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 *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 폴룬은 지금 저택 후원의 작은 연못가에 서서 물고기 밥을 주고 있던 참이었다. 즉, 매우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던 그에게 하인이 달려오더니 검은색의 자개 장식 마차가 저택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동글동글한 멜피르의 눈이 물고기의 것만큼 크게 벌어졌다.

"앨런 마나실 경이 이 곳에 오셨다고?"

"네, 남작님. 방금 그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후원까지 달려오느라 차오르는 숨을 소리 없이 삼키던 하인이 대답했다.

"허어······ 그분께서 대관절 무슨 일로 오셨는가."

물고기 밥이 담긴 그릇을 뒤에 서 있던 하인에게 넘겨준 멜피르가 손을 탁탁 쳐서 묻어있던 것을 털어냈다. 그 뒤 서두르는 걸음으로 들어가던 중 또 한 사람이 멜피르에게로 달려왔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하인이 아닌 집사였다. 멜피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나이 많은 그의 집사가 저렇게 직접 뛰어온다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곧 멜피르의 곁으로 다가온 집사가 귓가에 대고 말을 전했다. 멜피르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마나실 경의 마차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 말을 끝까지 전해들은 멜피르는 하마터면 연못에 빠질 뻔한 다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에서 벌어질 뻔한 사고를 막게 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그 짧은 말로 그의 목숨을 살려냈던 칼리안이 왔다. 3개월 동안 미뤄 두었던 목숨값을 받으러 온 것이다.

그것도 이런 대낮에 직접!

멜피르는 지금까지 살아온 많은 날 중 오늘의 멜피르가 가장 똑똑하기만을 바라며 서둘러 칼리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2)

르메인의 고개가 문 밖에 서 있던 카에라의 기사를 향해 돌아갔다. 칼리안을 따라가도록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냥 두시지요. 왕자님이 곤란할 겁니다."

"위험한 것보다는 곤란한 것이 낫지."

르메인이 굳은 얼굴로 이 사달을 낸 원흉을 향해 말했고 앨런의 입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감히 앨런 마나실의 마차를 습격할 이는 이 카이리스에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안전하기로는 이 아르피아 궁에 버금갈 곳이 바로 앨런 마나실의 마차인 것은 맞았다.

다만 그 마차의 안전함이 칼리안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할 앨런은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게다가 숨겨둔 검도 따르는 중이니 위험할 것이 없습니다."

르메인의 눈썹이 움직였다. 호위 시종을 두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는다면 왕자가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책이 따라야 하므로 르메인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대답했다.

"그래. 일단 기다려보도록 하지."

그렇게 일단락을 내고 난 뒤에야 르메인의 팔이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지금껏 앨런을 문가에 세워 두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굳이 권하지 않았어도 앉을 참이었던 앨런이 그 앞으로 가 앉았다.

앨런을 잠시 쳐다보던 르메인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이미 한번 큰 일을 치른 아이라 걱정이 앞서는군."

이렇게 걱정 많은 양반이 그 동안 어떻게 그리 무심했는지.

아몬드 쿠키 하나를 집어든 앨런은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과 함께 쿠키를 씹어 삼켰다. 우물거리는 앨런의 입을 잠시 보던 르메인이 물었다.

"무엇때문에 나간 것인지는 알고 있나?"

앨런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알 것 같아서였다.

"리베른의 마법 학원에 대해 묻던 중 팔랑팔랑 나가셨습니다."

"마법 학원이라? 그 아이가 학원까지 만들 결심을 한 것인가?"

"결심을 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애매한 대답을 한 앨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굳이 가시를 숨기지 않은 질문을 꺼내놓았다.

"만약 마법 학원이 세워진다 하더라도 전하께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재라는 것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니. 혹여 그것이 전하의 걱정거리가 되겠는지요?"

르메인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칼리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겠느냐는 말인 듯 한데. 섣불리 내 자리를 욕심 낼 아이가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런 이유로 내가 칼리안을 견제할 일은 없을 것이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날을 세울 이가 넘쳐나는 것이 걱정 될 뿐이지. 칼리안의 옆에 경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 중이니 그리 쳐다보지 말게."

앨런이 왜 자신의 편에 서있는지 모르는 르메인이 아니었다. 처음 오던 날부터 못을 박지 않았던가. 칼리안이 무탈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집안 정리를 해줄 뿐이라고.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번 로젤리타에 경이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한가?"

실리케가 얌전히 있는 중이라지만 지그프리드의 영지까지 가는 그 먼 길에 행여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하는 말이었다. 물론 앨런도 이런 르메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며 르메인을 안심시켰다.

"밖에 있을 왕자님보다 안에 계실 전하의 목이 더 간당간당하니 쓰잘데기 없는 걱정은 내려두시지요."

르메인이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빨리 와서 이 인사를 좀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칼리안이 기다릴 것만 생각하고 무작정 달려가던 멜피르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왕자님께서만 오셨는가?"

"네. 시종 둘만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혼자서, 그것도 앨런 마나실의 마차에 탄 채로 왔다.

분명한 비밀 방문이다.

멜피르가 긴장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인들 중 왕자님을 뵌 이가 있나?"

"안그래도 먼저 주변을 물려달라 하시어 따로이 보는 눈 없이 뫼셨습니다."

"그래. 잘했네."

멜피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후다닥 뛰어갔다. 지쳐버린 집사가 더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다 다시 멜피르가 간 곳을 향해 달렸다.

저택으로 들어선 멜피르는 서둘러 손을 씻고 옷의 먼지를 털어낸 뒤 응접실로 향했다. 생각 같아서는 편히 입고 있던 의복도 정갈한 것으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왕자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다.

응접실 밖에 서 있는 얀과 키리에가 보였다.

미리부터 주변을 물려둔 그 모습에 멜피르도 집사를 밖에 두고 홀로 응접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창을 등지고 앉아 찻잔을 들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과 시선이 마주친 멜피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남작 멜피르 폴룬, 3왕자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 속삭이듯 말하고 스쳐 지나간 것이 첫 만남의 전부였기 때문에 칼리안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대면한 멜피르가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를 하는 이유를 눈치 챈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하필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를 시작한 폴룬 상단이었다. 그러니 목숨값으로 대체 뭘 달라고 할지 걱정이 태산일 터였다.

"연락 없이 찾아와 미안합니다. 드러내기가 어려워서요."

사실 칼리안이야 대놓고 멜피르를 찾아오든 궁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왕자가 남작을 만나겠다는데 누가 참견을 하겠는가.

