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사랑해요

20화. 사랑해요

“주스 여기다가 놓아주세요. 그리고 꼬마 도련님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시고요!”

영서는 주스를 배달해준 아가씨에게 말을 전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민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작진들은 겉보기엔 각자 매우 분주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모두 영서 쪽을 주시하면서 이번엔 무엇이 배달 왔는지 궁금해했다.

곧이어 그들은 영서 쪽을 힐끔 바라봤다.

처음 장미꽃을 받았을 때 영서의 표정은 매우 난처해 보였고, 두 번째 다이아몬드를 받았을 때 역시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영서의 표정은 매우 행복해 보였으며, 심지어 웃으면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잇따라 소리를 쳤다.

“아이고, 요즘엔 미인에게 돈으로도 안 되네. 마음을 써야 간신히 미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만!”

“그러니까요. 아까 그 아가씨가 직접 손으로 주스를 짰다는 말 못 들었어요? 진짜 달달한 행동이잖아요!”

“마지막에 주스 보내주신 분이 미인의 마음을 얻는다에 한 표!”

“그럼 저는 다이아몬드에 걸게요!”

“왜 아무도 꽃에는 안 걸죠?”

* * *

주스와 녹두스프를 다 마신 후에 영서는 힘이 불끈 솟아, 다시 촬영에 들어섰다.

같은 시각, 집에서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는 시혁의 핸드폰이 띠링,하고 울렸다.

영서한테서 온 메시지였다.

이내 시혁은 메시지 창을 열었다. 메시지를 읽은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민우야, 주스랑 녹두스프 정말 고마워. 너무 너무 맛있더라!」

시혁은 자기만 생각하고 한참동안 그 메시지를 보다가, 그제야 꼼짝도 않고 창문을 보는 민우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민우야, 이리 와 봐.”

민우는 시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시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영서 이모한테서 메시지 왔는데.”

그 말에 민우는 로켓처럼 빠르게 시혁에게 가, 위로 팔짝 뛰어 오르며 핸드폰을 보려 했다.

시혁은 그런 민우를 보며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보여줄 테니까, 아빠라고 해봐.”

민우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으며, 쉽게 협조하려 들지 않았다.

민우의 애타는 울음이 끝나갈 무렵, 시혁은 마음이 약해져 핸드폰을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는 매우 흡족해하며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혁은 그런 아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시혁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일이 매우 적기 때문에, 신께서 민우를 그의 옆으로 보내 시험에 들게 한 것 같았다.

민우는 사실 매우 똑똑했고, 생후 6개월 때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민우의 어린 시절에 시혁이 놓친 부분이 많아 다시 채워주려 했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하지만 언제가 민우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시혁은 믿고 있었다.

민우가 한참 동안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어느 부분을 잘 이해 못 했는지, 아빠 앞으로 다가와 짧은 손가락으로 ‘워 아이 니(사랑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문장 뒤에 붙이는 말투 같은 거야. 특별한 의미는 없어.”

시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민우한테 이상하게 알려주지 말자! 형, 한자를 안 쓰고 발음만 써서 모르는 거야? 워 아이 니는 중국어인데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야!”

지훈은 후다닥 뛰어오더니,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보였다.

민우는 이 말을 듣고 아빠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곤 다다다 뛰어가 과일 즙을 짜러 갔다.

시혁은 12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 만약 영서가 바로 중국어로 써줬으면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쓰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너 출근 안 해?”

시혁은 지훈을 차갑게 쏘아보더니, 마치 부하 직원을 다루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훈은 극도로 흥분한 얼굴로 의자를 시혁 앞으로 가지고 와 앉았다.

“사장님, 사장님에게 보고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시혁은 입을 열기 귀찮아, 할 말이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훈은 두 손을 흔들며 매우 흥분한 상태로 말하였다.

“방금 내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 오늘 영서 씨를 좋아하는 사람 두 명이 영서 씨한테 줄 선물을 촬영장에 보냈대!”

“그거 민우가 영서 씨한테 준 주스랑 녹두스프인데.”

시혁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나도 알지. 우리 민우가 물건 주기 전에, 또 누군가가 영서 씨한테 선물 보냈나 봐. 그것도 두 명씩이나! 하나는 촬영장을 가득 채울 만큼의 장미꽃, 다른 하나는 다이아몬드래!”

그 말에 시혁의 얼굴빛이 무더운 여름 날씨마저 춥게 만들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누군지 알아냈어?”

시혁은 당장 누구 한 명이라도 없앨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훈이 책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게 바로 제일 중요한 포인트지. 내 정보망으로도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어. 그 사람들이 다시 나서야만 조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시혁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그들이 다시 나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이내 시혁은 지훈의 말을 듣고 나서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봉아, 사람 좀 알아 봐줘. 두 명이야.”

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싸늘했으며,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에 지훈은 시혁의 발 빠른 행동에 속으로 감탄했다.

정봉의 정보망은 지훈과 비교할 수 없이 넓어, 얻으려고 하는 정보의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형,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영서 씨 과거가 복잡할 거라고. 이제야 믿는 거야? 정봉이 형한테 영서 씨에 대해서도 알아보라고 시키는 건 어때?”

지훈은 의미심장한 투로 시혁에게 조언했다.

“필요 없어.”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영서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시혁은 굳이 먼저 나서서 영서의 뒤를 캐고 싶지 않았다. 만일 영서가 시혁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면, 스스로 먼저 알려줬을 것이다.

* * *

오후 6시가 되어, 영화 촬영이 드디어 끝났다.

오늘 촬영한 장면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위주의 장면이었다. 그래서 영서가 대사를 하는 장면은 없지만, 현장에 나와 곁에 가만히 서 있는 병풍 역할을 해야 했다.

