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살고 있습니다 (5)
- 참. 한가지 전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스승님.
- 네. 말씀하시지요.
- 레이첼 그레이스와 베로니카 마나실이 이곳에 있습니다. 오늘 잠시 만났어요.
리베른은 카이리스와 달라서 결혼을 하더라도 가주의 성으로 바꾸지 않는다 하더니 레이첼 역시 같았다. '마나실'이 아닌 자신의 성을 사용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앨런이 반겨하는 목소리를 냈다.
- 아주 잘 되었습니다.
- 함께 수도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 함께 오셔야 할 겁니다. 함께 오시면, 엘프들이 다니는 숲의 길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나마 살만 할 겁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레이첼도 유능한 마법사입니다. 마법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동 마법을 연구하고 있지요.
- 아, 그럼. 지그프리드 공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한 것이 혹시······.
- 벌써 도움을 준 일이 있었습니까.
시찰에 나섰던 슬레이만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슬레이만이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레이첼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식을 접하게 된 칼리안은,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고 성에 돌아오자마자 레이첼과 아르센을 응접실로 불렀다.
"준비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 두 분을 불렀습니다."
"네, 왕자님. 무엇을 준비했으면 하십니까."
"카이리스의 땅이 너무 넓어서요."
칼리안이 이렇게 운을 뗐다.
카이리스는 넓다. 너무 넓다.
지그프리드의 영지로 오면서 이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수도에서 공작령을 오가는데 몇 달이 걸린다니. 상상 이상의 크기가 아닌가.
그런데.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에게 '다시 오라'고 했다.
시스파니안을 만나는 것이야 그리 거부감 드는 일은 아니었으나 지그프리드에 다시 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길 위에서 또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도에서 다른 곳을 오가는 것에 낭비되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 길을 단축하기 위해 엘프들을 또 만나는 것은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일이고."
아르센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역간의 이동 시간을 좀 단축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만약 각 지역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마법사단 발칸도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왕자들의 싸움이 어떻게 번질지는 몰라도, 만에 하나 그것이 내전으로 바뀐다면 이동 시간이 빠른 쪽이 당연히 몇 배는 더 유리할 터였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을 잠시 떠올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간이동이고, 공간이동을 위해 있어야 할 것은 당연히 이동 마법진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카이리스 이곳저곳에 공간 이동 마법진을 구축할 생각입니다."
카이리스 각 지역을 순식간에 오갈 수 있도록 해 줄 공간 이동 마법진. 그것을 만들려는 생각을 했고, 마법진 구축을 위한 적임자 둘을 찾았다.
이동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
그리고, 할 일 없는 마법사.
"아······."
아르센이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을 했다.
쉽게 말해 당분간 잠을 자기는 글렀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칼리안이 공간 이동에 대해 관심을 처음 가졌을 때 그 일이 자신에게 올 것 같다는 불안한 예측을 이미 했었다. 게다가 칼리안이 공동에 들어갔던 사이 아르센은 레이첼이 어떤 것을 연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 아르센의 얼굴을 짐짓 모른척한 칼리안이 먼저 레이첼에게 말을 건넸다.
"리베른에는 각 지역으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이 있다 들었습니다."
"네. 단순히 있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고 해야겠지요. 비싸기는 해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칼리안은 아직 공간이동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마법진은 옛 칼리안의 전문 분야도 아니었다. 따라서 레이첼의 답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다시 한번 질문을 했다.
"말했듯이 나는 그것을 카이리스에도 구축하고자 합니다. 다만 리베른보다 이동 거리가 멀 수 있는데. 혹시 어렵겠습니까."
레이첼은 리베른의 이동 마법진 구축에 이미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장거리 이동에 대한 해결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거리가 멀더라도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어요."
별 것 아니라는 그 표정을 본 칼리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매우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가장 중요한 조건을 덧붙였다.
"좋군요. 그런데 당장은 내 세력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두 형님의 세력과 어떤 식의 다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나 쓸 수 있을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은 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하던 레이첼이 물었다.
"리베른에서는 마법진 자체를 경비합니다. 그런데 왕자님 말씀은······ 이동 마법진이 있는 지역의 보안 설비가 아니라 외부인은 마법진 자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맞나요?"
칼리안이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좋은 것은 독점해야 더 좋으니까요."
만고불변의 진리다.
웃고 있는 칼리안의 얼굴이 어쩐지 앨런과 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레이첼이 대답했다.
"그런 조건을 적용했던 적은 없었어요. 당장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한 번 생각을 해볼게요."
마법사단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찾아온 레이첼이 카이리시스에 도착도 하기 전에 숙제부터 안겨준 셈이었다. 그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던 칼리안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 뒤, 칼리안은 아르센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도 함께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아르센이 물었다.
"혹시 수도에서는 반대할 이가 없겠습니까? 전하께도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함이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만, 전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른 세력들도 언제까지고 반대하지는 못할 테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당장 진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계획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만들어 놓기는 할 테니까 다른 말 말고 일단 고민이나 해보라는 소리다.
그러는 왕자님 너도 마법사 아니었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던 아르센은 그 길로 지그프리드 성의 도서관으로 갔다.
* * *
레이첼과 아르센을 만난 뒤, 칼리안은 슬레이만을 찾아갔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만한 딱 좋은 곳이 있습니다."
대화 요청에 흔쾌히 응한 슬레이만이 간 곳은 칼리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응접실이나 서재 혹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가.
칼리안은 은은한 차 향이나 묵묵한 책 내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땀 냄새가 강하게 밴 슬레이만의 개인 수련실을 어색하게 둘러봤다.
"이게 또 은근히 앉을 만 합니다."
칼리안의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한 슬레이만이 수련실 한 쪽에 놓인 통나무를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결국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얀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 난리를 쳤을 테지만 칼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통나무 위에 기분 좋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함께 왕궁으로 가자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스승님과 함께 계시면 어떤지도 보고 싶고."
묘하게 닮은 듯 아닌 듯한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떨지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까닭에 한 말이었다.
다른 뜻이나 의도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말.
곧 지그프리드의 땅을 떠나야 하니 슬레이만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보인 그 말에, 슬레이만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왕자님께 이 곳에서 저와 검이나 겨루며 지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둘 사이에서는 누가 듣는 자리에서 나누기는 어려울 대화들이 오갔다. 얀의 둔함이 주 이야깃거리가 됐다. 얀은 칼리안이 호신술 수준의 검술만 조금 익힌 것으로 믿고 있다는 말에, 슬레이만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었는지 의심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의심할 곳이야 널렸지만 특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까닭이었고, 같은 이유에서 칼리안도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최근 르메인이 왕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고 그것이 앨런의 독설 덕분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더 꺼내둔 뒤에야 칼리안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오늘 시스파니안을 만났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네. 알고 있습니다. 시스파니안의 의지와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아니. 의지가 아니었어요."
칼리안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 챈 슬레이만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설마 본신을······."
채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질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본신을 만났습니다."
슬레이만의 얼굴에 항상 드리워져있던 큼지막한 미소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곧 큰 웃음소리가 되었다.
"으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살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실존하는지조차 모르는 고룡의 빈 둥지를 500년이나 지켜온 가문의 가주였다. 시스파니안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 기분이 오죽 기쁘겠는가.
때문에 슬레이만은 그 후로도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우리 가문이 의미없이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본래 하려던 말을 다시 꺼내들었다.
"시스파니안이 이 곳으로 직접 올 지는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시스파니안을 한번은 더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슬레이만이 한번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조금 전 아르센과 나눴던 이야기의 연장선에 섰다.
"그래서 말인데. 카이리시스와 지그프리드를 조금 더 빠르게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와 남쪽의 지그프리드를 연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이리스 곳곳에 이동 마법진을 늘려나가고 싶은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그 일로 공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대화를 요청했고요."
"이동 마법진이라······ 제 의견도 중요하지만 전하께서 허락을 하시겠습니까."
슬레이만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카이리스에는 왕도가 있기 때문에, 이동 마법진까지 있으면 외부의 침입에 노출될 위험이 높아진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공께서 동의를 해주신다면 카이리시스가 아니더라도 휘트린 영지와 경로를 연결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칼리안의 영지인 휘트린은 카이리시스에서 나흘 거리에 있었다. 그러니 수도와 연결이 어렵다면 칼리안 개인의 땅에 마법진을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구축을 하게 된다면 나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곳에 세워질 이동 마법진은 지그프리드 외성과 하루 이상 떨어진 거리에 구축하게 될 테고요. 마법진으로 인해 이 곳의 안전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된다면 언제든지 없애셔도 무관합니다."
여기까지 설명이 되자 슬레이만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승인을 하신다면, 하루 이상의 거리에 구축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것이 더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슬레이만의 말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예리한 기운의 마나가 칼리안의 손 끝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련 신청을 하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그런 생각으로 왕자님을 이 곳에 뫼셨는데 먼저 말씀을 꺼내시니 아주 좋습니다!"
"대련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의 손에 응집된 마나가 어느새 커다란 사과 정도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지금껏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형상.
그것은 불도 얼음도 바람도 아닌 전혀 새로운 힘이었다.
칼리안이 속성을 모두 지우고 서클의 근원이 되었던 순수한 오러의 기운만 남긴 덩어리였다.
칼리안은 수많은 유리 파편이 서로 뒤얽히며 휘몰아치는 듯한 응집체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오러의 기운으로 만든 것입니다. 일반적인 오러는 매개체 위에 덧입혀야 하지만 운 좋게도 저는 마법을 함께 사용할 수가 있어서요. 마법사들이 이용하는 방법으로 마력을 집약시킨 뒤에 오러를 응집하니, 매개체 없이 오러 발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칼리안은 며칠동안 깊이 고민해가며 생각해낸 힘을 슬레이만의 앞에 처음으로 보이고 있었다.
말은 쉽게 하였으나 오러와 마력을 함께 운용해야 하니 결코 수월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니 시스파니안의 본신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 가문에 다행한 일이고,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은 왕자님께 다행한 일인가 봅니다."
칼리안이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소드마스터였던 베른이 마법에 재능을 지닌 옛칼리안의 몸에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으나 그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줄 수는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내가 부탁드리려 했던 것은."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자 마나 응집체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서히 길이를 늘려가며 얇아지더니 곧 하나의 '검'과 같은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슬레이만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이것을 제 '검'으로 쓰고자 합니다만. 아직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강도도 예리함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십니까."
"네. 내가 가진 힘이 어느정도일지 가늠이 어려워서요. 공을 만났으니 정확히 확인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제야 칼리안이 뭘 원했는지 제대로 깨달은 슬레이만이 강렬한 투기를 보였다. 그 얼굴에 만연한 웃음이 칼리안의 '검'을 향하고 있었다.
슬레이만이 짧게 말했다.
"오십시오."
어느새 뽑아 든 슬레이만의 검에 푸른 오러가 맺혔다.
동시에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6)
슬레이만은 대륙의 두 번째 소드마스터였다.
그것은 곧 살아있는 이들 중 검의 길에 오른지 두 번째로 오래 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소드마스터로 지내온 기간이 강함과 완전히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깨달음 이후 보낸 시간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슬레이만은 강자였다.
슬레이만의 검은 그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묵직하되 둔하지 않았다.
- 쉬이익!
슬레이만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났다. 검 끝을 따라 일렁이는 오러의 푸른 빛이 잔상을 남기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칼리안의 검은 매섭도록 빨랐다. 하지만 결코 요란하지 않았다.
슬레이만이 찢어낸 공기를 칼리안의 검이 다시 베어냈다. 성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는 슬레이만의 검 사이를 소나기처럼 누빈다.
- 촤악!
슬레이만의 검이 칼리안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한 칼리안이 순간적으로 노출된 슬레이만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검을 휘감듯 쳐내자 칼리안은 곧바로 슬레이만의 심장을 노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수를 퍼붓는다.
둘 모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칼리안이 부탁한 것은 얌전한 대련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 브리센. 그리고 에반 브리센.
그들과 칼리안이 검을 맞댈 일은 반드시 생길 터였다. 그러니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칼리안 스스로가 가진 힘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 카아앙! 캉! 카앙!
따라서 슬레이만은 지금 칼리안이 한계를 꺼내도록 돕는 중이었다.
푸른 빛의 오러가 칼리안의 어깨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칼리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날카롭게 벼려진 마력의 검이 슬레이만의 뒤에서 날아왔다. 어느새 슬레이만의 뒤로 돌아간 칼리안의 검이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빠르다!
칼리안은 슬레이만조차 간혹 움직임을 놓칠 만큼 빨랐다. 근력이 부족한 만큼 검에 실린 힘도 부족했으나 대신 검을 움직이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슬레이만이 검을 회수하며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을 올려쳤다.
- 카앙!
베어내고 막고 내리치고 흘려보내는 공방이 쉼 없이 이어졌다. 날붙이와 날붙이보다 날카로운 마력의 덩어리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수련실을 가득 메웠다.
슬레이만의 검을 한번 더 흘려보낸 칼리안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캉! 카강! 카아앙!
순식간에 이어지는 네 번의 베기가 슬레이만의 급소를 노렸다. 슬레이만의 검에 힘이 들어가며 칼리안의 검을 모두 쳐냈다.
상당히 예리한 공격이었으나 슬레이만이 그리 어렵지 않게 방어한 탓에,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한층 강해진 살기가 슬레이만을 향하자 슬레이만에게서도 같은 기운이 뻗어나와 칼리안의 손발을 옥죄려 했다.
- 타앗!
칼리안의 발이 마치 허공을 밟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 이후에는 어김없이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에 슬레이만이 재빨리 검을 뻗어 칼리안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칼리안은 검의 날을 부드럽게 쓸어올리는 듯한 동작으로 그것을 흘려보냈다.
