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수업 참석
“누가 감히 노야를 불쾌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 재미없는 자들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제정광은 머릿속에서 그 사람들을 털어내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요 며칠간 내 여남후와 만났었소. 상대가 우리 제가와 결친하고자 하는 뜻을 비쳐왔는데,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여남후의 세자도 한 번 만나보았는데, 아주 훌륭한 인물 같더군. 우리 딸아이에게 매우 어울릴 듯했소.”
그의 말에 육 씨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으로 아주 크게 분개했다.
‘이 남자가 진짜로 우리 완이를 희생시키려고!’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녀는 시종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여남후가 공훈이 두터운 일류 세도가는 아니나, 어떻게 맞춰보면 우리 제가와 어울릴 법도 하네요.”
“부인이 반대하지 않으면 되었소. 이제 그쪽과도 확정을 지을 수 있겠군.”
제정광은 육 씨의 동의가 만족스러운 듯했다.
“딸아이에게 좋은 혼처가 있는데 어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요전에 입궁했었을 때, 현비(*賢妃: 옛 중국 비빈의 호칭 중 하나로, 정2품에 속함) 마마께서도 제게 물으셨었습니다. 저희 집안에 완이 외에도 이미 혼기가 찬 두 고낭이 더 있지 않냐 하시면서요.
완이의 혼사야 현비 마마께서 대신 주관해주신다고 하셨으니 제가 크게 걱정할 것은 없지요. 하지만 우리 여(茹)나 문(雯)이는 비록 제가 배 아파 낳은 아이들은 아니어도 제 딸들이니,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육 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제정광은 일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뭐라 하셨소? 현비 마마께서 완이의 혼처를 알아봐 주시겠다 하셨소?”
“그렇다니까요. 이 일은 제가 이미 노야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육 씨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정광을 바라봤다.
경도에서 육 씨가 입궁했을 때, 현비는 제완의 혼사에 대해 언급했으나 제완이 어리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며 넘겼었다. 이제 그 일을 아주 적합한 구실로써 꺼내 놓을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육(陸) 현비는 육 씨와 사촌 자매 사이로,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두텁게 얻고 있었다. 또 슬하에 7세 된 어린 아들 하나만을 두고 있어 태자의 위협이 되기에는 부족한 상대였다. 심지어 제정광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는 진작부터 육 씨를 이용해 육 현비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어쩌면 좋소? 내 여남후에게 제가의 적녀를 오 세자에게 주겠다고 벌써 얘기해놓았소. 그렇게 되면 신의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제정광은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초조한 듯 방안을 왔다 갔다 걸어 다니기 시작했고, 육 씨 역시도 짐짓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이…… 이를 어찌한답니까? 아니면 제가 육 현비께 잘 말씀드릴까요?”
“그건 안 될 말이오!”
제정광은 대번에 불가하다 선언했다. 육 현비와 여남후를 비교했을 때 누가 더 중요한지는, 제정광도 일머리가 있다면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
“육 현비께서 완이를 아껴주시는 것은 완이에게 큰 복이지 않소. 만약 우리가 육 현비의 호의를 거절하면 도리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오.”
육 씨는 제정광을 바라보며 속으로 홀로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겉으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입을 떼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방도를 생각해내야만 해!”
제정광은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는 양쪽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노야, 노야께는 다른 여식들도 있지 않으십니까?”
제정광이 그저 초조히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중점이 무엇인지를 영 잡아내지 못하자, 결국 육 씨가 먼저 운을 떼었다.
“그렇지만 내 여남후에게 적출의 여식을 세자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소…….”
제정광은 영 심사가 불편한 듯한 목소리였다.
“여를 제 이름 밑으로 넣는다면, 그 아이 역시도 적출의 이고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제정광은 돌연 굳은 표정으로 깊은 사색에 빠졌다.
* * *
제여를 육 씨의 호적 아래로 넣어 적녀로 만드는 건 그야말로 명분이 서는 일임이 분명했다. 이는 그에게도, 또 제가 전체를 보아서도 엄청난 이득인 일이었다.
그가 비록 집안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육 씨와 연설심의 사이가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화목한 사이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육 씨가 워낙 도량이 넓고, 온화하며 현숙한 부인이라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배포 좋게 너그러이 연설심의 여식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었다.
“여를 부인의 이름 아래에 넣는다는 말이오?”
그는 재차 그녀의 말을 확인하듯 물었다.
육 씨는 제정광의 손을 끌어 다시금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노야, 사실 이는 그저 저 혼자 생각해 본 일이었습니다. 여는 아주 영리한 아이가 아닙니까? 노야께서 그런 그 아이를 아끼신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지요. 그 아이는 노야의 여식이니, 제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저 역시 그 아이가 좋은 배필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고요. 다만……, 연 이낭이 이를 원할지 어떨지를 모르겠네요.”
제정광은 이미 그녀의 말에 홀딱 넘어간 상태였다. 육 씨가 그를 위해 사려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는 와중에, 어찌 그녀에게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는지를 의심할 겨를이 있겠는가?
“이 일은 연 이낭이 원하고 말고의 문제를 뛰어넘은 것이오. 완이의 혼사는 현비 마마께서 주관해주실 것이고, 그러면서도 나는 여남후의 신의를 잃지 않게 되는 일이 아니오. 그럼 이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겠군.”
