이가 도망가면서 수비대가 쫓아오지 못하게 해달라 했고, 네가 지그프리드를 팔아 먹었더니 수비대원이 안 쫓아갔다. 그럼 된 것 아니냐?"

아들이 사고를 쳤는데 도리어 좋아하던 슬레이만이 얀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알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주 잘 했다. 좋은 해결책이었다."

"해결은 이제부터 해야죠. 전하께서 왕자님과 아버지가 어떻게 아는지 물어 보실 게 아닙니까?"

"한 수 앞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벌일 만큼 급했느냐?"

슬레이만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재미가 있어 짓는 웃음이 아니라 아직 모두 자라지 않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걱정 마라. 안 물어본다."

"네?"

"물어보기엔 르메인은 생각이 너무 많다. 그러니 못 물어본다. 징계는 고사하고 아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갈거다. 알겠느냐?"

그 말에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겨있던 얀이 물었다.

"지그프리드라서?"

슬레이만이 정답이라는 듯 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머리 하나는 날 안닮아서 다행이다. 네 나이 때 나보다는 네가 낫다!"

"뭔들 닮았을까봐요."

슬레이만은 자신의 아들이 아직까지도 '우리 왕자님은 기마술도 글로 배우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몰랐다. 때문에 얀의 말에 '맞아, 맞아.' 하고 중얼거리다 뭔가 생각난 듯 유쾌하게 웃었다.

"아니지. 그래도 네가 바이올린 하나는 잘 켜니까. 그것은 확실히 날 닮았다!"

검은 못 쓰지만 바이올린은 켤 줄 아는 지그프리드. 그것이 바로 얀이었다.

그러니 조금 전 왕궁에 막 도착한 슬레이만을 봤을 때 얀이 질색한 표정을 지은 것은 아들을 팔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화끈하게 팔아 먹은 내가 그래도 이름 값이 좀 나간다."

얀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무게를 내려놓고 왕궁으로 왔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르메인이 네 꼬맹이에게 나랑 무슨 관계냐 물으면 그 뒤에 돌아올 대답이 있을 텐데, 대답을 듣고 나서 르메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아무 관계가 없지만 우연한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을 하게 되면 지그프리드의 선의를 경계한 꼴이 된다.

관계가 있어 도움을 받았다는 대답을 해도 마찬가지.

그 대답을 듣고 왕자에게 벌을 주면 왕자를 보증했던 지그프리드를 무시한 꼴이 되고, 그 대답을 믿고 벌을 주지 않으면 왕자와 지그프리드의 우호 관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 땐 브리센 후작이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르메인은 아마 내가 보증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무 것도 안하겠다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니 꼬맹이도 오늘 미리 예정된 외출이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행동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잘 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슬레이만이 듬직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종종 팔아먹어라. 내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해주마. 그러라고 있는 아빠 아니냐?"

얀이 감동했다는 듯한 얼굴로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 뿌듯함을 느낀 슬레이만이 허리를 곧게 피더니, 어깨를 쭉 넓혀보이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막 그렇게 비루먹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지.

잠깐 멋있다고 생각한 내가 멍청이지.

얀이 혀를 쯧쯧 찼다. 그 소리를 못들은 척한 슬레이만이 정원에 놓여있던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그 뒤를 따라간 얀이 입을 열었다.

"왕궁 사람들이 제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는 것 맞죠? 전하나 다른 왕족 분들도요."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한다. 아니었으면 내정 담당관이 진작에 보고했을거다. 손은 잘 써뒀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

"하긴. 누구 한 명이라도 알았다면 실리케가 저를 왕자님 옆에 두었을 리도 없겠네요."

슬레이만이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아들이 워낙 귀티가 안 나니 아무도 의심을 안 할 만도 하지."

얀이 눈을 찌푸리며 슬레이만을 흘겨봤다.

하지만 슬레이만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슬레이만과 똑같은 블론즈 색 곱슬머리를 보다 보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푸들 '얀'이 생각나서 자꾸 손이 갔다.

"그런데······."

그렇게 입을 열었던 얀이 곧 말을 멈췄다.

사실 요즘 칼리안의 증상에 대해 물어보려 했던 것이나, 마법과 관련된 내용이라던 칼리안의 말이 생각난 까닭이다. 어차피 슬레이만이 알지 못할 일이면 괜히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꺼낸 말을 집어넣을 순 없었으니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레아는 잘 지내요?"

"잘 지낸다. 이번에 같이 오겠다는 걸 떼어 놓느라 힘들었지."

드미레아, 얀의 여동생이자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소가주였다. 검도 잘 다룰 뿐더러 영특한 아이였다.

슬레이만이 무릎에 올려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굳은살이 빼곡하게 박힌 자신의 손바닥과 얀의 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물었다.

"그래서 넌. 여기는 좀 살 만 하냐?"

"아버지가 볼 땐 어때 보여요?"

"묵은 똥 싼 것 같다."

말을 해도 꼭.

저러니까 어머니가 집에 안내려가지.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레이만이 고개를 휘적휘적 움직이더니,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서 꼬맹이 시중 드는 것보단 도련님 소리 들으며 사는 게 낫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내려오거라. 그렇게 하기 싫다는 소가주 자리도 이제는 레아가 가져가 줬으니."

잠시 동생을 생각하던 얀이 칼리안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레아랑 나이가 같으세요."

"그렇지."

"처음에 아버지랑 궁에 와서 뵈었을 때에는 꼭 바짝 마른 나뭇가지 같으셨어요. 레아는 이제 막 돋아나서 반짝반짝하는 잎 같았는데."

정원 사이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인공 시냇물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누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래서였는데 어느 순간 안쓰러워졌고, 그러다 보호하게 됐고.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되고 나니까 이제는 살 만 해요."

"그래. 그럼 됐다."

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묵은 똥 싼 얼굴로 웃었다.

문득 편안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칼리안과 얀의 모습이 생각났다. 기세 등등하던 칼리안의 첫 걸음도 떠올랐다.

"그 꼬맹이. 지켜보다 보면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긴 하다."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냐는 얼굴에 슬레이만이 덧붙여 말했다.

"그런 게 있다. 모르면 말아. 아무튼 난 내일 내려가니 한동안 못보지 싶다."

"못보기는요. 3개월 후에 볼 텐데요."

"정말 그만 둘 생각이냐?"

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열 다섯이 되시니까요."

"아, 그래. 벌써 그렇게 됐지.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얀이 머리를 다시 단정히 묶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인 슬레이만과 대화를 마쳤으니 정문 근처에서 칼리안을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어느새 칼리안의 시종으로 되돌아온 얀이 정중히 예를 보였다.

슬레이만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했다. 얀이 웃으며 돌아나갔다.

* * *

한산했다.

아직 왕궁에서는 연회가 한참일 시간이었으나 광장의 행사는 이미 모두 끝이 났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인근의 술집으로 모여들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많은 이들로 북적이던 광장에는 어느새 분수대를 비추는 마법 등불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적막함에 잠겨 있던 광장에 때 아닌 말 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시작점은 왕궁에서 나온 두 필의 말이었는데, 처음에는 왕도를 따라 내려가는 듯 하더니 어느새 방향을 바꾸어 하츠아라 광장을 가로질렀다.

바로 앨런 마나실과 칼리안의 말이었다.

앨런을 쫓고 있는 칼리안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앨런 역시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기에 묵묵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따르는 말과 거리가 가까운데도 상대방이 자신을 무어라 불러 세우질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계속 뒤로 따라붙는 상대방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슬쩍 뒤를 쳐다 본 앨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지?'

언뜻 보인 것은 하얀 색의 망토였다. 수비대원들은 저런 화려한 망토를 하지 않는다.

그제야 뒤로 따라 붙은 이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앨런이 말의 속도를 줄이며 멈추어 섰다. 따라오던 말의 발굽 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느새 광장의 중앙까지 오게 된 탓에 분수대의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뒤로 고개를 돌린 앨런은 그제야 상대방의 차림새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한 바와 같이 그것은 결코 수비대원의 것이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귀족, 혹은 왕족이다.

곧 상대방이 말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어오더니 불빛 아래 선 채 앨런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 그리고 붉은 눈.

앨런도 오늘 아침에 광장에서 국왕 일가를 보았었다. 딱 지금 이 자리에 세워져 있던 수정판에서 보여주었던 그 얼굴의 셋째 왕자가 지금 앨런의 앞에 서 있었다.

'저 곱상한 왕자님이 무슨 일일까.'

앨런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떠올랐다.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6)

칼리안이 차분한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으나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대화를 하자는 것이겠지.'

아무리 타국의 왕자라 하나 말 위에서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 앨런도 별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그제야 칼리안도 앨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칼리안은 상당히 놀랐는데 분명 50대라 알고 있던 앨런의 얼굴 생김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높게 보아도 20대 중반.

다행히 아래로 내려갈수록 붉은 빛이 진해지는 독특한 머리 색이 그가 앨런 마나실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7서클을 완성시키면 나이를 한번 역행한다더니.'

그제야 정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었던 것이 이해되었다.

'과연. 제대로 찾았어.'

칼리안은 감탄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앨런을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을 대한 앨런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고작 열 넷인데. 어떻게 저런 눈으로 사람을 살피는가?'

자신을 훑어본 것은 수비대원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이 달랐다. 어쩐지 자신의 차림새가 아닌 쓰임새를 살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간단한 인사. 그 태도가 사뭇 당당했다.

왕족이 아닌 그 누구도 왕자를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는 못한다.

지금 앨런은 칼리안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한 치기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왕족의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인재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자다.'

르메인의 앞에 서더라도 앨런의 이런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이 진심어린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얀에게 말한 것처럼 칼리안은 왕족이었으니 제 입으로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곧 칼리안이 잠시동안 앨런을 쳐다보다 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십니까."

"닫힌 문을 열려니 문턱이 너무 높더군요."

잠시 칼리안을 살피던 앨런이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돌려 말하기를 해보자는 건가.'

앨런의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지금 앨런은 수비대원이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쫓아냈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티 나지 않도록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적당한 말을 골라 꺼내놓았다.

"문을 열어두었는데 굳이 닫힌 곳을 찾으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초대장 준 건 어따 두고 꼬투리를 잡느냐고.

앨런이 묘한 기분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눈빛도 그렇더니 열 넷의 소년이 할 법한 대꾸가 아니다.

미안하다는 사과 말고 앨런의 태도부터 꼬집은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많다보니 문턱에 티가 쌓입니다. 바람을 막는 것에 급급하여 미처 닦아 두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나 못 들어오게 막느라 수비대원이 실수를 하는 것까진 신경쓰지 못했다는 뜻을 담아 말을 덧붙였다.

사과도 아닌 그 말이 솔직하다 해야 할지 뻔뻔하다 해야 할지.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지켜보면 재미가 있을 아이구나.'

그런 생각을 한 앨런이 칼리안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을 땐 보이지 않았던 여러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앨런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웃음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잠깐······?'

앨런의 시선이 칼리안이 입고 있던 붉은 예복의 끝자락에 닿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쳐다봤다. 그런 앨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칼리안은 그저 묵묵히 앨런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던 탓에 칼리안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앨런이 갑자기 팔을 뻗어 칼리안의 손목을 잡아챘다.

- 휙!

평소와 같았다면 이 정도는 피했을 테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신이 혹사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느라 말 그대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더욱이 왕궁에서는 칼리안의 몸에 이렇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덕분에 여러 모로 방심했고 하릴없이 손목을 붙들렸다.

칼리안의 손목을 잡은 앨런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내리떴다.

"이게 무슨······!"

칼리안이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앨런이 칼리안의 몸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넣었다.

익숙해지기 힘든 날카로운 통증이 심장을 찔러왔다. 말을 모두 맺지 못한 칼리안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간 느껴온 것의 몇 배는 될 듯한 아픔에 몸이 휘청거렸다.

- 다각!

주인의 상태를 알아본 레이븐이 한 발 다가와 칼리안에게 제 몸을 가져다 댔다. 그런 행동에 놀랄 경황도 없이 레이븐의 몸에 기대어 선 칼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상태를 들키다니.'

이런 모습을 쳐다보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력이 칼리안에게 무슨 영향을 줄지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문을 닫아 두어도 바람을 모두 막아내지는 못하는 법이지요."

'참 잘도 말한다!'

칼리안이 사나운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며 붙들려 있던 손목을 잡아 뺐다. 놓지 않으려 하다가는 앙상하게 마른 손목이 그대로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앨런이 손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 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서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인할 게 있다 미리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앨런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전에 아픈 것을 먼저 들켰으니 이 이상 해야 할 말도 없지 않나. 물론 목소리까지 곱게 나오진 않았다.

"바람을 다 막지는 못한다······ 네, 맞습니다. 다 막지는 못했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마나를 쓸 수 없었습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계셨습니까."

허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마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진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은 모르는 눈치인데.'

용의 후손이 이끌어가는 나라에서 정작 마법사들을 홀대하기에 왔다. 제 발로 찾아 온 귀한 대마법사를 코앞에서 놓쳤다 여기게 할 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마주하게 되었다.

"흐음."

