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목적
“표형(*表兄: 사촌 형), 아는 분이야?”
두 사람 가까이 다가온 조언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년을 쳐다봤다.
‘표형?’
제완은 저도 모르게 조언옥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러면, 조 부인이 이 도적의 고모라는 말이야?’
“제 성은 관(關)이고, 이름은 외자 랑(朗)이에요. 낭자, 그날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관랑은 조언옥의 질문에는 아무 대답 없이 대뜸 자기소개를 한 뒤, 제완을 향해 읍했다. 제완은 다급히 옆으로 몸을 피하며 그의 행동이 퍽 난처한 듯 말했다.
“관 공자, 저는 공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제가 무슨 도움을 드렸다는 말씀이신지요. 당치 않으십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잠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보던 관랑은 곧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죠, 낭자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제 사의는 마음에 잘 담아두면 되겠네요.”
“낭자께서 혹 그 제가의 고낭입니까?”
관랑의 말을 들은 조언옥은 다 이해가 된 듯, 마치 심문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차가운 칼날 같은 눈빛으로 제완을 쏘아보았다.
조언옥의 눈빛에 제완은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하고 소탈하기 그지없던 공자가 별안간에 그녀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온몸에서부터 냉랭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렇다면요?”
제완은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전생에서도 조언옥을 몇 차례나 만났기에 그리 쉽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조언옥은 그녀를 향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께 접근한 목적이 뭡니까?”
‘아니, 내가 조 부인께 접근한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어?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달라 부탁드린 것 말고 설마 내게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인가?’
제완은 우스운 듯 피식 웃으며 조언옥을 쳐다봤고,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다소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조 공자의 질문이 참으로 이상하군요. 제 목적은 너무나도 또렷한데, 설마 그걸 알아채지 못하신 건가요?”
관랑이 팔로 냉큼 조언옥을 밀어냈다.
“고모님께선 제 부인의 병을 치료해드리시는 거잖아? 제 낭자께서 고모님과 친밀히 지내신 건 그 이유 때문이고.”
관랑의 말을 들은 조언옥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제완을 한차례 쳐다보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공수하며 말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제완은 조언옥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괜한 질문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어떤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조 부인에게 접근한 건 사실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제가의 적녀 신분인 제완이 굳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조 부인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사숙정이나 다른 여인들처럼 조언옥을 연모하는 마음이 있어 그랬다 한다면……. 조 부인에게 접근한 목적은 따로 있다는 얘기가 그 뜻일 수 있었다.
‘근데 조언옥이 이런 식으로 날 오해했다? 그건 아닐거야! 내가 알고 있는 조언옥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여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야. 이런 말을 할 리가 절대 없다고. 그렇다면,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거지?’
“제 낭자…….”
무슨 다른 할 말이 있는지 관랑이 그녀를 향해 헤벌쭉 웃어 보였다.
그러나 제완은 평온한 얼굴로 조언옥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인 뒤, 관랑의 이어지는 말을 끊으며 입을 뗐다.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어 저는 다시 돌아가 봐야 할 듯합니다. 관 공자, 조 공자, 안녕히 계십시오.”
관랑이 뭐라 입을 뻥긋하기도 전에 제완은 자갈이 깔린 오솔길에 발을 들였고, 고개도 한 번 돌리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관랑은 퍽 언짢은 표정으로 조언옥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넌 말이야, 평소에 늘상 그렇게 죽일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뭐 그렇다 쳐. 다른 집 고낭들한테도 꼭 그렇게 해야 하겠냐? 봐봐, 제 낭자가 놀라서 도망갔잖아. 넌 의심이 너무 많아. 나이 어린 낭자가 뭘 그렇게 속으로 셈을 하겠냐고.”
조언옥은 좁고 긴 눈동자로 별달리 해명할 말이 없다는 기색을 내비쳤고, 곧 그의 준수한 얼굴에 약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표형, 형은 정말 여색을 좋아해.”
“난 그저 제 낭자를 대신해 불만을 토로했을 뿐이야. 처음 만난 사람을 이렇게 대하다니, 양심에 찔리지도 않냐? 대장부의 면모라고는 요만큼도 없어가지고. 만약에 고모님께서 너 이런 거 아시면…….”
관랑은 쉴 새 없이 재잘재잘 조언옥에게 훈계했고, 조언옥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발걸음을 돌리고는 서재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너 거기 서! 나 아직 말하고 있잖아!”
관랑이 소리쳤다.
그때, 아직 얼마 멀리 가지 못했던 제완은 뒤에서 들려오는 관랑의 외침 소리에 일순 표정이 굳어지며 소매 속에 있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꾹 오므린 채로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비록 제완의 곁에 오랜 시간 있었던 건 아니지만, 침향은 이미 주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고낭…….”
하지만 제완은 아무 말 없이 홀로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다.