"저를 배려해주신 것임을 아는데 어찌 사과를 하십니까. 찾아주시니 그저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멜피르를 찾은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멜피르를 위해서였다. 마법사 협회 외에는 그 어떤 귀족과도 손을 잡지 않은 칼리안이다. 때문에 멜피르와 따로 만난 것이 알려지면 그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앉으세요. 잠시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조금 더 긴장한 얼굴이 된 멜피르가 주섬주섬 걸어와 조용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은 뒤,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그간 생각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레이븐의 목걸이를 선물해서 의중을 떠보려 했더니 완전히 간파했다는 것처럼 목걸이 값을 보내온 칼리안이었다. 그 이후로 아무 말이 없어서 혹시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더 큰 것을 요구하려 하는지를 알지 못해 속이 편칠 않았다.

칼리안의 말에 멜피르는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답했다.

"네, 왕자님. 천성이 장사꾼인지라 받기만 했던 적이 없다보니 내심 걱정을 하였습니다."

"솔직한 대답이 참 마음에 듭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동안 멜피르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한 멜피르가 마른 침을 삼킬 때 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폴룬은 무엇을 거래합니까?"

멜피르의 어깨가 잠시 경직됐다.

말과 다이아몬드요, 라는 대답을 하는 순간 저 어린 왕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왕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성격에 지금 마시는 차 값도 치르고 갈 것이 뻔했다. 그래야 훗날에 또 얽힐 일이 없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한 멜피르의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다시 여유롭게 차 향을 즐겼다. 한 모금의 차를 더 넘겼을 때, 멜피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거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폴룬 상단은 말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고 있지만 멜피르 폴룬은 아직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았다는 말이었으니까.

칼리안이 기대했던 대답, 그리고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아직이라 하니."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멜피르를 응시했다.

"내가 폴룬 남작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까요?"

수완 좋은 상단주 멜피르 폴룬 말고, 능력있는 남작 멜피르 폴룬을 상대하고 싶다고.

칼리안이 멜피르 폴룬을 찾아온 것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사였던 베른은 어차피 상단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자질구레하게 미래의 일들을 예견해서 돈을 벌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상단주 멜피르와는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멜피르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허어······."

저도 모르게 버릇 같은 숨을 내쉰 멜피르가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다시 한번 차를 마셨다.

달칵.

찻잔이 한번 더 작은 소리를 냈고, 멜피르의 입이 열렸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왕자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잘 되었군요."

칼리안의 눈에 흡족한 빛이 들었다.

살려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천천히 말했다.

멜피르가 자세를 다잡아 앉았고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조금 두루뭉술한 질문이었다.

"남작은 상단이 아닌 다른 것도 운영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앨런이야 칼리안의 사람이니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지부터 숨김 없이 말하고 부리겠으나 멜피르는 아직 아니었으니 그 의중부터 판단해보려는 것이다.

멜피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람이 있고, 돈이 있으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브리센도 있을 것이라서."

앨런이 추측한 것과 같이 칼리안은 지금 마법 학원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이 마법사단을 만드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브리센과 얽혀 귀찮은 일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멜피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떼며 물었다.

"브리센이 있다면 왕자님도 계신 것이 아닙니까?"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맞습니다. 나도 있습니다."

"사람과 돈이 있고 브리센 앞에 왕자님이 계신다면 그 역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온 이유에 대한 수수께끼를 더 이어나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칼리안은 더 숨기지 않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카이리스에 마법 학원을 세워볼까 합니다. 학원 하나 쯤 세울 돈은 이미 충분하고 교육을 담당할 이들이야 협회의 마법사든 앨런이든 써먹을 사람이 많은데. 운영이 문제입니다."

태평하기 그지 없는 마법사들이 학원을 제대로 운영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것을 고민하다 이 수완 좋은 상단주가 생각났고, 아직 받지 않은 목숨값이 떠올랐다. 그 길로 이렇게 멜피르를 찾아온 칼리안이었다.

멜피르가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으리라는 것을 아는 칼리안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단순히 학원을 운영하는 것을 떠나 멜피르 폴룬 남작이 3왕자 칼리안의 편에 서게 되는 일이었으니까.

결정을 내린 듯 멜피르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리안의 제안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그것이 저의 목숨값입니까, 왕자님?"

자신을 살려준 대가로 시키는 일인지. 그래서 의지와 상관 없이 꼭 해야 하는 일인 것인지. 그리 물어왔다.

칼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받았습니다, 목숨값."

달칵.

마지막 모금을 비운 차를 내려놓은 칼리안이 답했다.

멜피르의 시선이 한동안 빈 찻잔에 머물렀다.

곧 시원한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석달 동안 멜피르의 마음 한 구석에 얹혀있던 짐을 털어낸 것에 대한 후련함이었다.

"하겠습니다."

멜피르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 * *

이틀이 지난 아침.

체르밀 궁의 식당에서는 빨갛게 물을 들여 구운 빵, 체리가 가득 들어간 파이, 붉은 색을 가진 온갖 과일과 채소가 준비되고 있었다.

체르밀 궁을 둘러싼 회랑은 붉은 실로 장식됐고 인공 호수 주변에는 빨간 라프라니아 꽃이 한가득 놓였다. 바람결에 흩어진 꽃잎이 호수 위를 맴돌았다.

카이리스 사람들은 탄생을 축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죽은 이들의 앞에 붉은 꽃을 놓았던 것처럼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도 붉은 꽃을 건넸다.

그들에게 붉은색은 죽음과 탄생을 아우르는 색이었다.

그러니 그 얼마나 개성 없는 풍속인가,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같은 색을 건네다니.

아무튼 칼리안 혼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전통을 바꿔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잠에서 깨자마자 석류 주스를 마신 뒤 메를린이 건네주는 열 다섯 송이의 라프라니아 꽃을 받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칼리안의 생일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이리스의 3왕자가 드디어 성년이 되는 감격스러운 날인 것이다.

"열 다섯 번째 탄생일을 맞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을 이 말을 오전 내내 들었다. 세뉴 관에 모인 귀족들로부터 축하 인사와 생일 선물을 받는 것에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로젤리타 여정에 함께 할 이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간단한 감사 인사가 포함된 건배사를 하고 긴 시간에 걸쳐 밥을 먹고 차를 함께 했다.

쉴 틈 없이 저녁 만찬을 위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지그프리드관을 향해 갔다.

