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매화 따기



22화 매화 따기

사방화는 원래 잠깐 쉬려고 한 것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잠에서 깼다.

“깼으면 밖에 나가 스승님을 만나봐라. 내일부터 정식 수업이다.”

잠에서 깨자, 곧바로 진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는 잠시 혼란함을 느끼고, 창밖을 쳐다봤다.

정원 중앙에 책상이 놓여있고, 네 명의 중년 여성과 중년 남성 한 명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사방화가 문을 열고 나가, 그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네 명의 여성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으나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이들은 공주를 가르치는, 경성에서 매우 유명한 여성들이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남자에게서는 은은한 불향이 느껴졌다. 분명 연부루의 주방장일 것이다.

진강은 그들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다섯 명은 모두 하나같이 진강의 강요에 의해 오지 않은 것처럼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방화가 그들에게 인사를 하자, 그들도 같이 인사했다.

금(琴)과 바둑, 서예, 그림을 가르치는 스승들의 이름은 이금(李琴), 맹기(孟棋), 온서(溫書), 초화(楚畵)였고, 연부루의 주방장 이름은 하안(何晏)이었다.

이 다섯 명의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된 이름이 아니었다. 모두 유명해진 후에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따라 성을 제외하고 바뀌게 된 이름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한 뒤 낙매거를 떠났다.

“손 태의가 너에게 지어준 약에 잠이 오는 약도 넣어놨나? 이 시간에 잠을 자다니. 자고로 제자가 스승을 기다려도, 스승이 제자를 기다리는 법은 없다.”

사방화는 태의가 지어준 약에 수면제는 들어가 있지 않았는데, 자신도 어찌 하여 잠에 들게 된 건지 몰랐다.

“아직도 잠이 덜 깬 것이더냐? 그럼 가서 계속 자거라. 내일부터 정식 수업인데, 계속 이러면 안 된다.”

말을 마친 진강이 밖으로 나가다 말고, 다시 말했다.

“오늘은 청언과 저녁을 먹어라.”

사방화가 하늘을 쳐다보니 날이 이미 저물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진강이 영친 왕비와 식사를 하러 가겠다는 말을 바로 곁에서 들었기에, 별다른 의문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청언이 음식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물을 마시는 사방화를 지켜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청음, 네가 의자에 기대 있는 모습이 공자님과 매우 닮았다. 그러니까 공자님이 너를 좋아하시는 것이겠지.”

사방화의 몸이 순간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굳었다.

“너는 아까 점심을 먹지 않았으니, 내가 밥을 좀 더 퍼 왔다. 많이 먹어라.”

청언이 밖의 탁자에 음식을 놓은 후,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왜 가만히 있어? 빨리 와서 먹거라.”

배가 많이 고팠던 사방화는 곧,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가 말을 못 한다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청언이 입을 열었다.

청언은 공자가 누구에게 이리 잘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공자를 모셔온 자신이 질투가 다 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녀가 오고부터 이 낙매거가 더 이상 삭막하지 않은 것 같다고도 했다. 그녀가 오고부터 진강이 어떻게 변하였으며, 경성에는 그녀가 진강을 미모로 정복했다는 말까지 돈다는 사실도 말해주었다.

밥을 다 먹을 동안 청언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사방화는 그가 말을 끝낼 때까지 잠자코 들어줬다. 청언은 그녀가 약까지 마시는 걸 다 본 뒤에야 만족한 얼굴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난로가 계속 피어져 있어서, 매우 따뜻했다. 사방화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 *

진강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는 사방화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 안 잤더냐?”

사방화는 진강을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연석이 매화를 삶아서 술을 마시자고 했는데,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구나. 지금 한 번 만들어보자.”

진강은 방 안의 불을 붙이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사방화는 금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청언, 지하실에 있는 비취 항아리를 가지고 와라.”

진강의 명이 이어지고, 청언이 대답과 함께 즉각 지하실로 달려갔다. 사방화는 먼저 부엌에 가서 광주리를 챙긴 후, 밖에 나가 매화를 땄다.

잠시 후 진강이 갑자기 방에서 나왔다. 그는 사방화의 옆으로 와 매화 가지를 잡아당기고는, 그대로 그녀의 광주리에 털었다. 매화가 광주리 안으로 한꺼번에 떨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나뭇가지를 잡더니,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진강은 사방화 옆에 바짝 다가섰다. 그는 사방화보다 족히 머리 한 개 반은 더 컸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사방화는 진강의 몸에서 나는 청량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매화 향과 뒤섞인 그의 향기에 사방화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사방화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서 두 걸음 정도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나자, 매화꽃잎이 흩날렸다. 진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진강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매화가 사방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머리 위의 꽃을 떨어뜨리며, 자신의 마음도 다시 가다듬었다.

청언이 항아리를 들고 그녀의 옆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광주리를 보면서 말했다.

“청음, 술을 만드는 것뿐인데 매화를 이리 많이 딴 것이냐?”

