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자해공갈

14화. 자해공갈

담장 너머 정원 한쪽에서 책을 보던 소년은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는 담장 쪽을 바라봤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세자, 오후가 되어 햇빛이 강하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죠.”

시동 장순이 말했다.

“봄빛이라 따뜻하고 좋기만 한데 뭘 그러느냐? 게다가 나무 그늘이 있지 않으냐?”

소년은 꼼짝도 하지 않고 등나무 줄기로 짠 의자에 앉아 계속 책을 읽었다.

장순은 세자의 취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넓은 왕부에 경치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세자께선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책을 읽으시는 거지?

“세자, 이런 데 있다가 또 온가 둘째 아가씨께서 담장을 넘어오다가 세자의 머리 위로 떨어질까 걱정입니다.”

장순은 그날 일로 세자의 병이 재발했다고 여겨 온유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바로 그 온가의 둘째 아가씨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소년은 시동을 슬쩍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함부로 나불대지 마라. 그날은 우연히 그런 거니까.”

“소인이 보니까 담장을 한두 번 넘어 본 솜씨가 아니던데요…….”

담장에 바짝 붙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온유는 민망하고 난처했다.

세자의 시동 말이 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정왕세자는 그래도…… 성품이 너그럽구나.

어느 순간부터 담장 너머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더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온유는 살금살금 가까운 나무로 다가가 재빠르게 기어올랐다.

무성한 잎과 가지 덕에 그녀는 안심하고 담장 너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담장 건너편에는 월계수가 한 그루 있었는데, 정왕세자는 그 나무 아래의 흔들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펼쳐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봄바람이 스쳐 소년의 옷자락이 흔들렸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온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 보니 담장 너머 저곳이 정왕세자가 쉬러 오는 곳 같았다.

정왕세자의 취향은 그녀가 지금껏 본 명문가 공자들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정왕세자가 젊은 나이에 가슴에 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온유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그녀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왕세자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진 않았다.

정왕세자가 명의를 따로 청해야 할 정도로 아프다면 전생에는 어떻게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었지?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서 그녀는 잠든 소년을 내려다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득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았다.

온유는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들켰어!

그녀는 어떻게든 상황을 만회하려고 나무줄기를 잡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곁눈질로 소년을 슬쩍 봤는데…… 소년은 여전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유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담장 너머 기삭은 온유가 갑자기 나무 아래로 뛰어내리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장순은 세자가 갑자기 일어나자 덩달아 깜짝 놀랐다.

“세자, 무슨 일이십니까?”

기삭은 한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지난번에 담장에서 뛰어내렸을 때는 발목을 접질렸는데 이번에는 더 높은 나무에서 뛰어내렸으니…….

“어디 불편하신 것 아닙니까?”

기삭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본 장순은 걱정이 앞섰다.

“그만 좀 떠들거라.”

기삭은 한마디 쏘아붙인 다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평소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장순아.”

“예, 말씀하십시오.”

“목이 마르는구나. 가서 내가 즐겨 쓰는 다기들을 가져오너라.”

장순은 대답 한 마디를 남기고 부랴부랴 세자의 처소로 향했다.

담장 너머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어 살피던 온유는 기삭이 혼자인 걸 확인하고 깔끔한 동작으로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년을 보며 그녀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왕세자가 나를 미친 여자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어차피 들킨 마당인지라 반쯤 자포자기한 마음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소년이 자신의 앞에 서자, 온유는 겉으로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세자.”

기삭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온 이소저,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쪽으로 갈까요?”

온유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봤다. 정원 한쪽 야트막한 담 근처에 가득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정왕세자가 너무 침착한 게 이상했다. 대갓집 규수가 또 월담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나?

그녀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담장 밑에 서자 기삭이 웃으며 물었다.

“온 이소저는 오늘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방문이라…….

온유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상대방의 난처한 상황을 이렇게 수습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

온유는 잠시 입을 오므렸다가 눈을 질끈 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자께서는 언제부터 심장에 병이 있으셨던 거죠?”

질문이 너무 뜻밖이라 기삭은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오늘 왕부에서 명의를 청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조금 궁금해서요.”

일단 말문을 튼 다음에는 망설일 것 없었다.

기삭이 빙그레 웃었다.

“저도 궁금하긴 하군요.”

“세자께선 뭐가 궁금하신데요?”

“이소저께서 그걸 왜 궁금해하시는지가 궁금하네요.”

“세자와는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덕분에 제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가슴 통증을 느낀다고 하니…… 마음이 쓰이는 거죠.”

온유는 구차한 이유를 늘어놨다.

“이제 보니 이소저께선 저를 동정하시는 거로군요.”

기삭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온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답했다.

“세자께선 한창때이신데 가슴에 병이 있다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온 이소저는 정말 궁금하신 겁니까?”

