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기억력
조 부인이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나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제 노야께서 곧 오시나 보네. 어쩐지 동생이 요 며칠 웃음도 늘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 했어.”
“아휴, 놀리지 마세요. 그저 전보다 몸이 훨씬 더 홀가분해져서 마음도 같이 가벼워지고 있는 것뿐이에요.”
육 씨는 얄궂은 듯 조 부인을 흘끗 쳐다보며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제완은 두 번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금껏 진정으로 배우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던 무언가가 하나도 없었다. 소위 말하는 금기서화(*琴棋書畵: 악기, 바둑·장기, 서도(書道), 그림을 아울러 이르는 말)는 모두 단순히 품위 유지를 위해 배운 것이지, 진심으로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앞선 며칠 동안 조 부인이 육 씨를 위해 침을 놓아주는 것을 보니, 그녀는 새삼스레 금침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같은 여인인 조 부인이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크게 감탄했고, 그녀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나도 침구술을 배울 수 있다면…….’
“조 부인의 의술은 역시나 소문으로 듣던 것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용한 의원이시지요. 당초에 장 의원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 얘기했는데, 부인께선 금침 몇 개만으로 저희 어머니를 낫게 해주셨으니,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제완은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들을 빠르게 털어냈다. 제정광이 그녀가 의술을 배우도록 허락해 줄 리도 만무하거니와 조 부인이 그녀에게 기꺼이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이란 보장 또한 없었다.
그녀의 말에 조 부인은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흥미가 돋는 듯 제완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신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니면 너도 한 번 배워보거라. 그럼 이후에 너도 아주 훌륭한 실력을 갖추게 될 테니 말이다.”
일순간 눈동자가 반짝인 제완은 간절히 희망하는 듯한 눈으로 조 부인을 쳐다봤다.
“조 부인의 말씀은……, 저에게 침뜸을 가르쳐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육 씨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말을 진짜로 여긴 것이야? 너처럼 응석받이로 자란 고낭이 무슨 침구술을 배운다고.”
“어찌 제가 배우지 못한다고 하세요? 어머니, 전 고생하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아요.”
제완은 육 씨의 말을 듣자마자 영 내키지 않는 듯 반박하고 나섰다. 응석받이로 자랐다는 것이 고생을 감내하지 못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생들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제완의 단호하고도 경직된 얼굴을 본 조 부인과 육 씨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에 육 씨는 의아한 얼굴로 제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이것을 배우고 싶은 것이야?”
조 부인 역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 배우고 싶어요!”
제완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굳건했고, 목소리는 결연했다.
“어머니, 저 침구술을 배워보고 싶어요. 의술 말이에요.”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냐?”
육 씨가 입을 떼기 전 조 부인이 한발 앞서 그녀에게 질문했고, 제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배우고 싶어요. 부인께서 어머니께 침구를 놓아주시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항상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인의 동작들이 제 머릿속에서 줄곧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몰래 의서들을 보며 공부하려고 했지만, 침구술에 대해 적혀 있는 책들은 많지 않더라고요……. 만약 제가 이를 배운다면, 나중에 경도로 돌아간다 해도 전혀 걱정할 게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오랜 지병이 다시 재발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무능한 말 한마디에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보아하니, 효심 때문이었던 게로군.”
조 부인은 웃어 보였다.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제완이 소리쳤다.
“여러 이유 중 하나일 뿐이에요. 또 다른 이유는…….”
조 부인은 이어지는 제완의 말을 미소를 머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 전생에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너무나도 많이 해쳤으니, 만약 이번 생에 선한 일을 하며 그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두렵기 그지없는 이 운명이 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건가? 의술을 배워서 사람을 구하면, 하늘이 이번 생에는 나에게 좀 더 관용을 베풀어 줄 것 같다고 말이야. 아니야, 이렇게 말할 순 없어!’
“저도 조 부인처럼 여중호걸이 되고 싶어요!”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생각하던 제완이 별안간 고개를 불쑥 들고 가슴을 쫙 펴며 말했다. 이는 그녀가 유일하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이유였다.
조 부인은 크게 한바탕 웃기 시작했고, 육 씨는 탄식을 내뱉었다.
“다시 생각해 보거라. 네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야.”
그러나 제완은 인상을 쓰며 반박했다.
“어째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나요? 이건 제가 공부하고 싶은 거지, 아버지께서 하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그녀는 곧장 조 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 부인, 저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정말 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인 것이냐? 나도 마지막으로 제자 한 명을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긴 했다. 이 침구술이 대대로 전해져갈 수 있다는 건 나에게도 기쁜 일이지만, 이를 배우는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을 것이야.”
조 부인이 답했다. 그녀는 일부 옛사람들처럼 자신의 재능을 꼭꼭 숨기고 감춘 채로 혹여라도 다른 사람이 자기 의술을 빼앗아 갈까 항상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 지식은 전수될 때에야 비로소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조 부인은 육 씨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동생, 만약 동생만 허락한다면, 난 완이를 제자로 받아들일 거야.”