청언은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째서 한쪽 나뭇가지에 핀 매화만 땄느냐? 이러면 나무의 모습이 이상해지지 않겠느냐.”

사방화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가만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청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깊은 밤에 꽃잎을 온몸에 묻히고 그리 웃으면, 사람을 흘리는 매화 요괴 같아서 내가 놀라지 않겠느냐.”

사방화는 웃음을 거두며 광주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청언은 이상하다는 듯 사방화를 쳐다본 후, 바닥에 떨어진 비싼 매화 잎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까워했다.

진강은 이미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흥미를 잃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모두 버려라! 오늘은 술을 끓이지 않고 자러 갈 것이다.”

사방화는 걸음을 멈췄다. 청언도 걸음을 멈추고, 안고 있는 항아리를 보면서 말했다.

“공자님, 그럼 이 비취 항아리는…….”

“버려라!”

진강이 벌컥 화를 내자, 청언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이 비취 항아리는 매우 비싼 것으로, 공자님이 계속 보관하시고 계시던 물건입니다. 제가 다시 지하실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내가 버리라고 하면 버려라!”

진강이 벌떡 일어나 매서운 눈으로 말했다. 청언은 깜짝 놀라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항아리를 안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네가 들고 있는 매화도 버려라.”

진강은 사방화를 흘낏 본 후,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방화는 매화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다. 매화는 땅에 떨어져 바람결을 따라 굴러갔다. 바람에 매화꽃이 춤을 추듯 흩날렸다.

“청음!”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취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방화는 그녀를 맞이하러 나갔다. 취하의 손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옷들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마중 나온 사방화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직조부(织造府)에서 만들어 보낸 옷들입니다. 외투, 내의, 속옷, 잠옷입니다. 방금 왕부에 도착한 것을 왕비마마께서 곧장 청음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수업을 받을 때 입으시면 될 것입니다.”

사방화는 취하가 들고 있는 옷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에 있는 상자에는 왕비마마께서 특별히 고르신 장식품이 들어 있습니다. 선물로 같이 가져다드리라 하셨습니다.”

취하가 옷을 내려놓고, 가지고 온 상자를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진주와 비취로 만든 장식품들이 들어있었다. 사방화는 그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취하가 사방화의 얼굴을 살폈다. 질투심이 드는 동시에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인 시녀들이 이런 옷과 장식품을 봤다면 전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사방화의 얼굴은 평온했고,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런 물건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였다. 이런 것들을 너무 봐서, 마치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방화가 옷과 상자를 받아들자, 취하는 곧 낙매거를 빠져 나갔다.

그 때, 청언이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음, 방금 전에 공자님이 왜 갑자기 화를 내신 것이더냐?”

사방화 역시 영문을 몰랐던 까닭에 고개를 젓고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묘시가 되자 진강이 일어났다. 사방화는 방 안에서 그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일어나 옷을 입었다.

진강의 방은 제일 안쪽에 있어서, 외출을 한다면 사방화의 방 앞을 지나가야 했다. 사방화는 그에게 자신이 침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오랫동안 이런 비단옷을 입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진강이 방에서 나와 그녀의 방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사방화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 올려 비녀를 꽂은 후, 고개를 돌려 진강을 쳐다봤다.

진강은 그녀의 눈길을 피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사방화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청언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다가 사방화를 보고 순간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비비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진강은 못마땅한 듯 눈을 흘기며 청언에게 말했다.

“청언, 서재에 걸려 있는 보검을 가지고 와 청음에게 주어라.”

청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서재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검 한 자루를 가져와 사방화에게 건넸다. 사방화는 검을 받고 진강을 쳐다봤다.

“너는 나와 함께 검술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연습하라는 걸 지켜보라는 말이 아니다.”

사방화는 순간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검술밖에 몰랐다.

진강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다, 고개를 돌려 쫓아오지 않는 사방화를 재촉했다. 사방화는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그를 따라 갔다.

낙매거의 후원에는 뜰이 하나 연결되어 있었다. 뜰은 매우 넓었고, 잡초하나 없었다. 진강의 무공 연습을 위해 일부러 만든 곳이 분명했다.

“검술을 할 줄 알더냐?”

진강이 겉옷을 벗으면서 사방화를 보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르쳐 주마.”

진강이 검을 들고 그녀에게 겨누면서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이 안정적으로 서서 검을 끌어올리더니, 그녀 앞에서 검초(*劒招: 검을 휘두르는 방식 및 일련의 동작)를 시전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원래 서늘하지만, 검에서 발산되는 한기에 바람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검은 머리와 옷, 검이 매서운 바람과 한데 어우러져 겨울 같은 찬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그의 검술은 그의 성격과 닮아있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부드러울 때는 물처럼 유연했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만큼 가볍게 움직였다. 그의 검술은 변화가 무쌍하여 감히 예측도 할 수 없었다.

사방화는 조용히 그의 검술을 지켜봤다. 여태껏 이렇게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검술 연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 막북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 검술만 익히고 연습했다. 그런 사방화에게 그의 검술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