슬레이만은 방향이 틀어진 검을 힘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혼자서만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검을 뻗거나 회수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슬레이만이 회수한 검을 그대로 칼리안의 상체를 향해 휘둘렀다. 칼리안이 다시 한번 검을 빗겨대며 공격을 흘려냈다.
슬레이만이 씩 웃었다.
"이렇게 늘어져서야 지니신 힘의 한계를 어찌 알겠습니까."
곧 슬레이만이 손에 든 검에 힘을 집중했다.
- 우웅!
슬레이만의 검이 한번 떨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푸른 빛이 한층 짙어졌다. 검에 담긴 오러의 양이 늘어난 것이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 쿠웅!
슬레이만이 수련실 바닥을 거세게 박차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칼리안의 몸을 두동강 낼 기세로 내리찍었다. 칼리안이 재빨리 검을 횡으로 들어올려 공격을 막았다. 온 몸에 흐르는 피를 전부 얼려버릴 것 같은 한기가 슬레이만의 검을 타고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칼리안의 검이 마치 불이 깜빡이듯 점멸하다 사라졌다.
"······!"
자신의 것보다 몇 배는 묵직한 슬레이만의 오러를 제대로 견디지 못한 것이다.
내리치려는 슬레이만의 검과 그것을 막으려는 칼리안의 검이 서로 맞닿은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칼리안의 검이 사라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지지대를 잃은 슬레이만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슬레이만이 깜짝 놀란 소리를 내며 검을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칼리안이 움직임이 한 발 빨랐다.
칼리안은 검을 이루던 마력이 흩어짐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몸을 틀었다. 그리하여 슬레이만의 검 끝은 칼리안의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에 그쳤다.
칼리안의 뺨에 길고 가는 혈선이 하나 생겼다.
하지만 칼리안은 상처에 신경쓰거나 검이 사라지는 커다란 문제를 알게 되었음에 대해 당장 고민하는 대신 곧바로 다시 만들어낸 검을 움켜쥐었다.
- 쉬이익!
슬레이만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난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슬레이만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어 뒤로 돌며 검을 뻗었다.
수가 읽히자 칼리안은 뻗어나온 슬레이만의 검을 툭 치듯 밟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허공에 잠시 떠오른 몸이 떨어지는 힘까지 더해 마력의 검을 내리꽂았다. 정확히 슬레이만의 정수리를 향해서였다.
슬레이만은 빠르게 검을 틀어 그것을 막은 뒤 곧바로 뻗어냈다. 날붙이가 사납게 뒤엉키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 카앙!
검과 검이 맞붙은 채 슬레이만과 칼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칼리안이 씩 웃었다.
조금 전 슬레이만의 검이 낸 것과 비슷한 칼날이 떨리는 소리가 칼리안의 검에서도 흘러나왔다.
- 우웅!
유리 조각 같던 마력의 응집체가 파란 빛을 머금었다. 오러로 만들어진 마력의 검에 다시 한번 오러를 입힌 것이다.
칼리안의 투기는 그 어느때보다 강렬했다.
아껴둔 패는 나도 있다고.
칼리안의 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부우웅!
슬레이만은 기다리지 않고 다시 한번 검을 내질렀다. 칼리안의 발이 더 빠르게 움직이더니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마력의 검이 슬레이만의 어깨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슬레이만이 검을 틀어 그것을 가볍게 튕겨냈다. 공격이 막힌 칼리안이 검을 돌려잡고 올려치자 슬레이만이 빗겨냈다.
- 타앗!
칼리안이 슬레이만의 시야에서 또 사라졌다.
그 잔상을 좇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 슬레이만은 감각을 열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걸음이 향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곳을 향해 검을 뻗어냈다. 하지만 슬레이만의 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미 한 번 수를 읽혔는데 같은 공격을 다시 가할 칼리안이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 뒤에야 속았음을 깨달은 슬레이만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느새 반대편에 선 채로 슬레이만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칼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슬레이만이 깜짝 놀라 공격을 막았다.
- 카아앙!
칼리안의 검이 슬레이만의 목 바로 옆에서 간신히 멈췄다.
슬레이만의 목에 긴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우웅!
슬레이만의 검이 다시 한번 울음소리를 냈다.
검에 스민 오러가 깊은 바다와 같은 색으로 변했다.
더 위협적인 소리와 기운을 고스란히 느낀 칼리안의 눈이 치켜 떠졌다. 믿기지 않게도 슬레이만이 가진 오러의 기운이 한번 더 짙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슬레이만이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칼리안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위험하다.
흘려낼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칼리안이 곤두세우고 있던 모든 감각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칼리안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둔 오러를 전부 끌어모아 검으로 옮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가오는 슬레이만의 검을 있는 힘껏 올려쳤다.
- 콰앙!
지금까지 들렸던 그 어떤 소리보다 큰 굉음이 터져나왔다.
- 쩌저적!
슬레이만의 묵직한 검에 금이 갔다.
동시에 칼리안의 검이 빛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한계에 달한 것이다.
* * *
슬레이만의 검에 긴 금이 생겨 있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슬레이만의 마음에도 긴 생채기가 났다.
검 때문은 아니었다. 애검이 망가진 것도 물론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상심할 만큼 슬레이만의 마음 씀씀이가 좁지는 않았다.
딸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는 이상한 말은 어디선가 한 번 들어봤다.
그래.
조금 더 양보해서 아들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는 말도 언젠가 한 번쯤 들어 봤다 치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애비 목에서는 아직도 피가 철철 나는데!
"흉이라도 지면 어쩌시려고 얼굴에 상처를 내셨어요! 다른데는 괜찮으세요?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으세요?"
수련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뛰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칼리안에게 달려간 얀이, 만지면 부스러질까 건드리면 깨질까 애지중지하며 칼리안을 걱정하는 꼴을 본 것이다. 스스로가 마음이 꽤 넓은 남자라고 생각해왔던 슬레이만은 알아서 낫고 있는 칼리안의 실금같은 상처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얀을 향해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 내새끼가 어째 영 내새끼가 아닌 것 같다."
그런 슬레이만의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히나였다.
히나의 손이 빛나고 있었다. 슬레이만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수련실에서 울려퍼진 굉음에 깜짝 놀라 달려온 것은 둘 뿐만이 아니었다. 내성에서 키리에와 함께 있던 기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덕분에 슬레이만은 억울한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방금 전의 대결은 분명히 슬레이만이 이겼다.
지닌 오러를 다 쓴 것도 아니었으니 꽤 여유롭게 이겼다.
그런데 칼리안의 부서진 검은 형체가 안남았다.
슬레이만의 검에는 쩍 하니 금이 갔다.
칼리안의 얼굴에 난 상처는 애초에 크지도 않았거니와 축복의 힘 덕분에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슬레이만의 목에는 반 뼘 길이의 자상이 있었다.
"공작님······ 설마 지셨······?"
그러니 유란이 매우 주저하며 이렇게 물어 올 수 밖에.
슬레이만은 말을 잃었고 칼리안은 또 한 번 웃음보가 터졌다.
* * *
아침에는 공동에서 빛이 나고 오후에는 슬레이만의 수련실에서 폭음이 났다. 그저 칼리안이 왔을 뿐인데 항상 조용하던 코끼리들의 땅이 들썩들썩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성대한 석찬이 진행됐다.
칼리안과 슬레이만은 물론이고 칼리안의 일행들부터 앨런의 가족인 레이첼과 베로니카, 그리고 칼리안을 호위했던 스무 명의 기사들까지 모두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즐기는 자리였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그렇게 기대하던 슬레이만의 바이올린을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검을 다루는 손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잠시 뒤, 바이올린을 손에서 내려놓은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옆으로 와 앉았다.
"잘 들었습니다. 검을 잘 다루는 것은 알았지만 바이올린이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지그프리드 아닙니까. 검을 못 다뤄도 바이올린은 꼭 다룹니다."
이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히나에게 치료를 받은 슬레이만의 상처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아물어 있었다. 칼리안이 목의 상처를 살피는 것을 본 슬레이만이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칼리안이 웃으며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한계치 이상의 힘을 마주하면 검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어느 정도의 힘에 마력의 검이 사라지는지도 알았으니 그보다 큰 수확이 또 없었다. 만약 실제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검이 사라지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오러와 마법을 부리는 것을 수련할 차례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그 역시 다행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슬레이만은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져 있었다. 오러를 다루니 취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취기를 굳이 몰아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이 슬레이만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슬레이만도 칼리안에게 와인을 마실지 물었으나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사들이 적당히 술에 취하니 주변이 꽤나 시끌시끌해졌다. 헤일 라트란이 술에 취한 척 시끄럽게 굴 때에는 그렇게 듣기가 싫더니 지금은 퍽 신이 났다.
그렇게 얌전히 앉아 주변을 좀 구경하고 있는데 슬레이만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빠른 검술은 그리 특이할 것이 없으니 괜찮습니다만."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슬레이만이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을 횡으로 벨 때나 연타 이후 허리에 먼저 힘을 싣는 것은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특징입니다, 왕자님."
그 이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슬레이만은 칼리안의 검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들놈 덕에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습니다. 검술 수업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도 당연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검술을 지닌 채로, 불과 몇 개월 만에 검의 길에 오른데다 그 사이 쌓여있는 오러가 생각 외로 많습니다. 검의 길에 오른 직후 오러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기에도 부족한 시간일텐데, 오러를 다루고 쌓는 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조금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칼리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슬레이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슬레이만이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쳐 보이며 다시 말했다.
"아무튼. 카이리스에서는 다리에 중심을 둡니다. 검술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허리를 쓰든 다리를 쓰든 그저 개인의 습관이라 할 수 있겠으나 눈에 띄는 다른 점들과 함께 엮어 생각하면 의심의 싹을 키우게 될 겁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브리센 변경백이라면 알아볼 수 있으니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칼리안이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검을 쓰는 것만으로는 이상할 것이 없겠지만 칼리안이 급격히 변화한 모습을 보인 것 같은 다른 상황들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칼리안의 정체를 의심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그 눈빛의 뜻을 읽은 슬레이만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지그프리드입니다. 대장 코끼리가 3왕자 껍데기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채봐야 어디 쓸 데도 없습니다. 나중에 한번 더 겨뤄주기나 하십시오."
그 말에 칼리안이 짧게 답했다.
"고맙습니다."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마시지 않겠다 했던 칼리안에게 술을 강권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주변의 눈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는 좀 궁금한데, 혹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다보니 그리 되어 그냥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허허 웃은 슬레이만이 얀을 쳐다보다가 다시 칼리안을 봤다.
"혹시 저 놈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제가 더 묻고 싶은 문제네요. 눈치를 채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알고는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던 슬레이만이 자신의 아들이 어떤 인물인지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웃음을 지우며 조용히 덧붙였다.
"······ 설마 정말로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에이, 설마요.
제13장. 찾았습니다 (1)
시스파니안을 만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전히 지그프리드의 성에 있었다.
- 그냥 영영 안 오실 요량이십니까?
절반 쯤의 타박과 절반 쯤의 서운함이 섞인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웃었다. 칼리안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앨런에 대한 절반 쯤의 미안함과 절반 쯤의 고마움이 섞인 웃음이었다.
- 왕자님 일정이 늦어질수록 실리케가 준비해두는 것이 많아집니다. 가능한 서둘러 돌아오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네. 저도 본래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예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던 문제를 아직 해결하질 못해서요.
칼리안이 지그프리드 성에 열흘이나 머물게 된 것은 얀으로 인해 떠올리게 된 한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시스파니안을 만난 후 슬레이만과 거하게 칼을 맞댄 그날 칼리안은 '과연 얀이 칼리안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 슬레이만과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러다 슬레이만을 향해 질문 하나를 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내 오러를 알아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경백이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 검술이 뛰어나다 알려졌으니 아마도 왕자님의 몸 속에 오러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생각을 한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오러를 숨길 방법은 역시 없을까요?'
소드마스터가 걷는다는 '검의 길'이란 곧 깨달음의 길이다.
각자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검의 길에 들어선다. 오러를 깨우치는 방법이 서로 모두 달라 그것을 교육할 수도 없었다. 대륙에 소드마스터가 고작 여섯 뿐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름난 가문에서 나고 자라거나 소드마스터에게 검술을 교육받는다면 검의 길에 오를 확률이 늘어날 뿐. 반드시 깨우침을 얻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 수가 극히 적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아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오러를 숨겨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베른이었을 적에도 마찬가지였으니 칼리안도 처음에는 오러를 숨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른이 아닌 칼리안은 경우가 달랐다.
칼리안.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러니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과 싸울 땐 싸우더라도 열 다섯 살의 '마법사'가 검의 극의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되도록 숨겨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칼리안의 정체에 대해 얀에게 굳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오러를 숨기는 것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슬레이만도 다르지 않았던 터라. 슬레이만은 묵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아르센에게 가 닿았다.
오러 자체를 숨길 방법은 없었으나 어쩐지 유사한 해결 방법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아르센을 불렀다.
'헤르츠 경.'
또 무슨 일을 시키려 그러나 하는 표정의 아르센이 칼리안 쪽으로 왔고 칼리안은 간단한 질문을 했다.
'혹시 마나를 숨길 수 있는 마법 알고 있습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네 개의 서클을 가지고 계시니 이제 왕자님께서도 사용하실 수 있는 마법입니다.'
마법사이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드마스터.
그리고 서클과 오러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웃었다.
'알려주세요, 그 방법.'
이렇게, 칼리안은 마나를 숨기는 마법을 배웠다.