붉은 실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 색의 망토가 어쩐지 칼리안의 외양을 떠올리게 했다. 메를린이 일부러 그런 색으로 고른 것이 분명했다. 검은 색 재킷과 바지에는 별다른 장식을 넣지 않았으나 어디서나 눈에 띄는 망토 덕에 어차피 재킷이나 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한가지 흠이었던 마른 몸에도 살이 붙었으니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다시 머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반갑습니다."

칼리안은 또 이렇게 인사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반갑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귀족들이 심한 고민을 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별 뜻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계속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그러다보니 버릇이 되었다.

귀족들의 찬탄 가득한 눈길을 한 몸에 안은 칼리안이 언제나와 같은 기품있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갔다.

- 우뚝.

그리고, 정말로 아주 잠시 동안 발을 멈칫했다.

석 달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플란츠가 나와 있었다.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3)

요즘 뭐가 그리 바쁜지 몰라도 란델은 조찬에도 가끔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도 늦게 올 모양이었는지 란델은 없었다.

왕자들을 위해 마련된 동그란 테이블에 반갑지 않은 놈 한 명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칼리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아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한 자리에 앉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칼리안에게 '참 독한 감기'를 안겨준 실리케를 말 한마디로 몰아넣은 플란츠가 아닌가.

게다가 그 일이 있은 뒤 처음으로 둘이 함께 앉는 자리였다. 그러니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닌 둘의 사이가 어떨지 심히 궁금할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플란츠와 가야 할 길이 다르니, 억지로 친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귀족들의 시선도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야."

그런데 놈이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자신을 보는 귀족들을 한 명씩 빠짐없이 쳐다보며 시선을 돌리게 한 플란츠가 테이블에 상체를 누이듯이 기대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래 전에 있던 일과 같은 상황이 또 한번 벌어졌다.

"야. 피눈깔."

"칼리안."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호칭에 곧바로 대꾸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소 딱딱한 어조로 덧붙였다.

"넘겨 듣는 것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형님."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잠시 빛났다.

한참동안 칼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곧 그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잖아."

아니잖아.

칼리안의 눈이 조금씩 가늘게 변했다.

플란츠의 눈에는 날이 섰다.

"대들고, 칼도 쓰고, 말도 타고."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른한 한숨 같은 목소리가 칼리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 누구냐고."

칼리안은 말 없이 그 눈을 쳐다보았다.

그래. 플란츠 정도면 눈치 챌 만도 하다. 제 손에 올려놓고 그리 괴롭혀오던 동생이 하루 아침에 바뀌었으니, 모르면 얀이다.

칼리안은 아주 잠시 고민을 했다.

상관없다. 그렇게 결정했다.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것으로.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앨런처럼 마음을 얻어내야 할 상대도 아니니 사실을 이야기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만약 플란츠가 칼리안에 대해 아무리 확신한다 한들, 밝혀질 수 있을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잡아 떼면 그만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칼리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속은 시끄러웠으나 아무튼 겉보기로는 그랬다.

그런 칼리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연회장에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옛 칼리안이 떠나면서 전해주고 간 기억 속의 플란츠가, 그가 칼리안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 뒤에는 세크리티아를 망국으로 이끌었던 플란츠가 생각났다.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의 빈자리에서 떼어지질 않았다.

멀리서 그런 칼리안을 본 앨런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앉았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플란츠가 떠난 이후부터 칼리안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앨런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앨런은 칼리안에게 다가가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걱정하는 마음만 전했다.

* * *

다음 날.

연회장에서의 일로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칼리안에게 아침부터 앨런이 찾아왔다. 앨런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은 다 털어내셨는지요."

칼리안이 정말 신통방통하다는 눈으로 앨런을 쳐다봤다. 이 현명한 마법사는 그깟 말 한마디를 안해도 칼리안의 속을 다 알아보는 것이다.

앨런이 조용히 웃으며 덧붙였다.

"아직 못 털어내셨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건네온 말을 듣고서야 칼리안이 웃었다. 가끔씩 이렇게 아무 도움 안되는 말을 슥 꺼내놓는데, 그것이 어찌나 좋던지.

다만 정말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맞았으므로 곧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전날 플란츠와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플란츠가 칼리안이 바뀌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플란츠라면 눈치챘을 법 하지요. 망나니처럼 굴고 있어도 생각까지 짧은 아이는 아니니."

앨런의 후한 평가에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칼리안은 그냥 다음 말을 꺼냈다.

"우선은 모르는 척 했지만 당연히 믿지 않겠죠."

"무엇을 믿게 해야 합니까?"

칼리안이 대답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것을 본 앨런이 칼리안을 대신해 말했다.

"이전 칼리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알아도 밝혀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굳이 걱정하지는 마시지요."

그렇게 말한 앨런은 흠, 하는 소리를 잠시 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들킨 것은 둘째치고 베른으로 살지 않겠다 하였음에도 또 플란츠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어 가라앉아 있으니, 그 말을 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앨런이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 다시 입을 닫았다.

대신 앨런은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받으십시오."

주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는데, 그것을 여니 은색의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그냥 두꺼운 모양의 반지를 꺼내든 칼리안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끼워 보시지요. 꽤 마음에 드실 터이니."

좀 큰 크기의 반지였기 때문에 어디에 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은 그것을 둘째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반지가 알아서 줄어들며 손에 꼭 맞게 바뀌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음을 안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앨런을 쳐다봤다.

"가끔 늙은이 생각이 궁금하실 때 부르시면 같이 고민을 해드리겠습니다."

"통신용 마법이 걸린 반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칼리안은 정말 깜짝 놀랐다. 사실 지금 칼리안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앨런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으니까.

"왕궁에는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아 있어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왕궁에 있을 때에는 대화가 어렵겠으나 왕궁 밖에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응답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든든하네요."

앨런이 지금 왕궁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은 알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앨런에게 기댈 수 있으리라는 것이 반가웠다.

학회의 보물창고가 또 털렸다며 에우리아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저 좋아하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은 또 현명한 마법사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다 이 곳에 온 다른 이유가 생각난 앨런은 자세를 다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마차가 갔던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멜피르 폴룬으로부터의 연락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만나 보셨습니까?"

"네. 어제 찾아왔기에 만났습니다. 인재를 또 찾으셨더군요. 어찌나 셈이 밝던지."

그리고 앨런은 품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학원 부지 선정을 포함한 건설 비용과 초기 운영비, 교사 선임비 등이 적혀 있었다. 즉, 돈 달라는 내용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을 꼼꼼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만치 않은 금액을 본 앨런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첫 비용을 전부 왕자님께서 부담하겠다 하셨다던데 무리가 가지는 않겠는지요?"

