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벗어나다
진강은 래복루로 들어가 방 하나를 빌려 목욕을 한 후, 밥도 먹지 않고 소식을 기다렸다. 한 시진 후 부하 한 명이 와서 진강에게 고했다.
“공자님, 알아봤습니다. 살수문은 오늘 의뢰 받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뭐라?”
“오늘 확실히 의뢰가 없다고 합니다. 살수문에선 감히 공자님을 건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인이 그들의 검술을 보고 살수문의 사람들이라 판단하였는데, 아무래도 소인이 잘못 본 것 같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만약 살수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자들이 그런 것인지 다시 알아보아라.”
“네!”
진강은 앞에 있는 탁자를 꽉 움켜쥐었다.
* * *
두 시진 후,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다시 나타나 진강에게 고했다.
“강호에 유명한 문파들은 열 개 정도 있습니다. 아까 공자님과 싸운 네 명의 실력을 보면 다섯 개 문파로 그 범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살수문 외, 다른 집단들에게 암암리에 규범이 하나 있는데, 공자님과 관련된 일은 청탁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강이 웃으며 물었다.
“연유가 무엇이냐?”
“잊으셨습니까? 예전에 공자님께서 개 때문에 화가 나셔서 왕부의 사람들을 데리고 가, 청의루를 평정해 버리신 그 날을요. 그때 이후로 강호 사람들은 모두 공자님을 두려워하게 되어 암암리에 그런 규범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진강이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잠시 생각을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소인의 추측으론 강호에 새롭게 나타난 집단이 아니라면, 조정 관리들의 사병들일 것입니다.”
진강이 책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좌상, 그 여우같은 늙은이가 이렇게 빨리 손을 쓴 건가? 이곳은 경성에서 삼백 리나 떨어진 곳이다. 약간의 이상한 낌새만 있어도 바로 경성에 보고가 될 것이다. 우상은 나에게 손을 쓸 이유가 없다. 그는 이길 확신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지.
의취궁(倚翠宮)의 류비(柳妃)와 옥부궁(玉芙宮)의 심비(沈妃) 또한 나를 건드릴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들 때문에 나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지만, 감히 내 앞에서 이리도 대범하게 사람을 뺏어가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형님은 내가 막북에 가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이곳에서 나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
진강의 고심이 더 깊어졌다.
“설마 강호에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집단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시 깊게 조사를 해보아라. 누가 감히 내 앞에서 이토록 대담할 짓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겠다.”
진강이 차갑게 말했다. 검은 옷의 사내는 명령을 받고 물러났다.
진강은 배가 고파서 책상 위에 있는 음식을 두어 점 집어먹었다. 잠시 후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그는 돌연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방을 나섰다.
“공자님, 저희들이 찾아보겠습니다. 밤이 깊어 바람이 차니 외출하지 마십시오.”
검은 옷을 입은 자는 진강을 은밀히 보호하고 있다가, 나가려는 그를 보곤 황급히 말렸다. 진강은 손을 저으며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사방화와 함께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할 수 없이 진강을 따라갔다.
성을 나와 대략 십 리 정도 갔을 때, 진강은 갑자기 어느 나무 아래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뒤에 있는 사람에게 외쳤다.
“불을 피워라!”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즉시 불을 피웠다. 진강은 횃불을 들고 나무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에는 부호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진강은 나무에 새겨진 부호를 자세히 살폈다.
부호의 모양은 특이했다. 그냥 보기엔 마구 그린 것 같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마치 “뺏다.” 라는 글씨처럼 보였다. 한참을 보던 진강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감히 내 눈앞에서 나 모르게 이런 수를 쓰다니. 내가 그 자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강이 나무에 일장(一掌)을 내리치자, 나무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내 진강은 뒤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전부 다시 불러와라! 더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눈치가 매우 빨랐다. 그는 즉시 글씨가 새겨진 나무껍질을 벗겨냈다.
* * *
깊은 밤이었지만, 유흥가의 불빛은 대낮처럼 밝았다.
래복루를 제외하고 거리에서 제일 번화한 곳은 연지루였다. 그곳에서는 매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연지루 뒤의 작은 정원은 매우 조용하여, 적막감이 흘렀다. 작은 정원은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땐 연지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곳과 분리되어 있었다.
사방화는 창문 앞에 서서 연지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깊었으나, 연지루 너머에 있을 래복루의 차가운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을 서 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쪽 사람들은 전부 철수한 것이냐? 단서를 남기지는 않았고?”
사방화가 담담하게 물었다.
“모두 철수했습니다. 단서 또한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에 사방화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진강을 너무 우습게 봤다. 짧은 시간 안에 강호의 크고 작은 집단들을 전부 알아내다니. 너희들이 실력을 숨긴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사방화는 몸을 돌려 그를 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다. 오늘 일로 인해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천하제일이 아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지. 오늘 이후로 모든 일에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네.”
사방화는 창문을 두드리며 한참을 생각 하다가 곧 명령을 내렸다.