문득 고개를 든 앨런의 눈에 분수대 가운데 세워진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이 들어왔다. 오늘 하루 종일 온 거리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

그것도, 지켜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시스파니안의 조각상과 왕궁을 한번씩 쳐다본 앨런이 다시 칼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곧바로 따라오셨습니까?"

칼리안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앨런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 왕자가 시기 적절하게 쫓아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을 우연이라 하기엔 억지스러운 점이 많지 않나.

'저 질문이 나올까봐 제대로 마음을 사기 전까지는 아픈 것을 숨기려 했던 것인데.'

칼리안이 잠시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내가 미래에서 왔는데 당신이 왔다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앨런이라면 그 정도는 간파할 것이 분명했다.

"말을 타고 근처를 거닐다 수비대원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주신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지금 한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말장난에 가까운 속임수였지만 어찌됐건 솔직하게 답을 했다.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칼리안을 응시하던 앨런이 다시 물었다.

"왜 달려오셨습니까."

"달려가셨으니까요."

순간 앨런이 피식 웃었다.

딱 제 나이에 맞을 대답이 비로소 나온데다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많이 아팠던가 보다, 하고 생각하던 앨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

칼리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마나를 쓸 수 없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텐데 왜 굳이 묻는 것일까.'

앨런은 생각에 잠긴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대답이든 빨리 하라 채근하지도 않았다.

잠시 후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왜, 라고 하신다면."

치유사도 찾지 않고 앨런을 기다린 이유.

돌아가면 난리가 날 것을 알면서도 왕궁 밖으로 나왔던 이유. 분명 있었다.

칼리안은 레이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했다.

"앨런 마나실. 내가 그 이름을 얻고자 함입니다."

작은 한숨을 내쉬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 조만간 진짜 바람이 불 것 같아서요."

사실 암살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적당히 세자위를 사이에 둔 자리 싸움 정도로만 이해해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앨런이 검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긁적였다.

지금 앞에 있는 왕자가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스 왕궁 안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왕비 실리케가 가진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았다. 때문에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 셋째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적당히 알 것 같았다.

"왕자님께서는 바람을 막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잠재우고 싶으신 겁니까."

다른 세력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만 할 생각인지. 아니면 전부 물리치고 정점에 설 생각인지.

칼리안이 말 없이 앨런을 쳐다봤다.

정말로 믿어도 좋을 자인가. 마지막으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앨런의 눈에도 같은 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칼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당장은 막아야겠지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왕좌가 아닙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위해 왕좌가 필요하다면 잠재울 생각도 있습니다."

왕좌를 그저 선택사항으로 치부하는 오만한 말.

당장 죽어가는 몸 말고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왕자가 저런 말을 한다.

벌써부터 재미가 있었다.

'앞으로는 얼마나 더 재미있으려고.'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손가락을 들어 카이리스 왕궁을 가리켜보였다.

"초대장, 다시 주시지요."

고작 국왕 탄신 기념일 축하파티에 참석할 사흘 짜리 초대장이 아닌,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제대로 된 명분을.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을 지워냈다.

날카롭게 빛나던 붉은 눈이 앨런에게서 멀어져 바닥을 바라본다. 고개가 숙여지고 무릎이 굽혀졌다.

- 사락······.

하얀 망토가 잠시 부풀어올라 허공에 맴돌다 곧 깃털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칼리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앨런은 자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칼리안의 등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더니만.

그 등은 또 어찌나 작은지.

앨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일생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제자를 향해 대답했다.

"초대에 응하겠나이다."

그래, 내 너를.

살려주마.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1)

세뉴 강.

카이리스 수도인 카이리시스에 흐르는 강이었다. 왕궁의 건물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강은 카이리시스를 대각선으로 나누며 흐른다. 왕궁은 강의 북동쪽 지역 중앙에 있었고, 카이리시스 남서쪽의 외성 정문 밖에서부터 이어져 들어온 왕도가 세뉴 강을 건너 카이리스 왕궁까지 이어졌다.

하츠아라 사후 시스파니안이 떠난 뒤.

침체되었던 국가를 일으킨 것이 바로 왕도 건설 사업이었다. 주요 도시로 쭉쭉 이어진 이 널찍한 도로 덕분에 카이리스가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 할 만큼, 카이리스에서 왕도는 상당히 중요한 시설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그 왕도 위에서 각각 흰 색과 검은 색으로 칠해진 마차 두 대가 왕궁을 향하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던 그 마차들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로운 외관을 자랑했다. 둘 모두 진주 가루를 섞어 바른 반짝이는 외벽에 커다란 유리 창문을 달아 두었던 것이다.

다만 한 대는 흰 색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했고 또 한 대는 검은 색 바탕에 자개로 장식을 했다는 점이 달랐다.

헌데 자개라는 것이 카이리스에서는 상당히 귀했다. 카이리스가 대륙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없는 것이 바다였기 때문이다. 진주는 담수에서도 양식이 되었으므로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자개 재료가 되는 금조개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금 값보다 자개 값이 더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카이리스였다.

그런 자개로 거대한 마차를 치장한 것이 고스란히 보였으므로 이 검은 마차를 향한 시선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오른쪽에서 나란히 달리던 흰 마차 탑승자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마차 안에 있던 이가 창 밖에 보이는 검은 마차를 보며 혀를 찼다.

"저 꼴을 보게. 그야말로 굴러다니는 돈 덩어리로군. 사치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집사가 마부석과 연결된 들창 너머로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금박은 싼 줄 알고 저런 소리를 하나. 게다가 지금 남을 보며 사치를 논할 때인가?'

텐실에서 공수해 온 최상급 다이아몬드가 박힌 구두가 실려있지만 않았어도 마차 주인에게 이런 생각을 할 일은 없었으리라.

흰 마차의 외벽에는 날카로운 검을 쥐고 있는 그리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왕비 실리케의 집안인 브리센 후작가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차에 타고 있던 이는 브리센 후작의 둘째 아들이자 브리센 상단주인 레넌 브리센이었다.

"마차 주인이 지그프리드라도 되는가? 아니지. 덩치만 산만한 코끼리들이 저럴 리는 없는데."

카이리스의 코끼리.

그것은 지그프리드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랜 기간 단 한번도 왕좌를 탐낸 적 없으나 그 힘은 막강하니 맹수도 건드리지 못할 초식동물이라 하여 그리 불렀다.

지그프리드 외에는 저런 마차를 탈 만큼이 된다 여겨지는 가문이 없자 답을 찾지 못한 레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대체 어떤 자가 마차에 저렇게까지 돈을 처바른 것이야?"

집사가 들창을 통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전 테이난샤 거리 쪽에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다만 문장이 반대편에 있는지라 정확히 어느 가문의 마차인지는······."

"테이난샤 거리?"

"네.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집사의 말에, 레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내가 몰라서 되물어 본 것 같나.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실리케나 칼리안이 들었다면 비웃었을 법한 말로 집사에게 무안을 준 레넌이 다시 한번 커튼을 걷어 검은 마차를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검은 마차의 창문에도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어 도무지 누가 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법사들 중에 저런 재력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

"반대편 쪽의 가문 문장을 살펴볼까요?"

"그래. 그렇게 하게."

말을 들은 집사가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레넌의 하얀 마차가 속도를 줄여 뒤쳐진 뒤 다시 속도를 높여 검은 마차의 반대편으로 따라잡았다. 레넌이 재빨리 손을 움직여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벽에 새겨진 문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넌이 눈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 문장 한번 복잡하네. 저건 뭐야, 꽃인가? 꽃이 하나, 둘······."

마차가 조금 더 앞으로 움직여 문장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제야 문장을 정확히 확인한 레넌이 자신의 눈을 세게 비볐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붉은 꽃 일곱 송이와 은색 지팡이입니다, 브리센 자작님."

"내가 그걸 몰라? 입 좀 닫아!"

붉은 꽃 일곱 송이, 은색 지팡이!

"이게 무슨 일인가? 허어······ 미치겠군. 난리가 났어. 어찌 저 자가 여기에, 카이리스에 있느냔 말이야? 왕궁에는 왜 가는 것이지?"

대체 저 문장이 어느 집의 것인지도 모르겠고 입도 닫으라고 했으므로 집사는 그저 눈만 꿈뻑거리며 앞을 쳐다봤다.

두 대의 마차는 귀족들이 거주하는 에이난샤 거리도 통과했다. 때문에 레넌이 아닌 다른 귀족들도 왕궁으로 향하는 이 값비싼 검은 자개 마차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붉은 꽃들이 핀 덩굴이 은색 지팡이를 이리 저리 휘감은 모양이었다고?"

"네. 그런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차 외벽에 새겨진 문장의 모양을 들은 귀족들은 저마다의 하인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그 뒤에는 분명히 그렇게 생긴 문장이었다는 확신 어린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귀족들은 손사래를 치고 난 뒤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잘못 봤겠지."

에이, 설마.

"그 앨런 마나실이 여기에 왔을 리 없잖아."

그 뒤에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각자 하던 일을 싹 다 집어치우고 왕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 * *

축제 셋째날. 오전 9시 30분.

많은 이들의 시선과 관심 속에 왕궁에 도착한 앨런은 국왕으로부터 받은 초대장을 보여주며 왕궁의 열린 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닫힌 문의 문턱이 높은지 낮은지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검은 자개 마차의 외벽에 새겨진 앨런의 문장은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그리하여 시종장은 아침에 인사를 온 귀족들과 접견한 뒤 집무실로 향하는 르메인에게 지금 왕궁에 누가 왔는지를 급히 알렸다.

"전하. 조금 전 앨런 마나실이 왕궁에 찾아왔다 합니다."

르메인이 발을 멈추었다.

앨런 마나실. 대륙에 세 명 뿐인 7서클 마법사.

하지만 다른 두 명과 달리 어떤 국가에도 정착하지 않은 콧대 높은 능력자.

그의 이름이 가지는 힘이 어떤 것인지는 르메인 역시 잘 알았다. 앨런을 얻게 되면 왕위 계승 후보에 오르리라는 칼리안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나라를 운영하느라 하루가 부족한, 그래서 왕자들에게 단 5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던 르메인이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집무실로 바로 안내하도록."

덕분에 앨런은 왕궁의 작은 마차로 옮겨 탈 필요 없이 자신의 그 화려한 마차에 탄 채로 곧장 르메인이 있는 아르피아 궁까지 올 수 있었다.

의도한 것 같은 9시 30분.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는 아르피아 궁 앞에 나와 있는 귀족들이 참 많았다.

축제 기간동안 늦춰진 일정 덕에 나르실 관으로 여유있게 출근하던 왕실 업무 담당자들, 외무 담당과 오찬을 마치고 루비아 관으로 돌아가던 사신들, 그리고 국왕 접견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던 귀족들까지.

"저것은 앨런 마나실의 문장이 아닌가?"

"허어······ 리베른과 맺었던 계약이 끝났다더니."

그렇게 모이게 된 많은 귀족들은 카이리스에 파란을 몰고 올 검은 자개 마차가 소리 없이 멈추어 서는 것을 두 눈으로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

"헌데 어찌 카이리스에 왔을까. 리베른에 계속 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안할 터인데."

"그런 일을 겪었는데 편했을 리가 있겠나? 리베른 국왕과의 관계만 아니었어도 아마 진작에 떠났을 걸세."

"음? 아아, 그래. 내 미처 떠올리질 못했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뒤에서 앨런의 카이리스 방문 목적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모두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명의 마법사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은색에서 시작해 붉은 색으로 끝나는 특유의 머리 색이 햇빛 아래 드러나자 그가 앨런 마나실이 정말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귀족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앨런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날 입었던 누더기를 대신해 보란듯이 걸친 붉은 색의 로브에는 7서클을 상징하는 문양이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은 차갑게 빛났고 가는 입술에는 도도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중년 남자가 다가가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마나실 경, 어서 오십시오. 저는 국왕 전하를 모시는 시종장 라울 하르트입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을 직접 보낸 르메인의 의도가 분명했으므로 귀족들이 다시 술렁였다. 물론 앨런은 어딜가든 이 정도의 환대는 받았기 때문에 익숙한 상황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궁으로 들어섰다.

"정말 카이리스에 올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이겠나. 설마하니 천하의 앨런 마나실이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하나 하고 돌아가자고 왔을까."

귀족들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들어찼다.

당연한 일이다.

실리케의 기에 눌려 사는 르메인에게 앨런 마나실이 찾아왔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한편, 복도에 들어서 더는 마주치는 사람이 없자 라울의 뒷통수를 쳐다보던 앨런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해맑은 웃음을 짓던 새 제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9시 30분, 정확히 그 때 오세요. 물론 이번에는 꼭 '열린 문'으로 오셔야 합니다.'

덕분에 앨런은 마법사 연합에서 만들어 주었으나 한번도 입지 못했던 부담스러운 옷을 입고 리베른의 국왕이 작별의 선물로 주었던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왕궁을 찾은 길이었다.

칼리안의 의도대로 수많은 귀족이 아르피아 궁 인근에 모여있던 시간에 도착한 앨런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제자님께서 나를 끌어들였다고 아주 널리 홍보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군.'

곧 르메인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앨런이 안으로 들어섰다.

르메인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집무실에 마련된 응접용 소파에 앉아있었다. 앨런은 칼리안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르메인에게 인사했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르메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앨런의 인사를 받았다.