"돈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왕실 재정으로 부담하지 않고 폴룬 남작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제가 직접 참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스승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뭐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뜻을 보였다. 곧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금고에서 수표 뭉치를 꺼내와 앨런에게 건넸다.

"저 대신 좀 전해주세요."

"큰 돈인데 제대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감시할 필요 없이 주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겨두시면 됩니다. 아무리 큰 돈이라 하더라도, 폴룬 남작에게까지 큰 돈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저 정도 돈에 신임을 버리는 사람도 아니고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폴룬 남작은 상인이라서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스승님이나 협회장에게 간혹 자문을 구할 테니 제가 없는 동안 잘 대해주시고요."

"그것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 뒤 칼리안은 마법 수업 대신 마법 학원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을 앨런에게 건넸다. 멜피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따로 말을 전해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얀이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만 이제 다음 일정이 있습니다."

"그럼 저는 오후 마법 수업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만 대화를 마칠 시간임을 안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잠시 인사를 하고 갈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다른 일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은 저와 얘기나 나눠주세요."

"수업은 치우고 수다나 떨자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내일이면 시스파니안을 만나러 가야 하고, 그렇게되면 한동안 스승님을 뵙지 못할 텐데 오늘까지 수업을 하면 아쉽잖아요."

수업 하기 싫은 핑계가 참 그럴싸했다. 때문에 앨런은 웃으며 그리하자 대답했다.

* * *

체르밀 궁의 정문 앞에 검은 갑옷을 갖춰입은 스무 명의 기사가 도열하여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보낸 지그프리드의 정예 기사들이었고, 출발 전날 칼리안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체르밀에 방문한 참이었다.

칼리안보다 먼저 나와있던 키리에가 상당히 호승심 강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리에 역시 검을 다루는 이였으니, 서로간의 차이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탓이다. 물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 역시 그런 키리에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공작의 기사와 왕자의 호위가 알게 모르게 기싸움을 벌이는 사이, 궁 밖으로 칼리안과 앨런, 그리고 얀이 나왔다.

칼리안과 앨런이 나란히 걷고 시종인 얀은 당연히 조금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얀은 그런 것도 모른 채 그저 반가운 얼굴로 기사들을 보며 눈인사를 보냈다.

전날 오찬때는 이들을 이끄는 유란이라는 기사만 참석했기 때문에, 칼리안은 나머지 기사들은 처음 만난 터였다. 때문에 그들의 앞에 선 뒤 하나하나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호오.'

곧 칼리안의 입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말로만 듣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인데. 실로 대단한 위용이군.'

슬레이만이 얼마나 고르고 골라 보냈는지 알 만 했다. 덩치며 기백이며 그 앞에 선 키리에가 한낱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것 때문에 칼리안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눈빛들이 어째······ 이상한데.'

칼리안을 호위하겠다며 찾아온 기사들의 눈빛이 지켜줘야 할 왕자를 보는 그것과는 너무나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말로 써본다면,

- 우리 공자님을 시종으로 부리고 있는 새끼가 너였냐?

딱 이런 느낌이라 하면 될 것이다.

옆에 서 있던 앨런이 이런 모습을 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얼굴을 했다. 로젤리타 여정 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들이 칼리안의 칼 솜씨를 볼 일이 한 번쯤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정말 궁금했다.

그것을 볼 수 있을 키리에는 매우 기대되는 표정을 살짝 드러냈고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불편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왕자님?"

칼리안이 조금 더 노골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이리시스에서 나가자마자 땅에 묻힐 것 같아서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칼리안은 기사들과 눈을 마주한 채로 힘주어 말했다.

"얀. 마실 것 좀 가져와."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엄청난 투기가 기사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얀이 체르밀 궁의 건물로 다시 들어간 뒤 칼리안이 기사들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저렇게나 반겨주니, 가는 길에 다른 생각을 할 일은 없겠는데."

저런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플란츠에 대한 생각같이 불필요한 고민에 빠질 틈이 있겠나 싶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기싸움을 보던 앨런이 말했다.

"같이 못간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때가 있나."

한동안 기사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선전포고를 마친 칼리안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가는 곳까지, 잘, 부탁합니다."

어느새 버릇이 된 것 같은 진한 웃음이 다시 한번 맴돌았다.

제9장. 확인해 (1)

칼리안은 그저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왔다. 다만 평소 달리 식당이 아닌 궁 밖으로 곧장 나와 르메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조찬을 마친 후에는 간단한 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르메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칼리안의 앞에는 아르센이, 좌 우로 키리에와 얀이, 뒤로는 치유술을 쓸 수 있는 히나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런 일행의 앞 뒤로 검은 옷의 기사들이 도열했다.

왕실 마차를 탔다면 왕실 문양이라도 있었을텐데 칼리안은 딱히 왕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표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그래도 눈에 띄는 외양인데다 아직은 같은 편보다 적이 더 많은 칼리안이었으니 굳이 나서서 왕족임을 알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로젤리타를 떠난다 하니 광장부터 카이리시스 외성에 이르는 왕도 주변에 환송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칼리안이 나섰다.

화려한 마차는 없었으나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칼리안이 있었다. 때문에 이전의 왕자들에 비해 그 위용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이 지나가는 걸음 걸음마다 환호성이 울리고 무탈을 기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성인식.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로젤리타가 시작되었다.

* * *

출발 후 며칠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칼리안이 가게 될 도시들에 왕궁의 연락이 미리 전해진 것도 있었고 누가 섣불리 접근할 만한 기사의 수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싸움이 나면 피해야 하나 나서야 하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허탈했을 만큼 칼리안은 레이븐의 위에서 편히 앉아 구경이나 하고 얀과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

그리고 가끔씩 앨런의 목소리를 들었다.

- 네, 스승님. 별다른 일은 없으십니까?

- 갑자기 텐실에서 사신들이 왔다더군요. 르메인이 바쁘니 늙은이 혼자 적적합니다.

레이븐의 위에 앉아 한가롭게 앨런과 대화나 해볼까 했던 칼리안은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러둘러 말하지만 르메인이 바빠서 앨런도 정신 없다는 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 바쁘신가보군요.

- 아무래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신난 얼굴로 반지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반지에 든 마나를 금세 회수하는 모습을 본 얀이 물었다.

"마나실 경이 상대 못해드리겠다 합니까?"

"응. 바쁘시대."

"매일 그렇게 대화를 보내시는데 매번 받아주는 것이 더 신기하네요. 제가 상대해드릴테니 그만 무료해하세요."