그녀도 그냥 되는대로 대충 제완이라는 제자를 받아들이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사실 최근 며칠 동안 그녀는 이 어린 낭자가 진심으로 침구술을 배우고자 한다는 걸 이미 눈치챘었다. 그녀가 육 씨에게 침뜸을 놓아줄 때마다 제완은 바로 옆에서 눈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계속 지켜보고 있었고, 제완의 눈동자엔 호기심과 학구열이 마구 넘쳐흐르고 있었다. 만약 이 어린 고낭이 세도가 출신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자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냐 물었을 것이다.
육 씨는 솔직히 반대하고 싶었지만, 딸아이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결국 남모르게 속으로 혼자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완이 네가 어려움에 맞닥트려 뒷걸음질 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나는 상관없다.”
이 말을 들은 제완의 얼굴에는 3월의 봄꽃과도 같은 찬란한 미소가 번졌다.
* * *
조 부인은 제완을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제완이 자신의 재능을 완전하게 배울 것이라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조 부인은 원래 의과 대학의 학생이었고, 이 시대에 태어나게 된 뒤엔 전생의 의학 지식과,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은 것들을 합쳐 오늘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제완은 달랐다. 그녀는 매일 의학 서적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었고, 공부할 시간도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완은 세가의 천금과도 같은 고낭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녀가 아무리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더라도 거역할 수 없는 제약들이 수도 없이 많을 터였다.
“침구술은 침술과 구술로 나뉘는데, 두 가지 모두 아주 다양한 기교들을 사용한다. 내가 너의 모친을 상대로 진행하고 있는 치료법은 침을 수직으로 놓는 것으로, 밖에서부터 안으로 이르고,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에 이른다.
침을 놓을 때는 천천히 꽂아 넣어야만 한다. 너무 빠르거나 급히 움직인다면, 기(氣)를 들여보내 기의 순환을 촉진하는 것과 더불어 그 흐름을 돕는 효능에 크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를 보하기는커녕 반대로 전부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다…….”
조 부인은 육 씨에게 침을 놓는 한편, 제완에게 침구술의 기교에 관해 설명했다.
제완은 그녀의 해석을 진지하게 귀담아들으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침은 경혈(經穴)마다 앞뒤 간격을 두고 찔러 넣어야 하는데, 기가 닿지 않았을 땐, 더 깊은 곳을 향해 침을 놓아야 한다. 이는 얕은 곳에서부터 차츰 깊은 곳을 향해 침을 놓아 기를 촉진해 해당 부위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지.
또 침이 들어갈 때 손으로 돌리면서 넣거나, 침을 일정 깊이에까지 찔러 넣은 뒤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꽂는 동작을 통해 기를 들여보내는 건, 더 빠르게 기가 닿게 하기 위해서다…….”
조 부인은 마지막 금침 한 자루를 천천히 혈 자리에 찔러 넣은 뒤에야 고개를 돌려 제완을 쳐다보았다. 아주 열심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제완을 본 그녀는 입꼬리가 절로 쓱 올라갔다.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네게 줄 책 두 권을 가져왔으니, 이것들을 한 번 보아라.”
조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을 푸는 한편, 제완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에 제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께서 방금 말씀하셨던 것들, 모두 기억했습니다.”
“다 기억했다고?”
조 부인은 당황하는 동시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뒤이어 제완은 조 부인이 방금 얘기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똑같이 따라 말했고, 정말 단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조 부인 조차도 자신이 뭐라 말했는지를 이미 다 잊었는데, 제완은 모든 걸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 부인은 이렇게 기억력이 엄청난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제완을 쳐다봤다.
“넌 지금껏 다른 사람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했던 것이냐? 아니, 한 번 보거나 들은 건, 잊지 않는 능력을 타고난 건가?”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제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기억력은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서책을 몇 번이고 다시 봐야만 그중 일부 정도만을 기억할 정도였다. 오늘처럼 조 부인이 딱 한 번 말한 것을 전부 기억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 부인은 그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욱 놀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했던 말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냐?”
상대의 질문에 제완은 이마를 긁적였다.
“아마도 비교적 귀 기울여 세심히 들어서 기억이 나는 듯합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잘 됐다. 우선은 이 두 권을 먼저 한 번 보거라. 이것들은 내가 쓴 책들인데, 한 권은 병례(病例)에 관해 적었고, 다른 한 권은 치료법에 대해 적은 것이다.”
조 부인은 시녀의 손에 들려 있던 책 두 권을 받아 그녀에게 건네주며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당부했다.
제완은 보물을 얻은 것처럼 소중하게 책들을 대하며 답했다.
“네.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치료 후 옷을 다시 갖춰 입고 병풍을 지나쳐 나오던 육 씨는 제완의 이런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요 녀석, 전에는 뭐 하나 진득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게 없는 듯하더니, 지금은 이렇듯 침구술에 푹 빠졌구나.”
“어린 고낭들이야 뭐,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조 부인이 육 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완이는 가서 책 보라 하고, 우리는 또 담소를 나누러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