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진찰



18화 진찰

“너는 좋은 것은 배우질 않고, 남에게 무언가를 뺏는 못된 것만 배웠구나.”

영친 왕비가 도저히 못 보겠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다니, 그럼 두세 벌만 먼저 만들도록 하여라. 나머지는 천천히 해도 된다.”

“안 됩니다!”

진강이 거절했다. 그 말에 영친 왕비가 눈을 크게 뜨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급하게 옷을 만들겠다고 해도, 이리 기다리라고 할 것이냐?”

“어머니가 만드신다고 하면, 당연히 양보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진강이 다시 몸을 돌려 재봉사들에게 분부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거라. 다른 사람들의 옷은 전부 멈추고, 먼저 내가 의뢰한 것을 만들 거라. 누가 묻거든 내가 분부했다 하고. 불만 있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하면 될 것이다.”

영친 왕비도 진강의 고집에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

재봉사들은 감히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최고급 옷감을 쓰거라. 급하다고 조잡하게 하다가 나에게 들키면 죄를 물을 것이다.”

진강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진강 공자님,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모든 옷을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듭니다.”

“가 보거라!”

재봉사가 보장하듯 말하자, 진강이 안심한 듯 그제야 그들을 보내줬다. 재봉사들은 영친 왕비에게 인사를 한 후, 땀을 닦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친 왕비는 다시 자세히 사방화를 살펴봤다. 우아하고 침착한 모습 외에 대체 다른 시녀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영친 왕비는 청음이 어떻게 진강의 마음을 얻은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직조부(*织造府: 의상실)의 사람들을 특별히 불러와 청음의 옷을 맞춘 것도 이상하였다. 이곳은 옷 한 벌에 백 냥이 넘는 곳이라 모든 색의 옷을 맞춘다면, 아마 삼천 냥 정도 들게 될 것이다. 물론 왕부는 이 돈을 낼 능력이 충분히 있으나, 한낱 벙어리 시녀에게 이리 많은 돈을 쓴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진강은 분명 청음을 시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아가씨로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방화도 진강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영친 왕비의 방에서 그녀의 치수를 재게 한 것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진강이 그녀를 시녀 이상으로 대한다고 생각할 터였다. 게다가 시녀의 옷을 위해 좌상부 아가씨와 영강후부 아가씨의 차례마저 뒤로 미루어 버리다니, 영친 왕비조차 그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대체 누가 그를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진강은 자신이 억지를 부린 것도 모르고, 태연히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청음은 둔해서, 화분을 들고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어머니께서 낙매거로 보내주십시오.”

“알겠다.”

영친 왕비는 대답과 동시에 아들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진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 *

사방화는 조용히 영친 왕비에게 인사를 드리고, 진강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유란원을 나간 후에도, 영친 왕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춘란을 불러 물었다.

“진강이 정말 이상해졌구나. 막북으로 가는 도중에 내가 황궁에 들어가 폐하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청을 하여서 내게 원한을 품은 것일까?”

“절대 아니십니다! 소인이 아는 바로는 왕비마마께서 따로 폐하께 청을 드리지 않았어도,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으니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춘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마마께선 진강 공자님이 저 벙어리 시녀에게 너무 잘해주시니까, 마음이 불안하신 것이지요?”

“그래. 진강이 누구에게도 이리 잘해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영친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춘란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제가 두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강 공자님께서 청언을 황궁으로 보내 손 태의를 낙매거로 모시고 오라 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공자님께서 집사를 찾아가 청음이 묵는 방을 제대로 손보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왕부의 수리공들이 한 번도 여인의 방을 꾸며본 적이 없어서, 지금 매우 조급해하고 있다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더냐? 방금 전 아무 말도 없지 않았느냐?”

영친 왕비가 깜짝 놀라 말했다.

“공자님은 어려서부터 생각이 많으셨습니다. 왕비마마께선 더는 괘념치 마시고, 나중에 공자님께 직접 한 번 물어보십시오. 혹, 공자님에게 알아낼 수 없으면, 청음이 있잖습니까? 제가 이미 극단에 사람을 보내 청음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영친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대로 하겠다. 도대체 그 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조용히 지켜보자꾸나.”

* * *

유란원을 나온 진강은 빠르게 낙매거를 향해 걸었다. 사방화는 생각에 잠겨 걸어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었다.

진강을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며 괜스레 더 짙은 발자국을 남겼다. 차가운 바람에 옷자락이 날리고, 서늘한 추위가 몸을 에워싸도, 진강은 내내 따뜻한 기분이었다.

“진강 공자 아니야? 내 눈이 잘못됐나?”

멀지 않은 정자에서 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맞게 본 거야. 진강 공자가 맞네.”

이목청이 말했다.

“진강 공자, 여기!”

연석이 눈을 깜박이며, 소리 높여 진강을 불렀다. 진강이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방화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연석과 이목청은 모두 명문 귀족 집안의 공자들이었다. 진강과 그들의 신분은 거의 대등했다. 또한 그들 모두 외모가 준수하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연석은 방탕해 보였고, 이목청은 문약한 서생처럼 보였다.

그들 중 진강처럼 강하지만 부드럽고, 강직하지만 제멋대로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진강의 그런 묘한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러니 좌상부의 노 아가씨가 그에게 온 마음을 내준 것일지도 몰랐다.

