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침향(沈香)
육 씨는 제완과 함께 경전 낭송을 끝까지 들은 다음, 주지 스님에게 평안수 한 병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본당 밖에서 향을 올리고 있던 유 부인과 다시 마주쳤다.
“제 부인, 아까는 참으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李) 부인 자매 두 분께서는 두 달 전쯤 금주성으로 이주해 오신 참이라, 저와 그 두 부인은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오늘 두 분께서 하셨던 말은 부인께 큰 결례였습니다. 부디 부인께서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 부인은 이 부인 자매 때문에 혹여라도 육 씨와 소원해질까 염려되어, 그녀를 보자마자 다급히 웃으며 달려와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저와 부인이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제가 어찌 부인을 모르겠습니까?”
육 씨는 짐짓 서운한 듯한 눈빛으로 유 부인을 가볍게 쳐다보았다.
“무료하실 때 저희 집에 한번 들러주세요. 부인과 얘기를 나눈 지도 참으로 오래되었네요.”
유 부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번에 화답했다.
제완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유 부인을 쳐다보았다. 금주성에는 육 씨와 친한 벗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제완은 어렴풋이 유 부인을 기억해냈는데, 이전 생에서 육 씨가 세상을 떠난 후,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 제가 듣자 하니, 금주성에 정말 실력이 출중한 의원이 있다고 해요. 그분께 내일 집에 와 어머니의 진맥을 봐 달라 청해 두었습니다.”
제완이 육 씨의 손을 살며시 당기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를 들은 육 씨는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다. 어떤 의술적 치료를 받아도 그녀의 건강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완의 효심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저 방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일 의원님을 오시라 해 다오.”
제완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육 씨와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산 입구를 나섰다.
* * *
마차를 세워 둔 공터로 향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누군가가 마구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망할 것아, 네가 뭐라도 된다 여기는 것이냐? 비천한 노비 주제에 아양 떠는 법은 또 어디서 배운 것이야? 염치없고 배은망덕한 계집 같으니라고.”
아주 앙칼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은, 젊은 낭자인 것 같았다.
“내가 널 좀 매질해야겠다. 그것도 아주 호되게 때려줘야겠어. 이 뻔뻔스럽고도 요사한 년을 때려죽여야만 내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때려도 안 죽으면 그냥 아주 저…… 저기다가 팔아버릴 테다.”
버릇없고 패악스럽기 그지없는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한가득 녹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 들입다 욕을 쏟아붓고 있는 장소가 어딘지 전혀 살피지 않는 듯했다.
한 집안의 고낭일 법한 이가, 사람들이 다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저렇게 시녀를 때리고 욕하다니. 이곳이 어딘지를 신경 쓰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녀 스스로 민망해 마지않을 상황이었다.
서향세가(*书香世家: 학자풍의 세가) 출신인 육 씨는 저렇게 하인에게 손찌검하고 욕설을 퍼붓는 모습을 매우 눈에 거슬려했다. 저속한 말을 쏟아내는 낭자의 목소리는 전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어서, 육 씨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제완 일행이 수십 대의 마차들이 가지런히 서 있는 공터에 가까워지자, 산뜻하고 어여쁜 색의 옷을 입은 시녀들 몇 명이 서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녀들 한가운데에는 화초가 수놓아진 짙은 자줏빛의 짧은 윗옷과, 흰색 주름치마를 입은 낭자가 서 있었다. 대략 열세 살에서 열네 살 정도로,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듯하였는데, 얼굴 모양이 약간 둥글고 여려 귀여운 생김새였다.
다만 그 어리고 생기 넘치는 그녀의 매력은 손에 들린 기다란 채찍에 의해 반감되고 있었다.
자색 옷의 어린 낭자 앞에는 송화색 베옷을 입은 시녀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비록 시녀라고는 하지만 외모가 너무나도 아리따웠다. 갸름한 달걀형 얼굴에 큼지막한 눈, 오밀조밀한 입술이 오히려 주인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일순 호기심이 인 제완은 시녀를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녀는 주인이 그렇게 욕을 퍼붓는데도 단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
‘제법 기개를 지닌 시녀 같은데, 왜 저 낭자는 아양을 떤다는 말 같은 걸 하는 거지?’
사실 제완 일행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게 된 것은, 괜한 참견을 좋아해 일부러 그곳까지 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자색 옷을 입은 낭자가 시녀를 훈계하고 있는 위치가 바로 그녀들이 타고 온 마차 바로 옆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완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몇 번 눈길을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완의 시선을 눈치챈 모양인지, 자색 옷의 낭자는 씩씩대며 제완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제완이 자신보다 더 어여쁘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낯빛에 불쾌감이 한층 더해지고 말았다.
