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과거의 일
“천명을 받드신 황제 폐하의 명이오. 호부상서(戶部尙書) 제정광(齊正匡)은 반역의 무리와 결탁하여 황위 찬탈을 꾀한바, 천하를 어지럽히는 대죄인이자, 대역무도한…….”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고, 제가(齊家)의 저택 구석구석을 찢어놓을 듯이 울려 퍼졌다.
제가 일가(一家)의 재산을 몰수하고 참형에 처하라!
이 교서는 마치 천 년간 잠잠했던 우물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 듯 연이어 파란을 일으키며, 근 몇 년을 내리 평화롭기만 했던 경도(京都)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제가는 대대에 걸친 공신 가문으로, 주(周) 왕조에 변함없이 충심을 다해왔다. 전력을 다해 모셨던 태자가 끝내 즉위하지는 못했으나, 새로운 황제에게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조정이 안정되고,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제씨 가문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들의 참수형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진행되었다…….
하늘가가 어슴푸레해지고, 살을 에듯 차가운 바람이 쌩하니 불어 닥치고 있었다. 오늘 경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떠들썩하던 저잣거리는 어쩐 일인지 인적도 없이 고요했다. 그야말로 경도 전체에 무거운 공기가 아주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형장 밖에는 적지 않은 백성들이 형 집행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인파 속, 화려한 가죽 치마를 입고 흰색 여우 모피 피풍을 걸친 젊은 여인이 특히나 눈에 띄었다.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혹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의 눈동자에는 증오가 가득 서려 있었고, 차디찬 눈빛은 사형대 위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염오(厭惡)해 마지않는 원수가 형장에 오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도, 왜 그녀는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쓰라린 것일까? 드디어 그녀와 어머니의 복수를 하게 된 셈인데, 왜 복수 뒤의 희열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걸까?
쇠고랑에 꼼짝없이 묶여 있는 범인들은 계속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사나운 얼굴을 한 망나니들을 지켜보던 제완(齊莞)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스산함이 배어 있는 이곳 형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베거라!”
그 소리에 사형대 위에 있던 제정광이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은 모자에 드리운 면사에 가려진 제완의 얼굴로 향했다. 순간 그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친아버지를 모해하고, 가문을 배반한 역적의 딸자식이 저렇듯 죽지 않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구나!”
이에 제완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으나 하마터면 눈물이 가득 차올라 울컥 쏟아낼 뻔했다.
망나니가 제정광의 오른쪽 뒤에서부터 걸어와서는 먼저 왼손바닥으로 가볍게 그의 목을 쳤고, 제정광이 부들부들 떠는 그 찰나에 그의 머리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제가의 여든세 명이 단 하루 만에 모두 망령이 되었다.
이는 제가가 그녀에게 졌던 빚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해 온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으니 그녀는 응당 기뻐야만 했으며, 반드시 기뻐해 마지않아야 했다!
눈꽃들이 들어찬 땅 위에 흩뿌려진 뜨거운 핏물은 유독 새빨갰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머리들 역시 그만큼이나 섬뜩했다.
제완은 방향을 틀어 형장에서 벗어나 길가에 세워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돌아가자!”
* * *
저택에 도착해 안뜰로 통하는 중문(中門)을 들어서자마자 중앙 정원에서부터 갑자기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한 어린 시녀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마구 떨어댔다.
“이낭, 도…… 돌아오셨습니까? 후야(侯爺)와 부인께서 대청에서 이낭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제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앙 정원에 있는 대청을 향해 나아갔다.
보아하니, 두 사람은 이미 제가가 멸문지화를 당한 이유가 모두 그녀 때문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고급 진주가 상감된 신을 신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던 그녀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과거의 일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스쳐 갔다. 그러자 마음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켰고, 그 아픔에 숨을 쉬는 것조차 점점 힘들어졌다.
그녀는 경도의 명망 높은 제씨 가문의 적장녀로, 태생이 고귀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정이 너그럽고도 순한 명문가 출신의 여인이었으며, 타고나길 현숙하고 온화하며 선량한 성품을 가진 규수였다.
어머니는 제완을 낳은 후 몸이 크게 허약해졌지만, 부친의 첩이 낳은 서자들을 모두 어머니의 이름 아래에 넣어주었다. 제가의 첩이나 하인들은 물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어머니를 공경해 마지않았으며, 감히 단 한 번도 방자하게 굴지 않았었다.
제완은 이렇게 화목한 나날들이 아주 오래오래 이어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 여인이 나타난 이후 변하기 시작했다…….
