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조 부인
예상치 못했던 작은 소란 탓에 그들이 평안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어린 중이 참배를 마친 그들에게 다가와서는 재당(*齋堂: 절 내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가라 청했다.
“오늘은 참배객들이 적지 않은 듯하네요.”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제완은 마차를 세워 두는 공터가 지난번보다 더 빼곡한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이에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어린 중이 겸손히 답했다.
“며칠 뒤가 일 년에 한 번뿐인 행선일(行善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성안의 부인들께서 주지 스님과 올 한 해 동안의 활동을 어떻게 안배할지 상의하시고자 찾아오셨습니다.”
“행선일이요?”
제완은 처음 듣는 얘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그녀에게 침향이 설명하며 말했다.
“조 태수께서 금주성에 오신 뒤에 조 부인과 다른 부인들께서 함께 만드신 날입니다. 매년 하루를 정해서 성안과 주변 마을에 있는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자선금을 모으시지요. 올해로 벌써 5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건너뛰신 적이 없었습니다.”
제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 부인은 정말로 선한 마음을 지니신 분이구나.”
“또 조 부인께서 올해는 곡식을 선물하는 대신, 은자를 모아서, 곧장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눠주자 제안하셨습니다.”
어린 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품이 아닌 은자를 나눠준다는 말씀입니까?”
지금까지는 항상 의복이나 곡식들만 배분했기에 은자를 직접 주는 일은 매우 보기 드물었다.
“예, 맞습니다. 조 부인께서 항상 가장 많은 의견을 내주시지요.”
어린 중은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돌연 제완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어린 중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니까, 스님의 말씀은, 조 부인도 오늘 이곳에 계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재당에 계십니다.”
어린 중은 제완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슬쩍 쳐다봤다.
“고낭, 정말 잘됐네요.”
침향이 기쁜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제완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완은 하마터면 앞뒤 안 재고 당장 조 부인에게 달려가, 육 씨를 구해 달라 간청할 뻔했지만, 얼른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조 부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난데없이 도움을 청한다면 승낙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우선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본 이후에 도와 달라는 말을 꺼내야 했다.
제완은 웃으며 어린 중에게 말했다.
“얼른 재당으로 가시지요. 이렇듯 좋은 일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저희도 놓칠 수 없지요.”
* * *
어린 중은 제완 일행을 재당으로 안내했다.
육 씨와 함께 정자에서 만났던 부인들 몇 명 외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얼굴들이었다.
제완이 나타난 순간,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대청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제완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 어린 낭자가 입은 옷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옷감은 최상급이었다. 또 차분한 분위기에 생김새도 비교적 어여쁜 것이 수준 낮은 보통 가문의 여식은 아닌 듯해 모두 이 낭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제 낭자.”
그때, 제완과 만난 적 있던 유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누가 조 부인인지 아직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유 부인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본 제완은 미소 지으며 상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유 부인.”
“어찌 어머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낭자 혼자 온 것이에요?”
유 부인은 제완의 손을 끌어 자신의 곁에 앉게 했고, 눈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한차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제완을 소개했다.
“이 낭자는 경도 제가의 낭자입니다. 금주(锦州)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분들께서는 아직 낯이 익지 않으시겠지요.”
“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그 세도 가문, 제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곁눈질로 흘끗 제완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감히 경도의 제가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유 부인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제완을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 전과 달라졌다.
경도의 제가는 주(周) 왕조의 사대(四大) 세가 중 한 집안으로, 공훈을 세운 일류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게다가 유 부인이 이렇게 환심을 사고자 한다는 건, 틀림없이 적녀라는 뜻이었다. 이는 눈앞에 있는 제 고낭의 신분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완은 다른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차분히 웃으며 유 부인에게 말했다.
“오늘은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참배하러 온 것인데, 우연히 부인들께서 지금 선행일에 관한 상의를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금주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이러한 선행이 제 마음을 크게 움직였지요. 혹 여러분들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소녀 역시도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돕고 싶습니다.”
그녀의 말은 매우 간곡하고도 예의가 발랐다. 아첨을 떨지도 않았고, 오만한 기색도 없이, 진심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그러니 재당에 있는 이들 중, 제완의 숨겨진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오로지 제완 자신 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이 더 잘 흘러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유 부인이 아주 시원스레 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꽃 자수가 가득 놓인 옷을 입은 부인에게 말했다.