마법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유지에 있었다. 걷고 말하고 먹고 자는 동안에도 마법을 유지하는 것에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러를 완전히 감추는 것에 다시 사흘이 걸렸다.
칼리안에게서 오러의 기운이 새어 나오는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슬레이만 뿐이었으니 지그프리드 성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열흘을 머물렀다.
'이제 정말 감쪽같습니다! 칼 근처에도 못 가본 얌전한 왕자로밖에 안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아침 오러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슬레이만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이제 조금 익숙해진 공동묘지를 찾아 이렇게 앨런과 대화를 하게 된 터였다.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수두룩한 비석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서서 칼리안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얀이 보였다.
- 준비가 길었습니다. 내일은 정말로 출발할 겁니다.
그렇게 말을 전한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 혹시 브리센 변경백은 이미 수도로 출발을 했을까요.
- 변경백령에 대리인을 보내는 것을 최대한 늦췄습니다. 보름은 더 지나야 출발할 수 있을겁니다.
그레이가 빨리 도착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카이리시스에 당도할 날을 가능한 늦추도록 수를 썼던 모양이었다.
- 감사합니다.
- 그리고 곧 마법 학원의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을 치를 예정입니다. 아마 왕자님께서 도착하실 즈음이면 학생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터이니 기대를 해보시지요.
- 브리센 상단 인수로 바쁠텐데 마법 학원까지 벌써 준비가 되었습니까.
멜피르 폴룬에게 맡겨두었던 마법 학원의 진척 상황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칼리안이 꽤 놀란 얼굴을 했다.
- 네. 일처리가 아주 빠릅니다. 그래도 손이 모자라는 듯 보입니다. 마법 학원 일을 도와줄 이는 제가 적당히 골라 맡기겠으니 상단의 인재가 될 만한 인물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 주시지요.
- 찾아본다고 해도, 지그프리드령에 있는 이를 수도로 데리고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좋은 것을 자꾸 잊으십니까.
앨런이 장난 가득한 목소리를 계속 보내왔다.
- 앨런 마나실이나 키리에를 데려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왕자님께서 알고 있는 '미래'에 이름이 날 인재가 있는지 기억을 한 번 뒤져보시지요.
- 제가 상단 쪽으로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터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네요. 당장은 떠오르는 인물이 없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가며 성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지그프리드 성에서는 다시 한번 성대한 석찬이 열렸다. 이제 떠나겠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칼리안의 볼 일이 모두 끝났으니 곧 출발하리라는 것을 안 슬레이만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칼리안은 슬레이만과 드미레아의 환송을 받으며 지그프리드령을 나섰다. 유란을 포함한 기사들은 함께하지 않았다. 레이첼의 이동 마법을 통해 빠른 이동이 가능했으나 마법을 적용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칼리안과 키리에, 그리고 아르센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었으니 크게 위험할 일은 아니었다.
"또 오실 때는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얀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슬레이만을 향해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으하하! 그야말로 기대되는 소리입니다."
르메인과 앨런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칼리안과 슬레이만은 다시 잠시 헤어졌다.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기 위해서.
* * *
수도 카이리시스의 아스트리샤 거리가 아침부터 모여든 귀족들로 북적였다. 카페마다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의 대화 주제는 속속 도착하고 있는 전서구에 묶인 편지 내용이었다.
-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공동에 들어서자 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시스파니안을 닮았다는 이유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칼리안이었다. 그랬으니 지금 전해진 내용의 의미가 대체 무엇일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시스파니안이 다음 대 국왕으로 칼리안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렸다. 심지어 칼리안이 바로 시스파니안이 아니냐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랬으니 마치 이맘때 쯤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필 딱 그 날부터 시작된 '폴룬 마법학원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에 카이리시스의 모든 청소년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구경 잘했어요, 마나실 님. 그럼 저는 이만."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마법 학원 시험장을 보며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하며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앨런의 몸이 슉 사라지더니 에우리아의 등 뒤에서 다시 슉 나타났다.
"세 보 앞으로 워프 쓰지 마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서 웃고 있는 앨런을 보며 에우리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텔레포트가 아니라 워프다. 무려 6서클의 스킬이다.
에우리아는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고레벨의 마법을 앨런은 고작 에우리아 한 명 붙들자고 쓰고 있는 것이다.
에우리아의 말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한 가운데 놓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시끄러우니 빨리 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에우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마나실 님. 멜피르 폴룬 남작이 마법 학원을 세우려는 건 저도 당연히 알고 있었어요. 예비 수련생 모집 시험이 오늘부터인 것도 알았고요. 카이리스에도 마법 학원이 생긴다니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에우리아는 앞으로 카이리스의 마법이 발전할 생각에 매우 기뻐하며 멜피르 폴룬에게 응원의 말도 성의 있게 건넸다.
"그런데 제가 직접 돕기에는, 저 진짜 바쁘다니까요."
그 학원의 입학 시험일 아침이 되자 앨런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갈 데가 있다며 에우리아를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다.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에우리아가 아닌가.
학원 입학 시험이 있다는데 함께 앉아 자리를 빛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질질 끌려 시험장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든 에우리아는 도망가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임시로 만들어진 시험장의 긴 테이블로 걸어가 한 자리 채워주는 것에 동의했다. 만약 시험 감독을 볼 사람이 부족하면 도와주겠다는 생각도 했다.
- 폴룬 마법학원 교장 에우리아 세이렌 그런데 테이블 한 가운데 놓인 저 명패는 뭐란 말인가.
다섯 개의 자리에 놓인 명패들 중에 왜 가운데 놓인 저것만 가장 크고 심지어 저것만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말인가?
에우리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표했다.
"다른 사람 시키세요."
그 말에 앨런은 고개를 대충 끄덕끄덕하며 다시 한번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에우리아의 입에서 깊디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앨런은 말 한마디 안한 채 마법 학원의 일을 도와줄 이를 적당히 골라 앉혔다.
* * *
다시 시간이 흘렀다.
수도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는 길. 칼리안은 호숫가의 낮은 절벽에 세워진 레딩턴 성에서 사흘을 머무르게 되었다.
왜 하루가 아닌 사흘이 되었느냐면 앨런의 손녀 베로니카의 말이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의 마법으로 빨라진 속도 때문에 바닥의 구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 키리에가 곧바로 베로니카를 잡아내어 사람은 다치지 않았고 베로니카의 말은 히나가 치료 할 수준은 되었다. 물론 히나의 치유가 한번에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이 다 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레딩턴 성을 찾아오게 된 칼리안은 이른 아침 영주성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고요한 물안개가 피어오른 거대한 호수와 푸른 하늘이 상당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떼 지어 날아오르는 물새들을 보던 칼리안의 뒤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키리에였다.
무려 키리에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말에 동의하듯 얀이 따뜻한 민트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주인 레딩턴 자작도 이 곳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사려 깊고 진중하기로 유명해서요. 곧 카이리시스에 들어갈텐데 사흘 동안 푹 쉬고 간다 생각하세요."
"그래. 그래야지."
칼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말대로였다.
이제 이 곳에서 나흘만 더 가면 카이리시스다. 앨런과 르메인, 그리고 실리케와 란델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왕궁에 도착하면 당분간 이렇게 먼 곳까지 나올 일도 없을 뿐더러 지금 같이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루만 보내고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 곳이도 하니까. 여유롭게 보낼게."
"네, 왕자님."
그 여유.
굳이 마음먹고 가져보려던 그 여유는, 하지만 딱 한나절동안만 이어졌다.
"······ 이런."
그날 오후, 창 밖으로 레딩턴 성에 세 대의 마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의 옆에 새겨진 검을 쥔 그리핀 문장을 본 칼리안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이렇게 반가운 우연이 있나."
그것은 바로 브리센 가문의 문장이었다.
제13장. 찾았습니다 (2)
칼리안의 시녀인 메를린이 방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비어 있는 칼리안의 방을 찾은 것은 앨런이었다. 앨런이 안으로 들어가자 메를린이 밖에서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곧 앨런은 침실 옆의 금고로 걸어가 조금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그것을 열었다. 레넌과의 일로 금고가 꽤 많이 비워져 있는 것을 잠깐 확인한 앨런이 손에 들린 서류와 수표 몇 장을 그 안에 넣었다.
이제는 폴룬 상단이 된 옛 브리센 상단의 수익금 일부였다.
상단을 살 때 멜피르 폴룬의 이름이 쓰이긴 했어도 실질적인 돈은 모두 이 금고에서 나왔었다. 때문에, 받기만 하는 것은 질색이었던 멜피르는 상단 수익의 일정 금액을 멋대로 칼리안에게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 역시 거래이니 칼리안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래서 이렇게 앨런이 폴룬 상단의 첫 수익금을 넣어두기 위해 이렇게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
흥얼거림 같은 혼잣말이 앨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왕자님은 돈이 마를 날이 없으시니."
처음 금고 속을 들여다 봤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잠시 떠올린 앨런이 혼자 피식 웃었다. 그 때의 놀라움은 오닉스 스톤으로 만들어진 욕조를 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칼리안의 금고에 대한 볼일을 모두 마친 앨런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메를린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앨런은 때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레딩턴 성의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입 밖으로 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우연이 있나.'
계단 난간 아래로 보이는 옅은 에메랄드 빛의 머리카락.
그 아래로 보이는 빛 없는 연두색 눈동자.
플란츠였다.
계단을 오르던 플란츠가 옆으로 비켜서는 이의 발 끝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다리를 움직여 앨런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뒤에는 물끄러미 앨런의 얼굴을 봤다.
상대가 2왕자라 하여 상대하기 어려워 할 인물은 아니었던 앨런은, 그저 작게 웃는 표정을 한 채로 플란츠를 향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 말에도 플란츠는 대답 없이 앨런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서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아무리 플란츠가 왕자라 하더라도 앞에 서 있는 이가 앨런 마나실이었다. 브리센 후작조차, 아니. 국왕 르메인조차 앨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지 않던가. 때문에 앨런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이렇게 세워두는 것에 플란츠의 시종이 불안함을 느낄 때 쯤.
"마법사. 당신을 만나서 바뀐걸까. 바뀌어서 만난걸까."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인사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 플란츠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말을 앨런에게 전했었다. 따라서 앨런은 플란츠가 하는 이야기가 칼리안의 정체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음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말버릇이 그런 것인지 플란츠가 꺼내든 말이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되물었다.
"바뀌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앨런의 태도에 플란츠가 다시 말했다.
"내 아우님이 많이 바뀌었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대답을 못들어서. 당신은 알까, 하고."
굳이 대답이 필요하다면 '칼리안이 바뀌어서 앨런과 만난 것이다' 라고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앨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술을 물리시니 생각이 많아지신 겁니까, 아니면. 생각이 많아져 술을 물리신 겁니까."
2왕자인 플란츠에게 '술'을 직접 언급한 것은 르메인이나 실리케 그리고 란델이 전부였다. 그만큼 지금 앨런이 꺼낸 것은 상당히 무례한 말이었다. 물론 르메인이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이제 그저 일상적인 표현으로 듣고 넘기겠지만.
플란츠의 시종이 앨런을 쳐다봤다.
주의를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앨런의 시선은 플란츠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군."
플란츠가 더 이상 망나니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아쉬워할 이라면 란델 뿐일 것이다.
따라서 앨런은 언젠가 란델도 플란츠가 술을 끊었다는 것에 대해 말을 했었나보다 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첫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누구나 변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플란츠가 다시 한번 앨런을 응시했다.
여전히 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다.
"변함의 방법이 술을 끊는 것이든, 형제들의 미친 짓에 집어먹었던 겁을 끊는 것이든. 차이가 있겠습니까."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앨런의 독설 때문에.
"하."
곧 플란츠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앨런은 날카로운 선을 지닌 눈으로 플란츠를 고스란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변하니, 그저 그 뿐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앨런은 플란츠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 사라졌다.
화를 내는 대신, 플란츠는 가라앉은 연두색 눈으로 앨런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앨런의 독한 말을 한 번 곱씹었다.
"미친 짓이라······."
한참동안 플란츠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 * *
레딩턴 영지의 영주인 테시드 레딩턴 자작은 40대 중반의 키 크고 마른 사내였다.
사려 깊고 진중하기로 유명하다던 얀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지금 상당히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테시드는 특별히 어떤 왕자의 편에도 서지 않은 몇 안되는 귀족 중 하나였다. 다만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에 나타난 칼리안의 모습을 꽤 인상깊게 느꼈던 바는 있었다.
때문에 예정에 없던 칼리안 왕자의 방문은 물론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특별히 싫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저 칼리안이 불편함 없이 머물다 가도록 조금만 신경을 쓰면 되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들어오고 있는 저 마차들이 없었다면 그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을 터였다. 테시드의 입에서 지금의 심경을 나타내는 한 마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낭패로군."
마차에 보란듯이 새겨 넣은 브리센의 문장을 알아보지 못할 테시드가 아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카이리시스로 오는 중이라는 것은 몰랐으나 저 문장을 붙인 마차에 있는 이들과 칼리안의 관계가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창 밖이나 보며 고민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결국 테시드는 아무래도 지금 들어오는 이들에게 칼리안 왕자가 이곳에 와 있음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완곡한 말로 브리센의 사람들을 돌려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테시드에게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이 있겠지만 이미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그런데 그때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이 전해드릴 말이 있다고 합니다."
테시드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라 하게."
곧 그의 앞으로 온 칼리안의 시종 얀이 테시드를 향해 간단한 인사 후 칼리안의 말을 전했다.