만약 어머니가 양군유(陽君柔)라는 사람을 구해주시지만 않았어도, 그 여자는 제정광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가 없었을 테고, 어머니도 살해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양군유는 그녀의 새어머니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제여(齊茹)가 그녀 대신 안원후 세자(安遠侯 世子)와 혼례를 치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복수를 위해 일부러 세자를 꾀어 그녀 스스로 첩이 되는 억울한 일을 자처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이 일로 그녀의 외조부는 노기가 탱천해 그녀와 왕래를 완전히 끊었었다.
매정하기 짝이 없는 제정광은 어머니를 절망에 빠지게 했고, 배은망덕한 양군유는 어머니를 살해했으며, 제여는 그녀의 복중 태아를 해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모욕을 참아가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건, 바로 그 한 명 한 명의 처절한 최후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모든 원한을 갚은 지금, 응당 한바탕 큰 웃음이 터져 나와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제완 언니!”
이내 분노가 가득 서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완의 생각을 끊었고, 제완은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지불식간에 이미 정원의 대청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호화스러운 옷을 입은 한 부인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에 죄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제완의 뺨을 세차게 내리갈겼다.
“어디 더 때리기만 해 봐!”
제완이 부인의 손을 꽉 붙잡고는 서릿발 선 눈으로 쳐다봤다.
부인은 제완의 여동생이자, 양군유의 이름 아래에 적녀로 들어가 있는 제가의 둘째 딸 제여였다. 현재는 안원후 부인인 그녀는 한껏 험악한 얼굴로 제완을 노려보았다.
“제완 언니. 정말 잔인하다. 혹시 언니도 성이 똑같은 제씨인 제가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린 거야? 그분은 언니 아버지라고. 자기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벌이고도 언니가 사람이야?”
“아버지? 나한테 아버지가 있었나?”
양군유가 제완에게 큰 병이 있어 세자와 혼인을 맺을 수 없다고 말하며 대신에 제여를 시집보내자고 했을 때 제정광은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 그때, 그녀는 아버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녀의 아이는 제모습을 다 갖추기도 전에 제여의 손에 스러져 갔었지만, 아버지인 제정광은 도리어 그녀가 규율을 모른다며 책망했었다. 본처인 제여보다 앞서서 그녀가 회임한 순간, 그녀는 동시에 부친을 완전히 잃은 셈이었다.
“제가의 그 수많은 사람을 언니가 다 죽였으니, 언니의 말로도 무사평온하진 못할 거야.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아무리 증오한다 해도, 무고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 됐어. 언니는…… 언니는 정말이지 독사가 품은 독보다도 더 무서운 여자야. 정말 사람도 아니라고!”
제여는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래, 나는 사람이 아니다!’
제정광이 이전 태자와 결탁해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는 증거를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던 바로 그때, 그녀는 인간의 본성을 모두 내버린 채 오로지 복수만을 생각했더랬다!
“완아, 정말로 네가 그런 것이야?”
제여의 뒤에 덕과 재능을 겸비한 듯한 준수한 용모의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줄곧 가슴 아픈 얼굴을 한 채 실망한 듯 제완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맞아요!”
제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은 더욱 격렬해졌다.
눈앞의 사내는…… 원래 그녀의 낭군이 됐어야만 했다. 양군유와 제여가 없었다면 제완과 그는 서로 은애하는 화목한 부부가 됐을 텐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이 사내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대해주었지만, 그녀는 그만을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한 번, 또 한 번 제여와 그 사람들을 향한 복수에 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실망스럽구나.”
심장을 찌르는 아픔을 애써 억누르는 안원후의 눈빛에는 그가 받은 깊은 상처가 녹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제완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전 제게 빚을 진 사람들에게 꼭 갚아줘야 직성이 풀려서요.”
“네 가슴 속에 원망이 가득하다는 이유로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죽이다니. 넌 정말 이것이 복수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안원후는 제완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그녀는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연루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그저 제정광과 양군유가 받아 마땅한 벌을 받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 두 사람이 실제로 죽게 될 줄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가속들이 전부 연루되는 것 역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제가는 대대로 공신 가문이기에, 지위를 고려하여 기껏해야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그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그녀는 안원후를 마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생각해요!”
이에 안원후가 순식간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손바닥은 제완의 뺨을 그대로 내려치기 일보 직전에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가만히 든 채, 너무나도 가슴 아픈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장 꺼지거라! 이제 너는 더이상 나의 여인이 아니다. 꺼져버리란 말이다…….”
제완은 입술을 꾹 깨물고 깊은 눈빛으로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한 뒤 곧장 방향을 틀어 매우 단호한 발걸음으로 주저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완아, 네가 그리한 것은 네가 증오했던 사람들이 네게 한 짓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안원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고요히 전해져 왔다.
‘뭐가 다르냐고? 그딴 거 없어! 다른 거 하나 없다고. 난 그들과 똑같이 배은망덕했고, 똑같이 악독했고, 또 똑같이 난…… 모두가 원망하는 그런 여자가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