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만나다

22화. 만나다

또 다른 사람은 왼쪽에 앉은 사람과 나이대가 비슷한 청년으로, 까만 머리칼이 그의 쪽 찐 머리 아래 빛나는 흰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래턱을 살짝 치켜들자 살구씨 모양의 눈동자가 더욱 청명하게 빛났다. 정원 가득 핀 매화가 분위기를 더욱 오묘하게 만들었다.

그는 먹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안으로 은색으로 새긴 꽃무늬가 드러났다. 허리에 맨 비단 허리띠에는 양지옥패(羊脂玉珮)를 매단 은색 수술이 달려있었다. 정자 바깥으로 매화가 피어 있었고 바닥엔 흰 눈이 깔려있었으며, 탁자 위에 놓인 청주에서는 향긋한 향이 풍겨왔다. 가만히 앉아있는 그에게서는 고귀하고 비범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술을 따르는 시원한 소리가 주변을 채우자 당추생(唐秋生)이 놀란 듯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드니 맞은편의 관자초(關子初)가 자신을 위해 술을 따라 주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급히 말했다.

“관형 귀하께서 술을 따르시다니, 제가 어찌…….”

관자초는 손을 내저으며 술잔에 마저 술을 가득 따르고 말했다.

“호형호제하기로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귀하라고 부르느냐.”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며 웃었다.

“어렵사리 이곳 한매주거로 왔는데, 추생 너는 어찌 그리도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게냐. 이 아름다운 풍경과 술이 아깝군!”

“전…….”

당추생은 자신의 술잔을 들어 관자초와 잔을 맞부딪힌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괴로운 듯 말했다.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이번 일은…….”

관자초가 미소 지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계속 고민해 봤자 헛수고야. 차라리 마음을 놓아야 더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

그의 따뜻한 말투와 침착한 표정은 다른 이를 위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추생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저도 관형처럼 생각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요.”

동시에 당추생은 직접 관자초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매주거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과 함께 불어온 거센 바람에 매화 꽃잎이 춤을 추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당추생이 고개를 들고 소란이 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요마차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흩날리는 연분홍 매화 꽃잎 사이로 보이는 금색 날개의 짐승은 마치 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건?”

“설연산장의 백요마차다. 역시 기개가 엄청나군.”

당추생이 의아하게 관자초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어리둥절한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게 그 설연산장의 백요마차란 말씀입니까?!”

관자초는 웃으며 침착하게 답했다.

“네 마리의 백요수가 끄는 설연산장의 백요마차는 백문빙옥(白雯冰玉)으로 만들어졌지. 그건 세상의 그 누구도 모방해 내지 못해. 오로지 설연산장의 장주만이 마차에 탈 수 있다. 추생아, 구태여 설연산장의 입구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구나. 장주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당추생의 눈이 밝아졌다. 그는 이내 크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관형, 저는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그동안 모습조차 보이지 않던 설연장주가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것인지 나가서 봐야겠다. 같이 가자꾸나.”

관자초가 웃으며 함께 몸을 일으켰다. 옷자락을 매만지는 그의 행동에는 우아함과 고귀함이 깃들어 있었다.

“관형께서 함께 가신다니 저는 더욱 좋지요.”

당추생이 신이 난 듯 말했다.

둘은 천천히 백요마차가 착지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관자초는 함께 걸어가는 동안 뒷일은 생각지 않고 눈앞의 일만 바라보는 당추생의 태도에 대하여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 * *

한매주거의 문 앞 매화 정원에 백요수가 소리 없이 내려와 날개를 접었다. 금색의 매서운 눈동자가 주변에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것은 이내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더니 더는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주묘랑이 마부의 자리에서 뛰어 내려오더니 마차 안에 대고 낮게 말했다.

“장주님, 주모님, 한매주거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요마차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사람들은 가장 먼저 순백색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소맷자락을 보았다. 그러자 구름 같고, 안개 같은 속세의 먼지가 마음속에 와 닿았다. 더 자세히 바라보려 할수록 눈처럼 맑고 몽롱한 눈동자에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굉장히 놀랐다. 그들은 자신의 원력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위압감에 반항하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다.

사릉고홍은 품 안에 그녀를 안은 채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러나 그 어떤 걸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품속에 있던 사람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깨어난 것이 아니라 정원 가득한 매화향에 눈이 뜨인 것이다. 당염원은 눈을 반쯤 감고 군침을 흘렸다.

“이 냄새는……!”

사릉고홍이 고개를 숙여 당염원을 보더니 웃었다. 그녀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진 않았음을 눈치채고 그녀를 안아 한매주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묘랑은 뒤편에서 이들을 따르며 몰래 미소 지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이경 등의 나머지 사람들이 이미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사릉귀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묘랑은 생각했다.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만…… 갑자기 어딜 간 거지?’