"왕자님께서 자작이 저들에게 왕자님이 이 곳에 계신 것을 미리 알리고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생각을 그대로 들킨 것 같은 기분에 테시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고 대답을 짐작한 얀은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다른 이들이라면 그리 해도 괜찮지만 만약 브리센 변경백이라면 보내지 말고 함께 차나 마시자 하셨습니다."
그레이라니.
예상치 못한 이의 이름이 나오자 테시드가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아닌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라면 돌려보내고, 만약 변경백이 맞다면 들여보내달라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 왕자님께서 나를 구해주시는군."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레이 쯤 되는 이를 돌려보내려 한다면 단순히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정도의 선에서 끝나지 않을테니까.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들여보내도 괜찮다고 칼리안이 이렇게 배려를 해 준 것임을 알아들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겠다 전해드리게."
할 말을 마친 얀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다른 마차를 본 테시드가 다소 긴장한 얼굴을 했다.
* * *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브리센 변경백에 대해 알고 있는대로 얘기해줘."
얀의 머릿속에는 대부분의 귀족에 대한 정보가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다. 왕자의 상급 시종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었다. 때문에 얀은 주저함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꽤 오래 전에 변경백으로 봉해졌는데 그 당시 브리센 후작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변경백이라는 자리보다는 수도에서 기사들을 양성하다 후작 작위를 세습하고 싶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전형적으로 안하무인한 성격이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안좋은 소문은······."
그렇게 말한 얀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뒤를 이었다.
"집에 마련된 별실이 네 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집에 별실을 마련했다는 내용 역시 귀족들의 은어였다. 한 마디로 아내가 아닌 여자만 넷이 더 있다는 소리다.
"검을 잘 다루면서 안하무인하고 변경백의 자리에는 그리 애정이 없지만 후작의 자리에는 욕심을 냈었고. 한 편으로는 여자를 좋아한다. 이런 말이네."
"네. 맞아요."
얀의 평가를 기억해 둔 칼리안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나는 변경백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 혹시 만났던 적이 있었어?"
"제가 왕자님의 시종으로 오기 전에 한 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기억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요."
얀이 없을 때였다면 칼리안이 11세가 되기 전이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때 만났었다면 지금 내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하고 있겠군.'
물론 실리케로부터 칼리안에 대한 많은 것을 전해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가 칼리안에 대한 실리케의 말을 어디까지 믿고 있는지는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얀이 밖으로 나가 방을 찾은 이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칼리안이 언뜻 고개를 돌려 보니 레딩턴 자작의 집사인 듯 했다.
다시 한번 창 밖을 쳐다보니 여전히 같은 곳에 놓인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하인들이 마차의 말을 풀어 마굿간으로 데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가 방문한 것이 맞다는 뜻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레이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얀이 돌아서 걸어와 칼리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응접실에 브리센 변경백과 레딩턴 자작이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칼리안이 선선히 대답했다.
먼 남쪽에서 열심히 달려온 칼리안과 대리인 발령이 지연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출발한 그레이 변경백. 둘이 같은 날 한 장소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웃으며 응접실로 걸어갔다.
그리 호화롭지 않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딱 둘만 있었다. 그레이 그리고 테시드. 테시드는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레이는 아니었다.
칼리안이 들어서자 테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채로 혹은 자리에 앉은 채로 왕자를 맞이할 수 있는 귀족은 오로지 단 한명.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작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귀족은 기실 왕자보다 아래의 서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문 앞에 선 채로 잠시동안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런 칼리안의 시선을 한참동안 즐기던 그레이는 실리케를 닮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 온전한 예를 갖추지 못하겠군요. 칼리안 왕자님."
당연히 핑계다.
저 멀끔한 얼굴과 옷매무새 그 어느것도 병자의 행색은 아니었으니.
'실리케가 나에 대해 상세히 전했을 그 내용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되나.'
그러니 그레이는 지금 앨런 마나실 하나 등에 업고 천지분간 못한 채 날뛰는 3왕자 칼리안을 휘어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띄워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군요."
칼리안이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레이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대꾸했다.
"네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칼리안의 얼굴에 담겨 있던 웃음이 지워졌다.
실리케를 대했을 그 때처럼 붉은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카이리스 3왕자의 입에서 위압감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라도 숙이거라. 변경백."
제13장. 찾았습니다 (3)
- 고개라도 숙이거라.
칼리안이 응접실 문 바로 앞에 선 채로 말을 했기 때문에 밖에 있던 얀은 칼리안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키리에라도 있으면 안심이 될텐데 칼리안은 성 내에서는 키리에의 호위를 받지 않았다. 자유롭게 수련을 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 오더라도 기사들을 데리고 올걸.'
그동안 특별히 무력 충돌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여 기사들을 두고 오자는 의견에 동의한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다.
왕자를 만나는 자리였으니 응접실 안에 들어간 그레이가 무장을 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평소 슬레이만을 잘 보고 자라온 얀이 아니던가. 소드마스터에게는 손에 들린 그 어떤 것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변경백이 혹시라도 이성을 잃고 날뛰면 어떡하시려고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얀은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응접실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안에게 이동 마법에 대한 숙제를 받은 아르센과 레이첼이었다. 아마도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응접실로 오는 듯 했으나 응접실은 이미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 나누세요."
그래서 얀은 이렇게 이야기하며 둘을 돌려보내려 했다.
얀이 밖에 있다는 것은 닫힌 문 안쪽에 칼리안이 있다는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은 다른 것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테시드의 집사가 다가와 눈치 빠른 소리를 했다.
"윗층에도 대화를 나누실 만한 곳이 있으니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 굳이 수고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레이첼이 아르센을 향해 눈짓을 했다.
곧 둘은 집사가 이야기했던 곳으로 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 타다닥!
그러나 둘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발을 멈추어야 했다. 멀리 복도를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흔들리는 은발이 눈에 확 띄었다.
"히나?"
그것은 바로 히나였다.
평소 히나는 절대로 저렇게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저 모습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과도 같았다.
히나를 부른 얀이 표정을 굳힌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히나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얀을 보며 수어를 했는데 그 손이 많이 떨리고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얀은 허리를 숙여 히나의 얼굴에 눈을 맞추었고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히나. 천천히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그 말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조금 더 느려진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 오빠, 기사들.
수어를 많이 잊어버린 탓에 모두 알아볼 정도로 잘 하는 것은 아니었던 얀은 히나의 손짓 중 딱 두 가지 단어를 알아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키리에, 브리센의 기사들?"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이 표정을 굳히며 한번 더 물었다.
"싸움이 났어요, 혹시?"
히나의 고개가 다시 위 아래로 움직였다.
"어디죠?"
- 말.
"마굿간."
이제는 더 물을 것도 없어진 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응접실 쪽을 쳐다봤다.
아직 칼리안과 그레이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히나가 전해온 것을 확인하러 직접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르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가보겠네."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뜻 나서주는 아르센에게 얀이 고맙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키리에와 브리센 기사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굿간에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옆에서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아르센이 바로 마굿간 쪽으로 가려는데 얀이 말을 이었다.
"헤르츠 경. 그 쪽에 경이 먼저 해를 입히면 안됩니다."
"그 정도를 모르고 있지는 않으니 걱정 말게."
이렇게 말한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 아르센의 뒤를 따라 레이첼도 가보려 했으나 얀이 만류했다.
"헤르츠 경이 혼자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레이스 경은 히나를 좀 봐주세요."
아르센은 칼리안의 사람이 맞았으므로 문제가 생겨도 칼리안이 해결할 수 있었으나 레이첼은 아직 아니었다. 게다가 레이첼은 이제 막 리베른에서 카이리스에 들어온 이방인이 아닌가. 브리센과의 일에 얽히면 곤란한 일이 생길 터였다.
그런 이유임을 모두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이첼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히나의 어깨를 감싸쥐고 같이 방으로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히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히나의 뒷모습을 보던 얀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의 기사들이 하필이면 칼리안이 제 핏줄처럼 아끼는 키리에와 히나를 건드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왕자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실텐데······ 이를 어쩐다."
칼리안이 절대로 좋게 넘어가지는 않을 일이 생긴 듯한 예감이 든다. 얀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응접실 안에는 태풍의 눈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요한 가운데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웃음 비슷한 것을 얼굴에 걸어두는 것에는 성공했다.
"무엇을 숙이라는 말씀이신지."
"왕자의 말에 되물음이라니. 무례하구나."
완전한 하대.
지금 그레이는 화를 내기보다는 제 귀를 의심하는 편을 택했다.
이런 말을 들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붓을 들어 그려 넣은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을 띄운 채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그런 그레이의 눈을 아까부터 응시하고 있었다. 한기가 어린 눈을 그대로 둔 채였다.
그레이를 내려다보는 표정 역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칼리안이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변경백."
그레이 브리센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장자. 실리케 브리센 왕비의 오빠.
검술에 한해서라면 대륙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변경백.
그런 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뻔하다.
시종이나 하고 있는 공작가 맏아들이 정말 이상한 것이다.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듯 그레이같은 사람이 되고 살아간다.
칼리안 아니 베른은 그런 이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착해 빠진 체이스를 대신해 그들을 상대하고 다스렸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고개를 숙이라 하였다."
이런 부류는 바닥 끝까지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배를 보이든 발톱을 내밀든 선택을 한다.
르메인조차 하지 않는 완벽한 하대에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험악한 얼굴을 했다. 옆에 서 있던 테시드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
"그대가 움직여야 할 것이 입이 아닐텐데."
칼리안은 그레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런 칼리안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표정에는 어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것을 본 그레이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키가 큰 편인 테시드보다도 머리가 한 개는 더 큰 장신이다. 그렇게 큰 몸을 꼿꼿이 한 그레이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살기를 꺼내놓으려나. 혹은 이성을 놓고 어딘가 숨겨두었던 검이라도 뽑아 들려나.'
아니면 예상 외의 현명한 대처를 보여주려나.
칼리안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오갔다.
그레이의 다음 행동을 예상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이 예측하던 이런 수들은 곧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일어나셨으니 예를 보이고 앉으십시오. 브리센 변경백님."
테시드가 이렇게 그레이의 행동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테시드를 향한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레이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지금 테시드가 돕고 있는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그레이였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이 사소한 감정 싸움이 더 큰 사고를 부르지 않도록, 중재를 하는 것이다.
고작해야 자작인 자가 변경백을 말리고 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터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런 테시드의 의도와 마음가짐을 칼리안만 파악했다는 것. 그리고 칼리안은 테시드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었다는 것 뿐.
칼리안이 잠시 테시드를 향했던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다시 똑바로 쳐다봤다. 멀찍이 서 있었으므로 저보다 키가 큰 그레이를 딱히 올려다 볼 필요는 없었다. 그 눈빛을 본 그레이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 예전의 3왕자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실리케가 보내왔던 편지의 한 줄 그 의미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실리케로부터의 소식 뿐 아니라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칼리안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헌데 그것이 과장이 아니었을 줄이야.
그레이는 당장 칼리안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만약 그런 일을 벌였다면 브리센 후작가 전체가 도륙을 당할 터. 아직은 섣불리 검을 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일어났으니, 그럼."
다만 그렇다 하여 얌전히 물러날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의 얼굴이 비틀린 웃음을 만들어냈다.
검을 뽑아드는 대신 그레이는 아주 과장된 팔동작을 만들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거짓이 가득한 예절이 그레이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가 할 법한, 윗사람을 향한 조롱의 의미가 가득 들어간 인사였다.
"그레이 브리센이 위대한 카이리스의 3왕자님을 뵙습니다."
그 후 그레이가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인사를 시켰고 인사를 했으니 그 모습이 경박한들 칼리안이 할 말이 있을리가. 그러니 이런 인사에는 과연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그레이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칼리안의 고개가 테시드를 향해 있었다.
그레이의 인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칼리안은 그레이에 대해 더는 볼 것이 없다는 듯 테시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피곤하다는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고단하여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변경백은 레딩턴 자작이 잘 챙겨주세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고개가 그제야 그레이를 향했다.
칼리안이 담담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많이 아프다 하니."
그리고는 더이상 그레이를 상대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것처럼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완전히 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레이의 눈빛이 변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레이가 칼리안의 뒤를 따라 한 발을 내딛었을 그 때.
- 콰앙!
생각지도 못한 굉음이 성을 흔들었다.
유리창이 흔들거릴 만큼의 큰 폭음을 들은 칼리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마력.
그 기운은 바로 아르센의 것이었다.
제13장. 찾았습니다 (4)
아르센은 자신에게 건네지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듣는다.
그렇다 해서 흘려들어야 할 말과 곧이곧대로 들어야 할 말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센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에 한해서 진지하게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전에 아르센이 칼리안에게 헤일 라트란 백작의 욕설을 그대로 전달했던 것은 칼리안에게 욕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안이 헤일의 무엄함을 제대로 느끼고 엄히 처벌하도록 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정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르센이 결코 구분 없이 진지한 바보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 그 쪽에 경이 먼저 해를 입히면 안됩니다.
따라서 아르센은 얀이 자신에게 건넨 말에서도 진지하게 들어야 할 이야기를 잘 구분해냈다.
그러므로 아르센이 그레이의 마차를 시원하게 폭발시킨 것은.
그레이의 기사들이 히나에게 집적거리는 것을 막아선 키리에를 일방적으로 폭행한 것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다.
* * *
아르센의, 폭음이라.
이보다 더 이상한 조합이 또 있을까.
칼리안의 눈이 바닥을 향해 조용히 내리떠졌다.
테시드 레딩턴이 곧바로 창가로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응접실의 창문 쪽에서는 딱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테시드는 집사를 불러 무슨 일이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전달했다. 물론 그레이도 밖에 있던 기사를 불러 상황을 확인해오라는 지시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주변의 기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르센의 마력이 더 느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칼리안에게 다가온 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여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던 칼리안의 눈동자가 얀에게로 조용히 움직였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있는 표정을 보게 되었다.
