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작은 소란
한 부인은 반 시진(*1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으나, 화가 난 듯한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제완을 보자마자 곧장 육 씨의 몸 상태가 어떤지를 물었다.
“염려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 부인. 어머니께서 깨어나긴 하셨으나, 몸이 아직 허약하시어 한 부인을 맞이하기엔 조금 어려울 듯해, 저에게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부인을 초청하셨는데, 직접 대접해 드리지 못해 정말로 송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완은 한 부인에게 사죄했다. 금일은 본래 손님을 맞이해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뜻밖에도 한 부인을 냉대하게 되고 말았다.
“제 낭자, 그런 말씀 마십시오. 본래는 제가 낭자의 어머님을 뵈러 가야 하나, 이제 막 정신이 드신 제 부인께는 도리어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폐를 끼치는 일이니, 응당 제가 죄송해야지요.”
한 부인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고, 제완 역시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한 부인, 앉으시지요.”
한 부인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제완도 그 옆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이 온통 육 씨에게 가 있는 탓에 한 부인과의 대화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부인도 제완을 제자로서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한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별을 고했다.
제완이 한 부인을 직접 대문까지 배웅해 주었는데 마차에 오르기 바로 직전, 한 부인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제완에게 말했다.
“제 낭자, 금주성 태수 부인의 의술은 금주성에선 따라올 자가 없는 수준입니다. 이년 전, 그분께서 은침 하나로 임종 직전의 부인을 구해내는 것을 제가 직접 보았지요. 다만, 그분은 이곳에 잘 계시지 않으실뿐더러 현재 금주에 계신지 여부도 알지 못합니다. 만약 낭자께서 태수 부인의 의술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한 부인은 말을 끝맺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고 제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올라타고 별장을 떠났다.
한동안 제완은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조(趙) 부인께서?’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그녀는 조 부인이 의술에 능하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다.
“고낭, 고낭?”
제완의 곁에 있던 침향이 자그만 목소리로 그녀를 몇 번이나 불렀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제완은 침향을 한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넌 금주성에서 몇 년간 지냈었지? 혹시 조 부인께서 의술에 고명하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
“소인이 비록 그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분에 관한 소문은 적지 않게 들었었습니다. 조 부인은 매우 올곧으시고 관후(*寬厚: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하다)하신 분으로, 자주 백성을 도와주신다 했습니다. 요 몇 년 전에 어떤 촌락에 역병이 돌았는데, 조 부인께서 조수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 사람들을 구해주셨다고도 했습니다. 금주성의 백성들이 조 대인과 조 부인을 추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요.”
침향이 차근차근 답했다.
‘그럼, 진짜로 그렇다는 거네! 내가 직접 조 부인을 찾아가 어머니의 병을 봐 달라 청하면, 부인께서 승낙해주실까?’
이야기를 들은 제완은 조 부인이 백성들을 아끼는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그녀가 권세가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아는 한, 조 부인의 아들은 아주 냉담하고도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의 어머니가 과연 어떤 사람일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제완은 계속 망설이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 어떤 망설임도 육 씨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는 마음에 비할 수는 없었다.
“내일 내가 직접 조부(趙府)에 다녀와야겠다.”
제완이 끝내 결단을 내렸다.
그녀를 보고 있던 침향이 조금은 어렵게 입을 뗐다.
“고낭, 조 부인께서는 지금 금주성에 계시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소문으로는 두 달 전 본가에 가셨다 하셨는데, 돌아오셨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요.”
제완은 그대로 얼굴이 굳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정말 이대로 아무 손쓸 방법도 없는 거야?’
“보살님, 부디 조 부인께서 빨리 돌아오시게 해주시어, 부인께서 오랫동안 건강히 지내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한쪽에 있던 은행이 불쑥 혼잣말로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
“내일 평안사에 다녀오도록 하자!”
제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말로 천지신명에게 어머니를 살펴 달라고 애걸복걸할 수밖엔 없는 건가?’
평안사에 간다고 해서 딱히 어쩔 도리가 있을지는 제완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평안사에 가서 마음이라도 평안해지도록 기도한 뒤 어머니를 위해 계속해서 명의를 찾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장 의원을 그렇게 보내고 난 이후에 제완은 하인을 시켜 또 다른 의원을 초청했었다. 그러나 그 의원이 내린 진단도 장 의원과 별 차이가 없었고, 제완의 마음은 더욱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육 씨는 결국 경도에서 가져온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오늘 아침, 제완은 육 씨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찾아가서 상태를 살펴보고 왔다. 육 씨의 안색이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아진 듯해서 마음이 약간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좀처럼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침을 먹은 후, 육 씨에게 아뢴 뒤 침향을 데리고 평안사를 향해 출발했다.
* * *
“평안사에 다녀온 다음에 조 부인께서 돌아오셨는지 네가 좀 알아봐 줘.”
마차 좌석에 기대어 앉은 제완이 두 눈을 살짝 감은 채로 침향에게 분부했다.
“예, 고낭.”