꼭 아무 일이 없다며 투정을 부린 것 같아서,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칼리안 일행은 라트리아 숲을 지나 라트란이라는 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낮은 숲을 끼고 도는 왕도 아래로 열 개 남짓의 둥근 호수가 보였다. 특이하게도 호수들이 서로 굉장히 비슷한 형태였고 하나하나의 크기가 상당히 컸다.

사실 호수라고는 해도 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당연한 것이, 자연히 물이 차올라 만들어진 호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래가 확실히 전해져 내려오는 그것은 시스파니안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였다. 물론 그 고룡이 할 일 없이 이런 곳에 호수나 만들어보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악신을 쫓으며 운석을 끌어와 떨어뜨린 자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5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계곡에 남긴 이를 지금 보러 가는 거네."

"그렇다고는 해도 현신을 만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부담가지지는 마세요."

"그래. 그래야지."

"호수를 한번 둘러보실 겸 이 곳에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라트란까지 두 세 시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더 가면 쉴 만한 마땅한 곳이 없기도 하고요."

특별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얀은 이미 이 곳을 몇 번이나 지나다닌 사람이었고 칼리안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선선히 동의했고 일행은 왕도에서 조금 벗어난 평평한 풀숲으로 이동했다.

풀을 뜯는 것에 열중인 레이븐의 다리에 기대 앉은 칼리안이 이전 도시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를 건네받았다. 곧 히나가 다가와 칼리안과 얀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에의 옆으로 가 앉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얀이 말했다.

"키리에가 히나를 엄청 챙기던데요."

"여동생이니까."

그 말에 얀이 웃으며 대꾸했다.

"제 동생도 저러면 참 챙겨주고 싶을텐데요."

얀이 먼저 가족 얘기를 꺼내는 것이 처음이었다.

왕궁에서 벗어날수록 얀은 조금씩 시종이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만 보아도 그렇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옆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얀이 꺼내두는 가족 이야기에 칼리안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생일 선물 안 줬다고 자고 있는 오빠한테 칼 내리꽂는 애가 하나 있는데, 왕자님께서도 이제 곧 만나보시게 될 겁니다. 조심하세요."

칼리안이 마지막 남은 빵을 입에 넣다 말고 웃었다. 그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얀은 분명 엉엉 울었을 것이다.

얼마 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안이 다시 레이븐의 등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사삭!

덤불을 헤치고 다가오는 작은 소리.

그와 함께 숲으로 이어진 무성한 덤불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그 곳을 쳐다봄과 동시에 어느새 다가온 키리에가 칼리안의 앞을 막고 섰다.

기사들 역시 칼리안과 얀을 가운데 두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아니, 잠깐······."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경계해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데 히나보다도 훨씬 작은 인영이 덤불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를 보더니 깜짝 놀란 눈을 했다. 그러더니 양 손을 들어보이며 외쳤다.

"맞아! 살려줘!"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조금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에게야 더러 익숙했을지 몰라도 칼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은 외양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인영은 단발머리를 한 남자 아이였는데, 얼굴 옆에는 인간의 것보다 조금 더 길고 뾰족한 귀가 붙어 있었다.

항상 말이 없는 키리에가 아이를 보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엘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엘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칼리안의 평화로운 여행에 일어난 큰 파문은 이렇게 갑작스레 튀어나온 한 명의 엘프 소년으로부터 시작됐다.

생전 처음 본 엘프의 온전한 귀를 보며 신기해 할 틈도 없이, 그 엘프가 말했다.

"나, 시아."

이제 모두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드러났다. 아까부터 저 엘프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사 유란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엉뚱한 침입자에게 겨눈 검을 집어넣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계속 경계해야 할지를 물어오는 것이다.

엘프들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거짓말도 잘 하지 못한다.

때문에 경계심을 조금쯤 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칼리안은 칼을 치우라는 제스처를 하며 그 엘프에게 한발 가까이 갔다. 그와 함께 기사들의 검이 거두어졌다.

살짝 허리를 숙인 채 엘프의 얼굴을 살피던 칼리안이 물었다.

"시아? 네 이름이야?"

"응. 배고파."

"먹을 것 달라고 온 거야?"

"숨어 있었어."

대화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그런 얼굴을 한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엘프들은 다 이렇냐고 묻고 싶었는데 키리에가 똑같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 선 히나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 표정을 본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가 알 수가 없구나."

칼리안이 다시 한번 볼을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어?"

"맞아. 미안."

음.

칼리안은 이 대화를 집어 치우고 밥이나 먹여 보낼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볼지 고민했다.

그러다 돌연 칼리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 쫓아오는 이가 있었으면 그걸 먼저 말해줬어야지."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는 그리 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칼리안 일행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 손에 검이 들려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채 갈무리하지도 못한 투기가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기사들이 다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고마워."

그렇게 말한 시아라는 이름의 엘프가 울상을 지으며 칼리안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아까부터 꺼내놓는 말은 이해가 안됐지만 그 행동은 알아볼 수 있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차라리 입을 안 여는 편이 대화가 편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칼리안은 도와달라는 그 손짓에 대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좀 보고."

우선 칼리안은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놓았던 로브를 꺼내 시아의 머리를 덮었다. 그리고는 시아를 뒤쪽으로 보내며 키리에를 향해 말했다.

"데리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시아를 데리고 가 제 옆에 세웠다.

그 사이 칼리안의 앞을 막은 기사들이 언제든지 검을 뽑아들 태세를 했고 아르센은 언제든지 실드를 펼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칼리안은 소매 속의 나이프를 잠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들 일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다가오는 말은 한 마리였으니까.

- 다각, 다각.

곧 그가 일행의 근처까지 다가와 멈추었다.

스무 명의 기사가 함께하는 검은 머리 소년의 일행이 무엇인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계속 다가오는 이를 향해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장발의 남자였다. 어디에 속한 사병인지는 몰라도 병사의 복장을 한 채였다.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스윽 살펴보았다.

칼리안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마도 생김새만으로 칼리안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귀족이나 상단 소속일텐데. 그 정도면 내가 움직이는 경로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그때 유란이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저렇게 의심스러운 기색의 상대에게 칼리안이 누구인지를 굳이 먼저 알려주는 눈치 없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누구냐."

"도둑 한 명이 물건을 훔쳐 도망치는 바람에 쫓는 중인데. 혹시 이상한 아이 보지 못하셨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유란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도둑을 쫓는 기색이 아니구나."

"도둑 쫓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까."

"그런 아이는 이 곳에 없으니 물러가거라."