‘조언옥이 나한테 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서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제완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조언옥이 했던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해야 해.”
이에 침향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고낭.”
* * *
제완은 죽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곁채로 향했고, 조 부인과 다른 부인들은 벌써 상의를 끝마친 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숙정 일행도 모두 돌아왔다.
이곳에 반나절 이상을 앉아 있었던 탓에 몸이 적잖이 고단해진 육 씨는, 제완이 돌아온 것을 발견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인사했다.
이에 그녀의 몸 상태를 잘 아는 조 부인은 더 남아있길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육 씨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뒤이어 한 사람 한 사람 조 부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 * *
행선일은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아주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요 며칠 간의 사교 자리를 통해 제가의 모녀는 차츰 금주성 귀부인들의 모임 안에 녹아 들어갔다. 게다가 모두가 이 두 모녀와 친교를 맺길 갈망하는 탓에 최근 제가에는 왕래하는 손님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중에도 여남후부(汝南侯府)의 부인과 유 부인이 가장 빈번히 방문했다. 오 부인이 육 씨를 찾는 것은 오로지 경도에 있는 제가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유 부인은 육 씨와 말이 잘 통하기도 하거니와 조 부인이 육 씨의 병을 치료해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주 병문안을 오는 것이었다.
사숙정과 오영도 자주 오는 손님들로, 이 두 사람은 꼭 제완을 자신의 편에 두려고 경쟁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제완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사숙정 이었다.
하지만 제완은 두 빈객을 완전히 똑같이 대했으며, 단 한 번도 누가 더 자신과 잘 맞는다, 어떻다 표현한 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들을 문밖에서부터 거절하는 게 최고라 몇 차례 핑계를 대기도 했지만, 그 핑계를 계속해서 반복해 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 달 가까이 이런 일이 이어지자, 그녀는 이제 두 사람이 너무나도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남후 세자인 오영의 오라버니가 지난번 성문 앞에서 조언옥을 막아선 뒤에 그와 대판 싸움까지 벌였던 일은 이미 누군가가 고의로 소문을 퍼트린 후였다. 사숙정은 오영의 약점을 잡기라도 한 듯 만날 때마다 이에 관한 말들로 오영의 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다.
오영은 본디 조언옥의 주의를 끌고 싶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자신의 계획을 다 휘저어 놓는 바람에 조언옥이 이젠 그들 오가에 대해 호감을 느끼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부터도 마음이 너무나 괴로운데, 사숙정이 자꾸만 아픈 자리를 후벼 파니, 그녀에게 이가 갈릴 정도의 증오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숙정이 감히 오영을 이렇게까지 조롱할 수 있는 건 이유가 있었다. 제완에게 시녀를 선물해줬던 그 일로 그녀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보고 있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영이 지금 이 모든 걸 참고 있는 것은, 제완이 사숙정을 과연 어디까지 감싸줄지를 우선 잠자코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생각을 제완이 어찌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그녀는 그저 단순히 이 둘을 상대하기 싫을 뿐이었다. 매일매일 제완의 생각은 전부 육 씨의 건강에 가 있었다.
며칠 동안 육 씨의 몸이 점점 더 좋아지면서 마음도 하루하루 가뿐해졌다. 그러자 제완의 마음속에 기이한 생각 하나가 싹 텄는데, 자신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줄곧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또 그동안 그녀가 궁금해하던 다른 일에 관해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바로 조언옥이 왜 갑자기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느냐는 것에 대한 답이었다.
조언옥이라는 사람의 됨됨이로 보아 꼭 원인이 있는 일이 아니고는 쉽게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도 자문해보았지만, 금주성에 온 이후 자발적으로 조 부인에게 접근한 것 말고는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살 만한 일은 딱히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육 씨의 지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는 아주 명백한 목적을 처음부터 가감 없이 드러냈는데도, 그녀에 대한 조언옥의 의심은 대체 어디서 왔던 것일까?
만약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제정광이 금주성에 오려는 목적과 똑같은 것이었다.
전생에서 조언옥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황제의 크나큰 총애를 받게 되었었고, 제정광은 줄곧 그런 그를 태자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언옥은 그 어떤 무리에도 들지 않은 채 혈혈단신처럼 암암리에 사황자와 왕래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마지막에는 육황자의 제위 등극을 도왔다.
제정광이 금주성에 오는 것은 육 씨 때문이 아닌, 바로 태자를 대신해 직분을 행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그리고 조언옥은 이미 이러한 소문을 들었기에 그날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완아, 완아?”
조 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육 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딸아이를 보다가, 참다못해 그녀를 몇 차례 불렀다.
“무얼 그리 생각하고 있느냐?”
그제야 사색에서 현실로 돌아온 제완이 육 씨에게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언제쯤 금주성에 오시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정광이 이곳에 도착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에 아연해진 육 씨가 웃어 보였다.
“이제 금방일 것이다.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오시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