병풍 역할을 하는 것도 매우 힘든 노릇이었다. 사극 분장을 온종일 하고 있으려니 영서의 목은 부러질 듯 아팠으며, 더운 날씨에 겹겹이 껴입어야 하는 복장 때문에 몸에는 땀띠까지 났다.

영서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운 후, 마스크를 끼고 지하철을 탈 준비를 했다.

영서는 아직 유명하지 않은 데다가 알아보는 사람도 없으니, 지하철 타기가 다른 연예인들에 비해 비교적 편했다. 게다가 지하철은 막힐 일도 없으니 얼마나 편한가.

이내 영서가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검은색 마세라티 한 대가 영서의 옆에 멈춰 섰다.

곧이어 차의 창문이 내려지고, 운전석에 있던 연호가 미소를 지으며 영서를 바라보았다.

“영서야, 내가 데려다줄게!”

영서는 말문이 막혔다.

“…….”

‘전 남자친구…… 왜 또 전 남자친구인 건데……? 나 좀 가만히 놔두면 안 되나?’

“괜찮아.”

영서는 연호를 무시하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다시는 그 역겨운 얼굴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연호는 차의 속도를 영서의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몰면서 영서를 따라갔다. 보아하니 그는 영서를 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영서야, 우리 얘기 좀 해.”

그 말에 영서가 차갑게 웃었다.

“내가 오빠랑 할 얘기가 뭐가 있는데? 아까 내 스캔들로는 부족해? 크게 한 건 찍히고 싶어?”

연호는 눈썹을 찌푸렸다. 어릴 때는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따랐던 영서가 갑자기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니 그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영서야, 그런 이유가 아니야. 진짜 중요한 일이 있어서 너를 찾은 거야!”

영서는 대로변에서 옥신각신 연호와 소란을 피우다, 혹여 사진이라도 찍힐까 두려웠다.

‘이놈의 차는 너무 눈에 띄어.’

영서는 좌우를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차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 * *

30분 후, 어느 식당의 룸 안.

연호는 직원을 불러 영서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주문했다.

“영서야, 정말 오랜만이네. 입맛이 변했는지 안 변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해외에서 잘 지냈어? 내가 보낸 돈, 네가 다시 다 돌려보냈더라? 결국 계좌번호도 바꾸고…….”

“괜찮아.”

영서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민우에게 조금 늦게 집에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보내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윽고 연호가 수표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영서는 곁눈질로 연호가 내민 수표를 힐끔 보았는데, 무려 13억이라는 금액이 적혀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곧 영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연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의미야?”

연호의 눈빛은 단호했다.

“영서야,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마.”

영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연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내가 뭘 했는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그 배역 어떻게 따낸 거야?”

연호는 갑자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내가 어떻게 얻어냈다고 생각하는데?”

영서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연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연호는 있는 힘껏 책상을 내리치곤,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한영서! 너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들어오면 어떤 상황을 마주하는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넌 왜 이 더러운 곳에 있는 거야?”

“아, 나 같은 여자라…….”

영서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소연호 도련님이 오늘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예전의 영서였다면, 연호의 말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연호는 예전에 영서에게 자신의 아내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새론이 배우를 하려 하자, 전력으로 새론을 지지했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아무 사이도 아닌 영서에게 이런 식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영서야, 우리는 이미 헤어진 사이지만, 나에게 넌 내 친동생 같은 존재야. 난 그저 너를 도와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그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아 줘. 자, 이 돈 가지고 스타라이트로 가서 계약해지하고 연예계를 떠나.”

연호는 간절한 눈빛으로 영서를 설득했다.

“하, 나를 도와줘?”

영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맞아. 나 소연호 도련님의 도움이 필요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날 대신해 한씨 집안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 진상 좀 알려줘. 한새론이 두 남자를 돈으로 매수해서 날 겁탈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증거를 법정에서 제시해. 그게 나를 도와주는 일이야. 오빠가 할 수는 있어?”

“영서야, 나는…….”

연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서야, 내가 그렇게 해버리면 새론이 인생은 끝장나게 돼. 그리고 그때 그 일은 고작 미수에 그쳤어. 넌 방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고…….”

예상했던 대답임에도 불구하고 영서의 심장은 바늘에 찔리는 듯 콕콕 쑤셔왔다. 이내 영서가 빈정대며 말했다.

“그래서 오빠 말은 그때 새론이랑 오빠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는 거네? 너희가 나한테 억지로 술 강요하고 술에 약 탄 후에 그 놈들이랑 모의해서 날 겁탈했는데, 모두 다 내 잘못이라는 거네? 아버지 없는 아이를 배서, 죽은 아이를 낳은 것도 내 잘못이고!”

연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영서야, 그 뜻이 아니잖아! 그 일에 대해서 나랑 새론이는 이미 너한테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한테 최선을 다해 보상하려고 했는데, 넌 왜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하는 거야?”

영서는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하, 나보고 그 일을 잊으라고 하는 거야? 그래, 좋아! 네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한새론이 겁탈당하길 기다릴게. 그리고 걔가 아빠 없는 애를 임신하면 네가 한새론을 버리고 바람피운 다음 그때 다시 나한테 찾아와! 그럼 그 일을 잊어줄게!”

연호의 낯빛이 변했다.

“한영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 나는 말만 했을 뿐인데, 오빠 마음이 엄청 아픈가 봐? 그치, 자기 자신한테 벌어진 일이 아니면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 거지. 내가 너희를 용서하기를 바라? 난 성인군자가 아냐!”

말을 마친 영서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재수 없어!’

소연호를 상대해 주는 게 아니었다. 영서는 구역질이 나 저녁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빨리 집으로 가서 민우를 안고, 힐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