그 낭자는 분풀이라도 하듯, 일말의 자비도 없이 시녀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조(趙) 오라버니께서 널 몇 마디 칭찬했다고 해서 네가 갑자기 뭐라도 된 것 같더냐?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
시녀는 아픔을 꾹 참으며, 용서를 비는 비굴한 말 한마디 없이, 또 그렇다고 해서 거만한 것도 아닌 말투로 답했다.
“이고낭(二姑娘), 소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그래도 말대꾸를 하네!”
자색 옷의 낭자가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한번 채찍을 내리쳤다.
육 씨와 제완은 막 마차 옆에 다다랐는데, 마차 바로 옆에서 마구잡이로 손찌검을 해대는 낭자에게 아주 호되게 맞고 있는 그 시녀를 보며, 절로 동정심이 일었다.
시녀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견디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소인은 스스로 분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고요. 고낭께서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만 듣고 소인의 생각이 옳지 않다 단정해 버리시니, 소인,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주 기개가 넘치는 사람이네!’
제완은 시녀가 한 말을 듣자, 그녀에 대한 호감이 불쑥 생겨났다. 그래서 그녀는 육 씨가 마차에 오르도록 도와준 뒤에도 그 옆에 가만히 서서 자세히 시녀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시선이 시녀의 귓불 아래쪽에 있는 세 개의 붉은 반점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여인인 건가?’
“뭘 봐요!”
자색 옷의 낭자가 한껏 화난 목소리로 제완을 향해 소리쳤다.
“이고낭!”
그러자 그녀의 곁에 있던 한 나이 지긋한 시녀가 황급히 그녀를 막아 세운 뒤, 귓가에 뭐라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녀는 크게 당황하여 제완의 뒤에 있는 마차로 시선을 옮겼고,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고낭, 부인께서 마차에 오르시라 이르십니다.”
영하가 속삭였으나, 제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 시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쪽 뺨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도 연이은 세 개의 붉은 반점이 있었다.
‘역시 그 여인이 맞네!’
속으로 반색한 제완은 고개를 돌려 자색 옷의 낭자를 쳐다보고 말했다.
“고낭, 이 시녀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으시다면, 저에게 파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완의 말을 들은 자색 옷의 낭자는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옆에 있던 시녀도 대번에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채찍을 휘두르려 했지만, 옆에 있던 시녀가 빠르게 제지하며 귓속말을 했다.
“이고낭, 이분은 경도에서 오신 제가의 낭자이니, 절대 불화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이 년은 왜 데려가려 하시는 것입니까?”
자색 옷의 낭자는 자신을 잡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상당히 언짢다는 듯 제완을 노려보았다. 고귀한 신분의 제완이 알랑방귀만 뀔 줄 아는 이 계집을 대체 왜 사가려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이에 제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인연이 있어 보여 그렇습니다. 이곳은 본디 불도들의 성지로,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오는 곳입니다. 그러니 괜히 시녀 한 명 때문에 기분이 상할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여기를 오가는 참배자들은 대다수가 지체 높으신 분들인데, 굳이 시녀 하나 때문에 스스로 명성에 흠을 낼 필요도 없지요.”
자색 옷의 낭자는 시녀와 제완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본래 이 천한 노비를 어딘가로 팔아버릴 작정이었는데, 제완이 마음에 들었다 하니 차라리 인정을 베푸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자께서 이 노비가 마음에 드신다면 데리고 가시지요.”
“그렇다면, 노비 매매 문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제완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눈앞의 이 낭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금주성의 어느 대부호 집 자제가 틀림없지 싶었다.
이렇듯 오만방자하게 굴면서도 시녀를 팔겠다며 인정을 베푸는 건, 자기의 신분을 고려한 행동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굳이 힘들게 입씨름을 할 필요가 없는 셈이니 제완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잠시 뒤 아랫것을 시켜 댁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지요.”
자색 옷의 낭자는 입을 삐쭉이며 말하고는 채찍을 든 손으로 시녀를 가리켰다.
“이 천한 것아, 오늘 너 아주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앞으로는 그런 파렴치한 수법일랑 더는 부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제완을 힐끗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아주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시녀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이 주인에서 저 주인으로 바뀌는 것뿐이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그녀는 여전히 변함없는 노비였다.
“일어나거라. 이름이 무엇이냐?”
제완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고낭께 아뢰옵니다. 소인, 추국(秋菊)이라 하옵니다.”
추국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는데, 이미 상처의 고통으로 이마에 땀이 한가득 맺힌 상태였다.
제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금 물었다.
“원래 이름은 무엇이지?”
“침향(沈香)입니다.”
추국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또 다른 이름 하나를 뱉었다. 이는 그녀가 노비가 되기 이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맞아, 이 이름이야!’
제완은 씩 웃었다.
“앞으로는 침향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영하야, 침향을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해 주고, 돌아가면 의원을 좀 불러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