앨런이 굉장히 어려보였으나 사실은 르메인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칼리안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 이리 와 앉게."

르메인이 살짝 손을 들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고 사양 않고 걸어온 앨런이 르메인의 앞에 마주앉았다. 르메인이 깊이 있는 눈으로 앨런을 바라보며 잠시 해야 할 말을 정리하는 동안, 앨런은 자신의 것으로 나온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첫날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내 대신 사과하지."

"첫날의 이야기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이야기에 대한 사과입니까?"

르메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앨런의 말에 든 뜻까지 부드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벌어진 일은 수비대원이 무례를 저질렀던 것 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사과로 알아듣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앨런은 어떤 이야기인지를 묻고 있었다. 르메인이 그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찾아온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정도로만 전해 들었지. 3왕자에게서 따로이 전해 들은 이야기가 없었네."

공작 슬레이만이 예상한대로 르메인은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르메인은 수비대원에게 화가 나 돌아가던 앨런을 칼리안이 쫓아갔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사과하실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화는 즐거웠고 정문에서의 일도 설명을 들었습니다. 물론 설명을 들었다 하기보다는 괜한 꼬투리 잡지 말라고 혼이 났다 해야 맞을 듯 합니다만 아무튼 잘 마무리 하였습니다."

르메인의 눈에 의문이 들었다.

방금 칼리안이 앨런을 혼냈다는 말을 들은 것이 맞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르메인이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전하. 카이리스에 제가 머물 만한 집이 있습니까."

설명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본론에 르메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2)

왕비 실리케가 머무는 헤이시아 궁.

그곳의 후원에는 칼리안의 방 두 개를 합친 정도는 될 듯한 크기의 온실이 있었다.

벽과 천장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온실은 언제나 르니에리 잎으로 가득했다. 짙게 풍겨 나오는 실리케의 향수 냄새와 달리 온실 안에서는 특별한 향이 나지 않고 있었다. 하얀색의 신비로운 르니에리 꽃은 1년에 단 하루만 피었기 때문이다.

그 온실 안에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마치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실리케가 앉아 있었다.

다만 그 눈매가 사나운 것을 본 레넌이 어깨를 움찔했다.

'또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군······. 하긴. 좋을 리가 없지.'

축제 첫날 2왕자 플란츠가 술에 취한 채 광장에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터지는 일인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그 누구도 플란츠를 욕하지 않고 있었다. 칼리안으로 인해 플란츠에게 질책의 눈길조차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리케를 더 자극했다.

덩달아 레넌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오자마자 카이리스에 앨런 마나실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저래서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소식이야 굳이 레넌을 통하지 않더라도 전해들을 수 있을 테니까.

'구두만 전해주고 빨리 돌아가자.'

레넌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뒤에 서 있던 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집사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시녀장에게 건넸고 시녀장이 건네받은 상자의 뚜껑을 열어 실리케의 앞에 들어 보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실리케가 이렇게 물으며 상자 속을 쳐다봤다.

그것은 실리케의 눈빛과 잘 어울릴 연한 노란 색의 구두였는데, 구두를 장식한 금 조각의 가운데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구두를 훑어 본 실리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흡족해하는 것이다.

"말씀드렸던 텐실의 다이아몬드입니다. 운하를 건설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지 않습니까. 그 곳에서 나온 첫 원석들로 만든 상품 중 하나라 합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눈을 돌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실리케가 대답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계획한 일이······!"

"그건 그렇고."

레넌의 입이 민망하게 닫혔다.

레넌의 말을 자른 실리케가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잠시 쳐다봤다.

구두에 대한 감상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감사 인사는 고사하고 정작 하려던 말까지 막히자 레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것이 얼마짜리인 줄 알고!'

그런 레넌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을 시녀장은 무덤덤한 얼굴로 예를 보인 후 레넌의 집사를 데리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어찌 아직입니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목소리가 잇사이로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변한 실리케의 얼굴에도 레넌은 놀라지 않았다. 원래 그런 성격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탓이다.

레넌이 가까스로 웃어보이며 실리케를 달랬다.

"그것이······ 아무래도 시스파니안의 축복 때문일 것 같습니다."

"축복의 힘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하지 않았습니까. 3왕자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주 큽니다. 무척 거슬려요."

레넌이 마른 침을 삼켰다.

부채를 팔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대로 물건을 더 보내세요. 양을 늘릴 테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수를 쓰시는 것이······!"

실리케는 레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며 문 쪽을 향해 손짓하는 것이 마치 날벌레를 쫓는 듯한 태도와 비슷했다.

레넌의 입 속에서 작게 이 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뿐, 결국 레넌은 꺼내려던 말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 * *

르메인이 더 깊어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카이리스에 머물 집이라니.'

물론 반가운 일이다.

안 그래도 앨런을 카이리스에 두고자 하는 생각으로 불러다 앉힌 참이었다. 지금 실리케의 세력을 누르려면 앨런 정도의 인사는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속내로 저런 말을.'

그런데 앨런이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오히려 그 의도가 의심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광장에서 빨간 눈 고양이 한 마리를 봤는데 꽤나 마음에 들더군요. 이것 저것 가르치고 키워야겠다 했는데 그러자니 정작 제가 머물 곳이 없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르메인이 말했다.

"칼리안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물은 앨런이 앞에 놓인 탁자에서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 잘라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국왕의 질문을 받은 뒤 취하기에는 참으로 무엄한 행동이라 하겠으나 르메인은 말 없이 기다렸다. 곧 차까지 한 모금 마셔 입을 적신 앨런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 그리고 마법이라."

"그러니까······. 그대가 칼리안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카이리스에 머무르겠다는 소리인가."

"뿐만 아니라 고양이가 좋아할 환경도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집주인을 도와서 집 정리도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를 키우겠다는 것은 핑계고, 실리케 세력을 정리하여 칼리안을 다음 왕세자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것이 르메인에게 해가 될 것은 없었다. 르메인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뒤 물었다.

"감당이 되겠나. 알겠지만 지금 집안 꼴이 엉망이네."

"저도 뭘 키워보는 것이 처음이라. 감당하실 수 있을는지."

르메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걸렸다.

"그나저나 명분이 좋군. 스승과 제자라니."

왕자와의 사제 관계.

앨런이 카이리스에 눌러앉을 가장 그럴싸한 명분이다.

물론 실리케를 포함한 브리센 후작가에서 왕자의 마법 교육을 반대하려 하겠지만 상대가 앨런 마나실이다.

"제가 먼저 칼리안 왕자님을 제자로 삼겠다 지목했으니 브리센에서 막을 명분이 뚜렷하지 않고. 또 제가 하루종일 마법 수업만 할 수는 없을 테니, 시간이 남는 스승이 전하를 도와 일을 좀 한다 해도 방해할 수 없을 테지요. 제법 제대로 된 초대장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마치 이 명분을 칼리안이 만들었다는 듯한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런은 그에 대한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곧 생각을 정리한 르메인이 앨런에게 대답했다.

"그래. 머물 곳을 마련해 주겠네. 안 그래도 엉망인 집에 고양이 키울 이가 들어온다 한들 더 나빠질 것도 없겠지."

앨런이 가볍게 고개 숙여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허락과 별개로 르메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헌데 어째서인지 궁금하군. 특별할 것이 없다던 아이인데."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까."

되묻는 앨런의 눈이 의미심장했다.

"오히려 저는 칼리안 왕자님에게서 특별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쓸데없이 건강 상태까지 특별했다.

"그 아이가 겁이 많다고는 들었네. 말도 무서워한다 하던데 경을 쫓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은 고쳤나보군."

앨런은 칼리안이 매우 숙련된 솜씨로 말을 몰던 것과 그 말에 기대어 서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왜 아까부터······.'

그러다 문득, 르메인의 말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란델은 깊은 물과 같고 플란츠는 성난 파도와 같다 들었지. 칼리안은, 글쎄. 탈 없이 조용한 아이라 하였을 뿐. 재능이 있는 줄 몰랐네."

'어째서 전부 전해들었다 말하는거지? 마치······.'

직접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만약 무언가 특출한 것이 있었다면 내게도 전해졌을 테지. 그래서 사실 조금 놀랐네."

차를 들어 목을 축인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창가로 걸어가 밖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조금 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저도 전하와 마찬가지로 조금 빨리 결혼을 했었지요. 그러다보니 벌써 망아지 같은 손녀도 하나 있습니다."

순간 르메인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알고 있었으나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앨런이 생각한 '더 놀라운 이야기'는 손녀 자랑이 아니었다. 앨런은 손바닥을 아래로 둔 채 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머리가 제 허리춤에 왔으니. 아마 이 정도······. 지금은 더 컸을 겁니다. 그럼, 이 정도."

앨런의 팔이 조금 더 올라갔다.

뜬금없이 왜 키 얘기를 하나 싶었으나 르메인은 일단 조용히 앨런의 말을 들었다. 그런 르메인을 응시하던 앨런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혹시 왕자님들 키를 아십니까. 전하와 함께 섰을 때 어디까지 오는지를요."

르메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앨런이 시선을 옮겨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때로는 관심이 독이 되기도 하고 무관심이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압니다. 바쁘다는 것은 아무 핑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잘 알지요. 어제도 왕자님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같이 걷고 같이 서 있었는데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르메인의 눈빛이 식었다.

앨런이 지금 국왕의 사적인 영역에까지 간섭하려 한다고 느낀 것이다.

"마나실 경. 관심이 지나치군. 자네는 오늘 나를 처음 보았네. 자식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그대의 기준에 맞을 필요는 없지 않나."

불편하다는 심기를 굳이 가리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는 왕자들을 아끼고 있네."

"정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르메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앨런을 응시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르메인은 빨리 이 소모적인 대화를 마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경이 만난 칼리안, 그 아이는 특히나 그렇지. 내게 있어 깨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아픈 손가락이니까. 그 아이를 가르치겠다 하니 지금의 태도는 이해해보겠지만,"

"하!"

앨런이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국왕의 말을 자르고 튀어나온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르메인의 얼굴에 노기가 나타났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앨런이 아니었다. 앨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르메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전해 듣는 것은 그만하시고 좀 들여다 보시지요."

"무엇을 말이지?"

르메인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고민 없이 물었다. 대체 무엇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줄이야!'

앨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화를 삭이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아픈 손가락이라 하지 말고 그냥 한번 깨물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예전보다 더 아픈지, 아니면 덜 아픈지."

"······."

"관망만 하시다가는 잃게 되실 겁니다."

르메인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마나실 경. 똑바로 말하게."

앨런이 다시 걸어와 르메인의 앞에 섰다.

칼리안의 바싹 마른 등이 생각난 탓에 이번에는 앨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더 작고 더 빠르게 몰아치듯 말했다.

"피부에 푸른 기운이 돌고 손톱 밑이 보랏빛을 띱니다. 입술은 말라 있고 숨을 몰아쉽니다. 눈동자 가장자리에는 어두운 빛이 돌기 시작했더군요. 몸을 일으키다 말고 눈을 감고 멈추어 섭니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예복은 급히 수선한 티가 났습니다. 분명 크기를 줄였을 겁니다. 예복을 짓는 데에 얼마나 걸립니까. 한 달?"

르메인의 얼굴에 드러났던 노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앨런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앨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설마, 누가 그 아이에게······."

앨런이 르메인의 말을 또 잘랐다.

"네. 바로 알아들으시는군요. 그렇다면 바로 알아보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이미 한번 같은 일을 겪으신 전하라면. 저도, 그랬으니까요."

프레이야.

르메인의 머릿속에 간신히 접어두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고작 한 달 만에 옷을 줄였다면 한 눈에 티가 났을 겁니다. 키를 모르더라도, 손이든 입술이든 보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말라가는 것은 아셨어야죠. 그 아이가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지요!"

르메인이 허리를 구부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 끝이 떨려왔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독이라니······."

"정말 아낀다던 그 손가락, 이제는 좀 깨물어 보시지요."

앨런이 허리를 숙여 남은 반쪽의 쿠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씹어 삼키며 르메인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감싸쥔 손가락 사이로 참담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니면 지금 같은 그런 얼굴을 하지 마시던가요."

앨런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칼리안에게 해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르메인의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계속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이제와서는 그것이 낫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여 감히 말씀드렸습니다. 용서하시지요."

말을 맺은 앨런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예를 보인 뒤 그대로 나가버렸다.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3)

얀은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사실 슉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없던 사람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다분히 그간 충실하게 쌓아 온 시종으로서의 습관 덕분이었다. 아니었다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을 테니까.

게다가 홀연히 나타난 이 남자가 누구인지를 곧바로 알아보았으므로, 어제 손목을 삐끗한 시녀를 대신해 손에 들고 있던 세숫물을 쏟아 붓지 않는 침착함까지 발휘했다.

그에 따라 얀은 굉장히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칼리안이 잠들어 있는 침실의 커튼 앞을 막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외쳤다.

"마나실 경,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얀의 앞으로 워프한 것은 당연 앨런이었다.

그런데 앨런의 표정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한바탕 다투고 온 듯한 얼굴을 한 앨런이 손가락으로 침실 쪽을 가리켜보이며 물었다.

"왕자님은 아직이신가?"

