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추측
“어머님, 저는 누님이랑 같이 있고 싶습니다.”
제서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육 씨를 쳐다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애원했고, 육 씨는 제서의 조그만 머리를 어루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며칠을 내리 마차에 앉아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으냐? 우선은 들어가 쉬도록 하거라. 그러고 나면 이젠 매일매일 누님이랑 함께 있을 수 있단다.”
제완은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남동생이 기억 속에서와 똑같이 자신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자, 그만 마음이 동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니면 서를 제 처소에 데려가서 쉬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추 이낭이 다급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씀이십니다. 고낭께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제완의 말에 제서는 아주 신나 하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좋아요, 좋아. 누님, 나랑 같이 있어요.”
“고작 오늘 하루뿐이니 폐를 끼친다고 할 것도 없지.”
제완이 담담히 답했다.
제완은 추 이낭을 전혀 싫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그러면서 제완은 사람의 마음이란 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 육 씨가 세상을 떠나신 뒤, 추 이낭은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며칠을 내리 울었고, 그 이후 자신에 대한 태도 역시도 전혀 돌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양군유는 추 이낭을 전혀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완은 육 씨와 같은 남자를 공유한 여자를 마음속에서부터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제완은 아버지가 추 이낭의 방에 들었을 당시, 육 씨가 남모르게 밤새 눈물을 훔쳤다는 걸 알기 때문에, 첩실이라 하면 그 누구에게든 반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특히나 양군유, 그리고 제여의 생모인 연(連) 이낭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연 이낭은 제정광이 아직 혼례를 치르기 이전부터 집에서 그의 시중을 들던 통방 시녀였다.
추 이낭은 결국 제완의 말을 따랐다.
육 씨는 제완에게 제서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라 분부하고는 제정광을 따라 함께 안채로 들어섰다.
제서의 손을 잡은 채로 제정광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제완의 눈가에서 차츰 웃음기가 옅어졌다. 그러나 현재 그녀가 마음속에 강렬히 이는 증오심을 얼마나 강하게 억누르며 참고 또 참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예전엔 온화하고도 상냥한 아버지에게 마음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원한 섞인 마음을 누르며, 당장 그에 맞서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님? 누님, 기분이 안 좋아요?”
제서가 제완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안 좋긴. 그냥 뭐 좀 생각하고 있었어.”
사색에서 빠져나온 제완은 고개를 숙이며 남동생을 쳐다봤다.
“이 누님한테 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니야?”
제서는 뒤에 있던 시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방에 돌아온 뒤 제완은 침향에게 주방에 가 간식을 가져오라 시키는 동시에 제서의 시녀에게도 물러가 쉬라 명했다.
그녀는 그제야 제서의 자그만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꾹 눌렀다.
“어째 점점 더 영악해지는 거 같아?”
“누님, 아버님께서 누님의 혼처를 정하셨대요.”
제서는 방 안에 둘만 남게 된 걸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제완에게 말했다.
이에 제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미소를 머금고는 물었다.
“그건 누가 말해준 거야? 설마 서, 너,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몰래 엿들은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제서는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시는 거 몰래 안 엿들었어요.”
“그럼 어떻게 안 거야? 나 한테만 말해봐, 응?”
사실 제완은 이 상황에 관한 것이 머릿속에 이미 다 들어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면이었지만, 당시에는 스스로가 아버지 손에 쥐어진 바둑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창피하고 또 화가 났었다. 그래서 제서에게 이걸 누구한테서 들은 건지 미처 물어볼 경황이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 제서는 머뭇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결국엔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런 제서의 반응에 제완은 일부러 뚱한 얼굴을 해 보였다.
“우리 서, 안 착한 아이네. 무슨 일이 있는데도 이 누님한테 전혀 얘기도 안 해주고 말이야.”
“아아, 말할게요. 말할 테니까 화내지 마세요, 누님.”
제서는 재빨리 제완의 손을 잡아끌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둘째 누님이 저한테 말해준 거예요. 그런데 큰누님이 절대 좋아할 리 없는 일이라고, 큰누님이 너무 불쌍하니까, 저한테는 누님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 서는 이 누님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 안 하는 거지?”
제완은 미소를 띤 채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지만, 속으로는 아주 매섭게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나 제여 그 자식이었어! 걔는 서를 이용해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제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얼른 가서 아버님께 혼인 안 하고 싶다고, 둘째 누님을 혼인시키라고 말씀드려요. 둘째 누님은 큰누님 대신해서 하고 싶어 하니까요.”
“이 말도 둘째 누님이 너한테 직접 한 거야?”
제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제서에게 물었다.
“아니요……. 둘째 누님이랑 연 이낭이 이렇게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제서는 무언가가 켕기는 듯 멈칫멈칫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을 들은 제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서야, 그 말은 둘째 누님이 그냥 혼자 생각해 본 일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후에 이 말은 어디서도 꺼내선 안 돼. 알겠지?”
“네, 알겠어요.”
제완이 화를 내지 않는 걸 본 제서의 눈동자가 다시 말똥말똥 빛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침향이 간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자 제완은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동생이 냠냠 쩝쩝 간식을 먹는 것을 지켜보는 한편, 속으로는 제여의 속셈이 무엇일지를 이리저리 궁리해보고 있었다.
제완과 제여가 서로 맞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두 당사자가 너무나도 뼈저리게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직접 표현하진 않았다.