얀은 지금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난 소리가 아닌 칼리안을 신경쓰고 있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그레이를 상대하느라 가라앉아있던 목소리가 채 정리되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폭음은 밖에서 났는데 너는 나를 살피네."
"아······."
"뭐야."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얀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을 했다. 키리에에게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순간 칼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앞을 살짝 가로막고 선 얀이 말했다.
"제가 지금 내려가서 확인해보고 올게요."
의도가 다분했다.
칼리안이 직접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칼리안은 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 얀을 피해 돌아간 뒤 계단 쪽으로 뚜벅뚜벅 발을 옮겼다. 잠시 후 방으로 향하는 오르막과 밖으로 향하는 내리막의 사이에 멈춰 선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은 저 난리를 피우면서 나를 부르고. 너는 내가 저기 내려가지 않았으면 하고."
아르센이 칼리안을 '부르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르센이 폭음을 냈기 때문이었다.
폭음이 들렸다는 것은 곧 화염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아르센은 본래 얼음을 사용하는 마법사다. 그러니 폭음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 아르센이 일부러 화염을 써가며 폭발을 일으켰다는 소리였다.
만약 정말 긴급한 일이 있었다면 아르센은 잘 쓰지도 않는 마법을 쓰는 대신 상대방에게 얼음의 창을 날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저 폭발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속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유를 물은 것인데 너는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가 볼 밖에."
그러자 얀이 잠시 말을 고르다 걸음을 빨리 하여 칼리안의 앞을 한 번 더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걸음을 막아선 것에 대한 사과에 칼리안이 눈을 찌푸리며 얀을 쳐다봤다. 얀이 이렇게까지 나설 정도라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기기 전에 얀이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입을 열었다.
"왕자님. 여기서 변경백과 더 충돌하시면 안됩니다. 잘못 건드리면 왕자님만 불리해집니다. 잘 아시죠? 섣부르게 나서지 말아주세요."
얀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 뭘 건드렸는지부터 보고."
그리고는 다시 발을 놀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나타난 허여멀건한 마법사가 일언반구도 없이 말 머리통만한 화염구를 만들었을 때 그레이의 기사들은 상당히 당황했다. 그러다 말 머리통만한 그 화염구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올 때에는 모두 기겁하여 허리를 움츠렸다. 그렇게 기사들의 머리통을 스치듯 지나간 화염구는 그대로 그레이의 마차를 날려버렸다.
- 콰앙!
엄청난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던 네 명의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뒤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했다. 세 대의 마차 중 하필이면 그레이의 마차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 중 그레이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기사 엑토르가 살기를 띄우며 아르센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게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은 엑토르로부터 등을 돌리고 섰다. 그리고 키리에의 지저분해진 옷부터 '클린' 마법으로 제대로 돌려놓아 주었다. 흙과 피로 지저분해진 옷은 다시 깨끗하게 되었으나 이미 난 상처까지 어찌하지는 못했다.
언뜻 보아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으나 여기저기 까지고 멍이 들어 그리 보기 좋은 꼴이 되질 않았다. 아르센이 혀를 차며 키리에를 향해 물었다.
"왜 맞기만 하였는가?"
키리에가 대답 없이 살짝 웃었다. 아마도 브리센의 기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칼리안이 곤란해질까 걱정했으리라. 아르센의 입에서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네. 모르긴 몰라도 왕자님한테 좋은 소리 듣긴 힘들 것이네."
걱정해주는 말이었으므로 키리에가 감사를 전하려는데 그런 둘의 대화를 더 두고보지 못한 엑토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땔감으로 쓰기 딱 좋게 변한 마차를 가리켜보이며 살기 등등한 기세로 소리쳤다.
"저게 무슨 짓이냐? 감히 저것이 누구의 마차인 줄 알고!"
그러자 아르센은 키리에를 가리켜보였다.
"감히 이 소년이 누구의 사람인 줄 알고 건드린 것인가?"
마차와 키리에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는 했으나 아무튼 아르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엑토르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도 3왕자의 따까리냐?"
자신 때문에 일에 말려든 아르센이 비난을 듣자 키리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르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네."
말이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자신이 칼리안의 따까리인 것은 맞지 않나.
"그러는 그대는 후작 아들의 개인가?"
이번에는 저 따위 놈과 개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미안했으나 아무튼 아르센은 그렇게 물었다.
엑토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당장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옆에 서 있던 키리에에게 내밀었다. 찢어진 눈가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키리에가 그것을 받아들자 엑토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아르센이 자신을 그리 신경쓰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까닭이었다. 그러자 엑토르의 발 앞에 커다란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 콰직!
깜짝 놀란 엑토르가 발을 물리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엑토르의 발 앞에 얼음창을 날려보낸 아르센이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사들은 칼 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네. 거기서 말해도 다 들리니 더 다가오지 말게."
하마터면 얼음창에 그대로 발등을 찍힐 뻔한 그가 노기 어린 목소리를 터뜨렸다.
"이 새끼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 말에 저 멀리서 대답이 들렸다.
"내 따까리가 말해줬잖아. 개라고."
칼리안이었다.
꽤 거리를 두고 걸어오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칼리안이 한 말이 모두에게 또렷이 들리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잠깐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그레이의 마차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후에는 아르센을 향해 짧게 물었다.
"마차값, 내가 변상해야 합니까?"
그러자 아르센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제 급여에서 제하시면 됩니다, 왕자님."
그 말에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아르센의 급여가 어느정도인지 칼리안이 모르지 않았다. 변경백의 마차값을 제하려면 아마 몇 달은 한 푼도 받지 못할 터였다.
칼리안이 웃자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얀이 매우 불안한 눈을 했다. 칼리안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키리에의 얼굴부터 확인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저 기사들의 목을 치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일텐데 오히려 재밌다는 듯 웃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여전한 속도의 걸음으로 아르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내 시녀가 여기에 있었을텐데. 어디 있습니까?"
히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얀이 할 수 있었으므로 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아르센은 히나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여기에 없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자님의 시녀인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그럭저럭 마음의 여유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매우 화가 나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일을 더 키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화를 다스리고 있었다.
"반반하게 생긴 벙어리 계집이 있으니 변경백이 좋아하겠다 싶었다더군요."
그런 칼리안의 이성을 정직한 아르센이 툭 건드렸다.
칼리안이 새하얗게 웃었다.
얀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주 조금만 이성을 잃은 칼리안의 손에 투명한 빛이 어렸다.
* * *
그레이가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왕자의 시녀를 추행한 기사 넷의 혀를 자르고 왕자의 시종에게도 해를 입힌 죄를 물어 그들의 작위를 박탈한 것에 대해 칼리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제 부하들 잘못은 신경쓰지 않은 채 칼리안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그레이를 보며 칼리안은 일단 참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레이의 목을 치고 싶었으나 우선 그 정도 선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담담한 눈으로 이렇게만 말했다.
"헤르츠 경이 실수로 부순 마차 값은 카이리시스에 가면 마나실 경이 지불해줄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그에 대해 그레이는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했다. 테시드의 마굿간 하인들과 병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이는 그 길로 레딩턴 성을 떠나기로 했다. 때문에 테시드에게 마차를 빌리고자 하였으나 테시드는 그런 그레이에게 하필 지금 마차의 축이 고장나 수리중이라며 사과를 전했다.
그레이는 그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못했다.
결국 그레이는 어여쁜 두 명의 애첩을 짐을 싣는 마차로 옮겨 앉도록 했다.
핑크색의 하늘거리는 커튼과 진주 구슬이 달린 장식을 모조리 뜯어낸 그레이가 카이리시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괴성을 질렀다.
제13장. 찾았습니다 (5)
가만히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문득 말했다.
"조용해지니까 좋네요."
그레이가 떠난 뒤, 레딩턴 성의 병사들과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때문에 그레이의 흔적을 지우고 본래의 평화로운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즉 태평한 얼굴로 테시드의 집사가 건네준 따뜻한 밀크티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런 칼리안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테시드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브리센 변경백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글쎄요. 걱정할 것이 있으려나."
"소드마스터가 아닙니까. 변경백의 화를 그렇게 돋워놨으니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우려됩니다."
"괜찮습니다."
칼리안은 짧은 대답으로 해야 할 모든 말을 대신했다. 테시드에게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태평한지 누구에게 말 할 거리도 되지 못했던 탓이다.
칼리안이 이 응접실에서 그레이를 마주했던 그 순간 칼리안은 그레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매우 강한 오러를 느꼈다. 때문에 마음놓고 그레이의 자존심을 꾹꾹 내리눌렀다. 그레이의 오러가 느껴졌다는 것은 최소한 칼리안과 동급이거나 그 이하의 상대라는 소리였으니까.
게다가 수도에는 앨런과 앨런이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단이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앨런과 르메인이 어떤 결정을 하게 될 지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발칸의 창설을 앞당기겠지.'
아무리 훈련이 안되어 있다 해도 능력 있는 마법사들의 집단이다. 때문에 섣불리 나서서 건드려 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든 세력 대 세력의 싸움이든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사람과 만났을 뿐이니 걱정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테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불안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테시드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기하기까지 했다.
곧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움직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조금 가까운 곳을 보고 있었다. 사실 그 곳에는 그레이만큼 테시드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가 아까부터 눈에 밟히고 있었다.
테시드가 조금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저 시종은 계속 저대로 두실 겁니까?"
'저 시종'이란 성의 훈련장을 벌써 몇 십 바퀴 째 달리고 있는 키리에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칼리안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저렇게 해서라도 가르쳐 놔야 할 것이 있어서요."
칼리안을 위해 기사들의 매타작을 견딘 키리에는 히나의 치료도 허락받지 못한 채 곧바로 뜀박질을 시작해야 했다. 물론 테시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칼리안을 믿지 못한 행동에 대한 벌이었다.
키리에와 반대로 아르센은 칼리안의 직위와 대처 능력 그리고 재력을 믿었다. 그래서 엄청난 금액의 마차 한 대를 한 계절 잘 써먹을 장작더미로 만들어 경고를 빙자한 화풀이도 했다. 겸사겸사 폭발음을 들은 칼리안이 나오도록 불러낸 뒤에는 적당히 화를 돋워서 놈들을 처벌하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칼리안으로 하여금 직접 피를 보게 만든데다 안그래도 많이 비어있던 금고를 한번 더 털게 만든 것에 대한 대가로 아르센은 지금 꿀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 아이와 내가 감당할 일이 서로 다르니 이제 그것을 깨우칠 때가 되었습니다."
칼리안은 키리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일러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달리고 깨닫고 난 뒤 찾아오라 했을 뿐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무리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왕자님."
어느새 노을마저 지고 달이 밝아오고 있었다.
테시드까지 이렇게 키리에를 신경 쓸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나 칼리안은 그저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칼리안이 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내가 저 정도를 견디지 못할 이에게 내 등을 맡기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여유로웠고 목소리에는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때문에 테시드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궁금해 할 영역이 아니었군요."
"대신 내가 자작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왕자님."
칼리안은 티스푼을 들어 주위를 환기시키듯 밀크티를 몇 번 저은 뒤 입을 열었다.
"자작의 가족들은 카이리시스에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간혹 오가고 있습니다."
칼리안의 시선이 이제는 어두워져 어슴푸레 보이는 호수를 향했다. 그러다 아침에 보았던 평화로운 광경이 떠오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런 조용한 곳이라면 자작의 손이 직접 닿지 않아도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을텐데. 굳이 이 성에 계속 머무르는 이유라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테시드가 칼리안과 같은 곳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책을 읽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보니 떠나있을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이라······ 그렇군요. 이런 곳이라면 책을 보며 지내는 생활에 욕심을 내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답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저 책만 보며 지내도록 두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더 컸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금 전부터 고민하던 말을 꺼내놓았다.
"자작의 마차. 정말로 축이 고장났을까요."
마차를 빌려달라던 그레이의 말에 태연한 얼굴로 축이 고장나 타실 수 없다 말하던 테시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묻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어보였던 그레이의 얼굴이 생각난 테시드가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곧 테시드의 대답이 이어졌다.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가 타는 마차를 함부로 내어주면 자칫 갈 곳이 없어집니다."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는 말.
칼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거절한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서가 아니라 함부로 어느 쪽 편에 서기 어려웠다는 속마음을 칼리안에게 말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었다.
칼리안은 사려 깊고 진중한 그리고 상대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나서거나 빠질 줄 아는 이 자작이 꽤 마음에 들었다. 생각과 셈이 빠른 멜피르 폴룬과 썩 잘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과거의 기억에서 떠오르는 적당한 인재가 없으면 찾아서 쓰면 되는 것을. 게다가 인재란 눈에 띄었을 때 아낌 없이 주우라 하였으니.
칼리안이 테시드를 깊이 응시하며 물었다.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습니까."
테시드가 한동안 말 없이 찻잔과 창 밖을 쳐다봤다.
그 후 테시드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같이 가시죠. 카이리시스에."
칼리안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칼리안의 눈에도 보였다.
"왕자님 일행의 말이 다 나을 때 즈음에는, 마차 축의 수리도 끝날 것 같습니다."
"시기가 좋군요.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폴룬 남작을 도울 만한 사람,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전해진 앨런의 요청에 대해 대답했다.
* * *
칼리안이 이렇게 여유 가득한 자세로 앉아 인재 발굴에 힘쓰는 사이.
이미 발굴된 인재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건도 많고 사고는 더 많은 칼리안을 보좌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얀이었다.
