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화. 잠복

905화. 잠복

한참의 침묵 끝에 고개를 들고 길게 한숨을 내뱉던 퓰러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낸 그는 깃펜을 손에 쥐었다.

내게 더 이상 잃을게 어디 있겠어?

영지를 주겠다는 약속은 이미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이쪽에 끝까지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검은 시장에서 보낸 자의 말대로 이런 짓을 벌린다고 자신이 입을 손실도 없었다. 그렇다면 양쪽에 동시에 발을 들이고 있는 편이 좋았다.

만약 악마가 승리를 거둔다면, 지금의 상태에서 더 나빠질 리는 없었고, 크렘이 이긴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가 해온 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는 조용히 펜촉을 잉크에 적셨다.

* * *

저녁 무렵, 그는 트렌치코트 차림에 털모자를 쓰고, 내성 구역에 있는 ‘뿔나팔 골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