남자는 다시 한번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 구석에 서 있는 로브 쓴 아이를 발견했다. 누가 보아도 의심스러운 모습이었으므로, 남자가 빙글 웃었다.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좀 보고 가겠습니다. 기사님들께 싸움이나 걸어보자고 온 것은 아니니 길 좀 터 주십시오."

곧 남자가 말에서 내려 일행을 향해 한 발 다가왔다.

스무 명의 기사가 있는 곳에 저렇게 서슴없이 들어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투기도 갈무리 못하는 병사였으니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안에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같은 것을 눈치챈 것인지 유란이 조금 더 경계하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남자의 앞을 막으며 다시 말했다.

"멈춰라."

칼리안이 잠시 유란을 쳐다본 뒤 앞으로 나섰다.

남자의 믿는 구석. 즉, 반대편 수풀 속에 숨어 이 쪽을 향하고 있는 몇 개의 활이 있음을 파악한 뒤였다.

제9장. 확인해 (2)

칼리안이 걸어나오자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은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유란을 향해 물었다.

"저 자가 누굴 찾는다고요."

"물건을 훔쳐 달아난 아이를 찾는다고 합니다."

칼리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유란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냥 찾으러 왔다기에는 꼬리가 많이 긴데."

유란의 시선이 잠시 칼리안을 훑었다. 그가 눈치챈 것이 칼리안의 입을 통해 나온 까닭이다. 그것을 짐짓 못본 적, 칼리안이 남자에게 물었다.

"찾는 이가 어떻게 생겼는데?"

"어린 엘프입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행 쪽을, 정확히는 시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확인해."

로브 안쪽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레 길을 열자 남자가 잠시 칼리안을 보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유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란의 고개가 아주 조금 위 아래로 움직였다.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매단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찾던 이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돌아가. 살고 싶으면."

남자의 눈초리가 다소 사납게 변했다. 칼리안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주변의 기운에 집중했다.

남자가 일행에게 한 발 더 다가온 순간부터 미약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살기를 숨긴 이들도 있을테니 수풀 속에 몇 명이 숨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이 곳을 향해 몇 명이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이상했다. 살기가 남자와 시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로브를 들춰 그 안에 든 것이 시아가 맞다고 확인되는 순간 둘 모두를 죽이려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남자가 진작부터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시아라는 저 엘프가 훔쳤다고 하는 물건이 그리 좋은 일에 엮여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 돌리지 말고 들어. 아까부터 숲 속에서 누가 널 겨누고 있어. 저 애한테도. 확인하는 순간 화살이 날아올 거야. 그러니 그냥 가. 그 자들이랑 더 친하게 지내지 말고."

당연하게도 남자는 칼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숲을 쳐다보았고, 칼리안은 쯧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지 말라니까."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

유란과 기사들의 검이 뽑혀나옴과 동시에 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 중 네 발이 시아를 향하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던 키리에와 기사들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그 직후, 화살이 다시 한번 날아왔다. 이번엔 칼리안도 움직였다.

- 화악!

칼리안은 남자를 잡아당겨 몸을 숙이게 한 뒤 날아오던 화살들을 쳐냈다. 그 뒤를 이어 다시 쏘아진 화살이 넓게 펼쳐진 실드에 막혀 튕겨나왔다.

아르센이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씩 웃으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곧 유란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확인하고 와. 멀리까지 쫓지는 말도록."

화살을 쏜 이들을 굳이 잡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에서 내린 지시였다. 저들의 공격이 칼리안을 향한 것이 아니기도 했고 칼리안의 호위가 우선이었으니까.

유란의 말에 다섯 명의 기사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 직후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왔으나 마찬가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도망가는 것을 택했으리라.

시아의 곁에 있던 키리에와 두 명의 기사가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안이 붙들고 있는 남자를 인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자의 손이 슬며시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왕자님!"

자신을 구한 것이 칼리안이라는 것도 잊은 것인지 남자가 재빨리 검을 뽑아 그대로 올려그었다.

다행히 칼리안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검이 뽑히는 것을 안 순간, 칼리안이 남자를 붙든 손을 놓았다. 그 뒤 옆으로 몸을 틀며 나이프를 들어 검의 방향을 반대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윈드 애로우]

주문 없는 시동어에 순식간에 바람의 화살이 발현됐다. 그것은 곧 검을 쥐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관통한 뒤 사라졌다.

"아악!"

날듯이 뻗어나온 키리에의 검이 남자의 검을 쳐냈다.

- 카앙!

남자의 검이 힘 없이 날아가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에는 관심도 두지 못했다. 예리하게 집약된 바람이 뚫고 지나가 너덜거리는 어깨를 붙들고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남자를 뺀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의 눈이 칼리안에게 고정되었다.

칼리안은 조용히 소매 속으로 나이프를 집어넣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런 칼리안에게 걸어 온 유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호위기사가 스물이나 되면서 정작 몸싸움은 칼리안이 혼자 했으니 하는 말이다. 물론 칼리안이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 자나 데려가 확인해보세요."

"네, 왕자님."

곧 유란의 지시에 따라 두 기사가 남자를 제압하고 지혈했다. 심문은 해야 했으니 남자가 혹여 죽거나 기절하면 곤란했던 탓이다.

남자의 상처를 보던 기사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전 칼리안의 움직임과 마법이 계속하여 눈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얀이 그러지 않았던가. 앨런 마나실이 마법 재능이 없다고 공언한데다 검이라고는 호신술 조금 배운 것이 다라고.

꽃 같은 왕자님이라고!

"······ 어딜 봐서?"

평온하기만 한 얼굴의 칼리안을 쳐다본 기사들은, 남자를 칼리안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다시 시아를 쳐다보려던 칼리안의 고개가 중간에 멈췄다. 이번에는 얀이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마법을 쓰는 것이야 당연히 알았고 그간 키리에에게 검을 배운 것으로도 알고는 있었던 탓에 놀라움보다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문제가 있다면 보는 눈이 좀 부족하다는 것 뿐이다. 정확히는 칼리안의 실력을 전혀 눈에 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왕자님, 또 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폭풍같은 잔소리가 시작됐다.

기사들 두고 뭘 믿고 앞으로 갔냐는 둥, 그러다 다치면 어쩔 것이냐는 둥, 운이 좋았다는 둥, 뭐 그런 이야기들이 한참을 이어졌다. 칼리안에게 칼 한번 휘둘러보려다 어깨가 꿰뚫린 채 실려간 남자는 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잔소리를 들어 넘기던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인지 유란은 칼리안의 눈을 피했다. 얀의 둔함을 알고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잔소리가 비로소 끝나갈 즈음, 숲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다친 곳은 없는 듯 보였으나 소득도 없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잡아오라 한 것도 아니었던 유란이 질책하지 않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몇 명이 있었지?"