그레이가 돌아간 뒤 얀은 그레이의 마차값부터 가늠하여 따로 적어두었다. 칼리안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르센을 찾아가 마차의 변상은 칼리안이 할 것이라는 내용과 오늘은 '숙제'에 신경쓰지 말고 푹 쉬라는 칼리안의 말을 전달했다. 아르센이 마음껏 날뛴 덕분에 오늘 하루 얀의 심장이 얼마나 쇠약했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성의 주방장에게 부탁해두었던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아 히나의 방을 찾아갔다. 달래주기도 할 겸 키리에가 곧바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훈련장을 뛰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려던 것이다. 그런데 히나의 반응이 꽤 의외였다.
- 이제 괜찮아요. 울어서 미안해요.
빈 말이 아니라 히나는 정말로 굉장히 멀쩡했다.
부어있는 눈이 아니었다면 아까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키리에가 무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던 히나는 키리에가 벌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얀의 설명을 들은 뒤 덤덤하게 대답했다.
- 맞아요. 오빠는, 혼나야 돼.
곰 같은 키리에는 혼나는 그 이유를 몰라서 다친 몸으로 훈련장을 뛰고 있는데 히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떠먹었다. 잠시 할 말을 잊었던 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 괜찮아요. 왕자님이 전부, 갚아줬어요.
얀은 몰랐지만 칼리안이 키리에 남매를 데려올 때 히나의 잘린 귀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등을 갚아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히나는 칼리안이 기사들에게 왜 그런 벌을 내렸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야 그 이유를 달리 설명했지만, 사실 칼리안이 그들의 피를 본 진짜 이유는 히나를 희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 못하는 것을 조롱했기 때문이며 기사 작위를 박탈한 것이 희롱에 대한 처벌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칼리안은 키리에를 때렸다는 이유로는 기사들을 처벌하지 않은 셈이었다. 오히려 기사가 아닌 키리에를 벌 주고 있지 않은가.
- 전부 갚아주셨으니까, 더 이상, 속상해 할 이유도, 없어요.
속사정을 모를 얀은 히나가 괜찮다 하니 그저 천만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 * *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번에는 남의 마차를 부쉈다더군요. 돈이 또 나가게 생겼습니다."
사실은 칼리안이 아닌 아르센이 저지른 일이었으나 앨런은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당신의 망나니 아들이 또 사고를 쳤다는 듯한 말투로 전해진 소식에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너무 당연한 것을 되묻고 말았다.
"설마 칼리안이 그랬다는 말인가?"
"설마 란델 왕자님이나 플란츠 왕자님이 그런 막돼먹은 짓을 하겠습니까."
란델이야 당연했고 아무리 그래도 플란츠가 밖에서까지 남들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 비록 얀에게 한번 식사용 나이프를 집어던진 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얀이 다치지는 않았으니 수도에서 코끼리떼를 보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언제 슬레이만에게 그 일을 얘기해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앨런에게, 얀이 누구 아들인지는 꿈에도 모를 르메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그리 행동할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믿음이 잔뜩 담긴 대답을 한 르메인이 서랍에서 수표지를 꺼냈다. 그리고 금액을 써 넣는 곳에 펜을 가져가며 앨런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금고에서 빠져나간 돈이 많았으니 마차값 정도는 르메인이 지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앨런이 씩 웃었고 르메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앨런의 입을 쳐다봤다. 또 뭔가 한 소리가 나올 기세였으니까.
"마차 부순 값으로 막내 아드님 목을 내어드릴 셈입니까?"
또 혼났다.
"전하께서 마차의 값을 대신 지불하게 되면, 왕자님의 행동을 용인했다는 것을 마차 주인에게 알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즉 그것은 칼리안이 르메인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을 르메인 스스로가 증명해버리는 행동이었다.
"전하께서는 그냥 누구의 마차인지만 궁금해하시면 됩니다."
평상시의 르메인이라면 선뜻 돕겠다며 수표를 꺼내들기보다는 칼리안이 누구와 충돌했는지를 가장 먼저 물었을 터였다. 때문에 앨런은 지금 그 점에 대해 일침을 놓는 중이었다.
"누구의 마차였기에."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마차라 합니다."
그 뒤 이어진 앨런의 설명에 르메인의 얼굴에서 한 십년 쯤의 세월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레이가 데려온 열 명의 기사 중 넷의 작위를 박탈한데다 평생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카이리스 법도 내에서 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벌을 적용했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손이 상당히 매서운 아이가 되었나본데."
"그만큼 제 사람을 아끼는 것이지요. 참을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은 알고 있으니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안이 그렇게나 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불러올 여파를 따져보던 르메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칸에 소속될 마법사들의 명단이 얼추 만들어졌던가."
"네. 생각보다 적기는 하지만 왕자님께서 왕실의 두 기사단에 기가 죽지 않을 만큼은 됩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30명의 마법사를 떠올리며 앨런이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발칸의 창설은 두세 달 정도의 여유를 더 두고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들을 수용할 전용 건물도 없는 상태이니. 그런데 상황이 바뀐 탓에 우리도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간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마차값으로 칼리안의 행동을 용인해주는 배포가 아니라 브리센의 기에 눌려있지 않을 진짜 힘이었다.
르메인이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다 큰 숨을 내쉬었다.
"건물이 없으면 있는 것을 쓰면 되겠지. 기사단 파벨이 왕궁 내에서 사용하던 건물과 부지에 발칸을 들이게."
발칸의 창설을 앞당긴다.
그리고 실리케의 무기가 되어주었던 파벨의 구역에 마법사단 발칸을 들인다.
"파벨의 건물에 발칸을 들이시겠다니. 브리센에 대한 선전포고라도 하실 셈입니까."
"나쁘지 않겠지."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르메인을 보며 대답했다.
"축하드립니다. 머지않아 정말로 목이 간당간당하게 되셨으니."
머지않아 목이 간당간당하게 될 르메인이 같이 웃었다.
제14장. 오랜만입니다 (1)
너무 이르다.
사람들이 칼리안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르메인의 생각이었다.
칼리안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칼리안이 카이리시스에 도착하기 하루 전.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귀환을 환영해주려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공동이 빛나는 상서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돌아온다 하니 이번에도 모여든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때문에 거리마다 가득한 이들의 입에서 칼리안의 이름이 내려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칼리안이 차기 왕세자가 될지 되지 않을지를 벌써부터 점쳐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르메인이 이르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르메인은 그런 그들의 관심 때문에 칼리안이 실리케와 란델의 집중 타깃이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 오. 그것을 아는 분이 라트란 성에 기사단 카에라를 보내셨던 거군요.
르메인의 걱정을 들은 앨런이 어김 없이 한 소리를 했었다. 물론 앨런의 지적은 언제나 옳았으므로 르메인은 사과를 씹어먹으며 말을 내뱉던 그 입을 향해 별 소리를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런 르메인의 걱정은 얼추 들어맞았다.
란델의 생각은 알 수 없었으나 다른 한 명의 심기가 더 많이 비뚤어진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만나겠구나."
붉은 입술 틈에서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나 대단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지. 반갑기도 하여라."
칼리안이 독차를 물렸던 그 날 이후 친아들과 거의 다섯 달 만에 처음 만나는 오찬 자리였다. 하지만 실리케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칼리안에 대한 경계의 말, 그리고 르니에리 향기 뿐이었다.
물론 플란츠는 그 이상의 것을 실리케에게 바란 적도 없었다.
아마도, 없었다.
"내 아우님을 반겨하는 마음에 나를 보자 하셨는지."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에 다소 마르긴 했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실리케가 여전히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곧 변경백이 올 것이라 하기에 그것을 알려주려 부른 것이란다."
실종 상태인 레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저 새로 오게 될 그레이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플란츠가 성의 없는 고갯짓을 보인 뒤 대답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실리케의 눈에 찬 기운이 어렸다.
앞에 앉아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을 보는 실리케의 귓가에 칼리안이 건넨 말이 아른거렸다.
- 플란츠는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칼리안이 독을 마신 날. 항변하는 실리케를 플란츠가 막은 것이 실리케를 살리기 위함이었다던 그 말을 실리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언제나 플란츠는 실리케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지금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가 오는 것이 플란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이득이 될 텐데도 그저 탐탁지 않게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실리케는 조곤조곤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네가 걷게 될 길이란다. 너도 알고 있지 않니? 그러니 무의미한 반항들은 이제 그만하렴."
그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라는 말은 좀 짜증나는데."
그렇게 말한 플란츠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 모습에 걸맞는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해진 길인지도 모르겠고요."
실리케가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구의 마음대로인지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대답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이 알아낸 일들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많던데요. 훨씬."
칼리안이 공개했던 실리케로 인해 죽은 이들에 대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플란츠는 실리케가 정말로 그들을 전부 해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이미 사실임을 알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실리케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왜 아직도 이렇게 어리게만 구는걸까."
다른 대답이 필요할까.
플란츠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날. 그냥 닥치고 있을걸."
이성을 잃은 르메인이 카에라 단장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두고 보았어야 했다고. 플란츠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안 실리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금 실리케는 그 날의 르메인을 막아선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플란츠의 말에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실리케가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긴 플란츠의 연두색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 아들. 그리 애쓰지 말려무나."
언제나 플란츠가 하던 말이 실리케의 입에서 나왔다.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플란츠도 실리케의 눈을 쳐다봤다.
"······ 누구는 너무 변했는데. 누구는 너무 안변하네."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플란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독한 르니에리 향기가 다시 느껴졌다.
"계속 애쓰실 것 같아서. 원하시는대로 조용히 있겠습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변한 것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저 향기가 멈출 것 같아서였다.
* * *
- 늦더라도 다음주 전까지는 레딩턴 자작이 카이리시스에 도착할 겁니다. 상단 일을 해본 자는 아니지만 잘 적응할 것 같습니다. 카이리시스로 올 마음을 먹고 나니 열의가 대단하더군요.
- 다행입니다. 폴룬 남작의 과로사는 면하겠으니.
칼리안이 없는 사이 멜피르와 많이 친해진 모양인지, 앨런이 꽤 반겨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곧 칼리안 쪽에서 전할 말이 끝나고 이번에는 앨런이 소식을 전해왔다. 하마터면 르메인이 마차 값을 낼 뻔했다는 말을 듣고 실소하던 칼리안이 물었다.
- 그럼 발칸은 제가 도착한 직후에 창단되는 겁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앨런이 잠깐 대답하지 않다 물었다.
- 제가 왕자님께 그 말을 했었습니까?
- 아뇨. 제가 사고친 것 때문에 날짜를 앞당겨야겠다고 결정하셨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제가 카이리시스 밖에 있을 때 창단하면 자칫 공격이 있을까 걱정하셨을테니 제가 간 직후로 날짜를 잡고 그 전까지는 비밀로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앨런이 웃는 것이 전해졌다.
- 왕자님 손에서 사이 좋게 놀고 있었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왕자님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창단을 발표하고 그 다음주에 창단식을 가질 예정이지요. 그 전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 마법학원은 테이난샤 거리의 빈 건물을 임시로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마법사단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발칸이 어디에서 지내도록 할 지에 대해서는 칼리안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때문에 앨런은 칼리안의 놀란 반응을 기대하며 말했다.
- 파벨의 영역을 침범하기로 했지요.
앨런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꽉 쥐었다.
다른 대답 없이 한참동안 생각을 해보던 칼리안이 말을 전했다.
- 실리케가 워낙 화가 많아서 전하께도 위협이 있을텐데요.
-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카에라의 기사들을 너무 얕잡아 보지는 마시지요.
카에라의 기사를 얕보지 말라니.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앨런에게는 전달되지 않을 웃음이었다.
- 얕보다니요. 정확히 보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기사단장조차 검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는데, 두 명의 소드마스터로부터 르메인을 어떻게 지킨다는 말입니까.
앨런이야 자신이 곁에 있으니 괜찮으리라 여기고 말았겠으나 칼리안은 안심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상황에서 그레이가 카이리시스로 가게 되면 르메인의 목숨이 정말 위험할 터였다.
테이블 대신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치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반지와 연결된 앨런이 아니라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던 얀을 향해서였다.
"레딩턴에서 카이리시스로 가는 길은 이 곳 뿐인가?"
그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굳이 빙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이 길 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중얼거렸다.
"변경백이 그 분홍색 마차를 타고 수도까지 가진 않겠지. 그럼 잘 하면 만나겠네."
그리고는 잠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방금 결정한 일에 대한 여러 경우의 수를 가늠해보는 시간이었다. 곧 칼리안이 장난 같은 말을 건넸다.
- 스승님. 저 어쩌면 사고 하나 더 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우려된다는 듯이 말했다.
- 왕자님과 브리센 변경백이 만난 것이나 둘의 경로가 같은 것은 이 곳에서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괜한 오해 살 일은 벌이지 마시지요. 혹시라도 성급히 칼을 휘두를까 걱정됩니다.
- 그레이를 죽일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전하께서 저 때문에 목숨을 내놓게 할 생각도 없어서요.
-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일을 벌일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브리센 변경백이 카이리시스에 가게 둘 생각이 이제 없어졌다 해야 맞는 말일 것 같네요.
칼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 칼을 휘두르지는 않겠습니다. 제 칼은 탈이 나지 않을 때 휘두를 테니 걱정 마세요.
- 알겠습니다. 칼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하시지요.
무슨 사고를 치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사고치는 아들을 보며 머리아파 하는 것은 르메인의 몫이었다. 따라서 앨런은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 늘어나는 셈 치며 이렇게 답했다.
* * *
- 다그닥, 다그닥!