"왕자님께서는 지금 컨디션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던 중, 시녀들이 침실 커튼 안쪽에서 밖으로 나오다 멈칫했다. 앨런이 누구인지 몰라 놀란 눈치였다. 얀은 설명할 겨를도 없이 시녀들을 재빨리 내보낸 뒤 문을 잠그고 침실 반대편의 욕실로 앨런을 끌고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숫물이 든 작은 대야를 손에 든 상태였다. 내려 놓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쪽으로 오세요."

왕자의 방에는 침실과 샤워실, 서재와 거실, 그리고 화장실과 욕실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문이었다.

암살자의 침입이나 각종 사고를 대비하여 그리 만들어졌다. 때문에 욕실의 커튼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특별히 방음이 되지 않아 난처해하던 얀이 앨런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조용해지는 것 좀 써주세요."

"음?"

멍하게 얀을 쳐다보던 앨런이 뭔가를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어서는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리고 '조용해지는 것'을 시전했다. 곧 그들 주변에 사일런트 마법의 반투명한 막이 생성된 것이 보였다.

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십니까?"

앨런이 손가락만 튕겨 마법을 발현한 것에도 얀은 놀라지 않았다. 얀에게 있어 지금의 앨런은 꽃 같은 우리 왕자님의 방에 침입한 무뢰한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앨런이 걸친 옷이 7서클 마법사를 의미하든 말든. 방금 쓴 것이 무영창 마법이든 나발이든.

그런 생각이 빤히 드러났기에, 앨런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를 혼내려고 나한테 마법을 써달라 한 것인가?"

"왕자님이 깨시면 안되니까요."

국왕 르메인에게 일침을 하고 온 그를, 왕자의 시종이 예의 없다며 혼내는 상황이라니. 얀의 태도가 가히 좋지 않았으나 시종으로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결과라 너그러이 이해한 앨런이 대답했다.

"체르밀 궁에는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하더군. 르메인한테 아직 말을 못 들은 모양이라 어쩔 수 없었네."

"허가가 안나서 텔레포트인가 뭔가를 하셨다는 겁니까?"

앨런이 자기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워프라네. 좀 더 어려운 것이지. 내가 마법을 좀 쓰거든."

얀이 함께 웃으며 말했다. 워프든 나발이든.

"나가세요."

"어차피 깨우려던 것 아닌가? 내 기다리지."

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조금 더 쉬셔야 할 듯 하여 저희들도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앨런은 아무 소리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가루가 섞인 검은 타일로 사방이 둘러싸인 그 곳에 오닉스 스톤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은 욕조가 놓여 있었다. 앨런이 진심으로 감탄하더니 말했다.

"호화롭기 짝이 없는 곳이군. 늙은 스승님 9시 30분까지 왕궁에 오라 해놓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도 이해가 되네."

"늙었다뇨. 몹시 팔팔하신데요."

얀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그 곳이 칼리안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임을 깨달은 얀이 화들짝 놀라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 표정을 읽은 앨런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마법 범위 밖인데 이제는 시끄러워져도 괜찮은가?"

얀이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앨런을 밀어내기는 그만두었다. 대신 다시 한번 강경하게 말했다.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 일어나신 뒤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리시는 것은 안됩니다."

"난 왕자님 상태를 보러 온 것이네. 그러니 전할 말도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왕자님 상태를 자네와 얘기할 수도 없지 않나."

그 말에 얀이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이 앨런과 만났다는 것은 물론 전해들었다.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앨런이 칼리안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칼리안이 마법사에게 도움을 구하겠노라 했던 적이 있었지만 앨런에게 벌써 그 말을 했는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모르는 척 하기로 결정을 했다.

"상태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계속 말을 안 듣는 얀을 보던 앨런은 결국 조금 아껴두려 했던 패를 일찌감치 꺼내들었다.

"자네. 나를 알지?"

"······ 그야, 당연히 알지요. 왕자님께 들었으니까요."

앨런이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는 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새끼 코끼리. 까불지 말고. 나를 알지 않느냐고 물었잖나."

얀의 눈이 홉떠졌다.

사람들이 지그프리드를 두고 코끼리라 부른다는 것을 모를 얀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앨런이 슉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는 바람에, 세숫물이 담겨있던 대야를 기어코 떨구고 말았다.

- 땡그랑!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앨런의 앞에 반투명한 실드가 생성되어 물이 옷에 튀는 것을 막았다. 물론 얀에게까지 실드 범위를 넓혀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으니 얀 혼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어쩐지 세숫물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물이 쏟아지며 앨런이 웃음을 참듯 입가를 씰룩였음에도, 놀란 얀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떻게······?"

"몇 년 전에 아빠 코끼리와 리베른에 왔었지 않나. 좀 컸다고 다른 사람인 척 하면 내가 못알아 볼 성 싶던가?"

순간 슬레이만이 했던 말이 얀의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 내 아들이 워낙 귀티가 안 나니 아무도 의심을 안 할 만도 하지.

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닌데요! 들켰는데요! 그 동안 엄청 컸는데도 바로 들켰는데요!'

그것이 숨길 수 없는 귀티 때문이었을지, 앨런의 귀신 같은 기억력과 촉 때문이었을지, 얀의 브론즈 색 곱슬머리와 청회색 눈 때문이었을지.

혹은 이틀 전 늦은 밤, 마법사 친구를 만나 거나하게 술에 취한 어떤 소드마스터의 주사 때문이었을지는 오직 앨런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왜 그것을 숨기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건 얀의 큰 약점을 틀어쥔 앨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깨우게. 잔다고 낫는 것 아니니 시간 낭비 말고."

결국 5분여가 지난 뒤, 칼리안이 얀의 종 소리를 듣고 잠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온 몸이 푹 젖어 있는 얀의 꼬락서니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축제 서프라이즈야?"

"······ 죄송합니다, 왕자님."

"우는 거 아니지?"

"안 울어요."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얀이 조금 안심한 듯 말했다. 밖에 앨런이 있다는 말을 전해주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이제 좀 나아지신 것 같아 보입니다, 왕자님."

축제 첫날 앨런을 만나고 돌아온 칼리안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을 상이었다. 강행군 끝에 앨런의 공격 아닌 공격을 받았던 탓이 컸다.

만약 그런 내용을 얀이 알고 있었다면 앨런을 보자마자 물세례를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종일 잠만 잤으니까."

"플란츠 왕자님 덕분이라 해야 할 지는 몰라도 다행이네요."

본래대로라면 일정 상 축하 사절과 만나야했다.

그런데 플란츠가 술을 먹고 광장에 나선 것을 르메인이 알게 되었다. 카이리스 귀족들이야 플란츠가 하루 이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엘프까지 끼어 있는 사절들은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플란츠가 그들의 앞에서 실수를 할까 걱정한 르메인은 사절단과의 자리에 왕자들을 부르지 않았다.

"응. 어제 일정이 다 비었으니 좋은 일이지."

덕분에 칼리안은 긴 숙면을 취하며 휴식하는 행운을 누렸다. 의도치 않게 칼리안에게 도움을 준 꼴이 된 플란츠를 생각하던 얀이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전하께서 플란츠 왕자님께 금주령을 내리셨다 하더라고요."

"금주령이라니?"

"플란츠 왕자님께 술 가져다 주지 말고, 술 마시는 자리에선 음료수만 주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르메인이 저런 말까지 했을 정도면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퍽이나 안먹겠다. 축복이 있는데도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을."

"그래서 플란츠 왕자님의 시종들이 걱정이 많은 모양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의 시선이 침실을 막아 둔 커튼으로 향했다. 그제야 앨런을 생각해 낸 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지금 마나실 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깜짝 놀랐다. 어쩐지 커튼을 걷지 않았더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앨런이 칼리안의 얼굴을 정확히 쳐다보며 한 손을 흔들었다. 칼리안이 서둘러 앨런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얀이 말했다.

"왕자님께 긴히 확인할 것이 있다 하여 부득이하게 이리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잘했어."

잠시 얀의 몰골과 스승의 방문 사이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던 칼리안이 결국 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우선 간단한 옷을 입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행사를 위해 정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탓이다.

준비가 모두 끝난 뒤 커튼이 걷혔다.

"두 분께서 함께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전하겠습니다."

"아. 나는 되었네. 바로 가야 하니."

얀과 시녀들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은 비로소 앨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칼리안이 오래 기다려 준 앨런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앨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이제 하지 마세요. 되었습니다."

"네, 스승님."

칼리안이 앨런의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침에 르메인을 만나러 올 적당한 시간을 일러준 것은 맞았지만 자신까지 보러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다.

앨런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잊지 말고 매일 하나씩 챙겨 드세요."

그것은 붉은 색의 장식 없는 주머니였다. 안을 열어보니 진주빛을 내는 반투명한 구슬같은 것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왕자님이 가지고 계신 문제가 둘 입니다. 하나는 마나 운용이 안 되는 것."

대답 대신 이렇게 말한 앨런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칼리안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본능적인 회피였다. 앨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번 확인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나를 쏟아넣는 짓은 더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덕분에 하루를 꼬박 앓았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칼리안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 왕자님 몸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것."

"마나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렇고. 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지 신기하네요"

고개를 끄덕여보이기만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앨런이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시스파니안의 축복의 힘을 지니셨지요."

"네. 맞습니다. 치유력이 생기고 마법에 대한 친화력이 늘어나는 힘입니다."

"혹여 그것이 다소 이상한 조합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없습니까. 치유력과 마법이라니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바가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때 떠올랐던 옛 칼리안의 기억을 되새긴 칼리안이 대답했다.

"축복의 힘이라는 것이 결국 심장을 강화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나와 생명의 근원이 모두 심장에 있기 때문에요."

"네. 맞습니다. 시스파니안은 심장의 힘을 강화시키는 축복을 내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왕자님의 치유력도 사라졌을 듯 한데,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문제가 세 개인 것이군요."

칼리안의 머릿속에 플란츠가 던진 나이프에 상처를 입었던 날이 생각났다. 결국 상처가 모두 아물기까지 꼬박 2주일이 걸렸다.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봐 상처를 숨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을 떠올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그것도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칼리안이 손에 올려진 약 주머니를 쳐다봤다.

심장을 고칠 약인지를 궁금해하는 모습이었으므로,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약이 아닙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입니까."

앨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왕자님은 심장이 고장난 것도 아니고 마나가 막힌 것도 아니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뭔가를 집어먹을 땐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을 좀 해보시지요."

칼리안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 독입니까."

제4장.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4)

그래. 분명 몸에 이상이 있었다.

"처음에는 밖에 나서지 않았었기 때문이라 넘겼고 심장의 통증을 느낀 이후에는 마나 문제일까 생각했습니다.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었고요."

그것이 모두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것은 해독약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급히 만들기는 하였으나 해독이 되는 것은 확인했으니 그걸 다 먹을 즈음이면 다 나으실 겁니다. 그럼 저도 그때부터 왕자님의 마법을 보아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의 시선이 약 주머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앨런이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다 칼리안이 아닌 제3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담담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크리모사라는 맹독입니다. 몇가지 독초에 크리모사라는 뱀의 피와 독을 섞어 만들지요. 어제까지 건강했던 왕자가 갑자기 죽는다면 이상하게 여길 터이니 서서히 병드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헌데 어지간한 독은 축복의 힘으로 고쳐질 테니 소량의 맹독을 꾸준히 섭취하게 해 온 것이겠지요."

참으로 잔인하다.

칼리안은 고작 열 넷이었다.

잘못한 일이라고는, 프레이야를 닮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려면 향도 없고 맛도 없고 은에도 반응하지 않으면서 병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또 오랫동안 먹일 정도의 많은 양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을 겁니다. 왕자님의 증상과 그런 조건에 맞는 독이 바로 그것입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앨런이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전날 하루 종일 마법사 협회 건물에 눌러앉아 테이난샤에 거주 중인 마법사들을 달달 볶아 알아낸 정보였다.

"축복의 힘이 없었다면······. 아무리 적게 먹는다 해도, 폐에 병이 난 것처럼 기침을 하다 일주일 안에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겁니다. 그런 독한 것을 치유하다 보니 심장에 무리가 왔을 터. 그리하여 치유력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마나를 쓰려 하면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지요. 이미 힘들어 죽겠는데 또 힘을 쓰겠다 하니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밖에요."

칼리안이 약 주머니를 닫으려다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알약 몇 개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칼리안이 서둘러 그것을 집어 다시 넣었다.

집어드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칼리안은 분명히 암살됐다. 독살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마나를 쓸 수 없던 것을 보면 내가 상황을 바꾸어 독에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원래의 과거에서도 칼리안에게 독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사실이 가져오는 또 다른 의문에, 참을 수 없을 분노가 치밀었다.

"······ 왜."

주머니를 손에 꼭 쥔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이미 죽어가던 아이를 왜, 목을 졸라 죽였는가!'

앨런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붉은 눈에 그득한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것은 분명 소년이 가질 수 있을 눈빛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그 쪽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앨런은 조금 전 보았던 눈빛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 눈 앞으로 날아오는 칼만 날카로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예리한 법이니."

칼리안은 앨런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소드마스터는 독에 해를 입지 않는다. 때문에 방심을 했다.

방법을 막론한 각종 암살 시도가 난무하는 전장도 겪어보았던 베른이다. 그런데 방심을 했다.

