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앞으로는 함께
곧 다리가 세 개 달린 약솥이 눈앞 허공에 떠올랐다. 솥에 새겨진 푸른 자줏빛의 무늬가 마치 살아 있는 듯 춤을 추니 푸른 단향나무의 기운이 느껴졌다. 본래 녹녹의 몸체는 이 약솥이었고, 현재의 벽옥 모양은 봉인된 휴면 상태임을 의미했다.
일반인이라면 약을 조제할 때 영력을 이용해 영화(靈火)를 만든다. 하지만 당염원은 조금 달라서 약력을 통제함으로써 영약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이들을 순서에 맞게 약솥 안에 넣기만 하면 됐다. 그녀가 두 손바닥에 약력을 응집시킨 뒤 약솥을 두드리니 일종의 현묘한 박자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그림자가 약솥 주위를 맴돌았다. 두 손바닥의 움직임은 푸른 물결 같기도, 거센 폭풍우 같기도 했다. 치맛자락은 구름과 안개처럼 휘날렸고, 소맷자락은 부드럽게 일렁였다. 얼음과 눈으로 가득한 연못 위 월경화 아래 그녀는 마치 나풀나풀 춤추는 한 명의 선녀를 연상케 했다. 물에 비친 모습은 일종의 환영 같아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위잉-
그녀의 마지막 손길에 약솥에서 푸른 물결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단약 몇 알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당염원은 기쁨에 겨워 단약들을 품 안에 넣었다. 뒤이어 극심한 피로감과 무력감이 그녀를 뒤덮었다. 당염원은 뒤로 약간 휘청였다. 약솥은 그녀의 약력이 사그라들자 지탱하는 힘을 잃고 사라졌다.
「주인님……, 주인님!」
녹녹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난 괜찮아.”
당염원은 이대로 누워 잠을 자고 싶었다. 그저 당장 메마른 약력과 체력을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땅에 쓰러지기 전에 따뜻하고 포근한 품 안에 안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당염원은 당혹스러움에 두 눈만 깜빡였다. 사릉고홍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 그의 두 눈 속 가득 담긴 애석함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릉고홍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주변 공기도 그와 함께 차게 가라앉았다.
당염원은 상대방의 선의보다 상대방의 분노를 더 잘 포착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피곤해진 몸에 살짝 힘을 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용서를 구했다.
“고홍……. 아아, 고홍…….”
그의 경직된 얼굴이 다시 부드럽게 변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몸에 주었던 힘도 풀고 당염원은 눈앞의 그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곧 사릉고홍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이 한숨에 그는 모든 원망과 화를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원아.”
“네.”
당염원은 정신을 꼭 붙잡고 열심히 대답했다.
사릉고홍의 발밑에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그는 순식간에 당염원을 안고 빙연곡을 벗어났다. 이때 그녀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오에서 반 시진이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약 조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간이 지난 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대는 약속을 어겼소.”
사릉고홍이 말했다.
당염원은 입술을 오므렸다. 동그랗게 뜬 두 눈 속에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언제 왔는지도 몰랐고. 내가 왔다는 것도 몰랐던 거 맞소?”
“그렇습니다.”
사릉고홍의 말투는 더없이 부드러웠으나, 더 이상의 변명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약 조제할 때는 나도 함께하겠소.”
“네……?”
당염원은 말문이 막혔다.
사릉고홍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자신의 의지를 내비쳤다. 뒤이어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이미 내가 있어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소.”
당염원은 아직까지 멍해 있었다. 이마 위에 남은 천마독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원아.”
사릉고홍이 상처받은 듯 물었다.
“내가 함께 있는 것이 그리도 싫소?”
당염원은 반사적으로 입을 뗐다. 하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채웠다. 사릉고홍의 눈동자는 점점 더 적막해졌다. 둘은 곧이어 매림의 침각(寢閣)에 당도했다. 그는 직접 당염원의 신발을 벗겨 준 뒤 그녀를 침상 위에 뉘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당염원의 옆에 누웠다. 사릉고홍은 한 손으로는 당염원을 감싸 안고 힘겹게 입을 뗐다.
“내가 몰래 함께 갔는데도 그대는 전혀 날 발견하지 못했소. 다시는 그대 혼자서 조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오.”
사릉고홍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어두운 그림자 속 깊이 눈동자를 감추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마치 투명하게 맑은 샘물처럼 고요했다. 그 어떤 칼날 같은 말도 이를 끊을 수 없었다. 사릉고홍의 목소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난 그대를 속이고 싶지 않소.”
‘난 그대를 속이고 싶지 않소.’
이 한마디가 당염원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 말은…… 저를 벌하지 않으시겠단 말인가요?”