다섯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답했다.

"총 일곱 명입니다. 따로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곧바로 흩어졌습니다."

"그래. 알겠다."

밥을 먹고 엘프를 만났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린데다 잔소리까지 얻어 들은 칼리안이 저벅저벅 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귀를 감췄던 로브를 휙 벗겼다.

남자와의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웃는 얼굴로 시아를 대했던 칼리안의 눈매가 제법 매섭게 변해있었다. 시아의 눈에 겁이 잔뜩 쌓였다. 그리고 시아와 칼리안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루카가 그랬어. 난 몰라."

"네가 훔쳤다는 게 뭐야."

말이 겹치자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시아가 다시 말했다.

"응. 몰랐어."

"몰랐다고?"

"나 아니야."

"놈들이 네가······."

거기까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말을 끊은 칼리안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제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그나마 이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할 만한 이를 불렀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이 곳에서 가장 똑똑할만한 마법사 아르센이 곧장 칼리안에게 왔다. 칼리안이 찌푸린 얼굴로 시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질문보다 대답을 먼저 하는데."

그제야 시아의 말을 되돌려보며 칼리안이 말한 것을 깨달은 아르센이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놀라워 했다. 이상한 말솜씨를 가진 엘프와의 대화에 더 이상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던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지는 나중에 알아내고 저 남자는 라우첼 경이 취조할 것 같으니 헤르츠 경은 그 엘프가 하는 말부터 정리해서 줘요. 이게 무슨 일인지. 그리고 걔 떼놓을 때까지 걔랑 대화는 경이 맡아요."

아르센의 가시밭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맞아."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자네는 아는 것이 없고······."

"몰라."

"게다가 자네의 경우에는 물건이 무엇인지······."

"아니야."

"더욱이 자네는······."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 아닌 대화 소리 때문에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들이 떨렸다. 마음껏 웃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유일하게 이 곳에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괜찮은 칼리안만이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 불쌍해. 마법사.

히나의 수어를 본 키리에가 살짝 웃었다.

한참 뒤, 노트 하나에 시아의 말을 받아 적은 아르센이 얀을 향해 눈짓했다. 칼리안에게 이야기를 전해도 괜찮을지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의 허락을 구한 얀이 말의 속도를 줄여 키리에 쪽으로 갔다. 곧 아르센이 칼리안의 옆으로 와 내용을 전했다.

"웅크린 말의 정령이라는 뜻이야. 어머니 나무가 지어 주셨어."

"아이의 이름은 시아루스 티안 유레하, 엘프이며, 12세라 합니다."

아르센의 말에 함께 타고 있던 시아가 잠시 '끼어들었다'. 잠깐 침묵하던 아르센이 어색하게 말했다.

"······ 그렇다고 합니다."

"계속하세요."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질문보다 대답이 빠른 것은, 본인도······."

"헤르츠 경."

말을 막은 칼리안은 잠시 눈을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시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순서대로."

아르센이 잠시 긴장하여 말을 멈췄다.

순서대로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고 시아에 대해 알아보라고 말한 순서대로 보고하라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칼리안이 자신에게만 굉장히 엄격하게 군다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며, 아르센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우선 어떤 물건을 훔친 것인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 아이는 루카라는 이름의 엘프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나무 조각품을 팔았다고 합니다. 루카라는 엘프는 저 사내를 공격한 무리가 특이한 것을 가지고 있다며 쫓아가게 되었고, 그 물건을 슬쩍······ 한 것 같습니다."

루카라는 엘프가 어떤 물건을 훔쳤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시아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엘프가 정말로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 의외였으나 칼리안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다 쫓기게 되었고 루카라는 엘프와는 중간에 헤어졌답니다. 그 뒤로 왕자님과 만난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한번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대답을 먼저 하는 이유는 본인도 자세히 모른다고 합니다. 저절로 입이 열린다고 하는데 아이의 설명만으로는 정확한 파악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르센의 말을 모두 들은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칼리안의 입이 열리자 시아가 대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예지력을 가진 것인지를 묻고자 했던 칼리안이 한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유란과 다른 기사 사이에 묶인 말에 올려진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남자가 결국 기절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아직 물은 것이 없었다.

"더 전할 것은?"

"없습니다."

결국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칼리안에게 다시 인사를 올린 아르센이 뒤로 가고 제자리로 돌아온 얀이 물었다.

"직접 알아보실 생각이십니까?"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얽혀들어서 이 곳에 발이 묶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자세한 조사는 라트란 영주에게 맡기도록 해."

"네, 왕자님. 그럼 저 꼬마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 들어보니 히리스카 숲에 산다는데요."

칼리안이 다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리스카 숲이라면 영지의 병사들이 보호하며 데려다 주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대신, 하필이면 지그프리드 영지로 가는 방향의 인근에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옷자락을 잡힌 것을.

"숲 입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처까지는 데리고 가도 돼."

"네. 이제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길이 바빠도 엘프 꼬마 한 명 쯤은 데리고 다닐 수 있었으니.

칼리안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9장. 확인해 (3)

라트리아 숲을 지난 곳에 중소 도시 라트란이 있었다. 그 규모 면에서는 중소 도시에 속하겠지만 알고 보면 인근의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크고 깨끗한 건물들이 즐비한 것이 멀리서부터 잘 보였다.

마치 아스트리샤 거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칼리안이 조금 감탄한 눈으로 도시 전경을 보고 있자 혹시라도 칼리안이 영주에게 호감을 가질까 우려한 얀이 입을 열었다.

"헤일 라트란 백작. 혹시 생각 안나십니까?"

"아, 그······."

이름과 작위가 붙으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칼리안이 살짝 눈썹을 올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플란츠의 말실수로 상처 입은 막내 왕자에게 선물상자를 보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박쥐."

칼리안의 짧은 평가를 들은 얀이 씩 웃었다.

"그 전에는 란델 왕자의 편에 있었습니다만 6년 전 대사막의 전사들과 텐실의 전쟁이 있었을 때 곧바로 플란츠 왕자 쪽으로 전향한 자입니다."