'교살됐다는 사실에 얽매여서 중독을 의심하지 않았다.'

명백한 증상에도 불구하고 독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안이 저질러서는 안됐을 큰 실수였다.

"심하게 중독된 상태입니까."

"제가 보기엔 오늘 내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리안이 풉 웃었다. 앨런의 말에 기분이 한결 풀어진 것을 느끼며 물었다.

"만약 독과 해독약을 같이 먹는다면 그래도 더 심해질까요?"

앨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 하지 마시지요. 속도야 늦춰지겠지만 결국은 위험해질 것이니."

"어느 정도 늦춰지겠습니까."

"저도 치유사가 아니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열흘이 될 지, 보름이 될 지."

칼리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늦춰진다면 충분합니다. 함께 먹겠습니다."

"진심으로 독이랑 약을 같이 처드시겠단 말입니까?"

이것이 욕인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네. 몸의 단순한 이상이었다면 몰라도 독이라면 신중히 대처해야 합니다. 당장 안 먹겠다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앨런의 걱정어린 눈을 보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침마다 마시는 차인 것 같습니다. 그것 외에는 매일 같은 것을 먹지 않았어요. 다만, 항상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셨습니다. 시녀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간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예전의 칼리안은 자신이 서서히 중독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이 든 차를 거부했을지 모른다.'

칼리안이 차에 독이 들었다 눈치챈 것을 실리케가 알았다면 이미 중독되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암살자를 보냈을 수 있다. 실리케라면 분명히 그리 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차를 물리면 곧바로 다른 방법을 쓸 텐데 그때와 지금의 내 상황이 다르니 그들이 무엇으로 죽이려 들지 확신하기가 어려워.'

생각을 정리하는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범인을 잡을 증거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근래 몇 달 동안 브리센 상단에서 가죽을 쓴다며 뱀을 잔뜩 들여온 증거는 이미 모아두었고 지금도 마법사 협회에서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앨런은 참 많은 것을 알아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카드로 남겨두면 되겠네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리케를 잡을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뿐만아니라 증거까지 모았다니 대단할 따름이다. 이 정도를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동원된 줄은 모르는 칼리안이 그저 씩 웃었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차에 독이 들었음을 제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실리케가 몰라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시녀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 차를 마셔왔어요. 먹지 않고 버릴 방법이 없으니 해독약을 함께 먹더라도 차는 계속 마셔야죠."

"게다가 모닝 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얀과 다른 시녀들이 다칩니다. 저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독을 건넸으니 아무 일 없이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새끼 코끼리는 괜찮을텐데."

앨런의 혼잣말같은 중얼거림에, 칼리안이 되물었다.

"네?"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종은 어찌 그리 믿으십니까?"

그 질문에, 칼리안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거짓말 못해요. 여기, 얼굴에 다 티가 나서."

그리고는 오른 손바닥을 쳐다봤다. 작지만 분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는데 플란츠와의 일로 다쳤던 자국이었다.

그 손을 붙들고 어린애처럼 울던 얀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냥. 믿습니다."

앨런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하루 이틀 써야 할 독이 아니니 실리케 역시 들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는 것은 들켰을 때 빠져나갈 방법도 확실하게 마련해 놨다는 말이겠지요. 심지어 제 앞에서 버젓이 저를 죽이겠다는 말까지 했으니까요."

레넌 브리센 자작과의 석찬에서 보여준 실리케의 태도가 생각났다. 그것은 분명 걸릴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자칫하면 실리케는 잡지 못하고 제 사람만 잃습니다. 오히려 누명을 씌웠다며 저까지 몰아세울 테고요. 그렇게 되면 자객이 들거나 또 다른 독에 노출되더라도 막기 어렵습니다."

앨런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패가 생길 때까지, 최소한 독이라는 수단 만이라도 완전히 포기하게 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함께 먹겠습니다. 그 후에 날아들 눈에 보이는 칼들은 어떻게든 막으면 되니까요."

앨런이 복잡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해독약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그것을 입에 쑥 넣어 삼켰다. 그것을 본 앨런이 눈썹을 모로 세웠다.

"의심을 하고 집어 먹으라 했지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짜 독이면 어찌하려고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제가 믿는 만큼 스승님이 저를 믿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믿음을 못 드린 제 잘못 아니겠습니까."

앨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한번 번지르르하십니다."

"앨런 마나실을 꼬셔낸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오죽하겠습니까."

마치 칭찬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안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칼리안을 보며 잠시 침묵하던 앨런이 물었다.

"그래요. 이제 제가 또 무엇을 해 주면 되겠습니까."

살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준 것만으로도 과분했으나 아직 칼리안은 앨런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 저녁, 저를 한 번만 왕궁 밖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데려가 드리지요."

* * *

- 자르륵.

손에 들린 약 주머니를 살짝 위로 던졌다 받으니 해독약들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앨런이 돌아간 뒤, 칼리안은 지금 처음으로 얀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주머니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다.

칼리안이 앨런과 나눈 이야기가 건강 상태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얀이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옆에 서있기만 했다.

자르륵.

칼리안의 손에서 약 주머니가 다시 소리를 냈다.

"······ 얀."

"네, 왕자님."

"열흘 안에, 귀족들이 참석하는 일정이 있어?"

"축제 전 한달 동안 귀족과의 일정이 중단되었던 탓에 당분간 조금 많이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으로 뭐가 있지?"

잠시 칼리안의 일정을 떠올려보는 것인지, 얀은 한 동안 시선을 내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가까운 것부터 나열하기 시작했다.

왕궁 외부로 나가는 일정, 그리고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정들이 주르륵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질렸다는 얼굴이 됐다.

'많기도 하다!'

칼리안이 손을 살짝 들어 설명을 멈추게 했다.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네, 왕자님."

지금 칼리안은 실리케가 독을 포기하도록 만들 방법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앨런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생각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이 지금의 칼리안이 열흘 안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앨런에게 왕궁 밖에 나가겠다 말했고 때마침 딱 들어맞는 귀족들과의 일정도 하나 있었다.

다만 좀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고민이 길어졌던 것인데.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지.

문득 베른의 아버지, 지금 세크리티아의 국왕이기도 한 데블란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럴 때 생각이 나긴 나네요. 아버지.'

덕분에 칼리안은 결국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얀을 쳐다봤다.

밥좀 먹으면 안되냐는 말이 새겨지듯 나타나 있는 그 얼굴에, 칼리안이 웃으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르륵, 하는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자연히 얀의 시선도 주머니를 따라 움직였다. 매우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칼리안이 약간의 진실을 덜어내고 설명을 했다.

"약이야. 다 먹을 즈음이면 나을테니 걱정하지 마. 대신 이것에 대한 건,"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잠깐 말을 멈추자 칼리안의 의도를 눈치챈 얀이 먼저 대답했다.

"네.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눈치가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칼리안이 씩 웃고는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1)

칼리안이 이제 막 점심 식사를 시작했을 그 시각.

세뉴 관 1층에 마련된 홀에 모인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축제 마지막 날이었으나 분위기는 첫 날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 축제 둘째날,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마법사 협회에 들어가 하루종일 머물렀다.

- 협회의 마법사들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다.

이런 소식들이 발빠르게 퍼져나가던 중,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함께 들려왔다.

- 앨런 마나실이 처음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이는 다름아닌 3왕자 칼리안이다.

- 이에 대해 국왕 르메인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둘의 만남이 가져올 파장을 따져 본 귀족들의 혼란은 막지 못할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소식이 미처 전해지지 못한 곳도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을 이가 늦은 아침까지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방의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를 깨우던 상급 시종의 것이었다.

"왕자님.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그의 시종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지도, 종을 울리지도 않았다. 커튼으로 가려둔 침실 밖에 선 채로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왕자님!"

다시 한번 시종이 그를 부른 뒤에야 닫혀 있던 눈꺼풀이 살짝 열리며 연두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평소 같지 않은 풍경에도 그는 그저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팠던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그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커튼 밖에 시종이 서 있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시종이 다시 한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플란츠 왕자님, 일어나셔야······!"

그 때 시종의 뒤에 나타난 또 하나의 인영이 팔을 뻗어 시종을 옆으로 밀쳐내고는 커튼을 잡아들었다.

강한 향기가 온 방 안을 잠식했다.

르니에리 향기.

플란츠가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마."

들어가도 되겠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항상 그리하였다.

먼저 물어보고 배려하는 방법 따위,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커튼을 젖혔다. 그 후에는 민트색 드레스 자락과 그 끝의 연노란색 구두가 플란츠의 침실로 한 발 들어왔다. 실리케였다.

실리케의 뒤로 플란츠의 시종이 함께 들어왔다.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 지를 몰라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한 두번 있던 일이 아니었건만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듯 했다.

플란츠가 시종을 향해 나가라는 듯 손을 한번 휘저었고, 시종은 그를 향해 깊숙이 인사하고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실리케가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여 플란츠는 그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실리케가 천천히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르니에리 향에 가려져 술 냄새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플란츠는 그것을 언급하는 대신 말 없이 침대 옆에 놓인 술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마셨으니 냄새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행동이었다. 물론 르메인의 금주령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이기도 했다.

실리케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그 눈빛과 별개로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가 부채 뒤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고작 열 다섯이란다. 술에 매여 살 나이는 아니잖니. 게다가 곧 나가야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고."

순간 플란츠는 서류 뒤에 숨은 르메인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플란츠가 술에 손을 댄 것은 15세의 성인식을 다녀온 직후부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늘 술냄새를 풍기며 사는 것까지 이해해 줄 수 있을 문제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저 꼴을 하고 궁 밖에 나서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실망스러운 행동일까."

"그걸 말씀하시려던 것은 아닐테고."

플란츠가 마시다 남은 술이 담긴 술잔을 들어올렸다.

게슴츠레 뜬 눈은 잠이 덜 깬 것인지 혹은 술이 덜 깬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뿐이었다.

"왜 오셨는데요."

부채를 쥔 실리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를 참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플란츠는 그 역시 보지 않았다.

"네가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면 전하께서 어찌 생각하시겠니. 아무리 이 어미가 애를 쓴다 하여도,"

"듣기 싫은데······ 그런 얘기."

나른한 목소리.

실리케의 눈가가 떨렸다. 곧 실리케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구나. 전하와 이야기 나눌 때에도 그리 한 것은 아니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내가.'

살짝 눈을 뜬 플란츠가 조소를 보였다.

"왜 오셨는지. 그것만 말하고 가세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풀어 헤쳐진 옷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칼리안이 마법사를 등에 업었단다. 앨런 마나실, 그 마법사가 칼리안을 제자로 들였다며 벌써부터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더구나."

마법사.

실리케를 스치듯이 지나쳐 소파로 향하던 플란츠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플란츠가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술잔을 봤다. 잔 속의 술이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 플란츠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요."

실리케가 플란츠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의미인지, 어째서 이렇게 달려왔는지 알아듣지 못할 플란츠가 아님을 알았다. 때문에 실리케는 더 설명하는 대신 물었다.

"계속 나에게 이렇게 실망을 줄거니?"

"하지 마세요. 애 쓰는 거."

플란츠는 실리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수없이 이야기했던 말을 다시 꺼내놓았다.

실리케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플란츠가 말을 막았다.

"짜증나니까."

곧 플란츠가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실리케는 그런 플란츠를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플란츠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 오늘 갈 곳도, 앞으로 가야 할 곳도. 늦지 말고 나오렴."

부채가 접히고, 실리케가 다시 한번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 걸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도록 해두마."

실리케는 그대로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나갔다.

곧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플란츠가 문을 가리켰던 손을 내렸다.

들고 있던 술잔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플란츠가 이를 악물며 그것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 쨍그랑!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튀어 오른 유리 조각에 손등이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밖에서 눈치를 보던 시종과 시녀들이 잔이 깨지는 소리를 듣곤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플란츠는 손 끝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가."

"왕자님, 손에서 피가 납니다. 치료를······!"

"나가! 나가라고! 꺼지라고!"

······ 칼리안!

* * *

식사를 마친 칼리안은 왕자의 정복으로 갈아 입었다.

해독약이 벌써부터 효과를 내는 것인지 숨을 쉬는 것이 조금 편안해졌다. 앨런이 찾아와 급히 준비하게 된 덕분에 모닝 티를 마시지 않은 것도 이유일 것이다.

시녀들이 칼리안의 머리를 빗기고 마지막 점검을 해 주는 동안 옆에 선 얀이 축제의 마지막 일정을 설명했다.

"곧 기마 공연을 보러 가실텐데 왕궁 밖에 있는 곳이라 1시간 정도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 8시부터는 무도회가 있습니다."

왕자들도 기마 수업을 받고 국왕의 생일에 기마 공연을 보는 것은 르메인이 말을 좋아해서였지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레이븐과 함께 있는 것은 칼리안도 좋아하는 일이었으니 달리 불만은 없었다.

"브리센 상단에서 취소했던 그 공연인가?"

"네, 맞습니다. 그 일로 브리센 자작이 직접 찾아와서 왕자님들과 석찬도 했었지 않습니까?"

국왕이 참석할 정도의 큰 공연은 보통 대형 상단에서 주최했다. 그만큼의 인원이 모여 있는 극단이 없었기도 했고 대부분의 대형 공연장이 상단 소유였던 까닭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폴룬 상단에서 주최하기로 했습니다. 브리센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처음이네요."