여러 마리의 말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말이 달리는 속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누군가 본다면 꿈을 꾸는 중인지 의심을 해 볼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런 엄청난 속도의 말 위에서, 아르센과 레이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칼리안은 이동 마법진과 관련해서 카이리시스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느정도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르센은 카이리시스 입성일이 가까워지는 것을 거의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 같이 느끼고 있었다. 결국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레이첼과 토론을 이어나가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말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에 있었다.
속도가 이렇게까지 빨라진 것은 칼리안의 요구사항 때문이었다.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직후 말들이 견딜 수 있을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게 해달라 한 것이다.
"내 말은 맹세의 인 같은 것을 활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런데 맹세의 인은 일대 일의 계약이니컥!"
앞의 목소리는 레이첼이었고 뒤는 아르센이었다.
아르센의 말이 이상한 소리와 함께 끊긴 이유에 대해 칼리안은 굳이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촉박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말 위에서 입 열지 말아요. 혀 씹히니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우아한 레이븐은 빠른 속도로 달려도 여전히 우아했으니.
아무튼 이런 일련의 일들을 거치며 두어 시간을 더 달린 뒤 일행은 드디어 말의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칼리안이 찾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달리는 마차에서 그레이의 기운이 뻗어나오는 것을 확인한 칼리안의 입 꼬리가 말아올려졌다.
"찾았다."
벽 틈에 숨은 생쥐를 발견한 고양이의 울음 같은 칼리안의 목소리에 일행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얀은 알아서 뒤로 물러났고 레이첼은 히나와 베로니카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저들과의 일로 자정이 넘어서까지 훈련장을 달리다 간신히 칼리안의 뜻을 깨닫게 된 키리에는 투지를 불태우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제는 칼리안에 대한 쓸데없는 배려심 때문에 바보같이 참고만 있지는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아르센은 지난번에 부순 것 다음으로 비싸보이는 마차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일행들을 향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는 대신 잠깐 웃었다.
한편, 이제 내일이면 카이리시스의 집에서 편안하게 발 뻗고 잘 생각을 하며 불편한 마차를 간신히 참고 있던 그레이에게 집사가 말했다.
"변경백님. 뒤에 누군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따라오다니?"
그 말에 곧바로 마차 뒤의 커튼을 젖히고 뒤를 쳐다본 그레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또 저 왕자인가. 대체 어떻게 따라왔지?"
물론 이유는 간단했다.
칼리안의 일행은 레딩턴 성에 들어가 사흘을 쉬었다. 그 후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마법을 사용해 나흘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했다.
그 사이 그레이는 마차를 구매하여 정비하는 것에 하루를 쓰고 나흘을 달렸다. 못 만날 수도 있었던 그레이를 칼리안이 찾을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자신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칼리안이 심지어 살짝 웃고 있음을 확인한 그레이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마법을 좀 배웠다 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 안하무인한 성격 뿐 아니라 마법사를 우습게 보는 것도 에반 브리센 후작을 꼭 닮은 그레이였다.
"진정으로 인내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은 꿈에서도 모르겠지."
그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칼리안이 마차를 거의 다 따라잡았다.
그러자 그레이의 집사가 들창을 통해 물었다.
"변경백님. 마차를 세울까요?"
그레이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차가 서면 왕자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다. 그냥 무시하고 가도록."
"네 네."
아주 거친 표현에 화들짝 놀란 집사가 다시 몸을 돌리며 마부를 채근했다. 그 사이 칼리안이 그레이의 마차 근처로 다가왔다. 그레이는 창문의 커튼을 내린 채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칼리안이 마차 옆으로 가고자 했으므로 레이븐은 마차를 둘러싼 기사들의 말 사이를 우아하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용케 마차의 바로 옆까지 달라붙은 칼리안이 달리던 그대로 입을 열었다.
"변경백. 버릇없는 모습은 여전하군."
마차 안에 있던 그레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실리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저 왕자를 살려둬야 한다고 그 생각만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가며 그레이의 일행을 둘러보다 물었다.
"그런데 변경백. 네 기사가 여섯 뿐이구나. 나머지 기사 넷은 어떻게 했나."
그레이가 칼자루를 꽉 말아쥐었다.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아. 이제 기사가 아니었지. 내가 직접 작위를 박탈해놓고 잊고 있었군."
레딩턴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의 식사가 된 네 명의 멍청이들이 생각난 여섯 명의 기사들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네 개들이 사라진 것도 이렇게 궁금한데. 그대는 혹시 궁금해 해본 적 없나."
그렇게 말한 후 잠시 뜸을 들인 칼리안이 아주 느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대의 동생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어차피 레넌은 가문에 큰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그레이도 그리 크게 궁금해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리고 브리센 후작이 말하지 않았던가? 돈을 노린 이들의 소행일 것이니 차차 찾으면 된다고.
그것이 레넌이든.
혹은 레넌의 시신이든.
"사실 누가 브리센 후작에게 돈을 아주 많이 줬거든. 레넌 좀 치워달라고. 그랬더니 레넌이 사라졌지."
"그랬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레이는 칼리안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기더군."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후작은 후작 작위 탐내는 첫째 아들도 돈 받고 치워주려나, 하고."
그레이의 마차 속에서 살기가 확 피어올랐다.
살기의 방향을 확인한 칼리안의 눈이 긴 호선을 그렸다.
제14장. 오랜만입니다 (2)
칼리안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레이의 살기를 털어내듯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마차 안에서 그레이의 흉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차를 세워라."
계속 달리던 마차가 비로소 멈춰섰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의 살기를 느낀 키리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고 아르센과 레이첼의 손에는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를 보냈다. 특히 분홍색 마차를 보며 대충 각을 재보는 아르센 쪽을 집중적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얀을 보며 말했다.
"키리에만 남고 먼저 가고 있어. 곧 갈테니."
지금부터 할 일은 칼리안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칼리안의 비밀을 아는 키리에 외에는 이 곳에 있지 않아야 했다.
칼리안의 굳은 표정을 본 얀은 두 말 없이 일행들을 데리고 왕도를 따라 멀어져갔다.
그들의 뒤를 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동안 칼리안이 아닌 베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레이는 카이리시스로 가면 안된다. 다만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적당히만 손을 봐주어 뒤탈이 생길 여지를 만들어도 안된다.'
따라서 칼리안은 그레이를 완전히 바닥 끝까지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칼리안에게 대서지 못하도록 완전히 배를 보이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 드르륵!
그레이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베른의 눈빛을 한 칼리안이 창 밖을 쳐다보는 그레이를 내려다봤다.
그런 변화를 알 리 없었던 그레이는 커다란 검은 말 위에 앉은 채 마차 안의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리안을 향해 잇소리를 냈다.
"천한 년의 핏줄이 어디 감히!"
칼리안이 창문 너머로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멱살을 붙들어 잡아챈 뒤 확 당겼다.
- 콰악!
"내가 참다 참다······컥!"
순간적으로 마차 벽에 목이 눌린 그레이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살기도 그레이가 먼저.
욕도 그레이가 먼저.
그러니 이제부터는 정당방위다.
칼리안이 손에 붙들린 그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참고 억누르고 있던 화를 터뜨렸다.
"참다 참다, 뭐."
칼리안이 사납게 웃었다.
- 쾅!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다시 마차 벽으로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그 손에 붙들린 그레이는 머리를 또 박았다.
그레이가 눈을 치켜떴다.
"이······컥!"
- 쾅!
칼리안은 왕도에서 그레이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오러를 감추던 마력을 해제하고 있었다. 그것을 그레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여섯 중 세 번째의 소드마스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막 소드마스터가 된 칼리안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한다. 사실상 검의 길에 오른 뒤 제대로 수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칼리안이 강자였다.
"이, 뭐."
- 콰앙!
한번 더 마차 벽에 머리를 들이박은 그레이의 눈에서 이성이 사라졌다. 결국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향했다. 그 움직임을 마차 밖의 칼리안이 놓칠 리가 없었다.
- 쾅!
칼리안이 세 번째로 머리를 박은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더 숙였다. 그리고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그레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리거라."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살기가 폭발했다.
레넌, 그레이, 실리케, 그리고 플란츠.
참아왔던 브리센에 대한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죽기 싫으면."
갑작스러운 난리통에 그레이의 일행들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집사와 마부도 자리에서 일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와 여섯 명의 기사들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기사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멀리 서 있던 키리에조차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낄 정도의 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칼리안은 이 정도로 살기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잠깐 드러난 살기로 앨런 마나실을 긴장시켰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제어하지 않은 온전한 살기를 고스란히 받은 그레이는 오죽하겠는가.
그레이의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리라고 하였다."
그레이는 지금 저 말이 마차에서 내리라는 말인지 이승에서 내리라는 말인지도 구분이 안됐다.
결국 칼리안이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 쾅!
- 콰직!
오러가 집중된 팔의 힘을 마차 벽이 감당하지 못했다. 칼리안은 그레이를 창문 틀 째로 끌어냈다.
"잠깐, 잠깐만!"
그레이가 다급한 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그런 그레이를 멱살째로 들어 내팽개쳤다. 그리고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 상관에 그 부하다.
그 칼리안에 그 아르센이다.
스승님 가라사대, 칼만 아니면 얼마든지 사고치라 하셨으니.
- 우웅!
칼리안의 손 끝에 투명한 빛이 어리더니 둥글고 길쭉한 막대기 모양을 만들어냈다. 쉽게 말해 몽둥이다.
"좀 맞자꾸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타작이 시작됐다.
그레이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지도 못했다.
그 역시 소드마스터였다. 그런데도 몽둥이가 너무 빨라서 검을 뽑기는 커녕 피할 틈도 없었다. 그저 온 몸에 오러를 둘러 덜 아프게 맞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바로 얼마 전 호수에 던져버린 네 명의 기사도 놈들의 뼈가 모조리 부서지도록 화풀이를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문과 스스로의 힘 덕에 단 한번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이 곳만 벗어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수치심과 분노가 함께 밀려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한번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정말 다 사라져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리고 그레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 퍼억!
한 번 두 번 세 번 수도 없이 걷어 차고 짓밟고 즈려밟았다. 그레이의 칼을 빼앗지도 않았다. 칼을 겨눈다면 그것도 상대해주리라 생각했다. 그저 그레이가 칼을 뽑아들 생각도 하지 못했을 뿐.
기어코 그레이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그레이의 몸을 지탱하던 오러가 물에 넣은 설탕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오러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대륙의 소드마스터를 다시 다섯으로 줄여놓은 칼리안의 손에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모양의 길쭉한 원형 막대기가 생성되었다. 쉽게 말해 조금 더 센 몽둥이다.
투명하게 빛나는 예쁜 몽둥이가 공중에 화려한 궤적을 수놓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감히 내 앞에서."
- 퍽!
"핏줄을 말했느냐."
- 퍼억!
그레이가 몸을 뒤틀며 이빨 섞인 피를 게워냈다.
분노는 진작에 사라졌다. 수치심은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레이가 게워낸 것 외에는 피가 튀지도 않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칼리안은 지금 그냥 더럽게 아프고 죽지 않을 곳만 싹싹 골라서 야무지게 때리고 있었다. 그 손이 참으로 매웠다.
"잠깐, 잠깐만······."
칼리안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레이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더니 아주 잠시 두 애첩을 쳐다봤다. 여전히 자존심이 남아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다시 수고스러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레이는 미칠 노릇이었다. 왜 맞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안 맞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또 맞았다. 대체 저 몽둥이는 어디서 자꾸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런 그레이의 얼굴에 생각이 깊어 보였으므로 칼리안은 계속 때렸다.
오러가 없어도 기절을 하지 않았다.
기절 안할 곳만 골라서 때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너무 아팠다.
오랜 시간 검을 들어왔으나 이렇게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한 시간여가 넘도록 매타작을 당한 뒤에야 그레이가 칼리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몽둥이가 사라졌다.
칼리안이 그레이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레이의 몸이 움찔 하며 뒤로 물러섰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레이의 멱살을 다시 잡아 들어올렸다. 뿌리 깊은 공포감이 그레이의 눈에 어렸다.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때렸느냐."
그렇게 묻는 목소리 끝에 살기가 짙다.
대답 잘 하라는 뜻이었다.
- 후작은 후작 작위 탐내는 첫째 아들도 돈 받고 치워주려나.
그 순간 조금 전 칼리안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이었을까. 그레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에반, 에반 브리센 후작······."
지금 내뱉은 대답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
참으로 돈독한 부자관계가 아닌가.
칼리안의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그레이는 지금 그것조차 너무 무서울 뿐이었다.
그 얼굴 그대로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섯 명의 기사를 포함한 그레이의 가솔들이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칼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그레이의 멱살에서 힘을 풀었다. 털썩 하고 그레이의 몸이 힘 없이 쓰러졌다. 곧 칼리안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을 이리 만들었으니. 참으로 비정한 아비로구나."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이 그레이의 등을 밟았다.
- 콰직!
"끄아아악!"
척추가 부러지는 고통에 그레이가 결국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 모습을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칼리안의 눈초리가 그레이의 집사에게 가 닿았다.
"넌. 내 말을 알아들었을 머리인가."
그 말에 집사가 고개에서 꺼떡꺼떡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끄덕여댔다.
"지금 당장 변경백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겪은 억울함을 알리겠습니다. 후작 후작께서 아드님과 불화가 깊으셨다고, 이 곳으로 사람을 보내셨다고, 그래서 아드님을 이렇게 만드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변경백이 움직인 이동경로가 나와 같구나. 그것은 우연인가?"
집사의 입이 재빨리 답을 찾아 올렸다.
