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충고
“앞으로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용서해 드리지요.”
진강은 그들을 다시 바라보지 않고, 사방화를 향해 물었다.
“살아 있는 것을 원하느냐, 죽은 것을 원하느냐?”
사방화는 그를 담담하게 쳐다봤다.
‘당연히 살아 있는 것이지. 만약 죽기를 원했다면 방금 전 검을 던졌을 때, 바로 죽였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구나?”
진강이 하얀 여우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색 담비를 잡아 올리며,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돌아가면 네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
사방화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지만, 동물을 키우는 것이 화초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생각했다.
“너는 매일 하안이 떠난 후에 음식을 만들어서 이들에게 먹여라.”
사방화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만약 이 동물들에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인다면, 아마 며칠도 지나지 않아 이들의 뱃속이 설탕으로 절여질지도 몰랐다. 이내 진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매번 나만 벌을 받을 수는 없지.”
그 말에 사방화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스스로 먹은 것이잖아. 청언은 먹지도 않는데.’
진강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면서 말했다.
“손 태의의 의술이 정말 대단하구나. 방금 코웃음을 쳤지?”
사방화는 놀라 멈칫하다, 곧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였다. 그러고는 바닥에 있는 하얀 여우를 잡아 말 앞에 매달았다.
“그건 내가 맞힌 것이다.”
노 아가씨는 진강이 사방화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줄곧 진강의 천성이 원래 차가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생각과 전혀 다른 모습에, 노 아가씨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사방화가 하얀 여우까지 가져가는 것을 보자,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분명 제 화살이 이 여우를 맞혔습니다.”
“노 아가씨의 화살은 나의 화살을 맞혔을 뿐입니다.”
진강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활은 저기에 있습니다.”
노 아가씨가 진강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화살이 검은 화살에 의해 반으로 쪼개져 있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노 아가씨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당신의 화살이 아니었다면 내 화살이 하얀 여우를 맞혔을 것이고, 나의 청음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진강이 차갑게 말했다.
노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진강이 ‘나의 청음’ 이라 말하는 것을 듣자, 온몸이 떨려왔다.
진강의 새 시녀 이름이 청음이라는 것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진강이 공주를 가르치는 네 명의 선생과 연부루의 주방장을 불러들여 청음을 가르치게 하고, 심지어 경성 최고의 직조부(织造府, 의상실)에서 색깔별로 옷을 맞춰준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영친 왕비께서 청음을 직접 가르치신다는 것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들려온 진강 공자에 대한 소식들은 전부 이 시녀를 얼마나 총애하는 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노 아가씨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엄청난 인내심으로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려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와 함께 온 다른 여인들의 시선도 자연히 사방화에게 향했다.
여인이 여인을 볼 때는 단지 그녀의 외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부터 행동과 성격까지 전부 살펴본다. 그녀들은 사방화의 모습에서 흠을 찾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방화의 외모가 사람들이 말하는 천상의 선녀와는 다르다는 것 외에 다른 결점은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허리를 쫙 펴고 마치 말과 혼연일체가 된 듯, 홍종금 위에 앉아 있는 사방화에게선 고고하면서도 오만한 기운이 흘렀다. 그러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함부로 바라볼 수 없게 하였다. 게다가 그녀의 품에 안긴 여우는 전혀 반항하지 않고 얌전하게 굴었다.
이런 청음의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정말 그녀가 시녀인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청음의 이런 당당한 모습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검을 잃어버리지 마라!”
진강이 사방화에게 말했다. 사방화는 말위에 앉아 채찍을 휘둘러, 떨어진 검을 주워 올렸다. 진강도 채찍을 휘둘러 담비와 두 개의 화살을 회수했다. 그곳에 있던 여인들은 전부 아무 말도 못 하고, 진강과 사방화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가자!”
진강이 다시 말을 타고 달렸다. 사방화도 서둘러 그를 따라 출발했다. 그들의 말은 너무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만 그 자리에 남았다.
“저 여인이 바로 진강 오라버니가 거둔 시녀 청음이군!”
연 아가씨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노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너무 창백해서 마치 투명해 보일 지경이었다. 노 아가씨는 손에 든 채찍을 힘껏 움켜잡았다.
다른 아가씨들은 전부 노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진강은 그녀의 마음이나 체면을 생각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연 아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영 언니, 그만 봐. 모두 떠났으니까.”
연 아가씨의 이름은 연람(燕嵐)으로, 그녀는 영강후부의 아가씨이자 연석의 친누이 동생이었다. 노설영(盧雪莹)이 천천히 몸을 돌려 연람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람(燕嵐), 내가 네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연람이 멈칫하더니, 곧 대꾸했다.
“알면 뭐가 어떻지? 혼사는 부모님이 정하시는 거야. 우리가 누굴 좋아하고 누굴 싫어하든 전혀 상관없는 문제지.”
그 말에 얼굴이 어두워진 노설영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부모님의 명으로도 얼마든 매파와 상의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어.”
“그것도 상대가 언니를 좋아하냐 안 하냐에 달린 것이지.”
연람이 코웃음을 치면서 질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보니 우리들의 신분이 저 시녀보다도 못한 것 같군.”
연람은 더 이상 노설영을 쳐다보지 않고,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말했다.
“가자. 진강 오라버니가 여기에 왔으니 우리도 쫓아가 보자. 내 오라버니도 분명 왔겠지. 그들은 얼마나 잡았는지 보러 가자.”