"폴룬?"

'익숙한데. 뭐지?'

칼리안이 눈썹을 오므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칼리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폴룬 남작."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주었다.

"네. 멜피르 폴룬이라는 젊은 남작인데 상당히 똑똑하고 수완이 좋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브리센에서 공연을 양보한 셈이 되었네요."

칼리안이 실소했다.

'교수형 당하기는 싫을 테니 양보할 수 밖에.'

칼리안이 입 밖으로 대답하지 못할 그들의 사정이란 것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칼리안이 멜피르 폴룬을 기억하는 것은 세크리티아에까지 알려진 꽤 유명한 일 때문이었다.

무려 왕족, 그것도 1왕자가 다쳤던 사고.

기마 공연을 마치고 국왕 일가가 나오던 시간에 공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구조물이 무너졌다. 그리고 하필 그 때 계단 위에 있었던 란델이 무너진 구조물에 맞아 한 층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텐실에서 한 달쯤 요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게 지금이었구나. 르메인이 기마 공연을 하도 많이 봐서 그 일이 오늘 공연에서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거기까지 떠올린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지.'

구조물을 고정한 밧줄을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두었던 흔적이 나왔다. 그것이 멜피르가 란델을 해치려 했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으나 하필이면 다친 것이 텐실 국왕의 손자였다. 때문에 텐실의 불만이 많았고 결국 르메인은 멜피르를 교수대로 보냈다.

그 일을 듣고 왕족을 노린 것 치고는 허술한 테러였음에도 너무 섣부른 처사가 아니었는지에 대해 체이스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었다. 체이스는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지만 베른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베른은 그것을 맞추기 위해 한동안 고민을 했었다. 그 덕에 여전히 기억이 났다.

'폴룬이 범인이 맞았을 확률은 없다고 보아야겠지.'

진짜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공연장에서 그렇게 티 나는 증거를 만들어놓고 왕족을 노릴 리가 없지 않은가. 얀이 말한 것처럼 상당히 똑똑하고 수완이 좋다면 이 공연을 기회로 삼지 교수대 올라갈 발판으로 삼을 생각을 하진 않을 터였다.

'역시 브리센이 제일 의심스러운데······. 란델을 왜 노린걸까. 그것도 적당히 다칠 만큼. 아니면 단순히 폴룬 상단을 노렸나.'

그것을 위해 왕족에 텐실까지 건드릴 만큼 폴룬이 위협적일 이유가 있었던가.

상단과 관련해서는 베른도 옛 칼리안도 기억하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칼리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왕자님······?"

옆에서 들린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응?"

미간을 찌푸린 채 거울을 보며 말을 안하니 얀이 눈치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뭣 좀 생각하느라."

그러고 보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면 얀이 항상 불안해한다. 옛 칼리안이 대체 거울을 얼마나 깨뜨렸으면 저러는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은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왕자님."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들킨 얀이 민망해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을 짐짓 못 본 척, 칼리안이 다른 질문을 했다.

"오늘 공연 중에 폴룬 남작이 인사하러 오나?"

"보통 공연 시에는 주최자가 전하의 옆자리에 앉으니까요. 공연 시작 전에 인사를 올릴 겁니다."

"그래."

브리센이 개입한 이유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어딘가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일단 살려놓고 확인을 좀 해봐야겠어.'

그래서 이렇게, 일단 멜피르 폴룬부터 살려놓고 사정을 파악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2)

이보다 더 도도할 수는 없으리라.

자신의 말 레이븐을 보는 칼리안의 감상이었다.

지금 레이븐은 파도처럼 갈라진 사람들의 사이로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다각 다각 하는 발굽 소리를 더 크게 내는 것을 보면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참 많이 봤지만 이런 녀석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레이븐의 검은 갈기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 카이리스에서 눈을 뜬 뒤 왕궁 밖을 제대로 본 것이 처음이지 않은가.

앨런을 만나기 위해 광장에 나선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밤이었고 또 앨런에 대한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확실히 카이리시스는 정돈이 잘 되어 있네. 이런 길이 카이리스 전역의 도시로 이어져 있는 것도 대단하고.'

지금 밟고 있는 왕도는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실 강대국 다운 배짱이 아닐 수 없다.

이 길을 타고 적이 올 수도 있다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길을 통해 세크리티아로 왔겠지.'

마지막 기억이 피할 길 없이 떠오른다.

덕분에 칼리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플란츠에게로 갔다.

플란츠는 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 성질 하고는.'

안장의 손잡이를 잡은 손등에 베인 듯한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지 사이가 나쁜 줄은 몰랐는데.'

그날 오전, 칼리안은 의도치 않게 플란츠의 방에서 나오는 고함소리를 듣게 되었다. 날씨가 좋아 창문을 열어 두었고 칼리안의 방 바로 위에 플란츠의 방이 있었으니까.

또 실리케가 왔나보다 하던 얀의 말을 듣게 된 칼리안은 상당히 놀랐었다. 예상 외로 플란츠와 실리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왕자님,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조그만 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념을 애써 집어넣은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쳐다봤다.

귀족들의 거주 공간인 에이난샤 거리의 저택만큼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고급스러운 외관의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들어서 있었다. 아스트리샤라는 이름의 거리였는데, 귀족들을 위한 고급 상점과 문화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거리의 끝에 있는 폴룬 상단 소유의 공연장이 오늘의 목적지였다.

멀찍이서 국왕의 행렬을 쳐다보는 아이들이 칼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옷을 보니 귀족은 아니겠고······ 구경하러 이 곳까지 온 건가.'

평민의 아이들로 보이는 그 무리를 향해 살짝 웃어주자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사뭇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꺼냈다.

"아이들이 참 귀엽네."

"왕자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요."

지금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 된 얀의 대꾸에,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까지도 어려진 것이 당연하게 와닿질 않아서였다.

그런데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행렬을 빤히 바라보는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주변의 평민들과도 확연히 비교될 만큼 남루한 행색의 아이가 바라보는 곳에는 정복을 갖추고 르메인을 호위 중인 카에라의 기사들이 있었다.

모두가 국왕 부부와 왕자들을 보고 있는 가운데 홀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눈길이 낯설어,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칼리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 키리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물색의 머리.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와 벌써부터 큰 키.

칼리안이 찾아와 호위로 두고자 했던 아이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정확한 확인이 어려웠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기분이 끓어오르자 옆에서 얀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가 갑자기 왜······!"

퍼뜩 놀라 얀을 보니 레이븐의 고삐를 쥔 얀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칼리안이 원하는 것을 읽어버린 레이븐이 옆으로 방향을 틀려 한 것이다. 칼리안이 서둘러 레이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니야, 레이븐. 지금은 그러면 안돼. 가면 안돼."

고집을 부리던 레이븐이 그제야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던 얀이 안도한 한숨을 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나 때문이야. 괜찮아."

그렇게 답한 칼리안이 다시 옆을 쳐다보았으나 어느새 물색 머리의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칼리안이 그리운 것을 찾는 듯한 눈이 되어 주변을 살폈다.

'키리에.'

카이리스에서 많은 것을 잃고 세크리티아를 찾아온 고아. 그리고 천재 검사.

키리에의 재능을 알아봤던 베른이 그를 거두어 직접 검을 가르쳤고 키리에는 그 보답으로 목숨을 바쳤다.

베른의 마지막 날, 베른에게 날아오는 화살비를 몸으로 막아냈다.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

칼리안은 달음박질 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키리에와의 만남을 뒤로 미뤄야 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그 후 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즈음 기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주변을 방비하기 시작했다.

공연장이 보인다.

외벽은 석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검은색과 흰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모양새가 왕궁의 나르실 관을 떠올리게 했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고 얀은 공연장의 하인에게 레이븐의 고삐를 맡겼다.

"왕자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말이니 꼭 조심스럽게 다뤄주세요. 꼭이요.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얀은 레이븐의 성깔을 잘 알았으므로 '왕자님이 없으면 지랄이 심해요.'라는 얼굴로 이와 같이 말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국왕 일가를 위해 깔아두었을 붉은 융단이 공연장 정문까지 이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리고, 멜피르 폴룬도 눈에 들어왔다.

* * *

멜피르 폴룬.

회색 머리를 짧게 자른 동글동글한 인상의 사내였다.

브리센 상단의 상단주인 레넌 브리센과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의 첫인상이 확연히 달랐다.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순간, 멜피르는 왕의 일가 모두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를 살피고 자신의 인상을 남기려는 행동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입부터 열던 레넌과는 무게감부터 차이가 났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멜피르가 직접 길을 안내했다.

그 뒤를 따르는 동안 칼리안은 사고가 발생한 곳을 가늠하려 주변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어느 한 지점을 본 칼리안의 눈이 살짝 빛났다.

'저것이군.'

문제가 될 만한 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할 꽃잎 등을 담아둔 듯한 커다란 바구니였다. 밧줄로 묶인 임시 구조물은 그것 뿐이었다.

공연장은 타원형의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8개 층의 관객석이 주변을 감싸는 형태였다. 관객석 중앙에 특별석이 있었는데, 바로 국왕 일가가 앉게 될 자리였다. 그 한참 위에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저게 떨어진다는 얘긴데. 기사들이 미리 확인을 안 했다는 말이 되나.'

분명 이 곳까지 동행한 기사들이 있었다.

국왕 친위대인 카에라의 기사들은 오로지 르메인만을 밀착 호위했고, 르메인 외의 왕족을 호위하거나 주변의 사람들과 일대 기물들을 살피는 것은 왕실 기사단 파벨의 기사들이 담당했다. 그러니 저 밧줄도 분명 파벨에서 점검을 했을 것이다.

'점검을 했는데도 사고가 났다면 파벨에서 알고도 모른척 했거나 아예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물론, 파벨은 브리센의 손 안에 있는 기사단이었다.

칼리안이 소리 없이 툴툴거렸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

곧 국왕 일가가 특별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자 미리 자리를 채우고 있던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르메인이 그들을 향해 손을 올려 화답했다. 그 뒤 멜피르가 팔을 올려 좌석을 가리켜보였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르메인과 실리케가 각자의 자리에 앉고 란델과 플란츠가 그 뒤에 마련된 좌석으로 걸어갔다. 언제나와 같이 칼리안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칼리안이 걸음 속도를 늦췄다.

유난히 느린 걸음으로 멜피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살펴보세요."

짧은 순간, 멜피르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하지만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눈을 내리 뜬 채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멜피르 역시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살짝 숙였던 허리를 똑바로 세워 섰다.

'드러내놓고 도울 상황은 되지 않으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줄 수는 없고. 그래도 상단주라면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

만약 멜피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고가 난다면 란델을 끌어당겨 다치지 않도록 지킬 생각이었다. 란델이 표적이었다는 것만 드러나지 않으면 멜피르도 목숨은 건질 테니까.

멜피르의 시선이 르메인의 옆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머물렀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다른 귀족의 방해 없이 르메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자리였다. 당연하겠지만, 남작인 멜피르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르메인의 옆에 앉을 기회를 가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멜피르가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의 칼리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멜피르는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르메인을 향해 말했다.

"전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제가 직접 아래에서 감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알겠네."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똑똑하네.'

칼리안의 한 마디에 르메인의 옆에서 대화 할 수 있을 기회를 바로 내버렸다. 당장의 이득보다 만일의 상황을 더 중시할 만큼은 신중한 자라는 소리다.

르메인의 양해를 얻은 멜피르가 자리를 벗어났다.

-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 진행자가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한 손을 배꼽 위로 가져다 대며 특별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보인 진행자가 관객석을 보며 다시 한번 인사했다.

-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 관객 여러분, 환영합니다.

관중들이 큰 박수로 화답했다.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 여러분께서 앉아 계시는 아스트리샤 폴룬 공연장은, 아주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신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려 하시는 시스파니안 선왕비님의 말을 하츠아라 선대왕 전하께서 붙들어 세우신 곳이 바로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입니다!

관중들이 일제히 웃었다.

카이리스의 모든 기마 공연장에서 다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주의를 끌어낸 진행자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그럼 더 기다리시지 않도록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끝낸 진행자가 안으로 들어간 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됐다.

여러 마리의 말을 이끌고 나온 기수들이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달리는 말의 다리 밑을 지나는 등 여러가지 묘기를 보여주었다.

칼리안은 그 모습을 조금 따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다수는 그 스스로도 쉽게 해왔던 것들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능력이 없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탄성을 내며 좋아했다.

실리케는 여전히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한 묘기가 펼쳐질 때마다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며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칼리안의 대각선 앞에 실리케가 앉아있었고 그 방향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던 탓에 칼리안은 실리케가 하는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들으라는 듯이 나를 죽이겠노라 말하던 그 실리케는 어디 갔나.'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더 참아주기 힘들어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칼리안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던 플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오는 길에 키리에의 죽음이 떠올라 플란츠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난 상태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증오감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플란츠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 때, 달리는 말 위에 올라 있던 기수가 안장에서 뛰어 올라 뒤에서 달려오던 다른 말의 안장에 완벽하게 착지했다.