"아닙니다. 변경백이 이리 된 것은 이, 이틀 뒤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시점에 궁에 계셨으니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꽤 흡족한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그래. 그 소문에 내 이름이 한 글자라도 들어가면."
집사를 포함한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본 칼리안이 씩 웃었다.
"찾아가마. 어디든."
"네, 네. 알겠습니다."
집사가 울먹거리며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칼리안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레이븐의 안장에 오른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겸사겸사 네 것도 갚은 거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칼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에게 다각다각 걸어오는 두 필의 말이 보인 것은 거의 두 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때문에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뒤에야 마지막 영주성인 넨시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칼리안은 오랜만에 실하게 움직인 덕에 저녁도 걸렀다. 그리고 앨런에게 내용만 대충 전한 뒤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까지 단잠을 자는 칼리안의 옆을 키리에가 밤새 지켰다. 혹시라도 그레이의 기사들이 복수하러 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의 기사들은 칼리안의 얼굴만 떠올려도 진저리를 치고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얀과 히나가 매우 분주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이 곳이 체르밀인지 아니면 넨시아 영주의 성인지를 잠시 혼돈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몰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출발할 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얀이 이런 말로 칼리안을 살살 달랬다. 따라서 칼리안은 대체 여행길에 왜 챙겨왔는지도 모를 왕자의 정복을 쳐다봤다.
"······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결국 얀을 이기지 못한 칼리안이 정복까지 입으며 멋을 부리고 나니 다른 일행들이라고 대충 입을 수가 없었다. 어찌됐건 왕자의 로젤리타 수행원들이니 격은 맞춰야 했다.
따라서 모두들 이른 아침부터 목욕과 단장을 마친 후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무른 넨시아 영주성을 떠나 한 시간 거리의 카이리시스에 도착했다.
그 뒤 칼리안은 외성 안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정복을 입은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 예쁘고 지나치게 멋있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튼.
이런 환호성이 왕궁 내에까지 들렸으니 서재에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르메인과 앨런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도착했나보군."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비로소 찻잔을 들어올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꽤 긴장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앨런이 들어오자마자 또 이런 소리를 한 탓이다.
"전하의 아드님께서 이번엔 남의 허리를 부쉈다더군요."
조금 익숙한 듯한 말이었지만 이전과는 또 많이 다른 것이 부서졌다 하니 르메인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앨런이 일전에 알려준 올바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누구의 허리였는가."
앨런이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칭찬하듯 대답했다.
"그레이 브리센의 허리였다 합니다."
이랬으니 도무지 안심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대체 그 소드마스터 허리를 어떻게 부쉈냐는 말에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설마 혼자서 대섰겠느냐 칼리안은 다친 곳이 없다더라. 그러니 이래저래 싸우다 넘어지기라도 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앨런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르메인을 보며 앨런이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라는 자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니. 자식이 나서서 도둑을 쫓아내준 것이지요."
그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폐부를 깊이 찌르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잠시 뒤.
왕궁 안으로 들어온 칼리안이 레이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그새 밖으로 나와 있던 앨런의 품에 쏙 안겼다.
"스승님!"
앨런은, 남의 허리 부숴놓고 달려오는 이 어여쁜 제자를 온 팔로 꼭 안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뒤 르메인을 향해 웃어보이는 앨런의 승리감 어린 얼굴이 다시 한번 르메인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제14장. 오랜만입니다 (3)
체르밀 궁은 언제나 같았다.
그저 계절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칼리안의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며 쌓여 있는 선물상자도 똑같았다.
"그 동안 이 곳이 참 쓸쓸했는데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왕자님."
무뚝뚝한 메를린이 이런 인사를 건네자 메를린 뿐 아니라 다른 시녀들도 돌아가며 한 마디씩 칼리안을 반겼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왕궁을 떠나있던 그 짧은 기간만에 환복을 도와주는 손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체르밀에서 오직 칼리안만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다시 익숙해져야 할 칼리안의 일상이었다.
"저도 집에 돌아갔을 때 그랬어요. 오늘 푹 쉬시고 내일부터 다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금방 적응될테니 걱정마세요."
어색해하는 티가 많이 났던지 얀이 이렇게 말하며 민트차를 건네왔다. 밖에서 가장 많이 마셨던 것이었기 때문에 차를 본 칼리안이 괜히 웃었다.
떠날 때는 더운 바람이 불었는데 돌아오니 어느새 쌀쌀한 바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썩 나쁘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은 잠시 테라스로 차를 들고 나가 홀짝홀짝 여유를 즐겼다.
칼리안을 따라 나온 얀이 옆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왕자를 모시는 온전한 시종으로의 생활에 얀도 아직 다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에 대해 지적할 마음은 조금도 없던 칼리안은 그냥 티가 나지 않도록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참 이상하지."
칼리안이 잔잔한 인공호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칼날 위에 살고 있는 왕자들이 셋이나 있는데. 왕궁 밖 어느 곳보다도 조용한 것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손에 들린 민트차를 가만히 마셨다.
오랜만에 돌아온 일상에 상념 가득한 오전의 한 때가 그렇게 묵묵히 지나갔다.
* * *
앨런은 정말 바빴다.
발칸의 창단을 앞두고 마지막 정비를 하고 있었다. 칼리안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던 앨런은 점심 시간을 조금 넘긴 뒤에야 도착했다. 시계도 보지 못하고 일하느라 왕자와의 약속 시간에 늦을 만큼 바빴다.
심지어 앨런은 가족인 레이첼과 베로니카와도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둘은 아직 입궁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앨런의 저택으로 가야 했던 탓이다.
"둘의 입궁을 전하께 요청할 만큼의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셨던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어차피 내일부터는 체르밀까지도 드나들 수 있을 터이니."
앨런이 훌륭하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썰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들의 공간에 굳이 두 모녀의 출입을 요청하게 된 것은 이동 마법진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르센이 생각했던 것처럼 칼리안도 마법사였으므로 도무지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특정인만 사용할 수 있는 이동 마법진'을 만드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칼리안이 이곳 저곳을 다니기 어려웠으니 연구할 이들을 칼리안의 방으로 불러올 수 밖에.
레이첼과 베로니카를 생각하던 앨런이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제 가족들과는 이야기를 좀 나눠보셨습니까?"
칼리안이 앨런과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베로니카를 떠올려 보았다. 칼리안보다 한 살이 적고 이제 막 2서클을 만들어낸 어린 마법사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레이스 경과는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만. 베로니카와는 첫인사 외에는 말을 나누질 못했습니다."
"차차 나누면 될 일이겠지요."
"네.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칼리안이 카이리스에는 흔하지만 자신에게는 조금 생소한 견과류인 개암, 즉 헤이즐넛을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그간 서로 겪은 일들을 한동안 주고 받으며 식사를 마친 뒤, 둘은 오랜만의 산책에 나섰다. 장미 정원까지 걸어왔을 즈음 앨런의 입이 먼저 열렸다.
"한번 보여주시지요."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마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보기가 무섭게 이것부터 보고 싶었을 것이다. 칼리안이 손을 내밀어 마력을 집중해보였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한 예리한 기운의 마력이 둥근 구체를 이루었다.
"허."
그것을 본 앨런이 정말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지고한 시스파니안도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니 앨런이라 하여 달랐을까.
"혹시 그럼 이 마력에 속성의 힘도 담을 수 있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력을 다시 감추었다.
"가능은 합니다만 아직 자유롭게 쓸 만큼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검으로도 쓰고 몽둥이로도 쓰셨다 이 말이군요."
아아, 실로 고급스러운 몽둥이였다.
칼리안이 전날의 일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참지 않고 온전하게 화를 내 본 것이 얼마만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범상치 않은 힘이니 혹시라도 브리센 변경백이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걱정입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에 베여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겠지만 맞아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매타작 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라서. 운이 좋아 다시 걷고 검을 들게 된다 하더라도 저와 두번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할 테니까요."
"대체 사람을 얼마나 두드려 두었기에 소드마스터였던 이가 그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그런 사고를 내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
"손속이 무자비했던 것은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변경백이 수도 안으로 들어와 전하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과감히 저질렀던 일이었으니 수도에서는 그렇게 마음대로 굴 일 없을 겁니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후작이 좋지 않은 소문에 시달리겠습니다."
"네. 아들을 아주 잔인하게 대했으니 여파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발칸 창단 발표는 그 소문이 생긴 이후로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의 집사가 했던 말에 따르자면 그레이는 이틀 뒤에 후작이 보낸 사람들에게 공격당해 허리를 크게 다치고 변경백령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 뒤 후작의 천인공노할 짓을 일파만파 퍼뜨리겠다 했으니 에반 브리센은 한동안 소문에 시달릴 터였다.
"당장은 소문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을텐데요. 전하의 코앞에 발칸의 마법사들이 들어와 살게 되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기가 어려울 만큼. 그러니 그 이후에 발칸 창단을 발표하고 기사단 파벨의 구역을 발칸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앨런이나 르메인도 생각이 같았다.
"맞는 말씀입니다. 본래는 오늘이나 내일 쯤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일주일 정도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보니 폴룬 남작이 레넌을 살해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는데 그 흉흉한 말도 사라지겠군요."
그것은 칼리안이 이 곳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레넌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멜피르가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게 되었으니 레넌의 실종과 멜피르를 엮는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멜피르의 마음고생이 좀 있었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공교롭게도 부녀가 모두 악소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부녀라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실리케가 생각난 탓이다.
"어제 실리케가 플란츠 왕자와 따로 만났다고 합니다.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리케가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움직였다니 그 쪽에도 신경을 좀 쓰셔야 할 겁니다."
"네. 이제 실리케도 다시 움직일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소문이 커질수록 본래의 소문이 잦아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어렸다.
"기대되네요. 어떻게 나올지."
* * *
그동안 앨런과 반지를 통해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었는데도 할 이야기가 많았다. 덕분에 칼리안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두 시간 가까이 산책을 한 뒤에야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선물 상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저것들을 좀 열어볼까."
선물을 무조건 돌려보내기보다는 하나 둘 받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로 보내오는 선물이었으니 그들 중 얀의 평가가 괜찮은 이들의 상자를 열어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잠시 나갔다 들어온 얀이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선물은 오늘 밤이나 내일 열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정이라도 생겼어?"
"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칼리안의 눈빛에 얀이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씻고 옷 갈아입으시고 석찬에 드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세 왕자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겠다 하셨다네요."
"석찬이라니."
그 말을 들은 칼리안도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방금 밥 먹고 산책하고 왔는데."
비록 그 산책이 두 시간짜리기는 했지만 밥을 먹고 산책하고 또 밥을 먹는다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렇다 해서 르메인에게 못가겠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서둘러 샤워부터 한 뒤 그리 튀지 않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다른 두 왕자가 있는 자리였으니 굳이 화려한 복장으로 눈에 띌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머리 손질을 받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말에서 내리시자마자 마나실 경에게 달려가신 바람에 전하께서 많이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
확실히 그것은 칼리안의 실수였다. 아무리 앨런이 반갑다고는 해도 르메인에 대한 인사가 먼저였어야 했다. 르메인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왕궁에 도착을 하자마자 호되게 혼이 날 뻔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권했으니 싫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다 할 일이었다.
곧 준비를 모두 마친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에 마련된 소규모 만찬장으로 갔다. 출발할 때 체르밀 궁 앞에 마차가 한 대 뿐인 것을 보고 이미 예상했듯이 란델과 플란츠가 모두 와 있었다. 너무 늦장을 부린 것 같아서 칼리안은 그에 대한 사과의 의미까지 함께 담아 두 형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두 분 형님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란델과는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까지도 하루 한 두 마디 씩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문에 란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친 곳 없이 잘 다녀와 다행이라는 정도의 인사치레를 해 주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잘 왔다."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은 정확히 비교하자면 앨런이 시간의 축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던 그 날 만큼 놀랐다. 플란츠의 환영 인사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물론 진심이라고는 귀에 오러를 집약시켜도 찾아 들을 수 없을 목소리였으나 어쨌거나 환영의 뜻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저 놈이 이제는 약을 처먹나 하는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칼리안이 채 감추지 못한 놀라움을 확인한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고 란델은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그 직후 르메인이 들어와 석찬이 시작된 바람에, 결국 칼리안은 플란츠의 꿍꿍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란델. 읽고 있다던 시르테이야의 논서는 모두 읽었느냐? 네 학식이 갈수록 깊어지니 기쁜 일이구나."
르메인은 칼리안보다 다른 두 왕자들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칼리안을 배려했다.
"검술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하더니 지난번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구나 플란츠. 언제 둘이 사냥이라도 가보자꾸나."
이렇게.
칼리안에게는 그저 밖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왔는지만 물었고 칼리안은 얌전히 그렇다고만 대답했다. 배운 것이 많은지 부순 것이 많은지는 르메인이 더 잘 알테니까.
아무튼 란델과 플란츠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르메인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칼리안이 없는 동안 여러 번 이런 자리를 가졌던 것 같았다. 확실히 앨런의 공이 컸다.
그렇게 평화로운 부자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만찬장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시종 한 명이 시종장 라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나갔다. 그리고 라울이 매우 당황한 얼굴을 하다 르메인에게 무슨 말을 전했다. 작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던 르메인의 얼굴이 라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굳어졌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어오라 하게."
국왕과 왕자들의 식사자리에 들어올 수 있으나 방문 만으로도 시종장을 당황시킬 수 있는 사람. 르메인이 결코 반겨하지 않을 사람.
누가 찾아온 것인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되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또각.
또각.
구두가 만들어내는 소리에도 르니에리 향기가 감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무엇을 감추려 저렇게나 짙은 향기를 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실리케.
제14장. 오랜만입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