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거처



14화 거처

“어머님이 원치 않는다고 하셔도, 제가 원합니다.”

돌연 들려온 진강의 말에 영친 왕비가 놀라 물었다.

“정녕 이 아이를 원하느냐?”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의 눈은 술에 취해 흐릿하였으나, 표정만은 진지해 보였다. 그는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저 아이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곁에서 쉬지 않고 떠들며 저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벙어리는 찾기 쉬우나, 이리 손재주가 있는 벙어리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 옆에서 시중을 들 시녀가 없었는데, 이 아이로 하겠습니다!”

“그리 한다고…….”

영친 왕비는 할 말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방화는 순간 머릿속에서 초약(硝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무명산에서 8년간 수련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진즉에 기절했을 것이다.

사묵함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시서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전에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 거라 후회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왜 나를 그리 보는 것이냐?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큰 잘못이더냐.”

진강이 눈썹을 올리며, 단장에게 말했다.

“이 애를 샀을 때 얼마를 주었는가?”

단장은 놀라 눈을 껌벅였다. 단지 화장 솜씨가 좋을 뿐인데, 어떻게 영친 왕비와 진강 공자가 이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진강의 물음에 말을 더듬었다.

“열…… 열 냥을 주고 샀습니다.”

“단장에게 백이십 냥을 주어라.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다.”

진강이 뒤에 있는 사람에게 손짓 했다. 뒤에 있던 시종은 놀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영친 왕비를 바라보았다. 영친 왕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시종은 은자를 꺼내 단장에게 건넸다. 단장은 눈앞에 있는 은자를 보곤 놀라 말했다.

“제…… 제가 어찌 공자님의 돈을 받겠습니까? 벙어리 소녀인데, 그냥 드리겠습니다…….”

“어찌 대가없이 달라고 할 수 있나. 다른 사람들이 알면 뭐라 하겠는가? 가지고 가게! 가서 다른 필요한 사람을 사시게나.”

진강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단장이 영친 왕비를 쳐다보았다. 왕비는 진강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으로 이 아이를 원하는 것이냐?”

“당연하지요. 이미 돈을 내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제가 농을 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설마 저 아이를 저에게서 떼어놓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진강의 말에 영친 왕비가 큰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정말 취한 것 같구나. 술에서 깬 후 후회하지 말거라.”

“후회하면 다시 단장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원합니다.”

진강이 진지하지 못한 말투로 대답했다.

영친 왕비는 그를 노려본 후, 무릎을 꿇고 있는 단장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단장, 진강이 당신에게 다른 사람을 사라고 했으니, 이 돈은 받으시게. 원래는 당신의 사람을 이리 원하면 안 되는 것이지. 허나, 내 아들이 자신의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다 하였으니, 어미로서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시게. 이 일을 마음에 두지 마시게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공자님을 모시게 된 건 이 벙어리 아이의 복입니다.”

단장의 대답이 끝나자 진강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벙어리라고 부르는 건 정말 듣기 싫습니다. 어찌 되었든 앞으로 제 시중을 들 아이니, 이름을 지어주고 싶습니다.”

그는 잠시 사방화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인아(*可人兒: 마음에 드는 사람)라고 부르겠습니다!”

“허튼 소리를 하는구나! 어찌 그런 이름을 붙인단 말이냐?”

영친 왕비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청음(聽音)이라 부르겠습니다. 들을 수만 있고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이니,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진강이 다른 이름을 제안하자 영친 왕비도 찬성했다.

“좋구나. 그 이름으로 하자.”

영친 왕비는 사방화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야, 진강이 너를 옆에 두기로 했으니, 본분을 잊지 말고 그를 잘 보살펴 주거라.”

사방화는 눈을 깜박이면서,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아이인 것 같구나. 됐다, 밤이 깊었으니 모두 물러가라! 왕부에 빈방이 많으니, 손님들은 오늘 이곳에 묵게 해라!”

“네.”

영친 왕비가 분부를 내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윽고 부축을 받으며 떠났다.

* * *

연석은 영친 왕비가 떠나기만 기다렸다가, 참지 못하고 사방화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고개를 들어라. 도대체 진강 공자가 너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너를 자신의 곁에 두려 하는지 내가 좀 봐야겠구나.”

그의 손이 턱에 닿기도 전에 사방화가 몸을 피하면서 손을 쳐냈다. 연석은 밀려오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진강이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청언(聽言), 연석의 손을 잘라라!”

그 말에 청언이 일순간 품에서 보검을 꺼내들자, 검이 서늘하게 번쩍였다.

“공자, 이게 무슨 짓인가?”

연석이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내 사람을 함부로 만지려 들다니, 한쪽 팔을 잘라내고 싶은가 보군.”

진강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연석이 흠칫 놀라며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저 얼굴만 보려 그런 것인데 어찌 이리 화를 내?”

연석은 진강의 화난 얼굴을 본 후, 시선을 돌려 사방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연석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비록 벙어리지만, 성격은 마치 불같군. 나중에 저 성격에 당하지나 말게.”

“그건 그대가 상관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진강이 콧방귀를 뀌면서 자신의 옷차림을 정리한 후 앞서 걸어 나갔다. 두 걸음 정도 걷던 그가 발을 멈춘 후, 고개를 돌려 사방화에게 말했다.

“아직도 따르지 않는 것이냐?”