관객들이 큰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보냈고 그 시끄러운 틈을 타고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쁘고 음산한, 하지만 칼리안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쾌하고, 음흉하고, 약삭빠르고."

칼리안에게 하는 말이었다.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플란츠는 칼리안을 보며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제 주제도 모르는."

실리케는 독을 보내고 플란츠는 욕을 보내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칼리안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미친놈이, 처돌았나!'

순간적으로 플란츠에게 달려들 뻔 한 칼리안이 주변의 이목이 많음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굳이 이 자리에서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칼리안이 눈을 감았다 떴다.

날이 서 있던 눈빛과 표정이 거짓말처럼 지워지며 본래 플란츠를 대하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이 비틀어졌다.

"역겹다. 토악질이 나와."

플란츠는 아니었다.

주변을 신경 써 화를 추스르는 법 따위는 몰랐다. 플란츠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 네 놈에게 흐르는 그 천박하고 더러운 피가."

란델이 눈을 치켜뜨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뒤에 서있던 기사들과 시종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플란츠를 보았다.

그리고 르메인.

그의 가라앉은 눈도 플란츠를 향했다.

어느새 1부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소리가 사라진 그 곳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특별석 위의 모든 이들이 플란츠의 말을 듣게 되었던 탓이다.

'플란츠.'

실리케의 눈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적이 흘렀다.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진 칼리안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하얀 손에 가려진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3)

칼리안이 손을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화를 참아내느라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바로 칼리안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주위 시선을 위해 만들어낸 표정이었다. 사실 칼리안의 진심은 오히려 그 반대. 당장 플란츠의 혀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플란츠!'

칼리안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지금 칼리안이 르메인에게 바라는 것은 불같이 화를 내며 플란츠를 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르메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가장 큰 득을 불러올 테니 말이다.

그런 칼리안의 바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르메인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플란츠를 혼내는 말을 하지도, 추후의 처벌을 예정하지도,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을 바라보며 2부를 시작해도 좋다는 의미로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르메인은 플란츠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칼리안은 다시 한번 드러나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실리케. 어디까지 발을 물리겠나.'

실리케라면 분명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 하리라 생각했다. 칼리안은 그것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실리케의 손에 들린 부채가 아드득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멍청한······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플란츠의 행실이 좋지 않은 것은 르메인도 잘 알았다.

광장에 술을 먹고 나섰던 일로 플란츠에게 금주령까지 내렸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칼리안을 욕하는 것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원래 그러니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죽은 후궁 프레이야의 출신을 두고 모욕적인 언사를 한 것, 그것도 프레이야를 끔찍이도 아꼈던 르메인의 눈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플란츠.'

실리케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플란츠가 아니었다.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플란츠와 눈을 마주친 실리케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플란츠는 당혹스러운 표정이나 후회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 일부러 하였구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일부러 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이 곳에 오기 전 플란츠를 찾아가 몇 마디 말을 한 것에 반발하여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이 분명했다.

실리케의 소리 없는 외침이 플란츠를 향했다.

'왜 하필 오늘, 플란츠!'

앨런 마나실이 왕궁으로 찾아왔다.

귀족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왕세자 후보에 칼리안의 이름이 포함됐다. 같은 날 플란츠가 돌이킬 수 없을 실수를 했다.

브리센의 영역에 적당히 발을 걸치고 있던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할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실리케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2부 공연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나 특별석의 그 누구도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실리케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칼리안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생각의 고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

무언가를 발견한 멜피르가 한숨을 쉬었다.

"허어."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놀라움의 한숨이기도 했다. 그의 앞에는 반쯤 잘려나간 밧줄이 있었다.

"이것이 전하의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생각만으로도 목이 죄여오는 것 같다.

멜피르는 서둘러 밧줄이 더 상하지 않도록 조치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했다.

한숨을 돌린 폴룬이 문득 고개를 돌려 아래를 쳐다봤다.

이 일을 막도록 알려준, 그래서 멜피르의 목숨을 건져 준 검은 머리의 왕자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칼리안의 말을 믿고 르메인의 옆자리를 포기하는 말을 했을 때 칼리안이 지어 보였던 표정이 다시 생각났다.

그 막내 왕자는 분명, 문제를 잘 풀어낸 학생을 보는 선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이 곳에 대해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지 않았던가. 멜피르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고 해결해 낼 수 있는지를 불안해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고 없이 오늘을 잘 넘기더라도 저 왕자님께서는 나를 찾지 않으실 것 같구나.'

대가를 원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뼛속까지 상인인 멜피르는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거래를 해본 적 없었다.

"허어······."

똑같은 소리를 다시 낸 멜피르가 마른 침을 삼켰다.

* * *

공연이 모두 끝났다.

꽃가루는 떨어지지 않았다.

'잘 해결 했나보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얀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란델과 플란츠가 먼저 내려간 뒤에 그 곳에서 빠져나왔다. 예상한대로 사고는 생기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서니 멜피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르메인이 그를 보며 말했다.

"좋은 시간이었네."

르메인은 멜피르가 옆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플란츠의 행동을 다른 귀족이 직접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우셨다면 다행입니다, 전하."

멜피르가 겸양을 보였다.

그 사이 칼리안은 멜피르가 아닌, 멜피르를 보는 실리케를 살폈다. 그런 칼리안의 눈에 작은 의문이 담겨 있었으나 누군가 그것을 눈치챌 만큼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실리케의 반응이 없다.'

그래. 플란츠가 일을 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오늘 일어났어야 할 사고가 없었다면 그것을 지나칠 실리케가 아니었다. 플란츠의 일로 다른 하나를 잊고 지나갈 만큼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사고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인데.'

지금 실리케는 멜피르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실리케도 모르는 일이라. 그럼 레넌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는 말이 되는데.'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얽혀들어간다.

"그럼, 무도회 장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멜피르가 이렇게 말하며 세 왕자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칼리안을 향한 말이었으나 칼리안은 아무 반응 없이 인사를 받고 밖으로 나와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란델, 브리센 상단, 폴룬 상단. 상관 관계가 무엇일까. 혹시 텐실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베른은 카이리스의 옆에 붙어 있는 신성국가 텐실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없었다. 이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시기의 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내려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상단과 연관되어 있다면 물건이다. 왕족을 건드려서까지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일반적인 값어치는 아닐······ 아!'

일반적인 값어치가 아닌 물건.

거기까지 떠올리자 드디어 답이 나왔다.

칼리안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가 드러났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광산이다.'

숨겨진 단어를 찾으니 모든 퍼즐이 맞았다.

베른일 적에 체이스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생각났다. 사고 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었다.

- 테러라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 장난 같은데요.

- 그것이 단순히 왕족에 대한 테러라고 생각하느냐?

- 왕자가 다쳤다 하니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까, 형님?

- 글쎄. 어디 한번 생각해보려무나.

너무 노골적이고 단순한 사고.

마치 왕족을 노렸다는 사실을 들키려고 작정한 것 같은 바보 같은 사고.

'신성국가의 신관들이 다이아몬드를 살 일이 많을 리 없지. 대부분 카이리스로 팔려고 했을 것이다. 텐실 쪽의 상단에서는 란델의 눈치도 보았을 테니 브리센이 아닌 폴룬을 선호했겠지.'

체이스가 곧바로 떠올렸을 문제의 원인을 칼리안이 되어서야 알아냈다.

'브리센이 다이아몬드 상권을 가져오려고 폴룬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었어. 어차피 폴룬이 아니면 그 정도 거래가 가능한 대형 상단도 없으니.'

왜 란델을 건드렸는지 그 이유도 명확해졌다.

'란델이 다치면 텐실 국왕이 개입하게 되고, 의문점을 파악하기 전에 빨리 마무리 되리라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레넌, 의외로 잔머리를 좀 굴리는구나.'

정리를 마친 칼리안이 눈을 돌려 멜피르를 쳐다봤다.

멜피르는 칼리안을 당장 만나보고 싶겠지만 뜻대로 해줄 수 없었다. 얼마나 큰 값어치가 있는 문제였는지 알아냈으니 멜피르의 목숨값도 제대로 받아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 무도회에 가지 않겠다고 행사 담당에게 전해."

칼리안의 작은 목소리에, 얀이 깜짝 놀라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플란츠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칼리안의 슬픈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미안."

"아닙니다, 왕자님."

자신보다 더 침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얼마나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 * *

공연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방문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외로군."

르메인을 찾은 이는 잠시 말 없이 서 있다 소파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적막한 집무실에 울렸다. 르메인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무실을 채워나가는 르니에리 향기를 쫓듯 창문을 열었다.

집무실의 창문을 모두 열어갈 때 쯤.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차가 담긴 쟁반을 든 시종장이 들어섰다. 그러자 르메인이 손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필요 없다."

실리케의 눈꼬리가 떨렸다.

완전한 불청객 취급이 아닌가.

시종장을 도로 내보낸 르메인이 천천히 걸어와 실리케의 앞에 앉았다. 눈에는 아무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사실 실리케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프레이야가 죽은 뒤로 줄곧 그래왔으니까.

"무슨 일이지."

르메인이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눈빛에 딱 어울리는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어린 아이니, 실수를 용서하세요. 벌을 받는 것은 브리센이 할테니까요."

실리케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르메인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해본 적 없던 탓이다.

르메인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지금껏 플란츠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렇게 직접 찾아온 적 없었다. 심지어 저런 말을 꺼내놓은 경우는 더더욱 없었던 실리케였다. 이번 일이 상당히 큰 잘못이긴 했으나 예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서라. 무엇을 용서해야 하나."

물론 르메인은 실리케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칼리안.

정확히는 앨런 마나실을 등에 업은 칼리안 때문이리라.

칼리안을 생각하니 앞에 앉은 실리케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가 함께 떠올랐다. 왜 이렇게 선뜻 브리센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당장 귀족들이 플란츠에게서 발을 돌리지 않도록 묶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겠지. 그래야 칼리안이 사라진 뒤 갈 곳 잃은 귀족들이 란델에게로 가지 않을테니.'

벌이라는 명목으로 무엇을 잃든, 칼리안이 죽은 뒤에 얼마든지 되찾아올 자신이 있는 것이다.

- 이번 일 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앨런의 말을 상기한 르메인이 작게 웃었다. 앞에 앉은 실리케의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웃었다.

'웃었어?'

그 생각을 알지 못할 실리케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동안 르메인은 다른 이들의 앞에서 감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헌데 이런 노골적인 웃음이라니.

실리케가 새로운 부채를 잡은 손에 힘을 쥐었고 르메인이 말을 건넸다.

"그래. 그 벌은 무엇으로 받을 생각이지."

당연히 왕실 기사단을 물릴 리는 없었다.

그것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닐테니까. 놀랐던 마음을 추스른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르메인이 예상한 바와 같았다.

"인상 깊은 공연이었으니, 상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아."

실로 인상 깊은 공연이었지.

실리케의 말은 폴룬 상단에 브리센의 상권을 일부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르메인은 용서의 크기만큼 양보의 범위를 정하면 될 것이고, 브리센 가문은 받아들이리라.

"오늘은 플란츠가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좋겠군."

거래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4)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칼리안의 옆에 놓인 것은 꽤 많이 쌓여 있는 선물 상자였다.

어제의 무도회에서 르메인이 플란츠에게 벌을 주기는 커녕 무도회장에 함께 등장했기 때문에 칼리안이 느꼈을 상심에 대한 위로의 선물이었다. 물론 명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칼리안이 들고 있던 포크로 선물인지 뇌물인지 모를 것들을 가리켜보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벌써부터 줄타기 하는 거야?"

플란츠가 프레이야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곧바로 소문이 났다.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기사들이 함께 있었으며 그들에게도 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메인은 플란츠와 함께 무도회장에 들어섬으로써 플란츠를 너그러이 용서했다는 것을 알렸다.

문제는 그 직후에 르메인이 멜피르를 불러 공을 치하했다는 것에 있었다.

'오늘의 공연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에, 상으로 왕궁과 카이리시스의 기사단에 들어오는 말과 마구 일체의 납품권을 폴룬 상단에 부여하겠다.'

본래 기사들은 자신의 말과 병장기를 스스로 마련한다.

하지만 왕궁과 수도 카이리시스의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전력의 상향 평준화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왕실에서 제공했다.

그러니 왕실의 기사단, 카이리시스의 기사단, 외성 경비대, 수도 치안대 등등이 포함된 카이리시스 전력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 번에 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연히 그 거래 가치도 어마어마했다.

르메인이 그것을 폴룬 상단에 넘겨준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이권을 빼앗겼음에도 실리케와 레넌 브리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저 멜피르 폴룬만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을 뿐이었다.

'플란츠 왕자를 두고 거래를 한 것이구나.'

이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평소 플란츠가 무슨 짓을 해도 나서지 않았던 브리센에서 이런 피해를 감수했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칼리안이 가진 세력이 실리케가 경계할 만큼이 되었다.'

눈치를 보던 몇몇 귀족이 플란츠로부터 살짝 발을 뺐다. 물론 플란츠가 용서 받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확연히 적은 수겠지만 완전히 없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들이 칼리안을 위로한다며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두 개만 빼고 다 돌려 보내. 돌려보내는 선물들은 누가 보냈는지만 적어놔줘."