진강은 그들을 흘깃 보곤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낙매거로 향했다. 사방화도 시선을 거두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진강 공자, 너무 한 거 아닌가? 우리는 오늘 공자를 보고 가려고 지금까지 기다렸어. 한데 우리를 못 본 것도 아니고, 보고도 무시하다니.”

연석이 볼멘소리를 내며 가까이 걸어왔다. 이목청도 그의 뒤를 따라왔다. 이윽고 진강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낙매거에 들렸다가 다시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듣자니, 손 태의를 모셔오라고 했다던데. 어디가 아픈가?”

연석이 묻자, 진강이 답했다.

“아니.”

그러자 연석이 가까이 다가와 진강을 아래위로 살폈다. 진강이 괜찮은 듯 보이자, 연석의 시선은 그의 뒤에 있는 사방화에게 향했다.

“설마 태의한테…….”

“호기심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게.”

진강이 연석을 노려봤다.

“친우 사이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연석이 투덜거렸다.

“이 며칠 동안 마치 내가 공자에게 죄라도 지은 것처럼 구는군, 조금 있다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아도 되네. 앞으로 우리 죽을 때까지 얼굴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말을 마친 연석은 화를 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강이 짓궂게 웃으며 연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왜 화를 내는 건가? 이 며칠 동안은 내가 잘못했어. 그러게 누가 연석 공자더러 나를 건드리라 하였나?”

연석이 여전히 화난 표정을 짓고 있자, 진강이 그에게 설명했다.

“내 뒤에 있는 청음의 목을 봐 달라고 태의를 불렀어.”

그동안 보지 못한 진강의 모습에 연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인 때문에 친우들은 보이지도 않는군!”

“친우는 친우이고, 여인은 여인이지. 하지만 설령 친우라 하여도 내 여인을 뺏어 간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진강의 말에 이목청의 눈이 커졌다. 연석도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진강 공자. 정말 이 벙어리를 곁에 두려는 건가?”

연석의 말에 진강이 화를 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내 말은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을 때, 내 여인을 뺏어간다면 아무리 내 벗이라 해도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뜻이야.”

“공자…….”

연석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진강을 가만히 훑어보면서 말했다.

“진강 공자, 언제부터 그리 여인을 좋아했어?”

“내가 언제 여인을 싫어했지?”

진강의 말에 연석이 이목청을 향해 돌아서 물었다.

“대체 진강 공자가 언제 여인을 좋아했나?”

“3년 전, 진강 공자가 좋아한 여인이 있었지만, 당시에 4황자 진옥이 뺏어갔지. 그때 이후로 4황자와 물과 기름 같은 사이가 됐어. 그 여인은 요리사여서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었지만, 나이가 거의 서른 살이었어! 그 사건 외에 진강 공자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이목청은 곰곰이 생각하며 대답했다.

“지금 바로 눈앞에 한 명 있지 않나. 이 시녀를 마치 보물 다루듯 귀중히 대하는걸 보고도 그러나?”

연석은 아직 어제 일로 화가 난 듯, 사방화를 못마땅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너, 요리를 잘하느냐? 아니면 안마를 잘하는 것이냐?”

“화장을 잘하오.”

이목청이 말했다.

“이 공자에게 물은 것이 아니야!”

연석이 이목청을 흘겨보다가 다시 사방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청음에게 물어본 거지.”

이목청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청음은 말을 못하지 않나. 그래서 내가 말해준 것이네!”

연석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됐어! 그게 그리 알고 싶다면, 나와 함께 낙매거에 가지.”

말을 마친 진강이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방화의 지금 모습은 미인에 익숙한 그들이 봤을 때 당연히 못생긴 얼굴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강이 무슨 약을 먹었기에 저리 별것 없는 시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고 싶었다. 연석과 이목청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들이 낙매거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언이 서둘러 달려와 보고했다.

“공자님, 손 태의님이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님도 오셔서 사람들에게 방을 손보라 하였습니다.”

“알겠다.”

청언이 몇 번이나 정원을 쓸었건만, 차가운 바람이 불자 다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진강 공자의 낙매거는 정말 운치가 있군. 매화를 삶아 술로 담그면 정말 맛있을 거요!”

연석이 떨어지는 매화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자 진강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연석 공자의 난화각(蘭花閣)이 더 좋더군. 여름에 꽃이 전부 피었을 때, 왜 꽃으로 술을 만들어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나?”

“난화는 비싼 품종이지. 자그마치 한 그루에 금자 백 냥이 넘어. 만약 삶아서 술을 담그게 된다면 그 귀한 것을 한 번에 다 날리게 되는 셈 아니겠어?”

연석이 놀란 기색을 띤 채 말했다.

“연석 공자, 진강 공자의 말은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는 뜻이네. 이곳에 있는 매화도 평범한 매화가 아니야. 이 매화는 여름을 제외하고 봄, 가을, 겨울에 전부 피는 매화이지.”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연석이 입술을 삐죽거리다 입을 열었다.

“난 단지 매화 꽃잎이 이렇게 땅에 떨어지면 다 쓸어서 버리는 것이 아까워 그러네.”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낙매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것이겠지.”

이목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화당에서 기다리던 태의가 그들을 보고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진강을 비롯한 공자들은 태의보다 나이도 어리거니와 조정의 관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지위가 점점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기에 태의는 당연히 그들을 소홀하게 대할 수 없었다.

“청음, 빨리 들어와서 태의에게 진찰을 받아라.”

바깥을 향해 몸을 돌린 진강이 밖에 있는 사방화에게 말했다. 사방화는 정말 태의를 보고 싶지 않았으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