“먼저 왕은을 숨겨라! 내가 경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 후, 그를 몰래 영남으로 보내라. 그가 막북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에게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언제 경성으로 돌아가십니까?”
“진강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구나. 경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강은 바로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단서를 따라갈 것이다. 오늘 남겨 놓은 단서는 그 나무밖에 없지?”
사방화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이마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
“진강이 이리 똑똑할 줄 몰랐군.”
“만약 일부러 남겨놓은 것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미 보고 없애버렸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한 것처럼 들렸다.
“잠시 진강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어쨌든 이제 경성에서 그와 겨뤄볼 기회가 많겠지. 만약 그의 진짜 실력을 모른다면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그들에게 내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사방화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빚은 그가 왕은에게 달아두는 것으로 하면 된다. 한 사람을 숨기는 것이 한 집단을 숨기는 것보다는 쉬우니 말이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난로 앞으로 다가가 석탄을 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꺼질 것 같았던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듣기로는 매년 설이 다가오면 많은 극단들이 경성으로 들어오고, 각 부에서 극단을 고른다고 하더구나. 이틀 안에 경성으로 들어오는 극단이 있는지 알아보아라. 그들에게 섞여 경성으로 들어가야겠다. 어찌 되었든 충용후부도 극단을 고르지 않겠느냐. 그리되면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난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언신(言宸), 여기는 바깥이 아니니까 이렇게 얼굴을 가릴 필요 없다. 잠도 오지 않는데 앉아서 장기나 두자.”
사방화가 일어나 손을 털며 말했다.
“5년 전, 네가 하산한 후, 내가 제일 그리웠던 게 바로 너와 두는 장기였다. 잠이 안 올 때마다 나 혼자 연습하곤 했었지. 오늘 한번 겨뤄 보자꾸나.”
그러나 언신은 눈동자만 굴릴 뿐,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설마 5년 동안 연지루의 여인들을 돌본다고 장기 두는 법을 잊은 것이냐?”
언신은 곧 아무 말 없이 탁자에 가서 앉았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사방화는 그에게 복면을 벗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내 사방화가 언신의 맞은편에 앉아 장기판을 꺼냈다.
* * *
다음 날, 막북의 왕은이 도적을 만나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충용후부와 영친왕부도 동시에 이 소식을 접했다.
사묵함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사방화가 묘책을 고안해 진강에게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안심했다.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영친 왕비는 아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해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왕은과 함께 길을 떠난 것을 알고 있었다. 영친 왕비는 서둘러 가마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영친왕은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함께 궁으로 향했다. 영친 왕비는 궁에 들어가자마자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 *
황제는 마침 어화원에서 황후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영친왕과 영친 왕비가 왔다는 소식에 그가 황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보시오. 짐이 진강에게 막북에 가지 말라 했건만, 그대가 그를 막북으로 보내 달라 청하였지. 허나 이틀도 안 되어 바로 이렇게 영친 왕비가 달려오잖소. 왕비가 짐에게 진강을 경성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면 짐이 약조를 해야 하오? 아니면 약조하지 말아야 하오?”
황제와 사이가 다시 좋아진 그 날, 황후는 무명산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놀라운 소식이라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아들 진옥이 그곳에 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무명산이 황실의 기둥이기는 하지만 친아들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황후는 진옥이 무명산에 가서 목숨을 잃느니, 차라리 그곳이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진옥은 이제 고생할 필요 없이 경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황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영친 왕비에게는 아들이 한 명밖에 없는데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만약 진강이 막북에 갔다가 일이라도 당한다면, 신첩 역시 영친 왕비를 볼 낯이 없어집니다. 왕비가 부탁을 해온다면 폐하께서도 진강을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진강이 진옥의 소식을 알아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황제가 반문하자, 황후는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진옥이 다른 사람에 의해 함정에 빠진 것이든 아니든, 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애를 평생 걱정하고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무명산이 없어졌기에 진옥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어졌지요. 허나, 이 나라의 기둥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신첩도 마음이 아픕니다. 앞으로 황실에 불길한 일이 일어날까 저어되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신첩도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을 이리도 총애해 주시는데, 신첩은 진옥의 일로 인해 금전으로 달려가 경거망동하였지요. 폐하께서 신첩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신첩은 이미 충분합니다.”
황후의 말에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는 황후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이런 점 때문에 짐이 황후를 총애하는 것이오. 강할 땐 강하고, 굽힐 땐 굽힐 줄 아는 모습이 짐은 좋소. 안심하시오, 진옥은 그대와 짐의 아들이오. 진옥이 쉬이 목숨을 잃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오.”
황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물러나 있던 시종들은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영친왕과 영친 왕비가 가까이 다가와 황제와 황후를 뵙기를 청했다. 영친 왕비는 황제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황제가 손을 내저어 진강을 경성으로 돌아오게 하라 명을 내렸다. 어전시위(御前侍衛)는 삼백 리가 떨어진 평양현(平陽縣)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