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뻔뻔한 늙은이, 능의

23화. 뻔뻔한 늙은이, 능의

또다시 능희가 다가오려 하자, 고약운은 씩 웃으며 그를 가볍게 날려버렸다.

“쿨럭쿨럭!”

땅에 뒹군 능희는 기침을 하며 입가에 피를 흘렸다. 그의 음산한 눈빛은 여전히 고약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계집! 죽어라!”

소리를 지르자마자, 그는 다시 검을 들고 고약운에게 달려들었다.

고약운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다시 꽉 잡았다. 순간 그녀의 손에서 폭풍이 몰아쳤다. 능희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폭풍이 몰고 온 어마어마한 위압감 때문에 아주 잠깐 동안 온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촌각을 다투는 이 짧은 사이에 고약운이 능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긴 검의 손잡이로 능희의 배를 툭 치자, 능희는 울컥 피를 토하곤 뒤로 넘어졌다.

“너…….”

능희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푸른 옷을 입은 고약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약운이 햇볕을 온전히 받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본 능희는 악마가 자신을 향해 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뭘 어쩌려고? 고약운, 내가 경고하는데, 우리 고모가 귀비마마임을 잊지 마라. 그리고 내 뒤에 연기종이 있다는 것도 잊어선 안 될 거다. 날 때리기 전에, 앞으로의 네 안전을 잘 생각해라.”

등줄기가 서늘해진 능희의 얼굴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는 아직도 고약운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고약운은 그의 말을 듣곤 검을 거뒀다.

능희는 한숨을 돌렸지만, 여전히 적대심을 거두지 못했다.

“내가 널 죽일까 봐 그래?”

고약운이 웃었다.

“난 꽤 좋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떻게 너를 죽여? 능희, 어차피 너는 이제부터 쓸모없는 놈이야. 아무리 수련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거든. 그래서 더 철저하게 폐물로 만들어 버리려고. 여기서 그냥 죽여줄까? 아니면 그럭저럭 살아갈래? 네 마음대로 골라.”

이 말을 하면서 고약운은 정말로 좋은 사람인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너…….”

능희가 한마디를 더 하려고 하자, 순간 손목을 찌르는 아픔이 몰려왔다. 그는 아픔을 못 이겨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너무나도 아팠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 중 가장 아픈 건 바로 뼈를 깎는 고통과 근육이 망가지는 고통이었다.

고약운은 능희의 손발을 아주 가볍게 부러뜨렸다.

“으아아악!”

극심한 통증 속에서 능희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고약운이 마지막으로 그의 발에 있던 힘줄까지 끊어냈을 때, 능희는 생생한 통증에 못 이겨 기절하고 말았다.

“능희. 이번엔 고약운을 대신해서 네게 복수를 해준 거야.”

이제 그녀가 고약운이며, 고약운이 그녀였다.

고약운의 죽음에 아무리 고일봉이 크게 기여했다고 해도, 어쨌든 원인을 제공한 건 바로 능희였다. 이렇게 그의 손발을 부러뜨린 걸로 성공적으로 복수할 수 있었다.

“희야!”

멀리서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이 들려왔다.

고약운이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늙은 영감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능의는 붉어진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피에 물든 능희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시선을 점점 위로 올리면서 고약운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고약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고약운, 네가 감히 내 손자를 이렇게 만들다니. 백 배…… 아니, 천 배로 갚아주겠다.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다! 죽어라!”

그녀의 죽음만이 손자의 상처를 메울 수 있었다.

능희는 크게 격노하여 곧장 고약운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내뿜는 살의가 온 대지를 뒤덮었다.

그러나 능의가 고약운에게 달려들자, 순간 한 인영이 그녀의 앞을 막아 손을 들어 능의의 공격을 막아냈다.

여로는 능의의 주먹을 꽉 잡아 막았다. 여로의 눈에는 차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능 가주. 어린아이들끼리의 싸움에 늙은이가 끼어드는 건 좋은 그림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키시게!”

능의는 두 눈이 붉어진 채, 제 앞을 막는 이가 누구든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폭언을 참지 않았다.

“시합이고 뭐고 다 필요 없네! 지금 저 계집이 내 손자를 폐물로 만들었으니, 내 손으로 저 계집을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네!”

그러자 여로가 그를 크게 비웃으며 말했다.

“능 가주, 당신의 손자는 잘못된 공법으로 수련을 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에 의해 폐물이 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폐물이 운명이었을 겁니다. 당신의 손자는 더 이상 돌파를 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능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저자가 뭐라고 한 게지? 고약운이 아니었어도 우리 능희가 폐물이 되었을 거란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 없다!’

이전에 시운이 분명 말했었다. 공법을 익혀도 그 어떤 후유증도 없을 것이라고. 능의는 여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분명 저자가 고약운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

능의는 화가 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얼른 고약운을 넘기게! 피를 보고 나서 나를 탓하지 말란 말일세! 능희는 능가의 유일한 희망인데, 그 아이가 폐물이 된다면 우리 능가는 몰락하고 말 것이네. 그렇다면 난 저 망할 계집을 살려둘 수 없으니, 필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게야!”

능의가 미친 듯이 으르렁거렸지만, 여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능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로 뒤로 순식간에 휙 사라졌다.

