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차가운 태자 전하 (2)

7화. 차가운 태자 전하 (2)

황금색 빛이 점점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자는 매우 수려하게 생겼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다 차가운 인상이었다. 먹으로 적신 듯한 짙은 눈동자를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태자 옆에 있는, 황금색 옷을 입은 여인을 보면 경국지색이 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는 단어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지만, 얼굴이 말도 안 되게 창백했다. 병들어 보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 위에 연지가 찍혀있으니 얼핏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태자와 함께 나타난 여자는 능 귀비였다.

“태자 전하, 귀비마마를 뵙습니다.”

모두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바닥에 무릎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중 고약운만은 홀로 우뚝 서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모든 시선들이 그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 하겠느냐?”

고 장군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참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고약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릎에 치질이 생겨, 바닥에 무릎 꿇기가 조금 불편해서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저 두 분께 무례하게 군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치질?’

고 장군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고 씨 가문 저택에서처럼 그녀를 때릴 뻔했다.

무릎에 치질이 생기다니! 육십여 년 동안 살아온 고 장군도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러니 무릎에도 치질이 생기는구나, 하고 그저 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겠는가?

“하하.”

능 귀비는 살짝 입을 가리고 웃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약운을 쳐다봤다.

“네가 바로 그 고약운이구나? 만나보니 왜 유명한지 알겠다. 내 조카와 겨루겠다고 했다지?”

고약운이 능 공자에게 도전한 것은 사실 비밀이 아니었다. 그러나 능 귀비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니, 기정사실화가 된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고약운은 고개를 들어 능 귀비와 눈을 맞췄다.

“제가 바로 능희(凌熙)를 쳐부술 사람입니다.”

“푸흡!”

누가 먼저 웃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웃음을 터뜨리자 곧 모두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다들 살면서 이렇게 웃긴 농담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고약운. 네가 정녕 겁을 상실한 모양이구나? 어디가 어디라고 날뛰는 것이냐?”

능희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

“네가 나를 쳐부수겠다면, 나 또한 맹세하지. 내가 대결에서 패배한다면, 네 앞에 무릎 꿇고 너를 아버지라 부르마. 그리고 네 성을 따르겠다. 단, 네가 패배한다면 너도 그래야 할 것이다!”

표정이 흉악해진 능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저 계집이 나를 모욕하다니. 좋아. 아주 철저히 부숴주마.’

능희는 속으로 이를 갈며, 지금 당장 고약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뭐라고? 야 능희 이 나쁜 놈아!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 불러? 그게 뭔 헛소리야!”

라음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설령 약운이가 질지라도 그 뒤엔 내가 있어. 네가 정말 강인하고 용감하다면, 나랑도 한 번 더 붙어야 하는 거 아냐?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게 네 능력이야?”

능희가 라음의 욕을 듣고 눈이 뒤집혀 그녀를 향해 욕을 퍼부으려던 찰나, 돌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라 씨 가문 대장군이 그에게 보내는 뜨거운 경고의 시선이었다.

능희가 자신의 할아버지 능의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자가 바로 라 장군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능의와 라 장군 모두 장군이었지만, 능의는 손자 능희를 때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라 장군에게 라음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말하자면 그는 유명한 ‘딸 바보’였다.

라 장군은 ‘내 딸을 괴롭힌다면 네가 황손이나 귀족이라 할지라도 죽인다’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전에 병부상서(兵部尚书)의 아들이 라음에게 못생겼다고 말하자, 라 장군은 그를 반쯤 죽여 놓았었다.

황제는 어리석지 않았기에, 고작 이런 일로 라 장군에게 병권을 내려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라 장군은 나라를 위해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사람이었다.

능 귀비는 아주 잠깐 가볍게 웃어보이곤 이내 정색했다.

“라 장군. 아주 재밌는 여식을 두셨군. 그렇지만 태자와 연기종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게 주의시키길 바라오. 아, 그래. 내가 소개해줄 사람이 있소. 이 아이는 연기종 종주의 여식 시운(诗云)이라 하오.”

연기종이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겐 신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연기종 종주의 여식이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능 귀비마마, 저희 종문이 태자 전하의 생신을 경하드리러 왔습니다. 또한 종문에 들일 제자를 찾으러 온 것이기도 합니다. 청룡국에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적지 않다 하여, 직접 찾으러 온 것이지요.”

연기종은 이미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전 같은 존재인데, 더구나 눈앞의 소녀는 연기종 종주의 여식이기까지 했다.

시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의 웃음은 마치 봄바람처럼 편안했다.

고약운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 너도 알아차린 건가?

이내 고약운은 제 영혼에 대고 말하는 자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저 여인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 연신법(炼神法)을 수련했어. 저런 수법은 타인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지.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게 저 여인을 사랑하게 될 거다. 이런 수법은 사람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거든. 그래서 이 수법을 쓰는 이들은 타인의 정신력을 빨아들여야만 생존할 수 있지. 저 여인을 능가할 정신력이 없다면…… 아마, 죽게 될 거다.

자사마저도 시운을 보고 의아해졌다.

