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머물다
그날 저녁, 플래티넘빌 8호.
넓은 거실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혁과 민우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밥 먹자.”
민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야기할 거야.”
그러나 민우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음식 거부라는 그 유치한 협박이 아빠한테 먹힐 것 같아?”
민우는 나이 든 승려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서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부자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시혁은 결국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영서씨 주소 좀 보내줘.”
민우의 단식이 효과적이라는 걸, 결국 시혁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르게 움직인 지훈은 영서의 주소를 문자로 보내왔다. 그 뒤에 쓸데없는 말이 한가득 덧붙어 있었지만, 시혁은 당연하게도 그 말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시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민우는 벌써 아빠의 외투와 차 키를 챙겨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민우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시혁이 결국 민우를 안아 들면서 말했다.
“이번만이야. 다음번에는 어림도 없어.”
* * *
오디션 장소에서 돌아온 영서는 일단 모자란 잠을 보충한 뒤 마트에 들러 샤브샤브 재료와 맥주를 샀다. 첫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대한 자축이었다.
혼자서 샤브샤브를 먹는 것만큼 외로운 일도 없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것에 습관이 된 상태라 다행이었다.
육수를 내고, 채소까지 준비한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의아해 하며 문을 연 영서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문 밖에는 정장 차림에 검은색 코트까지 걸친 남자가 찹쌀떡 같은 아이, 민우를 안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민우는 알록달록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기이한 조합일까?
“유시혁씨?”
영서는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한 것을 겨우 참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아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병문안입니다.”
시혁의 반듯한 입술 사이로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 밤에, 직접 아이까지 안고 병문안을 오다니. 영서는 그의 방문이 의아했다.
‘그냥 쓰러진 것뿐이지, 뛰어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어, 참 친절하시네요. 하하. 얼른 들어오세요! 방이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내 영서는 떨떠름하게 손님을 맞고 얼른 방안을 대충 정리했다. 소파 위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침대 위에 널려있는 옷들을 침대 바닥으로 쑤셔 넣었다.
“편하게 앉으세요.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차랑 우유면 되겠죠?”
영서는 바쁘게 집 안을 정리하며 시혁이 여기까지 찾아온 저의가 무엇일지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시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상황을 보고하는 군인처럼 딱딱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영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시혁을 위한 차를 준비한 후, 민우를 위해 우유를 따랐다.
시혁이 긴 다리로 걸어가 비좁은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앉았고, 민우도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부자(父子)는 생긴 것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표정까지도 빼다 박은 듯 같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에, 말도 없었다. 이내 적막이 이어졌다.
영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뭐 하러 온 걸까?
이때, 냄비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나자 좁은 방안은 곧 맛있는 육수 냄새로 가득 찼다. 영서는 이 침묵을 깨기 위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녁은 드셨나요? 마침 샤브샤브를 먹으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좋습니다.”
민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
예의상 권한 말인데 이렇게 덥석 응해올 줄은 몰랐다. 대기업의 차기 총수와 아들은 얼마나 많은 산해진미를 맛보아 왔을까. 별안간 생판 남의 집에 들어와 샤브샤브를 같이 먹겠다니. 상당히 겸연쩍고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좁은 식탁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 영서는 접시와 수저를 더 내와 탁자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육수가 좀 매운데, 매운 거 괜찮으세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 영서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시혁이 답했고, 민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서는 일단 깨끗하게 씻어놓은 재료를 가지고 왔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시혁은 대부분의 시간을 나머지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데쳐주는 데에 들였다.
민우도 영서와 마찬가지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듯, 혀를 내민 채 헥헥 거리면서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영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이가 매운 걸 먹어도 괜찮은 거예요?”
이 도련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영서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약한 아이는 아닙니다.”
시혁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영서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오디션은 어땠습니까?”
내내 침묵한 채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던 시혁이 불쑥 질문을 해왔다. 영서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괜찮았어요. 그래서 오늘 저녁을 푸짐하게 먹으면서 자축하려고 했던 거예요.”
시혁이 잔을 들었다.
“축하합니다.”
뜻밖에 영서는 첫 번째 축하를 받게 되었다. 아닌 밤중에 찾아온 타인, 유시혁으로부터.
* * *
영서가 손에 든 맥주잔을 살짝 부딪치며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영서의 웃음에 시혁은 곧이어 눈앞이 살짝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곁에 있던 민우를 바라보던 영서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여기 꼬마한테 특히 고맙죠. 꼬마가 아니었다면 전 때맞춰 오디션 장에 가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같이 짠, 할까?”
민우는 우유와 영서와 아빠의 맥주를 번갈아 보더니 뭔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컵을 든 민우가 영서의 잔과 부딪힌 뒤 안에 든 우유를 벌컥벌컥 다 들이켰다.