무도회를 불참한 것과 같은 이유로 오늘의 조찬에까지 참석하지 않은 칼리안이 카이리스의 왕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느긋한 아침식사를 즐기며 대답했다.

지금 이름이 적힐 이들은 두 번 다시 칼리안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단 사흘만의 변화에 바로 마음을 바꾸는 자들은 칼리안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네. 그럼 어떤 것을 둘까요?"

"마법사 협회, 멜피르 폴룬."

칼리안은 아직 누가 선물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음에도 곧바로 대답했다. 두 곳에서도 선물을 보냈으리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말투였고, 명단을 보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협회, 그리고 멜피르 폴룬. 모두 있었다.

얀은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해하는 표정이 되었으나 칼리안의 말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협회 것은 그냥 받고, 폴룬 남작 것은 뭔지 봐 줘."

"네, 왕자님."

마법사 협회의 선물을 받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앨런 마나실을 매개로 마법사 협회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곧 선물 상자들의 분류가 시작되었다. 되돌려 보낼 것을 뺀 두 개의 상자가 테이블에 남았다. 그 중 넓적하고 높이가 낮은 상자를 집어든 얀이 뚜껑을 열어보였다.

"여기, 폴룬 남작이 보낸 선물입니다."

우아한 손길로 햄을 썰던 칼리안의 움직임이 순간 딱 멈추었다. 왜 그러나 싶어 상자 속을 쳐다 본 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고 칼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정신 없이 웃던 칼리안이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가 하라는 것은 아닐거고. 어제 상단에 무슨 얘기 했어?"

"그게······. 왕자님께서 레이븐을 특별히 아끼신다고는 했어요."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것은 아주 긴 체인을 가진 목걸이였다.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긴,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말의 목에 채우기 딱 좋을 정도의 긴 목걸이였다.

어제 공연장의 사람들이 혹시라도 레이븐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걱정한 얀이 칼리안이 특별히 아끼는 말이니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그것을 멜피르가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말 목걸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나도 없는 목걸이를 우리 레이븐이 먼저 받네."

레이븐의 검은 털에 잘 어울릴 백금의 얇은 체인 한가운데에 루비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큭큭거리며 남은 웃음을 털어낸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절하지도 못하겠네. 레이븐한테 너무 잘 어울리게 생겼어."

칼리안이 다시 햄을 썰어내며 말했다.

"값을 따져서 폴룬 상단으로 보내. 마음에 드는 물건이니 사겠다고 전해주고."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요?"

"응. 받는 게 아니라 사는 거야."

물론 멜피르가 제 목숨값으로 말 목걸이 하나만 보낸 것은 아닐 터였다. 무엇을 원해서 살려주었는지, 칼리안의 의중을 떠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고작 보석으로 끝낼 수가 있나.'

칼리안은 만약 자신이 저 선물을 받는다면 멜피르의 목숨 값에 해당될 가치의 진짜 선물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려고 레이븐의 목걸이를 보냈겠지. 나에게 줄 선물은 따로 있다는 의미로.'

하지만 칼리안이 원하는 것은 저런 재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저 선물을 그냥 받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당분간 내가 그냥 받는 선물은 마법사 협회에서 보내주는 것 뿐이야. 폴룬 상단에서 오는 것은 따로 알려줘. 나머지 귀족들 선물은 받지 말고 알아서 돌려보내."

얀에게는 미안했지만, 멜피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고 경고했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얀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걸이를 쳐다본 칼리안이 또 웃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웃겼다.

* * *

책상 앞에 앉아있던 앨런은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곧 누군가 그를 찾아오자 살짝 눈을 떠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이리 놓게."

눈 밑이 시커멓게 된 여성이 앨런의 앞에 새로운 서류를 내려놓았다. 비척비척 팔을 거둔 에우리아가 말했다.

"이건 어제 자 정보. 이제 진짜 없어요, 마나실 님. 다 털었대요."

에우리아 세이렌.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의 수장이며, 마법 공학자를 다수 배출한 마법사 가문인 세이렌 백작가의 장녀이자 5서클을 마스터한 능력있는 마법사였다.

평소 에우리아는 주신 세렌티보다도 고룡 시스파니안과 앨런 마나실을 더 믿었다. 에우리아에게 있어 앨런 마나실은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참 마법사 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국왕 탄신일 축제 둘째날 아침에 협회 문을 열고 들어온 적은발의 마법사를 본 에우리아가 얼마나 감격에 겨워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그런 에우리아에게 앨런이 처음으로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 혹시 여기 마법사들은 칼 든 새끼 사자가 왕관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 중인가?

그럴리가.

에우리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틀 간의 지옥이 펼쳐졌다. 앨런 마나실에 대한 광신도 같은 믿음이 살짝 식을 뻔 했을 만큼 험난한 이틀이었다.

온 카이리시스를 뒤져 찾아내는 정보가 실리케의 음모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낯이 된 마법사들이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정보 정말 많이 모은 거예요."

"알고 있네. 마법사들이 정보 찾는 것을 참 잘한다고도 생각 중이네."

"네. 의외의 재능이네요. 저도 그래서 정보 길드를 하나 만들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한 앨런이 굵직한 것들을 꺼내어 추렸다.

"실리케가 들어온 뒤 왕궁에서 독살되거나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4명, 마찬가지로 독살이 의심되는 마법사가 6명. 독살이나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족이 13명······. 참 대단하군. 이 정도인데 르메인이 그냥 있었다는 것이."

모두 정황 증거 뿐인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죽었다는 이들 모두가 실리케 혹은 브리센 후작가와 연관이 있었다.

정확한 증거로 모인 것은 레넌의 집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타크리모사를 레넌이 왕궁에 들고 갔다는 마법사의 증언,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크리모사를 대량으로 수입해왔다는 증거 뿐이었다.

'진작부터 의문점이 남은 사망 사건들의 증거를 모았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그랬다더라'는 수준밖에는 되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앨런이라는 중심점이 없는 이상은 증거가 있어도 소용 없었을 일이었다는 것도 알았기에, 앨런은 그것에 대해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고생했네. 이제 가서 좀 쉬게."

"네. 마나실 님도 쉬세요."

에우리아가 당장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얼굴로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에우리아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앨런이 혀를 쯧쯧 찼다.

"젊은 놈 체력이 저래서야."

앨런은 곧 에우리아가 가져온 서류를 손에 들었다.

표지를 제외하면 딱 한 장 짜리의 짧은 보고서였다.

[플란츠의 프레이야 모독 사건에 가려진 하나의 미스터리!]

다분히 마법사다운 보고서 제목을 본 앨런이 피식 웃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모든 보고서의 제목들이 다 이런식이었다. 보고서란 일단 흥미롭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마법사들이란.

"제목은 이렇게 써 놓고서는 비밀 엄수 마법을 걸어뒀군."

제목과 달리 중요한 내용이라도 담겨 있는 모양이다. 내용을 모두 보고 나면 종이가 자동으로 불에 타 사라지므로 주의 깊게 읽으라는 경고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 작성자와 앨런만 내용을 알 수 있었고, 에우리아조차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는 채 가지고 왔을 터였다.

"그래.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중얼거린 앨런이 표지를 넘겼다.

- 우연한 기회에 국왕과 함께하는 기마 경기에 초대된 본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폴룬의 공연장을 찾았으나 이게 웬걸. 8층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경기장도 안보이고 진행자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비운의 상황. 허나 본인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이글 아이'와 '매직 이어'를 시전하였다.

먼 곳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마법과 먼 곳의 이야기를 들리게 해 주는 마법.

"고작 경기 하나를 보자고 아무리 저레벨이라지만 활성화 유지가 필요한 마법 두 개를 동시에 쓰다니 참 쓰잘데기 없는 일에 마나를 낭비하는 친구로군."

불과 하루 전에 재미 삼아 얀에게 물벼락을 선물했던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소했다.

- 드디어 국왕 일가가 입장하고 뜨거운 화제의 대상 칼리안 왕자가 보였다. 칼리안 왕자는 멜피르 폴룬의 인사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살펴보세요.'

그리고 잠시 후, 본인은 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글을 읽어내려가던 앨런의 얼굴이 조금씩 진지하게 변했다.

보고서는 칼리안이 예정된 사고를 막았으며 범인은 아마 브리센 상단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을 던지며 끝났다.

작성한 이도 자신이 알아낸 사실의 중요함을 알았던지 어디에서도 그가 본 것을 발설하지 않겠으니 앨런도 비밀을 꼭 지켜달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칼리안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이 알려질 경우 칼리안의 입지가 곤란해질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은 장난을 좋아할 뿐,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곧 앨런의 손에 들린 보고서의 글씨들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한글자 한글자가 불에 타들어가듯 사라졌다. 그 불이 종이에까지 번졌으나 열기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앨런은 그 보고서가 완전히 타 사라지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다.

"흐음."

처음 칼리안을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 수비대원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 말을 타고 근처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앨런은 칼리안이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을 들은 직후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앨런이 인근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범위는 칼리안의 예상보다 더 넓었으니까.

"나도 그렇고, 사고도 그렇고······ 우리 왕자님. 어떻게 먼저 아셨을까."

앨런이 다시 한번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1)

그 날 늦은 오후.

칼리안은 금고 상판의 마법 문양을 맞춰 문을 열었다.

옛 칼리안은 그것을 직접 건드린 적이 없어 기억하지 못했고 일전에 얀이 여는 것을 보아 두었던 대로 조작하느라 몇 번을 틀리다 간신히 열었다.

칼리안 정도는 들어가도 될 만큼의 크기를 가진 금고 안에는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몇몇 서류와 상당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수표를 제외한 금 은 동화를 한 움큼 씩 집어 주머니에 담아 품에 넣었다.

"미안. 조금만 꺼내 쓸게."

그것이 어디가 조금만이냐고 물을 얀은 이미 밖에 있었으므로, 칼리안의 말에 다른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체르밀 궁 앞에서 얀과 함께 칼리안을 기다리던 앨런은 검은 색의 로브를 손에 든 채였다.

그리고 옆에는 품격 있는 말의 자세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한 모습으로 한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 서 있는 레이븐이 있었다.

"레이븐."

반가운 마음에 부르자, 레이븐이 머리를 들며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런 레이븐의 고삐를 넘겨주는 얀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님. 저 없이 가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함께 가는 것이 세계 최강의 마법사인 것을 또 까먹은 모양이다.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븐에 올랐다.

훌쩍- 하고 전보다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 오르는 그 모습에 앨런의 눈이 조금 가늘게 변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앨런은 곧 상념을 감추며 얀을 향해 말했다.

"쓸데 없는 걱정은 하지 말게. 전하께서도 허락하셨고, 또 옆에 내가 있을 테니."

"그래, 걱정 마. 내일 새벽까지는 올게."

그 때 칼리안이 기습적으로 말했고, 레이븐이 알아서 출발했다.

얀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소리 죽여 외쳤다.

"내일이라니요! 자정 전에 오겠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칼리안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힘내라는 듯 얀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앨런이 칼리안을 따라 달려 나갔다.

성공적으로 얀을 따돌리고 앨런의 동행을 보증 삼아 왕궁 밖으로 나온 칼리안은 앨런에게서 건네 받은 로브를 재빨리 뒤집어 썼다. 깊은 후드가 머리와 눈을 가려주었다.

"예전에는 다른 이유로 얼굴을 가렸는데. 기분이 이상하네요, 스승님."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가져 보는 자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좋으십니까?"

"네, 이게······ 얼마나 기다려 졌었는데요."

하마터면 '이게 얼마만의 외출인데요' 라고 말할 뻔한 것을 간신히 돌렸다. 옛 칼리안은 지금이 첫 외출이었으니까.

앨런이 대답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븐의 갈기를 흐트러뜨리며 장난치던 칼리안이 물었다.

"정말 전하께서 허락을 하신 겁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르메인도 왕자님의 외출을 보고 받았겠지요."

나몰라라 하는 태평한 말.

르메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앨런이 알아서 해줄테니까.

그리고 그 시간 르메인은 칼리안이 왕궁을 또 나갔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앨런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그래서 이번 외출을 알아서 책임져야 할 앨런은 이렇게 튀어나온 칼리안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까지 두고 다니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칼리안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왕궁 밖으로 나온 것은 실리케의 독차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준비물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온 김에 키리에도 찾으려 했다. 이 모든 것이 칼리안이 아닌 베른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었으니 앨런과의 동행은 어려웠다.

이 시간을 위해서 연기까지 한 칼리안이었다. 독차를 피하기 위해 차를 받아들다 실수인 것처럼 떨구었던 것이다. 혼자 다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이 생기더라도 최소한 도망칠 정도의 체력은 되어야 했으니까. 두 번은 쓰지 못할 방법이었으나 어차피 내일부터는 제대로 차를 마실 생각이니 상관 없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순순한 허락이라 칼리안이 오히려 놀랐을 정도였다.

"테이난샤 거리에 마법사 협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을 테니 찾아오시지요."

카이리시스의 지도는 이미 세작들을 통해 세크리티아에 잘 전해져 있었다. 옛 칼리안보다 베른이 카이리시스 구조를 더 잘 알 정도였으니까. 따라서 칼리안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스승님. 감사합니다."

앨런은 더 이상 칼리안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았고 칼리안도 말하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광장을 지나자마자 헤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