‘저렇게 사악한 수법을 쓰는 사람이 아직 있다니? 저 수법은 몇 년 전부터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 여인을 보자, 그는 특히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그간 딱 한 사람 앞에서만 느꼈었는데 말이다.

자사의 말을 듣고 고약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륙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았다.

* * *

“여러분.”

시운의 웃음은 부드럽고 따듯했으며, 눈빛 또한 온화했다.

“여러분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종문의 천영진(天灵阵)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을 천영진으로 들어갈 수 있게 제가 안내하지요. 여러분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천영진에서 수련을 하게 될 것이며, 이후 성적에 따라 여러분이 연기종의 문하생이 될 수 있을지 판단하겠습니다.”

천영진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연기종의 종문에서 가져온 것이니 분명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리라. 이는 모두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태자 영은풍(冷言风)이 고약운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러나 그는 고약운을 돌아보진 않고 차가운 기세를 풍기며 계속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고반반이 샐쭉거리며 말했다.

“고약운, 너 태자 전하 눈에 띄려고 일부러 무릎을 안 꿇었지? 그런데 어떡하니? 태자 전하는 널 쳐다보지도 않으시는데!”

이 같은 말이 떨어지는 찰나에도 태자 영은풍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내 영은풍을 보고 있던 고약운의 시선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고약운은 잠시 생각을 해봤다. 전생에서 그녀가 동악 대륙에 있었을 때,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녀의 무릎을 꿇게 할 자격이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어찌 태자 앞에서 무릎을 꿇겠는가?

그런데 이런 자신의 행동이 태자의 환심을 사려는 것처럼 보였단 말인가?

고약운은 영은풍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봤다. 천재인 고생소와 영은풍은 무예 수련을 함께하며 자주 겨뤘었다. 그리고 그들이 겨룰 때마다, 그 자리에 고약운이 함께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고생소를 통해 태자 영은풍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약운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두 사람이 무예를 겨룰 때마다 오라버니인 고생소만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약운이 한때 영은풍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고약운. 너 태자 전하를 연모하는구나?”

고반반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약운을 노려봤다.

“연모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전하의 주의를 못 끌어서 이 난리야? 다행히도 전하께서 네 계략을 간파 하셨어! 너는…….”

“태자가 뭔데.”

모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약운이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태자가 뭐냐고. 먹어도 돼?”

“뭐, 뭘 먹어? 너…… 너 진짜 바보구나!”

그러자 고약운은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라음을 보고 말했다.

“라음, 우리도 가보자.”

* * *

사람들은 소란스럽게 떠들다가 연기종 장로 두 명이 나타나자 금방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황궁의 마당은 곧 조용해졌다.

라음이 그 두 명의 장로 중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검은 옷 입은 사람 보이지? 저 사람이 바로 태자 전하의 스승이신 혼비 장로야.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전림 장로고. 두 사람 다 연기종의 고수야.”

고약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기둥을 바라봤다. 그녀의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네 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저것이 바로 천영진으로 들어가는 문일 것이다.

“각자 가진 실력을 통해 여러분은 천영진의 초급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제가 지정한 범위를 벗어나선 안 됩니다. 벗어난다면…… 반드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혼비는 엄숙한 표정으로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천영진 안의 영기는 너무 짙기 때문에, 취기 3급은 도달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력한 힘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이건 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설마 여기에 취기 3급에 도달하지 못한 분이 있진 않겠지요?”

“저…….”

고반반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자, 혼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소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시오?”

“혼비 장로…….”

고반반은 입술을 깨물고 고약운을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모두 다 알고 있지만, 고약운은 몇 년 전 취기 2급을 돌파했으며 그 이후로는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청영진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테지요.”

그녀가 너무나도 연기를 잘해서, 고반반을 모르는 이들은 그녀가 정말로 고약운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음?”

혼비는 고약운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았다.

“고약운? 고생소의 동생 아니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어떻게 취기 2급에 머물러 있단 말이오? 고생소는 천재인데, 어째서 그의 여동생이 이처럼 폐물이란 말이지? 정말 놀랍구려.”

몇 년 전 고생소가 자신의 제자가 되길 거절한 일은 혼비에게 있어 평생의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혼비가 고약운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청룡국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힘이 없는 걸 어쩌겠어요?”

고반반은 정말로 자식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너! 너 딱 기다려.”

라음은 화가 치밀어서 바로 주먹을 들어 올렸으나, 이내 또 다른 손이 그녀의 주먹을 꽉 쥐었다.

라음을 저지한 후, 고약운은 수려한 얼굴 위로 차분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오라버니에 비해 보잘것없는 제가 실망시켜드려 정말 면목이 없네요. 그런데 제가 어제 3급을 돌파했지 뭡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모두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이내 고반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군가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갈긴 것처럼 말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가 아니라, 고약운이 평소와 같은 일상 속에서 3급을 돌파했다고 말했다면 그마저도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방금 고반반이 고약운은 취기 2급이기 때문에 천영진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자마자, 고약운은 보란 듯이 3급을 돌파했다는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