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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각 가문의 숙녀들

16화. 각 가문의 숙녀들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자 제완도 고개를 돌렸다.

금실 테두리를 두른 옷깃에 꽃 자수를 새긴 진분홍색 상의와 잘게 주름진 꽃무늬 치마를 입은 젊은 낭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고운 색상의 의복 덕분에 한층 더 자태가 선연(嬋姸)해 보였으나, 얼굴에는 자만심이 가득했다. 그 고낭은 계집종 몇 명을 거느리고 그들 무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吳) 낭자.”

상대가 오는 걸 발견한 사숙정을 포함한 낭자들은 제각기 낯빛이 일변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완의 뒤에 있던 침향이 이내 작은 목소리로 상대가 누군지를 소개해 주었다.

“고낭, 이분은 여남후 댁의 적녀로, 그 댁의 이고낭이십니다.”

오영(吳盈)이라는 이름의 여남후 둘째 여식은 어느새 제완의 코앞까지 다가와 아래턱을 치켜들고는 제완을 흘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낭자께서 바로 그 경도 제가의 제완 낭자이신지요?”

제완은 아리따운 얼굴로 방긋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상대를 응시했다.

“오 낭자께선 아마도 저에게 가르침을 주실 것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가르침이라니 가당치 않은 말씀이시지만, 이 한 가지는 반드시 알려드려야 할 듯합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너무 가까이 지내시는 것은 체면을 스스로 깎는 일이라는 것을요.”

말을 마친 오영이 곧장 사숙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사숙정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오영은 여남후의 적출 둘째 여식이자, 집안 노부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손녀이기에, 감히 사숙정이 말대꾸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 낭자와 사숙정의 사이가 영 안 좋은 것 같네!’

제완은 두 사람 간의 불협화음에는 조금도 끼고 싶지 않은 듯 가만히 웃다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오늘 이렇듯 모든 분과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였는데, 어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그녀들 사이에서 신분이 가장 존귀한 사람이 바로 오영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뭐라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따랐다. 평소엔 횡포 부리기 좋아하는 사숙정조차도 오영 앞에서는 그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다. 제가(齊家)가 후작 가문은 아니었지만, 자그마치 주 왕조 백 년 동안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공신 가문이었다. 오가(吳家)는 이런 제가(齊家)에 비하면, 그저 이류(二流) 귀족에 불과한 셈이었다.

그런 제완이 버젓이 있는데 누가 오영을 두려워하겠느냔 말이다.

오영의 말을 맞받아치지도, 그렇다고 사숙정을 배척하지도 않는 제완을 본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약간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더욱이 장본인인 사숙정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제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완이 자신을 위해 말머리를 틀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주 신이 난 듯 말했다.

“제 낭자, 이곳 조가 화원에 죽정(竹亭)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다 같이 그곳에 가 앉을까요?”

조 부인이 세도가의 고낭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라고 보냈던 어멈도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어멈은 다급히 손을 올려 앞을 가리키더니 제완과 오영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 낭자, 오 낭자, 죽정은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일찍이 각종 차와 다과를 준비하라 분부하셨던 참이니, 낭자들께서는 자리를 이동하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수고스럽겠지만, 어멈이 길을 좀 안내해주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제완의 눈은 오영을 향해 있었다.

사실 오영은 제완과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사숙정을 위해 제완이 자신을 무시하는 걸 보고는, 낯빛이 차마 못 봐줄 정도로 일그러졌다. 만약 이곳이 한번 발을 들이기도 힘든 조가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당장에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쌩하니 자리를 떠났을 터였다.

* * *

죽정에 도착해 보니, 어멈의 말대로 진작에 다과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덕에 사람들은 각각의 자리에 앉아 곧바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제완은 낭자들의 대화 주제가 어쩐지 전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녀는 오영도 사숙정과 말을 섞기 싫은 듯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어멈, 혹 귀부(貴府)의 공자께서는 금일 집에 계시는가?”

그때 갑자기 사숙정이 고개를 돌리고는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어멈을 쳐다보며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졌다.

금주성의 풍속은 역시나 경도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것 같았다. 이렇듯 전혀 거리낌 없이 사내의 행방을 물어볼 수가 있다니 말이다.

그러나 사숙정의 이 기탄없는 질문에 오영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져 가기 시작했다.

이에 잠시 당황하던 어멈 또한 겸연쩍게 웃어 보이고는 답했다.

“저희 공자께서는 금일 동문생들과 함께 외출하셨습니다. 소인은 어디를 가셨는지 알지 못하고요.”

어멈의 대답에 사숙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고, 다른 고낭들 역시도 탄식을 금치 못했다.

곧이어 오영이 사숙정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조 공자께서 널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그리 잘 알면서도 감히 그분이 어디 계신지를 묻다니.”