“노야께서 허락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서신을 써, 연 이낭에게 얘기를 해 놓겠습니다. 그런 뒤, 아버님께 대신 이를 주관해주시기를 청하면 될 듯하군요. 이렇게 하면, 노야께서도 여남후에게 이번 혼사에 대한 확답을 주실 수 있겠지요?”
육 씨는 나긋한 목소리로 제정광에게 묻는 한편,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나 연설심이 노야께 이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군. 내가 먼저 그 얘기를 직접 꺼내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
“알겠소. 부인께서 친히 안배를 좀 해주시오. 내가 아버님께 서신을 드려 조금 더 명확한 세부 부분들을 부탁드리겠소.”
웃으며 이에 화답한 육 씨는 직접 제정광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기분이 크게 좋아진 제정광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당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는 대신 안채에 남아 육 씨와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자연히 밤에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고요한 밤이 지나갔다.
* * *
이튿날, 제완은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기상해 단장을 마쳤고, 은행도 일찌감치 아침상을 내왔다.
오늘은 바로 여인 학당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제완은 여인 학당에 대해 그저 풍문으로만 들어봤을 뿐, 한 번도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명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과 더불어 2, 3년만 더 지나면 주 왕조의 가장 명망 높은 여인 학당이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금주(锦州)의 여인 학당을 나온 고낭이라 하면, 거의 대다수 세도가에게 더 묻고 따질 것 없는 일 순위 며느릿감으로 점찍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제완은 여전히 수업 참석에 크게 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안채로 가 육 씨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채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채 대문 밖에서 제정광이 어젯밤 이곳에 머물렀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제완은 그저 침향을 데리고 곧장 학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 *
제가의 별장은 성의 서쪽 영안가(榮安街)에 있었는데, 거리의 좌우 양쪽 거주자 중 고관이나 귀인이 아닌 자가 없는 그런 동네였다.
하지만 여인 학당은 성의 남쪽인 도화산(桃花山) 자락에 있었고, 영안가에서 도화산까지는 반 시진(*1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이 걸렸다.
빈 시간을 이용해 제완은 또다시 침구에 관한 책들을 꺼내 들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모든 내용이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각인된 듯 남아있었지만, 그녀는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영 아쉬웠다.
마차가 덜커덕덜커덕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침향은 문득 고개를 돌려 제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침향의 눈가는 어쩐지 약간 촉촉해져 있었다.
책에 푹 빠져 있던 제완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침향이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고낭, 학당에 도착했습니다.”
제완은 들고 있던 책을 마차 안에 있는 작은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양 갈래로 정갈히 땋아 올린 머리와 의복을 단정히 정리한 뒤 입구에 드리운 천을 걷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이내 장엄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서원의 대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문 위에 있는 편액에는 커다랗고도 힘이 넘치는 금색의 필체로 ‘운록 서원’이라 적혀 있었다.
여인 학당은 바로 운록 서원의 한 모퉁이에 있었다.
침향은 이전에 사숙정을 따라 학당을 온 적이 있어 이미 길을 알고 있던 터라 제완이 그녀를 여인 학당에 가는 길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학당까지는 꽤 커다란 화원 하나를 지나가야 했는데, 화원에는 물이 아주 맑고도 투명한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호숫가에는 버드나무들이 한 줄로 쭉 드리워져 있었다. 다른 한쪽에 있는 자그마한 수풀 속에는 서원의 학생들이 쓰도록 배치해 놓은 돌로 된 의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서원 뒷산에 자리 잡은 여인 학당은 도화산의 도화 숲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머, 완 낭자! 완 낭자께서도 이제 학당에서 수업 들으세요?”
막 학당의 대문을 들어섰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전방의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제완은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고, 그곳에는 낯이 익은 얼굴들 몇 명이 있었다.
사숙정은 여인 학당에서 제완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순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기쁜 얼굴로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진작 이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사숙정과 오영이 여인 학당에 수업을 들으러 오지 않을 리는 만무한 일이 아니던가. 제완은 머리가 다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째 이후의 날들이 영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제 낭자, 어제 한 부인께 얘기 들었습니다. 오늘 낭자께서도 학당에 오실 것이라고요. 그래서 이곳 학당을 소개해 주라 저에게 당부하셨어요.”
오영은 바로 옆에 있는 사숙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완에게 곧장 다가와 아래턱을 치켜들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이에 제완은 덤덤히 웃어 보였다.
“그럼 오 낭자께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사숙정은 오영을 한차례 흘겨보고는 웃으며 제완에게 말했다.
“완 낭자, 그럼 이따 함께 수업 들을 때 뵙겠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과목은 제 낭자께서 좋아하지 않을 거니까, 괜한 착각 마.”
오영은 경멸하는 눈으로 사숙정을 쳐다봤다. 제완에게 제 발로 다가와 친절한 척하는 그녀가 영 마뜩잖은 눈치였다.
“완 낭자께서 좋아할지 아닌지 어찌 압니까?”
사숙정이 퍽 언짢은 어투로 말하자, 오영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너랑은 말을 섞는 것 자체가 백해무익한 일이지. 제 낭자, 제가 학당의 곳곳을 모시고 다니며 소개해 드리죠!”
제완은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오영과 사숙정은 정말이지 만날 때마다 저렇게 입씨름을 해대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독차지하는데, 제완은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