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훈련
“왕자님, 제가 뭘 해야 하죠?”
왕자가 답이 없자, 안나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네가 너의 힘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해. 그것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
“악마의 힘, 말인가요?”
“아니.”
로렌이 단호하게 답해주었다.
“너의 힘 말이야. 악마의 힘이 아니라, 너의 힘. 사람들은 마녀의 힘이 악마에게서 나온다고 하지. 그러니까 마녀는 모두 사악하고 부정한 존재이고, 모두 죽여야 한다. 그게 사람들의 말이야. 하지만 난 그런 말은 믿지 않아.”
로렌은 쪼그려 앉아 상대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
그는 지하 감옥에서 안나가 내뱉었던 가벼운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분명히 세상을 향한 경멸과 혐오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날, 그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세상이 미워서 악마와 계약했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마땅했다.
그렇다면 그 경멸과 혐오는, 자신을 악마와 계약한 사악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조소이리라. 정말로 악마와 계약했다면, 그렇게 웃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인 것은 이웃 집 내외를 죽이려든 강도 한명 뿐이었다. 착한 아이다. 적어도 로렌의 눈에는 그랬다.
“저는 한 번도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해친 적이 없어요.”
안나가 소리 죽여 말했다.
“그 강도를 빼고요…그건…”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 사람들이 널 두려워하는 건, 널 몰라서 그래. 그들은 끊임없는 훈련이 강한 전사를 만드는 것은 알지만, 마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 하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그리고 나약한 사람들은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해. 그래서 공포의 대상을 이해하기보다는, 없애버리려고 하지.”
“왕자님은 조금도 두렵지 않으세요?”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 4왕자는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힘이 너의 것이라는 걸 아니까. 일단은 그거면 충분해. 그리고 난 호기심이 많거든.”
로렌이 웃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시작하자. 그 힘이 무엇인지, 알아보자고.”
* * *
불빛이 그녀의 발밑에서 떠올랐다 또 빠르게 사라졌다.
23번째 연습이다. 그러나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안나의 이마에는 어느 새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녀가 손등을 가져가 땀을 닦아내자, 순간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땀방울이 증발했다.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연습을 시작했다. 마녀 제복(그러니까…메이드복)은 가지런히 잘 개서 한쪽에 놓은 채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벌이나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로렌은 티어에게 통에 망토를 가득 담아 가져오라고 명했다. 불꽃을 불러낼 때 마다 알몸이 되니, 그 때 마다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그리고 24번째 연습에서 마침내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화염이 더 이상 발밑에서 솟아오르지 않고, 손바닥에서 나타난 것이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화염을 손끝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불꽃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팔에 떨어져 소매를 태웠고, 또 다시 옷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24번째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로렌은 아직도 안나의 옷이 불탈 때 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작 안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로렌이 안나에게 정해준 목표는 명확했다. 먼저, 화염이 손바닥 또는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갈 때 옷을 태워서는 안 된다.
동시에 연못 속의 쇳덩이를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높은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30번째 연습까지 실패하자, 로렌은 그녀를 멈추게 했다.
“잠깐 쉬자.”
로렌은 멍하니 서있는 안나의 곁으로 간 뒤, 팔을 끌어당겨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넌 이미 지쳤어. 피곤할 때는 쉬어야지. 천천히 해도 되니까 무리하지마.”
* * *
크렘왕국에는 티타임이 없었다. 정석은 크렘왕국의 귀족들에게 티타임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알던 왕족의 이미지는 언제나 긴 식사와 여유로운 티타임을 갖는, 그런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만들면 그만이다. 간식과 차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
자신이 황량하고 외진 변방 마을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4왕자는 자신의 시녀, 몸종, 요리사들을 몽땅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럴싸한 과자를 구워내고 차를 끓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녀와 함께 ‘실험’을 시작한 첫 날, 성루 뒤뜰에 있는 조그만 막사에서 첫 번째 티타임이 열렸다.
안나는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간식을 바라보며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입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로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안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겨우 딸기 케익 하나에 놀라다니… 감옥 안에서도 눈물은 커녕 석고상처럼 무표정이더니 딸기 케익 하나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참으로 우스웠고, 안쓰러웠다.
왕자에게는 먹는 것보다 마녀의 표정을 지켜보는 일이 더 재밌는 일이었다.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케익을 입에 넣더니, 이내 푸른 눈을 두 배는 크게 뜨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 * *
3일 후 파라부가 변방 마을에 대해 정리한 자료들을 가지고 로렌의 집무실에 나타났다.
사실 4왕자가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보고서를 참을성 있게 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로렌은 어지러운 글자를 열심히 들여다 보다 파라부를 불렀다.
“여기서부턴 자네가 읽어봐.”
1시간이 넘는 보고를 전부 다 듣고 난 뒤,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매년 겨울철 세수와 교역이 전부 0이지?”
겨울은 기온이 낮으니 수확량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수와 교역이 아예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주민들이 가을철에 배불리 먹어 에너지를 저장하고, 겨울 내내 겨울잠이라도 자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겨울은 악마의 달이고, 변방 마을에는 괴수를 막을 성벽이 없기 때문에, 주민들은 전부 포트 요새로 이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마마의 안위가 우선이니까요.”
