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적응해 나가다
전생에서 제완은 단 한 번도 신령이나 부처에게 기도를 올린 적이 없었다. 천지신명이 진짜로 존재했다면, 왜 육 씨처럼 선량한 사람이 선(善)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악랄하기 그지없는 그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희희낙락하며 살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비로소 이 세상에 천지신명이 존재한다는 걸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태어난 게 과연 천지신명의 뜻일지, 아니면 윤회의 환생 과정 중 착오가 생겨 그녀의 영혼을 어렸을 때 그녀의 몸속으로 다시 돌려보내게 된 것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됐어! 이제 그만 생각하자. 괜한 걱정할 필요 없어. 모든 건 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런 거야.’
* * *
제완은 육 씨를 배웅한 뒤, 어렸을 적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서재에 갔다. 무엇을 하면 마음이 안정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던 그녀는 긴 책상 뒤쪽에 있는 도화 나무 책꽂이에서 흰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쳐놓고는 먹을 갈기 시작했다.
“고낭, 오늘 날씨가 참 좋은데, 나가서 걸으시는 건 어떠세요?”
은행이 삼족(三足) 향로에 불을 지피며 낭랑한 목소리로 제완에게 물었다.
제완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나갈래. 오늘은 여기 있으면 될 것 같아.”
은행이 물 주전자를 삼족 향로 위에 올려놓은 후, 제완의 곁으로 와 그녀 대신 먹을 갈아주었다.
“은행아, 너희 집 식구들은 어떻게 돼?”
제완은 고개를 숙인 채로 화필(畫筆)을 정리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질문했다.
“고낭께서 잊으셨나 보네요. 소인은 제가에서 태어난 노비입니다. 가족은 오라버니랑 여동생이 한 명씩 있고, 모두 본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은행은 아주 능숙하게 먹을 갈면서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제완은 그녀가 자신의 집 시종에게서 태어난 여식이라는 것이 문득 기억났다. 은행의 부모는 두 사람 다 제가의 문지기로, 한 사람은 앞뜰의 대문을, 또 다른 사람은 안뜰의 단청을 입힌 중문(中門)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라비는 그의 부친이 이전에 담당했던 사동의 일을 맡고 있었으며, 여동생은 아마도 재봉사로 일하는 듯했다.
‘나중에 이들 일가족은 모두 양군유 편에 섰지…….’
“너희 오라비는 혼인 상대를 정했니?”
제완이 화필을 먹물에 살짝 담그며 질문했다.
은행은 어리둥절하며 제완을 힐끗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가 느끼기에는 요 며칠 제완이 조금 이상한 듯했다. 앞서는 아무래도 제완이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은행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듯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이렇듯 그녀의 가족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소인의 오라버니는 이미 혼례 상대를 정했습니다. 고씨(高氏) 이낭 밑에서 일하고 있는 향아(香兒) 언니입니다.”
‘역시! 전생이랑 똑같아.’
제완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더는 질문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종이 위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은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완을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조용히 옆에서 기다렸다.
향로 위의 물이 끓기 시작하고 뜨거운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자, 은행이 황급히 향로로 다가가 뜨거운 차 한 주전자를 우려내어 책상 위 한쪽에 올려놓았다.
제완은 이따금 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씩 마셨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화폭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은행이 그림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색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흑과 백만 있는 게 꼭 어떤 단상인 듯했다.
약 한 시진(*2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제완이 붓을 내려놓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검은색과 흰색만이 있는 종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낭, 무엇을 그리신 것입니까?”
은행이 궁금한 듯 질문했다.
“설경이야. 마르면 정리해줘.”
제완은 가뿐한 목소리로 말한 뒤 그림을 내려놓고 천천히 서재를 나섰다.
전생에서 죽기 직전에 내렸던 대설의 풍경은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늘 그녀에게 스스로가 잃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잘못한 것은 또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워주는 것만 같았다.
* * *
빠른 걸음으로 서재에서 나온 제완은 곧 정원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고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내 강렬한 햇빛에 눈이 시큰거렸다.
과거에 자신을 배반했던 사람이 지금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미운지를 속으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미움이 남아있다면, 이제는 완전히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러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에, 당장 은행을 어떻게 대할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더는 곁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은행을 본가로 돌려보낼 방법을 생각해야겠어.’
* * *
곧이어 제완은 육 씨가 기거하는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저 별장일 뿐이었지만, 그 구조는 엄격히 경도의 대저택에 기반해 건조되어 있었다. 세 채의 큰 저택이 연이어 늘어서 있었고, 육 씨는 그중 중간에 있는 본채에서 지냈다. 제완이 있는 저택과는 불과 작은 화원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였다.
제완이 막 본채 건물에 다다르자, 짙고 쓴 약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육 씨는 기다란 의자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홍목으로 만든 빈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영하는 얇은 담요를 육 씨에게 덮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제완이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검지를 자신의 입 위에 가져다 대며 소리를 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제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내실에서 빠져나왔는데, 곧 바깥방에서 내실로 들어가려던 육 씨의 또 다른 측근 시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시녀의 이름은 하죽(夏竹)이었다.