그녀가 잠시 멍해졌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분명 약속 시간을 어겼으니 벌을 받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한데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함께하겠다는 게 전부였다.
사릉고홍이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염원이 안도하는 기색을 발견하자 그는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벌할 것이오.”
당염원의 눈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릉고홍이 그녀를 안은 채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얌전히 쉬는 것이 나의 벌이오. 몸이 모두 회복될 때까지.”
이게 무슨 벌이란 말인가? 당염원은 두 눈을 깜빡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진실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당염원이 이내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간 겪었던 것 중 가장 가벼운 벌이군요.”
“이제 그만 잡시다.”
사릉고홍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겨울날 따스한 햇볕처럼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가벼워지게 하는 음성이었다.
당염원은 이미 자신의 약력과 체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지금껏 버텨 온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토록 편안한 음성을 들으니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두 눈이 저절로 감기면서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사릉고홍의 품속을 파고들며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품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당염원은 그저 그의 수려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는 것이 좋았다.
사릉고홍은 그녀 옆에 누워 백옥 같은 손가락으로 당염원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다 시시때때로 품 안에 잠든 얼굴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복잡미묘했다.
“원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에워쌌다.
사실 사릉고홍은 두려웠다. 그는 자신의 횡포를 참지 못해 그녀가 자신을 떠나게 될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그는 당염원이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를 자신이 볼 수 없는 먼 곳에 떼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당염원이 조금 전 자신의 결정에 화를 내고, 그를 배척하다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했다면, 자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봐 겁이 났다. 심지어 일종의 마념(魔念)까지 생길까 두려웠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마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조금씩 고개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점점 떨려 오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사릉고홍이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설연산장에서 그와 늘 함께하는 몇몇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장주가 그저 제멋대로에 단순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표정 없는 얼굴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주묘랑처럼 사릉고홍을 어릴 적부터 봐 온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사릉고홍에겐 사실 엄청난 소유욕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물건에는 아무도 손댈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특별한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의 선천적인 성정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그는 반려동물을 키운 적이 있었다. 밥 주는 것, 씻기는 것 모두 사릉고홍의 몫이었고, 그 외의 사람은 만져 볼 수도 없었다. 만졌다가 벌어질 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키웠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독기로 인해 반려동물은 보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후에 다른 동물을 키웠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결국 그는 점점 표정을 잃어갔고, 그의 곁에는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있지 않게 되었다.
* * *
주묘랑이 명을 받고 달려왔을 때, 침상 위에는 두 사람이 껴안은 채 함께 누워 있었다. 잠들어 있는 여인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다웠고, 사내는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장주님.”
사릉고홍은 당염원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당염원의 흰 손목을 받쳐 들자 당염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였다. 그러자 사릉고홍은 부드럽게 당염원의 눈썹을 어루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괜찮소. 더 자도록 하시오.”
그의 손길에 당염원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의 가벼운 미소는 지금 그녀가 얼마나 편안해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주묘랑은 침상 앞으로 바삐 걸어와 당염원의 맥박을 짚어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사릉고홍에게 아뢰었다.
“주모님께선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이십니다. 모든 힘을 소진하시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주묘랑은 부름을 받자마자 당염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걱정한 이유는 당염원에게 사고가 나면 사릉고홍이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이 안 갔기 때문이었다. 사릉고홍이 이 여인을 점점 더 좋아하고 있음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사릉고홍이 이토록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여인은 사릉고홍이 풍기는 독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탕약을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주묘랑은 뒤이어 호기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크흠! 그리하면 더 적절한 탕약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설연산장에서 당염원이 대체 어떤 일로 원력이 쇠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약 조제를 했다.”
사릉고홍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주묘랑의 밝았던 얼굴이 일순간 진지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주모님께서 만드신 단약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당염원이 직접 약을 조제해 유 씨에게 먹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주묘랑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당염원 역시 어찌 됐든 약 조제의 대가인 당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조제 능력이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직접 조제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반 황품약(黃品藥)의 조제는 약의 종류와 투입 순서만 잘 지키면 곧잘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정력을 요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오직 현품(玄品) 이상의 단약만이 정력을 요했다. 이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으며, 현품 이상 강자의 원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약사이기도 했던 주묘랑은 단번에 당염원이 조제한 단약의 종류가 현품 이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너무도 기이한 일이었다. 보통의 황품 단약은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그저 약의 종류를 외운 뒤 약재만 준비되어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현품 이상의 약 조제는 절대적인 능력이 필요했고, 그와 동시에 뛰어난 기술력과 통제력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현품 이상의 약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주묘랑은 당염원이 현품 단약을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에게 충분한 원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묘랑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사릉고홍에게서 직접 당염원이 이렇게 된 이유를 들었으니, 더 이상 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