그러더니 그가 인파 속에서 라음을 찾아냈다.

“당했다!”

여로가 안색이 굳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강력한 바람이 그의 다리를 공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는 다리의 힘이 풀리며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여로는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꽉 잡고 일어서려 했으나, 지팡이는 그를 지탱하지 못하고 두 토막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순간 여로의 얼굴이 무섭게 구겨졌다. 그는 아무 일도 안 했다는 듯 모른 척하는 연기종 무리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이를 갈며 외쳤다.

“연기종……!”

방금 자신을 넘어트리려고 몰래 힘을 쓴 건 분명 연기종의 짓이었다. 그 사실에 여로는 분노가 치밀었다.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몰래 힘을 쓰다니. 좋다, 내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마!’

“라음!”

능의가 거칠게 라음을 잡아끌자, 그걸 본 고약운이 초조하게 소리쳤다.

이내 라음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능의에게 붙잡혀 있었다.

“고약운! 백신당 사람이 널 지켜주면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 게냐? 안타깝게도 넌 날 너무 얕잡아 봤다. 네 친우가 안전하길 바란다면 반항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을 바로 죽일 것이다!”

능의는 라음의 목을 조르며 잔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운아! 난 신경 쓰지 마!”

라음 역시 매섭게 눈을 부릅뜨고 겁 없이 외쳤다.

“능 가주, 이 염치없는 영감 같으니! 당신 손자가 생사장을 쓰고 시합하다가 폐물이 됐는데, 도대체 누굴 탓하는 거예요? 어린애들 싸움에 늙은이가 끼어들 줄이야!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운 건가요?”

“닥치지 못할까!”

능의는 큰손을 들어 라음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곧 라음의 얼굴에 손가락 다섯 개가 남긴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라음은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터진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으며, 조롱 어린 시선으로 능의를 주시했다.

“약운이랑 능희가 생사장을 쓸 때, 연기종 사람이 옆에서 증인이 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연기종을 무시한 채 약운이를 죽이려는 겁니까?”

라음의 시선은 연기종을 향해 있었다.

라음은 연기종 사람들이 얼마나 파렴치한 작자들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까 했던 말을 번복할 순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라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파렴치했다.

“생사장?”

혼비가 라음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라 소저, 미안하지만 생사장은 어디까지나 시합에 대한 것이오. 고약운이 규정을 어겼다면 누군가가 그녀를 바로 죽였겠지. 그렇지만 그 누군가가 연기종 사람은 아닐 거요. 우리 연기종은 살생을 매우 꺼리니,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라음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저 연기종이란 곳이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혼비 옆에 서 있던 시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보기에 이 모든 건 혼비의 뜻이지, 시운의 뜻이 아니었다. 시운은 연약하고 착하여 그야말로 선녀와 같은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이겠는가.

“하하.”

혼비의 말에 능의가 미친 듯이 웃었다. 속에서 연신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라음,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느냐?”

라음은 입술을 깨물다가 곧 차갑게 웃었다.

“연기종이 이렇게까지 파렴치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죽이세요!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까요. 흥, 내 이런 보잘 것 없는 목숨이나 얼른 가져가세요! 더는 협박할 생각 말고!”

“라음, 네 친한 친우가 내 발에 어떻게 짓밟히는지 잘 지켜보거라.”

능의는 크게 웃으며 라음의 목덜미를 잡았다.

“행여나 자진할 생각은 마라. 네가 내 손안에 있는 한, 넌 내가 죽일 것이다. 당장 죽고 싶어도 지금은 기다려라. 먼저 고약운을 죽인 뒤에, 너도 같이 저승으로 보내주마.”

말을 마치고 고약운을 쳐다보는 능의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고약운, 네 친우가 죽지 않길 바란다면 당장 검을 버려라. 검을 버리고, 내 앞에 서라!”

고약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수려한 얼굴 위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담담한 시선을 보내자, 능의는 더욱 약이 올랐다.

이내 고약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능 가주, 당신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곧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됐습니까?”

“흥, 쓸데없는 소리 마라!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네 친우는 바로 죽을 것이다. 고약운, 당장 검을 내려놔라. 이대로 네 친우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냐?”

능의가 라음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실을수록, 라음은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능의는 이 상황이 통쾌하기만 했다.

“여로. 검을 들어주세요.”

고약운은 손을 들어 검을 여로에게 던진 뒤 능의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그 어떤 변화 없이 덤덤했다.

“아가씨…….”

여로는 고약운을 보며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른침만 삼키며 긴장 가득한 눈으로 고약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약운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능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고약운. 감히 내 손자를 다치게 했으니, 네게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마. 안심해라, 단번에 죽이진 않을 테니까. 내 손자가 당한 고통을 천배 만배로 갚아주겠다!”

퍽!

능의는 주먹으로 고약운의 가슴을 세게 쳤다. 그 공격에 고약운이 긴 그림자를 남기며 몇 걸음 뒤로 날아가 넘어지자, 그녀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창백한 얼굴을 모두 가려버렸다.

이내 고약운이 입가에 흐른 피를 닦으며 고개를 들어 능의를 쳐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또렷하게 드러나는 조롱하는 기색에 능의는 더욱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