“조 부인, 어찌 생각하십니까?”
유 부인이 입을 떼는 순간 제완의 시선도 동시에 돌아갔다.
그녀는 30대 초반 정도 되는 부인이었는데, 백옥같이 하얗고도 매끄러운 피부와 단정히 빗은 귀밑머리를 하고, 훌륭한 기개가 서린 눈매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제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매우 다정했고,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려는 느낌이 전혀 없어서,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역시도 환영해 마지않지요. 제 낭자가 이렇듯 도움의 손길을 내어 주고자 하니 매우 기쁘군요.”
조 부인은 이견이 없는 듯, 살며시 웃는 눈으로 제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완은 어쩐지 조 부인이 낯설지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어디서 만났었지?’
제완은 속으로 자문자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는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조 부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 지난번 평안사에 왔을 때, 어머니와 정자를 내려오다가 이 부인과 한차례 마주친 적이 있어.’
행선일 준비를 하면서 부인들은 지금껏 수장을 따로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 암묵적으로 조 부인을 우두머리로 여겼고, 수완이 있는 유 부인이 각종 대외적인 준비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분은 태수 부인이십니다. 제 낭자, 낭자의 도움에, 우리 기분이 다 좋아지는군요.”
유 부인이 웃으며 말했고, 제완은 몸을 틀어 조 부인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조 부인.”
그러자 조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제 낭자, 그리 예를 차릴 필요 없습니다. 나는 꾸밈이 없어, 번다하고 불필요한 예절은 딱 질색인 사람이에요. 이왕 모두 함께 일을 도모하게 됐으니, 예의에 얽매이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곧장 말해주세요.”
‘정말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분이시네.’
제완은 이 사람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조 부인께서는 참으로 소탈하신 분이신 듯합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일이 있다면, 부인께선 언제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조 부인을 바라보는 제완의 눈동자는 신실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교제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눈빛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최대한 진실한 사람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조 부인이 매우 다정하고 따뜻한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긴 하나, 타인에 대해 미세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제완은 그녀가 깊이 사귀기엔 어려운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염려 놓으세요. 나 역시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조 부인은 아주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모두 식사하시지요. 오늘 이 식사는 주지 스님께서 모두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절에서 차린 이 식사를 통해 여러분들의 평안을 기원하고자 하니, 모두 사양 마시고 드시기 바랍니다.”
재당 내에는 옆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을 제외하고 십여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중 적지 않은 부인들이 제완과 친분을 쌓고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조 부인의 이 한마디가 떨어지자 모두 겸연쩍은 듯 제자리로 돌아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뒤, 제완은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화젯거리를 찾아 조 부인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꽤나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했고, 심지어는 제완에게 혼처가 정해졌는지를 묻기도 했다. 제완은 아주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했지만, 뚜렷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 탓에 다른 화제를 찾지 못한 부인들은 멋쩍어하며 자리를 떠났다.
조 부인은 그런 제완을 슬쩍 뜯어보다가, 이내 곁채에서 들었던 제완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 어리디어린 고낭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이 시대에 그러한 안목과 견해를 지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제완의 행동거지는 대범하고도 격식을 갖추고 있었으니, 가정 교육도 제대로 받은 듯했다. 적지 않은 세가의 여식들을 만나보았던 그녀지만, 제완처럼 차분하고 진중한 기개를 지닌 이는 참으로 보기 드물었다.
한창 대화 중이던 유 부인은 본래 계속해서 제완, 그리고 다른 부인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자 했지만, 어느샌가 시녀가 그녀에게 와서는 무어라 귓속말을 전했다. 그래서 조 부인과 제완에게 일이 생겨 집에 먼저 돌아가야겠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뒤이어 조 부인이 제완에게 말했다.
“모두 각자 바쁜 일이 있으신 듯하군요. 우리 두 사람이 가장 한가로운 것 같은데, 밖에 나가 잠시 걸을까요?”
이것은 바로 제완이 간절히 원하던 기회였기에, 그녀는 당장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습니다. 아직 평안산의 풍경을 자세히 보지 못했거든요.”
“그럼 가도록 하죠.”
조 부인이 제완을 쳐다보고는 그녀의 손목을 끌고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