가볍게 답한 침향은, 안색이 좋지 않은 제완이 신경쓰여 넌지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낭, 마음을 조금 더 편히 가지셔도 될 듯합니다. 부인께서는 복이 많으신 분이시니, 분명 백 세까지 아주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이에 제완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응’하며 대충 짧게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냉소가 녹아 있었다.
‘복이 많으시다고? 백 세까지 사셔? 만약 정말로 그러실 수 있다면, 내가 왜 이 세상에 다시 왔겠어.’
하지만 전생이 어찌 됐든, 이번 생에서는 이전의 일들이 반복되는 걸 결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를 위해 운명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해도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 * *
마차가 중대가(中大街)를 지나 성문 앞에 다다랐는데, 돌연 바깥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차가 강제로 세워졌다.
“무슨 일이 난 건가?”
제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인이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침향은 짙은 남색의 모직 천을 걷고 마차에서 내린 뒤, 뒤따라오던 사동에게 앞쪽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아보고 오라 명했다. 주변이 인파로 꽉 막혀 있던 터라 그 이유를 알아내는 데에는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낭, 운록 서원의 학도들이 한 소년을 에워싼 채로 길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소년이 권세가의 노여움을 샀고, 지금 그 권세가의 소야가 건장한 사내들 몇을 데려와 무공을 겨루자 청하였으나, 소년이 응하지 않아 이렇게 대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침향이 돌아와 제완에게 마차가 멈춰 선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제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악한들이 이렇듯 길을 막고 섰는데, 어찌 문을 지키는 관군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거지?”
“여남후(汝南侯) 소야라, 관군들 역시도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침향이 답했다.
‘약한 자들은 잘도 마구 대하면서, 강한 사람들한텐 꼼짝도 못 하는 것들 같으니라고!’
침향은 속으로 영 마뜩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포위당한 사람은 누구라더냐?”
제완이 물었다.
“그것은 아직 못 물어보았습니다. 소인이 다시 가서 묻고 오겠습니다.”
침향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또 한 번 직접 마차에서 내렸다.
제완도 창에 쳐놓은 천을 살짝 거두고는, 한창 떠들썩한 저쪽 현장을 쳐다봤다. 때마침 인파 속에 자그마한 틈이 하나 생겼는데, 그 사이로 준엄하고도 차가운 표정을 한 준수한 외모의 젊은 사내가 시선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제완은 천을 아예 활짝 걷어 올리고는 소년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야!’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다만, 어쩐지 저 사내 주변의 다른 물체들은 모두 빛이 바래고, 오로지 저 사내만이 눈에 띄는 것 같았다. 경국(傾國)의 외모를 지녔다고까지 할 만큼은 아니지만, 뭔가 그냥 넋을 놓고 쳐다보게 되는 그런 기개가 풍겨오고 있는 것이다.
준수한 얼굴의 사내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고, 그저 차가운 낯빛으로 입을 꾹 닫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앞에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 감히 그에게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무언의 압도력이 충분히 느껴졌다.
아직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런 지위의 인물이 된 것이 아님에도, 벌써 저렇듯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기개를 지니다니. 저 사내는 정말이지 보통 사람은 아닌 듯했다.
조언옥, 이생에서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전생에서 조언옥의 도움을 받기 위해 각종 기회를 만들어 가까워졌었다. 그렇게 해서 제가가 전임 태자와 결탁한 증거를 그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조언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아주 깊이 박혀 있던 제가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제완은 가림천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전 생과 똑같이 살아가지 않겠다 결심했다. 그러니 조언옥 같은 인물과는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조언옥이 이곳에서 장래에 고관대작이 되든, 중간에 어떤 삶을 살든 생각하거나 알 필요조차 없었다. 자고로 군주가 되는 데에는 수많은 대가가 따르는 법인데, 전생에서 새로운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던 조언옥의 두 손이 깨끗할 리가 없었다.
“고낭, 포위되어 계신 분은 조가(趙家)의 소야라 합니다…….”
마차로 돌아온 침향이 제완에게 바깥의 상황을 세세히 말해주었다.
그렇게 막 침향이 설명을 마쳤을 때, 바깥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들은 더욱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싸우는 소리까지 들렸다. 제완은 침향에게 미처 답을 할 겨를도 없이 얼른 다시 천을 걷어 올리고 현장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곳에 있던 조언옥이 민첩히 몸을 움직이는 게 눈에 보였다. 그는 기세 좋게도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을 연이어 땅에 내리꽂았고, 그들의 뒤에 숨어 있던 세도가의 청년 역시 단번에 발로 차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서릿발 선 목소리로 수문병들에게 빨리 길을 뚫으라 명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사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제완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조언옥에게 걷어차인 청년은 끝내 나머지 사내들의 손에 들려 그곳을 떠났고, 성문은 빠르게 통행이 재개되었다.
제완은 한 번 더 조언옥을 보고 싶었지만, 그새 어디로 갔는지 인파 속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길이 뚫렸으니, 다시 출발하도록 하거라.”
제완이 분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