기삭이 웃었다.

온유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원래 딱히 병이랄 건 없었는데, 그날 온 이소저가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심장에 병이 난 것 같습니다.”

온유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 때문에 병이 났다고?

이거 완전 자해공갈 아냐!

온유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기삭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온유는 진지한 표정의 소년을 의아한 듯 바라봤다.

정왕세자의 표정은 농담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차분했다. 둘이 농담을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설마 진짜로 나 때문에 병이 났다는 거야?

그래서 정왕부가 명의를 수소문해 불렀다면? 그리고 전생과 달리 정왕세자는 먼 길을 떠나지 않게 된 것이다.

놀라는 바람에 가슴에 병이 생기는 일이 흔치는 않지만, 정왕세자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았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온유는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담장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어쨌든 별일 없는데 담장 밑에 서 있던 사람은 놀라서 심장에 병이 났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녀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온유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땐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요. 제가 대신 아플 수는 없으니 사과의 뜻으로 돌아가서 약재라도 보내겠습니다.”

기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온 이소저,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약재 같은 건 부족하지도 않고요.”

온유는 고집을 부렸다.

“세자께선 친왕의 아드님이시니 당연히 약재가 부족하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어쨌든 저 때문에 병이 나셨으니 저로서는 모른 척할 순 없습니다.”

“얼마 전 왕부에서 귀댁에 혼담을 넣은 건 온 이소저도 아시겠죠?”

소년의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이 소녀의 얼굴에 드리웠다.

온유는 순간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이 남자 왜 이렇게 직설적이야!

그녀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그녀 때문에 심장에 병이 생겼으니 평생 책임지라는 건가?

방금 세자가 분명히 말했다. 약재 같은 건 부족하지도 않다고.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었나요? 어머니가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어요.”

온유는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어머니가 아닌 그녀가 거절한 걸 정왕세자가 알기라도 한다면 이제 와 궁금하다고 또 담장을 넘은 그녀가 너무 후안무치해 보이지 않겠는가?

소년은 살짝 웃으며 오히려 그녀를 두둔했다.

“온 이소저는 모르고 있었군요.”

“그런데 그 일을 왜 꺼내신 거죠?”

온유는 바짝 긴장했지만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제 병이 일어난 연유를 모르십니다. 그런데 이소저가 약재를 보낸다면 괜한 오해만 사게 될 겁니다.”

“괜한 오해라고요?”

기삭이 가볍게 웃었다.

“온 이소저가 후회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는 말이죠.”

온유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 부는 바람인지 꽃향기가 배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소년의 목소리가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그러니 이소저는 약재를 보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병이 이소저 때문에 생겼다고 해도 원망하지는 않아요.”

온유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멀리서 시동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 어디 계십니까?”

“아직 궁금한 게 남으셨습니까?”

기삭은 큰 소리로 시동에게 기다리라고 하더니 온유에게 물었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없습니다…….”

온유는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여기 잠시 계시다가 돌아가십시오. 배웅은 하지 못하겠군요.”

기삭은 온유를 보며 웃음을 짓더니 돌아서 장미 담장 뒤로 걸어 나갔다.

시동 장순이 마주 오며 말했다.

“세자, 어디 가셨던 겁니까?”

“기다리는 게 지루해서 한 바퀴 돌고 왔다.”

장순은 옷소매로 의자를 쓱 닦더니 말했다.

“앉으십시오. 차를 올리겠습니다.”

“됐다. 한 바퀴 돌았더니 좀 덥구나. 일단 방에 돌아가지.”

장순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년은 휘적휘적 앞장을 섰고, 장순은 다기를 챙겨서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떠난 정왕부 정원 한구석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온유는 장미 덩굴이 아름답게 휘감긴 야트막한 담장 뒤에서 멀어지는 세자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능숙한 솜씨로 담장을 넘어 장군부로 돌아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녀는 문득 담장 이쪽 장군부 정원에도 월계수 나무가 있는 걸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야트막한 담장이 있었고 그 옆에는 백목련이 활짝 피어 있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람은 달랐지만 봄 풍경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정왕세자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 의원이 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왕세자의 심장에 큰 문제가 없는 것에 비해 장군부 노부인의 심장병은 잘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기에, 주 의원은 낮에는 장군부에 머물기로 했다.

둘째 아가씨가 뵙기를 청한다고 하자, 주 의원은 의아한 와중에도 밖으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신의께서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가씨께서 노부에게 말입니까?”

아직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녀를 보며 주 의원은 더욱 의아해했다.

“정왕세자 말입니다…….”

온유가 입을 열자마자 주 의원은 바짝 긴장했다.

주 의원 입장으로서는 정왕세자 이야기만 나와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