‘악마의 달?’
로렌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궁정에서 수업을 받았을 때, 역사 교사가 악마의 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매년 겨울 첫눈이 내린 후, 태양은 점차 빛을 잃고 비올린 산맥에 지옥의 문이 열린다. 이 때 지옥에서 온 사악한 기운이 영혼을 침식시키며, 여자들을 악마의 노예인 마녀로 만든다.
사람의 경우는 마녀가 되지만 악마의 힘에 물든 동물들은 강한 괴수로 변하여 인간을 공격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마녀는 이 계절에 태어나며, 이미 태어나 있는 마녀들의 힘은 평소보다 훨씬 강해진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본 적 있어? 지옥의 문을?”
“마마, 보통 사람이 어떻게 지옥의 문을 볼 수 있겠습니까!”
파라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올린 산맥은 산 가까이에 다가가기만 해도, 사악한 기운의 영향을 받는 곳입니다. 가벼우면 두통에 시달리고, 심각하면 지능을 잃을 수도 있지요. 게다가…”
“게다가 뭐?”
“마녀가 아니라면 지옥의 문을 볼 수 없습니다. 마녀들은 이미 악마의 하수인이 된 자들이니, 사악한 기운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파라부는 고개를 돌려 뒤뜰을 바라보았다.
로렌은 파라부의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채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자 노인의 시선이 다시 왕자를 향했다.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도 변방 마을에 온 건 처음입니다. 크렘왕국에서 사악한 존재를 직접 만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매년 한 번씩 이주라... 최악의 조건이었다. 토지가 척박한 것은 둘째 치고, 매년 이주를 해야 하다니, 마을이 왜 이 모양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포트 요새가 괴수를 막아낼 수 있다는 말은 괴수들도 죽을 수 있고, 이기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럼 대체 왜 그 괴수들을 뿌리 뽑지 않는 거지?”
“포트 요새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라이언 공작의 정예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으니,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처음부터 포트 요새에 경고 신호를 보내기 위해 생긴 곳인걸요.”
‘총알받이구만…’
* * *
토지가 나쁘면 황무지를 개간하면 되고, 영토가 작으면 밖으로 넓히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터.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단지 괴수들의 침입을 조금 더 빨리 알기 위해 세워진 마을이라니.
아마도 상황이 급박해지면 마을 주민들을 괴수의 먹이로 던져주고 시간을 벌겠다는 거겠지.
그런 곳에서 안심하게 일을 하고, 삶을 이어나가고, 대대로 살아갈 삶의 터전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렌은 파라부가 물러가자마자, 그의 수석기사인 카터 라니사를 불렀다.
“수하들을 데리고 가서 현지 호위병, 사냥꾼 아니면 농부들을 찾아와. 이곳에서 5년 이상 살았고, 악마의 달을 보낸 사람들로. 만약 괴수와 싸운 적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데려오도록.”
카터가 명령을 받고 떠나자 로렌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어 나갔다.
변방 마을의 주요 산물은 광산물과 동물 모피이고, 식량은 대부분 수입해오고 있었다. 모든 운송품은 루비콘 강을 통해 운반되고 있었다.
마을의 광산에는 철, 구리, 유황, 수정, 루비, 사파이어 등 제법 다양한 광물이 있었다. 문제는 그 광물이 귀하건 흔하건, 포트 요새에 광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돈이 아니라 식량을 받는다는 점 이었다.
‘대체 이게 뭐야…귀한 광물을 보내고, 식량으로 받고…제 값을 내지 않는 수준이 아니잖아. 이건 그냥 날강도라고…’
부족한 수입을 벌충하기 위한 수단은 모피 거래였다. 주민들은 서쪽의 숲에 들어가 짐승들을 사냥해, 포트 요새나 모도르 마을 사람들에게 파는 것으로 부족한 살림살이를 메꾸고 있었다.
‘왜, 이따위로 관리하고 있는 거야? 루비콘 강은 왕국 전체를 지나는 강인데, 그냥 포트 요새가 아닌 다른 곳에 광물을 팔면 되는 거잖아. 운송 루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 *
이튿날, 카터가 호위병 2명과 현지 사냥꾼 1명을 데리고 왔다.
“이 두 사람은 변방 마을의 순찰대장입니다. 매년 봉화를 올리는 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 사냥꾼은 괴수를 만난 적이 있는 자로, 직접 괴수의 목을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세 사람이 일제히 절을 하며 예의를 갖추자, 로렌이 호위병 중 하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존…존경하는 왕자 마, 마마…”
왕자의 부름에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호위병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말을 더듬어댔다.
“저와 브라이언은 모두…모두 여기 사람인데, 눈이 내린 후, 우리…아니, 그, 저희들은 북쪽 언덕 광산 지대의 봉…봉화대에 가서…가장 먼저 괴수의 동향을 살피고, 괴수들이 서쪽 숲을 넘으면, 봉화를 올린 뒤 달아나, 미리 준비해 놓은 쾌속선을 타고 떠나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는 말투였다. 더듬는 것은 둘째 치고,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흐음…알겠어. 당신 파트너도 말해 보라고 해.”
로렌은 답답한 나머지 고개를 저은 뒤, 손짓으로 다른 호위병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