전생에서 육 씨가 세상을 떠난 후, 양군유는 육 씨의 측근 시녀였던 하죽과 영하를 아무에게나 시집보내버렸었다. 그렇기에 제완도 이후에 그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낭, 고낭께서도 여기 계셨군요.”
하죽이 육 씨의 피풍을 손에 든 채로 방긋 웃으며 제완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하죽아.”
제완은 그녀를 향해 이가 훤히 다 보일 정도로 해맑게 웃어 보였다.
곧이어 영하가 발을 걷고 내실에서 나와 제완을 향해 자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는 방금 약을 드시고 잠드셨습니다. 혹 급한 일이 있으셔서 부인을 찾아오신 것인지요?”
그녀의 말에 제완이 짐짓 걱정되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어머니의 병환이 혹시 더 심해지셨니?”
“경도에 계실 때보다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금주성에 오신 이후에 재발하는 횟수도 크게 줄었고요.”
영하가 웃으며 답했다.
“그럼 다행이야.”
그렇게 대답한 제완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금주성이 육 씨가 요양하기에 적합한 곳이긴 했지만, 어차피 모녀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엔 경도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제완의 기억에 육 씨는 겨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병을 치료할 방법을 반드시 빨리 찾아야 했다.
“영하야, 금주성은 뛰어난 인물들이 많은 곳이라는 소문을 들었어. 집 관리인한테 혹시 어머니의 지병을 고칠 수 있는 이름난 의원이 있는지 좀 나가서 찾아보라고 전해줘. 제가(齊家)가 반드시 크게 보상할 거라고.”
제완이 영하에게 분부했고, 영하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화답했다.
“예, 소인이 지금 곧장 가서 제가(齊家) 관리인에게 금주성의 명의를 찾아보라 얘기해 놓겠습니다.”
제완이 비록 열두 살이기는 하나, 열 살이 되기 이전에는 노부인의 곁에서 자랐다. 이년 전, 노부인이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기만의 독채를 가지게 되었다.
노부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제가의 적녀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총명했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친절하고 온화했다. 그리고 노부인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아 제가의 모든 하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 누구도 나이가 어리다 하여 그녀를 얕보지 못했다.
그래서 영하는 제완의 분부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답했다.
* * *
이튿날은 날이 약간 추웠지만, 하늘은 매우 청명했다.
육 씨는 아침 일찍부터 하인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명했고, 제완과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성 밖 평안산(平安山)에 있는 평안사로 향했다.
마차는 별장 대문에서 출발해 고즈넉한 분위기의 서쪽 큰 길가로 천천히 나아갔는데, 바로 금주성에서 가장 번화한 중대가(中大街)였다. 길을 따라 사람들로 붐비는 대형 점포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었고, 행인들과 등짐장수들이 거리 곳곳을 거닐고 있었다.
주국(周國)에서도 매우 번성한 성 중 하나인 이곳 금주성에는 오만 가지 점포들이 운집해 있다 해도 될 만큼 가지각색의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경도와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제완은 창을 가린 천 너머로 바깥의 행인들이 오고 가는 것을 쳐다보며 속으로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금주성에 관한 기억은 벌써 흐릿해진 상태였는데, 다시금 성내의 화려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언젠가 본 적은 있는 듯하지만,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차가 수많은 젊은 여인들의 곁을 지나쳐 갔는데, 그때마다 발랄한 웃음소리가 마차 내부에까지 전해져 왔다.
거리에는 행인들과 상인들 말고도 외출한 젊은 여인들이 제법 많았다. 사회 분위기가 개방적인 주국에서는 여인에 대한 속박이 극심하지도 않았고, 요구 조건이 많지도 않았다. 관원이 될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에게는 그다지 각박한 조건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국의 여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고도 개방적인 모습이었다.
“금주성의 여인들은 경도 여인들보다도 훨씬 더 호방한 듯하구나. 이렇듯 여인들이 얼굴을 드러낸 채로 큰길을 다니는 것은 경도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일이지.”
싱긋 미소를 지은 채로 마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육 씨는 제완이 적잖이 흥미로워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주성과 달리 경도는 곳곳에서 관원들과 세가, 호족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여인들에게 두문불출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여인 스스로 가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항시 주의해야만 했다.
제완은 육 씨의 말에 공감한다는 뜻으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속으로 이 호방하고도 쾌활한 여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중대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차는 성문에 다다랐다. 야간 통행 금지 시간도 아니기에, 수문병은 굳이 그들의 마차를 세워 검사하지 않았다.
사실 이는 모녀가 탄 마차 네 면에 ‘제가’라고 적힌 목패가 걸려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가는 신분이 매우 존귀한 주국의 명문 세가였기 때문에, 일반 사병들은 그들을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