영서는 민우의 진지하고도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른이 술을 마실 때 어떻게 하는지 다 알고 있는 건가?’
Rrrrrrrr.
이때 시혁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가 액정을 확인하며 베란다로 나갔다. 영서는 그 틈을 타 얼른 민우에게 자신의 맥주를 건넸다.
“궁금하지? 자, 얼른. 아빠 없을 때 한 번 맛봐! 딱 한 모금만이야!”
그 말에 민우는 예쁜 눈을 반짝 빛내더니, 고개를 숙여 조심스레 맥주를 살짝 들이켰다. 그러곤 맛이 하나도 없는 듯 얼굴을 잔뜩 구겼지만, 그래도 민우의 기분은 퍽 좋아 보였다.
시혁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영서는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태연하게 앉았다. 그녀보다 훨씬 더 프로다운 민우는 여유롭게 우유를 마시는 척 했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시혁 또한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선 미약한 온기가 살며시 어려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영서가 사온 많은 음식을 깨끗이 비워냈다.
* * *
영서가 힐끗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 내리치더니 뒤이어 콰르릉,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곧 바람도 미친 듯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봤는데 오늘 저녁부터 폭우가 내린다고……. 태풍도 온다고 했던 것 같고⋯⋯.”
영서는 골치 아프다는 듯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런 영서를 시혁이 민우와 함께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영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간도 늦었고 날씨도 궂으니 아이를 데리고 집까지 가는 건 좀 어렵겠네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하루 주무실래요?”
영서는 예의상 한 말에 유시혁 같은 사람이 덥석 응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좋습니다.”
민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째서⋯⋯. 이 사람은 거절을 모르나? 결정이 너무 쉬운 거 아냐? 두 부자가 마치 내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지? 아, 정말 미치겠네.’
만약 오늘 밤 찾아온 것이 유시혁 뿐이었다면, 영서는 시혁에게 이곳에서의 밤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오늘 낮에 그런 어이없는 말을 했던 상대라면 더더욱.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시혁의 곁에는 민우도 있었으니까. 이런 날씨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게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이가 함께 있으니 남녀가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 정도의 호의는 베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영서에게 지원해준 숙소는 거실 하나에 방 하나가 딸린 구조로 크지 않았다. 이에 영서는 예상도 하지 못한 두 손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재워야 할 지 고민했다.
“어……. 제가 거실에서 잘게요. 유시혁씨는 아이랑 제 방에서 주무세요. 시트는 얼른 갈아 드릴게요.”
“됐습니다. 제가 거실에서 잘 테니, 한영서씨가 아이랑 방에서 주무시죠.”
시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영서는 어째선지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유그룹의 차기 총수 유시혁에게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나 먹이고 거기다 거실에서 재우다니. 하지만 영서는 시혁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유시혁씨랑 아이가 갈아입을 편한 옷이 있는지 좀 찾아볼게요.”
한참이나 옷장을 거의 뒤집다시피 한 영서는 두 사람이 입을 편한 옷을 겨우 찾아냈다.
* * *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 업체에서 보내준 아이용 피카츄 잠옷이 옷장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마침 민우에게 꼭 맞는 사이즈였다.
시혁이 입을 옷을 찾아내는 것은 쉬웠다. 영서의 남동생이 놀러왔다 남기고 간 옷이 몇 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부모와 함께 살게 된 뒤, 그동안 키워준 양부모님께 죄송해 연락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영서는 동생 도윤하고만 가끔 왕래하곤 했다.
옷을 갈아입은 영서가 시혁 몫의 이불과 베개를 가져다주었다. 거실에 놓인 소파는 시혁의 긴 다리를 수용하기엔 너무 버거워 보였다. 이에 영서는 소파 스툴을 가져다가 붙여 놓는 것으로 마음의 죄책감을 덜어냈다.
민우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내 민우는 알아서 씻고, 혼자서 영서가 꺼내준 귀여운 잠옷을 입더니 알아서 침대 위에 눕기까지 했다.
샤워를 마친 영서는 보수적인 투피스 잠옷을 입은 뒤 부적절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섰다.
“저⋯⋯ 유시혁씨, 전 먼저 잘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부르세요.”
“그러죠.”
방금 막 씻고 나온 영서를 본 시혁의 눈은 일순 초점을 잃었다. 곧 눈동자 속에서 파도처럼 거대한 파문이 엿보였다.
화장기 없는 영서의 뽀얀 얼굴은 화장실 안 수증기 때문인지 살짝 발그레했다. 거기다 흔한 투피스 잠옷 차림에 머리는 번 헤어스타일로 틀어 올린 영서를 보자, 시혁은 그녀가 아무런 상황도 야기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보수적인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서의 모습에서 부적절해 보이는 부분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혁은 자신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자신의 신체 변화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