노설영과 다른 아가씨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라타 연람을 쫓아갔다.
* * *
진강과 사방화는 사냥터 입구에 도착했다. 진강이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었다. 사방화는 진강을 한 번 본 후,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뭐 하는 것이냐?”
진강이 그녀의 행동을 보고 물었다.
사방화는 손가락으로 자신이 누르고 있는 하얀 여우를 가리켰다. 여우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이리 추운 날씨에 계속 피를 흘리고 있으면 곧 죽게 될 터였다. 진강은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물었다.
“내가 준 손수건은? 소매를 찢지 말고 그걸 써라. 팔이 드러나면 보기 안 좋다.”
사방화는 자신의 긴 소매를 보며 찢어도 팔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막으니 어쩔 수 없었다.
사방화는 가슴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봤다. 영친 왕비가 아름답게 수놓은 손수건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고민이 되었다. 쓰기엔 너무 아까운 손수건이었다. 피를 묻히게 되면 다시는 쓸 수 없다는 생각에 사방화는 손수건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진강은 계속 사방화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내 것을 사용해라.”
사방화는 거절하지 않고, 소매를 받아들었다.
“이 찰과상 약도 주마.”
진강이 품에서 사기병을 꺼내 사방화에게 던졌다. 사방화는 병을 열고 가루를 술에 풀어 여우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 후, 천으로 부드럽게 감싸줬다.
눈에 남아 있던 적의가 어느 정도 사라진 여우가 고개를 돌려 사방화를 쳐다봤다.
“이 작은 동물도 착한 이를 알아보는 구나.”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사방화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얀 여우는 원래 사람처럼 영민한데다, 보기 힘든 동물이기도 했다.
“이 자색 담비의 상처도 치료해 주거라.”
진강은 담비를 사방화에게 건네면서 역시 또 자신의 소매를 찢어 주었다. 담비는 잠시 사방화의 품에서 발버둥 쳤지만, 금세 진정을 하고 가만히 안긴 채 치료를 받았다. 진강의 화살은 사방화가 던진 검보다 더 깊게 상처를 내어, 뼈가 보일 정도였다. 약을 바르는 정도로는 상처가 전부 아물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상처를 살펴본 후, 여우를 진강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방에서 자수바늘과 자수 실을 꺼내 담비의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진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런 것도 할 줄 아느냐?”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왔지만, 진강과 사방화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곧이어 사람들이 도착했다. 연석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진강에게 말을 건넸다.
“공자, 누이동생에게 들으니, 자색 담비와 하얀 여우를 잡았다던데? 정말 보통 운이 아니군. 누구는 몇 개월이나 이곳에 와 사냥을 했지만, 여우와 담비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는데 말이지.”
그 말에 진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연석을 바라보았다.
“한데 청음은 무엇을 하는 건가? 자수를 놓는 중인가?”
연석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사방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윽고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본 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인가? 솜씨가 태의원의 의원들보다 좋은 것 같은데? 저번에 손 태의가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았는데 손을 떨던데.”
“자네가 말한 손 태의가 상처를 꿰맨 분은 바로 우리 어머니신데. 지금 영친 왕비마마와 이 짐승을 비교하는 것인가?”
진강이 못마땅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자 연석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면서 웃었다.
“영친 왕비마마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청음의 솜씨가 손 태의 못지않게 매우 세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손 태의에게 자수를 놓게 하면, 바느질 솜씨가 좋아질 테지.”
진강이 차갑게 말했다. 연석은 손 태의가 여인들처럼 자수를 놓는 모습을 상상하자,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 사묵함, 이목청, 정명, 송방, 그리고 노설영과 연람의 일행이 도착했다. 사람들의 말에는 각각 자신들이 사냥한 동물들이 매달려 있었다.
“담비와 여우라니, 진강 공자가 이겼어. 운이 정말 좋군.”
이목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어떻게 말을 하여 담비와 여우 털을 받아낼 수 있느냐가 더 어려운 일이 되었군.”
정명이 말했다.
“이리 많은 사람들이 진강 공자에게 진 것이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겠어!”
송방이 한탄하듯 말했다.
“충용후부는 오랫동안 사냥에 나가지 않았지만, 외숙부님께서 매년 진귀한 동물들의 가죽 털을 보내오시오. 만약 공자들이 모친께 털을 받기 힘들면 내가 더 내주겠소.”
사묵함이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내기에서 진 것은 진 것이지요! 집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세자께서 더 내려 하십니까?”
정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요! 아무리 얻기 힘들어도 청음을 위해 내놓아야지요!”
송방이 말을 이었다.
사묵함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진강이 누이동생을 집에 가둬놓고 있으나, 못되게 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떤 명문가 아가씨보다도 더 잘해주고 존중해준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입을 옷이기 때문에 오라버니로서 어쨌든 자신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줘야지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지금 담비의 상처를 꿰매는 것인가?”
이목청이 사방화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맞네. 청음 아가씨의 솜씨가 손 태의보다 더 나아. 정말 대단하다니까!”
연석이 사방화의 솜씨에 감탄하며 말했다.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그의 눈빛이 깊어지며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진강은 이목청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연석을 보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별 것도 아니네. 청음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지. 혹, 담비가 부러운 거라면, 언젠가 그대들이 다리나 팔을 다치게 될 때, 청음에게 꿰매주라고 하겠네.”
연석은 진강의 말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고삐를 당겨 뒤로 물러났다.
“그만하게! 우린 그런 걸 원하지 않아.”
이목청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