대륙에 위치한 왕국이 넷임에도 카이리스가 바다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북쪽과 서쪽이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사막이라 불리는 척박한 그 곳에는 아직 제대로 된 형태의 나라가 없었다. 그 곳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이들은 주신 세렌티가 아닌 그들의 민속신앙을 믿었다. 그것을 빌미로 나라도 작고 신력의 근원인 신물의 힘도 서서히 떨어져가는 텐실에서 북쪽 사막으로의 영토 확장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된 군대가 없으니 해 볼 만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자 순식간에 모여든 전사들의 전력이 생각 외로 강력했다. 괜한 짓을 했다가 궁지에 몰린 텐실에서는 란델과의 관계를 앞세워 카이리스에 조력을 요청했다. 당연히 실리케는 반대했고 그 덕에 텐실은 큰 손해만 보고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때를 보고 빠질 줄은 아는 박쥐네."

그런 자가 자신에게 한 발을 올리려 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그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잠깐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도시 입구 근처에 다다랐다.

입구까지 나와서 왕자의 일행을 기다리던 헤일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가운 얼굴을 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속도를 조금 높여 일행의 가장 앞으로 나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헤일이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헤일 라트란입니다."

"반갑습니다."

칼리안의 대답이야 항상 같았다. 인사도 나눴으니 안으로 들어갈까 하고 있는데 헤일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어지는 말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이렇게 왕자님을 직접 모시게 될 날이 오다니 이 헤일에게 무한한 영광입니다. 왕자님께서 도착하시는 날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인근에 당도하셨다는 말을 듣고 어제는 제가 잠을 꼬박 설쳤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잠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 척 했다. 낯간지러운 말에 질색한 표정을 감추기가 영 어려워서였다.

이 길은 카이리시스에서 지그프리드로 가는 최단 경로다.

그러니 헤일은, 듣기만 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저 말을 작년의 플란츠에게도 똑같이 했을 것이 분명했다.

곧 다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피곤한 걸음을 세우고 건넨 말이라는 것이 저런 입에 발린 소리였던 탓에 썩 고운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앞마당부터 정리하고 기다렸다면 더 좋았을텐데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했던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칼리안에 가려져 있던 피투성이 환자를 그제야 보았는지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낸 헤일이 물었다.

"일행이십니까? 의술사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치료가 필요하지 않게 된 자입니다."

헤일이 다시 한번 헉 소리를 냈다.

지금 칼리안이 꺼낸 말은 귀족들이 험한 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일종의 은어로, 사형수를 뜻했기 때문이다.

카이리스에서 범죄자에 대한 치료를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형수는 예외였다. 어차피 죽을테니 굳이 치료를 해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는 칼리안에게 검을 겨눴다. 칼리안은 왕자였다.

그 결과로 남자는 상처를 치료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왕자님."

남자가 칼리안을 공격했다는 것을 안 헤일이 고개를 조아렸다. 앞마당이라고 했으니 라트란 영지 내에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자칫하면 헤일 역시 책임을 면치 못할 상황이 되었으니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일 터였다.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는데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 뚝 떨어져 칼리안의 손등을 적셨다. 곧 또 한방울이 뚝. 그리고 또, 뚝.

레이븐이 작게 투레질을 했다. 콧잔등에 물을 맞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얀이 서둘러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려 했다. 그리 많이 내리는 비가 아니어서 괜찮다고 손짓한 칼리안이 헤일에게 말했다.

"사과보다는 지붕이 먼저 필요하겠네요."

내성을 지나 영주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빗줄기가 꽤 많이 굵어져 있었다. 8월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날에 내리는 비에 주변에는 금세 습한 기운이 돌았다. 비가 오는 모양새를 보던 칼리안이 유란을 향해 말했다.

"일단 성의 병사들에게 넘기고 다른 설명은 하지 마세요."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으로 오는 사이 은근히 젖은 터라 헤일이 내어 준 방으로 간 칼리안은 우선 몸부터 씻었다. 그리고는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빗소리가 방안에 가득 들어찼다.

하늘을 살피니 아무래도 내일까지는 빗속에 갇혀있어야 할 꼴이었다.

안 그래도 먼 길이라 발이 묶이기 싫어 조금 전의 일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비 때문에 결국 발이 묶여버렸으니.

"그것 참."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얀이 들어왔다. 칼리안이 부탁한 차가운 얼음이 가득한 민트 차를 손에 든 채였다.

"고마워."

열린 문 틈으로 유란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얀이 대답을 전했다.

"오늘 잡힌 이에게서 찾은 것이 있다 하는데 라트란 백작에게 건네라 할까요?"

이곳에 오던 길에 나머지 조사를 헤일에게 맡기겠다 했던 말 때문에 물어오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어떤 건지 먼저 확인해볼게. 들어오라고 해."

그 말에 유란을 방으로 부른 얀이 잠시 나갔다 오더니 유란 몫의 민트차를 가져와 건넸다.

때문에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양 손으로 민트차를 받들어 든 유란이 정중히 다시 자리에 앉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당황하던 얀이 다시 밖으로 나간 후 유란은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자의 신발에 숨겨져 있었다며 병사들이 전해준 것입니다. 아, 손수건은 제 것입니다. 지저분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혹시라도 더럽다 할까봐 설명해오는 말에 칼리안이 웃었다.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나고 방금 씻어 개운한 기분에 시원한 민트차까지 한 모금을 머금으니, 절로 미소가 생긴다. 그 작은 여유로움을 만끽한 칼리안은 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이 서서히 지워졌다.

칼리안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바람에 유란은 그것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한동안 손수건 안에 든 것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이걸 그 자가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것은 유란이야 자세히 몰랐겠지만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 주었던 물건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칼리안을 보며 유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단번에 알아봤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설탕 조각처럼 생긴 그것을 보며 물었다.

"경은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오래 전 치안대에 있을 때 리베른의 암상인을 검거하며 보았습니다. 잠시동안 죽은 것으로 위장해주는 독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왕자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자신을 일주일간 앓아 눕게 한, 대신 자유를 준 독을 쳐다보는 칼리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먹어봤던 것이라서."

창밖의 빗소리가 거셌다.

하필 비가 와서 발이 묶였다. 거기에 더해, 빼낸 발도 도로 돌려놓게 할 만한 것이 나타났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떻게 관심을 끄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가겠는가?

"투기도 갈무리 못하던 놈이 독을 가지고 있었네."

칼리안이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투기'라는 말에 유란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검술이 뛰어나신 것 같았습니다만."

그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매우 노골적인 말 돌리기였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인데 입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작은 나이프 하나로 장검을 흘려냈던 칼리안의 모습을 기억에서 잠시 접은 유란이 대답했다.

"네. 왕자님."

"지금 내가 한번 만나볼게요."

유란이 놀라서 물었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은 대답 대신 물방울이 맺힌 잔을 톡톡 건드렸다.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뜻이리라. 대충 칼리안의 성격을 파악한 유란이 다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