또한 제서가 제완을 이렇게나 따른다는 건, 제가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으니, 제여 역시도 이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제여는 제서에게 왜 그런 말을 했고, 심지어는 제완에게 알리지 말라 당부했던 걸까?
사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제여는 제서를 통해 이 소식을 제완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제완의 얼굴이 돌연 어두워졌다.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번에 제정광이 그녀와 혼인시키려는 상대는 안원후 세자 영조운(寧朝雲)이 아니라, 따로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는 상황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제서로부터 이 일을 들었을 때, 누가 그에게 이런 정보를 노출한 것인지 더 깊이 알아보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곧장 육 씨에게 가 자신의 혼인이 제정광의 바둑돌처럼 쓰이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고 말했었다. 이후에 육 씨가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은 그냥 흐지부지됐었다.
제서를 이용해 겉으론 한없이 제완을 걱정하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제여의 이 말들을 절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제완과 제여는 서로 부정할 수 없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관계였다.
어쩌면 그럴싸하게 꾸민 말들을 전해 듣고 난 뒤, 제여가 일부러 그녀의 혼사를 깨트리려 한다 생각하게 만들려던 것일지도 모르니, 그녀는 반드시 이와는 반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게 아마도 제여의 목적일 거야…….’
제여는 분명 제완이 제서에게 이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를 캐물을 것이고, 제서가 그것을 털어놓으리라는 것까지 예상하고 일을 꾸몄을 것이었다. 뜻밖에도 지난 생에서는 그녀가 캐묻는 걸 깜빡해 제여의 속임수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반대로 이번 생에선 그녀가 제서에게 이에 대해 잊지 않고 묻긴 했다. 하지만 제여는 지난 생에서도 뜻대로 이루지 못했던 일을 이번 생에선 무사히 이룰 거라 혹여 꿈에서라도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녀의 여동생에겐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기다란 의자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제서를 바라보던 제완의 입꼬리엔 의미심장한 옅은 미소가 쓱 떠올랐다.
* * *
제완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진작에 잠에서 깬 제서를 데리고, 제정광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안채로 향했다.
사실 이번 생에서 제완이 제정광과 떨어져 있던 시간은 고작 두세 달 정도였지만, 그녀는 부녀지간에 마치 하나의 세상이 사이에 있는 듯 한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까지 합쳐 보면 그녀와 제정광은 이미 십 년 동안이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침착하게 인사를 올리는 제완의 눈에 기쁨이 한가득 서린 육 씨의 얼굴이 슬그머니 담기자, 제완은 마음이 살짝 아려왔다.
제서 역시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로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추 이낭은 육 씨의 옆에 서서 자기 아들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제정광이 가장 아끼는 이낭인 것은 아니었지만, 육 씨가 가장 신임하는 이낭이었다.
추 이낭과 제서가 육 씨의 신임만 잃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들 모자는 제가에서 그리 힘든 나날을 보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서가 제가의 유일한 적출인 제완과 가까이 지낸다는, 아주 소중한 사실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완을 바라보던 제정광은 어느새 장녀가 훌쩍 자라 다 큰 고낭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얼굴에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긴 했지만, 1, 2년 정도만 지나면 육 씨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했다.
태자에게 이미 태자비가 있지만 않았어도, 그의 여식이 일국의 국모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아쉽고도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족끼리 이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 없다.”
제정광은 제완에게 육 씨의 바로 옆자리에 앉으라 명하고는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처와 아들딸을 한눈에 담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내 금주성에 온 것은, 우선은 가서(家書)에 부인의 몸이 좋아지고 있다 적혀 있어, 직접 한 번 내 눈으로 보고 싶어서였소. 둘째로는 공무 때문이오. 그래서 요 며칠 동안은 바깥일이 몹시 바쁠 것 같으니,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을 때 만일 내가 집에 없다면, 당 선생에게 맞이하라 일러주시오.”
‘당 선생은 제가의 노야도 아닌데, 대체 왜 굳이 그자에게 제가를 대신해 손님을 맞이하게 하라 말씀하시는 거야?’
하지만 육 씨는 끝내 질문을 삼킨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완도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당 선생이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건, 태자를 위한 그 시답잖은 일 때문일거야!’
뒤이어 제정광은 육 씨와 제완에게 금주성에 온 이후의 생활이 어떤지를 물었다. 특히 그들이 금주의 다른 세도가들과 왕래하고 있진 않은지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 육 씨가 답했다.
“제 몸이 좋지 않아 바깥에 나가 사교를 맺을 기회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요 며칠 전이 행선일이었던 덕에 여남후의 오 부인, 그리고 유 부인과는 조금 가까워졌지요. 완이도 여공(*女紅: 바느질, 자수 등 여인이 하는 일)뿐 아니라 글공부도 해야 하니 온종일 바깥에 나가 있는 건 적합하지 않고요.”
육 씨가 조 부인을 쏙 빼고 언급한 건, 그녀가 남편의 성정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제정광은 조 부인 같은 여중호걸을 단연코 탐탁지 않아 할 것이라, 두 사람의 왕래를 반대하고 나설지도 몰랐다.
제정광은 무릇 여인이란 집안에서 가장을 돕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만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들에는 여인들이 관계하면 안 되었다.
육 씨의 대답에 제정광은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덧붙여 몇 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당 선생과 논의할 것이 있는지 곧바로 자리를 떠나 바깥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