“그렇다고 조 공자께서 낭자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숙정은 꽤나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만약 평소였다면, 그녀는 감히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제완이 함께 있으니 오영이라는 사람도 별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너보다는 한참 더 낫지. 너 같은 계집이 감히 조 공자를 넘본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오영은 사숙정을 경멸하는 눈으로 째려봤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사이가 엉망진창인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조언옥을 연모하게 되면서 서로를 영 마뜩잖게 보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제완의 얼굴에 염오(厭惡)가 번뜩 스쳤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있던 어멈에게 물었다.

“귀부에서 준비해준 다과의 맛이 일품이라 너무 많이 먹은 듯하군. 잠시 소화를 좀 시키며 걷고 싶은데. 어멈, 혹 정원 안을 조금 걸어도 되겠는가?”

“제 낭자, 편하게 다니셔도 됩니다. 소인이 시녀에게 일러 낭자께 길을 안내해 드리라 하겠습니다.”

조가의 관리인 어멈이 총망히 답했다.

“그럴 것 없네. 내 이 정원 안에서 길을 잃을 정도까지는 아니니 말이야. 게다가 이곳에 일손이 필요할 테니, 어멈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네.”

제완이 덤덤히 답했다.

“그렇다면……, 제 낭자, 편히 다녀오시지요.”

제완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정과 오영이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그녀는 침향을 데리고 죽정을 나서서 또 다른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제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오영이 일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솔직히 제완도 여인들이 질투 때문에 다투는 장면을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아버지의 첩실들이 아버지의 총애를 얻기 위해 뒤에서 남몰래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또 훗날 안원후의 첩이 되었을 때도 본처와 다른 첩들의 배척과 모해에 직면했었기에, 그녀는 이런 장면이 가장 꼴 보기 싫었다.

* * *

“고낭, 여남후 세자와 조가의 공자께선 며칠 전 큰길 위에서 충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까 오 낭자는 아마도 그 일을 모르고 계신 듯합니다.”

침향이 제완의 뒤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낭자가 속에 어떠한 수를 감추고 있는 거라면, 그걸 굳이 드러내려 하진 않을 거야.”

제완은 가만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진지한 얼굴로 잠시 생각해 보던 침향은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인과 시녀 두 사람이 길을 따라 정원을 반 바퀴 정도를 돌았는데, 조가의 정원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제완은 오로지 죽정 내의 그 떠들썩한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 정원의 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며 다시 입을 뗐다.

“조 부인과 다른 부인들께선 어떻게 논의를 진행하고 계신지 모르겠네. 우리 한 번 가서 보자.”

그리고 막 방향을 틀어 돌아가려던 찰나, 저쪽에서 돌연 사내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 *

갑자기 들려온 사내들의 목소리에 제완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곧장 정원 안 커다란 나무에 가려진 자갈이 깔린 오솔길 쪽을 바라봤다. 그 작은 길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오로지 저 오솔길뿐이었다.

제완은 이쪽으로 오는 사람과 마주치기 싫은 듯, 침향에게 눈짓하며 함께 어딘가 구석에 숨자는 뜻을 표했다.

잠시 뒤, 두 명의 소년이 함께 오솔길에서 걸어 나왔다. 한 명은 소매가 꽉 끼는 짙은 남색의 홑옷을 입은 채로, 흔히 볼 수 있는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선 강호를 누비는 협객과도 같은 차림새였다.

또 다른 한 명은 푸른 비단으로 만든 장포에 검정 허리띠를 매고 있었는데, 소맷부리와 옷깃에 어두운색의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영준하고도 빼어난 그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고귀함을 한층 더해주었다. 이 사람이 바로 방금 사숙정이 오매불망 잊지 못하던 바로 그 조언옥이었다.

하지만 제완은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들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한껏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아진 뒤에야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뒤이어 막 고개를 들고 방향을 튼 순간,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조언옥이 우뚝 선 채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제완은 조언옥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얼른 여유롭고도 침착한 표정을 되찾고 조언옥을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조언옥 역시 젊은 여인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막 오솔길을 나왔을 때, 사실 그는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챘었다. 만약 하인이었다면 응당 그를 보고는 나와서 인사를 해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몰래 숨은 것을 보고는 대체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여인인 줄은…… 어머니의 손님이겠지.’

“응? 낭자시군요!”

그때, 조언옥의 옆에 있던 젊은 사내가 깜짝 놀라면서도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성큼성큼 제완을 향해 다가왔다. 제완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년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성문을 봉쇄했던 밤에 화단 속에 숨어 있었던 그 강호의 대도(大盜)라는 사람이잖아?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아, 맞네. 고모가 여기 있다고 그때 그랬었지. 근데 어떻게 또 조언옥이랑 같이 있는 거야?’

“낭자, 어찌 여기 계십니까? 지난번 제가 낭자께 큰 도움을 받아 줄곧 답례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듯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좋네요. 이제야 고낭께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겠어요.”

제완 앞에 선 소년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