곧 나머지 일행들도 사릉고홍을 뒤따라 한매주거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에 올라서자 맞은편에서 별안간 흰 그림자가 나타나 사릉고홍의 길을 막아섰다.

“멈춰……!”

하지만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에 의해 공격받은 듯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치다가 땅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 입에서는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재빨리 소매 안에서 옥병을 꺼내 그 안에 든 단약 하나를 입에 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 사람은 비록 아름다운 미남의 용모는 아니었으나 정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바로 설연산장의 장주를 찾으러 온 당추생이었다.

당추생의 눈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사릉고홍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다가 입을 뗐다.

“이렇게 남을 공격하는 게 무슨 군자란 말이냐!”

주묘랑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이 사람은 솔직한 것일까, 아님 멍청한 것일까?

“응?”

당염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사릉고홍은 차가운 눈으로 당추생을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당염원의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당추생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치 꽁꽁 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의 기운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고, 당추생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졌다.

“관…… 관형?”

당추생의 얼굴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히 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자가 관자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관자초는 그가 일어나는 것을 부축해 돕더니 다리 위 맞은편에 있는 사릉고홍에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관자초라고 하오. 그리고 이자는 당가의 소주 당추생이고. 설연산장의 장주를 뵙소이다.”

사릉고홍이 약간 갸우뚱하며 죽다 살아난 당추생을 바라보았다.

“당가의 소주(少主)?”

그리고 이어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림의 그 당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약간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관자초와 당추생은 이 소리가 사릉고홍의 품속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이 눈을 다시 똑바로 떴다. 당염원이 머리를 내밀고 몽롱한 눈빛으로 낮게 하품을 하며 두 사람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했고, 두 눈에는 물기가 몽롱하게 어려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은 푸른 노을을 닮아 있었고 엷은 유리처럼 고요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어수룩한 모양이었다.

관자초의 눈이 멈칫했다. 심장에서 마치 큰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일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원이?!”

놀란 당추생이 황급히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갔다.

“괜찮은 게냐?! 별일 없으면 되었다, 그거면 됐어.”

그러다 당염원이 사릉고홍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깨닫고는 어두운 얼굴빛을 했고,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기 시작했다.

“이런 대낮에 보는 눈도 많은데 안겨 있으면 체통이 설 수 있겠니. 원아, 내려와서 얘기해야지!”

뒤편에 서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주묘랑은 생각했다.

‘당가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독특한가? 주모님의 성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당가의 소주가 어쩜 이리도 일품의 성정을 가졌을까.’

당염원은 눈만 깜빡였다. 그녀는 사릉고홍의 품이 조금 꽉 조이는 것을 느끼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릉고홍의 한 수에도 미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할 만큼 당염원은 멍청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신이 상림당가의 소주이신가요?”

당염원의 시선이 당추생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당추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원아, 설마 이 큰오라비를 못 알아보는 게냐!”

당염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수람을 보았다.

수람이 당염원의 뜻을 알아채고 앞으로 나와 옆에 서서 읊조렸다.

“아가씨, 이분은 큰오라버니가 맞습니다. 당가의 돌아가신 대부인(大夫人)의 소생으로, 당가의 적장자이십니다. 여섯 살 때부터 둘째 부인의 밑에서 자라났고, 올해 들어 타지를 돌아다니셨지요.”

수람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는 원력을 지니고 있는 당추생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당추생이 다급하게 외쳤다.

“원아, 무슨 일이냐? 이 사람이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러는 거야! 나에게 말하면 내가 반드시 널 도와주마!”

주묘랑은 할 말이 없었다.

당염원이 말했다.

“당신은 고홍을 이길 수 없어요.”

그 말에 당추생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이내 그는 원망스럽게 소리쳤다.

“어찌 오라비의 체면을 깎으면서까지 저자의 편을 드는 것이냐!”

“당신의 체면은 돌이킬 수 없어요.”

당염원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거짓됨이 없었다. 당추생이 피를 토하려고 함에도 당염원은 아무렇지 않게 수람에게 되물었다.

“당교지와 유 씨 모두 외모가 빼어났는데, 이자는 그렇지가 않네. 정녕 당가네 본처의 맏아들이 맞니?”

표정에는 아무런 미동이 없는 것이 농담의 기색이나 장난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람은 얼굴이 붉어진 큰도련님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동정의 눈물을 삼키면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염원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가에서 매우 열등한 사람이구나.”

“크헉!”

당추생이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면서 비틀거렸다.

관자초는 때맞춰 그를 부축하여 당추생이 다시금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도왔다. 그의 눈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당염원을 바라보았다. 당염원은 마치 이 사람이 왜 피를 토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당추생을 보고 있었다. 관자초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도를 터득했다. 그는 당염원이 조금도 거짓됨 없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고, 얼굴 위로 떠오르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