사방화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청언이 검을 거두고 진강과 사방화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세 사람의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연석은 소매에서 손을 꺼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그는 멀쩡한 제 손을 보며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눈치 챘소? 진강 공자가 최근 들어 좀 변한 것 같지 않소?”

사묵함이 어두운 안색으로 연석을 바라보았다. 곁에 있던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석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진강 공자의 행동이 예전과 다르게 괴이하긴 하지.”

“덕자 태후마마께서 하사하신 개가 죽은 후부터 인 것 같네.”

정명이 말했다.

“아끼던 개가 죽었으니, 이상해 질 만도 하지.”

곧이어 송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면, 막북으로 가려던 것이 무산되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허니, 진강 공자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네. 안 그러면 정말 손이 잘릴 수도 있을 거야.”

송방이 연석을 보면서 말하자, 연석이 자신의 손을 주무르며 화를 냈다.

“이 추운 날, 내가 왜 왕부에 있겠나? 진강 공자의 개가 죽기도 하였거니와, 그가 막북에 가지 못해 기분이 좋지 않을까 봐 같이 있어주는 거잖아? 근데 고작 벙어리 소녀 때문에 내 손을 자른다면 그건 정말 은혜도 모르는 것이지!”

“모두 그대의 마음을 알 것이니 그렇게 소리칠 필요 없소.”

사묵함이 연석을 향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연석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몸을 돌려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사묵함을 쳐다보았다.

“자귀 세자, 제가 진강 공자한테 잘못한 게 있습니까? 진강, 그 이상한 성격을 가진 자는 개가 죽어서 그렇다고 해도, 세자까지 제게 왜 이러십니까?”

순간 사묵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연석의 눈길을 피하면서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충용후부로 돌아가겠소.”

“밤이 깊었습니다. 영친 왕비마마께서도 여기 머무는 것을 허하셨으니, 내일 아침에 함께 떠나시지요!”

정명이 권했다.

“아니, 돌아가겠소.”

사묵함은 반드시 돌아가 조부와 계책을 세워야 했다.

“됐다. 돌아가시라고 해! 충용후부의 노후야께서 자귀 세자가 돌아오지 않으시면 필시 걱정하실 테지!”

연석이 사묵함의 어깨를 두드리며 시서에게 말했다.

“날이 어둡고 추우니까 조심해서 모시거라!”

시서가 고개를 끄덕였고, 사묵함은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연석 일행은 마침 잠이 쏟아졌기에, 집사가 안내해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하루 종일 시끄러웠던 영친왕부가 마침내 적막감에 휩싸였다.

* * *

사방화는 진강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으나, 안정적이었다. 전혀 술에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어느덧 정자 몇 개를 지나 매화꽃이 핀 정원에 도착했다. 진강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화가 고개를 들자, ‘낙매거(落梅居)’라고 쓴 현판이 보였다.

정원에는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나무들 사이에 작은 길이 나있었다. 지금이 매화 철이라 그런지 향기로운 매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람이 불자 매화꽃이 천천히 흩날렸다.

정원 가운데는 본채가 있었고, 본채 양쪽에 별채가 있었다. 진강은 본채로 들어갔다.

사방화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다, 뒤에 있는 청언을 바라보았다. 청언이 인상을 찌푸리며, 안에 있는 진강에게 물었다.

“공자님, 이…… 청음을 어디에 묵으라고 할까요?”

“나를 모시는 시녀이니, 당연히 내 방에서 묵어야 하지 않겠느냐.”

진강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언이 손가락으로 진강의 방을 가리켰다. 사방화는 인상을 쓰며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록 8년간 남장을 한 채 살았다고는 하나, 자신은 여인이었다. 어떻게 사내와 한 방에서 잘 수 있겠는가?

“문 앞에서 무엇 하는 것이냐? 들어오지 않고 계속 서있을 테냐?”

진강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사방화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청언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이 머무시는 낙매거 안에는 방이 세 개가 있다. 공자님은 그중 제일 안쪽에 있는 방에서 주무시고, 중간에 있는 방에는 당직을 서는 호위 무사가 머문다. 제일 바깥쪽에 있는 방은 손님들이 머무시는 방이다.”

사방화가 내내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자 그가 다시 말했다.

“공자님은 겉으로는 무뢰배처럼 보이시나, 그리 나쁜 분은 아니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몇 년간 곁에 사람을 두지 않으셔서 중간에 있는 방이 계속 비어있었으니 아무 걱정 말거라.”

사방화는 청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열네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로 보였고, 언행은 항상 신중하고 침착했다. 이내 그녀는 무언가 한마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은 벙어리라는 것을 떠올리고 입술만 깨물었다.

“이곳 낙매거에서는 나와 공자님 두 사람만 묵었는데, 앞으로 너까지 세 사람이 묵게 되었구나. 오늘 공자님께서 너를 택하셨으니, 앞으로 최선을 다해 공자님을 모셔야 한다.”

말을 마친 그가 사방화를 낙매거 안쪽으로 떠밀었다.

“꾸물대지 말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거라! 가서 공자님의 머리를 빗어드리고 세수 시중을 들어라. 그 후엔 쉬어도 괜찮다.”

사방화는 세 개의 방을 살펴보았다.

“너는 방금 이 곳에 왔으니, 왕부의 상황에 대해 지금 말하지는 않겠다. 내일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나는 바로 저곳에 머무니, 무슨 일이 있거든 날 부르거라.”

청언이 서쪽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지금 상황에선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언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보이자,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